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카엘 라우드럽

(라우드럽에서 넘어옴)

Laudrup-1231769.jpg

전설 그 자체였던 현역 시절.


현재 모습.

이름미카엘 라우드럽(Michael Laudrup)
생년월일1964년 6월 15일
국적덴마크
출신지프레데릭스베르
신장183cm
포지션공격형 미드필더
소속팀쾨벤하운 BK (1981 - 1982)
브뢴뷔 IF (1982 - 1983)
유벤투스 FC (1983 - 1989)
SS 라치오 (임대) (1983 - 1985)
FC 바르셀로나 (1989 - 1994)
레알 마드리드 (1994 - 1996)
비셀 고베 (1996 - 1997)
AFC 아약스 (1997 - 1998)
지도자덴마크 축구 국가대표팀 (2000 - 2002 / 수석코치)
브뢴뷔 IF (2002 - 2006)
헤타페 CF (2007 - 2008)
스파르타크 모스크바 (2008 - 2009)
RCD 마요르카 (2010 - 2011)
스완지 시티 AFC (2012 - 2014)
레크위야 SC (2014 - 2015)
국가대표104경기 37골
스완지 시티 AFC 역대 감독
브렌던 로저스
(2010~2012)
미카엘 라우드럽
(2012~2014)
개리 몽크
(2014~2015)


Michael Laudrup
외래어 표기법을 따르면 미카엘 라우드루프

덴마크축구선수. 전 EPL 스완지 시티 감독.
1964년 6월 15일생.
클럽통산 478경기 199골. A매치 104경기 37골.

1 소개

알란 시몬센과 함께 덴마크를 대표하는 축구선수이자, 명실상부한 1990년대의 레전드.[1]

라우드럽이 한창 활약할 무렵엔 국내에서 유럽축구 열기가 낮았기 때문에 지명도가 떨어지지만, 세계적으로 1990년대 초중반 유럽을 대표하는 미드필더로 꼽힌다. 사실 우리나라만 몰랐지, 세상은 이미 라우드럽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2]

놀라운 패싱력과 볼 컨트롤 능력을 지녔던 미드필더 183cm의 장신에다, 사진만 봐도 알겠지만 골격도 단단하다.

이처럼 세계를 호령한 불세출의 축구선수였지만, 활약 시기가 대한민국이 해외축구에 관심이 있던 시기 이전이므로[3] 대한민국 내에서는 아는 사람들만 아는 선수였는데, 스완지 시티의 감독으로 부임한 이후 기성용을 영입하면서 새삼스레 관심을 끌어모으고 있다. 언론도 "미카엘 라우드럽의 반만 배워도 기성용 성공한다능!"이라면서 설레발을 치고 보통 사람들도 라우드럽의 플레이 영상을 본 뒤 그런 반응을 보이는데, 사실, 틀린 말도 아니다.

우승경력 : 아약스, 바르셀로나 4연패, 레알 마드리드, 유벤투스. 크루이프의 드림팀 멤버로 바르셀로나에서 4개의 라리가 타이틀을 포함한 9개의 트로피를 수집했다. 레알 마드리드 시절까지 합하면 라리가 5연패.

  • 1999년 프리메라리가 지난 25년간 최고의 외국인 선수 선정.
  • 2003년 UEFA 50주년 유럽 최고의 축구선수 50인 선정.
  • 2004년 FIFA 100주년 최고의 축구선수 100인 선정.
  • FC 바르셀로나 서포터 선정 클럽 역대 최고의 용병.
  • 2013년 마르카선정 레알마드리드 역대 외국인 베스트 11.

다들 어마어마한 기록이다. 주목해야봐야 할 점은 스페인 라 리가의 양대 강호, 서로를 끔찍히 싫어하는 두 팀의 어엿한 레전드로 꼽히는 것. 라우드럽의 위엄이라면 위엄일지도. 사실 레알 마드리드에서의 그의 업적은 레전드라고 말하기엔 부족하지만, 라이벌 FC 바르셀로나의 레전드가 복수하겠답시고 덥썩 찾아와주었으니 얼마나 통쾌할지...

