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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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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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 중단의 굴뚝 있는 건물이 폭발 사고가 난 원자로 4호기. 그 옆으로 3, 2, 1호기가 수백m 길이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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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 직후에 공중에서 촬영된 파괴된 원자로 4호기의 사진. 수백 장을 찍었는데 필름이 거의 다 방사선으로 타버렸고[1] 남은 것 중에 그나마 괜찮은 사진 하나.[2] 이나마도 헬리콥터에서 촬영된 거라 간신히 형체를 건진 것이지만 지상에서 찍은 건 모조리 타버렸다. 후술할 바이오 로봇 목차의 사진도 필름이 방사선에 노출돼 망가지는 바람에 사진이 이상하게 나온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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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석관 속에 괴물이 잠들어 있다, 숭고한 희생들과 함께.

북서쪽에서 바라본 오늘날의 체르노빌 원전. 관광객들은 여기서 원전을 보게 된다. 사진 왼편에는 추모비가 건립되어있고 석관 보수공사가 한창이다.

20세기 사상 최악의 원자력 사고이자 사상 최초의 7등급 원자력 사고

인류 역사상 단 두번뿐인 하지만 두번이나 일어난 7등급 원자력 사고이자 원자력 사고의 위험성과 공포를 전세계에 각인시킨 반면교사.[3][4]

서서히 무너지고 있던 소련을 완전히 결단내버린 사고.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와 함께 역사상 최악의 발전소 사고다. 당시 소련은 당연히 필사적으로 사고를 은폐하려 했지만 이 정도로 대규모의 사고가 완벽하게 은폐될리 없기 때문에 스웨덴에 방사능 낙진이 떨어지면서 36시간만에 들통났고, 그제야 소련은 "아 우리가 좀 말아먹었어" 하고 실토했다.

2 상세

Чорнобильська АЕС ім. В. І. Леніна(우크라이나어)
Чернобыльская АЭС им. В. И. Ленина(러시아어)
V.I. Lenin Memorial Chernobyl Nuclear Power Station(영어)

정식 명칭은 V.I. 레닌 공산주의 기념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이름답게 입구에는 레닌 흉상까지 있었다고 한다.

1971년에 착공되어 1978년 5월에 지금의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상용운전을 개시했던 구 소련원자력 발전소로 흑연감속 비등경수 압력관 방식이다. 이 방식의 원자로는 기술이 많이 필요 없고 가격이 싼 편이지만 안전성이 상당히 낮은 데다 제어하기 힘들다.[5] 사고로부터 2년 후 죄책감으로 자살한 발레리 레가소프[6]에 의하면 이미 사고 이전부터 소련 정부는 이 흑연감속 비등경수 방식의 발전소의 위험성을 이미 알고 있었으나 이를 은폐했다고 한다.

이 발전소 옆에는 소련 내에 단 2기 뿐이라고 알려진 Duga-3 대륙간 탄도 미사일 경보 레이더가 있는 비밀 기지가 존재했으나 원전 사고 이후 버려졌다.

3 RBMK

rbmkanal.gif

Реактор Большой Мощности Канальный, Reaktor Bolshoy Moshchnosti Kanalniy이란 뜻으로 한글로 옮기면 흑연감속 비등경수 압력관형 원자로란 말이다. 보통 앞에자만 따서 RBMK라고 부른다.

소련에서 플루토늄 생산로를 개조하여 만든 원자로로 세계 최초로 전력망에 전력을 공급한 원자로가 이 기종이다. 특이한 점은 현대 서방 경수로들과 달리 감속재로 흑연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물론 기체를 열전달매체로 사용하는 개량 가스냉각로와 같이 흑연을 사용하는 원자로는 현재도 일부 존재하나 전체의 5%에 불과하다.

4 20세기 사상 최악의 원자력 사고

디스커버리에서 공개한 체르노빌 전투(The Battle of Chernobyl) 다큐영상. 자막 번역판이다. 영상 재생 전의 섬네일 이미지가 거부감을 불러일으킬수도 있으므로[7] 영상은 링크처리를 한다.

4.1 대폭발

400px-RBMK_Reaktor_ChNPP-4.PNG
1986년 4월 26일 오전 1시 22분 30초(사고 1분 30초 전), 컴퓨터에 마지막으로 기록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4호기 반응로에서의 제어봉 위치. 숫자는 반응로 안으로 삽입된 깊이를 나타낸 것이며, 센티미터 단위다.

녹색: 제어봉 (167개)
파란색: 중성자 감지기 (12개)
노란색: 반응로 중심으로부터 나온 짧아진 흡수재 봉 (32개)
회색: 압력관 (1,661개)
붉은색: 자동 제어봉 (12개)

이 끔찍한 사고는 1986년 4월 26일 새벽 1시 24분경에 일어났다.

이날 체르노빌 발전소에서는 부소장 겸 수석 엔지니어인 아나톨리 댜틀로프의 지휘 하에 특별한 실험이 기획되어 있었는데 그 내용은 '원자로의 가동이 중단될 경우 관성으로 도는 터빈이 만들어내는 전기가 얼마나 오래 전력을 공급해줄 수 있는가?' 라는 것이었다. 돌이킬 수 없는 실험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 실험조건
정격출력 22~33%인 700~1,000MW
그 당시 체르노빌 원전의 출력은 100% 였다.
100%의 출력을 22~33%까지 낮추기위해 제어봉을 인출.

이런 실험이 기획된 이유는 원자로가 정지할 경우 사용하는 비상용 디젤 발전기의 문제 때문에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수준의 출력에 도달하는 데 1분이나 걸렸던 것이다.[8] 따라서 원자로가 정지했을 때 과연 냉각펌프를 작동하는 데 필요한 전력을 제때 공급할 수 있는지가 불확실했고 그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 이 실험이 기획된 것이었다.

실험은 25일 새벽 1시부터 시작되어 오후 2시까지로 예정되어있었으며, 원자로의 정지를 막기 위해 안전장치를 정지시켰다. 이때 키예프의 전력 담당자가 전력공급을 요구했기에 일시적으로 실험이 중단되었는데 장시간 동안 저출력 상태를 유지한 탓에 내부의 균형이 깨지게 되었다. 정상출력이라면 중성자를 흡수해서 안정된 상태로 돌아갔을 제논-135가 (중성자가 모자라서) 그러지 못하고 축적된 것.

다시 실험을 실시했을 때 문제가 생겼다. 원래 예정보다 원자로의 출력이 크게 떨어진 것. 그 이유는 실험자들의 실수 탓이라는 설이 지배적인데 이미 너무 많이 쌓인 제논-135에 의해서 출력이 통제를 벗어났었다는 가능성도 있다.
실험 당시 100%의 출력으로 운행중이던 원자로의 발전출력을 22%, 700MW까지 낮추는것이 조건이었으나 원자로 운전원의 실수로 30MW까지 낮아진다.

어쨌든 출력이 너무 낮아지자 실험자들은 제어봉을 빼내서 출력을 올리기 시작했다.(다시 200MW 정도의 출력으로 상승시킴) 그러나 정상출력보다 여전히 낮았기에 제논-135의 축적은 계속되었고 이 때문에 출력이 올라가지 않는 상황이 벌어졌다. 중성자를 제논-135가 모두 먹어치우니 핵반응을 일으킬 중성자가 모자랐고 출력도 올라가지 않았으며 제논-135는 계속 축적되는 악순환이 벌어졌다.

그래서 실험자는 제어봉을 더 빼냈고 실험의 일환으로 평소라면 쓰지 않을 펌프까지 가동시켰으며 출력 저하로 원자로가 정지하지 않도록 안전장치를 또 정지시켰다[9]. 제어봉은 6개~8개 가량밖에 안 남았었는데 규정상 최소 제어봉은 30개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고가 안전장치도 없는 구식 소련 원자력 발전소가 원인이라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체르노빌 원자로에도 안전장치는 다 붙어있었다. 당시 체르노빌 원자로에는 ECCS[10]가 장치되어 있었는데 위와 같이 인위적으로 원자로를 중단시키는 실험을 하면 원자로의 연쇄반응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원자로 재가동 절차를 밟아야 했다. 하지만 아나톨리 댜틀로프은 이것을 매우 귀찮게 여겨서(...) 엔지니어들의 반대에도 불구[11]하고 ECCS를 모조리 해제하고 실험에 임했다. 이 행동은 집에 누전차단기 내려가면 귀찮다고 누전차단기 안 달고 전기 쓰는 것과 같은 행동이다.[12][13]

그리고 실험이 실시되었는데 전기 공급이 줄어들자 자연스럽게 냉각 펌프에 공급되는 전기의 양도 줄어들었고 이로 인해 냉각수의 유입이 감소하자 원자로 내부가 과열되면서 내부 증기압은 상승했으며 설계결함[14]으로 인해 원자로의 출력은 미친 듯이 상승했다. 놀란 실험진들은 급히 안전장치를 가동해서 제어봉을 삽입했지만 제어봉을 너무 많이 빼놨던 탓에 이것들을 모두 삽입하는 데에는 18초나 걸렸다(가압경수로의 경우 2~4 초대로 가능하지만 체르노빌 발전소의경우 비등경수로 방식인데 비등경수로의 경우 제어봉을 삽입하는데 20초가량 걸린다.[15] 그동안 내부의 중성자는 미친 듯이 불어났고 내부에 있던 제논-135로도 이를 모두 흡수할 수 없었으며 마지막 희망인 냉각수마저도 제어봉에 밀려나간 탓에 중성자 흡수에 실패해 버렸다. 결국 원자로 출력은 정상치의 100배(30만MW) 가까이 상승했고 내부의 증기압은 과도할 정도로 상승하면서...

