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句麗-唐 戰爭 | ||||
Goguryeo–Tang War |
안시성 전투 |
1 개요
삼국통일전쟁 파트의 한 부분. 고구려와 중국 당나라왕조의 전쟁. 명칭에 관한 문제는 고구려-수 전쟁 항목 참조. 결론만 말하면 흔히 언급되는 '고당전쟁'이라는 약칭은 역사적 어원을 이해하지 못한 잘못된 명칭이다.
2 당왕조의 건국과 연개소문의 쿠데타
2.1 당의 건국
수나라의 수문제는 남북조시대에 도탄과 혼란에 빠져있던 중원을 통일시켜 안정시켰으나 아들인 수양제에게 살해당하고 왕위를 빼았겼다. 수양제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3차례에 걸쳐 고구려와 싸웠으나(고구려-수 전쟁) 오히려 참패를 면치 못하였고 그 외에도 지나친 토목공사로 인하여 국고를 탕진하였으며 민심을 잃었다. 결국 수왕조는 내분으로 인하여 멸망하고 당국공 이연이 새롭게 당나라왕조를 건국하였다.
그의 둘째 아들이었던 당태종 역시 맏형 이건성, 동생 이원길 두 형제를 죽인 후에 부황을 은밀히 압박하여 황위를 찬탈한 인물이었지만 수양제와는 그 그릇이 다른 인물로, 당나라를 훌륭히 이끌었으며 건국 초부터 큰 위협이었던 돌궐을 무찌르고 고창국와 토욕혼을 격파하여 주변 국가들을 모두 정벌하고 나라를 안정시켜 후세에 정관의 치라 불리는 태평성대를 이룩하였다.
2.2 영류왕의 유화책과 첩보전
이렇듯 당태종이라는 걸물이 몰고 온 파장은 어마어마했고, 고구려의 영류왕은 이에 대해 힐리가한이 격파된 직후인 629년에 당에 사신을 보내 지도를 헌상하는 등 유화적인 자세를 보였다. 그러한 동시에, 당의 팽창을 경계하며 631년 이후 천리장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이해 7월, 당 조정은 관인을 파견하여 고구려와 수나라와의 전쟁 때 죽은 수군의 유골을 수습하고, 요서 지역에 고구려 만든 경관(京觀, 수나라 군사의 시체로 쌓은 전승기념시설)을 허물라고 영류왕에게 항의했다. 이는 명백하게 고구려에 대한 위협이자 도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나 영류왕은 당조정의 항의를 받아들여 경관을 허문다.
641년 5월, 당태종은 직방랑중 진대덕(陳大德)을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그 전해 영류왕이 태자를 당에 보낸 것에 대한 답례 형식이었는데, 직방랑중은 병부 소속으로 국내외의 주요 군사시설을 포함한 지도 제작을 관장하는 직으로서, 군사정보수집의 실무를 총괄하였다. 진대덕은 자신이 경치 좋은 곳 탐방을 좋아한다면서 평양으로 가는 도중에 고구려의 주요 산천과 성곽 및 교통 요지들을 두루 살폈고 정보를 모았다.
당시 고구려는 매우 심각하게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고, 고구려의 최고위직인 대대로(大對盧)가 진대덕의 숙소를 세 번이나 찾아가는등 예우를 극진히 하였다고 한다. 이해 8월, 진대덕은 귀환하는데 그가 얻은 정보를 당태종에 보고하였다. 당태종은 기뻐하며 노골적으로 고구려 공격에 대한 야욕을 보였고, 기회만 오면 공격하겠다는 의사 표시를 했다.
진대덕의 평양성 방문은 고창국 멸망 소식등과 함께 고구려 지배층의 내분을 촉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귀족들은 강경과 온건의 의견차로 대립하였고, 고구려는 안팎으로 중대한 시련에 봉착하게 되지 않았을까?
그후 영류왕은 연개소문을 여타 귀족들과 견제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역으로 막리지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키는 바람에 시해되고 말았다. 이후 연개소문은 영류왕 등 100여명[1]을 제거한 후 보장왕을 왕위에 올리고 자신은 고구려의 최고 실권자로 떠오르면서 양국간에는 긴장이 고조된다.
2.3 연개소문의 쿠데타와 고조되는 전운
당에 대해 적극적인 화친 정책을 펼쳐오던 영류왕이 연개소문에게 살해당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당태종은 이에 크게 진노했다.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에 사람을 보내 신라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라고 요청하면서 양국의 상황을 파악하고 명분을 쌓아올렸다. 전통적인 조공 책봉 관계로 보면, 제후국들이 서로 싸움을 벌이는데 천자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이를 계속한다면, 천자가 개입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기는 셈이다. 연개소문은 이러한 당나라 사신의 요구를 거절하였고, 의자왕의 경우에는 겉으로는 일단 응하는 듯한 자세를 보였다. 반면 고구려에 대해 당나라가 다시 한번 사신을 파견하여 압박하자 연개소문은 당 사신을 굴에 가두어버렸다.
외교적 압력은 효과가 없었고, 이렇게 되면 무력 행사밖에 남은 길이 없었다. 당태종은 직접 고구려 정벌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왕을 죽인 불충한 역적 연개소문을 토벌한다는 명분이었다.
"요동은 옛 중국 땅이고 막리지가 그 임금을 죽였으므로, 짐이 몸소 가서 이를 경략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어른들과 약속하니 아들이나 손자가 나를 따라가는 자는 내가 잘 위무할 터이니 염려할 것이 없다."고 하고, 포백과 곡식을 후하게 주었다. 군신들이 모두 황제에게 가지 말기를 권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나는 알고 있다. 근본을 버리고 말단으로 가며, 높은 것을 버리고 낮은 것을 취하며, 가까운 곳을 두고 먼 곳으로 감은 셋이 모두 좋지 못하다. 고구려를 정벌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개소문은 임금을 죽이고 또 대신들을 살육하고 즐거워하고 있으므로, 한 나라의 사람들이 목을 내밀고 구원을 기다리고 있다. 의논하는 사람들은 이를 살피지 못하고 있다."─三國史記 卷第二十一 髙句麗本紀 第九 |
당나라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자 연개소문은 백금과 관원 50여 명을 바치면서, 이들이 당나라 수도에 머물기를 원한다고 요청했다. 당나라 조정을 달래고 상황을 살피려는 의도로 보이는데, 연개소문이 당 사신을 박대한 것처럼 당태종도 고구려 관원을 구속하고 백금을 거부하여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이 당시 당태종의 상황을 살펴보면, 후계자 책봉 문제로 상당히 곤혹스러운 시기를 지났었다. 후군집(侯君集) 등의 원로들이 죽었고, 장손무기와 저수량 등이 셋째 이치를 지지하고 나서면서 뜻을 이루고 반대했던 사람들을 처벌하는등 위풍당당한 당태종의 이름치고는 꽤나 골치아픈 상황에 시달렸었다. 심지어 현장 법사에게 환속을 권유하여 자신을 도와줄 것을 요청했을 정도.
이런 상황에서 고구려 정벌은 자신의 권위를 다시 한번 세울 수 있고, 또 유약해보이는 셋째 이치가 차기 황위계승자가 된 상황에서, 자신이 안정적인 발판을 깔아줄 수 있는 수단도 될 수 있었다. 어찌되었건 모든 상황이 전쟁을 향해 흐르고 있었다.
3 1차 전쟁
출정에 앞서 당태종이 총애하던 재상이었던 위징은 고구려의 기세가 만만치 않았고 수나라 역시 대병을 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를 꺾지 못하였다며 고구려 원정에 반대하였다. 당태종 역시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 잠시 원정 계획을 보류하였으나 위징이 사망한 이후에 원정을 말리는 이가 없게 되자 마침내 직접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3.1 당나라의 전쟁 준비
644년 7월, 당태종은 출병에 필요한 군량 징발과 수송에 관한 조처를 취하고, 한편으로 영주도독 장검에게 영주, 유주 도독부의 군대와 거란·해·말갈 등의 기마 군단을 이끌고 먼저 요동을 공격하여 고구려의 방어 상태와 형세를 탐색하게 하였다. 장검은 마침 요하가 범람하여 강을 건너지는 못하였지만, 소규모 정찰대를 잠입시켜 요동 각지의 지형과 기후, 수초(水草)의 상태 등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수집하여 보고했다.
그리고 10월, 당태종은 수도 장안의 노인들을 불러 잔치를 베풀면서 고구려 원정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아무래도 전대 왕조인 수나라의 폭정 중에 하나가 고구려 원정이었고, 그때문에 고구려 원정이라면 치를 떠는 사람들이 많았을테니(고작 30년전 일이다.) 이는 민심을 다스리기 위한 조치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11월, 형부상서 장량이 평양도행군대총관으로 임명되었고, 남부 지역에서 징발한 병사 4만, 장안과 낙양에서 모병한 3천, 전함 5백여 척을 동원해 산동반도를 떠나 해로로 평양을 향해 진군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세적(李世勣)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보·기병 6만과 난주·하주의 유목민 항호를 거느리고 요동으로 진군하게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645년 2월 12일, 낙양을 출발하여 6군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향하였다.
○ 十九年(645), 命刑部尙書張亮爲平壤道行軍大總管, 領將軍常何等率江·淮·嶺·硤勁卒四萬, 戰船五百艘, 自萊州汎海趨平壤; 又以特進英國公李勣爲遼東道行軍大總管, 禮部尙書江夏王道宗爲副, 領將軍張士貴等率步騎六萬趨遼東; 兩軍合勢, 太宗親御六軍以會之. 19년에 형부상서(刑部尙書) 장량(張亮)을 평양도행군대총관(平壤道行軍大總管)으로 삼아 장군(將軍) 상하(常何) 등과 江·淮·嶺·硤의 강한 군사 4만 명·전선(戰船) 5백 척을 이끌고 내주(萊州)에서 바다를 건너 평양(平壤)으로 향하게 하였다. 또 특진(特進) 영국공(英國公) 이적(李勣)을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總管)으로 삼고, 예부상서 강하왕 도종(禮部尙書 江夏王 道宗)을 부총관(副總管)으로 삼아서 장군(將軍) 장사귀(張士貴) 등과 步兵·騎兵 6만을 이끌고 요동(遼東)으로 나아가게 했다. 兩軍이 합세하도록 한 다음, 태종(太宗)은 친히 6軍을 거느리고 가서 전군을 합류하기로 했다.─舊唐書 卷 199 東夷列傳 第 149 (구당서 199권 中 동이열전 149편) |
수나라와의 전쟁 당시와 달리, 이 당시 당나라 군의 자세한 전체 숫자는 명기되어 있지 않다.[2] 가장 무난한 견해로는 10만명 대의 본 병력에, 영주도독부, 거란과 해등의 유목민 부대가 합쳐질것을 고려해서 20만 중반대 혹은 30만 내외라는 추정이다. 일부에서는 50~60만, 100만 설을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신라에게 파병을 요구했으며, 백제에게도 참전, 혹은 최소한 방해하지 않고 협조할 것을 요구하였다.
