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中國史 | ||||
기원전 1600 ~ 기원전 206 | 기원전 206 ~ 907년 | |||
907년 ~ 1644년 | 1616년 ~ 현재 |
중국의 역사 907년 ~ 1644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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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0 ~ 1368 | 다이 온 예케 몽골 울루스/대원(大元)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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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4년 당시. 원 황실 실질 지배지역. |
Их Юань улс / 元朝
1 개요
1271년부터 1368년까지 몽골이 중국 대륙을 지배하던 시기에 존재한 몽골계 정복왕조. 중국의 역대 통일 왕조중 가장 넒다. 중국 통일왕조 역사상 3번째 단명왕조.[1] 다른 왕조들과 달리 이 왕조를 세운 민족은 현재도 독립 국가를 유지하는 데다[2] 요 및 금이나 청과 달리 한족을 노골적으로 노예 취급했기 때문에 외몽골의 할하 몽골인들은 이 시기 중국을 몽골의 식민지로 평가한다. 그에 반해 정부가 중심이 되어 막북공정을 추진하는 중국은 칭기즈 칸을 세계를 지배한 중화 몽골의 대영웅이라고 보고 있다. 차라리 쿠빌라이 칸을 중화영웅으로 떠받들지[3] 한편 중국 내몽골 지역의 차하르 몽골족은 원나라를 몽골족이 중심이 된 중국 왕조로 본다.[4]
몽골 제국의 제5대 칸 쿠빌라이 칸이 국명을 중국식인 대원(大元)으로 선포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완전한 중원 왕조로서의 전환은 아니고, 서역의 4대 칸국[5]을 포함한 몽골 제국의 명목상 대칸으로서의 정체성도 계속 유지했다.
중세 몽골어로 다이온 여커 몽골 울루스라고 불렀으며, 이는 대원대몽골국(大元大蒙古國)이라는 뜻이다. 황성은 보르지긴(孛兒只斤). 남송 등을 정복해 중국을 통일했고, 고려를 침공해 부마국으로 만들었다. 그 여세를 몰아 일본과 베트남, 인도네시아, 미얀마 등지로 쳐들어갔다가 카미카제와 현지인들의 격렬한 저항에 후퇴하기도 했다. 또한 베트남을 정복하려다가 쩐흥다오의 전략에 말려들어 물러났으며 잘 안 알려졌지만 인도네시아, 미얀마에 아이누가 살던 사할린 땅을 침공하기도 했다.
명나라에 의해 중원에서 추방된 이후 만주 북부와 내몽골에서 북원으로 이어진다. 북원은 겨우 3대에 평종이 대칸 자리를 조리그투 칸에게 찬탈당하며 실질적으로 "원나라"로써는 멸망한 것으로 간주된다. 물론 "몽골"로써는 이후 한참 더 존속하다가 청나라에게 내외몽골이 차례로 복속될 때까지 독립해 존재했다.
한족을 정복 왕조 내의 다른 백성들처럼 대하지 않고 하층 계급으로 강제 편입시킨 건 이 왕조가 유일하며 또한 역대 중국 통일 왕조 중 유일하게 한반도 전체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간접적으로 통치했던 왕조이기도 하다.
원나라 지배층이 몽골계이기는 했어도 한족이 대부분이고 충신들 중에는 유복형이나 조양필 등 한족이 더 많았으며 나중에는 몽골 귀족들이 한족화되기도 했다.[6] 그리고 몽골 제국 시절부터 극동 방면의 주력부대는 한족 부대였고 몽골족은 지휘관 뿐이었다. 당장 하급 장수들부터가 전부 여진족 및 거란인들이었다.[7] 즉 원나라는 중국 역사가 맞고, 자신들도 정통성을 가진 중국 왕조처럼 행세했다. 게다가 후세의 중국 왕조들도 내몽골로 쫓겨난 북원은 몰라도 원 세조인 쿠빌라이 칸의 시대부터 베이징, 즉 대도를 차지하고 있을 때까지는 중국 왕조로 봤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청나라 및 요나라와 같은 전형적 정복 왕조로, 되려 만약 원나라가 망하지 않고 19세기까지 계속 이어졌다면 중국에 있어 원나라의 몽골풍 인상이 강하게 남았을 것이다.[8] 치파오와 변발 등 만주족의 인상이 현대에도 깊게 남아있듯 말이다. 그리고 이 만주족도 몽골계 종족인 퉁구스인들이다.
