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godrag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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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 베어스NC 다이노스넥센 히어로즈LG 트윈스
KIA 타이거즈SK 와이번스한화 이글스롯데 자이언츠
과거에 참가했던 구단 보기 ➡
삼성 라이온즈kt wiz
200px
엠블럼[1]마스코트
블레오
삼성 라이온즈
Samsung Lions
창단1982년 2월 3일
법인 설립1982년 3월 5일
구단 법인명㈜삼성라이온즈
영문명칭Samsung Lions Co., Ltd
업종명스포츠 클럽 운영업
상장유무비상장기업
기업규모대기업
연고지대구광역시[2]
구단 연고지 변천대구광역시 (1982~)
구단명 변천삼성 라이온즈[3] (1982~)
구단주김재열[4][5]
사장김동환[6]
단장홍준학
감독김한수
마케팅팀장이**[7]
홈 구장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 (2016~)
(29,000석)[8]
포항 야구장[9]
(12,000석)
2군 구장삼성 라이온즈 볼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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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드 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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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우승
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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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 2005, 2006, 2011, 2012, 2013, 2014
역대 우승 엠블럼
파일:Attachment/samsunglionsks1985.png파일:Attachment/sl2002.png파일:Attachment/samsunglionsks2005.png파일:Attachment/samsunglionsks2006.png파일:Attachment/samsunglionsks2011.png
1985년2002년2005년2006년2011년
파일:Attachment/samsunglionsks2012.png파일:Attachment/samsunglionsks2013.png파일:Attachment/삼성 라이온즈/samsunglionsks2014.png
2012년2013년2014년
2011년 아시아 시리즈 우승 팀[10][11]
삼성 라이온즈
삼성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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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라이온즈수원 삼성 블루윙즈서울 삼성 썬더스대전 삼성화재 블루팡스
용인 삼성생명 블루밍스삼성 갤럭시삼성전자 육상단삼성전기 배드민턴단
에스원 태권도단삼성생명 탁구단삼성생명 레슬링단삼성전자 승마단

1 개요

KBO 리그의 프로야구단. 연고지는 대구광역시. 롯데 자이언츠와 함께 원년부터 연고지와 이름 변경없이 KBO 리그를 지켜온 두 팀중 하나이자, 한국 프로야구 역대 최다승 기록을 가진 한국프로야구의 구단이다.[12]

모기업이 삼성그룹인 팀답게 KBO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2000년도부터 KBO에서 메인 스폰서를 도입했는데, 2000년부터 2004년까지 삼성증권, 2005년부터 2008년까지 삼성전자에서 메인 스폰서를 맡아왔다. 팀의 상징색은 파란색 & 빨강색-하늘색(연파란색, 1984년부터 1994년까지)[13]-파란색(1995년부터).[14] 팀의 마스코트는 블레오.

한때 삼성스포츠단 중 유일한 독립 법인으로서[15], 축구단을 제외한 다른 스포츠 팀들이 그룹 계열사의 부서 형태였지만 삼성 라이온즈는 삼성그룹 계열사의 위치를 가지고 있으며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말대로 특정한 계열사가 독점하지 않고 지분을 각각 나눠 가지고 있었다.[16] CJ, 신세계까지 포함한 범 삼성가가 모두 지분을 가지고 있었던 셈.

2015년 제일기획이 삼성 라이온즈 지분 67.5%(12만 9,000주)[17]를 6억 7천만원에 매입했고 .2016년 1월 1일부로 제일기획 산하의 스포츠단으로 편입되었다. ##. 기사에 따르면 2015년 이후로 삼성 라이온즈도 제일기획 산하 구단으로 변경 된다는 말이 있었고 이에 대해 제일기획에서는 부인했었으나 최종적으로 허리띠를 졸라매는 삼성그룹의 정책상 제일기획 산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법인 회사이기 때문에 같은 그룹의 축구단과 함게 제일기획의 자회사로 편입된다.[18]

알게 모르게 묻히는 사실이 있는데, 월드컵이 개최되는 해에 성적이 가장 좋은 팀이다. 어느 구단 문서에도 월드컵에 성적이 좋다고 쓰여 있지만, 이 팀 앞에서는 명함도 못내민다(...)[19] 당장 1982년부터 한국시리즈에서 준우승했고, 이후 1986, 1990, 2010년도 마찬가지로 준우승을 거둔 바 있다. 하지만 우승도 2002년, 2006년, 2014년 총 3번이나 달성하였다. 1998년에도 한국시리즈는 진출 못했으나 플레이오프 직행까지는 했다. 월드컵 열리는 해에 가을야구 못한건 1994년 한 번 뿐이다. 그때야 얼마 없는 삼성의 암흑기였으니까... 근데 따지고 보면 월드컵때만 유독 성적이 좋은게 아니라 그냥 원래 성적이 좋다보니 얻어 걸린거 같은데...

2 팀 특징

해태-KIA 타이거즈와 쌍벽을 이루는 KBO 리그 최고의 명문 구단
2011년 2014년까지는 삼성 제국

2.1 팀 컬러

4대 구기 종목 감독들이 뽑은 최고의 팀
전통적인 팀 컬러는 백수의 왕 사자라는 이미지답게 공격적이고 힘이 넘치는, 화려한 야수진을 앞세운 공격 야구로 이에 비해 아쉬운 투수진[20]이라는 색채를 띠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건 1990년대 후반의 삼성 모습이고, 그 이전에는 강력한 타선과 강건한 수비력 그리고 강속구를 던지는 에이스 투수, 이것이 과거의 삼성 라이온즈의 이미지였다.

한창 삼성이 잘 나갈 때의 클린업트리오 사기타선은 두 형태였다. 1980년대 중반의 삼성 타선은 어떤 교타자가 안타를 치든 볼넷을 골라나가든 어떻게든 누상에만 나가면 4번타자가 나와서 홈런을 뻥 쳐버리고 그 뒤에 나오는 세 명의 타자 중 한 명은 연이어 반드시 장타를 쳐버리는 그런 형태였다.[21] 그리고 2000년대 초·중반은 이마양이라는 이 단어 하나로 모든 것이 정리된다.

