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스 데스포의 <폭파된 대동강 철교를 건너는 피난민들>. [1][2] 1950년 12월 4일 촬영.
이 사진으로 맥스 데스포는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6.25 전쟁 영어 : Korean War 중국어 간체, 번체 : 朝鲜战争, 朝鮮戰爭 | ||
300px 저작자: Roke(2006.06.05.) | ||
날짜 | ||
전쟁: 1950.6.25.~1953.7.27. 휴전: 1953.7.27.~ (2024-11-24 19:03:31 현재도 지속) | ||
장소 | ||
한반도 | ||
이유 | ||
북한군의 남침[3][4] | ||
교전국 | 유엔군 대한민국 미국 영국 터키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에티오피아 제국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타이 필리핀 그리스 왕국 남아프리카 연방 콜롬비아 | 공산군 북한 소련 중국 |
의료 지원국 |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이탈리아[5] 인도 이스라엘 |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 루마니아 인민 공화국 헝가리 인민 공화국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인민 공화국 |
지휘관 | 이승만 해리 S. 트루먼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윈스턴 처칠 클레멘트 애틀리 더글라스 맥아더 매튜 B. 리지웨이 월튼 워커 제임스 밴 플리트 신성모 백선엽 김종오 채병덕 정일권 타흐신 야즈즈 등... | 김일성 박헌영 최용건 김두봉 남일 김책 김광협 이오시프 스탈린 니키타 흐루쇼프 마오쩌둥 펑더화이 쑹스룬 등... |
결과 | ||
무승부[6], 명목상 현재 진행중 | ||
영향 | ||
수많은 사상자와 이산가족의 발생 분단의 고착화와 상호 적대감 심화 일본의 경제적 부활 | ||
참전 병력 | 최소 92만 명[7] | 최대 200만여 명 |
사망자 | 군인 26만 명[8] 민간인 99만 명 추정[9] |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최소 250만여 명[10] |
경제적 피해 | 공업기반의 절반, 30억달러 또는 국부의 1/4[11] | 전력의 74%, 연료 공업 89%, 화학공업의 70%[12] |
목차
일제강점기와 함께 20세기 한국사 최악의 비극 중 하나
하마터면 제 3차 세계대전이 될 뻔한 전쟁
1 개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에서 1950년 6월 25일에 북한이 대한민국을 침공하여 발발했고, 1953년 7월 27일부로 휴전된 전쟁이다. 정확히 말하면 정전협정에 의해 정전된 것이라서 만약 남한과 북한 사이에 다시 전쟁이 터진다면 그건 2차 한국 전쟁이 아니라 한국 전쟁이 재발한다고 봐야 할지도 모른다. 다만 대한민국은 정전협정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종전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2 명칭
이 전쟁은 한국전쟁이라는 명칭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주로 영미권에서 이 전쟁을 가리키는 명칭인 Korean War를 번역한 것이다. 대한민국에서는 1973년 제정한 〈각종 기념일에 관한 규정〉에서 6·25 사변일(六二五事變日)을 공식 명칭으로 써왔으나, 2014년 3월 24일 개정으로 6·25 전쟁일이라고 규정한다. 대한민국의 국정 국사 교과서에는 6·25 전쟁으로 표기했는데, 이는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을 따른 것이며, 대한민국에서는 공식적으로 한국 전쟁보다 6·25 전쟁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반면 학술용어로는 "한국전쟁(Korean War)"라는 용어도 쓰인다. 6.25는 한국전쟁의 배경과 과정, 그 결과 및 여파를 아우르기 어려운 단어라는 의견이 있다. 또는 경인공란(庚寅共亂)이라고 불린다. 6.25라고 부르는 것은 전쟁이 6월 25일 그날 시작되었다는 의미 밖에 안되어 여러 복잡한 사건의 추이와 전개과정을 포괄하는데 적절치 않은 용어라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6.25라는 말을 6월 25일 이전에 있었던 일련의 흐름을 축소시키고 우리측에 유리한 입장을 부각 시키기 위해 정부 권력차원에서 정착시켰을 것이라 추정하기도 한다. 어쨌거나, 우리나라는 해방후 오랜기간 이 전쟁을 6.25라고 불렀고 많은 논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6.25라는 말이 자주 쓰이며, 현재는 6.25를 혼용해서 쓰이고도 있다. 나이많은 노인들은 6.25 사변이 입에 붙어 있어 6.25 사변이라 부르고 있다.
하지만 "한국전쟁"이라는 용어에 대해서 반대하는 의견도 있다. 한국전쟁이라는 용어가 학계에 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무렵부터다. 브루스 커밍스의 저서 "The Origin of Korean War"이라는 책이 운동권 학생들에게 크게 반향을 얻으면서부터다. 해외에서는 'Korean War'라는 표현을 쓰지만 자기네 나라 전쟁을 타의적 표현을 빌려쓰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는 지적이 있다. 또한 'Korean'이 북한에서는 '조선'으로 해석되기 때문에 "한국전쟁"도 객관적인 용어라고 보기 힘들다는 지적도 있다. 그리고 당대에 사용지도 않은 용어를 굳이 쓸 필요가 있냐는 비판도 제기된다. 사건의 성격을 왜곡하는 것이 아니라면 당대에 쓰인 명칭을 주로 존중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그것 또한 역사적 산물이라는 것이다. 또한 한국의 역사에서 벌어진 전쟁이 비단 6.25전쟁만이 아닌데 한국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은 혼동이 있을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그리고 3.1운동 3.15 부정선거, 6.10 민주 항쟁, 4.19 혁명나 5.18 민주화운동 처럼 한국에서는 그것이 발발한 시점을 기준으로 명칭을 붙이는 관습이 있다. 6.25가 그 사건의 성격을 포괄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다른 사건들의 명칭도 바꾸어야 하냐는 문제에 봉착할 수도 있다. 유럽에서도 2월 혁명이나 7월 혁명처럼 그 사건이 발생한 시기를 기점으로 사건의 명칭을 부여한 예도 존재한다. 따라서 6.25전쟁이라고 쓰는 것이 문제 없다는 것이다. 물론 어떤 역사용어를 쓰느냐 하는 것도 그 사건을 바라보는 이에 따라서 다양할 수 있다. 그것 역시도 하나의 해석의 산물이자, 사관을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국사편찬위원회와 국방부 지정 공식용어는 '6.25전쟁'이며, 정부에서도 6.25전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6.25동란(同亂) 이란 표현도 있다.
당대 미 의회에서는 군사적인 충돌의 의미를 가진 Conflict라는 단어를 사용해 6.25전쟁을 지칭했다. 6.25전쟁이 대규모 국제 전쟁으로 비치면 안된다고 봤던 트루먼과 미 의원들에 의해 War라는 단어의 사용이 사실상 금기시 되었다. 까딱 잘못하다간 6.25전쟁이 전작의 후속작 World War III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공산권 국가와 서방의 대중들에게 6.25전쟁이 '전쟁 같아도 전쟁 같이 느껴지지 않도록' 이를 축소시켜 지칭한 것이었다.[13] 후에 한국전쟁이 정치인들의 손에서 역사가들의 손으로 넘겨질 때 쯤, War라는 단어가 학계에서 보편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중국 역시 역사가들의 손을 거치면서 '항미원조전쟁'이라는 말이 '조선전쟁'이라는 말로 바뀌어 통용되었다.
한편 6.25 전쟁이란 명칭은 사람들의 인식이 '6월 25일'에 일어난 전쟁에 그치고 그 3년간의 나머지 역사는 잘 인식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는 견해도 있다. 이 때문인지 한때 많은 사람들이 이 전쟁의 개전년도를 몰라서 기사까지 나오는 경우가 흔했지만 2016년에는 개전년도를 모르는 경우가 많이 줄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휴전연도는 성인들도 모르는 사람이 많다. 참고로 휴전은 정확히 3년 1개월 2일 후인 1953년 7월 27일 이다.
맥아더를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사람들 측에서는 만약 미국이 맥아더의 요구대로 만주 지역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렸거나, 중공 대신 소련이 직접 참여 했을 경우 제3차 세계대전이 되었을 것이란 주장도 있으나 실제로 참전한 것은 중공이고 중공의 핵개발은 64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핵실험이 성공했기에 맥아더의 당시 계획대로 중국이나 소련에서 거의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접경의 만주 지역에 핵을 투하하여 동해에서 서해까지 중공과의 인접불가한 경계를 그어놨다면 중국의 재래식 군대만으로는 더 이상 개입이 불가능해 통일을 이루었을 수도 있다. 중공 영토에 대한 공격을 금기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중공군이 한반도 이남까지 발을 들였던 전쟁상황에서 그 반대가 불가능할 이유는 없다. 더군다나 당시 중공의 힘과 미국의 실제 힘은 비교조차 안 되는 상황. 베트남전도 그렇지만 6.25 역시 거의 다 자유진영이 통일 가능했던 상황에서 미국내부 사정으로 발을 뺀 경우다. 하지만 현실은 60년 넘게 분단국 소련이 참전한다고 해도 당시는 대륙간 탄도탄이란 것이 없던 시절이다. 그러나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이 5년밖에 안 지났기 때문에 미국 내의 정치적 흐름과 영국, 프랑스 등의 서유럽 국가들의 극렬 반대로 결국 1951년 맥아더는 해임되었다. 맥아더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지금 진정한 헬조선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사실 소련에서는 지원에 소극적이었지만 중공군으로 위장을 한 파일럿들을 일부 보낸 바 있다. 이 파일럿들의 통신이 감청되기도 했지만, 소련이 개입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경우 확전을 우려한 미군과 UN군에서는 이를 일부러 무시했다. 6.25전쟁이 무조건 한반도 내의 국지전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생각을 가진 당시 미 대통령 트루먼 입장에서는 자꾸 전쟁 스케일을 키울려고 하는 맥아더가 굉장히 위험한 인물로 비춰졌다. 결국 트루먼에 의해 해임된 맥아더는 일단 전쟁 영웅으로 미국에 귀국하지만 이후 미 의회 상원위원회 청문 과정에서 그 진실이 까발려져 명예를 실추당한다. 6.25전쟁이 제3차세계대전으로 커지면 안된다고 봤던 사람은 트루먼 뿐만이 아니었다. 공개된 스탈린의 서필을 통해, 스탈린 역시 판깔기에 참여한 주제에 한국전쟁이 제3차대전으로 확전 될까봐 크나큰 내적 괴로움을 겪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잘못했다간 전쟁이 세계대전으로 번질수도 있었지만, 양쪽 모두 확전의 두려움에 자기 나름대로 어느정도의 전쟁 억지력을 확보해 전쟁이 커지는 것을 막았다.
말 그대로 한반도 전체를 휩쓸었던, 한국사에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전쟁으로, 한반도 내에서 벌어진 최초이자 최후의 현대전이라고 할 만하다. 물론 이에 수반한 충격 또한 남북 모두 한동안 이 전쟁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할 정도로 컸으며, 앞에서 말했듯 대대로 남북한의 이념과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쳐왔고 냉전이 끝난 21세기인 지금까지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물론 전혀 안 좋은 쪽으로.
1980년대까지 대한민국 제1~제5공화국에서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의 정권에서 국시로 삼았던 반공, 북한에서 김일성이 전후 독재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정적을 제거하는 명분 역시 "반동분자를 없애야 한다"는 것이라는 것에서 국가운영과 국민여론 및 의식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군사정권 당시 한국의 지도층과 오늘날까지 이어가는 북한 수괴층의 통치를 합리화하는 명분으로 오용됐다.
세계사적으로도 제2차 세계대전 종결과 함께 전개된 냉전 구도가 '열전(熱戰)'으로 폭발하게 된 거의 최초의 사례로 꼽히며, 2차 세계대전 당시 아군이었던 미국과 소련, 중국이 직간접적으로 전쟁을 벌인 사례이기도 하다. 또한 6.25 전쟁은 지금까지도 해외에서 '한국'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될 정도로 현대 한국에 대한 인식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한편으로 일본이 중흥하고, 대만에 유배된 중화민국이 살아나는 어부지리에도 영향을 주었다.
특히 일본은 서유럽과 마찬가지로 이미 완성된 인적 자원과 사회 구조를 가진 국가였고, 한국전쟁 이전부터 경제 재건에 착수한 상태였기에 6.25전쟁이 없었어도 결국 부활하기는 했을 것이지만, 6.25전쟁이 이를 크게 앞당긴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3 전쟁 발발과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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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태극기 펄럭이며
앗싸
니들은 왜 끼어들어?
굳이 끼워 맞추자면 저 상황은 애치슨 라인이 설정된 직후라고 보면 된다. 다만 스탈린은 저 그림 상의 상황과는 달리 김일성이 전쟁 일으키자는 땡깡을 48번이나 기각시켰다. 그러나 애치슨 라인을 알게 된 스탈린이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거라 생각하고 결국 김일성의 남침을 허락하는 상황으로 끼워맞출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 과거 소련의 비밀공문서가 공개된 현재, 애치슨 라인의 설정이 한국전쟁 발발에 끼친 영향이 미미한 것이 밝혀진 시점에서 위와 같은 기존의 가설들은 모두 유보되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로는 해방 이후 남북 간에 크고 작은 충돌이 벌어지고 있었다. 전쟁은 6월 25일 갑자기 뻥 하고 터진 것이 아니라, 이전에 이미 교전 상태였다. 나이드신 분들은 45년 해방 후부터 전쟁 전까지 있던 여러 소란을 기억한다. 디테일한 부분에는 논란이 있으며, 이 기간 동안의 문제는 이데올로기 또는 남북한 양쪽 정부의 기원 내지는 본질 문제와 결합되어 매우 혼탁하다. 얼마전까지 일부러 이러한 미묘한 부분은 연구자들이 회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군사정부 시절에는 아예 연구자들이 이런 미묘한 부분은 방치했다. 말 잘못했다가 끌려갔기 때문.