다만 원나라의 역사가 중국의 역사라고 몽골 제국 전체의 역사 또한 중국의 역사라고까지 확대 해석도 하지는 말자. 시간이 흐르면서 몽골 제국은 여러 칸국으로 쪼개지면서 터전으로 삼은 지역의 문화에 동화되는 모습을 보이는데 원나라는 중국 지역에 동화된 칸국이라 볼 수 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 중국 역사가 몽골 제국 전체의 역사를 아우른다고 보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2 사회
정복활동 초기 몽골은 한때 실제로 중국인들을 모두 죽이고 그 땅을 뺏고 논밭을 목장으로 바꿀 계획도 했다. 그러자 야율초재의 "근데 얘들 죽이면 세금은 어디서 걷어요?" 이 한마디에 그만두었다는 기록이 중국 쪽에 있긴 한데, 스기야마 마사아키 같은 학자들은 거짓말일 것이라고 단언한다. 몽골인들도 세금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고, 도시 한두 개도 아니고 화북의 그 많은 사람들을 다 죽인다는 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는데 그런 계획을 했을 리가 없다고. 목초지 발언은 몰라도, 일단 야율초재에게 거란족의 나라를 멸망시킨 여진족들을 모두 죽여주겠다고 한 말은 진심으로 보인다. 다만 몽골 제국은 바로 그 불가능해보이는 학살로 문자 그대로 나라 하나 지워버리는 건 예사였기에... 칭기즈 칸이 마음만 먹었으면 정말 중국은 싸그리 쓸렸을지도 모른다. 본격 원조 에코파시스트
원나라의 통치는 영주분봉제로 기본적으로 봉건적 신분제 사회였다. 원나라는 '몽골인 → 색목인 → 한인 → 남인' 이렇게 계급순으로 구성된 신분 제도를 실시했는데, 이때 한족들은 3~4 등급의 피지배층으로 분류되어 생활을 하였다.[9] 그리고 원나라에서는 호적상 이들의 신분층을 계관호와 투하호로 나누었는데, 투하호는 귀족에 사적으로 배속된 백성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양민층이며 노예층은 '구구'라고 따로 불리었다. 원은 세수를 늘리기 위해 이런 노예들을 해방시켜 양민층으로 흡수시키려 하였다. 이 이외는 대략 다음과 같다.
- 원나라의 법률은 "'노예는 물건과 같다"'라고 규정했는데, 주인은 임의로 매매하거나 증여할 수 있었다.
- 20가구를 1갑(甲)으로 편성하였다. 각 갑마다 한 명의 갑주(甲主)를 두었다. 갑주는 몽골인이다.[10]
- 20가구가 1명의 몽골인을 먹여살려야 했다. 또 몽골인 갑주는 새로 결혼하는 한족 여성의 초야권[11]은 몽골 병사의 몫이었는데, 중국 한인은 혈통의 순수성 유지를 위해 첫번째 태어난 아기를 죽였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흔한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다만 이건 한족에 대한 차별이 목적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몽골에서는 라마승에게 처녀성을 바친 다음에라야 다른 남자와 혼인을 할 수 있는 습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 관점으로 보면 정말. 개소리다몽골에게 직접 지배당한 중국 대륙에 거주했던 사람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고 보인다.
- 반란을 방지하기 위해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다.
- 여러 사람이 모여서 집회를 열지 못하게 했다. 열더라도 대부분 어용 집회.
- 한족은 무기류를 일체 가질 수 없었다. 10가구에 하나의 부엌칼을 가질 수 있게 하였다. 무술을 배우거나 사냥을 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것은 몽골족의 동의를 받은 후에 가능했다.
- 노예는 사유물로 재산은 언제든지 빼앗을 수 있다.
- 전부는 아니지만 노예인 한족에 한해 전통적인 한족 성명을 가질 수 없었다. 출생일자를 가지고 이름을 삼은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주중팔.