2000년대 중후반, 선동열 감독 시절에는 강력한 불펜과 마무리 투수를 통해 승리하는 팀이 되었다. 대신 타선은 전체적인 리빌딩이 가해지면서 상대적으로 약해졌다. 타선으로 이기는 경우도 종종 있긴 했지만. 몇몇 삼성 올드 팬들은 선동열 감독 부임 이후 예전부터 고수해 왔던 뻥 야구 스타일에서 벗어나 뻥 야구도 철벽 투수진도 아닌 어정쩡한 팀이 되었다며 불평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투수진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KBO 최고 수준이고, 야수들 수비력도 수준급이다. 다만 윤성환이나 장원삼 등 준수한 1선발급 선수들도 있긴 했지만, 류현진같이 리그를 씹어먹는 이미지는 아니었다. 둘 모두 큰 기복 없이 꾸준히 성적을 올리는 스타일.

이후 2011년 유격수 출신 류중일 감독이 취임하면서 배영섭이나 정형식같은 유망주가 발굴되고 최형우, 박석민 등 새로운 주포들의 각성으로 공격 야구가 다시 살아나며 2011년 정규 시즌, 한국 시리즈, 아시아 시리즈를 모두 우승, 국내 최초로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였다. 2012년에는 이승엽까지 일본에서 복귀하며 타선이 더욱 강화되었고, 2014년에는 비록 역대급의 타고투저의 흐름을 타긴 했으나 1987년에 삼성이 세운 팀타율 0.300을 뛰어넘는 0.301의 팀타율 신기록을 세웠다. 2015년에는 0.302로 더 높였다. 팀 타율이 3할을 넘어간 것은 한국프로야구 개막 이래로 (2015년까지) 삼성 라이온즈가 유일하다.[22]

하지만 여전히 투수진이 강한 팀이다. 2013 시즌 윤성환, 배영수, 장원삼, 차우찬이라는 토종 10승 투수 4명을 배출하였고, 외국인 투수들이 부상에 시달리지 않고 좀 더 분발했다면 5명의 10승 투수를 배출하는 흔치 않은 일이 일어날 수 있었다. 외국인 선발까지 포함해 2014 시즌은 준수한 선발자원인 차우찬이 본의 아니게 롱 릴리프로 전업을 하게 되었을 정도, 그리고 불펜진은 KBO 최강이다. 홀드왕 한현희와 구원왕 손승락이 있는 넥센도 볼 만하지만(넥센은 선발진이 안좋다.) 2012년 5월 24일 대구 롯데전부터 7회까지 리드한 경기서 단 1패도 없이 무려 130연승을 내달렸다. 2012년 58경기, 2013년 62경기, 그리고 2014년 10경기를 더해 ‘130연승’을 채웠다. 안정권KO라 불리는 전통의 불펜진에, 정현욱과 오승환이 떠나고 2014년 팀 투수진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 와중에도 9개 구단 중 유일하게 5선발 전원이 100이닝을 소화했으며, 그 부진하다던 투수들의 호투로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제패했다. 이 정도면 삼성 라이온즈는 원조 투수왕국을 넘어선 新 투수왕국이라 할 수 있을 정도.

2.2 팀 운영 방식

전체적으로 부유한 이미지의 팀이다. 또한 전력 자체는 좋지만 구단 운영은 그룹 고위층의 생각에 의해 좌우되는 팀이다. 현재는 팬들의 힘이 세진 데다 프런트 내부의 지속적인 반성을 통해 선수들에게 연봉 높고 대우 잘해 주는 대인배 이미지의 좋은 팀이 됐지만 옛날엔 비싸게 사와서 쓰다 버리는 전형적인 삼성식 운영으로 악명이 높았다.[23] 대표적인 예로 이만수, 김시진, 장효조 등 한국 야구의 전설이자 팀 프랜차이저들을 매몰차게 내친 것은 유명하며, 원년부터 활동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공식 은퇴식을 치뤄 준 선수가 류중일, 김현욱, 김한수, 전병호, 김재걸, 양준혁 여섯밖에 없다는 것 자체가 선수들을 어떻게 생각해 왔었는지 잘 보여 주는 사례.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2002년 V2 이후로부터는 팬덤과 팀 내에서 만연했던 우승제일주의가 충족되면서 저런 행보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점. 우승 이후 프런트는 기존 프랜차이즈 스타들의 대우를 개선하는 데 힘을 기울여서, 2003년에는 뒤늦게나마 이만수를 영구결번 시켜주기도 하고, 최근에는 레전드들을 코치로 기용하는 등의 행보도 보이고 있다. 은퇴식도 신경써서 치뤄주는 건 덤. 참고로 은퇴식을 치뤄 준 선수들 중 2002년 이전에 은퇴식을 한 선수는 2000년 류중일밖에 없다. 그러나 2015년을 기점으로 다시 그 악명 높던 삼성식 운영이 스물스물 돌아오기 시작하고 있다. 이런기사이런 글이 올라올 정도로 도박사건에 대한 부실한 대응, 팀프랜차이즈 박해, 용병 계약과 관련해 악의적인 언플등 모든 팬들이 80-90년 악명높던 프런트가 돌아왔다며 분노하는중. 그리고 2016년 류중일 감독의 재계약건등을 보면 아직까지는 팬들의 목소리보단 그룹 고위층의 입김이 구단 운용에 더 강하게 작용한다고 보여지고 있다.

김응용 감독 시절까지는 자금력을 바탕으로 한 적극적인 선수 영입으로 한국 야구계의 뉴욕 양키스 같은 올스타 팀 이미지였는데, 선동열 감독 부임 이후 선수 영입을 자제하여 그 이미지가 희석되었다. 가장 큰 계기는 2003년 우승 팀 현대에서 FA로 풀린 심정수와 박진만을 각각 4년 최대 60억, 4년 최대 39억이라는 어마어마한 돈[24]으로 영입하여 05년 우승을 이룬 이후, '그렇게 돈 써서 우승 못하는 팀이 어디 있냐'는 말에 기분 상한 선동열 감독이 FA 영입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2.2.1 2000년대, 돈성시대

2002년 전까지 계속된 한국 시리즈 우승 실패로 인해, 외환 위기 이후에는 타 구단들의 경영난을 틈타 무지막지한 자금력으로 선수들을 영입하면서 현대 유니콘스와 함께 야구계를 돈으로 양분하기도 했었다.

