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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스라엘역사를 다루는 문서.

2 고대 이스라엘

2.1 성립

흔히 이스라엘이라고 하면 엑소더스디아스포라처럼 다른 강대국에게 정복당하는 유랑 민족으로 인식되지만,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기록으로만 보아도 남의 땅을 빼앗는 적극적인 침략을 통해 첫 국가를 건설하였다. 타나크의 율법서 토라에서는 모세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인들이 이집트에서 도망친 것으로부터 독립의 기원으로 간주하지만, 본격적으로 정착생활을 시작한 것은 예리코의 전투를 통해 가나안 선주민을 축출하고 처음으로 가나안에 발을 붙이면서다.

유대교는 국가와 종교체계의 기원을 여기까지 소급하고 있지만, 고고학적으로 이 시기에는 유대교의 유물에 비해서 다신교 유물이 압도적으로 많이 출토되기 때문에 실제로 유대인의 지배가 얼마나 공고했는지는 불확실하다. 뭐 성경에도 일단 다신교를 믿는 민족과 잡거하여 공존하거나 서로 싸운 것으로 묘사되고 있기는 하다. 다만 견해의 대립은 있어 왔으나 예리코 전투부터 고고학적 실증성은 높지 않아 보통 200년 뒤인 기원전 1000년 경을 유다 왕국의 고고학적인 시작으로 본다. 아래의 왕국 시대 내용 역시 성서 등의 기록을 따른 것이다.

2.2 통일 왕국 시대

기원전 10세기 경으로 추정되는 시대는 그 유명한 다윗 왕과 솔로몬 왕의 시대로 이스라엘의 전성기였다고 기록된다. 이스라엘 극우파들은 이때 이스라엘의 영토가 나일에서 유프라테스까지 이르렀다고 주장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말도 안되는 소리다. 현재로서는 실제로 영향력을 행사했는지 조차도 성서 외의 증거로서는 확인이 힘든 수준일 뿐더러 초대왕인 사울 때 간신히 느슨한 부족 연합 수준을 벗어나 국가 형태를 갖추었는데 단지 그 다음 왕인 다윗때 와서 대제국이 된다는게 말이 될까? 다만 나일강시나이 반도 인근 지역으로, 유프라테스 강을 오늘날의 시리아요르단 쪽으로 생각한다면 강역상 불가능하진 않다.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고고학적 증거는 기원전 10세기 말 경 고대 이스라엘의 영토로서 대체적으로 그 정도의 영역을 가리키고 있기는 있다. 그렇다고 해도 현재 이스라엘 남부 네게브 사막 지대는 당시에 이스라엘의 영토가 아니었으므로 이는 현대 이스라엘 보다도 적은 강역이다. 따라서 대제국이라는 말은 터무니없고 성서에 기록된 다윗 왕과 솔로몬 왕의 왕국은 이집트와 아시리아와 같은 강대국들이 쇠퇴하던 중동 지역의 힘의 공백 시기에 그들의 영향력을 받고 있었던 가나안인들 일부가 야웨신앙으로 규합되면서 등장을 했었던 지역강국 정도라고 보면 된다.

2.3 분열 왕국 시대와 멸망

솔로몬의 사후 그의 자손 르호보암 왕에게 반기를 든 이들이 여로보암을 지지하면서 왕국은 남북으로 분열되었다. 여로보암은 북부의 10지파를 장악하여 북이스라엘 왕국을, 르호보암은 남부의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를 장악하여 남유다 왕국으로 나뉜 것이다. 그 뒤로 형편없는 약소국으로 살았다. 물론 두 왕국 사이의 사이는 그리 좋지 못해서, 북이스라엘이 아람#s-2.1과 연합해서 남유다를 치기도 하였다.

남유다 왕국의 정치가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던 반면에, 북이스라엘 왕국은 8번이나 왕가가 바뀌는 혼돈의 카오스였다. 존경받던 예언자 사무엘의 공인을 받은 남유다의 다윗 왕가와는 달리 북이스라엘은 애초에 여로보암이 스스로 왕좌에 올랐던 것이기 때문에 정통성이 결여될 수밖에 없었다.[1] 참고로 여로보암 왕가는 여로보암의 아들 2대 왕 나답 때에 장수였던 바아사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멸족당한다. 흠좀무.

