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관계

(남북관계에서 넘어옴)
대한민국의 대외관계
6자회담 당사국남북한관계한미관계한러관계한중관계한일관계
아시아/태평양한국-대만 관계한몽관계한국-베트남 관계한국-이스라엘 관계한국-말레이시아 관계
한국-인도 관계한태관계한필관계한호관계한국-이란 관계
유럽한독관계한영관계한국-프랑스 관계한국-이탈리아 관계한국-체코 관계
기타한국-터키 관계한국-베네수엘라 관계


南北韓關係
중국어: 朝韩关系, 韓朝關係
일본어: 南北関係
영어: North-South Korea relations, Inter-Korean relations

1 개요

"이제 남한과 북한은 서로 경쟁하듯 국토를 나누어 민족이 서로 싸우는 길로 나아갈 것이다."

- 백범 김구

남북한관계(南北韓關係)는 남한북한 간의 관계를 말한다. 남한과의 관계는 그야말로 변화무쌍. 독립 직후 6.25 전쟁 전후 항상 준전시, 긴장 관계였다. 휴전선을 경계로 한반도의 북쪽을 지배하고 있는 국가이지만, 대한민국 헌법에는 대한민국의 영토를 "한반도 전체와 그 부속도서"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이 법 조항대로라면 북한은 남한의 입장에서 이북 5도를 불법 점령하고 있는 반국가단체다. 실제로 아직도 북한을 국가라고 인정 하지 않고 북한을 "이북에 있는 공산주의 정권"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차라리 그렇게 생각하는게 안전하다.

북한도 헌법상 남한을 같은 식으로 취급하고 있었으나 1991년 유엔에 남북한이 동시 가입하면서 유엔의 권고조치에 따라 1994년 한반도 전체를 영토취급을 하는 헌법조항을 수정한다.[1] 남한에서도 이 문제의 논란이 있었으나 헌법재판소가 이 유엔권고를 무시해도 위헌이 아니라는 결정을 내린바 있다.

그러나, 여전히 여러 공식문서, 특히 정부는 아니지만 실질적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노동당의 공식문서 등에서는 조선을 개무시하는 것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북한에서 나온 최신 연감에 나오는 지도를 살펴보면 남한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나온다. 한반도가 모두 붉은색 분홍색으로 칠해져 있으며 휴전선이 나타나 있지 않다. 게다가 세계 각국의 국기가 모여 있는 페이지를 살펴봐도 인공기는 있지만 태극기는 없다. 다만 연감에 "남조선" 관련 내용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정리하면 현재 정치적으로는 서로가 서로를 애매하게나마 인정하고 있다.

김대중 정권 이후로는 햇볕정책, 남북정상회담, 개성공단 등의 교류, 화해 시도가 늘어나면서 남북관계가 아주 좋아진 적도 있었고 곧 통일될 것 같은 여론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실은 시궁창. 북핵문제 이후 북한은 점점 국제사회의 악의 축이 되었고, 이명박 정권 이후 이명박 정부의 비핵 개방 3000구상에 북한이 반발하는 등 남한과의 관계가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하였다. 2009년 1월 18일 정부 관계자가 북한 남침과 연결해 생각할 수 있는 문서를 흘려버려 북한이 남한에 공격적인 발표를 하는 등 관계가 복잡해져 버렸다. 사실 나아졌다고는 해도 그나마 '덜 적대적'인 정도였었지 우호적인 관계로 진입했던 순간은 단 한순간도 없었다. 일단 기본적으로 양측이 서로를 흡수해버리려는 살벌한 구도를 바닥에 깔아두고 있으니까...

북한이 스스로 붙인 정식 국명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이란 단어 자체는 국제적인 명칭, 사전적인 의미, 사람 이름으로 치면 풀네임인데 북한과의 관계가 험악해지는 시기에 남한에서 저렇게 부르면 조롱조가 아니라면 종북이라는 오해를 사기도 한다.

북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남한대만에서 부르는 통칭. 단순한 통칭이 아니라 남한 내에서는 이 "북한"이라는 표기가 정부와 언론 기관에서 쓰는 공식 표현이다. 게다가 냉전까지 공산권 국가와 대치하고 있던 비슷한 처지의 대만도 북한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대만-북한 관계가 좀 더 개선된다면 '북한'은 '조선'으로 바뀔 가능성이 크다. 마치 중국, 동남아의 공산 국가가 남한과 수교 후 남조선에서 한국으로 명칭을 바꾸었듯이.

따라서 한국어 위키백과[2] 같은 극히 예외를 제외한다면 남한 내에선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북한'으로 표현한다. 한편 반대로 북한에서는 남한을 '남조선'이라고 부른다. 상기한대로 자국이 '조선'이고 남한이 자기들 남쪽에 있으니 그러는 듯.

공화국, 그러니까 '군주가 없고 주권을 가진 국민(인민)이 권리를 가진 나라'를 자칭하는 국가에서 "3대 세습"이라는 위대하기 짝이 없는 업적(...)을 이룬 것을 비난하는 입장에서 '김씨조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외에 남한에서 북한을 부르는 다른 방법도 가지가지인데, 통칭 북한(North Korea)이며 "이북"이나 "북쪽", 한창 반공 분위기가 강하던 시절에는 '북괴'라고 많이 불렀다. 그 외 '빨갱이' 등이 있다.

당사자인 북한은 '북한'이라는 표현 자체가 북한을 한국의 북반부로 보는 표현이니까 당연히 이러한 표현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한국의 '한'자를 싫어하여 '한국'이란 이름을 가진 언론 기자들의 출입을 금했을 정도, 따라서 자국을 보통 줄여서 부를 때 '조선'이나 '(우리) 공화국'이라 한다.

북한이 '북한'을 싫어한다는 것은 많은 예시가 있는데, 일례로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북한 감독에게 남한의 스포츠 기자가 얼떨결에 북한이라는 말을 썼더니 감독이 "북한이라는 나라는 없다."라고 말하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 버렸다. 남한인이 북한에서 부르는 명칭인 남조선 사람이라고 자처하지 않듯이 북한 주민이 스스로 "북한"이라는 표현 자체를 사용하는 경우는 당연히 없다.

김정은김정일의 후계자로 확정되었을 때 김정남이 외신 언론과의 인터뷰 중 자국을 "북한"이라고 지칭한 것을 두고 남한 언론들이 대서특필하며 '김정남이 북한과 연을 끊으려는 심산' 운운하며 설레발을 친 것은 바로 이런 까닭. 당장 총살형에 처해도 시원치않을 위험 발언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왕족이 직접 구사한 희귀한 케이스가 낳은 해프닝이다. 당시 관련 기사. 결론적으로 2012년 2월 현재까지는 김정남 본인에게 별 탈 없었으나 [김정남을 겨냥한 암살이나 테러 시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관측은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다만 이것은 그가 '북한'이란 단어를 입에 올려서 그런것이 아니고, 권력 승계 과정의 암투로 인한 부산물일 뿐이다.

남한에서는 이북5도위원회(구 이북5도청)가 활동하고 있는데 갑작스런 통일이 될 경우 이북 5도 지역을 안정시키기 위한 기구다. 여기에는 도지사, 시장, 군수 등 자치단체장이 임명되어 있으며 진짜 통일이 되면 그대로 지방자치제가 시행될 예정이다.[3] 마찬가지로 북한도 적화통일에 대비해서 이런 기구를 만들어 아주 작은 단위까지 이미 단체장을 임명해 놓은 상태다.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북한이 헌법에서 서울을 수도 삼았다가 수도 항목을 비운 대목은 적화통일에 성공할 시 북한의 의도가 엿보이는 구절이다.[4]

나무위키 내 모든 항목에서 저 국가(내지 단체)에 대한 지칭은 "북한"으로 권장하고 있다. 이는 일단 길이부터 훨씬 간결한데다(...) 남한의 언론에서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명칭이 "북한"이기 때문이다. 항목명이 북한으로 고쳐지기 이전에 많은 위키러들은 이 항목에 오기 위해 부카니스탄, 부칸 등을 쳐서 들어왔을 것이다.

