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비야 FC 감독 | |
호르헤 루이스 삼파올리 모야 (Jorge Luis Sampaoli Moya) | |
생년월일 | 1960년 3월 13일 |
국적 | 아르헨티나 |
출신지 | 산타페 카실다 |
포지션 | 수비형 미드필더 |
소속팀 | 뉴얼스 올드 보이스 (1977~1979) |
지도자 | 후안 아우리치 감독 (2002) 스포르트 보이스 감독 (2003) 코로넬 볼로네시 감독 (1984) 스포르팅 크리스탈 감독 (2007) 오히긴스 감독 (2008~2009) 에멜레크 감독 (2010) 우니베르시다드 데 칠레 감독 (2011~2012) 칠레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2012~2016) 세비야 FC 감독 (2016~) |
세비야 FC 역대 감독 | |||||||||||
우나이 에메리 (2013~2016) | → | 호르헤 삼파올리 (2016~ ) | → | 현직 |
불행했던 선수 시절을 딛고 명장으로 거듭 난 사나이[1]
화끈한 공격축구 전술의 달인이자 칠레 축구 역사상 첫 메이저 대회 우승을 이끈 감독
1 인물 소개
호르헤 삼파올리(Jorge Sampaoli, 1960. 3. 13~)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축구 감독이다. 2016년 1월까지 칠레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한 바 있다. 풀 네임은 호르헤 루이스 삼파올리 모야(Jorge Luis Sampaoli Moya)이다. 아르헨티나의 산타페 주 카세로스 군 인근 작은 마을인 카실다 출신이라고 한다.
2 선수 경력
호르헤 삼파올리의 선수 경력은 정말 안습한 수준이다. 그는 유년 시절부터 축구에 깊은 열정을 갖고 고향 리그의 아마추어 리그에서 선수 생활을 하다가 17세 때인 1977년에 산타페 주의 주도 로사리오를 연고로 하는 뉴얼스 올드 보이스의 유소년 팀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러나 불과 2년 후인 1979년에 정강이뼈와 종아리뼈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어 불과 19세의 어린 나이에 프로 무대에 데뷔조차 하지 못하고 선수 생활을 접어야 했다.
3 지도자 경력
선수 생활을 그렇게 허무하게 끝냈으나 축구에 대한 열정은 포기할 수 없었는지 32세 때인 1992년 아마추어 클럽인 아프렌디세스 카실덴세스의 감독을 맡으며 감독직을 시작하였다. 그 때부터 아르헨티나의 아마추어 클럽 및 3부 리그 팀 감독을 역임하며 착착 지도자 경력을 쌓았다. 그가 처음으로 프로 축구 감독에 데뷔하게 된 건 2002년 페루 리그의 후안 아우리치라는 구단의 감독으로 취임한 것이었다.
그러나 첫 프로 축구 감독으로서의 성과는 보잘 것 없었다. 그는 후안 아우리치에서 단 8경기를 지도하는데 그쳤는데 그 때 거둔 성적은 고작 1승 2무 5패에 불과했다. 결국 그는 후안 아우리치가 리그 최하위에 랭크되었을 때인 2002년 5월에 사임했고 불과 1개월 후 페루의 다른 구단인 스포르트 보이스의 감독으로 취임했다. 그곳에서 그는 굵직굵직한 승리를 거두며 성공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2004년 그는 타크나를 연고로 하는 코로넬 볼로네시의 감독으로 취임해 이곳에서도 준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그곳에서 보인 2년 동안의 성적을 인정받아 2007년, 마침내 리마가 연고인 페루 명문 구단 스포르팅 크리스탈 감독에 취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17경기를 치르면서 단 4승만을 기록하는데 그쳐 결국 해임되었고 페루에서의 감독 생활도 끝나게 되었다.
2007년 말에 삼파올리는 칠레로 이주하였고 랑카과를 연고로 하는 오히긴스 FC 감독 자리에 올랐다. 2008년, 팀은 아페르투라에서 3위를 차지하며 칠레 거함들이 상대하기 까다로운 존재임을 증명하였다. 팀은 거함 우니베르시다드 데 칠레와의 플레이오프 8강에서 탈락하였다. 그 다음해, 삼파올리에게 시련이 찾아왔는데, 2009년 아페르투라 플레이오프 진출에도 불구하고 산티아고 연고의 우니온 에스파뇰라에게 2차전에서 1 : 6으로 패하는 등 "라 셀레스테"는 부진한 행보를 보였고, 8위로 시즌을 마감하였다.