3.2 파죽지세의 당나라군 - 개모성 함락
645년, 마침내 당나라 군의 선봉이 요서의 영주에 다다랐다. 당시 영주에서 요동을 향해 나아가는 길은 세 갈래로, 하나는 연군성(燕郡城), 여라수착(汝羅守捉)을 거쳐 요하 하류를 건너 한(漢) 대의 요대현(遼隊縣)에 이르는 남도이고, 다른 하나는 연군성 ─ 회원진(懷遠鎭)을 거쳐 요동성으로 이르는 중도였다. 북도는 연군성에서 북으로 통정진(通定鎭)을 지나 신성, 현토성 방면으로 나아가는 길이었다. 당군은 이 세 길을 따라 진격하였다.
다시 복기해보자. 수나라군의 경우, 전군이 중도를 취해 요동성을 공략한 뒤, 곧바로 천산산맥을 넘어 오골성을 공격하고 압록강으로 나아가 평양으로 진격하자는 계획이었지만, 그것이 요동성 공략전부터 실패하자 모든것이 꼬여 버렸다. 그에 비해 당군은 요동 평야에 확실한 교두보를 구축한 뒤 삼군이 동시침공한다는 방침으로, 요하를 건너는 작전부터 세 방향에서 전개, 요동성을 삼면에서 압박하였다.
이세적의 선봉군은 중도를 취하는 듯 하다가, 일순간 갑자기 방향을 틀어 우회하는 노정이지만 가장 평탄한 북도로 움직여 신속히 이동하여 요하를 건넜다. 4월 1일, 당군은 고구려군의 요하 방어선을 기습적으로 돌파하여, 이세적은 현도성(玄菟城)을, 부총관인 강하왕 도종은 병력 수천으로 신성을 공격하였다.
고구려군은 매우 놀랐으나 성문을 틀어막고 수비를 하였는데, 공략이 여의치 않자 당군의 일부로 신성 방면의 고구려군을 묶어둔 뒤 주력을 남으로 돌려 개모성(盖牟城)을 함락시켰다. 이때 연개소문이 가시성(加尸城)의 700여 명을 보내 성을 지키게 하였는데 이세적에게 사로잡히고 당나라 군대에 종군하길 원하자, 나중에 당태종은 그 병사들의 집이 가시성에 있는데, 만일 지금 내 부대에 들어오게 된다면 그 처자들이 모두 살해당할테니 그럴 수는 없다고 하여 모두 풀어주었다. 당태종으로서는 인덕을 과시함과 동시에, 아무래도 첩자가 있을지도 모르는 병력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개모성을 함락시킨 이세적의 당군은 이곳을 근거로 삼아 일부 당군을 주둔시켜 신성 방면의 고구려군과 교전하면서 그 동향을 견제하게 한 뒤, 5월 들어 주력은 남쪽의 요동성으로 진군시켰다. 한편으로 영주도독 장검은 남도를 취해 도하한 뒤, 이민족 부대를 거느리고 건안성(建安城)을 타격하였고, 국내성에서 출발해 건안성과 안시성방면을 거쳐 요동성으로 진격하는 고구려 지원군 4만을 기병 4천으로 저지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남쪽에서 요동성을 지원하는 것은 장검이 이끈 당군이 이미 건안성 등에 선제공격을 취하는 바람에 이에 대비하는 차원에서라도 쉽게 움직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 무렵 당태종의 본군은 중도를 취해 요택(遼澤)을 건너 요동성으로 몰려들었다. 요택은 진흙이 200리여서 사람과 말이 모두 건너갈 수가 없으므로, 장작대장(將作大匠) 염입덕(閻立德)이 흙을 넓게 깔아 다리를 만들어 군대가 지체하지 않고 요택 동쪽으로 건넜다. 당태종은 늪지대 등을 통과하면서 사용한 다리를 모두 치워버려 배수진격으로 군대의 마음을 굳게 하였다.
3.3 요동성 함락
요동성 앞에 주둔해 있는 이세적의 군대 안에서는 두가지 의견이 나왔는데, 바로 싸우자는 측과 당태종의 주력이 도착한 후 싸우자는 주장으로, 후자가 우세했으나 강하왕 도종은 속전을 주장했다. 교전이 벌어지자 당나라의 행군총관 장군예(張君乂)가 달아나는 바람에 당군이 패배하였는데, 도종과 이세적이 역습을 하는 바람에 고구려군이 천 명이 전사하였다.
이후 당태종의 주력이 도착함에 따라 요동성의 상황은 급속도로 암울해졌다. 당태종은 속전을 한 강하왕 도종을 칭찬하고 도망친 장군예를 처형했으며, 용감하게 싸웠던 도위(都尉) 마문거(馬文擧)는 중랑장으로 임명했다. 또 태종은 직접 기병을 이끌고 성 가까이 와서, 흙을 지고 나름으로서 전투를 독려하였다. 과장이 있을 것은 감안해야 하겠지만, 기록상 당나라군이 수백겹으로 요동성을 포위하고 북을 치고 소리를 지르며 고함을 치자 그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 지경이었다.
무경총요(武经总要)의 운제 그림 |
이 당시 고구려군은 상황이 몹시 좋지 않자 개국왕이자 호국신 추모에게 미녀를 단장하고 바쳐 무당이 굿까지 했고, 당나라 군대의 이세적은 포거(抛車)를 쏘아 큰 돌을 3백보까지 멀리 날려 성 안에 타격을 가했다. 남풍이 불자 당군의 정예병력이 달려들어 성 내에 불까지 번졌고 난장판 속에 마침내 당군이 성내로 진입하였다. 고구려군은 죽을 힘을 다해 싸웠으나 마침내 요동성이 무너지고, 이 전투에서 죽은 자가 만여 명이었다. 또한 체포된 병사가 만여 명, 남녀가 4만 명이고, 양곡이 50만 석이었다.
수양제가 백만대군을 이끌고 왔음에도 그렇게 견고하게 버티던 요동성이, 이토록 허망하게 열흘만에 무너져내린 것이다.[3]
이 직후 당군은 기세를 살려 백암성(白巖城)을 공격하였다. 이때 연개소문이 오골성의 군대를 내보내서 백암성을 포위한 당군을 치라는 명을 내렸으며 승리하여 당나라 장군 글필하력에게 부상을 입히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백암성 성주인 손대음(孫代音)이 당나라의 군세가 크고 아름다운 거대함을 알고는 두려워 하다가 결국 항복하면서 백암성은 함락당하였다.
동시에 당나라 수군을 이끄는 장량 역시, 요동반도 남단에 있는 비사성을 함락시켰다. 이 부대가 당나라 본진과 합류하는것도 두려운 일이지만, 더 큰 위협은 해로를 통해 군수물자 등을 보급하는데 있었다. 이로서 당나라 군대는 개모성에서 백암성에 이르는 넒은 지역을 장악, 확실한 교두보를 마련하면서도 보급을 완비하며 장기주둔이 가능해지게 되었다.
3.4 주필산 전투
이렇듯 전역의 초기, 당나라 군대는 고구려를 사정없이 몰아쳤으며 그중에서도 주필산 전투는 고구려-당의 최대 야전으로써 고구려의 가장 큰 피해가 났다.
당군의 주력 병종인 기병, 궁병 등의 이미지 |
안시성을 공격하기 전에 안시성이 잘 방어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당태종은 안시성 대신 두 성중에 어느 성을 먼저 공격할지 물었는데 이때 이적이 두 성 모두 당군에게 큰 위협이긴 하지만 안시성을 미리 쳐서 함락시키지 못할 경우에는 보급이 어려워지고 후에 배후 기습을 당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곧 여러 신하들이 안시성을 칠 것을 건의하니 당태종은 이에 따르기로 하였다.
당나라 군대가 요동에 침입하여 이미 여러 성을 함락시켰다는 급보를 전해 들은 연개소문은 곧 북부욕살(褥薩)이었던 고연수(高延壽)와 남부욕살 고혜진(高惠眞)으로 하여금 당군을 치도록 하였다. 명을 받은 고연수와 고혜진은 말갈기병까지 끌어와 15만이나 되는 대군을 이루었다.
이때 이들과 함께 전세를 살피던 백전노장 고정의는 당태종의 지략이 뛰어나니 경거망동하지 말 것을 권하였다.
"진왕(秦王 = 이세민)은 안으로 여러 영웅을 제거하고, 밖으로 오랑캐를 복속시켜 독립하여 황제가 되었으니, 이는 한 시대에 뛰어난 인재이다. 지금 나라 안의 무리를 거느리고 왔으니 대적할 수 없다. 나의 계책으로는 병력을 멈추고 싸우지 않고 세월을 허송하며 오래 버티어 견디며 기습 병력을 나누어 보내어 그 식량을 보급하는 길을 끊는 것만 같지 못하다. 양식이 이윽고 떨어지면 싸우려고 해도 싸울 수 없고, 돌아가려 해도 길이 없으니 곧 이길 수 있다." ─ 三國史記 卷第二十一 髙句麗本紀 第九 |
고정의가 주장한 지구전은 실제로 당태종이 가장 두려워하는 바이기도 했다. 당태종은 신하들에게 고구려군의 고연수가 취할 계책은 세가지인데 가장 상책으로 바로 고정의가 주장한 바와 똑같은 말을 하였다. 중책은 안시성의 병력과 함께 달아나는것이고 하책은 일단 싸우자는 식인데, 당태종은 고연수가 소위 그 하책을 선택할 것이라 예상했다.
과연 두 사람은 하라는 지구전은 안하고 이 충고를 묵살하고 곧바로 당군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여기서 고구려군의 운명은 정해졌다. 당서와 삼국사기에는 당태종이 고연수가 하책을 택할지 어떻게 알았는지는 나와있지 않다. 특히 상책은 고구려-수 전쟁 때 이미 고구려가 써먹어 엄청난 효과를 본 전략인데도 그렇다. 하지만 고연수는 15만 대군이 주는 힘에 취해버렸는지 그것을 무시해 버렸다.
서전에서 고구려의 말갈 기병이 당의 아사나사이(阿史那社尒)의 돌궐 기병 1천여 명을 이기자 고연수는 "상대하기 쉽구나."라는 개드립을 치면서 자신감을 얻어 계속 당군에 접근하였다. 마침내 고구려군은 안시성 동남쪽 8리 정도의 거리까지 다가오게 되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안시성 내의 고구려 군과 협력한 듯한 모습은 기록에 보이지 않는다.