한편 위키백과 같은 경우는 대한민국(남한) 국적의 대한민국(남한) 위키가 아니라 공식적으로 타 국적인 미국 국적의 한국 위키이기 때문에 문화어(북한 표준어)를 모두 병기하며 항목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라고 해둔다. 다만 미국 국적이지만, 가치 중립을 지향한다.

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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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내 모자는 메이플 시럽을 좋아하고, 거의 모두에게 친절해.
캐나다: 이봐.
독일: 내 모자는 자기가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봐.
영국: 나는 모자 안에 모자가 있어!
스코틀랜드: 꺼져!
남한: ......
북한: 가짜 Korea, 엿이나 먹어! 냄새나는 자본주의의 돼지 같으니! 진짜 Korea, 위대한 Korea!
미국 창년, 중ㄱ...아 아니지, 난 핵폭탄으로 널 계속 계속 계속 죽일 거야!(하략)

폴란드공에서 표현한 남북관계.[5]

대한민국과의 관계는 그야말로 변화무쌍해, 화전(和戰)의 반복이다. 휴전선을 경계로 한반도의 북쪽을 지배하는 국가이지만 대한민국 헌법에는 대한민국의 영토를 '한반도 전체와 그 부속도서'로 규정하니, 이 법 조항대로면 북한은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이북 5도를 불법으로 점령하는 반국가단체다.[6] 아직도 정식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북한을 "이북에 있는 공산주의 집단"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차라리 그렇게 생각해야 정신건강에 좋다. 북한도 헌법상 대한민국을 같은 식으로 취급했으나, 1991년 UN에 남북한이 동시 가입하면서 UN의 권고조치에 따라 1994년 한반도 전체를 영토 취급한 헌법조항을 고쳤다.[7] 그러나 여전히 북한의 여러 공식 문서[8]에서는 대한민국을 개무시하는 것 정도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는 두 국가 모두 애매하게 서로의 관계를 인정한다.

김대중 정권 이후로는 햇볕정책에 기반한 남북정상회담개성공단 설립, 금강산 관광 등의 화해와 교류의 시도가 늘면서 남북 관계가 좋아진 적도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시기마다 각종 무력도발을 하며 다시금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이후로도 잊을 만하면 터지는 북핵문제 등 각종 사건 이후 북한은 점점 국제사회에서 악의 축으로 찍히고, 이명박 정권의 '비핵 개방 3000' 구상에 북한이 반발하는 등 남한과의 관계가 어긋나기 시작하였다. 사실 나아졌어도 그나마 '덜 적대적'이었을 뿐이지 우호적이었던 적은 없었다. 기본적으로 통일을 양측이 서로 흡수하는 방식을 바랐기 때문에... 흡수하면 둘 다 망하는 거 아니였어?

북한에서 자기네들이 스스로 붙인 정식 국명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이란 단어 자체는 국제적인 명칭, 사전적인 의미, 사람 이름으로 치면 풀 네임인데 북한과의 관계가 험악해지는 시기에 대한민국에서 저렇게 부르면 (조롱조가 아니라면) 종북이라는 오해도 산다. 해외에서는 저 약자를 줄여 북한을 DPRK 라고 칭한다. 남한과 북한을 따로 표기할 때, SOUTH KOREA, NORTH KOREA 혹은 RK, KOR(남한), DPRK(북한)으로 표기한다.

게다가 냉전까지 공산권 국가와 대치하던 비슷한 처지의 대만도 북한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대만-북한 관계를 좀 더 개선한다면 '북한'은 '조선'으로 바꿀 가능성이 크다. 마치 중국, 동남아의 공산 국가가 한국과 수교 뒤 남조선에서 한국으로 명칭을 고쳤듯이.

대한민국에는 이북5도위원회(이북5도청)가 있는데, 북한 지역 역시 대한민국의 (명목상) 영토이므로 행정구역을 설치·유지하여, 남북통일이 오면 이북 5도 지역을 안정시키기 위한 기구다. 여기에는 도지사, 시장, 군수, 읍장, 면장, 동장 등 각급 행정구역의 장(長)을 임명해 놓았고,[9] 통일 직후 (또는 어느 정도 안정한 뒤) 지방자치제를 실시할 예정이다. 마찬가지로 북한도 적화통일에 대비해서 이런 기구를 만들어, 아주 작은 단위까지 이미 각급 행정구역의 장을 미리 임명한 상태다. 그럴 일은 전혀 없겠지만, 북한이 자기들 헌법에서 서울을 수도로 삼았다가 수도 관련 조항을 비운 것은 다 그런 까닭이다.

3 약사(略史)

1945년 8.15 광복 이후 미군, 소련군의 진주[10]에 따른 남북분단 이후 한반도 이남은 미국이, 이북은 소련이 진주하게 되면서 1948년 8월에는 자유진영의 대한민국이, 9월에는 공산진영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남북한의 관계는 동족관계이면서도 정치적, 이념적 문제로 상호간의 적대관계가 매우 짙은 편이었다. 분단이 되자마자 남북한간의 왕래가 끊겨지게 되었고 교통도 절단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38선. 박헌영남로당 등의 자체 공산세력이 미군정 치하에서 공산정부 수립을 위해 여러 방도를 썼으나 결국 모두 처리되었다고 한다.

1948년 UN 한국임시위원단 회의에서 이승만 등은 미국UN의 도움하에 남한에서만 선거를 실시하여 단독정부 수립을 희망하였고 백범 김구한국독립당 등은 남북한 전역에서 선거를 실시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결국 북한소련이 선거를 거부함에 따라 남한 지역에서만 선거를 실시하였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수립되었다. 그리고 동년 9월 9일에는 북한도 소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함에 따라 남북한의 관계는 정부수립 이후로 더욱 적대적으로 접하게 되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남침하여 6.25 전쟁이 일어났고 1953년 휴전이 성립되었으나, 남북관계는 전쟁 이후로 더욱 적대관계를 형성하였다. 북한은 휴전 이후에도 남한을 겨냥한 여러 침투, 공작, 테러사건을 벌였다. 남한실미도 사건으로 유명해진 북파공작원을 많이 파견하였다.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이 처음으로 방북하여 김정일을 만나게 되면서 1차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었고 그 해 남북 이산가족 상봉,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남북한 선수단 동시입장 등 화해 무드가 조성되기도 하였지만 제2연평해전, 북핵문제 등이 일어나기도 하여 여전히 문제의 불씨가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2003년 노무현 정권 출범 이후 2007년 2차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는 등 서로 간의 관계에 진전을 보이기도 했지만 회담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잇따른 핵실험으로 위기가 고조되기도 하였다.

2008년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 이명박정부는 북한이 핵을 완전히 폐기하고 개방에 나서면 10년 안에 북한의 1인당 국민소득을 3000달러까지 끌어올릴 수 있도록 경제적으로 지원하겠다는 이른바 '비핵 개방 3000구상'을 대북 노선으로 견지하였다. 북한이 이에 반발하여 남북관계는 경색되었다.#

이후 악화된 남북관계는 결국 금강산 관광 중단, 2009년 5월 로켓 발사와 2차 핵실험, 2010년 3월 천안함 폭침과 11월 연평도 포격사건으로 계속 이어졌다. 2013년 은하 3호 발사와 3차 핵실험 여파, 종전협정 파기 운운으로 남북관계는 역대 최악까지 흘러갔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 100일 이후에 들어서 남북 당국회담이 개최되기로 합의됨에 따라 향후 남북관계가 정상화 될 지가 주목되고 있다. 그러나 이마저도 회담 1일을 앞두고 대표격 문제로 파기됨으로서 무산되었다.

