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같이 보기 : 미안할 짓을 왜 하냐, 꼬우면 북한가라 이기야, 개소리, 전체주의
1 소개
한국인을 비롯해 범적으로 공동체주의가 만연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흔히 사용하는 관용적 표현 중 하나이다.[1] 이 표현의 의미를 논리적으로 분석하면 "네가 힘든 일은 나(화자)나 다른 사람도 힘든 것이다. 그런데 나(화자)와 다른 사람들은 견뎌내는 일이다. 따라서 너도 견딜 수 있어야 함을 알아야 한다."의 삼단논법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이 표현의 숨겨진 뜻은 협동과 노력, 그리고 인내이다. 이게 분명 가만 생각해 보면 뭔가 이상한 논리인데도[2], 묘하게 설득력 있어서[3] 진리로 추앙하는 사람이 많다. 농경사회나 산업사회처럼 다수의 노동력이 필요한 노동집약적인 환경에서 특히 빛을 발한다.
본래 상대방을 격려라 쓰고 갈굼이라 읽는다하고자 사용하는 것인데 현실적으로 말하면 현 상황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을 때 의지드립적으로 옹호하기 위해 남용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숨겨진 의미로 해석하면 "다른 사람들도 다 힘들지만 불평하지 않으니, 너도 불평하지 말라." 정도이다. 또한 이런 논리가 폭행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선 맞을 짓 항목 참조.
2 표현의 문제점
이를 반대하는 명언으로는 유병재의 페이스북 발언이 있다.
"나만 힘든 건 아니지만, 니가 더 힘든 걸 안다고 내가 안 힘든 것도 아니다." - 유병재 페이스북 - tn=%2As 출처
결론부터 내리고 보면 "너만 힘든 거 아니다"라는 표현은 그야말로 획일화를 상징하는 말이다. 암묵적으로 모든 사람들의 인내력이나 처한 환경이 동일하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노동집약적인 산업이 주를 이루는 곳이라면 어느 정도 납득하는 부분이 있지만, 인재를 공장제품 찍어내듯 모조리 획일화시키는 것은 장기적 사회발전 시나리오로 봤을 때, 그리고 문화 및 문명적으로 봤을 때도 정말 답이 없는 책(策)이다. 이를 증명하는 것도 정말 많이 찾아볼 수 있는데 캄보디아의 정체기를 불러온 크메르 루주 사태와 소련의 공산주의의 실패, 유럽에 수백 년 가까이 암흑기를 가져온 신앙기반 금욕주의, 그리고 북한의 협동농장도 정확한 예시이다.
인간의 본질 및 성향이라는 것은 똑같은 환경에서 지냈어도 극과 극을 달리는 케이스가 많다. 하물며 유전적으로 부모의 피를 이어받은 자식이나, 심지어 유전 형질이 같은 쌍둥이 사이에서도 성격이나 행동이 똑같지 않은 아이들이 태어나는 판이다. 결국, 이런 병폐를 사회범위로 늘리면 더 이상의 말이 필요없다. 그렇다보면, 동일한 환경에 대비해 분명히 상대적 약자가 발생하고 이를 보호해 주어야 할 상대적 강자 또한 존재한다. 예를 들어, 군대에서 굉장히 힘든 훈련을 받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지쳐서 비틀거리는 병사에게 선임병이 "지금 너만 힘든 줄 아냐?" 라고 물어보는 경우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징병제 특성상 선별해서 들어온 병사들이 아닌 만큼[4] 개중에는 분명 체력이 좋은 사람이나 저질체력도 반드시 있고, 체력관리에 익숙하지 않은 병사가 있을 수 있으며, 지구력이 떨어지는 병사가 있을 수도 있다. 위 표현은 그러한 개인차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정작 이런 말을 하는 병사들은 이런 개소리를 하기 이전에 이미 후임들에게 지나치게 과도한 일과와 책임을 부여했을 경우가 많다. 또한, 상관이랍시고 이러한 짓거리를 일삼는 것은 자신의 능력이 한참 뒤떨어짐을 공공연히 광고하는 꼴이다. 이는 일본군의 사례에서도 아주 잘 드러난다. 당장 스타크래프트 게임만 하더라도 유닛 간 상성 관계를 따져가면서 전투를 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는 정말 효율적인 전략전술이 아니다. 예를 들어, 초반러시나 기지가 위급한 상황이 아닌 이상 일꾼을 직접적인 전투에 동원한다면 겜알못 취급을 받을 텐데 이러한 사례가 바로 이에 맞먹는 멍청한 행동이라는 것이다.
