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SP미디어

(데습에서 넘어옴)

DSP Media
Dae Sung Production Media

DSP Media
300px
정식명칭주식회사 디에스피미디어
영문명칭DSPmedia co.,Ltd
설립일1991년 10월[1]
업종명음악 및 기타 오디오물 출판업
기업규모중소기업

주소서울시 강남구 학동로25길 20
(舊 논현동 36-12번지)
링크공식 홈페이지 유튜브
트위터 페이스북
DSP미디어 마이너 갤러리
width=100 소속 아티스트
가수
오종혁A-JAX허영지
APRIL캐스퍼K.A.R.D
배우
송찬익최배영이현주
연습생
조시윤

1 개요

"DSP는 욕으로 부흥하는 회사다. 팬을 잃을지언정 안티잃게 하지 않는다."
- 트위터에 올라온 글
" 팬들은 DSP에게 SM 급의 기획력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팬들은 DSP에게 JYP 급의 언플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팬들은 DSP에게 YG 급의 음악성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팬들은 DSP에게 CUBE 급의 이미지 메이킹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팬들은 DSP에게 묻습니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지만 앨범이라도... 심지어 케어라도 제대로 해주길 바랐다고... 동시에 저렇게 오랫동안 텀이 길어지면 저절로 팬덤은 와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그들을 위해 해온 건 뭐냐고 묻고 싶습니다. "
- 딴지일보 댓글

한때 SM 엔터테인먼트와 함께 대한민국 아이돌 업계의 양대산맥이었으나 쇠퇴한 연예 기획사

회사를 자존심과도 같게 여기던 사장이 쓰러지고 회사 대표가 바뀌면 어떤 꼴이 나는지 제대로 보여주는 기획사[2][3]

DSP는 어떻게 이렇게 쇠퇴했는가

그러나 한편으론 중소기업 중 최강.

대한민국연예 기획사.

대전에서 고등학교 체육교사[4]를 하던 이호연은 1981년 ‘연예계의 대부’이자 선배인 양승국 한밭기획 사장의 권유로 한밭기획 전무이사로 입사하며 엔터테인먼트계에 뛰어들게 된다.[5] 이후 소방차, 유열, 심신 등을 발굴해 양사장과 함께 매니지먼트를 했다. 이 중 한국 최초의 아이돌로 불리는 소방차는 기획, 홍보 등에 있어 이호연 사장의 첫 작품으로 많은 연예관계자들이 인정하고 있다.

1991년도에 독립하여 대성기획을 설립했다. 소방차의 성공을 보고 한국에도 아이돌이 뜰 수 있겠다는 확신을 갖고 살던 집을 털어 창업했다고 한다. 이후 1999년 2월 법인을 다시 설립하면서 DSP엔터테인먼트로 사명을 변경했고, 2006년 3월 코스닥 우회상장 과정에서 사명이 DSP이엔티로 바뀌었다가 이후 2008년 9월 물적분할 과정을 통해 법인을 새로 설립하면서 DSP미디어로 사명을 변경했다.

이 회사의 역사는 2010년 이호연이 병으로 쓰러지기 전과 후로 나뉜다. 이호연이 이끌던 DSP와 지금의 DSP는 다른 회사라고 봐도 무방한데, 비단 이호연 뿐만 아니라 이호연이 쓰러지고 나서 고위 임원, 이사들이 2010년을 전후로 회사를 나갔거나 혹은 쫓겨났기 때문이다.

원래는 잘 나가는 기획사로, ZAM, 젝스키스, 핑클, 클릭비, SS501, 카라 등을 배출한 회사다. 잘나가던 90년대 말~2000년대 초에는 젝스키스와 핑클로 SM(H.O.T, S.E.S)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획사였으며, 비교적 최근인 2000년대 중반 ~ 2010년대 중반까지도 SS501, 카라 등으로 어떻게든 경쟁을 이어갔다. 물론 지금이야 SM을 따라잡을 듯한 회사로는 YG, JYP등이 존재하지만 DSP의 리즈시절때는 오로지 "SM과 대성기획(혹은 DSP)" 이 한 마디로 정리 가능했었고 그 어떤 소속사도 그 2인자 자리를 넘볼 수가 없었다.[6][7] 그러나 지금은 시궁창. 소속 가수는 좋아하지만 소속사는 싫다는 의견이 절대 다수. 고로 DSP를 까면서도 DSP를 빠는 현상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 회사는 반쯤은 이호연 사장의 카리스마, 인맥, 그리고 으로 유지되던 회사였다. 그가 뇌출혈로 쓰러진 후 DSP가 어려움을 겪자 이 점이 더욱 부각됐고, 이호연의 경영능력을 높이 평가하는 기사들도 나왔다.[8][9] 2000년대 중후반 이호연이 잠시 가수들한테서 손을 때고 드라마에 빠져있을 때는 성적이 안 좋다가, 다시 돌아와 손을 본 암욜맨프리티걸이 대박을 쳤던 것을 보면, 쓰러지기 직전에도 감은 여전히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2010년 그가 뇌출혈로 쓰러지자 모든 기반을 잃은 DSP는 몰락했다. 2010년 중반부터 이호연의 부인 최미경 씨가 대표이사를 맡고 있으나 최미경 씨는 원래 연예계는 물론 경영과도 전혀 무관한 가정주부였다. 설상가상으로 최미경이 경영진과 임원을 갈아치우고 사리사욕을 챙기면서[10] 자연히 회사 꼴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이호연 쓰러진 후 DSP, '아내의 경영은'

2016년 현재 활동하는 그룹은 A-JAX, APRIL이며 프로듀스 101에선 윤채경조시윤이 출연한적 있다.

한때는 방송프로그램 제작이나 드라마, 영화등을 제작했던 리즈시절도 있었다. 이효리의 잊고 싶은 <세잎 클로버>를 이 회사가 제작했다. 이 외에도 외과의사 봉달희, 마이걸, 연개소문 등의 드라마나, 박수홍 최원정의 여유만만, 경제비타민, 좋은나라 운동본부 등의 예능프로그램을 제작하였다.

2 역사

2.1 90년대 초반

과거 한밭기획에서 아이돌 그룹 소방차를 기획했던 이호연이 1991년 10월 '대성기획'이라는 이름으로 설립한 회사다. 소방차의 성공을 보고 한국에도 아이돌이 뜰 수 있겠다는 확신을 갖고 살던 집을 털어 창업했다고 한다. 이후 댄스그룹 'ZAM'을 내놓았으며, ZAM이 인기를 끌자 잇달아 비슷한 컨셉으로 김준희가 속한 를 내놓았다. 둘 다 장수 그룹은 못 되었지만 ZAM은 한국 가요계에 길이 남을 원 히트 원더로 지금까지도 기억되고 있다.

사실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H.O.T보다 앞서 현재 일반화된 틴에이저 아이돌 그룹을 한국에서 최초로 기획한 기획사다. IDOL이라는 중학생으로 구성된 2인조 댄스그룹으로 10대들이 공감할만한 가사로 반짝 히트했으나, 언급된 형편없는 기획력으로 인해 그룹의 실력, 스타성에 한계를 드러냈다. 그리고 탄탄한 기획을 받고 스타성을 갖추고 가요계를 평정한 SM엔터테인먼트H.O.T.에게 밀려나 1년만에 팀은 해체했다.

2.2 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SM에서 내놓은 H.O.T.와 S.E.S.가 히트하자, DSP는 라이벌젝스키스핑클을 내놓아 히트시키면서 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아이돌 시장에서 SM과 양대산맥을 이루었다.

이 때 'SM+1' 전략을 써서, SM을 모방하되 인원수가 한 명 많은 그룹을 내세운 것이 아니냐는 이미지도 있었다.[11] 다만 단순히 따라가는 전략 뿐이 아니라 자사 가수들만의 강점과 특색을 살려냈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냥 따라간다고 성공할 정도로 가요계가 호락호락한 곳은 아니다. 당시 99년 11월 3일자 한겨레 기사를 봐도 SM을 따라했지만 실패한 가수는 무수히 많았고, 그 중 DSP는 기획력 측면에서 성공적이라는 평을 받았다.[12] 또한 DSP미디어의 아래 '국내에서 최초로 시도한 사항들' 항목에서 보듯이, 국내 최초로 시도한 사례들도 꽤 있다.

한편 이에 대한 김기영 전 이사의 말을 빌리자면 "젝키나 핑클이 H.O.T나 S.E.S의 ‘따라쟁이’라는 말을 듣지만‘아이돌(100% 10대)-젝키(남자)-핑클(여자)-클릭비(밴드)’는 DSP의 일관된 아이돌 4대 프로젝트였어요. 아이돌의 ‘바우와우’가 예상 밖의 빅 히트를 기록하면서 젝키와 핑클의 데뷔가 늦어진 거죠."라고 한다. 그러나 놀러와에서 은지원이 본래 강성훈과 자신이 2인조 그룹으로 나올 예정이었으나 이호연 사장이 직접 "H.O.T가 뜨고 있으니 애들을 더 모아야 한다"라면서 급히 4명의 연습생을 더 모아 그룹을 급조했다고 증언하면서 구라로 밝혀졌다(…). 종합하자면, 은지원과 강성훈의 2인조 그룹은 본래 4대계획에 맞춰 준비되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H.O.T.를 의식해서 급조해 1명 더 붙여 나간 것도 사실이란 뜻. 이효리도 이미 SES가 데뷔한 후에 핑클에 합류했으니 프로젝트는 있었으나 멤버구성은 급조였다고 보는 것이 맞을 듯 하다.

한편 이 시기 이호연 사장이 직접 젝스키스핑클을 이끌고 가서 평양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기사 오늘날 갈수록 최악으로 치닫는 남북관계를 생각하면 믿기지 않는 일이다.

1세대 아이돌의 전성기가 지나고 아이돌 암흑기였던 2000년대 초반, DSP에서 만든 샤인이나 투샤이 등의 그룹은 실패했다. 그러나 이 시기는 SM에서도 신비, 밀크, 블랙비트 등을 말아먹었던 시기라 크게 언급되지는 않는다.

2.3 2000년대 후반

이 시기 SM의 동방신기가 큰 인기를 끌자, DSP에서는 이에 대항할 남자 아이돌로 SS501을 데뷔시킨다. 앞서 언급했듯이 DSP는 'SM+1' 전략을 쓰다가, SS501부터는 (원래는 7명이었다가) 5명으로 냈다.[13] 이 점에서 한소리 듣기도 했지만, 앞선 트렌드를 철저히 벤치마킹하여 시장에서 어느정도 입지를 유지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SS501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고, 특히 코어 팬덤을 확보하며 SS501의 팬클럽인 트리플 S는 동방신기의 카시오페아, 슈퍼주니어의 엘프와 함께 아이돌계 3대 팬덤 '카트엘' 이라는 말까지 만들어냈다.

그런데 이 시기에 DSP에서는 삽질을 하는데 바로 SS501의 일본 진출이었다. 동방신기가 2006년 일본에 진출한 것을 의식한 것 같으나, 동방신기조차도 2008년 퍼플라인까지는 일본에서 죽도 못 쑤었고 이는 SS501도 마찬가지였다. 한편 한국에서는 이 시기 활동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일본과 한국 두 시장 모두 이도저도 아닌 어중간한 상황이 되었다.

2006년 3월 섬유원단 제조 업체인 호신섬유주식회사의 인수합병을 통해 코스닥시장에 우회상장되었다. (당시 코스닥 종목코드는 016040.) 그러나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상당한 금액[14]을 투자한 드라마 연개소문드라마의 발퀄리티와 함께 쫄딱 망하면서 2009년 4월에 3년만에 코스닥 시장에서 상장폐지되었다(...).

그나마 드라마에 눈을 돌려 가수에서 잠시 손을 떼고 있었던 이호연이, 다시 돌아와서 손을 본 SS501의 U R Man과 카라의 Pretty Girl이 대박을 쳤다. 카라에게 반응이 오자 일본 진출 제의가 들어왔지만, 카라의 국내 기반을 더 닦아야 한다고 판단해 진출을 미루고 2010년 5월에 대형기획사와 더 좋은 조건으로 진출하게 된다기사. 이호연 대표 와병 이후 레인보우, 에이젝스가 국내 기반을 닦지 않은 채 무리하게 일본 진출을 했다가 한국 일본 양국에서 이도저도 아니게 된 것과 비교된다. 전술했듯이 SS501의 일본진출은 기대한 것만큼 히트치지 못했는데, 국내 기반이 확실히 있었기 때문에 김현중의 꽃보다 남자와 U R Man으로 금새 회복할 수 있었다.

2009년 9월 핑클, 카라를 기획한 길종화 이사가 퇴사, 'B2M엔터테인먼트'를 설립했다. 계기는 이효리가 엠넷과 계약이 만료되면서 길종화 이사와 함께 일하고자 했기 때문(이효리는 2010년 4월이면 B2M엔터테인먼트로 이적). 아직 이것이 DSP의 계열사 형식인지 단순한 퇴사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SS501, 카라의 앞으로의 행보를 본다면 알 수 있을 듯. SS501 멤버 허영생, 김규종 그리고 니콜이 실제로 이쪽으로 이적하기도 했다.

정리하자면 이 시기는 무리한 사업 확장연개소문 200억이 결정타이 회사의 기반을 갉아먹었다. 그나마 상장폐지 이후 이호연이 드라마에서 손을 떼고 다시 아이돌을 손 보면서, SS501과 카라가 히트를 치며 회사 상황이 회복되어 갔다.[15]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때 온라인 학습사업에도 투자를 했었다. 이것도 망했다. 놀랍게도 이 학습사업 대표가 이호연과 결혼하게 되는 최미경이다.# 이때부터 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007년 인터뷰에서도 이호연이 노총각이었다고 한 것을 보면 이때부터 2009년 사이에 결혼한 것으로 보인다.[16]

2.4 2010년 : 이호연 대표의 와병과 몰락의 시작

몰락의 시작

회사를 이끌던 이호연 사장이 2010년 3월 뇌출혈로 쓰러지면서 거짓말처럼 모든 것들이 안 좋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SS501의 경우 계약기간이 2010년 6월까지 였는데, 멤버인 김현중배용준의 키이스트로 이적, 박정민은 CNR 미디어에서 지호 엔터테이먼트로 이적 김규종허영생B2M엔터테인먼트로 이적후 김형준이 있는 CI ENT랑 계약을 했다.

이호연이 쓰러진 후 그의 부인 최미경이 대표이사로 취임하나 최미경은 연예계나 경영에 전혀 문외한 주부에 불과했다. 또한 회사의 중역들이라 볼 수 있는 몇몇 임원들은 퇴사를 해버렸다. 최미경은 자기 딸[17]을 이사로 앉히고, 기존의 경영진 대신 전문경영진도 아닌 친인척들을 경영진으로 투입하는 등 회사를 망치려는 듯한 행보를 보였다. 그리고 이 경영진 교체와 그들의 무능은 카라의 반발을 샀고 또 한 차례 소동을 일으킨다. 21세기판 세도정치를 아주 제대로 보여줬다

2.4.1 카라 전속계약해지 통보 사건

이 문단의 본문에 대해서는 카라 전속계약해지 통보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임원 교체가 이루어진 후 회사 꼴은 어느새 막장 드라마에 나오는 대본 수준이 되었고, 결국 카라가 들고 일어났다. 2011년 1월 19일. 리더 박규리를 제외한 카라 멤버 4명의 카라 전속계약해지 통보가 있었다. 법률 대리인인 랜드마크를 통해 “DSP가 지위를 악용해 멤버들이 원하지 않는 연예활동에 대한 무조건적인 강요와 인격모독, 각종 무단 계약으로 멤버들에게 정신적인 고통을 줬다”고 주장했다. 이어 “믿음으로 일해야 하는 소속사와 소속가수의 관계에선 신뢰가 가장 중요한데 소속사는 카라를 돈벌이의 수단으로만 이용했다”고 주장했다.