참참참!!!
결국, 삼파올리는 2009년 8월에 경질되었다. 이후 그는 에콰도르로 건너가 2010년에 과야킬을 연고로 하는 CS 에멜레크 팀 감독으로 취임했다. 그에 따라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2010에서 팀을 지휘하였고, 비록 조별리그 탈락에 그쳤으나, 지역 대회에서 인상적인 활약 끝에 토너먼트 1라운드 1위를 차지하여 코파 수다메리카나 2010과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2011 조별 리그 진출권을 확보하였다. 같은 해 에멜레크는 후반기 1위를 차지한 리가 데 키토를 상대하였으나, 패하였다.
이후 다시 칠레로 돌아와 산티아고를 연고로 하는 칠레 최고의 명문 구단 우니베르시다드 데 칠레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곳에서 삼파올리는 대박을 쳤는데 3번의 리그 우승과 코파 수다메리카나 우승을 차지한 것. 그간 겉절이 같이 떠돌던 지도자 인생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성공을 한 것이다.
3.1 칠레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
한편, 삼파올리가 칠레에서 대박을 칠 무렵 칠레 축구 국가대표팀의 상황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명장 마르셀로 비엘사가 2011년 2월에 돌연히 사퇴한 후 클라우디오 보르기가 감독으로 취임했는데 2011년 코파 아메리카에서 고작 8강에 그친데다 그 해 10월부터 치러진 브라질 월드컵 남미 지역예선에서도 부진을 면치 못하며 9경기를 치르는 동안 성적은 4승 5패(승점 12점)에 불과해 본선 진출을 장담하기 어려울 정도로 막장 상황에 놓였다.[2]
그리하여 칠레 축구협회는 곧바로 클라우디오 보르기를 2012년 11월 자로 해임하고 칠레 리그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둔 호르헤 삼파올리를 국대 감독으로 선임했다. 삼파올리는 뛰어난 지도력으로 침체에 빠진 팀 분위기를 빠르게 수습했으며 남은 경기에서 5승 1무 1패라는 준수한 성적을 거두며 총 9승 1무 6패(승점 28점)의 성적으로 아르헨티나와 콜롬비아에 이어 3위로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3]
그러나 조 편성은 그다지 좋지 못했는데 디펜딩챔피언인 스페인과 그 스페인과 끝까지 우승컵을 놓고 경쟁했던 네덜란드, 그리고 아시아의 강호 호주와 함께 죽음의 조인 B조에 편성된 것. 그 탓에 칠레의 16강 진출을 예상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1차전 조 최약체 호주와의 경기에서 칠레는 그 특유의 닥공 축구를 선보이며 3 : 1로 완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2차전 상대는 바로 디펜딩챔피언 스페인. 비록 1차전 네덜란드와의 경기에서 1 : 5로 대패하는 대참사를 겪었지만 그래도 전력을 고려할 때 스페인이 칠레보다는 한 수 위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칠레는 스페인을 상대로 질식에 가까운 압박 수비를 보이며 전반 20분 에두아르도 바르가스, 전반 43분 차를레스 아랑기스의 골로 2 : 0으로 완승을 거두었다.
3차전 네덜란드와의 경기에서 A조 1위로 예상되는 브라질을 피하기 위해 칠레는 초반부터 공격적으로 나서 볼 점유율에서 64% : 36%으로 매우 높게 가져가며 네덜란드를 밀어붙였다. 그러나 피지컬에서 우위에 있는 네덜란드는 하프 라인 아래에 잔뜩 웅크리며 칠레의 공격을 모두 막아냈고 오히려 롱킥을 통한 역습으로 칠레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후반 중반 이후 칠레의 체력이 점점 떨어지기 시작했고 이때까지 하프 라인 아래에 잔뜩 웅크리면서 체력을 비축한 네덜란드가 곧바로 몰아치기 시작했다. 네덜란드 : 내가 하프 라인 밑에서 웅크리고 있었던 건 체력 비축을 위함이었다. 후반 32분, 르로이 페르와 후반 35분에 멤피스 데파이에게 잇달아 실점하며 0 : 2로 패했다. 경기가 끝난 후 삼파올리는 네덜란드를 향해 "롱킥과 역습만 노린다."고 비난을 퍼부었으며 "수비만 하는 팀을 상대로는 해법을 찾을 수 없다."고 비웃었다.
