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의 공인회계사 출신 정치인에 대해서는 박완규(정치인)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이름 | 박완규(朴完奎) |
출생 | 1973년 12월 1일, 충청북도 청주시 |
본관 | 밀양 박씨 규정공파[1] |
신체 | 174cm, 52kg |
가족 | 2남 1녀 중 셋째 |
학력 | 태광고등학교 서울호서전문학교 음악학부 재학[2] |
데뷔 | 1997년 부활 5집 앨범 불의 발견 |
소속 | 라디오스타 엔터테인먼트 |
종교 | 천주교(세례명 : 사도 요한) |
공식 사이트 | 팬카페 |
목차
1 개요
2 부활 활동
역대 부활 보컬 | |||||||||
1대 | 2대 | 3대 | 4대 | 5대 | 6대 | 7대 | 8대 | 9대 | 10대 |
김종서 | 이승철 | 김재기 | 김재희 | 박완규 | 김기연 | 이성욱 | 정단 | 정동하 | 김동명 |
대한민국의 가수. 데뷔 이전에는 송탄 미군 부대에서 디제이를 하거나 노래를 부르곤 했다. 그러다 미군 부대에서 공연하던 중 조명 감독으로 활약하던 박완규의 누나가 김태원에게 다리를 놓아주었다고 한다. 김태원의 "니가 송탄의 박완규냐?"로 시작된 인연이라고.. 그리고 부활 오디션을 볼때 부른 곡이 바로 레드 제플린의 블랙 독. 노래 한 방에 부활 멤버 전원을 뻑 가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때 김태원이 "이제 한글 노래를 불러봐라" 라고 했는데 부활의 히트곡 '사랑할수록' 을 부르자 "넌 한글 발음이 안 좋다" 며 디스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박완규를 탈락시키기엔 너무도 아쉬웠던 김태원은 박완규의 맞춤곡을 써내려가기로 한다[3].
위의 오디션 관련 일화로, 김태원이 오디션이 다 끝나고 일주일 후에 통보해 주겠다고 한 뒤 박완규를 보냈는데 당시 박완규는 부활 오디션에서 떨어질 경우 다시 백화점에서 청바지를 팔아야 하는 열악한 신세였고,[4][5] 사정만큼이나 성질도 급했던 박완규는 김태원에게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어 형님, 저 지금 당장 결정해 주십시오. 떨어지면 다시 청바지 팔러 가야 됩니다 라고 김태원을 재촉[6]했고 김태원이 처음에는 뭐 이런 놈이 다 있냐?고 디스하다가 한참 고민하다 좋아. 하자. 내가 하라는 대로 따라오면 성공할 수 있을 거야 라고 해서 당일날 오디션에 합격했다고. 동네에서는 "00동의 아들 박완규"라는 식으로 난리가 났다고 한다.
이후 부활의 4집과 5집 사이 나온 베스트 앨범 "이솝의 붓" 에서 박완규가 부른 소나기 가 공개되며 김태원은 "그동안 가지 않은 길을 가려 한다" 며 부활의 새로운 방향을 천명한다. 그리고 마침내 부활 5집의 보컬로 데뷔하였다. 김태원이 5집에 붙인 '불의 발견'[7] 이라는 앨범명 그대로 당대의 충격을 안겨준 화끈한 보컬이었으며, 당시까지 동양인의 발성구조 상 한계로 여기던 중-고음역의 구분없는 완벽한 음색 표현이 가능한 유일한 록 보컬리스트로 찬사를 받았다. 앨범에서 가장 유명한 곡 "Lonely Night"은 서구의 헤비메틀 보컬 수준에 비춰도 손색이 없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숨겨진 명곡으로 "마술사#s-6" 가 있다. 비록 시작은 메탈 밴드였을지언정 1집에서 4집에 이르기까지 서정적이면서도 장르적으로는 프로그레시브 록적인 성향이 매우 강한 부활 앨범 중에서도 가장 이질적인 앨범으로 박완규의 탁월한 표현력과 가창력, 김태원의 보컬 최적화 작곡 능력이 만들어낸 명반이다.
부활 앨범 녹음 당시 김태원이 얼마나 스파르타식으로 했는지 비틀즈코드에 출연하여 "Lonely Night" 두 소절을 녹음했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눈물을 짓기도 했다(...)[8]제목 그대로 외로운 밤의 느낌이 나야 하는데 그 느낌이 안 난다고 퇴짜를 놨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박완규는 불타는 신혼이었는데 외로운 밤의 느낌이 날 리가 있나(...) 두 소절 녹음하는데 2주일 걸렸다고... 정확하게, "이런 시간엔 더 그리워" 를 부르는데, 이런 시간엔~ 다시.이런~ 다시. 다시. 다시... 네버 엔딩 론리나잇 사실 Lonely Night의 가사만 놓고보면 박완규가 아니라 바로 직전 보컬이던 김재기와 김재희에게 더 잘어울리는 가사다. .아마도 3 ~4집에 연주곡들 중에 쓰려고 남겨둔 가사를 박완규에 맞추어 편곡을 한 것으로 보인다.