박규리의 입장은 밝혀지지 않은 상태여서 제 2의 동방신기가 되는거냐는 기사가 쏟아져 나오고 있는 중이지만 사실 카라가 갈라질 일은 없다는 것이 팬들의 일관된 반응. 현재 기사 정황상 이번 사건은 멤버들의 부모가 주도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거기다가 모 기획사 대표 등 연예계 큰손들이 관여하여 카라를 '빼돌리려' 했던 정황들도 드러났다. 곧 박규리의 입장도 밝혀졌고 박규리 역시 멤버들과 함께하고 싶다는 입장을 밝혔다. 전속계약 해지를 통보한 몇시간 뒤. 구하라가 이 소송에서 빠진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 사태에 대해 DSP 측은 "그 동안 카라 그룹을 국내 일류 스타로 육성하고, 한류열풍의 주역으로 이끌기 위해 노력해 온 소속사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고 주장했다. 그걸 지 입으로 말하네

DSP측의 언플성 기사도 보인다. 물론 단순히 기자의 설레발성 기사일 수도 있다.

2011년 1월 24일 DSP와의 계약 해지를 요구하는 3인이 당시 경영진의 퇴진을 조건으로 계약을 유지할 뜻이 있음을 밝혔다. 이는 카라 멤버들 혹은 멤버들의 가족중 일부가 당시 경영진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는 의미. 이에 DSP미디어측은 "경영진 교체는 말도 안된다"며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이후 인터뷰로 인해 DSP의 숨겨진 치부가 드러났다. 이호연 사장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이호연 사장의 부인을 중심으로 경영진이 움직이면서 전에 없던 여러가지 병폐가 발생된 것. 그 동안 DSP의 무능(...)을 답답해 하던 팬들은 "이렇게 이호연 사장을 그리워 하게 될 줄 꿈에도 몰랐다."며 이호연 사장의 빠른 쾌유를 기원하고 있다. 사장님이 돌아오신다면 레인보우가 메이저로 도약할수있고 퓨리티가 데뷔할수도있다! 그러나 퓨리티는 결국 저 멀리......

2011년 2월 가까스로 가수협 회장이자 이호연과 친분이 두터웠던 태진아가 중재에 나서면서 겨우 협의점을 찾았다. 이후 4월 28일 DSP와 카라 3인간의 합의가 끝나면서 원만하게 해결되었다. 팬들은 4월 28일을 카라가 부활했다는 의미인 카활절로 지정했다.

2.5 2012년~2013년

8월 25일 카라가 '14회 한·중가요제' 행사를 위해 이동 중 탑승했던 차량이 휴게소 장애인 주차장에 주차를 했다는 기사가 떠서 잠시 논란이 일었다. 하지만 곧 DSP 측에서 잘못을 인정하고 재발을 방지하겠다는 발표를 해서 곧 잠잠해졌다.

2012년 겨울에 사무실을 이전한다고 한다. 현재 사옥 근처에 있는 빌딩에 입주할 예정이라고 한다.#

2012년 초 새 5인조 걸그룹 DSP걸즈(가칭)를 한국과 일본 양국에 출격시킨다는 계획을 발표 했다. 걸그룹 명칭은 '퓨리티(PURETTY)'로 결정되었고, 한일 공동 제작 실사 결합 애니메이션으로 프리티 리듬 오로라 드림의 후속작인‘프리티 리듬 디어 마이 퓨처’를 통해 새로운 걸그룹 DSP걸즈를 공개할 계획이라고 한다.# 18세 혜인, 16세 시윤, 채경, 소민, 14세 막내 재은 등 다섯명으로 구성된 DSP걸즈는 데뷔 준비 중 닌텐도, 위스퍼 등 CF에 캐스팅되었다고 한다.그동안 한국에는 언제 오냐는 퓨리티 팬들의 바람이 있었는데 2013년 2월 애니매이션이 '꿈의 보석 프리즘 스톤'으로 한국방영을 결정하면서 조간만 국내 무대에 서야 하는데...2013년 7월 19일 서울 캐릭터라이센싱 페어에서 첫 한국 공연을 하게 되었다.다만,방송무대 데뷔는 여전히 소식없다가... 2013년 9월을 끝으로 일본활동까지 접고 2014년 5월 17일에 공식 팬카페를 통해 혜인은 배우로 전향을 하고 재은은 학업을 위해 탈출탈퇴, 나머지 세 명은 카라 프로젝트에 나온다는 소식을 알려 해체 확정. 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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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이 퓨리티로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국내공연이 될줄 누가 알았겠는가........

  • DSP보이즈, 에이젝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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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일 때문에 계속 미뤄졌던 새 남성그룹인 'DSP보이즈(가칭)'이 공개되었다. 정식 그룹명이 '에이젝스(A-JAX)'로 확정되었고, 에이스타일 + 젝스키스? MBC MUSIC에서 페이크 다큐 형식을 가미한 신인 소개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특이하게도 군필 멤버(형곤)가 있다.
  • 무리한 일본 활동
레인보우와 갓 데뷔한 에이젝스를 일본에 데뷔시켰다. 레이블은 유니버설뮤직그룹. A-마하-투미 등으로 국내에서 팬덤을 키워나가던 레인보우는 한창 성장할 시기에 성장이 뚝 끊겨버렸고, 국내에 팬덤이 아예 없는 에이젝스는 일본 활동의 후유증으로 인해 팬사이트 하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다고 일본에서 성공했냐 하니 그것도 아니고, 하필이면 2013년 한일관계가 급격히 경색되는 바람에 결국 국내로 돌아와야 했다. 한국도 일본도 제대로 못 챙긴 SS501의 전철을 또 저지른 것이다.
  • 마지막 불꽃, DSP 페스티벌
2013년 12월 14일에 DSP 페스티벌을 열었다. DSP 콘서트니 만큼 역대 DSP의 많은 가수들이 출연했다. 젝스키스의 은지원, 장수원, 김재덕도 출연했다. #

DSP가 정신 나갔나 보다. 팬들을 위해 이런걸 해주다니... 2013년, DSP를 먹여살리다시피 하는 카라가 이날 공연의 첫 무대를 시작했고, 마지막에 모든 가수가 한꺼번에 엔딩곡 부르기 직전에도 카라의 무대가 한번 더 있었다. 카라가 아닌 다른 DSP 가수들을 보러간 팬들 입장에서는 약간 뜬금없었을 수도 있지만 상기한대로 카라가 명실상부한 DSP의 간판인데다가 객석을 채운 대다수도 카밀리아였고 결과적으로 이날 무대가 연말 가요대상을 제외하고 5인조 카라의 마지막 무대였기에 그만한 의미가 있는 무대였다.

2.5.1 정니콜과 강지영의 재계약 불발

2014년 1월 14일 DSP미디어는 정니콜과의 재계약이 성사되지 않았음을 알리고 니콜을 탈퇴 처리했다. 니콜이 재계약 거부한 이유는 이 글 참조. 그리고 다음날 강지영 역시 DSP와 재계약할 의사가 없음을 알리는 내용증명을 DSP에 보내면서 최종적으로 니콜과 강지영은 2014년에 모두 탈퇴하게 됐다.앞으로 3인조 체제로 갈지 새 멤버를 영입할지는 미지수지만 5인조로서 쌓아온 이미지와 역사가 워낙 뚜렷한 데다가 개인 팬덤보다도 팀으로서의 카라에 대한 팬덤이 강한 카라였기에 사실상 기존같은 팀 활동은 보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아직 남은 멤버들도 있으니만큼 카라라는 팀과 이름 자체는 상징적인 의미에서라도 남겠지만 사실상 회사의 미래는 레인보우에이젝스 둘중에 하나가 뜨기를 바라야 할 듯. 틀렸어 이제 꿈이고 희망이고 없어

결국 카라를 계속 유지시키기 위해 카라 프로젝트라는 프로그램을 통하여 새 멤버를 뽑았다. 하지만 새 멤버가 객원멤버인줄 알았다는 박규리의 발언을 보니 역시나 소속사 단독으로 새 멤버 영입을 결정한 것 같다.

한편 회사를 떠난 니콜은 B2M으로 가서 11월 솔로앨범을 발표하였고, 강지영은 일본으로 건너가 연기활동을 하고 있다.

파일:TngoFTT.jpg
놀랍게도 이렇게 홍역을 겪는 3년 동안에도 영업이익과 당기순이익은 흑자를 기록했다.

2.6 2014년~2015년 : 본격 위기

2013년까지는 이렇게 어떻게건 버텼지만, 2014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위기가 찾아왔다. 금융감독원에 공시한 자료에 따르면, DSP미디어의 2014년 총 이익은 1/3으로 줄어든 것으로 드러났다. 여기에 관리비 등을 포함해서 순이익을 계산하면 2013년에 30억이었던 것이 2014년에는 3억으로 무려 1/10으로 감소했다. 다 망한 것이다.#

카라는 건재하게 활동하고 있지만, 2015년 발매한 IN LOVE는 전 앨범이었던 Day&Night에 비해 음원 사이트 순위, 가요 프로그램 순위는 높아지긴 했으나 음반 판매량은 완전히 부진한 성적을 거두었다. 게다가 재계약일이 2016년 1월로 다가와 팬들의 불안감 불안감이라 쓰고 설레임이라 읽는다을 높이고 있다. 레인보우는 1년여 만의 컴백임에도 불구하고 6년전과 변함없는 타이틀곡 선정으로 인해 처참한 성과를 거두고 2주만에 활동을 종료했다. 에이젝스는 2년 동안이나 음반활동이 없는 등 소속사로부터 철저히 방치당했다. 한일 동시데뷔 등 DSP의 삽질로 인해, 본인들이 뭘 해볼 새도 없이 수렁에 빠진 케이스. 거의 해체나 다를 바 없는 상황이다.

APRIL을 새로 데뷔시켰으나 이 역시 출발부터 잡음을 일으켰다. 카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안소진이 APRIL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계약을 일방적으로 해지당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발생한 것. 게다가 데뷔한 후에도 리더였던 소민이 탈퇴하는 등 내홍을 겪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콘셉트의 걸그룹이 쏟아져 나와 그 사이에서 차별화를 못 하기도 했다. 데뷔 음반 Dreaming의 판매량은 한터 기준 1,500여 장으로 상당히 저조하다. 지방 팬사인회를 안 돌려서 판매량이 낮아져 버린 게 원인이라는 이야기가 자주 나오기는 하지만 기존 DSP의 이름값을 생각하면 낮아도 너무 낮은 수치. 이렇게 APRIL이 시장에서 반향을 일으키는데 실패하면서 DSP의 몰락을 경고하는 기사들이 쏟아지고 있다.

기획사의 주 수입원인 남자 그룹이 없다는 것이 문제. 일찍이 SS501의 뒤를 이어 에이스타일과 에이젝스를 데뷔시켰지만 에이스타일은 여러 문제로 인해 이미 2009년에 사실상 해체했다. 에이젝스는 한일 동시 데뷔라는 최악의 악수로 인해 국내 팬덤 형성에 실패하는 삽질을 보여주었고 멤버 서재형이 사회복무요원으로 입대한데다가 2년 가까이 이렇다 할 활동이 없는 실정이다. 2015년 데뷔 예정인 남그룹이 있었으나, 플랜이 밀린 끝에 연습생 두 명이 군대에 갔다는 소문이 들릴 정도로 상황이 좋지 못하다.

회사의 명실상부한 원톱이자 소녀가장카라의 국내 앨범 활동 성적이 멤버 교체를 겪은 이후 전성기 때보단 한풀 꺾인 모양새인지라 확실한 후발주자가 필요한데, 레인보우에이젝스는 공백기가 길어도 너무 길다.그렇다고 컴백할 때 어마어마한 명곡을 주는 것도 아니다 레인보우에겐 망곡을 줬지... 데뷔 시에 대중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진 못했으나 꾸준한 활동으로 팬층을 다지며 결국 정상까지 올라선 아이돌 그룹[18]들을 보면, 일정 부분 적자를 감수한다하더라도 소속 연예인들에게 투자를 해서 꾸준한 활동을 하게 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2015년 10월, 이호연 대표가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주관하는 대중문화예술상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받은 건 좋은데 뇌졸중으로 쓰러져서 5년째 와병하고 있는 사람에게 이제와서 표창을 주는 의미가 있을까 싶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이호연이 쓰러지기 전 30여년간 배출한 가수들과 한국 가요산업에 끼친 영향력을 보면 충분히 받을만한 상이긴 하다.[19] 표창은 카라 멤버 박규리와 한승연이 대리 수상했으며, 이날 시상식에는 레인보우, 에이젝스, APRIL이 출연하여 선배 가수들의 곡을 불렀다.

사실 2015년을 돌이켜보면 DSP 미디어가 총력전을 펼쳤다고 봐도 무방하다. 레인보우와 카라의 컴백, 구하라의 솔로, APRIL의 데뷔에 클릭비 재결합까지. 1년 내내 회사 내부적으로는 공백기가 없을 정도로 열일(!)했다. 이 와중에 컴백 못한 에이젝스... 그러나 이들 중 성공한 활동이라고 할 수 있는 그룹은 아무도 없었다. 카라의 국내 성적은 이미 2011년 이후 하락세를 타고 있었지만, 정규 4집 숙녀가 못 돼 이후로는 음원차트 상위권조차 간 적이 없고 음반판매량도 전성기의 1/10도 못 되는 수준으로 매우 큰 하락세를 타고 있으며, 1년 8개월만에 컴백해 최악의 곡이라는 평을 들은 레인보우, 4세대 아이돌중에서 차별화가 부족해 큰 화제까진 일으키진 못했던 APRIL, 모두가 우려했던 대로 된 구하라의 솔로, 2015년 내내 불었던 재결합 열풍 속에서도 화제를 일으키지 못한 클릭비까지 받아든 성적표는 암울 그 자체다. 대충 정리 해서 이야기 하면 열심히는 했지만 결과는 그닥인 한 해를 보낸 셈(...).

2015년 11월 26일, 계약이 만료되고 6년 반 가량이 지나서야 SS501의 유닛 SS301의 상표권을 등록했다.SS501 상표권은 카라사태 때 등록했다 허영생, 김규종, 김형준이 유닛 활동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 슬슬 들리자 선수 친 것이다.상표권 사용료라도 노렸나보다 그래서 Double S 301로 나왔다. 다만 SS301같은 경우는 CI Ent가 준비중 이었는데도 상표를 등록하지 않은탓도 있다.

결국 2015년에는 매출도 전년보다 떨어지고, 그동안 봤던 흑자도 못 보고 적자전환이 이루어졌다. 그야말로 위기가 시작되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2.7 2016년 : 카라, 레인보우마저 떠나버린 현재, 변화의 기로에 서다.

2016년 들어서, 본격적으로 몰락의 신호들이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도 이미지가 안습했으나, 실제로 프로듀스 101 방영 전후로 실용음악 학원 및 댄스스쿨에서 비공개 오디션을 진행 중인데, 다른 기획사에서 데뷔를 위해 DSP로 가는 게 어떻냐고 하면 가지 말라고 팬들이 만류하는 글까지 나오고 있다. 야 DSP 가지 마. 거기 망했어!

카라는 허영지를 제외한 기존 3인의 계약 만료가 1월 말로 다가오면서[20] 또다시 2014년 때의 암흑기가 떠올라 팬들이 불안해하던 동안 구하라의 이적은 이미 기정사실화가 되었었고 ??? : 요시! 찬스다![21] 한승연도 연기에 더 관심을 보인다는 기사가 나왔다. 즉, 2년 전에는 새 멤버 투입으로 위기를 타개했다면, 이젠 기존 멤버들의 잔류도 불투명해지면서 점점 팀 존속에도 물음표가 달려가는 상황... 게다가 이렇게 소속사 입장에 유리하고 허영지를 제외한 멤버들을 깎아내리는 언플 기사를 쏟아내어 비판을 받았다. 하여튼 소속 연예인 언플은 안하면서 이런언플은 잘도 해요 하지만 오히려 소속사가 일을 못 하는 것을 대중들이 대부분 알고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류의 음해성 언플 기사에도 대중들은 별 반응 없이 카라를 응원하였다. 소속사가 붙잡아도 모자랄 판에라면서 오히려 응원하는 중.[22] 그리고 1월 15일부로 허영지를 제외한 3인 모두의 전속계약이 만료되었다. 축 탈데습 그러나 DSP는 '카라를 해체할 지 멤버 구성을 새로 할 지 고민 중'이라거나 '훗날 재결성의 가능성을 열어두었기에 해체라는 표현을 쓰지 않은 것'이라는 식의 언플로 카라의 이름을 유지하려는 상황. 빨대 계속 꽂지 마세요 D모 기획사 : 이제 그만 빨아먹겠지만 빨대는 빼지 않겠다 심지어 APRIL의 첫 일본 팬미팅에 허영지를 MC로 쓰고 카밀리아를 대상으로 우선예약을 받아서 팬들의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신인 그룹과 앨범을 알리는 데 중요한 쇼케이스 및 팬미팅에서는 멤버가 아니라, 전문 MC의 자질이 있는 아나운서코미디언을 쓰는 게 관례다.[23] 그리고 레인보우가 Prism으로 컴백하고 홈페이지가 개편되면서 소속 아티스트란에서 카라는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허영지가 대신하게 되었다.

