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개요
조선 후기 붕당 중 하나인 노론이 프리메이슨처럼 조선을 지배하고 지금 현재 대한민국까지 지배하고 있다는 음모론.
노론 음모론가들에게, 노론의 주도로 형성되고 조작된 것으로 간주되는 주류 사학은 "노론사관"이라고 명명된다. 그러나 이는 음모론가들이 기존 학계의 사관을 잘못 지칭하는 명칭이므로 노론 음모론의 바른 이름은 아니다. 그럼 남인 사관? 소론 사관?
다만 노론 사관이 있다는 의견자체는 학계에선 있기는한데 음모론 같은 건 절대 아니였다. 오히려 이덕일때문에 노론사관이라는 의견이 음모론으로 변질되었다.
위에 나왔듯이 역사적 배경이 아주 없는 사관은 아니다. 실제로 노론의 정치적 우세에 따라 배제되어버린 소론과 남인 학자들에게 조선 말기부터 비슷한 인식이 퍼져있던 듯 하다. 가령 고종대의 인물인 이건창(李建昌)이 저술한 조선 붕당 정치사서인 당의통략(黨議通略)서는 서인 공신세력이 "국혼을 다른 세력에게 잃지 말고 재야의 지도자인 산림을 높여 쓰자(산림존숭 물실국혼)"며 맹약을 했고, 그 이후로도 기반을 잃지않고 집권할 수 있었다 고 서술한 바 있다. 정조 독살설도 남인일가의 민담이나 여유당전서 등에서도 나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것이 마치 오컬트 속에 나오는 프리메이슨이나 장미십자회처럼 노론을 권력을 장악한 비밀결사체로 규정하는 움직임으로 바뀐 것은 이덕일을 비롯한 현대 유사역사학이 그 기원이다.
"노론사관"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이덕일의 책인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이덕일의 한국사 4대 왜곡 바로잡기)>이다. # 이주한 연구위원도 <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이라는 책에서 노론 음모론을 주장했다. #
이런 류의 끝판왕!으로 이덕일이 쓴 세월호 참사 뿌리는 노론의 당리당략이라는 글이 있다(...)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2 노론 음모론의 내용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이 회니시비를 계기로 노론과 소론으로 분리되었는데, 이 노론이 경종 시기의 잠시를 제외하면 조선 말기까지 조선을 장악하였으며 조선의 발전에 심각한 폐해를 끼쳤다는 주장이다.
노론 음모론에 따르면 노론은 우선 사도세자를 악의적으로 모함해서 영조로 하여금 임오화변을 일으켜 사도세자를 죽이게 한다. 그리고 임오화변을 계기로 시파와 벽파로 분리되는데 벽파가 개혁군주 정조를 독살하고 정권을 잡는다. 즉, 정조 독살설을 주장하는 것. 이후 지속적으로 정권을 잡은 노론 벽파는 세도정치를 펼치면서 조선을 썩게 만들다가 일제강점기에 나라를 팔아먹고 친일파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정작 이완용은 노론산림의 위정척사파들이라면 기겁을 할 역사속의 여러 역적들의 복권을 주장해 관철시켰다. 순종 항목이나 이완용 항목 참조.
일각의 노론 음모론은 환빠처럼 근현대사에서도 이런 음모가 계속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대한민국이 광복한 뒤에는 영남 지방을 기반으로 하는 보수 우파가 되어 지속적으로 진보를 방해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이른바 '영남 노론'이라는 단어가 나오게 된다. 즉 영남 지역의 보수우파 문중들이 자신들의 정당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역사왜곡을 했다는 것이 노론 음모론의 주장이다. 노론 음모론자들은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을 노론사관의 대표적인 역사왜곡 사례로 지목한다. 여기서 <선조수정실록>의 십만양병설 경우 의도적인 역사왜곡 보다는, 서인 측에서 양병설을 포함하는 이이의 개혁/경장의 주장들을 언급하고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다가 생긴 착오에 가깝다. 이에 대해선 이이 문서를 참고.