쾅!

터지지 말아야 할 게 터지고 말았다.

냉각재로 원자로 안에 들어있었던 이 한꺼번에 끓어올라 일으킨 압력이 1차 폭발을 일으켰고 나머지 열이 수증기를 흑연과 반응시켜 수소와 일산화탄소로 만들어서 2차로 대폭발을 일으켰다.

이 두 번의 폭발은 반응로의 뚜껑에 이어 원자로의 콘크리트 천장까지 통째로 날려버렸고 이후 감속재인 흑연이 타면서 화재가 일어남과 동시에 최소 500경 베크렐, 최대 1200경 베크렐 가량의 흉악한 양의 방사능 물질이 사방으로 누출되었다.[16] 이때 누출된 방사능 물질의 총량은 히로시마에 떨어졌던 원자폭탄 리틀 보이의 400배.[17][18]

4.2 재앙, 그리고 진화

화재가 발생하자 1차로 14명의 소방대원이 파견되었고 그 다음으로 급히 달려온 레오니트 텔랴트니코프가[19] 지휘하는 체르노빌 소방대가 전력을 다해 진화작업을 벌였다.

그들은 방사능 방호복도 없이 사투를 펼쳤지만 그들의 힘만으로 막기에는 재난의 규모가 너무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나중에 도착한 키예프 소방여단과 교대할 때까지 진화작업에 전력을 다한 결과 오전 5시에 대부분의 화재가 진압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대량의 물이 사용되었으며, 이 물은 4호로와 접촉하면서 증기로 변한 것이 내부 물질과 반응하여 가연성 물질로 변했다. 그리고 이것은 26일 오후 9시 41분에 다시금 대폭발을 일으키고 만다. 이 때 치솟은 불기둥의 높이가 자그마치 500m였다고. 500m라 해서 얼마인지 짐작이 안 간다면 당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던 미국 윌리스 타워442m다. (안테나 포함시 527m.) 즉 한 거대 마천루 높이를 능가할 정도의 대폭발이었던 셈. 좀 더 쉽게 설명을 첨언 하자면 63빌딩249m, 롯데타워 지붕까지의 높이가 554m이다.

물이 소용 없음을 깨달은 소련 당국은 헬리콥터를 동원하여 대량의 붕소, 돌로마이트, 납, 진흙, 모래 등을 뿌렸지만 방사선이 너무 강해서 원자로 위에 헬리콥터를 멈추게 할 수가 없었고, 이런 상황을 감당할 수 없었기에[20] 원자로 상공을 지나가면서 흙을 뿌리도록 해야 했다. 이 방법은 5월 7일까지 계속되었으나 흙이 4호로만이 아닌 주변까지 뿌려지면서 열이 식지 않도록 지켜주는 역할을 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헬리콥터도 추가 폭발 위험 때문에 물러나고 말았지만 다행스럽게 4호로와 딱 붙어있었음에도 불구하고 3호로가 무사하면서 여기에 있던 액체 질소가 4호로에 주입되었고, 5월 9일에 화재 진압에 성공한다. 만약에 3호로까지 폭발했더라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리고 그날은 마침 소련이 나치 독일을 상대로 대조국 전쟁에서 승리한 승리의 날.(...)

사고 직후 당연히 구소련 정부는 필사적으로 이를 숨기려고 했으나 사고로 인해 발생된 낙진이 저 멀리 스웨덴까지 날아가는 바람에 스웨덴 사람들이 "뭔가 크게 터졌는데 눈가리고 아웅이라고? 개소리 집어쳐!!"라고 여기저기 떠들어대서 이 사고가 뽀록났다.

4.3 대피, 그리고 작업 준비

당시 체르노빌은 발전소인 동시에 발전소 직원과 연구원, 주민 등 5만 명의 인구가 살았고 특히 100km 내에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수도 키예프가 있었기에 이만저만 난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인권 따위 개나 줘버린 소련 정부에서는 당연히 사고 사실을 공표하지 않았고 덕분에 인근 주민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로 방사선에 피폭당했다. 그리고 사고 발생 당일 그 방사능 물질이 스웨덴까지 날아갔으나[21] 이 항의를 계속 묵살하고 개기는 바람에 이 소문이 전 유럽에 모조리 퍼지고 나서야 소련에서는 사고 사실을 공식 발표했다. 낙진은 전 유럽을 싸그리 다 덮었다. 심지어는 저기 멀리 떨어진 일본홍콩에도 이 사고의 낙진이 떨어졌다. 거기까지 떨어졌다니 한국이라고 낙진이 안 떨어질 리가... 결국 브라질 같은 남반구를 빼고는 낙진이 모조리 날아갔다는 얘기.[22]

사고 첫날의 방사능 누출량은 그렇게 크지 않았으나[23] 26일 밤에 원자로에서 다시금 대폭발이 일어나면서 방사능 물질의 누출량이 크게 늘었고 이에 따라 소련 당국도 주민들을 피난시키기로 결정했다. 사태가 워낙 심각했던 까닭에 군부대와 경찰, 소방관 등 수십 만의 인력이 인근으로 투입되어 인원을 대피시켰다. 처음에는 프리피야트와 체르노빌, 그 인근 지역 주민들만 피난시켰지만 시간이 감에 따라 위험지역은 점차 확대되었기에 4월 30일부터 추가적인 소개 작업이 시작된다. 최종적으로는 발전소 주변 30km 이내의 주민 전부가 철수하였으며 방사능 물질이 대량으로 뿌려진 지역으로부터의 탈출이 종료된 것은 8월이었다.

당시 아주 번창하던 도시인 프리피야티(혹은 프리피야트)[24]는 이 사고로 인해 인구 5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이 도시를 하루아침에 전부 떠나야 했다. 현재 가장 유명한 유령 도시로 알려져 있는 지금은 온갖 잡초가 자라고, 야생 동물들이 돌아다니고 있어서 나는 전설이다의 배경이 현실화된 도시라고도 불린다. 콜 오브 듀티: 모던 워페어맥밀란 대위와 함께하는 암살미션에서 메인장소로 등장한다. 귀신 나올것 같은 굉장히 스산한 분위기
동시에 소련 당국은 정화 작업에 착수했으나 여기서 당시 소련의 국가적 한계가 드러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련이 무능했다고 할 수는 없다. 이전 문서에서는 체르노빌에 방사능 방호복이 없었다고 하는데 실제론 직원용 몇 벌만 있었고 이걸로 모든 복구 인력에게 입히는데 무리였기 때문에 소련 전국에서 방호복을 긁어모으고 있었다.[25] 하지만 시간이 촉박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화생방 보호의나 우의에 납을 붙여서 보낼 수밖에.

그래도 소련 정부 당국도 마지막 양심은 있었기에 아이오딘 131[26]에 대한 방호를 위해 인부들에게 요오드가 첨가된 보드카가 다량 지급되었다.[27] 이것은 분명히 효과가 있었지만 다른 방사능 물질을 막을 수가 없었다! [28]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수습을 위해 골머리를 짜냈으나 토의 끝에 이들이 도달한 결론은 "방사능 물질에 오염된 지역은 모조리 부숴서 평평하게 한 다음 콘크리트로 2m 이상 덮어버리고, 오염된 원자로는 초대형 커버를 씌워버린 뒤에 10년쯤 지나면 해결 방법이 나오겠지?" 였다. 하지만 10년이 다가오기 전에 소련은.... 그리고 그야말로 대역사가 시작되었다.

4.4 체르노빌 전투(Battle of Chernobyl)[29]

그야말로 공산주의 체제에서나 가능한 무한한 인력 동원과 인권이나 자유를 무시한 조치들이 이런 비상 상황에는 효력을 발휘했다. 소비에트 휘하의 모든 공화국에서 인구 비례로 인원을 할당하여 소련 전체에서 총 60만 명(!)의 인력(주로 예비군)을 징발해냈다. 소비에트의 높으신 분들은 엄청난 인원을 조금씩 피폭시키는 방식으로 체르노빌 근로인력들의 희생을 최소화하려고 한 것이다. 일말의 양심은 있었다[30][31][32] 총지휘는 니콜라이 타라카노프(Nikolai Tarakanov) 장군이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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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체르노빌이 폭발 사고로 황폐화된 지 8일이 지난 뒤 노동자들이 핵발전소의 파괴된 원자로에서 자신들을 밖으로 실어 나를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 20세기 포토 다큐 세계사

4.4.1 살신성인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사고 첫날 화재 진압을 위해 뿌린 물이었다.

사고 직후 녹아내리는 노심과 방사능 물질이 원전 지하에 흐르는 지하수와 만날 경우 광범위한 오염 또는 수소폭발이 일어나 오염이 유출되고 사고 통제가 어려워지는데 이렇게 되면 수습이고 뭐고 없다.

이를 막기 위해 펌프기사 알렉세이 아나넨코(Alexei Ananenko), 발레리 베스팔로프(Valeri Bezpalov)와 일반사병인 보리스 바라노프(Boris Baranov) 3명의 사람이 램프를 들고 직접 지하로 들어가 방사능에 오염된 물로 잠수, 펌프를 가동시켜 지하수를 차단했다. 흔히 이들이 스페츠나츠 출신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방사능 중독으로 사망했다는 글이 떠돌아다니지만 Andrew Leatherbarrow가 2016년 조사한 결과 바라노프는 2005년 65세로 사망했고 나머지 두 명은 멀쩡히 살아 있었다. 물도 무릎 정도까지밖에 올라오지 않았다고...물론 그래도 위험한 일이었던 건 맞다.

어쨌든 이들은 소련을, 아니 전 지구를 방사능에서 구해냈다.