3.1 침략을 주도한 전쟁범죄자
- 김일성 : 북한 영토와 인민 전체를 도박판에 올인 해 놓고, 본전만 간신히 건진 인간쓰레기.
그 본전도 껍데기만 남았다그나마도 박헌영을 제끼고 건져올린 본전이다. 사실 삽질은 자기가 다 해놓고 책임은 박헌영에게 다 떠넘겼다. 직책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 수상 - 박헌영 : 6.25전쟁의 시나리오를 제안한 진 주인공이자 흑막이다. 전쟁을 일으키면 남로당 잔존 세력이 들고 일어날 것이라는 주장인용 오류:
<ref></code> 태그를 닫는 <code></ref>
태그가 없습니다이나 이현상 같은 이들이 남아있다 쳐도 사실상 사라진 거나 다름없었다.</ref>으로 전쟁을 선동한 선동가. 직책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 부수상 & 외무상. - 테렌티 시티코프 : 김일성의 침략을 적극적으로 도운 인물.
- 배후 세력
3.2 들어가기에 앞서, 용어 설명
현재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6.25 전쟁은 북한이 남한으로 침략하면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누구나 안다. 다만 한자어의 어감 문제로, 제대로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남침'이라는 용어만 '북침'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일반적인 한자어에서의 동서남북 방위는 부사어로 해석된다. 즉 '남침'은 '남쪽으로 침략했다'라는 의미로, 방위가 들어간 다른 한자어인 '남하, 북상, 동진, 서정' 역시 '남쪽으로 내려감, 북쪽으로 올라감, 동쪽으로 나아감, 서쪽으로 정벌함'으로 해석한다. '효종 시기의 북벌론'이나 '제갈량의 북벌'에서의 '북벌' 역시 마찬가지 경우로, 이 단어들에서의 '북'은 '북쪽으로의 정벌'이라는 풀이에서 부사어 역할을 한다.
물론 한자어에는 '부사어+서술어'가 아니라 '주어+서술어' 구조인 단어도 적지 않기에, '북'을 주어로 삼아 '북쪽이 침략함'으로 이해하여 '북침'이 옳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상당하다[14]. 그러나 상기한 '북벌'을 '주어+서술어'로 이해할 경우 '(누군가를 향한) 북쪽의 정벌'(?)이 되니 만큼, 방위가 들어가는 일반적인 한자어에서는 그 방위를 부사어로 해석하는 게 좋다. 만일 그래도 헷갈린다면, '똥침'이라는 말이 '똥구멍(…)이 침략한 상황'이 아니라 '똥구멍 쪽으로 침략하는 상황'을 이르는 말임을 생각하면 된다
사실 우리 역사에서 6.25 남침보다 더 큰 희생이 일어난 사건은 없었으니 만큼, 교육 과정에서 "6.25남침"이란 말을 안 가르친다는 자체가 문제라면 문제. 현재는 '북한의 남침'이라고 하여 주어, 부사어, 서술어 모두를 분명히 한 용어로 서술되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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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같은 공산주의 국가인 유고슬라비아 신문에서 만든 만평.
3.2.1 북한의 남침 증거들
2010년대까지 밝혀진 자료에 의하면, 정권 확립과 당시의 우세를 활용해 조기에 남한을 제압하려던 김일성과 공산 파르티잔 세력을 비롯한 남조선로동당 인맥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려던 박헌영의 주도로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이 정설이다. 북한이나 남한의 극소수 세력은 북침이나 소련의 배후 조종설을 주장하기도 했으나, 소련 기밀문서의 공개 등으로 대부분 설득력을 잃었다. 그렇다고 소련과 중국이 전쟁의 원흉이 아니라는 뜻도 아니다. 애초에 소련, 중국이 개전 허가를 안 하고 지원을 안 해줬다면 한국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북한의 주장을 제외하면 정말로 남한이 북한을 선공했다는 북침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문자 그대로 극소수에 불과하다. "북침설을 주장한다."고 지목되는 학자들의 대부분은 반공 이데올로기로 인해 가려진 부분을 지적하는 것을 의도했던 것이 대부분이다. 대표적으로 지목되는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에서도 6월 25일날 먼저 총공세를 펼친 것은 북한이 맞다고 서술하고 있다. 다만 그 이전에 38선 부근에서 서로 2 ~ 10㎞씩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는 국지전이 있었다는 사실을 국내 학계에선 최초로 도마 위에 올렸고, 한국전쟁은 그것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주장했을 뿐이다. 참고로 브루스 커밍스는 대표적인 수정주의 학자로, 미국 외교 기밀 문서가 공개되면서 그에 기반해서 냉전사를 해석하였다. 미국의 외교 기밀 문서들은 25년을 시한으로 공개되기 때문에 가능한 것.
그러나 국지전은 매우 소규모의 무력시위에 불과했다. 일단 규모 자체도 어떤 경우엔 분대급에 불과했고 보통 중대급, 커봐야 대대급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런 국지전이 6.25 전쟁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는 것이 학계의 결론. 굳이 6.25 전쟁과 국지전이 관련이 있다면 당시 교전 규모를 봤을 때, 38선 부근의 국지전은 신생 북한군의 전투 경험 습득과 교리 시험을 위해 북한이 지속적으로 남한지역을 내습한 것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전면전 발발 이전부터 북한은 부단히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 실제로 1949년 쯤 가면 개성시에서 북한군 부대가 박격포로 하도 공격을 해대는 지경에 주민들이 항의하는 수준까지 갔다고 한다. 그러니까 커밍스가 틀렸다.
사실 북한군이 미리 전쟁을 준비했다는 가장 큰 증거는 남침 직후 수십~수백 킬로미터 수준의 작전기동을 했다는 것 자체다. 군대 갔다 온 사람은 누구나 알겠지만, 미리 계획을 세우고 충분한 준비를 해두지 않았다면 부대는 자기 주둔지를 함부로 떠날 수 없다. 게다가 개전 직후 전황을 보면 더 참담하다. 주성하 기자도 북한 학교에서 남한이 북침했다는 역사 교과서 내용을 배우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어떻게 남한이 먼저 공격했는데 바로 쳐발리고 수도까지 순식간에 밀려버릴 수가 있냐는 문제였다.
그러나 커밍스의 연구는 해당 분야에 대한 극초기의 연구이므로 이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21세기에 들어와서 전쟁 직전의 대한민국 국군은 물자와 장비가 부족하고 군사훈련도 제대로 안 되어 있어 전면전의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결론이 학계의 정설이다. 그저 물자와 장비, 병력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UN 한국위원회와 미국의 극심한 통제 속에서 전쟁 준비 같은 걸 생각할 수 있는 상황조차 되지 못했다. 이 당시 UN 한국위원회의 한국군 통제는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이었다. 하다 못해 소총 한 발도 한국위원회의 승인 없이 불출할 수 없었다. 특히 1990년대 공산권이 붕괴되면서 소련 측 외교문서가 공개되자 신전통주의적 해석이 지지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소련의 배후 조종설 또한 오해의 소지가 있다. 이 주장의 핵심은 북한 지도부는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했고, 소련 정부가 표면상 내세우는 꼭두각시에 불과했다는 것에 있다. 그러나 6.25 전쟁사와 관련된 연구 초기부터 한국전쟁 발발 이전에 북한에 대한 소련의 막대한 물자 공여와 장교 파견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냉전 종결 이후 소련의 기밀 문서가 공개됨으로써 이것은 기정사실이 되었으나 이것이 과연 소련이 주도한 것인지는 의문점이 남는다. 김일성이 이전부터 마오쩌둥, 스탈린과 접촉한 징후가 보이기 때문. 즉 김일성이 공산권 거대 국가들에게 지원을 요청하고 공산권 국가들이 이를 들어준 모습이다.
스탈린은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키고 싶어 안달하는데도 그걸 48번씩이나 거절했는데 김일성이 그치지 않고 애치슨 라인까지 들먹이며 요구를 하자 끝끝내 승인했다고 한다. 다만 스탈린이 무슨 평화주의자라서 이 전쟁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전면전을 할 경우 제3차 세계대전으로 일이 크게 번지는 것을 두려워한 것일 뿐이었다. 그리고 스탈린 개인은 소련의 현 전투력이 미국에게 많이 뒤쳐져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면전을 반대한 것이었지만 김일성은 철딱서니없게도 이러한 국제정세 따윈 나몰라라 하고 그냥 자기 사리사욕만 채우려고 스탈린에게 땡깡을 부린 것이었다.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보낸 친필 러시아어 서문
참고로 소련이 해체되면서 공개된 기밀 자료 중에 한국전쟁 당시 북한 주재 소련 대사이자 북한군 배속 소련군사고문단장인 라주바예프 장군이 당시 상황을 보고한 라주바예프 보고서에는 라주바예프 장군이 한국전쟁 중인 북한에 착임하게 된 과정과 그 이후 전쟁 전개 과정에 대한 분석이 실려 있다.
매우 생생한 묘사와 서술로 사료가치가 높고, 더군다나 소련의 개입에 대해서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특히 라주바예프 중장이 착임하게 되는 1950년 10월 경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묘사는 소련의 한국전 개입을 확실하게 설명한다. 개전 당시인 6월 25일의 북한 주재 소련 대사는 스티코프 중장, 군사고문단장은 바실리예프 중장이었다.
스탈린은 3차 대전을 우려해 소련인 군사고문은 38선을 넘지 못하게 했다. 이것이 군사고문의 작전지도에 애로사항으로 작용했고,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뒤집히자 스탈린은 현지에 파견된 소련 대사와 군사고문단장의 무능에 격노하여 이 둘을 교체하고 라주바예프 중장을 파견해 위의 두 직위를 겸직하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심지어 소련은 한때 2차 대전의 영웅 말리노프스키 원수를 파견해 조선인민군을 지휘하게 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검토했다고 한다.
심지어 한국 전쟁 초기에 한국군에 투항한 북한군 장교출신자는 2010년 경 방영된 KBS의 '한국전쟁'에서 "6월 25일 개전을 앞두고, 소련군 고문이 '훈련담당 고문'에서 '작전담당 고문'으로 싹 교체되는 걸 보고 전쟁을 직감했다" 라고 증언한 바도 있다. 참고로 이 분은 인민군 6사단 출신으로, 당시 6사단은 개전을 앞두고 중국 팔로군의 조선인 부대에서 조선인민군으로 일괄 이관된 인원으로 구성된 조선인민군의 정예부대였다.
전쟁 당시 신의주에서 교사를 지냈던 <성문종합영어>의 저자 송성문은 한국전쟁이 북한 지도부에 의해 1947년부터 주도면밀하게 계획된 남침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결론은 정말로 북한은 가만히 있는데 남한이 먼저 공격했다거나, 북한은 그럴 의지가 없는데 소련이 시켜서 한 짓이라고 주장하는 학설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퇴출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다만 북한을 자주성이 없는 정권이라고 까기 위해 소련이 시켜서 한 것이라는 주장을 인용하는 경우도 있다. 결국 이래도 까고 저래도 까는 것.
같은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한국군의 북침설을 잘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60년대 중국에서도 북한의 남침으로 교과서 수정이 이루어졌다. 남침 자체는 빼도박도 못하는 진실이기 때문. 대신 전쟁 주체 및 과정을 중국에 유리하게 해석하여 중국의 개입을 정당화하고 있다.
북한 지도부는 현재도 북침설을 주장하며 "미국의 조종을 받는 한국군과 미군이 북침했다"는 주장으로 일관하지만, 앞에서 봤듯이 실제로는 중국 및 소련의 지원을 받는 북한이 남침을 한 것이다. 실제로 전쟁 발발 직전에 남한의 미국의 군사 고문단은 철수 중이었지만 소련은 북한에 영관급 장교를 군사고문단으로 파견했다. 중국과 러시아에서 기밀 해제된 문서들은 아예 정확한 날짜와 과정을 열거하며 남침 준비를 위한 준비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3.2.1.1 스탈린 배후 조종설의 진실
실제 김일성의 '조국해방전쟁'에 대하여 소련이 그 배후에 있었다는 사실과 그 중심에 스탈린이 개입했다는 사실은 이미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개입에 있어서 스탈린은 김일성의 남침계획에 대해서 수차례 거부의사를 표명했으며, 국제적 정세가 허락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계획을 반대했다. 그리고 49년부터 50년 초까지 이어진 38선 부근의 국지적인 충돌에 대해서도 북한 측에게 절대 먼저 도발하지 말 것을 권고하기도 했으며, 전쟁을 승인하고 전쟁이 발발하여 전투가 계속되고 있는 순간에도 소련은 전장 밖으로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이러한 소련의 모습은 유엔 안보리 불참을 통해 한국전쟁에서 자신들의 책임을 은폐하여 국제적인 정당성을 확보하고, 북한에 대하여 군사적 지원과 원조를 통한 전쟁 개입으로 미국과의 직접 대결을 피하며, 김일성의 공군지원 요청에 대해서도 군사적 개입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작전범위를 한정하여 지원한 것으로 대변 가능할 것이다. 즉 위의 모습 모두 북한에 대한 확실한 지원도 그렇다고 부족한 지원을 제공한 것도 아닌 것으로, 모른 체하지는 않지만 결정적 지원은 하지 않으면서 한반도내로 전쟁을 제한하고 또 교착상태로 전쟁을 이끌어나가려고 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소련은 노획되었을 경우 빼도 박도 못하는 개입증거가 되는 T-44, T-54, IS-3, IS-4 같은 소련제 최신예 전차들을 북한과 중공군에 전혀 제공하지 않았고 2차대전에 쓰이던 수준의 구식 무기만 지원했다. 물론 구식인 T-34로도 T-34쇼크를 줄 수 있을만큼 우리나라 군대가 약하기도 했으나 만약 소련이 6.25전쟁을 승전으로 이끌겠다고 작정했었다면 미군의 M46패튼을 상대하기 위해 저런 전후형 신형전차들을 투입했을 것이다.