4 남북관계의 자세한 변천

4.1 해방 이후 ~ 195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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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대한민국과 북한 정권의 수립 이후 당시 초대 대통령 이승만북한에 대해서 반공 노선과 북진통일론을 취해왔다. 특히 남북협상을 위해 방북(訪北)한 백범 김구와 사이가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고 그가 방북을 했을 때도 불쾌한 심기를 드러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집권기인 1950년 6월 6.25 전쟁이 발발하고 정전협정이 체결되면서 1960년 4.19 혁명으로 하야할 때까지 반공노선을 계속 지향했다. 전쟁이 난 상황에서 다른 노선을 채택할 수 없잖아 자세한 내용은 멸공통일 항목 참조.

4.2 1960년대

일시적인 데탕트가 벌어졌으나 정책적으로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1960년 4월 혁명 이후 극우반공 체제가 약화되고 자유가 쟁취되자 통일에 대한 논의가 가능하게 되었고, 점차 통일운동도 활발해졌다. 레드 콤플렉스로 인해 7.29 총선까지만 해도 통일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지 않았으나 이 무렵 미국과 일본에 각각 체류한 김용중과 김삼규가 주장하던 중립화통일론이 잡지 등지에 소개되면서 차츰 통일운동이 활발해졌다. 이 당시 대학생들이 외산제품 배격과 양담배와 커피를 마시지 말자는 신생활운동을 펼 때 또 다른 대학생들은 시국토론회를 열어 통일문제를 제기했다.

1960년 11월 초에는 서울대학교 문리대학과 법과대학 등에서 통일문제가 논의되었는데, 특히 11월 1일 문리대 교정에서 있었던 서울대 민족통일연맹(이하 민통련, 1985년에 결성한 재야단체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과는 다른 곳이다.) 발기 모임은 기성세대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이 발기모임에서 채택한 대정부 및 사회 건의문에 담긴 내용에 의하면, 기성세대는 남북 분단의 책임을 지고 통일에 대한 젊은이의 발언을 억압하지 말고, 정부는 적극 외교로 전환해 그 일환으로 장면 총리가 미국과 소련을 방문하라는 등의 요구는 냉전의식을 몹시 자극했다. 그러나 다음 날 장 총리는 오스트리아식 중립화 통일안에 대해 경고했고, 현석호 내무부 장관은 국가보안법의 보강을 시사했다. 이날 야간국회에서는 대한민국 헌법 절차에 따라 남북 자유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의해 이승만 시절의 북진통일운동 시대로 돌아간 느낌을 주었다. 게다가 1960년 8월 14일에 북측에서 제의한 '남북연방제'는 남한에 영향을 주었다.

통일운동과 혁신계의 정치세력화는 시너지를 불러일으켰다. 통일운동은 1960년 8월 이후 혁신계가 몇 개의 정당으로 새로 정비되는 등 혁신계와 청년/학생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지면서 활기를 띠었고, 혁신계는 통일운동이 활기를 띠면서 힘을 얻어갔다. 1961년 1월에는 통일운동의 주도 단체로 심산 김창숙을 위원장에 앉힌 민족자주통일위원회(이하 민자통)을 조직하는 작업이 구체화되어 통일선언서가 발표되었고, 이후 2월 25일에는 결성대회를 열었다. 민자통에는 사회당과 혁신당의 일부, 사회대중당 등 여러 혁신정당과 사회단체가 참여했으며, 청년단체가 적극적인 역할을 맡았다. 민자통은 통일의 3대 원칙으로 자주, 평화, 민주를 내세웠다.

진보적 통일운동은 민족해방론과 결합했다. 1960년 11월 1일 민통련 발기 모임에도 자주성 확립을 역설했지만, 청년/학생, 혁신계는 1961년 2월 8일 한미경제협정이 체결되자 반미자주화운동을 벌였다. 서울대 민통련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전국학생투쟁위원회는 외세가 매족적/반민족적 일부 분자와 결탁하여 조국을 분할했다고 지적했고, 한미경제협정에 미국의 한국경제 감독권 강화 조항 등이 들어간 것은 예속적/식민지적 불평등 조항이기 때문에 결연히 반대한다고 밝혔다.

이렇게 학생들과 혁신계의 통일 운동이 활발해지고 그러한 것들이 반공주의와 냉전 이데올로기를 위협하자, 이에 놀란 장면 정부는 1961년 3월 들어 반공법과 데모규제법을 제정해 이에 대처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결국 혁신계의 2대 악법 반대투쟁을 불러일으켜 통일사회당 등 혁신계는 '반민주악법 공동투쟁위원회'를 조직해 두 법안에 대한 반대 투쟁을 벌였다. 대구에서 개최된 2대 악법 반대 궐기대회에도 많은 군중이 모였고, 이어 열린 3월 22일 서울 집회도 규모가 컸다. 통일사회당 등은 4월 초에도 각지에서 집회를 벌여 무기력했던 혁신계가 통일운동과 2대 악법 반대투쟁으로 대중의 호응을 얻어 무시 못할 정치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4월 19일을 맞이해 3~4월 안에 장면 정권이 무너질 것이라는 떡밥인 '3, 4월 위기설' 속에서도 학생들은 신중하게 처신해 4.19 1주년 기념식에 침묵시위를 벌였고, 이날 학생들은 4.19 1주년을 기념해 극우반공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주장을 폈고, 통일운동도 더욱 구체화되었다. 서울대 학생회는 <4.19 제2 선언문>에서 "지금 이 땅에 역사 사실을 전진적으로 변혁시키기 위해서는 반봉건/반외압 세력, 반매판자본 위에 세워지는 민족 혁명을 이룩하는 길뿐"이라고 하여 '3반 혁명'을 주장했다.

이날 열린 서울대 민통련 기념식 뒤 열린 침묵시위에서 "이 땅이 뉘 땅인데 오도 가도 못하느냐",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판문점에서", "남북 학생 판문점에서 만나자" 등 통일운동 역사에 길이길이 회자될 구호를 적은 플랜카드가 나타났다. 이러한 구호는 5.16 쿠데타가 터지기까지 계속되었다. 또 1960년대까지 중립화 통일론이 주였는데, 민자통 결성 이후 '남북 협상론'이 대두되어 영향력을 발휘했다. 게다가 남한을 경제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북한의 지원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북에서 전기를 보내고 남한은 이북에 쌀을 보내자는 "이남 전기 이북 쌀"과 같은 구호가 주목을 끌었다. 어느 쪽이건 장면 내각이나 극우 반공세력 입장에서는 놀랄 노자다.

장면 내각과 반공 세력들은 유엔 총회 결의에도 영향을 받았다. 1960년을 전후해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신생 독립국가들이 유엔에 가입하는 사례가 늘자 유엔 주재 미국 대사인 아들라이 스티븐슨 2세(1900~1965)는 1961년 4월 12일에 종전의 결의안을 수정하여 북한을 초청한다는 안을 삽입해 초청할 수밖에 없었다. 정작 북한은 유엔의 조건부 초청을 거부했지만 유엔의 새 결의에 놀란 장면 국무총리는 용공적인 통일이라면 차라리 현재와 같은 분단상태를 택하겠다고 공언했다.

1961년 5월 3일 민통련은 결의문을 통해 남북 학생 회담과 학생 기자 교류, 남북 학술 토론회, 남북 학생 친선 체육대회를 열 것을 결의했다. 이틀 후인 5월 5일에 전국 19개 대학 학생들이 참여한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 결성준비 대회'에서 이틀 전 발표한 민통련의 제의를 적극 지지하고, 남북 학생회담 장소는 판문점으로 하자고 제안하는 한편 정부는 학생회담에 모든 편의를 제공하라고 요구했다.

학생들의 급진적 통일운동은 민자통의 호응을 얻었다. 5월 13일에 민자통이 주최한 남북학생회담 환영 및 통일촉진 궐기대회에선 남북의 정당과 사회단체도 정치 협상 태세를 갖출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장면 내각이 이에 강경 대응하기로 하자 몇몇 민통련 간부들은 너무 나갔다고 생각해 대응책을 서둘렀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이 집회가 있던 이틀 뒤에 쿠데타가 터져 이러한 통일운동은 와해되고 만다.