"Lonely Night" 의 성공으로 계속 부활에서 활동할 듯 싶었지만 금전적인 문제로 부활을 탈퇴한다. 당시 부활의 행사 개런티가 120만원이었는데 기획사에서 떼어가고 남은 돈을 넷이서 나누면 그 돈으로는 연년생 젖먹이들 분유값을 대는 것도 힘들었다고 한다. 분유 버프 따윈 없었나보다. 안습 이때 박완규는 김태원에게 "형님, 돈인지 음악인지 확실히 해주십시오" 라고 묻자 김태원은 "세상 일이 네 뜻대로 되는 게 아니다. 돈이면 돈, 음악이면 음악 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금전적인 문제와 음악적인 견해가 동시에 충돌했던 것으로 보인다. 박완규 이전에도 숱한 보컬 교체로 나가는 보컬들을 붙잡지 않던 김태원은 박완규에게 "너는 아직 배울 게 많다. 밖에 나가면 양아치, 사기꾼밖에 없다" 며 박완규를 만류했지만 결국 부활에서 나온다.[9] 만일 이때 박완규가 나오지 않았다면 부활의 역사도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10]
3 솔로 활동
3.1 천년의 사랑(1999)~ 4집(2006)
부활에서 나온 이후 미려한 보이스 톤과 중-고음역대를 완벽하게 표현하던 보컬 스타일이 크게 바뀌었으며, 허스키하고 파워풀한 음색을 강조한 솔로 1집(1999. '천년지애')으로 대박을 쳤다. 이 앨범의 타이틀곡이 그 유명한 '천년의 사랑'. [11]
그렇게 1집의 대박으로 소속사였던 캔 엔터테인먼트[12]를 살렸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사장은 박완규에게 제대로 된 돈을 지급하지 않았고 그 결과 한동안 죽은 듯이 살았다고 고백했다. 집계 시스템이 정착되지 못하고 희박한 저작권 개념, 그리고 노예 계약이 성행했던 시대가 만들어낸 불운. 천하의 개쌍놈들 지금에 와서는 '없던 일로 치자, 그러나 다시는 마주치지 말자' 고 합의본 듯. 그래서 팬들은 "천 년의 사랑 대박 나지 않았나?" 라고 알고 있지만 실제로 박완규가 번 건 별로 없었고 이때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 MBC다큐에서 밝히길 '돈 벌려고 부활을 나와서 천 년의 사랑을 불렀지만 돈도 못 벌고 마음도 좋지 않았다' 그래서 천 년의 사랑을 부르고 싶지 않다고 말했었다.[13] 그런데 나는 가수다에서 이영현이 불러버렸다 그런데 깡통 사장에게 그렇게 당해놓고도 깡통의 아내인 장혜진과는 콘서트 게스트로 설 정도로 친한 사이다.
앨범은 의외로(?) 꾸준히 냈는데 2006년까지 4집을 냈다. 물론 대중적인 흥행을 한 건 1집 '천 년의 사랑' 뿐. 2집과 3집은 대중성과 하고 싶은 음악 사이에서의 박완규의 갈등이 컸다면 소속사와의 인연을 끊기 위해 마지막으로 낸 4집 앨범은 아예 사비로 앨범을 만들어 박완규가 하고 싶은 음악이 그대로 녹아있다. 안타깝게도 흥행은 하지 못했다. 국내 록의 열악한 환경과 본인이 목 관리를 소홀히 한 탓도 있지만 결정적인 것은 제대로 된 돈을 지급하지 않았던 소속사의 대우와 이에 따른 생활고. "비밀" 이전에 부활과 한 번 콜라보를 한 적이 있는데 상업적으로 실패하게 된다. 그리고 생활고로 인해 아내와 이혼했다. 또한 이 시절 목 상태는 일상생활 대화를 하다가도 쉬어버릴 정도로 최악. 가수도 아예 그만 둔 상태였다고 한다.[14]
3.2 재기(2011~)
노래가 꼭 아름다운 목소리로만 해야 하는 건 아니죠. 목소리는 아름다워도 마음은 아름답지 못할 사람이 많으니까요. 예상은 했는데 정말 치료가 안 되는 중증에 가까운 병이더군요. 그 상태 그대로 '비밀'에 담았습니다.- 김태원
2011년 김태원이 원래 배우 윤상현에게 주려고 했던 "비밀"을 거절당하고 거의 반 폐인처럼 지내던 박완규에게 건넸다고 한다.(최근에 김태원은 '실은 2년전부터 박완규를 위해 일부러 준비해 놓았던 곡이었다고 고백했다.) 김태원은 "내가 시키는 대로만 따라와라" 라고 했다고. 처음엔 목이 너무 상해 노래가 불가능할 지경이었지만 병원에서 약물 치료를 겸하면서 한 소절씩 녹음해서 합치는 식으로 곡을 완성시켰고 이것을 2011년 부활과 콜라보레이션 프로젝트 1호로 발매하여 차트 정상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곡 자체는 자가복제적 성향이 강해진 김태원의 네버 엔딩 스토리 2 정도라는 평이지만 박완규의 담백한 보컬과 서정적인 가사가 드라마 OST와 아이돌 댄스계로 양분된 가요계에서 크게 선전했다. 이 당시 의사는 박완규에게 살고 싶으면 노래를 하지 말라고 했을 정도. 수술이 시급했지만 박완규는 그동안 쌓아온 성대 근육이 사라지는 것이 염려돼 결절 치료부터 시작했다. 이후 기적적으로 염증이 가라앉기 시작했고의사는 마치 새살이 돋는 것 같다고 표현할 정도로 목 상태가 크게 호전되었다.
박완규는 어릴 적에 산에 올라가서 노래 연습을 하다가 피를 토한 적이 있는데 이때부터 결절이 시작된 상태였다. 말하자면 박완규의 목 상태는 흡사 판소리를 하는 사람들처럼 변해있던 것. 의학적으로 볼 때 판소리를 하는 사람들의 목 상태는 결절로 분류한다. 덕분에 박완규는 예상을 뛰어넘고 훨씬 목 상태가 나아질 수 있었다.
스스로 리즈시절 자신을 '음역대가 좁고 고음만 되는 보컬'이라 평했는데 젊은 시절 이것이 꽤 컴플렉스였던 듯 하다. 비틀즈 코드에 나왔을때 밝힌 바에 의하면 당시 이를 극복하려 공업용 식초인 빙초산Uman (토론)ㅎㄷㄷUman (토론) Uman (토론)무슨 약을 하셨기에 이런 생각을 했어요?Uman (토론)을 마신 적도 있다고 한다. 물론 본인도 무서워서 물은 좀 탔다고(...)당시 이 얘기에 패널이었던 유세윤, 박지선이 경악을 했다.
그리고 혹시 몰라서 해두는 얘기인데, 절대!!절대 따라하지 말자!!!이런 거 한다고 노래 실력은 안 오른다. 아니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
의외로 박완규는 하드코어를 시도한 적이 있다. 솔로 2집인 <<엽기발랄>>(2000)의 타이틀 곡인 '욕망이란 이름...' 은 당시 인디에서 인기가 있었던 하드코어 밴드 펄럭펄럭[15]이 세션과 래핑을 맡았다.
대표곡은 애니메이션 카우보이 비밥을 뮤직 비디오로 사용하기도 했던 '천 년의 사랑'. 전항목에서 고음병 환자가 좋아하는 곡이라 했지만 대중적으로도 히트한 곡 이다. 그리고 카우보이 비밥의 한국판 엔딩곡인 'Alone[16]' 이 있다.[17] 한국 애니 바다의 전설 장보고의 주제가 '다시 태어난 전설' 을 부르기도 했다. 다만 그 후로는 활동이 뜸한 편이었다.
