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초(삼국지)

(금마초에서 넘어옴)
촉서 관장마황조전(關張馬黃趙傳)
관우장비마초황충조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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馬超
(176년 ~ 222년)

西川馬孟起(서천마맹기) : 서천의 마맹기(마초의 자)는

名譽震關中(명예진관중) : 명성이 관중에 떨치었는데
信布齊誇勇(신포제과용) : 한신, 영포와 같이 자랑할만큼 용맹하고
關張可竝雄(관장가병웅) : 관우, 장비와 나란히 할 수 있는 영웅이네.

1 개요

후한 말과 삼국시대 촉나라의 인물. 는 맹기(孟起). 부풍군 무릉현 사람.

2 정사

2.1 초기 생애

부친 마등은 영제(168년 ~ 189년) 말, 변장, 한수 등과 함께 양주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192년, 한수, 마등이 무리를 이끌고 장안으로 나아가니 한나라 조정에서는 한수를 진서장군으로 삼아 금성으로 되돌려 보내고 마등을 정서장군으로 삼아 사례 부풍군 미현으로 보내 주둔하게 했다.

허정전 주석 익주기구전에 따르면 애초에, 한수와 마등이 관중에서 난을 일으켜 자주 유장의 아버지 유언과 교류하여 믿었다.

그 뒤 마등이 장안을 습격했으나 패주하고 양주로 되돌아갔다.[1]

전략에 따르면 마등은 진서장군 한수와 결탁해 의형제가 되었는데, 처음에는 서로 매우 친했으나 뒤에 부곡(部曲)이 서로 침입하게 되자 원수 사이가 되었다. 마등이 한수를 공격하자 한수가 달아났는데 무리를 합쳐 돌아와 마등을 공격해 마등의 처자식을 죽였고 싸움이 연이어 풀리지 않았다.

장기전 주석 위략에 따르면 건안(196년 ~ 220년) 초, 한수와 마등이 서로 공격했다. 마등의 아들 마초 또한 건장하다고 칭해졌다. 염행은 일찍이 마초를 찔렀는데, 가 부러지자, 부러진 모로 마초의 목을 쳐서 거의 죽게 만들었다.

전략에 따르면 건안(196년 ~ 220년) 초, 국가의 기강이 위태롭고 느슨해지니 사례교위 종요, 양주목 위단을 시켜 그들을 화해하게 했다.[2]

2.2 평양 전투

종요전 주석 전략에 따르면 원상고간곽원에게 수 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흉노의 선우와 하동으로 침략하려고 할 때, 마등과 한수에게 사신을 파견하여 화친을 맺으려고 했다.[3] 마등은 몰래 그것을 허락했다.

사례교위 종요가 관중을 진수하게 되자 한수, 마등에게 서신을 보내 화와 복에 관해 진술했다.[4] 마등이 마초를 보내 종요를 뒤따르게 하니 하동군 평양현에서 곽원, 고간을 토벌하고 마초의 장수 방덕이 직접 곽원을 참수했다.

전략에 따르면 마초는 그 뒤 사례교위(종요)의 독군종사가 되어 곽원을 토벌했는데 날아온 화살에 맞자 주머니로 자신의 다리를 감싼 채 싸워 곽원을 격파하고 참수했다.[5] 조령으로 서주자사에 임명되고 그 뒤 간의대부에 임명되었다.

2.3 중기 생애

장기전에 따르면 조조는 형주를 징벌하려고 했지만, 마등 등이 관중에서 할거하고 있었으므로 또 장기를 보내 마등 등을 설득하여 부하들을 해산시키고 귀향하도록 요구했다. 마등은 이것을 허락하였지만 여전히 이전과 같은 행동을 하였으므로 장기는 사변이 일어날 것을 걱정하였다. 그래서 여러 현에 문서를 보내 식량 등을 준비하도록 하고, 군수에게 교외까지 나가 맞이하도록 했다. 마등은 부득이 동쪽으로 출발했다.

그 뒤 마등이 한수와 서로 불화하자 수도로 돌아올 것을 청하니 이에 징소해 위위로 임명하고, 마초를 편장군으로 삼고 도정후에 봉해 마등의 부곡(部曲)을 거느리게 했다.[6]

전략에 따르면 마등이 입조하게 되자 마초를 편장군으로 임명해 마등의 진영을 거느리게 했다. 또 마초의 동생 마휴를 봉거도위, 마휴의 동생 마철을 기도위로 삼고 그 가속들을 모두 업으로 이주시키니 오직 마초만이 홀로 남게 되었다.

허정전 주석 익주기구전에 따르면 마등의 아들 마초에 이르러서는, 관계를 되돌리고 서로 소식을 주고받으며 유장은 촉의 의(意)를 이으려는 뜻이 있었다. 왕상이 유장에게 고하여 말했다.

마초는 날래지만 어질지 못하여 얻는 것에 의로운 것을 보지 않으니, 만약에 이와 같이 그(마초)를 끌어들여 가까이 하시면 말미암아 호랑이를 길러 장차 스스로 근심을 남길 뿐 입니다.

유장은 그 말을 따라 이에 길을 끊어 마초와 교류하지 않았다.

2.4 동관 전투

고유전에 따르면 조조는 종요 등을 파견하여 장로를 토벌하려고 했다. 그런데 고유가 간언하여, 지금 거대한 군대를 함부로 파견한다면 서쪽에 있는 한수와 마초가 자신들을 공격하는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게 되어 창자 서로 선동하여 반역을 일으키게 될 것이니, 우선 삼보(三輔)를 불러 모아서 삼보가 평정시킨다면, 한중은 격문만을 보내도 평정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위기전 주석 위서에 따르면 이때 관서 제장들은 겉으로는 귀부했으나 내심은 믿을 수 없었다. 사례교위 종요는 3천 병을 청해 관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겉으로는 장로를 친다고 칭했으나 내심 실제로는 그를 위협하여 인질을 얻으려는 것이었다.

무제기에 따르면 211년 봄, 장로가 한중을 점거하니 3월에 종요를 보내 장로를 토벌했다. 조조가 하후연 등에게 하동에서 나와 종요와 합류하게 했다. 이때 관중의 제장들은 종요가 습격하고자 하는 것으로 의심하니, 마침내 마초가 한수, 양추, 이감, 성의 등과 함께 모반했다.

장기전 주석 위략에 따르면 한수가 서쪽에서 장맹을 토벌할 때, 염행에게 옛 영채를 지키도록 하였고, 마초 등과 결탁하여 모반할 때, 마초가 한수를 도독으로 삼았다. 마초가 한수에게 말했다.

예전에 사례교위 종요가 저 마초로 하여금 장군을 취하도록 하였으니, 관동인은 다시 믿을게 못됩니다. 지금 저 마초는 부친을 버리고 장군을 부친으로 삼으려 하니, 장군께서도 자식을 버리고 마초를 자식으로 삼으십시오.

염행이 마초와 연합하지 말라고 한수에게 간하였다. 한수가 염행에게 말했다.

지금 제장이 공모하지 않았음에도 뜻을 같이 하고 있는데, 이는 타고난 수명과도 닮은 것이오.

그리고는 동쪽의 화음으로 갔다.

