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개요
1956년 하필이면 병신년이다 8월에 김일성이 권력을 독차지하기 위해서 정적들을 반동분자로 몰아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지금의 북한을 독재체제로 존속시킨 결정적인 사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나라인 주제에 조선을 계승하지도 않았으며 민주주의도 아니고 인민을 위하지도 않을 뿐더러 공화국도 아니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다.
정확하게는 김일성이 한국전쟁에 대한 자기의 책임을 회피하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권력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 일으킨 숙청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2 배경
2.1 사건 이전까지의 북한 정부의 권력구도
초기의 북한 정권은 김일성을 지도자로 하는 조선로동당 일당독재정권은 맞지만,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지금하고 많이 달랐다. 조선로동당은 출신 배경과 성향이 다른 여러 좌익계 세력들이 소련의 강요로 합병해서 출발한 정파연합정당[1]으로 사실상 이때의 정부 구성은 연립정부에 가까웠다고 보는 게 맞다.
- 만주파(혹은 만주빨치산파)
- 김일성, 김책, 최용건 등 1930년대 만주에서 항일독립운동, 무장빨치산 활동을 했던 그룹. 이들은 코민테른의 1국1당 원칙에 의거해서 중국 공산당에 입당한 후에 중국인과 조선인들의 연합 항일무장부대인 동북항일연군 소속으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조선인민혁명군을 결성하고 무장투쟁에 나섰다. 동북항일연군 소속이었긴 하지만, 항일연군 자체가 이름에서 볼 수 있듯 만주 지방에 군웅할거하던 수많은 항일 무장세력의 연합체 같은 거여서, 일방적인 지휘계통은 아니었다.[2][3]
나중에 흑화되어 그렇지 이때까지만 해도 이들은 애국적 열정으로 독립운동을 했다이들은 만주지역의 조선인 밀집 지역을 중심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다가 보천보 전투, 간삼봉 전투를 주도했고, 1930년대 말 일본군의 빨치산 토벌이 격화되자 1940년을 기점으로 차츰차츰 소련령 연해주로 피신하였다. 김일성이 1940년에 가장 먼저 넘어갔고, 김책이 1943년도에 가장 늦게 월경하였다. 이후 소련군 88국제여단에 편입되고 장교 계급을 받고 군사 훈련을 받다가, 일제가 패망하고 소련군이 한반도 북부를 점령하자 1945년 10월 소련군 장교 신분으로 북한에 들어왔다. 중요한 사실은 이들은 단 한 번도 독자적으로 활동한 적 없으며 항상 중국공산당원들과 함께였다는 것이다. 만주에서 빨치산 활동을 할때도, 이후 연해주로 피신해서 소련군 88국제여단으로 편성되 있을때도 조선인과 중국인이 섞여있었다. 일제가 패망하자 88여단 소속 중국공산당원들은 중국공산당으로 복귀해서 2차 국공내전에 뛰어들고, 조선인들은 소련군을 따라서 북한에 들어온 것이다. 지금까지 이어지는 조중군사동맹은 이런 오래된 역사적 뿌리가 있는 것이다. 이후 소군정의 후원하에 조선로동당과 조선인민군의 핵심을 차지했고 김일성은 내각 수상으로 실권을 장악한 상태였다.
- 1930~40년대 한반도 북부 지방에서 활동했던 그룹. 이들 상당수가 함경도 갑산 출신이라 '갑산파'라고 칭한다. 이들은 일제강점기 내내 만주파와 연계해서 활동했고 해방 후에도 만주파와 함께 했기 때문에 크게는 만주파의 일부로 본다.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이들은 일제강점기 동안 김일성이 지도했다는 조국광복회의 산하조직인 갑산공작위원회에서 활동했다고 한다.[4][5] 빨치산이 만주파의 직계라면 이쪽은 방계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이 갑산파 그룹은 계속되는 권력 투쟁에서 언제나 김일성을 지지했기 때문에 아래 서술되는 다른 세력들이 모두 숙청된 이후에도 한동안 권력 핵심부에 존재하였다. 그러나 1967년 경제건설 노선에서 이견을 보이다가 결국 숙청되고 만다. 갑산파 항목 참조. 이들이 사라지고 나면서 북한 정권에는 김일성의 친인척과 빨치산 시절 직계 부하들만 남게 된다. 견제자가 사라진 완벽한 김일성 1인독재가 완성된 것이다.
- 연안파(혹은 중공파)
- 김두봉, 무정처럼 항일 전쟁과 국공내전에 참여하면서 중국 본토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했던 그룹. 이들의 상당수는 1930년대 말부터 조선독립동맹, 조선의용군 등으로 활동하면서 중국 공산당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 있거나, 혹은 무정처럼 아예 중국 공산당 간부로 활약하였다. 단 김원봉의 조선의용대는 중국국민당의 지원을 받았다. 그 때문에 국공내전기 중국 공산당의 수도였던 연안의 이름을 따서 연안파라고 부른다. 김두봉은 이 당시 북한의 국가원수였다.
- 소련파
- 박창옥, 허가이, 이상조, 남일 등 소련 출신 그룹. 주로 중앙아시아와 연해주의 고려인 2, 3세들로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하면서 말이 통하는 소련 공산당원을 찾다보니 북에 들어온 사람들이다.