상관의 능력이 좋다면 후임에게 과도한 일과와 책임을 부여할 필요도 없을 뿐더러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기에 굳이 시키지도 않고, 모범적인 시범을 직접 보여주거나 올바르게 후임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 상관의 책임감이자 능력이다. 애초에, 손자병법부터 "진정한 지도자는 힘이 아닌 모범으로 다스린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진정으로 각성해야 하는 것은 오히려 무능한 상관인 셈이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개개인의 능력을 벗어나는 무리한 명령까지도 상명하복이라는 이름하에 암암리에 행해지고 있는데, 애초에 상명하복이란 합리적인 명령이라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수행이 불가능한 무리한 명령으로 인해 하급자를 다치게 하거나 부상, 사망으로 이르게 하는 것은 명백한 상관의 책임이자 징계를 받아야 할 잘못이다. 그리고, 그 잘못에 대한 책임은 당연히 상급자가 져야 하는 것이며 책임지는 것을 거부한다면 응당 직무유기가 된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자신과 상대방을 동일시하는 성향이 있을 때 이 표현은 매우 논리적(?)이 된다. 위 예시에서 "나는 힘들지 않은데, 왜 이 녀석은 힘들다고 불평이지?"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은 기본적으로 잔꾀가 아니라는 가정하에 자신이 해당 환경에서 상대적 강자에 있기 때문인데, 그걸 자기자신이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른 상황을 더 추가해보면 아래와 같다. 아래의 말들이 재수없다고 느껴진다면 어째서 위의 표현이 잘못된 것인지를 이해한 것이다.
- 왜 돈 아깝게 지잡대 따위를 다니는거지? 그냥 1년 수능공부 더 빡세게 해서 좋은 대학에 가면 될 것을. 아니면 그냥 일자리나 찾아보든가?
- 뚱뚱한 놈들은 그저 밥 먹고 똥만 싸대는 한심한 놈들이지, 머릿속에 먹을 거 생각밖에 없고 살 뺄 노력도 안 했다는 거잖아? 까짓거 한 끼 굶고 운동하면 되는데.
- 아니, 이런 쉬운 것도 못해요? 좆볍신 새끼들, 나대지 말고 더 연습해 오든가, 아니면 그만두든가?
다만, 정말로 자기 자신(나) 말고 모두가 힘들다고 하는 상황이라면 분명한 사회적 문제인 것이고 당연히 당장 때려고쳐야 할 심각한 문제라는 소리다. 알고보니 "니 탓이 아니라 사회가 그런 거니 힘내라"는 츤데레성 발언이라 카더라
위의 서술들에서 보이듯이 저 표현은 상당히 비논리적이고 근거도 없이 상대방을 비난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남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무능한 행태이기 때문에 저 표현을 사용하는 대상에게는 반드시 해당 책임을 추궁하면서 저러한 행태를 다시는 못 하도록 하는 인실좆을 해야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권장된다.
3 적용 사례
- 정작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고서 자신 혼자만의 의견을 서열관계에서 하급자에게 강요할 때 이런 표현을 즐겨 쓰는데, 실제로 익명 설문조사를 해보면 너만 힘든 줄 아는 것이 아니라 너만 힘든 줄 모르는 결과가 나오기 십상이다. 이런 표현을 쓰는 놈들이 익명 설문조사를 시행하지 않는 이유는 설문조사 했을 때 발릴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권력으로 찍어누르는 것이다. 또한 위에도 언급되있듯 상명하복이란 합리적인 명령이라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명령이 분명히 잘못되었고 개선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체면 때문에 다수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것은 벌받아 마땅한 행위이다. 무엇보다 이런 부조리들은 일본군에게서 자주 나타났던 부조리로, 한국인이라면 당연히 부끄러워하고 분노해야 할 행태이다.