두 왕국 모두 어떤 왕 때에는 유대교만을 신봉하다가도, 어떤 왕 때에는 다신교를 수용하곤 하는 것을 반복하였다. 하지만 북이스라엘 왕국이 훨씬 더 다신교를 많이 믿었다.[2] 그래서인지 성경에서 이스라엘 왕국은 문란한 사회로 묘사된다. 하지만 국력은 북이스라엘이 압도적이었고, 특히 오므리 왕조 2대 왕인 아합 왕은 페니키아 공주 이세벨과 혼인하고 딸 아달리야를 남유다 왕비로 시집보내는 등 페니키아, 아람, 남유다를 연합한 맹주가 되어 아시리아의 침공을 물리치기도 했다.

그러다가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이 먼저 아시리아 제국에게 멸망당한다. 이 때 잔존한 북 이스라엘 주민들은 이주 온 아시리아인들과 섞여서 사마리아인의 조상이 된다.

한편 남유다 왕국은 新 바빌로니아의 침입으로 멸망했고, 주민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이러한 바빌론 유수 과정에서, 유대인들은 신 바빌로니아 제국의 언어인 아람어를 익히게 되었고, 이것은 훗날 예수의 모어로 이어졌다.

2.4 페르시아 치하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가 바빌로니아를 무찌르고 지역의 강국으로 떠오른다. 이 때 아케메네스 왕조의 키루스 2세(고레스)는 유다인들에게 원래 살던 땅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조치하였고, 유다인들은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와 예루살렘 성소를 재건하였다. 이것이 구약 성서 에즈라서느헤미야서의 이야기. 페르시아 치하에서는 관용 정책 덕분에 그냥저냥 평화롭게 지낼 수 있었다.

2.5 그리스 치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으로 아케메네스 왕조가 붕괴하고, 알렉산드로스의 사후 디아도코이로 인해 본격적으로 그리스인이 중심이 된 헬레니즘 세계가 열렸다. 유대인들은 초창기 디아도코이 왕조들 중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를 받았으며, 그 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몰아낸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헬레니즘 왕조들은 셀레우코스 왕조 초기까지는 유대인과 유대교에 대한 관용 정책을 펼쳤지만, 이후 유대교에 대한 박해와 동화 정책이 시행되었다. 예루살렘 신전을 철거해버리고 그 자리에 제우스 신전을 세우는 등 강압적인 지배를 하였다. 이에 유다인들은 반란에 나선다. 하스모니안 왕조의 마카베오가 마카비 전쟁을 일으켜 유대인들은 그리스의 지배에서 벗어나 왕국을 세우고 성전을 재건축했다. 유대교의 명절 하누카는 이 때 성전을 새로 세워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2.6 하스모니안 왕조의 짧은 독립

하스모니안 왕조는 기존에 이교도 이민족이던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개종시켜서 유대교도로 만든다. 헤롯 왕조도 이런 이교도 출신 혈통이다. 하지만 이 때문에 헤롯 왕조는 골수 유대교도들에게는 반발을 샀다.

하스모니안 왕조는 분열과 쇠퇴를 거듭하였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로마 제국은 유대를 꿀꺽 해버리고 만다. 로마에 반발하려는 움직임이 열성당원들을 중심으로 일어나 1세기경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으나 로마 정규군의 진압으로 결국 기원후 73년 마사다 요새에서 로마군에 의해 열성당원들이 전부 전사 혹은 자결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그 후에도 순순히 로마의 지배에 따르지 않았고, 결국 서기 122년에 대규모 반란을 또 일으켰다가 패배한다. 이런 대규모 반란 말고도 자잘한 반란이 하도 많이 일어나서 로마는 다른 속주랑 비교도 안되는 크기의 유대 속주에 1개군단을 항상 상주시켜야만 했다.

2.7 로마 치하

이후 로마는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에서 쫓아냈는데 이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대인들이 로마 지배하에서 디아스포라를 당해서 전세계로 흩어졌다는 상식을 갖고 있다. 하지만 서울대 김갑수 교수의 견해에 따르자면 실제로 디아스포라가 이루어져서 유대인이 전세계에 흩어진 것은 아니라고 한다.