이로 미루어 보아 분단세력의 극우/반공체제와 통일운동은 물과 기름처럼 공존키 어려웠다. 4월 혁명으로 극우/반공세력에 틈이 보이자 통일운동이 전개되었고, 통일운동은 2대 악법 철폐운동과 함께 혁신세력을 굳세게 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지 10년이 좀 지난 터라 대중들은 레드 콤플렉스에서 헤어나오지 못했고, 급진적 통일운동은 극우반공 세력들을 두렵게 만들었다.

반면 북측에서는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북한측은 통일의 가능성이 커졌다고 기대했으나 막상 북측은 대규모 군중집회를 열어 남측의 혁명을 지지하는 것 외엔 남한 사정에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이는 북한과 연계된 남측의 혁명조직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1961년 5월에 북한에서 '조국평화통일위원회'가 만들어져 초대 위원장에 벽초 홍명희, 초대 부위원장에 박금철, 리효순, 강양욱, 박신덕, 백남운, 이극로 등 7명이 선출되었다. 이는 통일전선의 형태를 갖추고 남측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대로 8월 14일에 김일성은 8.15 축하행사에서 남북 간의 경제/문화를 통일적으로 조절하는 느슨한 형태의 '남북연방제'를 제의했다.

1961년5.16 군사정변이 일어나자 처음에 북한은 박정희와 그의 가족이 좌익 단체에 참여한 경력을 알고 박정희의 형 상희의 옛 동지인 황태성을 밀사로 파견했다. 그러나 황태성은 체포되었고, 박정희는 반공과 친미의 자세를 굳건히 했다.

4.19와 5.16의 파도가 지나간 뒤, 1962년에 쿠바 미사일 위기가 일어나고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는 등 국제 정세가 급격히 변동하기 시작했다. 세계 전쟁이나 미국의 공격에 대한 위기감이 쌓인 북한 정부는 우선 자체의 힘을 기르는 데 쏟기로 결정했다. 가장 중요한 건 국방이었다. 1962년 12월에 개최된 조선로동당 중앙회의 전원회의에선 "전군의 간부화, 전군의 현대화, 전 인민의 무장화, 전국의 요새화"를 주 내용으로 한 4대 군사노선을 발표했다.

다른 한편으로 북한은 남한에서의 혁명을 기대했지만, 그건 북한이 일방적으로 지원해서 되는 게 아니며 남측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 일어나야 한다고 판단했다. 또한 국제적인 반미 혁명세력과 단결하여 범세계적인 반제/반미 전선을 결성하고자 했다. 1964년에 열린 전원회의에서도 이와 같은 방안을 '3대 혁명역량 강화방침'으로 정리했다. 이 방침은 북한의 혁명기지 강화, 남한의 혁명역량 강화, 국제 혁명역량과의 강화를 내세웠으며 이는 북쪽의 '민주기지'를 강화한 뒤 주로 무력에 의지해서 남북통일을 달성하고자 한 한국전쟁 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따라서, 남쪽은 그 자체의 힘에 따라 '남조선혁명'을 이룩해야 함이 강조된 것이다. 참으로 무시무시한 발상이라 할 수 있다.

북한 정부는 남한에서 4.19 혁명이 실패한 주 이유가 바로 혁명을 이끌 당 조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판단했다. 이로써 북한이 만든 '남조선혁명론'이 남쪽에 퍼지면서 지하 혁명조직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후의 내용은 통일혁명당 사건 항목 참조. 다른 한편으로 1967년에는 독일과 프랑스를 여행한 적 있는 학생과 지식인 수백여 명이 북한과 접촉을 했다는 이유로 검거된 '동백림 사건'이 발생하여 이들 중 34명은 서울의 재판정에 서게 되었다. 남북분단의 비극이라 할 수 있다.

1968~1969년은 한반도에 또다시 전쟁의 위기가 다가온 해로 기록된다. 1968년 1.21사태(김신조 등의 청와대 기습사건)과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미국푸에블로호 피랍사건 등이 일어났고, 다음해 4월에 일어난 EC-121 격추 사건 등으로 인해 3공화국의 반공노선은 견고해졌다. 대통령 박정희는 공식 석상에서도 북한김일성을 북괴의 괴수이자 침략의 원흉이라고 비난하였던 적도 있다. 틀린말은 아니네 특히 68년의 이런 사건들은 국방건설'자주국방'등을 명목으로 한 향토예비군제도의 창설에 큰 영향을 미쳤다. 군필자들의 빡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이로써 1960년대의 북한의 대남/대미 정책은 많은 후유증을 남겼다. 말로는 '남조선 혁명론'을 내세웠지만 남한에 친북/종북 세력이 확산될 여지는 별로 없었다. 미국에 대해서도 최대한 자존감을 세울 수는 있지만 대신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과 화해할 수 없는 대립의 길을 걸어야 했다. 그로써 북한은 전쟁 발발 위협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되었고, 사회주의 낙원을 세운다는 자신감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체제는 더 움츠러들게 되었다.

4.3 1970년대

그러나 1970년대가 문을 연 시점에 동서 간의 데탕트(긴장완화)의 물결이 한반도에 밀려오자 1971년 4월에 북한이 남북정치협상회의 소집을 제안하고, 얼마 후에는 민주공화당을 비롯한 남한의 사회단체 및 개별적 인사들과 아무 때나 접촉할 용의가 있다고 표시했다. 그해 9월부터 남북적십자회담이 시작되면서 남북대화의 돌파구가 마련되어 공식적인 남북대화가 시작되었다.

사실 남북간에 공식적인 대화가 시작되는 때는 1971년 남북요인 접촉을 시작으로 이듬해에 김일성과 남한의 중앙정보부장인 이후락, 박정희 대통령과 북한의 부주석 박성철 간의 비밀회담이 큰 역할을 했다. 마침내 남북한은 1972년에 7.4 남북 공동 성명을 통해 자주/평화/민족 대단결이라는 통일원칙에 대해 합의하였다. 이는 통일에 대한 공개적이고도 민족적인 합의 없이 정부 당국자들 간의 비밀회담에 의지해서 이루어졌다는 한계가 있지만, 남북이 자주적인 통일의 원칙을 이끌어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이후 남북간에는 적십자회담과 남북조절위원회를 비롯한 여러 갈래의 대화가 처음으로 성사되었다. 북한은 남한 정부를 처음으로 대화상대로 인정하고, 1973년 6월에 연방제 통일안(고려민주연방공화국)을 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방안으로 내세웠다. 반면 남한은 남북한 UN 동시가입 추진 등을 조건으로 내걸은 6.23 평화 통일 외교 선언을 발표했다. 이에 반공/보수세력들은 두려워했지만, 남한 국민들은 해방을 맞을 때와 마찬가지로 열렬히 환영했다.

그러나 남북대화는 양자 사이에 서로 다른 의도 속에서 진행되었다. 북한은 자신들이 줄곧 주장되 온 통일방안이 합의됨으로써 북한 주민들에게 일정한 성과를 보여준 데 만족할 수 있었으나, 통일의 전제로 내세운 '주한미군 철수'와 '독재정권 타도'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1960년대까지 북한은 확고한 경제적 우위를 근거로 전방위적인 통일 공세를 보여줬으나, 1970년대 들어서 남한이 경제와 민간 교류를 통해 통일에 접근하자는 단계적 통일론을 들고 나오자 정치/군사적 문제를 우선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외국군 주둔이라든지 국가보안법 문제 등 남한 내의 '약점'을 빌미로 계속해서 통일문제의 주도권을 잡고자 하는 의도였다. 남한의 박정희 정권 역시 국내 문제를 회피하는 수단으로써 더 나아가 유신체제로 이행하기 위해 통일문제를 이용했다. 이런 식으로 남북대화가 의도되지 않는 방향으로 나가면서 북한은 10월 유신으로 인한 유신체제 수립과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 등을 트집잡아 남북대화를 단절했고, 곧바로 주체사상과 주석제를 명기한 헌법을 만들었다.