유공권(柳公權)에 따르면, 당시 고구려군의 많은 숫자의 위용을 보고 당태종이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하였다고 한다. 당나라 군대의 규모를 20만+돌궐, 거란기병으로 여긴다면, 이 중 장량의 수군은 요동반도 방면에 있고, 개모성이나 요동성 등지에 일부 당군이 주둔하면서 방어에 주력했을 것을 생각한다면 그 전력은 대폭으로 줄어든다. 이런상황에서 15만에 육박하는 고구려군은 상당히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이에 강하왕 도종은 고구려의 대군이 이곳에 집중한 틈을 타, 평양을 기습적으로 타격한 제안을 제시하였다. 이때 도종이 요구한 병력은 5천. "그 근본을 뒤엎으면 수십만의 군대를 싸우지 않고도 항복시킬 수 있습니다."라는 것이 도종의 주장이었는데, 이런 말이 나올 정도면 고구려 군대의 숫자나 위용이 당나라 지휘관들에게도 압박을 주는 규모였을 것이다. 하지만 당태종은 이런 모험책을 듣지 않았다.
이때 당태종은 일부러 15만 군사의 위용에 겁을 먹은척하여 두 욕살에게 선뜻 사신을 보낸다. 당태종은 고연수에게 연락을 취해, 자신은 연개소문을 문죄하러 왔을뿐, 교전은 바라지 않고 다만 신하의 예만 취해준다면 철수하겠다는 의사 표시를 보였다. 뻔히 보이는 기만책이지만, 고연수는 이에 속아넘었던지, 혹은 은연중에 경계를 늦추고 자만했던지 진군을 멈추고 방비를 게을리 하는 대병크를 보였다.
한편 당태종은 이 기간동안 병력을 밀집시켜 포진을 완료하고 고구려군을 기다린다. 고구려군이 안시성과 연계할 것을 우려하여 고구려군을 당 태종 본대가 포진한 지역으로 끌어들인 후 장손무기로 하여금 고구려군 배후로 돌아 공격하게끔 한 것이었다.
다음 날, 고연수는 1만 5천여 병력을 이끌고 서쪽 고개에서 진을 치고 있는 이세적의 군대를 보고, 그 숫자가 적다고 여겨 공격을 가하였다. 고구려군이 당군에 집중하여 돌격한 사이 장손무기가 이끄는 부대가 고구려군을 기습적으로 강타하였고, 전면의 이세적은 1만 장창병을 전면에 배치함으로서 고구려 기병의 돌진을 저지했다. 고구려군은 앞으로 돌진하자니 이세적의 부대에 막히고, 뒤로는 장손무기의 병력에 막혀 크게 당황하였다.(퇴로는 이미 장손무기가 다리를 끊어 봉쇄된 상황.) 즉, 고구려군이 너무 성급한 나머지 유인 - 반전 - 포위 전술에 말려버린 것. 삼국사기에선 여기에 덧붙여 천둥과 번개가 치는데다, 전면에서 용문 출신의 용병 설인귀가 기이한 옷을 입고 크게 소리를 치며 돌진하며 고구려 군의 전열을 흩어지게 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결국, 고구려군은 큰 피해를 입어 2만(삼국사기) 명이 전사하였다.
고연수 등을 비롯한 고구려군 3만 7천여 명은 자그마한 구릉에 올라가 방어책을 강구하려 하였지만, 당군이 이를 포위하자 결국 항복하였다. 항복한 고구려 장교만 3천 5백여 명이었고, 말갈 병사 3천 3백여 명은 모두 땅에 파묻어버렸다.[4] 또 이 전투에서 당군이 거둔 말만 5만여 필이나 되었으며, 항복한 고연수는 홍려경(鴻臚卿)으로, 고혜진을 사농경(司農卿)으로 봉해졌다.[5]
3.5 우주방어 안시성 전투
고구려 기마무사의 이미지
주필산 전투에서 고구려 군과 싸워 승리한 당태종은 곧 계획대로 안시성으로 진격하였다. 당시에 당태종은 안시성이 다른 성들로부터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그 성주 또한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켰던 당시에 이에 호응하지 않았던 점을 미루어 보아 항복을 권유하면 순순히 응할 것으로 알고 있었다.
안시성주는 항복을 거절하고 오히려 굳세게 방어하였으며 당태종은 크게 진노하여 군사를 몰아 안시성을 공격하였으나 번번히 실패하였다. 안시성에서 예상치 못하게 고전을 하게 되자 당태종은 안시성 공략을 GG포기할 것도 생각하였으나 안시성을 포기한다면 곧 그들이 배후에서 공격을 감행하거나 보급로를 끊어 버릴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안시성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안시성은 낮에 철저히 방비를 하는 한편 밤에는 정예병들로 하여금 줄을 타고 성벽을 내려가게 하여 야습을 일삼았다. 화가 난 당태종은 "성을 함락시키면 성안의 모든 사내를 죽여버리겠다."라는 극딜불필요한 말을 하여 오히려 안시성의 저항의지만 돋구어 버렸다.(...) 이러한 일이 당군의 전황에 더욱 불리하게 작용했음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6]
이때 당태종과 함께 출전했던 이도종의 건의에 따라 안시성의 공격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토산을 쌓을 것을 명하여 수개월에 걸쳐 흙을 쌓아 토산을 만들었다. 한때 토산 위에서 나무와 돌을 날려 안시성의 성벽 일부를 허물었으나 폭우로 인하여 토산이 무너지는 사태가 일어나고 말았다. 이때 안시성의 성벽 위에 있던 고구려 병사들이 허물어진 토산으로 진격하여 이를 빼앗아 버렸다.
최후의 희망이었던 토산 마저 잃어버리자 당태종은 더이상 싸울 의지를 잃었고 결국 철군하였다. 이때 토산의 책임자였던 이도종이 토산을 허술히 관리하여 고구려군에게 빼앗겼다고 하여 그 책임을 묻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당태종은 이도종이 요동에서 싸울때 개모성과 요동성을 함락시킨 공로가 있으므로 그럴 수 없다며 이도종을 용서해 주었다.
당시 당군과 안시성 성주 간의 전투는 무척 치열하여 당태종이 이 전투에서 한쪽눈을 잃어 애꾸눈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한편 안시성주의 이름은 기록에 남아있지 않아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그의 이름이 남아있지 않음을 슬프게 여겼다고 전해진다. 다만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따르면 당시 안시성 성주의 이름은 양만춘이라 하고 몇몇 기록에 양만춘이라고 언급되긴 하나 1000여년 후 야사에서 그렇다고 언급하고 있기때문에 확실하지 않다.
3.6 당군의 철군
안시성에서 지나치게 시간을 끈 결과 당태종이 염려하던 대로 겨울이 닥쳐왔고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게 된 당군은 점차 싸울 힘을 잃어갔다. 여기에 설연타 역시 연개소문과 연계하여 반당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결국 당태종은 고구려에서 철군할 것을 결심하였다. 요하 하류 도강을 선택한 당군은 진흙길을 고생하며 건너 돌아가야 했고 이때 굶주림과 추위에 지친 당나라 병사들이 행군 중에 상당히 많이 죽거나 병들었다고 한다.
당태종은 일찍이 이런 참혹한 패배를 경험한 적이 없었기에 장안으로 돌아온 후에 "위징이 살아있었다면 반드시 나를 말렸을 터인데 그가 내 곁에 없다는 것이 너무나 슬프고 애석한 일이다."라며 한탄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때 고구려가 입은 피해도 상당히 컸지만 결국 당나라 군대는 안시성에서 발이 묶여 고전하다가 돌아갔으므로 결국은 패전하였다. 신당서에서는 야전에서 사상을 당한 병력[7]이 육군 5천, 수군 1천으로 되어 있으며, 구당서에서는 풍토병, 보급 문제 등으로 수만 군사를 잃은 것으로 기록했다.
한편 주필산 전투 후에 당나라에 투항한 고연수와 고혜진은 곧 당나라가 고구려을 멸망시킬 것으로 믿었으나 오히려 당군이 패퇴하고 달아나자 고국을 버리고 투항했던 일을 크게 후회하였다. 결국 고연수는 이 일로 상심하다가 홧병으로 죽었고 고혜진은 결국 살아서 당태종을 따라 당나라 장안에 도착하였다.
3.7 당시 당군의 규모
3.7.1 다수론(10만 이상)
구당서에 따르면 이세적의 요동도행군 6만에 장량의 평양도행군 4만 3천으로 10만으로 고구려를 공격하였다고 기록되어있지만 이는 당 태종이 직접 이끈 6군과 건안성을 공격한 장검의 이민족부대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으므로 당군의 규모가 10만이라고 주장하는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볼 수 있다. 안시성 전투 시 연인원 50만을 동원했다는 기록이나 정예 10만 이외에도 상당수의 병력있었을 것을 암시하는 기록들로 보아 10만으로만 침공했다 단정짓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아무래도 10만의 정예 병력 말고도, 보급이나 수송과 수송부대 호위나 보급로 방위 등 참여한 인원을 고려할 시에는 더 많은 수의 인원이 전쟁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다.[8] 길이가 40m가 넘는 요동성을 몇백겹으로 포위했다는 기록이나 주필산 전투에서 이적과 장손무기의 총관이 40명이 넘는다는 것 등 참고로 총관은 1만명의 군사를 지휘하는 장수다. 그외에도 10만명뿐이라면 이해가 가지 않을 고구려군이 요동에 투입한 30만 이상보다 많았으면 많았지 적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총관 40명이면 20만의 병력이 장손무기의 휘하에 있었다는 것이 성립되는 것을 고려하면 단 10만 명 만이 당 원정군이라고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더욱이 여수전쟁의 교훈의 사례를 비추어봐도 고구려를 공격하는데 100만대군에 준하는 규모를 동원할수 밖에 없다는건 이미 당시 여수전쟁에 참전한바 있는 당나라의 장수들이 몰랐을 가능성이 없다. 기본적으로 전쟁에서 원정군의 규모는 적에 비해서 전력적 우세를 장담해야 가능한 것으로 당의 기본규모가 고구려의 기본 총병력 규모의 최소 2배는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못해도 전투병력 규모만 50~60만이라는 것이 성립할수 있다. 수나라때의 동원된 약 114만명 규모에 절반은 동원되었을 가능성은 분명하게 크다. 더욱이 당나라는 고구려 원정을 위해서 주변 이민족들이나 국가들을 통제 복속시킨 것은 그만큼의 국경안정을 추구하여 병력을 최대한 집중하기 위한 목적이 강하다. 특히 토번이나 설연타에게 경고했을때의 100만대군의 이야기는 결코 허황된 규모를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면 최소 언급된 규모의 1/2은 되어야 규모를 뻥튀기해도 충분히 이해할수 있는 동원규모이기 때문이다. 수나라 역시 고구려 원정을 위해서 주변국을 복속하여 최대한 통제한 다음에야 그만한 대규모 병력을 동원했던 점을 상기해본다면 다르지 않다.