- 몽골인들과 색목인들은 관직이나 공직 등 중요한 자리에 등용될 수 있었지만 3, 4계급인 한족은 불가능했다.
또한 직종에 따라서 10등급으로 나누었다. 관리, 아전, 도사, 승려, 의사, 기술자, 목공, 창녀, 유생, 거지가 그 순서다. 또 원 중기서부터 과거가 시행되었는데 이전에 비해 유학적 지식보다 실무 행정이 중시되었다. 이러한 실무 중시 경향은 원뿐만 아니라 금과 신법 이후의 송에서도 그랬다.[12]
물론 이러한 조항이 실시된 건 일부 지역에 한정되어 있었고, 특히 강남 지역에서는 송대부터 터잡고 살아온 한족 지주들의 자치가 실시되는 지역이 태반이었다. 애시당초 몽골은 이 차별 정책을 중국 전토에 시행할 만한 행정 역량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를 잘 알고 있는 원나라 측에서 갈아엎으려는 시도가 몇 번 있었지만 자체 분열로 그럴 여력이 없었고, 게다가 역설이지만 이게 오히려 도움이 됐는데 원나라 말기 주원장을 비롯한 여러 실력자들이 강남에서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원나라를 칠 여력을 확보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손해가 되었는데, 농민 반란군 중 무장 상태가 농민이 아니신 분들도 생겼기 때문이다.# 각종 화기를 다루는 자칭 농민 반란군
근래에는 저 한족을 노예로 했단 설이 부정되고 있는데 그 근거 중 하나가 강남의 자치다.[13] 강남인은 하북인과 달리 머리도 안 밀리고 한족 신사층끼리 알아서 잘했다. 그리고 유복형이나 조양필 등 한족 간부들도 원나라 황실을 위해 많이 봉사하곤 했다. 특히 유복형은 고려인인 홍다구와 함께 원나라의 일본 원정에 선봉장으로 섰다.
문제는 원나라 말기 중국인들을 몰살시킬 움직임이 더 있었다는 것. 물론 국가의 전면적 막장화와 교체로 저지되었다.
그리고 사서를 보면 몽골인들이 군사 부문을 제외하고는 행정에서 별로 한 것이 없는 나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점령지에 대한 통제력이 약해 상당히 위태로웠다. 비유를 하면 군대는 있으나 경찰이 없어서 몽골인이 적대적인 점령지에 소수로 여행을 다니기에는 매우 위험했다. 조공을 바치면서도 자기들끼리는 대놓고 몽골인을 타타르라고 부르며 경멸한 러시아 같은 곳들은 몽골인을 죽이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기 때문에 안전책도 없이 갔다가는 사망이었다. 유목민이 선조인 나라들을 봐도 특이한 케이스다. 물론 농경국가적 성격이 있는 경우다. 몽골의 경우도 해당이 되는 것처럼 보이나 구체적인 예를 들어 만주족과 몽골인을 비교하면 당연 안습이라 사실 묶어서 분류하기에는 너무 특이한 나라다.