전속계약 만료 이후 한승연과 구하라는 각각 배우 전문 기획사인 제이와이드컴퍼니, 키이스트로 이적하였고 박규리는 아직 소속사가 확정되지 않았다.[24] 모두 DSP를 떠나자마자 전 멤버들이 2016년 1분기(1~3월)에 드라마를 두 개나 한다는 낭보가 들어왔다. 드라마 떡밥이 귀했는데 이게 무슨 소리요![25] 박규리는 KBS 대하드라마 장영실, 강지영은 니혼TV 수사드라마인 히간바나에 중요한 조연으로 출연하여, DSP의 능력이 다른 기획사에 비해 얼마나 부실한지를 입증하였다. 활동 지원에서도 전 카라 멤버들의 새로운 소속사 및 레이블들이 지원을 잘 해 주고 있는 건 덤. 한승연도 JTBC 금토드라마 청춘시대에 주연급으로 출연하면서 그야말로 무능력을 인증했다.

에이젝스는 중국 활동을 하고 있었으나 멤버 성민이 탈퇴하였다. 탈퇴 과정에서 소속사 측의 명확한 입장 발표가 전혀 없었고, 팬들은 네이버 프로필이나 뉴스 기사를 통해서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멤버 변동이 팬들에게 매우 민감한 사안인 것을 감안하면 기획사로서 가장 기본적인 멤버 및 홍보 관리를 방관하고 있었다고밖에 볼 수 없다. 팬들은 DSP 측에 전화를 걸어 사실 확인을 했고 탈퇴는 사실이 아니라는 답을 들었지만, 그 이튿날 바로 언론 보도가 떴다. 이를 두고 카밀리아들은 DSP 내부에서 커뮤니케이션이 전혀 안 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분석하였다. 결국 2월 5일 성민을 비롯해 효준(지후), 사회복무요원 복무 중인 재형이 공식 탈퇴하고 2015년 연말부터 에이젝스에 합류해 있던 연습생 중희가 공식적으로 합류했다.[26]

더군다나 레인보우도 재계약을 앞두고 있다. 일단 레인보우는 2월에 Prism으로 컴백하였으나 역시나 이번에도 뜨지 못하고 3월 중순 활동을 마감했는데, 제작 예산 부족으로 인해 디지페디가 제작한 뮤직비디오의 퀄리티도 안습을 달리고 있다. 레인보우의 경우에는 타이틀곡 선정이 Prism에서도 문제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레인보우도 제발 DSP를 나와서 타 소속사로 이적해 컴백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대부분이다. 단 한번의 멤버 변화 없이 7년 동안 동고동락한 멤버들의 우정도 끈끈하기 때문에 해체라는 극단적인 파국으로 치닫지 않는 한, 전부 다 재계약을 하거나 아니면 타 소속사로 멤버 전체가 이적을 해서 활동할 가능성도 있다.

퓨리티 해체 후 카라 프로젝트에 참가했으나 탈락한 뒤 APRIL에도 들어가지 못한 채 연습생으로 내려간 윤채경조시윤프로듀스 101에 내보냈으나 조시윤은 별다른 분량 확보를 하지 못한 채 힘겹게 버티다가 8회차 방송에서 41위를 기록하며 방출되었고, 윤채경은 8회에서 15위를 기록한데 이어 10회에서 7위로 상승하며 TOP 11 진입 가능성을 높였으나 최종 11회에서 16위로 내려앉으며 또 한 번 좌절했다. 이후에 방송이나 SNS 등으로 두 명의 소식을 자주 내보내 주지 않는 이상 데뷔 전에 팬들이 와해될 수 있는 상황.

게다가 속쓰린 현실이 하나 있다면 DSP에서 연습생을 3년 넘게 하다가 쏘스뮤직으로 이적한 소원여자친구로 데뷔하고 그것도 모자라 여자친구가 대박을 터뜨린 것이다. 뭐 여자친구의 대박은 쏘스뮤직마저도 기대하지 않았다지만(...)

그런 가운데 허영지, 프로듀스 101에 출연한 윤채경조시윤, 그리고 APRIL에서 탈퇴한 소민이 함께 4인조 걸그룹으로 데뷔할 수도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윤채경이 본인이 곧 데뷔할 수도 있다는 떡밥을 던지기도 했다. 만약 DSP가 이 그룹을 데뷔시키지 않으려고 했으면, 굳이 허영지를 각종 예능에 내보내며 대중에게 노출을 시키고, APRIL에 집중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윤채경과 조시윤을 굳이 힘들게 프로듀스 101에 내보냈던 것, 또한 나름 순항하고 있던 APRIL에서 소민이 탈퇴했던 것에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윤채경의 팬덤도 매우 커져 버린 만큼 데뷔를 늦췄다간 그나마 적지않은 팬덤을 모았다가 소속사의 실수로 와해되는 일을 다시 만들어 낼 순 없으니. 그러나 윤채경이 프로젝트 걸그룹 C.I.V.A에 이어 I.B.I에서 활동하는 것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움직임은 없다.

10월 28일 레인보우가 결국 해체를 발표했다. 계약이 끝나는 11월 12일에 공식적으로 해체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 속에서도 DSP에서는 새로운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일단 APRIL은 동시에 같이 컴백한 동세대 아이돌에 묻히고 활동 도중 현주가 건강 문제로 잠정 휴식을 한 데 이어 팀에서 탈퇴하는 변화를 겪었으나 THE SHOW에서 1위후보에 두번 들어 2위까지 들었으며, 미니 2집이었던 Spring은 팬싸인회 하나없이 초동 1000장으로 우주소녀의 데뷔앨범과 CLC의 리플레시의 초동을 넘기며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그리고 막내인 진솔은 JTBC의 보컬 경연 프로그램인 걸스피릿과 걸스피릿의 스핀오프 컨텐츠인 소녀어택에 출연과 EBS 보니하니의 새 MC로 발탁되어[27] 본인과 APRIL의 인지도를 올리고 있다.

윤채경11회에서 탈락후 방황하던 팬덤을 V앱으로 확실히 잡은뒤 홍대 미니 콘서트, 케이블 고정, 특별 음반까지 내주는 특별 혜택을 주었다. (그러나 팬들이 원하는 정식 걸그룹로의 재데뷔는 여전히 감감무소식이다.) 다행스럽게도 프로젝트 걸그룹인 C.I.V.A활동으로 인지도를 한번 더 끌어올렸으며 이후 또 다른 프로젝트 걸그룹인 I.B.I소속 멤버로 활동도 예정되어 있다. 비록 정식 걸그룹이 아닌 프로젝트 그룹이긴 하지만 그동안 데뷔에 목말라있던 본인과 팬덤에게는 괜찮은 기회로 작용 할 수 있다. 레인보우도 마이 리틀 텔레비전등 공중파 예능출연을 이루어내며 팬들사이에서 큰 호평을 들었다.

또한 기존에 아이돌 그룹외에 신경을 덜쓰던 부분에도 진출한점. 레전드히어로 삼국전로 인지도를 넓혀가던 배우 최배영을 영입하고 언프리티 랩스타2 출연 래퍼인 캐스퍼를 영입하면서 기존의 아이돌이 아닌 새로운 길, 새로운 음악적인 스펙트럼을 넓히기위한 시도를 하고있다.

그외엔 특이하게도 2016년 이 기획사우회상장, 대표의 건강상태 악화, 소속가수 이탈 및 불법행위 연루, 매니저의 자회사 설립 후 독립, 방송영상사업 진출이건 사망플래그라는 DSP 몰락의 과정을 놀랍도록 똑같이 밟아 가고 있다. 코스닥 다시 1패

3 특징

3.1 소속 연예인 관리

3.1.1 2010년 이후

전술한 바와 같이, 이 회사는 2010년 이호연 대표가 뇌출혈로 쓰러지기 전과 후가 많이 대비된다. 2010년 이전에는 과도한 스케쥴이 문제될지 언정, 소속 아이돌의 긴 공백기에 전혀 뜨질 못해 팬들이 안타까워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몰아부쳐서 스타를 만들어줬고, 곡빨도 잘 받아오며 인기있는 프로그램 출연 또한 괜찮게 시켜줬다. 반면 2010년 이후의 DSP는 소속 아이돌을 제대로 활동 시켜주지 못하고 있다. 곡빨이나 프로그램 섭외력도 약하다는 평이 많아졌다.

사람들이 제일 안타까워 하며 소속사를 탓하게 되는 아이돌은 단연 레인보우다. "레인보우가 1위하기를 온 우주가 기원한다"는 반응일 정도다. 레인보우가 대중들에게 이런 안타까움을 받는 이유는, 2009년 말에 데뷔했더니 바로 2010년 3월 사장이 쓰러지면서 회사가 쇠퇴해갔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회사가 제대로 돌아갈 때 멤버 하나하나 잘 뽑아놓고 데뷔는 시켜놨는데, 이후 회사 상황 자체가 바뀌어버려서 제대로 서포트를 못해줬으니 말이다. 대충 비유하자면, 괜찮은 집안에 이쁘고 어린 딸이 있었는데 아빠가 갑자기 죽으면서 집안이 기운 꼴이다. 그 결과 어린 딸은 주위에서 기대했던 것 보다 못 미치게 성장해서 다들 안타까워한다. 그래도 애초에 낳아 놓는 것은 잘 낳아놨으니, 평균보다 잘 살고 있기는 하다.

3.1.2 방목형(?) 관리

팬들 사이에서는 소속 가수 관리 안 하기로 유명하다. 텍사스 소떼들이 초원을 뛰놀게 하는 마냥 거의 내버려두다시피 하는 방목형 관리를 보여 줘 원성이 높다. 이로 인해 붙은 별명이 목장이다. 그런데 목장 경영이 무조건 안 좋은 건 아니다. 나름대로의 장점은 있다. 소속 가수들을 전혀 관리하지 않아 진정 실력있고 능력있는 아이들만 살아남을 수 있는장점이냐 이게 환경이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DSP 소속 가수의 개개인의 능력은 타 대형기획사의 가수의 능력과 큰 차이가 없다. 다만 단점은 소속 가수들의 능력을 전혀 활용을 못하고, 이게 DSP소속인지 무소속인지 원... 소속 가수들의 장점을 극대화 시킬 기획력이 안 된다는 것이다. 고로 기획부를 전부 다 갈아치워야 한다

소속 가수들의 인성교육은 잘 되어 있는 편이다. 회사 자체에서 고가의 선물을 거절하는 것도 그렇고, SS501김현중이 중학생 정도의 팬에게 명품 넥타이를 받고 "이런 거 아버지 드린 적 있어? 아버지께 선물드려."하지만 이분은 나중에...하고 돌려준 일화가 유명하다. 소속사와 소속 가수들의 재계약 문제나 계약 조건 등으로 시끄러워지는 경우는 많아도 소속 가수들이 개인의 문제로 사회적 이슈를 일으킨 경우는 거의 없는 편이다. 다만, 안티들은 이이 대해 "회사가 인성교육을 잘 시키는게 아니라 뽑힌 애들의 인성이 좋은 것일 뿐"이라며 까기도 한다(...)

또한 DSP의 전통이라면 소속 연예인은 항상 본명으로 데뷔한다는 점이 있다. 이름이 비교적 세련된 편인 은지원, 이효리, 성유리, 구하라가 예명 의혹을 받았지만 이 전통 때문에 의혹은 그저 데꿀멍. 물론 이 친구가 있는 이상 이 의혹은 더 이상 없을 거 같다. 퓨리티 이후로는 성을 뺀 예명 체제를 쓰고 있다. 그런데 퓨리티는 데뷔는 커녕 국내에 겨우 발 한번 붙히고 해체 크리...

3.1.3 젝스키스와의 관계

2016년 젝스키스가 재결합하면서, 과거 젝스키스가 이런 일을 당했다는 글이 많이 올라왔다. 맞는 말도 있긴 하지만, 상당부분 허위사실이나 과장인 점이 있어 문제다. 이에 관해선 아래 문서의 글을 참조 바란다.

젝스키스/해체 문서 참고.
젝스키스/정산 문제 문서 참고.
젝스키스/DSP 관련 루머 문서 참고.
젝스키스/음반 판매량 축소 의혹 문서 참고.

3.1.4 기타 소속 가수들과의 관계

젝키 팬덤의 경우 전술한 바와 같이 최악의 관계였던 것과 달리, SS501 초창기 시절에는 훈훈한 일화들이 보인다. 어떤 일본꼬마가 표잃어버려서 콘서트 못들어가고 있으니까, 왜 그러고 있냐며 사장이 대기실로 데리고 갔다고 한다. 그 꼬마랑 SS501이랑 밥도 같이 먹었다고.. 팬클럽 창단식 때는 팬들 700명이 밤새느라 밖에서 벌벌 떨고있으니까, 이호연 사장이 양해를 구해서 안에 리허설 보게 도와주기도 했다고 한다.# SS501 공방 뛰러온 팬들한테 슬쩍 다가가서 "지금 하는거 재밌니?" 라든지 "현중이 왜 좋아해?" "쟤네 인기 어느 정도냐"라는 등 어슬렁 거리며 말을 건냈다고 한다. 심지어 멜론콘서트 때는 초록색 옷 입고 팬들이랑 같이 풍선 흔들고 있었다고.. 뇌졸중으로 쓰러지기 직전인 2009년 일본 개그맨 게키단 히토리와의 일화영상에서, 게키단 히토리의 아내가 이호연을 사람 좋아보이고 친절한 분이었다고 회상하는 것을 보면 늙어서는 사람 자체가 온화(?)해졌다고 생각된다. SS501 중후반기에는 무리한 일본 진출, 제대로 활동을 안시켜준 점 등으로 욕을 먹기도 했다. 다만 이때는 회사 자체가 백억대 부채로 휘청이던 때이긴 하다. SS501 막바지 상황은 젝키 해체 때와 같은 불미스러운 일은 없었다. 애초에 이호연 사장이 뇌출혈로 사경을 헤메던 상태로 회사 자체가 어수선해서, 멤버들의 계약을 연장할만한 여건이 안됐다.