이러한 소련과 스탈린의 입장은 한국전쟁 관련 구소련 군사외교문서에서 일부나마 확인되고 있으며, 결론적으로 6.25 전쟁은 김일성이 주도해서 시작한 전쟁임을 알 수 있고 박헌영의 남조선 인민봉기는 전쟁 개전의 정당성으로 활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3.2.1.2 스탈린의 미국개입유도설
2000년 이후 스탈린과 고트발트의 편지내용이 담겨있는데 이 편지 내용에 따라 미국개입유도설이 제기됐다. 자세한 건 해당 문서 참고 바람.
3.2.1.3 6.25 전쟁이 발발한 시간
북한군이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 경에 38선을 넘은 이후다. 전략적으로 본다면 새벽에 상대 진영을 공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는 초보들도 알 수 있는 사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1950년 6월 25일이 '일요일'이라는 것이다.
당시 군에서 복무했던 분의 증언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군 체계는 미국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국군도 토요일 오전이 되면 필요한 최소한의 인원을 제외한 전원이 외박을 나가 일요일 오후에 들어왔다. 여담이지만, 증언을 해주신 분이 군대에 간다고 하자 그 분의 장인 어른께서 농사일 하기 싫어서 도망가냐고 물었다고 한다. 얼마나 개판이었으면...
즉, 북한군이 38선을 넘은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오전 4시 경에 우리 군은 각자의 집에서 전력을 다해 취침을 하고 계셨다. 그러니까 우리가 군대에서 주말 외박이 자유롭지 않은 것은 다 김일성 때문이다
여담으로, 이 전쟁이 시작하기 불과 1시간 전, 지구의 반대편에서는 월드컵의 시작을 알리는 휘슬이 울렸다.
3.2.2 남침유도설?
단, 북한이 쳐들어올 걸 뻔히 알면서도 미국에서 수수방관했다는 음모론은 존재한다. 남한이 북한을 공격했던 몽금포 전투가 있던걸 보면 아마 이것 때문으로 보인다. 일명 '남침유도설'로, 2차대전 중 돈을 신나게 빨았던 미국의 군수산업이 종전이 되자 만든 물건 어디 써먹을 데 없나 걱정이었는데 김일성이가 뻘짓하는 게 빤히 보이니 낚싯줄을 드리웠다는 것이 그 골자다.
당시 이승만 정권의 군비 군수 확장 요청에도 미군은 거절로 일관했고 이에 대해서는 북진을 공공연히 주장한 이승만의 탓이 없지 않다. 남한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통일을 시도하면 소련과의 전면전이 불가피할 것이라 판단한 미국 정부는 이승만의 호전적인 태도에 응해줄 수 없었다.
그리고 애초에 한국은 미국의 주요 관심사도 아니었고 미국 정부와 이승만은 사이가 안 좋았다. 또한 애치슨 라인에서도 한반도를 제외함으로써 확인사살까지 했다.
이걸 밀고 들어가서 "북한은 미국의 음모에 휘말린 또 하나의 희생자일 뿐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는 마치 제2차 세계대전도 나치 독일의 책임이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의 음모에 히틀러가 휘말렸을 뿐이라는 주장과 같다.
더군다나 만약에 남침유도설이 맞다면 한국군이 박살나는 거야 그렇다 쳐도 남침을 유도해놓고 요격에 나선 미군 역시 투입하는 족족 박살이 난데다 이후에도 삽질을 거듭한 이유가 무엇인가를 설명해야 한다.[15]
특히 전선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전쟁 초기에는 미군 병사들도 제대로 된 훈련을 받지 못해 한국에 보내지는 족족 총알받이로 내몰려 무더기로 죽어나갔으며, 개전 초 미군이 북한군의 공격에 연이어 패한 데는 이러한 병력의 자질 문제도 있다. 게다가 군수산업을 돌릴 큰 시장을 미국이 원했다면 차라리 중국의 국공내전을 장기화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게다가 요격에 나섰다는게 겨우 1개 대대, 그것도 2개 중대로 이루어진, 대대원 540명에 장교숫자는 겨우 15명 안팎 정도밖에 안되는 찰스 스미스 대대 요거 하나밖에 없었는데 이게 쳐발리고 나서야 윌리엄 딘 장군의 미 24사단이 나섰다. 남침을 유도해 놓고서 남침한 북한군을 때려잡는다는 게 꼴랑 1개 대대밖에 안된다면 남침유도 자체가 말이 안된다.
더불어 소련의 비밀문서가 공개되면서 남침유도설은 완전히 박살나고 말았다. 최근에도 남침유도설을 정설로 주장하는 서적이 나오곤 하지만 순전히 책을 팔아먹기 위한 수작일 뿐이다. 일례로 남침유도설을 정론으로 내세운 <한국전쟁의 수수께끼>의 경우 한국전쟁 50주년을 노리고 출판했다가 반응이 시들하자 10년 후에 한국전쟁 60주년 기념으로 <6.25 미스터리>라는 제목으로 내용을 살짝만 바꾸어 신간으로 속여 출판했다. 저자 자체가 이글루스에 스스로 만점 먹이면서 완벽한 책이라고 홍보하다가 왕창 까이고도 계속 남침유도설이 만고의 진리임을 전파하는 걸 보면 정말 책 팔고 싶은가 보다. 님들 책 좀 사주세염 돈을 못벌어염
3.3 전쟁 전야
전쟁 직전 남북한 병력 상황 비교 (단위 : 명) | ||||||
계 | 육군 소계 | 육군 전투 병력 | 지원 • 특수 병력 | 해군 | 공군 | |
국군 | 103,827 | 94,974 | 67,416(8개 사단•22개 연대) | 27,558 | 6,956 | 1,897 |
인민군 | 201,050 | 182,680 | 120,880(10개 사단•30개 연대) | 61,820 | 15,570 | 2,800 |
전쟁 이전에, 남북한 모두 남북 분단이 가시화된 시점부터 상대 지역을 '미수복 영토'로 보고 북한에서는 '북한을 먼저 공산주의화시켜 민주 기지로 삼은 뒤 남한을 점령해 공산주의화시킨다'는 민주 기지론을, 남한에서는 이승만 정권이 주장했던 북진 통일론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남한의 북진 통일론은 진정성이 있었는지, 그저 반공 이데올로기 조성을 위한 것이 아닌지에 대해 많은 의심을 받고 있다. 게다가 이를 근거로 무기와 군사적 보조를 요구하는 이승만의 요구는 미국에게 그대로 묵살당했고, 당시 남한의 경제력은 사야할 무기도 제대로 못 사오는 등 형편없었다.
전차만 해도 한국군은 이미 소련에서 북한에 전차를 지원한 사실을 파악하고 전차의 도입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미국 측은 한국군이 전차를 보유할 경우 이를 이용해 북진을 추진할 가능성을 북한이 남침할 가능성보다 훨씬 높게 보았다. 어처구니 없지만, 사실 그럴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다. 미군이 '남북전쟁 때 수준'이라고 폄하한 한국군의 전력이 한때 인민군보다 강했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실제 인민군의 무력이 우리가 아는 야크기와 땅크 수백대 수준으로 증가한 것은 1949년 말에 들어서였다. 김일성이 무기 값으로 금괴를 보내기 전까지 스탈린이 꿈쩍도 하지 않았던 것. 아무튼 이때부터 북한군도 본격적으로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미국도 이에 대한 첩보를 입수하고 한국군에 전차와 전투기를 지원하는 계획을 세워놓았지만, 계획을 실행하기 전에 전쟁이 터져버렸다.
물론 한반도의 지형적 요건상 전차의 활용도가 높지 않고 한국군에게 지원한 바주카나 대전차지뢰 정도로도 충분히 대응이 가능할 것이라는 판단도 크게 작용하긴 했다. 태평양에선 셔먼으로 그렇게 썰고 다녔으면서?
당시 남한에는 전차가 0대, 전투기도 0대로 연습기만 10여 대가 있었던 반면 북한은 소련제 T-34 242대와 전투기 170여대를 보유한 상태. 당연히 김일성으로서는 적화통일의 구미가 당기는 상황이었다.
북한 내부에서는 서서히 김일성에게 정치적인 힘이 기울어가고 있었다. 연안파 세력은 국공내전에 실제로 참전 중인데다가 소수 조선의용군이나마 입성하다가 소련에게 무장 해제를 당하는 등 북한 내에서 입지를 넓히기에 힘이 달렸고, 소련파 또한 행정가로서는 뛰어났지만 소련에서 태어난 한인 2, 3세로 구성되어 북한 내에 기반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 결과 두 세력은 김일성파에게 협력하는 식으로 정권에 참여해야 했다. 남조선노동당 세력은 활동의 연혁이 오래되어 지지 폭은 넓었으나 말 그대로 남한에서 쫓겨온 식이라 실질적으로 정치적 입지가 좁았다.
김일성은 서서히 이들을 압박해 나갔고, 그 결과 박헌영은 "우리가 남침을 행한다면 남한 해방을 원하는 빨치산 10만 명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호언장담했지만, 1994년 공개된 북한-소련 외교문서에 의하면 김일성은 이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며 남로당 봉기설은 접었다. 출처는 KBS 역사스페셜 한국전쟁 최대 미스터리! 북한군, 왜 3일간 서울에서 머물렀나?#
김일성의 계획안은 대략 이러했다.
- 한반도를 적화통일시킬 경우
- 한국이 소련에 편입될 경우 김일성은 소비에트 연방의 '까레야 공화국' 서기장이 된다.
- 독립을 유지한 상태로 공산국가가 된다면 김일성은 적화통일된 한국의 수령이 된다.
- 전쟁에서 북한이 패배했는데 땅을 잃지 않을 경우
- 이 전쟁에서 북한이 패배하고 땅마저 잃었을 경우
- 멸(승)공통일, 백화통일이라고도 한다. 김일성은 소련으로 망명해서 그곳의 군 수뇌부 중의 한 명이 되거나 중국 간도로 패주해서 북한 임시정부를 꾸린다. 언젠가는 다시 공산국가로 만들게 될 한국의 임시통치자의 직함도 겸하게 된다. 다만 이 정도라도 김일성의 안위를 매우 위태롭게 할 수는 있었겠지만, 위의 군사력 관련 내용을 보라. 정규전 이후라면 모를까, 정면 승부 자체로는 도저히 북한이 질 것 같지가 않았을 것이다.
즉 김일성에게 불리한 카드는 거의 없는 상황이었고, 김일성은 전쟁 계획을 더욱 가속화할 수 있었다. 결국 김일성이 나름대로 생각한 6.25 전쟁은 전혀 밑질 것이 없는 장사인 셈이었다. 이기면 소련과 싸바싸바해서 득할 간도회복+한반도 적화통일하여 공산 대조선국가를 세워 수령이 되는거고 패배함으로 인해서 잃는 것은 자신의 정적들이다. 최악의 경우까지 상정해도 보신할 수 있는 보험이 있었다. 김일성의 이러한 정치적인 목적 역시 6.25 전쟁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김일성 혼자만의 착각이자 망상일 뿐이며 실제로 김일성과 스탈린의 생각 중에서만 비교해본다면 스탈린이 옳은 것이다. 만약 남한을 함부로 건드렸다가 미국과 전쟁에 말려들고 이게 제3차 세계대전으로 번지게 되면 김일성 본인 정도가 아니라 한반도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기본적으로 씨가 마를 수 있고 더 나아가서는 전세계 인구의 과반수 이상이 죽어나갈 수도 있는 엄청난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었다.
제3차 세계대전을 걱정했던 것은 미국도 마찬가지인지라 1.4 후퇴 당시 소련이 북한에 공군을 지원한 걸 미군이 눈치챘으나, 미군은 제3차 세계대전을 우려하여 이 공군이 소련군인 것을 알면서도 중공군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미국과 소련은 서로의 눈치를 엄청나게 봤다. 결국 김일성 혼자만의 야욕 하나 때문에 인류사에 크게 악영향을 끼쳤다.
이에 따라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에 계속해서 지원을 요청했으나 1949년 이전까지 중국과 소련은 북한을 돕기에 곤란한 요소가 많았다.
중국은 비록 마무리 단계이기는 했으나 국공내전을 진행하고 있었고, 소련도 제2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국토가 황폐화된 이래 미국에 대한 군사적 열세 의식을 지니고 있어 참전을 꺼렸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이 국공내전에서 우세를 굳히면서 1949년 10월 1일 정식으로 건국을 선언했고, 1950년 5월에는 전쟁이 종결되었다. 이 때 중국 내 한국인들로 편성해 총괄하였던 조선의용군 2~3만 명이 북한 내로 유입되어 조선인민군을 증강했다.