노론 음모론자들은 기존 사학계와 적대적인 환빠와 결합하여 주류 사학 = 노론사관 = 식민사관이라는 도식화된 주장을 한다. 또 대한민국의 보수 우파를 조선시대 노론과 친일파까지 연결시킨다. 때로는 여기에서 더 발전해 정파적인 주장으로 결론지어진다. 즉 '영남 노론'이 대한민국 수립 이후에는 경상도에 기반을 둔 지역감정을 조장하여 기득권을 누리고 정권을 세워 권력을 유지하며 다른 지방과 진보 세력을 탄압했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이 '노론사관'이란 게 역사학계 내부의 사관이 아니라 정치영역에서 정파적인 이유로 만들어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학문 영역에서 노론사관이란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3 음모론에 대한 논박
노론 음모론의 헛점은 한 두가지가 아니다.
3.1 모호한 음모론 주체
이들이 만악의 근원으로 꼽는 것은 '서인-노론-벽파'이다.
우선 위 주장에선 시파와 벽파, 노론과 소론, 서인과 동인-남인, 더 나아가 붕당들 전체의 문제점들을 일부러 애매하게 하나로 표현하고 있다. 시파의 책임을 벽파에게 전가하고, 서인 전체의 문제점을 노론에게만 전가하고, 붕당 정치 전체의 문제점을 서인에게만 전가한 것.
순조 대부터 정권을 장악한 안동 김씨 및 풍양 조씨 등의 세도정치 가문들은 모두 노론 시파에 속하며, 오히려 노론 벽파는 정조가 사망한 직후 잠시 정권을 잡았다가 시파의 역공에 거의 숙청당했다. 게다가 붕당정치가 끝나고 세도정치가 들어서게 된 책임은 오히려 탕평책을 빌미로 왕권 강화에 지나치게 힘써서 신권의 견제 기능을 무너뜨린 영조와 정조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정조와 대립했다는 이유만으로 세도정치의 책임을 노론 벽파에게 전가하고 있다.
게다가 엄밀히 말하면 벽파는 反정조 세력이라 부르기도 뭣하다. 정조의 대리청정과 즉위를 지원사격한 김종수, 김귀주 등이 벽파였고 뒤의 행보를 보면 오히려 정조는 벽파를 보호했다. 벽파 수장 김종수를 일컬어 정조는 "내가 그의 목숨을 몇번이나 살려준지 모르겠다."라고 할 정도로 그의 뒤를 봐주었다. 그래서 김종수는 정조 즉위 후의 최측근 그룹이라 할 수 있는 동덕회 4인방 중 한 명으로 꼽히는데, 나머지 세 명이 정민시, 서명선, 그리고 홍국영이라는 점을 보면 김종수가 차지하는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심환지만 해도 심환지 어찰이니 뭐니 해서 反정조라는 공식은 거의 깨졌다. 하지만 여기에 박정희를 암살한 것도 그의 측근인 김재규라는 것을 들먹이며 어찰을 받았거나 말았거나 정조 독살한 건 심환지와 벽파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존재한다
3.2 영남 노론?
'영남 노론'이란 주장의 경우 멀리갈 것 없이 국사 교과서만 들여다 봐도 박살난다. 경상도는 유구한 역사 이래로 동인-남인의 텃밭이었다.(하지만 주류사학을 부정하는 이들이라서 교과서 내용도 조작된 거라고 우긴다. 그러니 바로 들통나지... 하지만 교과서도 못 읽은 것들이 바로 교과서도 노론 세력의 후예들이 썼으니 믿을 수도 없다고 정신승리하고 자위한다 (...)
굳이 지역적으로 당파를 구분하자면 노론은 경기-충청도 기반이고, 영남은 남인과 가까웠다. 당장 남인에서 추앙받은 이황과 류성룡이 어디 출신인지 생각해보자. 경상도 지방에도 노론 집안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나 정말로 손에 꼽힐 정도로 드물다. 효종 때는 경상도 서인 유생들이 율곡을 옹호하는 글을 올렸다가 남인 유생들의 공격으로(말 그대로 집으로 쳐들어와서 집을 부수고 고향에서 추방했다.) 고향에서 쫓겨나는 일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경종 이후 이인좌의 난 등으로 인해 경상도는 반역향이라 하여 정 2품 이상의 벼슬을 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현대 경상도 지역에서 양반 문화가 잘 남아 있는 이유로 조선 후기에 중앙 진출의 길이 완전히 막힌 영남 지역의 양반들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해석까지 나올 정도이다. 참고로 안동 김씨 가문은 어디까지나 본관이 경상도 안동일 뿐이지 실제 정치적 기반으로서의 경상도와는 관련이 없는 가문이다.