강제적으로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서 쫒겨난 문헌기록은 전혀 없다. 오직 그에 근접한 기록으로는 AD 135년에 반란전쟁후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전역도 아니고) 단지 예루살렘에서만 쫒겨났다는 것만 확인할 수 있다. 그 기록도 아주 소략하다.

그 기록이 맞다는 전제 하에서 이야기를 풀어보자. 여러 차례 유대인 반란에 진절머리를 앓던 로마인들은 유대인들의 종교적 중심지이자 반란의 중심지였던 예루살렘을 가만히 두지 않았으리라. 그런데 그 당시 예루살렘은 지금과는 달리 매우 작은 성곽도시였다. 성곽만 보면 불과 1~2제곱킬로미터에 불과하다고 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하자. 반란전쟁이 일어났다. 그래서 반란의 중심지였던 성이 진압군에게 파괴됐다. 전쟁터였던 성이 불바다가되고, 폐허가 되는 일은 다반사이지 않는가? 유대인들은 폐허가 된 도시에 살 수 없고, 학살도 피할겸 시골로 피난갔을 것이다. 반란의 중심지였기에 로마 정부가 당분간 접근금지 봉금령 따위를 내리는 것도 상상해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봉금령이 과연 영원할까?

그 어디에도 봉금령이 언제까지 유지되었다는 것도 밝혀져있지 않다. 시간이 흘러 몇 년이 지난 후, 복구된 다음엔 인근의 유대인이 또 들어와 살았으리라. 그리고 설령 그 봉금령이 있었다고해도 고작 작은 읍성 수준의 도시 하나만 폐쇄되었다고해서, 유대인들이 갑자기 전세계로 퍼질수는 없다. 오히려 그보다 훨씬 전인 BC 1세기부터 큰 규모로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을 벗어나서 다른 지역 곳곳에서 여러 언어를 사용하며 살았다는 기록은 무척 많다. 또한 디아스포라라는 단어는 그리스어로 원래 '그리스인이 전세계에 흩어져 사는 것'을 가리키는 단어이고, 유대인들도 전세계에 흩어져살고 있으니까 그것도 함께 포함해서 '한 민족이 여러 장소에 흩어져서 사는 것'을 가리키게 된 단어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강제적인 디아스포라는 낭설이자 신화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 강제적인 디아스포라가 없었는데, 유대인들이 이렇게 전세계 곳곳에 흩어져서 살게된 이유는 무엇일까?

유대인들에겐 애초에 디아스포라가 없이 그냥 자발적인 이민만이 있었다. BC 1세기경에 벌써 이집트 등에 유대인 공동체들이 존재했다. 특히 당시 세계의 문화의 중심지였던 알렉산드리아는 유대인 공동체가 무척 커서 인구의 40%가 유대인이었다. 서기 79년에 화산폭발로 멸망한 중소도시 폼페이에도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다는 유물이 나오고 있을 정도로, 기독교가 퍼지기 시작했던 AD 2~3세기에 로마시내 곳곳엔 유대인들의 집단 거주지인 게토가 존재했다. (또한 유태인들외에 기독교인들도 집단 거주지가 있었다.) 또한 앞서 짚었듯이 신약의 각 전도서 기록에 의하면 레반트(레바논, 시리아), 갈라디아, 에베소(터키), 테살로니카(그리스) 등에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대인 집단에게 전도하는 기록이 자주 나온다.

BC 3~2세기경에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70인역판 성경이 저술되었다는 것은, 당시에 이미 유대인으로서의 종교적 정체성은 유지하면서도 히브리어가 아닌 그리스어 성경을 필요로 할 정도로 헬레니즘화가 진행된 유대인 집단이 이미 크게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또 70인역 성경에는 히브리어 원어가 아닌, 처음부터 그리스어로 저술된 문헌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이 헬레니즘화 유대인 집단이 자체적인 종교적 전통을 만들어낼 정도로 오래되고 정체성 있는 집단이었음을 알려준다.