명목상으로는 몽골인이 중요한 행정적 위치를 가지고 있었으나 몽골 제국에서 여러모로 우대를 받던 색목인들의 기록에서는 잉여다. 물론 페르시아인처럼 몽골인들에게 털린 사람들도 있어서 폄하로 볼 수도 있으나 거란족인 야율초재의 기록에서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반론을 하려고 해도 몽골 출신의 학자나 심지어는 글을 제대로 알던 사람도 극히 적기 때문에 반론도 거의 불가능하다. 학문적 스펙이 뛰어나지 않았던 사람들도 좋은 결과를 낸 적이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으나 문제는 일단 학문을 알아서 학문적 능력을 기른 사람들이나 그렇고 몽골인들은 학문 자체를 모르니 답이 없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수학적 업적을 남기려면 일단 학벌이 좋지는 않아도 수학을 배워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몽골인은 자기가 직접 학문을 하는 것보다 다른 민족들을 이용하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에 통수를 맞을 위험이 항상 있었다. 이런 문제점 때문이라도 메이저 민족들 중에서 유목민 출신 선조들을 가진 경우공부를 해서 중간에 농경 민족화 되었다.를 살피면 유목민들도 본인들이 어느 정도 학문에 관심을 갖고 국가를 운영하는데[14], 특이하게도 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자기가 직접 공부하는 것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사람들이 운영하던 국가였다. 영웅은 공부 따원 안 한다네 그러나 각 지역에 동화된 이후에는 지역문화에 능통해진 몽골인들도 많다.문제는 그때쯤되면 그 지역 몽골인 자체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3 행정
역대 중국 통일 왕조들 중 가장 영토가 넒었지만 가장 취약한 행정력을 자랑했다. 그야말로 군현제를 천년전 봉건제로, 근세기 중앙집권국가를 중세 봉건제도로 되돌린 수준이다. 사실 이게 멸망의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원나라의 지방행정제도는 중서성이 승상부 역할을 맡아 전 지역을 총괄하고, 그 아래에 11개 행성을 하남, 강남, 섬서, 사천, 요양, 감숙, 운남, 영북, 정동[15]를 총독부로 두어 지방을 통치했다. 그 지역의 3분의 1이 정복활동 도중에 분봉된 왕공제후들 및 정복전쟁 당시 원에 붙은 군벌들의 영지로 곳곳에 왕부가 설치되었다. 이들 지역에 대해 원 황실은 간섭은 할 수 있어도 통치는 불가능했다. 징세 불가. 징병 불가. 행정력 행사 불가. 이건 현대의 기준에서 봐도 외국 혹은 자치국이나 마찬가지다. 거기다 중서성 관할 지역에서도 왕공제후들 및 귀족들 영지가 빼곡히 가득차 있었다.
거기다 정규군으로 화북에는 4개 몽골도만호부[16], 강남에는 22익, 후광 및 쓰촨지역에 각각 6익의 한군만호부[17]들을 배치했는데, 영지까지 분봉시켜놓고 지휘관은 세습이었다. 거기다 이들은 지방행정체계인 행성 밖에서 존재했다. 따라서 얼마 못가서 죄다 군벌화. 황실 직할군은 시위군단과 케식 합쳐서 1개 도만호부 수준이다.여기에 유목민 특유의 문화와 관료제의 미비 등으로 인하여 중앙정부의 영향력이 특히 더 낮았고, 이 때문에 다른 왕조들처럼 지방세력의 발호를 억제하려는 시도조차 할 수 없었던 것.
이러한 일은 쿠빌라이 칸이 남송원정군을 장악하기 위해 이것저것 이권을 막 퍼줘서 가능했던 일. 쿠빌라이 칸은 왕공제후들의 자제들로 구성된 케식을 인질삼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시궁창. 원 황실은 이걸 통제하기 위해서 열심히 연회를 열어 달랬지만 임시방편에 불과했고, 심심하면 반란과 쿠데타가 일어났다.
4 문화
원나라는 몽골지상주의였으나 단 이 나라도 한족화는 피하지 못해 후대로 갈수록 몽골귀족들이 중국식 문화에 젖어 몽골식 성명을 중국어로 치환했다. 물론 변발이랑 호복은 이 시기부터 북중국에 한해 강제했으나 그나마 명목상에 불과했으며 남중국은 사실상 신사층을 중심으로 자치제를 유지해 터치도 안하고 내버려 뒀다.
이름만 중국식으로 바꾼 게 아니라 중국의 제도 등을 도입하고, 후대로 갈수록 중국색이 강해지게 되지만 다른 이민족 국가들에 비하면 그 강도는 약하다. 중국 특색을 지양하며, 몽골의 정체성을 강하게 유지하였기 때문. 그런데 몽골인의 숫자가 너무 적다보니 유지하기가 매우 까다로웠고 그 성격도 매우 이질적이라 오래가기 힘들다는 단점이 있었다. 결국 그들의 문화는 그 시대를 지탱하는 데만 유효했다. 그나마 청의 만주족과 달리 그 정책 때문인지, 아니면 북방에 근거지가 건재해서인지 나라 자체는 망하지 않고 몽골 공화국으로 계승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물론 그 전에 할하, 차하르, 부랴트, 오이라트 등 부족별로 분열되었고 외몽골은 청대에도 반 독립지역으로 놀았기 땜에 독립이 가능했으나 내몽골은 만주족과 일체화되어 현재까지 중국의 일부로 남아있고 부랴트 역시 일찍이 러시아인들에게 점령당해 자연스레 러시아화되었다.
