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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1일 (수) 15:47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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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여수를 탈환하는 진압군
진압군에게 생포된 반란군
불타는 시가지에 돌입한 진압군
진압군에게 무저항 의사를 표시하는 민간인
1 소개
정식 명칭은 여수·순천 사건이다. 1948년 10월 19일에 일어나 10월 27일에 완전히 진압되었다. 한때는 "여수·순천 반란사건"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여수와 순천의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단지 두 도시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가 일으킨 사건이라 하여 공식명칭에서 반란이라는 단어가 삭제되었다.[1] 다른 명칭으로는 "여수 주둔 14연대 반란사건", 혹은 그냥 "14연대 반란사건"이라고도 부른다. 북한에서는 여순병란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여수, 순천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주둔 군부대의 사병이 주축이 되어 일어난 반란이니까. 남부군을 쓴 이태가 신동아에 기고한 실록의 제목도 이것이다.
여순사건은 좌익계열의 군인들이 제주 4.3 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여 시작되었으나, 사건의 핵심 주동자가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밝혀지지가 않아서 여러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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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이 미군과 짜고 남한내 좌익역량을 노출, 소멸시키기 위해 일부러 일으켰다는 설(극좌측 주장)[2] - 애국 제주도민 학살을 위한 출병을 거부하고 친일 경찰과 맞서 싸우기 위해 일어났다는 설(좌파측 주장)
- 남로당도 모르게 우발적으로 좌익부사관 지창수가 일으켰다는 설(다수설)
- 북한의 지령을 받고 좌익장교 김지회가 일으켰다는 설(우파측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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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의 지시를 받고 남한에 혼란을 일으키기 위해 前연대장이 일으켰다는 설(극우측 주장)[3]
일단 극좌(김일성측)들과 극우(이승만측)들의 잠꼬대는 여백이 아깝기는 하지만 '정부의 반응' 항목에서 살짝 다루고, 다수설이나 우파측 주장의 경우 진행과정은 비슷하지만 북한의 사전지시가 있었는지 여부와 반란군을 지휘한 이현상이 언제 도착했는지의 차이가 있다. 강동정치학원에서 유격훈련을 받던 이현상이 반란 소식을 듣고 급히 남한으로 내려갔다는 설도 있고, 이미 3개월 전에 수료하여 곳곳에 흩어진 조직 지도를 위해 지리산에 있었다는 설도 있다.
여러 설을 다루다 보니 여순사건을 김지회가 일으켰는지 지창수가 일으켰는지 조금 꼬여 있는데 이해 바람. 어디까지나 여순사건은 지창수가 일으켰고, 김지회는 나중에 말려 들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어쨌든, 이 사건은 한국전쟁에 앞서 대한민국이 반공국가로 자리잡는 데에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
1.1 14연대 창설
해방정국 당시 군에는 크게 3개의 좌익 조직이 있었다.
하나는 남로당 중앙당에서 직접 관할하는 장교들의 조직인 ‘콤 서클’
하나는 남로당 지방 도당에서 관할하는 병사들의 조직인 ‘병사 소비에트’
마지막으로 남로당을 견제하기 위해(...) 북로당이 경상남도 일대에 조직한 ‘인민혁명군’이다.
남로당에서 군 안에 두 가지 서로 다른 조직을 만든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장교들의 인사행정은 모두 서울에서 하며 인사이동이 심하기 때문에 남로당 중앙당에서 직접 관할한다. 그러나 사병들의 경우 지방에서 모집하고 인사이동이 거의 없기 때문에 지방당에서 관할한다.
2. 서로 선을 다르게 하면 보안상 유리하다. 이 때문에 남로당은 장교 조직과 병사 조직을 별도로 조직, 관리했으며, 콤 서클과 병사 소비에트는 같은 부대 소속임에도 서로의 존재를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세 번째 조직인 인민혁명군은 무려 1천5백93명에 달하는 지하세력으로 콤 서클, 병사 소비에트와 달리 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민중 깊숙이 침투해 있었다. 그런데 일선 행동대가 상부의 지령도 받지 않은 채 임의로 ‘대구 10.1사건’에 편승하였다가 일망타진되어 47년 초 붕괴되었다. 북로당의 침투에 반발한 남로동 측에서 인민혁명군조직을 대한민국 경찰청(...)에 제보했다는 설도 있다. 인민혁명군이 붕괴되자 북로당 조직부와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내무국 정보처에서는 강진을 대표책임자, 정보처 요원 김일광을 실질적 총책으로 한 제2차 인민혁명군을 조직하려고 한다. 이들은 주로 국방경비대, 해안경비대, 경찰관계 세포조직신을 내선으로 하고 남로당에 포섭되어 있지 않은 사회주의자와 그밖에 청년단체 계통조직선을 외선으로 한다.
여순사건의 두 주역인 4연대 정보과 선임하사관 지창수 상사는 ‘병사 소비에트’에 소속되어 있었고, 김지회 중위는 북한의 평양학원 대남반 출신 공작원으로, 지령을 받고 남파되어 국방경비사관학교 3기에 입교한 북측 공작원이다. 김지회가 ‘콤 서클’에 침투 할 때는 좌익장교들은 그를 남로당으로 알았고, 병사 소비에트는 김지회를 우익 장교로 알았을 정도로 보안이 철저하였다. 김지회는 국방경비사관학교 시절부터 교육생들을 콤 서클로 포섭 하였고, 1연대 2대대장 부관을 거쳐서 전남 광주에 창설된 제4연대로 전속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제2차 인민혁명군의 실질적인 총책인 김일광에게서, 김지회가 이끄는 콤 서클을 인민혁명군과 합작하라는 지시가 내려온다. 여기에 부록으로 평양학원 항공중대를 졸업한 공작원 최일주 일병이 김지회의 당번병 명목으로 항상 그를 따라다닌다. 김지회의 연락책 겸 감시역이였는데, 여순사건 초기때는 김지회는 배후에서 지휘하고 최일주가 대신 ‘병사 소비에트’를 지휘했다.
정리하자면 지창수 상사가 이끄는 ‘병사 소비에트’는 남로당 계열이었고, 적색 장교들의 조직인 ‘콤 서클’도 자신들을 남로당 중앙당 소속으로 알고 있었으나 북한 공작원인 지휘관 김지회 중위에 의해 ‘인민혁명군’으로 소속이 변경되게 된다.[4] 뭔가 베트콩을 보는 것 같다
김지회와 지창수가 소속된 제 4연대는 영암사건이 발생했던 그 부대이지만 사건에는 크게 휘말리지 않았고 각자 ‘콤 서클’과 ‘병사 소비에트를 순조롭게 확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각자의 상부 조직을 통해 새로 여수에서 창설되는 14연대로 이동하여 혁명군 조직으로 만들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런데 4연대에서는 1개 대대 병력을 차출하여 14연대 기간병으로 보냈는데, 이에 이미 김지회와 지창수가 포함되어 있었다. 연대 지휘부에서는 불온사상 때문에 평소에 골치를 앓아온 터라, 평상시에 불온했던 다수의 병사들을 14연대로 보낸 것이었다.
그리하여 48년 5월 초, 14연대가 창설되고 김지회는 신설 14연대 작전참모 보좌관, 지창수는 연대 본부 선임하사관격인 연대 인사과 선임하사관, ‘병사 소비에트’ 부책인 정낙현은 연대본부 정보과 선임하사관이라는 요직을 죄다 차지하였다. 그리고 14연대는 신병을 대대적으로 모집하였는데 주로 전남 동부 곡성군, 구례군, 순천군, 광양군, 보성군, 여수군, 고흥군 등에서 모집했다. 이 때 지원자가 부족한 탓에, 불온사상 여부를 가리지 않고 지원자는 무조건 입대시켰다.[5]
이 때문에 각 지방에서 좌익운동을 열렬히 하던 청년들이 경찰의 수배를 받게 되면 14연대에 입대하기 일쑤였다.[6] 남로당 전남도당 군사부에서도 예하 군당에 비밀 지시를 내려 좌경청소년들을 14연대에 되도록 많이 입대시키도록 독려하였다. 또한 각종 범죄자들도 군에 가면 무사하다는 소문을 듣고 경찰들을 피해 입대할 정도였다. 사실 국방경비대는 건군 초기부터 군인이 정치적 견해를 표명하는 것에 대해서도 미군정이 전혀 제제를 가하지 않았으며, 완전한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었다.
백선엽은 국방경비대 입대에 있어서도 사상검열 등은 전혀 없었고 충성서약과 신체검사, 구두시험만으로 선발하였다며 입대 절차를 너무나 허술했던 것으로 회고하였다. #
여순 사건 직전 김지회의 14 연대 ‘콤 서클’에는 김지회, 홍순석, 배명종, 정영길, 김남근, 신일수 중위등 주로 경비사관학교 3기들이 소속되었고[7] 4연대 역시 비슷한 규모였다. 지창수 상사가 이끄는 ‘병사 소비에트’에는 약 80명의 하사관과 병이 소속되었다.
1.2 군 내부의 반란
1.2.1 김지회 배후설
사건의 발단은 제주도 4.3 사건으로, 여수에 주둔 중 제주도의 소요를 진압하러 가라는 명령을 받은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장병들 중 남로당 계열이 다수 침투해 있던 1개 대대의 군인들이 명령을 거부하고 현지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에서 시작한다.
14연대는 이미 9월 중순부터 제주도 출동을 예정하고 있어서 10월 초부터 다른 부대로부터 박격포와 기관총 등을 차출하여 공급받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신식무기인 M1 소총과 카빈소총, 자동소총, 기관단총을 비롯 각종 통신장비 등이 다른 부대에 앞서 우선적으로 100% 공급되었다. 그리고 종래 가지고 있던 일제 38식 소총과 99식 소총은 아직 반납하고 있지 않았다. 그 때문에 평상시 보다 두 배에 달하는 6천여정의 소총을 보유하고 있어서 남아도는 소총으로 반란 후 민간인 좌익폭도들을 무장시킬 수 있었다.
여기에 여순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당시 국군과 경찰 사이의 알력이다.