SS501김현중의 경우 무릎팍도사에 출연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활동 당시 소속사 사장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매우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DSP를 떠나기 전에 이호연 사장과 술자리를 가졌는데, 도저히 말이 안 떨어져 몇잔이고 술을 계속 마셨다고 한다. 그러다 이호연 사장이 '너 어떡할거냐? 있을거야? 말거야? 나갈려면 빨리 나가야지 서로 힘들게'라고 말했고, 김현중은 '사장님 곁이 아닌 다른 곳에서 일해보겠습니다'라고 했다”고 그때를 회상했다. 그러자 이호연은 힘든 거 있으면 말하라고, 회사 못 구해도 도와주겠다고 했다고 한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호연은 뇌출혈로 쓰러졌는데, 김현중은 지금도 병문안을 종종 가고 있으며 솔로로 1위를 하면 꼭 사장님께 수상소감을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후 솔로로 1위를 했을 때 그렇게 했다. 2013년 아시아 경제 인터뷰#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를 데뷔시켜주신 DSP 이호연 사장님을 요즘에도 가끔 찾아 뵙곤 해요. 건강이 조금 안 좋으셨는데 요새는 많이 괜찮아지셨어요. 은지원 형도 이효리 누나도 다 지금은 이적을 했지만 전 회사를 그리워해요. 사실 회사를 옮기고 나서 이전 회사를 그리워하는 경우는 많지 않잖아요. 하지만 모두가 그리워하는 걸 보면 사장님은 참 좋고 대단한 분이셨던 것 같아요. 역시 정이라는 것은 위대하다는 걸 느끼죠."
다른 멤버 김형준은 2016년 Double S 301로 컴백하면서, 지금도 DSP 최미경 사모님과 연락하며 지내고 있고 키워주신 이호연 사장님께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했다. 김형준이 14살 때 이호연 사장이 직접 캐스팅해 데려왔었다. 김규종은 활동당시 공홈편지에서 평소 이호연이 '우리 오공돌이들~ 일로와봐~'라고 말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핑클과는 소속사 나갈 때도 DSP에서 알아봐줄 정도로 잘 지냈다. 이호연이 뇌출혈로 쓰러지고 병실에 누워있을 때, 핑클 4명이 모두 찾아와서 이호연 사장이 좋아하던 노래 "루비"를 불러주며 눈물 지었다고 한다.# 활동 당시에는 핑클의 기행 항목에서 보듯이 화려한(?)일화들 떄문에, 이호연은 핑클을 망나니시스터즈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2013년 5월 29일 라디오스타에 이효리가 출연해서 말하길, 사장님과 매우 친분이 두터워서 회사가 어려워 월급이 밀리면 다음에 상황 좋아지면 달라고 쿨하게 넘어갔다고 한다. 성유리는 무릎팍도사에서 데뷔때 신인으로서는 받기 어려운 좋은 대우를 받았다고 말하기도 했고, 회사에서 나갈때도 매우 원만히 나가며 감사인사를 전했다#. 옥주현은 2015년 핑클회동 당시 페이스북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리며 당시의 소속사 직원과 사장님에게 고마움을 전하기도 했다.[28]

카라의 경우도 이호연 쓰러지기 전 까지는 사이가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DSP의 상황이 어려워져 카라가 해체위기일 때 소속사 사장은 카라를 끝까지 지켰다. DSP가 상장사 시절 제작했던 드라마 연개소문이 크게 실패하면서 자본잠식을 당한다. 당시 지분은 자동차 부품회사에서 대부분 가지고 있었다. 곧바로 소집된 주주총회에서, 적자폭이 커진 부분을 가지치기 하고 회사를 살리라는 압박이 들어온다. 이 가지치기 대상이 바로 드라마, 예능부분 사업을 접고 걸그룹 카라를 해체시키는 것이었다. 3회에 걸친 회의 끝에 이호연 사장이 내린 결론은 지원 안받고 '지분 다 내놓고 합병 파기 자본잠식으로 상장폐지...그래서 SS501 & 카라 데리고 나옴'이었다. 이후 카라가 일본에서 초대박을 쳤던 것을 생각하면 신의 한수였다. 정작 자신은 카라의 일본 진출 후 얼마되지 않아 뇌출혈로 쓰러져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카라가 처음으로 공중파 가요프로에서 1위를 한 날, 이호연 사장이 멤버 전원에게 청담동 명품샵에서 명품백을 하나씩 사줬다고 한다.
그러나 이호연 사장이 뇌출혈로 쓰러지면서 2011년 카라 전속계약해지 통보 사건이 발생하고 만다. 카라 측은 신뢰관계가 있던 이호연 대표가 투병을 시작한 시점부터 소속사와 신뢰가 깨졌다고 밝혔다. 구하라의 경우, 병상에서 누워있는 아버지 같은 이호연 대표를 떠날 수 없어 소속사에 잔류하기로 마음을 굳힌 것 같다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실제로 이호연이 구하라를 특히 아꼈다는 이야기가 돌긴 했다. 2010년 6월 5일 김정은의 초콜릿 방송에 이효리가 출연해 다음의 에피소드를 말했다. 한번은 이효리가 구하라를 불러내서 같이 술을 마셨는데, 구하라가 다음날 스케쥴 중 구토를 했다. 그러자 이호연이 이효리한테 전화를 걸어 ‘너 그 버릇 아직도 못 고쳤냐’며 혼냈다고 한다.

3.2 계약관련

3.2.1 계약서 없이 운영되던 시절

젝스키스, 핑클까지 계약서 없이 활동했다고 한다. 클릭비부터 계약서가 생겼다.

20세기 미소년 시즌3에 해당하는 은희상담소에서 DSP 후배격인 레인보우 멤버들이 나왔을 때, 계약서 없이 활동했다는 사실이 직접적으로 언급됐다. 레인보우 멤버들이 계약서가 없었다고 들었다며 진짜냐고 먼저 물어봤다. 이호연 사장은 연습생들에게, 젝스키스는 계약서 없이도 몇년을 무난하게 일한 의리파 애들이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게 착취 아닌가 젝스키스의 경우 계약서 없이 활동하며 입금되는대로만 받아서, 멤버 본인들도 어떤 방식으로 정산된 건지 잘 모른다. 계약서가 없었던 것에 대한 사장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계약보다 신뢰를 더 중요시하는 거죠. 신뢰가 무너지면 계약도 소용없지 않습니까. 끼와 감각을 갖고, 인간적이고 자유로운 정신으로 유대를 가질려고 해요. 그런 유대관계 속에서 창작활동을 해야 결과물도 좋아진다고 봅니다.”#

사실 어떤 대우를 받았느냐, 상호 신뢰가 형성됐느냐에 초점이 맞춰져야지 계약서가 없었다는 사실 만으로 깔 것은 아니다. 젝키 팬들은 계약서가 없었던 것 자체로 DSP를 죽일 놈 취급하지만, DSP가 이상한 것이 아니라 연예계에서 계약서 없이 활동하는 일이 특이한 경우가 아니었다. SM 이수만이 당시 H.O.T.와 세밀한 계약서를 작성한 것이 새로운 모습이었다(다만 돈을 적게 주는 불공정한 면이 있어 문제가 되었다). 심지어 최근까지도 계약서가 없는 사례는 자주 보인다. 아바엔터테인먼트의 민효린, 채정안, 한지민, 채시라 등이 계약서 없이 활동했으며#, 문근영은 나무엑터스와 10년 가까이 계약서 없이 활동했고#, 송지효도 씨제스엔터테인먼트와 계약서 없이 활동했으며#, 이효리도 B2M엔터테인먼트와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고 그냥 의리로 남아있기도 했다#. 다 신뢰를 바탕으로 계약서 없이 활동한다는 입장이다. 그리고 법적으로 봐도 서면계약서를 의무화 할 수 있는 조항은 없다. 하도급 계약이라면 서면으로 계약을 안 한 것에 대해서 문제를 삼을 수 있지만 이 부분은 하도급 계약이 아니다.# 그리고 연예인은 근로기준법의 적용을 받는 근로자가 아니다.#

계약서 없이 활동한 것은 핑클도 마찬가지였다. 핑클과는 이호연 사장이 표방한 의리관계가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보인다, 성유리가 무릎팍도사에서 밝히길 데뷔때 신인으로서는 받기 어려운 좋은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이효리는 2013년 라디오스타에 출연해서 말하길, DSP 시절 사장님과 매우 친분이 두터워서 회사가 어려워 월급이 밀리면 다음에 상황 좋아지면 달라고 쿨하게 넘어갔다고 한다. 핑클은 이후 타 소속사로 이적할 때도 DSP에서 알아봐주는 등 원만하게 끝을 맺었다. 그리고 은지원, 이효리, 김현중이 이적 후에도 전 회사가 그립다는 말을 했다는 것을 보면 인간적인 관계가 어느정도 쌓인 점은 맞다고 보인다기사. 이효리는 이적 후의 소속사인 B2M엔터테인먼트(사장이 DSP 출신인 길종화)에서도 계약이 오래전에 만료되었는데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고 그냥 의리로 남아있기도 했다기사. 또한 2016년 라디오스타에서 젝스키스가 해체 이유에 대해 말했을 때, 이호연 사장과의 관계가 아니라 가깝게 붙어있던 매니저와의 관계가 안 좋았다고 밝혔다.

다만 이재진 같은 경우 과거 싸이월드 시절 호연이란 이름의 팬이 글을 남기자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던 것을 보면, 안좋게 헤어진 멤버도 꽤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물론 H.O.T. 해체 비화[29]처럼 계약서를 쓴다고 모든게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의리를 표방하며 계약서를 안 썼지만 오히려 그 점 때문에 인간적 신뢰관계 쉽게 깨지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착취의 목적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젝키 팬들은 계약서가 없었던 사실 자체로 DSP에 분노하며, 그 중 어느 정도는 맞는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이호연이 정말 악마 같았으면 노예계약서를 작성했을 것이다. 당시 젝키에게 해준 대우보다 더 나쁜 조건으로도 얼마든지 계약서를 작성할 수 있던 시기였고, 이를 통해 5년이고 10년이고 소속사에 묶어놓을 수도 있었다. 젝키 팬들이 근거로 드는 2001년 7월 시사매거진 2580 보도내용을 보면, 노예 수준의 계약서로 당시 가장 잘 나가던 아이돌 그룹 가수들의 음반 인세가 100원도 채 되지 않았고(SM이 100원으로 H.O.T. 멤버당 20원이었다고 함), 계약금도 없이 10년 가까이를 소속사에 묶어버리기도 했다. 저런 계약서를 쓸 바에는 차라리 계약서를 쓰지 않는 편이 나았다. 특히 오늘날 재결합 하려 할때 만약 저런 계약서가 쓰여 있어서 발목을 잡았다면, 젝키 팬들에게 끔찍할 것이다. 해체 이후 장수원, 김재덕이 결성한 제이워크를 보면, Suddenly라는 곡으로 흥했지만 이후 계약한 소속사에서 제대로 활동을 안시켜주고 계약도 안 풀어줬다. 그래서 20대 대부분을 아무것도 못하고 흘려보냈다.

이때 당시 계약서를 쓰지 않은 덕분에(?), 젝스키스는 2016년 재결합시 YG엔터테인먼트와 자유롭게 계약서를 작성했다. 상표권 또한 YG 측에서 정식으로 등록해 젝스키스의 상표권을 가지고 있다. SM을 나온 신화가 이름을 찾기 위해 험난한 여정을 거친 점과 비교된다. 2000년 6월 16일자 피자의 아침 방송에서 이상호 기자가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추궁하자, DSP 측은 멤버들이 계약에 묶이지 않도록 배려한 것일 뿐이라고 밝혔다. 결국 자기가 말한대로 2016년 젝스키스가 재결합할 때는 아무 제약 없이 YG랑 계약했다.

한편 그동안 전 소속사인 DSP미디어가 젝스키스 해체하고 나서 찌질하게 상표권 등록을 수차례 시도했다가 실패했다고 퍼져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DSP에서 젝스키스 상표권 등록을 신청한 사실 자체가 없고, 어느 이상한 기업체에서 신청했다 거절당한 내역만 있다.여기서 젝스키스를 검색하면 알 수 있다.

젝스키스 팬들이 많이 까지만, 클릭비부터는 계약서를 작성하고 있다. 현재는 정산 또한 잘해준다고 하며 수익분배 비율도 타소속사와 비교해봤을 때 나쁘지 않다. 카라 전속계약해지 통보가 터진 이후 회사 자체가 크게 바뀌었다.흥행성적도 크게 바뀐 것이 함정이지만 이호연 시절처럼 가수들이 히트치지는 못하지만, 이런 면에 있어서는 젝키시절과 달리 깔끔해졌다고 보인다. 심지어 2015년 그렇게 뜨지 못한 에이프릴도 데뷔하고 반년쯤 지나고 정산을 받았다고...

3.3 노래 스타일

노래 선정이 꽤나 좋은데 외부 작곡가 위주로 돌아가는 회사임에도 곡 퀄리티가 대체적으로 안정적이고 좋은 편이다. 노래마저 좋지 않았으면 다트운영이 절대 나올수가 없다. 단점으로는 시대적인 트렌드를 따라가려만 한다는 점과 간혹 타이틀곡 선정이 엉망이라 수록곡은 다좋은데 타이틀곡이 별로인 경우가 발생한다는점.

SM이나 YG, JYP 미스틱, 젤리피쉬 등의 소속사와는 다르게 전속 작곡가나 편곡가가 존재하지 않는편이다. 이는 대성기획 시절때도 그랬는데 팬들은 제발 전속 작곡가좀 대려와달라고 하곤 그랬다. Rock U이후 스윗튠이 전속작곡가마냥 카라에게 곡을 자주 줬으나[30] 6번째 미니앨범부터는 이 관계도 끝. 다만 DSP와의 관계가 끊어졌을 뿐이지 카라 전 멤버들에게는 곡을 계속해서 제공하거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중이다.

2014년 들어 다양한 작곡가들에게 곡을 받는 시대로 흘러가게 되서 그런지 더이상 팬들은 작곡가를 데려와 달라는 소리를 하지 않는다.

2016년 젝스키스가 재결합하면서 DSP의 곡 받아오는 능력이 다시 재조명받기도 하였다. 당시의 뮤비 퀄리티는 처참했지만, 대신 비싼 작곡가는 많이 섭외해서 겨우 3년 활동인데도 명곡들이 즐비하다. 해체 후 16년이나 지나서 단독 콘서트를 열었지만 오늘날 들어도 좋은 노래가 많아 세트리스트를 충분히 채웠다.[31]

3.4 안목과 줍줍(...)

DSP가 가진 몇 안 되는 장점 중 하나

연습생이 매우 많은 편은 아니라 데뷔 시에는 다른 소속사의 연습생을 데려와서 데뷔시키기도 하는데, 어디선가 불쑥 데려오는것도 데려오는 것이지만 데려오는 멤버들과 기존 멤버들의 조화도 매우 좋은 편이라 DSP 아이돌들은 비쥬얼만큼은 큰 악평을 들은 적이 없다. 여기다가 이호연 특유의 높은 안목까지 포함하면 그 위력은 무시무시했었다. 비쥬얼 만큼은 최강이라는 평을 들었다. 이호연, DSP를 제일 싫어하는 팬들도 인정할 정도다. 대표적으로 젝스키스의 멤버들[32], 오종혁, 유호석, 김형준, 김현중, 구하라.

언론이나 방송에서 밝혀진 캐스팅 일화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효리의 캐스팅 비화를 보면, 이호연이 핑클 멤버 구성에 한참 신경을 쓰고 있을때, 강남역에서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던 이효리가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곧바로 달려가 버스를 타던 이효리를 설득해 사무실로 데려왔다. 하지만 당시 이효리는 다른 매니지먼트업체와 계약을 맺고 있었는데, 말도 안되는 계약조건이어서 즉시 소속 매니지먼트사에 항의해 이효리를 데려왔다고 밝혔다#. 이효리가 힐링캠프[33]에 출연해서 밝힌 일화에 따르면, 대뜸 '나 이호연이요'라고 전화가 와서 사장을 만났다고 한다. 만나서는 노래나 춤 하나도 안 시켜보고 얼굴만 보고 바로 뽑았었다고 밝혔다.[34] 참고로 이날 방송에서는 DSP 측에서 한혜진 미모 포텐을 알아보고 핑클에 들어오지 않겠냐는 제의를 했던 것이 밝혀졌다. 그러나 한혜진 본인이 거절했다고 한다.역대급 비쥬얼 걸그룹이 나올뻔 했다

옥주현힐링캠프에 출연했을 때 데뷔 일화를 밝혔는데#, 이호연이 스카우트로 풀어놓은 기자가 옥주현이 노래하는 모습을 보고 이호연한테 데려갔다고 한다. 이호연은 옥주현을 처음 보자마자 왜 이렇게 뚱뚱하냐며 돌직구를 던졌는데, 옥주현은 나는 성악하는 사람이니까 상관없다고 맏받아쳤다. 그러자 이호연은 너 아이돌 시켜준다는데 뭐가 싫냐며, 여자는 살빼고 쌍커풀 하면 확 바뀐다고 설득했다고 한다. 그런데 데뷔 날짜가 다가오는데도 수술을 안 시켜주다가 뒤늦게 시켜줘서, 데뷔하고 쌍커풀 부운 채로 활동했다고...[35]

이호연이 쓰러지기 전 마지막으로 기획에 참여한 레인보우의 경우[36], 멤버 지숙2014년 2월 세바퀴에서 레인보우 멤버로 뽑힌 비화를 이야기했다. 당시 회사에 오디션을 보러 갔는데 아무도 없길래 소파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때 중후한 남성이 들어오더니 ‘너 뭐냐. 잠깐 들어와봐’라고 해서 들어갔다고 한다. 이어 그 남성이 ‘애들아 나와봐’라고 하자 6명의 멤버들이 나왔고, 그 사이에 서보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더니 ‘너 다음 주부터 나와’라고 해서, 오디션을 보지도 않은 채 합격했던 일화를 밝혔다. 그 남성이 이호연 사장이다. 소파에 앉아있는 모습을 보고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팀의 메인 보컬을 노래도 안 듣고 뽑는 DSP 레인보우에 대한 세간 평가가 '멤버 개개인은 너무 좋은데[37] 왜 못 뜨는지 이해가 안 간다'며, '레인보우가 1위 하기를 온 우주가 기원한다'는 반응인 것을 보면, 확실히 멤버는 잘 뽑아서 데뷔시켰다고 보인다. 그러나 데뷔시켜놓고선 사장은 뇌출혈로 쓰러지고 기존 직원들 중 상당수가 회사를 떠나갔다..  