현금 트레이드로 데려온 임창용조계현(해태), 김기태김현욱(쌍방울)을 비롯해 2000년 FA 제도가 도입되면서 이강철(해태)과 김동수(LG)를 영입한 것을 시작으로 2002년에는양준혁(LG)를 재영입 2004년에는 박종호(현대)를, 2005년에는 가장 임팩트가 큰 박진만심정수(현대)를 FA로 영입했다. 이외에 해태에서 방출된 이순철을 영입하거나 선수협 파동으로 소속 팀과 갈등을 빚은 마해영을 트레이드해 데려오는 등, 한동안은 우승만을 위해서 외부 자원들을 마구 영입하기도 했다.

이렇듯 투자를 가장 많이 하는 팀임에도 불구하고 2002년 전까지는 임팩트가 있는 성적을 내지 못했다. 20세기 콩라인. [25] 분명 삼성의 공식 첫 우승은 1985년임에도, 삼성이 콩라인을 탈출한 건 김응용 감독이 온 후 2002년 한국 시리즈 우승으로 알고 있는 야구 팬들이 적지 않다. 심지어 삼성 구단과 선수, 팬들조차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며, 한국시리즈 우승 뒤에야 85년 우승 기록도 자신있게 우승 기록으로 얘기하게 된다. 또한 다른 팀이 보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투자를 많이 하는 탓에 돈성, 돈성 타이콘츠[26]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나마 삼성이 돈성의 오명을 벗은 것은 김재박 당시 현대 유니콘스 감독이 '돈으로 누가 우승 못 해'라고 디스를 걸어[27] 빡돈 선동열 감독이 FA 영입을 자제한 이후부터이다.[28] 사실 박진만과 심정수 영입 후, 2009 시즌 개막 전 장원삼(히어로즈) 30억 현금 트레이드설 전이나 그 이후 타 팀에서 큰 돈을 들여가며 데려온 선수는 없다. 트레이드로 데려온 KIA의 손지환, 한화의 심광호 정도. 김재박 감독의 발언 후 2009년에도 처음으로 데려온 선수가 트레이드로 영입한 두산 베어스채상병. 이 경우는 좌완 투수 지승민과의 1:1 트레이드였으니 돈과는 상관없다. 그리고 진갑용현재윤의 부상만 아니었으면 당연히 하지 않았을 트레이드였다.[29]

김재박 감독의 발언 후 자체적으로 짜임새 있는 투타 라인을 리빌딩하면서 돈성 오명에서 벗어난 상태였으나 2008년 11월 14일, 히어로즈장원삼을 30억에 지르며 돈성의 건재함을 과시했다. 이후 다른 6개 구단의 반발로 인해 트레이드 승인 불가를 받아 장원삼을 돌려보냈지만, 1년 후에 결국 영입했다.

선동열 감독도 FA 영입을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니었다. 2010년 거포 FA 김태균도 영입하려 했으나 엔화에 밀려 실패했다.

하여간 이런 인터뷰가 개그 소재가 될 정도로 삼성의 머니 파워는 대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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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KBS '미디어 포커스'에서의 전화 인터뷰 장면 캡쳐. 여담이지만 이 당시 프로그램에서는 케이블 스포츠 채널 3사에서 삼성 경기의 중복 중계가 심각함을 제시했고, 스포츠 방송사들은 삼성 구단과의 계약(= 몇 경기 이상 중계하는 조건으로 돈 얼마를 받는 조건) 때문이라 주장했다. 이 장면은 그에 대한 반박[30]. 이 당시 삼성 라이온즈의 중복 중계는 심각한 수준이어서, 지금처럼 4개 채널이 확보되지도 않은 환경이었고 당시 신생 채널이었던 엑스포츠는 MLB만 중계하던 상황에서 삼성 경기 중계율은 100%를 초과했고 다른 팀들이 피해를 입었다. 특히 상대적 비인기 구단인 현대, SK(당시 중계율 7, 8위)가 많이 중계되지 못했다. 그러나 SK는 이 보도 이후 후반기 상승세로 결국 중계율 2위에 오른다. 응?

2.2.2 2010년대, 거지성

그러나 류중일 감독 시절에는 정말로 외부 FA 영입에 돈을 거의 쓰지 않아서 팬들이 이제 돈성 소리 들어도 좋으니 제발 돈 좀 쓰라고 하는 지경에 다다랐다. 2016년 기준으로 외부 FA를 12년째 잡지 않고 있는 팀이다. 특히 2013년 우승 이후엔 단장 송삼봉이 '50억이면 2군에 투자할 수 있는데 외부 FA를 왜 영입함?', '그 돈이면 특급 외국인 하나 데려오고 FA 하나 나가면 젊은 애들 1군에서 육성할 수 있음'이라는 개드립(...)을 친 덕에[31] 팬들마저 '우리는 더 이상 돈성이 아니라 거지성이다'라고 자조할 지경.

뭐 사실 이렇게 엄살(?)을 부려도 내부 FA는 잘 잡았다. 장원삼을 4년 60억 원에 잡았고 박한이를 4년 28억 원에 잡았으니... 정현욱이 떠나긴 했지만, 이 경우에는 떠나기 전후의 성적으로 미뤄봤을 때 삼성이 놓쳤다기보다 오버페이하기 싫어 놔준 것에 가깝다. 반드시 잡아야 하는 집토끼는 모두 단속해냈다는 이야기. 또한 2014년 핵심 전력이였던 윤성환안지만을 각각 4년 80억 4년 60억으로 잡고 내야 유틸리티인 조동찬선수를 4년 28억에 붙잡았다. 그러나 배영수와 [권혁]]을 내보냈는데 권혁은 본인이 더 많은 기회를 얻기 위해 스스로 떠났으며 배영수는 정현욱때와 같이 굳이 오버페이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놔준 것이다.