국군과 경찰의 앙금은 해방 직후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강점기 민중을 가까이에서 억압한 것은 일본 경찰이었다. 당연히 마주치기도 어려운 높으신 분들보다, 일선에서 직접 수탈하는 순사들에 대한 국민들의 공포와 증오는 굉장한 것이었다. 오죽하면 "순사 온다"는 말이면 우는 애가 울음을 그친다는 소리까지 있었으니... 문제는 해방과 함께 미군정이 들어서며, 내부 실정을 아는 경력자인 순사들이 미군정 경찰로 고스란히 채용된 것이다. 즉, 왕년의 일본 순사가 그대로 경찰이 되버린 셈이다. 어제의 일본 순사들이 대한민국 경찰 제복을 입고 거들먹대는 꼴에 복장이 터진 이들은 모조리 국군(과 그 전신인 국방경비대)에 입대했고, 이후 경찰과 육군은 총격전(!!!)을 주고받을 만큼 험악한 사이로 발전한다. 물론 국군에도 일본군, 만주군 경력자들이 즐비했고 지금 시선에서야 둘다 친일파라고 하겠지만 일본군, 만주군의 하급장교나 하사관에 불과한 이들이 대민마찰을 일으킬 일은 사실상 없었다. 따라서 당시 관점에선 일본군, 만주군 경력자는 친일파로 안봤다. 당장 경찰놈들이 부대로 쳐들어온다는 헛소문으로 부대원을 선동하며 벌어졌던 바로 이 여순사건의 주역, 남로당 김지회조차 왕년의 일본군 소위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 좌익분자들도 속속 국방경비대/국군에 입대했고, 신병 모집에 어려움을 겪는데다 미군정에서도 별 말이 없으니 특별한 신원조회없이 군에서도 무작정 받아들였다. 이는 여순사건이 발발하게 된 하나의 원인이자 도화선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러한 군과 경찰 사이의 갈등은 제1공화국 내내 지속되었다. 이때 이승만이 상대적으로 경찰을 싸고 돌고 군부를 찬밥다루듯 하자[8] 군사지도자였던 이범석이 정변까지 모의할 정도였다.[9] 그런데 14연대의 기간병은 군경의 무장충돌인 영암사건을 일으킨 제 4연대 출신이니...
48년 9월 24일에는 구례 경찰서 직원 한 명과 14연대 사병 9명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는데,[10] 몰려든 구례 경찰서 경찰관들에게 사병들이 구타당한 뒤 구금되었다. 그래서 14연대 헌병들이 구례까지 가서 이 병사들을 인수받아 왔는데, 연대 인사계인 지창수 등은 이 사건에 대해 분개하면서 언제 한번 보복하려고 벼르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반란 직전 몇가지 사건이 동시에 돌아가는데, 첫째로 48년 10월 12~3일경, 김지회 중위와 최일주 일병은 남로당 수장인 박헌영의 오른팔이자 ‘지리산 유격전구’ 사령관인 이현상에게서 제주도 4.3 사건에 파견을 거부하고 봉기를 일으키라는 지시를 받는다. 이현상은 남로당원이기 때문에 김지회의 상급선이 아니지만 소련군정과 북로당 대표라는 신분을 겸하고 있어 김지회에게 명령을 내릴 자격은 있었다. 다만 이현상이 직접 김지회에게 지시했는지, 북로당, 즉 김일성의 지시에 의해 반란이 일어난 것인지가 불분명해 추가 검증이 필요하다.
둘째로 전라도 내의 4연대와 14연대를 관할하는 광주 제 5여단 정보참모 김창선 소령은 군내 좌익 계보를 파악하여 우선 4연대 50여명을 구속하고 이어 48년 10월 16일 14연대 사병 40여명을 연대내 영창에 색출하고[11] 주모자급 3명은 광주의 여단 본부로 압송하였다.
이어 좌익성향 때문에 연대 대전차포중대장으로 좌천된 김지회 중위와 9중대장 홍순석 중위도 즉각 체포하려고 하였지만, 막 부임한 박승훈[12] 신임 연대장이 반대하자, 김창선 소령은 일단 여단으로 복귀후 다음날인 17일 김지회와 홍순석에게 광주 여단 본부로 출장 명령을 내렸다. 광주에 도착하면 구금할 목적이었다. 김지회와 홍순석에게는 똥줄 타는 상황.
세 번째로 우연히도 같은 날인 17일 고향에 휴가갔던 병사들이 구례경찰서 형사들과 충돌, 빨갱이 혐의를 받고 경찰서에 끌려가 뭇매를 맞고 풀려나 귀대하였다. 그러자 연대에서 구례경찰서를 습격하자며 아우성이 일어났다. 연대장 박승훈은 여단본부로 부임인사를 하러 가서 공석이였고 부연대장 이희권 소령이 대신 여단으로 보고하면서, 장병들을 진정시키고 사기앙양을 위해 일부 병력을 구례에 보내 사건을 수습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건의하는 지경이었다. 그바람에 김지회와 홍순석의 여단본부 출장 명령은 흐지부지되었다.
넷째로 18일 육군본부로부터 14연대에서 1개 대대를 차출, 제주도 폭동을 진압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제주도 출동명령을 받은 대대는 제1대대였고, 김지회의 연대대전차포 중대도 제1대대로 배속되었다. 출동 날짜는 19일이었다.
즉, 군내 좌익세력에게는 상급선에서는 무장봉기를 일으키라고 하고, 군내 상부기관에서는 그들의 혐의를 파악하여 체포 직전까지 이르렀고, 부하들은 경찰들과 충돌했지, 그와중에 제주도로 출동 명령이 떨어진 아비규환의 상황이었다.
그리고 운명의 19일. 연대에 대형 트럭이 4대 밖에 없어, 이것으로 1개 대대의 장비를 여수항까지 운반하려면 한세월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날 밤이 되도록 병력 이동이 이뤄지지 않았다. 밤 10시경 1대대는 완전 무장한 채 내무반에서 대기중이었고 2·3대대는 취침중이었다. 연대장과 부연대장은 장비 선적을 위해 여수항으로 나가 있었다.
이때 연대 본부 옆에 위치한 연대 근무중대에서 갑자기 총성 1발이 울리고, 거의 동시에 연대 정문의 위병소에서 비상나팔 소리가 일어났다. 그러자 비상소집으로 인지한 각 중대는 완전무장을 하고 중대 본부 앞으로 일반 집합한 이후 연대 종합연병장으로 집결하였다.
1대대 부관 김정덕 소위가 연대 근무중대 앞을 지나는데 사병들이 그를 무조건 구타하였다. 마침 그 옆을 지나가던 조병모 소위가 “왜 장교를 구타하느냐?”고 꾸짖자 구타하던 사병들은 총검으로 조 소위를 찔러 쓰러뜨렸다(첫번째 희생자). 조병모 소위는 반란 사병의 총에 팔을 맞으며 필사적으로 도망가 대대본부 앞에 있던 전용인 소위에게 까지 가서 쓰러졌다. 조병모 소위를 쫒아오던 4~5명의 반란 사병은 조병모 소위를 그냥 지나쳐서 무기고와 탄약고를 지키던 보초를 쏴죽이고 문에 잠겨있는 열쇠를 총으로 부수어 연 뒤 점거하였다. 제5중대 주번사관인 박윤민 소위는 주번사령에게 비상문의를 하러 가다가 탄약고쪽에서 쏘는 반란병 총을 맞고 사망하였다.
한편 규정대로 연대 전 장병들이 연대연병장에 집결했는데 여기저기서 총성이 울리고, 뒷산에서 신호탄이 날았다. 또한 사복 차림의 민간인들도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13] 이와중에 지창수가 사복차림의 민간인들과 함께 연병장 사열대로 뛰어올라가 "경찰이 우리를 죽이기 위해 쳐들어온다."고 선동하면서 진압파병 거부, 제주 빨치산에 호응하여 본토에 제2전선을 구축, 남북통일을 위한 인민군으로 행동할 것을 선동하였다. 지창수의 ‘병사 소비에트’ 소속 병사들이 연대 장병 곳곳에서 “옳소! 옳소!”하면서 동조하였다. 그때 3명의 하사관이 앞으로 나서며 “지창수, 너 어쩌자고 이러는 거냐!”, “여러분! 우리는 엄연한 국군입니다. 불순분자들의 선전에 넘어가선 안 됩니다.”라며 군인 정신을 발휘하였다. 그러자 반란병들이 그 자리에서 그들을 모두 사살하였다.
이어 ‘병사 소비에트’의 특수공작책 심재호 상사의 지휘로 반란병들은 전 부대를 뒤지며 모든 장교를 "미제의 앞잡이"라 하여 발견하는대로 사살하기 시작했다. 이날 사살된 장교들은 1대대장 김일영 대위, 2대대장 김순철 대위, 3대대장 이봉규 대위등 대대장 전원과 연대 작전주임 장교 강성윤, 정보주임 장교 김래수 중위, 진도연, 김녹영, 맹택호, 박경술, 민병여, 김진역, 이상술, 장세종, 이병순, 노영우, 이상기 소위등 20여명에 달했다. 동년 5월에야 창설된 14연대는 장교 충원율이 낮아 경비사관학교 5기생인 10여명의 소위들이 모두 중대장을 맡고 있었고, 각 소대장직은 고참 하사관들이 맡고 있었다.[14]
연대내 장교들이 대부분 살해되었을 때에야 여수항으로 수송장교 윤중위를 통해 반란 소식이 알려졌고, 이에 상황을 살피러 부연대장이 정보주임 김제주 중위를 대동하고 연대로 돌아갔다. 김제주 중위는 연대 탄약고에서 수화하다가 사살되었고, 부연대장은 연대본부까지 포복으로 기어가 확성기 마이크를 잡고 불순분자들의 명령에 넘어가지 말고 대한민국에 충성할 군인들은 연대본부 앞으로 집결하라고 절규하였지만 돌아오는 것은 총알 세례뿐이었다. 결국 부연대장은 차를 타고 빠져나와 여수읍 헌병 파견대로 향해 그곳에서 순천에 파견된 14연대 2개 중대를 이끄는 홍순석 중위에게 전화하여 반란 진압 출동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홍순석은 상술했다시피 ‘콤 서클’의 핵심 멤버로 연대내 반란이 성공했다는 것을 알려준 꼴에 지나지 않았다.
그제서야 김지회 중위는 연락병 겸 북측 감시원인 최일주 일병을 대동하고 연대 대전차포 중대장실에서 나와 반란군을 직접 지도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15] 이후 김지회는 아직은 자신이 노출될 때가 아니라고 판단하여, 최일주 일병을 시켜서 간접적으로 반란군을 지휘한다.
이상이 김지회가 주도했다는 배후설이다.
1.2.2 지창수 단독범행설(다수설)
10월 15일, 육군 총사령부로부터 제주도로 출동하라는 명령이 전달되었다. 그런데 사령부 명령이 군 통신망이 아닌, 일반 우체국 전보로 오는 바람에 일반사병에게도 금방 소문이 퍼진다. 출동 날짜는 10월 19일로 매우 촉박했다.[16]
중앙당에 소속된 김지회 중위등 장교 당원들은 남로당의 기본 방침이 아직은 무장봉기를 할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고, 중앙당으로 연락하기에도 시간이 촉박하여 일단 출동 명령에 응하기로 한다.
그에 반해 지창수 상사등 하사관들은 자신들의 상급기관인 전남도당에 문의하려 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자 자체적으로 병사위원회를 열어 토론에 들어갔다. 결국 병사위원회는 출동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정했다. 선전 해설반을 편성해 대대별로 파병 반대 선동을 하는 한편, 위병사령부 장악조, 통신망 차단조, 장교 처단조, 무기고 점령조 등으로 병력을 나누어 먼저 연대를 장악한 후 지창수가 비상나팔을 불어 전체 부대원을 연병장으로 집합시키기로 하였다.
48년 10월 19일밤 연대장 박승훈 중령은 제주도 출동을 위해 무기와 장비의 선적을 지휘하고 있었고, 장교들은 출동 장교 환송회식 중이었다. 홍순석 중위의 2개 중대는 순천에 주둔하고 있어, 여수 주둔지인 신월동에는 총 2700여명의 병력이 있었다.