- 무임승차 혐오의 논리와 결합할 경우 어느 정도의 호소력까지 갖게 되기 때문에 부적절한 표현이라고 지적하기도 힘들어지게 된다. 즉, "다들 묵묵히 참으며 희생하고 있는데 너 혼자만 희생하기 싫고 달콤한 이득만 누리겠다고? 우리가 뭐 안 힘들어서 내색을 안 하고 있는 줄 알아?" 와 같이 희생 vs. 꾀병 논리로 접근하게 되는 경우가 실제로 있다. 하지만 그 관행이라는 것을 자세히 뜯어보면 외국에서는 안 한다든지, 업계 상위 회사에서는 안 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반례도 엄청나게 많다. 당장에 지금 너만 힘든 줄을 모른다라고 말해줘야 할 상황이다. 무엇보다 저 관행이라는 미명하에 벌어지는 부조리와 악습 감추기/합리화는 자연주의의 오류에 해당하는 명백한 논리적 오류다. 저런식으로 따지자면 세계적으로 비난받는 아프리카의 여성할례나 중동권의 명예살인도 이전부터 해온 관행이니 괜찮다는 식으로 어물쩍 넘어가도 된다. 그렇기에 저 관행 어쩌구 하는 개드립이 나온다면 이렇게 추궁해서 책임/죄값을 지게 하자. "그래서, 당신이 지금 잘했냐? 지금 잘못이 없다는 거냐?" 라고 말이다.
- 인간극장, 성공시대 같은 류의 TV프로그램들도 모두 이러한 맥락에서 방송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상황에 따라서는 격려에 사용될 수 있는 말이기에 적절한 타이밍에 사용하면 되려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자기계발서 중에서도 이런 것을 노리고 하는 조언을 담은 불쏘시개나 냄비받침같은 것이 은근히 많은 건 넘겨두자.
- 예외적으로 이런 논리가 허용되는 경우가 아주 없진 않다. 바로 범법자들, 특히 묻지마 살인이나 강도 같은 흉악범들이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쳐놓고 흔한 레파토리로 "살기 힘들어서 그랬다", "사회가 날 이렇게 만들었다" 같은 뻔뻔한 자기변명을 해대는 경우에까지도 동정에의 호소에 홀라당 넘어가버린다면 오히려 그쪽이 더 문제일 것이다. 앞서 언급된 대로 모두가 다 힘들게 산다고 해서 고통을 받아들이는 개인차까지 무시되어선 안 되겠지만, 오늘도 상식을 가진 대부분의 사람들은 울화를 풀 길이 없다 해도 사람을 죽이지 않고 도덕과 양심에 따라 꾹 참고 살아가면서 자기 나름대로의 건전한 화풀이법을 모색하고 실행하고 있다.