- 남로당파(혹은 국내파)
- 박헌영과 이승엽 등 일제강점기 시절 국내에서 항일운동 및 공산당 활동을 했던 그룹. 이들은 일제 패망 직후 조선공산당을 재건하여 정예당원 10만, 방계조직 100만이라고 자칭할 정도로 엄청난 세력을 자랑하면서 1945년 9월, 조선인민공화국 수립 선포를 주도하였다. 이후 다른 좌익계 정당인 남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과 통합하여 남조선로동당 약칭 남로당을 만들었다. 박헌영이 주도하던 이 그룹은 애초에 우익 및 미군정과의 협력관계를 유지하였으나, 모스크바 3상회의 이후 전면적인 찬탁 노선을 채택하면서 대중적인 입지가 좁아지게 되고, 미군정의 통치가 굳건해지자 전면 총파업과 무장봉기 등 강경 노선을 채택하였다가 실패한다.[6] 결국 남조선로동당이 불법화되자 박헌영, 이승엽 등 지도부와 정예당원 수천여 명이 집단 월북하였다.[7]
이렇게 여러 정파가 소군정의 압력으로 한데 묶인 것이 바로 조선로동당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6.25 전쟁까지만 해도 서로를 견제하고 있긴 했으나 전시상황이었기에 별다른 충돌 없이 각자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전쟁 이전이라고 그렇게까지 잘 지냈던 건 아니다. 일례로 무정은 '중위나 대위 달고 들어온 놈들이 무슨 장군이냐!'는 말을 할 정도로 위세가 대단해 김일성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실력자였지만 전쟁 전에는 김일성의 견제로 인해 스스로의 영향력만큼의 지위에 오르지 못했고 심지어는 전쟁 중에 낙동강 공략 실패와 평양 방어 실패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숙청 당하기까지 했다. 어디까지나 이후의 상황에 비해서는 비교적 잘 지냈단 이야기.
정전 협정 직후 총성이 멈추자 각 "파" 들의 북한에서 권력을 가지기 위한 치열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각 파벌별로 노선적, 사상적 차이도 엄청났는데, 간단히 요약하자면 연안파는 모택동식 신민주주의를 지지하는 경향이 있었고, 소련파는 당초 소련식 스탈린주의를 지지하다가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격하운동 이후 현실사회주의적 집단 지도체제를 지지한다. 전후 경제 재건 때도 만주파는 급속한 협동농장화를 주장하고 중공업을 중시했지만, 소련파와 연안파는 자영농 허용, 경공업/소비재 위주의 경제 건설을 주장했다.[8] 이러한 이유로 인해 김일성을 비롯한 각 세력들이 서로를 물어뜯으며 발생한 것이 바로 8월 종파 사건이었다.
2.2 비 소련파인 김일성이 수반이 된 이유
당시 세력별 힘의 크기는 군정시절 내세운 김일성이 북한 정부의 수반이었고 가장 권력도 강했다. 하지만 초기 북한에서의 김일성 권력은 그다지 확고하지 못했다. 김일성이 최고 지도자이긴 했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북한 정권 성립된 이후부터 그의 만주빨치산 그룹, 그리고 그들과 연합한 갑산파는 허가이의 소련파, 무정과 박일우의 연안파, 박헌영과 이승엽의 남로당파 등 수많은 파벌의 견제에 시달리고 있었다.
가만히 보면 김일성은 소련파가 아니였는데 소련에서 김일성을 최고지도자로 내세웠다. 그 이유는 소련파에는 인지도가 높은 최고지도자감의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소련파의 상당수는 구한말과 일제시대 초기 연해주로 건너갔다가 1930년대 중앙아시아로 끌려간 고려인들의 2세들로, 소련군이 북한이 진주하면서 말이 통하는 소련공산당원을 급하게 찾다보니 이들을 데려온것이다. 이때문에 소련파 인사들은 국내 기반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고려인 2세들이다 보니 조선말이 통하기는 하지만 서투른[9] 인물들도 많았는데, 대표적인게 바로 소련파의 대표격인 허가이였다. 고려인 2세가 아니라 1930년대부터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인물들도 있지만 대중적인 인지도가 너무 떨어졌다. 아무리 그래도 일국의 최고지도자를 대중들이 전혀 모르는 생뚱맞은 인물을 세울 수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소련파는 소련공산당 내부에서도 그렇게 명망이 높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쉽게 말해 사상, 행정, 실무 모든 면에서 A급은 아니었다는 이야기. 대체로 북한에 들어온 소련파를 추적해 보면 고급 당료나 고급 장교는 거의 없고 기껏해야 하급 관료나 위관급 장교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전면에 내세울 수가 없었다. 인지도도 떨어지고 지위나 경력, 능력 모든 면에서 부족한 이들을 내세운다는 것은 조선인들에게 반발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소련군정측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이렇기 때문에 소련파가 북한 정권을 주도할 경우 노골적인 괴뢰정권의 모양새가 되기 때문에 당시 조선인들의 지지를 받기 힘들다는 점을 우려했다. 소련파는 북한 내에 물적, 인적 기반이 전혀 없고 오로지 소련의 지원이 있을 때만 정치적 힘을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말 그대로 소련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하면서 소련의 후원으로만 연명하는 괴뢰정권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이다. 훗날 아프카니스탄의 친소 정권이 이런 식으로 굴러가다가 1989년 소련군이 철군하자마자 무자헤딘 반군의 공격으로 바로 몰락하였다. 그리고 그 뒤에 탈레반의 헬게이트가...