결국 이 시기의 남북대화는 미국의 한반도 안정화 정책을 비롯한 국제 정세의 변화에 따라 진행된 것으로서 뚜렷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북한은 미국과의 직접적인 담판을 통해 민족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한편 주한미군의 철수를 요구했다. 그 와중에 1974년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문세광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에 이어 1976년 비무장지대 제3땅굴 구축과 미군-북한군 간에 충돌에 기인한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이 잇따라 터지면서 한반도는 일촉즉발의 위기를 맞이했고, 남북관계는 더욱 경색되었다.

대내적으로는 사법살인으로 유명한 인혁당 사건(1964년), 방송극 <송아지> 대본 필화사건(일명 '송아지 사건')(1964년~1965년), 동백림 사건(1967년), 민청학련 사건(1974년), 남민전 사건으로 이어진 민투위 강도 사건(1978년~1979년)과 같은 공안 사건이 아주 많았는데, 주로 이때 북한과 연계시키곤 하였다. 그리고 박 정권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뒤 통일운동 세력을 억압할 뿐더러 통일에 대한 논의조차 금지했다. 대표적으로 1964년에 발생한 MBC 사장 황용주 필화사건, 1966년 민주사회당 창당 준비대표인 서민호 의원 구속사건 등이 있었다. 1964 도쿄 올림픽 때 세계신기록 보유자인 북한의 육상선수 신금단이 남한에 있는 아버지를 만나 온 민족을 울렸을 당시 여/야 의원들은 '이산가족 상봉 면회소 설치 결의안' 등을 제출했지만, 박 정권은 이마저도 거부했다.

1976년 이후 더욱 경색된 남북관계는 북한이 남한의 혁명을 통한 조국 통일, 소위 '남조선혁명' 정책을 더욱 고수하게 만들었다. 더구나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김재규에 의해 시해된 뒤 12.12 군사반란으로 권력을 잡은 신군부가 5.18 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해 군부 정권을 수립함으로써 남북간의 적대감이 한층 더 강화되었다.

4.4 1980년대

이러한 국면이 지속되는 가운데 북한은 1980년 10월에 김일성은 조선로동당 제6차 대회를 통해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설안을 제의하여 또 다른 통일방안을 모색했다. 이 방안은 남북이 서로 다른 사상과 제도를 인정하고, 남북한 지역정부를 지도하는 연방정부를 수립해 통일에 이르고자 하는 의도였다. 그러나 1연방 2체제 2지역정부를 내용으로 하는 이 방안은 전과 다름없이 국가보안법 폐지, 주한미군 철수, 남한에서의 공산당 합법화를 위시한 세 가지 전제조건을 내세움으로써 남한이 따르지 않는 한은 불가능한 시나리오였다. 이러한 북한의 새 통일방침은 남한의 독재정권을 인정하지 아니한다는 점에서 통일전선의 성격을 띤 공세로 볼 수 있다.

1981년 출범한 전두환제5공화국 초기부터 북한이 남한 정부를 극도로 불신하여 1983년 북한이 대통령 전두환을 타깃으로 노린 미얀마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가 발생하면서 양국간의 긴장감이 더욱 증폭되었으나 군사적 충돌로까지 발전하지 않았다. 이 와중에 전두환 정권은 1982년 1월에 '민족화합 민주통일 방안'을 발표했다.

1984년 1월에 남북 양국과 미국은 3자 회담을 열어 북-미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남북 간에 불가침 선언을 채택하자고 결의했다. 이때 북한이 대미관계를 한반도 문제 해결보다 우선시한 것은 남한이 여전히 미국의 종속적 지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가운데서 남북간에 물밑 접촉이 이루어져 관계 진전을 위한 움직임이 이어졌다. 전두환 정권은 쿠데타로 집권한 이상 남북문제에 접근하여 정통성을 보완하려는 의도가 있었고, 북한은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설방안 등 지속적인 통일공세에 대해 구체적 성과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9월에 북한의 수해물자 공급 제의를 남측이 받아들인 것을 계기로 이후 남과 북은 적십자회담, 경제회담, 국회회담 예비접촉 등으로 잇달아 대화를 재개하였다. 1985년 8월에 열린 남북 적십자회담을 통해 남북 이산가족의 고향방문과 남북 예술단의 상호 교환에 합의했고, 9월 20일에 각각 151명씩 서울과 평양의 역사적인 교환 방문이 성사되어 어느 정도 대북관에 변화가 있는 듯 했다. 그러나 정상회담 의제에 연방제 및 주한미군 철수 등을 포함시키려는 북한의 일방적 입장은 전두환 정권에 부담을 주었다. 남한은 남북관계를 정권안보에 이용하고자 했고, 북은 여전히 남한 정권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식으로 핑퐁게임을 했다. 이러한 핑퐁게임 속에서 위에서 언급한 아웅산 테러 사건을 비롯해 1986년 금강산댐 건설 소동과 김일성 사망 오보 사건 등이 발생했다.

다른 한편으로 전두환 정권은 기독교계의 통일운동 등 민간 주도의 통일운동을 철저히 탄압하였다. 예를 들어 1986년에 유성환 신한민주당 의원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국시와 관련해 반공보다 통일이나 민족이 상위개념이라고 말하는 바람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안기부에 끌려가 심한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이를 '유성환 국시론 파동'이라 한다.

1980년대를 거치면서 개혁/개방을 표방한 소련의 사회 변동 등 급격한 국제 정세의 변화와 남한 경제의 급속한 양적 팽창 등으로 남한의 대북 우위가 두드러졌다. 게다가 1988년에 남한이 서울 올림픽을 개최하면서 남북 사이의 국력 차이는 현저하게 벌어지게 되었다. 또한 소련과 중국 등 북한의 동맹국가들이 올림픽에 참가함으로써 북한의 외교적 위치도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올림픽을 1년 정도 앞두고 일어난 'KAL기 폭파 사건'으로 북한의 위치는 국제적으로 매우 위축되고 말았다. 당초 북한은 서울올림픽 대회의 공동 개최를 주장했으나 그것이 이루어지기에는 상호간의 신뢰가 부족한데다 대화와 합의를 실천해 나갈 여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을 뿐더러 정치적 합의가 지켜지기에는 서로에 대한 적대감이 해소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남북 양측의 사회적 기반이 거의 전무했다고 볼 수 있다.

1987년에 터진 6월 항쟁6.29 선언은 1960년 4월 혁명 이후와 같이 통일운동의 물꼬를 텄다. 1987년을 전후해서는 '북한 바로알기 운동'이 국가보안법 철폐운동과 함께 전개되었다. 1988년에 민선으로 선출된 노태우 대통령이 집권한 뒤인 3월 29일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 후보 김중기의 '남북한 대학생 공동체육대회'와 '국토순례대행진' 제안은 통일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비록 같은 해에 개최된 6.10 및 8.15 남북학생회담은 경찰의 원천 봉쇄로 무산되었지만, 학생과 재야 세력은 더욱 활발히 통일운동을 폈다.

통일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될 때 노태우 대통령은 남북간의 교류를 제안하고 북이 미-일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협조할 용의가 있다는 '민족 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특별선언(이하 7.7 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은 표면적으로는 북과의 관계 개선을 내세웠지만, 북을 고립시키려는 북방정책과 연결되어 있다. 이후 1989년 9월 11일에는 기존의 민족화합 민주통일 방안을 보완코자 자주, 평화, 민주를 3대 원칙으로 제시하고 남북간의 동질성 회복을 위해 '남북연합'을 통일의 중간 단계로 주장한 '한민족 공동체 통일방안'을 마련했다.