2 선수생활

2.1 선수초기~FC 바르셀로나 시절

유소년 팀에서 축구를 시작한 라우드럽은 17세 때 코펜하겐 FC(Kjøbenhavns Boldklub)에서 프로 데뷔를 한다. 1983년 재능을 인정받아 유벤투스로 이적한다. 물론, 아무리 뛰어나도 스무살 풋내기를 중용할 만큼 유벤투스의 멤버가 녹록하지 않은지라, 임대 형식으로 SS 라치오에서 2년 동안 활약하다가 유벤투스로 복귀했다. 85/86시즌 유벤투스에서 세리에 A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지만, 아직 본인의 전성기라고 할 만한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85/86시즌 월드사커가 선정한 Top 10위 중에 6위였다. 1위는 당연히 끝판왕 디에고 마라도나였다.

그러나 1988년 요한 크루이프프리메라리가 FC 바르셀로나에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이야기가 바뀐다. 언제나 그렇듯이, 타도 레알 마드리드에 불타는(...) 바르셀로나와 요한 크루이프는 당대 최고의 선수를 끌어모으는데, 라우드럽은 1989년 바르셀로나로 이적한다. 안도니 수비사레타, 로날드 쿠만[4], 펩 과르디올라[5], 호세 마리아 바케로,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훗날 호마리우게오르게 하지까지... 그야말로 드림팀이 탄생했다. 이후 90/91시즌을 시작으로 바르셀로나는 4년 연속으로 프리메라리가에서 우승을 차지한다. 또한 1992년 팀의 오랜 숙원이던 UEFA 챔피언스리그마저 제패함으로 절정에 이른다. 이 와중에 라우드럽은 2년 연속(92,93)프리메라리가 MVP까지 차지했으니, 그 포스가 어느 정도였을지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하지만 화무십일홍이라, 1994년 마침내 드림팀 붕괴를 알리는 서막이 오른다. 그것도 아주 비참하게. 1994년 5월 18일 챔피언스리그 결승. 상대는 오렌지 삼총사를 앞세워 세리에 A를 호령했고 마르셀 드사이가 자신을 디스하던 요한 크루이프역관광 태울 준비를 한 AC 밀란이었다. 결과는 4:0으로 캐관광을 당했다.

사실 결승전 당시 AC 밀란의 멤버는 전성기 세계를 지배했던 '밀란 제네레이션'의 풀스쿼드와 비교하면 1.5군정도의 네임벨류였다. 밀란 제네레이션의 대표적인 멤버인 오렌지총사프랑코 바레시, 알레산드로 코스타쿠르타 등 주요 멤버들이[6] 타팀으로 이적하거나 부상이나 경고누적/4강전 퇴장 등의 사유 때문에 경기를 뛰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또한 AC 밀란의 다소 안전제일주의적인 경기스타일[7] 등으로 인해 AC 밀란을 얕잡아보고 있었던 요한 크루이프[8]는 "축구가 뭔지 한 수 가르쳐주겠다."며 결승전에 임했지만 결과는 평소와 달리 공격적인 맞불작전으로 나온 AC 밀란에게 그야말로 영혼까지 털리는 바르셀로나의 비참한 참패였다.

비록 AC 밀란이 최상의 전력은 아니었다고해도 당시 스쿼드는 상당히 두터웠다. 주전급이었던 파올로 말디니, 데메트리오 알베르티니, 즈보니미르 보반, 로베르토 도나도니, 마우로 타소티 등 외에도 인지도가 낮았거나 백업멤버에 가까웠던 마싸로, 드사이, 사비세비치, 필리포 갈리등도 오렌지 삼총사나 바레시/코스타쿠르타의 공백을 완벽히 메꾸며 바르셀로나 격파에 일조했다. 실제로 네 골이 전부 이들에 의해서 나왔다. 마싸로 2골, 사비세비치 1골, 드사이 1골.

이 때의 라우드럽으로 말하자면, 당시 프리메라리가의 외국인 선수의 출전 시간제한 때문에 엔트리에서 제외되게 되었고, 이 때문에 요한 크루이프와의 마찰이 심했다. 호마리우, 스토이치코프, 쿠만에게 밀린 것인데 크루이프는 성격상 아예 대놓고 라우드럽을 천대했고, 둘의 갈등은 봉합되기 어려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특히 이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라우드럽은 경기장까지 찾아와서 벤치는 커녕 관중석에서 지켜보게 되는데 이로 인해 불편한 팀 분위기는 패배의 원인 중 하나기도 했다.

어쨌든, 이날 충격적인 참패로 인해 바르셀로나는 팀 개편에 착수하고, 드림팀을 이끌던 30대 주역들이 여름 이적 시장에 대거 흘러나왔다. 라우드럽 또한 마찬가지였는데, 복수의 칼날을 갈던 라우드럽은 오직 바르셀로나를 깨부수기 위해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다! 충공깽.