소련도 생각보다 미국에게 밀리지 않고 냉전이 굳혀지는 상황을 확인했고, 1949년 6월 핵실험에 성공하면서 군사적인 자신감을 회복했으며, 결정적으로 애치슨 라인을 보면서 마음을 돌리게 된 것으로 보는 주장이 있으나, 현재는 소련 문서의 공개로 부정되고 있다.
반면 1949년 후반부터 1950년 초반까지 미국은 동아시아 지역의 정세에 대해 다소 혼란스럽게 생각했던 듯하나, 앞서 언급했듯 대체적인 골자는 '남한 침공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였던 듯하다. 1949년 12월 작성된 미국의 NSC-48/2에서는 한국을 방위 지역에 넣지 않았으며, 1950년 1월 '애치슨 라인'에서도 한국과 대만을 방위 지역에서 제외했다.
미국의 정보기관들이 북한의 공격 준비 움직임을 포착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38선 지역의 교량 건설 작업이나 북한군의 배치 상황 등이 수많은 루트를 통해 맥아더 사령부로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아더는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알면서도 무시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냥 안중에 없었던 것에 가깝다.
애초에 한국은 형식만 맥아더의 관리지 미국정부가 직접 관할하는 곳이라서 맥아더는 일본의 통치에만 골몰했으며, 트루먼을 비롯한 미국 고위관료들의 인식 속에 북한은 소련의 꼭두각시 이미지로 남아 있었기에 미국은 소련이 미국과 전면전을 벌일 생각이 아니라면 북한을 이용해서 남한을 밀고 들어오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전략을 구상하고 있었다. 즉 "남침할 것 같은데 일단 지켜본다"가 아니라 "그래봐야 남침 가능성은 거의 없다" 정도의 태도였던 것이다.
문제는 아래에도 서술되는 바와 같이 영 꺼림칙해하는 스탈린을 김일성과 박헌영이 설득해서 원조 협정을 받아낸 데 있다. 미국의 인식과는 달리 북한 정부는 훨씬 더 독립적인 행동을 취하면서 독자적으로 남침을 계획하고 있었다.
다만 1950년 4월, NSC-68에서는 이러한 눈치를 집약해 좀 더 적극적인 방위안을 계획했으나, 여전히 한국에는 특별한 군사적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1948년 12월, 소련이 북한에 주둔하던 소련군을 철수시키면서 간접적인 압박을 받아 군사 고문단만을 남겨둔 채 1949년 6월 남한에 주둔하던 미군이 철수한 바 있었고, 이를 원하지 않았던 이승만과의 갈등도 커졌다. 앞서 말했듯, 이승만과의 갈등은 도리어 가뜩이나 대대적인 군축중인 미국의 한국에 대한 군사적 지원이 더욱 축소되는 결과를 낳았다.
한편 앞서 언급했듯, 6.25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도 남북간의 충돌은 소규모로나마 제법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1948년 남북한에 독립 정부가 구성된 이후부터 남북한 양측은 각자 내부에서 좌우익 간의 대립으로 혼란스러운 상태였고 38선에서는 크고 작은 국지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육군의 육탄 십용사도 이 당시 이야기다.
주로 개성특급시, 옹진군, 의정부시 등에서 이러한 국지전이 벌어졌는데, 대개 38선에 걸친 산과 봉우리를 두고 분란이 벌어졌다. 개성과 옹진은 도시를 남한이 영유하고 그 뒷산을 북한이 영유한 상태였으며 북한은 여기에 진지 구축을 시작했다. 비교적 뒤늦게 이러한 상황을 파악한 대한민국 국군은 이를 완화하기 위해 38선에서 걸친 고지의 점유에 보다 적극적이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벌어졌다. 단, 이러한 국지전은 1949년 6월부터 8월 경까지 활발해지는데, 여기에 대해서 주한미군의 철수로 인해 불안해진 이승만이 국제적 관심을 환기하기 위해서 공방전에 보다 적극적이었다는 설이 있다.
한편 한국에서도 북한의 남침을 예측하기도 했다. 1949년 12월 17일 정보국이 상부에 올린 '연말종합적정판단서'인데, 놀라울 정도로 북한의 초기 작전을 예측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과 한국 정부는 이 보고서를 무시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북한은 1949년 말까지 남침 준비를 완료했다. 적의 병력은 전차 150대, 항공기 200여 대, 각종 포 2000여 문으로 장비된 10개 보병사단 약 19만여명으로 판단된다. 적은 주공을 동두천-의정부-서울로, 조공을 개성-문산-서울, 춘천-원주, 속초-강릉으로 하여 선제공격할 것이다. 적의 기습 시기는 50년 3월경으로 예측되나 동북 지방의 중공군 출신 의용군 편입이 늦어질 경우 6~8월로 연기될 가능성도 있다. 적의 전차는 아군에 대한 결정적 위협이 될 것이며 공중 지원과 해상 게릴라의 상륙 침투를 병행할 것이다. 남침을 전후해서 무장 공비에 의한 남한 후방 교란 활동을 격화시킬 것이다. 적은 위장된 평화 정치 공세를 더욱 강화할 것이다.
이 보고서는 우파에서 간혹 이야기하는, 박정희가 작성했다는 문서다. 출처는 정재경이 쓴 한국전쟁사 115~116p. 참고.
그리고 6월 중순, 하순은 남한 지역의 농번기였고 당시에는 농업이 국가의 주력산업이었다. 실제로 인구의 60~70%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한국군에서는 농번기에 장병들에게 모내기 휴가를 대대적으로 보내어 6.25 전쟁 개전 당시 한국 육군 전 병력의 3분의 1 가량이 휴가 상태였다. 물론 한국 정부나 국군이 바보라서 이렇게 휴가를 내보낸 건 아니었다.
1950년 2월에 총선거 일정이 그 해 5월로 결정되면서 한국군은 비상대비태세에 돌입했다. 당시만 해도 전후방을 가리지 않고 무장빨치산이 준동하던 때였고 3~4월에 걸쳐 전선에서 '위기설'이 퍼지고 있었던 시기다. 1950년 초반의 신문들을 찾아보면 이때까지도 빨치산 소탕작전으로 정신없던 모습을 볼 수 있다. 문제는 계속적으로 비상대비태세가 발령후 해제되지 않아 전군의 피로도는 심각한 수준에 달해 있었다는 것.
여기에 6월 중순 한국에 방문한 UN 한국위원회에서도 한국군이 불필요하게 비상대비태세를 유지하고 있는 점을 문제삼으면서 한국군은 별 수 없이 6월 23일을 기해 비상대비태세를 전면 해제하고 전 군에 대대적인 휴가를 지시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왜 하필이면 비상대비태세를 해제하자마자 대대적인 휴가를 실시했는지가 의문일 수 있는데, 3개월이 넘게 휴가 외출 외박 없는 비상대비태세를 유지하다 보니 군량미가 바닥났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휴가 장병들에게 건빵을 지급했는데, 상황이 이러니 반대로 건빵은 창고에 가득 남아있었다. 이러니 울며 겨자먹기로 병사들을 밖으로 내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4 전쟁의 전개
해당 문서 문서 참조.
5 미군의 참전과 역할
해당 문서 문서 참조.
6 전쟁의 영향
해당 문서 문서 참조.
7 전쟁에 대한 인식
7.1 명칭에 관하여
미국을 비롯한 해외에서 부르는 'Korean War'의 번역된 명칭인 한국 전쟁 역시 국내에서 널리 사용된다. 위키백과에서는 이 명칭을 쓰고 있다. 한국 전쟁이란 명칭을 사용하는 데에는 대한민국(ROK) 역사상 본토에서 치른 사실상 유일한 전쟁이라는 점, (표면적으로는) 두 'Korea' 간의 전쟁이었다는 점,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학술적 명칭이라는 점 등의 이유가 존재한다. 반대측에서는 자국에서 일어난 전쟁을 외국식으로 불러야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반박한다. 그러나 현재 학술적으로는 '한국 전쟁' 이라는 표현이 "6.25 전쟁"보다 상대적으로 많이 쓰이는 것으로 보인다.
6.25 전쟁은 한국 전쟁 발발일을 강조하여 북한의 남침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서방에서는 가끔씩 Korean war말고도 The forgotten war(잊혀진 전쟁)이라고도 불린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현재까지 가장 많은 미군 사상자가 난 전쟁인데도 불구하고, 베트남 전쟁과 이라크 전쟁에 묻혀 그리 알려진 전쟁이 아니기 때문. 물론 단순히 이런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에 관해서는 아래 문단에 자세히 후술.
한편 6.25 사변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사변'은 선전포고 없이 다른 나라를 공격하는 것이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육이오 전쟁'과 '한국 전쟁'으로 올라와 있다. 옛날에는 남북전쟁이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단어 자체가 1860년대 미국의 내전을 지칭하는 단어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해서인지 요즘은 잘 안 쓰이는 추세.
북한에서는 조국해방전쟁이라 부르지만 물론 현실은 조국훼방전쟁 국내에서는 당연히 이 표현이 통용되지 않는다. 혹시 북한학 관련자를 제외하고 이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 사람이 보인다면 일단 회사에 연락을 취하자. 이 명칭이 북침설을 반박하는 또 다른 이유가 될 수 있는데, 북한이 먼저 공격받았다면 "조국방어전쟁" 혹은 "조국수호전쟁"이라 불렀을 테지 "조국해방전쟁"이라는 말은 쓰지 않았을 것이다.
반대로 한국의 우익단체 중에서도 극히 일부에서는 아예 북한의 정통성이 없음을 보다 강조하는 표현으로 김일성의 난이라는 표현을 쓴다. 더 나아가서는 김일성 가짜설에 의거해 김성주의 난이라고도 한다. 1950년이 경인(庚寅)년임에 착안하여 경인년에 공산당이 일으킨 난이라는 뜻으로 경인공란(庚寅共亂)이라고 하기도 한다. 다만 학술적으로는 전혀 적절하지 못한 표현이며, 현재 절대 통용되지 않는 표현이다.
해외에서야 한국이나 조선이나 모두 'Korea' 로 칭해지니 상관없지만, 대한민국을 제외한 한자문화권에서는 남북한을 어우르는 명칭이 조선(朝鮮)이다. 중국/베트남/일본/대만/홍콩에서는 '한(韓)'은 오직 남한이라는 나라에 한정되는 개념에만 사용한다. 대한민국은 '대한' 이라는 명칭을 밀지만, 북한은 스스로를 '조선'으로 밀고 있으며, 중국이나 일본 입장에선 수백년 동안 존속한 '조선' 이라는 국가와 그 지명이 더 익숙하고, 한국이라는 나라는 2차대전 후 자유주의를 표방하여 서방세계 진영에 선 현대적 국가로서 탄생한 국가이기 때문에 비하가 아니라, 그들에게는 '조선'이라는 이름이 훨씬 익숙하다. 따라서 한국에선 '한국 전쟁'이나 '6.25 전쟁' 이라고 부르지만, 다른 한자문화권 국가들에선 이 전쟁을 대부분 조선 전쟁(朝鮮戰爭)으로 부른다.
중국측에서는 현재 보통 중립적으로 조선전쟁(朝鲜战争)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战争)이라는 표현도 사용되는데, 미국에 대항해서 북조선(북한)을 도와준 전쟁이라는 뜻. 이런 6.25 전쟁에 대한 중국의 인식이 한국과의 국교 수립 이후 문제가 되자 중국에서는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발발하여 중공군이 개입하기 이전까지는 '조선전쟁', 중공군이 개입하기 시작한 1950년 10월 말부터 종전까지를 '항미원조전쟁'으로 구별해서 불러야 한다는 학설이 주장되기 시작했다. 즉 6.25 전쟁의 개전 당시인 조선전쟁은 남북한 간의 내전에 불과하나, 미군을 주축으로 한 UN군의 진격으로 한만 국경에까지 도달하는 등 중국이 위협받기 시작하자 중국을 지키기 위해 북한을 도와 참전한 전쟁인 항미원조전쟁은 구별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항미원조전쟁의 개념을 완전히 부정하면 당시 중공군은 침략군이 되어버리며, 그렇다고 계속해서 밀고 나가자니 한국과의 외교 마찰이 발생하는 모순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낸 조금은 억지스러운 개념. 이게 넌센스인 것이 실제로는 중공은 해방 직후부터 북한군의 창설에 개입해왔다. 조선족 사단을 파견하여 군정대학을 만들고 인민군을 육성, 남침준비단계부터 철저히 개입했다. 또한 6.25 개전 초기엔 조선족 사단이 인민군 안에 편성되어 남침하였고 중공군의 남침시에도 그 길잡이가 되었다. 현재도 조선족 학교나 단체에서는 그것을 항미원조라고 가르치고 매년 기념행사를 갖는다. 동시에 조선족은 이 참전에 대한 포상으로 조선족 자치구를 부여받았다. 이후 타 지역과 병합하면서 오히려 한 단계 낮은 조선족 자치주가 되었다.
일본에서도 '조선전쟁(朝鮮戦争, ちょうせんせんそう)'으로 부르며, 베트남에서도 '조선전쟁(Chiến tranh Triều Tiên, 戰爭朝鮮)'으로 부르고, 대만/홍콩과 같은 중화권에서도 '조선전쟁(朝鮮戰爭)'으로 부른다.