4 유사 표현
자매품으로는 "아프리카 난민들에 비하면 넌 행복한 줄 알아라"가 있다.[5] 근데 그게 너희들 때문은 아닌 거 같은데? 그러면 지상낙원은 사우디아라비아?[6]
이같이 아프리카 난민 어쩌고 하면서 전혀 상관없는 주관적인 격이 낮은 대상을 끌어오는 것을 학문적으로 말하자면 하향적 사회비교라고 한다. 여기서 진정으로 깨달아야 하는 것은 현실에 감사하는 마음일지는 몰라도, 현실에 안주하는 마음은 절대로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저들이 저런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아프리카 난민처럼 살아가지 않고 성장했기 때문인데, 저들의 말대로라면 아프리카 난민보다 조금 더 잘 사는 수준으로만 유지하고 살아가면서 경제발전, 복지정책, 국방정책 등으로 현실사회의 문제점을 개선하면서 더욱 발전을 해야 할 필요가 전혀 없다.[7]
즉, 말의 앞뒤가 안 맞는다는 것이다. 저런 생각이라면 6.25 전쟁 이후 언급하는 아프리카 난민처럼 판자촌에서 살아야지, 아파트 같은 거 짓고서 산업화의 업적이니, 한강의 기적이니라고 씨부리는 것은 논리적 일관성이 전혀 없다. 그럼 반대로 우리도 그런 곳처럼 총 들고 빵야빵야 해야겠다고 해주자! 네 다음 구속
애초에 비교대상부터 잘못 잡은 게 저러한 논리를 펼치는 작자들이 데리고 온 대조군들을 보면 무슨 국가라고 하기도 뭣한 무법지대 유사국가들이다(...). 국가란(적어도 현대적 기준으론) 사회계약론에 근거하여 인권보장, 의사표현의 자유와 이를 반영하고 실현시키려 정진하는 태도, 분배정의가 갖춰진 집단들을 의미한다. 이 중 하나라도 제대로 못 지켜진다면 문제가 있는 국가이거나, 국가꼴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다. 얼마나 잘살든 간에 이게 못 지켜지면 오십보백보란 말씀이다.
무엇보다 이런 논리를 펼치는 작자들의 마인드가 '국가가 잘산다=개인이 잘산다'이지만 당장에 옆나라 중국만 봐도 연관성이 없다는 게 증명된다. 또한, 경제적 우월성을 강조하는 단골 궤변으로 GDP 비교가 나오지만 이것 또한 전자와 비슷하게 GDP와 삶의 질을 연관시켜서이다. GDP는 수량지수이고 후생지수가 아니기 때문에 후생평가의 기준으로서는 당연히 한계를 가진다. 이 점은 앞서 언급한 중국이나 인도의 사례만 보더라도 답이 나온다. 애초에 분배가 되야 삶의 질이 올라가지... 무엇보다 경제학의 정의는 한정된 자원을 효율적, 합리적으로 분배하는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이 쯤 되면, 저런 논리를 주장하는시는 분들은 경제학이란 학문을 무슨 정의로 받아들이는지 궁금할 지경이다.
즉, GDP와 삶의 질은 상관관계는 있어도 인과관계는 없다. 아니, 애초에 경제는 나라의 수준이나 가치를 판단하는 하나의 요소일 뿐이지, 절대적 판단기준이 될 수가 없다. 또한, 빈곤과 가난은 경제계급적 시각으로 분류하는 것이며 GDP와 같은 것으로 구분짓는 것이 아니다. 선진국이라도 판자촌에서 사는 사람은 있으며, 빈곤에 시달리는 나라라고 해서 선진국 국민 수준의 경제력을 보유한 사람[8]이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즉, 전제부터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런 논리는 극단적인 경제결정론 시각이고 인간의 존재라는 요소는 무시하고 있다는 것도 큰 오류라고 할 수 있다. 미국 잡지에서 위안부 합의에 대한 비판을 하기도 했는데, "이번의 합의가 사과라면 한국은 국가 기능을 기대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 즉 선진국인 미국에서도 경제만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주장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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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사망자 수가 세 자릿수가 넘어가는 가습기 살균제 사망사건을 가지고 "불매운동을 왜 하느냐?"망언까지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할진데도 "어쨌든 간에 한국은 잘살지 않느냐?"라고 한다면 이렇게 반박 가능하다. "그럼 내가 돈 몇 푼 던져주고 가습기 틀어서 네 가족을 죽여도 되겠네?"라고 말이다. 그건 이미 키워 잖아
그렇기에 이러한 말을 하는 사람들은 명심해야 한다. 상황이 어찌되든 간에 가장 소중한 것은 개인의 존재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협상 대상이 될 수도 없으며, 양도의 대상도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이 인간이 중심이 되는 위치에 있지 않다면, 그 어떤 경제적인 업적이든지 모두 무의미한 것이다. 인간은 돈이나 밥만 먹고 살지 않는다. 결국에는, 경제라는 것도 사람을 위한 것인데 그러지 못하고 주객전도가 된 것이니까 말이다.