따라서 소련군정에선 이들 대신 그나마 이름이 알려진 김일성과 박헌영을 최고지도자의 후보로 두고 계속 민심을 살피다가, 만주 지역의 항일빨치산 활동과 보천보 전투 등으로 많은 명성을 쌓고 있던 김일성과 만주빨치산파를 권력 핵심으로 세운 것이다. 대신 소련파를 선전과 언론부서에 집중 배치해서 만주파를 견제하게 한다.
어차피 김일성, 김책, 최용건 등 만주빨치산파 계열도 1940년대에 연해주로 넘어가 소련군의 보호하에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소련군 극동88여단에 편입되서 장교 계급을 받고 한반도 침투를 위해 군사훈련을 받다가 해방을 맞이하였다. 김정일이 이 시기에 하바로프스크에서 태어났다. 북한에선 백두산 밀영에서 출생했다고 조작했지만. 참고로 김일성이 1940년에 연해주로 월경하고 김책이 1943년에 가장 늦게 넘어갔다.
원래 소련은 동유럽에서 위성정권을 세울 때도 결코 소련계 동유럽인을 머리로 내세운 적은 없고 대체로 소련과 연줄이 있는 현지의 공산주의자를 내세웠다. 이런 의미에서 소련이 북한 지역에서 이름이 잘 알려져 있고 소련과도 연줄이 있는 김일성을 내세운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10][11]
그리고 소련의 후원하에 정권을 장악한 김일성은 박헌영파의 지지를 얻어 한국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2.3 무정과 박헌영의 숙청
그러나 북한 지도부의 기대와는 달리 초반에 잠깐 승승장구하다가 미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완전히 뒤집혀서 오히려 멸망 직전까지 몰렸다가 중공군의 참전과 소련의 지원으로 간신히 패전위기에 벗어난다. 이제 궁지에 몰린 김일성 정권은 실패에 대한 책임추궁으로 권력 기반이 약화될 것을 우려하기 시작했다. 이때문에 실패의 책임을 씌우기 위한 희생양을 찾기 시작했고 여기에 대상으로 떠오른게 박헌영과 남로당파였다. 김일성 정권은 한참 전쟁이 진행중이던 1951년에 이미 박헌영을 체포하고 권력의 핵심부에서 남로당파 간부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이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이 중국인민지원군 수십만이 북한에 주둔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과 연계된 연안파를 정면공격하는건 힘든 일이고, 또한 소련군정이 직접 심어두고 간 소련파 간부들도 마찬가지였다. 반면에 남로당계는 인원은 상당하고 국내 기반은 튼튼했지만, 외부 후원자는 전무했다는 점에서 가진 건 많은데 지킬 힘은 없는 처지에 빠진 셈이다.
게다가 박헌영은 김일성에게 "조선인민군이 진격을 개시하면 남조선에 남아 있는 과거 당원들과 좌익계 대중들이 들불처럼 봉기해서 인민군을 도울 것"이라고 호언장담했지만, 그런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이 호언장담이 김일성 정권이 남침을 결정하는데 영향을 준게 사실이기 때문에 박헌영과 남로당계도 전쟁실패의 책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12] 때문에 실패의 책임을 뒤집어 씌우기도 손쉬웠다.
더욱이 남로당계의 지도자였던 박헌영의 경우 해당 시기 김일성을 아득히 능가하는 개인 숭배의 대상이였다. 오늘날 개인 숭배라고 하면 김일성을 생각하지만, 이 당시에는 박헌영에 대한 개인 숭배가 훨씬 심했다. 일제강점기부터 공산주의 운동의 실질적인 지도자인데가, 끝까지 일제에 굴복하지 않고 강고하게 투쟁했다는 점 때문에 국내 지식인 계층의 지지를 광범위하게 받고 있었다.[13] 해방 직후 서울 시내에 "박헌영 동무는 우리의 부름에 답하라" 라는 전단이 나붙을 정도였다. 월북 후에도 사무실에 박헌영 사진이 걸리는가 하면 박헌영 지지자들이 박헌영 선집을 발간해 바칠 정도였다. 특히 분단 이후 월북한 남쪽 출신 공산주의자들이 유일하게 의지할 만한 지도자였다는 점에서 개인 숭배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 점에서 조직적인 세력화를 통해 김일성에게 맞서기 시작한다면 김일성의 입장에서는 심각한 위협이 되었을 가능성도 컸다.
또한 김일성은 항상 눈엣가시로 생각하던 연안파의 거두 무정 또한 낙동강 전선에서의 패배와 평양 방어 실패의 책임을 뒤집어 씌워서 중공군이 참전하기 직전에 숙청해버렸다. 김일성이 무정을 밀어내는 과정은 하나의 블랙 코미디였다. 무정이 평양 방어는 무리라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이 억지로 평양 방어를 떠맡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일성은 평양이 함락당하자 방어사령관이 책임져야 한다며 무정을 실각시켰다. 어쩌라고 하지만 무정은 처형당한 것이 아니라 인민군 죄수부대장을 지내다가 8로군 시절부터 무정의 전우들이 많았던 중국측의 요구로 중국으로 망명했으며, 그곳에서 병사했다고 전해진다.