사실, 프로야구 구단은 만년 적자 사업이기 때문에 윗선의 눈치를 봐야하고, 편성된 예산을 넘겨서 쓰기가 어려운데 FA에다 돈을 쓰면 기존 선수들에게 돌아갈 자금이 줄어들어 연봉이 깎이거나 하기 십상이기에 삼성의 선택은 충분히 합리적이다. 내부 FA를 놓치면서 육성 드립을 쳤다면 문제가 되었겠지만 잡을 FA는 다 잡았고, 외부 영입 없이도 좋은 성적을 내고 있기에 겆성이라는 얘기는 좀더 전력 보강을 원하는 팬들의 아쉬움이 섞인 한탄이다.[32] 류현진의 포스팅비로 지갑이 두둑했던 한화 이글스나 신생팀인 NC 다이노스는 그렇다 치고, 2013년 FA 대란 때 외부 FA를 영입한 구단은 연봉 협상이 계속해서 미뤄지고 있다는 얘기가 돌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굳이 외부 FA에 휘말리지 않고 내부 FA를 알뜰하게 잘 잡는 삼성이 진정한 승리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2015년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박석민을 놓치고, 2014년-2015년 최고의 활약을 펼쳐준 효자용병 야마이코 나바로도 놓치고, 단장이 '외부 FA는 없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해버리는 사태가 발생하자 팬들 사이에서도 '거지성'이라는 용어가 점차 일반화되어 가는 분위기이다. 게다가 그 내막으로 삼성 라이온즈가 삼성그룹 계열사의 지위가 아닌 제일기획 산하로 이동한다. 이 경우는 삼성 라이온즈에 대한 그룹의 지원은 점차 줄어들게 된다. 사실은, 예전부터 이미 줄어들고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와 달리 이재용 부회장은 프로구단이 흑자를 내지 못해 수백억씩 지원받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보는 사람인 만큼 삼성이 이전만큼의 자금 동원은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이 부회장이 자주 야구장을 찾는 야구광이기에 아버지에 준하는 자금 지금을 통해 삼성 라이온즈가 거대 명문 구단의 지위를 이어갈 것이라 기대했던 많은 팬들은 이윤 추구로의 급격한 전환, 익숙하지 않은 긴축 운영에 격렬한 배신감을 느끼며 프런트와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불만을 표하고 있다.

결국, 공식적으로 2016년 1월 1일부로 삼성 라이온즈제일기획 산하 계열사 삼성스포츠단으로 편입되는 것이 확정되었다. 제일기획 매각설이 돌면서 산하 스포츠단들조 같이 매각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이 있었지만, 제일기획의 프랑스 매각이 무산되면서 라이온즈 또한 삼성 소속 구단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최근 뉴스기사들로 미루어 보건대 삼성 프런트에서도 SK나 넥센과 같은 광고 및 마케팅을 통한 수익 창출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시작한 것으로 보였으나 드러난 내막은...

2.3 선수 대우

원년부터 성적이 좋았기 때문에, 그만큼 레전드 급의 선수들도 많이 나왔다. 이 부분은 아래 삼성 라이온즈/역대 선수와 같이 보면 좋다.

삼성답게 선수들을 대하는 방식이 직원들과 유사하다. 선수들의 평균 연봉이 높고[33] 신인 선수들에 대한 계약금과 연봉에도 후한 편이다. 매년 팀 성적이 상위권이다 보니 뛰어난 선수를 뽑기 어려워 상위 라운드 지명자의 계약금은 타 팀과 비슷하거나 적을 때도 있지만, 4라운드부터는 타 팀 지명자보다 계약금을 좀 더 주는 편이다. 2010년 선수들 최저 연봉이 2천만 원에서 2천 4백만 원으로 오르자, 신고선수들 연봉도 똑같이 2천 4백만 원으로 올렸다. 타 팀의 경우엔 신고 선수라고 그들의 연봉을 최저 연봉보다 더 적게 주는 경우가 제법 되며 여러가지로 국내 구단 중 대우가 가장 좋은 곳이지만, 필요가 없어지면 칼같이 정리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이만수, 김시진, 장효조. 팬들의 목소리와 참여도가 커진 2000년 이후엔 많이 좋아졌지만 옛날 삼성은 그 어떤 프랜차이즈 스타라도 필요없다고 생각되면 가차없이 내치기로 유명했다. 또한 선수협 창단 때는 김기태를 앞세워 선수단 전원을 불참시켰고, 2009년 선수 노조 창단 때에도 삼성 그룹의 무노조 원칙 때문인지 선수들을 전원 불참시켰다. 이와 같은 현상은 LG 트윈스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러나 아이러니한 점은 한때 숙적이라 할 수 있던 해태에서 온 김응용 감독이 선수 대우를 개선하는 데 크게 일조했다는 것이다.[34][35]는 것이다. 또한 일부 프랜차이즈 스타들을 제외하고는 타 팀과 마찬가지로 은퇴한 삼성 프랜차이즈 스타들을 위주로 코치로 전향시키면서도 높게 대우해 주는 경향이 강하다. 실제로 류중일, 김현욱, 김한수, 전병호, 김재걸은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이면서 은퇴식까지 치른 후 현재 삼성의 감독이나 코치직을 역임하고 있었거나 역임하고 있다. 류중일이 감독으로 취임한 뒤 이승엽, 임창용 등 해외로 진출했던 레전드 스타들이 돌아오기 시작하면서 삼성의 레전드 잔혹사는 일단 끝이 났다.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 마지막 경기에서 그동안 삼성 구단과 사이가 좋지 않은 것으로 유명했던 이만수가 시포를 맡은 것은 삼성의 레전드 대우 개선을 상징하는 사례로 꼽힌다.

2.3.1 삼성이 놓친 FA 선수는 잡으면 안 된다?

유난히 삼성 출신에 타팀으로 이적한 FA 선수가 먹튀로 변질되는 경우가 잦다. FA 특성 상 노쇠화의 위험이 있다지만, 첫 번째 FA인데 먹튀로 변질 되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 선수들의 공통점은 FA 협상이 가능한 시즌부터 뭔가 조짐이 있었다.