무엇보다 아프리카가 못산다면 잘살도록 도와줘야한다. 저런 모습을 보고 깔보고 차별하면서 정당한 비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은 당연히 잘못된 것이다. 게다가, 저런 말들을 자주 써먹은 집단들이 역사에서 자주 보이는데 바로 수구 세력들이다.
이들은, 주로 (마르크스주의 용어 차용)계급투쟁을 매도하는 소재로서 저런 문구들을 단골로 써먹었다. 계급투쟁적 표어에 맞서는 표어로서 이른바 수혜론을 내세운 것이다.[9] 하지만, 역사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면 경제적 분배와 사회문화적 변화의 이면에는 항상 계급투쟁이 존재했다는 명백한 사실이 있는데, 그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 보자면 저 말은 그저 뻔뻔한 유체이탈 화법에 불과하다. 수혜는 무슨 수혜? 언제 거저 준 적 있었나? 그렇기에 저런 말을 하는 작자들은 당연히 이런 쓴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다.
아프리카보다 한국이 잘살고 행복하다고? 너네들이 정당한 대가를 스스로 준 적이 있었나? 우리가 너네들 같은 놈들하고 싸워서 얻어낸거지! 우리가 이러지 않았다면, 너희들은 아프리카보다 더 했으면 했지, 못하진 않았어!
라고 말이다. 애초에 저런 세력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절대 거저 포기한 적이 전혀 없으니까 말이다. 결국은 전부 계급투쟁의 산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러한 비교는 초점부터 어긋나 있는데,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는 주장(그러니까 분배에 대한 논의)에 대해 아프리카니 난민이니 하는 선천적, 환경적 요인(GDP나 인프라)을 대입하고 있다. 도대체 국가의 사회정의를 논하는 자리에서 GDP나 사회인프라 비교가 왜 나온단 말인가?
저런 식의 논리라면, 아프리카 지역에서 공공연하게 행해지는 인권침해와 범죄들[10]도 "나라가 못살아서 당연하다."는 식으로 자기합리화가 된다는 것이다. 여러모로 정신나간 소리다. 그렇기에 저런 논리는 그저 속물 근성에 비루하고 전형적인 물타기에 불과하다. 본래 논점하고는 백만광년을 넘어서 억만 광년도 넘게 떨어져있으니까 말이다.
또한, 저들이 느끼지 못하고 있지만 저러한 표현은 인종, 민족, 지역차별적 요소가 매우 다분하다는 것이다. 다만, 차별을 의도한 발언이 아닌 경우가 있겠지만 실제로 아프리카가 한국보다 경제상황이 훨씬 안 좋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봐도 사실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저런 용례는 충분히 차별적인 언사이고 아프리카 사람보다 행복한 줄 알란 말로서 아프리카에서 사는 사람들은 당연히 행복하게 살지 못하는 상대적으로 하등한 인간 군상으로 타자화되고 있다. 그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보지 못하고 그저 GDP나 경제동물에 빗대서 바라보는 물신적이고 속물적인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애초부터, 역사적으로 저러한 말들을 국가 단위로 써먹은 사례가 바로 제국주의 국가들인데, 제국주의의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 한국인들이 저러한 식민사관스러운 주장을 펼치는 것부터가 그냥 자폭이나 다름없는 행동이다. 봉건적 왕조나 구시대의 악폐습을 무너뜨리고 자신들이 지배자가 된 입장이다보니 지배 정통성을 어필하고자 쓴 말들이다.
예를 들어, "무능하고 부정부패한 조선왕조를 무너뜨리고 고통받던 조선 백성을 대일본제국의 신민으로 받아들여주신 천황 폐하(...)의 은혜에 우리 모두 감사하자!" 라든가, 이런 소리를 옹호하는 논리로는 눈 하나 깜짝하지 못할 인간들이다.
그렇기에 저러한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한다면 이렇게 반박을 해 주자. "그럼 아프리카는 더 이상 발전하지 말라는 소리냐? 인종차별주의자 새끼들아." 라고 말이다. 또한, 이 항목을 보여주고 식민사관이 그렇게 좋으면 다시 일본 지배받으라고 반박해주자.