그리고 위에서 잠시 언급한 영호남 지역감정 문제의 경우에도 말이 안되는게, 조선시대의 호남 지역의 사대부들은 영남과 마찬가지로 동인/남인에 가까웠다. 단지 정여립의 난 때 서인인 정철의 주도로 호남 유림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을 받아 그 세력을 잃은 것이며, 시기적으로 좀 차이가 날 뿐이지 영남 유림과 똑같은 취급을 받았다.
참고로 현대의 지역감정 문제는 조선시대의 붕당 정치와 아무 상관이 없다. 대한민국 정치판에서 영호남 지역감정이 강하게 작용하기 시작한 건 김영삼-김대중의 대립과 3당합당 이후의 일로, 그 전까지 같은 영남이라고 해도 박정희의 기반지인 대구, 경북과 김영삼의 부산, 경남은 성향이 확실하게 달랐고, 부마항쟁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경남지역은 원래 친일, 친독재 기득권층과는 거리가 멀었다. 영호남의 지역감정은 대한민국의 정치논리에 의해 '선거용'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이에 대해선 지역감정 항목의 영남-호남 부분을 참조할 것.
3.3 사도세자 모살?
노론 음모론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것으로 사도세자가 노론의 음모로 모함을 받아 살해당했다는 이야기. 영조를 노론에 휘둘리는 멍청한 국왕으로 설정하고 사도세자가 마치 반노론 세력에 힘을 실어주는 개혁 군주의 자질을 보여주자 이에 반감을 품은 노론의 음모에 휘말려서 뒤주에 갇혀 살해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한 논박은 사도세자 및 임오화변 항목을 참조할 것.
또한 음모론에서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혜경궁 홍씨가 악의적으로 남편을 모함하고 결국 임오화변까지 일으키게 했으며, 그녀가 쓴 한중록은 그녀와 친정인 홍봉한 집안의 행적을 극도로 미화한 기록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한 논박 역시 혜경궁 홍씨 항목을 참조할 것.
3.4 노론 친일설
음모론의 끝판으로 노론의 다수가 개화 이후 친일파로 변해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주장. 대표적으로 여흥 민씨가 꼽힌다.[1] 그러나 이는 당시 조정에서 실권을 잡고 있던 관료들의 출신과 위정척사 운동을 주도한 계층만 봐도 올바른 분석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당장 위정척사파의 거두인 최익현을 비롯한 노론들 다수가 위정척사운동에 관여되어 있었으며 친일파들은 주로 고종이 직접 키운 여흥 민씨 세도가문[2]이나 개화파 등 기존 주류 노론과는 다른 이질적인 세력도 많이 있었다.
4 노론 음모론의 세력과 현재
불행히도 2015년 현재 노론 음모론은 주로 대중적인 서점들의 판촉을 기반으로 한국 대중들에게 널리 전파되고 있는 실정이며 이덕일 소장의 주 레퍼토리인 조선왕 독살설을 차용한 방송 매체들과 영화들이 우후죽순 제작되면서 이러한 상황에 기름을 붓고 있다. 전술했듯 허점이 많은 이론이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지만 현대 주류 학계를 각종 부패와 음모의 온상으로 묘사하는 걸 절대 빼먹지 않는 노론 음모론의 특성상 학계 차원의 반박만으로는 상황을 진정시키는 데에 무리가 있다. 답정너? 오히려 조선사 및 근대사를 노론 음모론 계열의 서적으로 처음 입문한 이들에 한해서는 학계 차원의 반박이 주류 학계에 대한 더 큰 불신, 그리고 그에 따라 결국 더 심한 역효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대중들에게 널리 퍼진 잘못된 노론사관의 적절한 예시글. 그것도 네이버캐스트에서 영조에 대해 처음으로 기술한 글이 이렇다. 일단 사도세자 노론 흑막설을 대놓고 쓴 글쓴이의 글 내용 뿐만 아니라 밑에 댓글들 또한 노론사관 운운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창작물 적인 관점에서는, 창작가들은 "부패한 기득권 세력"과 "청렴한 개혁 세력"이라는 클리셰를 매우 선호하고, 여기에 음모론 요소를 끼워넣기도 좋다보니 노론사관이 선호받는다고 볼 수 있다. 이 클리셰는 현실 세계의 정치 부패에 대한 경계감과 카타르시스 때문에 늘 선호받는 소재이긴 하다. 사실, 보통 해외 배경 작품에서는 귀족이 이런 역할을 맡는다. (대표적으로 은하영웅전설처럼) 그런데 조선에서는 이런 역할을 해줄 귀족이 없다. (…) 그렇다고 양반을 모두 부패 귀족과 같은 것으로 만들기에는 실제 현실과의 차이가 너무 크다. 그렇다보니 "서인-노론-벽파"가 이 똥물을 덮어쓰는 역할을 맡는 것.