7.1.1 미국의 '잊혀진 전쟁'(The Forgotten War)
미국에서는 이 전쟁을 'Korean War' 외에도 '잊혀진 전쟁(The Forgotten War)', '알려지지 않은 전쟁(The Unknown War)'이라고 흔히 부르며, 한국 전쟁을 다룬 다큐멘터리들은 대체로 이런 제목들이 붙는다. 단어가 문학적이기 때문에 형식을 갖춘 문서의 경우가 아니면 오히려 이 쪽이 더 흔하게 보인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 전쟁 사이에 발생한 데다가,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고(그러나 전사자 수는 수만명에 육박한다. 그만큼 2차대전과 월남전쟁의 스케일이 크긴 했다), 세월이 오래 흘렀기 때문이다. 잊혀진 전쟁 문서 참조.
동 제목의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게임도 있다. 당시 미국 대통령 해리 S. 트루먼의 이름을 따 'Truman's War(트루먼 전쟁)'라고도 부른다.
또한, 미국은 한국전쟁 참전 당시 트루먼 대통령이 제대로 된 전쟁(War, Total War)이 아니라 'Police Action'이라고 발표했다는 것도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트루먼이 이렇게 불렀던 것은 대놓고 선전포고 때리며 전쟁이라고 부르기에는 3차 세계 대전이 두려웠던 것도 있고, Police Action은 유엔헌장 42조와 53조에 합법적인 행위로 규정되어 미국의 참전이 국제법적으로 적법한 행동이었다는 걸 주장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물론 이건 정치적 이유에서의 분류였고, 한국전쟁의 규모나 미국이 투입한 병력을 보면 'Police Action'이라는 말은 그다지 적합하다고 보기 어렵다.
7.1.2 내전이다.
한반도 남부의 대한민국과 한반도 북부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서로를 정식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자기측 중앙정부에 반하는 반국가단체로 여긴다. 이전의 편집자가 미국의 남북전쟁을 예로 들어놨는데, 이건 남부의 독립 시도에 중앙정부가 진압한 성격이어서 이와는 성격이 다르다.
대한민국 헌법에 의하면 북한과 조선로동당은 대한민국의 국토인 한반도를 참절하고 대한민국 정부에 맞서 '정부'를 참칭하는 반국가적 단체이자 반군이므로, 국가보안법에 의거하여 한국 전쟁은 김일성이 일으킨 내란, 김일성은 반란수괴범, 김일성의 부하와 조선로동당원 및 조선인민군은 목적수행범으로 규정할 수 있다. 물론 현실은 시궁창 하지만 실제로 노무현 전 대통령은 한국 전쟁이 내전이라고 밝혔다가 일부 학계의 비판을 받은 바 있다.
남북이 생각하는 서로의 지위가 자국내 반역단체이기에 중공군과 UN군의 참전이 없었다면 서로서로 내전으로 규정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외국군대들의 참전 이전까지만을 내전으로 보는게 옳은 듯하다. 중공군을 파견하여 북한을 도왔던 중국도 1950년 10월을 기준으로 이 전쟁을 둘로 나누어 부르고 있으니 말이다. 중국은 중공군 참전 이전을 조선전쟁, 중공군 참전 이후를 항미원조전쟁이라 하여 따로 취급한다.
7.1.3 국제전이다.
남북한이 각각 국가라는 관점에 의하면, 남북한이 서로를 어떻게 바라보든간에 국제적으로 남북한이 모두 국가로 인정받고 있기 때문에 6.25 전쟁은 국제전이라고 볼 수 있다. 유엔군이 38선 이북으로 북진하려 할 때 반대가 컸지만 무시하고 강행한 바 있다.
실제로 이승만 전 대통령은 평양 '수복' 이후 대한민국 대통령이 아닌 개인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해서 연설했다고 한다. 비록 헌법상 북한지역은 대한민국의 영토이지만 국제적으로는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개인자격으로 방문할 수 밖에 없었고, 이승만도 이를 잘 알았기에 '유엔과 협의해서 대한민국이 북한 지역에 대한 통치를 보장받도록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유엔 총회에서 대한민국이 한반도 전체를 대표하는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받았다고 우기는 주장을 반박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기도 한다.
다만 인용된 자료만 가지고는 당시 북한 지역이 국제적으로 대한민국의 영토로 인정되지 않았다고 볼 충분한 근거가 되기에는 다소 부족한 면이 있다. 또한 극단적 실리주의자인 이승만의 성향으로 봤을 때, 개인 자격 방문은 자격 여부에 개의치 않고 가장 빠르게 평양을 방문할 방법이었기 때문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도 없다. 즉, 개인 자격 방문이라는 것이 북한 지역이 국제적으로 대한민국의 영토가 아니어서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보는 것은 근거가 다소 미약한 편이라는 것.
한편으로는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더라도 6.25 전쟁의 성격을 국가 대 국가의 전쟁으로도 볼 수 있다. 김일성을 그저 소련, 중국의 꼭두각시로 본다면 김일성을 앞잡이로 한 소련, 중국의 대한민국에 대한 침략이므로 명백한 국제전이라는 것이다. 또한 다국적군인 유엔군의 참전을 근거로 해도 국제전이 된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7.2 주한UN군의 참전과 국제적 인식
당사국인 대한민국과 북한에 더해, 전투병을 파병한 참전국의 숫자로 보면 미국 이외에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그리스, 터키, 필리핀, 태국,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캐나다,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구성된 UN군 16개국과 중국의 총 17개국.
의료지원부대를 파병한 국가는 스웨덴, 인도, 덴마크, 노르웨이, 이탈리아, 체코슬로바키아 6개국이다. 여기서 이탈리아는 UN에도 가입하지 못한 상황에서 적십자 소속의 의료지원팀을 꾸려 파견했으며 체코슬로바키아는 북한측으로 파병했다.
그 외에 물자 지원을 포함, 대한민국을 지원한 국가는 총 67개국이다.
6.25 전쟁은 한편으로 역사상 가장 많은 국가가 단 한 나라(대한민국)를 돕고자 지원한 것으로 기록된 전쟁이며 이에 따라 기네스북에 오른 전쟁이기도 하다. 당시 대한민국에 병력, 물자, 전후복구를 지원한 나라는 자그마치 67개국으로, 당시 세계 국가들 중 73%에 달한다. 이 중에는 아이티, 인도네시아처럼 별다른 이해관계가 없었거나 경제력이 낙후된 국가들조차 포함될 정도이다. 특히 영국이나 프랑스 등은 이전에 2차 세계대전까지 타국의 침공을 당했던 경험도 있었기 때문에 이들 국가들은 그 때의 참상을 기억하면서 참전하였다고 한다.
또한 가장 오랫동안 평화협정 없이 휴전이 지속된 전쟁으로도 기록되었고, 지금도 하루하루 그 기록을 계속 경신중이다. 한국전쟁은 명목상(De Jure)으로든 실질적(De Facto)으로든 언제든지 휴전이 파기될 수 있는 현재 진행형인 전쟁으로, 굳이 따질려면 평화협정을 맺은 바가 없는 제3차 포에니 전쟁(...)이 있겠으나, 어쨌든 이건 당사국들이 이미 존재하지 않는 실질적으론 종전된 전쟁이라... 아직도 끝나지 않았고 언제 다시 재개돼도 이상할 것이 없다.
이는 개전 당시 북한이 저지른 명분도 선전포고도 없이 기습적 무력 침공이 전세계적으로도 인면수심의 인물들이나 하는 짓으로 취급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근거 중 하나이기도 하다. 물론 상술했듯 선전포고는 없어도 전쟁 수행이 가능하다. 하지만 여전히 뾰족한 명분 없이 북한이 침공했다는건 충분히 문제될 만하다. 일부 친북 세력들이 '사실 남한 or 미국이 먼저 건드려서 반응한 것일 뿐임!'이라고 우기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북한은 명분을 갖고 싸운거다'라는 주장을 내세워 북한이 인면수심의 장본인이 아니라고 우기기 위한 것이 목적이다.
미국이 이라크와 전쟁을 벌이면서 그 명분으로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다'고 우긴 것을 생각해 보자. 러시아도 남오세티야 전쟁을 벌일때 사실 그 전부터 조지아를 조지려는 생각은 있었지만 먼저 조지아를 치지 않고 조지아가 남오세티야를 침공할 때 까지 기다렸다가 침공이 들어오는 순간 '우리의 동맹을 공격하다니 용서할 수 없다!'면서 바로 기다렸던대로 조지아를 조져버렸다.한마디로, 조지아를 조지고 싶었지만 조지아가 남오세티아를 조지려 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지아를 조진거. 언어유희 쩌네 저 두 국가가 마음만 먹으면 3차 세계대전을 치룰수도 있는 국제사회 초강대국들임에도 주변국들을 상대로 치졸하기까지한(...) 변명을 내세우며 전쟁을 벌인것은 명분 없는 전쟁은 아무나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
관련 기사 이렇게 북한이 인면수심의 장본인 취급을 받은 이유는 역시 이 무렵이 2차대전이 막 끝난 무렵이었다는 사실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2차대전의 악몽이 가시지 않은 통에 비인도적, 비신사적인 침략전쟁이 일어났으니 당연히 세계의 시선이 곱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것. 여기에 당시 세계정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지 겨우 5년밖에 안 된 상황에서 또 전쟁 당시의 후속처리와 후유증을 처리하는데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김일성인간이기를 포기한 어떤 쌍놈이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자기의 야심만 채우려고 하는통에 더 골치 아프게 만든 것이었다. 상술한 것이긴 하지만 당시의 세계정세는 다시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위해 서로 몸사리던 시대였다는 사실을 모르고 설쳐댄 김일성이 악질이었던 것. 당장 수에즈 운하 사건이 일어났을 때 미국과 소련이 영국, 프랑스, 이집트, 이스라엘을 윽박질러 전쟁까지 가는 걸 막으려했던 사실을 상기하자.
이외에 소련과 일본도 비밀리에 참전하여 각각 항공 지원과 소해 임무를 담당했다. 참전한 소련 조종사들은 중국인민지원군으로 위장하기 위해 슬라브계 백인이 아닌 몽골계 혈통의 소련인들로 선발하였고 중국어 및 조선어 학습을 받았지만 치열한 교전 중에 낯선 외국어를 쓰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에 스탈린에게 간절하게 부탁해서 승낙을 받아 실제 작전 중에는 그냥 러시아어로 교신했다고 한다.
물론 그 전에도 긴급상황시 러시아어로 된 무선통신이 들리는 경우를 UN군이 밥 먹듯이 캐치하고 보고했으나, 소련군이 참전했다는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면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까 두려웠기 때문에 해당 보고를 받은 상부 및 지도자층을 포함해서 다 모르는 척했다고 한다. 사실 소련도 공군력 딸리는 북한과 중공을 지원하긴 해야겠는데 대놓고 지원하면 자기들이 귀찮아지니까 비밀스럽게 진행했다. 한마디로 말해 양쪽이 서로 알고도 모른 척 한 셈. 아무리 위장을 한다 해도 조종사는 소련인이고 격추되는 일도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 당시에도 자유 진영이 이 계획을 알게 된다. 이른바 북한 전투기를 격추시켰더니 조종사가 소련군 코쟁이[16]. 이들은 공식적으로는 중국군으로 처리되어 포로 대우를 받았으며, 송환거부포로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중국군은 그대로 송환되었기 때문에 이들 역시 전쟁 이후 중국을 거쳐 소련으로 갔을 것으로 보인다.
이 사실은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 특히 소련 모두 전쟁에 개입하면서도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전될 것을 우려해 최대한 한반도의 영토와 사람 내에서 모든것들이 다 해결되도록 꾹꾹 눌러담아 은폐했으며 더불어 이 전쟁이 한반도 외부로 퍼지지 않도록 힘을 썼다. 그래서 소련은 소련 붕괴전까지 자신들의 전쟁 개입을 부인했으며 실제로 휴전협정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참전국의 숫자만 따지면 위에서도 밝혔듯이 세계 73%의 국가가 대한민국을 지원했으며 북한측에도 막대한 소련의 병기와 중국의 전투병이 지원되었으므로, 6.25전쟁은 거의 세계대전에 준하는 규모의 대규모 전쟁이었던 것이다. UN군의 절대 다수(90% 정도)가 미군이었으나 67개국의 지원국 가운데에는 꼭 병력 지원만 한 나라만 있었던 게 아니라 물자와 의료진, 기술자를 지원한 나라도 역시 매우 많았기 때문에 단순히 병력만으로 지원국을 규정하는 것은 편협한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유엔군으로 참전한 일부 국가의 경우, 이들 나라가 미국과의 특별한 관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국을 지원했다던가, 2차대전 직후 미국 눈치를 안 볼 국가가 없다면서 이들 국가가 유엔군으로 참전한 이유를 단순히 미국 눈치를 보고 미국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이라고 정의하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유럽 참전 국가들은 나토 창설 멤버이기 때문에 참전했다고 치더라도 태국, 에티오피아,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터키, 남아공은 미국의 뜻과는 별개로 참전한 것이다. 또 15개국 군대가 독자적인 작전을 수행한 게 아니라 미군에 배속되어 전투를 했다고도 하는데 이 또한 사실이 아니다. 미군을 포함한 모든 병력은 유엔군 소속이었고 그 수장이 미군 출신인 더글러스 맥아더였을 뿐이다. 다국적 연합군에서 지휘관이 한국군 출신이라고 다국적군이 한국군은 아니듯이 말이다.