  • 마해영 : 2004년 4년 28억 KIA행
- 2003년에 개인 최다 홈런-타점 기록을 세우며 겉으로 보기에는 좋은 성적을 냈으나 이마양 트리오에 가려져 있을 뿐, 그해 6월에는 안타도 거의 치지 못하고 시즌 막판에는 하위타선으로 떨어지는 등 조금씩 힘이 떨어지고 있었다.
- 2004년에 잠시 숨고르고, 2005년에는 난 아직 안 죽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데 서정환 감독과의 갈등 때문에 벤치 신세를 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2005시즌 끝나고 LG로 가더니... 그래서 마해영은 KIA 시절 이후를 기억하기 싫었나보다
  • 정현욱 : 2013년 4년 28.6억 LG행
- 2012년에 구위 하락으로 필승조에서 밀려났다.
- 2013시즌 전반기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활동했으나, 후반기부터 극심한 부진에 시달렸다. 계속되는 성적 하락에 스트레스가 심했는지 위암까지 얻어 전성기 때에 단련된 근육을 모두 잃고 몸이 야위어졌다. 지금은 예전의 영광을 찾기 위해 분투하는 중.
  • 배영수 : 2015년 3년 21억 한화행
- 2014년에는 두들겨 맞아가며 8승. 꼭 강판 전에 시원하게 얻어맞고 내려갔다.(...)
- 2014시즌 후 자기 말로는선발 기회를 찾아서 한화로 들어갔다. 그리고 계속되는 퀵후크[36]에 시달렸고, 그렇다고 성적도 좋은 건 아니라서 한화팬들에게서 환불 요청이 계속해서 들어왔다.(...) 2016시즌에는 팔꿈치 수술을 받았고, 5월 20일 재활 등판의 최고구속은 겨우 131km/h.(...) 유희관도 그거보단 빠르겠다

2.3.2 은퇴식

원년부터 출발하여 샛별 같은 대 스타들을 보유했지만 은퇴식을 치뤄 준 선수는 류중일, 김현욱, 김한수, 전병호, 김재걸, 양준혁 여섯 명뿐. 은퇴 경기는 2010년 9월 19일 양준혁이 최초로 은퇴 경기를 가졌다.

2.4 우수한 선수 육성 및 재활 체계

삼성 라이온즈는 타 팀에서 가장 부러워할 만한 선수 육성 체계와 재활 시설을 갖추고 있다. KBO리그 최초의 단일구단 전용 훈련장인 삼성 라이온즈 볼파크와 용인에 있는 삼성 트레이닝 센터[38]가 그것.

1984년 삼성 라이온즈는 신인 육성 및 원활한 선수 수급을 위해, OB 베어스에 이어 두 번째로 2군을 창설했다. 고졸 연습생들을 영입해 2군을 만든 OB와 달리, 삼성은 코칭 스태프까지 따로 영입하며 2군 체제를 확립시켰다. 1987년에는 현재 삼성 라이온즈 볼파크(경산 볼파크)의 모태인 경산 훈련장이 완공되었고, 1990년대에는 2군 선수들을 일본 추계 훈련이나 미국 교육 리그에 보내는 등 선수 육성에 힘써 왔다. 특히 1995년 시즌 후에는 2군 선수단 전원이 미국 교육 리그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런 투자로 2군 리그에서 남부 리그 5년 연속(1994~1998)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1990년대 말 외환 위기2군 투자가 줄었고 결정적으로 매년 한국 시리즈 우승에 실패하면서, 성공 여부가 미지수인 신인 육성보다는 성적이 보장된 외부 선수 영입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돈성'이라는 별명이 붙여질 정도로 외부 선수 영입에 막대한 돈을 투자하면서, 앞서 언급한 것처럼 삼성이 오랜 기간 2군에 투자해 왔다는 사실은 묻혔다.

그러다가 2000년대 들어 한국 시리즈 우승을 경험하고, 선수 발굴과 육성 필요성을 느끼면서 다시 2군에 투자를 하기 시작했다. 이후 배영섭이나 최형우 등 2군에서 올라온 선수들이 우수한 활약을 펼쳐 주면서[39] 화수분 야구라 불리는 두산 베어스와 함께 우수한 선수 육성 사례로 꼽히고 있다. 이후 롯데 자이언츠에서도 김해에 상동 야구장을 짓는 등 2군 육성의 필요성을 일깨워 준 사례로 꼽힌다.

2011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계기로 3군을 신설하여 무한 경쟁 체제를 갖추는 계획을 세우게 되었고, 2012년 8월 포항 야구장의 완공 이후 향후 2군 선수단 이름 자체를 포항 삼성 라이온즈로 변경하며 모든 2군 경기를 포항에서 가질 계획을 세웠다. 이리하여 1군(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 - 2군(포항 야구장) - 3군 및 잔류·재활군(경산 야구장)으로 이어지는 육성 체계를 구축하려고 했으나 무산 되었고 그 뒤 노후화된 경산 야구장 대신 청도군에 500억원을 들여 2군 훈련장 및 클럽하우스를 신축하고 이후에 2군을 경산시에서 청도군으로 변경할 계획이였으나 잠정 중단 되었고 청도의 2군 신축구장 부지도 처분한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른 9개 구단이 2군에 투자를 점차 늘리고 새 2군 신축구장을 건설하고 있으나 유독 삼성만 1군과 함께 2군의 투자를 대폭 줄이면서 한때 가장 좋은 2군구장을 보유하던 팀에서 가장 질 낮은 구장을 보유한 팀으로 바뀌었다. 많은 팬들은 자생을 하려면 좋은 2군구장과 많은 투자가 있어야 하는데

2.5 좌타 대두 레전드 라인

LG 트윈스 보다 훨씬 뛰어난 왼손잡이 선수들을 많이 배출했다. 특히 왼손잡이 타자의 경우 독보적이다. 이에 삼성 팬들은 이를 좌타대두라인이라고 부르고 있다.