문제는 자신들은 자뭇 그럴듯한 "궁중-조정 정치물"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이런 종류의 소재를 쓴 작품은 워낙 흔하다보니 결국 클리셰 투성이 작품이 되버린다. 창작물적 관점에서 문제점은, 이 노론사관에 기초한 음모론적 궁중 조정 정치 묘사 방식이 결국 전제군주제에서 "왕"의 역할과 책임에 대한 고찰이라는 중요한 주제를 방폐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결국 "노론사관"론은 어떻게 보면 사실상의 무제한적 권력을 휘두르는 "왕"에 대한 비판을 "간신"에 대한 비판으로 전환하여 왕에게 무한한 실드를 부여하는, 전근대적인 간신론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특정 당파가 음모를 꾸며서 이 모든 게 잘못됐어요!"라는 이론은 결국 "임금님은 착하신데 그 간신배 놈이!"라는 구시대적 사상과 굉장히 비슷한 측면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간신론"은 결국 왕을 실드침으로서, "리더쉽에 대한 올바른 고찰"도 방해하게 된다는 문제점이 있다. 결국 노론사관 음모론이 적용된 사극에서 왕의 역할은 "음모론 세력에 휘둘리거나," "음모론 세력과 싸우거나" 둘 중 하나가 되버리며, 음모론 주체라는 사실상의 마왕이 존재하니 왕의 역할이 현실의 "리더"에 보다는 거의 "선택받은 용사"에 가깝게 되버린다. 결국 자신들은 현실적이고 그럴듯한 정치 사극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지만, 현실과는 동떨어진 비현실적인 판타지물이 되버리는 셈이다. 이는 실제 역사를 이해하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숙종의 경우 오히려 당파가 임금 손아귀에 놀아난 꼴인데 드라마에서는 오히려 숙종이 당파의 피해자처럼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4.1 조선후기 정치사의 흐름에 대한 인식의 부족
조선후기 정치사에서 붕당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연과 학연을 근거로 하는 붕당과는 별개로 18세기 부터는 정치적 상황에 따른 결정이 붕당보다 우선시되는 경우가 많다. 당장 영조 때만 해도 탕평책에 대한 입장으로 탕평파라는 새로운 정파가 나타났으며, 같은 당 내에서도 준론과 완론으로 나뉘어 심지어 노론 완론은 소론 완론과 더 친밀 했고 노론 준론과는 앙숙이 되었다. 정조 때는 노론과 소론보다 시파와 벽파가 더 중요하였다. 즉 영정조 때만 되어도 노론과 소론, 남인과 북인이라는 당색보다 경종 당시 대리청정 논란에 대한 입장, 임오화변에 대한 임장, 탕평책에 대한 입장 등 개인의 정치적 입장이 더욱 중요해진 것이다.