사실 UN군의 지휘권이 미군 장성에게 돌아간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한국군이 1950년 7월 초 북한군의 공격을 막고 있는 동안 유엔의 '한국 군사원조 결의'에 따라 미국의 육, 해, 공군이 참전했고, 이어 영국의 해군과 호주의 해, 공군, 뉴질랜드 해군도 전선에 투입됐으며, 이외에도 다수의 유엔 회원국이 참전을 준비하고 있어서 이들에 대한 지휘 통제 문제가 대두됐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트리그브 리 유엔 사무총장은 7월 3일 6.25전쟁의 가장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미국이 유엔군을 지휘하도록 제의했다. 결국 대한민국 방위를 위한 회원국들의 군사행동에 통일성을 유지하고자, 안전보장이사회는 7월 7일 미국이 작성하고 영국과 프랑스가 제안한 '유엔군사령부 설치'를 의결함으로써 유엔군을 지휘하는 통합군사령부가 발족하게 됐다.
이 결의안의 주요 골자는 '안전보장이사회를 대신해 한국에서 침략자 북한과의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권한을 미국의 대통령에게 위임하고, 유엔 회원국들이 파견한 군대를 미국의 통일된 지휘하에 둔다'는 것이다. 유엔 사무총장은 초대 유엔군사령관에 미 극동군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을 임명하고, 그에게 "미국의 작전 임무는 국제 정치상 어디까지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지원하에 이루어진다"는 지침을 전달했다. 유엔 회원국 중 대부분의 국가가 지지하는 가운데 결성된 유엔군은 한국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을 갖고 있으며, 파견 병력 규모와 지원능력 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미국에 의해 좌우될 수 밖에 없었다. 미국 이외의 국가의 참전은 주로 미국의 국무부와 트리그브 리 유엔 사무총장의 협의하에 이루어졌다. (출처: <6.25전쟁 프랑스군 참전사> - 국가보훈처 편저, 2004년)
이와 같이 UN군의 혼란스러운 지휘체계를 안정시키기 위해 UN 안보리와 회원국들이 미군 장성에게 UN군 지휘권을 양도한 것일 뿐이다.
이 전쟁을 보는 시각에는,
- 미국으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진영과 소련으로 대표되는 사회주의 진영을 각각 남북이 대리자의 역할로 전쟁했다는 대리전으로 보는 시각.
- 남북의 국내전으로 보는 시각. 단, 이 시각의 경우 남쪽이든 북쪽이든 각각 처음부터 미국과 소련, 중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왔다. 당장 북한이 초기공세 때 쓴 T-34 전차를 과연 어디서 구했을까? 미국과 중국은 자신들의 '정규군'을 보냈었던 만큼, 서로 UN군이니 의용군이니 하는 그럴싸한 대외적 명분을 내거는 수를 쓰긴 했지만 이렇게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 마지막으로 대리전이 아니라 자유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 자체가 맞부딪힌 세계전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당장 1951년 UN군이 북쪽으로 북상할 때쯤 맥아더가 트루먼 대통령과의 마찰이 생겼는데, 맥아더가 중국(정확히는 만주 지역)에 핵폭탄을 사용해서라도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하자 트루먼은 전쟁의 확대를 우려해서 1951년 4월 11일 맥아더를 해임시킨 바 있다. 이러한 전쟁의 성격으로 인해 한국전쟁은 냉전 시대 세계 각지에서 벌어진 대리전의 시초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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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전쟁의 당사자는 성격이야 어쨌건 남한과 북한일 뿐이고, 중국은 엄연히 제3자이다. 그래서 중공군이 이 전쟁에 개입한 것을 '불법개입'이라고 한다. 그런 중국에 무력 개입을 넣는 순간 당연히 중국이 가만히 있을리 만무하고 중국쯤 되는 큰 국가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다른 공산국가들도 체면상 안 나설 수가 없게 되며 당연히 세계적인 규모의 트러블이 된다.
7.3 유엔과 국제 세계의 시각 및 활동
6.25전쟁은 사실상 거의 유일하게 유엔군이 전쟁의 한 쪽 당사자로 참전한 전쟁이다.
유엔이 성립한 후 개입한 전쟁이나 국제분쟁에서 유엔은 거의 예외 없이 평화유지군, 즉 양측의 성격이 어쨌건 간에 서로를 중재시키고 양측을 대신해 치안을 수호하는 '중재자' 역으로 참여한 반면, 6.25 전쟁에서만큼은 유엔군이 UN 깃발을 달고 북한 및 중공군을 상대로 전투를 수행하였다. 이것은 본 전쟁이 최초이자 거의 마지막이며 이후 벌어진 전쟁에서 유엔군이 한쪽을 위해서만 유엔 명의로 참전한 적은 없다. 베트남 전쟁, 걸프 전쟁, 이라크 전쟁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걸프 전쟁'이나 '리비아 내전'처럼 '안전보장이사회 승인'을 얻은 전쟁이라 하더라도 거기에 참여한 각 나라 군대들은 각자의 명의로 참전하였다.
물론 어느 한쪽이 평화유지군을 먼저 공격한다면 그에 대한 방어전이야 수행하지만 본 전쟁처럼 유엔군이 선공을 당한 것이 아님에도 한쪽만을 위해 적극적으로 참전한것은 분명 의의가 있다. 그래도 시리아 내전을 계기로 자국민에게 잔혹한 정권을 국제 사회의 힘으로 응징하기 위해 다시 결성될 필요성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으나, 본 전쟁과 내전은 그 성격이 서로 극명히 다른 데다 무엇보다 양쪽이 다 악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에 앞으로도 오랜 기간 유엔군이 한쪽을 위해 싸워줄 일은 없어 보인다.
7.4 북침이 아닌 남침이다
2013년 6월에 뜬금없이 고교생들의 6.25 전쟁 인식이 논란이 되었다. 서울신문이 한 여론조사 기관에 의뢰해서 고교생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고교생의 69%가 6.25 전쟁을 북침이라고 생각한다고 응답한다는 기사가 나왔고 이 기사는 보수성향의 국민들에게 심한 충공깽을 일으켰다. 심지어 박근혜 대통령까지도 이 기사를 인용하면서 역사왜곡 문제를 바로잡겠다고 발언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실제 이 기사와 여론조사 설문을 분석해보니 오해하기 쉽게 만든 설문이었다고 한다. 애당초 이 기사의 의도 자체는 고교생의 6.25 전쟁 인식문제를 다룬게 아니라 한국사 교육의 문제를 지적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고교생 69%가 북침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에 보수성향의 국민들과 박 대통령은 이 대목에만 폭발했다는 것. 게다가 설문의 내용도 문제였는데 "한국전쟁을 남침이라 생각하는가 북침이라 생각하는가"라고 단순하게 물어본 것이 화근이라는 지적이 많다.
실제 한 고등학교 교사가 학생들에게 물어보니 북침의 뜻을 북한이 침략한 것으로 아는 학생들이 많았다는 것. 이 때문에 국한문 혼용을 옹호하는 학자들이 학생들의 한문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사실 이건 한문 교육이 아니라 국어와 역사 교육의 문제라고 봐야 한다. 요즘은 한자어라도 한글로만 표시하는 경우가 많은데 왜 '북녘 북'이나 '남녘 남'의 뜻과 소리와 생김새까지 알아놓아야 하는가? 그냥 간단히 '북한이 남한을 침략했다.'라고만 적어놓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한자 표현이 그대로 역사책에 사용된 것도 있고.
2004년 보훈처의 여론조사에서도 학생들의 겨우 0.7% ~~한해 수능보는 학생이 60만명에 12개의 학년이다. 0.7% 약 5천명만이 남한이 북침했다로 응답했고 거의 대다수는 북한의 남침이라고 올바로 파악하고 있었으며, 전교조에서 보훈처가 진행한 여론조사와 같은 질문으로 서울지역 중고생 1499명에게 설문조사한 결과에서도 89.4%가 6.25 전쟁은 북한이 일으킨거라고(남침) 응답했다.
사실 '북침'은 '북쪽으로 침범함'의 뜻이다. 한자어가 줄임말로 만들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예를 들어 '동진(東進)'은 말 그대로 '동(東)'으로 '진(進)'한다는 뜻이다. '동(東)', '서(西)', '남(南)', '북(北)' 등의 한자는 추상적인 방위를 나타내며, 이에 방향성 있는 동사와 결합할 경우 부사로서, 그 동사가 말하는 동작의 방향을 나타낸다. '동진(東進)', '서천(西遷)', '남하(南下)', '북상(北上)' 등의 한자어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17] 결국 국방부는 학생들이 헷갈리는 경우를 줄이기 위해 교육용 용어를 '남침' 에서 북한의 남침 으로 좀 더 명확하게 들리도록 수정했다.
북풍은 북쪽에서 부는 바람이고 상대의 몸에 맞든 발에 맞든 손으로 쏘면 장풍이다. 라는 식의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가 있다면 위에 언급한 품사가 같은 종류인지 생각해보자. 구구절절이 말할 것도 없이 예전에는 "6.25남침"사건으로 묶어서 가르쳤다. 50년 6월25일 새벽 선전포고도 없이 인민군이 남침을 감행했다는 말이 요즘 교과서에는 수록이 안 되어있는 건가? 우리 민족이 2천만이던 시절 300만이 넘는 사상자와 국토의 괴멸을 낳은 근현대사 최대의 사건을 다룬 수업에서 남침이란 핵심단어 자체를 못 들어봐서 북침하고 헷갈린다고 한자 탓이라고 주장한다면 그 교육과정 자체가 문제가 아닐까?
7.5 중국과 6.25 전쟁
마오쩌둥의 아들 마오안잉이 이 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당시 중국군 총사령관 펑더화이는 혹시라도 마오안잉에게 위해가 끼칠까봐 전선으로 보내지 않고 사령부에서 러시아어 통역관으로 근무하도록 했는데 사령부가 네이팜탄 폭격을 맞아 전사했다. 마오쩌둥은 아들이 전사하자 며느리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시신을 중국으로 운구하지 않고 전사한 그 자리에 무덤을 만들라고 지시했고 마오안잉의 영구는 아직까지 북한에 묻혀 있다. 이 묘는 중국과 북한의 혈맹관계를 상징하는 중요한 정치적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시체팔이
7.6 한국전쟁 10대 미스테리
한국전쟁 10대 미스테리 문서.
8 여담
- 만약 6.25 전쟁에서 남한이 졌다면, 미국 정부는 서사모아나 제주도에 신(新)한국 또는 망명정부를 세울 계획이었다고 한다.
한국판 국부천대Korean Jeju - 미국의 역사학자 존 톨랜드가 딘 장군의 유족을 찾아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당시 딘 장군이 전쟁 중에 얻어먹었던 음식 중 하나가 마늘 장아찌였는데, 딘 장군은 마늘 장아찌의 맛에 매우 감탄하여(...) 일부러 하산해서 더 얻어오기까지 했다.
오오 한국의 손맛 오오전후 샌프란시스코 육군장교회관에서 백선엽과 점심을 먹으면서 그가 하는 말이 "백 장군, 요즘 내가 말이지요, 김치를 잘 담근답니다. 한국에서대부분은 포로생활하다가 김치 맛에 푹 빠졌나 봅니다."반면 옆에서 침울한 표정으로 식사하시는 전 미 2보병사단장 카이저 - 정전 협정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전선 각지의 부대에 알리는 전보를 쳤던 사람이 바로 송해였다. 고향이 이북인 송해는 6.25 전쟁 당시 전보병으로 근무했는데, KBS2 김승우의 승승장구에 출연하여 몇 십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히 당시에 쳤던 모스 부호를 기억한다고 밝힌 바 있다. 앞서 소개된 이승만과 로버트슨의 소휴전회담 중 1번 항목의 상호 안전보장 조약은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결실을 맺었다.
- 스탈린은 한국전쟁 중 인민재판에 대한 정보를 전파받자마자 "김일성 동무는 이 미친 짓을 규제하지 않고 무얼 하는 건가?"라며 격분했다고 한다.
그걸 아는 사람이 대숙청을 해?그도 그럴 것이 공산군이라는 집단은 인민의 협조를 얻는 것을 미덕으로 하는데 그 인민에게 반감을 불러 일으키는 짓을 하는 건 정신나간 행태이기 때문이다. - 근세기 가톨릭 성인 중 가장 유명한 성인 중 한 명인 파드레 비오의 경우에는 한국 전쟁을 세상 종말의 전조라는 사적 계시를 하기도 했다. 1950년에 일어난 전쟁은 한국전쟁뿐이므로 한국전쟁을 두고 말하는 게 분명하겠지만, 이 사적계시의 날짜가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거의 5달 전인 2월이다
오오 역시 성인번역이 상당히 조잡하다. - 북한의 남침 1시간전 지구반대편 브라질에서는 제4회 브라질 월드컵의 개막전 킥오프가 있었다.
- 관우의 67대손이자 관평의 66대손인 관충금(關忠金)이 중공군 신분으로 이 전쟁의 1.4 후퇴에 참전하여 국군과 UN군을 사살했다.
- 1960 로마 올림픽과 1964 도쿄 올림픽 남자 마라톤을 2연패한 아베베 비킬라가 이 전쟁에서 에티오피아군 참전부대인 각뉴부대의 대대장 경호병으로 참전했었다.
- 아폴로 계획 당시의 우주 비행사였던 닐 암스트롱 역시 한국전쟁 참전용사이다. F9F-2B 팬서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하였다.