시대가 변하고 아프리카가 한국보다 더 잘살게 되면 뭐라고 변명하려나? ...그리고 실제로 아프리카가 한국보다 더 뛰어난 경우도 있다!# [11][12] 그럼, 우리나라는 미국보다 못사니까 후진국 소리를 들어야 되는건가? 정작 대한민국보다 미국이 더 잘사는 국가라서 미국에서 보내면 행복할 텐데 저런 궤변을 늘어놓는 사람들은 미국으로 보낼 생각은 안 하고 있다.
이 단어가 한층 더 심하게 발전한 사례로는 바로 그 악명높은 꼬우면 북한으로 이민가라가 있다. 위의 아프리카 드립보다 훨씬 더한 개소리 of 개소리다. 더 자세한 건 해당 항목을 찾아보자.
그리고 비슷한 경우로는 중학생용 국정 도덕교과서[13]에 놀지 말고 열심히 일하라는 교훈의 예시로 스페인이 공휴일이 280일이나 되고 놀기만 좋아해서 유럽에서도 후진국이 되었다고 기술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국정교과서 `스페인사' 오류 논란> 19세기와 20세기 스페인은 나폴레옹의 침공으로 인해 국토가 황폐화 되고 이후 정치적으로 혼란을 겪고 왕정 붕괴와 공화정 수립, 그리고 스페인 내전이 벌어지는 등 문제의 교과서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스페인 국민들이 흥청망청 놀만한 여유가 그다지 있지도 않았다.
스페인 역사에 대한 무지일 수도 있지만 의도적인 왜곡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다. 애초에 비교된 영국, 독일, 프랑스 같은 국가들이 나중에 차차 나아지긴 했지만 산업혁명 당시 어린이들까지 포함한 노동자들의 장시간 노동 문제가 있었다는 것과 제국주의 열강으로 식민지를 착취해왔다는 사실은 무시하고 있다.[14] 문제가 제기되고 스페인 대사관 관계자까지 알게 되자 외교문제로 번질까봐 우려했는지[15] 문제의 내용을 학기 중에 급하게 삭제했다. '스페인사 왜곡' 도덕 교과서 삭제키로
그리고 그 유명한 "내가 니 나이 때에는..."이라고 말하는 꼰대들도 많이 존재한다. 한 마디로 "나는 너와 같은 나이일 때 더 고생하고 더 노력했다. 너는 그 정도도 못 하면서 말만 많냐?"라는 이른바 노오오오오오오력, 의지 드립으로 이어진다.
이 역시 어불성설인 게 어르신이 청년이던 시절의 세상과 지금의 세상은 엄연히 다르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똑같이 나전칠기를 만들어 팔아도 70 ~ 80 년대에는 그럭저럭 먹고 살 만 했지만, 2000년 이후로는 다 파산해서 기술 계승이 끊어질 지경이다. 나전칠기 장인이 바뀐 게 아닌데 이렇게 상황이 다른 건 그만큼 세상이 달라졌기 때문인 것이다. 아니, 애초에 저거 본 항목에서 수도 없이 언급되는 자연주의의 오류이다. 그야말로 과거로 되돌아 가자는 정신나간 소리이니 상콤하게 씹어주고 한 영화의 명대사를 작렬시켜 주자. 너나 잘하세요.
비교란 건 자신보다 못한 존재와 비교하며 위안을 얻거나 자신보다 우월한 존재와 비교하며 마냥 자기 자신을 비하하기 보다 자신과 다른 존재에게서 자기 발전 및 성찰의 계기와 교훈을 얻을 때 더욱 의미가 있다는 것도 알아두자.
5 역발상
이것의 안티테제는 다름아닌 오지랖(관용적 의미로서)이다.- ↑ 하지만 개인주의 우세인 서구에서도 가끔 비슷한 표현이 보인다.