이런 식으로 전쟁중에도 김일성은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하였고, 전쟁이 종결된 이후에는 미제침략자들에 맞서서 자신들이 승리한 전쟁이라고 강변하면서 권력을 계속 강화해 나갔다.[14] 여기에 스탈린 우상화를 따라한 김일성의 개인 숭배 현상과 맞물려서 김일성파의 권력은 더욱 더 커져만 갔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연안파와 소련파는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고 이들은 김일성의 강력한 정적이었다. 연안파와 소련파는 각각 중국과 소련의 후원 아래 김일성을 견제하였고 김일성 또한 이들의 움직임을 주시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당과 내각, 그리고 군을 점점 장악하여 갔다.
박헌영파에 눈에는 김일성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기억자도 모르는 무식쟁이 무장단체 두령, 연안파의 눈에는 자신들이 중원에서 수백만 국민당군과 교전할 때, 만주 산구석에서 수백명을 데리고 장군놀이하던 인물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김일성의 카리스마나 권모술수, 조직장악력은 절대로 만만히 볼 만한 것이 아니었다. 연안파, 소련파, 남로당파 내부에서조차 배신자가 나와 김일성파에 가담하여 김일성의 정권 장악에 일조했다. 예를 들어 총참모장 남일이나 내무상 방학세 같은 경우는 소련파였으나, 김일성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옛 동지인 소련파에게 총부리를 돌렸다.
3 갈등 원인
3.1 전후 복구 방향에 대한 이견
북한은 한국전쟁 당시 UN군의 폭격으로 폐허가 되어있었다. 중요 도시인 평양, 원산을 비롯해 각종 인프라 시설들이 폭격으로 인하여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북한은 종전 직후부터 사회주의 국가들, 주로 중국의 원조를 받아 전후 복구를 시작하게 된다. 그런데 이 전후 복구, 특히 산업 발전의 방향을 두고 김일성과 반대파의 의견이 대립하였다.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만주파는 소련과 같은 중공업 산업 위주의 전후 복구를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에 비해 소련파와 연안파는 당장 인민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경공업 산업 위주의 전후 복구를 추진해야 함을 역설한다.
만주파가 중공업 중시 정책을 제안한 건 빠른 군비 확장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경공업을 발전 시킬래야 발전 시킬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소련이 위성국가들의 경공업 발전을 최대한 막았기 때문인데, 경공업은 중공업의 기반이 되므로 공업 분야에서 확고한 헤게모니를 쥐려는 소련이 각 위성국가들의 경공업 발전을 은근히 막았다는 데 있다.
어찌되었든 경제 정책에서의 이러한 대립은 권력 투쟁의 한 부분으로서 두 입장은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3.2 소련 공산당의 스탈린 개인 숭배 비판
이오시프 스탈린의 집권시에는 스탈린의 개인 숭배가 추진되었고 스탈린은 신격화되었다. 그러나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가 등장하면서 흐루쇼프는 스탈린 개인 숭배를 비판하고 스탈린의 신격화는 중지된다. 이후 소련 지도부는 집단 지도 체제를 형성하면서 자본주의 세력과의 관계 개선을 꾀하게 되었고 '너 죽고 나 살기' 식의 극단적인 권력 투쟁의 형태는 많이 약화되었다.
소련은 공산주의 세력의 리더로서 자의 반 타의 반 다른 공산주의 국가들에 큰 영향을 미치는 위치에 있었다. 소련 공산당의 변화는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해 가던 김일성에게는 엄청난 위협이자 위기였다. 반대로 김일성의 숙청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반대파에게는 김일성을 비판하고 실각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3.3 중국과 소련의 영향력
중국은 한국전쟁 당시 막대한 물자와 군사력을 북한에 지원하였기 때문에 연안파를 통하여 북한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게다가 1958년도까지는 전쟁 방지라는 명분하에 중공군도 북한 내에 진주하고 있었다. 또한 소련은 한국전쟁 당시 방관의 자세로 북한에게 많은 실망을 안겨주기는 했지만 부인할 수 없는 세계 초강대국이자 공산주의 세력의 리더였다. 즉, 북한은 중국과 소련의 내정간섭을 일정 부분은 피할 수 없었다.
당시 중국과 소련은 김일성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일단 김일성이 중국과 소련의 분열을 이용하여 양쪽을 오가면서 삥을 뜯었고 덕분에 북한은 엄청난 외교적 이득을 보았다. 이들은 이런 김일성을 "배은망덕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1970년대까지 소련으로 하여금 "우리 말 더럽게 안 듣는 동쪽의 작은 나라"라는 인식을 갖게 하고 그럼에도 남한에서는 '괴뢰'라고 부른 게 함정 1980년대에는 변화하지 않는 북한을 두고 조롱거리로 삼기까지 이른다. 박노자의 말에 따르면 당시 많은 가정에서 북한의 선전책자를 구독해서 유머 잡지처럼 활용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세계적인 북한 전문가인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는 소련은 북한을 동맹국으로 인식한 적이 없으며 소련 지도층은 북한을 매우 싫어했다고 증언했다. TV조선의 모란봉 클럽이란 프로그램에 출연한 란코프 교수는 당시 소련에서의 북한에 대한 인식은 이상하고 웃긴 나라, 미친 독재국가였다고 발언했다. 그래서 김일성 대신 각각 자신들과 친밀한 인사들이 정권을 잡았으면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중국과 소련은 김일성의 반대파인 박헌영과 최창익, 김두봉 등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박헌영은 모스크바의 국제레닌대학을 졸업하고 소련에서도 활동하였으며 '조선의 레닌'이라는 말까지 있었을 정도로 국제적으로도 명망 있는 공산주의자였다. 소련과 중국은 여러 차례 박헌영을 죽이지 말고 중국 또는 소련으로 보낼 것을 김일성에게 요구하였는데 김일성은 눈치를 보다가 결국 박헌영을 제거해버렸다. 김무정은 숙청된 후 중국의 요청으로 인하여 중국으로 보내졌다. 나중에 마오쩌둥은 김일성이 중국과 상의도 없이 연안파를 대거 숙청한 것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4 전개
위에서 서술한 소련공산당에서의 스탈린 개인 숭배 비판 이후 김일성의 반대파들은 이러한 변화에 힘입어 1956년 4월에 예정되어있던 조선로동당 3차대회에서 김일성 개인숭배 비판과 당 운영의 민주화가 논의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개인숭배 움직임과 관련하여 오히려 엉뚱하게 개인숭배를 박헌영의 책임으로 뒤집어 씌우며 자아비판을 거부했다. 게다가 중공업 위주의 정책노선은 수정되지 않았으며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이러한 조선로동당 3차대회를 소련공산당은 비판하면서 이를 정식 대회로 간주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정리하였다.