2.2 레알 마드리드 시절~은퇴

당연히 바르셀로나 팬들은 뒷목을 잡았고, 살기등등한 비난을 쏟아냈다. 레알 마드리드가 누 캄프 원정을 왔을 땐 10만 가까운 관중의 열화와 같은 야유(...)속에 사방을 'Laudrup Judas(라우드럽은 유다같은 배신자)' 플랜카드로 도배했다.[9] 하지만 두번째 시련이 꾸레들을 기다리고 있었으니

이적한 첫 해 레알 마드리드가 프리메라리가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라우드럽은 무려 5년 연속으로 우승을 맛봤다. 하지만 극심한 스트레스 때문인지, 2시즌 만에 스페인 생활을 접고 당시 막 프로리그를 만들어서 어마어마하게 돈을 쏟아붓던 J리그 빗셀 고베로 이적한다. 유럽에서도 신기해하는 '사건'이었고 '축구로 지구를 한바퀴 돈 사람'이라는 수식어도 쓰이곤 했다. 그리고 1년 뒤[10] 아약스로 이적해서 1시즌을 더 활약하고, 화려했던 선수 생활을 마감한다. 동생 브라이언 라우드럽도 그렇고 미카엘도 그렇고 한 클럽에서 오래 머물지 않고 옮겨다니며 커리어를 쌓았다.역마살 형제

2.3 국가대표 경력

오늘날 덴마크는 FIFA 랭킹도 상위권이고 유럽의 강팀이란 이미지가 있지만, 사실 80년대 이전에는 듣보잡 취급을 받았다. 1990년대 세계 최고의 골키퍼 피터 슈마이켈과 미카엘 라우드럽, 그리고 동생 브라이언 라우드럽이 뛰던 시기에 유럽축구의 강자로 자리매김했다.

라우드럽은 18살 생일인 1982년에 덴마크 국가대표에 데뷔를 하게 되고 104게임 37골을 넣는다.

미카엘 라우드럽은 센츄리 클럽 가입자답게 대표팀 경력도 풍부했다. 유로 1984와 유로 1988에 출전했으나, 정작 덴마크가 우승을 차지하면서 센세이션을 일으킨 유로 1992에는 불참했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 처음 출전한 덴마크는 조 1위로 16강에 진출하는 쾌거를 달성했는데, 조예선 우루과이를 상대로 6:1 대승을 거두기도 했다. 이 경기에서 라우드럽이 보여준 현란한 드리블에 이은 득점 장면은 라우드럽 최고의 플레이를 언급할 때 항상 빠지지 않는 명장면이다.

이후 월드컵에서는 덴마크가 연달아 지역예선에서 탈락했고, 결국 34세로 선수생활도 막바지에 이른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 덴마크가 진출한다. 1승 1무 1패로 프랑스에 이어 조 2위로 16강전에 진출, 내친김에 나이지리아마저 4:1로 압도하고 8강에 진출...했는데 하필 상대가 브라질. 결국, 접전 끝에 3:2로 브라질에게 석패했고 이 시합이 라우드럽의 대표팀 은퇴 경기가 되었다. 그래도 이 성적은 현재에도 덴마크 축구 국가대표팀의 최대의 월드컵 성적이다. 이 경기는 그의 동생 브라이언이 2-2 동점골을 넣고 보여줬던 모델 세리머니로도 유명하다. 1998년 월드컵을 끝으로 현역 은퇴하게 된다.

3 플레이 스타일

팬텀 드리블(라 크로케타)의 교본으로 불릴 정도의 대단한 볼 컨트롤로 여러가지 기술들을 소화해 냈던 선수가 미카엘 라우드럽이다.[11]

스타일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테크니션의 교본이다. 경기 흐름을 읽는 눈과 정확한 패스, 뛰어난 축구 센스까지 그야말로 흠잡을 곳이 없었다. 척 봐도 바이킹의 후예다운 용모인데, 공을 차는 모습은 위장전입 남미혈통이 아닐까 의심스러운(...) 창조적인 플레이를 했다. 과거 그가 활약하는 모습, 특히 패스 플레이는 지금도 스페셜 영상을 다시 돌려봐도 "우왕ㅋ굳ㅋ 개쩌네요?" 한마디 밖에 안 나온다.