4.4.2 바이오 로봇

파일:Attachment/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bio-robots-chernobyl-500x330.jpg [33]

소련군이 폭심지 주변을 헬기로 찍은 화면에서는 아직도 방사성 물질이 나오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고 이에 대해 엔지니어들은 거대한 석관을 씌워 뚜껑을 덮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그 작업을 위해서는 일단 발전소 지붕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지붕은 폭발 당시 튀어나온 감속재 흑연으로 뒤덮여 있었고 방사능에 심하게 오염되어 있었다.[34] 이대로는 도저히 인간이 접근할 수 없다고 생각되었으므로 무인 달탐사차량인 루노호트를 만들었던 기술자들을 불러와 로봇을 제작해서 투입시켰다. 거창한 물건은 아니고 일종의 원격조종 불도저 같은 것으로 밀어서 조각을 지붕 아래로 밀어서 떨어뜨렸다. 달에는 우주 방사선이 강력하게 내리쬐는 환경이므로 달탐사 로봇을 만든 기술력으로 원자로의 방사능도 버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배터리 수명에 문제가 있었고 강력한 방사능에 오래 노출되자 전자회로조차도 버틸 수 없어 고장나고 만다.

파일:Attachment/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LiqPrepR3.jpg

작업을 마냥 미룰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므로 3,500명 정도의 인력 투입이 결정되었고 로봇을 대신해 투입된 이들은 바이오 로봇으로 불렸다. 문제는 화생방보호의가 없었다는 것. 정확히는 몇 벌 되지도 않아서 이걸 3,500명에게 번갈아가며 입게 한 후, 즉시 우의에 납 판때기를 기워 만든 조잡한 화생방보호의가 만들어졌으나 이마저도 몇 벌 없었던 까닭에 작업인원들이 돌아가면서 입어야 했다.[35][36] 거기다 지붕의 방사선 수치가 너무 엄청나다 보니[37] 올라가 잠깐 작업한 뒤 되돌아와 쉬어야 했는데 작업 시간은 보통 2분을 넘기면 생명을 장담할 수 없었으며 방사능이 강할 경우 작업 시간은 불과 40초로 제한되기도 했다. [38][39] 이 때문에 8명이 뛰어들어가 삽으로 퍼내서 지붕아래로 떨어뜨리는것을 2번 하고 다시 뛰어나와 재빨리 옷을 벗으면 그걸 다음 조가 갈아입고 또다시 뛰어들어가는 식으로 작업이 진행되었다. 당시 이 위대한 자기 희생의 모습을 찍으려고 같이 현장으로 들어간 사진기사는 바닥에서 올라오는 방사선 모양으로 카메라 필름이 타버린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3,500명이 10일간을 작업한 뒤에야 방사능의 1/3이 줄어들었고 석관 작업이 진행되었다.[40] 이들은 목숨을 걸고 방사선과 싸운 댓가로 증명서 하나와 100루블(오늘날 U.S 100달러 정도의 수준)을 받았다.

4.4.3 마그마 문제

위쪽을 덮는 것 뿐만 아니라 아래쪽을 차단하는 것도 문제였다. 용융된 핵연료 마그마들이 점점 바닥을 뚫고 내려가고 있었다.

계속해서 아래쪽으로 핵연료가 누출될 경우 대수층에 도달할 가능성이 있었는데 서부 러시아의 전체 식수원이 오염되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었다. 엔지니어들은 방사선이 그나마 약한 지하 쪽으로 땅굴을 파들어간 다음 발전소 아래에 액체질소를 사용한 냉각기를 설치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에 소련 전역에서 광부들이 소집되었다. 섭씨 50도를 넘나드는 열기 안에서 광부들은 한 달 만에 작업을 완료했는데 통상의 3분의 1로 단축된 것이었다. 그러나 지반이 매우 좁고 더워서 방호복을 입을 수 없는 상황에서 토양은 방사능에 오염된 상태였기 때문에 당연히 광부들도 다량의 방사능에 피폭되었고 재수가 없어서 방사능에 오염된 흙을 먹고 그 자리에서 사망하는 광부들도 있을 정도였다. 이렇게 많은 희생을 한 끝에 발전소 아래에 공간을 마련하고 나니 정작 냉각기 완성에 기술적인 문제가 생겼다. 결국 액체질소 냉각기는 취소되고 그 자리를 콘크리트로 채워버리고 말았다.

4.4.4 석관의 완성

체르노빌 원전을 완전히 뒤덮을 석관의 부품은 소련 각지에서 제작되어 운반되었고 이 부품은 현장에 투입된 인원들이 조립했다. 현장에서 모든 것을 다하지 않은 이유는 발전소 주변이 방사능에 오염되어 있었고 이런 곳에서 오래 작업을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조립은 1986년 10월에 완료되었으며 50만 명의 소련군은 방사능에 대한 승리를 축하했다.

4.4.5 그러나...

이것은 단지 첫 번째 전투의 종결일 뿐이었으며, 그 후에도 사후 작업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석관 위에 다시 더 큰 석관을 씌우는 프로젝트 역시 진행되고 있으며, 우크라이나 단독으로는 도저히 무리여서 각국의 모금을 걷어 진행 중이다.

새로운 석관 건설 현장. 정말 크고 아름답다.[41]

새로운 석관이 완성된 후 핵연료를 끌어내서 폐기할 때까지 위협은 계속될 것이다.

400px
훈장은 저 생지옥에서 목숨을 걸고 희생한 사람들에게 던져준 것이다. 참고로 끌려간 사람들 중 대다수가 20년 이내에 사망했다고 한다. 1991년에 이 메달과 인증서를 저 생지옥에서 고생한 사람들에게 나눠줬으며 그 사람들이 받은 이 훈장을 그들의 아들, 딸 혹은 홀로 살아남은 배우자들이 팔고 다녔다고 한다.

4.5 책임자들의 처리

문제의 실험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사고 당일 즉사하거나 극심한 방사능 피폭으로 며칠에서 몇 주 사이에 죽었으며 발전소 직원들 상당수가 그 뒤를 따랐다. 그러나 발전소장인 빅토르 브류하노프(Виктор Брюханов)와 실험책임자인 아나톨리 댜틀로프(Анатолий Дятлов)는 살아났으며 소련 정부는 이 둘에게 책임을 묻게 된다. 중대한 업무상의 과실 치사 혐의를 적용, 형사고소를 통해 10년의 징역형을 때린 것이다. 그리고 현장 직원들도 도마에 올랐지만 조사 결과 그들은 상부의 지시를 충실히 따른 것으로 밝혀졌으며 사후에 용기 칭호가 수여된 사람도 있다.

물론 처벌이 가벼워 보이는 게 사실이나 이런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르고도 10년형인 건 물론 책임자들이 의도적으로 사고를 친 것도 아니고 누가 봐도 명백한 과실이었기에 소련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던 것. 이들이 자행한 '실수'가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를 생각해보면 능지형에 처해도 모자랄 지경이지만 과실과 고의는 구분되어야 하고 어차피 이들도 방사능 후유증으로 평생을 고생하는 건 물론 인류가 존속하는 이상 영원히 손가락질 속에서 살게 될 테니 그걸로 대가를 치렀다고 볼 수 있겠다.[42]

더욱 가관인 것은 두 사람 모두 형기를 채우지도 않고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는 점이다. 그래도 핵심 책임자인 댜틀로프는 평생 방사능 때문에 고생해야 했고 사고가 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1995년 결국 세상을 떠남에 따라 체르노빌 사고 후유증 사망자 명단에 오르게 됨으로써 대가를 치렀다.

2011년 4월 28일 체르노빌 발전소장이었던 빅토르 브류하노프가 기자와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 링크는 여기이고 구글 번역은 여기이다. 사고 당시 피폭량이 250rem(2.5Sv)이었기에 살아남은 것 같다.

5 피해

5.1 인명피해

사망자 명단은 영어 명단한국어 명단을 참조하자.

  • 알렉산드르 아키모프 - 선임연구원으로 동료인 레오니트 톱투노프와 함께 제어장치에 달라붙어 마지막까지 폭발을 막으려고 시도하다가 피폭당했으며 사고 직후 14명의 소방관들을 지휘하여 화재진압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와 톱투노프는 병원에 실려간 후 '체르노빌 원전 사고의 범인' 으로 손가락질을 당하며 죽어갔다.
  • 발레리 호뎀추크 - 순환펌프 기사. 이 사고의 첫 번째 희생자. 발전소 폭발과 동시에 매몰되어 현재도 유해조차 찾지 못하고 있으며 유해 자체는 폭발 당시 산화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원자로 3호기와 4호기 사이의 공간에는 그를 영웅으로 칭송하는 위령비가 만들어져 있으며 매 해 유족들이 추모하러 온다고 한다.
  • 발레리 페레보스첸코 - 제어봉이 노심에 삽입되지 않자 알렉산드르 쿠드럅체프, 빅토르 프로스쿠랴코프와 함께 수동으로 제어봉을 집어넣다가 피폭당했다. 사고 이후 그는 친구인 호뎀추크를 찾아봤지만 실패했고 6주 후에 사망했다.
  • 이반 오를로프 - 원자로 제어를 시도하다가 피폭되어 사망.
  • 바실리 이그나텐코 - 사고 직후 투입된 14명의 소방관 중 한 사람. 당시 소방헬기 조종사로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계속해서 모래와 젖은 시멘트를 끼얹어 사고가 확산되는것을 막아 소련 국민들에게 영웅으로 찬사받았으나 피폭되어 백혈병에 걸려 2주 후에 사망했다. 이후 그는 공로를 인정받아 폴라리스상을 수여받았다. 그의 아내 루드밀라 이그나텐코는 체르노빌 사고 직후 딸을 출산했는데 태어난 지 4시간만에 사망했다. #[43]
  • 블라디미르 샤셰노프 - 폭발에 내동댕이 쳐지면서 척추가 부러졌고 그 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방사선 화상을 입고 사망. 산 채로 타 죽은 것이다.