반면 북한은 남한의 재야 및 학생 등 민간 차원에 의한 통일 교류에는 적극적인 태도를 취했다. 1989년 새해에 김일성은 신년사에서 '남북정치협상회의'를 제의함과 동시에 남한의 김수환 추기경, 문익환 목사, 백기완 등의 재야 저명인사들을 지명하여 평양으로 초청하고자 한다는 식으로 남북간의 민간교류를 제안한 데 이어 그해 3월에 통일운동가 문익환 목사가 북한을 방문한 뒤 6월에는 대학생인 임수경이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한 사실은 남한 정부와 민간을 분리한 북한의 시각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 두 사람의 북한 방문은 남한 사회의 재야 및 학생 운동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그해 6월에 발생한 서경원 방북 사건 발표로 공안정국이 형성되어 실정법 적용 논란까지 불러일으켰으나, 전체 통일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일대 사건이었다. 특히 문 목사의 방문은 남북화해와 통일의 가교를 놓는데 기여했고, 임수경은 북의 학생들에게 신선한 영향을 주었다.

이때까지 북한의 통일방안은 시기에 따라 전략/전술적인 차별이 있긴 했지만 그 본질은 북한식 '흡수통일론'을 내세웠다고 무방할 것이다. 즉, 북한 정부는 남한과 직접 테이블에 앉아 통일에 접근하기보다는 남한 내에서 '반정부 민주세력'의 투쟁을 통한 민주화를 거치는 방식을 우선시했던 것이다.

4.5 1990년대 ~ 현재

그러나 1989년 가을부터 1990년대 초에 소련과 동구권 국가들에서 일어난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는 남북 관계와 통일문제에 대한 북한 정부의 현실 인식에 일정한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하지만 북한은 사회주의 체재를 지키는 것을 절박한 과제로 인식하면서도 남북관계의 주도권을 잃지 않기 위해 공세적 자세를 늦추지 않았다. 1990년에 김일성은 신년사에서 남과 북 사이의 자유 왕래와 전면 개방을 주장했다. 그는 남측이 쌓은 콘크리트 장벽을 철거할 것을 요구했는데, 이는 독일의 베를린 장벽처럼 남측이 쌓은 콘크리트 장벽을 분단의 상징으로 만들어 남북관계의 정치적 우위를 확보하려는 의도였다.

한편 북한은 미국이나 일본 등의 관계 정상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이들 국가의 요구에 따라 남북 당국자 회담에도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90년 9월부터 남북의 총리를 수석대표로 하는 남북 고위급 회담이 개최되어 남측은 경제와 사회/문화 교류를, 북측은 군사와 정치 문제를 주요 의제로 내세워 서로 대립적인 입장이었다. 그동안 남측은 점진적 교류를 통해 남북관계를 개선해나가는 입장이었던 반면, 북은 주한미군이나 국가보안법과같은 정치/군사적 문제를 남북관계의 근본 장애로 간주해왔다. 그러나 고위급회담에서 양측은 의견을 절충하여 두 주장 모두 포괄적으로 다루면서 남북관계가 진전되어 그 해 남북통일축구대회 개최, 1991년 남북 탁구 공동대표팀 결성 등으로 이어져 체육경기에서도 교류가 활발했다.

1991년 12월에 남북 상호간에 체제를 인정하고 내정 간섭을 하지 않으며 무력을 쓰지 않는다는 내용을 중심으로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이하 남북기본합의서)'를 제정했다. 이는 7.4 남북 공동 성명 이후 남북 당국 간에 이룬 첫 합의로써 남북관계의 큰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남과 북은 이 합의서에서 남북관계를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된 특수관계로 규정하고, 상대방의 국가적 실체는 인정하되 국가로는 승인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이 합의서는 상대방 체제이 인정과 존중, 내정 불간섭을 명시하고, 남북 불가침과 교류/협력에 관해 여러 사항을 규정했다. 1972년 7.4 공동성명이 통일의 기본 원칙을 밝혔다면, 남북기본합의서는 남북관계 및 불가침, 교류/협력 사항을 구체화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 합의서의 채택에 따라 한때나마 남북이 상호 실체를 인정하고, 상호 교류와 협력을 통해 민족 공동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는 듯 했지만 1992년 초에 남한이 미국과 함께 팀 스피릿 훈련을 재개하고 북한의 핵문제가 불거지면서 남북 고위급 회담은 1992년에 8차로 막을 내리게 되었고, 또다시 남북관계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북한은 여전히 정치적/군사적 문제의 해결에 우위를 두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체제를 보장하기 위해 미국과의 담판에 초점을 맞추었고, 남한을 신뢰할 수 있는 상대로 여기지 않았다. 그들의 관점에서 남한은 아직도 '미국의 식민지'로 간주할 뿐이었다. 남한 역시 냉전 이데올로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으며, 북한을 진정한 대화 상대로 인정하는 데에도 인색했다.

이 와중인 1991년 9월에 사회주의 동맹의 붕괴로 고립이 심화된 상황에서 북한은 그 동안 분단을 고착화시킨다는 이유로 거부하던 남북한 UN 동시 가입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현실의 사회주의권이 무너진 마당에 닥쳐오는 국제 환경의 변화를 거스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후 12월 31일에는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1993년에 군정을 종식시킨 김영삼의 문민정부는 새로운 통일정책인 '3단계 3기조 통일정책'을 마련했다. 이 정책은 화해/협력, 남북연합, 통일국가로 3단계 통일 과정을 설정하고, 이러한 3단계 통일 과정을 위한 정신으로 민주적 국민합의, 공존/공영, 민족 복리의 3기조 제시였다. 반면 북한은 국가적/사회적 난관이 지속되는 가운데서도 표면적이나마 통일에의 열망을 늦추지 않았고, 오히려 진일보한 제의를 내놓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93년 4월 6일에 김일성이 발표한 '전민족 대단결 10대 강령'에서 남북이 서로 상대방을 흡수하지 않을 것을 제기했다. 김일성 자신은 북한이 처한 전반적인 수세적 입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년에 연방제 통일방식에 대해 강한 집착을 보였다.

거기에 1993년 4월에 김영삼 정권이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 노인을 북으로 송환시킨 것은 남북관계가 좋아질 수 있다는 청신호였다. 그러나 북한이 그해 3월에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한 뒤 1994년에 박영수 북측 대표단장이 '서울 불바다'라고 극언한 데다가 1992년부터 불거진 북한의 핵개발 문제에 대해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가 전쟁불사의 강경책으로 나오고 북한 또한 강경책으로 대응하여 한반도는 정전 40년만에 전쟁 상태로 돌입할 것 같은 위기감이 고조되었지만 다행히 그 해 여름에 독재자 암살 전문 지미 카터의 방북으로 숨통을 터놓았다.

더 나아가 김일성은 6월 17일에 카터 전 대통령에게 남북정상회담 개최의 뜻을 밝혔고, 김영삼 대통령은 다음날 이를 수락하여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하기로 함에 따라 남북관계는 획기적인 변화를 맞는 듯했다. 그러나 7월 8일에 김일성이 죽자 남한의 극우 세력들은 일제히 조문을 극렬히 불허했고, 김영삼 정부가 방북조문단 불허방침을 밝히자 북한이 이에 대해 극한 반응을 보여 남북관계가 급격히 나빠졌다. 그나마 1995년 6월 대북 쌀 지원을 통해서 남북관계에 물꼬가 트이는 듯 싶었는데, 1996년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일어나고 설상가상으로 북-미간 핵 갈등, 남한 내에서도 대북정책을 둘러싼 '남남갈등'이 불거지면서 거의 소득이 없었다. 이와는 별개로 범민족대회, 범청학련 통일대축전을 위시한 민간 차원의 남북교류는 여전히 계속되었으나 정부는 이를 철저히 탄압했다. 이러한 탄압 기조는 1990년대 후반까지 이어졌다. 이렇듯 김영삼 정부는 그토록 마련한 통일 방식을 제시하지 못하고 임기응변식으로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대처하는 형편이라 할 수 있다.