이러한 결과에 김일성의 반대파들은 실망하고 점차 반김일성 운동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김일성이 동유럽 순방을 위하여 북한을 비운 사이 연안파와 소련파는 소련의 지지 하에 연합하여 김일성 실각이라는 목표 달성을 위해 연합한다. 그리고 그 전면에는 최창익, 윤공흠, 서휘 등의 연안파가 나서게 되었다.
소련은 전면적으로 김일성 정권을 전복하려는 움직임을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당시 소련 대사가 최창익 등 연안파의 주요 지도자들을 만나면서 은연중에 반김일성 운동을 부추겼다. 다만 소련이 전면에 나섰다는 느낌을 주지 않기 위하여 소련파가 전면에 나서지는 않게 하였고 연안파를 전면에 내세워 집단지도체제를 구축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김일성 반대파의 움직임은 최용건을 필두로 한 김일성의 심복들에게 포착된다. 최용건은 반대파의 움직임을 즉시 김일성에게 알렸고 김일성은 소련대사관에 박정애와 남일을 파견하여 소련에게 더 이상 반대파 인사들과 접촉하지 말 것을 권고하는 등 자신에 대한 반대 움직임을 무마하기 위하여 치밀하게 준비하고 계획한다.
여기서 김일성이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 중의 하나가 김일성파의 조직력이었다. 다른 계파들, 즉 소련파는 아예 구심점이 존재하지 않았고 연안파는 그만그만한 지도자들이 많은 데다가 남로당파는 박헌영 및 남로당 쪽 지도자들이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서 거의 와해 직전이었다. 이 반면 김일성파는 만주 빨치산 시절부터 김일성을 정점으로 똘똘 뭉쳐있었기 때문에 이런 권력 투쟁시에 다른 계파에 비해 전투력이 강했다. 이럴 때만 쓸데없이 능하다
김일성에 대한 반대파의 공개적인 도전은 1956년 8월 30일 열린 당 중앙위원회 8월 전원회의에서 이루어졌다. 먼저 발언한 김일성의 지지파들은 서휘와 윤공흠이 책임자로 있던 직업동맹과 상업성을 비판했는데, 이는 김일성 지지파가 반대파의 중심인물들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들의 반대 움직임에 대비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후 윤공흠이 김일성을 비판하기 시작하였는데 윤공흠은 김일성의 개인 숭배를 비판해야 하는 핵심을 벗어나 김일성의 간부정책 비판으로 방향을 벗어나게 된다. 이는 김일성 지지자들이 다수였던 전원회의 참석자들을 자극하였고 윤공흠은 이들에 의해 억지로 단상에서 끌려내려오게 된다. 중국으로 망명한 서휘는 윤공흠이 김일성의 간부들, 특히 당시 당 간부들의 신망이 높았던 최용건을 강도 높게 비판한 것은 '비정치적 과오' 였다고 생전의 회고에서 밝히고 있다.
회의장의 살벌한 분위기를 체험한 윤공흠과 서휘 등 연안파 인사들은 회의장을 빠져나와 자동차를 타고 중국으로 망명하기 위하여 신의주로 향한다. 이들의 탈출은 김일성 반대파들의 권력투쟁에서의 패배를 뜻하는 것이었다. 오후에 계속된 회의에서 김일성 지지파들은 반대파를 강도 높게 비판했고 반대파의 대표였던 최창익은 "당의 노선에는 문제가 없으나 개인 숭배의 움직임에는 문제가 있다" 고 발언했지만 이미 대세는 기운 후였다. 소련파인 박창옥은 "자신은 어떤 그룹과도 연결되어 있지 않다" 고 발언하였지만 주석단과 회의장에서의 항의가 들끓어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결국 서휘와 윤공흠, 리필규는 출당 조치되고 최창익과 박창옥의 당직은 박탈되었다. 동시에 최창익과 박창옥은 내각부수상직 등의 정부 직위도 박탈되었다. 즉, 반대파의 정치적 숙청으로 결과가 도출되었던 것이다. 김일성에 대한 조직적인 반대운동이었던 8월 종파사건은 이렇게 김일성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5 결과
8월 전원회의의 조치는 즉시 중국과 소련에 알려졌다. 중국에 망명한 서휘와 윤공흠, 그리고 당시 주소 북한대사인 이상조 등은 중국과 소련에게 북한에 개입하여 이러한 결과들을 수정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중국과 소련도 이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여 아나스타스 미코얀과 펑더화이를 단장으로 하는 무시무시한 연합 대표단을 파견, 김일성에게 8월 전원회의의 조치를 철회하고 관련자들을 다시 복권시켜줄 것을 요구하였다. 미코얀은 소련의 총정치국 부서기장으로 러시아 혁명을 눈으로 본 사람이기도 했으며, 헝가리 등 동유럽의 민주화 바람을 잠재우고 마오쩌둥 단일 주석 체제를 집단 지도 체제로 바꿀 겸 중국에 왔다가 겸사겸사 방문한 것이었다. 중국 측의 펑더화이는 한국전쟁의 조중연합군 총사령관이자 마오의 오른팔이었으며, 무엇보다 김일성과 사이가 무척 안 좋았다. 이런 거물들이 파견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당시 소련과 중국이 얼마나 진지했는지는 자명하다.