이런 식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올레크 겐리흐처럼 폭발로 수증기를 뒤집어쓰고도 살아남은 사람도 있다. 방사능 저항성 보유자 그러나 올레크 겐리흐는 예외적인 경우이고 뒤치다꺼리를 하는 과정에서 방사선 피폭에 의해 56명이 사망했으며 인근 주민을 제외하고 발전소 해체와 봉인을 위한 과정에 투입되었던 인부 중 고도방사선에 피폭된 사람은 20만 명이 넘는다. 그리고 이 중 25,000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되어있지만 이쪽은 정말 방사선 때문에 죽은 건지 확실치는 않아서 비공식 집계로 남아있다. 심지어 당시 이 사고 잔해를 치우는 작업을 총지휘한 장군마저도 방사능 물질 오염으로 현재까지도 고생하고 있는 판이니 실제로 바로 앞에서 직접 노동을 한 사람들이 어떤 고생을 하고 있을지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당시 피폭 인원이 제대로 집계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너무 많은 숫자의 사람들을 부양해야 하는 상황이 오자 소련 정부가 인체에 치명적인 방사선 수치를 10배로 부풀려 발표[44]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한된 사람들[45]만 치료해준 것이다.

그 외에 민간인 피해도 엄청나서 이후부터 인근 지역에서 발생한 갑상선암, 백혈병, 유방암 등등 온갖 질병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피해자 집계는 기준에 따라 다양한데 그린피스는 약 20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했다.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 신체장애자 동맹은 우크라이나 내의 피폭자가 약 350만 명(그 중 미성년자 120만)으로 사망자는 2005년 기준 150만 명을 넘었다고 발표했다. 한편 러시아 정부에 의하면 러시아의 피폭자는 145만 명이라고 한다. #

이 대형사고로 인해 지금까지도 이 발전소 주변 지역이 몽땅 출입금지 지역[46]으로 묶여있다. 스리마일에 이은 체르노빌 사고로 원자력 발전소는 대표적인 기피시설물이 되어버렸다.

또한 디스커버리 다큐멘터리에서 공개된 자료에 의하면 사고 당시 프리피야트는 물론 키예프도 정상치보다 수천 배는 더 높은 방사능 오염이 일어난 것으로 추정되나 당국은 다가오는 5월 축제(5월 1일 국제 노동절)를 준비하기 위해 이 사실을 숨겼다. 우크라이나의 서기장이였던 체르빈스키는 이 사실을 알고도 가족들과 함께 이 행사에 참여했고 얼마 후 자살했다.

오늘날까지도 이들에 대한 자세한 통계조사는 단 한 번도 이뤄지지 않고 있으며 정확한 피해 수치는 알 수 없다.[47]

그래도 조사를 아예 안 하는 건 아니어서 2012년 11월 8일, 미국에서 사고 현장에서 일했던 근로자들에 대한 추적조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자세한 건 관련 소식 항목 참고.

다행인 건 멜트스루는 피했다는 것이다. 만약 여기까지 갔더라면 희생자 수는 수십 곱절이나 늘었을 것이다.

5.2 주변 지역의 피해

체르노빌과 프리피야트는 방사능에 오염되어 사람이 살 수 없는 유령도시가 되었으며 주변 마을들도 모조리 비워졌다. 주변의 숲들도 똑같은 이유로 출입금지구역이 되었는데 대표적인 예가 붉은 숲이다.

원전에서 18 km 떨어진 체르노빌 시는 오랫동안 유령도시가 되었다가 2003년 체르노빌 복구 및 개발 프로그램(Chernobyl Recovery and Development Programme)이 시작되면서 관련자들이 들어와 거주하고 있다. 원전과 프리피야트 관람도 여기서 출발한다. 그러나 전성기에 비하면 꽤나 적은 숫자로, 일부 건물을 제외한 도시의 거의 모든 건물이 빈 상태라서 유령도시에 가까운 상태다.

5.3 주변 국가의 피해

주변 국가들도 무지하게 피해를 봤다. 일단 벨라루스(벨로루시), 러시아에서는 소아 갑상선암 발생률이 급격하게 증가했다. 특히 하필이면 바람이 위로 불고 있었던 탓에 벨라루스에는 이 사고의 낙진의 80% 가량이 떨어져서 지금도 벨라루스 국토의 33%씩이나 되는 곳(남한 면적의 반이 넘는 면적)이 방사능 오염으로 출입금지 구역이다. 영국이나 스웨덴 같은 유럽의 반대쪽에서도 토양에서 방사능 물질이 검출되었다. 특히 영국의 일부 지역은 이때의 사고로 인하여 방사능에 심각하게 오염되어 출입 자체를 법적으로 금지하는 곳도 있다. 이탈리아산 파스타에서 방사능 물질이 검출되어 일본에서 수입을 금지당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일본은... 우리나라 역시 이 사고의 영향으로 현재 2, 30대 중에 갑상선암 발병 비율이 높아졌다는 주장이 있다. 당신의 갑상선암은 체르노빌 탓인가. 이 주장에 대해서는 당시에는 방사능량이 미미했으며, 갑상선암의 발생율 증가는 건강에 대한 관심과 검진율의 증가가 원인이라는 반론이 있다. 녹색연합 최초 문제제기에 대한 반론.

이 사건 이후 러시아에 근접한, 아니 근접하지 않은 유럽 여러 나라 야생동물의 뼈와 뿔에서도 방사능이 검출된다. 독일 같은 경우 방사능에 오염된 멧돼지를 잡을 경우 잡아먹지 않고 정부에서 그 대신 돈을 줄 정도다. 이게 중요한 이유는 한약재로 인기가 높은 녹용(!)에 방사능이 쌓이기 때문.

서방 세계, 특히 서유럽 지역에서도 체르노빌 사고가 너무 큰 피해였기 때문에 자국 내 원전 반대여론과 집단 패닉 사태를 우려하여 사건에 대한 진상을 감추었다. 체르노빌 사건 관련 자료는 당시 즉각적으로 발표되지 않고 어둠 속에 묻혔으며 2000년대 들어서야 관련 자료들이 공개되었다.

5.4 동식물들의 피해

하지만 세상 일은 끝까지 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일. 현재 체르노빌 지역은 몇십 년간 인간의 손이 닿지 않고 보존된 덕분에 야생동물의 천국이 되었다. 방사능 물질이 어느 정도 줄어들자 동물들이 돌아와 현재는 유럽의 희귀동물들이 여기서 살고 있다는 듯. 인터넷에서 4m가 넘는 메기나 초거대 지렁이/쥐 사진이 떠돌면서 체르노빌 괴물이라고 나오고 있지만 루머에 불과하다. 4m가 넘는 메기는 웰스메기라는 종으로 원어종 자체가 3m는 자라며 사람의 출입이 통제되면서 자연 상태로 무럭무럭(?) 자란 것에 불과하다. River Monsters에서는 방사능으로 인해 오히려 크기가 줄었다고 하는 기록도 있다. 초거대 지렁이는 자이언트 지렁이라는 녀석으로 남미/호주에 서식하는 종. 이 또한 원래 기본 1m에 최대 3m까지 자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거대쥐는 중국 모 대학생의 제작품이라고 한다.[48] 어쨌거나 야생동물의 천국이 된 것까지는 좋은데 들리는 소문으로는 잔류 방사능 물질 때문에 체르노빌을 갔다오는 철새들의 생식능력이 떨어져 간다고 한다. 이보시오 체르노빌 책임자 양반! 철새가 이런데 다른 동물도 그렇게 무사하지는... 실제로 체르노빌 주변에서 서식하는 기형동물들이 발견되고 있는데 예를 들면 하나의 몸통에 머리통이 여러 개가 달린 개구리나 꽃 자체가 둘둘 말린 해바라기나 꽃 한가운데를 뚫고 다시 올라온 꽃대와 꽃 같은 기형 생물들이 실제로 발견되고 있긴 하다. 폴아웃이나 메트로2033 따위의 핵전쟁 이후 흉악한 돌연변이 괴물이 나타나는 게임 설정은 실현 되지 못했다

5.5 피해에 대한 반론

방사능 피해에 대한 반론도 있다. 사이언스TV 채널에서 방영된 방사선의 위험에 관한 BBC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의 방사선 피폭시 생명에 끼칠 수 있는 기준으로 작성된 그래프를 따르면 최하 9천 명 이상이 사망할 가능성이 있었지만 실제 사망한 사람의 수는 그보다 적었다고 한다. 물론 사고 처리에 투입된 공무원 134명 중 47명은 방사선 피폭의 영향으로 사망하고 아직도 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보고는 있지만 사건 이후 20년 동안 방사능과 유의미한 질병으로 사망한 사람의 수는 100명이 되지 않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발전소 근처의 생물(들쥐) 등을 채집해서 조사한 결과 이들은 하루에 X-ray사진을 8천장 찍은 정도의 양에 해당하는 0.015시버트 정도의 방사선을 쬐이고 살았는데 그로 인한 특별한 유전적 변이는 없었으며 오히려 면역력이 일부 상승하는 결과도 있었다고 한다.