다른 DSP 가수들의 경우에도 이런 식의 일화들이 많다. 젝스키스고지용도 공항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고 이호연이 그냥 바로 캐스팅 했다는 소문이 있고, 김재덕도 본인이 밝히길 사장이 그냥 처음 봤는데 아무것도 안 시켜보고 바로 캐스팅 했다고 한다[38]. 장수원은 오디션장에서 사장의 '잘 하는 게 뭐냐'는 질문을 받고 '아무것도 없는데요'라고 답했더니, 사장이 솔직해서 좋다며 그대로 합격시켰다. 클릭비오종혁은 2006년 라디오에서 밝히길, 오디션 보러 DSP 사무실에 갔을 때 어느 경비원같은 후줄근한 옷입은 아저씨가 다가와서 '오디션 보러왔냐'고 묻길래 진짜 버릇없이 굴었다고 한다. 근데 그게 알고보니 이호연이었다. 이외 카라강지영도 뽑아서 15일 연습시키고 데뷔시켰다... 전술했듯이 이효리도 춤 노래 아무것도 안 시켜보고 그냥 얼굴 보고 뽑았다.

SS501의 경우, 김형준이호연이 직접 줍줍했고, 박정민은 김기영 실장의 모교 생활기록부를 뒤져 발굴했다. 김현중은 박정민 지인에게 추천받아 줍줍했고, 허영생은 원래 SM 계열사인 BM에서 연습생 생활을 하다[39] 나온 상태였는데, 마침 김형준의 지인이자 캐스팅디렉터인 허영생의 지인에게 추천받아 오디션을 보고 영입되었고, 김규종만이 유일하게 5차 공개 오디션을 통해 영입되었다. 김형준과 박정민은 학교 동창이며, 김현중은 박정민 지인의 지인이고, 허영생은 김형준 지인의 지인이다(...).

이렇게 설렁설렁(?) 뽑은 멤버들이 이후 크게 활약한 것을 보면 감은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기타 90년대 초중반 이본, 오현경, 이승연, 이아현, 박소현[40] 등을 발굴한 사람도 이호연이다. (출처: #, #, #, #, 아궁이 160715일자 방송편 등)

이호연이 쓰러지고 회사는 이호연과 따로 운영되지만 그 안목과 줍줍 전통은 죽지 않았다는 평이다. 에이젝스는 회사의 기획력이 개판이라 그렇지 비주얼만큼은 DSP답게 좋다는 평이 많으며 APRIL의 데뷔때도 다른 소속사의 연습생을 대려오면서 이 전통은 깨지지 않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인증하기도 했다. 참고로 현재는 DSP의 신인개발팀이 인재 영입을 맡고 있다.

DSP의 과거 아이돌들을 보고, 멤버 뽑기만 잘하지 이후 소속사가 별로 해준게 없다는 평도 있는데, 아이돌 시장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인물 뽑기라는 생각이 전통적으로 강하게 잡혀있던 회사였다고 보인다. 아이돌은 말 그대로 idol이다. 즉, 아이돌은 일반 대중에게 있어 우상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일반 대중에게 우상이 되려면 뭔가 남다른 것을 '타고나야' 할텐데, 그것은 타고난 유전자/외모/근성/성장과정 같은, 후천적인 트레이닝이나 의술로 가질 수 있는 것과 구별되는 점들이다. 체계적인 트레이닝으로 노래나 춤 실력을 길러내고 외모도 후천적인 성형으로 갖출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입장과 정반대의 방향이다. 이런 의견이라면 거의 누구나 아이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전술한 입장에서는 그런 경우 idol의 자격이 없는 것이다. 아마도 그런 생각이 DSP와 이호연의 사고방식이었다고 보인다. 과거부터 DSP 출신 연예인들을 보면 타고난 외모나 근성을 갖추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어떤 행동을 할 때 남들 눈치 안 보고 거리낌 없이 편안하게 해도 보기 흉한 게 없는, 소위 구김 없는 면이 드러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 부분은 성장 과정이 받쳐주어야 하는 것들이다. 꼭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 과정이 그렇게 유복스럽지 않더라도 여전히 구김없는 모습을 보여주는 애들이 있다. 아마도 그런 것이 스타의 근성 같은 것을 형성할 것이다. 일반 대중들이라도 그들의 눈은 바보가 아니다. 아이돌은 말 그대로 idol이어야지, 철저히 꾸며서 속인다 해도 어느 순간 한계를 드러낸다. 그 기준선을 감으로 잡아내서 idol이 될만한 인물을 뽑는 것이 DSP와 이호연의 역할이었다고 보인다.

3.5 국내에서 최초로 시도한 사항들

DSP가 한국에서 최초로 시도한 것들도 많다. 소방차는 국내 최초의 아이돌이라 불리고, IDOL은 최초로 10대인 멤버로 이루어졌고, 최초로 해외파 멤버로 이루어진 아이돌이었다. 젝스키스의 블랙키스와 화이트키스는 아이돌 유닛의 시초다. 핑클은 4인 4색으로 아예 그룹내 색깔별로 맡은 타이틀이 있었고, 클릭비는 최초의 밴드형 아이돌이었다. SS501은 리얼리티쇼에서 데뷔하여 스타덤에 오른 최초의 사례였다. 이제 일반화가 된 역조공은 카라가 처음으로 했다. 2016년 붐이 일어난 걸그룹 서바이벌카라프로젝트가 시초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2016년 현재, APRIL의 경우 사월이라는 마스코트를 만드는가 하면, 아이돌리얼리티를 UHD로 찍는 등의 시도를 하고 있다.

4 비판

4.1 기획력

현 DSP의 가장 큰 문제점

DSP는 과거 2000년대 중반까지 전성기를 구가했는데 이는 기획력이 좋아서가 아니라, 멤버 뽑기와 이호연 사장의 감과 인맥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1세대 아이돌 시장에는 아직 지금처럼 체계화된 시스템이 정립되지 않았다. 얼굴 잘 생기고 끼있는 애들을 뽑아서 괜찮은 노래 붙여주면 그럭저럭 장사가 되는 시스템이었다. 게다가 젝스키스는 처음부터 댄서 출신 두명(이재진, 김재덕)을 멤버로 넣은 덕에 안무 구성 및 트레이닝은 소속사에서 안 해줘도 가수 당사자들이 해결할 수 있었다.

또한 이호연 사장의 인맥과 감, 불도저식 추진력으로 회사의 단점들이 커버가 됐다. 이호연 사장은 연예계에 있어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고, 인재를 알아보는 감이나 일을 밀고 나가는 추진력도 좋았다. 다트 던져 회사일을 결정하냐며 다트사마라는 비아냥도 있었지만, 30여년간 수많은 스타들을 배출했던 것을 생각하면 분명 실력 있는 인물이었다. 그가 뇌출혈로 쓰러진 후 DSP가 어려움을 겪자 이 점이 더욱 부각됐고, 이호연의 경영능력을 높이 평가하는 기사들도 나왔다.[41][42]

그러나 그 이후 아이돌 산업이 체계화되고 이호연 사장마저 뇌출혈로 쓰러지면서, 결국 DSP는 경쟁력을 잃고 말았다. 한때 경쟁사였던 SM이 BoA를 필두로 전문적인 트레이닝/연습생 시스템과 체계화된 마케팅 전략을 수립해나가는 동안, DSP는 그만큼 발전하지 못했다. 그래도 2000년대 중후반까지는 그럭저럭 성공했지만, YGJYP가 본격적으로 대두되고 이호연이 쓰러지면서 도태되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90년대 중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즈음에 막 신생 기획사로서 등장했던 연예 기획사들은 회사 전속으로 활동하는 프로듀서를 육성하거나 유명 프로듀서를 전속으로 영입하는 것은 기본이고, 각종 트레이닝 시스템과 회사 전용 연습실등을 구축하는 것은 물론, 정기적인 오디션 시스템을 통해 연습생 육성 시스템을 만드는데 주력했는데 DSP는 이런 부분에 대한 투자가 미흡했었다. SM엔터테인먼트를 제외하고 90년대 중반 이후 등장했던 신생 기획사들중, 현재 대형 기획사로 성장한 곳이 JYPYG이고, 이 회사들은 꾸준히 투자를 거듭한 끝에 현재 아이돌 혹은 가수를 육성하기 위한 여러 부대시설을 갖춘 사옥과 독자적인 육성 시스템을 구축한 것만 봐도 답은 나올 것이다.[43] 팬들에겐 스죄라 불리며 욕을 얻어먹는 스타제국도 2000년대 중반 꽤 묵직한 존재감을 알렸던 시절 쥬얼리의 성공 이후로 규모는 조금 작지만 녹음 스튜디오와 연습실, 헬스장, 식당등이 있는 준수한 규모의 사옥을 건설하고,[44] 이후 보컬이나 댄스 트레이너들을 영입하면서 정기적인 오디션을 개최하는등 미래를 위한 투자를 힘써왔다.

그래도 DSP도 2000년대 중후반기에는 8~90명 규모의 여러 국적의 연습생에, 연습실 트레이너 등을 갖춰놓으며 시스템을 구축하기는 했다. 김재경 등 당시 나이대에서 에이스라 불리던 연습생도 상당수 있었다. 하지만 그냥 놔둬도 알아서 돌아갈만한 건실한 시스템을 갖추지는 못했고, 그 결과 회사를 진두지휘하던 인물이 쓰러지자 회사도 급격히 기울었다.[45]

2000년대 중반까지는 도시전설급 일화들이 많다. 무릎팍도사 성유리편과 김현중편을 보면 대강 알 수 있다. SS501은 트레이닝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멤버들이 직접 사비를 들여 보컬 연습을 받을 정도였고, 연습실도 회사가 운영하는 곳이 없어서 이곳 저곳 전전하며 연습하곤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운동장 20바퀴를 돈 다음, 5~6명을 한 방에 두고 보컬 연습을 하라고 했다 한다. 서로 시끄러우니 양동이를 뒤집어 쓰고 연습했다고 한다... 핑클의 경우 옥주현이 나머지 멤버들을 가르쳤고, 연습생 시절 노래 연습을 위한 피아노가 없어서 모 라디오 노래 대회에서 우승하여 받은 상품인 전자 피아노로 연습했다고 한다. 애시당초 이진과 성유리는 노래 부르던 학생도 아니었는데, DSP는 무작정 데려와서 트레이닝 한번 제대로 해주지 않고 걸그룹으로 데뷔시켰다. 근데 결과물이 대박이었다는 것이 함정 카라는 탄탄한 가창력을 갖춘 메인보컬 한 명이 있었으나, 그 멤버가 개인사정으로 탈퇴한 이후에는 해체위기까지 거론될 정도로 오랜 공백기가 있었고,[46] 새로 들어온 멤버들의 실력이 이를 뒤받쳐주질 못해서 여러 쓴소리를 들었어야 했다.

사실 1세대 아이돌 시장에서 젝스키스핑클 등을 필두로 2대 아이돌 기획사로 이름을 날리던 시절에도 SM엔터테인먼트의 아이돌을 벤치마킹하여 헤어스타일이나 컨셉면에서 비슷한 느낌으로 데뷔시킨 경향이 컸다.[47] SM의 아이돌에 인원 한명 더붙여서 데뷔시킨것도 그러한 이유였고. 그리고 2000년대 중반 SS501을 필두로 다시 2세대 아이돌 그룹을 선보일때는 1세대 아이돌 시절의 그룹 형태를 거의 그대로 옮겨 왔고, 멤버들의 매력이 발산되며 존재감이 컸을 뿐, 기획력 자체에서 특징적인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이거빼고 그렇다고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이런 따라하는 전략만으로 성공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가요계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은 아니다. 젝스키스, 핑클, SS501, 카라 모두 자신들만의 강점과 특색을 분명 살려냈고, 곡빨 안무빨도 SM에 버금가는 혹은 뛰어넘는 수준으로 붙여줬기에 성공한 것이다. 당시 99년 11월 3일자 한겨레 기사를 봐도 SM 따라했지만 실패한 가수는 무수히 많았고, 그 중 DSP는 기획력 측면에서 성공했다는 평을 받았다.[48]

그래도 이호연이 대표로 있었을 때는 이호연의 신기와 같은 다트 실력(…)으로 대박을 터뜨려주었다. 예를 들어 이호연이 드라마에 눈을 돌렸을 때는 성적이 별로다가, 이호연이 다시 돌아와 손을 본 암욜맨프리티걸은 대박을 쳤다. 이호연 보고 다트사마라고 놀리기도 하는데, 다트도 한번이 아니라 여러번 맞추면 실력으로 봐야할 것이다#. 하지만 이호연이 쓰러진 지금은 그런 것도 아니다. 현재는 25년 전통의 과거 2대 기획사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는 기획력을 보여주는 경우가 있다. 기획력만 보면 오히려 2000년대 중반 이후 등장한 중형 기획사들보다 딸리며, 동네 구멍가게 수준이라는 의견도 있다. 기획력이 홍콩의 액션 배우가 만든 그룹만도 못하다는 의견도 있다. 이는 2014년 카라 멤버들의 계약이 종료되고 멤버 두명이 나간후에 억지로라도 멤버를 영업할려 한점에서 알 수 있는데, 팬덤은 물론 멤버들마저도 무시하다시피 한 처사에 결국 팬들, 기존 멤버, 새 멤버 모두 그리 좋지 못한 결과를 얻게 되었다.

해외 진출의 성과에 대해서는 체계적인 기획이나 준비로 이뤄낸 것이 아니라고 비판 당하기도 한다. 1세대 아이돌 시절에는 젝스키스핑클이 대만등에서 어느정도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이 당시에도 해외 진출을 미리 준비한 것은 아니었고, 한류붐 + 다른 아이돌 그룹의 성공이 맞물려 현지에서 수요층이 늘어나면서 기회를 얻은 측면이 컸다. 반면 SM 엔터테인먼트는 외형적으로 보면 비슷한 해외진출 행보를 보이는 듯 했으나, S.E.S를 앞세워 일본 시장에서 밑바닥부터 개척을 시작했으며, 이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이를 반면교사 삼아서 다시 일본 시장에서 성공하기 위해 준비시켰던 것이 BoA였다. SM 엔터테인먼트BoA의 일본 데뷔를 준비시킬때 S.E.S의 경험을 토대로 "일본 시장에서 자리잡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나름대로 계산하고 이를 역산하여 보아의 일본 진출 시기를 조율 했다는 사실은 이미 유명한 일화이며, 이후 BoA의 성공과 이를 통한 경험을 앞세워 다시 밀어 붙인게 동방신기의 일본 진출이었다. 반면 DSP는 SS501때도 한류 붐에 편승해 급하게 일본 시장을 두드린 느낌이 컸으며, 당연히 장기적인 안목으로 보면 이는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런 급한 기획이 맞물리면서 한국 시장과 일본시장 어느곳에서도 큰 성과를 내지 못하는 시기가 생기기도 했다.

그래도 분명 카라는 일본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에 대해 개그맨 게키단 히토리의 홍보효과 + 때마침 맞물린 '미스터'의 인기로부터 얻어걸렸다는 의견이 있는데, 그 2개에 DSP의 역할이 크니 그렇게 볼 것은 아니다.