김일성 사후의 북한은 내외적인 난제에 당면해 대남관계에서 적극적인 태도를 사실상 포기했다. 국제적인 고립과 경제적 위기에 빠진 채 남북관계에 대한 자신감을 사실상 포기했다. 새로 지도자가 된 김정일은 최악의 경제 위기를 맞아 통일문제에 힘을 쏟기가 어려웠다. 그의 일차적인 관심은 핵문제로 야기된 나라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과 '고난의 행군'이라는 총체적 난국 상황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식 사회주의'를 수호하는 과제가 통일문제보다도 훨씬 시급했다. 다만 1997년 8월에 '조국통일 3대 헌장(조국통일 3대 원칙, 전민족대단결 10대 강령,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 방안)'을 발표해 대내외적으로 확산시키며 지지를 획득하고자 했다.

북한은 1998년에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자 남한에 대한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급격히 약화된 내부 경제를 타개하려면 외부의 지원과 대외 경제 교류가 필수적이었으며, 이를 위해선 무엇보다 남한과의 관계 개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김대중 정부는 과거 정권들이 취한 대북 강경책을 버리고 화해와 협력의 정책인 '햇볕정책'을 도입했다. 처음에 북한은 이 정책을 남한의 흡수통일 책략으로 간주하고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했었으나, 그것이 지닌 '우호적' 성격을 배척하지는 않았다. 사실 남북관계의 새로운 전기를 만드는 데에는 현대그룹 총수 정주영이 큰 역할을 해냈다. 사실 정주영은 1989년에 이미 북한을 방문해 금강산 개발 의정서를 체결했지만, 문익환과 임수경의 방북 사건으로 성사되지 못했다. 정주영은 1997년 말부터 대북 접촉을 적극적으로 벌여 1998년 6월에 500마리의 소를 이끌고, 또 10월에 501마리의 소와 자사 승용차 20대를 가지고 판문점을 넘어 북에 간 것은 대단한 이벤트였다. 이로 인해 10월 18일에 관광객 826명 등 1,418명을 태운 배가 동해항에서 금강산을 향해 북의 장진항으로 떠나면서 금강산 관광을 시작했다.

이 사건은 굳게 닫혀 있던 한민족의 분단장벽을 허무는 사실상의 출발점이 되었고, 이로부터 민간 차원의 교류도 점차 활기를 띠면서 2년 뒤에 개최할 남북정상회담을 비롯한 남북 교류와 협력 과정에 가교를 놓았다. 비록 1998년 속초 잠수정 침투 사건, 여수 반잠수정 침투 사건과 1999년 제1연평해전, 금강산 관광객 억류 사건 등이 터지게 되면서 남북간에 한때 긴장이 감돌았지만 전반적인 화해의 흐름을 막지는 못했다.

2000년 3월에 김대중 대통령이 대북 지원 확대와 남북 간 화해와 협력 등을 골자로 한 '베를린 선언'을 계기로 남북은 특사를 파견해 물밑 대화를 진행하여 4월에 남북정상회담의 개최가 발표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원래 6월 12일에 북에 도착하려 했지만 북한 정부의 요구로 하루 늦은 6월 13일 오전 10시 20분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하여 북의 김정일이 공항까지 나와 영접했다. 이는 1948년 분단정부 수립 이후 52년만에 처음 있는 경사였다. 그동안 남과 북은 상대방을 부정하고 적대시했는데, 20세기가 끝나고 21세기에 들어가는 길목에서 화해와 화합을 큰 걸음을 내딛었다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이날부터 남북정상회담을 열어 6월 15일에 두 정상은 6.15 남북 공동 선언을 발표해 통일문제를 자주적으로 해결하고,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합의했다. 이후 북한은 남한 당국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사실상 지양하고 남북 대화와 협력의 당사자로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그 이전까지 북한이 남측의 재야 인사들과 학생 운동권 등 비정부적 조직들과의 교류를 중시하고 남측 정부에 대해 불신을 감추지 않았던 것에 비해서는 획기적인 선택이었다. 북한이 남한에 대해 입장을 바꾼 것은 어려워진 경제를 회생하기 위해서는 남측의 지원과 협력이 절실하기도 했지만 자신을 적대시하지 않게 된 남한 정부의 태도에 대한 인식을 바꾼 측면도 있다.

6.15 공동성명에 따라 8월 15일에 1985년 이후 15년만에 남북 이산가족 방문단이 교환되어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실현되었고, 9월 2일에는 비전향 장기수 63명의 북송, 18일에는 경의선 철도 및 도로 연결 기공식이 있었다. 게다가 남북 간에 각종 교류가 증대되어 남한의 대북 지원이 지속되었다. 남북 간에는 장관급회담, 이산가족 상봉, 경제협력 등 실제적인 교류와 협력이 지속되었다. 특히 2002년 9월에는 경의선동해선 철도 및 도로 연결/착공식이 거행되었다. 이후 11월에 북한은 남한 기업들의 입주를 위한 '개성공업지구법'을 채택했고 2003년 2월 금강산 육로관광 허용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새로운 세기에 접어들면서 남북관계가 순탄하게 발전한 것은 아니었다. 정상회담 뒤 북한은 '우리민족끼리'라는 선언적 구호 아래 민족 내부의 협력을 강조했다. 이와 같은 기조는 민족문제에 대한 외세의 개입을 저지하려는 강력한 정치적 목적을 띤 것이며, 민족의 자주성이라는 고유의 주체적 이데올로기를 반영한 것이었다. 오랜 기간 한미동맹 관계를 지속해 온 남측으로서는 북측이 주장한 민족 공조를 우선하기는 어려웠으며, 이는 남북관계의 근본적인 진전을 가로막는 주 원인으로 꼽힌다.

남북관계의 발전을 저해하는 기타 내외적 요인들도 적지 않았다. 2002년 6월에 또다시 발생한 제2연평해전은 남북관계를 일시적으로 악화시키기도 했다. 더군다나 미국의 조지 워커 부시 행정부의 출범 이후 미국의 대북 강경정책은 남북관계의 진전에 계속해서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에 대해 북한은 6.15 공동선언의 틀을 강조하며 이에 근거한 민족 간의 공조를 거듭 주장했으나, 남측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이 때문에 남한 당국에 대해 민족 공조의 측면에서 협력을 강조하면서도 반대로 비판적 태도를 취하는 등 이중적인 입장을 보였다.

2003년부터 국민의 정부에 이어 출범하게 된 참여정부에 들어서도 남북관계는 급격하게 조절되지는 않았다. 2003년 NPT 재탈퇴와 2006년 북한의 핵실험(1차 핵실험, 북핵문제)으로 긴장상태가 오가기도 하였고, 대북특검 등으로 약간의 강온조절도 있었다. 그러나 경제적 측면에서의 남북간의 교류는 해가 갈수록 대폭 증대되었다. 개성공단의 경우 2005년에 북측 근로자 수가 6천여명에 그치던 것이 불과 3년 만에 4만 명으로 증가했고, 같은 기간 생산액은 16배 이상 증대되었다. 남북 간 상호 간의 인적 왕래는 2000년 7,986명에서 2008년에는 18만 6,775명으로 비약적인 증가를 보였다.

북핵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국제적 여건이 성숙치 않은 상황 속에서 남과 북은 제2차 남북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했다. 2007년 5월에 경의선 철도 시범 운행이 실시되고 10월에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두 남북 정상은 남북관계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때 두 정상은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이하 10.4 선언)'에서 2000년 6.15 공동선언을 변함없이 이행하며 현 정전체제를 종식시키고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할 것을 밝혔다. 또한 남북 양측은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설치, 공동어로구역과 평화수역 설정, 개성-신의주 철도와 개성-평양 고속도로 공동 이용, 백두산 관광 실시, 상시적인 이산가족 상봉 등 획기적으로 쌍방의 협력 확대에 합의했다. 이후 남북총리회담을 비롯한 각 분야의 실무 회담이 동시다발적으로 열리면서 10.4 선언 이행이 순조롭게 이행되는 듯했다.