참고로 초기의 기독교는 유대교의 새로운 한 분파로써 시작했기에 유대인들에 대한 전도부터 시작했으며, 특히 국제어였던 그리스어를 이미 사용하고 있는 유태인집단이 지중해권역 곳곳에 자리잡고 있었기에 전파가 용이했다는 점이 기독교를 세계종교로 만든 하나의 요인일 것일 것이다. 특히 기독교 전파 초창기에 수집, 작성된 문헌인 신약 복음서들은 히브리어나 아람어를 사용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그리스어로 저술되었는데, (특히 신약 복음서의 등장인물들이 구약성경을 인용할 때, 히브리어 구약을 인용한 말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70인역을 인용한다.) 이는 유대교의 종교적 정체성을 제외하면 상당부분 헬레니즘화된 유대인집단이 이미 존재했고, 복음서가 이들을 대상으로 저술된 것임을 알게 해준다.

왜 유태인들이 이른 시기에 그렇게 다양한 장소에 살았을까? 그동안 팔레스타인을 지배했던 앗시리아, 히타이트,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그리고 그뒤를 이은 로마제국까지 다 광대한 영토를 자랑하는 다민족국가들이었다. 또한 또한 유태인들은 당시 중근동의 공용어였던 아람어와 그리스어를 사용했기에 다른 지역의 정착에도 어려움이 없었다.

마케도니아 왕국의 붕괴후 잠시 들어섰던 유대독립국가는 BC 66~61년에 폼페이우스의 동방원정으로 무너지고, 팔레스타인은 새로운 패자인 로마제국으로 편입되었다. 그들이 로마를 싫어해서 유태인 독립국가를 열망했건 어쨌건 간에 그들은 로마제국의 국민이었기 때문에 자유롭게 이주할 수 있었다. 또한 로마제국의 특징 때문이기도 했다. 로마는 다민족국가로써 민족을 차별하지 않았다. 심지어 비로마인이 황제가 된 경우가 더러 있을 정도였으니까.

현대의 미국이나 브라질같은 거대한 다민족국가를 떠올려보자. 드넓은 미국 곳곳에 한국인들이, 흑인들이, 백인들이 퍼져서 살아간다. 특히 백인들은 아예 혼혈이 되어서 원래의 민족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된 것이 불과 200여년 동안 벌어졌다. 로스앤젤레스에는 한국인들의 거대한 디아스포라가 존재할 정도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섞이고 섞여서 그렇게 유태인들이 로마라는 자기 나라의 곳곳에 시나브로 이주하게된 것이다. 476년에 서로마제국이 멸망했고, 동로마제국은 1453년에야 멸망했다. 400~1000여년이면 충분히 유태인들이 그렇게 많은 곳에 퍼져 살 수 있다. 유태인들만이 곳곳에 이주한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고대의 그리스인이나 페니키아인, 카르타고인들도 그렇게 지중해 전역에 퍼져살았다. 고대의 지중해는 하나의 커다란 경제적 권역을 이루고 있어서 권역내에서 교류가 잦았던 점도 큰 요인이다.

또한 유대인과 페니키아인의 동질성에도 주목해야한다. 앞서 히브리어와 페니키아어는 가나안어의 방언관계에 지나지 않으며, 사실상 알파벳의 표기만 다를뿐, 하나의 언어로 간주해야 옳다는 이야기를 했다. 히브리문자는 BC2세기에 사라졌고, 페니키아문자는 BC1세기경에 사라졌다. 두 문자가 사라진후 두 언어는 각각 아람어에 흡수되었다. 페니키아인들은 일찌기 이집트 제4왕조인 BC 26세기~BC24세기때부터 이집트와 상거래를 한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로 일찍부터 동지중해권역의 무역중개인이었고, 스페인, 튀니지, 아나톨리아등 지중해 연안 곳곳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있었다. 유태인과 페니키아인의 사이에는 언어적 차이가 거의 없었고, 서로가 비슷한 지역을 점유하고 있었다. 페니키아인은 북서해안가 가나안인으로 보고, 히브리인은 남동산악지대 가나안인으로 보면 쉬운 비유가 될 것이다. 고대부터 지중해연안은 무역에따라 하나의 거대한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고 페니키아인들은 지중해권역에 많이 진출했고, 히브리인들도 페니키아인으로 함께 간주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어쨌든 이러한 이유로 이 후 많은 유대인이 중동이나 유럽으로 퍼졌는데, 대부분 이민한 사회에 녹아들어가지 않고 자신들 고유의 전통과 종교를 지키면서 살아갔기 때문에 배척을 당했다.

