신의손

(발레리 사리체프에서 넘어옴)

1486eb70305dbe02961ed6b4e83e6b68.png
선수 시절 ???
파일:/image/082/2012/02/25/20120224000178 0 5 20120225100905.jpg

부산 아이파크 골키퍼 코치
신의손 (申宜孫 / Shin Eui-Son) [1]
생년월일1960년 1월 12일
국적대한민국[2]
출생소련 타지크 SSR 두샨베[3]
신체 조건192cm, 87kg
포지션골키퍼
소속 클럽SKA-파미르 두샨베어스(1978~1981)
PFC CSKA 모스크바(1981)
FC 토르페도 모스크바 (1982~1991)
일화 천마/천안 일화 천마 (1992~1998)
안양 LG 치타스/FC 서울 (2000~2004)
국가대표 경력1987~1997, 15경기
타지키스탄 국가대표
지도자 커리어안양 LG 치타스 GK코치 (1999)
FC 서울 코치 (2005)
경남 FC GK코치 (2005~2007)
대교 캥거루스 수석코치 겸 GK코치 (2008~2011)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U-20/U-23 GK코치 (2009~2010)
부산 아이파크 GK코치 (2012~ )
1992 K리그 베스트 일레븐
FW
박창현
FW
임근재
MF
신홍기
MF
김현석
MF
신태용
MF
박태하
MF
신동철
DF
홍명보
DF
이종화
DF
박정배
GK
사리체프
1993 K리그 베스트 일레븐
FW
차상해
FW
윤상철
MF
김판근
MF
신태용
MF
김동해
MF
이상윤
MF
김봉길
DF
최영일
DF
이종화
DF
유동관
GK
사리체프
1994 K리그 베스트 일레븐
FW
윤상철
FW
라데
FW
김경래
MF
신태용
MF
고정운
MF
황보관
DF
안익수
DF
유상철
DF
홍명보
DF
허기태
GK
사리체프
1995 K리그 베스트 일레븐
FW
황선홍
FW
노상래
MF
신태용
MF
고정운
MF
김현석
MF
김판근
MF
아미르
DF
최영일
DF
홍명보
DF
허기태
GK
사리체프
2000 K리그 베스트 일레븐
FW
최용수
FW
김도훈
MF
안드레
MF
신태용
MF
전경준
MF
데니스
DF
강철
DF
이임생
DF
김현수
DF
마시엘
GK
신의손
2001 K리그 베스트 일레븐
FW
우성용
FW
산드로
MF
신태용
MF
서정원
MF
송종국
MF
남기일
DF
우르모브
DF
김현수
DF
김용희
DF
이영표
GK
신의손
K리그 30주년 레전드 베스트 XI
FW
황선홍
FW
최순호
MF
김주성
MF
신태용
MF
유상철
MF
서정원
DF
최강희
DF
김태영
DF
홍명보
DF
박경훈
GK
신의손

1 소개

Hands of God 거기다 직업까지 골키퍼이다.

발레리 콘스탄티노비치 사리체프(Валерий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Сарычев)는 대한민국 K리그에서 활약했던 타지키스탄 출신[4]의 前 축구 선수(포지션은 골키퍼)이다.

1960년 1월 12일생. 지금은 한국에 귀화하여 신의손(申宜孫)으로 개명했다. 별명으로 '神의손'이라고 불리던 걸 아예 그쪽으로 (한자는 바꿔서) 개명한 것. 구리 신(申)씨의 시조다.[5].

1992년부터 2016년 현재 24년간 대한민국 생활을 하고 있으나 한국어는 여전히 서툰 편이다. 여러 인터뷰 영상을 보더라도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서 쓰거나 아예 영어로만 인터뷰하는 경우가 더 많이 보인다.

2 선수 시절

명실상부한 K리그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이자 성남 일화 천마의 레전드. 뛰어난 골키퍼 한 명이 얼마나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는지 알려준 산 증인이다.

성남 일화 천마의 레전드 골키퍼 신의손은 성남의 창단 이래 K리그 최강의 골키퍼 본좌라인을 지속적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만든 첫번째 인물이다. 신의손의 전설적인 활약으로 인해 성남 일화 천마는 K리그 3년 연속 우승을 제패하는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그의 전설적인 활약으로 일화 시절부터 현재까지 성남 FC는 다른 구단들과 비교를 해도 절대로 꿇리지 않는 골키퍼 계보를 이어갈 수 있었다. 2016년 현재 성남 FC의 골키퍼 계보는 신의손 - 김해운(권찬수)[6] - 김용대 - 정성룡(전상욱) - 박준혁 - 김동준으로 이어지고 있다.

