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FIFA 월드컵 | ||||
3회 | → | 4회 | → | 5회 |
1938 FIFA 월드컵 프랑스 | → | 1950 FIFA 월드컵 브라질 | → |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
목차
1 개괄
1950년 6월 24일부터 7월 16일까지 개최된 4번째 FIFA 월드컵으로, 역대 월드컵 중 두 번째로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개최된 대회이자 초대 월드컵에 이어 두 번째로 남반구에서 개최된 대회이기도 하다.
지난 대회와 같이 16개의 팀에게 출전 자격이 주어졌으며, 개최국 브라질과 지난 대회 우승팀 이탈리아를 제외한 14개의 티켓을 위해 참가한 국가는 총 31개였다.[1] 하지만 예선 도중에, 또는 기껏 예선을 통과해놓고 기권했던 국가들이 상당히 많았다.
이 대회에서는 경기 수익을 조금이라도 더 벌기 위해 한경기라도 더 많이 치르게 하려는 생각으로 모든 경기방식을 토너먼트 대신 리그제로 치렀기 때문에 상당히 기형적인 조편성도 있었다. 그리고 이 대회에서 월드컵 역사상 등번호가 처음으로 선을 보였는데 지금처럼 선수에게 매겨진 것이 아니라 포지션에 따라 매겨진 것이었다.[2]
결승 리그에서 우루과이가 난적 브라질을 꺾고 2번째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다.
너무나도 당연히 이 당시 대한민국은 우리 민족 최대 비극으로 인해 예선에조차 참가하지 못했다.[3]
그리고 휘슬이 울리자 그 일이 시작되었다
2 개최지 선정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원래 개최되었어야 할 1942년과 1946년 월드컵은 전쟁, 전후 복구 문제 등으로 인해 열리지 못했다. 게다가 1942년 월드컵 자체가 브라질이 강력한 개최 후보국이었던 관계로[4] 브라질에서 1950년 월드컵이 개최되는 것에 크게 반대하는 분위기는 없었다. 굳이 독일에게 전쟁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는다하더라도 일부 중립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전쟁으로 상당한 타격을 입었기 때문에 월드컵을 개최할 여력이 없었기도 했다. 그래서 브라질이 단독으로 입후보를 하였고, 개최권을 따오는 데 성공한다.
원래는 1949년에 개최될 예정이었으나 이 월드컵의 개최를 확정지은 1946년의 룩셈부르크 총회에서 1950년으로 확정했다.
3 지역 예선
이 대회 지역 예선의 자세한 내용은 밑의 항목 참조.
그리고 이런 일들이 있었다.
- 전범 국가인 동·서독과 일본은 여러가지 제재를 받았는데, 이 대회 출전 자격 박탈도 그 중 하나였다.[5] 때문에 이 대회는 월드컵 역사상 초대 대회와 더불어 독일이 불참한 단 두 번의 월드컵[6]이다. 하지만 같은 전범국이었지만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는 제재를 받지 않았다.
오스트리아는 합병당한거였고, 이탈리아는 X맨이라...
- 디펜딩 챔피언이었던 이탈리아는 유로 2012에서의 독일[7]과 2010 월드컵의 그리스[8]마냥 특정팀에서 과반수의 선수들을 차출해서 국가 대표를 꾸렸었다. 하지만, 당시 세리에 A를 5연패하고 그 국대 멤버 중 과반수가 있던 토리노 FC 팀이 리스본에서 SL 벤피카와 친선 경기를 치르고 오는 도중에 비행기 사고를 당해 선수 18명과 스탭 5명이 사망했다. 당시 토리노의 베스트 11이 전부 사망했으며, 리스본에서 경기를 치렀던 선수들 중 후보 선수 루이지 쥴리아노만 여권 문제로 리스본에 묶여 있다가 화를 면했다. 나머지 4경기는 유스들을 콜업해서 경기를 치렀고 결국은 우승했다.[9] 정말로 망했어요, 지못미. 결국 이탈리아는 치명적인 전력의 구멍을 만회하지 못하고 스웨덴에 밀려 조별 리그에서 탈락, 사상 최초로 디펜딩 챔피언이 1 라운드에서 광탈하는 기록을 남겼다.[10]
- 아르헨티나 역시 이 대회에 불참했는데 그 이유는 1938년 월드컵 개최의 실패와 더불어 1946년 월드컵 개최에 성공했으나 전후 복구 문제로 인해 그 월드컵이 취소된 데다가 브라질과의 라이벌 의식이 최악으로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1945년 당시 브라질의 젊은 공격수 아데미르가 아르헨티나 수비수 호세 바타글리에로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6대 2로 승리를 챙겨간 것에 앙갚음하듯 이듬해의 코파 아메리카 대회 결승전에선 브라질을 홈으로 불러들여 초유의 난투극을 벌인 끝에 2대 0으로 이겼다.[11] 그 이후로 두 팀은 10년간 시합을 하지 않았다. 또한 아르헨티나와 지역 예선에서 같은 조에 있던 볼리비아와 칠레는 자기들끼리 두 번 시합을 치르기는 했지만 아르헨티나의 기권으로 인정되지 않고 자동으로 브라질에 가는데 성공하였다.