한편 팔레스타인에 상당수의 유대인들은 로마 치하에서 많은 수가 기독교로, 이슬람의 정복 이후 많은 이들이 이슬람교로 개종해 오늘날의 팔레스타인인이 되었고 개중에는 다른 팔레스타인인처럼 아랍어를 모국어로 쓰지만 이집트의 콥트 기독교도처럼 유대교의 신앙을 유지한 유대 공동체 역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집트의 콥트 기독교가 교회 언어로 콥트어를 쓰듯이 팔레스타인의 유대교 공동체도 교회 언어로 히브리어를 사용해왔다.) 이와 관련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여기를 참조하라. [1]
[2]
[3]

3 현대 이스라엘

3.1 성립 이전

여하튼 이스라엘은 로마제국의 영향력하에 있었고 로마제국이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리되면서 비잔티움 제국의 영역하에 있었다가 서기 636년에 야르무크 전투에서 신흥 이슬람 제국이 승리하면서 이스라엘 지역에 대한 영유권도 이슬람권에 넘겨지게 되었으며 우마이야 왕조와 압바스 왕조의 통치하에 있었으며 십자군 전쟁하에서 기독교 왕국이 세워지기도 하다가 살라딘에 의해 다시 아랍왕조의 통치하에 놓이게 되었으며 예루살렘 왕국은 1291년까지 남아있었으나 아이브유 왕조를 뒤엎고 일어선 맘루크 왕국에 의해 정복되었다가 1516년에 맘루크 왕조가 오스만 제국의 의해 멸망당하면서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유대교인들은 기독교 국가들과 이슬람 국가들의 통치하에서도 그런대로 정착생활을 유지하며 살아갔지만 오랜시간이 흐르며 대다수의 유대교인들이 각각 기독교와 이슬람교도로 개종하였고 문화적으로도 아랍에 동화되었으며 유대인으로써의 정체성을 유지한 이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오랜 세월동안 고대 이스라엘 국가는 그저 하나의 흘러간 옛 국가에 불과했으며, 유대인들은 국가보다는 종교와 풍습으로 정체성을 유지했다. 근대에 이르러 민족주의의 발흥으로 유럽계 유대인들도 여기에 자극을 받았고, 이스라엘을 국가로서 재건해야 한다는 시오니즘이 아슈케나짐들 사이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국가를 만든다는 것은 거대한 모험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다지 지지를 받지 못했다.

3.2 20세기 초반

이것이 현실화된 계기는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당시 이곳은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는데, 이들과 전쟁중이던 영국은 오스만 제국의 중동 영토 안에 많은 아랍 부족들이 존재하며, 이들의 협력을 얻어내면 전쟁 중인 오스만 제국의 국력을 크게 약화시킬 수 있으리란 판단을 한다. 그리하여 시작된 것이 무함마드의 후손이며 메카의 대족장이었던 후세인과 영국의 이집트 고등판무관 맥마흔 사이에 맺어진 '맥마흔 선언'이란 이름의 비밀협정이었다. 이 선언은 쉽게 말해서 '반란 일으키면 아랍 국가 만들어주마'라는 내용이었고 통일왕국의 야심을 가지고 있던 후세인은 여기에 호응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 당시 반란군에 파견된 영국의 연락책이 이후 영화로도 만들어진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였다.

영국의 공세와 연결된 반란은 꽤나 성공적이어서 오스만군을 죄다 몰아내고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를 점령할 정도였다. 그러나 프랑스는 이미 영국하고 이 지역을 갈라먹자고 짝짜꿍을 해놨기 때문에 전후 이들 아랍군을 무력으로 무너뜨리고 레반트(現 시리아, 레바논) 지역을 자신들의 영토로 확보했고, 영국의 배신으로 인해 통일 아랍 결성이 좌절된 하자즈 가문의 에미르 후세인은 라이벌 사우드 가문의 사우디아라비아에 의해 본거지인 메카에서 패주하였다.