마초가 무리를 통솔하게 된 후 마침내 한수와 굳게 맹세하여 서로 응하고 양추, 이감, 성의 등과 서로 결탁하여 진군해 동관에 이르렀다.

전략에 따르면 211년, 마초는 관중의 제장들인 후선, 정은, 이감, 장횡, 양흥, 성의, 마완, 양추, 한수 등과 함께 도합 10부로 함께 반란을 일으키니 그 군사가 10만으로 하수, 동수 일대를 점거하고 진영을 벌여 세웠다.[7]

두기전에 따르면 한수, 마초가 반역한 때, 홍농 및 풍익에서는 많은 현읍이 거병하여 그들에게 호응하였다. 하동은 역도들에 인접한 곳이었으나, 주민 가운데 다른 마음을 품은 자가 없었다.

장로전 주석 위략에 따르면 유웅명은 마초 등이 모반하였을 때, 마초를 따르지 않아, 마초가 그를 격파했다.

왕랑전에 따르면 나중에 마초가 반란을 일으켜 가홍을 체포한 다음에, 그를 화음으로 데려가서는 포고문을 만들게 했는데, 가홍은 만들지 않을 수 없었다.

서황전에 따르면 조조가 동관에 도착한 뒤 강을 건너지 못할 것을 두려워해 서황을 불러 물었다. 이에 서황이 말했다.

지금 신(臣)에게 정예병을 내려 포판진을 건너게 해 주십시오. 군의 선봉이 되어 그 내부를 끊는다면 적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조조가 옳은 말이라 하고는 서황에게 보병과 기병 4천 명을 주어 포판진을 건너게 했다.

무제기에 따르면 조조는 급박하게 대치하는 한편, 몰래 서황, 주령 등을 보내 밤중에 포판진을 건너 하서를 점거해 둔영을 세우게 했다.

산양공재기에 따르면 당초 조조의 군대가 포판에 있으며 서쪽으로 하수를 건너려 하자 마초가 한수에게 말했다.

의당 위수 북쪽에서 저들을 막으면 20일이 지나지 않아 하동의 곡식이 다하여 필시 달아날 것입니다.

한수가 말했다.

하수를 건너게 해주어 하수 가운데서 몰아붙인다면 오히려 통쾌하지 않겠는가!

그리고는 마초의 계책을 펼치지 않았다. 조조가 이를 듣고 말했다.

마초 저 아이가 죽지 않는다면 내가 묻힐 땅이 없겠구나.

서황전에 따르면 참호와 목책이 미처 완성되지 못했을 때 적 양흥이 밤중에 보기 5천 여 명을 이끌고 서황을 공격했으나 서황이 이를 격퇴했다.

무제기에 따르면 조조가 동관에서 북쪽으로 강을 건너려 했는데 미처 건너기 전에 마초가 배를 향해 달려와 급박하게 싸웠다.

무제기 주석 조만전에 따르면 조조가 장차 황하를 건너려 하여 선두 부대가 막 건널 때 마초 등이 돌연 당도했는데 조조는 호상(胡床)에 앉아 일어서지 않았다. 장합 등이 사태가 급박한 것을 보고 함께 조조를 이끌어 배에 타게 했다.

허저전에 따르면 마초는 보병과 기병 만여 명을 이끌고 조조군을 추격하여 왔는데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허저는 조조에게 적군이 너무 많이 오고, 지금 병사들은 이미 다 건넜으니 떠나야만 한다고 말하고는 조조를 부축하여 배에 태웠다. 적군은 더욱 빨리 추격하였고 군사들은 배에 오르려는 자들을 죽이고 왼손으로 말 안장을 들어 조조에게 날아오는 화살을 막았다. 사공이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죽자, 허저는 오른손으로 배를 저어 나아가게 하여 가까스로 황하를 건넜다. 이 날, 허저가 없었다면 조조는 위험에 빠졌을 것이다.

무제기에 따르면 이에 교위 정비가 소와 말을 풀어 유인하자 적들이 소와 말을 취하느라 어지러워졌고 이에 조조가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

무제기 주석 조만전에 따르면 제장들이 군이 패하는 것을 보았는데다 또한 조조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해 모두 황망하고 두려워했는데, 조조를 만나보고는 슬퍼하고 또 기뻐하며 어떤 이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조조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 하마터면 좀도둑들에게 곤란을 당할 뻔 했구나!

무제기에 따르면 황하를 따라 담을 양쪽에 쌓아 만든 통로를 만들며 남쪽으로 진군했다. 적(마초)이 물러나 위수가 황하로 유입되는 입구를 지켰다. 이에 조조가 속이는 군사을 여럿 두고는, 배에 군사들을 태워 몰래 위수로 들어가 부교를 만들고, 밤중에 군사를 나누어 위수 남쪽에 둔영을 세웠다. 적이 밤중에 둔영을 공격하자 복병으로 이를 격파했다.[8] 마초 등은 위수 남쪽에 주둔하며 서신을 보내 황하 서쪽을 떼어줄 것을 요구하며 화해를 청했으나 조조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9]

조조는 한수, 마초와 더불어 홀로 말을 타고 대화했는데 마초는 자신의 힘이 강함에 의지해 돌진하여 조조를 붙잡으려 은밀히 꾀했으나 조조 좌우의 장수 허저가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았고 이에 마초는 감히 실행하지 못했다.

가후전에 따르면 조조가 후에 한수 ,마초와 위수 남쪽에서 싸웠는데, 마초 등이 땅을 갈라 화해를 하려고 하면서 아울러 인질을 요구하였다. 가후가 이를 괜찮다고 여기니 거짓으로 허락했다. 또 가후에게 계책을 물어보자 가후가 말했다.

이간질시키면 끝입니다.

조조가 말했다.

한수와 마초의 동맹을 풀어 버리겠소.

단 한 번에 가후의 책모를 썼다.

무제기에 따르면 한수가 조조와 서로 만날 것을 청했는데 조조는 한수의 부친과 같은 해에 효렴이 되었고, 또한 한수와 같은 시기의 동년배였다. 이에 말을 마주하고 서로 대화를 나누었는데, 군사에 관한 일은 말하지 않고 다만 수도에서 있었던 옛 일만을 얘기하며 손뼉을 치며 환담했다. 대화를 끝낸 뒤 마초 등이 한수에게 물었다.

공이 무슨 말을 했습니까?

한수가 말했다.

별 말 없었소.

마초 등이 이를 의심하였다.

무제기에 따르면 뒷날, 조조가 또 한수에게 서신을 보냈는데 여러 곳의 글자를 첨삭해 마치 한수가 고친 것처럼 보이게 하니, 마초 등이 더욱 한수를 의심하게 되었다.

조조는 가후의 모책을 써서 마초와 한수를 이간시키니 다시 서로 시기하고 의심하게 되었고 군이 대패했다.

무제기에 따르면 이에 조조가 날짜를 정해 어울려 싸웠다. 먼저 가벼운 몸차림을 한 병사로 싸움을 걸고 싸움이 매우 오래 지속된 후 용맹스러운 기병을 풀어 양쪽에서 공격하여 대파하고 성의, 이감 등을 참수했다. 한수, 마초 등은 양주로 도주하고 양추는 안정으로 달아나니 관중이 평정되었다.