- FIFA에서 영국을 월드컵에 끌어들이기 위해 영국 홈네이션 4개국[12]들로만 예선을 치룬 후 그 중 상위 2개국을 월드컵에 진출 시켜준다는 파격적인
편애제안으로 홈네이션끼리만 따로 예선전을 치뤘다. 그 결과 잉글랜드가 1위 스코틀랜드가 2위로 진출권을 따냈다. 자세한 내용은 지역 예선 항목 참조. 그러나 스코틀랜드는 예선전 전부터 잉글랜드에게 밀리면 월드컵 안 나간다고 공언했었고 결국 잉글랜드에게 밀리자 월드컵 진출권을 따 놓고도 기권해 버린다.그리고 그렇게 대우받은 잉글랜드는 정작 본선에서 시망
- 50년대 이전 미국 대표팀의 월드컵 출전사를 보면 월드컵에 참가했던 선수들 중 A 매치 출전 횟수가 10회를 넘는 선수도 없을 정도로 얼굴이 자주 바뀌었고 상당수가 축구선수 외에도 투잡을 뛰었으며[13] 인접국 출신 불체자들에게 미국국적을 주는 조건으로 뛰게 하기까지 했다.[14]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대표팀은 당시 기준으로 세계최강인 잉글랜드를 떡실신시켰다. 잉글랜드는 당시 축구 종주국이라는 자만심이 하늘을 찔렀고, 처음으로 출전하는 월드컵에서 다른 팀들을 상대로 얼마나 크게 이길까에만 관심이 쏟아지는 상황이었다. 오죽하면 당시 미국의 언론사들은 미국 대표팀이 잉글랜드를 1대 0으로 제압했다는 기사를 믿지 못해 잉글랜드가 미국 대표팀을 10대 0으로 제압했다는 오보를 냈다가 나중에 정정 기사를 쓰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월드컵 역사에서 손꼽히는 이변의 경기 중 하나이고 흔히 나오는 월드컵의 이변 시리즈 중 가장 처음을 장식하는 사건이다. 하지만 이것은 잉글랜드에게 있어서 3년 후에 일어날 진짜 재앙의 서곡에 불과했다.[15] 그러나 경기 전날 브라질 관중들이 잉글랜드가 탈락해야지 브라질의 우승에 도움이 된다고 하여 밤새 잉글랜드 선수들이 잠자던 호텔 앞에서 소리를 지르고 악기를 연주해대서 제대로 잠을 못자게 했던 점도 있었다.
- 당시 아일랜드는 나라는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두 개의 팀이 출전했다. 이는 아일랜드의 당시 상황과 맞물리는데 같은 나라에서 종교 갈등으로 인해 가톨릭을 믿는 아일랜드 축구 대표팀인 FAI와 성공회를 믿는 아일랜드 북부 지방의 북아일랜드 축구 대표팀인 IFA이 따로 팀을 꾸려 출전했기 때문이다.[16] 하지만 나라가 완전히 갈라선 것도 아니고 선수의 국적에 대해 민감한 시기도 아니었던 탓에[17] 4명의 선수[18]는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양쪽에서 경기를 했다. 두 나라가 다른 조에 편성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고, 같은 월드컵에서 두 개의 국적으로 경기를 뛴 유일한 사례이다.