밤 10시 10분경, 이미 연대 무기고와 상황실이 장악된 상태에서 비상나팔이 울렸다. 영문 모르는 사병들이 연병장에 집결할 때 장교들은 환송식에서 만취하여 잠들었거나 여전히 술을 마시는 중이었다. 열 받는 상황이기는 하지만 이들 장교 대부분은 남로당 중앙당원이였으니 동정은 금물.
먼저 지창수가 연단에 나가 "애국병사 여러분! 우리는 동족 살상의 제주도 출동을 결사반대합니다."라는 일장 연설을 하였고 상당수의 병사들이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좌익사병들이 "미제와 이승만 매국도당을 타도하자!"라고 고함치며 바람을 잡았다. 이 상황에서 누군가 "지금 경찰놈들이 부대에 쳐들어오고 있다!"라고 외치자 우왕좌왕 하던 사병들까지 "무기를 들어라! 경찰과 싸우자!"라며 단결하게 되었다. 다만 일부 사병들은 겁먹고 총을 든 채 달아나 버렸다.
이때, 하사관을 포함한 장교 세 명이 연단으로 뛰어나가 "안 돼! 뭐하는 건가? 지금은 때가 아니다!"라며 아직은 반란은 시기가 아니라고 만류하였다. 장교가 남로당 중앙당원인 것을 모르는 사병들은,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연단에 오르는 이들을 사살해 버렸다(...). 이어 반란군은 이미 개방된 무기고에서 무기를 들고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장교와 하사관들을 찾아 죽이며 군의관 등 이용 가치가 있는 몇 명만 빼고 이십여명의 장교를 살해했는데, 그중 열 다섯 명이 남로당 중앙당원이었다(...).
지창수는 스스로 연대장에 취임하고 병사위원회 소속 하사관들을 즉석에서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빨치산 종군기자 출신의 이태가 쓴 <남부군 비극의 사령관 이현상>에 의하면 여순사건은 완전히 지창수 상사에 의해 일어난 것이며 14연대 장교 16명중 대부분이 좌익장교였지만 극심한 팀킬로 이중 15명이 사살되었고, 사상이 불분명한 김지회만 살려두었다고 한다. 이후 지창수 상사는 순천으로 이동한 반란군 주력을 이끌고 가다가, 이현상이 22일 오후에 순천에 나타나 반란군을 격려하고 “여수에서부터 회색분자 혹은 반동장교 혐의를 받고 열차에 감금당해 온 김지회의 신원을 이현상이 보증하여 풀어줌으로써 그 시각부터 비로소 김지회가 반란군의 총지휘를 맡게 되었으며, 그 동안 당에서 애써 부식해 놓은 14연대의 수많은 장교 프락치들을 신원도 확인하지 않고 마구 살해해 버린 지창수 일파의 경거망동을 개탄하여 마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 이어 각고의 노력 끝에 포섭한 좌익장교들이 죄다 팀킬당한 사실을 안 이현상은 김지회와 함께 엉엉 운다(...).
정지아의 <빨치산의 딸>에 의하면 14연대가 제주도 파견이 결정나자 지창수 상사는 당황하였고, 전남도당과 대책 마련에 대해서 상의하였다. 그러나 사태가 너무 급박해지자 일단 반란을 일으켰고, 반란 이후에야 전남도당도 그 사실을 알았다고 나온다. 22일, 여수 14연대의 봉기소식을 듣고 중앙당 노동부장 이현상이 봉기 지휘를 위해 순천에 도착했다. 이현상은 지창수를 만나자 먼저 중앙당에서 심어놓은 좌익계 장교 열여섯명의 안부를 물었다. 그때야 평소 모병할 때 박헌영을 존경한다는 사람들만 입대시키는등 평소 좌경적인 언동을 자주 해 순천역 화물차에 감금되어 있던 김지회를 만나게 되었고, 이현상은 물론 지창수까지 회한의 눈물을 터뜨렸다. 이후 이현상의 지도 아래 홍순석 중위를 총지휘관으로, 김지회를 부지휘관으로 임명하여 14연대의 지휘체계를 개편하였다.
김남식의 <실록 남로당>에서는 “당시 반란 사병들에게 체포, 감금되어 총살 직전에 있던 후일의 반란군의 지휘자 김지회 중위가 지리산에 가면 나를 증명해 줄 사람이 있다. 내가 반란부대를 지휘토록 해 달라고 사병들에게 요구”하였다고 되어 있다.
안재성의 <이현상 평전>에 의하면 대전차포 중대장 김지회 중위가 "나는 여러분의 편입니다. 내가 반란군을 지휘하게 해주시오. 아니면 나를 지리산으로 데려가주시오. 지리산에 가면 나의 신분을 확인해줄 사람이 있습니다."라고 하며 살아 남았다.
반란의 중심지인 전남 전역을 관할하던 전남도당이나 여수, 순천 군당들은 모두 산악에 숨어 있는 상태로 14연대 반란군과 사전에 모의할 시간도 공간도 없었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전남 도당이 순천군당에게 상황을 보고하라고 했으나, 이들은 올려 보낼 어떤 정보도 갖고 있지 않았다. 북한은 가장 늦게 반란 소식을 알았고, 뒤늦게 라디오로 사실을 들은 서울의 남로당 중앙당에서 긴급히 간부 두 사람을 파견하여 기차로 광주까지 갔으나, 계엄군들에게 차단되어 돌아가야만 했다.
그러던 와중 덕유산과 지리산 일대를 돌아다니며 야산대들의 현황을 점검하던 이현상이 제일 먼저 나타났다. 그는 경남 서부지구당 위원장 김상홍을 만나 상의한 후, 경남 도당 연락원의 안내에 따라 22일 순천역에 도착하였다. 홍순석과 지창수는 그자리에서 총지휘권을 이현상에게 넘겨 주었다. 이현상은 제일 먼저 "그런데 장교들은 다 어디 갔습니까?"라고 물었지만...... 미리 저승에 갔어요!
24일에는 마산에서 진압하러 온 15연대장 최남근[17]이 반란군에 합류하고 싶어 문의하지만, 이현상은 "이승만 정권을 무력으로 무너뜨리려면 산발적인 봉기가 아닌 전면적이고 직격적인 봉기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시기가 아닙니다."라며 돌려 보낸다. 이후에도 이현상은 산중에서 여러번 이 사건을 반란사건이라고 규정지으며, 남로당의 전력을 노출시킨 잘못된 행위라고 비판하였다.
이와 같이 각종 빨치산 문학에서도 대부분 북한의 개입설을 부인하고, 지창수 상사의 단독 범행을 주장한다. 또한 백선엽의 토벌기록인 실록 <지리산>에서도 남로당은 이 사건을 전혀 몰랐으며 지창수 상사의 단독범행이라고 하는 등 좌우를 통틀어 학계에서도 정설로 인정된다.
여기에 김지회 배후설처럼 이현상이 사전에 여수에 도착하여 김지회와 지창수를 만나 반란을 지시하지 않고, 사건 이후에야 순천에 도착하여 반란을 지도하게 되었다. 또한 이를 도와 북한에서 강동정치학원 출신 유격대 180명을 남파한 것은 사건 한달이 지난 11월 17일이었기 때문에, 북측에는 여순사건의 사전 정보가 없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결정적으로 남로당 여수시당과 주변의 군당들은 긴급회의를 열었으나 이 갑작스런 사태의 대처법을 두고 우왕좌왕했다. 서울의 중앙당은 며칠후 라디오를 통해서나 사태를 파악했기 때문에 아무런 지시도 내릴 수 없었다.
여수시당은 모조건 호응해 나서야 한다는 측과, 지시가 없는 가운데 지하 조직을 전부 노출시킬 수는 없다는 주장이 맞섰는데, 격론 끝에 이익주 등의 강력한 주장으로 반란에 동참하기로 결정했다.
결과적으로 치밀한 사전계획 없이 사병중심의 돌발적인 상황이라 급속히 진압되어 산속으로 들어가 유격전에 전념하게 된다. 평양에서는 처음부터 이 사건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았으며, 이후 '미국의 사주를 받아 군내 좌익 세포를 노출시키기 위해 일으킨 사건'으로 조작하여 박헌영과 남로당을 숙청하는 계기가 된다.
1.3 여수 인민공화국
14연대 반란정보를 입수한 여수경찰서(서장 고인수)는 비상소집을 걸어 150명의 본서와 지서 근무 경찰관이 집합하였다. 여기에 부연대장의 연락을 받은 헌병대 40여명과 합동 작전으로 봉산지서 부근에서 1차 저지선을 형성하였다. 광주 경찰청의 명령은 “경찰서 절대사수”였다. 그러나 병력차는 압도적이었으며, 경찰-헌병 연합부대는 순식간에 격파당하고 반란군은 경찰서 안으로 진입하였다. 경찰서를 빼앗은 반란군은 즉시 유치장을 열어 각종 범죄 피의자 50명을 석방하고 무기를 지급하였다.
10월 20일 여수읍의 주요 공공 건물과 요소요소에는 일제히 대형 인민공화국 깃발이 게양되었고 오후 1시부터 중앙동 광장에서 여수인민대회(군중대회)가 열렸다. 또한 반란군은 ‘제주도 출동거부병사위원회’ 이름으로 “우리들은 제주도의 애국 인민들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하여, 우리들을 제주도에 출동시키려는 민족반역 정권의 명령에 대하여 조선인민의 아들로서의 사명하에 이를 거부하고 사랑하는 동포를 위하여 일어섰다.”라는 성명서를 발표 하였다. 식사는 남로당 여수지구위원장 이용기였고, 격려사는 보안서장으로 내정된 유목윤, 세 번째로 인사말은 일본군 지원병 출신이자 14연대 ‘병사 소비에트’ 총책으로 반란의 주역이였던 지창수 상사였다.
남로당 수장인 박헌영의 오른팔이자 ‘지리산유격전구’ 사령관인 이현상이 내린, 봉기군은 지리산으로 입산하라는 지시에 의해 이미 20일 오전 8시경 김지회의 지휘로 반란군 주력 2개대대(1천4백명)은 기차와 화물 트럭으로 순천으로 향했고, 일부는 지역방어를 해야 한다는 지창수 상사의 주장에 의해 2개 중대만 여수에 남았다. 그 탓에 이후 여수에 진압군이 왔을 때는 이미 반란군 주력은 없었고, 그때까지 날뛰고 있던 좌익세력이 조직한 ‘인민의용군’ 정도였다.