더욱이 고구려의 공격의 교훈을 당이 모를리도 없다. 고구려의 영토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보급로 유지를 위해서 경비병력들이 대량으로 소요될수 밖에 없다는건 당 스스로가 더 잘알고 있는 일이다. 더욱이 당의 목표는 고구려 멸망이지 고구려의 굴복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병력동원의 목적에서부터 차이가 클수 밖에 없다. 더욱이 공세를 취하는 입장인 공격자는 원정때 적보다 최소 양적인 전력이 2배이상이 요구되는 점을 감안하고 동시에 수성전에서만 10배이상이 요구되는 점도 감안한다면 병력이 10만 규모 혹은 20만 규모라는건 부정적일수 밖에 없다. 더욱이 고구려는 고구려 영역내에서만 야전에서 한번에 동원가능 병력만 20만 규모에 이른다. 실제로 주필산 전투때만해도 15만명이 야전에서 당군과 싸우다가 패해 대치상태에 이었던 점이나 그외의 수차례의 수만명 규모의 병력차출은 야전에서 고구려도 십수만 규모의 병력동원이 가능함을 의미한다. 이는 다시말해서 당군의 규모가 20만 미만이면 고구려가 수세적인 방어전략에만 있었을 가능성이 적다는 것이다. 그보다 더 큰 규모의 30만 별동대를 상대로도 살수대첩때 야전전투를 치룬 고구려인데 그보다 병력이 적은 병력이 원정군 총규모로 오는데 수세적으로만 일관했을 가능성은 적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최소 당군 병력은 평시 고구려의 병력인 30만 규모에 동급 이상의 지상군이 움직였다는 증거가 된다. 적보다 우세하거나 대등하면 공세를 취하고 적보다 열세일 경우에는 방어를 취하는건 당시나 지금이나 기본적인 군사학이기 때문이다.
3.7.2 소수론(10만)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반론이 만만치 않다. 일단 행군총관이 이끄는 1군의 병력이 당의 시대에 따라 대단히 유동적이라 1만이라고 한정하기 힘들다. 이 설을 주장한 김용만 선생은 고대 춘추전국시대와 제(제나라)의 예에서 군의 수를 1만으로 추정하지만 바로 직전인 수나라의 군제만 봐도 1개 행군이 6천여였던 적도 있고, 2만에 달하던 때도 있다. 거기다 <이위공전서>에서 당의 군제는 1개 군이 2만인데 <당육전>에서는 5천 넘으면 총관 1명이 배치, 즉 5천 선부터 1개 군으로 셀 수 있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1군을 5천으로 잡으면 당측이 고구려군을 부담스럽게 여긴 것이 지극히 타당하게 보여진다.
요동성 포위기록은 고대 기록 특유의 과장으로 볼 여지가 충분하고, 당군이 요동성을 공략하기 전에 신성과 국내성의 지원군과 전투를 치룰 때 도종은 4천의 기병을 이끌었지만 이 안에 행군총관 장문예가 있었다. (자총관일 수도 있다. 당은 총관을 복층제로 임명했고 상급 총관은 총관이라고 적고 말지만, 하급총관은 '자총관'이라고 할 때도 있고 그냥 총관이라고 적을 때도 있다.)
안시성 전투의 토산을 쌓은 연인원이 50만이라 하지만 고구려군이 마냥 수성적으로만 대처하지도 않았고, 위의 요동성 전초전이나 주필산 전투, 그리고 오골성의 글필하력 요격전등 다수의 야전도 치뤘다. 애초에 10만 정예병이라고 몇개 성에서 공격적으로 대처할 병력은 절대 아니고, 각 성에서 보급선을 끊고 적군을 소모시킨 후 주력병력을 진출시키는 것이 고구려의 전략이라 그다지 기존 전략에 비해 수세적인 전략을 펼치지도 않았다.[9] 설령 수세적이었더라도 신성이 고작 수십기의 기병에게 봉쇄되는 등, 숫적 열세보다는 당군의 기동전략에 각 성이 고립된 면이 더욱 크다. 당태종이 요택으로 철수한 것은 보급 부족도 있었지만 설연타가 당에 대한 공격 의사를 드러냈기 때문에[10] 급박한 철수 작전이 필요하던 시점이었던 점이 더욱 크다. 50만설은 지나치게 많게 잡은 것으로 추측한다. 그냥 당 태종 직속병력이 10만 명이거나 아니면 원수정 초중기의 로마 제국이 군단병과 보조병을 나눈 것처럼 로마로 한다면 레기온에 해당하는 병력만을 기술했다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을 듯.
4 2차 전쟁
당나라는 1차 전쟁에서 패배하였으나 수나라와는 달리 여러 성을 함락시키기도 하고 야전군에도 큰 타격을 입히는 등 상당한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당태종은 이러한 성과를 계속 확대시키고자 수만[11]의 병력을 지속적으로 원정군으로 편성,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는다. 이러한 소모전의 목적은 요동 일대의 고구려 세력을 계속 약화시키고 대응하여 출격하는 야전군 또한 격파하여 방위력을 소진시키는 데 있다 할 수 있다.
당태종은 이후 재차 대규모 원정을 계획하나 실행에 옮기기 전에 사망한다. 아무래도 아들의 군사적 역량을 신뢰할 수 없었는지 유언으로 고구려를 치지 말라[12]는 말을 남겼다.
그 뒤를 이은 당고종 치세에도 당은 주필산 전투에서 활약해던 맹장 설인귀에게 군사를 내주어서 655년과 659년에 고구려에 원정군을 파견하나 별 성과를 보이진 못했고, 고구려를 치고자 강한 의지를 보이던 당 태종이 사망한 탓인지 이러한 요동에서의 소모전도 횟수가 감소하게 된다.[13]
655년에 고구려는 백제, 말갈이 연합해 신라를 공격하여 33개 성을 빼앗아 신라의 수도인 금성까지 위협하자 김춘추가 구원병을 요청하였고 고구려의 뒤통수를 치기위해 국경지역인 요하에 도착해 선제공격을 했지만 패퇴하였으며 또 다시 659년에 공격했지만 성과없이 퇴각한다.
그런데 660년,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신라와 힘을 합쳐 백제를 멸망시키는데 성공했다. 이로써 고구려는 동맹국인 백제가 멸망해 이제는 신라, 당나라, 양쪽에서 압박을 받으며 고립상태가 되었다. 당 태종이 절대로 고구려를 공격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지만, 애초에 고종은 자신의 아버지인 당 태종이 고구려군에 패퇴되고 그 전쟁에서 병을 얻어 사망했기 때문에 고구려에 대해 강한 증오심을 가지는 것도 당연했다.[14] 정벌할 절호의 기회라 판단한 고종은 661년 정월에 4만 4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요하지역에 도착해 공격하려 한다. 신라 역시 당나라와 연합, 나당연합군을 결성하여 각각 남과 북으로 공격해 왔다. 이때 백제부흥군이 나,당 연합군 진영에 선제공격을 가하여 혼란에 빠지자 공격 시기를 늦추게 된다.
4.1 고구려 공격
백제 부흥운동이 기세를 더하던 시기이긴 하지만, 660년 겨울 당고종은 고구려 원정을 발표하고 병모를 모집하기 시작한다. 최종적으로 동원한 규모는 대략 35개 군. 위에서도 언급했듯 1개 군이 규모가 명확하지 않으므로 정확한 규모는 미상. 이를 6개의 부대로 편성하였다. 각각의 진격로는 미상이나 대체적으로 소사업과 글필하력이 이끄는 부대는 육로, 소정방 부대는 해로로 전진한 것이 확실해 보이며, 그외에 임야상, 방효태가 지휘하는 부대도 해로 쪽으로 움직였을 가능성에 비중을 두고 있다.
아울러 당에 숙위하던 김인문을 귀국시켜 막 즉위한 문무왕에게 고구려 공격 사실을 알리고 출병을 요구하였다. 이에 신라측은 문무왕이 직접 남천주로 나아가 옹산성과 우술성 일대의 백제 부흥군을 진압하고 웅진성에 주둔하던 당측 장수인 유인원과 연결선을 다시 이은 후 주력군을 차출해 북벌군을 편성하면서 고구려 일대의 전황을 살피기 시작한다. 북벌군의 지휘는 신라 최고의 권력자, 김유신이 직접 맡기로 하였다.
그해 8월 고종은 군을 내보낸다.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의 기록이 약간씩 다른데. 세가지 기록을 정리해 보면 대략 글필하력 : 요동도행군대총관, 소정방 : 평양도행군도총관, 임아상 : 패강도행군대총관, 소사업 : 부여도행군대총관, 정명진 : 누방도행군총관, 방효태 : 옥저도행군총관 정도가 아닐가 여겨진다.
병력 규모는 확인할 수 없다. 다만 1개 군 = 최소 5천이라는 당육전의 기록을 생각하면 35개 군의 최소 병력은 약 17만 5천, 특수 임무를 맡은 군의 경우 규모가 확대된다는 점을 생각하면(당육전에는 최대 1만 이상의 부대로 증편될때까지 고려하여 장교 배치를 달리하도록 명시되어 있다.) 최소 20만 내외에 종속된 기미주의 이민족 병력이 +a 일 것으로 보인다. 정명진과 방효태는 대총관이 아니라 총관에 불과한데도 대총관과 같이 기술되었는데, 이는 이들 부대가 여타 군에 비해 증강된 특수부대였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다.
'에게, 고작(...) 20만?' 이라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이것은 최소 추정치가 20만 플러스 알파라는 것이며, 중국이 아무리 인구가 썩어넘친다 해도 수십만씩 원정군을 보내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당나라 290여 년의 역사를 통틀어봐도 원정군이 20만이 넘어가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며, 이정도를 보내는 것도 국력을 상당히 집중시켜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더욱이 주공격로가 해상로를 이용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무작정 많이 보냈다가는 전력이 제대로 전개되어보기도 전개 몰살될수도 있다. 상륙작전은 고금을 통틀어서 공격자 입장에선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더욱이 '최대 40만 규모'까지 생각해볼수 있는 이 원정군 규모는 더욱이 고구려의 요동방어선을 해상에서부터 우회하며 요동의 주력군을 차단하고 평양으로 직공하는 입장을 감안하면 엄청난 규모인 셈이다. 당장의 여수전쟁때 평양성에서 내호아의 수군만 10만 우문술의 육군 30만은 고구려에게 크나큰 위협이었다. 그때와 비교를 해본다면 똑같은 위협적 규모가 동원된 것임은 물론 20만 규모라 할지라도 평양직공으로 20만 규모가 상륙해버렸다는 것은 당시에도 대규모의 병력이 일시에 기습에 성공한 셈이라는걸 감안한다면 고구려에게도 엄청난 규모의 병력의 침공인 셈이다.[15] 하도 백만 대군만 보다 보니까 감각이 마비될수도
4.2 평양성 포위
가장 먼저 고구려 영내에 진입한 것은 소정방이 이끄는 평양도행군이였다. 661년 8월, 소정방이 이끄는 평양도행군은 패수에 상륙하였고 격렬하게 항전하는 고구려군을 격파한 후 평양 근교 마읍산에 진을 치고 평양성을 포위하여 공성을 시작한다.