실제로 같은 가문의 형, 동생이 노론과 남인으로 나뉘는 경우도 있었고 (나주 나씨의 경우나 경종 시기 사촌이였으나 소론 조태구-노론 조태채 집안같은 경우가 있다.), 소론이 노론으로 당색을 바꾸는 경우도 있었으며 (반남 박씨, 경북 일대 유림들의 경우), 송시열이나 윤휴,박세채같이 당색이 달라도 일가끼리 서로 혼인하는 경우도 많았다. 간단히 말하자면 18세기 이후로 노론이니 소론이니 남인이니 하는 당색은 각 가문의 전통 정도로만 남아 있었고, 그보다는 국왕의 정치적 입장에 대해서 어떠한 입장을 취하느냐가 더 중요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 각 당색이 마치 고정되어 절대 불변하는 것인양 노론 음모론을 들이대는 것은 조선후기 정치사에 대한 인식의 부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다,
4.2 서인 전체의 악역화
노론이 악당이 되어가면서 원류인 서인들과 노론과 뿌리는 같았던 소론까지 싸잡아서 욕을 먹고 있다. 실질적 원류인 율곡 이이가 욕을 먹고 있는 것은 물론 심의겸계로 분류되는 윤두수 형제도 실제 역사에서의 행적보다도 지나치게 욕을 먹고 있으며 윤두수 형제 욕먹는거는 이순신을 모함한 죄 때문 아닌가?정철은 정여립의 난에서 선조의 손아귀에 놀아난 것 때문에 숙일 줄 모른다는 당대의 평가와는 달리 선조에게 아첨하는 간신처럼 묘사되고 있고 나무위키에서도 이런 주장이 반영되어 지나치게 부당한 평가를 받고 있다. 정작 나라를 망친 주범인 안동 김씨는 노론 벽파와 적대하던 노론 시파였고 순조의 묵인과 암묵적 동조 하에 벽파를 제거하고 세도를 누린 것임에도 정작 욕은 벽파와 정순왕후 김씨가 받고 있다. 심지어 안동김씨도 노론이니 벽파라는 왜곡질까지 나올 지경. 오히려 세도정치를 비롯한 조선 후기의 개판 오분전 막장상황은 순조의 잘못이 더 크다.
4.3 남인에 대한 지나친 미화
위의 노론-서인에 대한 폄하에 비해 빈도는 떨어지지만, 이 노론-서인 세력과 대립관계였던 남인 세력을 과도하게 미화하는 움직임도 있다. 주된 근거가 정조를 근대 개혁 군주로 설정하고, 남인이 이 정조의 정치적 파트너였으며 정조가 독살당하고 남인이 축출당하면서 조선이 막장 테크로 흘렀다는 것. 조선 후기 실학자 중 일부(ex:정약용)가 남인 출신이라는 이유로 남인 전체가 실학을 위해 노력한 집단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주장을 하는 대표적인 부류가 이문열과 이인화다. 이인화는 아래에 언급될 <영원한 제국>이란 작품을 집필했다. 사실 이런 얘기가 나오는게 운좋게도(?) 조선이 막장이 될 무렵 남인은 제대로 몰락했기 떄문이다. 폭삭 무너졌는데 어떻게 조선은 망친단 말인가?
5 평가
사실 당의통략의 이야기는 그 맹약이 정말로 의도적이었냐는 점을 제외한다면 충분히 일리 있는 이야기다. 근본적으로 동-서 갈등은 정치의 오랜 현실이었던 훈신, 척신에 대한 친화도에서 비롯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간단히 설명하면 애초에 승부가 난 게임이었다. 서인은 근본이 친외척 세력인 경화사족이고, 동인은 근본이 반외척 세력인 지방사족이었기 때문이다. 이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 굳이 전부 서술한다.
동인은 외척 전반과 그와 연대한 사림 전체를 척결대상으로 규정하며, 이른바 "4대사화"를 훈구파와 사림파의 오랜 대결로서 규정했다. 그러나 4대 사화의 실상은 성종 이후 대두한 사림 근본주의자들과 그에 비판적인 온건 사림과 이들과 연대한 훈신, 척신간의 대립이다. 그러다보니 사림의 사관에서는 남곤이나 심정, 김안로 같은 사림 출신 권신들도 죄다 훈구파나 외척으로 부정되었던 것이다.[3] 그러나 따지고 보면 조선 명종조에도 일부 사림은 윤원형에게 줄을 선 원죄가 있으며 그렇다고 인종을 지지한 사림들이라고 윤임과 손을 안 잡은 것이 아니다. 명종조를 거치면서, 다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때가 덕지덕지 묻은 상태였다.
다시 선조 때의 분당 시점으로 돌아가자. 김효원은 윤원형의 집을 기웃거렸을 만큼 배경이 부족한 집안 출신이었다. 그런 신규 가문이니 만큼 건천동에서 살았고, 그래서 동인이 되었다. 반면 심의겸은 잘나가는 정동 사람이다. 그러니 서인이 되었다. 당장 정철만 보아도 금수저다. 율곡 이이는 특별한 정파에 소속되지 못한 상황에서 이러한 정치적 현실을 옹호하다보니 어느순간 서인의 거두가 되었던 반면, 동인들은 이를 강경하게 반대하고 나선 순수 경상좌우도의 퇴계학파 사림집단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선조와 동인이 훨씬 우세한 상황인데도,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은 서인으로 분류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자.