위기전 주석 위서에 따르면 종요의 군사가 처음 진격하니 관서에서 크게 반란을 일으켰고 조조가 친히 정벌한 뒤에야 겨우 이를 평정할 수 있었고 전사자도 만 명을 헤아릴 정도였다.

마초는 달아나 여러 융족들에 의지하고 조조가 추격해 안정에 이르렀으나 때마침 북방에 일이 생겨 군을 이끌고 동쪽으로 돌아가려 했다. 양부가 조조를 설득하며 말했다.

마초는 한신, 영포의 용맹을 갖추고 강족, 호족의 마음을 심히 얻고 있습니다. 만약 대군이 돌아가며 이를 엄히 방비하지 않는다면 농상의 여러 군들은 국가의 소유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양부전에 따르면 조조는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지만, 빠른 시간에 군대를 귀환시켰으므로 수비는 주도면밀하지 못했다.

2.5 기성 전투

이각, 곽사전에 따르면 한수는 금성으로 달아났다가 그의 장수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마초는 한양(천수)을 점거했다. 마등은 좌죄되어 삼족이 멸해졌다.[10]

양부전에 따르면 마초는 또 융족의 우두머리들을 인솔하고 농상의 군현을 공격하였다.[11] 농상의 군현들은 모두 그들에 호응했는데, 오직 기성만은 주와 군의 관리들을 끼고 고수하였다.[12] 마초는 농우의 병사들을 모두 겸병하였으므로, 장로는 또 대장 양앙을 파견하여 그를 도왔다. 모두 만여 명이 성을 공격했다.

양부는 나라의 사대부와 종족 자제 중 전쟁에 참가한 천여 명을 인솔하고, 종제 양악에게 성벽 위에서 초승달 모양의 진영을 만들도록 하고 마초와 전투를 했다. 정월부터 8월에 이르기까지 저항하며 지켰지만, 구원병은 오지 않았다.

염온전에 따르면 마초가 양주의 치소인 기성을 포위하여 극히 위급한 상황이었는데, 주에서는 염온을 은밀히 탈출케 하여 하후연에게 위급을 알리도록 하였다. 적의 포위는 몇겹에 이르렀으나, 염온은 밤중에 물 속에 숨어 탈출하였다. 다음날, 적도들은 염온이 포위를 벗어난 흔적을 발견하고, 사람을 풀어 그를 쫓게 하여, 현친현의 경계에서 염온을 발견하여 이를 붙잡아 마초에게로 끌고 돌아왔다. 마초는 그 포승을 풀어주며 말하였다.

이제 승패의 향방이 보이겠지. 족하는 고립된 성의 구원을 요청하고자 하였다가 우리 손에 붙잡혔는데, 어떠한가. 혹여 내 말에 따르고자 한다면 곧 성에 돌아가 올 원군이 없다고 말하도록 하라. 이리 행하지 않는다면 바로 그대를 죽일 것이다.

염온이 거짓으로 이를 승낙하였기에 마초는 염온을 수레에 태워 성 아래쪽에 다다랐다. 염온은 성을 향하여 큰 소리로 말했다.

대군이 삼일 내에 도래할 것이오. 모두 힘내시오!

성중에서는 이를 보고 모두 눈물을 흘리며 만세를 외쳤다. 마초는 노하여 그를 책망하여 말했다.

족하는 목숨을 어찌 이리 가벼이 여기는 것인가!

염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때 마초는 장기간 성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치 못하였기에 그를 회유하여 뜻을 바꿀 수 있을까 기대하였다. 이에 또다시 염온에게 말했다.

성중의 연고자 가운데, 내게 동조하려 하는 자가 있소, 없소?

염온은 또한 답하지 않았다. 결국 엄히 그를 책하였으나, 염온은 이렇게 말하였다.

장부가 군주께 사관함에 이르러서는 죽어도 두 마음을 갖지 않는다 하오. 헌데 경은 장자에게 의롭지 못한 말을 하게끔 하려는 구려. 내 어찌 삶을 탐하는 자이겠소?

결국 마초는 그를 죽였다.

왕이전에 따르면 건안(196년 ~220년) 연간에, 조앙은 참군사가 되었고, 기성에 머물렀다. 이때 마초가 공격해 왔는데, 왕이는 스스로 궁농수(弓籠手)를 몸에 걸쳐 활을 쏘아 마초군에 대항해 싸웠다. 남편 조앙 옆에서 싸우면서 귀걸이나 반지들을 조앙의 병사들에게 상으로 주었다. 마초의 공격이 드높아지자 성안의 사람들은 배고픔에 시달렸고, 자사 위강은 원래 인자한 사람이었는데, 관리들과 백성들이 상하는 것이 두려워 마초와 화해하려 하였다. 조앙은 그 의견에 반대하였다. 집에 돌아와 왕이에게도 말했더니, 왕이가 말했다.

군주에게는 그를 충고하는 신하가 있어, 신하는 위급할 때에 독단이 인정되고 있습니다. 독단이 꼭 나쁜 것이 아닙니다. 하후연의 구원이 근처까지 와있지 않다고는 단언할 수 없습니다. 당연히 병사들을 독려하고 높은 공을 위하여 같이 노력해야 합니다. 모두 절개를 완수하여 죽읍시다. 항복은 안 됩니다.

조앙이 돌아가 위강을 다시 설득하려 했지만, 이미 위강은 마초와의 화해를 도모하고 있었다.

양부전에 따르면 그 결과 자사와 태수는 낯빛을 잃었고, 마초에게 항복하자고 하는 이가 있기 시작했다. 양부가 눈물을 흘리며 간언했다.

저 양부 등은 부모 형제를 이끌고 대의로써 서로 면려하며, 죽음에 이르러서도 두 마음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항복은 성공할 공업을 버리고 의롭지 못한 이름 속으로 빠지는 것입니다. 저 양부는 죽음으로써 이 성을 지킬 것입니다.

그리고 통곡을 했다. 자사, 태수는 사람을 파견하여 화의를 요청하고, 성문을 열고 마초를 맞이하였다. 마초는 성 안으로 들어왔으며, 기성에서 양악을 구금하고, 양앙을 시켜 자사, 태수를 죽이도록 했다.[13]

과연 마초는 여러 융족들을 이끌고 농상의 군현들을 공격하니 농상의 군현들이 모두 이에 호응했고 양주자사 위강을 죽이고 기성을 점거하여 그 군사들을 차지했다. 마초는 정서장군, 영(領) 병주목, 독양주군사를 자칭했다.

하후연전에 따르면 마초가 양주자사 위강을 양주 천수군 기현에서 포위하자 하후연이 위강을 구원하려 했는데, 도착하기 전에 위강이 패했다.[14] 기성에서 2백 여 리 떨어진 곳까지 마초가 와서 이에 맞서 싸웠는데 군이 불리했고 견저가 모반하자 하후연은 군을 이끌고 퇴각했다.[15]

왕이전에 따르면 마초는 위강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위강을 죽었고 조앙의 적자 조월을 인질로 취하였다. 마초는 조앙을 자신을 위하여 사용하고 싶었지만 아직 크게 신뢰하지 못하였다. 마초의 처, 양씨는 왕이가 절개가 높다는 말을 듣고 왕이를 초대하였다. 왕이는 양씨를 설득하여 조앙이 마초의 신뢰를 받을 수 있도록 하려고 말했다.