- 터키와 스코틀랜드, 인도는 지역 예선을 통과했지만
터키와 인도는 조금 날로 먹은 듯한 느낌이 들지만 사소한 건 신경쓰지 말자조 추첨 전에 기권하였다. 그래서 FIFA는 이 팀들의 자리를 지역 예선에서 탈락한 포르투갈과 프랑스, 아일랜드로 채워 넣으려 했지만 포르투갈은 거부하고 프랑스와 아일랜드는 수용하였다. 그러나 그 두 팀은 나중에 기권하였다. 특히 아시아의 유일한 출전국이었던 인도가 이 대회에서 기권한 이유는 맨발로 축구를 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19] 만약 이 대회에 출전했더라면 인도는 아시아 최초로 월드컵에 출전하는 영예를 누릴 수 있었으나 결국 무산되었고 아시아 최초의 월드컵 진출국 타이틀은 다음 대회에 출전한 대한민국이 가져간다. 게다가, 인도는 이 후로 월드컵 무대에 단 한번도 진출하지 못해서 월드컵과 인연이 멀어진 것은 물론 현재 인도 축구의 위상을 생각해보면 앞으로도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을 가능성이 매우 희박해 보이기 때문에 인도 입장에서는 땅을 칠 노릇. 어쨌든 이 때문에 4조의 경기는 꼴랑 우루과이 VS 볼리비아가 유일한 경기가 되고 말았다. 물론 이 경기에서 우루과이는 볼리비아를 8-0으로 난도질해 버렸다.
- 터키는 예선에서 달랑 시리아를 상대로 7-0으로 이기고[20] 진출했기에 인도 못지않은 거저먹기였지만 6.25 전쟁이 한창인 한국에 파병하고 소련이 쳐들어올까봐 노심초사하던 터라[21] 기권하게 된 거였다. 여담인데 시리아가 왜 유럽 예선에 포함되어있냐고 궁금하겠지만 1940~50년 유로바스켓이라든지 월드컵 예선에서도 시리아나 레바논, 이란, 이집트같은 나라들이 유럽 예선으로 참가할 수 있었다. 다만 대부분이 내부 사정으로 한번에 나온 게 별로 없거나 기권했을뿐...
-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독일에서 잘려나갔던 자르 지방(Saar protectorate)도 대표팀을 꾸려서 월드컵에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월드컵 개막 2주일 전에서야 FIFA에서 가입 승인을 하는 바람에 1950년 월드컵에선 문턱조차 밟을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1954 월드컵 예선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갔고 1956년 정식으로 서독으로 편입되어 사라졌다.
4 대회 엠블럼·마스코트·공인구
4.1 포스터
파일:/image/etimesi/2010/06/17/1 04 Copy(320).jpg
축구공을 차는 축구 선수의 발을 형상화했는데, 스타킹에 세계 각국의 국기를 그려 넣었다. 역시 이 당시의 월드컵도 초창기 월드컵이라서 마스코트와 공인구 같은 건 없었다.
5 경기장
월드컵이 열린 도시와 구장은 다음과 같다(가나다 순).
- 벨루오리존치, 에스타디우 세체 지 세템브루[22]
- 상파울루, 에스타디우 두 파카엠부
- 쿠리치바, 에스타디우 두리발 지 브리투
- 포르투 알레그리, 에스타디우 도스 유칼립투스
- 헤시피, 에스타디우 일랴 두 헤티루
- 히우지자네이루, 에스타디우 두 마라카낭[23]
6 대회 진행
6.1 조별 리그
진하게 표시된 국가는 결승 리그 진출국. 순서는 조별 리그 순위. 사선은 기권국.
조별 리그 | ||||
1조 | 브라질 | 유고슬라비아 | 스위스 | 멕시코 |
2조 | 스페인 | 잉글랜드 | 칠레 | 미국 |
3조 | 스웨덴 | 이탈리아 | 파라과이 | |
4조 | 우루과이 | 볼리비아 |
자세한 내용은 밑의 항목 참조.
6.2 결승 리그
결승 리그 | ||||
결승 | 우루과이 | 브라질 | 스웨덴 | 스페인 |
진하게 표시된 국가 우루과이가 우승국. 순서는 결승 리그의 순서를 따랐다.
순위 | 국가 | 경기 | 승 | 무 | 패 | 득 | 실 | 득실 | 승점 | 비고 |
1 | 우루과이 | 3 | 2 | 1 | 0 | 7 | 5 | +2 | 5 | 우승 |
2 | 브라질 | 3 | 2 | 0 | 1 | 14 | 4 | +10 | 4 | 준우승 |
3 | 스웨덴 | 3 | 1 | 0 | 2 | 6 | 11 | -5 | 2 | 3위 |
4 | 스페인 | 3 | 0 | 1 | 2 | 4 | 11 | -7 | 1 | 4위 |
자세한 내용은 밑의 항목 참조.