당장 1983년에 입단하여 삼성 초창기 최고의 교타자로 활약했던 장효조를 시작으로 1993년에 입단하여 은퇴까지 삼성팬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던 양준혁, 그리고 좌완 투수로 입단했다가 타자로 전향한 뒤 현역 최고의 슬러거가 된 이승엽이 있다. 그 외에 입단 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활약하여 외야 한 자리를 지키는 박한이좌타대두라인의 후예 최형우, 비교적 늦게 각성한 채태인 등이 주전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그리고 2015년 신인 구자욱이 혜성처럼 등장하였다. 반대로 초창기에는 이만수, 김성래, 강기웅으로 이어졌던 뛰어난 오른손잡이 타자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40]

2.6 왼손잡이 투수 갈증

왼손잡이 투수의 경우는 좀 다르다. 오히려 창단 초창기에 비운의 만루홈런 사나이이선희와 프로 최초 100세이브를 달성한 권영호 등 뛰어난 좌완들이 많았던 편이지만 성준 이래로 삼성은 왼손투수 갈증에 늘 시달렸다. ??: 뭐요? 성준이 삼성 역대 좌완투수 중 가장 많은 승수(97승)를 올렸지만 구위보다는 제구 위주의 기교파 투수였고, 그나마 성준 이후 장원삼이 삼성으로 트레이드로 오기 전까지는 김태한, 전병호 정도가 활약한 것이 유일했다. 그나마 1990년대 삼성 투수 트리오 중에 김태한이 차지하는 위치를 생각해보면 썩 좋은 편은 아니었으며, 그나마도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며 마구 굴린 탓에 조로한 경향이 있으며, 롱런한 전병호도 흑마구로 대표되는 기교파 투수였다. 지금은 넥센에서 트레이드가 한번 성사되었다가 무산된 뒤 다시 성사장원삼이 삼성의 전통인 좌완 기교파 선발투수로 활약하고 있다. 그러고보면 삼성의 경우 유독 좌완 스터프형 투수보다는 좌완 기교파 투수들로 계보가 이어져 왔는데, 2014년 시점에서 좌완 스터프형 투수로는 차우찬백정현 정도다.권혁도 있었지만 2014 시즌 이후 FA로 한화 이글스로 이적했다.

2.7 아마야구 지원과 리틀야구단

대체적으로 암울했던 2000년대 대구·경북 팜에 대해 삼성 구단이 아마야구 지원에 인색했던 것이 하나의 원인으로 지목됐다. 그도 그럴 것이 김응용이 삼성 사장으로 있는 동안 모교 개성고 야구부 발전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면서 침체에 빠진 모교 지원에는 전폭적인 지원을 하는 사이 연고지의 경주고 야구부와 구미전자공고 야구부가 해체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연고지 야구부의 해체를 온전히 삼성 측의 잘못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것이, 구단의 지원 못지 않게 학교 차원에서의 야구부에 대한 지원도 중요하지만 경주고는 타 학교에 비해 학교 차원의 지원이 부족했었고[41], 구미전자공고의 경우에는 마이스터고로 전환되면서 불가피하게 야구부를 해체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연고지 고교야구부 해체에 후술할 삼성기 대회 폐지나 리틀야구단 해체 등이 연달아 벌어지면서 아마야구 지원에 대해 소홀하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공교롭게도 이 시기는 모 감독 재임 시기랑 겹친다[42]

삼성이 그 이전에도 아마야구 지원에 손을 놓고 있었던 아니고 실제로 1990년대에는 아마야구 지원을 했었다. 1992년부터 유소년 및 고교야구 활성화를 목적으로 대구·경북 지역 초중교를 대상으로 한 삼성기 대회를 열었다. 삼성기는 1993년에는 고교까지 참가하는 대회로 확장했다가 IMF 사태로 축소됐다. 그 여파로 2000년에는 대회를 열지 않았고, 2005년을 끝으로 폐지됐다가 2011년부터 초중교를 대상으로 다시 부활했다. 2014년부터는 삼성의 1차 지명 대상지로 확장된 강원 영동 지역 초중교도 참가한다. 2011년 별세한 장효조 2군 감독을 기리기 위해 2012년 대회부터 타격 1,2위 선수들에게 주는 상을 '장효조 타격상'으로 명명했다.

1990년에는 프로구단으로는 최초로 구단에서 운영하는 리틀야구단을 만들었다.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이전부터 진행해 온 어린이 여름야구교실이 큰 인기를 끌어 아예 리틀야구단을 만들어 야구에 소질이 있으나 소속 학교에 야구부가 없어 선수가 될 기회가 없는 유소년 유망주들을 조기에 발굴·육성해 야구부가 있는 초등학교로 전학보내든지, 중학교로 진학시켜 야구선수로 육성하기 위해서였다. 삼성이 리틀야구단을 만들기 전에는 대구 지역에는 리틀야구단이 없었지만 이를 계기로 대구 지역에도 하나둘 리틀야구단이 생겨났다. 당시 스카우트를 맡으며 현장에서 멀어졌던 장효조가 명예 감독으로 있었고, 이밖에도 선수 출신 구단 직원들이 코치로 선수들을 지도하기도 했다.

선수들의 정신적인 성장을 목표로 두고 성적에 연연하지 않아 전국 규모의 큰 대회에서 이렇다 할 성적을 거둔 적은 없지만 현재 나무위키에 등록된 전현직 프로선수 중 강영식, 김인태, 손형준, 용덕한, 우동균, 유선정, 이상민, 이상호, 이정호, 임현준, 정병곤, 최민구 등 12명이 삼성 리틀야구단 출신이다. 이밖에 과거 고양 원더스 소속으로 청각장애인 프로야구선수를 꿈꿨던 박병우도 삼성 리틀 출신.

이렇듯 리틀야구단을 통해 프로선수가 된 사례도 여럿 있었으나, 리틀야구단이 활성화되면서 다른 리틀야구단과의 지원에 대한 형평성을 두고 학부모들간 갈등이 조장되자 2008년을 끝으로 구단이 리틀야구단 운영을 포기했고, 2009년부터는 라이온즈 이름을 계승한 리틀야구단이 단독으로 운영하고 있다.