지금은 나라가 안정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난리를 평정하는 것은 사람을 얻는데 있습니다. 양주의 군사와 말이야 말로 중원의 나라와 싸우는데 딱입니다.

마초의 처 양씨는 깊게 감동하였으며, 양씨는 왕이를 신뢰하게 되었고 중요한 일에 대해서 왕이를 불러 상의하고 결정하곤 했다. 조앙이 마초의 신뢰를 받게 된 것과 모두 공을 세우고 화를 면한 것은 왕이의 노력 때문이다.

양부전에 따르면 양부는 마음속으로 마초에게 보복하려는 마음이 있었지만, 적합한 기회를 얻지 못했다. 오래지 않아 양부는 아내를 잃어 장례식 때문에 휴가를 요청했다.

양부의 고종사촌 형 강서가 역성에 주둔하고 있었다. 양부는 어렸을 때 강서의 집에서 성장하였는데, 강서의 어머니와 강서를 만났을 때 이전에 기성에서 발생한 일을 말하고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고 매우 비통해 했다. 강서가 말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우는 것이오?

양부가 대답했다.

마초는 아버지를 배신하고 군주를 배반하였으며 주의 장수들을 죽였습니다. 어찌 저 양부 혼자만이 슬퍼하며 책임을 느끼겠습니까? 한 주의 사대부들은 전부 치욕을 받았습니다. 마초는 강대하지만 신의가 없고, 대부분 모순되는 것이 많아 무찌르기가 쉽습니다.

강서의 어머니는 매우 감동했고, 강서에게 양부의 계책을 따르도록 명령했다.

위강의 옛 관리와 백성인 양부, 강서, 양관, 조구 등이 마초를 공격할 것을 함께 모의했다.

왕이전에 따르면 강서 등과 마초를 토벌할 계획을 세운 후에, 조앙은 왕이에게 물었다.

우리의 계획이 이렇게 통하긴 하였지만, 인질인 조월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

왕이는 말했다.

충의를 세워 군부(君父)의 치욕을 씻는데 비교하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것은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닐 것이며, 하물며 자식의 목숨의 경우에는 더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조앙은 그대 말이 옳다고 하였다.

양부전에 따르면 마초는 양부 등이 병사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군대를 인솔하여 출전하였다. 조구와 양관 등은 양악을 풀어주고, 기성의 문을 닫고, 마초의 처자를 토벌했다.

마초는 역성을 습격하여 강서의 어머니를 붙잡았다. 강서의 모친은 그에게 욕을 퍼부었다.

너는 부친을 배반한 역적 놈이고, 군주를 살해한 흉악한 적이다. 천지가 어찌 너를 오래 살려두겠느냐? 네가 일찍 죽지 않는다면, 무슨 면목으로 감히 사람들을 보겠느냐!

마초는 노하여 강서의 모친을 죽였다.

양부, 강서가 노성에서 군사를 일으키자 마초가 출군해 이를 공격했으나 함락하지 못했는데, 양관, 조구가 기성의 성문을 닫아 버리자 마초가 들어갈 수 없었고, 진퇴가 낭패스럽게 되자 이에 한중으로 달아나 장로에게 의탁했다.

무제기에 따르면 마초가 한양에서 다시 강족, 호인에 의지해 해악을 일으키자 저왕 천만이 모반하고 마초에 호응해 흥국에 주둔했다. 하후연을 시켜 이를 토벌하게 했다.

왕이전에 따르면 그 후 장로의 도움을 받은 마초가 공격해왔을 때도 왕이는 남편과 함께 기산에서 맞서 싸웠다. 30일에 구원군이 오고 포위가 풀려나 마초는 인질 조월을 죽였다. 기성이 습격당하고 나서 기산의 수비까지 조앙이 낸 아홉 가지의 기묘한 꾀에는 전부 왕이의 생각이 들어 있었다.

하후연전에 따르면 강서 등이 급히 구원을 요청했는데 여러 장수들이 의논하기를 조조의 절도(節度)를 기다리자고 했다. 하후연이 말했다.

공(조조)께서는 업에 계시니 왕복하는데 4천리 길이오. 회답에 따르려 하다가는 강서 등은 필시 패할 것이니 급히 공격해야 하오.

마침내 이를 실행해 장합에게 보병과 기병 5천을 주어 선두에 서서 진창의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가게 하고 하후연 자신은 군량을 감독하며 후미에 있었다. 장합이 위수 가에 도착하자 마초가 강족과 저족 수천 명을 이끌고 장합에 맞섰다. 싸우기도 전에 마초가 달아나니 장합은 진군하여 마초군의 무기를 거두었다. 하후연이 도착했을 때는 여러 현들이 이미 다 항복한 상태였다.

2.6 장로 휘하

전략에 따르면 마초는 다시 농상에서 패했다. 그 뒤 한중으로 달아났는데, 장로는 마초를 도강좨주로 삼고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려 하니 어떤 이가 장로에게 간언했다.

이처럼 자신의 어버이를 사랑하지 않는 이가 어찌 남을 사랑하겠습니까?

이에 장로가 그만두었다.

전략에 따르면 당초 마초가 반란을 일으키기 전 그의 첩의 동생인 동충이 삼보(三輔)에 머물렀는데 마초가 패하게 되자 동충이 먼저 한중으로 들어왔었다. 정월 초하루 아침, 동충이 마초에게 장수를 바라는 뜻으로 술잔을 올리자 마초가 가슴을 치고 피를 토하며 말했다.

온 가문의 근친 일족이 하루아침에 함께 죽었는데 지금 두 사람이 서로 축하한단 말인가?

그 뒤 수차례 장로에게 군사를 청해 북쪽으로 양주를 탈취하려 하니 장로가 보내 주었으나 이로움이 없었다. 또한 장로의 장수 양백 등이 그의 유능함을 시기하자 마초는 마침내 무도를 따라 달아나 저족 중으로 들어갔다가 몸을 돌려 촉으로 달아났다. 이 해가 건안 214년이다.

2.7 유비의 입촉

이회전에 따르면 유비는 이회를 한중으로 파견하여 마초와 우호를 맺도록 했다. 마초는 그래서 유비를 따랐다.

마초는 장로는 더불어 일을 도모하기에 부족한 인물이라 생각하여 내심 근심하고 번민했는데 유비가 성도에서 유장을 포위했다는 말을 듣고 은밀히 서신을 보내 항복을 청했다.

유비가 사람을 보내 마초를 영접하자 마초는 군사를 거느리고 곧바로 성 아래에 도착했다.

전략에 따르면 유비는 마초가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기뻐하며 말했다,

내가 익주를 얻었구나.

그리고는 사람을 시켜 마초를 멈추게 하고 은밀히 군사를 대어 주었다. 마초가 도착하자 군을 이끌고 성 북쪽에 주둔하게 했는데, 마초가 도착한 후 열흘이 지나기 전에 성도가 무너졌다.

성안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며 유장이 이내 머리를 조아려 절하니 마초를 평서장군, 독임저로 임명하고는 예전대로 도정후로 삼았다.