그 말을 들은 네덜란드 감독 루이스 판 할은 "남의 나라 감독 이야기는 안 하고 싶다."며 쿨하게 씹었다.[4] 그리고 치러진 브라질과의 16강전. 바로 전 대회인 남아공 월드컵 16강전에서도 칠레는 브라질이란 거대한 산에 막혀 0 : 3으로 패해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그래서 경기를 치르기 전에는 칠레가 브라질에 맥없이 주저 앉을 것이란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삼파올리는 브라질의 흑역사 마라카낭의 비극을 언급하며 그 때의 영상을 선수들에게 보여주었고 "우루과이가 해낸 일을 우리가 못할 건 없다."며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그 말이 결코 허세가 아니었음을 증명했다. 칠레는 탄탄한 조직력과 우세한 체력으로 브라질을 괴롭혔다. 열세였던 평균 신장은 한 발 더 뛰는 것으로 커버했다.[5] 전반 18분에 다비드 루이스에 선제골을 허용하며 0 : 1로 끌려갔지만 칠레의 에이스 알렉시스 산체스가 전반 32분에 동점골을 터뜨려 다시 1 : 1로 균형추를 맞추었다. 칠레는 한 발 더 뛰는 조직적인 수비로 브라질의 에이스 네이마르를 완전히 지워버렸다.
주장이자 수문장인 클라우디오 브라보는 잇단 선방을 보이며 선수들에게 힘을 불어넣었다. 전후반 90분을 지나 연장전까지도 승부는 가려지지 않아 결국 승부차기로 이어졌다. 그러나 힘을 너무 많이 뺐던 탓일까? 1번 킥커 마우리시오 피냐와 믿었던 2번 킥커 알렉시스 산체스마저도 모두 브라질 골키퍼 줄리우 세자르의 선방에 막혀버린 반면 브라질은 2번 킥커 윌리안을 제외하고 1번 킥커 다비드 루이스와 3번 킥커 마르셀루가 모두 성공시켜 0 : 2로 끌려가게 되었다. 뒤이어 3번 킥커 찰스 아랑기스가 성공시키며 다시 1 : 2로 따라붙었고 브라질의 4번 킥커 헐크가 실축하는 호재에 힘입어 4번 킥커 마르셀로 디아스가 성공시켜 스코어를 2 : 2 원점으로 되돌리는 근성을 보였다. 이제 승부는 양팀의 5번 킥커에 달렸다. 그러나 브라질의 5번 킥커 네이마르가 골을 성공시킨 반면, 칠레의 5번 킥커 성추행범 곤살로 하라가 골대를 맞추며 실축해 끝내 2 : 3으로 석패했다.