그러나 평양성은 함락이 쉽지 않았다. 평양성은 외곽, 외성, 내성 등 3중 구조로 되어 있고 오랜 공성전을 경험한 유서 깊은 성이며, 강한 방어력을 자랑하는 요새였기에 소정방군 단독으로 이를 공략하기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고, 이로인해 장기전으로 이어진다.
거기다 서북지역에서 철륵(위구르)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남하하던 글필하력군, 소사업군이 귀환하자 당의 작전은 매우 꼬여버렸다. 거기다 고구려군이 후방을 차단시켜 보급로가 끊기게된다. 완전히 고립되어 식량부족을 호소하기 시작했고, 당고종이 급히 보낸 사신으로부터 10월 말에 이 소식을 전해들은 신라군은 쌀 4천석, 조 2만 2천석을 준비, 북벌군을 북상시키기 시작한다.
한편 소정방군은 식량부족을 호소하면서도 겨울이 다가오자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총공세를 시도하나 고구려군의 반격에 의해 오히려 궤멸당할 위기에 몰리게 된다. 결국엔 퇴각로까지 차단될 위기까지 온다. 때마침 도착한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의 군량미로 밥을 지어먹고 황급히 퇴각한다.
고려(고구려)인이 말하기를 '12월에 고려국에서는 추위가 매우 심해 패수가 얼어붙었다. 그러므로 당군이 북과 징을 요란하게 치며 운거와 충팽을 동원해 공격해왔다. 고려의 사졸들이 용감하고 씩씩하였으므로 다시 당의 진지 2개를 빼앗았다. 단지 2개의 요새만이 남았으므로 다시 밤에 빼앗을 계책을 마련하였다. 당의 군사들이 무릎을 끌어안고 곡을 하였다. 날카로움이 무디어지고 힘이 다하여 빼앗을 수가 없었으니, 후회해도 어찌할 수 없는 부끄러움이라는 것이 이것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라 하였다. - 일본서기 |
주어가 자꾸 바뀌고 생략된 부분이 있어 뭔가 앞뒤가 안맞아 보이지만, 이를 해석하자면 '겨울에 패수(대동강)가 얼어붙자 당군이 공성무기를 동원해 공격을 해왔지만, 이를 물리치고 오히려 당군의 진지를 2개 빼앗았다. 남은 요새 2개를 뺏기 위해 밤에 공격하였고, 이 공격에 당군의 사기가 매우 저하되었으나, 고구려군의 힘이 부족해 요새를 점령하는데는 결국 실패했다. 빼앗지 못한 것이 부끄럽고 안타깝다.' 정도가 될 것이다.
이후 소정방은 신라군이 오기만을 기다리면서 방어에 전념을 다했고, 2월 6일 신라군과 합류하면서 날라온 식량과 의료품을 받은 후 해얀으로 급하게 철수, 당으로 귀국하였다.
4.3 사수 전투
글필하력이 지휘하는 요동도행군은 압록강에 육박해 왔다. 이에 연개소문은 아들 연남생에게 군대를 주어 이들을 맞서게 하였고 글필하력과 압록강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나 겨울이 되어 압록강이 얼어붙자 이를 도하, 고구려군 3만여를 사살 또는 포로로 잡는 전과를 올렸다.
그런데 중국 서북지역에서 철륵(위구르)이 반란을 일으키고, 설인귀와 정명진의 지휘 아래 이를 진압하던 당군은 설인귀가 무리한 추격전을 벌이다 심각한 피해[16]를 입기도 하는 등 상황이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자 결국 육상으로 전진하던 당군을 철수시키는 결정을 내리고 만다. 구당서 글필하력전에 따르면 글필하력의 철수는 확실히 이 때문이며,[17] 소사업의 철수도 이것과 관련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구려의 위기는 계속되었다. 소정방은 비록 육상으로의 엄호는 끊겼지만 아직 해상에서의 지원군을 기대할 수 있었으며, 여차하면 신라군도 지원올 것이라 믿고 계속 평양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소정방과 합류하기 위해 압록강 인근에 상륙, 남하한 것으로 추정되는 방효태가 이끌던 옥저도행군이 사수까지 전진해 왔다가 연개소문이 직접 지휘하는 고구려군과 교전, 대패하고 그 자신도 전사해 버린다.
이때 사수전투의 전개과정에 대해 삼국사절요를 보면 방효태 부대는 초전에 패해 포위망에 갇혀 버리고(탈출을 권하는 부하에게 "내가 데리고 온 향리의 자제 5천여 명이 이제 모두 죽었는데 어찌 내 한 몸만 살아남기를 구하겠는가?" 하며 물리치는 모습이 나온다. 이때 방효태는 영남도 백주자사였으며, 영남도에는 6개 부가 있었는데 이지역 부병들을 동원해 종군시켰다가 초전에 전멸한 듯 하다.) 이후 필사적으로 돌격한 당군을 섬멸하는 두단계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때 방효태의 13명의 아들들도 모두 전사하였다.조운에 이어 한가정을 완벽히 파괴한 연개소문의 위엄
이 전투의 결과 소정방군은 평양성 인근에서 고립무원의 처지에 처하게 되었으며, 이후 겨울에 이루어진 대공세로도 평양성을 함락시키지 못하면서 위기에 처하게 된다.
4.4 신라군의 진격과 후퇴
신라는 당고종의 요구에 따라 고구려 정벌을 위한 북벌군을 준비하였고, 당시 신라 최고의 권력자이자 최고의 지휘관인 김유신이 직접 지휘하기로 결정하는 등 나름 성의를 보였으나, 정작 작전이 벌어졌을 때는 상황을 살피며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사실 신라 입장에선 한참 기세등등한 백제 부흥군과 치열한 혈투를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함부로 군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러나 10월 말엽, 소정방군이 평양 인근에서 고립되자 당고종은 신라에 사신을 보내 소정방군의 구원을 독촉하였고, 특히 식량을 지원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신라군은 결국 평양으로의 북진을 시작한다.
때는 한겨울인 662년 1월, 신라군은 임진강을 넘어 북진하기 시작한다. 출발할 때는 수레 2천여 대를 동원하였지만 패수도 얼어붙는 혹독한 추위 속에 결국 수레를 버리고 소와 말에 모든 식량을 실어야 했다. 신라군의 북진을 막기 위한 고구려군의 저지를 뚫고 2월 초, 평양 근처까지 도달한 신라군은 당군에 사람을 보내 신라군의 도착을 알렸으며, 이후 당군과 신라군의 협공으로 마지막 저지선을 뚫는데 성공, 소정방군에 식량와 각종 의료물품을 전달하는 데 성공한다.
이후 소정방군은 철수했고, 이 소식을 들은 신라군도 귀환하기 시작한다. 고구려군은 신라군 섬멸을 위해 추격해 왔지만 오히려 신라군의 역습에 의해 1만에 달하는 전사자를 내고[18] 이후 신라군은 본국으로 귀환한다.
4.5 결과
이 전쟁에서 고구려와 당나라 양측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전쟁 지역이 고구려의 주요 곡창지대와 철 생산지인만큼, 식량과 무기를 생산해야 하는 곳이 전쟁터가 되면서 심각한 국력 상실이 뒤따르게 됐을 것이다.
당 또한 마찬가지로 상당한 수준의 전력 손실이 있었고 원정과 연관된 반란까지 진압하느라 국력 소모가 상당했다. 또한 이러한 원정 실패의 여파로 당 건국 이후 오랫동안 정국을 지배하던 관롱집단은 정치적 지배권을 상당수 상실했고 중소지주층과 손을 잡은 측천무후와의 정치투쟁에서 패배하며 실권을 상실하게 된다.[19] 이러한 당 내의 정치투쟁이 진행되면서 아직 방어할 힘이 넉넉히 남아있는 것으로 확인된 고구려를 재침공할 엄두가 안나게 된 당은 한동안 고구려에 대한 소모전까지도 자제하는 모습을 보인다.
5 3차 전쟁
2차 전쟁 이후에 대막리지로써 고구려의 실권자 행세를 하던 연개소문이 사망하고 그를 뒤를 이어 장남인 연남생이 태막리지의 지위를 이어 받았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당나라 군대를 상대로 수차례 승리하긴 하였으나. 독재정치로 권력을 휘둘렀으며 이어 연개소문의 뒤를 이은 연남생이 아버지만큼 유능한 면모를 보이지 못했다. 게다가 이런 와중에 연남생의 두 동생이 형의 지위를 탐하여 서로 간에 권력 투쟁을 벌이다가 급기야는 무력 행사로 사태가 확대되면서 조정의 상황과 민심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것.
연개소문의 장남인 태막리지 연남생은 자신의 지위를 탐내던 두 아우 연남건, 연남산을 상대로 국내성을 근거지로 삼아 대항하다가 힘이 부치자 급기야 당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20] 당고종은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적과 글필하력, 설인귀 등에게 군사를 내주어 고구려를 침략해왔다.[21] 이때 남생의 배신으로 고구려 내부의 정보와 기밀이 당으로 세어 나가면서 전황은 당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그리고 이후, 666년. 이세적을 총지휘관으로 한 당의 주력부대가 고구려로 진격한다. 고구려는 이듬해인 667년 가을까지 필사적으로 항전했지만 10월 신성이 함락되고 부근의 16성은 당군에 각개격파당한다. 연남건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금산에서 일시적으로 고간의 군단을 격퇴했으나 당군을 추격하는 와중 설인귀의 기습 공격으로 5만의 병사가 전사했고 남소 목저 창암의 3개 성이 당군에 항복했고 당군은 연남생의 병력과 합류한다.
요동 방어선이 붕괴된 상황에서 연남건은 압록강 방어선에서 당군을 저지했고 안시성군 3만은 학처준의 군단을 기습했으나 모두가 놀라는 와중에서도 학처준은 호상에 걸터앉아 밥을 먹다가 정예병력을 뽑아 고구려군을 요격해서 격퇴했다.
668년 2월 이세적과 설인귀가 부여성을 함락시켰고 부여주가 모두 당에 항복했다. 연남건은 부여성 탈환을 위해 5만 병력을 보내 이세적과 설하수에서 교전했으나 3만 이상의 병력이 전사하는 대패를 당했다. 그리고, 압록강 방어선마저 돌파한 당군은 마침내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을 포위한다.