2011년 5월 28일에 포크가수 손지연, 토종 헤비메탈 밴드 WON과 함께 합동 공연을 했다. 과거에 다투기도 했던 김경호 역시 게스트로 섰다.
혼자 라디오를 진행하기도 했는데, 화려한 말솜씨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분이 혼자 입담으로 이렇게 웃겨줄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그 예로 김동명의 데뷔곡을 정말 아름다운 곡이라 극찬하고, 가수는 곡따라 간다고 자기는 론리 나잇 그대로 평생 외롭게 산다는 등 가차없는 드립이 터져나오곤 한다.
4 보컬로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부활 보컬 시절과 현재의 보컬 스타일이 확연히 달라진 보컬리스트다.
부활 시절에는 압도적인 하드웨어와 더불어 타고난 미성을 바탕으로 한 폭발적인 고음을 자랑했으며 당시 최고의 고음을 자랑하던 김경호와 라이벌로 자주 매치되면서 로커로서의 자질을 인정받았다. 특히 일체의 허스키톤도 섞이지 않은 맑고 청아한 클린 톤의 음색이 엄청난 화제를 낳았으며 3옥타브 대의 초고음역이 그야말로 난무를 하는 미친 난이도의 곡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부르면서도 훌륭한 표현력과 전달력을 잃지 않는 완전체였다는 점도 주목할 점이다.
이 시절에는 그냥 음역대 자체가 엄청나게 높았다. 고음으로 유명한 <Lonely Night>의 최고음이 3옥타브 레#(D#5)[18]인데 이거보다 한 옥타브 더 올라갔다고.대신 저음 불가 불후의 명곡 2 <부활> 편에서 김태원이 "박완규도 이거 부르다 목 망가졌다" 고 했는데 이건 사실이 아니다.[19][20] 90년대 박완규의 라이브 영상을 보면 박완규는 "Lonely Night" 이나 "마술사" 를 웃으면서 부른다. 대신 라이브에서 #이 많이 됐다고 한다. 일종의 카운터 테너라고나 할까.[21] 박완규 본인이 방송에서 직접 밝힌 바에 의하면 4옥타브 D~E(레~미) 정도까지는 소리가 났다고 한다. 흠좀무 만약에 지금도 이런 키를 유지한 상태였다면 김종서와 더불어서 미성의 고음을 자랑하는 로커이자 김종국이랑 쌍벽을 이루는 날카로운 고음을 자랑했을 것이다. 사실 지금도 음역대는 바리톤의 베이스에 저음은 베이스까지 내려가고 고음도 테너는 쉽게 올라간다.
살인적인 난이도와 고음으로 도배된 5집 중에서도 최강의 곡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믿음 이라는 곡이다. 들어보면 그 유명한 고음곡 론리나잇과 마술사의 최고음 3옥 미를 능가하는 3옥타브 파[22]를 그야말로 따발총처럼(...) 난사하다가 마지막에 진성(!)으로 She's gone의 최고음과 같은 3옥 솔으로 마무리한다(...) 당시에는 인터뷰나 목소리 등을 들어보면 여자 성대와 음높이가 비슷했다. 저음이 1옥타브 라 이하로 내려가지 않아서 부활의 예전 앨범들 노래를 커버할 때는 3키 이상(!) 높이고 부르곤 했다.[23]본인은 컴플렉스가 있었는지 피나는 노력으로 점점 음색을 허스키하게 바꾸게 되었고 음역도 조금씩 내려가게 되었다.허스키 보이스를 쓰던 솔로시절 노래들도 엄청나게 높다(...) 허스키 음색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카랑카랑하고 시원시원하게 고음을 연사하던 박완규의 리즈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들도 꽤 많다.
실질적인 보컬로서의 전성기는 2002년 3집 활동 때까지이다. 이 시기 전성기를 화려하게 불태웠으며 특히 이 시기 발표한 <After You've Gone> 은 박완규의 노래 중 Lonely Night에 버금가는 난이도를 가진 곡이며, 박완규는 이를 라이브로 불렀다. 이 때까지만 해도 시원하고 맑은 목소리가 어느 정도 남아있었으나[24] 2003년 이후 스트레스가 쌓이고 본인이 목소리를 바꾸기 위해 무리하다가 점차 맑은 목소리가 사라지기 시작한다.
박완규의 창법은 변칙적인 창법으로 밖으로 나오는 소리가 아닌 소리를 먹는 창법으로 이런 형식으로 부른다는 것 자체가 희한한 일이다(대표적으로 김장훈이 있는데 이분도 목이 많이 왔다갔다 하신다). 이 창법에 어쩔 수 없이 성대를 갈아가며 쓰는 허스키까지 더해져 성대를 안드로메다로 보내는 창법으로 여지껏 노래를 해왔다.
전성기 시절에는 4옥타브 미(!!!)까지 올라갔을 정도로 상당힌 미성이었지만 허스키 보이스로 바꾼 뒤에는 음역대가 낮아져서 현재는 3옥타브 솔 정도까지 올릴 수 있다. 그래서 현재 본인의 곡을 힘들어한다는 것에 의문을 가지는 사람도 있을 수 있는데 고음역대를 순간적으로 올리는 것과 높은 음역대를 유지하면서 지속적으로 난사하는 것은 당연히 차이가 나기 때문에 자신의 최고음과 상관없이 이전에 자신이 부르던 노래를 부르기 힘들어하는 것은 당연할 수 있다. 당장에 Lonely Night의 최고음이 넘사벽의 고음이 아닌데도 상당히 어려운 노래로 꼽히는 이유도 다 이런 이유이다.
5 나는 가수다 출연
2011년 9월 21일 방송된 tvN <러브송>에 출연해 "진짜 록을 보여주기 위해 <나가수>의 합류를 결심하게 됐다" 고 밝혔다. 남자의 자격 합창단 편이 끝날 때쯤에 출연할 것으로 보이며 "큰 칼을 들고 나간다. 95% 이상의 목 상태를 만들어 내 속살을 보여주며 다 쓸어버리겠다" 고... 오오 간지 관련기사 아마도 목이 상당 부분 회복된 것으로 보인다. 토크쇼 노코멘트에서의 발언으로는 원래 나가수는 폐지되어야한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였었는데 당시 나가수에 출연중이던 장기호 교수와[25] 임재범이 대놓고 박완규에게 독설을 퍼부으면서 프로에 대한 편견도 많이 사라지고 나가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임재범이 "너 뜬 노래 천년의 사랑밖에 없잖아. 근데 그게 락이냐?"라고 했다고.
