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테쿰세 셔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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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테쿰세 셔먼이 활약한 남북전쟁에 대해서는 남북전쟁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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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남북전쟁 이후 찍은 사진이고 팔에 단 검은 리본은 링컨 대통령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달았다.

1 개요

William Tecumseh Sherman.
1820년 2월 8일 ~ 1891년 2월 14일

미국 남북전쟁 당시 연방군 육군 장군. 미국 제일의 재배기

테쿰세의 저주는 그와는 상관없으나 셔먼의 아버지가 유명한 원주민 족장처럼 미국의 절반을 작살내라고 강인해지라고 테쿰세의 이름을 붙였으니 관련이 아주 없지는 않다. 특히 그에게 초토화가 된 남부지방의 입장에서 본다면 저주가 아니라 지옥이 생각날 수준이었다.

1820년 2월 8일 오하이오 주 랭커스터 시에서 판사아들로 태어났으나 9세에 아버지가 병으로 죽는 바람에 재혼한 어머니와 양부 밑에서 자랐다.[1]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졸업하고 육군 장교로 임관해 미국-멕시코 전쟁에 참전했으나 병참 장교와 행정 역할이었기에 전투 경험이 없어 성과와 명성은 미미했다. 이후 소령으로 예편한 뒤 여러 직업을 전전했지만 제대로 되는게 없었다. 친구들의 추천으로 재입대하여 루이지애나 주방위군의 육군사관학교장으로 일한다.역시 군대 체질 그러던 중 루이지애나가 미 연방에서 탈퇴하자 바로 그만두고 세인트루이스로 가서 잠시 철도회사일을 한다. 이후 남북전쟁이 발발하여 연방 육군에 여단장으로 복귀하면서 그의 삶은 빛나기 시작했다.

이 때 셔먼의 연방 육군 재입대도 당시 미의회 의원이었던 동생 존 셔먼의 입김이 작용했다. 존은 이후 미 국무장관자리까지 올라가 셔먼법을 재정한다. 당시 군에 대한 정치인들의 영향력은 대단했는데 그랜트 장군도 링컨 대통령의 도움이 있었기에 해임 위기를 면하고 무사히 진급했다.

야전 능력은 그야말로 전설적이라서 셰리던, 율리시스 S. 그랜트와 더불어 북군의 3대 명장이었다. 하지만 그의 능력은 전략가에 치중되어 전술가로서의 능력만 따진다면 별로 보잘 것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싸우지 않고 이기는 데는 능했지만[2] 싸움에서는 평범한 수준이라고 봐야 한다. 순수한 전술가로서의 기량은 '치카모가의 바위'로 불리는 조지 H. 토머스 쪽이 셔먼보다 더 유능하다고 할 수 있다. 몇 번이고 전군이 붕괴되는 상황에서도 부대를 유지하여 반격의 기회를 만들었기 때문. 하지만 토머스는 버지니아 출신이었고, 또한 상대적으로 그랜트의 지원를 덜 받았다는 게 한계로 작용했다. 게다가 남부 육군에 워낙 뛰어난 전술가들이 많다보니 남북군을 통틀어 평가하자면 평균보다 조금 더 나은 정도였다. 전술가로서는 평범하다는 평가를 받은 조지프 존스턴 장군을 상대로도 서부전역에서 계속 불리한 교환비로 전투에서 졌다.