방송에서 미국에서는 자연방사선의 양이 다른 지역의 2배에 달하는 미국 중서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보통 수준인 동부 지역 사람들보다 오히려 암 발생률이 낮은 점을 들며 미약한 방사선이라면 오히려 신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물론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유의미한 증거는 있지만 안전하다고 결론이 난 것은 아니므로 오해는 없길 바란다.[49]

우리나라에 광범위하게 퍼진 '산성비 맞으면 머리카락이 빠진다는 설'의 원조가 86년 5월 체르노빌 낙진이 한반도 상공에 도달한 데 있다. 한편 2005년에 국민건강보험관리공단 통계를 가지고 환경단체에서 2, 30대 갑상선암 발병이 급증한 원인이 체르노빌에서 날아온 요오드-131에 있다고 주장한 바 있으나 한국수력원자력에 따르면 체르노빌 원전 사고로 인해 국내에 미친 영향은 미미하다고 한다.

동아일보 기자 출신이며 신동아에 글을 쓰는 이정훈은 한국의 핵주권이란 책자에서 이 사건이 과장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책자는 원자력 발전이 가장 우선시이며 가장 친환경적(?)이라고 주장하기에 알아서들 보자. 그리고 일본처럼 되는 거지 아냐 그래도 일본처럼 병신같이 비등수로를 쓴건 하나도 없어

5.6 소련 붕괴

소련에서는 사고 후에 어떻게든 발전소 간판만은 내리고 싶었지만 이미 간판이며 뭐며 전부 방사성 물질에 절어버린 뒤라서 건드릴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고. 그뿐만 아니라 당시 복구작업 때 쓰던 장비들도 방사능 폐기물로 버려져 있다고 한다. 심지어 원자로를 콘크리트로 매워버리는 데 사용된 세계 최대 헬리콥터 Mi-26 헤일로 100여대 역시 모조리 메워버렸다. 거기다 바로 옆에는 소련에 두 대밖에 없다는 초대형 핵미사일 감지 레이더("Russian Woodpecker" DUGA-3)가 위치한 비밀 기지도 있었는데 이 물건도 방사능에 오염되어 버려졌다. #지도와 사진 보기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서기장내셔널 지오그래픽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투입된 비용이 거의 국가 예산 전체 규모에 맞먹었던 것[50]으로 구소련의 붕괴를 불러일으킨 결정적 요인이라고 단언하기까지 했다. 가뜩이나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들인 비용에 미국과의 군비 경쟁으로 인해 소련의 재정지출이 크게 늘어났고 더군다나 사우디와 영미권 업체간의 치킨게임으로 인해 석유값이 폭락하는바람에 쓰는돈은 그대로인데 걷어들일 돈은 크게 준 상태에서 체르노빌 사고가 터지는 바람에 사건을 수습하는데 드는 비용이 천문학적으로 들어버리는 바람에 소련경제가 회생불능의 상태가 되었다는게 정설이다.

거기에다 위에서 보듯 체르노빌 원전 폭발로 아직도 많은 지역이 방사능에 덮혀있고 50만 명이 넘는 인력을 동원한 것과 그 인력들 대부분과 인근 지역에 살았던 이들 대부분이 방사능에 피폭되었으므로 건강한 삶을 살았을 리는 만무하다. 또한 정화작업에 투입한 자원과 지역 주민들을 이주시키는 데 든 비용을 생각해 보면 과장이 좀 있다고는 해도 소련 같은 대국도 부담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비용이 든 건 명백한 사실이다.

이렇게 원자력 발전소 폭발로 인한 대규모 피해와 이를 수습하는 데 혼선을 겪었고 그리고 이후로도 다른 희생양을 찾아 죄를 뒤집어 씌우는 국제 양아치 소련 당국의 태도는 소련과 공산주의 정치 체제의 실패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그나마 소련 당국이 비난 이후 최대한 진실에 가까운 정보 공개를 허용한 것이 이 사건이 부른 몇 안 되는 진보. 참고.

이때 입은 인적, 물적 피해는 미국의 SDI 계획과 함께 소련 붕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6 사고 이후

체르노빌 원전 사고가 환경에 미친 영향과 복구에 대한 보고서를 IAEA가 내놓았다. 다운로드는 여기에서 하자.

6.1 문닫아라 체르노빌!

아직 저 발전소 잔해 안에는 사고 당시 즉사한 발전소 직원 발레리 호뎀추크(Khodemchuk, Valery Ilyich 메인 순환펌프 기사)의 시체가 있다고 한다. 물론 시체는 폭발과 함께 문자 그대로 증발해 버렸다.

그러나 진짜로 심각한 문제는 우크라이나 정부가 전기가 모자란다는 이유로 1, 2, 3호 원자로를 계속 가동한 것이었다! 덤으로 옆에 2기의 동형 원자로를 건설하다가 1988년에 취소하였다.[51]

결국 1991년에 2호로에서 화재가 발생했고 우크라이나 정부는 '손상이 너무 심하다' 며 2호로를 폐쇄한다. 1호로 역시 문 닫으라는 세계 각국의 압력으로 인해 1996년 11월에 폐쇄되고 2000년 11월에 3호로도 정지됨으로서 모든 원자로가 멈추게 되었다.

6.2 관광명소

현재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지역에 타지인, 심지어 외국인도 출입할 수 있다. 단, 국가로부터 인정받은 한 관광 업체의 관광 프로그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더군다나 바로 들어갈 수도 없고 들어가기 1개월 전에 사전 예약을 하고 그조차도 심사와 신원조회를 거쳐야 하며 정신병력이 있거나 범죄전력이 있는 사람은 제한된다.

이 지역의 방사능에 오염되어서 사망한다 해도 아무도 원망하지 않겠다는 각서까지 써야 출입할 수 있다. 2009년 10월 15일 EBS에서 방영한 '세계테마기행' 에서 실제로 들어갔다 나왔다. #

반드시 공인된 우크라이나 출신의 가이드가 1명 따라다니며 다른 곳은 위험하기 때문에 지정된 곳, 즉 주로 아스팔트 도로. 방사능 물질이 비에 의해 쉽게 쓸려나가고 우크라이나에서 관광객들을 위해 비가 오지 않을 때는 하루에 두 번씩 도로의 물청소를 진행하기 때문에 다른 곳보다는 도로 근처가 안전하다.그래서 도로만 다닐 수 있고 가이거 계수기 같은 방사선 탐지 장비를 가지고 다닌다. 입구에서 조금만 들어가도 정상치의 10배를 넘는 방사능이 존재한다. 만약 가이거 계수기에서 방사능의 양이 좀 많이 검출될 경우 집에 갈 때 이곳에 들어왔을 때 입었던 옷을 모두 벗어다가 소각해야 한다. 따라서 이곳을 방문하려면 여벌의 옷과 신발은 필수다.

그리고 이곳을 출입할 때 입은 옷은 경우에 따라 버려야 하기 때문에 절대 비싼 명품옷을 입어서는 안된다. 이렇게 위험한 곳에 이런 고생까지 하면서 굳이 관광을 가야 할 필요가 있느냐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특이한 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많다. 아무래도 현대사에 가장 큰 사건인 소련 붕괴에 제일 큰 역할을 한 사고로 추정되므로 여러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듯 하다.

2011년부터는 관광객들에게 본격적으로 개방할 생각인 듯하다. 현재는 안전한 관광코스를 찾는 중.

2011년 4월 16일에 방영된 MBC 시사매거진 2580에서 EBS 이후 지상파 최초로 체르노빌에 다녀왔다. 물론 EBS의 세계테마기행보다는 분량이 적으나 그래도 비교하자면 세계테마기행에서는 붉은 숲 근처 도로에서 한 발자국도 들어가지 않으려는 가이드가 나왔지만 2580에서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근처 도로에서 풀숲으로 한참 들어가는 장면이 나온다.

탑기어 UK 21시즌 3화 방영분 중에서 출연진들에게 연비 좋은 경차에 기름을 23리터만 넣어준 뒤 100마일(약 160km)을 가라고 했다. 출연진들은 그건 당연히 가능한 거라면서[52] 진짜 도전은 따로 있을 거라느니 말했는데 도착지가 체르노빌이었다. 출연진들은 문을 열고 다니고 갈지자 주행을 하는 등 어떻게든 연료를 많이 써서 체르노빌에 가기 전에 차를 멈추게 하려고 했다.

결과적으로 리처드 해먼드[53]는 성공했지만 제레미 클락슨[54]제임스 메이[55]는 실패해서 차에 가이거 계수기를 달고 체르노빌 안으로 들어갔다. 특히 제레미는 체르노빌 안에서 입구로 돌아가던 중에 차가 멈춰서 걸어서 나와야 했다고 한다. 또한 해당 필름을 촬영한 카메라맨들에 대해 엔딩 크레딧에서 'Extra Brave Film Cameras' 라고 지칭하며 세 명의 이름에 효과를 주었다.

6.3 괴물은 여전히 그곳에 있다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는 아직 확실하게 안전을 확보한 게 아니다. 사고 당시 기술진이 목표로 한 것은 '일단 피해의 확산을 막아야 한다' 였지 '완벽하게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 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 당시 상황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당시 복구반의 노력으로 30년의 시간을 번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미 그 시간은 지났고 체르노빌을 덮은 석관도 슬슬 수명이 끝나가고 있다. 특히 발전소 밑바닥이 문제인데 워낙 악조건이었기에 원래 설치하려던 액체질소 냉각기를 설치하지 못한 것이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오늘날 또다시 지하수로의 누출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56]

6.4 원자로 처리 방안

현재 기술자들이 지금도 방사선을 내뿜고 있는 원자로를 제거하려고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기술자들끼리의 논의는 어떻게 하면 체르노빌 발전소에 아직 남아있는 플루토늄 등의 방사능 물질들을 다른 곳에다 버리느냐 하는 것이다. 저 멀리 우주에 내다 버리는 방법도 신중히 논의는 되고 있지만 논의만 되고 있을 뿐 실행에는 옮기지 못하고[57] 이렇다 할 해답도 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 사고는 흑연감속 비등경수 압력관 방식 특유의 불안정함 때문으로 치우치는 경우가 많으며 위에서 서술했듯 그 말도 일리는 있지만 그 이전에 제어봉을 빼놓고 실험한 것부터가 문제다.[58] 참고로 동유럽 쪽에선 흑연감속 비등경수 압력관 방식 원자로를 교체하는데 서방의 지원을 요구하면서 원자로의 설계 결함만을 앞서 내세우고 있다고 한다.