남인은 한양에서 그야말로 "남산골 샌님"의 땅인 목멱산에 자리잡았다. 북인은 청계천 이북 거주자인데, 별다른 공통적 특성이 적은 서경덕, 조식 학파인 비이황학파 연합 정도로 취급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중 남명학파의 강경파는 대북이 되었고, 외척(=인목대비)와 연대한 온건파는 소북이 되었으며 류희분 등도 실제로 외척이었다. 이런 상황을 뒤집어 엎은 것이 인조반정이다.
이후에도 마찬가지 상황은 반복되었다. 서인은 다시 공신들의 공서파와 산림의 청서파로 갈렸다. 공서파들은 효종의 책봉을 적극 지지했으나, 명분상에 치명적인 결점이 있었고 결국 다수 숙청되었다. 산림의 현실적 힘을 인정한 효종은 다시 청풍 김씨 가의 김육을 사돈 삼으면서 명성왕후를 책봉했고, 과연 명성왕후와 김우명, 김석주 등은 현종, 숙종조에 서인 산림과 종친, 남인 사이의 적극적인 균형추 역할을 했다. 두 차례의 예송논쟁과 갑인환국은 서인 외척, 그리고 그와 손을 잡은 남인의 승리를 알리는 첫 신호탄이었다.
그렇게 김석주가 적극 나선 경신환국으로 남인들이 대거 쫓겨나면서, 서인은 다시 친 외척파인 노론과 반 외척파인 소론으로 갈렸다. 이 과정에서 박세채는 일관적인 반 외척행보에 나서면서 처음에는 소론이었다가 뒤에는 노론이 되었다. 문제는, 남인 출신인 장희빈 때문에 경종의 외척이 남인이라는 점. 그래서 노론은 반 외척파(반 경종파)가 되고(!), 소론은 친 외척파(친 경종파)가 되었다.
탕평책을 내세운 영조의 결론도 외척이었다. 열 살로 요절한 효장세자의 세자빈은 소론 조씨 출신이었다. 세자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던 효순왕후는 세자의 사후 현빈으로 봉해졌다가 영조 27년 1751년 11월 14일 경복궁 자경전(慈慶殿)에서 소생없이 37세의 나이로 승하하였으며, 이듬해인 1752년 1월 22일 효장세자의 묘 왼쪽에 안장되었다. 또 사도세자의 세자빈은 노론에서 상대적으로 한미한 홍봉한의 딸 혜경궁 홍씨였다. 정순왕후 김씨의 경주 김씨 역시 주요 외척이 되었다. 그래서 영조 말기에는 드디어 조정이 외척간의 전쟁터가 되어버린 것이다. 노론 벽파가 되는 청명당은 정조 치세 내내 외척들을 쳐내는데 바빴다. 처음엔 김귀주와 손잡고 홍인한 - 정후겸을 내몰고, 다시 김귀주를 버리고 홍국영과 손잡고, 다시 홍국영을 버리고 시파에 적대의식을 보였다.
그러나 청명당(벽파)은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는 당파였다. 자신들 역시 경주 김씨라는 외척 세력과 손을 잡은 상태였을 뿐더러, 정조의 동의에 의해서만 존속할 수 있었다. 이점은 남인도 마찬가지여서, 벽파와 남인은 "우리 전하는 참 훌륭하신데 왜 저놈들은 안 쫓아내실까? ㅠㅠ"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정조는 이들을 두고 계속 시파를 견제했으며, 정순왕후 수렴통치기간에는 이들이 주류가 되었으나 김조순을 몰아낼 수도 없었다. 결국 정순왕후가 죽고 벽파는 이른바 팔자흉언사건으로 반정조, 반사도세자로 찍히며 하릴없이 숙청되어버린다. 그리고 벌어진 것은 19세기 조선의 외척 천하, 즉 세도정치였다. 세도정치는 안동 김씨(+ 풍양 조씨) - 전주 이씨 선파(대원군 대) - 여흥 민씨(고종 친정 이후) 등으로 이어지면서 조선을 결국 멸망에 빠뜨리고 말았다.