멘토가 후덜덜한데 김태원, 임재범, 신대철, 김도균이라고...[26]. 이들이 편곡을 담당할 수도, 무대에 같이 나올 수도 있다고 한다. 김태원이 남격으로 출연이 힘들다 하더라도 그야말로 엄청난 라인업.
이미 자우림과 김경호가 나가수에 출연하고 있는 가운데 박완규까지 더해져 락커 3파전이 벌어지면 그야말로 나가수가 초토화될지도 모르겠다. 흠좀무 그때까지 자우림이나 김경호가 탈락하지 않으면
11월 27일 기준으로 새가수는 적우였다. 김경호가 춤까지 추는 모습을 보고 나가기 싫어졌을지도... 는 아니고 김경호가 졸업이든 하차든 빠지는 시점에서 투입되는 걸로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김경호의 페이스를 보면 적어도 내년 초까진 못 나갈 듯하다. 결국 제작진에서 조기투입을 결정한 거 같다.
12월 18일 인순이가 탈락하면서 투입. 1번으로 나와 김현식의 "사랑했어요" 를 부르며 2위를 차지하였다. 숫자를 2를 유독 좋아하는 모 갤러리에서는 진작부터 환호했다(…).
다음 선곡은 고해. 박완규가 행사나 게스트석에서 몇 번 불렀던 곡인데 이번 기회에 재편곡을 통해 어떻게 고해가 선보여질지 기대되었다. 결국 11라운드 2차 경연에서 고해를 통해 첫 1위에 등극했다. 또한 자문 위원단들은 박완규의 고해에 대해 테크닉에선 임재범에게 없는 무언가를 보여줬다는 평가를 내렸다. 그런데 정작 1위를 했음에도 임재범과 김태원에게는 혼만 났다고 한다(...) 힘을 빼라고 누차 말했음에도 힘자랑을 해서 그랬다고.
이후 신성우의 '내일을 향해' 를 선곡하여 퍼포먼스를 보여줬으나 결국 7위를 하고 만다. 말도 안돼 집시레기보다 순위가 낮다니
1월 15일 중간점검에서 대장금의 OST인 알렉산드로 사피나의 '하망연' 을 불러 1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3번의 저주, 임재범의 저주, 지상렬의 저주에 사로잡힌 그. 과연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심지어 후에 중간평가 1위의 저주까지
1월 22일 2차 경연, 7번을 뽑은 데다가 "오늘 7위를 하더라도 제 자신에겐 1위입니다" 란 말을 남기고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원곡을 뛰어넘는 편곡으로 원숙미와 카리스마를 보여주며 1위 획득. 한 번에 저주 4개를 씹은 바간규의 패기 자문위원단은 "대가의 반열에 올랐다" 라는 칭찬을 했으며 방송 후 반응도 매우 호의적이다. 다만 저작권 크리...
1월 29일 13라운드 1차 경연에서 김목경의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를 불러 4위를 차지했다.
2월 12일, 13라운드 2차 경연에서 김경호가 추천해준 "아버지" 를 불렀다. 결과는 5위. 김경호의 마지막 나는 가수다 공연이었던 만큼 이 무대를 각별하게 여겼던 것 같다. 그리고 김경호가 4위를 차지하며 다시 순위가 붙어있게 되자 마지막으로 "Rock! Will! Never! Die!" 를 김경호와 함께 외쳤다.[27]
5.1 나는 가수다에서 불렀던 곡들
경연 | 가수 | 매니저 | 노래 | 순위 |
11라운드 1차 경연 | 박완규 | 지상렬 | 사랑했어요 - 故 김현식 | 2위 |
11라운드 2차 경연 | 박완규 | 지상렬 | 고해 - 임재범 | 1위 |
12라운드 1차 경연 | 박완규 | 지상렬 | 내일을 향해 - 신성우 | 7위 |
12라운드 2차 경연 | 박완규 | 지상렬 | 하망연 - 알렉산드로 사피나 | 1위 |
13라운드 1차 경연 | 박완규 | 지상렬 |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 - 김목경 | 4위 |
13라운드 2차 경연 | 박완규 | 지상렬 | 아버지 - 김경호 | 5위 |
평균 3.3위.
6 나는 가수다 2 출연
오프닝 쇼에서 과거의 악연때문에 부르지 않을 것 같았던 천 년의 사랑을 불렀다. 상당히 힘을 빼고 부른지라 과거의 음원과는 차이가 좀 있다.
5월 첫 경연에서는 봄비로 1위 등극. 이 때 시종일관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으로 인해 나가수 내에서 흑표범이란 별명을 얻었다.
그리고 5월의 가수전에서 절규하는 박완규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하며 부치지 않은 편지를 불러 1위를 차지하며 나가수 시즌 2 첫 이달의 가수로 올라섰다. 1위로 올라서며 한동안 나가수를 떠나게 된 점은 아쉽지만... 참고로 나가수 1,2를 통털어 8번의 경연 중에 1위가 4번이다.
나가수2가 시작했던 5월에 첫 이달의 가수가 되어 퇴장한 이후에 꽤 오랜시간 동안 자료화면(...)으로만 모습을 보였지만 12월 드디어 슈퍼디셈버 2012 가왕전에 모습을 드러냈다. 첫번째 자신의 대표곡 경연에서 2011년 부활과 함께했던 비밀을 불렀는데 평소 박완규의 무대와 달리 시종일관 미소를 지으며 편안하게 노래를 불렀고 마지막에는 "태원이 형 사랑합니다"이란 말로 재기에 결정적 도움을 준 부활 김태원에게 감사를 전했다. 비록 잔잔한 곡이라 6위를 차지했지만 사전 ARS조사에서 예상 가왕 1위를 차지하는 듯 기대감을 높였다.
7강전에선 과거 동생의 앨범 홍보를 위해 라디오 부스에 들렸던 누나 故최진실을 추억하며 동생의 곡 SKY(故최진영)의 영원을 불렀다.