그러나 그의 전략가적 능력, 특히 전략적 식견은 남북군 어떤 장군도 비견될 수 없을 정도로 넓고 선진적이었다. 이는 1864년의 대결로 셔먼의 숙적 취급을 받는 조지프 존스턴의 경우를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는데, 존스턴은 전략적 식견 측면에서 셔먼 장군의 의도를 읽어낼 수는 있었고 실제로도 계속 우월한 교환비로 계속 승리하여 1:3 정도 되던 남부 육군과 북부 육군의 비율을 거의 1:1.5까지 끌어내렸다. 그러나 셔먼은 계속 지면서도 꾸준히 애틀랜타까지 진격했고, 셔먼이 애틀랜타의 코 앞까지 진격하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남부연맹 정부는 존스턴을 해임했다. 존스턴은 지치고 규모가 줄어든 북부 육군을 애틀랜타 근처 유리한 지형에서 쳐부수려 준비하고 있었으나 이는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존스턴 해임 후 남부 정부는 좀 더 공격적인 성격의 후드 장군을 서부전역 사령관으로 임명했는데, 이런 도박은 어찌 보면 남부로써는 근거가 있는 선택이었다. 이전에 동부에서도 존스턴이 전투에서 계속 이겼음에도 북부 육군이 남부연맹의 수도인 리치먼드 코앞까지 진격한 상황이 벌어졌는데 이 때 존스턴을 해임하고 좀 더 공격적인 성향의 로버트 리를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재미를 본 전적이 있었다. 어쨌든 전임자였던 존스턴이 야금야금 북군을 갉아먹어놓은 것도 있고, 남부 육군이 애틀랜타를 지키기 위해서 주위에서 병력을 닥닥 긁어모은 것도 있어 후드는 더 우세한 병력으로 애틀랜타 전투에 임할 수 있었으나, 셔먼을 쫓아내기 위해서 무모한 공격을 계속 감행한 끝에 전술적, 전략적 양쪽 면에서 다 패했다. 어딜 가나 다 이긴 싸움 말아먹는건 높으신 분들 주특기 물론 북군 입장에선 땡큐였지만

2 바다로의 진군

그의 전략가적 능력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근거는 현대전을 정의하는 총력전에서 상대방의 전투수행역량과 의지를 뭉개버리는 초토화 전술을 구사한 것이다. 청야전술 파.괘.한.다!

전략기동의 달인으로 남북전쟁 당시 남부연합의 중심지 조지아사우스 캐롤라이나 를 말그대로 쑥대밭사실은 도 안 자랄 폐허으로 만드는 일종의 초토화 전술인 "셔먼의 바다로의 행진진군"(Sherman's March to the Sea)을 선사했는데,이분이랑 잘 맞을 것 같다 시기를 무대로 한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의 클라이맥스에서 불타는 애틀랜타 거리가 그의 전술이 어떤 모습으로 진행되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정확하게 말하면 여기에 묘사된 애틀랜타의 파괴는 셔먼 본인이 한게 아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애틀랜타 불바다 상황은 바다로의 진군 전에 애틀랜타 전역에서 남군 육군 사령관 후드가 퇴각하는 와중에 청야전술로 군수물자와 군사시설에 불을 지르고 도망갈 때의 상황이다. 그 후에 셔먼이 바다로의 진군의 시작을 개시하면서 병원과 교회만 남기고 다 태워먹었다는데 이것도 사실이 아니다. 후방은 조지 H. 토머스에게 맡기고 본인은 빠르게 당시 조지아의 최대 항구였던 서배너로 동진하여 바다를 장악한 연방 해군의 지원을 받으러 갔다. 물론 중간에 가면서 툭하면 불지르고 때려부수고 파괴하면서 다녔지만. 이렇게 함으로써 셔먼은 남부 경제를 개발살내고, 남부인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셔먼은 휘하 병력들에게 일부러 20일치 식량만 준비시키고, 나머지는 필요한 식량 및 물건들은 모두 현지조달을 지시했다. 무타구치 렌야? 이런 명령을 내린 이유는 그 때까지 철도에만 보급을 너무 의존해서 북부 육군이 제대로 진격할 찬스를 놓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앞서 설명한 남부의 전쟁수행능력 말살에 주 목적이 있었다. 따라서 이런 명령을 받은 장병들은 당연하게도 명령서의 허용범위보다 더 많이 약탈하고 더 많이 파괴하고 다녔으며,[3] 결국 북군은 지나치는 곳마다 전쟁 수행에 필요하다고 여기는 모든 것을 파괴하였다.[4] 조지아 주를 가로지르면서 지나간 곳을 인간계에서 헬게이트로 만드는 동안 셔먼의 북부 육군이 남긴 것은 철도레일뿐이었는데 이마저도 확실하게 못 쓰게 하려고 녹여서 나무에다가 둘러놓았다(...). 이것을 보고 남부인들은 셔먼의 넥타이라고 불렀다. 게다가 위에서 언급한 존스턴은 숫적으로 남군이 불리한 상황에서[5] 포레스트가 지휘하는 기병대를 시켜 후방에서 북부의 물자를 약탈하는 작전을 지속적으로 폈는데, 이에 북군은 그 보복으로 지나가는 마을마다 더 씐나게 약탈했다.