물론 원나라가 남긴 문화적 영향도 있긴 하다. 아니 꽤 많다. 대표적으로 매우 인기있는 중국인들의 간식인 북경 양꼬치가 바로 원나라와 명나라때 북경에 잔류한 몽골인들에게서 유래한 것. 그리고 명나라 초중기의 복식도 한동안 몽골식 복장의 영향을 받은 형태였고[18] 베이징의 지역색에도 알게 모르게 영향을 줬으며 베이징의 여러 지명도 몽골인들이 지었다고 한다. 작곡가 가오샤오숭(高晓松)이 방송에서 베이징의 명칭이 촌스럽다는 말에 몽골인이 글을 몰라서 그랬다는 무개념발언을 했다가 논란이 된 적이 있다. 변발과 수병 빵모같이 생긴 모자는 청나라대에 널리 퍼졌지만 기원은 원대다. 또한 북방 중국인(북부 한족)의 혈통에는 적잖이 북방계(몽골) 혈통이 섞여있는데 몽골통치 하에 혼혈되어 태어난 것이다.
5 미디어에서의 원나라
미디어에서 원나라가 나오면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는데, 하나는 칭기즈 칸이 나올때 후일담으로 잠깐 언급되는 거랑 나머지 하나는 개판오분전이 되어 국가 막장 테크를 타는 말기의 원나라가 바로 그것이다. 한국의 경우 대몽항쟁기의 일이 사극 등에 자주 나온다.
신의(드라마)에서는 공민왕 때까지의 고려왕들이 전부 줄줄이 무능했었다는 이유로 원나라가 고려를 합병하려고 했다..
기황후(드라마)에서는 기황후, 고려의 가상왕 왕유, 토곤 테무르(혜종)의 관계를 초반에 가상적으로 설정한 스토리로 시작하여 이후 원나라에서의 스토리를 다룬다.
중국 드라마인 건원풍운(국내명은 칭기즈 칸의 후예)에서 쿠빌라이 칸에 대해 다루었다.
6 역대 황제
원나라 건국(1270년) 후의 군주들만 다뤘다. 그 이전과 이후의 칸들은 몽골 제국이나 북원 항목을 참고. 국성은 보르지긴(孛兒只斤)이다.
아래의 역대 황제란을 보면 알겠지만, 국가가 존속했던 99년(1271-1368) 중 첫째 쿠빌라이(25년)과 마지막 토곤 테무르(36년)을 빼고 나면 39년(1294-1333)에 황제가 9명이 있었던, 여러가지 의미로 대단했던 막장 나라다. 평균 약 4년. 그마저도 13년 동안 재위한 2대 테무르를 제외하면 1대에 3년.
대수 | 묘호 | 시호 | 칸호 | 휘 | 연호 | 재위기간 |
1대 | 세조 | 성덕신공문무황제 | 쿠빌라이 칸 | 쿠빌라이 | 중통(中統, 1260~1264) 지원(至元, 1264~1294) | 1260~1294 |
2대 | 성종 | 흠명광효황제 | 테무르 울제이 칸 | 테무르 | 원정(元貞, 1295~1297) 대덕(大德, 1297~1307) | 1294~1307 |
3대 | 무종 | 인혜선효황제 | 카이산 퀼리그 칸 | 카이산 | 지대(至大, 1308~1311) | 1308~1311 |
4대 | 인종 | 성문흠효황제 | 아유르바르와다 칸 | 아유르바르와다 | 황경(皇慶, 1312~1313) 연우(延祐, 1314~1320) | 1311~1320 |
5대 | 영종 (英宗) | 예성문효황제 | 시디발라 게게엔 칸 | 시디발라 | 지치(至治, 1321~1323) | 1320~1323 |
6대 | 진종 | 흠인대효황제 | 예순 테무르 칸 | 예순 테무르 | 태정(泰定, 1321~1328) 치화(致和, 1328) | 1323~1328 |
7대 | - | 폐제 | 라기바흐 칸 | 라기바흐 (阿速吉八) | 천순(天順, 1328) | 1328 |
8대 | 문종 | 성명원효황제 | 자야야투 투그 테무르 칸 | 투그 테무르 | 천력(天曆, 1328~1329) | 1328~1329 |