1950 FIFA 월드컵 우승 |
우루과이 |
두 번째 우승 (★★) |
7 기록실
- 최초 득점: 아데미르(브라질), vs 멕시코, 전반 30분(조별리그)
- 퇴장: 없음
- 최초 페널티 킥: 엑토르 오티스(멕시코), vs 유고슬라비아, 후반 44분(조별리그)
- 최초 멀티골: 아데미르(브라질), vs 멕시코, 전반 30분&전반 79분(조별리그)
- 해트트릭
- 최다 득점 경기
- 최다 득점차 경기: 우루과이 8 vs 0 볼리비아(조별리그)
- 최초 역전승: 스웨덴 3 vs 2 이탈리아(조별리그)
- 자책골: 호세 파라(스페인), vs 브라질(조별리그)
- 무득점팀: 볼리비아
22경기에서 88골이 터지면서 경기당 평균 4골을 기록했다.
8 결과
1위 - 우루과이
2위 - 브라질
3위 - 스웨덴
4위 - 스페인
순위 | 국가 | 경기 | 승 | 무 | 패 | 득 | 실 | 득실 | 승점 | 비고 |
1 | 우루과이 | 4 | 3 | 1 | 0 | 15 | 5 | +10 | 7 | 우승 |
2 | 브라질 | 6 | 4 | 1 | 1 | 22 | 6 | +16 | 9 | 준우승 |
3 | 스웨덴 | 5 | 2 | 1 | 2 | 15 | 11 | +4 | 5 | 3위 |
4 | 스페인 | 6 | 3 | 1 | 2 | 10 | 12 | -2 | 7 | 4위 |
5 | 유고슬라비아 | 3 | 2 | 0 | 1 | 7 | 3 | +4 | 4 | 1라운드 |
6 | 스위스 | 3 | 1 | 1 | 1 | 4 | 4 | -2 | 3 | 1라운드 |
7 | 이탈리아 | 2 | 1 | 0 | 1 | 4 | 3 | +1 | 2 | 1라운드 |
8 | 잉글랜드 | 3 | 1 | 0 | 2 | 2 | 2 | 0 | 2 | 1라운드 |
9 | 칠레 | 3 | 1 | 0 | 2 | 5 | 6 | -1 | 2 | 1라운드 |
10 | 미국 | 3 | 1 | 0 | 2 | 4 | 8 | -4 | 2 | 1라운드 |
11 | 파라과이 | 2 | 0 | 1 | 1 | 2 | 4 | -2 | 1 | 1라운드 |
12 | 멕시코 | 3 | 0 | 0 | 3 | 2 | 10 | -8 | 0 | 1라운드 |
13 | 볼리비아 | 1 | 0 | 0 | 1 | 0 | 8 | -8 | 0 | 1라운드 |
8.1 수상
지지뉴
2위 - 후안 스키아피노(우루과이)
3위 - 아데미르(브라질)
아데미르. 턱이 참 크고 아름답다
2위(5골) – 오스카 미게스(우루과이)
공동 3위(4골) – 치쿠(브라질), 알시데스 기지아(우루과이), 사라[27], 에스타니슬라오 바소라(이상 스페인)
1950년 브라질 월드컵 베스트 11
골키퍼: 로케 마스폴리(우루과이)
수비수: 예리크 닐슨(스웨덴), 호세 파라(스페인), 빅토르 로드리게스 안드라데(우루과이)
미드필더: 옵둘리오 바렐라, 알시데스 기지아(이상 우루과이), 바우에르, 자이르(이상 브라질)
공격수: 지지뉴, 아데미르(이상 브라질), 후안 알베르토 스키아피노(우루과이)
페어 플레이상 – 미국
9 뒷 이야기
- 이 월드컵 개막전과 한국전쟁은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이 월드컵 개막전은 개최국 브라질과 멕시코의 경기로, 현지 시간으로 1950년 6월 24일 15시에 시작되었다. 브라질의 표준시는 한국과는 정확히 12시간 차이. 그로부터 한 시간 후 지구 반대편에서는 인민군 전차가 38선을 돌파하기 시작했다.