정ㅋ벅ㅋ!


얼릉 부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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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랄한 새끼

남부에서 셔먼이 한 짓이 얼마나 심했는지 남부에서 셔먼은 증오의 대상이 되었고 남부인들은 그에게 북부의 악마, 파괴자 양키 등 온갖 저주섞인 별명을 붙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셔먼이 가장 많이 박살낸 사우스캐롤라이나는 셔먼이 꽤 오래 살았고 무척 좋아하는 고장이었다고 한다. 사우스캐롤라이나는 남북전쟁의 시발점이 된 곳이기도 한데, 분리독립운동이 한창이던 당시 사우스캐롤라이나에 머물던 셔먼은 전쟁이 나면 다 작살날 때까지 싸워야 할 거다라고 지인에게 경고했는데, 결국 그걸 자기 손으로 직접, 그것도 바로 그곳에 와서 감행한 셈이 되었다(...).

이 때문에 '구 남부연합 출신에게 셔먼에 대한 증오는 뿌리가 매우 깊어서 신형 전차에 M4 셔먼이란 이름이 붙자 탑승을 거부하는 전차 승무원 나올 정도였다'는 말이 나올 정도. 다만 이 일화는 거짓말이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M4라고만 불렀고 셔먼이나 스튜어트라는 명칭은 영국에서 쓰던 것이었다. 그 어디에도 미국 남부사람들이 타기를 거부했다는 공식기록은 없다. 이 일화는 벨튼 쿠퍼의 책 데스 트랩에서 인용된 오류이다.

셔먼이 어찌나 심하게 남부를 파괴했는지 남부가 입은 손실은 그 당시 1억 달러였다. 이를 현재의 가치로 환산하면 무려 100억 달러(10조 원 이상)에 달한다. 이 피해를 복구하는 데만도 남부전쟁이 끝나고 수십 년은 족히 걸렸다. 복구 사업의 대부분이 셔먼이 때려부순 걸 다시 복구하는 거였다고 하니(...). 그러나 이 1년 여 간의 전략기동중에 약 6만 규모인 그의 부대가 입은 피해는 100여 명의 전사자와 600여 명의 부상자에 지나지 않았으며, 남군에 대해서도 최대한 달아나거나 항복하게 만드는데 주력하여 많은 인명을 해치지는 않았다. 물론 파괴활동 중 저항만 안하면 민간인을 학살하지도 않았다. 말 그대로 남부의 물자와 시설을 완전히 파괴하고 잿더미에 모든 것을 잃고 망연자실한 사람들을 남겨놓는 것이 셔먼의 목적이었다.

그리고 자국의 기반시설이 완전히 파괴되고 자신들의 가족들이 셔먼의 손아귀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두려워진 남부 육군 장병들의 탈영도 늘어났는데, 1865년 초반에 무려 10만 명이 탈영했을 정도였다.

결국 셔먼의 예상대로 이런 초토화 작전에 시달린 남부는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능력을 상실했고, 이는 남부연합의 수도였던 버지니아리치먼드 근처에서 대립하던 리와 그랜트의 싸움에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당장 탈영이 없기로 이름이 높았던 리의 군대에서 사우스캐롤라이나 등 셔먼이 파괴한 후방 주에 속한 장병들이 자신의 고향을 지키기 위해 탈영하기 시작했으며,[6] 리의 군대는 커녕 수도인 리치먼드조차 식량과 무기, 장비가 다 떨어져서 더 이상 리의 남군이 전투를 지속할 수 없었던 것이다. 주요 전장으로 역사적인 명전투들이 벌어지던 동부와 달리, 전쟁의 향방을 결정지은 것은 의외로 셔먼의 서부전역이었다는 평.