패망하여 쫓겨난 후세인의 아들들에게 영국은 자국령을 양도하였는데, 요르단 왕국과 이라크 왕국이 건설되었다. 이렇게 아랍 세계의 분할을 완성시키고 팔레스타인 지역은 자신들의 보호령으로 삼아놨다. 현재의 중동 문제는 상당부분 이 시점에서 시작된다.
다만 이 과정에서 영국만 탓하기도 곤란한 것이 하자즈 술탄국이 망해버린건 성급한 칼리프 지위 선포로 이슬람교도 전체의 반발을 부른 후세인의 삽질이 주된 이유였기 때문. 오히려 하자즈 가문이 사우드 가문에게 한 순간에 근거지를 다 털려버리고 개털이 되버린걸 영국이 후원해서 그럴듯하게 왕국을 세우도록 도와줬다고 볼 수도 있다.

여기에 영국이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내 국가 수립을 지지한다는 '밸푸어 선언'이 있었음이 확인되면서 문제가 여기서부터 커지기 시작한다. 일단 영국이 반란 세력을 한 민족이라도 더 일으키자는 욕심에서 양쪽 모두와 협상을 벌였고, 이후 팔레스타인을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으로써 영국이 직접 지배하게 되면서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까지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일대에서는 유대인과 아랍인들 사이에서 유혈충돌이 계속되는 혼란의 도가니가 펼쳐졌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아랍인, 특히 이집트와 이라크는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를 거부하고 친독파 정권이 영국군 기지를 공격했다가 무력으로 박살나고 친영파 허수아비 정권이 세워지는 등 적극적인 사보타주를 시도해 연합군의 전쟁 수행을 방해하고 나치에 협력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끌난 후, 독일에서 유대인에 대한 대량학살이 자행된 사실이 밝혀지게 되자 영국은 가장 곤란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아닌게 아니라 1차 대전 종전 이후 아랍인들의 뒷통수를 친 까닭에 아랍인들에게 꿀리는 입장이었으므로 국가 건설은 커녕 약속했던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가장 적극적으로 막았고 유태인에 대한 공격에 소극적으로 대응했을 뿐만 아니라 독일에서 탈출한 유대인들의 국내 입국조차 막은 역사가 있으므로 영국은 더이상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국가 건설을 막을 입장이 못되었다.

유럽계 유대인에 대해 국제적인 동정심과 관심이 쏠렸고, 히틀러 버금갈 정도로 유태인을 질색했던 스탈린조차 당시 시오니즘의 주류였던 좌파 시오니즘에 관심을 두고 있었기에 이스라엘 건국에 반대하지 않고 있었다. 물론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건국된 아랍 국가들은 격렬하게 반대했고 팔레스타인인들은 봉기와 반란으로 저항했지만 모든 열강이 유럽계 유대인을 지지하고 있었다. 승전 열강에 의해 결성된 UN은 나름대로 유대인이 많은 지역만 독립시키는 안을 협상안으로 내밀었고, 아랍권의 반대 속에서 팔레스타인 양분안을 다수결로 통과시켰다. 그러나 이 경우 지중해 연안의 비옥하고 공업이 발달한 지역은 유대 인에게, 척박한 사막 지역은 아랍 인에게 분할하도록 되어 있어 아랍 인에게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안이었다. 이어지는 폭력사태 속에서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이 선포되었고, 여태 그곳을 지배한 영국군은 마치 나몰라라 하듯 철수하였다.[3]

3.3 20세기 후반

팔레스타인 문제는 한창 아랍 통일, 혹은 연합을 두고 논쟁을 벌이던 주변국들의 공통 화두가 되었고, 이스라엘 건국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이미 건국 이전부터 확산된지 오래였던 폭력사태가 본격적인 무력 투쟁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주변 아랍국가들이 공개적으로 개입하면서 이스라엘과 주변국들 사이에 제1차 중동전쟁, 이스라엘 건국 전쟁이 발발한다. 하지만 아랍 국가들의 군대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무능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여기에 이스라엘 유태인들의 분투와 아슈케나짐의 입김이 센 미국의 지원 덕분에 이스라엘의 몇배나 되는 군사력을 지닌 주변국들은 도리어 패배를 하고 만다. 이 전쟁에서 승전을 거둔 이스라엘은 국가의 존립을 굳혔다. 물론 아랍 국가들에게 팔레스타인 자체는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고 나중에는 이미 물 건너간 UN 계획을 무시한 채 팔레스타인 국토로 지정된 영토를 이스라엘과 나눠먹었다.

