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직할시/역사

북한의 수도 평양의 역사를 정리한 문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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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궁전이었던 안학궁 복원 상상도. 어째 지금 북한보다 저기가 더 좋아보인다.

큰 강과 넓게 펼쳐진 평야가 있고, 대륙 문물을 접하기 쉬운 지리적 특성 덕에 한국 역사상 가장 오래 전부터 개발된 지역들 가운데 하나다. 요동 지역을 포함해서 본다고 해도 한국 역사상 거의 최초의 도시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그런데 북한 당국은 평양을 포함한 대동강 유역이 인류 최초 5대 문명 발상지들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하고 있다.[1] 이것이 또 혐한초딩들에게는 좋은 떡밥이 되어 한국인은 뭐든 지들이 최초라고 주장한다 설의 강력한 뒷받침이 되고 있다(...)기사의 댓글에서 정신 상태가 의심이 되는 사람들이 보이지만 무시하자

1 고조선 ~ 한사군

고조선의 후기 수도인 왕검성으로 추정되며, 한나라는 이 지역을 정복하고 낙랑군을 세웠다.

2 삼국시대

고구려들은 내내 평양을 주시하였다. 대무신왕 때부터 여러 번 공략한 끝에 미천왕 때 낙랑을 정복했고, 결국 장수왕 때 이 지역으로 천도(遷都)했다. 엄밀히 따지자면 이 당시 수도 역할을 했던 곳은 안학궁과 대성산성[2]이 위치했던 대성구역 일대였다. 이 당시 궁전이었던 안학궁은 규모가 컸을 뿐만 아니라 안에 수정성도 있었다고 하니 꽤 화려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다.

뒷날 평원왕 때 우리가 흔히 평양성으로 알고 있는 장안성(長安城)[3]으로 천도했다. 이 평양성 자리는 고려, 조선, 일제강점기 때를 거쳐서 현재에도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평양성의 가장 큰 의의는 그 이전의 도성들과는 달리 백성들의 들과 궁전성(城) 안에 함께 존재하는 한국식 도성의 시초라는 것이다. 또한 평양성의 도시 설계는 당시 신라일본의 도시 설계의 동기가 되기도 했다. 역사스페셜 北문화유산 8부작 중 1부 고구려 평양성 편에 따르면 도로가 잘 정비된 계획도시였으며 고구려 때 운하가 있었고 이것은 조선 때까지도 존재했다. 이 당시 도로들 가운데 일부가 현재의 평양에서도 도로로 쓰이고 있다.[4] 또한 의외로 많은 양의 낙타가 있었으며, 온달 설화에 의하면 당시치고는 상업 수준이 꽤나 정교하게 발전하였다.

이 당시 고구려의 두소(수도)였던 만큼 고구려의 유적들이 꽤 많다. 안학궁과 대성산성, 고구려 목교, 평양성(부속 건묵물들로는 대동문, 보통문, 부벽루, 연광정, 을밀대, 칠성문, 을밀대, 칠성문), 고구려 시대 무덤들 등 을 비롯한 수많은 고대 유물들이 만들어졌다. 그에 맞춰서 오랜 역사의 도시답게 많은 설화들도 함께 내려오고 있으며, 북한에서 이러한 것들을 묶어서 발간한 책도 있다. 물론 고구려의 유적들 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고조선, 낙랑과 그 이후의 고려, 조선 때의 유적들도 많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통일 뒤 평양을 개발하는 것이 경주처럼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3 남북국시대

기록이 자세히 남아있지 않다. 다만 평양이 통일신라발해의 변방에 위치하고 있었고, 두 세력 모두 평양을 접수했다는 기록이 있기는 하다. 고구려가 멸망할 때 많은 주민들이 당나라에 끌려갔고, 보장왕의 서자로 알려진 안승(安勝)이 평양의 인구가 얼마 남지 않아서 슬퍼했다고 한 기록도 있는 것을 보면, 전쟁으로 인한 인구 이탈이 상당했던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일단 발해의 경우 정약용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서는 발해가 점유하는 것을 실패했다고 한다. 하지만 유득공발해고(渤海考)에서는 발해가 평양을 접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통일신라의 경우 위치를 확실히 알 수 없는 북방의 패강진(浿江鎭)이 평양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 지리지에서는 패강진에 관한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이 시기의 평양은 통일신라와 발해의 경계에 있었기 때문에 몰락한 옛 성터 취급을 받았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DMZ

4 후삼국시대

예성강 연안의 패서 일대가 궁예에게 투항하자 평양성주 검용(黔用)이라는 자가 같이 투항했다는 기록이 있다.