선수 데뷔는 SKA-파미르 두샨베에서 했지만 소련에서 주로 활약했던 팀은 FC 토르페도 모스크바 시절이며 161게임 출장에 153실점을 기록했다. 10년의 커리어 통산으로 1게임 1실점 이하를 기록한 것. 토르페도 모스크바는 지금은 비록 2부 리그지만 사리체프가 뛰던 1981-1991년 구 소련 시절에는 1부 리그의 탄탄한 중위권 팀으로 주로 3위에서 6위를 기록한 팀이었다.(또한 소련 시절 5번째로 많은 우승을 한 팀이기도 하다.) 1986년과 1991년에는 소련 최우수 골키퍼상을 받는 등 한 마디로 당대 소련 축구 리그의 최고 골키퍼였던 것.

소련의 해체로 대한민국과 연을 맺게 되면서 일화 천마에 입단하게 된다. 1992년 천안 일화에서 뛸 당시부터 경기당 실점율이 소수점 이하라는 괴물같은 성적(그러니까 골을 먹은 게 한 경기당 한 골도 안 됐다는 이야기다.)을 내면서 전년도 리그 최다 실점 팀이, 골키퍼가 바뀌더니 리그 최소 실점 팀으로 변모되었다. 이 때 뒷날 그의 이름이 되는 신의 손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전대미문의 K리그 3년 연속 우승 신화는 덤이다.

사리체프에 이어 부천 유공에서 영입한 샤샤(알렉세이 폿시발로프, Александр Подшивалов) 또한 무지막지한 실력을 보이면서 프로축구의 모든 팀들이 외국인 골키퍼를 영입하는 붐이 일었다. 결국 대한민국 축구 팀들이 토종 골키퍼들을 외면하면서 그의 등장이 1998년 이후 K리그에서는 외국인 골키퍼를 불허[7]하는 규정을 만들었을 정도.(이 때 김병지가 군계일학의 실력을 보인다.) 때문에 본의 아니게 선수 생활을 접어야 했지만, 2000년에 귀화 자격을 갖춰서 귀화 시험을 통과, 이름을 자신의 별명인 신의손으로 짓고[8] 구리 신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후 안양 LG로 복귀했는데 언론에서 대서특필할 정도로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동계훈련에는 10일밖에 참가하지 못했지만, 여전히 녹슬지 않은 실력을 과시하면서 안양 LG에 우승을 안겨 주고 2005년 5월에 정식으로 은퇴했다.

1992년부터 1998년까지 뛴 일화 시절에는 157경기에 출장하여 179실점을 기록했고, 2000년부터 2004년까지 뛴 안양 LG 시절에는 95경기 출장 99실점을 기록했다. 현재까지도 K리그에서 이 기록에 비견될 선수는 오직 김병지뿐이다.

3 지도자 시절

이후 여자축구 고양 대교의 코치를 지내다가 홍명보의 스카웃으로 대한민국 U-20 청소년 국가대표팀의 골키퍼 코치를 거쳐서 2012년 런던 올림픽 국가대표 골키퍼 코치를 맡았다. 동시에 2011년부터 올림픽 국가대표팀 주전 골키퍼인 이범영이 소속된 부산 아이파크의 골키퍼 코치를 맡고 있다. AFC U-19 챔피언십 우승의 주역 중 하나인 이창근 또한 신의손 코치의 가르침을 받았다.

4 골키퍼의 중요성을 알리다

무엇보다도 골키퍼를 천대하던 대한민국 축구계에서 골키퍼의 중요성을 일깨운 장본인이다. 신의손 이전까지는 대한민국 축구계에서 골키퍼는 그야말로 학원 축구에서 필드 플레이어에서 밀려난 키 큰 선수들이 대충 보는 포지션이었고, 골키퍼 전담 코치 따위는 사치였다.