관우전에 따르면 관우는 마초가 항복해 왔다는 말을 듣고는 예전부터 친분, 내왕이 있는 이가 아니기에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내 마초의 사람됨과 재주가 누구에 비교될 수 있는지 물었다. 제갈량은 관우의 호승심이 강함을 알았으므로 이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맹기(마초)는 문무를 겸비하고 웅렬이 남보다 뛰어난 일세의 호걸로 응당 익덕(장비)과 말머리를 나란히 해 달리며 선두를 다툴 수는 있으나 염(髥) 그대의 절륜 일군함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관우는 수염이 아름다웠으니 이 때문에 제갈량이 관우를 일컬어 염(髥)이라 한 것이다. 관우는 이 서신을 읽어보고 크게 기뻐하며 빈객들에게 보여주었다.

마초전 주석 산양공재기에 따르면 마초는 유비가 후대하는 것을 보고 유비와 더불어 말하며 늘 유비의 자(字)를 부르니 관우가 노하여 그를 죽일 것을 청했다.[16] 유비가 말했다.

다른 사람이 궁박해져 내게로 귀의했소. 그런데 경 등이 분노하며 내 자(字)를 불렀다하여 죽이자 하니, 천하 사람들에게 무엇을 보이겠소!

장비가 말했다

그렇다면 응당 예(禮)를 보여야지요.

다음 날, 크게 모이며 마초를 청했는데, 관우, 장비가 함께 칼을 쥐고 곧게 서 있었다. 마초는 좌석을 둘러보았을 때 관우, 장비를 보지 못했다가 그들이 서 있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니 마침내 다시는 유비의 자(字)를 부르지 않았다. 다음 날 탄식하며 말했다.

내가 이제야 패망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주인의 자(字)를 부르다 하마터면 관우, 장비에게 죽임을 당할 뻔 했구나.

이후로 유비를 존중하며 섬겼다.[17]

2.8 유비 휘하

팽양전에 따르면 팽양은 자신이 먼 곳으로 진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내심 불쾌하여 곧 마초를 찾아가 만났다. 마초가 팽양에게 질문했다.

그대는 재능이 특출나므로 주공께서는 그대를 중요하시며, 응당 제갈공명, 효직(법정) 등과 함께 발을 나란히 하고 달려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찌하여 외지의 작은 군에 임명되었습니까? 이것은 사람들의 그대에 대한 희망을 저 버린 것입니다.

팽양이 말했다.

늙어서 황당하고 어그려졌으니 또 무엇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또 마초에게 말했다.

그대가 외부를 맡고 내가 내부를 담당하면 천하는 충분히 평정되지 않겠습니까?

마초는 먼 곳에서 떠돌다가 촉나라로 투항해 왔으므로 항상 위험과 두려움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팽양의 말을 듣고 매우 놀랐으므로 대답하지 않았다. 팽양이 돌아간 후, 마초는 팽양의 말을 모두 상주했다. 이 때문에 팽양은 체포되어 담당 관리에게 보내졌다.

전략에 따르면 당초 마초가 촉으로 들어올 때 그의 첩인 동씨와 아들 마추는 남아서 장로에 의탁하고 있었다. 장로가 패망하자 조조가 이들을 손에 넣었는데, 동씨를 염포에게 하사하고 마추는 장로에게 주니 장로가 자기 손으로 직접 마추를 죽였다.

2.9 한중 공방전

양부전에 따르면 유비가 장비와 마초 등을 파견하여 저(沮) 길로부터 나와 하변을 취하도록 하였으므로, 저, 뇌정 등 일곱 부족 1만여 부락이 모반하여 유비에게 호응했다.

무제기에 따르면 유비가 장비, 마초, 오란 등을 보내 하변에 주둔하게 하니, 조홍을 보내 이에 맞서게 했다.

조휴전에 따르면 유비가 장수 오란을 보내 하변에 주둔하게 했다. 유비가 장비를 보내 고산에 주둔케 하여 군의 배후를 끊으려 했다. 의논하던 많은 사람들이 이를 의심하자 조휴가 말했다.

적이 실제로 길을 끊고자 하면 응당 복병으로 몰래 행군해야 하는데, 지금은 오히려 먼저 성세를 과장하니 이는 실제로는 그들이 이를 실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땅히 적군이 아직 집결하지 못했을 때 급히 오란을 공격해야 할 것이고 오란이 격파되면 장비는 달아날 것입니다.

조홍이 이를 좇아 진병했고, 오란을 공격해 대파하니 과연 장비는 달아났다.

무제기에 따르면 3월, 장비, 마초는 한중으로 달아났고, 음평의 저족 강단오란을 참수해 그 수급을 보내왔다.

유비가 한중왕이 되자 마초를 좌장군, 가절로 임명했다.

황충전에 따르면 유비가 한중왕이 되어 황충을 후장군으로 임명하려 하니 제갈량이 유비를 설득하며 말했다.

황충의 명망은 본래 관우, 마초와 동등하지 않았는데 이제 곧바로 동렬에 두려 하십니다. 마초, 장비는 가까이에서 그의 공을 직접 보았으므로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으나 관우는 멀리서 이를 들으면 필시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니 이는 불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유비가 말했다.

내가 직접 이해시키겠소.

그리고는 마침내 관우 등과 더불어 나란한 지위에 두고 관내후의 작위를 내렸다.[18]

2.10 죽음

221년, 표기장군, 영(領) 양주목으로 올리고 태향후로 올려 봉했다.

222년에 죽으니 이때의 나이가 47세였다. 죽음에 임해 다음과 같이 상소했다.

신의 종족 2백여 명이 맹덕(조조)에게 주살 당해 거의 다 없어지고 다만 종제 마대가 남았으니 미천한 종족을 위해 제사가 이어질 수 있도록 폐하께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그 외에 더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시호를 추증해 위후(威侯)라 했다. 아들 마승이 후사를 이었다. 마대의 관위는 평북장군에 이르렀고 진창후로 올려 봉해졌다. 마초의 딸은 안평왕 유리의 배필이 되었다.

3 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외모가 수려해서 금마초(錦馬超)라는 이명이 생겼다. 그런데 정사에서 마초의 외모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러니까 이는 창작.

우선 마초의 아버지 마등부터 이미지가 바뀐다. 정사에서 마등은 반란 세력에다가 동탁과도 연계할 정도의 못된 인물이었다. 그러나 연의에서는 마등이 반동탁 연합군에 참가하고 나중에 유비와 함께 헌제혈서에 서명하는 등 악당에서 충신으로 이미지 체인지된다.

마초가 정사보다 일찍 등장한다. 장안을 점거한 이각 일파와 마등, 한수가 싸울 때 17세의 마초는 적장인 이몽, 왕방을 베는 활약을 보였으나 아버지인 마등이 패했기 때문에 패퇴했다.

연의에서 마등은 조조와 대립한 양주의 한 세력으로서 묘사되어 있기 때문에 원소의 잔당인 고간, 곽원과 마씨 일족의 전투는 연의에서 나오지 않는다.

연의에서는 마등이 조조 암살 계획에 가담했기 때문에 마초는 일족의 대부분을 조조에게 모살당하고 만다. 양주에 있어서 난을 피한 마초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촌 동생인 마대와 함께 복수를 위해 거병하게 된다. 마초는 상복을 대신해서 흰 전포를 입었는데 사자 형상의 투구와 더불어 마초를 상징하는 아이템이 되었다.