6강전에선 부활의 드러머였던 故 김성태가 말했던 대한민국에서 노래를 부르려고 하면 먼저 조용필 노래부터 알아야 한다라는 말에 처음으로 연습했던 곡인 비련을 불렀다.
5강전에서는 소싯적 친구들과 노래방에서 자주 불렀던 라이오넬 리치의 Hello를 불렀는데, 아쉽게도 박완규의 나가수 여정이 이 곡으로 끝나게 됐다.
파죽지세로 5월의 가수까지 됐으나 가왕전 들어서 모니터 평가단의 선호도 조사에서 계속해서 꼴지를 차지하는 듯 성적이 좋지 못했다. 특히 박완규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목 문제가 계속해서 박완규의 발목을 잡은 듯. 실제 공연에서 박완규의 목소리 힘이 상당히 빠져있음이 느껴졌다는 의견이 많았다. 기나긴 여정을 끝낸 박완규에게 박수를 보내는 한편 상했던 목을 쉬면서 회복해 앞으로 더 좋은 음악을 내주길 기대하는 팬들이 많다.
6.1 나는 가수다 2에서 불렀던 곡들
경연 | 노래 | 순위 |
오프닝쇼 | 천 년의 사랑 | |
5월 B조 | 봄비 - 이정화 | 1위 |
5월의 가수전 | 부치지 않은 편지 - 故 김광석 | 5월의 가수 |
특별무대[28] | 소금인형 - 안치환 | |
특별무대[29] | Beauty and Beast - Celine Dion&Peabo Bryson | |
가왕전 개막전 | 비밀 | 6위 |
가왕전 1주차 | 영원 - SKY(故 최진영) | |
가왕전 2주차 | 비련 - 조용필 | |
가왕전 3주차 | Hello - Lionel Richie | 명예졸업 |
7 스덕 인증
E-스포츠계의 큰형님.
2011년 3월 24일 라디오 스타에서 믿기지 않겠지만 아이유 팬이라고 인증했다. 아이유가 MBC GAME에서 <아이유의 스타포유>를 진행할 때도 지켜봤다고. ㄷㄷㄷ... 그러면서 스타크래프트에 대해서도 자연스레 언급되었는데 스타는 아들과의 소통을 위해서 시작했다고... 근데 뒤에 읽어보면 알겠지만 아들과 친해지기 위해서는 핑계인 거 같다. 그럼 아들을 스타 같이 하려고 낳은건가 ㄷㄷ 흔한 아버지의 큰그림[30]
그리고 2011년 4월 9일에 열린 신한은행 위너스리그 10-11 KT와 SKT의 결승전을 직관하기 위해 현장에 나타났다.# 평소에 김택용 선수의 팬이었으며 티원이 우승하면 김택용 선수를 직접 만나기로 했다고 밝혔다. 1세트가 PC 문제로 지연되자 "결승전 초대가수 지나에게 독설을 날리러 왔다", "지연되는 시간 동안 무대 위에서 공연이라도 해야 되는 거 아니냐" 는 드립도 터져나왔다.
그리고 김택용이 켠김에 꼼까지 레이드를 성공, 팀의 우승과 함께 홍진호의 준우승의 경력 추가를 이뤄내면서 이 둘은 직접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천 년의 코딱지 택용 씨는 평가가 안돼
그리고 켠김에 왕까지에서 김택용이 박완규를 응원하러 오면서 조우! 걸그룹을 만난 것처럼 기뻐하는 박완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노래할 때의 과묵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수줍게 택신을 안아보며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은 좋아하는 연예인을 만난 소녀팬이 따로없다. 택신 오자마자 쫓겨난 정동하 지못미.
김택용 빠돌이(...).
마이 스타리그 경인지역 예선에 참가했다고 한다. 다만 1차전에서 토스를 상대로 7배럭하다가 광탈(…). 종족은 테란이라고... 스갤에서는 벌처를 잘 탈 얼굴이라며 벌처를 쓰는 행위를 '완규질' 이라고도 부른다.하지만 이 분이 벌처 운전수를 빼다 박았다
서울 지역 예선에서는 송병구와 특별 해설로 참여해서 송병구에게 성격이 좋지 않다는 독설을 날렸다(…). 그러니까 택용이를 데려왔어야지!
황신께서 은퇴하시는 날에 참석해서 직접 노래를 불렀다.# 참고로 이때 김택용이 진 경기 중 유일하게 박수친 것은 바로 2009년 6월 20일에 열린 황색혁명이었다!
그리고 온게임넷 랭킹쇼에 나온다고. 형 그래서 앨범은요?
2011년 8월 5일 벌어진 임진록에 나와 홍진호의 팬임을 다시 한 번 인증. 여기서 스타크래프트2 역시 플레이 하고 있음을 밝혔다. 현재 골드리거인데 본인은 다이아 리그 정도의 실력으로 생각하고 있다 한다. 홍진호에게 '드론이 화염차를 둘러싸면 어떻게 하냐' 는 면박을 줄 정도인 걸 보면 스타 2 역시 기본적인 상성 관계는 파악할 정도로 한 모양.
2011년 9월 17일 열린 진에어 스타리그 결승전의 초대 가수[31][32]로서 결승전 전의 축하 공연을 하였다. 가수로서의 그의 내공을 느낄 수 있는 멋진 무대였다는 평. 크게 정명훈을 외쳐 크게 허영무를 외쳐
여러 E-sports 관련 언론과의 인터뷰를 보면 그가 얼마나 E-Sports를 사랑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요즘에는 거의 E-Sports의 큰형님이 되어가는 중. 박완규, "위기의 e스포츠, 선수와 팬들에게는 죄가 없다"
2011년 11월 켠김에 왕까지 2주년 특집에 홍진호와 같이 나왔다. 하라는 게임은 안하고 잠자고 훈수나 두다 결국 홍진호가 깨서 끝(…).
그리고 라디오 스타에서 김경호가 한 번 더 박완규는 게임을 좋아한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박완규가 택신 화이팅이라고 쓴 영상도 방송에 탔다(…).
나가수에서 신성우의 '내일을 향해' 를 고르고 7위를 한 주에도 이틀 뒤에 용산으로 와 김택용의 경기를 관람한 적이 있다. 당시에는 결과가 나오지 않아 아무도 몰랐겠지만 나가수가 방영되자 진정한 택빠라는 평가가 줄을 이었다.