경기가 끝난 후 브라질을 탈락 직전까지 몰고갔던 칠레의 우수한 경기력에 많은 찬사가 갔으나 삼파올리 감독은 "정신승리는 필요없다. 우리가 오늘 경기에서 졌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며 애써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월드컵에서의 활약으로 호르헤 삼파올리의 주가는 크게 치솟았고 칠레 축구협회는 삼파올리와 재계약을 맺어 2018년 러시아 월드컵까지로 계약을 연장했다. 월드컵이 끝나고 1년 뒤 칠레는 2015년 코파 아메리카를 개최했다. 개최국 칠레는 멕시코, 볼리비아, 에콰도르와 함께 A조에 속했다. 칠레는 홈 그라운드의 이점을 안은 덕분인지 막강한 닥공 축구를 선보이며 1차전에서 에콰도르를 2 : 0으로 꺾었고 2차전에서 멕시코와 3 : 3으로 비겼으나 3차전에서 볼리비아를 5 : 0으로 대파해 2승 1무, 10득점 3실점으로 조 1위를 차지했다. 8강 상대는 디펜딩챔피언 우루과이. 칠레는 경기당 3.3골씩 터뜨리는 막강한 공격력을 무기로 삼고 있다면 우루과이는 주포 루이스 수아레스의 징계로 인해 매 경기마다 수비적인 운영을 했다. 창과 방패의 대결에서 칠레는 세계적으로 악명 높은 우루과이의 늪 축구에 골탕을 먹었다. 짧고 세밀한 패스로 우루과이의 진영을 뚫고 뚫어도 우루과이 수비수들은 양파 껍질처럼 계속 등장했다. 세트피스 찬스에서도 평균 신장이 더 큰 우루과이가 더 유리했다. 그 결과 칠레는 상당히 고전할 수밖에 없었고 우루과이의 작전에 말리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이렇게 우루과이의 늪에 빨려들어갈 뻔한 걸 구해낸(?) 건 성추행범 곤살로 하라였다. 후반 17분, 곤살로 하라 후X 털이법는 우루과이의 공격수 에딘손 카바니에게 다가가 중지 손가락으로 똥침을 먹였다. 에딘손 카바니는 그에 격분해 싸대기를 살짝 쳤는데 하라는 마치 죽빵이라도 맞은 양 심판 앞에서 오버하며 뒹굴었다. 주심은 에딘손 카바니를 퇴장시켰고 칠레는 수적 우위를 점했다. 이런 수적 우세에 힘입어 칠레는 더욱 공격적으로 나섰고 마침내 후반 36분, 우루과이의 골키퍼 페르난도 무슬레라가 볼 처리 미스로 놓친 볼을 마우리시오 이슬라가 중거리슛으로 결승골을 터뜨려 1 : 0으로 간신히 승리했다. 4강전에서도 페루를 맞아 다소 고전한 끝에 2 : 1로 승리해 결승에 진출했다. 결승전 상대는 바로 칠레의 천적이자 삼파올리 자신의 조국이기도 한 아르헨티나였다.[6]
그러나 칠레는 주력을 바탕으로 아르헨티나를 몰아붙였고 볼 점유율과 슈팅 수에서도 모두 아르헨티나를 앞섰다. 파라과이와의 경기에서 6골이나 터뜨리는 괴력을 발휘했던 아르헨티나는 그 막강한 공격력은 다 쌈싸먹어 버리고 전임 감독 알레한드로 사베야가 물려준 유산인 수비력으로 버티기에 급급했다. 칠레는 경기를 지배했으나 마지막 한 방이 부족했고 전후반, 연장전까지 마치고도 결국 0 : 0으로 비겨 승부차기로 승부를 가리게 되었다.
승부차기에서 칠레는 1~3번 킥커까지 모두 성공시킨 반면 아르헨티나는 1번 킥커 리오넬 메시만 성공했고 2번 킥커 곤살로 이과인은 엉뚱한데다 슛을 갈겼으며 3번 킥커 에베르 바네가의 슛은 클라우디오 브라보의 선방에 막혔다. 이제 4번 킥커 알렉시스 산체스만 성공시키면 승부는 끝나는 상황에서 알렉시스 산체스는 대담하게 파넨카 킥으로 아르헨티나를 침몰시켰다. 그렇게 승부차기에서 4 : 1로 승리해 칠레가 사상 처음으로 코파 아메리카에서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다. 코파 아메리카 우승으로 호르헤 삼파올리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3.2 탈세 혐의 그리고 칠레와 결별
그렇게 한참 잘 나가던 삼파올리는 2015년 11월부터 갑자기 탈세 혐의에 연루되었다. 그런데다 2016년 1월경에 칠레의 라디오 방송 '아그리쿨투라'를 통해 "내 뜻과는 달리 인질처럼 칠레에 잡혀 있다. 나는 더는 칠레에서 일하고 싶지도, 살고 싶지도 않다."고 말했다는 보도가 나오며 논란이 일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일각에서는 호르헤 삼파올리가 탈세 혐의를 회피하기 위해 감독직을 내려놓으려 한다는 비난을 제기했다. 칠레 언론에서는 만일 삼파올리가 사퇴할 경우 계약서에 명시된 600만 달러(72억 원)이라는 거액의 위약금을 내놓아야 한다고 짚었다.