율리시스 S. 그랜트가 정식 사령관인 조지 미드를 직접 제어했던 포토맥군은 일견 무모해 보일 정도로 리의 남군에게 계속 싸움을 걸었고 종종 많은 손실을 입었지만, 북군의 최고의 강점인 무한한 보급역량을 잘 살리고, 남군의 장점인 우수한 장교단을 봉쇄하고 약점인 빈약한 보급을 압박한 것이 효과적인 수단임은 틀림없었다. 이렇게 북버지니아군 주력이 붙들려서 소모되어 가는 동안 서부에서 셔먼의 테네시군이 남부 중심부를 휩쓸어버렸다.[7] 서부전역의 존스턴은 증원을 요청했지만,[8] 남부에는 더이상 그럴 자원이 남아있지 않았다. 이 일을 가리켜 링컨 대통령은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그랜트가 리라는 곰에게 손을 물려 있는 동안, 셔먼은 그 곰의 가죽을 산 채로 벗겨 버렸군."

3 비판

셔먼의 초토화 전술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역사학자들은 셔먼이 '바다로의 행진'을 개시하기 이전부터 전세는 북부 쪽으로 기울어 있었으며, 공업생산력이 북부에 비해 크게 뒤떨어진 상태에서 대부분의 군수물자를 수입에 의존하던 남부의 실질적 전쟁지속능력이 해군의 패배로 인한 제해권 상실과 뒤이은 오랜 해상봉쇄로 이미 한계에 달해 있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식량의 경우도 이미 전시체제 하에서 노동가능 인구의 대부분과 흑인 노동력의 감소[9]농업이 황폐화되어 가고 있었던 점을 생각하면 애초에 파괴를 하든 말든 북군 점령지역에서 남군으로 군량미 송출이 제대로 될 수 없었다.

민간인 피해도 난징대학살 수준의 대대적인 학살만 없었다 뿐이지 사상자 수는 결코 적지 않고, 초토화 전술이라는 명목 아래 수없는 약탈, 방화, 강간[10] 등 거의 전쟁 범죄에 준하는 폭력이 가해졌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래에 인용된 명언들처럼 그저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한 필요악이었다고 넘기기는 좀 많이 애매한 수준이다. 애틀랜타의 파괴가 가장 유명하게 회자되기는 하지만 그건 당시 애틀랜타가 남부의 제1도시였던 상징성 때문이지, 딱히 애틀랜타가 특별히 더 잔혹히 유린당했기 때문은 아니다. 사실 위에도 썼지만 북부 육군만 이런거 아니다. 애틀랜타가 불바다가 된 건 셔먼 자신이 직접 한 게 아닌 남군이 청야전술로 불지르고 후퇴한 게 이유이니 억울한 상황이다. 게다가 남군도 북군 포로나 연방에 붙은 민간인들을 상당히 잔혹하게 고문하고 죽인 기록이 있다. 또 남군 역시 북부의 물자보급선을 끊기 위해서 우월한 기병대를 이용, 계속해서 북군이 장악한 도시와 마을, 항구나 기차역들을 약탈하고 다녔다. 허나 셔먼이 남부에 입힌 피해가 어마어마했다는 것은 사실이고, 실제로 당시의 기록들을 보면 정말 같은 나라 사람이 맞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

같은 미국인들끼리의 남북전쟁에서는 그나마 자비를 베풀어주었지만 아메리카 원주민들과의 전쟁에서는 그런거 없고 더 심했다.

"we must act with vindictive earnestness against the Sioux, even to their extermination, men, women and children."

"우린 수족에 대해서 진지한 복수심을 지니고 행동해야 합니다. 남자건, 여자건, 애건 싸그리 씨를 말리더라도요."

"hostile savages like Sitting Bulland his band of outlaw Sioux...must feel the superior power of the Government."

"시팅 불과 그의 무법자 수족 같은 적대적인 야만인들에게는 정부의 우월한 힘을 느끼게 해줘야합니다."