2012년 3월, 평소 응원하던 팀인 SKT T1의 응원가를 불러 공개했다. 근데 가사가... 폭풍물량 컨트롤왕
2012년 3월 22일 기사가 떴다. 중단되었다가 이제 열린 스타리그를 후원하신단다. 기부금이 될지, 아니면 다른 방법일지는 기자회견을 가지겠다고. 스타판이 어느정도 시한부라는 소리까지 나돌고 있던 마당에 이런 발언은 스덕들에게는 그야말로 가뭄에 내리는 단비. 인터넷에서는 스타를 무시하는 사람들과 스타 팬들의 말이 오가고 있지만 스타를 모르거나 안좋아하는 사람들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멋지다" 며 박완규에게 박수를 보내기도 한다. 이제 명실상부한 E스포츠의 큰형님이자 대인배가 되었다. 스덕들은 찬양하도록 하자. 정작 김택용은 예선에서 광탈 후원 내용은 재능기부 형태의 오프닝곡 기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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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과 정말 상관없는 얘기지만 저 사진에 우(友)는 사실(右)여야한다 기자 ㅄ냐? E스포츠의 벗 박완규씨
2012년 4월 8일에는 KeSPA의 홍보대사로 위촉되기도 했다.
슈퍼주니어의 규현이나 희철 등을 제외하고는 연예인들이 방송에서 스스로를 게임팬이라 커밍아웃 밝히는 경우가 굉장히 드문 편인데 이에 반해 박완규가 보여주는 관심은 이례적인 수준이다. 언론이나 정치권에서도 게임의 폭력성 등을 들먹이며 사회에서 묻어버리려고 하는 판국에 당당히 E스포츠의 팬이라고 밝히는 박완규의 진심덕에 이미 E스포츠의 큰형님으로써 대접받는다.
거기다 2012 티빙 스타리그의 오프닝이자 헌정곡인 'Here I Stand' 를 불러서 스덕들은 눈물만 펑펑... 작사, 작곡은 예레미의 조필성이 했다. 티빙 스타리그의 결승전 행사에도 당연히 등장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결승전 날짜가 변경되면서 박완규 본인의 스케줄과 어긋나는 바람에 출연하지 못했다.
거기다 병세가 악화된 우정호를 남몰래 도왔다는 기사까지 뜨면서 E스포츠를 사랑하는 그의 마음에 모든 스덕들이 또 한번 감동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 우정호는 병세가 악화되어 2012년 8월 23일 오전 1시 경에 세상을 떠났다. 박완규는 이 소식을 접하면서 뉴스엔 기사를 통해 '오전께 우정호 사망 소식을 접했다. 훌륭한 프로게이머였는데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돼 안타까운 마음 뿐이다. 투병 과정에서 더 큰 도움을 드리지 못해 미안하다' 란 말로 그의 마음을 전했다. 더구나 그 전날 스갤에 우정호 선수의 병세가 악화되었고 그러니 후원을 부탁한다는 내용의 글을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사이트로 퍼지기도 전에 우정호 선수가 생을 마감하면서 더욱 안타깝다는 의견이 많았다. #
온게임넷의 신설 코너 박완규의 스2Like에 출연함이 밝혀졌다. 첫 방송은 2012년 9월 11일 저녁 7시. 나레이션은 신인 투니 8기 성우 김정훈.
유튜브 2012년 9월 24일 우정호 선수의 추모 앨범을 발표했다.
8 방송활동
2007년 이적의 음악공간에 출연한 적이 있다.[33] 놀라운 것은 이때 머리를 잘랐었다는 것. 머리를 자른 것이 기른 것보다 훨씬 말끔하다는 불편한 진실 락을 접고 블루스를 하기로 했다는 언급을 하며 이전에 뮤지컬에서도 활약했음을 언급한다.[34]
후에 2010년 김태원과 스타 오디션 위대한 탄생을 진행하게 되면서 방송으로부터의 복귀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이때 독설가 기믹이 크게 화제가 되면서 라디오 스타에서 섭외가 오게 된다. 이때 박완규가 김태원에게 "형님, 저 이곳에 나가야 합니까?" 하고 묻자 김태원의 대답은 "그럼 안 나갈 거냐? 너 아직 정신 못 차렸구나?" 였다고. 이후로 노홍철의 친한 친구와 같은 라디오 프로그램, 놀러와, 오천만의 대질문, 온게임넷 등 방송가에 활발하게 모습을 비추기 시작한다. 2012년 1월 22일 개그콘서트의 감사합니다 코너에 게스트로 출연하기도.
2011년 3월 4일 스타 오디션 위대한 탄생에 김태원의 멘토스쿨 최종 심사에도 참석했다. 여기서 평소 성격대로 독설을 날렸는데 '원래 좀 아련하고 회상하듯 불러야 하는 노래인데 너무 슬퍼서 몸서리가 처진다', '손짓, 발짓 때문에 산만하고 발음이 안 좋다', '평가가 안 된다. 이건 노래를 잘 하는 게 아니라 소리를 잘 내는 거다', '초등학생이 성인 노래 부르는 거 같이 지나치게 예쁘다' 등등으로 참가자들의 정신을 아득히 날려버렸다. 나는 가수다와 합성한 패러디물까지 나왔다. 힛갤입성 정모씨는 평가가 안 돼 이후에 밝혀진 바로는 대기실에서 넋을 놓고있던 백청강,이태권,손진영에게 다가와 '형도 많이 넘어졌어.'라며 위로했다고 한다.카메라가 없으면 한없이 부드러운 형
방영 후 사람들의 반응은 호불호로 나눠졌고 원래부터 박완규를 좋아했던 사람들의 반응은 '아니 형님 다 괜찮은데 왜 그렇게 돼지가 되셨나이까(...)' 원래 박완규는 아주 마른 몸이었고 내던 소리도 날카로운 것이 칼을 바싹 간 느낌이라고 김태원이 칭찬하고 다녔는데 그 소리를 극복하기 위한 한 과정으로 생각된다[35]... 는 의견이 있는데 이 인터뷰에서 본인은 그냥 찐 거라고(...) 어쨌든 위대한 탄생 중간에도 나오지만 이젠 완규도 원키로 못 부르는 "Lonely Night" 이 돼버렸다(...)[36]
물론 지금 목소리가 예전보다 훨씬 두꺼워서 더 좋다는 사람도 적지는 않다. 2011년 8월 7일 열린음악회에서 소향과 '사랑보다 깊은 상처' 를 불렀는데 마침 동시간대 나는 가수다에서 박정현과 김범수가 부른 '사랑보다 깊은 상처' 와 비교하면서 호평을 하는 사람들이 있기도 했다. 2011년에 와서는 아름다운 콘서트에서 한영애의 "누구 없소" 를 원키로 불러 아직 죽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독설가 이미지와 락부심 때문에 방송에서는 상당한 꼰대(...) 이미지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굉장히 솔직한 성격이다. 남자의 자격 합창단 에피소드에서는 보컬 트레이너로 나왔는데 출연 당시에는 성대에 힘이 없는 할머니들이 최선을 다해 노래하는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려 울보 락커라는 말을 듣기도 하였다. 그리고 성대결절로 15년간 노래를 끊으셨다가 합창단에 나오기 위해 다시 노래를 불렀다는 음악 선생님을 보고 동병상련을 느끼고 감정이 북받치는 모습도 보여줬었다.