게다가, 무슨 농구선수마냥 노룩패스를 눈이 돌아갈 정도로 잘했다. 수비수는 말할 것도 없고, 동료조차 빈 공간 찾아들어가다가 갑자기 자기 발밑에 볼이 나타나서 식겁할 정도(...). 게다가 PK도 준수하게 잘 찼다. 요약하자면, 마라도나의 킬패스 능력에 가장 근접했던 선수. 사람이 아니무니다.

라울 곤살레스는 어느 인터뷰에서 "내가 함께 뛰어 본 선수 가운데 최고다."라고 밝힌 바가 있으며, 프란츠 베켄바워는 "60년대 최고 선수는 펠레, 70년대는 요한 크루이프, 80년대는 디에고 마라도나, 90년대는 미카엘 라우드럽이다."하고 평가했다. 또한 브라질의 레전드 축구선수였던 호마리우도, "라우드럽은 내가 인정하는 4명의 선수 중 1명이다."라며 그의 진가를 이야기한 적이 있다.

4 지도자 경력

대표팀과 프로팀 은퇴 이후 지도자의 길을 택했다. 2002년 한일월드컵은 덴마크 코칭스탭으로 참가했으며, 2002년부터 2007년까지 덴마크의 브뢴드비 IF(Brøndby IF) 팀 감독을 맡았다.
2005년 브뢴드비를 덴마크 슈퍼리그 챔피언으로 올려놓았다. 2006년 소속팀과 계약연장을 하지 않고 2007년 프리메라리가 헤타페의 감독을 맡아 코파델레이, 유에파컵에서 돌풍을 일으켰으며, 한때 아브라함 그랜트 감독 경질 이후 후임으로 첼시로 간다는 루머가 돌기도 했었다.

2008년 9월 러시아 스파르타크 모스크바 감독에 취임했으나, 성적부진을 이유로 7개월 만에 경질되었다.

2010-11 시즌부터 프리메라리가레알 마요르카 감독으로 부임, 누가 바르셀로나의 레전드 아니랄까봐 마요르카 가지고 바르셀로나 공략본을 만들어내고 있다. 바르셀로나 아는 만큼 보인다!

2012-13 시즌부터 EPL의 남부 웨일즈에 위치한 스완지 시티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리고 데뷔전에서 박지성이 주장으로 나선 QPR을 5:0으로 압살하며 화려하게 첫 경기를 장식했다.[12] 그 이후엔 리버풀로 이적한 조 알렌의 대체자로 기성용을 영입하면서 한국에서의 인지도는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급격히 높아질 전망이다. 제 2의 알렉스 퍼거슨이냐? 제 2의 아르센 벵거냐? 결국 덴마크 최강희가 되었다

브랜든 로저스 감독 이후 스완지 시티를 잘 이끌며 26라운드 팀 순위 8위를 달리고 있으며, 팀 창단후 처음으로 컵대회 결승까지 팀을 올려놓는 등 여러모로 선전하고 있다.

과거 선수 때부터 감독 시절까지 많은 시간을 스페인에서 보낸터라, 스페인식 패싱축구를 프리미어리그에 잘 접목시키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개인적으로 자신에게 영향을 가장 많이 끼친 인물로 요한 크루이프를 꼽는 등, 패싱축구와 점유율 축구에 대한 철학을 확고하게 스완지 팀 컬러로 자리잡아 가는 중이다.

2013년 2월 25일 풋볼 리그 컵 결승에서 풋볼 리그 2 소속 브래드포드 시티를 압도하며 우승, 감독 커리어 사상 최초 우승이자 선수와 감독으로 모두 웸블리 경기장에서 우승[13]을 차지하는 진기록의 주인공이 되었다.