가장 큰 차이점은 마초가 불효자에서 효자로 변한 것이다. 정사에서 마초는 업에 있는 자신의 일족들이 죽든 말든 신경쓰지 않고 반란을 일으켜서 결국 마등 등 마초의 일족은 몰살되버린다. 그러나 연의에서는 조조가 먼저 마등 등을 죽이고 마초는 그 복수를 위해 거병한다는 식으로 바뀌었다.

연의에서 한수의 부하들로 등장하는 기본팔기는 별로 비중이 없지만, 정사에서는 모두 관중의 유력 군벌들이었다. 봉기했을 때 마초군이 장안성을 함락시켰다는 것도 허구. 곧바로 동관으로 군사를 휘몰아 조조와 승부를 벌인다. 동관 전투에서는 마초의 용맹함이 과장되어 이통을 찔러 죽이고 조조를 추격하자 조조가 도망치면서 붉은 전포를 벗어던지고 수염까지 자르는 장면이 창작된다. 정사에서 이통은 마초에게 죽은게 아니고 조조가 수염을 자르는 장면도 없다. 중간에 웃통을 벗은 허저와 일기토를 하는 장면이 있지만 창작이다. 마초는 허저와의 싸움을 통해선 "그 용맹이 지난날 여포에게도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조조의 찬사를 듣는다. 가후의 이간계에 의해 마초는 한수를 공격해 그의 한쪽 팔을 잘라버리지만 패주한다. 연의에서 한수는 이후 조조에게 투항하지만 정사에서 한수는 그 후에도 조조에 대항해 거병하다가 죽었다.

기성에서 양부 등의 계략에 속은 마초는 자신의 눈 앞에 아내 양씨 등 자기 가족들의 목이 떨어트려진다. 마초는 역성을 습격하여 분풀이로 그곳의 강서, 윤봉, 조앙의 가족들도 다 죽여버리는데 조앙의 아내 왕이만 남편이 있는 기산의 군중에 가 있어서 죽음을 면했다고 나온다. 정사에서 마초가 역성에서 죽인건 강서의 어머니 뿐으로 나머지 강서. 윤봉, 조앙의 가족들은 멀쩡히 살았다. 아마도 나관중이 가족이 몰살당한 마초가 불쌍해서 이런 화풀이(?) 장면으로 부풀린게 아닐까 생각된다.

그대로 장로에게 의탁하고 유장군의 원군으로서 파견되어 유비군의 장비와 일기토를 한다. 장비와의 대결을 통해서 유비와 제갈량으로부터 "사스가 서량의 금마초다."라는 극찬을 듣지만 연의의 창작이다. 마초는 제갈량의 책략에 의해 양송의 참언에 혹한 장로에게 의심받아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여기서 양송은 실존하지 않았던 인물이고 정사에서는 제갈량의 책략도 아니었다. 정사에서 장로에게 마초를 시기한 것은 양송의 형으로 나오는 양백이다. 뜬금없이 이회에게 마초의 친구라는 설정이 붙었고 마초는 이회의 설득에 의해 유비군에 투항한다. 유장은 원군이 오지 않는 것을 깨닫고 유비에게 항복한다.

유비 진영에 합류한 이후의 활약도 대폭 늘어나 한중 공방전에서 조조군에게 광역 공포를 걸고 기습으로 적의 배후를 교란하며 맹활약, 마지막에는 복병으로 등장해 치명적인 타격을 입힌다. 정사에서는 관우, 장비, 마초, 황충이 사방장군에 임명되지만 연의에서는 이 멤버에 조운이 추가되어 오호대장군으로 바뀌었다.

정사에서는 유비가 죽기 1년 전에 죽었다. 그러나 연의에서는 수명이 늘어나서 유비 사후에도 조비의 오로군이 쳐들어왔을 때 제갈량의 명을 받들어 그 중 한 갈래인 강족의 군대를 패기만으로 제압하는 등 활약을 이어간다. 다만 연의에서도 유비에게 귀부한 뒤로는 정사처럼 미묘하게 활약이 부족해서 살짝 먹튀스러움이 남아 있다. 죽음 장면은 묘사되어 있지 않으나 제갈량이 북벌을 나서면서 마초의 묘를 방문하는 장면이 있다.

마초의 사촌 동생인 마대는 정사에서는 높은 관직과 작위를 받았음에도 딱히 비중이 없는 인물이지만 연의에서는 마초 버프를 받아 제갈량 세대 촉한의 필두 무장 중 하나로 활약한다.

4 가족 관계

  • 마원 - 마초의 선조.
  • 마평 - 마초의 조부, 마등의 아버지.
  • 강녀 - 마초의 조모, 마등의 어머니.
  • 마등 - 마초의 아버지.
  • 마휴 - 마초의 남동생, 마등의 차남.
  • 마철 - 마초의 남동생, 마등의 삼남.
  • 마대 - 마초의 사촌 동생, 마등의 조카.
  • 양씨 - 마초의 아내.
  • 동씨 - 마초의 아내, 염포의 아내.
  • 동충 - 마초의 처남, 동씨의 남동생.
  • 마추 - 마초의 아들.
  • 마승 - 마초의 아들.
  • 마씨 - 마초의 딸, 유리의 아내.
  • 마운록 - 반삼국지에서 등장하는 마초의 여동생, 마등의 딸, 조운의 아내.

5 평가

5.1 명성

마초는 할머니가 강족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강족과 저족 등 서북 지역의 이민족들과 가까워졌고, 이로써 그는 그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이민족과 결탁했다는 이미지 때문에 후세엔 마초를 부정적으로 보기도 하였다. 일단 마초가 유비에게 귀부하자 유장이 그 소식을 듣고 바로 항복했다는 기록이나 비록 터무니없다 부정되었으나 산양공재기에서 마초가 유비에게 귀부한 다음에도 유비의 자를 부를 것이라고 기록된 것을 보면 당대 마초의 인식은 한 곳을 뒤흔들만한 제후의 반열로 여겨졌던거 같다.

  • 조조와도 자웅을 겨뤄 일시적이나마 조조를 위기로 몰아붙여 당대의 호걸로 여겨졌다.
  • 마초는 당대에 피아를 가리지 않고 영포, 팽월 등 고대의 맹장들과 비견되는 극찬을 받았다.
  • 조조에게 전멸에 가깝게 패하고도 금세 일어설 수 있었으며 그가 봉기하자 많은 세력들이 순식간에 호응했다.
  • 장로에게서 탈출해 유비에게 귀순할 때도 이민족인 저족의 영역을 경유했다.
  • 관우는 마초의 평판에 대해서 제갈량에게 편지를 보냈다가, 제갈량이 관우가 마초보다 낫다는 평가를 하자 흡족해 하였다.
  • 유비가 한중왕에 오른 뒤, 관우, 장비와 동렬에 세워졌다.

5.2 통솔

연의에서 마초는 한수의 지략에 의존하고 일신의 무력에 비해 통솔과 지략은 부족한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실제 마초의 군사적 행적을 보면 마초는 무력보다 어느정도의 전략적 식견에 의해서 군을 움직였으며 당세 최강의 조조의 군세를 상대로 상당히 선전하였다. 다만 중과부적으로 조조의 군세에 연거푸 패하고 유비 휘하에선 별다른 공적을 세우진 못하였으니 군사적 커리어가 아주 우월하다고 볼 여지는 없다. 마초의 군사적 커리어는 다음과 같다.