첫번째로 미스터의 경우 그런 작곡가와 배윤정이라는 안무가를 붙여준게 소속사의 역할이었으니, 소속사가 한 일이 없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일본에서 인기를 얻은 요인은 국내에서 형성된 이미지와, 국내에서 활동하던 곡(미스터, 점핑 등)과 안무(엉덩이 춤)였다. 즉 국내에서 히트를 시켜놨으니 일본에서 통한 것이다. 이호연이 드라마에 눈을 돌렸다가, 다시 돌아와서 손을 본 프리티걸이 히트를 치며 카라가 스타덤에 올랐다. 애시당초 구하라, 강지영 등 멤버 구성에 있어 이호연 입김이 컸다. 카라한테 처음 반응이 오자 일본에서 러브콜이 들어왔지만, 국내기반을 더 닦아야 한다고 판단해 거절했다. 당시 회사가 백억대 부채로 휘청이던 상태여서 한푼이 급했겠지만 잘 선택한 판단이다. 훗날 이호연이 물러난 이후의 DSP가 레인보우에이젝스를 국내 기반도 안 닦였는데 무리하게 진출시켰다가, 양국에서 이도저도 아니게 된 것과 비교되는 결정이다. 2009년 카라의 국내 기반이 제대로 닦이자 일본에서 스스로 알아서 반응이 일어나며 더 좋은 조건으로 진출하게 된다. 게키단 히토리, 야구치 마리 등 톱연예인들이 자처해서 언급해줄 정도였다. 특히 2009년 국내활동을 하며 일본에서 히트를 친 결정적 요인인 명곡 "미스터"가 탄생됐다. 그게 안무가랑 작곡가가 만든거지 이호연이 만든거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는데, 그 작곡가랑 안무가를 인맥과 감으로 섭외하는게 소속사 사장 역할이다. 대표이사 바뀐 이후의 DSP가 자사 가수들, 특히 레인보우에게 줬던 곡과 안무 퀄리티역대급이었던 것이 블랙스완를 생각하면 답이 나올 것이다. 카라 때의 DSP는 백억대 부채로 앞을 못 내다보는 상황이었고, 레인보우 때의 DSP는 카라가 벌어다 준 현금으로 풍족한 상태였던 것을 생각하면, 소속사 사장 역할이 엄청나게 큰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미스터를 타이틀곡으로 안 밀고 Wanna를 타이틀곡으로 민 것은 미스였다.

두번째로 게키단 히토리의 경우 일본 방송에서 카라를 홍보할 때 감동받은 일이라며 자주 말하는 일화가, 카라가 일본 진출하기 훨씬 전에 사적으로 DSP 사무실에 직접 찾아가서 멤버 전원의 친필 싸인 포스터를 받아왔다는 이야기다.[49]영상 사무실 문 앞에 어떤 경비원 같은 사람이 있었는데, 자기가 카라의 팬이라고 말하니 사무실로 친절하게 안내해서 멤버 전원의 친필 싸인이 있는 포스터를 줬다고 한다. 사람 좋아보이는 친절한 분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런데 2010년 2월 도쿄 赤坂BLITZ에서 열린 카라의 라이브에 간 날 그 경비원 아저씨가 있길래 아는척 했더니, DSP 사장이었다고 한다. 즉 그 사람이 이호연이었던 것이다ㄷㄷㄷ 뇌출혈로 쓰러지기 얼마 전의 이야기다. 카라가 일본에 전혀 진출하지 않았던 시절이고 게다가 게키단 히토리가 누군지 알 리도 없으니[50], 보통 사람 같으면 그냥 적당히 응대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장이 직접 친절히 대접했고 그 결과 상상 이상의 홍보효과를 냈다. 참고로 이때 카라인도쿄 방송을 보면 이호연 사장이 일본까지 같이가서 챙기고 있다. 그런데 안색이 그냥 보기에도 안 좋아, 이미 뇌출혈의 징조가 있었다. 윤흥관 이사(카라가 아빠라고 부르던 분)는 카라의 일본 첫 쇼케이스때 뒤에서 울다가 이호연사장님에게 들켜서 몇달간 놀림 당했다고, 라디오에 나와서 말한바 있다.[51]

기타 카라가 생뚱맞게 일본 진출에 성공한 것이 아니라, 이미 DSP에 어느 정도 기반이 갖추어져 있었기에 성공한 것이다. 2006년에 이호연과 친분이 있던 高和彦씨를 대표로 선임해 DSP 일본법인을 설립했고, SS501을 일본에 진출시켰다. 이때의 高和彦씨의 인맥과 노하우가 카라의 일본진출에 큰 도움을 주었다.#

아무튼 분명 카라의 대 성공은 DSP의 해외 진출의 전환점이었고, 이를 통해 해외 진출 성공의 경험을 축적시키나 했다. 하지만 레인보우에이젝스를 한국 시장에서 입지를 다지기도 전에 급하게 일본 시장에 내보냈다가,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확실하게 자리를 잡지 못하게 만들어 버렸다. 레인보우와 같은 경우 카라가 일본에서 대 성공을 거둔 시기와 맞물려 일본 진출을 하였기 때문에 기대를 모으기도 했으나, 맥락없는 카라 동생 그룹이라는 타이틀만 밀어붙이다가 일본의 카라 팬들에게까지 쓴소리를 들어야 했다. 국내에서 카라에게 처음 반응이 오기 시작하자 일본 진출 제의가 들어왔을때, 당시 DSP는 카라의 국내 기반을 더 닦아야 한다고 판단해 진출을 미루고 2010년 5월에 대형기획사와 더 좋은 조건으로 진출했던 것과 비교하면 아쉬운 결정이다.

한편 카라 자체에 대해서 보면, 초반에는 아예 제2의 핑클이라는 컨셉하에 메인 보컬 + 그외멤버라는, 사실상 핑클의 후속 그룹과 같은 느낌의 멤버 조합으로 데뷔하면서 역시 신선한 기획력을 찾아보기는 힘들었었다. 데뷔초의 힙합 컨셉마져도 대중들에겐 아무런 반응을 얻지못했다. 이에 이후 카라가 성공한 것은 전담 작곡진이었던 스윗튠의 능력과 멤버 본인들의 매력으로 이룬 것이라고 평가절하하는 의견이 있다. 하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능력있는 멤버들(구하라, 강지영)을 추가로 뽑아오고, 그런 대박 작곡가와 안무가를 붙여주는게 소속사의 능력이자 역할이다. 소속사 대표가 바뀐 후 레인보우에게 붙여진 곡과 안무의 퀄리티역대급이 블랙스완를 생각하면 답이 나온다. 게다가 카라 때는 소속사가 백억대 빚에 허덕이던 때고, 레인보우 때는 카라가 벌어다 준 돈으로 소속사가 풍족한 상태였다. 이 점을 보면 아이돌의 성공에 소속사의 능력과 결정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4.2 언론플레이

4.2.1 취약한 언플 능력

언론플레이가 생명(?)인 연예 기획사이면서도 언론플레이 능력이 형편없다. 아니, 형편없는 수준이 아니라 언론플레이 자체를 거의 하지 않아서 소속 그룹 팬들에게 '제발 언플 좀 해라' 같은 말을 적지 않게 듣는다. 그래도 컴백 기사 정도는 약간 날리기는 하고, 레인보우가 데뷔할 적에 엄청난 양의 언플을 쏟아냈다. 하지만 "SS501, 카라는 제대로 신경도 안 써주더니 얘네들은 왜 이렇게 밀어주냐" 며 반감만 만든데다, 레인보우의 첫 활동은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종료되었다. 그나마 이것도 다른 대형 기획사 신인들과 비교하면 새발의 피 수준. DSP 소속 기존 연예인들에 비해 엄청났다는 것일 뿐이다. 이것도 꾸준히 지속되지 못하고 반짝 언플에 그치고 말았으며 정작 언플해야 할 타이밍에 언플을 해주지 않는 건 선배 그룹들과 마찬가지. 안습. 오죽했으면 내가 네트워크와 더불어 언플을 전혀(...) 안하는 기획사 중 하나로 꼽힐까. 그리고 2014년 허영지 데뷔 시 이를 답습해 엄청난 언플을 쏟아냈으나 결과는 신규팬 확보 실패 및 팬덤 이탈로 이어졌다.

김현중이 전두환 팔순잔치에 참석했다는 기사가 떴을 당시에 DSP는 "결코 그런 일은 없다" 며 강하게 반발하다가, 이런 기사가 뜰 정도로 오히려 역효과만 불러들였다. 다만 실제로 전두환과 이호연 사장 생일이 1월 18일로 같긴 하다. 이것을 가지고 이호연 정치성향이 극우라고 보기는 힘들다. 노무현 대통령 서거 당시 이명박 정권의 시퍼런 압박에 연예계도 눈치를 봐서 소극적으로 의사를 표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호연은 SS501을 조문하게 하고, 공항에서 출국할 때 멤버 전원 검은 양복을 입게 했다. 정치성향이 어떻다 보다, 그냥 별 생각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행동했다고 보인다. 한편 전두환 생일 참석 건을 가지고, 이호연이 김현중의 몸값을 떨어뜨려 DSP에서 못 나가게 하려는 수작 아니냐는 음모론도 있었다. 하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김현중이 무릎팍도사에서 직접 밝힌 바를 보면, 이호연은 김현중을 쿨하게 보내주면서 힘든 것 있으면 얘기하라며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얼마 후 뇌출혈로 쓰러졌다. 이 점을 봤을 때 음모론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당시 김현중 인기를 봤을 때 겨우 그 정도 사건 가지고 소속사를 못 찾을 수준이 아니기도 했다.

언플로 메이저 걸그룹을 만들었다가 망한광수 사장과는 대조적이다. 카라의 성장과 함께 자본의 여유가 생기면서 허위기사에 대한 대응도 빨라지고 있지만 갈길이 멀다.

그런데 이 형편없는 언론플레이 능력이, 소 뒷걸음질 치다 쥐잡는 것 마냥 아주 가끔 도움이 되기도 한다. 소속 연예인들이 사고를 쳐서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면 다른 연예 기획사에선 자기 변명, 물타기, 감성팔이 등의 언플로 여론을 무마시키려다 역효과로 일이 더 커지고 연예인과 기획사의 이미지가 더욱 악화되는 경우가 자주 있다. 그런데 DSP에선 이럴 능력이 없어서(...) 기획사&소속 연예인들이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며 사과하게 되고, 이게 오히려 대중들에게는 진실성이 있는 것처럼 보여서 생각보다 빨리 사건이 무마되는 경우가 가끔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카라 멤버들이 탄 차량이 장애인 주차공간에 무단 주차를 해서 논란이 되었을 때, DSP 측에선 곧바로 이를 인정하고 재발 방지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혀서 논란이 가라앉은 적이 있다. 위의 다트에 비유한 기획력도 그렇고 DSP가 살아남는 이유는 과연 운빨인 듯 하다.

소속 연예인에 대한 언플은 못하면서 자사에 대한 언플은 능수능란하게 한다. 대표적으로 연습생 안소진의 자살 사건 당시, DSP는 재빠르게 베이비카라의 공식 팬카페를 비공개로 전환하고 네이버 프로필을 수 시간만에 바꾸었으며 자사 입장을 홍보하는 기사를 쏟아내었다. 참고로 당시 레인보우가 블랙스완으로 컴백하고 활동을 마칠 때까지도 네이버 프로필 사진을 신곡의상으로 바꿔주지 않았다.그런데 미니4집은 발표하자마자 프로필 사진 바꿔줬다. 급하긴 급한건가 카라 멤버 3인의 계약 만료 당시에도 3명은 계약이 종료되고 각자 길을 찾아갔지만 DSP가 카라를 보내주는 듯한 뉘앙스의 언플 기사를 쏟아내기도. 임직원들에게 불리할 때만 언플 능력이 풀가동되는 신기한 회사. 이때만큼의 언플실력은 JYP, FNC 못지않다

4.2.2 젝키 재결합 관련 언플

2016년 젝스키스가 무한도전을 통해 재결합하며 과거 젝키 팬들이 뭉치자 엄청난 화력을 보여주었다. 전술한 '젝스키스와의 관계' 목차에서 보듯이 젝키 팬덤과 DSP는 역사상 유례없는 최악의 사이였다. 이에 무한도전 방영 이후 '과거 DSP가 젝스키스에게 이런 짓을 했다'는 글이 각 사이트에 대량으로 올라왔다. 맞는 말도 있긴 하다. 그러나 상당부분이 허위사실이어서 문제다. 이에 관해서는 젝스키스/DSP 관련 루머 문서에 서술되어 있다.

이런 상황이면 DSP는 그런 허위사실이나 퍼뜨리지 못하게 잡았어야 했다. 그러나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행동을 하고 만다. YG와의 계약 소문이 돌자, 이호연 전 사장이 거동불가능한채 누워있는데 인사는 하러 왔어야 하지 않냐며 YG에 앞서 DSP에 연락달라는 언플을 한 것이다. 이에 대해 젝키 팬들은 분노하여 해당기사 댓글은 악플 일색이다해당기사[52]. 최다추천 댓글 내용을 보면 맞는 말도 있지만, 대부분이 그동안 허위루머의 총집합 편일 정도다. 강제로 해체당했다, DSP 측이 젝키 상표권 신청했다가 거절당했다, 젝키로 소속사가 300억이나 벌었다, 밤무대 돌렸다, 술자리 불러냈다, 3000만원 행사 뛰고 80만원 받았다는 등의 내용인데, 젝스키스/DSP 관련 루머 문서에서 보듯이 이는 사실로 보기 힘들다. 그러나 팬들에 의해 최다추천에 가 있으니, 이 기사를 계기로 일반인들이 그런 루머를 전부 믿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이 기사를 계기로 허위사실을 섞어 '과거 젝키가 이런 일을 당했다'고 쓴 글이 각 사이트에 이전보다 훨씬 많이 올라왔다. 이 정도면 이호연 엿먹일려고 일부러 저런 기사 썼다고 볼 수준이다. 6년째 거동불가능하고 말을 못하는 상태로 누워있는 이호연이 기사를 냈을리는 없는데, 병상에 누워있다 뜬금없이 욕을 엄청 쳐먹게 되었다.

물론 이호연 사장이 젝키를 만들고 키웠으니, 6년째 식물인간처럼 누워있는 사장한테 병문안 좀 오라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는 개인적으로 하면 될 일이지, 저렇게 네이버 메인에 뿌릴 내용이 아니었다. 게다가 말도 못하고 거동불가능한 상태인 이호연이 기사에서 나오는 의견을 개진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아예 저런 기사가 나왔다는 사실조차 모를 것이다. 기사 대부분이 기자의 상상이거나 DSP 측의 의견일 뿐이다.

특히 요즘 대중들은 저런 식의 기사를 "앞에 인사 얘기는 그냥 쓴 것이고 결국 DSP랑 계약하자고 언플한거네"라고 받아들인다. 실제로도 그런 목적이 있었다고 비쳐진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호연 사장을 욕받이로 세워놓고 DSP랑 계약하자고 언플한, DSP 측의 멍청한 행동이었다고 보인다. 왜냐하면 DSP에 대한 일반인들 시선조차, 이호연 사장이 쓰러진 이후 회사가 쇠퇴하여 현재는 젝스키스를 감당할 능력이 안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젝키 멤버들 생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결국 아무 성과 없이 욕만 먹은 언플인 것이다. 사장이 바뀐 이후 각종 오판들로 쇠퇴한 경력을 봤을 때 놀랍지 않기는 하다.

한편 이 언플에 대해 젝키 팬들은 젝키 멤버들이 이호연에게 병문안 겸 인사 가는 것 자체도 말이 안된다고 본다. 하지만 젝키 팬덤이 이호연과 각주와 같은 최악의 관계인 것이지[53], 전술한 '소속 연예인 관리' 목차에서 보듯이 젝키 멤버들이 이호연과 그 정도로 최악의 사이는 아니다.