같은 해 7월에는 신라의 20만 대군도 사천 전투 등에서 고구려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여 모두 고구려군에 대승을 거두고 고구려 남부 전선을 돌파해 평양 근교에 도달한다. 신라군은 당군과 합세하여 평양성을 포위했다.
5.1 평양성 함락
가을 9월에 이적이 평양을 무너뜨렸다. 글필하력이 먼저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 아래 이르고, 이적의 군대가 그 뒤를 이어서 평양을 포위한 것이 한 달 남짓이었다. 보장왕은 연남산을 보내어 수령 98인을 거느리고 백기를 들고 이적에게 나아가 항복하니, 이적이 예로써 맞이하였다.
9월 21일에 대군과 더불어 합쳐서 평양을 에워쌌다. 본득은 사천 싸움에서 공이 제일이었고, 김상경은 사천 싸움에서 죽었는데 공이 제일이었다. 구율은 사천의 싸움에서 다리 아래로 내려가 물을 건너 나아가서 적과 더불어 싸워 크게 이겼지만, 군령을 받지 않고 스스로 위험한 곳에 들어갔기에 비록 공이 제일이었으나 포상되지 않았다.[22]
구기는 평양 남쪽 다리 싸움에서 공이 제일이었다. 선극은 평양성 대문 싸움에서 공이 제일이었고, 북거는 평양성 북문 싸움에서 공이 제일이었다. 박경한은 평양성 안에서 술탈을 죽여 공이 제일이었고, 김둔산은 평양 군영 싸움에서 공이 제일이었고, 세활은 평양 소성 싸움에서 공이 제일이었다.
연남건은 여전히 문을 닫고 항거하여 지키면서 자주 군사를 보내어 나와 싸웠으나 모두 패하였다. 남건은 군대의 일을 승려 신성에게 맡겼는데, 신성은 소장 오사·요묘 등과 함께 은밀히 이적에게 사람을 보내서 내응하기를 청하였다. 5일 뒤, 신성이 성문을 여니 이적이 군사를 풀어서 성에 올라 북치고 소리지르고 성을 불태웠다. 천(연)남건은 자해하였으나 죽지 않았으니, 왕과 더불어 남건 등을 잡았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신라본기 부분 요약 정리
한달 남짓 포위가 이어지자 보장왕은 연남산을 보내 당군에 항복했지만, 연남건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농성을 이어갔다. 결국 이적과 내통한 연남건의 심복 신성이 성문을 열었고, 당군은 평양성을 완전히 함락시켰다. 이적은 10월에 보장왕과 연남건·연남산 등 20여만 명을 이끌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5.2 결과
이 전쟁에서 당나라는 신라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오랜 세월 동안 수당제국의 숙적으로 지내던 고구려를 멸망시키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애초 조약과는 달리 신라에게 주기로 약속하였던 백제의 영토는 물론 한반도 전체를 집어삼키려 하였고 결국 나당전쟁이 일어났으나 7년간의 전쟁 끝에 패퇴하여 한반도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그리고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 대조영이 고구려의 고토에서 군사를 일으켜 다시 발해를 세우며 발해가 곧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밝혔다. 발해의 건국으로 실상 당나라가 고구려 원정으로 얻은 영토는 거의 모두 잃은 개고생한 셈(...)[23] 애초에 천하통일을 목적으로 한 명분론적인 성격으로 일어난 전쟁인 만큼 전쟁의 당위성도 상당히 약했고[24] 돌궐 토벌전쟁처럼 경제적 이권을 획득할 전쟁도 아니라서 투입대비 산출이 너무 안좋은 전쟁이었다. 결국 당나라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고구려에 국력을 쏟아부은 결과 - 그것도 신라의 도움이 없었으면 멸망시키지도 못했다 - 토번, 돌궐이 다시 발호하는 결과만 낳는 등 당나라 입장에서도 명백히 실패한 전쟁이었다.
다만 당나라 입장에서 굳이 의의를 찾자면, 궁극적으로 이곳의 영토는 얻지 못했을지언정 중국 동북지방의 심각한 안보적 위협은 사라졌다는 데에 당나라의 고구려 정벌은 의의가 있을 것이다. 고구려는 당나라 주변 적대국들 중에서 영토는 작아도[25]통치체계가 상당히 문명화된, 문화적 역량을 상당히 갖춘 나라였다. 고구려를 사전에 정복하지 않고 영류왕의 의도대로 고구려와 사대관계[26]를 맺고 조선-명 수준의 사대관계로 화친을 하게 되는 것은 당나라 입장에서는 굉장히 위험하고 화근의 불씨를 키우는 일이다. 고구려가 남쪽의 신라와 백제를 온전히 정복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돌궐과 중화제국들과 접경을 맞닿은 요동지방에 최정예 전력을 항상 주둔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고구려 유적들을 보면 요동과 평양 사이에 이어지는 루트에 종심방어체계를 구축, 전통적으로 고구려의 안보를 위협하던 중국 제국들이 침공하는 길목에 대부분의 방어 전력을 쏟아부은 흔적이 발견된다. 신라가 진흥왕 시기 함경도까지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당시 고구려 내정이 엉망이기도 했지만, 그시기 고구려는 돌궐과의 분쟁으로 인해 요동지역에 온갖 군사력을 집중시킨 시기였다.[27] 그런데 당나라가 영류왕의 요청대로 화친하게 되고 어느정도 당나라와 조공책봉 관계가 안정되게 되면, 이제 고구려는 온전히 한반도 지역에 정예 군사력을 투입시킬 수 있었을 것이며, 수도평양과 가까운 후방의 위협을 제거하고 후대에 다시 중국의 안보에 심각한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된다.[28] 후대의 발해나 조선, 고려와는 달리 고구려는 건국초기부터 끊임없이 중원 왕조의 군현들을 침략하면서 성장한 나라다. 애초에 호전적인 나라이기 때문에 기회만 난다면 얼마든지 조공책봉 체계를 깨고 중국 변경을 괴롭힐 것이 너무 자명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후 중국 한족의 통일제국들(송,명)을 위협하고, 심지어 멸망시켰던 국가들(요[29] ,금,청)은 대부분 고구려가 있던 동북지방에서 발호했다.[30] 물론 당나라의 고구려 침공 명분은 17세기 초반 명나라의 후금 원정처럼 단순한 안보적 위협 제거가 아닌 '점령통치'가 목표[31]였지만, 고구려 멸망 이후 요나라가 발흥하기까지 수백년간 중국 통일왕조의 국가적 안보를 위협할 국가는 이후 수백년간 나타나지 않았다. 중국인들이 유독 동북지방을 자신들의 안보에 중요하게 생각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이곳은 산지가 많아 방어가 쉬우며, 중국입장에서 정복을 위해선 엄청나게 긴 보급선을 유지시켜야 하는데 그러려면 최소 수십만에서 백만 이상의 단위의 보급병력들과 엄창난 물자가 필요했다. 그렇다고 이곳의 정복을 포기하자니 그것도 문제다. 이곳에 터를 잡은 국가들은 얼마든지 십만 이상 단위의 정예병들을 충분히 원정에 동원할 국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그럼 당장 외교적으로 냉각기에 들어가거나 중국이 조금이라도 삐끗한 모습을 보이면, 이 병력들이 그대로 하북 지방으로 밀고 들어올 가능성이 있다.[32] 따라서 고구려가 후방에 신라를 두고 국력을 집중시킬수 없을 때 사전에 밟아놓을 필요가 있었다. 물론 당시에는 이것까지 계산에 놓지는 않았지만[33], 후대의 역사적 사실들로 미루어 보았을 때 당나라의 고구려 정벌은 최소한 당나라가 송나라나 명나라처럼 이민족(금[34],청)에 의해 멸망당하지는 않는 토대를 깔아놓았다고 볼 수 있다.
6 고구려가 전쟁에서 패배한 이유
크게는 3차례와 소모전까지합치면 수십차례에 이르는 여당전쟁와 전투의 결과는 결국 당나라의 승리로 끝났다. 약 천년 공식적인 국가기간은 700년 수준의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고구려가 당에게 패배한 이유들은 매우 복합적인 것이라고 할수 있다. 일단 가장 큰 이유는 국가의 체급 문제.
6.1 정치적 이유
상대적으로 내부적인 체제 변화가 느린 노쇠한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을 고구려의 패인으로 꼽을 수 있다. 당나라는 과거제도 등으로 체계적이고 선진적인 관료체계를 이미 수나라 때부터 정비하는 등의 발전이 있었다. 그러나 고구려는 평원왕-영양왕 때 겨우 왕권을 다시 중흥하게 기틀을 다진 것 밖엔 없었다.
관료 집단의 문제나 내란 등이 있었던 것은 당나라도 고구려와 똑같았으나 그 전에 고구려와 당나라 사이의 국력 차이가 너무 난다. 당나라의 경우 본토를 위협받지 않는 초강대국이기 때문에 외세의 압력을 덜 받을 수 있었지만, 고구려는 당나라라는 압도적인 초강대국이 그것을 수습할 틈을 주지 않았다.
또한 당나라는 과거 여수전쟁의 국제외교의 실패의 교훈을 바탕으로 주변국을 최대한 통제하려고 애를 썼다. 1차 여당전쟁 전에 주변국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노력을 했다. 대표적으로 분열된 돌궐을 정복하고 오늘날 티베트에 해당하는 토번 등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안정화를 추구하며 그 노력을 더욱 강화했다. 이러한 노력 결과 2차 여당전쟁 시점에서는 거란의 상당수가 고구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당으로 이탈하였고 역으로 동아시아에서 고구려가 고립되는 형국이 되면서 당나라군은 처음으로 겨울에도 고구려 내지 땅에서 전선을 형성하여 장기 주둔을 하며 전쟁을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신라를 통하여 고구려의 남부 전선을 괴롭히는 성과를 올린다. 이에 맞선 고구려는 영류왕 때부터 연개소문 집권 때까지 제대로 국제적인 연계를 하는데 있어 유기성이 다소 떨어졌고 결국 전선을 안정화시키는데 실패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고구려와 당의 국력 차이를 고려해야 한다. 백제가 멸망할 당시 고구려는 육로에서 당나라와 교전 내지는 전쟁 준비 중이었다. 고구려가 강대국이기는 하지만 남쪽과 북쪽 모두에서 수십만 규모의 양면전선을 수행할 정도로까지 간주되지는 않는다. 상대방을 두들기면서도 제3국에 강력한 유인과 압박을 제시하기에는 당나라가 더 유리할 수 밖에 없다. 거기다가 기록 자체도 당나라 입장에서 쓰인 것들이 대부분이라 고구려가 자체적으로 외교를 한 흔적에 대해서는 많이 부실하다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
그리고 당나라가 주변국 통제에 성공했다는 것은 동쪽 한정으로, 당나라가 고구려와 치고받는 데 온 국력을 쏟는 바람에 서쪽에서 토번이 당나라를 위협할 정도로 성장하는 것을 막지 못했고, 결국 고구려가 멸망한 지 겨우 1년만에 토번과의 외교 실패로 완전히 적대관계로 돌아섰다. 그리고 이쪽은 고구려와 달리 끝내 성장을 막지 못해 약 100년 뒤에는 수도까지 털리는 굴욕을 맛보게 된다. 결국 길게 보자면 당나라 역시 고구려와 같은 딜레마에 처하게 된 셈이다.