8.1 독도와 일본
한국전쟁의 물자재정지원국이자 몰론 기뢰제거 및 일부 역할[18]을 맡아온 일본은 실상 6.25 전쟁 동안 대한민국령 독도를 국지적으로 계속 노려왔다. 1951년 8월 31일 일본 외무성이 독도를 일본 땅에 편입하려는 의지가 담긴 견해를 표명한데 이어 일본 어선이 맥아더 라인을 침범하여 어업 활동을 벌이자 이승만 대통령이 엄중대처와 재무장 반대를 언명했고 곧이어 대한민국 외무부가 1951년 9월 3일 일본 외무성 주장에 반박했다.
1953년에도 일본 무장순시선 등이 수 차례에 걸쳐 독도에 불법 침입해 독도에 일본 영토 표지목을 무단 설치하고 어로 작업을 하는 우리 어민들을 협박하는 등 독도를 노리자, 홍순칠과 참전용사 33인의 민간인들은 1953년 4월 20일 독도의용수비대를 결성하였다. 이후 독도의용수비대는 현 독도경비대에 순시권을 반환한다.
8.2 유럽 지성계의 반응
한국전쟁은 (비록 명분상이지만) 공산주의 국가가 아무런 명분도 없는 침략 전쟁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불과 몇 년 전까지 나치의 침략과 광기를 겪었던 유럽의 좌파 지식인들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때문에 한국전쟁을 놓고 좌우간에, 혹은 좌파 내부간에 적잖은 논란이 일어나게 되는데, 물론 좌파 일각에서도 북한의 침략 행위를 비판하는 시각도 존재했지만, 대체로 남한과 미국의 도발에 대한 북한의 자위적 전쟁이라며 옹호하는 분위기가 우세했다. 말하자면 북한은 가만히 있는데, 남한과 미국이 자꾸 집적거리니 북한이 자위권을 발동한 것이라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그리고 당시 좌파에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많은 지식인들이 이러한 주장에 낚였는데, 그 중에는 시대의 지성으로 불리는 장폴 사르트르도 있었다. 이러한 얼토당토않는 주장에 세기의 지성까지 낚이게 된 것은 물론 한국에 대한 유럽 지성인들의 무지도 한몫했지만, 파시즘의 피해자이자 파시즘 타도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한 소련에 대한 우호적인 분위기도 한몫 했다. 그러니까 북한의 침략 행위를 사실대로 비판하면 그 북한을 탄생시킨 소련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결국 사르트르는 북한의 침략을 비난하는 모리스 메를로퐁티와 대판 싸우고 결별하게 되는데, 북한의 현 상황을 놓고 본다면 결과적으로 메를로퐁티의 판단이 옳았다. 사실 김일성이 단순히 제2의 스탈린이 아니라 스탈린의 잔혹함에 히틀러의 광기가 더해진, 어찌보면 스탈린과 히틀러를 능가하는 자라는 걸 당시로서는 알 수 없었다. 이 당시 북한 정권은 어쨋든 각종 좌파, 공산 세력의 연합 정권이었고, 레지스탕스 항목에 나와 있듯이 프랑스를 비롯하여 서유럽 각지에서는 자국의 반파시스트, 반나치 투쟁의 중심에 공산주의 세력이 있었기에 공산권에게 진 빚이 있다고 느낀 사람들이 많았다.
9 관련 기록
6.25 전쟁/관련 기록 문서 참조.
10 다룬 책
10.1 역사학계에서
현재까지는 다음 학자들이 역사학계에서 최고의 업적을 이뤘다고 평가받는다.
- 브루스 커밍스 : 한국전쟁의 기원 1은 한국전쟁 발발전까지 남한의 내부상황을 다뤘는데 최고의 실증연구를 보여줬고 실제 많은 한국역사가들이 넘사벽을 느꼈다. 그러나 정작 한국전쟁과 그 이후를 다룬 2권은 추측과 근거없는 음모론으로 가득해서 가루처럼 까였다. 1권은 소련문서 공개 이후에도 가치가 높은 학술서라 평가받는다. 그러나 2권은 당시에도 비판받았고 소련문서가 더 공개되자 가치를 잃었다. 그가 좌파적 시각을 가진 탓도 있을 수 있겟으나 군사학적 분석을 무시한 지나친 실증주의 집착이 주 원인이었다. 반대로 1권은 주로 한국내부를 미군문서를 중심으로 분석했기 때문에 실증주의 집착이 오히려 강점이 됐다.
- 박명림 : 박사 학위 논문으로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주장된 남침유도설을 논파하였다. 사실상 한국 전쟁의 기원에 대한 연구는 박명림에서 완결이 났다고 볼 수 있다. 당시 기준에선 최고의 실증업적을 해냈다는 평가를 받았었다. 학술적인 연구를 할 때 꼭 봐야하는 책이다. 그러나 러시아가 내놓은 한국전 요약의 비중이 크다는 한계가 있다. 이 요약은 당시 스탈린과 소련의 개입을 축소했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됐다. 그리고 아직 미국에서 소련문서 번역이 완벽하게 이뤄진 상황이 아니었다.
- 정병준 : 대한민국, 북한, 미국, 소련의 문서들을 전부 교차검증한 최초의 학술도서다. 실제 정병준 교수는 미군 문서와 북한군 노획 문서를 미국까지 가서 1년이 넘게 직접 확인하고 복사해서 가져왔다. 또한 당시 소련 문서는 미국에서 완벽히 번역된 상태였다. 실증연구로 브루스 커밍스와 박명림을 능가하는 최고의 성과를 이뤄냈다. 이건 정병준이 꼭 박명림이나 브루스 커밍스보다 뛰어난 학자라기보단 당시에 소련문서가 미국에서 완벽하게 번역된 이유도 있고, 정병준 자신도 이점을 자세히 설명하며 미국 측 학계의 대단한점을 저서 '한국전쟁'에서 자세히 설명하며 찬사를 보내고 있다.
- 김동춘 : 대표 연구저서 '전쟁과 사회'
- 박태균 : 한국전쟁 발발 이전부터 한국전쟁 발발, 정전과정 등 개략적으로 다룬 대중역사서
10.2 군사적
아마존에서 'Korean War'로 검색하면 5263종의 책이 검색된다. 절반 이상이 참전용사들의 수기.
퓰리쳐상을 수상한 저명한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핼버스탬(David Halberstam)저《콜디스트 윈터: 한국전쟁의 감추어진 역사》(The Coldest Winter)는 꼭 읽어보도록 하자. 한국전을 둘러싼 열강들의 정치싸움과 맥아더의 삽질을 잘 알게 될 것이다. 단, 미국인이 지은 책인 만큼 한국의 시각과 한국군에 대한 내용은 전무하다시피 하니 이 점은 참고하도록 하자.
군 복무 중인 밀덕이라면 한국군이 편찬한 <한국전사>#를 열람해볼 수도 있다. 몇 가지 버전이 있지만 21세기 들어서 아주 크고 아름다운 파란색 표지 버전으로 6.25전쟁사라는 이름을 새로 붙여서 출간되고 있으며, 11권으로 완간 되었다. 이 <한국전사>는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웹으로도 공개돼 있는데 PDF로 다 공개돼 있으니 관심 있으신 위키러들은 언제든지 참고 가능. 세금이 아깝지 않은 훌륭한 사례 중 하나다. 물론 책으로 소장하려면 구입도 가능하다.[19]위 한국전사는 2016년 현재, "6.25전쟁사" 총3권으로 편찬된 상태. 물론,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홈피에서 다운로드하여 (pdf 파일 30개) 볼 수 있다.
그 외에는 우정문고에서 출판한 책인 <6.25전쟁1129일>이 있다. 내용이 충실하고 지도나 사진등의 자료도 많으니 볼 가치가 많다. 다만 비매품인게 흠. 학교, 국공립도서관에 있는 경우가 좀 있으니 거기서 보자. 계룡대 견학때 무료로 줄때도 있다.
그 이전인 1970~1980년대 출간된 서적들은 대체로 한자의 압박이 좀 크다. 특히 전투사는 아직 재간이 되고 있지 않다. 한자가 후달리는 밀덕에겐 약간 아쉬운 부분. 하긴 영어, 한자는 기본에 일본어/러시아어/독일어 해독능력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코어 밀덕에게는 문제가 아닐지도.
10.3 다큐멘터리
- 컬러로 보는 한국전쟁 - 잔인한 장면이 있으니 시청에 주의할 것.
밀덕질/역덕질은 아니고 개론적이지만 전반적으로 꼼꼼히 설명된 자료를 찾는다면, KBS에서 제작, 방영한 10부작 <한국전쟁> 다큐멘터리를 추천할 만하다. 원작은 1990년에 제작, 방영되었고 그해 방송대상까지 받았던 작품. 이후 2010년에 리메이크되는데 이 때 구 소련 해체 이후 공개된 문서/영상자료와 중국측의 협조를 받은 자료 등을 대폭 보강하였다. 이 다큐에는 전쟁의 배경, 당시 한반도와 관련된 국제적 역학, 관련 인물들의 증언 등이 잘 소개되어 있다. 유튜브 링크 (단, 1편은 빠져 있다.)
특히 1990년판 당시 생존해 있던 여러 관련자들의 증언을 많이 실어놓았는데 DVD에서 갑자기 화면비가 4:3으로 나오는 부분이 있다면 90년판 내용을 활용한 부분이라고 보면 된다. 한편으로는 비참한 전쟁의 충격에 대한 당시 '휘말린' 사람들(참전 당시 끔찍한 기억을 증언하는 군인이나 학살이 일어난 지역의 주민 등)에 대한 인터뷰도 많이 담겨 있다. 다만 DVD 판매 때문에 KBS 홈페이지에서 다시 보기는 할 수 없으며, DVD로 구입해야 하는데 선례들이 그렇듯이 좀 비싼 편.
한편 국내에 소개된 국외 제작 한국전쟁 관련 다큐멘터리로는 1988년에 KBS를 통해 방영된 영국 BBC 제작 다큐멘터리 '한국전쟁(4부작)'과 1994년 SBS에서 방영된 러시아 오스탄키노에서 제작한 '한국전쟁의 실상(2부작)'이 있다.
'한국전쟁의 실상(2부작)'은 SBS에서 먼저 방영되고 다음날 KBS에서 방영되었다. 당초 방송 3사가 공동 구매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SBS 측이 이를 깨고 프리미엄을 얹어서 독점 방영권을 따냈고, 이에 KBS 측이 시청자의 보편적 접근권을 내세워 항의하는 바람에 SBS는 해당 프로그램을 KBS에 무상으로 제공해야 했다. 당시 SBS 가시청권은 서울 및 수도권으로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KBS의 주장은 일리가 있었고, KBS는 정규 편성을 변경하여 긴급 편성 방영했다.
BBC 제작 다큐멘터리 '한국전쟁'은 고품격의 다큐멘터리를 많이 제작한 BBC의 명성에 비해 여러모로 아쉬운 점이 없지 않지만, 당시 국내에서 접하기 어려웠던 중국 인민지원군 참전자들의 증언을 들을 수 있다. 그리고 러시아 오스탄키노에서 제작한 '한국전쟁의 실상'은 한국전쟁 당시 소련, 중국 등 공산권의 동향을 소개하고 있는데, 특히 기밀 해제된 구 소련 문서를 통해 당시 소련이 한국전쟁에 비공식적으로 참전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 외의 한국전쟁 관련 다큐멘터리
- 76인의 포로들 - MBC에서 제작된 2부작 다큐멘터리로 1993년 방영되었으며, 그해 한국방송대상을 수상했다. 한국전쟁 당시 남북한 대신 중립국행을 택한 76인의 포로들의 이후 행적과 현재의 삶을 추적한 다큐멘터리로, 인도, 브라질, 아르헨티나 현지 취재를 통해 제작되었다.
11 관련 작품
외국은 별로 없고,한국의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11.1 문학
- 광장 (최인훈)
-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박완서)
- 그을린 대지와 검은 눈 : 한국 전쟁의 영국군과 오스트레일리아군 (앤드루 새먼 지음/이동훈 옮김) - 전쟁 당시 영국군들의 눈부신 활약 및 지금까지 묵인돼왔던 영국군의 민간인 학살 등을 담은 작품.
- 기억 속의 들꽃 (윤흥길)
- 나무들 비탈에 서다 (황순원)
- 노근리 그 해 여름 (김정희) - 제목애서도 알 수 있듯이 위의 노근리 학살 사건에 대해 아이의 관점으로 서술한 책이다.
- 마당 깊은 집 (김원일)
- 불의 제전 (김원일)
- 목마와 숙녀 (박인환)
- 몽실 언니 (권정생)
- 병신과 머저리(이청준)
- 불꽃 (선우휘)
- 불신 시대 (박경리)
- 비 오는 날 (손창섭)
- 소문의 벽 (이청준) - 주인공이 겪는 중요한 트라우마의 시작이 6.25 전쟁 때의 일이다.
- 수난이대 (하근찬)
- 스탈린의 편지 (노재성) - 대체역사소설.
- 어둠의 혼 (김원일)
- 여명의 눈동자(드라마의 원작)
- 오발탄 (이범선) - 주인공의 동생이 한국전쟁에 참전해 부상자가 되었으며 상이군인도 등장한다.
- 요한 시집 (장용학)
- 유예 (오상원)
- 은마(는 오지 않는다) (안정효)
- 장마 (윤흥길)
- 초토의 시 (구상)
- 태백산맥 (조정래)
- 학 (황순원)
-
고스트메신저:무제경전
11.2 영화
한국 영화가 아닌 것은 괄호 안에 제작국가를 명시하였다.