5 고려

개국 초부터 평양을 다시 건설한 뒤 서경(西京)이라고 불리면서 중요한 도시로 취급되었다. 서경 세력들이 지나치게 강성해지면서 때로는 개경문벌귀족 세력과 대립하기도 했으며, 그 때마다 토벌군이 편성되어 서경 세력들을 토벌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그 가운데에서도 최대의 서경 봉기라고 일컬어지는 묘청의 난에서는 왕이 서경 사람들을 함부로 죽이지 말라고 당부했으나, 계속되는 항전에 악이 받쳤는지 진압군 세력은 서경을 가혹하게 공략했다. 이러한 거듭되는 항쟁이 반골 기질로 받아들여져서 서경 출신들은 권력에서 배제되었으며, 이런 이유에서인지 당대 평양은 외적에게 항복하거나 항전을 거부한 예들이 부지기수로 많다.

6 조선

조선시대에는 평안도 평양부로서 고려 때와 마찬가지로 북부 지방의 최대 거점도시 역할을 했다.

역시 조선시대에도 수도(한양)에 이은 제 2의 도시 지위를 유지했으며, 수도와의 지역감정도 이어갔다. 조선 조정의 차별 때문인지 당시 평양 사람들은 벼슬길에 진출하기보다 상업에 열중했다. 그래서 당대 평양은 개성과 함께 조선에서 손 꼽히는 상업도시였다. 이 차별이 극대화되서인지 결국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강계, 함흥, 해주, 진주를 포함해서 기생들이 많기로 유명했다. 고우영 일지매에서도 일지매가 평양에 간다고 하자, 월희가 "평양은 색향인데 다른 여자를 만나면 어쩌나" 하면서 걱정했을 정도.

평양에 주재하며 평안도를 관할하는 평안감사는 조선시대 3대 지방관으로 나주목사, 과천현감[5] 과 더불어 가장 선망하는 부임지였으며 특히 평안감사는 기백(箕伯)으로까지 불리웠다. 기자의 영지를 다스린다는 뜻. 기자조선의 수도가 평양이었고 이 곳에 기자의 사당이 있었기 때문이다.
'평안 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란 속담도 이 평안 감사의 위세에서 기인한다. 다만 이를 '평양 감사'라고 잘못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평안 감사가 평양에 주재하고 평양부를 관리하는 평양 부윤 직책을 겸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대한제국이 들어서면서 1902년 쯔음부터 평양을 제 2의 수도인 서경(西京)으로 육성하려는 계획이 있었으며, 풍경궁 또한 이 때의 유산이지만 얼마 안 가 일제 침략으로 국권피탈이 되면서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7 일제강점기 ~ 북한

일제강점기 때에도 평양은 여전히 기호지방과의 지역감정을 이어갔다. 오늘날 남한(대한민국)에서는 영호남의 지역감정이 유명하지만, 남북 분단 이전까지만 해도 기호지방과 평안도와의 지역감정이 가장 유명했고, 역사 또한 1000년 넘게 이어져 내려와 훨씬 더 깊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당시 가장 인기가 많았던 스포츠 경기가 바로 경성부(서울) 대표 팀과 평양 대표 팀이 겨루는 경평축구전이었다.