더욱이 고구려는 당나라에게 능동적인 외교전략도 보여주지 못하는 문제점도 보였다. 연개소문 사후로 추정되는 시점에서 고구려는 당에게 사신을 보내어 전략노선의 변화를 보이려고 했으나 사실 그 문제에서 능동적이지 못했다. 당나라가 아니더라도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를 상대로라도 강화체제를 마련한다던지[35]
어쨌든 여기서 말하는 것은 당시 신라는 오랜 원수지간인 백제를 멸망시키는것이 고구려보다 먼저였던 건 확실하고 고구려도 물론 먹으면 좋긴 한데 워낙 싸움도 잘하는 나라고 신라의만의 국력만으로는 못 먹을거 같으니 뭐 먹으면 좋고 못 먹으면 어쩔 수 없고(아님 기다렸다 나중에 약해지면 먹어야지)라는 식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생각치 못했던 반전 시나리오로 흘러가 연개소문 사후 갑자기 고구려가 스스로 내분이 겹치고 이 와중에 당나라가 침공하면서 어찌어찌하여 신라-당 동맹 관계가 되고 결국 평양성이 함락당해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신라 입장에서는 어? 고구려까지 멸망시킬 줄은 몰랐는데 의외의 수확인데? 하는 즉, 이길거라 생각않고 상대를 에라 모르겠다!라고 하며 한대 탁 쳤는데 억! 하고 급소에 맞아 뻗어버린 격투기 상황처럼 얻어걸린 정도라고 할 수 있다.]하는 외교적 노력을 했어야하지만 기록부실도 있지만 우선적으로는 그런 노력을 전혀하지 못했다.
자신의 정치전략의 실패를 연개소문 사후에 이어지는 권력세습의 독재체제에서는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불안정한 권력체제로 뭔가 해보려고했지만 연남건의 쿠데타로 이후로 이렇다할 이야기가 없는걸 감안하면 실패한 외교전략만 붙잡고 외교도 매우 고정관념에 틀에 박혀있었다는 이야기도 해당한다.
다만 백제를 택하고 신라를 압박한 자체를 외교적 전략 부재의 산물이라 보기는 힘들다. 고구려가 남방에 우군이 없던 시절, 돌궐과 싸우는 도중에 한강 유역을 상실했고 수나라와 싸우는 도중에 신라에게 5백리의 땅을 빼앗겼으며 백제와도 교전이 있었다. 또한 연개소문이 동맹을 맺기 이전까지 백제 신라 할 것 없이 당나라에 고구려 견제를 요구할만큼 양면전선의 위험은 존재했다.[36][37]
또한 당나라를 상대함에 앞서 단합을 해도 막아낼까 말까 하는 상황에 연개소문의 사망 직후 그의 아들들은 서로 내전에 빠졌고, 대막리지라는 고위직 중의 고위직 연남생이 스스로 당나라에 도움을 청하고 연정토는 신라에 투항하는 막장 상황이 연출되었다. 내부에서 이렇게 분열해대면 고구려가 아니라 고구려 할애비라도 이길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고구려 패망의 일차적인 책임은 무능한 연개소문의 세 아들들에 있겠지만, 소수의 연씨 일족들에게 각각 막대한 권력을 나눠주고, 그들을 견제할 대신들도 진작에 몰살시킨 상황에서 게다가 세 아들의 후계구도마저 명확하게 정해놓지 않은 채 무책임하게 저승으로 가버린 연개소문 본인의 실책도 매우 크다. 많은 사람들이 1, 2차 여당전쟁의 영웅적인 항전에만 초점을 맞추느라 간과하기 쉬운데 사실 고구려의 최후는 부족한 국력으로 인한 중과부적의 패배가 아니라 자멸에 가까웠던 것이다.
6.2 군사적 이유
고구려가 당나라에게 패배한 이유는 대체적으로 능동적인 전략을 구사하지 못한 전략부재가 주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의 무기나 병사등의 군대의 전반적인 형태가 당보다 질이 낮거나 부족하여 패퇴했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크기 때문이다. 그랬다면 고구려가 3차례 이상의 대규모 총력전에다가 수십차례의 소모전을 수행할 여력이 되었을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기록들을 토대로 봐도 고구려의 무기나 지휘관들등을 우수하게 평가하면 평가받았지 약하거나 부족하게 평가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여수전쟁부터 침공군은 수륙 양면으로 정공법, 소모전, 기동전 등 여러가지를 기획해서 적용했었다. 특히 침공군이 요동 일대의 방어선을 우회해서 평양을 직공하는 방법을 쓴다면 저지하지 못하였고 고구려 중심지가 그대로 공격에 노출되었다. 고구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략이 고정되어 있었다. 전략이 능동적으로 변화하지 못하고 고정관념적으로 목적 그 자체가 되어버리자 고구려군의 방어체제는 돌아가도 전쟁의 유동적인 대응은 어려웠다. 특히 1차 여당전쟁 후 소모전에 있어서 고구려는 청야전술 자체에 너무 맹목적으로 의존하다보니 소모전에 있어서 군사적인 효과적인 대응을 못한 점도 대표적인 사례이다. 국력적으로 상대적으로 열세인 고구려가 주요지대인 요동에서의 청야전술의 고집은 상대적으로 소모전에서 고구려가 빠르게 열세가 될수 밖에 없는 원인이 될수 밖에 없었다. 즉 당이 고구려의 약점을 파악하여 대응할때 고구려는 그 약점을 보완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다.[38]
물론 고구려 역시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근본적인 전략이 바뀌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수, 당의 군대가 압록강 근처로 들어올 때는 어김없이 수십만 규모의 전투가 벌어졌다. 을지문덕과 고구려군은 압록강 및 오골성 일대에서 수나라군과 맞섰고 1차 여당전쟁 당시에도 장량이 이끄는 수군은 고전하여 전후에 문책당했고 2차, 3차 여당전쟁 때 역시 압록강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하여 선전하기도 한다.[39] 하지만 기본적으로 고구려의 전략인 1차 요동방어선 2차 압록강 3차 평양을 체계화 한것에서 움직인 것이지 고구려가 당나라처럼 전략 자체를 다양하게 구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기본적으로 방어자 입장에서 고구려는 100년이 넘게 완성한 방어체계에 한정해서 움직였기에 2차 여당전쟁때 해상력을 주공으로 들어왔던 당군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여 평양이 포위당한 형국에 처해서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당장 백제멸망때 당이 10만이상의 병력을 상륙하거나 주공으로서의 공격이 가능함을 입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렇다할 전략이 바뀐 것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나름의 노력을 했기 때문에 3차 여당전쟁때 고구려 해군력을 동원하여 당군이 고립된 상황에 처했었다는건 맞지만 고구려는 시각각 변화하는 전략에 대응하기 바빴기에 새로운 전략을 구사할수 있는 형국이 되지 못했다.
물론 고구려입장에서는 중국왕조 국가들 대부분이 고대에도 주력은 육군이라는 점에서 육군으로 들어올수 있는 기동로는 요동방어선 수준이었다는 점에서 전략자체가 틀린건 아니었다. 수백년간 중국왕조들 대부분이 고구려를 공격해올때의 주공은 요동의 요하쪽의 기동로를 택하여 고구려를 공격해왔던게 사실이다. 수군이라는 해군이 동원되었어도 해군은 어디까지나 항상 조공에 불과한 보조군 역할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나라 역시도 2차 전쟁전까지만하더라도 수백년간 해왔던 그대로의 예상대로 왔기 때문에 고구려로서는 따로 새로운 큰 틀의 전략발전을 생각하기에는 어려운 환경도 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를 보더라도 영국과 프랑스가 기동전에 소홀히하고 소모전략에만 치중해있어서 고착화된 것은 보수성도 있지만 전장환경의 요건이 당시 전차의 발전등이 있어도 쉽게 바꾼다라는 여건이 형성되지 못한 점이 크다. 고구려도 당나라와 전쟁하면서 똑같았고 나당연합군으로 남북으로 협공을 받았을때도 거의 유사하기 때문이다.
또한 주변일대의 국제정세랑 전투도 660년에 이르러서는 고구려에게 불리하게 흘러갔다. 적봉진의 패퇴나 요서지역을 당나라가 완전히 차지함으로서의 수세적 입장이 된 것이 고구려로서는 군사적 수세에 몰리는 상황이 되었고 그사이 나당 연합군은 고구려의 남쪽 전선을 책임지던 백제를 제압하는데까지 성공한다.[40]
이런 상황이 되다보니 고구려는 3차 여당전쟁때 상대적으로 후방지역으로 여겨졌던 부여성까지도 당의 대군이 우회기동을 할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버리게 된다. 또 남부전선의 방어체계는 북방처럼 체계화되어있지 못한 점도 있었다. 한성을 기반으로 방어체계가 강력했는지 여부는 회의적일수 밖에 없다. 물론 급한 요동방어선에 병력이 차출되는등의 전력저하도 있고 남부전선 자체가 요서-요하처럼 완전히 확고할정도의 안정적인 영토선 라인이 구축되지 못한 형국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는 것도 있지만 결국 그 결과 신라군이 2/3차 전쟁때 평양까지 올라오는 결과도 역시 초래했다.[41][42]
- ↑ 일본서기에는 180여명
- ↑ 이를 당태종의 패배를 드러내는 것이라 꺼렸다는 말도 있는데, 반대로 당나라가 수나라의 실패를 두드러져 보이게 하기 위해 여수전쟁 당시의 기록을 일부러 과장되게 했다는 식도 있고, 비슷한 예로 비수대전도 과장을 했다는 설이 있다. 당태종 시기에 오호십육국시대, 남북조시대의 역사서들이 작성되었는데, 신하들이 당태종의 고구려 원정을 반대하기 위해 일부러 황제가 원정나갔다가 시망한 일을 부풀렸다는 식(;;) 여하간 말하는 사람마다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줄었다 하는 부분이라 논란이 많다.
- ↑ 수양제는 4번이나 공격했고 심지어 몇달을 싸웠는데도 함락시키지 못했다.