보다시피 수족에 대해서는 그 역시 전쟁광 같은 태도로 나오고 있다. 다만 토벌이 끝나자 나바호족에게는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 땅(원래 영토의 알짜배기는 뺏겼지만)을 확보해 주고 남은 땅에서는 정말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지원해 주었고 그 덕에 나바호족은 지금 최대 부족 중 하나가 되었다.[11] 그렇다고 해도 매우 호전적인 발언인 건 사실이지만... 어쩌면 그 당시 미국인이 할 수 있는 생각과 관점의 한계였을지도 모른다.

4 전후 행적

남북전쟁 이후 대통령에 당선된 율리시스 S. 그랜트는 그를 미국 역사상 두 번째 육군대장으로 진급시키고 총사령관의 자리에 올렸으며, 셔먼은 그 후 15년간 그 자리를 유지했다.

이후 남북전쟁에 관해 그가 쓴 회고록은 명저로 평가받아 문인으로 명성을 얻기도 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편지 쓰기를 좋아해 거의 평생, 전쟁중에도 매일 편지 여러 장을 쓰고 받았기에 필력이 상당한 수준이었다.

그의 장례식 때는 남북전쟁 당시 적수였던 남부 육군의 조지프 존스턴도 참석했는데, 비가 오는 추운 날인데도 경의를 표하기 위해 모자를 벗고 있었다. 존스턴의 친구가 감기에 걸릴 수 있으니 모자를 쓰라고 권유하자 존스턴은 '만약 내가 관 속에 있고 빌리(윌리엄의 애칭으로 셔먼을 말한다.)가 자리에 있었다면 빌리 역시 모자를 벗고 있었을 것'이라고 답하였다. 정말?[12] 다만 그 때문에 존스턴은 폐렴에 걸려서 몇 주 후에 사망했다. 죽은 셔먼이 산 존스턴을 잡았다

리델 하트와 같은 전사가에게 '최초의 현대적 장군'이라는 평을 받았다. 총력전(Total War)의 선구자로 칭송받기도 한다.

휘하 육군 장병들은 그를 '빌리 아저씨'라 불렀다고 한다. 빌리는 셔먼의 이름인 '윌리엄'의 애칭.

가족으로는 아내 엘레노어와 8명의 자녀, 11명의 형제들이 있다.

5 명언

"Its glory is all moonshine. It is only those who have neither fired a shot nor heard the shrieks and groans of the wounded who cry aloud for blood, for vengeance, for desolation. War is hell."

"전쟁의 영광이란 건 완전히 헛소리다. 오직 총 한 번 쏴본 적 없거나 부상병의 비명과 신음소리를 듣지 않은 사람들만이 큰 소리로 더 많은 피와 복수, 파괴를 외친다. 전쟁은 지옥이다."


"War is cruelty. There's no use trying to reform it, the crueler it is the sooner it will be over."

"전쟁은 잔악행위이다. 그걸 바꿀 필요는 없다. 잔인하면 잔인할수록 더 빨리 끝나니까."


"You cannot qualify war in harsher terms than I will. War is cruelty, and you cannot refine it."

"나보다 더 가혹하게 전쟁을 정의할 수는 없을 겁니다. 전쟁은 잔학행위이며 아무도 그걸 개선할 수 없습니다."


This war differs from other wars, in this particular. We are not fighting armies but a hostile people, and must make old and young, rich and poor, feel the hard hand of war.

"특히 이 전쟁은 다른 전쟁과 다릅니다. 우리는 군대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적대적인 국민과 싸우고 있으며, 늙건 젊건, 부자건 가난하건 전쟁의 고통스런 손길을 느끼게 해 주어야만 합니다."

같은 오하이오 주 출신인 미 공군대장 커티스 르메이 장군의 "무고한 민간인 따위는 없다(There are no innocent civilians)."와 맞먹는 후덜덜한 발언. 그래서 미국은 이들의 업적을 기려 미 해군 궁극의 파괴병기 삼지창의 운반수단인 SSBN의 최신형은 오하이오급으로 이름지었다

하지만 자국 병력의 보존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적측 민간인이건 도시건 뭐건 다 때려부쉈던 르메이와 장군과 달리, 셔먼의 경우에는 최대한 안 하되, 하려면 끝장을 봐야한다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실제로도 셔먼은 전쟁을 싫어했으며(이 점에선 그랜트와 비슷하다), 무의미한 파괴와 학살을 가장 증오했다. 그가 파괴와 학살을 좋아했다면 애당초 남군의 존스턴이 장례식에 참석하기는커녕 잘 죽었다고 축제를 벌여도 시원치 않았을 것이다.