2002년도까지는 한국 시리즈 우승 경험이 없어서 팬이나 구단이나 우승 강박증에 시달리고 선수들은 새가슴 성향을 보였으나, 2000년대에 우승을 여러 번 하면서 이런 점은 고쳤다. 하지만 2000년대는 김응용, 선동열로 대표되는 해태 출신 감독들의 영향으로 골수팬들이 떨어져나가 인기가 떨어졌던 시기이기도 하다. 1990년대에는 1995년에 홈 경기 총 관중수 62만3970명으로 최고점을 찍는 등 내내 50만명 선을 유지했으나 2000년부터 줄기 시작하더니 김응용 감독 취임 이후 2002년에 24만7698명을 기록했고 2004년에는 19만5872명으로 최저점을 찍었다. 2002년 월드컵 여파와 이를 잇는 한국 최초의 시민 프로구단인 대구 FC에 관심이 더 집중된 것도 이 상황에 한 몫 했다. 이후 내내 30만명 선을 유지하다 선동열 감독 마지막 해인 2010년에 45만5246명으로 40만명 선을 회복했고 류중일 감독 취임 이후에는 45만1483명의 2013년을 제외하고 50만명 선을 유지하는 등 인기를 회복했다. 출처

삼성에서는 개념이었던 감독이 타 팀에 가서는 역대급 막장이 되거나, 그 반대로 딴 팀에서는 명장인데 삼성에서는 도무지 적응 못하고 말아먹는 사례가 종종 보인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백인천. 김응룡도 한화에 가서는 막장 운영을 보여주며 커리어의 마지막을 대차게 말아먹었다(...) 반대로 21세기 들어 야신으로 추앙받는 김성근은 삼성에서는 흑역사급 추태만 보여준 희한한 경우.김성근은 삼성 시절 저리가라 하는 흑역사를 찍는 중이라....
  1. 2008년부터 사용 중인 로고.
  2. 도시연고는 대구광역시지만 광역연고로 보게된다면 경상북도 전역을 포함한다. 강원도 영동 지역은 지역 고교 팀을 대상으로 1차지명을 할 권한만 갖고 있을 뿐 지역 연고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
  3. 롯데 자이언츠와 함께 원년부터 지금까지 스폰서 기업명과 팀명이 모두 동일한 유이한 팀.
  4. 동아일보 김성수 창업주의 증손자(김재호 동아일보 사장의 동생)이자 이건희 회장의 막내사위(이서현 삼성물산 사장의 남편)로 삼성 라이온즈의 최대주주인 제일기획에서 스포츠사업부문 사장을 맡고 있으며, 대한체육회 부회장직과 대한빙상경기연맹 회장직도 겸하고 있다. 공식적인 구단주지만 실질적인 구단주는 이재용.
  5. 구단 운영권이 제일기획으로 넘어가기 전까지는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이 구단주를 맡았다. 이수빈 회장은 삼성 라이온즈 창단 원년에 구단 사장직을 맡기도 했다.
  6. 전임 삼성 웰스토리 사장.
  7. 해당항목 참조
  8. 다만, KBO 리그 기준으로 라팍의 만원관중은 24,000명이다.
  9. 제 2구장.
  10. 한국프로야구 첫 우승팀이자 유일한 우승팀. 삼성 말고는 아시아시리즈를 우승한 한국프로야구 팀은 아직도 없다.
  11. 2011년은 한국프로야구 정규리그+한국시리즈 통합우승을 달성했고, 아시아시리즈 우승까지 가져가면서 한국프로야구 최초로 트리플크라운(정규리그+한국시리즈+아시아시리즈)을 달성한 유일한 팀이 되었으며, 삼성의 역대 최고의 한 시즌이 되었다.
  12. 여기서 '팀 이름'을 '라이온즈' 같은 고유명으로 한정하면 2000년대부터 야구 본 사람들은 '그럼 두산과 KIA도 있지 않느냐?'라고 할 수도 있지만, 두산은 대전에서 서울로의 연고 이전이 있고, KIA는 해태에서 구단을 인수해온 것이니 정말로 엄밀히 말하면 삼성과 롯데만이 원년부터 변하지 않은 구단이다.
  13. 롯데 자이언츠보다 약간 진한 색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주리 블루에 더 가까운 색.
  14. 로열 블루나 코발트 블루 중 하나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15. 야구단이 독립법인화 된후 축구단인 수원 삼성 블루윙즈도 법인회사로 전환했다. 그 외 다른 스포츠단들은 전부 모기업의 부서로 포함된다.
  16. 삼성전자 27.5% + 삼성SDI 15% + CJ제일제당 15% + 신세계 14.5% + 삼성전기 12.5% + 삼성물산 7.5% + 제일기획 3.0% + 이건희 2.5% + 제일모직(구 삼성에버랜드) 2.0%. 삼성 라이온즈는 나눠갖지말고 다 같이 공동 운영 하게 하려 했다고..
  17. 삼성전자(27.5%) 삼성SDI(15.0%) 삼성전기(12.5%) 삼성물산(9.5%) 등.
  18. 자세한 내용은 삼성 라이온즈/2016년 문서 참조.
  19. 무엇보다 LG 트윈스는 월드컵이 열린 2006년, 2010년에 각각 최하위, 6위라는 안 좋은 성적을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그거만 빼면 월드컵이 열리는 해의 성적은 나쁘지는 않은 편이다. 한국시리즈 4번 진출하여 우승 2번(1990년, 1994년)하고, 준우승도 2번 했다.(1998년, 2002년)
  20. 어디까지나 '야수진에 비해서'이다. 실제로 1980~1990년대 리그를 대표할만한 특급 투수들도 상당수 있었고, 2000년대에도 생각보다 투수력은 준수한 편이었다. 팀 평균 자책점 또한 상위권.
  21. 1980년대 중·후반에 등장한 비운의 천재타자 강기웅도 무시 못 할 타력을 과시했다.
  22. 여담으로 2015년 넥센이 팀타율 3할에 도전했는데,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만난 삼성이 9이닝 1피안타로 넥센 타선을 잠재우며 몸소 2할대로 떨어트려줬다(...). 어디서 올라오려 그래