사실 여기에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하나 있다. 중국과 소련이 회담을 하는데, 독재 체제를 계속 유지하는 중국을 못마땅하게 여긴 소련이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과 관련, 독재 체제는 무너져야 하며, 집단 체제로 바뀌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중소회담 내내 언급했다. 사실 중국 입장에서도 체제의 근간을 흔드는 말들이었기에 맨 처음 어느 정도는 말을 맞받아쳤다. 하지만, 소련의 회담 상대 미코얀은 위에도 상술하였다시피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이었고, 결과적으로 전혀 게임이 안되었다. 덕택에 소련에 의해서 독재 체제에서 집단 체제로 바뀐 전례가 있던 중국은 이날 또 털렸다. 그렇다고 중국 입장에서는 소련을 어떻게 할 수도 없었으니 화가 머리 끝까지 날 만했다. 그런데, 그 회담 바로 뒤에 연달아서 중국과 북한이 면담을 했... 잔뜩 화난 중국은 다음날 비행기로 북한으로 미코얀과 같이 방문하겠다고 선언했고,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김일성은 미코얀과 펑더화이가 참석한 9월 전원회의에서 자신에게 과오가 있음을 인정하기보다는 최창익과 박창옥의 죄를 입증하고 자신이 취한 조치가 정당했음을 보여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주한미군과 한국전쟁으로 대폭 증강된 한국군이 건재한 상황에서 김일성은 동맹국들의 요구를 거절할 상황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방문단의 포스가 너무 강력했다. 결국 김일성은 굴복, 최창익의 출당 조치를 철회하는 굴욕을 겪고 자중하는 모양새를 펼친다.
하지만, 실질적인 복권 절차는 차일피일 미루면서 시간을 끌었다. 윤공흠과 서휘 역시 중국으로 망명한 반대파들 또한 김일성의 박해가 두려워 귀국하는 것을 거부하였으며 그들은 이후에도 계속 중국에 머물렀다. 이런 상황이다보니 김일성은 도리어 소련과 중국을 등에 업고 자신에게 반대하던 반대파들을 회유하는 한편 반대파의 완전한 제거를 위하여 '반종파투쟁'을 강도 높게 추진하였고 이 과정에서 김두봉, 오기섭, 류축운 등이 현직에서 해임되는 등 1957년 여름까지 200여 명의 반대파 인사들이 '종파주의자'로 체포되었다. 그리고 종파주의자들에 대한 책임을 물어 김두봉을 국가 주석의 자리에서 내쫓는 등 실각시킨다.
이후 1958년, 소련과 중국이 공산권의 헤게모니를 놓고 충돌하면서 김일성의 단일 체제 수립은 더욱 심화되었다. 소련과 중국 모두 동맹국들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 여념이 없었고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 사이에서 줄타기 협상을 벌이며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원시적 형태의 주체사상이 처음 등장한다. 중국과 소련 외세의 영향력을 거부하고 어디까지나 우리의 관점으로 주체적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강대국에 흔들리지 않는 외교 자체는 옳은 것이다. 하지만 이걸 사회의 모든 분야에 확대시키면서 정교하고 이상한 방향으로 사상을 짜맞추기 시작해서 결국 1970년대에 가면 김일성 개인 숭배와 세습을 정당화하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완전히 대체한다. 90년대에서 2000년대에 들어 북한은 공산주의 국가임을 표방하면서도 마르크스의 서적은 금서로 지정했고 김정은 정권이 들어선 지금은 아예 공산주의도 부정하고 있다.
결국 김일성은 중국과 접촉해 지지를 약속하는 대신 북한에 주둔 중이던 중공군을 철수시키고 펑더화이의 내정간섭에 대한 사과를 받아내는 엄청난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이로써 김일성 반대파를 지킬 방패막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미코얀과 펑더화이의 개입으로 목숨을 부지했던 최창익과 박창옥은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숙청당했고 기타 김일성 반대파들 역시 비슷한 말로를 맞이했다. 이러한 숙청은 1960년까지 이어졌고 김일성의 숙청을 피하여 중국으로 도망친 사람의 수만 1천여 명에 달했다.
즉, 중국과 소련은 김일성을 막기 위하여 내정간섭까지 했지만 김일성은 이를 견뎌내고 자신의 위치를 굳건히 지켰다. 오히려 김일성은 더 많은 반대파들을 숙청, 제거하여 자신의 위치를 공고화하고 주체사상을 결합시켜 자신을 완벽하게 신격화하는 데 성공한다.