그의 전쟁에 대한 생각이 어땠는지 그가 죽기전에 남긴 말이 잘 묘사하고있다.

There is many a boy here today who looks on war as all glory, but, boys, it is all hell.

"전쟁을 명예로운 일처럼 생각하는 많은 젊은이들이 있다. 그러나 젊은이들이여, 그것은 모두 지옥이었다."

I’ve been where you are now and I know just how you feel. It’s entirely natural that there should beat in the breast of every one of you a hope and desire that some day you can use the skill you have acquired here.

Suppress it! You don’t know the horrible aspects of war. I’ve been through two wars and I know. I’ve seen cities and homes in ashes. I’ve seen thousands of men lying on the ground, their dead faces looking up at the skies. I tell you, war is Hell!
"나 또한 자네들 자리에 있던 적이 있고 지금 자네들 기분이 어떤지 정확히 알고 있네. 자네들 가슴 속에 언젠가 여기서 배운 것들을 바깥에서 써먹을 수 있으리란 희망 내지는 소망이 두근거리고 있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야.
집어치우게! 자네들은 전쟁의 끔찍한 면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네. 전쟁을 두 번 겪어보니 확실히 알겠더군. 난 잿더미가 된 도시와 집들을 보았네. 죽어버린 얼굴로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는 수천의 시체도 보았지. 똑똑히 말해두는데, 전쟁은 지옥이야!"
-1879 미시건 주방위군 육군사관학교 졸업반 연설의 출판시의 변형-

In our Country...one class of men makes war and leaves another to fight it out.

"우리나라에서, 한 계층의 인간들은 전쟁을 벌이고 다른 계층의 인간들을 끄집어내서 싸우게 한다."

군사 관계자들에게는 금과옥조라 할 만하다. 특히 군주국끼리의 전쟁이 아니라 민주 공화국끼리의 전쟁[13]을 처음으로 드러낸 발언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이에 대해 군사연구가 데이브 그로스먼(D.Grossman)은 자신의 저서 "전투의 심리학" 에서, 셔먼이 틀렸다는 것은 아니지만 진심으로 전투 자체를 원하고 즐기는 군인들도 있을 수 있으며 그들을 이상한 사람 내지는 뭔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처럼 취급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한편 셔먼은 정치인들에게 러브콜을 받았을 때도, 이렇게 말하며 거절했다.

"If nominated I will not run; if elected I will not serve."

"만약 후보로 지명된다면, 난 유세를 안할거요. 만약 당선되면, 일을 안할 거고."

한편 기레기들을 매우 증오했다.

"I hate newspapermen. They come into camp and pick up their camp rumors and print them as facts. I regard them as spies, which, in truth, they are. If I killed them all there would be news from Hell before breakfast."

"나는 신문기자들을 증오한다. 그들은 막사로 처들어와 뜬소문을 모아서 사실인양 기사를 낸다. 나는 그들을 스파이로 간주했고, 실제로 그러했다. 만약 내가 그 작자들을 다 잡아 죽인다고 해도 그들은 아침식사를 먹기 전에 지옥에서 기사를 내보낼 것이다."