9대 | 명종 | 익헌경효황제 | 쿠살라 후트그투 칸 | 쿠살라 | 천력(天曆) : 1329년 | 1329 |
복위 | 문종 | 성명원효황제 | 투그 테무르 칸 | 투그 테무르 | 지순(至順, 1330~1332) | 1329~1332 |
10대 | 영종 (寧宗) | 충성사효황제 | 린칠반 칸 | 린칠반 | 지순(至順) : 1332년 | 1332~1333 |
11대 | 순제 | 선인보효황제[19] | 토곤 테무르 칸 | 토곤 테무르 | 원통(元統, 1333~1335) 지원(至元, 1335~1340, 1368~1370) 지정(至正, 1341~1368) | 1332~1368 |
7 계보도
1. 세조 | |||||||||||||||||||||||||||||
친킴 | |||||||||||||||||||||||||||||
카밀라 | 다루마바라 | 2. 성종 | |||||||||||||||||||||||||||
6. 진종 | 3. 무종 | 4. 인종 | |||||||||||||||||||||||||||
7. 천순제 | 9. 명종 | 8. 문종 | 5. 영종 | ||||||||||||||||||||||||||
11. 원순제 | 10. 영종 | ||||||||||||||||||||||||||||
12. 소종 | 13. 평제 |
8 추존 황제
묘호 | 시호 | 성명 | 비고 |
희조(熙祖) | 의현황제(毅玄皇帝) | 보단차르(孛瑞察兒) | 태조 추숭, 칭기즈 칸의 10대조 |
선조(宣祖) | 공철황제(功哲皇帝) | 카부러(合不勒) | 태조 추숭, 칭기즈 칸의 증조부 |
열조(烈祖) | 신원황제(神皇帝) | 예수게이(也速該) | 태조 추숭, 칭기즈 칸의 생부 |
목종(穆宗) | 도녕황제(道寧皇帝) | 주치(朮赤) | 세조 추숭, 태조의 장남 |
성종(聖宗) | 충무황제(忠武皇帝) | 차가타이(察合台) | 세조 추숭, 태조의 차남 |
예종(睿宗) | 인성경양황제(仁聖景襄皇帝) | 툴루이(拖雷) | 세조 추숭, 태조의 4남 |
유종(裕宗) | 문혜명효황제(文惠明孝皇帝) | 친킴(眞金) | 성종 추숭, 세조의 차남 |
순종(順宗) | 소성연효황제(昭聖衍孝皇帝) | 다루마바라(答剌麻八剌) | 무종 추숭, 무종의 부친 |
현종(顯宗) | 광성인효황제(光聖仁孝皇帝) | 카말라(甘麻剌) | 진종 추숭, 진종의 부친 |
9 트리비아
- 참고로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은 원나라 법전은 대한민국에서 발견되다. 그것도 라면박스 안에서(...) 세계 유일 몽골 최후의 법전 '라면박스'서 찾았다 몽골 대통령이 이를 보기 위해 한국을 방한했을 정도.
- ↑ 다만 3번째 단명왕조라는 건 몽골 제국이 몽골 본토만, 그리고 이후 중국 북부만 차지하고 있었던 기간은 제외하고, 중원을 통일한 이후 시기만 계산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몽골 제국 자체의 존속기간은 훨씬 길다.
- ↑ 외몽골의 할하 몽골인 한정. 내몽골은 중국, 부랴티아는 러시아 소수민족으로 잔존하고 있는 형편이며 내몽골인의 경우 내몽골 내에서조차 소수다.
- ↑ 쿠빌라이 칸이 원나라를 세우면서 몽골 제국이 본격적으로 중국화되었으니 어느 정도 말이 된다.
- ↑ 내몽골의 몽골족인 차하르인은 몽골국의 할하인 및 러시아의 부랴트인, 오이라트인과 원래 사이가 나빴다. 유목민에게 부족이 다르단 건 그냥 다른 나라라는 것이다. 현재도 내몽골과 외몽골인의 키배는 살벌하다.