특이점으로는 일제강점기 당시 개신교세가 한국 전체에서 유난히 강했는데, 당시 '조선의 예루살렘'이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하였을 정도였다. [6] 왜냐하면 당대 평안도 주민들은 조선 조정의 차별 때문에 조정에 대한 반감이 심했고 평양은 당대에 조선에서 손에 꼽힐 정도의 상업도시였기 때문에 신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에 적극적이었다. 게다가 1907년에 평양 장대현(章臺峴)교회[7]에서 시작된 대 부흥으로 인해 평양평안도 지역은 개신교의 세가 더더욱 빠르게 성장했었다. 1907년에 장대현교회에서 시작된 평양 대 부흥 사건은 현재 남한개신교 단체에서 한국의 개신교 역사에 대해 논할 때 결코 빠지지 않고 이야기가 나오는 중요한 사건이라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일제가 패망, 한국 북부에 소련군이 진주하고 남북분단이 발생하면서 북한의 임시수도가 되었다. 6.25 전쟁 중인 1950년 10월 19일부터 12월 2일까지는 일시적으로 북한의 통치권에서 벗어나기도 했지만...

그 이후 원래의 입지조건 + 북한의 수도라는 점 때문에 원산시와 함께 도시 전체가 폭격으로 완전히 폐허가 되는 비극을 맞이하고 만다.[8] [9]김일성 스스로 "평양에 성한 집이 초가집 2채밖에 없었다"고 할 수준.

따라서, 한국전쟁 이후의 평양은 몇몇 명승고적을 제외하고는 새로 만들어진 도시다.
지금은 전쟁을 대비하여 도시자체가 요새화되었으며 그중에서 저고도 대공망은 상당한 수준이다. 낡아 빠진 대공포를 주로 사용하지만 대신 이를 벌충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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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전세계에서 저고도 대공망이 가장 조밀하게 구성한 지역이다.
물론 모스크바 대공망처럼 세계 최강수준은 아닌 것이 고고도 대공망은 6포대의 S-200이 전부이다. 때문에 한국군은 대량의 매버릭벙커 버스터, 팝아이 지대지 미사일을 대량으로 운용하고 있다. 덕분에 북한군은 빈약한 공군전력중 그나마 상태가 좋은 MiG-29 40대 전량을 평양근처에 대기해 놓고 있으며 대량의 GPS교란 장치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한마디로 한국판 바그다드인 셈이다. 그외 최근 북한의 군사퍼레이드에서 S-300으로 추정되는 신형방공무기가 튀어나와 군당국을 긴장시켰다. 하지만 고고도 공격에 취약하기에 폭격기를 사용한 공격에는 속수무책이다. 때문에 과 주일 미공군기지에서 B-52가 항시 대기중이다. 옛소련의 공화국이나 중국의 라이센스인 HQ-9라고 추정. 물론 바그다드의 사례에서도 알겠지만 한국과 미국에서 작정하고 를 던저대기 시작하면 대책이 없기는 피차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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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참고로 현재 학계는 평양이 고조선의 중심지가 된 것은 BC 3세기 초반에 고조선이 연나라에게 요동지방을 털리고 난 뒤의 일일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2. 전시(戰時)에 임시 수도 역할을 했다.
  3. 당연히 중국의 시안(西安)이 아니다. 동북공정을 주장하는 중국인들이나 해괴한 주장을 하는 환빠들에게 좋은 먹잇감이 될 수도 있는데, 성(城)을 뜻하는 고유어인 '잣'과 내부를 뜻하는 고유어인 '안'을 음차한 표기라고 하는 견해가 있다.
  4. 물론 당시에 만들어진 도로는 현재의 포장도로 밑에 묻혀서 유적으로만 존재하는 상태다.
  5. 조선시대 과천의 지역은 현재의 경기도 안양시, 군포시, 과천시, 서울특별시 관악구, 동작구, 서초구 대부분이다. 지금의 과천시는 여러 지역이 다 떨어져 나가고 남은 그 일부에 불과하다.
  6. 한편 당시 대구광역시가 좌익세력이 매우 득세해 조선의 모스크바라고 불렸는데, 뒷날 두 도시는 정반대 성향으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아이러니.
  7. 순우리말로 널다리골교회라고도 불린다.
  8. 이 과정에서 영명사풍경궁 등을 비롯한 수많은 유서깊은 유적들도 파괴되었다. 정말로 안타까운 일.
  9. 12월 2일~4일, 국군과 유엔군의 평양 철수 이후 북한군은 중공군과 함께 평양에 다시 진입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