6 노론사관을 바탕으로 한 창작물
6.1 영화/드라마
- 영원한 제국
- 원작 소설인 이인화의 소설 및 이를 바탕으로 한 동명의 영화. 원작의 저자 스스로가 밝혔듯이 전적으로 작가 본인의 가문적 배경[4]에 기반한 "영남 남인 사관"을 표방하고 있는 책이지만, 의외로 심환지와 벽파들의 판단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연암 박지원에 대한 긍정적 평가, 무엇보다도 정조 독살 묘사 자체를 여유당전서의 독살설로 퉁치고 있는 등으로 최소한의 금도는 지킨 소설이다. 다른 가문에서 소송이 들어올 수 있다는 사실도 감안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주요 인물의 이름은 마지막 글자가 바뀌어 있거나, 한자가 뒤바뀌어 있다. 주인공 영남 남인 출신의 규장각 대교 이인몽(夢)은 작가 이인화(본명 류철균)의 페르소나임을 스스로 밝히는 것이다. 소설에서 밝히기를, 이인몽의 자리에 있던 실제 인물은 익헌 이문원(翼憲 李文源 1740∼1794) 대감의 아들로 세도정치기에 순탄하게 좌의정을 지낸 금석 이존수(1772 ~ 1829)였다.
- 이 책에선 적어도 "영남노론"은 주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동시에 어찌되었든 대중적으로 노론 음모론을 알린 대표적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박정희의 10월 유신을 정조의 가상의 홍제 유신의 하위호환으로 주장하는 등 은근슬쩍 드러난 전근대적 정치적 입장이 큰 문제. 때문에 이인화는 미학 평론가 진중권에게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에서 제대로 까였다. "우리 조상은 당파싸움을 했지만, 임금을 모시는 충신이었다"가 이인화의 논지가 아니냐는 일침. 사실 진중권의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자체가, 이인화가 진중권의 악마주의론을 악마적 초인 옹호 담론으로 이용하면서 진중권이 분노해 시작한 책이다. 그리고 진중권은 이인화의 주장대로라면 오히려 영남 남인 세력이 '영남 기반의 독재 정권 세력'의 기반이 된다는, 결과적으로 영남 남인을 스스로 모욕하는 자폭 행위나 다름없다며 비판했다. 아이러니한게, 진중권이 비판한 박정희 정권과 정조/남인 간의 연관성 주장은 방향만 정반대로 바뀌어서 악역 설정을 '영남 노론'으로 바꾸어 노론과 박정희 독재정권을 동일선상으로 놓고 비판하는 주장으로 바뀌었다는 것. 여기에도 극과 극은 통한다.
- 이산
- 정순왕후가 노론의 수장으로 반란까지 획책하는 등 노론이 악의 축으로 나오나 혜경궁 홍씨는 악녀가 아닌 자애로운 어머니로 나오고, 정조 독살설도 반영하지 않는 것으로 그나마 다른 사극보단 나은 편이다.
- 정조암살미스터리 8일
- 성균관 스캔들
- 원작인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은 노론 음모론 소설이 아니나, 드라마로 각색되면서 역시 노론이 악당이 되었다. 그래도 주인공이 노론 영수 아들이다 보니 주인공 아버지는 악당이 아닌 보수적 정치인 정도로 묘사되는 편이지만, 다른 노론 대신이 악당 노릇을 하는 건 마찬가지.
- 무사 백동수
- 역린
- 비밀의 문
- 이 분야의 끝판왕. 노론이 무슨 프리메이슨같은 비밀결사 비스무리하게 나오며, 경종 독살과 맹의를 무기삼아 영조를 휘어잡는다. 심지어 노론대신들은 아예 영조를 왕 취급도 하지 않는다. 오죽하면 김창완이 분한 김택이란 인물은 극중에서 영조에게 너,야 거릴 정도로 무례하게 나오며 드라마 내에 나오는 대부분의 살인사건의 배후도 죄다 노론.
- 화정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응!?- 애초에 악역들이 노론 세력이며 도입부에 노론 대신들이 옹기종기 모여 세손의 이름을 산이라 멋대로 부르며 글러먹었다, 못 쓰겠다며 뒷담화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도세자의 관서행을 소현세자가 모아두었던 보물을 찾기 위한 것으로 표현하고, 마지막에 나오는 사도세자의 편지에 "아비도 ...한 세상을 꿈꾸었으나 사방에서 아비를 모함하는 ..가 끝이지 않는구나."라는 표현이 나온다.
6.2 만화/소설
- 참고한 도서 중에 이덕일이 쓴 책이 3권이나 있다.(...)
- 참고한 도서 중에 이덕일이 쓴 책이 3권이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