  • 조조의 배후를 공격하며 맹위를 떨치던 곽원을 쓰러뜨리다.
  • 서로의 이해 관계가 달라 와해되기 십상인 막강한 서북의 군벌들을 규합하여 구심점이 되어 군벌 연합체를 이끌었다. "이때 관서 지역의 군대는 천하에서 가장 날카롭고 강하였다"고 호삼성은 평하고 있다.
  • 배후를 노리고 도하하는 서황과 주령을 보고 마초는 군사를 몰아 공격하고 싶어했지만 한수는 선봉군은 그냥 통과시키고 조조 본대가 도하할 때 일격을 가하자는 일종의 유인책을 사용했다. 결과적으로 상황을 옳게 본것은 마초였고 관중 연합군은 서황과 주령에게 배후를 털리고 조조와의 대결에서 우위를 내주는 빌미를 제공하는 오판이 되었다. 조조는 마초의 통찰을 후에 전해 듣고 "마초 그놈이 죽지 않는다면 내가 죽어도 묻힐 땅이 없겠구나!"라고 탄식하였다.
  • 조조는 선봉군이 무탈하게 도하하는 걸 보고 방심한 상태에서 도하하다 마초군의 기습을 받아 거의 죽을 뻔했다. 조조가 탄 배의 사공이 화살에 맞아 죽을 정도였으니 그 긴박함을 짐작할 수 있다. 허저의 불굴의 호위 덕분에 다행히 살 수 있었다.
  • 가후의 책략에 속아 넘어가고 조조와의 연이은 야전에서 계속 패배했다.
  • 마초와의 전쟁을 통해 조조군 전사자가 만 단위였다는 기록도 있다.
  • 불리한 여건 속에서 당대에 손꼽히는 야전 사령관 하후연을 야전에서 패퇴시켰다.
  • 재기를 노렸지만 하후연, 장합과의 전쟁에서도 끝내 패해 근거지 양주를 영영 상실한다. 물론 이 부분은 불리한 조건 속에서 조조, 서황, 하후연, 장합같은 군재들을 상대로한 패배라서 변호의 여지가 있다.
  • 장로와 유비 밑에선 딱히 두드러진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군사적 커리어가 끊긴다.

종합해 보면 독자적인 군벌이었을 때는 충분히 뛰어났지만 타세력 치하로 흡수된 이후로는 군벌 우두머리 시절의 위용을 회복하지 못한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

5.3 패륜아?

우선 정사에서 마초의 일족이 위해를 당한 비극은 여러 번이다.

  • 마등과 한수가 서로 양주의 주도권을 두고 싸울 때 한수에 의해 마등의 처자가 해를 입었다.
  • 마초가 재기를 꾀하던 중 기성에서의 배신으로 인해 처 양씨와 자식들이 죽었다.
  • 마초는 아버지 등 자신의 일족이 적의 손아귀에 인질로 있는 상태에서 조조에게 싸움을 걸었다가 그 여파로 아버지를 비롯한 일족들이 몰살되었다.
  • 한중을 탈출해 유비에게 귀순할 때 첩 동씨, 아들 마추, 부하 방덕을 버리고 갔다.

부친을 비롯한 일족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사유 때문에 당대에 패륜과 냉혈한의 상징으로 종종 운위되었다. 아버지를 배신했다는 말을 여러번 듣는 것으로 보아 당대에 이미 그의 봉기를 비난하는 시각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 마초는 처음 한수와 결탁할 때, 한수에게 자신의 부친을 버리고 한수를 부친으로 삼겠다고 말했다.[19]
  • 양부가 마초는 아버지를 배신했다고 언급한다.
  • 강서의 어머니가 마초를 꾸짖으며 부친을 배반했다고 언급한다.
  • 장로는 마초를 높게 평가해 자신의 딸과 결혼을 시키려고 했으나 마초가 가족을 아끼지 않는다고 반대하는 의견을 듣고는 생각을 바꿨다.[20] 과연 마초는 유비에게 투항할 때 처자를 버리고 갔다.

그런데 마초 역시 인간이기에 일족을 사랑하지 않는게 아니었다. 이와 상반되게 일족을 아끼는 기록들도 보인다. 결코 인간적인 측면이 결여된 냉혈한 캐릭터는 아니었다.

  • 마초가 양주를 잃고 한중으로 도피했을때 눈치없이 정월을 쇠자는 첩 동씨의 동생 동충, 그러니까 처남의 부박함을 꾸짖으며 죽은 가족들을 생각하며 오열했다.
  • 임종을 앞두고 유비에게 일족이 마대 밖에 안 남았으니 종족의 제사가 이어지게 해달라고 서글픈 유언을 남겼다.

분명 결과적으론 어리석음의 말로이자 패륜이고, 당대에 마초를 바라보는 시선 역시 패륜아, 냉혈한이라는 부정적인 요소가 투영된 부분이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실제 역사상의 마초가 정말로 패륜아고 냉혹한이었는지는 반론의 여지가 있다. 정말로 마초가 의도적으로 패륜을 저질렀는지는 단정하기 힘든 구석이 있다.

반란의 이유에 대해서는 조조의 공작이라는 설도 있다. 마초가 애초에 자기 영역을 보존하려고 피치 못하게 봉기한 군벌이라는 시각을 강화한다면 다소 달리 해석될 여지가 있다. 이를 뒷받침 하는것이

장로가 한중을 점거하니 3월에 종요를 보내 장로를 토벌했다. 공이 하후연 등에게 하동(河東)에서 나와 종요와 합류하게 했다. 이때 관중(關中)의 제장들은 종요가 습격하고자 하는 것으로 의심하니, 마침내 마초가 한수, 양추, 이감, 성의 등과 함께 모반했다.

라는 무제기의 기록이다. 이에 따르면 관중 군벌이 조조가 종요로 하여금 한중을 토벌할 것을 명했을 때, 이것이 양주 군벌들을 자극하여 조조가 습격하려는 것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일각에선 이것을 바탕으로 조조가 이를 기회로 반란을 유도했다는 의견을 보이는데 실제로 학자 호삼성은 이를 조조의 허허실실에 의거한 계략으로 보았다.

그리고 마초가 유비에게 투항할 때 부하 방덕을 버리고 갔다고 비판하는 시각이 타당하다면 유비 역시 전예, 진군, 진등같은 특급 인재들을 버린 셈이 된다. 피치못할 사정으로 데려가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가족조차 데리고 가지 못했을 정도였는데 방덕과 같이 유비에게로 귀순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또한 마초가 일족을 죽음으로 몰고 내버린 건 사실이지만 이는 당대 군웅들에게는 별로 드문 일이 아니었다.

  • 원소는 일족의 죽음을 각오하는 걸 넘어서 아예 정치적으로 이용했다는 의혹까지 받고 있다.
  • 조조 역시 일족이 도겸의 군대에 몰살당하게 만드는 빌미를 제공했다.
  • 유비 같은 경우는 일족까진 아니더라도 수없이 처자를 잃었다.
  • 부하의 의견을 듣고 마초를 사위로 삼으려는 계획을 철회한 장로부터가 원래 유언의 부하였는데 유장이 유언의 뒤를 잇는 순간의 공백을 틈타 반란을 일으켜 오두미도를 중심으로 한중 일대를 독자 세력화하면서 모친을 비롯한 일족 전체를 갈아넣은 패륜아, 반골이다.[21]
  • 손권은 말년에 이궁의 변으로 일족을 말아먹었다.