그 이후 수에즈 운하 문제로 이집트와 대결한 제2차 중동전쟁,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으려 전쟁 준비를 하던 시리아와 이집트의 징후를 파악하고 선제 침공으로 불과 6일만에 두 나라를 격파한 6일 전쟁(제3차 중동전쟁), 복수의 기회만을 노리던 아랍 연합군이 제대로 정신차리고 선빵 때린 제4차 중동전쟁 등... 이스라엘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이며, 중동전쟁의 역사이기도 하다.

지금도 이스라엘은 인구 수에서는 10배 이상, 경제력과 양적 군사력 종합에서는 거의 19배 이상 차이 나는 아랍국가들 사이에 끼어있다. 이스라엘은 군사 강국이지만 안심할 수 있는 입장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스라엘 정부의 억압적인 통치에 신음하는 팔레스타인인들과 그들의 무장단체는 틈만나면 게릴라전으로 이스라엘을 공격해대고 온갖 사건이 터져서 나라가 조용할 날이 없다. 국가 GDP의 13% 이상을 국방비로 지출하고 남녀 모두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며, 어느날 갑자기 무기 수입선이 끊길까봐 자체적인 무기 개발 능력을 강화하는 등[4] 언제나 불안불안한 초석 위에 집을 지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영토는 탱크를 전속력으로 서너 시간만 달리면 한바퀴 돌 수 있을 만한 작은 크기에다 물까지 부족하다... 이로 인해 악바리 같이 싸워댔으나 지금은 오랜 전쟁에 지친 국민들 사이에 병역 기피 풍조도 만만치 않다. 지금은 사라진 국내 고등학교 과목인 교련 교과서를 보면 이스라엘이 애국심이 뛰어나고 늘 전쟁에 나간다고 참으로 이스라엘을 찬양한 바 있지만 사실은 전혀 아니다. 정작 이스라엘도 건국초부터 상당수 유태인들이 군대에 안 가려고 별별 짓 다 했으며, 군대 가서도 전투로 인한 두려움으로 우울증, PTSD에 걸려서 약물 중독에 빠진다든지, 여군 성폭행, 탈영, 심지어 프리깅(상관 살해), 총기난사도 꽤 저질렀다고 한다. 이는 지금도 계속되는 현재진행형이다. 두려움없는 무적의 군대라는 건 전면 헛소리인 셈이다. 이런 일화들은 월간 플래툰에서도 다룬 바 있다.

아랍연합국들은 4차 중동전까지의 패배로 더 이상의 군사적 대결은 지양하고 있다. 이는 4차 중동전과 함께 찾아와 세계 경제를 뒤흔들어놓은 1차 오일쇼크에 대한 반성도 포함되어 있다. 이는 또한 아랍연합 내 수개 국의 정권이 바뀌면서 그들이 내정 문제에 더 집중하게 된 탓도 있다. 사실 아랍과 이스라엘 사이에는 몇 차례 결정적 평화의 순간이 올 뻔했으나 번번히 테러라든가 이스라엘 강경파의 득세라든가 등의 악재에 가로막혀 좌절되고 말았다. 특히 1981년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 암살1995년 이스라엘의 이츠하크 라빈 총리 암살은 역사를 후퇴시키고 분쟁을 조장한 추잡한 테러였다.[5] 게다가 두 사람 다 전쟁 영웅에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평화 조약 진행중 극우파인 동포의 손에 의해 매국노로 매도되며 암살당했던 것이다. 결국 두 진영 사이에 평화의 길은 아직도 멀다고 할 수 있다.

3.4 21세기

가자 전쟁2012년 11월 가자지구 폭격(2차 가자전쟁)의 경우처럼, 분쟁은 그야말로 현재 진행형이다. 2000년대 이후 더 시궁창이 된 까닭은 아리엘 샤론(01~06 총리)는 양반일 정도의 강경한 시오니즘 정파들이 주도하고 있기 때문이다.[6] 그러다보니 팔레스타인 문제는 해결이 안되고 그저 악화되기만해 이스라엘의 심각한 골칫거리다.