정부 당국에서는 19일 야간에 일어난 반란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가 21일에 이르러서야 국무총리의 공식적인 담화발표가 나왔고, 22일에야 중앙일간지에 첫 사건보도가 나왔다. 김지회가 반란군을 총지휘한다는 보도는 26일자 국제신문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평양방송에서는 이미 20일 아침 6시에 제 1보로 반란의 진전 사항을 수시로 보도하며 여수·순천 지역의 좌익세력을 격려하고 남조선의 모든 애국적 인민과 국방군 장병은 여기에 호응 봉기하라고 선동했다. 같은날자 ‘로동신문’,‘민주조선’등에서도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그런데 소련의 정부기관지 ‘이즈베스챠’와 ‘타스’ 통신은 북한쪽과 쿵짝이 안 맞았는지 반란 이틀 전인 10월 17일에 이미 남조선의 ‘대구’지역에 반란이 발생했다고 보도하였다(···) 그러다 21일에야 다시 평양방송 인용으로, 남조선 여수지역에서 군대의 반란과 인민폭동이 발생하였다고 보도하였다. 사전에 북한측에게 사전 보고 받고 봉기날짜와 대구와 여수라는 지명을 헷갈렸나?[18] [19] 서울의 남로당 중앙당은 라디오 방송을 듣고 처음으로 여순사건의 발생을 알았다.
정부측에서는 여수에서만 관민 1,200명이 학살당하고 1,15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고 발표하였다. 다소 과장은 있겠지만 학살 자체가 발생했던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특히 좌익세력보다도 깡패·양아치·부랑아들이 더 날뛰어 평상시 감정있던 사람들이나 부자들을 죽였다.[20]
반란군의 주력부대는 김지회의 인도로 20일 오전 순천으로 이동하였고, 여기에서 홍순석이 이끄는 14연대 2개 중대와 합류한다. 홍순석은 반란에 주저하는 사병 8명을 총살해 놓은 상태였다.[21] 20일 오후 경 순천을 장악하였고, 21일에는 구례·광양 방면으로 진출하였다.
그런데 이때 약 2백명의 병력이 서쪽인 보성군 방면으로 무단 이탈하였다. 이들은 거의 전부 벌교·보성·고흥·화순·광주 출신이었는데, 벌교읍과 그 주변 지역에서 한풀이식 무차별 살육을 벌였다. 그러나 주력에서 무단이탈한 소규모 부대인지라 광주 방면에서 달려온 진압군의 토벌작전에 걸려 전멸당한다.[22]
20일 새벽 광주의 4연대가 진압을 위해 1개중대의 병력을 급파하였지만, 4연대는 위에서 이미 언급듯이 영암사건으로 경찰들과 전투를 벌였던 부대이며, 4연대 출신인 김지회와 지창수가 이미 붉은 조직들을 만들어 놓은 곳이었다. 4연대는 순천에 도착하자마자 오전 10시경 부대 안에 있던 좌익 부사관 이진범 일등상사의 인솔로, 끝까지 투항을 거부한 이명은 소위, 장인호 소위등 장교 2명과 사병 28명을 학살한 후 잔여병력을 이끌고 반란군으로 넘어가 버렸다.
22일에는 15연대장 최남근이 자신의 반란 동참 여부를 상의하기 위해 포로가 된 것으로 위장하여 지리산으로 따라 들어갔다가, 군내 조직을 유지하라는 지시를 받고 27일 다시 탈출을 가장하여 15연대로 귀환하였다.[23] 이후 정체가 탄로나 총살형.
1.4 정부의 진압
이에 정부는 10월 21일에 반란군이 점거한 지역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진압군을 파견한다. 하지만 위에서 보았듯 일부 진압군이 반란군으로 돌아서기도 하는 등 꼴이 말이 아니었다. 심지어 남로당계 중대장이 자신의 대대장에게 기관총을 갈겨대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고립된 반란군의 세력은 차츰 약화될 수 밖에 없었다.[24] 육군총사령관 송호성 장군을 지휘관으로 하는 ‘반란군토벌전투사령부’가 창설되었고, 진압군은 대전 제2연대, 전주 제3연대, 광주 제4연대, 부산 제5연대, 대구 제6연대, 군산 제12연대, 마산 제15연대의 전 병력 또는 일부 차출병력, 육군비행대 L-4 10대, 육군 기갑연대 소속 장갑차 20대, 해군 경비정 7척, 서울 및 각도 혼성 경찰병력 약 2개대대로 거의 1개 사단 규모였다. 그에 반해 반란군은 김지회의 14연대 주력 2대 대대 1400명에 홍순석의 2개중대, 4연대 1개 중대등 1600명 중대였다.[25]
진압군 중 4연대는 21일 새벽 구례방면으로 북상하던 홍순석의 부대를 순천 북방 약 8킬로 지점 학구리에서 격파하였다. 그 바람에 홍순석 부대는 이미 광양방면으로 이동하던 김지회와 합류할 수 밖에 없었다. 오후부터 순천 탈환 작전에 들어가 22일 오전 순천을 완전히 수복하였다. 한편 광양방면으로 이동중인 김지회는 22일 오후 광양군 옥곡면 백운산 기슭에서 마산에서 출동한 15연대와 대치중 연대장 최남근과 만나는데 그는 이현상과 만나 자신의 행동 지침을 듣기 위해 포로로 가장하여 입산한다. 이때 군내 지하세력을 유지하라는 지령을 받고 탈출을 가장하여 하산한 최남근은 이후 이 사실이 발각되어 총살당한다.
이 때 진압군은 여수, 순천을 회복하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현상-김지회의 반란군 주력의 목표는 지리산 입산이었고, 이에 전투를 회피하며 빠져나갔다. 사실 원래 진압군의 작전은 지리산 입산 차단이었다. 당시 이승만은 맥아더의 초청으로 19일에 일본으로 갔고, 20일 새벽 기타 주요인사가 모인 회의에서 국무총리 이범석이 지도를 보면서 반란군은 진압군에게 몰리면 지리산으로 들어갈 것이라며 처음부터 이를 염두에 두고 진압 작전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청산리 대첩의 영웅다운, 백전노장의 탁견이었다. 그러나 현지 지휘관들의 적정판단의 혼미와 반란군의 예상을 뛰어넘은 신속한 여수·순천 탈출 작전으로 지리산 차단 작전은 실패하였다. 이러한 점 때문에라도 당시 회의에 참석했던 육군총사령관 송호성이 진압군 사령관으로서 삽질한 것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순천시가지 수복작전은 21일 오후 10시부터 시작되었다. 장갑 수색중대를 선봉에 내세우고 L-4정찰기들을 상공에 띄우고 제3연대, 제12연대등이 공격의 주역을 담당하였다. 반란군의 저항은 미미하였다. 여수와 마찬가지로 순천에 도착한 반란군들은 순천을 장악한 즉시 빠져나갔다. 순천에 남은 반란군의 숫자는 미상이지만, 벌교출신 한모 상사의 지휘하에 150명이 벌교로 후퇴하여 벌교를 피바다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으로 봐서 여수에 남은 2개 중대와 비슷한 규모로 추측된다. 순천의 완전 수복은 10월 23일 오전중에 이루어졌다.
계엄군 사령부는 11월 13~14일 순천현지에서 군법회의를 열어 검거된 폭도 피의자 458명중 101명을 무죄석방, 79명을 징역 20년, 79명을 징역 5년, 102명을 사형에 처했다. 또한 전남 학무당국은 이에 관련된 순천지방 초등학교 불순교사 61명을 파면하였다.
하루 쉬고 24일 아침 여수 수복작전이 개시되었다. 육군총사령관이자 진압군 사령관인 송호성은 20일 회의때 국무총리 이범석에게 적은 지리산으로 들어갈 것이라는 말을 들어 놓고서도, 지리산쪽으로 이동하다가 15연대와 접촉한 반란군은 소규모의 패잔병집단이라 지레짐작하고 적의 주력은 여전히 여수에 남아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조로웠던 순천 진압작전의 기억에만 빠져 있어, 총사령관이라는 직책을 망각하고 최선봉의 장갑차에 올라타고 진격하였다. 당시 여수에 남은 반란군이라고는 지창수가 이끄는 2개중대(3백명)와 약간의 무장 폭도뿐이었는데, 여수북방 약 8킬로 지점의 미평리 근처에서 이들의 매복에 부딪쳐 집중 사격을 받는다. 이때 송호성은 응사하는 장갑차 기관총소리에 고막이 파열되어 굴러떨어지는 개망신을 당하고 부대는 즉시 순천까지 후퇴한다.[26] 얼마나 망신스러운 전투인지 공간사에서는 “미평리에서 반란군의 완강한 저항(???)에 직면, 송호성 사령관이 부상하고 진압군은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어 순천으로 철수”했다고만 기술되어 있다. [27]
총사령관이 최전선도 아니고 최선봉에 서서 가다가 부상당한 것도 문제이지만, 그 뒤 겁먹었는지 뒤도 안 돌아보고 정신없이 100리를 후퇴하여 순천까지 가는 바람에 여수와 순천 사이에 공백지가 생겼다. 정작 지창수는 잔여병력을 이끌고 바로 그날 밤 이 공백지를 통해 도망가 버린다. 이들은 김지회-홍순석이 곳곳에 남겨놓은 안내원을 따라 지리산으로 입산한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반란의 주력부대가 여수에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이고 이에 차단선을 풀고 여수만 노리게 되어 반란군들은 큰 피해 없이 지리산으로 입산한다. 여수의 무장 폭도 분자들도 지창수를 따라 지리산으로 입산하였고 정작 여수에는 북한군이 남진하여 오고 있는 줄로만 알고 있던 여수인민위원장 이용기등 일부 좌익분자들만 남게 된다.
뒤늦게 진압군사령관을 송호성에서 김백일로 교체하고 25일, 근쳐에 차단선을 펼치고 있던 군부대까지 싹싹 긁어와 여수를 향해 진격한다. 물론 여수에 14연대의 주력부대는 없었다. 전날 매복당했던 미평리를 무혈 점령하고 여기에서 신중하게 하룻밤을 보낸 후 26일 아침 여수 시가지에 대한 박격포 사격과 함께 장갑차들이 돌진한다. 여수에서는 약간의 무장폭도들이 남아 있었지만 큰 피해는 없었다. 오히려 해상에서 LST 선상에 타고 있던 5연대의 박격포가 12연대를 강타하여 적지 않은 사상자를 발생케 한 것 정도. 지루한 시가전이 지속되었지만 진압군은 시내 중심부를 속속 탈환해나갔다.
시가전 끝에 27일 오전, 여수 남국민학교에 진압군사령부가 설치되며 완전 수복이 이뤄진다. 그리고 2진으로 도착한 경찰부대는 동료 경찰과 그 가족들이 처참하게 학살당한 것을 보고 눈이 뒤집어졌고, 군경의 합동 보복 학살 타임이 시작되었다.
1.5 지리산 유격대
48년 11월 중순 지창수가 이백여명의 잔여 병력을 이끌고 백운산으로 들어오면서 총 6백명의 병력이 집결하였다. 조계산 방면에도 2백 명이 가 있기는 했지만, 최초 14연대 반란군과 4연대 일부 병력, 이에 동조하는 좌익세력까지 합쳐 4천명에 달하는 수의 병력이 작살나, 열흘 남짓만에 겨우 1/5 밖에 남지 않았다.
나머지 병력 중 4백명은 진압군과 싸우다 죽고, 2천8백명은 생포되어 재판에 넘겨져 있었다. 49년 1월 10일까지 진행된 군사재판에서 410명에게 사형이 선고된 뒤 바로 집행되었으며, 568명은 종신형으로 대전교도소 등지에 분산 수감된다. 기타 병사들은 10년 이상 중형을 받고 수감되다가 6.25가 터지면서 전부 총살당한다.