이처럼 똑같은 처지의, 아니 더 막나가는 다른 군웅들 같은 경우는 별 비난이 없는데 마초의 이미지에만 패륜과 냉혈한 이미지를 투영시키는 것은 분명 균형잡힌 시각이 아니다.

5.4 무력

연의에서 일기토가 여러 번 나오기 때문에 삼국지 장수의 무력을 결정짓는 요소가 일기토라고 아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연의에서 나오는 일기토는 대부분 창작으로 정사에서 일기토에 대한 기록은 매우 찾기 힘들다. 정사의 염행과의 일기토에서 패배한 것만 봐도 연의에서 나오는 일기토로 일신의 무력을 따지기엔 어렵다. 염행이나 허저와의 일화만 봐도 마초 일신의 무력은 용장으로 보기엔 어렵지만 평양전투에서 보여준 용맹함을 보면 그가 어느 정도는 용맹한 장수였다는 점은 확실하다.

  • 전략에 따르면 마초는 사례교위(종요)의 독군종사가 되어 곽원을 토벌했는데 날아온 화살에 맞자 주머니로 자신의 다리를 감싼 채 싸워 곽원을 격파하고 참수했다 .그만큼 마초가 용맹하기에 기록될 수 있었던 기록인데 이마에 화살을 맞고도 멀쩡히 군대를 지휘했다고 기록된 관우의 일화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 정사에서 염행이라는 한수 수하의 듣보잡 무장에게 치명상을 입고 사경을 헤맸다는 기록은 삼국지 팬들의 기존의 인식을 뒤흔들어 놓았다. 위략은 촉한에 대한 왜곡된 시각이 있는 사료라서 촉한의 맹장 마초의 명성에 흠집을 내기 위함이고 또 그렇게 묘사된 대로 마초가 치명상을 입었다면 고대의 의료 기술로는 무장으로 재기가 불능하지 않겠냐는 의혹도 있다. 그러나 배송지가 사료로 게제한 만큼 당시 마초가 어렸고 염행 개인의 무력이 엄청나게 강했다고 봐야할 듯 싶다. 다른 해석으로는 '두들겨 패서 반죽음을 만든 것'이 아닌 '거의 죽일 뻔한 공격'이라는 설도 있다. 철저하게 원문[22]을 기초로 본다면 일방적으로 두들겨 팼다고 단언할 수는 없으며 싸우다가 우연히 날린 공격 한 번에 마초가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의 부상을 입었거나 목을 향하여 날린 치명적인 공격을 간신히 회피한 것으로 해석해도 딱히 거의 죽을뻔 했다는 서술이 딱히 모순은 되지 않는다.
  • 연의에서 마초가 이통을 죽이지만 창작이니 신경쓰지 않는다.
  • 정사에서 직접 조조 암살을 마음 먹었다가 조조 곁에서 호위하고 있던 허저를 보고 단념했다고 하는 에피소드처럼 보는 관점에 따라선 굴욕일 수도 있는 기록이 또 있다. 단 허저가 그만큼 용맹무쌍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집어넣은 기록일 수도 있다.
  • 연의에서 웃통을 벗은 허저와 일기토를 벌이는 장면이 있는데 창작이다.
  • 연의에서 만인지적 장비와도 맞먹는 무용의 소유자로 이미지가 정립되었지만 장비와의 일기토도 창작이다.

6 미디어 믹스

  1. 마등은 이각곽사에게 식량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하자 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패배, 장안에서 마등과 호응하려던 세력들이 모두 숙청당했다.
  2. 단 이 싸움이 끝난 뒤에도 마등은 한수를 비롯한 관중의 군벌들과 산발적으로 계속 대립했고 관중 군벌들은 이합집산을 거듭했다.
  3. 당시 원씨 형제가 조조의 하북 진군을 일시적으로 막아내는데 성공하여 전열을 고를 수 있게 되자, 별도의 경로를 통해 조조의 배후를 칠 계획을 세운 것이다.
  4. 당시 종요 혼자만의 힘으로는 흉노와 곽원 양쪽을 모두 상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였다.
  5. 그만큼 마초가 용맹하기에 기록될 수 있었던 기록인데 이마에 화살을 맞고도 멀쩡히 군대를 지휘했다고 기록된 관우의 일화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6. 마등이 받은 위위라는 직책은 삼공 바로 아래로 매우 높은 직책이다. 그러나 마초가 받은 편장군 벼슬은 명예직에 불과하다.
  7. 사서에서는 군벌들의 총 병력이 10만이라고 적고 있으며 액면 그대로 믿지 않더라도 6~7만 이상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8. 마침내 조조군이 위수를 도하하자 전황은 점점 마초에게 불리해진다.
  9. 부동의 1인자인 조조와 달리 군벌 연합의 수장으로서 서로 이해가 대립되던 군벌들을 무마시키고 조정해야 했던 마초 입장에서는 이도저도 아닌 장기전만큼 위험한 것은 없었다.
  10. 아버지와 두 동생을 비롯한 마초의 일족은 모두 이때 죽어 마초에겐 사촌 동생 마대만 남게 된다.
  11. 막강한 군벌들이 대부분 죽거나 투항했지만 호족들과 이민족들까지 조조에게 복종하는 건 아니었다.
  12. 거듭된 전란으로 피폐해진 서북 지역의 민심은 그곳을 통제하던 군벌들이 사라지자 극히 유동적으로 변했고 조조의 영토라기보단 분쟁 지역에 가까웠다.
  13. 양부는 마초의 호의로 살아남았는데 관청을 차렸으니 군무를 살피고 사무를 관장할 행정관이 필요해 남겨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는 실수였다.
  14. 장안에 있던 하후연은 조조의 재가를 받느라 제때 원군을 대지 못했다.
  15. 하후연의 퇴각으로 한동안 농서에서 마초를 견제할 만한 군세는 사라지게 된다.
  16. 자를 부르는 것은 상대방과 신분이 동등하거나 높을 때 가능하며, 하급자가 상관의 자를 부르는 건 불경하다 여긴다. 부하가 상관을 부를 땐, 직책으로 부르는게 일반적이다.
  17. 배송지는 당시 관우는 형주에 있었는데 왜 유비, 장비랑 같이 익주에 있냐고 이 기록의 신빙성을 부정하였다.
  18. 이를 통해 마초가 유비군 내에서 관우만은 못해도 장비나 황충보다는 높은 대우를 받았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19. 심지어 한수가 마등의 처자식을 죽인 적이 있는데도 그와 결탁했다.
  20. 마초의 전처가 적에게 죽었는데 장로의 딸이라고 그런 일을 당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는 뜻이다.
  21. 단 이 부분은 장로 입장에서 폐부를 후벼파는 치명적인 측면이기에 더더욱 마초에게 딸을 줄 엄두가 안났을 것이다. 동족혐오?
  22. 行嘗刺超,矛折,因以折矛撾超項,幾殺之 어떤식으로 '거의 죽였다'는 설명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