그 후에도 간간히 온건파인 노동당이 집권하기는 했지만[7] 살아남은 온건파의 대부격인 시몬 페레스 현직 대통령(2007년 7월 취임)의 "온건함"이라는건 터키와 친분을 유지하고 이란 공격에 반대하는 정도다. 가자지구 폭격에 반대하는 온건파란 상상할 수 없다. 물론 페레스가 대통령이 되기 위해 노동당 당수에서 샤론의 카디마당으로 갈아탄 것도 있지만, 정작 카디마당은 2005년 말 여당이었던 리쿠드 당이 가자지구 철수에도 반대해서 샤론이나 올메르트 등이 분당한 것이라는게 함정.

그런데 그 강경한 리쿠드 당이 다시 노동당 잔당(에후드 바라크 전 총리-99~01)과 손을 잡고 연정을 개시했고, 2012년에는 총선 승리를 위해 다시한번 가자지구를 폭격하며 극우파와 손을 잡았다. 샤론 역시 2000년 동예루살렘의 이슬람 성지를 "평화"를 내세우며 방문했지만 오히려 팔레스타인 '알박기'에 대한 지지로 해석된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공습을 하다가 목적인 하마스 멸망이 실패한탓에 총선에서 부진한다. 제1당을 유지하기는 했지만 좌우 의석(총 120석 중 각각 60석)이 똑같은지라 더 이상 강경해지기는 힘들어지게 되었다.

특히 50세의 언론인 출신 야이르 라피드가 이끄는 중도 좌파 성향 ‘예쉬 아티드(이스라엘의 미래)’당이 전체 120석 중 19석을 얻어 2당이 되었다. 2012년 4월 창당된 이 신생 정당은 계속된 전쟁을 반대하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공존하는 ‘2개 국가 체제’를 옹호하고 정통파 유대교의 병역 특례에 반대하는 개념 정당이다. 거국 내각 가능성이 고려되기도 했다. 여담으로 이스라엘은 정당에 투표하는 완전 비례대표제 국가로, 해적당도 있다고 한다. # 2%가 넘으면 의석을 보유하게 된다.

4 같이 보기

  1. 여로보암이 시작한 우상숭배도 다윗을 왕으로 삼은 야훼에 대한 결별로 보기도 한다.
  2. 북이스라엘에서 가장 의로운 왕으로 평가되었던 예후바알 숭배는 금지했지만 금송아지 숭배까지 금지시키진 못했다. 하지만 북이스라엘에서는 야훼를 금송아지 형상으의 신으로 오해하고 숭배해서 그랬을 거라는 학설도 있다.
  3. 이는 국가가 수립되었기 때문에 영국과 이스라엘 사이에 특별한 방위조약이 없는 한 당연한 일이다. 오히려 영국이 국력 약화에도 무리하게 남아서 이스라엘 지역을 계속 지키면서 통제했다면 외면하는 것보다 몇백배는 더 욕을 먹었을 것이다. 철수해 버린게 무책임해 보이는 이유는 일을 다 벌려놓고 철수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4. 비록 바누누가 폭로해서 비공식적이지만 핵무장까지 해놨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있다. 언젠가는 이란과 이스라엘이 서로 핵무기를 사용할 거라는 불길한 농담도 있다.
  5. 라빈은 아라파트와 손을 잡고 오슬로 협정을 채결했다는 이유로 평화상 수상 1년만인 총리 재임 도중 말이다. 그리고 그 짧은 평화 이후 1996년 총선에서 강경파인 네타냐후가 집권했다.
  6. 당장에 현 총리 네타냐후부터가 샤론 총리의 가자지구 철수에 반발하여 장관직을 사퇴했을 정도로 강경한 성격이다.
  7. 다만 이는 1980년대에 평화주의적으로 노선을 변화시켰기 때문이고 1970년대까지는 꽤나 강경파적인 면모를 보이고 팔레스타인 지역에 깽판을 치는 정책을 입안하는 등 만악의 근원이라고 할수있는 정당이었다. 애시당초 4차례의 중동전쟁이 일어났던 시기가 노동당이 정부를 구성했던 시기였던걸 감안하면 당연한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