지리산 입산 이후 반란군은 빨치산화하였다. 기존의 14연대 반란군 출신들만이 아니라 남로당 중앙에서 보낸 이현상이 사령관이었으며, 구례군당(위원장 최규복)등 지방 좌익 세력이 대거 합류했기 때문이다. 또한 최규복과 박종하가 지리산에서 14연대 반란군에게 사상 교육을 하기도 하는 등, 당이 군을 지휘하는 모습을 보였다.
2년 후의 일이지만 이현상이 이들 부대를 남부군이라는 이름으로 이끌고 남하할 때 편제를 보면, 사령관 이현상, 총참모장 박종하(전 구례군당 유격대장), 정치위원 여운철(전 충남도당 위원장) 승리사단장 이진범(14연대 하사관 출신)으로 구성된다. 즉 반란군 14연대 색깔이 많이 약해진다. 소설 <남부군>의 저자 이태가 전북도당에서 전속된 부대가 승리사단 서울부대(부대장 14연대 사병 출신 김금일)였는데 다른 빨치산 부대와 달리 승리사단은 일본군 국군 특유의 악습이 남아 있어 구타와 폭행이 잦았다고 한다. 용어도 빨치산식 어투가 아닌 국군식 용어를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28] 또한 지방 유격대와 달리 여성이 적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정지아의 소설 <빨치산의 딸>에 의하면, 정지아의 부친이자 주인공인 유혁운(본명 정운창)은 곡성군당 소속이며 여순사건시 14연대 반란군이 인민군이 곧 내려와서 해방시켜 준다는 말을 믿고 기뻐한다. 그러나 며칠만에 14연대가 지리산으로 도망가자, 조직이 전부 노출된 상태라 할수 없이 대거 입산하여 도당, 군당, 면당 별로 빨치산화하여 투쟁한다. 당시 지방 조직원들이 어떻게 빨치산이 되었는지 잘 보여준다. 주의 할 것은 이들이 전부 14연대에 합류해서 남부군이 된 것이 아니라, 여수-순천지역에 있다가 14연대를 따라가거나 지리산이 있는 구례군당 정도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군당/면당원들은 해당 군/면 지역 안에서만 활동하는 빨치산이 되었다. 명령 계통도 전남도당의 지휘를 받았을 뿐, 이현상 부대와는 별개였다. 그러나 상호 협조 관계가 되어 구례군당 유격대장 지리산 호랑이 박종하, 또는 <빨치산의 딸>의 저자 정지아의 엄마이자 구례군당 소속 이옥자(본명 이옥남) 처럼 소환 형식으로 이현상 부대로 넘어가기도 했다.
1.6 여순사건 주역들의 최후
여수군에서 내응한 남로당 여수지구위원장 이용기는 반란 일주일 후 여수 근교 석천사 뒤 마래산에서 소나무에 목을 맨 시체로 발견되었다. 반란군을 따라 지리산으로 들어가지 않고 자살한 것이 의문인데, 아마 14연대가 반란을 일으키면 각지에서 다른 국방군도 호응하고 38선에서 인민군이 내려오기로 굳은 약속이 되었다는 말만 믿고 있었지만 결국 아무일도 안 일어나자 비로소 기만당한 것을 알고 참담한 심정에 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여수지구 위원들은 체포되어 사형당한다.
48년 10월 중순에서 11월 초순 사이에 14연대 반란군 600여명에 여순지역의 좌익폭도들을 합쳐 대략 1천명 정도가 광양 백운산, 지리산에 입산하는 나름 성공을 거두었다. 그런데 이후 국군의 적극적인 진압작전과 민심 이반, 약속된 북의 지원군 부재 등으로 이들 세력은 급격히 약체화되었고, 결정적으로 이현상이 반란군을 정규전처럼 운용하는 실책으로 그 해 말에는 350명, 사건 겨우 반년만인 49년 4월, 고작 2백명 정도만이 남아 지리산 일대에 분산 고립되었다.[29]
이후 지리산에서 유격활동을 펼치던 반란군은 진압군의 승전으로 열세에 몰리면서 그 잔당이 한국전쟁 때까지 빨치산으로 활동하였다. 반란의 주역 지창수는 반란군을 이끌고 지리산으로 입산하라는 이현상의 명령을 어기고 2개 중대를 여수에 잔류시켜 지역 방어에 매달리다가, 48년 11월 이후 지리산에서 이현상에게 '금싸라기 같은 봉기군 주력의 분산과 무모한 지역점령으로 인한 희생의 책임'을 물어 호된 비판을 받고 모든 지위가 박탈되었다.[30] 이후 의기소침한 상태로 대열 후미를 따라다니다가 49년 2월 지리산 기슭 경남 하동군 화개면에서 국군 토벌대에 의해 발목에 총상을 입고 생포되었다. 교전 중에 생포되면 그자리에서 총살되는게 보통이었지만 반란의 주모자라 정식 군법회의에 가게 된다. 그러나 지씨 가문은 광주의 이름난 부호로, 막대한 재력을 동원해 사형을 면하고 무기징역을 받게 된다. 하지만 6.25가 발발하고 낙동강 전선이 위태로운 50년 8월 중순 처형당하였다. 그러나 그가 숙청된 것은 표면적인 이유가 아니라 소식 없는 북의 지원군,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 대규모 군경토벌군의 압박으로 인해 반란군이 전의를 상실하자 그 책임을 전가하기 위한 희생양으로 선택되었다는 설이 있다.
1949년 4월 9일 새벽 2시 30분쯤, 김지회·홍순석 일당 29 명은 산내면 반선리 선술집 금판정에서[31] 술집 주인의 신고로 출동한 군경과 맞닥뜨려, 홍순석을 비롯한 정치부장, 후방부장 등 17명이 사살되었고, 7명은 포로로 잡혔다. 생포된 공비들이 김지회와 그의 처 조경순도 같이 있었다고 진술하였지만 이들 부부의 시체는 발견하지 못했다. 4월 13일, 김갑순 일등상사는 조경순을 비롯한 일당을 생포하였고 조경순을 심문하여 김지회의 행방을 추궁, 600m 정도 떨어진 야산에서 까마귀에게 심하게 훼손된 시체 1구를 찾아냈다. 김지회는 반선리 전투에서 입은 총상으로 창자가 밖으로 나오는 등 그 시체가 너무 훼손이 심하여 신원확인이 불가능할 정도여서, 처 조경순에게 직접 확인케 했다. 빨간 스웨터의 여대장으로 알려진 김지회의 처 조경순도 생포 후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되었다가, 한국전쟁 직후 형무소에서 처형된다.[32] 이때 공을 세운 3연대 3대대는 전원 1계급 특진되었고, 김갑순 상사는 상금 1백만원과 훈장을 탔다.
6.25 직전에는 이현상 휘하의 제2병단(일명 지리산인민유격대)은 겨우 70~80명이 남았고, 이후 구대원으로 불리며 남부군의 주력이 된다. 이때의 14연대 반란군 출신은 이영희(남부군 부사령관), 이진범(남부군 승리사단장), 김흥복(2대 승리사단장. 이후 81사단으로 개편), 송관일(승리사단 관일부대장), 김금일(승리사단 서울부대장)[33]등으로 지휘관이 된다. 공식 기록에는 반란군은 392명이 사살되고 2,298명이 투항하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 지리산유격전구 사령관 이현상 역시 토사구팽당한다. 이현상은 5년간 지리산 일대에서 빨치산 총사령관으로 행세하다가 남로당 출신의 김일성 절대지지파로부터 출당 및 모든 지위를 박탈당하고 산중고아가 되어 홀로 지리산을 배회하다가 1953년 9월 군경토벌대에 의해 사살당한다.[34] 당시 북에서는 박헌영과 남로당이 숙청될 때라서, 남한내 박헌영의 오른팔인 이현상은 김일성에게 눈의 가시일 수 밖에 없었다. 이태의 <이현상(남부군 비극의 사령관)>을 보면 북한에서 내려와 그를 암살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김지회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던 이현상은 51년말 군경의 1차대공세로 남부군이 다 작살나자 1백명 밖에 안남은 병력으로 '김지회 부대'와 '박종하 부대'로 부대를 재편한다. 이후 김지회 부대만은 이현상의 직속으로 끝까지 그를 지켰지만, 남로당 숙청으로 이현상이 숙청될 때 김태규를 부대장으로 하고 이름도 995 부대로 바꾸어 전남도당 구례군당 산하로 소속을 변경해 버린다.
995부대는 53년말 군경의 2차대공세때 김태규가 투항하면서 끝난다. 14연대 반란군과 남부군도 이로서 완전히 역사속에서 자취를 감춘다.
자세한 것은 빨치산(조선인민유격대) 항목 참조
2 사건 이후
이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 정부는 반공노선을 더욱 강화하였다. 진압이 완료된 그해 12월, 국가보안법을 통과되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이듬해에는 군부의 숙군이 본격화되었다. 현역군인의 약 5%가 갈려나갔는데, 억울하게 붙들려간 사람도 한 두 명이 아니었다. 나중에 석방되어 고위장성을 역임한 사람도 여럿 있지만, 무고하게 목숨을 잃거나 고문을 받아 장애를 입은 사람도 숱하다. 신원조회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엉망이던 군부를 다잡는 계기가 되었지만, 반대로 억울한 희생을 당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 사건이 북한의 지령이나 남로당 지도부의 지시로 일어났다는 얘기도 있으나, 남로당에서도 북한에서도 전혀 원하지 않았던 사건이었다. 남로당은 공중파 라디오 뉴스를 듣고 비로소 사건 발생을 알았다고 할 정도. 우발적으로, 게다가 사병 위주로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이후의 어떠한 계획도 없었고 결국 순식간에 와해되고 말았다. 군 내부에 세포조직을 키워 세력화하려고 했던 남로당은 이 사건 이후로 군 내부의 좌익계열들이 모조리 색출되어 군 내부에서 남로당의 기반이 뿌리째 뽑혔기 때문에 타격이 매우 컸다.
한국전쟁 종전후 북한에서 패전에 대한 책임공방이 일었을때 김일성파를 제외한 연안파, 남로당파, 소련파는 이 사건의 귀결을 매우 아쉬워했다는 후문도 있다. 박헌영의 입버릇이던 "인민군이 남진하면 20만 명의 남로당원이 호응할 것" 이라는게 사실이 되었을테니... 하지만 나중에는 되려 남로당계를 숙청할 때 빌미 중 하나가 되었다. 남로당 거두 박헌영의 재판에서 박헌영은 "여순사건은 내가 미군과 짜고 남한군 내의 세포조직을 노출시키기위해 일부러 일으킨 것이다. 그 이유는 내 사상적 기반이 나빴기 때문이다."라고 진술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럴 리가 있나. 수령 아바이 마음에 안들면 사상적 기반이 나쁜거지. 물론 박헌영은 1946년에 월북한 상태로, 김일성과 달리 군사적 자산이 없는 탓에 정치적으로 위축된 상태라 남로당을 통해 군사력을 강화할 속셈은 가지고 있었다. 다만 그뿐이지 미군과 짜다니...