이외 팬들은 이호연과 소속사는 젝키에게 제대로 해준 것이 없고, 젝키 멤버 본인들 매력과 능력으로 뜬 것인데 염치없는 소리 한다는 반응이다. 하지만 지금 아이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점을 잊은 듯 하다. 소속사가 키우는 것이 아이돌이다. 일단 멤버 하나하나 잘 뽑아서 데뷔시켰고[54], 비싼 작곡가들한테 곡을 잘 받아와서 오늘날 기준으로 봐도 명곡들이 많으며, 확 몰아부쳐서 가수를 띄우는 능력도 좋았다. 자세한 내용은 젝스키스/DSP 관련 루머 문서 기타 목차 참조. 팬들 논리는 작곡가가 곡을 만든거지 이호연이 한게 뭐냐고 욕하는데, 말이 안되는 소리다. 기획사가 아이돌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서포트가 좋은 작곡가로부터 대박날만한 곡을 받아오는 일이다. 이 능력 여부에 따라 아이돌의 성공이 결정난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2016년 기사만 봐도, 젝스키스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곡 폼생폼사는 이호연 인맥으로 신인 작곡가를 발굴해 대박을 터뜨린 사례다#. 이호연이 쓰러진 이후의 DSP가 레인보우에게 블랙스완같은 망곡을 주며 못 띄우는 것만 봐도, 소속사 사장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이외 이호연 까는 용도로 '젝스키스라는 이름 조차 MBC PD가 지어줬는데 이호연은 한게 뭐냐'는 말이 많은데, 그 MBC 은경표 PD가 이호연 인맥이다. 하와이에서 강성훈과 은지원을 스카웃 했을 때, 이호연이 하와이에 간 이유가 은경표 PD랑 놀러간 것이었다. 사장이랑 친분이 두터우니 고민을 거듭해서 젝스키스라는 끝내주는 이름을 지어준거지, 그런 인맥이 아니었으면 이름을 지어줄 리 없었다. 애초에 데뷔하자마자 H.O.T.의 라이벌 포지션으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주요 방송에 출연한 것은, DSP가 아니면 거의 불가능했다(당시의 DSP 위상은 지금과 전혀 다르다). 이후 당시 최고로 인기있던 프로그램들에 젝키가 무수히 많이 출연했는데, 이 역시 소속사의 파워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스케쥴을 매우 빡세게 돌려 원망을 들었지만, 그런 방식으로 몰아부쳐 H.O.T.를 따라잡았기에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2011년 해피투게더 해당영상 6분 20초부터). 근본적으로 DSP 자체가 거의 이호연 사장의 파워, 인맥, 그리고 감으로 유지되던 회사였다. 그가 뇌출혈로 쓰러진 후 DSP가 쇠퇴하자 이 점이 더욱 부각됐고, 이호연의 경영능력을 높이 평가하는 기사들도 나왔다.[55]

젝스키스는 과거 계약서 없이 활동하였기 때문에 현재 자유롭게 새 기획사와 계약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에는 무계약으로 인한 불투명성 때문에 정산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는 문제점이 있었지만, 세월이 흐르자 god가 과거의 소속사 싸이더스에서 재결합을 하고 H.O.T.가 이수만과 회동하는 것과 다르게 젝스키스는 자유롭게 새 기획사와 계약할 수 있는 요인이 되었다. 2000년 6월 16일자 피자의 아침 방송에서 이상호 기자가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추궁하자, DSP 측은 멤버들이 계약에 묶이지 않도록 배려한 것일 뿐이라고 밝혔다. 자기가 말한대로 실행됐다. 젝키 팬들은 DSP가 철저히 배제당하는 것을 보고 권선징악이라며 좋아하고 있다. 일부 팬들은 이재진의 매제가 양현석이고, 게다가 은지원의 당고모가 대통령이니 대한민국 역사상 최강의 권력을 가진 아이돌이 되었다며, DSP와 이호연이 아무 말 못한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 이호연이 뇌졸증으로 쓰러지면서 많은 직원들이 회사를 떠나 현재 젝키 시절 직원은 거의 없다시피 하고, 이호연 자신은 수년째 병상에 식물인간처럼 누워만 있다. DSP 자체도 암울한 상황이다. YG고 대통령이고 상관없이, 애초에 젝키가 인간적인 측면에서 이호연에게 연락하는 것이면 모를까, DSP를 무시하고 활동해도 실질적 장애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5 사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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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클시절부터 써왔던 사옥. 사옥 전체는 아니고 3층만 DSP가 사용. 당시에는 SM과 2인자를 다투던 시절이였기 때문인지 청담동의 SM 맞은편에 있었다. 그리고 연개소문과 온라인 학습사업이 망하고 옮겼다고...

파일:둘째사옥1.jpg파일:둘째사옥2.jpg

카라가 뜨기 시작할 때 옮긴 사옥. 당시 "이호연 개인저택이다", " 요양원 느낌이 난다" 라는 평이 들려올 정도로 모두에게 총공깽을 선사하였다(...)[56] 결국 2012년에 다시 옮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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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알듯한 현 사옥. 활동하는 아이돌의 현수막을 걸어놓는다. 겉보기엔 빌라같지만 주차장도 있고 아래 실내를 보면 어마어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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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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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회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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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 공간사무실(?)

강남에 존재하는 중소기업 연예기획사중 몇 안 되게 3층 이상의 사옥을 가지고 있고[57] 연습실도 2층이나 된다. 캐스퍼 영업 당시에는 전용 작업실까지 줬다. 설명이 必要韓紙?. 괜히 다른 중소기획사, 소기획사 아이돌 팬들에게 궁궐로 불리는 게 아니다.

6 기타

  • 회사 역사는 오래되었지만 인지도가 좀 낮은편이다. 물론 중간에 사명을 바꿔서(대성기획→DSP엔터테인먼트) 그랬을 가능성이 높지만 "H.O.TS.E.SSM"으로 딱 떠오르는 반면 젝스키스핑클은 어디 소속이였는지 모르는 대중들이 많다. 단지 둘이 같은 소속이였다는것만 알정도.. 심지어 네이버에서는 DSP만 검색할때 전 사명인 DSP엔터테인먼트가 먼저 뜰 정도다.[58] 윤채경 갤러리의 갤러가 DSP에 전화를 걸어 알아본 결과 DSP 본인들도 인지도 부족을 알고있다. 이때문인지 2013년 중반 이후 에이젝스를 시작으로 뮤비 초반부에 빅히트울림처럼 소속사 인트로를 넣고 있다.[59]
  • 이미지가 똥망이라 그렇지 JYP를 제외한 비슷한 동급의 중소기획사 중에서는 최상위권에 속한다. 프갤에서 정리한 프로듀스 101 출연 소속사들 매출 규모에서 JYP와 함께 의미있는 영업이익을 내는 소속사로 나왔으며[60] 실제로 연습생들 사이에선 좋은 기획사중 DSP가 자주 언급되기도 한다.
  • 공식 홈페이지는 모바일 페이지가 존재하지 않는데다가 대문과 매뉴가 어도비 플래시를 사용중이라 폰에선 재대로된 사용이 불가능하다. 가뜩이나 iOS는 플래시 지원이 없었고 안드로이드는 4.1부터 보안상 문제로 플래시 지원이 끊겼으니.. 물론 플래시가 탑제된 브라우저 앱을 깔면되지만 여러모로 불편한 편이다. 그나마 울림에 비하면 소속 아이돌의 뮤비나 음반 업데이트가 빠른정도...?
  • 팬들에 말하길 DSP에 의견을 전할때는 전화가 가장 편하다고 한다. 이메일은 거들어 보지도 않는다는듯(...). 그러나 전화를 받는 직원이 한때 성의 없고 자기 회사 가수에 대해서도 모르는 상담으로 악명이 높았다. 2016년 현재는 나아진듯.