- ↑ 고구려 포로들에 대한 후한 대우와는 엄청나게 차이가 난다. 이 이유에 대해 자치통감은 이 전투에서 말갈병이 당나라 황제의 진을 침범했기 때문이라 했다. 하지만 정작 구당서, 신당서에선 이유에 대해 아무 설명이 없다.
- ↑ 왕군악의 전사를 거론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에 대한 신당서 태종실기의 기록은 '六月丁酉,克白岩城。已未,大敗高麗于安市城東南山,左武衛將軍王君愕死之'이다. 당서는 사건의 순서를 나열한 것이지 날짜에 따라 기록한 사서가 아니며, 따라서 주필산 전투의 결과를 이야기하면서 그 전투에서 있었던 일(왕군악 전사)를 기록한 것으로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 ↑ 일설에 의하면 이는 안시성의 사기를 떨어트리기 위하여 했다는 얘기도 있다. 그야말로 병크.
- ↑ 순수하게 전투로 전사한 병력을 의미한다.
- ↑ 수양제가 113만의 전투병을 데리고 왔을때, 보급병력은 전투병력의 2배 가량이었다고 하니 사례를 참고해볼만하다.
- ↑ 안시성 전투 이전까지 당군은 야전에서 상당히 유리한 것을 넘어 무패에 가까운 위용을 보이지만 진로상으로만 보면 여수전쟁에 비해 크게 진전된 면이 없는데도 극적인 장치를 이용하여 위용만을 강조하는 등 비판적으로 볼 여지가 있는 편. 실제로 고구려를 공격할 때 압록, 평양으로 직공 자체는 어렵지 않다. 문제는 그 다음이지만 수양제, 당고종 역시 평양을 직공하고, 압록강 일대에서 고구려군을 격파하기도 한다. 당나라의 당시 공격양상은 단순히 평양으로 요이땅! 하는 것이 아니라 요동 방어선을 무력화시키고 고구려를 접수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요동성을 비롯한 성 10여개를 돌파한 것은 수나라에 비해 나은 전과이다. 하지만 당군의 후방에 신성과 건안성의 10만대군이 뒤를 노리고 있기 때문에 평양 직공책이 반려된 점, 점령되었을 터인 요동성 일대가 당군에게, 특히 후퇴할 때 전략적으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점 등은 아직 요동 일대를 완전히 제압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 ↑ 이 점에 대해서는 고구려의 의도대로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 ↑ 2~4만 사이 정도로 추정된다.
- ↑ 정확히는 요하를 넘지 마라.
- ↑ 당 태종 시기에는 1년에 2~3번까지도 원정군을 보냈지만 당 고종 치세에는 차츰 기간간격이 늘어져 2~4년 단위의 공격이 있었다.
- ↑ 이외에도 자신의 아버지를 죽게까지 만든 고구려가 당나라 내로 쳐들어올까 두려워서 못쳐들어오게 계속 공격했을수도 있다는 의견들도 있다.
- ↑ 이게 얼마나 엄청난 규모인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면 인천상륙작전때 동원된 UN군 병력이 75,000명이었다. 즉 인천상륙작전에 동원된 병력의 약 세배의 해당하는 병력이 패수로 진입하여 수도인 평양성을 공격한것이다.
- ↑ 중국통사에 따르면 1만 4천여명으로 추격부대를 편성했다가 8백여 명이 생환했다고 한다.
- ↑ 글필하력은 귀환한 직후 바로 서쪽으로 파견된다.
- ↑ 신라의 기록에 따른 것이고 포로가 고작 소형에 해당하는 것을 감안하면 과장일 가능성이 크다.
- ↑ 장손무기, 저수량 등 태종대의 중신들이 이때 제거된다.
- ↑ 비슷한 시기에 3형제의 삼촌이자 연개소문의 동생인 연정토는 고구려 남부 12개 성과 함께 신라에 투항했다. 이미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고구려는 내부에서부터 사분오열되고 있었던 것이다.
- ↑ 이들은 당 태종과 함께 오랫동안 전쟁을 수행한 명장들이였고 고구려와 오랜 전쟁을 겪어 경험이 풍부한 장수들이었다. 또한 측천무후와의 권력투쟁에서 살아남은 몇 안되는 공신들이기도 하다.
- ↑ 분하게 생각하고 목 매어 죽고자 하였으나 주위 사람들이 구하여 그러지 못하였다.
- ↑ 그래도 요동은 얻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실질적인 지배력은 제로에 가까웠고 그나마도 발해가 금방 먹어버린다.
- ↑ 당태종이 고구려 원정을 결행할 당시 당나라 조정의 다수 대신들은 '무용론(武用論)', 즉 아무 이득이 없는 전쟁이라는 것이 중론이었다. 그러나 황제의 의지가 너무 강해 원정이 결정되었다.
- ↑ 토번, 돌궐등과 비교했을 때를 말하는 것이다
- ↑ 단순히 외교적 형식의 사대가 아닌, 조선과 명나라 사이의 관계처럼 영구적인 사대관계 확립을 일컫는다. 실제로 영류왕은 지속적으로 당나라와 화친을 추진하며 전쟁의 명분을 찾던 당태종의 골머리를 앓게 하였다. 영류왕은 수나라와의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기 위한 시간을 벌 목적도 있었겠지만, 아마 후대의 조선-명 관계처럼 어느정도의 평화적 관계를 수립하길 내심 바랬을 수도 있다. 아무리 이겼다고는 해도 통일제국과의 총력전을 경험한 영류왕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되도록 통일 중화제국과의 충돌을 피할 수 있는 외교적 위치를 절실히 원하는 것이 이치상 합당하기 때문이다.
- ↑ 실제로 원산만 지역은 곧바로 고구려에게 뺏기고 만다.
- ↑ 특히 고구려는 한반도 중부지역을 백년넘게 점령했던 역사가 있기 때문에, 요동에 있는 십만 단위의 병력을 이곳으로 투입하면 이곳의 토착세력들이 자연스레 고구려로 돌아설 가능성이 높다. 중화 제국들과 달리 언어와 풍습도 비슷하거니와 무엇보다 이지역의 지리와 토착세력들의 인적 정보 및 인적 커넥션 보유 등 여러모로 이민족들이 침략하는 것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당시 신라와 백제가 거의 서로 멸망을 목표로 피터지게 싸우던 중이기 때문에 6세기 초반무렵보다 훨씬 군사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다. 즉, 이전처럼 고구려가 만명 단위의 병력이 아닌 십만명 이상의 병력을 동원하기 시작하면 고구려와의 최전선에 투입된 신라군들 후방에서 토착세력들이 동요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을 것이다. 그리고 백제 한성 함락에는 기습이긴 하지만 고작 3만명밖에 동원되지 않았다.
- ↑ 내몽고-요서지역에서 발흥했지만, 이들이 가진 알짜배기 영토의 대부분은 요동과 만주였다. 그리고 요나라도 만약 고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고려를 멸망시켰다면, 송나라도 멸망당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 ↑ 물론 몽골제국은 세계제국이니 논외
- ↑ 당태종이 고구려 원정을 감행할 당시에도 당태종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 '실지론(失地論)'을 내세우며 고토(한4군)회복을 명분으로 전쟁을 주장했다. 이를 토대로 '실지론'이 고구려 정벌의 동기라는 견해가 최근에 제시되고 있다. 다만 이는 사료의 액면 그대로만을 받아들인 견해이고, 당나라가 고구려 원정을 한 실질적 이유는 학자들마다 견해가 제각각이라서 통일되지가 않는다. 어쨌든 동기가 무엇이었든간에 목표는 점령통치였다는 것은 분명했다.
- ↑ 하북쪽이 점령당하면 중원 장악은 시간문제다.
- ↑ 어디까지나 당시 중원사람들의 인식에 있어 최대 안보의 위협은 흉노가 발호했던 몽골평원 일대다.
- ↑ 문맥상 북송 멸망을 지칭하는 걸로 이해하길 바람
- ↑ 신라는 백제를 멸하는게 목적이었을 뿐 고구려를 멸하는게 목적은 아니었다. 물론 여기에 대해 반론을 하자면 당시 신라의 실권층인 김유신, 김춘추 등 일부 인사들은 삼한을 신라가 통일해야 한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기는 했다고 할 수 있다.
- ↑ 백제를 선택한 이후에는 신라가 고구려 남방을 칠 때면 백제의 역공으로 견제가 가능하고 올리며 공세로 나가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기도 했으며 백제가 멸망하는 순간, 당나라 35군의 5할이 평양을 직공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 ↑ 백제와 신라는 이미 6세기 중반부터 원한이 깊어 주변국의 중재에도 싸움을 그치지 않는 상황이었다. 큰 세력을 우리 편으로 하고 작은 세력도 적으로 안 두고 달랜다는 것이 말이야 듣기좋고 가능성 여부는 판단하기 나름이지만 최소한 백제를 선택한 것을 전략의 부재라고 보는 것은 고구려가 멸망했다는 결과만 보고 내린 폄훼에 가깝다.
- ↑ 실제로 고구려는 당에게 1차 전쟁이후 요서의 영향력을 대부분 상실하면서 1차 여당전쟁전처럼 작전술 수준의 야전기동으로 선제공격을 하는 적극적 대응을 하지 못한다.
- ↑ 연남생은 깨졌지만 그래도 계필하력이 철수하며 어찌어찌
뒷걸음질 치다가전략적인 목표는 달성되었고 3차 전쟁 당시에 남건은 그래도 한반도에 돌입한 풍사본, 이세적을 압록강 밖으로 축출하여 해를 넘겨 버텼다.결국 깨지긴 했지... - ↑ 당나라는 수륙 양면으로 십만 단위의 대전을 벌일 능력이 되었지만 고구려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였고 게다가 고구려가 7세기 초반에 북방에 손을 놓고 있던 사이에도 당나라는
인밀레로북방민족들을 하나둘씩 제압해나갔으니(...) - ↑ 이미 백제 멸망 이후 660년대 초반에 고구려 남부 성들이 속속 신라에 투항하기 시작했다. 아마 이지역 군벌들은 상대적으로 요동에 비해 소외되어 있던 전장이라 중앙의 지원을 거의 못받았을 가능성이 크며, 이러한 소외에 대한 불만 또는 전력의 한계로 중앙 지원없이 자체적으로 신라에 대항하는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투항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신라군과 교전한 고구려군의 규모는 당나라와의 교전에서 십만 단위를 넘었던것과 별개로 만명을 넘어가지 않았다.
- ↑ 2차 고당전쟁에서 김유신이 남쪽 전선을 뚫고 평양성으로 진격한 후 후퇴할 때 군대를 보내어 쳤는데 1만이 격파당했다고 한다. 당시 고구려의 군사들이 중국과 전면전을 벌이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1만이 넘는 군사가 적은 것은 아니지만, 이들로써는 신라를 제압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