Bradford-City-v-Swansea-C-008.jpg

이처럼 스완지 시티에서 성공적인 감독 커리어를 이어가면서 차후 거취에 관해 많은 카더라가 나도는 가운데, 3월 9일 감독 계약을 1년 더 연장했다. 이로서 2015년 6월까지 스완지 시티를 맡게 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기성용의 태도에 대한 불만으로 둘 사이의 불화설이 대두되고, 기성용이 결국 선덜랜드로 임대를 가게 된다. 그리고 기성용이 선덜랜드에서 좋은 활약을 보이고 스완지서 기성용 자리를 차지한 선수들이 부진하자 기빠들은 열심히 라우드럽을 조롱하며 강등당하라 저주하는 등 한국 인터넷에서 별로 안 좋은 대접을 받는 중이다. 다음 시즌에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은 생각치 않는다. 결국, 성적부진으로 2월 4일 경질되어 감독직은 한방에 훅 갈수 있다는 것을 인증했다(...). 그리고 기레기들은 기성용때문에 경질이라고 대대적 보도.. 병맛이다 더 병맛인 건 네티즌들은 이걸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14]허나, 성적부진은 구실이었을뿐 실상은 선수단의 급작스러운 대격변으로 인해 기존 선수와 영입파의 내분이 발생했고 이때문에 라우드럽이 팀 장악에 실패해 구단주에게 신임을 잃었기 때문에 짤린 것이다. 기성용은 그 사이에 있었던 것일 뿐, 기성용 한 명 때문에 경질되었다보는 건 무리이다. 스완지 시티의 2013~14시즌 항목 참조.

2014년 6월 30일 카타르 스타즈 리그 레크위야 SC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공교롭게도 남태희 선수의 소속팀이기도 하다.

2015년 2월 하비에르 아기레 감독을 해임한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그에게 감독 제의를 했으나, 레크위야에 집중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 일본의 제의를 거절했다.[15] 그리고 2015년 6월, 재계약에 실패하며 레크위야 감독직을 끝낸다. 당시 팀 성적이 리그 우승 확정에 아챔 8강까지 갔다는 것을 생각하면 성적 부진으로 인한 해임은 아닌 듯

5 기타

동생 브라이언 라우드럽도 덴마크의 레전드급 축구선수였다. 형의 명성에 가려져서 세계구급으로 평가받지는 못했지만, 이쪽도 어쨌든 바이에른 뮌헨, 레인저스 등을 거치면서 훌륭한 커리어를 보냈다. 다만 피파3 인게임 성능은 동생쪽이 나은지라 피충들이 종종 미카엘보다 브라이언이 더 훌륭했다고 주장한다

스완지 시티에서 라우드럽의 지도하에 뛰고 있었던 기성용 인터뷰에 따르면, 과묵한 성격인지 기성용 본인에게도 그렇고 선수단에게도 별 말이 없다고 한다. 그래도 워낙 감독 자체가 선수시절 월드 클래스급 레전드였기 때문에, 선수단 내에서도 감히 감독에게 함부로 개기려는 선수들이 없다는 모양이다.

여담이지만, 라우드럽은 게으른 천재였다. 요한 크루이프가 라우드럽을 직접 지도하던 FC 바르셀로나 감독 시절, "너님은 항상 80~90%의 노력밖에 안 함. 니가 빈민가에 태어나서 오직 축구 하나만 보고 살 수 있었다면, 그래서 절실함에 재능을 100% 발휘한다면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을 거임! 예끼! 니미!"라고 열심히 안 하고 게으르다고 항상 갈궜다고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요한 크루이프는 운동선수 주제에 연습을 죽도록 싫어하고 하프타임이 되면 담배를 피워대는 골초였다. 결국 요한 크루이프의 커리어를 보면 게으른 천재끝판왕이나 다름없었다(...). 개구리 올챙이 시절 모른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미카엘 라우드럽은 은퇴를 하고 스완지 시티의 감독이 되면서 선수들에게 "몸과 마음을 바쳐서 축구에 헌신하라!" 라면서 선수들에게 게으름 피우지 말라고 갈구고 있는 중이다(...). 근데 저렇게 게으르긴 했어도 결국 한 시대를 씹어먹은 사람이라 게을렀던 본인의 현역시절보다 절반도 못하는 선수들을 보면 화가 날 만도 하다...

6 경력

6.1 선수 시절

  • 레알 마드리드 CF (1994/95 - 1995/96)
    • 라 리가 (1) : 1994/95
  • 덴마크 축구 국가대표팀
    • 1995 FIFA 컨페더레이션스 컵 우승