2015년까지 새로운 차폐막을 설치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급조한 콘크리트 차폐막이 수명을 다했기 때문인데 이 차폐막은 자유의 여신상이 그대로 들어갈 만큼 높이가 크단다. 흠좀무.[59]

우크라이나 정부는 2065년까지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를 해체하고 정화 작업을 완료할 예정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은 아니다. 바로가 우크라이나 비상사태부 장관에 따르면 (해체) 작업에는 50년이 걸린다고 하며 비상사태부의 다른 관계자는 "핵연료 꺼내는 데 30년, 해체 작업에 60년이 더 걸린다."라고 말했다. 4호기의 핵연료 외에도 노후화된 사용후핵연료 냉각수조에 저장된 21000개(2천 톤)의 폐연료봉도 처리해야 한다. 그래도 2015년까지 새 저장시설을 완공한다니 믿고 기다리... 기엔 유로마이단 이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관계가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데다 우크라이나는 동부가 분리독립할 기세라서 어떻게 될지 불투명하다.

6.5 그래도 RBMK는 돈다

체르노빌 발전소의 원자로에 사용된 원자로는 RBMK(Реактор Большой Мощности Канальный, 흑연감속 비등경수 압력관형 원자로)였다. 체르노빌 사고가 난 후 동형 원자로에 대해 대규모 안전 보강 조치가 실시되었다.

  • 제어봉 설계 변경. 본래는 흑연이 감속재 끝에 달려 있었는데 이걸 감속재 안으로 집어넣었다.
  • 제어봉 변경에 따라 연료 농축률 2%에서 2.4%로 증가
  • 수동 제어봉 개수가 30개에서 45개로 증가
  • 80여개 추가 감속재를 이용해 RBMK에서 가장 위험한 저출력시 운전 정지
  • SCRAM(긴급 운전 정지) 절차가 18초에서 12초로 감소
  • 긴급 안전 장치에 무단 접근시 경보 발령

2011년 기준으로 동형 원자로 11개가 아직도 운전되고 있으나 새로 짓는 것은 없다. 왜냐면 RBMK 방식 자체가 1950년대에 개발된 것이기 때문에 이미 원자로 디자인 수명을 다했기 때문. 현재 러시아가 새로 짓는 원자로는 VVER(Водо-водяной энергетический реактор, 물-물 에너지 반응로. 러시아식 가압경수로)방식인데 이놈도 골 때리는 게 초기 모델엔 RBMK처럼 격납용기가 없다! 그러나 그 당시 딱 한 군데 서방의 안전기준을 맞추는 VVER이 있었는데 바로 핀란드가 건설한 Loviisa 원자력 발전소이다. 이 원자력 발전소는 원자로만 소련제지 나머지 운용설비는 지멘스 등에서 충당했다. 현재 러시아의 쿠르스크, 레닌그라드, 스몰렌스크 발전소에서는 아직도 RBMK 원자로를 발전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북한의 영변원자로가 5MWe의 열출력을 내는 흑연감속로인데 2013년부터 다시 재가동에 들어가 버렸다. 위에서 기술했듯이 플루토늄 생산이 쉽기 때문에 북한에서 어떻게 사용할 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60] 위에서 기술했듯이 흑연감속로는 위험하기 때문에 북한에서 돌리다간 한반도 전체가 체르노빌처럼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만에 하나 북한에서 사고가 난다면? 사망 플래그 확정. 그리고 방사능은 편서풍을 타고 일본을 공격한다 벨라루스와 강제 자매결연 하지만 일본이 선빵을 친 듯 하다.

6.6 관련 소식

마리아 샤라포바의 가족들이 이 당시에 샤라포바를 임신한 상태에서 체르노빌 근교에 살고 있었는데, 이 사고 때문에 시베리아로 이주하고 그곳에서 샤라포바를 낳았다. 실제로 샤라포바의 친할머니는 이 사고로 인하여 피폭을 당했다. 그래서 마리아 샤라포바는 체르노빌 피해자들을 돕는 자선활동을 하고 있다.

2011년 4월 경향신문이 체르노빌 원전의 기술자인 니콜라이 이사예프인터뷰를 했는데, 이 때 동료들 가운데서 자신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공포의 붉은 숲피해농민 인터뷰도 링크.

2011년 우크라이나의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체르노빌 원전 사고 관련자들의 특혜와 연금 등을 줄이고 남는 돈을 빈민 구제에 사용하겠다고 했다가 전국적인 반대 시위에 직면했다. 목숨 걸고 나라 지켰더니 연금을 깎어!? 이 미친놈들아!!

2011년 9월 4일, 체르노빌 원전 사고 당시 프랑스를 통과한 방사능 구름이 건강에 아무런 영향도 없다고 말함으로서 악성 사기죄로 기소된 보건성 방사선 방호 중앙국 국장 피에르 펠런 교수가 면소 판결을 받았다. 국민과 교수 사이에 계약 관계가 성립된 게 아니므로 사기죄는 성립될 수 없다는 게 이유라고 한다. 번역기는 여기를 참조하자. 환경 운동가들과 (방사능 구름 때문에 암에 걸린) 갑상선암 환자들은 이 판결을 강하게 비난했다.

2012년 11월 8일, 체르노빌 원전 사고 수습작업에 참여한 작업원 11만 명을 20년 간 추적 조사한 미국 국립암연구소와 대학 연구팀이 저선량 피폭도 백혈병의 발병율을 높인다는 연구결과를 미국 학술지에 게재했다.

2014년 2월 여행을 온 젊은이들의 모험을 다룬 '체르노빌 다이어리'라는 영화가 개봉되었다.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장르는 호러.[61]

6.7 사고 등급

이 사고는 전 세계의 원자력 역사상 처음으로 <국제 원자력 사고 척도> 7등급으로 분류되었다. 비교를 위해 5등급 이상의 다른 사고들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윈드스케일 사고 - 5등급의 사고이며 한때 서방에서는 사상 최악의 원자력 사고라고 알고 있었다.
  • 스리마일 섬 원자력 발전소 사고 - 5등급. 인명피해는 없다.
  • 키시팀 사고 - 원자력 사고 역사상 유일한 6등급이며 체르노빌 이전에는 사상 최악의 사고였지만 소련의 수치 국가기밀이었기에 그 실상이 알려진 것은 소련이 망한 이후였다.
  •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 5등급이었다가 7등급이 된 사고이며 현재진행형이다#. 여기에 적힌 사고들 중에서 유일하게 체르노빌과 견줄 수 있는 원자력 사고이다.

6.8 이동식 발전소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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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은 1990년대에 완성할 목적으로 원자력발전소 차량을 구상중이었고 개발완료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나는 바람에 핵의 위험성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이동식 원자력 발전소 개발 프로젝트는 전면 백지화되었...었는데, 부활했다! 2020년 즈음부터 배치할 거라고 한다.#

6.9 세계 평화에 기여?

미국과 소련 양국의 핵무기 감축 논의에 체르노빌이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는 이야기가 있다. 히로시마, 나가사키보다 더 넓은 지역이 더 높은 수치의 방사능 오염지대로 변하면서 핵전쟁 이후 펼쳐질 지옥에 대해 사람들이 두려움을 가지면서 핵무기 감축을 주장하는 파가 정치계에서 큰 힘을 차지하게 되면서 핵무기 감축에 기여했다는 것.[62] 그리고 덤으로 소련까지 무너졌으니 미국은 올레!