후에 강연 100도씨라는 프로그램에서 이 때의 일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당시 84세의 노부인께서 혼신을 다해 부르는 노래에 자신이 음악에 대해 가지고 있던 고집이 모두 녹아내렸다고. 할머니께서 마치 '완규야, 노래는 이렇게 하는 거야. 인생은 이렇게 사는 거야.'라고 이야기하는 듯 했다고 한다. 자기 인생을 바꾸었다고 하며 반성의 눈물을 흘렸다고 언급할 정도로 인상깊은 사건이었던 듯하다.
13년 3월 13일에는 코미디 빅리그의 원달라팀의 게스트로 출연, '원달라 플리즈' 까지 했다(!) 덕분에 원달라팀은 1승을 추가.
이후 연기에도 도전(!)해서 SBS 드라마 결혼의 여신에서 간간히 모습을 드러냈다. 1화에서 아내에게 긴머리 감기게 하면서 하는 작태가 묘하게 웃음을(...) 그리고 9월 11일부터 방영예정인 푸른거탑 제로에도 출연한다. 군부대의 짬밥을 수거해서 사료로 쓰는 짬아저씨 역할을 맡는다고.묘하게 점점 개그 캐릭터가 되어가나?
개그콘서트 2015년 추석 특집편 횃불 투게더에 등장, 무려 선글라스까지 벗어가며(!!) 개그혼을 불태웠다. 언제는 예능프로 싫다고 하던 사람이!
2016년 11월 27일 ~ 12월 4일 복면가왕에 도전! 무한패션왕이라는 이름으로 출연해 가왕 돼서 만나요 제발~ 복면스타, 복면매거진 2580을 꺾고 3라운드에 진출했으나, 역도요정 김복면에게 예상 외의 패배를 당해 3라운드에서 탈락했다. 의도적으로 김치 담그는 컨셉의 의상을 입고 출연했으나[37], 이미 목소리만 듣고 네티즌들은 "완규 형님 나오셨네"라는 반응이었다. 이젠 개그 캐릭터 정착
2000년대 중반까지만해도 부활의 Never Ending Story를 원키로 부를만큼 목상태가 양호했으나 2013년부터 음역대가 급격히 내려가는등 음색이 임재범과 매우 흡사했었다. 실제로 히든싱어의 임재범편과 이시기에 박완규의 라이브를 들어보면 임재범의 목소리 및 창법과 상당히 비슷하다는것을 알수있다. 이는 평소 박완규 본인이 임재범을 존경해 그와 같은 창법으로 바꾸려고 한것으로 보이나 2016년 현재 복면가왕을 기점으로 창법 및 음색이 다시 예전의 박완규로 돌아왔고 목상태도 상당히 회복되었다. 심지어 2011년 비밀활동때보다 비교가 안될정도로!
9 기타
아내와는 이혼은 했지만 연락도 자주 하고 친구처럼 잘 지낸다고 한다. 수입도 최소 생활비와 소주값 정도의 용돈을 빼면 아내와 아이들에게 보낸다고 한다.
학생때는 전교회장을 했을 정도로 공부를 잘하는 모범생이였다고 한다. 어릴 때 꿈은 검사였다고(!) 놈의 죄질은 평가가 안 돼 집안 형편 때문에 실업계 고교에 진학하려고 했을 때 학교에서 난리가 났다고 한다. 전교 1등을 하던 우등생이 실업계 고교에 진학한다고 하니 학교에선 기함을 할 수밖에. 친구들과 영어단어 외우기 내기를 하던 우등생이 부기, 회계를 배우니 공부에 흥미가 안 생겨서 힘들었지만 밴드부도 하면서 나름 즐겁게 지냈다고 한다.
윤도현(빠른 1972년생), 김경호(1971년생), 김바다(1971년생)보다 어리다. "나는 록의 전설이다"에 출연했을 때 '도현이 형' 이라고 부르는 것에 충격받은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라고. 충격과 공포다 그지 깽깽이들아!!
나가수에서 무대 끝나고 김경호한테 형!형! 하고 부르면서 뛰어가는거 졸귀
10 관련 영상
부활 당시의 목소리
아니 어떻게 이런 목소리가..
솔로 독립 후의 목소리 (with 정단, 정동하)
- ↑ 규정공파 25세손, 혁거세 70세손 '圭'자 항렬이다. 같은 항렬로는 배우 박준규가 있다.
- ↑ 2012년 입학.
- ↑ 나는 가수다 2 가왕전에서는 김태원은 탈락을 생각했으나 드러머였던 故 김성태가 기회를 주자고 설득했다고 언급한 바 있다. 부활 내 김태원의 독선적인 리더 이미지와는 달리 작곡은 철저한 보컬 최적화의 원칙을 지킨다. 보컬마다 두드러지는 강점이 하나씩 꼭 있는데, 그 강점을 최대한으로 살리는 느낌. 부활 노래의 리메이크가 어려운 이유일지도.
- ↑ 특히 당시 아내는 임신 중이었다.
- ↑ 그가 말하기를 청바지를 많이 팔기는 했지만 돈은 그렇게 벌지는 못했다고.
- ↑ 본인 말로는 협박.
- ↑ 여기서 불이란 박완규를 뜻한다.