  23. 이런 철혈운영으로 인해 김태한, 박충식, 김상엽 등의 에이스들이 쉴 새 없이 구르다 내쳐졌다. 타자도 예외는 없어서 강기웅, 양준혁 등의 스타 플레이어를 내쳐버렸다. 다만 양준혁은 김응용 감독 덕분에 다시 돌아왔다.
  24. 심지어 심정수의 4년 60억 FA 기록은 2013년에 와서야 깨졌다.
  25. 물론 1985년 통합 우승이 있고, 1987년 통합 1위가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인정하는 우승 팀은 한국 시리즈 우승 팀이었다. 1985년 한국 시리즈는 열리지 않았고, 1986년부터 바뀐 룰에 의해 전후반기를 휩쓴 팀도 2위 팀과 한국 시리즈를 치르게 되었는데 1987년 한국 시리즈가 그러했다. 전후반기 1위 팀이라는 위치에 맞지 않게 2위였던 해태 타이거즈한테 0-4 셧아웃(...)을 당하면서 한국 시리즈 우승은 무산되었다.
  26. 타이거즈 출신의 감독(김응용, 선동열) & 코치진(김평호, 정회열, 조계현 등) + 유니콘스의 FA 선수(박종호, 박진만, 심정수)
  27. 물론 디스 건 그 감독도 돈으로 우승한 적이 있었다. LG로 가서는 돈으로도 못했지만
  28. 그리고는 445를 찍고 다시 30억 현찰 박치기로 장원삼을 사서 겨우 2위로 올라섰다.
  29. 당시 부상으로 재활 중이었지만 두산에 부족한 좌완 계투를 내주면서 두산 포수 중 서열이 떨어지는 채상병을 데려온 것에 분노하는 삼성 팬들도 많았지만, 두산 이적 후 지승민의 행보를 생각하면 어딜 봐도 삼성이 남는 장사를 했다.
  30. 화면에 나온 '구단이 돈이 없다'는 말은 '프로야구단 법인이 적자를 기록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는 의미
  31. 다들 아는 사실이지만 삼성은 2010년대 들어 외국인 영입은 폭망했다.
  32. 사실 냉정하게 보면 2013 FA에서 삼성에게 필요한 것은 삼성 취약 포지션인 2루수 정근우 정도밖에 없었고, 이마저도 충분히 대체 선수가 있는만큼 딱히 필요없다는 얘기가 중론이었다. 당장 정근우의 나이를 봐도 현 삼성 2루를 맡고 있는 조동찬김태완과 별 차이도 없고, 도리어 내줘야하는 보상선수로 인한 출혈을 더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실제로 정근우가 70억이라는 거금을 받자 정근우에 대한 토론은 모조리 종료되었다. 심지어 이후 2014 시즌이 시작되자 2루수 자리에 일찍이 인터뷰를 했던 대로 특급 외국인을 데려오며 종지부를 찍었다.
  33. 한 예로 2012년 시즌 후 심창민는 연봉 협상 전 전년도에는 재활 때문에 최저연봉 2400만원을 받았다가 올해는 1군에 올라왔으니 5000만원을 받자고 생각했었는데, 협상 과정에서 프런트가 처음부터 "내년 연봉은 5500만원으로 하자."라 말해 당황한 나머지 "6000만원 주세요."라고 말실수를 했다가 프런트가 "그래."라고 답해 놀랐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밖에 롯데 시절 매년 연봉 협상에 프런트와 대립각을 세웠던 신명철은 삼성 이적 후 늘 그랬듯이 연봉 협상 때 연봉 고과와 관련된 자료를 잔뜩 준비해 갔으나, 본인이 예상한 금액보다 구단측 제시 금액이 더 높아 군말 없이 바로 계약을 체결했다는 일화도 있다.
  34. 김응룡 감독은 구단 측에서 별로 불러오고 싶지 않아 했던 양준혁을 다시 삼성으로 불러들이는 데 큰 공을 세웠다.
  35. 예외야 있겠지만 대부분의 삼성 팬들은 김응룡 감독이 처음 삼성에 부임했을 때는 크게 반발했지만 첫 한국 시리즈 우승 이후에는 그러한 여론은 수그러들었고 선동열 감독과는 다르게 싫어하지 않는다. 일단 첫 한국시리즈 우승이었던 2002년 한국 시리즈의 이미지가 워낙 좋고 이후에도 부임하고 있는 동안 포스트시즌은 꾸준히 진출한 데다 팀 정체성을 딱히 바꾼것도 아니라 삼성 팬들의 김응룡 감독에 대한 이미지는 나쁘지 않다.
  36. 2012시즌 이후 배영수의 선발 경기는 꾸역꾸역 버텨가며 6이닝 이상 찍는 타입이다.
  37. 정확히는 삼성에 입단한 후 쌍방울 레이더스로 트레이드되었다가 다시 삼성으로 트레이드되었다.
  38. 삼성 트레이닝 센터의 경우에는 삼성 그룹 소속의 스포츠 구단뿐 아니라 삼성에서 후원하는 기타 스포츠 종목의 선수들도 이 곳에서 훈련과 재활을 한다. 국내에서는 가장 체계적인 최첨단 훈련 시설을 갖췄다고 평가받는다.
  39. 엄밀히 말하면 배영섭은 지명 후 부상으로 한 시즌을 날렸고 최형우는 경찰청 입대 후 방출당하고 제대 후 재영입한 케이스라 삼성 2군에서 성장한 경우라고 보기는 힘들다.
  40. 사실 크보에서도 현재 뛰어난 우타거포는 많이 희귀한 편이다. 리그 정상급 우타거포는 박병호정도다.
  41. 비단 경주고 뿐만 아니라 대구·경북 고교야구부에 대한 학교 차원의 지원이 점점 줄어 가면서, 이에 대구·경북 중학야구 유망주들 중 몇몇 선수는 지원이 후한 타 지역 고교로 진학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삼성 리틀야구단 출신임에도 천안 북일고로 진학한 김인태가 있다.
  42. 2008년 1차 지명 폐지와 전면드래프트 도입을 두고 당시 삼성 감독이던 선동열은 연고지역에서 유망주가 안 나온다면서 1차 지명 폐지에 적극 찬성했다. 연고 지역 학교에 지원도 잘 안 했으면서 유망주가 나오기만을 바라니 될 리가 없지 참고로 당시 구단 고위층도 선동열의 입장에 동조해 1차 지명 폐지에 적극적이었으나, 정작 삼성 스카우트들은 1차 지명 폐지에 반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