7 체르노빌 사고를 다룬 작품들

7.1 다큐멘터리

7.2 대중매체물

1987년 미국 방영된 TV시리즈 에어울프 시즌4에서 9~10화인 '스타보그라드 핵발전소'(Stavograd) 상하편은 체르노빌 사고에서 모티브를 얻은 작품이다. 작중 소련이라는 국명은 나오지 않으나 가상 지명이 스타보그라드로 누가 봐도 소련이다. 여기서 외부 개입을 꺼리고 "우리가 해결할 수 있다"고 큰소리치는 소련 군부와 관료들을 간신히 설득한 후, 방사능이 아무리 뿜어져나와도 끄떡없는 천하무적 에어울프가 폭발한 원전에 접근해 지대공미사일을 발사해 사태를 수습하는데 성공한다. 지대공미사일 몇 발로 간단히 핵발전소 사고가 처리되는게 가냥한지는 묻지말자 애초에 안그래도 터진 원전이 지대공 미사일에 터지면 방사능이 더 세어나오거나 심각하면 아예 핵폭발이 일어날수있다.
종말론자 중 요한묵시록의 내용을 추종하는 종말론자들이 좋아하는 떡밥 중 하나이다. 요한묵시록의 내용 중 8장에 '큰 별 하나가 강과 샘물에 떨어졌다. 그 별의 이름은 으로 물을 쓰게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라는 내용이 있다. 그런데 우연히도 러시아어에서 체르노빌의 원래 뜻이 바로 쑥이다. 그 지역에서 쑥이 많이 나와서 붙여진 이름.
  1. 방사선에 전체적으로 노출된 필름은 증감현상한 것처럼 거친 그레인이 나타나고 색 재현성이 떨어진다. 일부가 노출되면 방향에 따라 서치라이트를 비춘 듯한 무늬가 나타나며(발전소 지붕에서 촬영한 사진에 이런 흔적이 나타난다) 영상 필름의 경우 사방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 듯한 모습이 나타난다.
  2. 이고르 코스틴은 1진으로 도착한 보도 사진 작가들 중 한 명으로 헬리콥터에 탑승해 사고 현장을 촬영하였다. 그의 카메라들은 몇 분 만에 전부 고장나 버리는 바람에 겨우 12장만을 찍을 수 있었다. 방사선의 위력에 대해 잘 몰랐던 그는 의아해하며 배터리가 나간 정도로 생각했다. 차라리 정말 그것 때문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3.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발생하며 유일한 7등급이란 타이틀은 잃었으나 폭발 규모는 여기가 최강이다. 후술할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진짜 지구가 멸망할뻔 했다.
  4. 조금 더 쉽게 설명하자면 후쿠시마가 몇 년 동안 지속적으로 방사능이 새는 것이면 체르노빌은 단 한번의 폭발로 지구가 위험해진 사건이다.
  5. 왜냐면 소련이 자기네들이 쓰던 군사용 플루토늄 생산로를 대충 고쳐서 전력용으로 써먹었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원자로로는 영국에서 개발한 마그녹스가 있다.
  6.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 조사위원회 위원장. 자세한 것은 링크 참조.
  7. 방사능 피폭으로 인해 오른팔이 없이 태어난 기형아의 이미지.
  8. 서방에서는 원자로가 정지하자마자 디젤 발전기가 가동해서 이런 실험을 할 필요가 없었다는 설이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서방 측 원전도 분명히 이런 종류의 문제가 많았다. 특히 디젤 발전이 최고출력까지 이르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이런 종류의 위험은 동서방을 막론하고 항상 존재한다. 흔히 서방식 원전이 안전하다고 보는 경향이 있는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원전은 종류를 막론하고 항상 위험하다.
  9. 당시 체르노빌 원자로는 ECCS가 장착되어져 있었으며, ECCS때문에 인위적으로 원자로를 중단시키는 실험을 하면 원자로의 연쇄반응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원자로 재가동 절차를 밟아야 했다.
  10. 원자로 설비에 이상이 생기거나(특히 냉각재 상실 사고) 전력 생산이 중단되면 자동으로 감속재가 빠지거나 혹은 중성자 억제제가 왕창 든 냉각재가 투입되거나 제어봉이 긴급 삽입되면서 반응이 중단되도록 설계된 시스템으로 한국어로는 비상노심냉각장치라고 부른다.
  11. 걔네들 안전수칙에도 ECCS를 끄지 말라고 되어있었다.
  12. 그러나 실제로 그러한 일들이 자주 있다.오래전 지은 집들은 누전기에 굵은 구리선으로 차단기가 내려가지 않도록 작업해둔 곳도 있다. 심지어 데이터센터의 서버실, 또는 PC방도 그러하다.
  13. 나중에 사고가 터진 후 방사능에 피폭당해 죽어가던 알렉산드르 아키모프를 비롯한 기술자들은 천하의 개쌍놈들로 비난을 받았다. 이 끔찍한 사태를 일으킨 원흉으로 치부된 것. 진짜 원흉은 따로 있었잖아
  14.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의 원자로는 흑연 감속형인데 안전한 제어가 힘든 면이 있다. 일반 경수로의 경우 물이 줄어들면 중성자가 덜 다녀 자연적으로 출력이 줄어드는 데 비해 이건 거꾸로 물이 적어지게 되면 출력이 증가되어 버린다. 즉, 냉각재 상실 사고가 터지면 펑! 또 다른 문제는 양의 기포 계수를 가진다는 점이다. 냉각재 사고가 아니더라도 과열된 원자로는 물을 마구 끓게 만들어 수증기로 만드는데 이것은 물 분자의 밀도를 감소시킨다(수증기 밀도는 1기압시 물의 1/1600). 물은 중성자를 흡수하여 핵 반응을 억제하는 역할을 하는데 밀도가 낮아지니 핵 반응이 활성화된다. 반응이 활성화되니 온도는 더 올라가고 물은 더 증발하고 다시 반응이 활성화되는 악순환에 빠져 걷잡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참고로 상업용 원자로로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이용되는 가압경수로의 경우 반응도 출력계수가 음의 값을 갖는다. 그러니까 원자로 출력이 올라가면 반응도가 낮아지면서 출력도 자연스럽게 낮아진다는 얘기. 이런 걸 원자로의 고유 안정성이라 한다.
  15. 제어봉이 흑연 위에 달려있어서 제어봉을 긴급 삽입해도 흑연에 제어봉이 걸릴 경우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이런 일이 없겠지만 폭주 때문에 흑연 덩어리들이 덜컹거리는 상황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 기타 원자로의 경우 비상시 이에 대응하는 시간은 2초 이내라고 한다.
  16. 노심융해가 일어났다고도 하지만 실제로 노심융해가 일어난 스리마일 섬 사고와 비교하면 너무나 빠른 속도로 출력이 폭주했기 때문에 노심융해보다 폭발에 의한 영향이 더 크다. 실험 시작 시간에서 폭발까지 거의 1분도 안 걸렸다.
  17. 방사능 물질을 대량으로 생성하는 코발트 폭탄과 같은 예외를 제외하면 실제 핵무기보다 이런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방사선은 몰라도 방사능 물질은 더 많이 뿜어댄다. 히로시마나가사키원폭이 떨어졌음에도 체르노빌보다 더 빨리 복구된 사실을 기억하자. 실제 핵무기가 떨어지면 처음 나오는 낙진만 물로 깨끗이 제거하면 방사능에는 큰 문제가 없지만 체르노빌처럼 감속재가 불타오르며 지속적으로 방사능 물질을 뿜어댄다면?
  18. 예시로 나온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의 경우 원폭 그 자체에서만 낙진 등의 형태로 방사능이 나왔을 뿐이다. 결정적으로 이후 태풍들이 몇 번 지나가면서 방사능 낙진은 금세 쓸려나갔다.
  19. 그와 그의 소방대는 역부족임에도 불구하고 화재진압과 3호로의 보호에 최선을 다했으며 이런 노력이 결실을 맺었는지 3호로는 기적적으로 무사했다. 만약 이것까지 터졌으면 재앙은 수습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지도 모르며 이 공적을 인정받아 텔랴트니코프는 그의 부하인 블라디미르 프라비크와 빅토르 키베노크와 더불어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수여받았다. 그는 53세가 되던 2004년에 암으로 죽었으며 키예프에 마련된 그의 무덤에는 그를 위한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20. 헬기가 발전소 상공에서 모래들을 뿌리다 메인로터가 근처의 크레인 줄에 걸려 메인로터가 갈리며 그대로 헬기가 전복되면서 수직 추락. 그 후에 잠깐 추락한 헬기에 대한 위령비가 나온다.
  21. 스웨덴은 처음에 자신들의 원자력 발전소에서 방사능 누출이 일어난 게 아닌가 의심했으나 분석 결과 소련으로부터 온 것이 분명하다고 단정지었다.
  22. 하지만 낙진이 안온 브라질도 1년뒤,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방사능 공포에 휩싸이게 된다, 자세한건 해당 항목 참조
  23. 프리피야트에 파견되어 방사선량을 측정하던 군인들의 책임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급상승하는 방사선량에 경악했고 높으신 분들 역시 이 보고를 받고 경악했다.
  24. Припять. 우크라이나어로는 Прип'ять.
  25. 실제로 방사능 방호복은 비싸면서 만들기도 어려운 장비다.
  26. 요오드의 동위원소 중 하나로 반감기가 8일인 방사능 물질이며 갑상선에 붙어서 갑상선암을 일으킨다.
  27. 이런 보드카를 마실 경우 갑상선 부위에 요오드를 과포화시켜 갑상선 부위가 방사능을 띤 요오드에 오염되는 것을 막아준다.
  28. 자세한 것은 방사선방호 약제를 보자. 제대로 막아내려면 엄청나게 다양한 약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부작용도 있고 하지만 정작 이 약제들도 방사선의 급성장애의 방호에 목적이 있는 것으로서 발암이나 수명단축 등 만성장애의 방호에 도움이 되는지 여부는 명확하지 않다.
  29. 이 사고를 다룬 디스커버리 채널의 동명의 다큐멘터리 제목이기도 하다. 이 항목 상단에 올라와있는 동영상이 그것.
  30. 체르노빌 청산작업 전체를 연구한 전문가의 의견에 의하면 '현명한 조치였으며 약간의 백혈병 위험은 있지만 그것도 확실하지는 않은 수준' 이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판단 착오가 있었다. 노심이 뿜어내는 방사능이 예상을 훨씬 초월할 정도로 너무나도 강했다.