- ↑ 일 칸국, 킵차크 칸국, 오고타이 칸국, 차가타이 칸국.
- ↑ 현재 베이징의 시민들은 대부분 한족화된 몽골족의 후손들이다.대부분 명나라 영락제 때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천도하면서 난징에서 데려온 사람들의 후손인데, 종교도 티베트 불교세가 몽골의 영향으로 강한 편이다. 상하이나 허난 성 등 순수 한족 거주지가 기독교세가 강한 것과 대비되는 부분.
- ↑ 서방 원정의 경우 투르크인들이 주력이었다. 몽골인은 수부타이 및 주치 정도만 있었다. 몽골인의 수는 1% 남짓한 극소수라 당연하다.
- ↑ 혹은 내몽골의 차하르부가 청나라에 복속되지 않고 자신들의 주도로 중원을 점령하거나 준가르가 청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의 새로운 주인이 된 후 정통 중국 왕조를 표방하여 그 상태로 19세기까지 차하르부나 준가르의 중원 통치가 계속 이어졌어도 마찬가지로 차하르부나 준가르의 몽골풍이 전형적인 중국풍으로 각인되었을 것이다.
- ↑ 여진인이나 고려인은 한인 계급으로 분류되었다.
- ↑ 이 갑주가 반란이 일어났을때 최우선적으로 죽었다.
- ↑ 여자 노예가 결혼할 경우 영주가 먼저 여자와 동침하는 권리
- ↑ 잡과 등이 이에 해당한다.
- ↑ 서울대 문석홍 교수 참조 '몽고인들은 자신들을 정점으로 하여 제 2계급에 색목인, 제 3계급에 화북의 한인/만주인/고려인, 제 4계급에 최후까지 저항했던 남송인', 즉 피지배 계급은 맞았는데, 다 정복을 하지도 못했고 행정력도 부족하니 내버려 둔 것이라 보면 된다. 중동이나 러시아의 경우를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다.
- ↑ 당장 중국의 후대 유목민계 왕조인 청나라도 적극적으로 학문을 했으며
비록 문자의 옥으로 자유로운 학문 연구는 불가능했지만 황제 본인은 적극적으로 학문을 익혔으니인도의 무굴 제국과 유럽 및 중동의 오스만 제국도 마찬가지였다. 원나라가 특이케이스인 셈. - ↑ 한국사에서 나타나는 '정동행성'을 말한다. 정동행성은 일본 정벌을 위해 설치한 기관이지만 일본 정벌이 무산된 이후에도 존치되어 고려 내정을 간섭하는 기관으로 기능했다. 이름에서 보듯이 이 기관은 원의 지방관청 형식을 띄고 있기 때문에 당시 한반도가 원의 영토였는지 아니면 고려가 그대로 존속했으되 심하게 간섭만 받았는지 여부를 논할 때 정동행성의 성격은 매우 중요하게 거론된다.
- ↑ 만호들을 총괄하는 군단급. '몽골' 이란 이름이 붙어있는 데서 알 수 있듯 이들은 몽골인이였다. 병력 정수 6~7만
- ↑ 1익 = 만호. 단, 사이사이에 '상만호' 라는 도만호부의 절반 수준의 크기의 부대도 있었다. '한군' 이라는 데서 알 수 있듯 계급상 3번째인 한인으로 구성. 원나라는 남인들을 경계하여 군대에서 철저히 배제했다.
- ↑ 정확히 고려양의 영향을 받은 몽골의 복식이었으며 이것도 명나라 홍치제 시기에 그의 선포로 한족 복식이 전통적인 한푸로 바뀌게 된다. (15세기 후반)
- ↑ 역대 중국왕조의 마지막 황제의 시호는 그 왕조를 없앤 다음 왕조가 내린 것을 삼는 것이 원칙이다. 북원이 내린 혜종(惠宗)이란 시호가 있긴 하나 북원은 고작 2대로 끝나고 멸망하였으며 원을 중원에서 몰아낸 명제국이 중국 통일왕조로 인정받는 만큼 명태조 주원장이 붙인 순제가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