사태가 커지자 삼파올리는 급히 기자회견을 열고 수습에 나섰다. 기자회견에서 그는 "칠레 국민들은 진실을 알 필요가 있다. 내가 칠레를 떠나고 싶어한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다. 나는 이곳에서 절대 잊을 수 없는 순간을 경험했다. 나는 앞으로도 산티아고에 계속 살 생각이다."고 밝히며 칠레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사퇴하고 싶다고 한 말이 거짓말임을 밝혔다. 또 자신의 탈세 혐의에 대해서는 "내 계약 정보가 유출되고 개인 정보가 공개되자 나와 칠레를 음해하려는 세력이 생겼다."고 밝히며 "그러면서 내가 온갖 비리에 연루되고 세금을 내지 않은 사람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그러나 진실은 그렇지 않았다. 다만 이번 사건이 내게 영향을 미친 건 사실이다. 나는 칠레 대표팀이 거둔 성공의 과정에 일조한 일부일 뿐이다. 나는 누구의 아이돌이 되고 싶은 마음도 없다. 최근 떠도는 모든 소문은 날 음해하고 칠레에서 쫓아내려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야기다."고 주장했다.약간 피해망상 아닌가?
그러나 그 기자회견이 있고 불과 1주일도 되지 않아 돌연히 칠레 국대 감독 자리에서 사퇴했다. 아직 계약기간이 2년 남은 상황에서 스스로 마침표를 찍어버린 것.
삼파올리가 갑자기 칠레와 결별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본인이 직접적으로 밝힌 바는 없지만 자신에 대해 쏟아지는 탈세 의혹에 대해 심기가 거슬렸던 것과 자신을 칠레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에 앉힌 당시 칠레 축구협회장 세르히오 하두에가 최근 피파 비리 스캔들에 연루되어 협회 내 지지 기반이 약해진 점, 그로 인해 새로 협회장에 취임한 아르투로 살라 회장과의 불화가 주된 원인일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어쨌든 호르헤 삼파올리는 칠레 역사상 최초로 코파 아메리카 우승컵을 들어올리게 하고도 뒤끝이 좋지 못했고 결국 자신의 주가를 높이게 만들었던 칠레와 4년 만에 결별하게 되었다.
3.3 근황
칠레에서 떠난 삼파올리는 최근 EPL 감독직에 관심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16년 2월 16일 스페인의 '엘 파이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내 스타일은 공을 점유하고 계속해서 공격을 하는 것"이라며 "EPL 클럽 감독직에 관한 환상을 갖고 있다는 것에 부정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심지어 종료 직전에도 2골을 뽑아낼 정도로 공격적인 경기를 하기 때문이다."라며 EPL 감독직에 대한 희망을 밝혔다. 이어 "자신은 우승이라는 최상의 계획을 가진 팀을 선택하겠다."라며 "3위 혹은 4위에 머무는 팀을 만들지 않을 것." 아스날 의문의 1패, 아르센 벵거 의문의 1패이라며 EPL 클럽 감독직 희망과 함께 자신의 야망 역시 전했다.관련 기사
또 최근 영국 언론에서는 삼파올리가 첼시와 접촉하고 있으며 첼시 차기 감독으로 부임할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7] 영국의 '텔레그래프' 지에 의하면 삼파올리가 영어 공부에 한창 매진 중이라는 소식을 전하며 삼파올리가 첼시 감독으로 부임할 가능성이 높다고 알렸다.관련 기사
한편, 칠레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4년 동안 삼파올리의 지도를 받은 아르투로 비달은 삼파올리가 EPL에 매우 적합한 감독이라며 삼파올리의 EPL 진출을 적극 지지했다. 그런데 2016년 2월 말의 기사에 따르면 첼시 수뇌부에서 삼파올리가 유럽에서 팀을 지도한 경험이 없다는 점을 들어 삼파올리를 선임하는 건 모험수라고 판단해 후보에서 배제했다고 한다.관련기사 [8] 현재, 첼시의 차기 감독은 현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인 안토니오 콘테가 유력하다고 한다.[9]
그리고 예상대로 콘테 감독은 유로 2016 직후, 첼시 감독직에 취임하게 되면서 신임 감독직에 이름을 올렸다.