- ↑ 그 스파르타식 녹음으로 스트레스를 받아서 살이 45kg까지 빠졌다고 한다. 굳이 BMI로 환산할 필요 없이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빼도박도 못할 저체중. 지금은 꽤 살이 찐 편이지만 그 당시 앨범 자켓 사진이나 라이브 영상을 보면 지금과 동일인물이 맞나 싶을 정도로 빼빼 말랐다.
- ↑ 그런데 박완규가 부활에서 탈퇴한 뒤 어떻게 살았는가를 생각해보면 김태원의 말이 틀린게 아니였다. 어찌보면 선견지명을 한 셈이다!
- ↑ 아닌 게 아니라 부활 5집 불의 발견은 부활의 디스코라피 중 가장 서구적 메탈의 느낌을 잘 살렸으며 높은 완성도를 지닌 명반으로, 박완규가 가진 보컬리스트로서의 역량을 최대한으로 끌어낼 수 있었다. 다만 박완규의 탈퇴로 인해 단발성 실험으로 그치고 말았다.
- ↑ 단 이때부터 한국에서 박완규만 가능하다고 평가하던 중고음->고음역대를 자유로이 오가며 물흐르듯 완벽하게 뽑아내던 특색이 사라졌다고 볼 수 있는데, 곡 구성도 진성으로 무난히 전개하다 클라이맥스에 고음역대를 분리해서 내지르는 형태 - 전형적인 한국형 락 발라드- 로 바뀌어 버리는 바람에, 흔해빠진 한국형 락 보컬로 전락했다고 안타까워 하던 헤비메틀 매니아들이 많았다.
- ↑ 가수 장혜진의 남편 강승호가 사장으로 있다.
사장의 별명인 '깡통' 을 따서 이름을 지었군 - ↑ 박완규가 방송에서 밝히길 김종서가 '대답없는너' 로 로커로서는 상상도 못할 인기를 얻어, 자신도 그런 음악을 하면 록을 하며 먹고 살줄 알았다고 한다. 실제로 국내에서 '록' 장르로 가장 큰 인기를 얻은 가수가 바로 김종서
- ↑ 가수를 그만 두기 전에는 미사리로 내려가 노래를 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가수를 그만 둔 후에는 보컬 트레이너로 전향하기 위해 보컬 학원에 전화한 적도 있다고...
- ↑ 2000년에 '뽀뽀뽀' 를 하드코어 버전으로 부른 그 펄럭펄럭이 맞다.
- ↑ 이 곡은 메이저 데뷔 전에 부른 곡이다.
- ↑ 관련 인터뷰를 보면 투니버스도 자주 보는 편이고 본인이 곡을 담당한 카우보이 비밥도 나름대로 감명 깊게 보았다는 듯.
- ↑ 전 문서에서는 미라고 되있었는데, 3옥타브 레#맞다.
- ↑ 불명2에서 이걸 선곡한 샤이니 종현에게 대놓고 키 낮추라고 말하기가 뭐해서 완곡하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공연중 여러번 삑사리가 난 건 비밀.
- ↑ 알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박완규는 생활고로 인해 라이브 카페에서 정말 기회가 잡힐 때마다 계속 노래를 불렀다. 아내와 아이에게 줄 돈이 없어 미친듯이 노래를 하다가 생긴 성대결절을 제대로 치료하지 않아 목이 정말 많이 망가졌다. 의사가 살고 싶으면 노래하지 말라고 했을 정도. 중간에 음색을 바꾸기 위해 목을 고의적으로 망가뜨린 듯한 언급도 있었다. 산에 가서 미친듯이 소리를 지르다가 피 덩어리를 토해냈고 그대로 기절했다고.. 그 상태에서 치료를 잘 받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목이 많이 나갔다고 본인이 직접 밝혔다.
- ↑ 故신해철의 이야기에 따르면 '자기가 어디까지 올라갈지 자기도 모르는' 사람이란다.
- ↑ 비슷한 음역대의 곡으로는 대표적으로 더 크로스의 Don't cry의 '영원히!!~!~' 부분
- ↑ 이승철의 목소리는 바리톤이었고 김재기와 김재희는 베이스였다. 반대로 박완규는 테너 이상의 메조 소프라노의 음역대였으니 당연한 것이다.
- ↑ 천년의 사랑도 2002년까지만 원키로 불렀다. Lonely Night 역시 2003년부터 2키씩 낮춰서 부르기 시작했다.
- ↑ 갑자기 왠 교수가 박완규에게 독설을 퍼붓나 싶겠지만 장기호 교수는 일찍이 빛과 소금의 밴드로, 박완규보다 훨씬 이전에 데뷔한 선배이다. 김현식의 밴드에 속해있던 시절부터 치면 거진 10년 선배로 대선배가 된다. 그 본인도 한가닥 한 가수였고 하니 나가수를 비판하는 박완규에게 한 소리 할 수 있었던 것
- ↑ 국내의 전설적인 3대 헤비메탈 밴드 부활, 시나위, 백두산이 함께 한다는 것이다(...) 가히 충공깽
- ↑ 김경호는 장난투로 "이거 질린다" 라고 말했다(...)
- ↑ 5월의 가수 특별전
- ↑ 8월의 가수가 된 소향과의 특별 무대로 평소 친분이 있던 박완규에게 듀엣을 부탁했다고 한다.
- ↑ 물론 아들이 태어났을 때 스타는 존재하지 않았다(...)
- ↑ 하지만 본인이 온게임넷 관계자에게 직접 축하 공연을 하겠다고 통보&로비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 분 행적을 보면 진짜 그럴 수도 있다(...)
- ↑ 단독 초대 가수는 아니고 그 앞에 신인 걸그룹 에이프릴 키스가 나오고 두번째 무대가 박완규였다. 커뮤니티 평은 '에이프릴 껒'. 무대 자체가 비교가 안 됐다.
- ↑ [1]
- ↑ 예수 역을 맡은 적이 있다고. 이유는 머리가 길어서. 이에 이적은 박완규가 머리를 잘랐으니 자신이 머리를 기르겠다는 개드립을 쳤다.
- ↑ 현진영도 폐활량을 늘리고 울림통을 바꾸기 위해서 살을 찌웠었다.
- ↑ Lonely Night의 최고음은 대중가요 수준에서 넘사벽의 고음은 아니지만 문제는 3옥타브 초반대의 고음이 폭포수처럼 내리꽂는 게 문제다.
- ↑ 본인 말로는 설마 그 건방진 박완규가 저런 걸 입고 나왔겠냐라고 생각할 줄 알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