여순사건으로 군내 좌익세력이 색출되지 않았다면 한국전쟁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여순사건 이후 숙군작업을 통해 숙청된 군인은 전체 군인의 5% 정도이다. 이 숙군작업을 통해 반공성향의 군문화가 정착되었다. 한편으론 당시 군의 파벌 가운데 만주군 출신들이 대거 중요 보직에 포진하는 결과[35]를 가져왔다고도 한다.[36] 한편 숙군작업은 좌익세력을 척결한다는 대의명분도 있었지만 반공 이데올로기 강화를 통한 이승만 정부의 확고한 군 장악 목적도 있었다. 그 결과 반국가 세력들도 좌익들과 같이 대거 숙청되었다. 그러나 여순사건은 이후 불어오는 어마어마한 대학살의 전주곡이었을 뿐이니. 사건이 일어난 여수 지역도 아니고 근처인 순천지역도 아니고 저~ 멀리 있던 지역의 좌익세력들까지 여순사건과 관련있다고 학살당한다. 위로 올라가는 보고의 상당수는 여순 세력들이 출몰했다고..
그리고 시간이 흐른 지금, 아직도 해당 지역은 당시의 사건을 기억하거나 이를 전해들은 사람들이 많은 편이다. 그래서 군인들이 훈련 등의 이유로 무장하고 돌아다니면 꼭 한마디씩 뭐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심지어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리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위 사건을 언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시 말해 전체적으로 군인에 대한 인식을 망쳐놓은 셈이다.
어떤 의미로는, 남로당의 첩자들이 자유롭게 군 내부로 스며들도록 방치한 미군정 당국의 방만한 태도가 좌익에게는 학살의 기회를, 우익에게는 복수의 명분을 제공한 셈이다.
3 정부의 반응
이범석은 이게 극우와 극좌의 합작이라고 발표했다[37][38].
# # 당시 국회 속기록에도 나온다. 이걸 가지고 김구가 여순사건에 관련이 있다는 둥 루머가 퍼져나갔다. 김구 암살관련 미 정보문건을 보면 김구, 염동진은 우익 반대파 장교들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했다고 한다. 역사편찬위에서는 염동진과 몇몇 장교들의 발언만 가지고 하는 거라서 신뢰성이 떨어진다고 했다.
심지어 5.10 제헌국회의원 선거때 이승만에게 대항하여 출마한 최능진 전 미군정청 경무부 수사국장과 백범 김구 선생 계열로 48년 9월 29일 해임된 오동기 전 14연대장(광복군 출신)을 이른바 ‘혁명의용군사건’으로 조작하여 구속했는데, 이 사건과 뒤섞어서 여순반란 사건의 총책은 최능진과 오동기라는 괴랄한 결론을 내린다. 이에 최능진은 사형, 오동기는 징역 10년을 받았다. 상술했다시피 김지회는 적색장교로 분류되어 연대 작전주임 보좌관이라는 요직에서 대전차포중대장으로 좌천되었는데 이를 지시한 사람이 당시 14연대장 오동기 소령이었다. 오동기 소령은 직접 상경하여 군 고위층에 김지회의 구속 건의까지 하였지만 증거가 없는데 어떻게 장교를 함부로 구속하느냐고 하여 허위로 몰아간 적이 있다. 이런 그에게 반란의 주모자라고 하니 본인은 환장할 노릇.
결국 여순사건이 북로당+소련의 지시라고도 하고 싶고, 정치적으로 눈에 가시인 김구의 지시라고도 하고 싶으니 결국 이걸 짬뽕하여 극좌와 극우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일으킨 사건이라는 결론. 어째 광주민주화운동이 당시 전두환측에서는 김대중이 일으킨 내란이라고 하고 최근들어 극우측에서 북한의 사주 + 아예 북한군이 투입되어 일으킨 봉기라고 서로 다른 주장을 하며 말이 꼬인 것과 비슷하다. 이 사건이 북로당+소련의 지시인지, 자신의 세력 약화에 조급해 했던 박헌영이 독단적으로 일으킨 남로당 이현상을 통해 일으킨 사건인지 친일경찰과의 불화와 제주도로 출동을 거부한 애국 14연대가 우발적으로 일으킨지[39]는 이견이 있다.
다만 확실한 건 김구가 북측과 짜고 일으킨 우익 쿠데타라는 것이나, 북한측에서 주장하듯 박헌영이 미군과 짜고 군내 세포조직을 소멸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이라는 것은 신빙성이 부족하다. 어째 극우든 극좌든 생각하는 것은 비슷한 것 같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든 실체와 관계 없이 잘되면 내 공로이고 안되면 정적에게 뒤집어 씌우기.
그러나 김구 안티세력에서는 이를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주장하면서 반란에 진압하러 갔다가 반란군이 된 제4연대장의 이름을 최남석이라고 주장하는데 저건 당시 기록이 잘못된 것이다. 여기에 대해 다룬 오마이뉴스도 있다.#
실제로 여순사건이 일어나기 전 오동기 제14연대장에서, 제4연대장이었던 박승훈이 후임 연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 후임 제4연대장은 이정일[40]이다. 훗날 이성가[41]로 개명한다. 남의사에서 활동했으며,해방전에는 한국 광복군의 북평 잠편지대 소속이었다.
저 극우 부분은 박정희 시대때 삭제되는데, 박정희에게 있어서도 흑역사였다. 당연히 박정희에 대한 부분도 삭제된다. #,# 박정희 본인이 여순사건으로 발발한 숙군의 대상이었을 뿐더러, 극우=김구를 지칭하는만큼 박정희로서 그냥 놔둘 일은 없었다. 자세한 것은 김구 항목의 김구의 복권 부분을 참조.
박정희 관련 링크(3개)를 확인할 수가 없다. 안열린다는 얘기다
4 좌우익의 학살
여수 점령후 반란군은 남로당 여수군당과 합동으로 경찰관과 우익진영 인사 검거작업에 착수하였다. 또한 여수군의 행정기관을 장악하고 우익인사, 경찰, 그들의 가족들을 살륙하였다. 교전이나 즉결처분으로 죽은 경찰은 74명, 공식적인 인민재판으로 죽은 민간인은 수십명 가량이었다. 진압군에 밀려 후퇴할 때 까지 3일동안 도합 150명 가량이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당시 여수 인구 8만명)
20일 순천으로 향한 반란군은 홍순석 중위가 이끌던 14연대 2개 중대와 합류한다. 여기서는 여수보다 학살의 규모가 컸는데 경찰관 칠십명은 경찰서 앞마당에서 집단 학살당하는등 우익들과 그 가족을 합쳐 총 9백명이 죽었다.(순천 인구 5만명)
그외에도 남원, 광양, 보성, 벌교, 고흥 등 전남과 경남의 여러 군소도시를 다니며 인민위원회를 세우고 우익들을 살해했다. 군별로 십여명식 죽어 약 2백명 가량이 살해당하였다.
이러한 차이는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여수는 전통적으로 우익이 우세한 지역으로, 좌익활동이 활발하지 않은 만큼 이에 대한 우익의 탄압도 극심하지 않았다. 그에 반해 수년 전부터 극단적으로 좌우익이 대립해 서로 보복 살상을 일삼던 순천에는 대규모 학살극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런데 주의할 점은 이들 도시에서 반란군과 그 추종세력... 정확히 말하자면 반란군 주력은 초반에 다른 도시로 진출하거나 지리산으로 들어갔고, 도시에 남은 좌익 세력들에 의해 죽은 경찰관과 우익 세력은 도합 1천3백명 가량으로 추정된다.
문제는 여순 사건으로 죽은 전체 민간인은 몇명이란 말인가? 당시 방송과 신문은 반란군이 3천명 이상의 주민을 학살했다고 하였다. 하지만 당시 국방부는 7천명이라고 발표 하고, 이듬해 전남 보건후생부는 이재민 구호자료에서 여수등 7개 지역에서 2634명이 사망하고 4325명이 행방불명되었다고 한다. 즉 7천명 가량이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좌익 세력이 죽인 사람은 1천 3백명. 그럼 나머지 5천7백명은?
반란 당시, 평소 정부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좌익계열 시민과 학생들도 이들에게 협조하였던 탓에 사건은 복잡한 양상을 띠었다. 특히 학생들이 협조했던 사실은 이후에 '여학생들이 치마에 무기를 숨기고 접근해 진압군을 공격했다 카더라'식의 크게 과장된 이야기로 발전하기도 했다. 당시 계엄령이 선포된 지역은 빨갱이 협조자 색출이 진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반란군에 의해 살해된 민간인의 수보다 많은 수의 민간인들이 처단되었다. 또다른 기록에 의하면 반란군에 의한 학살은 500명 남짓인데 비해 진압군에 의한 학살은 6000명 이상이다. 그것도 무려 정부 발간 공식기록 이다. 다만 실제로 이 수치는 사실인지 아닌지 확실치 않다. 반란군에 의해 학살된 민간인이 진압군측 학살 수치에 포함되었을 가능성도 높다. 어찌되었든 쌍방에 의해 희생된 민간인의 수는 반란중 죽은 군인들의 수보다 결코 적지 않다는 것만큼은 사실이다. 그도 그럴 것이, 좌익에 의한 사상청소가 벌어지자, 그 이후 진압군이 들어왔을 때 피눈물을 흘리는 우익들에 의해 보복조로 살육이 자행되었던 것.
우선 여순 사건에서 반란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먼저 발생한 것은 맞다.[42] 또한, 진압군의 반란 진압 과정에서, 반란군에 동조한 사람들에 대해, 재판 과정 없이 보복성 학살이 자행된 것도 맞으며, 그 과정에서 관련 없던 사람이 많이 죽었다. 늘 그렇듯 양편이 다 총을 들고 있으면 양편에서 다 죽게 되어 있다.[43]
한편, 관동군 출신이던 김종원이 무고한 양민들을 '빨갱이'로 몰아 대량학살을 하는 데 활약한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이기봉의 <빨치산의 진실>에서는 “교복을 입은 여수수산학교와 여수여중생들에게까지 권총과 카빈이 지급되었다. 이들은 스승을 예사로 살해하였다. 진보적 사상을 지닌 70여명의 각급 학교 교사들도 가담하여 학생들을 충동질하였다.”고 하였지만 실제로는 일부 좌익 학생이 가담한 수준이었다. 고위간부들에게나 돌아가는 권총이 어린 학생들에게 지급되었다는 것 부터 뭔가 수상하지 않은가?
당시 수많은 헛소문이 퍼졌는데 대표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통해 어린 초등학생까지 반군에 가담해 총을 들고 저항했으며 좌익인 아들이 우익인 아버지를 쏘아 죽였다느니 하는, 그의 입 외에는 어디에서도 출처를 찾을 수 없는 괴담을 퍼뜨렸다.