이후 UEFA 유로파 리그 3연패를 거머쥔 세비야 FC의 우나이 에메리 감독이 세비야를 떠날 것이라는 소식과 함께 후임 감독으로 거론되고 있다. 에메리가 파리 생제르맹 FC의 차기 감독으로 부임할 것으로 보이면서 세비야는 차기 감독으로 키케 플로레스를 노렸으나 RCD 에스파뇰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무산되자 삼파올리를 선임할 것이라고 한다. 결국 삼파올리는 세비야의 감독으로 부임을 확정했다.
4 전술 스타일
요약 : 공격축구 성애자 이자 닥공 그자체
같은 아르헨티나 국적이면서 역시 칠레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했던 마르셀로 비엘사와 같이 매우 공격적인 축구를 선호하는 사람이다. 정확히 말하면 삼파올리가 이른바 '비엘사시즘'의 계승자다. 다들 알다시피 마르셀로 비엘사는 라인을 높이 끌어올려 전방에서부터 압박을 하며 공격적인 움직임을 주문하는 전술을 사용한다. 호르헤 삼파올리 역시 그러한 '비엘사시즘'을 충실히 계승했다. 마르셀로 비엘사와 호르헤 삼파올리 이 두 사람이 감독으로 있는 동안 칠레 축구 국가대표팀은 닥공축구의 대명사로 꼽혔다. 그들 전술의 특징은 라인을 높이 끌어올려 전방에서부터 압박을 하고 짧은 패스를 통해 점유율을 높이 가져가는 콤팩트한 축구를 구사한다는 것이다.
다만 비엘사와 삼파올리의 차이점이 있다면 비엘사에 비해 삼파올리가 전술적인 유연성이 더 낫다는 것이다. 즉, 비엘사처럼 거의 매 경기마다 수비 그거 먹는 건가요? 식으로 공격 축구를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공격보다는 수비에 주안점을 둔 전술을 취할 때도 많다는 것이다.[10]
예를 들자면 비엘사는 남아공 월드컵에서 또 삼파올리는 브라질 월드컵에서 각각 스페인을 상대했다. 물론 후자 때 스페인은 다소 하락세였다는 점을 감안해야겠지만 비엘사는 스페인을 상대로 자신들이 그 동안 갈고 닦아왔던 전술인 닥공 축구 전술로 스페인과 상대했다. 그 경기에서 비엘사의 칠레는 스페인을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11] 그러나 결국 1 : 2로 패했다.[12]
반면, 삼파올리는 1차전에서 스페인이 네덜란드에 1 : 5로 패한 걸 보고 2차전 스페인과의 경기에서 공격보다는 수비, 역습에 초점을 맞추어 경기에 나섰다. 스페인의 티키타카를 무력화시켰던 네덜란드의 이른바 '파이브백' 전술을 벤치마킹하여 결국 2 : 0으로 승리했다. 또 두 사람 다 남아공 월드컵과 브라질 월드컵 16강전에서 브라질을 상대했는데 비엘사는 공격 일변도로 브라질과 맞섰다가 수비 배후 공간을 노출하며 0 : 3으로 무너졌다. 반면, 삼파올리는 브라질을 상대로 조직적이고 한 발 더 뛰는 압박 수비로 맞서 1 : 1로 비겼고 승부차기 끝에 아쉽게 패했다.
삼파올리가 경기를 치른 곳이 브라질 홈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삼파올리 쪽이 더 여건이 안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성적은 더 나았다고 볼 수 있다. 이로 보아 전술의 완성도 측면에서는 당연히 비엘사가 몇 수 위이지만 적어도 유연하게 변화시키는 능력에서는 비엘사보다는 삼파올리가 더 낫다고 할 수 있다.- ↑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삼파올리는 불과 19세의 나이에 프로 데뷔도 하지 못하고 선수 생활을 접어야 했다.
- ↑ 특히 6차전 베네수엘라와의 경기에서 2 : 0 승리를 거둔 이후 콜롬비아, 에콰도르, 아르헨티나에 3연패를 당한 게 타격이 컸다.
- ↑ 남미예선의 난이도가 초초초극악 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대단한 수준이다.