6.2 감독 시절

  • 브뢴뷔 IF (2002/03 - 2005/06)
    • 덴마크 슈퍼리가 (1) : 2004/05
    • 덴마크 컵 (2) : 2002/03, 2004/05
    • 덴마크 슈퍼 컵 (1) : 2002
  • 레크위야 SC (2014/15)
    • 카타르 스타즈 리그 (1) : 2014/15
    • 카타르 국왕 컵 (1) : 2014/15
  1. 우연하게 시몬센이 먼저 1979년에 바르샤에 이적해서 3시즌동안 활약했다.
  2. 한국에서도 해외축구에 관심이 있는 덕후나 위닝 등 축구게임을 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알 수 밖에 없는 레전드다.
  3. 물론 상대적으로 그렇단 얘기다. 한국에서 유럽축구, 정확히는 EPL을 주말마다 볼 수 있게 된 것이 박지성의 맨유 진출 이후부터이긴 하나 접근성의 문제이지 당연히 한국에도 유럽축구빠는 당시에도 얼마든지 있었다. 다만 박지성 이후 더욱 널리 보급되었을 뿐. 예나 지금이나 중고딩 남자들이 축구에 하악하악대는건 마찬가지다.
  4. 이해하기 힘든 괴상한 팀운영으로 발렌시아 C.F. 팬들로 하여금 분노와 스트레스로 뒷목을 잡게 만들었던 그 쿠만이 맞다. 하지만, 선수시절에는 레전드급 선수였다.
  5. 90년대 최고의 앵커맨(또는 그 중의 한 명)으로 꼽혔던 레전드. 2008년 FC 바르셀로나 감독을 맡아 08/09시즌의 6관왕을 비롯 굉장한 커리어를 쌓아올리고 있는 그 사람이 맞다.
  6. 바레시-코스타쿠르타는 당시 AC밀란의 주전 센터백이다.
  7. 전임감독인 아리고 사키과는 다른게 당시 AC밀란 감독 파비오 카펠로의 성향 때문이었다.
  8. 사실 그도 그럴것이...해당시즌 AC밀란은 감독인 파비오 카펠로의 극단적인 수비전술 탓에 리그 34경기 19승 12무 3패 36득점 15실점이라는 극단적인 변태 짠물축구를 펼친 바가 있다. 당시 밀란의 스쿼드가 그렇게 꽉 잠궈야만 성적을 낼 수 있는 스쿼드는 결코 아니었음에도. (오렌지 삼총사의 해체가 있었다고 해도 충분히 공격적인 재능을 지닌 선수들이 더러 있었던 스쿼드였다.) 물론 어쨌든간에 프로무대에서 방심으로 인해 대참패 한것은 크루이프의 삽질이 맞기는 하다만...
  9. 사실 2만명의 꾸레들의 서명에도 불구하고 미카엘이 바르샤를 버리고 레알로 떠난 것은 더 이상의 신뢰가 없는 크루이프의 불화와 적은 출장 기회 등이 얽혀 나온 결과물이다. 어느 정도의 보복성 이적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결과적으로 라우드럽은 꾸레들의 뜨거운(...) 반응에 그 곳으로 도망가듯 떠나게 되지만...
  10. 여름에 이적했기 때문에 뛴 기간은 정확히 1년이지만, 햇수로는 2년간 일본에서 활약한 셈이다.
  11. 실제로, 팬텀 드리블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미카엘 라우드럽 이후였다.
  12. 그러나 아직 브렌던 로저스 前 감독의 영향이 많이 남아있다는 평도 많다. 스완지 시티를 성공으로 이끈 스완지 팬들 입장에선 배신자 로저스 감독의 티키타카 전술이 아직 스쿼드에 그대로 녹아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스완지의 팀 스타일은 로저스 혼자서 만든 것이 아니며 여러 감독을 이어 스타일이 유지되고 있는지라 로저스의 스타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13. 바르셀로나 시절 91-92 UEFA 챔피언스 리그의 결승전이 웸블리에서 열렸다.
  14. 알싸나 싸줄 둥 대부분의 축구 팬기성용 팬들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라우드럽은 사랑입니다, 라우드Love라고 하며 그를 찬양했으나 시즌이 바뀌자마자 순식간에 지 맘대로 기성용 내치더니 잘 됐다며 그를 조롱하는 중. 그러나 아무리 감독이라도 사람은 사람이라 자신과 불화가 있는 인물마저 그저 실력 하나만으로 계속 쓰는 건 무리다. 알렉스 퍼거슨베컴루드 반 니스텔루이를 그 클래스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과감히 보내버린 것을 생각해 보자
  15. 공교롭게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이 레알 마드리드의 레전드 울리 슈틸리케였기 때문에, FC 바르셀로나에서 황금기를 보낸 미카엘 라우드럽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의 제의를 받아들였다면, 그야말로 한일전의 라이벌 구도와 똑같은 엘 클라시코였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