- 이 월드컵에서 브라질 정부는 브라질의 축구 열기를 상징하기 위한 메인 스타디움으로 히우지자네이루에 마라카낭 경기장을 짓기로 결정했다. 마라카낭은 세계 최대 수용 인원을 자랑하던 경기장으로 입석까지 합하면 무려 20만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초대형 경기장이었다.[28] 문제는 이 초대형 경기장의 첫 삽을 너무 늦게 뜨는 바람에[29] 이것을 제 시간 내에 짓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는 것. 원래 같았으면 월드컵 기간 내에 짓는 것이 불가능했지만 브라질 정부의 엄청난 지원과 노동자들을 밤낮없이 굴린 덕분에 그나마 월드컵 개막전을 여기에서 치를 수는 있었다. 그러나 완성된 경기장까지는 아니었고, 월드컵 중에도 공사를 계속하여 결국 결승전은 완공 상태에서 치를 수 있었다. 하지만 결승전에서 그 참혹한 비극이 일어날 줄이야...
- 그리고 이 월드컵이 브라질에게는 홈에서 열리는 월드컵은 시궁창으로 망친다는 징크스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 대회에서 마라카낭의 비극을 당하고 64년 후에 이를 극복하려고 했으나 그때보다 몇배는 더 참혹한 대참사를 맞이하고 말았다. 그리고 두 대회 모두 브라질을 쓰러뜨린 팀이 우승을 차지했다.
앞으로 브라질에서 월드컵이 열릴 일은 없을 듯하다.
10 대회 이후
브라질은 우승을 놓치자 브라질 축구계는 물론이고 나라 전체가 비탄에 빠지며 한바탕 거대한 홍역을 치러야만 했다. 마라카낭의 비극을 참고할 것.- ↑ 하지만 팀은 32개이다. 이는 당시 아일랜드의 정세에 의한 것으로 자세한 내용은 지역 예선 항목에 기술되어 있다
- ↑ 즉, 한 선수가 다른 경기에 그대로 뛰어도 포지션이 바뀌면 등번호가 바뀌는 식이었으며 선수가 바뀌어도 포지션은 같은 다른 선수가 스타팅 멤버에 오르면 등번호는 바뀐 선수가 그대로 사용하는 식. 이후 1958 FIFA 월드컵 스웨덴 대회에서 월드컵에 데뷔한 펠레가 이런 식으로 등번호 10번을 부여받았는데, 그 이후 펠레가 눈부신 활약을 선보이면서 세계를 주름잡자, 등번호 10번은 지금도 축구에서 에이스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등번호가 된다.
- ↑ 설령 인도와의 티켓 경쟁에서 이겨서 브라질에 갔다고 해도 더 복잡한 내부 사정 때문에 기대만큼의 성적을 거뒀을리는 만무하다
- ↑ 1942년에 세계대전이 없어서 월드컵이 열렸다고 가정한다면 당시 개최지 투표에서는 독일과 브라질이 월드컵 개최를 놓고 다투었겠지만 이전 두 대회를 유럽에서 개최했기 때문에 브라질 쪽이 확률이 더 높긴 했다
- ↑ 일본은
개털이였던 한국에도 질 정도로축구실력이 형편없었으니 아쉬울게 없지만 서독은... - ↑ 그런데 희한하게 독일이 없는 이 두 번의 월드컵에서 모두 우루과이가 우승했는데 우루과이는 이 두 번 밖에 우승을 못했다.
우루과이가 우승하기 위해서는 독일을 지역 예선에서 탈락시켜야 한다징크스를 잘 찾아보면 이런 징크스도 있다 - ↑ 유로 2012의 독일의 경우 바이에른 뮌헨의 선수들을 과반수 차출했다
- ↑ 2010 월드컵의 그리스의 경우 파나시나이코스 FC의 선수들을 과반수 차출했다
- ↑ 1949년에 일어난 이 사고는 사고가 일어난 장소의 이름을 따서 수페르가의 비극으로 유명한데, 이 당시에 사망한 선수 중 가장 아까운 이로는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플레이 메이커 발렌티노 마촐라를 꼽을 수 있겠다. 60년대에 이탈리아와 유럽을 주름잡았던 '위대한 인테르(La Grande Inter)'의 주축 플레이 메이커 산드로 마촐라의 아버지이다
- ↑ 이 사고로 인해 이탈리아 축구의 운명이 완전히 바뀌었다. 이탈리아가 이를 완전히 만회하기까지 20년에 가까운 시간을 써야 했으며, 이로 인해 1군 선수를 몽땅 잃은 토리노는 리그의 주도권까지 같은 연고지를 쓰는 유벤투스에게 넘겨주게 된다
- ↑ 이 난투극의 시작점은 브라질의 공격수 자이르가 아르헨티나의 주장 호세 살로몬의 다리를 부러뜨린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관중들이 난입하였고 경찰이 나서서 소요를 진정시킨 후에야 다시 경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호세 살로몬은 당시 29살이었고, 이 태클로 인해 다시는 전성기의 기량을 회복할 수 없었으며 결국 1년 후에 은퇴하게 되었다
- ↑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아일랜드 북부지방-현재의 북아일랜드
- ↑ 예를 들어 하프 월터 바르-Walter Bahr는 고교 교사, 골키퍼 프랭크 보기-Frank Borghi는 삼촌의 장례식장에 고용된 영구차 기사. 다른 사람들도 접시닦이, 우편배달부 등등 다양한 직업이 있고 이 중 상당수는 대학생들이었다
- ↑ 그 잉글랜드전에서 잉글랜드를 격침시킨 이변의 중심에 선 조 게이텐스는 원래 아이티 사람이었다.