또한 정부의 요청에 따라 취재를 나간 이들도 헛소문을 부추겼는데, "여고생들이 '오빠'하며 군인을 불러 다가가자 치마 속에서 권총을 꺼내 죽였다"라는 기사가 바로 이때 나왔다.[44] 하지만 여주중학교에서 조사한 결과 실제로 실종된 여고생은 단 1명뿐이었다.
이때 적어도 세 명 이상의 여자 경찰이 강간 후 살해되었다는 이야기가 퍼졌다. 실명까지 공개되며 반란군 앞에서 발가벗겨진 채 음부에 총을 맞고 죽었다는 소문이었다. 국막래 경사는 후일 토벌대와 헛소문이었다고 인터뷰를 한다. 당시 아마도 6.25 때의 사례와 뒤섞인 듯 하다.
여수경찰서 고인수 서장 및 부하들을 모조리 사살했다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정작 지서장은 여수 시내로 진격하는 반란군을 만나기까지 했는데도 해를 입지 않고 지서로 돌아와서 무기들을 숨긴 뒤 살아서 몸을 피했다.
즉 반란군의 무차별 학살이 존재한 것은 사실이지만 세부적인 면에선 사실과 다른 점도 있다는 것. 물론 잊어선 안 될 것은 단지 "존재했다" 수준의 학살이 아닌, 국군의 무자비한 보복을 받을 정도로 큰 규모의 학살이 있었단 점이다. 그리고 그 보복 학살은 좌익들에 의한 학살의 규모를 훨씬 상회하였다. 천백 배의 피의 복수
5 창작물에서
- 창작물에서의 이야기임을 감안할 것.
일부 군인들은 지리산에 들어가는 대신 전라남도 각 마을을 돌아다니며 반란군인척 하며 학교 운동장으로 모이라고 한 다음, "반란군의 명령에 따라 모였으니 님 좌빨!" 하는 낚시 작전으로 마을사람들을 집단 학살하였다.
다른 소설에서도 야간에 군인들이 마을 할아버지에게 총부리를 들이대며 "이승만 만세냐? 김일성 만세냐?"하며 양자 택일하게 만드는 장면이 나온다. 아니 똑같은 군복에 총든 군인들이 반란군인지 진압군인지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 알 수가 있나?(진압군은 철모에 흰색띠를 둘렀다.) 결국 그 할아버지는 자신은 무식해서 아무것도 모르며 둘다 만세라며 울고 만다.
사실 반란군들이 행군할 때 마을사람들이 진압군인지 알고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민국 만세! 이승만 만세!"를 외쳤다는 일화도 있다. 반대로 고흥반도에서는 국군이 진입하자, 마을 사람들이 "인민군 만세!"라고 외쳤다가 학살당하였다.
진압군인지 반란군인지 알수 없기 때문에 군인들이 와도 집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될까? 이럴 때는 마을사람은 전원 학교 운동장에 집합하라는 명령에 따르지 않은 죄로 좌익으로 분류되어, 집집 마다 군인들이 수색하며 사살했다. 심지어 각 섬에서 배타고 육지로 나와 학교 운동장에 집합해야 했다.
순천 북국민학교등 각 학교의 운동장에는 거대한 구덩이가 파지고, 20~40세의 모든 남성은 속옷만 입고 무릎 꿇고 앉아 있어야 했다. 경찰관 가족과 우익청년단은 손가락으로 좌익 동조자들을 가리켰고, 지목된 사람들은 다섯명 씩 철사에 묶인 채 사살되어 구덩이에 던져졌고 어느 정도 쌓이면 장작과 기름을 넣어 불태워졌으며 다른 쪽에 있던 여자와 노약자들은 이 장면을 지켜봐야 했다. 이 광경은 외국인 기자들에 의해 기록되었다. <라이프>지의 칼 마이던스 기자는 "울 수조차 없는 상황"이라고 묘사하였다.
특히 각 지방 면장들은 군경 앞에서 의무적으로 좌익세력을 지목해야만 했다. "면민중에서 좌익 30명만 추려내!"하는 식으로 할당량이 내려졌다. 이미 주요 좌익 세력은 반란군 14연대를 따라 입산하고 남은 것은 반란군이 군청창고를 깨서 나눠준 쌀 받아 먹은 사람밖에 없던 상황에서, 면장들은 할 수 없이 평소 고분고분하지 않던 사람 몇을 지목했고, 그들은 즉석에서 처형되었다. 백두산 호랑이 김종원의 경우에는 이때 지목된 사람들을 일본군 헌병대 하사관 시절부터 애지중지 하던 일본도도로 목을 쳤다.
6 여담
- 여담으로, 이 사건 이후, 그렇잖아도 불길한 취급받는 숫자인 4는 대한민국 육군의 독립 부대명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않게 되었다. 14연대는 당연히 없어졌고, 일부가 반란에 가담한 4연대는 20연대로 재편되었다. 대한민국 해군 역시 함번 및 중대급 이상 육상 부대번호에 4를 넣지 않으나, 이는 여순 사건과 별개로 한국전쟁 당시 함번이 4인 함정들이 우연히 좋지 않은 사건을 겪거나 격침되는 일이 잦아, 미신에 민감한 뱃사람들의 특성상 사기에 영향을 크게 주기 때문에 생긴 방침이다.
- 이 사건의 여파로 6연대는 3차에 걸쳐서 일부 반란을 일으켰고 이들은 지리적인 영향상, 이현상과 14연대가 있는 지리산 대신 태백산맥이나 팔공산으로 들어가서 남도부 부대에 합류하게 된다. 결국 6연대도 없어졌다.
- 허영만 화백의 아버지도 이 당시 죽을 뻔 했다고 한다. 허영만 화백의 아버지는 일제시대 순사를 했기 때문이다.
- 리영희 씨는 한국해양대학교 재학 시절에 이 사건을 목격한 적이 있다. 항해 실습을 하던 선박이 진압군 병력을 수송하던 선박이어서 여수항까지 가게 되었다고 한다.
- 여수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치료 시설인 애양원을 운영하던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도 이 사건때 좌익계열 학생들에 의해 살해되었다.[45] 손양원 목사는 자신의 두 아들을 살해한 학생인 안재선 씨를 용서하고 양자로 삼았다(!!) 이런 손양원 목사의 모습은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별명을 낳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터지고 손 목사는 피난하지 못한 한센병 환자들을 지키기 위해 교회에 남아 있다가 여수 지역으로 온 인민군에게 총살당하고 말았다.[46]
- 사건이 처음 발생했을 당시 14연대의 주둔지는 현재의 여수시 신월동 일대로 한국화약 여수공장이 있다.
- 대한민국 해병대가 창설된 계기가 된 사건이다. 해상에 인접한 특성상, 진압에 조선해안경비대도 동원되었는데, 함 승조원을 해군 육전대처럼 차출하거나 국방경비대를 태워 상륙시켜 운용하는 등엔 행정 절차 등이 복잡하고 육해군간 연계력이 떨어져, 해군이 직접 운용할 수 있는 지상전 및 상륙전 병력의 필요성이 제기되자 손원일 제독이 이를 관철시켜 창설한 것이다.
7 참고 문헌
사건당시 구례에 있어서 사건을 직접 목격하였고, 이후 6.25때 첩보공작 요원으로 인민군에 침투하여 사건의 진실에 많이 접근한 이기봉이 쓴 책도 참조하면 좋다.
- <실록 제14연대(독서신문사)> - 여순 사건이 언급되는 책은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이책이 언급되어 있다.
- <빨치산의 진실(도서출판 다나, 1992년)> - 중반까지는 주로 역사와 이론이며, 후반부에는 빨치산의 기원인 14연대 사건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작가 이기봉의 성향이 워낙 오른쪽에 치우쳐 있어 걸러 들을 필요가 있다. 박헌영이 김인회를 시켜 여순사건을 일으켰다는 점은 여러 설중 하나로 받아 들이면 되지만, 좌익세력의 양민학살을 과대포장하여 다루고 규모가 훨씬 컸던 우익에 의한 학살은 아예 빼버린 점이 아쉽다.
- <여순병란(청산, 1994년)>
- 남부군의 작가 이태의 여수 14연대 반란 사건을 조명한 실록 소설. 작가가 남부군으로 편입했을 무렵, 반란의 지휘부들을 이현상, 박종하을 제외하고는 전사하여 보지 못했지만, 중간 지휘자였던 하사관들이나 말단 병사들이 많이 남아 있어 이들을 통해 반란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여러 사료와 이태가 반란군에게 직접 들은 증언을 취합하여 썼다. 위의 책인 빨치산의 진실에서는 전혀 안 나오는 우익에 의한 여수 주민들에 대한 학살을 자세히 다루고 있으며, 빨치산/반란군의 갖은 병크들도 잘 다루고 있다. 빨치산의 진실은 거의 군경쪽 자료만은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여순병란은 군경쪽 자료는 물론 반란군 당사자의 증언까지 합쳐져 있기 때문에 사건이 상당히 입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얘를들어 15연대장 최남근이 김지회를 만나 반란을 모의했던 것을, 박종하가 생존해 있을 때 이태에게, "15연대 전체를 반란으로 이끌 수도 있었는데 당시 반란군이 김지회의 성화 때문에 급하게 이동중이라 김지회와 만나기 위해 이동에만 2일 걸려 타이밍이 안맞아 반란으로 연결되지 못해 안타까웠다"는 증언을 채록해 놨다. 군경쪽에서는 절대 알 수 없고, 반란의 당사자만 알 수 있던 비화.
8 파란 눈 종군기자가 본 '여순 사건'
2016년 4월 30일 여순 사건 당시 세계적인 종군 기자로 명성을 떨친 칼 마이던스가 남긴 사진이 재미사학자 유광언 씨의 기증으로 공개되었다. 보러 가기- ↑ 하지만 당시 여수·순천에 옛 친일경찰들의 패악질과 정부의 무리한 공출이 있었기에 반정부 성향이 존재했다. 당시 주민들은 자본주의나 공산주의 같은 이념에 대한 명확한 개념이 없어서, 좌익은 2개월 전에 수립된 이승만 정부의 실책을 두고 선동했다. 여수·순천의 주민은 이 선동에 속아 반란에 동조한 부분이 있다. 반란군이 여수·순천 일대를 순식간에 장악한 요인 가운데 하나로 평가하기도 한다.
- ↑ 현재까지도 북한의 공식 입장이기도 하다.
- ↑ 당시 국무총리 이범석의 발표이며, 이미 오래 전에 폐기된 주장이다.
- ↑ 그러나 그 직후 제 2차 인민혁명군 마저 미군정 경무부 수사국에 의해 일망타진 되어 또 한번 붕괴된다. 이때 총책 강진이 검거되는 바람에 김일광이 대신 잔여 세력을 지휘하게 된다
- ↑ 반공이 국시로까지 자리잡기 전이었으며, 정부수립 이전 미군정도 딱히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입장까진 아니었다. 그저 김구, 이승만 등 해방 이전부터 반공성향이 강한 인물들의 영향력이 행정권에 끼쳐 있을 뿐이었다.