7 소속 연예인

7.1 과거 소속 연예인

  • ZAM
  • 코코 : 윤현숙이 ZAM을 탈퇴 후 배우 이혜영[61]과 함께 결성한 여성 듀오.
  • MUE
  • 마운틴 : 뮤(MUE)의 멤버였던 김준희 가 체크 출신의 오창훈과 함께 결성한 혼성 듀엣. '탱고탱고'라는 곡이 조금 알려졌을 뿐 오래가지 못했다. 김준희는 이후 연기자 겸 사업가로 활동 중이며, 오창훈은 스크림의 멤버였던 송호범과 뭉쳐 JYP 남성듀오 원투를 결성한다.
  • IDOL (그룹 이름 자체가 '아이돌(idol)'이다.)
  • 젝스키스 : 2016년 재결합이후 YG엔터테인먼트로 이적.
  • 이승연
  • 핑클
  • 2Shai : 남성보컬 듀오.
  • 샤인(Shyne) : 해외파 쌍둥이 여성 듀오.
  • SS501 : 현재는 멤버들이 타 소속사에서 활동중이며 허영생, 김규종, 김형준은 유닛인 Double S 301로 활동중이다.
  • 선하 - 연예계 은퇴 후 현재는 국책연구원이 되었다.
  • 에이스타일
  • 퓨리티 - 2014년 5월 17일자로 공식 해체. 멤버 3명이 카라 프로젝트에 참여했지만 허영지에 밀려 카라의 새 멤버가 되지 못했으며 이 중 1명만 APRIL의 멤버가 되었으나 2015년 11월 9일 탈퇴했다. 채경, 시윤은 연습생으로 잔류했다가 프로듀스 101에 참가한다.
  • 카라 : 2016년 1월 15일부로 박규리, 구하라, 한승연의 계약기간이 종료되었다.허영지는 계약기간이 남아있어 DSP에 잔류. 일단, 박규리의 발언으로 현재는 긴 공백기상태.
  • 김규민
  • 박종찬
  1. 정확한 날짜는 알려져 있지 않은데 위키백과는 물론이고 공식 홈페이지 마저도 1991년 10월만 써져있다. 중간에 법인을 몇차례 바꿔 가며 운영한 듯하다. 현재의 법인은 기존 법인의 코스닥 우회상장 이후 2008년 9월 19일 물적분할 형태로 새로 설립한 법인이다.
  2. 단순히 DSP에게만 적용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회사들 역시 제대로 된 전문 경영진들을 불러오지 않으면 DSP같은 일이 생길 수 있다. 실제로 SM 역시 이수만이 해외도피 중이던 시기에는 나오는 가수마다 실패하며 흑역사가 발생했었고 현 DSP의 몰락을 따라가는 소속사도...
  3.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음반제작기획사 대표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각자 출발점은 다른 세 사람 이수만, 박진영, 양현석 모두 각자 자신의 기획사를 차리고 운영하기 위해 얼마나 피땀어린 노력과 노하우를 배우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을 했었는지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이호연도 비판을 피할 수 있는 인물은 절대 아니다.
  4. 성균관대학교 체육학과 출신. 과거 태권도 선수였었다고도 한다.
  5. 김광수 등 대부분 연예 기획제작자가 밑바닥 로드매니저부터 밟고 올라오는 것과 달리, 81년도에 한밭기획 전무이사로 첫발을 내딛었다. 나이도 만 27살이었으니 극히 이례적인 사례다. ZAM의 윤현숙(아버지가 육참총장)이나 젝키의 은지원(설명이 필요한지?) 등 다이아몬드 수저 집안에서도 자식을 맡길 정도고, 대학도 제대로 나온 것을 보면, 90년대 당시 어두웠던 연예업계 분위기치고는 나름대로 인텔리에 가까웠다고 보인다.
  6. 당시 기사 원문: ‘SM기획’과 ‘대성기획’은 그 중 단연 두드러지는 곳. SM기획(대표 이수만)은 H.O.T S.E.S 신화를, 대성기획(대표 이호연)은 젝스키스와 핑클을 배출해 가요 시장의 권력을 장악했다. 요즘 가요계를 ‘수만이와 호연이의 전성시대’라고 부를 만큼 이들의 영향력은 막강하다.[1]
  7. 단적인 예로 501 / 라 불리며 2000년대 중반 ~ 2010년대 초반을 주름잡았던 보이/걸 6그룹 중 2개 그룹이 DSP 소속이었다. 나머지 중 셋은 역시나 SM. 원더걸스 만이 JYP 소속이다. YG도 대중성 강한 빅뱅, 2NE1 등으로 뛰어들긴 하지만, 2000년대까지만 해도 이들과 경쟁하기는 역부족이었다.
  8. 업계 관계자들은 “DSP가 지금의 위치에 오르게 된 데는 DSP의 설립자인 이호연 대표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이 대표가 DSP 설립 초부터 줄곧 기업의 경영·기획 등을 비롯해 가수의 앨범 제작까지 손수 돌보며 기업의 성장을 도모했기 때문이다. 성균관대학교 체육학과를 졸업한 이 대표는 1981년 한밭기획, 1989년 대성기획 등을 거쳐 1991년 DSP를 설립했다. 실력 있는 제작자로 유명세를 탄 후 데뷔시키는 가수마다 정상에 올려 ‘스타제조기’라는 수식어를 얻기도 했다. 큰 부침 없이 기업의 덩치를 키워내 경영 능력 또한 높이 평가받았다.# // 대성기획의 수장은 80년대 소방차를 대스타로 만들었으며, 90년대 잼 젝스키스 핑클, 2000년대 SS501 등 수많은 스타 아이돌 그룹을 탄생시킨 이호연 대표였다. 물론 이호연 대표는 DSP의 사장도 맡았다. 추진력과 스태프 관리에 있어 가요계 최고 수준이었던 이호연 대표가 일선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시절, 대성기획 및 DSP는 이수만 사장의 SM엔터테인먼트와 함께 사실상 국내 양대 가요 기획사로 군림했다.#
  9. 최근 언론에서 밝혀진 것들만 보면, 옥주현이 밝힌 바에 따르면 핑클의 성공에 이호연의 판단과 추진력이 크게 작용했었고#, 젝스키스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곡 폼생폼사는 이호연의 인맥으로 신인 작곡가를 발굴해 대박을 터뜨린 사례다.#
  10. 자기 소유 건물에 DSP를 입주시키고, 그 임대료 명목으로 DSP 회사돈을 야금야금 챙기고 있다. 다만 이는 원래 다른 업종들의 기업들도 쓰는 방식이다. FNC도 한성호 부인의 건물에 입주해있어 임대료가 한성호 지갑으로 들어간다.
  11. H.O.T.(5명)→젝스키스(6명), S.E.S.(3명)→핑클(4명), 신화(6명)→클릭비(7명) 등.
  12.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9110300289117001&editNo=6&printCount=1&publishDate=1999-11-03&officeId=00028&pageNo=17&printNo=3649&publishType=00010
  13. 에이스타일(슈퍼주니어 - 7), 카라(소녀시대 - 3) 로 멤버수가 오히려 줄고 있다(?). 다만 카라는 소녀시대보다 몇달 먼저 데뷔했으므로 직접비교가 어렵다.
  14. 수백억대로 알려져 있긴 한데 어디서는 200억이라고 하고 어디서는 400억이라고 하는 등 정확한 금액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15. 참고로 DSP 역사상 가장 많이 돈을 번 카라의 일본 활동은 2008~2009년에 그 기반이 형성되었으니, 나름 의미있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때 형성된 이미지와 그때 나온 곡과 안무로 일본 시장을 휩쓸었다.
  16. 댓글에 이호연 뇌졸중으로 쓰러지기 3개월 전에 결혼했다는 말도 있는데, 정확한 시기 아는 사람은 추가바람.
  17. 이호연과 결혼하기 전 낳은 딸, 다시 말해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얻은 딸이다.
  18. 멀리 갈 것도 없이 소속사 선배인 카라만 해도 2008년에 미니앨범을 3장 발표했고, 결국 그해에 엠카에서 데뷔 첫 1위를 차지했다.
  19. 기사원문: 이호연 대표는 국내 매니지먼트 1세대 출신으로서 젝스키스, 핑클, 클릭비, SS501, 카라, 레인보우 등 대중들에게 오랜 시간 큰 사랑을 받은 뮤지션들을 기획, 제작하여 한국의 음악산업 발전에 원동력이 되었다. 특히, 카라의 경우 국내 걸그룹 최초로 첫 도쿄돔 단독 공연을 기획, 개최하는 등 한류열풍을 이끄는데 앞장섰다. 뿐만 아니라 이호연 대표는 TV드라마 '마이걸', '연개소문', '외과의사 봉달희' 등을 제작. 높은 시청률을 자랑하며 미디어사업 분야에도 기여한 점이 이번 대중문화예술상 대통령표창 수상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20. 허영지는 2019년 1월 31일에 계약이 만료된다.
  21. 그러나 김광수의 그간 언행을 보면 MBK 쪽으로 갈 가능성은 없다. 실제로 이적 루머 뉴스가 쏟아졌을 당시에는 언론들이 유력한 후보로 키이스트를 골랐지, MBK를 고른 뉴스는 하나도 없었으며, 결국 키이스트로 이적했다.
  22. 재계약 여부에 대한 추측성 기사가 난무하던 시점에서 팬덤에서 들고 일어나 재계약 거부 운동을 진행하기도 했다.
  23. 실제로 2015년 이전의 카라 국내 쇼케이스 및 팬미팅에서는 아나운서 박지윤, 전현무, 전문 MC인 MC딩동 등이 진행을 맡았다. 그러나 2016년 4월의 APRIL 컴백 쇼케이스에서는 전문 MC가 아닌 김지숙이 진행을 맡았다.
  24. 박규리 본인은 장영실 드라마에 먼저 집중하고 소속사를 찾겠다고 하였다.
  25. 쟈니스를 비롯한 일본 아이돌을 보더라도, 한 분기에 같은 그룹에서 드라마를 2명 이상이 동시에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26. 군필자인 형곤은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로 진학하는 값진 성과를 거뒀다. 아이돌 최초 학생예비군일 뻔했는데 예비군 6년차라서...
  27. 그런데 보니하니 오디션 참가가 소속사와 상의 없이 독자적으로 결정했다는 얘기가 있다.
  28. 오랜만에 옛날 이야기 보따릴 펼쳤더니 재미난 일들이 많긴 하다. 넷은 여러모로 세고 특이했다. 이상하리만큼 운이 좋았다, 우린. 가수가 되고 싶단 큰 꿈도 없이 캐스팅된 아이들. 노래 안 되고 춤도 안 되는데 '연습생 시절'이란 것도 없이 그 상태로 데뷔를 시킨다고… 망할 거라고 확신하며 아무 기대도 겁도 없이 세상에 나왔다. 예상대로 데뷔곡 '블루레인'은 큰 집중을 받지 못했지만 좌절하지도 않았다. 당연하다고 생각했기에. 우리 사장님은 갑자기 말도 안 되는 곡으로 방향을 바꿔 빛의 속도로 일을 진행했다. 뮤직비디오를 찍던 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이런 옷을 입고, 이런 유치한 가사를 립싱크하라니. 이걸로 앞으로 방송도 해야 하냐고. -이것봐 나를 한번 쳐다봐. 나 지금 예쁘다고 말해봐-콜미 콜미 콜콜 기 붜 코올 -난 니거야- 우린 모두 하기 싫은 티를 뚝뚝 묻혀가며 했다. 그런데 이게 그렇게 터질 줄이야…! 그 이후 고공행진. 노래 춤 실력을 키워야 하는데 예능의 절대 강자로 시청률을 제압하던 핑클은 잠자는 시간, 가요 프로그램 출연하는 시간을 제외하곤 예능촬영에 몰두. 노래 연습은 안녕… 춤은 모두가 따라 출 수 있는 걸로. 오늘 밥 먹으면서 저 위의 내용으로 웃음꽃이 활짝 폈다. 신기하지 않냐며, 잠깐 꿈을 꾸고 깨어난 것 같다며. 갖춰진 것도 없이 운이 억수로 좋았던 건 말이 안 되는걸 되게끔 옆에서 애써준 사람들의 공이 크다고…FBI에서 훈련 받는 것보다 우리 넷을 케어하는 게 몇 배는 더 고통스러웠을(^__^) 매니저 오빠들. 불도저 이호연 사장님. 오늘 귀 좀 간지러우시겠다. 핑클을 에워싼 숲이 되어준 그대들에게 고맙고 보고 싶고 미안하고… 넷이서 이야기 나누며 많이 그리워했어요. 오겡키데스카.
  29. 예전 김구라의 시사대담에서 나온 말을 보면, 2000년대초 이재원이 SM 나오면서 한숨쉬며 한말이 '사장님이 장당 백원만 줘도 안나갔을거다'라고 했다고 한다. 당시 CD 한장에 1만2천원정도였다. 장당 20원씩 받았다는 말이 있다. 만약 젝스키스가 SM의 H.O.T.처럼 계약서를 작성해 활동했으면, 음반 총 판매량이 190만장이니(물론 축소 의혹이 있지만 공식 인정 기록은 이것이니 이대로 계산했을 것이다) 기껏 3800만원을 받는다. 게다가 멤버수가 H.O.T.보다 한명 더 많으니 이보다 적어질 가능성도 있다
  30. 2014년에 이단옆차기가 곡을 줬으나 망했다.
  31. 그러나 이는 이호연 있을때 이야기고(2016년 기사만 봐도, 젝스키스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곡 폼생폼사는 이호연 인맥으로 작곡가를 섭외해왔다.#), 현재는 레인보우의 블랙스완 같이 역대급 망곡을 주는 경우도 있어 비판을 받기도 한다.
  32. 그런데 수년의 세월이 지나 2016년경 라디오스타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젝스키스 멤버 캐스팅에는 강성훈이 직접적인 관여를 했다고 한다. 당시 듀엣에서 급작스럽게 6인조로 바뀌자 강성훈이 탈퇴하려 했고, 이에 이호연이 너가 OK 한 사람들로 뽑겠다고 설득했다고 한다. 그래서 오디션장에서 강성훈이 이호연 옆에 앉아 같이 결정했다고 한다. 또한 동시대에 활동했던 핑클의 경우도 DSP에서 직접 고른 사람은 옥주현, 이효리고, 나머지는 옥주현이 뽑았다고 알려져 있다(물론 캐스팅 디렉터가 데려오긴 했지만 멤버를 고른 사람은 옥주현). 이호연 안목 하나로 된 것이 아니라, 멤버들 안목이 더해졌기에 가능한 조합이었다.
  33. 120416일자 방송
  34. 이효리의 2집 앨범 땡스투에 "8년동안 든든하게 지켜주시는 우리 사장님 '나 이호연이야!' 그 말 오래오래 듣고 싶어요. 건강하세요.."라고 적혀있는 것을 보면, '나 이호연이야'가 평소에 자주하는 말버릇이었다고 보인다.
  35. 기타 정선희가 여걸파이브에서 밝히기를, 사장이 당시 "물건이 들어왔는데 좀 커"라고 했다고 한다ㅋㅋ
  36. 데뷔하고 거의 곧바로 이호연 사장이 쓰러졌다. 데뷔는 시켜놨는데 케어는 전혀 못해준 셈이다.
  37. 김재경은 연습생 당시에도 에이스라고 소문이 자자했다. 고우리는 공중파 드라마에 조연으로 활발히 출연 중인데, 비쥬얼이 원래 배우인 것 같다는 평이다. 조현영도 남초 사이트에서 매우 흥했었다.
  38. 그래서 김재덕 본인은 자기가 얼굴이 잘생겨 뽑힌줄 알았다고 한다.
  39. SM과 정식 계약 전에 소속되는 회사
  40. 첫 매니저가 DSP의 길종화 이사였다.# 2016년 젝키가 재결합하며 강성훈이 박소현의 러브게임에 출연했는데, 연습생 시절 강성훈과 은지원이 원래 듀엣으로 데뷔하려던 것도 다 알고 있었다.
  41. 업계 관계자들은 “DSP가 지금의 위치에 오르게 된 데는 DSP의 설립자인 이호연 대표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이 대표가 DSP 설립 초부터 줄곧 기업의 경영·기획 등을 비롯해 가수의 앨범 제작까지 손수 돌보며 기업의 성장을 도모했기 때문이다. 성균관대학교 체육학과를 졸업한 이 대표는 1981년 한밭기획, 1989년 대성기획 등을 거쳐 1991년 DSP를 설립했다. 실력 있는 제작자로 유명세를 탄 후 데뷔시키는 가수마다 정상에 올려 ‘스타제조기’라는 수식어를 얻기도 했다. 큰 부침 없이 기업의 덩치를 키워내 경영 능력 또한 높이 평가받았다.# // 대성기획의 수장은 80년대 소방차를 대스타로 만들었으며, 90년대 잼 젝스키스 핑클, 2000년대 SS501 등 수많은 스타 아이돌 그룹을 탄생시킨 이호연 대표였다. 물론 이호연 대표는 DSP의 사장도 맡았다. 추진력과 스태프 관리에 있어 가요계 최고 수준이었던 이호연 대표가 일선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시절, 대성기획 및 DSP는 이수만 사장의 SM엔터테인먼트와 함께 사실상 국내 양대 가요 기획사로 군림했다.#
  42. 2015년 핑클 멤버들의 회동 후 옥주현은 페이스북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린 바 있다. 핑클의 성공에 이호연의 감과 추진력이 상당부분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 오랜만에 옛날 이야기 보따릴 펼쳤더니 재미난 일들이 많긴 하다. 넷은 여러모로 세고 특이했다. 이상하리만큼 운이 좋았다, 우린. 가수가 되고 싶단 큰 꿈도 없이 캐스팅된 아이들. 노래 안 되고 춤도 안 되는데 '연습생 시절'이란 것도 없이 그 상태로 데뷔를 시킨다고… 망할 거라고 확신하며 아무 기대도 겁도 없이 세상에 나왔다. 예상대로 데뷔곡 '블루레인'은 큰 집중을 받지 못했지만 좌절하지도 않았다. 당연하다고 생각했기에. 우리 사장님은 갑자기 말도 안 되는 곡으로 방향을 바꿔 빛의 속도로 일을 진행했다. 뮤직비디오를 찍던 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이런 옷을 입고, 이런 유치한 가사를 립싱크하라니. 이걸로 앞으로 방송도 해야 하냐고. -이것봐 나를 한번 쳐다봐. 나 지금 예쁘다고 말해봐-콜미 콜미 콜콜 기 붜 코올 -난 니거야- 우린 모두 하기 싫은 티를 뚝뚝 묻혀가며 했다. 그런데 이게 그렇게 터질 줄이야…! 그 이후 고공행진. 노래 춤 실력을 키워야 하는데 예능의 절대 강자로 시청률을 제압하던 핑클은 잠자는 시간, 가요 프로그램 출연하는 시간을 제외하곤 예능촬영에 몰두. 노래 연습은 안녕… 춤은 모두가 따라 출 수 있는 걸로. 오늘 밥 먹으면서 저 위의 내용으로 웃음꽃이 활짝 폈다. 신기하지 않냐며, 잠깐 꿈을 꾸고 깨어난 것 같다며. 갖춰진 것도 없이 운이 억수로 좋았던 건 말이 안 되는걸 되게끔 옆에서 애써준 사람들의 공이 크다고…FBI에서 훈련 받는 것보다 우리 넷을 케어하는 게 몇 배는 더 고통스러웠을(^__^) 매니저 오빠들. 불도저 이호연 사장님. 오늘 귀 좀 간지러우시겠다. 핑클을 에워싼 숲이 되어준 그대들에게 고맙고 보고 싶고 미안하고… 넷이서 이야기 나누며 많이 그리워했어요. 오겡키데스카.
  43. DSP는 2006년 SBS드라마 연개소문에 투자했다 큰 실패를 맛본 후 상장폐지가 되는 아픔을 겪긴 했지만, 그 전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아이돌 기획사중 하나였고, 회사 규모도 절대 작지 않았다.
  44. 사실 스타제국의 사옥 규모는 대형기획사에 비해 작은거지, 어지간한 소규모 연예기획사들과는 당연히 비교가 안될정도로 좋은 시설을 가지고 있다. 프로듀스 101만 보더라도 스타제국의 회사 규모나 사옥의 수준은 상위권이었다. 다만 경매에 넘어갔을 뿐
  45. 분야는 다르지만 삼성을 보면 이미 시스템으로 잘 돌아가는 회사를 만들어놨기에, 이건희가 쓰러져도 여전히 잘 나가고 있다
  46. 애초에 카라도 핑클과 같은 구조로 만든 것이어서 딱히 체계적인 멤버 구성은 아니었다. 무었보다 카라를 기획했던 길종화부터가 핑클의 매니저출신이여서(...)
  47. 그나마 클릭비가 밴드 아이돌이라는 신선한 컨셉이었지만, 멤버수나 코디는 신화를 벤치마킹한게 강했다.
  48.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9110300289117001&editNo=6&printCount=1&publishDate=1999-11-03&officeId=00028&pageNo=17&printNo=3649&publishType=00010
  49. 풋스마 20110308일자, 메렝게의 기분 20110204일자, How to モンキーベイビー!2009년 11월 방송 등
  50. 자신이 일본의 개그맨이라고 말은 했다지만, 카라가 일본에 전혀 진출하지 않은 상태고 한국에 유명한 일본 연예인도 아니니 이상하게 생각하는게 보통일 것이다
  51. 윤흥관 이사는 카라의 첫 도쿄돔 콘서트 전날 다음과 같은 트윗을 올리기도 했다. "이제 내일이다. 나가 이곳에서 공연을... 믿기지 않는다. 그리고 기쁘다. 눈물 날 정도로 ㅠㅠ 사장님께서 이걸 보셨음 많이 좋아하셨을텐데........"
  52. 2016년 5월 6일 기사가 올라왔으며, 댓글 수는 오후 3시 40분 기준 3,978개. 그 와중에 네x버는 기사 순위 내리는 중.
  53. "미친 개호연 새끼 뒈지는 날 우리젝팬들 얼굴에 비로소 웃음꽃이 핀다."는 문구(사진)정도는 애교라고 볼 정도로, 다음과 같은 내용의 현수막이 있었다.# (D.S.P 두고 보자 / 개좇십창 창녀 썅클 / 썅클은 창녀래요 / 뻑큐 씹탱 개호연 / 이호연 죽여라 / 창녀 핑클 / 이호연 너 나랑같이 죽자 / 이호연 너의 정력에 무릎을 꿇는다 / 이호연 제삿상에 옥돼지 머리 놔주마. / - 호연씨 사랑해요. 당신의 효리가 - / 이호연 너의 그녀들을 찾으려면 창녀촌으로 오너라 / 나는 개호연이다 나는 미친놈이다 나는 오늘 뒈졌다 속보 6월18일 2시 이호연 젝키팬에게 맞아 사망.이지, 아래에 보듯이 젝키 멤버들이 이호연과 그 정도로 나쁜 사이는 아니다.) 오늘날 이수만, 양현석, 박진영한테 저런 것하면 잡혀갈 수준이다. 인터넷에서 유언비어 유포도 심했다.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주작 수준이 낮아서 믿을 사람이 없을 정도이긴 하다.# # # # # # # 이외 해체날에는 조영구 그랜져 새차를 이호연 차로 생각하고 다 부셔서, 이호연이 조영구한테 1100만원을 물어줬다. 시사프로 피자의 아침 방송을 보면 해체 당시 사무실 경호회사 직원이 다음과 같이 인터뷰 하고 있다. "18일..농성을 부리고 여기에다 계란 세례나 밀가루, 식초 이런 것들을...난동을 부려가지고...."
  54. 2016년 라디오스타 방송을 계기로 팬들은 강성훈이 젝키를 만들었고 이호연이 한 것은 없다고 주장하는데, 전술한 멤버 항목에서 보듯이 막상 내막을 살펴보면 고지용을 제외하고는 이호연 공이 크다.
  55. 원문: 업계 관계자들은 “DSP가 지금의 위치에 오르게 된 데는 DSP의 설립자인 이호연 대표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이 대표가 DSP 설립 초부터 줄곧 기업의 경영·기획 등을 비롯해 가수의 앨범 제작까지 손수 돌보며 기업의 성장을 도모했기 때문이다. 성균관대학교 체육학과를 졸업한 이 대표는 1981년 한밭기획, 1989년 대성기획 등을 거쳐 1991년 DSP를 설립했다. 실력 있는 제작자로 유명세를 탄 후 데뷔시키는 가수마다 정상에 올려 ‘스타제조기’라는 수식어를 얻기도 했다. 큰 부침 없이 기업의 덩치를 키워내 경영 능력 또한 높이 평가받았다.# // 원문: 대성기획의 수장은 80년대 소방차를 대스타로 만들었으며, 90년대 잼 젝스키스 핑클, 2000년대 SS501 등 수많은 스타 아이돌 그룹을 탄생시킨 이호연 대표였다. 물론 이호연 대표는 DSP의 사장도 맡았다. 추진력과 스태프 관리에 있어 가요계 최고 수준이었던 이호연 대표가 일선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시절, 대성기획 및 DSP는 이수만 사장의 SM엔터테인먼트와 함께 사실상 국내 양대 가요 기획사로 군림했다.#
  56. 참고로 프리티 리듬 디어 마이 퓨처 1화에선 이때의 DSP 사옥이 나온다.
  57. 뮤직웍스, MBK엔터테인먼트도 1층만 쓴다고 한다. WM엔터테인먼트가 7층이긴 하나 망원동이므로 예외로 친다.
  58. 나무위키 내에서도 DSP엔터테인먼트로 쓰는경우가 많은듯. 과거 조시윤문서나 중소돌문서등...
  59. 그러나 이 인트로가 쓸데없이 길어서 왜 넣었냐는 의견이 많아 팬들이 항의하기도 했다. 결국 길었던 앞부분은 Muah!때 짤리게된다.
  60. 다만 이는 2014년 기준. 2015년엔 간판 그룹이던 카라의 성적도 2014년과 비교해서 심각하게 떨어졌던 편이어서 결국 2015년에 적자전환에 매출도 뚝 떨어졌다.
  61. 룰라 이상민의 전 아내로 유명하신...
  62. 논란이 좀 있다. 자세한건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