  31. 현재에도 원자력 발전소 내에서 고방사능 지역에 진입해 작업하는 일의 경우 비슷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물론 작업시 한계치로 하는 피폭량은 훨씬 더 낮은 편이고 방호복 등도 지급한다.
  32. 여담으로 PWR(가압경수로)의 경우가 BWR(비등경수로)에 비해 구조적으로 한 사람이 더 오래 방사능 구역에 머무를 수 있다. BWR의 경우 심한 경우 몇 분 정도밖에 허용되지 않는다고 한다. 국내의 원전은 대부분 PWR이다.
  33. 잘 보면 사진의 밑부분에서 하얀 그을음이 기둥처럼 올라와 있는데 이것은 문서 최상단의 체르노빌의 공중 촬영 사진에서 설명했다시피 지상에서 올라오는 강한 방사선에 필름이 망가져서 그렇다.
  34. 한 조각마다 시간당 몇 시버트을 내뿜고 있었다.
  35. 이 옷은 거의 모든 부위를 납으로 덮었기에 그 무게가 무려 30kg에 달했다.
  36. 문제는 아무리 고성능의 방사능보호의가 있어도 천년만년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정 시간 동안 방사능에 노출되었을 때는 다른 것으로 교체를 해야 하는 게 정상이지만 현실은...
  37. 당시에는 시간당 70시버트로 계산했으나 오늘날에는 시간당 무려 100~120 시버트였을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38. 당시 방사선에 노출된 시간은 40초보다 길었다. 작업인원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40초 내에 모든 일을 끝내고 돌아올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이 발전소 지붕에 올라간 건 한 번이 아니니 그 피폭량은 위험 수준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39. 삽을 쓰는 것 뿐만 아니라 때때로 큰 흑연 덩어리는 한두 사람이 손으로 들어 옮기기도 했는데 시간당 15시버트의 오염물을 단 한 번 그렇게 옮긴 것만으로도 복귀 후에는 통증을 느끼며 한동안 주먹을 쥘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40. 소련 정부에 의하면 지붕 작업자들의 피폭은 수백 밀리시버트 정도로 통제되었다. 그러나 당사자들은 그것이 축소된 수치이며 실제로는 몇 배나 많이 피폭되었다고 주장한다. 지붕에서 복귀한 후 코피를 쏟으면 병원으로 실려갔고 몸을 가누지 못하면 집으로(!) 보내졌다는 증언 등을 볼 때 많은 이들이 급성피폭의 증상을 보였을 정도로 전반적인 피폭량은 매우 높았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위에 기재되었듯 당연히 40초 이내에 모든 작업을 끝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41. 참고로 이 여성 분은 체르노빌 주변을 탐사하면서 여전히 방사능에 절어있는 다양한 풍경과 사물을 보여주기도 한다. 같이 올라오는 유튜브 동영상을 참조.
  42. BBC에서 만든 다큐멘터리 'Surviving disaster - Chernobyl Nuclear disaster' 에는 이들의 악행이 잘 나온다. 안전장치를 끄고 실험하면 위험하다는 기술자들의 주장을 묵살하는 아나톨리 댜틀로프와 사상 최악의 원자력 사고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방사선 수치가 높지 않다고 상부에 허위보고를 하는 빅토르 브리하노프의 모습은 보는 이의 살의를 불러 일으킨다. 이 인간이 보고한 수치가 3.6뢴트겐인데 두 번째 폭발이 일어난 후 상부에서 계측장비를 갖고 와서 측정한 결과는 무려 15000 뢴트겐(대략 150시버트)을 초과했다! 어느 정도로 강하냐면 이런 엄청난 수치의 방사선이 뿜어져나오는 곳에 사람을 갖다두면 길어야 한 시간 이내에 죽어버린다 이 다큐멘터리는 나중에 '대재앙 - 체르노빌 원전 폭발사고' 라는 제목으로 국내 TV에도 방영되었다.
  43. 링크에 따르면 피폭 후 입원 한 이그나텐코를 그 당시 임신 중이어서 문병이 불가능했던 아내 루드밀라가 이미 둘 사이에 아이 둘이 있어 괜찮다고 거짓말을 하여 허가받아 입실하였고, 남편이 죽는 그날까지 병실에 함께 있었다. 이때 남편과의 신체적 접촉(키스나 포옹 등)을 금하라는 지시를 무시하여 루드밀라도 엄청난 양의 방사능에 피폭되는데, 원래는 루드밀라의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피폭이었으나 그 방사능을 뱃속의 태아 나타샤가 흡수하여 무사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나타샤는 태어난 후 4시간만에 사망.
  44. 이 짓은 현재 일본도 하고 있다. 식품의 방사능 수치 규제를 기존보다 낮추기는 했으나, 인체의 치명적인 방사능수치를 부풀려 발표하지않음.
  45. 당연히 공산당원 위주.
  46. 이 지역에 출입할 수 있는 사람은 사마셜 이라고 불리는 체르노빌 출신의 사람들 뿐으로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죽음을 맞고 싶어하는 노인들에 한해 거기서 살 수 있다고 한다. 식량은 외부에서 가져와 방사선에 노출되지 않게 밀봉된 채로 지급된다. 그리고 전면 무료 의료 지원이 제공되며 일정 기간이 지나면 무조건 건강검진을 받는다.
  47. 북유럽에서는 이 사건으로 인해서 10만건 이상에 달하는 낙태 수술이 행해졌다.
  48. 방사능에 노출되면 특정 유전자의 변이로 인하여 특정 부위가 거대해지거나 작아지는 경우는 있어도 전체가 커지거나 하는 마블 코믹스고질라스러운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랬다면 일본 히로시마나가사키를 비롯한 핵 피해지역은 진격의 거인들이 살고 있을 것이다
  49. 실제 러시아 같은 북동유럽에선 날씨가 좋지 않으니 다른 지역보다 햇빛을 잘 받지 못하여 비타민 D 생성을 돕기 위해 유치원에서 정기적으로 방사선은 아니지만 자외선을 쬐어준다. 즉,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더 알맞겠다.
  50. 이 부분은 하나의 레토릭으로 이해해야 할 듯하다. 당시 체르노빌 복구비용은 3580억 달러. 2011년 현재 대한민국 국가 예산을 뛰어넘긴 하지만 소련 GDP의 수~15% 규모라는 추정치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참고로 계획경제체제인 소련 경제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힘들겠지만 OECD 국가의 예산 규모는 해당 국 GDP 대비 20~40% 선이다(국가가 많은 부분을 책임지는 북유럽 복지국가가 40% 이상, 복지 수준이 낮은 한국멕시코가 20%로 최저.). 평균 30% 수준. 그렇다면 국가 예산의 절반 정도. 이 양반이 원래 좀 쇼맨십, 과시욕이 있고 이빨을 잘 까는 걸로 유명하다.그렇다고 해서 냉전 양강 국가예산의 절반이 적게 들어갔다 소리가 아니고
  51. 물론 일대가 쑥대밭이 되어 님비현상의 주체가 되는 주민 자체가 모두 피신한 상황이지만 거기서 일하는 직원은 어떻게 되었을까?
  52. 7km/l만 넘겨도 충분히 가능하다.
  53. 지그재그로 운전하다 경찰에 걸린 이후로는 가속 잠깐 하다가 브레이크 가속 잠깐 하다가 브레이크를 반복. 경찰에 걸려서 정차하는 동안 기어를 중립에 넣고 고RPM을 유지했다.
  54. 차 안에 짱돌 적재 및 트렁크 열고 달리기. 중간에는 잠깐 운전석 문도 열고 달렸다.
  55. 케이블을 뽑아서 ECU에서 엔진 제어를 하지 못하도록 했다.
  56. 당시 체르노빌 뒷수습은 일단 피해를 중지시키는 것이 급하니 완전한 해결책은 나중에 나오리라 보고 30년을 견디는 것을 만들자는 식이었다. 그런데 냉전이 끝나고 동구권 경제가 붕괴하면서 어영부영하는 사이 내구연한이 다가온 것이다. 이렇게 갑자기 망할 줄은 몰랐겠지
  57. 우주에 버린다는 아이디어 자체는 좋지만 문제는 로켓으로 쏘아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로켓이 고장나서 대기권 돌파도 하기 전에 공중 폭발이라도 한다면? 아주 좆되는 거야 신뢰성 높고 안전한 소유즈 계열 로켓을 쓴다면 상대적으로 안전하긴 하겠으나 로켓이란 것에 이런 물건을 싣는 것은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앨 수 없다. 더욱이 우크라이나와 가까운 곳에서 로켓을 쏠만한 장소는 바이코누르, 플레세츠크,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인데, 이 곳은 입지가 카자흐스탄 영내, 북극해(...), 중국 국경과 시베리아 횡단철도 근처(......)라는 환상적인 위치선정을 자랑한다. 즉, 이걸 쏴줄만한 발사장도 없다. 또 로켓을 발사하는 것이기에 당연히 천문학적인 금액이 들어간다. 이외에도 국제법 상 제약도 있다. 현실적으로 이 방법은 힘들지도.
  58. 하지만 아나톨리 댜틀로프는 이러한 인재를 뉘우치기는커녕 1990년에 병보석으로 가석방 되자마자 독일뮌헨으로 도망쳐서는 거기서 체르노빌 사고의 원인이 자신들이 안전장비를 해제해서가 아니라 원래 RBMK형 원자력 발전소라 사고가 날 수밖에 없었다고 논문을 썼다.
  59. 하지만 예산부족으로 인해 아직까지는 완공을 못했다.
  60. 본래 원자로는 전력생산을 위한 목적보다는 플루토늄 생산을 위한 군사적 목적의 개발이 강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시가 맨해튼 프로젝트.
  61. 방사능에 피폭되어 흉측해진 식인종들에게 습격당해 하나둘 희생당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결말은 꿈도 희망도 없다.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 하나가 살아남았으나 기밀 유지를 위해 출동한 우크라이나 군에 의해 남주는 사살당하고, 여주는 끌려간 뒤 방사능 피폭이 심한지라 가망이 없다 판단되자 다른 피폭자들이 있는 감방에 던져진다.
  62. 물론 핵무기 감축을 통한 비용 절감 등의 실질적인 이유도 있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