- ↑ 14연대 뿐 아니라, 이런 청년들이 군부대에 입대하는 일이 흔했다. 지금도 군인이 민간에서 범죄를 저지르면 군 헌병대로 이첩되는데, 당시 철통같은 경비를 서는 군부대로 입대해 들어가버리면 말그대로 행방이 묘연해질 뿐더러 입대 사실을 알아도 경찰이 어찌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 14연대 3개 대대장은 경비사관학교 2기
- ↑ 무장면에서도 경찰측이 우위를 가지고 있었는데, 한국전쟁 때도 당시 주력 소총인 M1 개런드는 군보다 경찰이 더 많이 소유하고 있었다. 때문에 군이 후퇴하는데 경찰이 소총을 들고 북한 정규군과 맞서는 웃지못할 사건들이 빈발했고 후방 빨치산과 싸우던 경찰을 향해 미군이 공격을 가한 경우도 있었다. 경찰치고는 무장이 너무 좋아서 위장한 북한군인줄 알고 그랬다고 한다(...).
- ↑ 4.19혁명 당시 경찰이 시위대를 강경진압한 것과 달리 계엄군이 시위대에 유연하게 대처한 것에도 이러한 영향이 있었다고 한다.
- ↑ 당시 육군은 돈이 없어서 계급장 대용으로 단추를 꿰매어 달아 개수차로 분별을 했는데, 문제는 이 단추가 경찰 정복 단추와 비슷했다(...). 이것을 버스 안에서 본 경찰들이 거지들이라며 놀렸다.
- ↑ 당시는 철모, 작업모가 전부 부족하여 정모를 많이 착용했는데 좌익계열 장병들을 이 정모의 턱걸이 끈을 의도적으로 T자형으로 묶어서 상호간 성분식별의 암호 표지로 이용하고 있었다. 김창선 소령은 이사실을 알고 턱걸이 끈을 T자로 묶은 병사들을 색출하였다.
- ↑ 일본군 출신. 50세 후반의 중령
- ↑ 남로당 여수군당 위원장 이용기가 이끄는 여수지역 좌익청년
- ↑ 당시 대대장과 연대 작전주임까지는 경비사관 2기였고, 가장 막내는 6기였다.
- ↑ 이때 지나가던 유창남 상사가 김지회에게 왜 봉기에 가담하지 않냐고 힐난했는데 이후 반란군의 포로가 된 미군 고문관 모어 중위, 그린바움 중위를 구출하고 탈출하여 여순반란 사건의 내막에 대해 가장 충실하게 증언한다
- ↑ 이전 서술에서는 군부 숙군으로 불안해했다고 기술되었는데, 앞뒤가 잘못된 것이다. 여순사건이 숙군의 원인이 되었으며, 이듬해 4월부터 본격적으로 작업이 시작되었다.
- ↑ 간도특설대 출신이다.
- ↑ 반란은 소련측 지시로 일어난 것이고, 17일 대구에서 반란이 일어났다고 보도한 것은 일부러 미국측을 헷갈리게 하기 위함이라는 설도 있다.
- ↑ 평양방송이 남한보다 하루 먼저 여순 사건을 방송한 것은 북한 배후설의 중요한 근거가 되지만, <남부군>의 저자 이태는 평양의 중앙통신은 남한의 통신사들이 전국의 지국들과 교신하는 것을 잡아 지체 없이 평양방송으로 흘리는 일이 자주 있었기 때문에 사전 개입했다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고 반박한다.
- ↑ 이는 6.26때도 똑같이 반복된다.
- ↑ 장교인 홍순석이 순조롭게 2개 중대를 합류한 것은 홍순석이 전남 화순 출신이라 이례적으로 현지 남로당과 연결되어 있어서 처음부터 반란사병들에게 신분을 보장받고 있었다.
- ↑ 벌교에서 발생한 반란군의 학살행위와 진압은 조정래의 장편소설 《태백산맥》 제1부 〈한의 모닥불〉에 잘 나와있다. 단, 《태백산맥》 1부의 내용과는 달리 주민의 환대 같은 것은 없었다고 한다. #
- ↑ 최남근은 만주국육군군관학교 출신으로,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하였으며 북한을 왕래했던 적색분자였다. 심지어 출동 후 15연대에게 실탄도 지급안하다가 2중대장이 난리쳐서 나눠줬을 정도.
- ↑ 원래 계획은 북한에서 밀고 내려오면 이와 동시에 지리산유격전구에서 광주 4연대를 시작으로 여수 14연대, 마산 15연대, 전주 3연대, 군산 12연대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영남 및 태백산유격전구에서 대구 6연대를 시작으로 부산 5연대, 청주 7연대가 반란을 일으키며, 오대산 유격전구에서는 강릉 8연대, 춘천 1대대, 원주 2대대가 반란을 일으켜 남한 전역을 혼란에 빠뜨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딴건 없었다. 오직 14연대만 성공하고 6연대가 3차에 걸쳐서 반란을 시도하다가 실패하여 6,70명이 팔공산에 입산했을 뿐이다. 일단 북에서 안 내려왔으니 결국 14연대도 속은 셈이다
- ↑ 이러한 병력 과잉 동원과 우군 각 부대간의 협조체계 미비, 사격군기 문란으로 진압군끼리 격렬한 사격전이 펼쳐졌다. 주요도시 수복 이후 야간에 졸다가 실수하여 밤새 사격전을 벌이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아군끼리의 교전은 반란군이 이미 지리산으로 다 들어간 이후에도 계속 벌어졌다.
- ↑ 여담으로 송호성과 함께 장갑차를 탔던 AP통신 기자 크린튼은 현장에서 총탄 2발을 맞고 즉사하였는데 한국 최초의 외국 종군기자 희생자가 되었다
- ↑ 북한 49년판 <조선년감>에는 리승만 매국도당 괴뢰군 270여구를 사살하고 패퇴시킨 전투라고 나와 있는데 역시 북한답게 뻥튀기가 작렬한다.
- ↑ 이태의 회고에 따르면 이현상이 포위되었을 때, 노획한 국군 무전기를 통해 국군식 무전법으로 국군 부대간 교란을 시도하기도 했다.
- ↑ 이태의 남부군에서도 이점을 비판한다. 소수의 빨치산으로 민심을 얻고 전투를 회피하며 유격전을 펼쳐야 하는데 민중들을 약탈하고 국군의 거점공략등을 일삼았다는 점을 문제시 한 것이다. 반면에 그의 책 <여순병란>에서는 정치적으로 선전하기 위해 이런 백주대낮의 대규모 전투를 벌였다고 나온다.
- ↑ 이태의 <여순병란>에 의하면 14연대의 좌익장교 15명을 불문곡직하고 처형한 죄, 여수에서 약간의 부하들만 데리고 탈출하여 1천여명의 좌익세력을 방치하여 적의 손에 넘겨준 죄 때문이라고 한다.
- ↑ 이지아의 <빨치산의 딸>에서는 유격대는 민폐를 끼치지 않는 것이 철칙인데 어쩌자고 그렇게 술을 먹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술에 취해서 당했다는 소문과 달리 군경의 매복과 속임수에 넘어간 것일 수도 있다고 뇌내망상을 한다. 좌익 성향의 <이현상 평전>역시 이쪽 설을 따른다. 참고로 술집주인 박과부는 나중에 빨치산에게 보복으로 돌로 맞아 죽는다.
- ↑ 김지회가 4연대 시절 남로당 제주도당 소속이자 전남도당과의 연락책이였던 전남도립 병원 간호원인 그녀를 포섭하기 위해 꾀병으로 입원 했다가 사랑에 빠지게 된다.
- ↑ 승리사단이라고 해봤자 200명 정도이며 초기에 '흥복부대'와 '관일부대'로 나눠져 있다가 서울,대구,전주,여수 4개 부대로 개편되면서 김흥복이 사단장으로 승진한다.
- ↑ 정확히는 투항한 빨치산으로 구성된 토벌대. 빨치산의 신체적 능력이 워낙 넘사벽이여서 투항한 빨치산정도는 되어야 추격전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 ↑ 만주군 출신들이 여순사건 진압에 큰 공을 세운 것이 감안되었다고 한다.
- ↑ 당시 국군은 중국군파(광복군), 일본군파, 만주군파 등 크게 3개의 파벌로 나누어져 있었다. 여순사건 이전에도, 주한 미국 군사고문단이 호의적으로 평가한 군인들은 만주군파에 속한 인물들이었다. 자세한 것은 만주군 항목을 참조.
- ↑ 극우 부분은 박정희가 집권한 후에 삭제되었다. 어찌됐건 간에 본인 입장에선 흑역사니 그럴만도 하다. 이범석 자신은 독립군 출신이지만 희한하게 열렬한 이승만의 지지자로 극우 성향에 가까운데 이런 발표를 낸것 자체가 흠좀무
- ↑ 여기서 말하는 극우는 정확히 말하면 이승만이 아닌 김구계열을 암시한다. 내부 정쟁에서 김구계열을 공격하기 위한 발표인 셈.
- ↑ 주로 좌파쪽 주장인데 현재는 거의 논파되었다. 최소한 애국의 대상은 남한이 아니다.
- ↑ 실제로 당시 기록은 이정일 부대로 나와 있다.
- ↑ 제20연대라 나와있는데, 원래 제4연대로 여순사건이후 제20연대로 개명됨.
- ↑ 손양원 목사의 아들의 사망과 관련해서, 동인, 동신 형제의 동생(손양원 목사의 딸)이 여수에서 순천으로 가면서, 길거리에서 많은 민간인들이 죽어있는 것을 목격한다. 또한, 안재선을 비롯, 당시 반란군에 동조하여, 학살에 가담한 사람들의 증언도 있다.
- ↑ 반란군은 여수, 순천에 있던 미국인 선교사나 군사고문단은 건드리지 않았다고 한다(...).
- ↑ 월탄 박종화가 쓴 기사였는데, 정부가 기자가 아닌 성균관대 교수이자 소설가인 박종화를 취재하라고 보낸 것부터 희한하다.
- ↑ 손목사의 두 아들은 당시 우익 성향의 학생단체에 소속해 있었기 때문에 살해한 것으로 보인다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이 부분은 논란의 소지가 있다. 당시 순천 사범 학교는 신탁 통치에 대하여, 찬(좌익), 반(우익) 으로 나눠져서 강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손 목사의 두 아들은 우익 학생 단체가 아니라 기독 학생회 소속이었다. 기독 학생회가 우익 성향이었다고 주장할 수는 있으나, 당초 첫째 아들 동인은 그런 논란에서 떨어져 있는 사람이었다. 당시, 동인을 죽인 이유는 미제에 앞장선다는 황당한 이유였다. 동신은 동인의 동생이라는 이유로 죽였다. (우익 성향이었다 하더라도, 반탁이었을 동인에게 미제에 앞장섰다고 했다는 건) 아무래도 동인이 기독교도이고 기독 학생회를 이끄는 입장이었던 게 가장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 동인, 동신 형제를 죽였던 좌익 학생 중 한명인 안재선(손 목사가 양자로 받아들인,,)도 이와 비슷한 증언을 했다.
- ↑ 결국 여순지역 사람들은 어떻게 하든 다 죽는다는 아픔을 겪었다. 좌이든 우이든 중립이든 죄다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