하지만 (구)소련에서 정규 골키퍼 코치에게 배워 온 신의손이 무지막지한 선방을 선보이면서 일화 팀을 리그 우승으로 이끌자, 1994년에 일어난 대한민국 골키퍼의 양대 비극 중 하나인 미국 월드컵 독일최인영의 실수[9],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의 주전 골키퍼 차상광의 알까기[10]가 맞물려서 골키퍼의 중요성과 체계적인 양성이 대한민국 축구의 과제로 떠올랐다. 게다가 신의손 등장 이후 너도나도 다른 팀에서도 외국인 골키퍼를 영입하니까 연맹에서 외국인 골키퍼의 영입 금지까지 만들 정도니.... 이 때부터 최소한 프로 팀들은 전담 골키퍼 코치를 두기 시작했고 학원 팀에도 필드 플레이어와는 전혀 다른 골키퍼 양성이 과제로 주어졌다.

툭히 월드컵 독일전 때문에 최인영에 대한 실망감이 극에 달했을 때는 "한국인 골키퍼로는 희망이 없으니 발레리 사리체프를 귀화시켜서 대표팀에 발탁하자"는 여론도 있었다. 이후 김병지이운재가 뛰어난 기량을 보여주면서 그런 이야기는 쑥 들어갔지만, 대표팀과는 관계없더라도 결과적으로 귀화를 하기는 한 셈이다.

5 기타

  • 여담으로 '야신 클럽'의 멤버라고 알려져 있는데 일단 야신 클럽이라는 호칭 자체는 비공식이기 때문에 선수 커리어에 중요하진 않으나, 가입 요건으로는 소련러시아 국적으로 러시아 리그, 컵대회, 유럽컵 대항전, 국가대표 4개 항목에서 100경기 이상의 클린시트를 기록해야 인정해 준다. 신의손의 경우는 아예 국가대표 경기가 소련 붕괴 후 1997년 타지키스탄에서 1경기 나온게 전부[11]라서 야신 클럽의 대상자가 아니다.
  • 참고로 발레리 사리체프로는 1981~1991년까지 소비에트 슈프림 리그(Soviet Supreme League - 지금의 러시아 프리미어 리그의 전신)[12]에서 도합 165경기를 뛰었다.
  1. 본명은 발레리 콘스탄치노비치 사리체프(러시아어: Валерий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Сарычев, 로마자: Valeriy Konstatinovich Sarychev)이다.
  2. 2000년에 귀화
  3. 현재 타지키스탄
  4. 당시 그의 출신지인 두샨베는 소련 소속이었으나 독립 국가 연합 결성 이후 타지키스탄 령이 됐다.
  5. 그러나 본인만 귀화하고 가족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리 신씨는 1대로 끝나게 생겼다.
  6. 2016년 현재, 성남 FC 골키퍼 코치.
  7. 단, 필드 플레이어가 경기 중에 골키퍼의 퇴장, 부상 등으로 포지션을 대신 맡아야 하는 경우에는 허용된다. 사실상 영입 금지.
  8. '사리첩', '구체포' 등 생소한 한자어도 후보에 올랐었다.
  9. 결국 후반전에 이운재로 교체된다.
  10. 이 때문에 대한민국 아시안게임 대표팀은 우즈베키스탄과 맞붙은 4강전에서 0:1로 패해 3,4위전으로 밀리고 만다. 그리고 쿠웨이트에게 패해 4위에 그쳤다. 그것도 그 알까기가 우즈베키스탄의 유일한 슈팅. 오죽하면 구글 검색어에도 '차상광 알까기'가 거의 20년이 가까이 된 지난 지금도 있으며, 최인영은 한때 국대 No.1 골리라 이름이라도 남았지 차상광은 존재 자체가 부정당한 수준의 흑역사 취급이다.그래봤자 조병득을 대신해 멕시코 월드컵에 나섰던 고 오연교만큼 심할까? 그리고 우즈베키스탄중국을 결승전에서 만나 꺾고 축구 금메달을 차지했다. 여담으로 당시 우즈베키스탄 국가대표팀에서 뛴 선수이자 간판 선수였던 미르잘랄 카시모프우즈베키스탄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아 브라질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 예선, 2015 아시안컵 8강전에서 대한민국과 맞붙었다. 히로시마 대회까지 아시안 게임 축구가 A매치로 취급되기 때문에, 히로시마의 패전은 우즈베키스탄을 상대로 2024-11-24 11:19:58 현재까지 유일한 A매치 1패(역대성적 9승 3무 1패)다.
  11. 이 경기도 평가전 상대가 대한민국이었다. 여담으로 신의손은 이 경기에서 무려 4골이나 허용하며 팀은 4:1로 졌다.
  12. CSKA, 토르페도 모스크바 두 팀이다. CSKA는 1981년 한 해만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