- ↑ 개개인의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고려하지 않는 부분이 잘못되었다. 즉, 결론인 A(너)=C(인내력)과 전제인 B(나)=C(인내력)가 되려면 도입된 가정인 A(너)=B(나)이어야 하나 여기서 사상 견해차로 인한 문제가 발생한다.
- ↑ 사실 잘못됨을 알고 있더라도 타인은 가능하나 자신은 불가능하다 라는 타인과 자신의 차이로 인한 차별이 염려되어 묵고하는 경우도 있다.
- ↑ 체격과 체력은 다르다.
- ↑ 최근 케이블TV에서 국제구호단체의 광고를 방송하는 것도 물론 후원금을 내라는 의미도 있겠지만, 그보다도 국민들로 하여금 이러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 ↑ 물론 이러한 레퍼토리가 쓰이는 상황은 대체로 도를 넘은 자국 혐오를 보이는 작자들을 비판하기 위한 경우가 많다지만 이것이 한국의 부조리 및 악습을 정당화할 근거는 될 수 없다.
- ↑ 참고로, 모리셔스는 대한민국보다 복지정책이 잘 되어있다고 봐도 부족하지 않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모든 교육비가 무상이고, 학생들에게 대중교통비를 지원한다. 미국과 더불어서, 복지 수준이 경제 규모와 무조건 비례하는 것은 아님을 말해주는 좋은 사례.
- ↑ 당장에, 짐바브웨의 독재자 로버트 무가베는 국민들이 빈곤한 삶을 살고 있어도 수십억이 넘는 재산을 갖고 있는 부자다. 물론, 부패정치로 인해 국민들은 굶어 죽고 있는 것이다.
한 나라의 독재자가 재산이 수십억이라니... 눙물 - ↑ 현재 학술계에서 (최소 한국에선)논란의 아이콘인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해 일부 측에서 이러한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이 논란을 불렀다. 자세한 건 해당 항목 참조.
- ↑ 학살, 강간, 여성할례, 성소수자 탄압 등등.
- ↑ 국제 노동조합 연맹(ITUC)에서 세계 139개국의 노동권 현황을 조사해 발표한 세계노동권리지수(GRI)인데 한국을 최하위, 5등급으로 분류했다. 그에 비해 남아공은 무려 1등급이다. 또한 2등급, 3등급, 4등급으로 분류되는 아프리카 국가도 수두룩하다. 저러한 비교가 얼마나 그릇된 관점인지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예시이다.
- ↑ 사실 아프리카는 흑인만 사는 땅이 아니다. 북부 아프리카는 그 유럽과 지중해를 끼고 서로 교류를 오랫동안 해와서 백인이나 백인 혼혈도 많다. 이 외에도 제국주의 시절 아프리카에 진출한 백인들이 많다. 남아공도 미녀들의 수다에 출연해 유명해진 브로닌과 같이 '아프리카 출신 백인'들이 많다.
- ↑ 사실 도덕교과서를 읽어보면 교훈이랍시고 '시금치는 거친 땅에서 자란 식물인데 온실에서 자라서 맛이 없어졌다, 요즘 아이들도 온실에서 자라서 약해졌다'나 '잠은 무덤 속에서도 잘 수 있다'라는 등, "과연 이게 교훈적으로 맞는 말인가?" 의문이 들 수 있는 표현을 당당하게 써놓고 있다.
- ↑ 스페인도 사실 식민지를 지배하고 착취한 식민제국이긴 했지만, 교과서에서 얘기하는 19세기와 20세기 당시에는 영국, 프랑스가 압도적인 식민제국이었으며 이미 스페인의 대다수 남미 식민지들이 독립했다. 그나마 남은 쿠바와 필리핀마저도 미국과의 전쟁으로 잃어버렸다.
- ↑ 새역모의 사례처럼 자유발행 교과서에서 특정 국가에 대해 왜곡해서 가르치는 것도 당사국이나 그 나라 국민들이 민간 차원에서라도 불편함을 제기할 수 있는데, 이건 심지어 국정 교과서에 악의가 담겼다고 볼 수도 있는 내용으로 왜곡해서 썼으니까 그냥 있었으면 스페인 대사관이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