6 숙청, 또 숙청
김일성은 자신에 대한 맹목적인 지지자가 아니라면 같은 파벌인 갑산파라고 해도 숱하게 숙청하였으며 자신의 충복이었던 자들도 권력 유지에 방해가 된다고 여겨지면 무자비하게 숙청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김일성의 심복이었던 김광협.
김일성 반대파의 대표나 다름없었던 최창익은 완전히 숙청되어 정치범수용소에 수용되어 일생을 마쳤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그의 먼 친척까지 정치범수용소에 수용되거나 시골로 강제 이주당하는 등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피해를 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떤 탈북자는 자신이 최창익의 재종손녀인데 최창익의 재종질인 아버지는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 생사를 알 수 없고 자신은 다행히 어머니의 출신 성분이 좋아 어머니와 함께 회령으로 추방되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최창익의 숙청으로 인한 피해는 황장엽의 탈북 이후의 숙청으로 인한 피해와 거의 비슷한 규모였다고 하니, 그 끔찍함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북한의 악명 높은 정치범수용소는 8월 종파사건 이후 처음으로 등장하였다고 한다. 8월 종파사건으로 인해 발생한 막대한 수의 종파주의자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정치범수용소가 만들어졌고 지속적으로 그 규모가 확대된 것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박헌영 역시 이때 목숨이 달아났다. 최종 재판은 이루어졌지만 그가 미군정과 내통했다는 확실한 증거라고 우길 단서조차도 찾기 어려웠던 것. 김일성은 당시 내무상 방학세에게 "방 동무, 리론가 박헌영은 지금 어떻게 됐느냐. 문제의 증거는 완벽하게 확보했느냐. 증거고 뭐고 다 필요 없다. 오늘 밤에 목을 따버려!" 라고 말했고 당일 비공식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의 사망 시기는 빠르면 종파사건이 벌어지기 전인 7월, 늦어도 1956년 12월에서 1957년 초로 추정되고 있다.
7 후폭풍
8월 종파사건 이후 김일성의 지지파는 당, 내각, 군을 모두 장악하였고 김일성은 지속적으로 반대파를 숙청하고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였다. 이는 주체사상과 결합되어 지금의 북한을 막장 상태로 몰아내는 데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만 해도 북한은 제한적이지만 민주적인 시스템이 있었다. 이전에는 이러한 시처럼 어느 정도 조직 비판도 자유로웠고, 소련 등에서 들여온 해외 문화의 유입으로 문화적으로도 풍요로웠으며, 인민위원회/최고인민회 투표도 자유선거, 비밀선거로 치뤄져 밀폐된 공간에서 후보를 자유롭게 찍어냈다. 게다가 그때는 여행증 그딴 거 없이 자유로운 이동과 거주도 가능했다. 이때 남북통일했으면 좋을 텐데... 그러나 김씨 일가의 1인독재가 되면서 모조리 "그런 거 없다"가 되었다.
8 만일?
만일 8월 종파 사건에서 김일성의 권력이 제한되고, 여러 정치세력들이 서로 견제하는 구도가 그대로 이어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랬다면 북한도 김일성이 신격화되는 김씨세습왕조 체제가 아나리 구 소련, 동유럽, 중국 등의 여타 공산 국가들처럼 최고지도자를 중심으로 당, 정, 군의 최고위 간부들이 권력을 공유하는 집단지도체제의 형태로 흘러갔을 가능성이 크다.
더 나아가서 1990년대 초 구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 공산 국가들이 민주화가 될 때 함께 일당독재체제가 무너져서 보다 자유롭고 개방적인 체제가 들어서거나 대한민국 주도로 흡수통일이 이루어지는 시나리오도 있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 정권이 무너지지 않는 한 이렇게 될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다.
보다 현실적인 가정으로는 1980년대 중국과 베트남이 개혁개방에 나서면서 미국을 위시한 자본주의 국가들과 관계를 개선하고, 시장경제를 도입할때 북한도 함께 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랬다면 북한은 중국처럼 일당지배체제를 유지하면서도 경제개발에 올인하는 개발독재의 길을 걸었을 것이고, 현재의 중국-대만 관계이나 1980년대 동독-서독 관계처럼 남북한도 무역과 문화교류가 자유로운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
실제 덩샤오핑을 위시한 중국 최고지도부는 1980년대 개혁개방에 나서면서 여러차례 김일성에게도 함께 할 것을 권고하였다. 이런 영향으로 북한 경제 관료 일부가 중국에서 연수를 받으면서 개혁개방 정책을 공부하고, 1984년 '합영법'을 발표하면서 조총련계 일본 자본을 끌어들이려는 시도도 했지만, 결국은 그냥 시늉에 그쳐버렸다. 그래서 중국 지도부는 북의 이런 자세에 대단히 실망했다고 한다.