- ↑ 그렇다고 삼파올리 감독의 발언이 틀린 것은 아니다. 월드컵을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이때 네덜란드는 세대교체가 진행중인 팀이었고 공격에서는 아르옌 로벤
축구하는 노인과 로빈 반 페르시, 베슬러이 스네이더르, 클라스 얀 훈텔라르로 주축이 된 베테랑 급 선수들이 주도하다시피 해서 사실상 이들 없이 경기하기에는 네덜란드로써는 불가능 그자체였다.한마디로 노답어느정도였냐면, 16강전이었던 멕시코전에서 선제 실점을 내준 이후 후반전 막판까지 끌려가다가 스네이더르의 동점골에 이어 로벤이 얻어낸 페널티킥을 훈텔라르가 넣으면서 어렵게 역전승을 거두었고 뒤이어 열린 코스타리카와의 8강전에서는 승부차기 접전끝에 간신히 이겨 체면치레를 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향으로 인해 네덜란드는 4강진출을 구현했음에도 그 다음에 열린 유로 2016 예선에서 베테랑들을 대체해야 하는 문제점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탈락하는 굴욕을 겪었고 현재까지도 해결책 마련에 노력한채 다가올 러시아 월드컵 유럽 예선을 준비하고 있다. - ↑ 실제 이 경기에서 칠레 선수가 기록한 활동량은 무려 145km였다. 즉, 선수 1명 당 13.2km씩 뛰었다는 것. 보통 10km가 넘으면 많이 뛰었다고 하는데 13km씩 뛰었으니 칠레는 그야말로 젖먹던 힘까지 짜냈던 셈이다.
- ↑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당시 준결승전에 오른 4팀(아르헨티나-칠레-페루-파라과이) 감독들 모두 아르헨티나 국적을 가진 감독들 이었고 이러한 진풍경에 일부 해외 팬들은 충공깽 수준으로 바라보며 놀라워 했다고 한다.
아르헨티나의 감독능력은 세계 제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일!! - ↑ 현 첼시 감독 거스 히딩크는 성적에 관계없이 2015/16 시즌 동안만 감독직을 수행하기로 계약되어 있었다.
- ↑ 아무래도 과거 클럽에서 보여준 능력치가 인상적이지 않았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배제 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 안토니오 콘테의 계약 기간은 유로 2016까지였다.
- ↑ 특히 비엘사 감독의 고집은 나름대로 유명(?) 한데 가장 유명한 사례는 바로 2002년 한일월드컵때 였다. 당시 조국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수행하였던 비엘사 감독은 환상적인 선수단을 이끌며 월드컵에 합류해 전문가들로 부터 강력한 우승후보라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전술 운영에서는 논란을 빚었다. 바로 공격수 배치에 문제점을 드러낸 것이다. 지금도 유명한 골잡이로 알려진 에르난 크레스포와 가브리엘 바티스투타를 놓고 고심을 많이 펼친 그는 두 선수를 과감하게 투톱 체제로 내보내기 보다는 오히려 원톱체제로 전환해 나가는 움직임으로 대회를 맞이하였고 그 결과, 이렇다할 공격력의 무게감을 뒤떨어지게 하는 원인으로 촉발되며 그가 추구하던 축구 스타일에 커다란 오점을 남겼다. 또한 당시 크레스포도 어느정도 이름 날린 골잡이였지만 베테랑 급이었던 바티스투타가 워낙 국대에서 닥 주전으로 차지하다 보니 임팩트가 상대적으로 약했던 크레스포에게는 제대로 된 활약을 펼치지 못하면서 비판여론을 가속화시키게 만들었다.
스웨덴전에서 첫 골 넣은건 위안거리중 하나물론 그때의 바티스투타가 30줄에 접어든 노장이었고 다른 선수들도 역시 크게 뒷받침 할 정도로 수준급 선수들 이었다는 점에서 감독 스스로도 원톱 체제를 고집하였다지만 지나친 고집이 낳은 결과가 자국 대표팀의 광탈 이었으니... 할말 없는것은 분명할 듯 싶다. - ↑ 그 경기에서 볼 점유율, 슈팅 수 모두 스페인보다 칠레가 더 앞섰다.
- ↑ 일명 토레스의 오심 논란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승리는 스페인의 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