6 여담

후에 그의 이름미국 전차M4 셔먼, 구한말 대동강에서 난동 부린 상선 제너럴 셔먼호,[14] 그리고 그의 이름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크고 무거운 나무세쿼이아중 가장 무거운 나무에 붙여졌다.
  1. 이 양부는 딸까지 있었는데, 셔먼은 이 양부의 딸을 사랑하게 되어 양부가 죽고나서 결혼하게 된다.
  2. 당연히 이순신이 전술적 능력이 모자란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이순신은 동서고금에 비할 바가 거의 없는 천재적 지휘관이다.
  3. 게다가 이들 중 병사들은 많은 수가 사면을 대가로 징병된 범죄자 출신이니 당연히 명령을 핑계로 온갖 행패를 부렸다.
  4. 단 사람만 빼고. 정확히는 민간인 학살 하지 않았다. 남부의 군인과 민간인들이 항복하면 죽이지 않고 받아주었다. 물론 저항했다간 얄짤없었다.
  5. 애초부터 인구에서 북부가 남부를 압도하여 숫자가 불리했다.
  6. 이 때문에 남군은 민병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러한 행태는 전형적인 민병대식 행태이기 때문이다. 정규군은 자신의 고향이 박살나더라도 이를 악물고 전략적인 목표에 집중하지만, 민병대는 전쟁의 전략적 목표보다는 자신의 고향을 더 중시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7. 사실 셔먼은 서부를 진군하면서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았다. 셔먼이 조지아의 가장 큰 항구인 서배너를 향해 바다로의 진군을 시작하자, 애틀란타 전역에서 패배했지만 아직 병력을 보존했던 후드는 셔먼이 서배너로 진군한다는 걸 알고 "헐ㅋ 그러면 우리도 질수 없뜸. 북부의 배후를 친다!"하고 오히려 북쪽으로 진군하였다. 그리고 후드의 남군이 셔먼이 남겨뒀던 조지 H. 토머스 휘하 북군에게 프랭클린-내슈빌 전투에서 완전히 박살나며 서부전역의 남군은 거의 말소된다.
  8. 이 시점에서 후드가 서부전선의 남부 육군을 프랭클린-내슈빌 전투에서 완전히 말아먹는 바람에 그 잔존병을 이어받은 존스턴의 부대는 전투수행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다. 이에 리는 뻘짓하지 말고 동부전선에 합류하라고 했으나 결국 합류하러 가던 도중에 전쟁이 끝났다.
  9. 북부로의 이탈뿐 아니라 남부에서도 자유토지를 약속하며 흑인의 입대를 대대적으로 장려했다. 그렇게 흑인들이 서로 총을 겨누는 안습한 사례도 제법 많았다.
  10. 이쪽은 셔먼의 철저한 통제 덕에 거의 없었다고 한다. 강간 피해는 아마 남부 쪽에 의해 부풀려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당시가 인종차별이 만연한 시기이다 보니 강간 피해를 당한 것은 주로 흑인 여성이었다. 왜냐하면 백인 여성을 강간했다가 걸릴 경우 가차없이 처벌했기 때문이다.
  11. 원주민과의 전쟁사를 살펴보면 아메리카 원주민과의 전쟁에 앞장선 연방 육군 장교들이 전시 상황이 아닐 때는 오히려 원주민에게 우호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사례가 꽤 있다. 어떤 식으로든 자주 접하다보니 자연스레 원주민들의 사정에 밝아졌고 지역 민병대와 달리 원주민들과 직접적인 이해, 원한관계로 얽혀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12. 전쟁 이후 자주 서신을 주고 받았고, 존스턴이 워싱턴 DC로 여행 올 때마다 저녁 식사를 통해 서로 만날 정도로 친했다고 한다. 사실 역사를 보면 의외로 적대 세력이었던 장교들끼리 전후에 사이가 친한 경우가 많다. 당장 2차 세계대전에서 그 나치 독일군으로 복무한 장교들도 전후 연합군 군인들과 친하게 지낸 사례가 적지 않다. 아돌프 갈란트라든가. 심지어 그 헤르만 괴링조차도 사형이 집행되기 전 자기를 담당하던 미 육군 소위와 친구먹었으며, 그 친구의 도움으로 스스로 음독자살했다. 자세한건 해당 항목 참고.
  13. 이게 문제가 되는 게, 범국민적인 전쟁수행 의지에 기반한 국민군끼리의 전쟁총력전의 양상으로 진행된 것은 남북전쟁이 처음이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국민들이 먼저 전쟁을 요구하고 정부가 이에 질질 끌려간 사례는 사실상 없었으며, 이후에도 매우 드물다.
  14. 브루스 커밍스 박사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가리켜 '애틀랜타의 원한을 갚았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조선인이 왜 남부인들의 복수를? 사실 미국의 역사서술에서 자주 보이는 유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