2008년에 출범한 이명박 정부는 북한이 핵을 완전히 폐기하고 개방에 나서면 10년 안에 북한의 1인당 국민소득을 3000달러까지 끌어올릴 수 있도록 경제적으로 지원하겠다는 이른바 '비핵 개방 3000구상'을 대북 노선으로 견지하였는데, 북한이 이에 '반민족적 대결론'으로 규정해 점차 비판의 강도를 높이면서 남북관계가 경색되어 암운이 더욱 짙어져갔다. 7월 11일에 박왕자 씨 피살사건으로 인해 남북교류의 양대산맥[11] 중 하나이던 금강산 관광이 끊겼다. 이 사건은 남북관계를 완전히 수렁으로 밀어넣고 8년간 회복하지 못할 정도로 악화일로를 걷게 만든 대사건으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이어서 경의선 및 동해선 철도와 도로도 운행을 중단했고 제8회 6.15 민족통일대축전을 마지막으로 6.15/8.15 남북공동행사 역시 중단되었다. 게다가 남북 이산가족 상봉 역시 2010년 11월에 중단하였다.

2009년 2차 핵실험에 이어 2010년 3월 천안함 피격사건이 일어나자 두 달 뒤에 조사단은 북의 어뢰 공격에 의해 침몰했다고 발표하여 큰 논란을 일으켰다. 발표 사흘 뒤인 5월 24일에 이명박 정권은 대북 교역과 교류를 중단시켰다.

이후 11월 연평도 포격 사태로 해병대원 2명, 민간인 2명이 사망함으로써 북한이 위험한 모험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실감케 해주는 사건이었다.이러한 사태로 인해 남북관계는 최악의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다. 남북은 마치 냉전 시기로 회귀한 듯이 상호 적대의식을 가감 없이 드러냈고, 이에 따른 양측의 긴장도는 한층 높아져갔다. 남북관계는 당국 간 대화는 물론이고 민간과 경제 교류 역시 급격히 위축되었다. 이 시기에 개성공단이 존폐의 위기에 처했으나 살아남은 건 그동안 쌓아온 남북간의 교류가 헛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 상징적인 메세지였다. 이처럼 한반도 평화와 남북경협의 길은 멀고도 험했으나 그만큼 성과도 있었다.

그리고 2011년김정일이 죽고 그의 3남인 김정은이 후계자로 집권한 뒤 12월 29일 북미고위급회담에서 북의 핵실험 유예가 발표되어 북미간에 순풍이 오는 듯했으나, 2012년 4월에 북한이 또다시 로켓을 발사하자 한반도의 정세는 다시 경색되었다. 2013년의 3차 핵실험은하 3호(광명성) 발사로 남북관계는 정권 초기부터 말기까지 얼어붙었다.

2013년에 들어선 박근혜 정부는 이전 정권과 달리 남북간 '신뢰'를 바탕으로 한반도 비핵화 회담 진전 시 한반도 경제공동체 건설을 목표로 한 대북 정책을 창안했지만, 초반부터 북한의 정전협정 파기선언, 선전포고, 개소리 등으로 인해서 남북관계가 크게 경색된 시기였으며 불안감까지 밀려오는 바람에 그 어느 때보다도 격랑이 심해가던 시기였다.

이 해에는 결국 개성공단이 폐쇄되면서 지난 이명박 정부시절 금강산 관광 전면중단 이후 5년만에 일어나게 되었던 일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북한은 말로 '휴전협정을 파기한다'며 대남 선전포고격에 가까운 도발을 하였으며 이로 인해서 남북관계는 긴장상태에 돌입하게 된다. 2013년 6월 남북간 당국회담역시 무산되었다.

게다가 국정원이 NLL 관련 문서를 개방해서 외교관계마저 더 악화되었다. 이것을 전문 공개하면 그때는... 게다가 저 문서 개방 여파는 타국과의 외교관계에서도 악영향이다.

뜻밖에도 2013년에 평양에서 열렸던 아시아 클럽 역도 선수권 대회에는 남한 선수단의 방북승인과 동시에 남한태극기 사용을 허가함과 동시에 남한애국가 연주까지 전면허용하면서 물꼬가 트여가기도 하였다. 참고로 우리나라 또한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에서 북한의 국기 및 국가사용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2013년 9월 21일, 북한의 대남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를 통해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연기한다라고 밝히면서 남측으로 책임을 전가한 상황이라 남북관계가 나아졌다고는 볼 수는 없다.

2014년 초 김정은이 남북관계 개선을 주장하였고, 이에 따라 북측이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남북 고위급 회담이 성사되었고, 일단은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양측이 여러 사안에서 워낙 이견이 많아 앞으로의 남북관계를 양측이 어떻게 풀어갈지는 계속 지켜봐야 할 일이다.

그러나 2015년 8월 4일 DMZ 목함지뢰 매설 사건이 일어나면서 대북방송을 재개하기로 결정함으로 다시 냉각. 2015년 8월 20일 북한이 남한 연천군으로 사격을 하며 대북방송을 중지하라고 최후통첩을 보내왔다. 자세한 내용은 서부전선 포격 사건 문서 참고.

그리고 2016년 1월 6일 북한에서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했다고 발표하고 2월 7일 광명성 4호 위성 발사를 저지르면서 이에 이해 관계가 얽힌 각국이 크게 반응하면서 남북 관계는 화해의 여지없는 힘대결로 들어가게 됐다. 결국 2월 10일에는 개성공단까지 잠정 폐쇄되며 남북한의 관계는 완전히 틀어저버렸다.

5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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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당 GDP 비교이다.

2015년 기준 한국은 27,600달러. 북한은 2014년 기준 621달러로 추정되므로 1인당 소득 격차는 최소 40배 이상이며, 전체 GDP의 차이는 무려 100배에 달한다. 다만 한국의 성장이 갈수록 느려지는 반면[12] 북한은 김씨왕조를 처단하기만 하면 그 다음 미래는 아무리 비관적이라도 그 이전보다는 나을 것이기에 앞으로 격차가 줄어들 수도 있다.

6 군사

한국군 vs 북한군을 참고할 것.

7 관련 항목

  1. 그러나 실제로 북한이 남한을 승인한 것은 전혀 아니다. 아직도 자기네 웹사이트에는 '우리나라에는 백두산, 묘향산, 지리산 등 아름다운 산이 있다' 등의 서술을 하는데, 남한의 산인 지리산을 자기네 산으로 간주한다는 것 자체가 일단 남한을 승인하지 않는다는 것.
  2. 이 경우는 NPOV를 위해 공식 명칭으로 부르는 것.
  3. 다만 북한 지역에서 민주주의가 정착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는 점과, 행정구역을 개편해야 될수도 있기 때문에 임시적으로 정부에서 지자체장을 임명하는 관선제가 시행될 가능성도 있다.
  4. 지금은 수도를 '평양'이라고 하고 있지만, 뒤에서는 몰래몰래 '서울'이라고 한다.
  5. 미국캐나다, 독일덴마크의 관계는 우호적으로 묘사되었고 영국스코틀랜드의 관계는 좋지 않기는 하지만 북한이 한국에게 일방적으로 표시하는 증오감만큼은 아니라는 뜻. 참고로 폴란드공에서 모자는 한 나라의 북쪽에 위치한 나라를 뜻하는 말이며, 자신을 최고의 한국(Best Korea)이라 우기며 남한을 가짜 한국(False Korea)라고 비방하며 욕해대고 협박하는 것은 폴란드공에서 북한의 주된 기믹 중 하나다.
  6. 북한 인민들은 북한에서 잡아둔 인질로도 본다.
  7. 대한민국도 이 문제를 두고 논란이 있었지만, 헌법재판소가 이 UN 권고를 무시해도 위헌이 아니라는 결정을 내렸다.
  8. 특히 정부는 아니지만 실질적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노동당의 공식 문서.
  9. 대체로 해당 지역 출신의 실향민 또는 그 후손인 때가 많다.
  10. 소련군은 만주 작전 이후 한반도 북부를 점령하였다.
  11. 개성공업지구, 금강산.
  12. 경제 구조 개선과 노인연령 상향 등의 강경 조치가 없으면 2060년 경에는 0%대까지 떨어져 OECD 최하위를 기록하게 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