베트남도 1986년부터 '도이모이' 정책을 표방하면서 미국과의 관계 개선 및 부분적인 시장경제 도입에 나섰다. 따지고 보면 십수년간 전쟁을 했던 베트남도 미국과 외교관계를 정상화하고 군사협력[15], 경제교류를 하고 있는데 북한만 미국과 대립하고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어느 쪽이든 북한이 지금의 막장 상태가 되진 않았을 것이고, 남북관계와 한반도의 군사적 대립 상황도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똑같은 일당독재라도 북한의 개막장 세습왕조체제와 당관료와 군부가 적당히 권력을 균점하면서 서로를 견제하는 중국, 베트남, 쿠바와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 김일성도 이 사건의 배경이 스탈린 사망 이후의 개인 숭배에 대한 비판과 다른 파들의 존재 그 자체에 있음을 깨닫고 완전한 독재 체제를 위해 진행을 서둘렀기 때문이다.
9 관련항목
- 도서정리사업(1967) - '5.25 교시'로 시작 된 북한판 문화대혁명
- 주체사상의 형성 - 천리마 운동 시대(1958~1967)와 1967년 갑산파 숙청
- 당의 유일 사상체계확립의 10대 원칙(1974) - 세습체제의 정당화
- 오초아 사건 - 쿠바판 8월 종파사건
- ↑ 이런 형태는 2차대전 이후 소련의 위성국에서 흔하게 나타난다. 소련군은 자신들이 점령한 동독 지역에서 독일 사회민주당과 독일공산당을 강제로 합병해서 사회주의통일당(SED)을 만들고 나치를 피해 소련으로 망명했던 공산주의자 발터 울브리히트를 서기장으로 세웠다.
- ↑ 이들은 국내에 조국광복회라는 통일전선체를 만들었다고도 하지만, 이는 상당부분 신빙성과 규모를 의심받고 있다.
- ↑ 뉴라이트나 극우반공 세력들은 이들을 대단히 폄하하지만 이때는 독립운동 진영에서 변절자들이 속출하던 때였기 때문에 중국공산당과 함께 일제와 싸웠다고 해서 이들의 항일운동을 폄하할 근거는 되지 못한다. 임시정부와 중국국민당의 관계는 오히려 이들보다 더 종속적이었다. 중일전쟁 시기 충칭 임시정부 산하의 한국광복군은 <한국광복군 행동준승>에 따라서 중국국민당의 지시가 없으면 선전용 삐라 한장 못뿌리는 무기력한 존재였다.
- ↑ 다만 국내외를 막론하고 대부분의 현대사 연구자들은 조국광복회의 실체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당시 빨치산들이 선전용으로 부풀린 페이퍼조직이란게 정설이다.
- ↑ 사실 이런 행태는 좌우를 막론하고 독립운동사에서 흔하다.
- ↑ 이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 대구 10.1사건,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등이다.
- ↑ 애초에 미군정이 좌익계를 제거하기 위해서 정치공작과 탄압을 가해서 남로당을 강경투쟁으로 유도한 것인지, 아니면 남로당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서 강경노선으로 선회한 것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8.15해방 직후 초기에는 박헌영이 주도한 좌익계들은 우익과 통일전선을 만든다는게 기본 방침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강경우익인 이승만 조차도 초창기에는 조선공산당과 연대할려고 했었다.
- ↑ 소련파의 이러한 주장은 소련이 적백내전 직후 자영농과 소기업 허용 등 시장경제를 부분적으로 인정하는 신경제정책(NEP)으로 전후 재건을 이룬 경험과 연관이 있다.
- ↑ 해외교포들을 보면 세대가 지날 수록 언어 구사능력이 급격하게 떨어지고 3세, 4세쯤 되면 전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 ↑ 물론 박헌영도 1930년대 소련 모스크바의 국제레닌대학과 동방노력자대학에 유학하면서 공산주의를 학습했기 때문에, 소련과 연이 있긴 하다.
- ↑ 이는 같은 시기 미군정이 대표적 친미파였고 80대의 고령이라 오늘내일하던(...) 서재필보다 친미적이면서도 미국과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던 이승만을 지지한 것과 상통한다. 알만한 사람은 알겠지만 이승만은 골수 친미주의자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과 전후 종신집권 개헌 과정에서 미국과 상당한 마찰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미국은 주한미군을 동원해서 이승만을 체포하고 강제로 정권을 교체하는 일명 '에버레디' 작전까지 수립했으나, 실행 직전에 정치적인 부담을 이유로 포기하였다.
- ↑ 김일성은 전세가 뒤집힌 다음에 "남조선 노동자들이 파업으로 물자수송을 3일만 막아줬어도 전쟁 이겼다"면서 박헌영한테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실제 전쟁 초기 낙동강방어선까지 몰렸을때 국군은 궤멸상태였고, 미군은 아직 준비가 되있지 않았기 때문에 만약 부산, 대구 등지에서 민중봉기 혹은 노동자 파업으로 군수품 수송이 지체가 됬다면 정말 어떻게 될지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파업 비스무레한 것도 없었다. 이미 10.1 대구 사건, 여순 반란 사건, 4,3사건 등을 거치면서 남한 내의 좌익계 대중조직들이 모조리 파괴되었고, 대부분의 간부들은 월북하거나 아니면 전향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 ↑ 민족주의 계열에서도 박헌영의 이런 면모에 대해선 상당히 높게 평가하였다.
- ↑ 북한이 휴전협정 체결일인 7월 27일을 조국해방전쟁 승리기념일로 대대적으로 선전하면서 기념하는 것에는 이런 이유도 있다.
- ↑ 한때 베트남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 동남아의 전략적 요충지인 캄란 만 해군기지를 미해군 태평양함대한테 임대한다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현재도 임대는 아니지만, 미 해군 함정들이 종종 캄란만 군항에 입항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