- ↑ 1953년, 자신들의 홈이자 축구의 성지라 일컬어지는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유니폼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놈들'에게 6-3으로 패하고 멘붕에 빠진 사건이다.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유럽 대륙의 팀에게 처음으로 패한 사건이었으며 그것도 대패의 굴욕을 받았다. 6개월 뒤 복수를 하겠다며 원정을 떠나서는 7-1로 개발렸다. 그게 바로 1950년대 축구계를 평정했던 페렌츠 푸스카스의 매직 마자르, 헝가리 대표팀이었다
- ↑ 이는 이 월드컵 이후에 북아일랜드가 정식 출범하고 나서 해결 되었다
- ↑ 현재는 한 축구 선수가 단 한 번이라도 성인 대표팀에 출전하게 되면 다시는 다른 나라의 대표팀 선수로 뛸 수 없다
- ↑ 톰 아르네, 렉 라이언, 데비 월시, 콘 마틴
- ↑ 이전까지는 맨발로 축구를 했으며 이 때문에 1948년 올림픽에서도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어떤 보고서에서는 인도가 브라질까지 갈 돈이 없어서 기권했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BBC 스포츠 참고자료
- ↑ 그 1경기도 안방경기였다
- ↑ 터키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당시 터키는 총비상이었다. 소련과의 국경에 20만 가까운 병력을 배치하고 만반의 준비를 다하고 있었다
- ↑ 미나스 제라이스 주 소재. 세체 지 세템브루는 브라질의 독립 기념일인 9월 7일을 의미한다. 현재의 이름은 인디펜덴시아
- ↑ 당시 개막전과 결승 최종전을 치렸던 그 경기장이며 우루과이의 센테나리오 경기장, 아르헨티나의 엘 모누멘탈과 함께 남미 대륙을 대표하는 경기장이다. 2014년 월드컵에서도 메인 스타디움으로 쓰였다
- ↑ 그런데 RSSSF에서는 4조에 터키와 스코틀랜드가 배정되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 ↑ Zizinho. 풀 네임은 Thomaz Soares da Silva. 펠레의 어린 시절 우상으로 더욱 유명한 선수이다. 마라카낭의 비극만 아니었어도 역대 최고 선수 반열에 오를 정도로 뛰어난 선수였고 공격수로서 필요한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는 만능형 선수. 특히 드리블에 있어서는 당시에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며 아르헨티나의 호세 마누엘 모레노와 함께 40년대 남미 축구를 양분하던 대선수였다
- ↑ 풀 네임은 Ademir Marques de Menezes. 1950년 월드컵 당시 브라질의 간판 스트라이커. 총 A매치 출전 기록은 39경기 32골로 아직도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의 역대 득점 랭킹에서 9위에 랭크되어 있다
- ↑ 라 리가의 스페인 국적 선수 중에서 득점 1위에게 주는 텔모 사라상의 모델이 바로 이 사람이다. 라 리가 역대 최다 득점도 갖고 있는 아틀레틱 빌바오 출신의 레전드
- ↑ 현재는 입석이 금지되고 개보수를 거치면서 78,838석의 좌석을 가지고 있다. 그래도 수용 인원이 이 정도면 충분히 대형 경기장이다
- ↑ 1948년 8월 2일에 떴다. 월드컵 개막에는 2년도 채 남지 않은 상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