- M.A.S.H. (미국)
- 고지전
- 그란 토리노 (미국) - 주인공이 한국전쟁 참전자이며 한국전쟁은 중요한 복선 역할을 한다.
- 낙동강은 흐르는가
- 돌아오지 않는 해병
- 마이 워 (중국)[20]
- 맨츄리안 켄디데이트 (미국)
- 배틀 힘 (미국)
- 서부전선(영화)
- 아벤고 공수군단
- 오! 인천 (미국/한국)
- 원한의 도곡리 다리 (미국)
- 웰컴 투 동막골
- 은마는 오지 않는다 - 전시 미군 성매매 관련해서 나온 작품.
- 작은 연못
- 적과의 동침
- 집결호 (중국)
- 태극기 휘날리며
- 포화속으로 - 포항여중 전투에 참전한 학도병들을 다룬 영화.
- 영호작전(미국) - 1952년 개봉. 당시 미군의 민간인 학살을 다루기도 한 독특한 작품. 한국에는 1957년 개봉되었고, 동명의 한국영화가 1967년에 제작된 바 있다. 물론 전혀 다른 영화다.
- 죄없는 병사들(90년 개봉)
- 순교자들(65년 作)
- 병사는 죽어서 말한다 (66년 作)
- 에미의 들(92년 作)
- 격퇴 - 베티고지 전투를 소재로한 영화
- 철모(미국) - 미군과 전쟁고아의 이야기. 다만 인종차별이라는 평도 있다.
- 인천상륙작전(영화) -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해 활약했던 특수부대원들을 다룬 영화.
-
고스트 메신저[21]
11.3 드라마
- 로드 넘버 원
- 서울 1945
- 야인시대
- 여명의 눈동자
- 왕초
- 전우- 6.25 배경인 드라마 로드넘버원과 다른 배경스토리.
- M.A.S.H. - 위 영화의 드라마 판. 문서 참조.
- 삼팔선 - 중국에서 제작한 드라마.... 기대를 말자.
11.4 뮤지컬
- 로기수
- 여신님이 보고 계셔
- 프라미스
11.5 만화
11.6 PC게임
- Conflict: Korea - 1991년 SSI 제작.
- Steel Panthers: World At War - 미 해병대의 장진호 전투를 다룬 Chosin Few라는 캠페인과, 몽클라르 장군이 중공군의 Human Wave(실제 유닛명)을 맞아 고지를 방어하는 시나리오가 있다.
- IL - 2 수투루모빅 1946 - 원래는 없었지만 울트라팩 패치로 인해 한국전쟁맵이 추가되었다.
- 워게임: 레드 드래곤은 한국 전쟁이 직접적인 배경은 아니지만 부산 포위의 작전 계획이 낙동강 방어선, 인천상륙작전과 유사한 부분이 있다.
- 라이즈 오브 네이션즈 확장팩 : 쓰론 앤 패트리어트 - 냉전시대 시나리오에 한국 전쟁을 구현한 미션이 있다.
11.7 Mobile 게임
11.8 노래
12 참고 문서
13 어록
"포탄 맞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요? 조그맣게 갈비 조각이 나요. 사람이 분해돼 버리고 아무것도 없어요. 펑 하고 터지고 나서 가 보면 (손바닥을 반절쯤 붙잡아 보이며) 나무에 창자 조각 요만큼 걸려 있고 살 토막 요만큼 걸려 있고 그래요. 포탄 맞으면 아무것도 없어요…. 버린 게 아니라 (시체를) 찾을 수가 있어야 버리죠. (영화 "고지전"을 보았느냐는 질문에)…그런데 그건 애들 장난이지."- 한국전쟁 참전용사 김달육(8사단 16연대)
"지금 한국 국민이 전쟁 속에서 고통당하고 있는데, 이를 돕지 않는 것은 제 양심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윌리엄 쇼
"모두들 앉아 내 말을 들어라. 그동안 잘 싸워주어 고맙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더 후퇴할 장소가 없다. 더 밀리면 곧 망국이다. 우리가 더 갈 곳은 바다밖에 없다. 저 미군을 보라. 미군은 우리를 믿고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후퇴하다니 무슨 꼴이냐. 대한 남아로서 다시 싸우자. 내가 선두에 서서 돌격하겠다. 내가 후퇴하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 백선엽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끝까지 한국을 지키겠다."- 월튼 워커
"국군은 대통령으로부터 명령을 기다리고 있으며, 명령만 있으면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을 수 있다."- 신성모
"국군이 북진하고 있으니 국민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 6.25 발발 3일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방송. 그리고 얼마뒤 서울이 함락 되었다
"어느 나라에서든 인민은 그들의 주권과 독립을 위해서 유혈전쟁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우리는 승리를 얻기 위해 어떠한 희생도 주저해서는 안되고 지금부터라도 장기전을 계획하지 않으면 안된다."- 박헌영
"야, 이 자식아! 전쟁이 잘못되면 나뿐 아니라 너도 책임이 있어!"[22]- 김일성
""물러 설곳은 없다. 피로써 조국을 사수하자페이크다 이 병신들아""- 인천 상륙 작전이후 평양에 방송된 김일성의 음성. 그리고 몇시간뒤 평양에서 김일성은 도망쳤다
어디서 많이 본모습인데??역시 극과 극은 통한다
서울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십시오. 적은 패주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여러분과 함께 서울에 머물 것입니다. 국군의 총반격으로 적은 퇴각 중입니다. 우리 국군은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할 것입니다. 이 기회에 우리 국군은 적을 압록강까지 추격하여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달성하고야 말 것입니다.- 이승만
"조선통일은 무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미국이 남한 같은 작은 나라 때문에 3차대전을 시작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미국의 개입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23]- 마오쩌둥
"남한은 미국에서 수 천 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나라지만, 그 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든 미국인들에게 중요합니다. 6월 25일 공산주의자들이 남한을 공격했습니다. 이는 공산주의자들이 독립 국가들을 정복하기 위해 군사력을 사용하려 한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북한의 남침은 유엔헌장 위반이고 평화를 침해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도전에 정면으로 대응해야 합니다."- 해리 트루먼
'그 개새끼들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합니다!'
미국은 어려움에 처한 친구를 버리는 나라가 아닙니다.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통일에 착수하자는 조선사람들의 제청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는 중국과 조선이 공동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이고 중국동지들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에는 다시 검토할 때까지 연기되어야 한다."- 이오시프 스탈린
"나는 인천상륙작전이 5000 대 1의 도박이라는 점을 알고 있지만 그 정도 확률을 감당하는 데 이미 익숙합니다. 우리는 인천에 상륙할 것이고 적을 분쇄할 것입니다."- 더글러스 맥아더
"국군과 유엔군은 수도 서울을 탈환했다."- 손원일
"정전의 실현은 외래제국주의연합세력과 미제의 앞잡이 이승만매국도당을 반대하며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수호하기 위한 우리 인민의 3년간에 걸친 영웅적투쟁의 결과이며 우리 인민이 쟁취한 역사적 승리입니다."그래놓고 몇 년 후 자기 스스로 자유를 버린다.- 김일성
"나는 정전이라는 것이 결코 싸움을 적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게 하며 고난과 파괴를 더하고 전쟁과 파괴적 행동으로 공산 측이 더욱 전진하여 오게 되는 서곡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에 정전의 조인을 반대하여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정전이 조인되였음에 나는 정전의 결과에 대한 나의 그동안 판단이 옳지 않았던 것이 되기를 바란다."- 이승만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꽃잎처럼 사라저 간 전우야 잘 자라전우여 잘자라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맨 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불의의 역도들을 멧도적 오랑캐를
하늘의 힘을 빌려 모조리 쳐부수어 흘려온 값진 피의 원한을 씻으리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정의는 이기는 것 이기고야 마는 것
자유를 위하여서 싸우고 또 싸워 다시는 이런 날이 오지 않게하리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6.25의 노래
- ↑ 흔히들 한강 철교라고 잘못 알고 있는 사진이지만, 실제로는 대동강 철교다. 그때 당시 국군과 유엔군은 평양 철수를 하고 있었다.
- ↑ 원 제목은 Flight of refugees accross wrecked bridge
- ↑ 북한이 침공한 것 으로 북침으로 아는 사람이 있지만 북한이 남한쪽으로 침공한 남침이다.
아래에 후술하지만 - ↑ 그런데 북한에선 북침으로 교육하고 있다고 한다.
- ↑ 사실 이탈리아는 한국전쟁 발발 5년 후인 1955년 12월 22일에 UN에 가입했지만 한국전쟁 당시에는 유엔군의 이름으로 참전하였다. 링크
- ↑ 하지만 전쟁 내내 유엔군에 의해서 남측이 해군이나 공군에서는 우세했다.
- ↑ 전쟁 말기 한국군 58만, 미군 34만 가량이었기에 이 이상의 수치로 추산됨. 다만, 최대 수치는 공산군보다 적은걸로 추정.
- ↑ 미군 사망자는 4만 명 가량이고 한국군 사망자가 14만이지만 한국군의 경우 의용군 등으로 입대한 상태에서 전사하여 군복무 기록이 남지 않은 경우. 북한에 억류된 뒤 그대로 거기서 학살당한 사람 등이 굉장히 많아서 정확한 통계를 내기가 쉽지 않다.
- ↑ 보도연맹 등 학살 피해자 20만여 명 포함.
- ↑ 공산군 역시 UN군과 비슷한 사례로 누락된 수치가 많기에 정확한 수치 추산은 힘들다. 그래서 자료를 보면 온갖 추측이 다 있다.
- ↑ 이대근, 현대한국경제론: 고도성장의 동력을 찾아서, 경기: 한울 아카데미, 2008, p.60
- ↑
-625--124496254/1348359.html # - ↑ 영화 백 투 더 퓨쳐 문서의 고증 항목에 나와있는것처럼, 그 당시엔 Korean Conflict라 불렸다.
- ↑ 물론 이 경우에도 사실 관계를 오해한 것이 아니라, '북→남'이라는 침략 사실은 제대로 이해한 상태에서 단지 용어만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 ↑ 만약 진짜로 남침을 유도했다면 꼴랑 로켓포 하나 들려보내는 뻘짓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 ↑ 사실 6.25 전쟁은 하늘에서 제트기가 제트기를 격추시킨 최초의 전쟁이다.
- ↑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한문의 문법은 대별하면 실사(뜻이 있는 글자)와 허사(뜻이 없고 문법적 요소로 작용하는 글자)로만 나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하기 때문에, 품사의 전용성(轉用性)이 매우 크다. 쉽게 말하면 一(일)은 맥락에 따라 '하나'라는 뜻의 명사로 쓰일 수도 있고 '하나로 하다, 즉 통일하다'라는 뜻의 동사로 쓰일 수도 있고 '한 번'이라는 뜻의 부사의 뜻을 나타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북침(北侵)은 '북이 침공하다'로도 충분히 해석될 수도 있고(北을 명사로 해석한 경우), '북쪽으로 침공하다'로 해석될 수도 있다(北을 부사로 해석한 경우).
이건 어거지. 실제 한자는 이렇게 사용되지 않는다. 국한문 혼용 교과서를 사용하던 시절에 공부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사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북침과 남침은 굉장히 오해의 소지를 많이 야기할 수 있는 어휘이다. 이러한 '북침'과 같은, 두 가지 이상의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 어휘의 경우에는 '북한의 남침(북한이 남쪽으로 침공하다)' 등과 같은 추가적 서술을 덧붙임으로써 의미를 확실히 해주어야 한다. 위 설문조사상의 문제는 전술한 바와 같이 단지 '북침인가? 남침인가?'라고 물음으로써 오해의 여지를 남긴 것이다. - ↑ 출처
- ↑ 오프라인상으로는 서울 용산구에 있는 전쟁기념관 내부 1층 우측의 카페에 책꽂이에 판매도서용이라 해서 진열되어 팔고있다. (2016/09/11 수정자의 실제구입경험), 재고가 있다면 1권당 거의 2만원대돈으로 살수야 있겠지만 상업용서적(?)이 아닌 비매품에 가까운 책이라 상설재고 여부는 불투명하다. 책의 분량은 거의 A4크기로 800페이지이다. 군 기관에서 발간한 책인만큼 민간 서적에 비해 훨씬 자세하게 전쟁기간동안 군사적, 전술적 상황에 많은 비중을 할애했다. 두드러진점은 어느 전투, 전역, 작전이 있으면 세부내용과 특정전장의 지리환경, 투입부대, 전투서열과 각 제대 지휘관 성명, 전술지도(?)로 당시 상황 구현과 일자별 각 제대,부대의 전투기록명시가 있다. 구체적으로 대입하자면.. 네이버 블로그에 태평양전쟁 연재로 유명한 파워블로거 대사가 서술하는 내용의 수준이 이 책에서 엇비슷하게 구현되었다고 보면 된다.
- ↑ 중국판 이름은 아적전쟁. 참고로 이 영화의 홍보 동영상이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자세한 건 항목 참조.
- ↑ 작중 등장인물인 사라도령의 설정이 6.25 전쟁 학도병이었다는 설정이지만
당연하게도작중 언급은 없다. - ↑ 1950년 11월7일 피난 당시 만포진에 있는 소련대사관 파티에서 만취한 김일성이 박헌영 부수상과 전쟁에 대한 이견으로 언쟁할때 대리석으로 된 잉크병을 박헌영에게 던지며 한 말.
- ↑ 하지만 지금의 한반도는 전쟁이 일어나면 제 3차 세계대전으로 번질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이 되었다. 세계의 화약고 문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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