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1세

(사자심왕에서 넘어옴)

Richard The Great

역대 잉글랜드 국왕
플랜태저넷 왕조플랜태저넷 왕조플랜태저넷 왕조
헨리 2세
(Henry II)
리처드 1세
(Richard I)

(John)
이름리처드 1세
(Richard I of England)
별명사자심왕 리처드
(Richard the Lionheart)
부왕잉글랜드의 헨리 2세
모후아키텐의 엘레오노르
생몰년1157년 9월 8일 ~ 1199년 4월 6일(41세)
재위기간1189년 7월 6일 ~ 1199년 4월 6일(10년)
대관식1189년 9월 3일
He was a bad son, a bad husband, a bad king, but a gallant and splendid soldier.

"훌륭한 아들도 아니었고, 훌륭한 남편도 아니었고, 훌륭한 왕도 아니었으나, 용감하고 빛나는 군인이었다."


스티브 런치만 경(Sir Steven Runciman), 영국의 역사학자

영국(잉글랜드)의 이자 노르망디 공작, 아키텐 공작,[1] 가스코뉴 공작, 푸아티에 백작, 앙주 백작, 멘 백작, 낭트 백작, 아일랜드의 영주.

잉글랜드 역사상 가장 뛰어난 용장이자 암군.[2] 그리고 영국 역사상 최강의 인간흉기.

그가 나섰다 하면 불리하던 전투도 뒤집혀버리는 등 초인적인 무용담을 자랑하는 인물이다. 무용담만 따진다면 항우와 비견될 정도인데, 그 때문에 사자심왕 리처드(The Lionheart)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한 인물. 사자심왕을 줄여서 사심왕(獅心王)으로 적기도 한다. 그런데 한국에는 '사자왕 리처드'라고 알려져 있다. 왠지 사자심왕이나 사심왕이라고 하면 좀 어색해서 그런 걸지도...[3]

좀더 그럴싸하게 부를려면 "사자의 심장을 가진" 리처드 1세라고 하는게 나을 것이다. 아니면 어느 게임의 네이밍 센스를 따라해 (사자) 심장의 리처드

1 생애

1157년 9월 8일생. 영국 플랜태저넷 왕가 헨리 2세의 3남이자 후대 왕인 존 왕의 형이다.

위의 형으로 헨리와 기욤 9세가 있었는데 이 둘이 전사하면서 후계자가 되었다. 그런데 둘과의 관계가 막장이다.(…) 어머니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프랑스의 필리프 2세와 손을 잡고 아버지를 협박해 왕위를 얻었는데[4][5] 나중에 가서는 이슬람 털러 나가 있는 동안 동생이 반란을 일으켜 다시 돌아와야 했다.

옥스퍼드에서 출생하였고 프랑스 아키텐 리무쟁 샬뤼에서 죽었다. 잉글랜드의 왕이지만, 10년의 재위 동안 실제 잉글랜드에 있었던 건 6개월 정도라고 한다. 또 그 당시 귀족들이 그랬듯이 영어[6]는 한마디도 할 줄 몰랐다.

11살이 되던 해인 1168년에 어머니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로부터 영지를 물려받아 아키텐 공작이 되었으며 1172년에는 푸아티에 공작이 되었다. 1183년에 리처드가 통치하던 가스코뉴의 주민들이 그의 가혹한 통치방식에 반기를 들고 반란을 일으켰고 이에 사이가 좋지 않던 리처드의 형 헨리와 동생 제프리가 반란군에 가세했다. 그러나 6월 11일 헨리가 급사한 후 반란군이 와해되었고 리처드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반란군을 격파, 확실한 왕위계승자로 인정받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런 모습에도 헨리 2세는 "내가 왕위를 물려줄테니 대신 네가 통치하는 아키텐을 네 동생 에게 물려줘라"라고 명령했는데 이 의견에 반발하기도 했다. 이후 아버지 헨리 2세와 표면적으로 화해하긴 했지만 1188년, 헨리 2세와 필리프 2세와의 싸움에 필리프 편에 가세하며 아버지의 뒤통수를 치기도 했다. 1년 후인 1189년에 헨리 2세가 병사하자 그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의 국왕이 되었다.

1.1 십자군 전쟁

1189년 국왕에 오른 리처드 1세는 난데없이 헨리 2세에 맞서 자신의 편을 든 사람들을 비열한 아첨꾼이 기생충같은 인간들이라고 모조리 처벌함으로써 토사구팽해버리는 등 대대적인 숙청을 가하고 잉글랜드 왕국의 보물을 모두 차지했다. 그의 대관식날에 왕이 유대인을 죽이라는 명령이 내려졌다는 헛소문이 퍼져 대대적인 유대인 학살이 벌어지기도 했다. 대량 살육이 벌어졌건만 리처드는 폭도들 중에 오로지 3명만 처형했는데 그나마도 살인죄가 아니라 기독교도 집에 불을 지른 방화죄였다. 이후 그는 십자군 원정에 가고 싶어 안달내게 되었다.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왕가의 땅을 팔고 매관매직을 일삼았다. 능력없는 귀족들이 돈으로 관직을 사서 학정을 펼쳤고 돈을 받고 사면권도 팔았다. 리처드가 뛰어난 지휘관일지는 몰라도 암군인 이유가 여기서 드러난다.

어쨌거나 그는 제3차 십자군 원정에서 대활약하였고, 용맹무쌍하기로 유명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살라흐 앗 딘을 전투에서 이긴 것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전략 전술에 무지하고 닥돌만 해대는 당대 유럽기사들과는 달리 보급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국가 내정을 말아먹으면서까지 상당한 자금과 물자를 준비해두고 출정했고, 출정 후에도 예루살렘으로 직행하기보다는 보급로를 단단히 다지면서 예루살렘으로 접근해 가는 등 신중한 면도 보였다. 그런데 살라흐 앗 딘을 수 차례나 무찌르는 눈부신 활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각 국의 정치적 이해 관계 때문에 이탈이 속출한데다 초반에 "10만 대군"이라 자칭하던 신성 로마 제국의 대군[7]황제의 급사로 와해되어버리는 악재도 있었다. 결국 최종 목표인 예루살렘 탈환에는 실패한다. 안습. 그래도 살라흐 앗 딘의 공격으로부터 일부 지방은 지켜내고 해안의 여러 도시를 수복하는 전과를 올릴 수는 있었다.

이런 군사적인 성과 때문에, 신성 로마 제국군이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급사로 이탈하지 않고 프랑스 왕 필리프 2세가 빠져나가지 않았다면 3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재탈환할 가능성이 높았다고 보는 견해도 많다. 그러나 살라딘도 지친 군세를 정비하고 시리아를 비롯한 각지에서 원군이 도착하고 있던 상황이고 게다가 십자군에 대한 아랍의 적개심도 대단했으며 전투에서 아랍인들이 필사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어서 속단하기는 어렵다. 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리처드 지휘하의 십자군은 이슬람 군대에 대해 심각할 정도의 교환비를 보일 뿐만 아니라 2차 십자군을 괴멸시킨 주 전법인 유인전술이나 기만 전술이 거의 통하지 않아 살라딘의 고민이 컸고, 심지어 예루살렘으로 진군해오는 리처드를 막기에는 병력이 집결하는 시간이 부족했을 정도로 그의 십자군이 매우 위협적이고 강력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결국 리처드 역시 프랑스군의 영국령 침공이나 존의 반란을 알면서도 무리하게 예루살렘으로 진격중이었고, 그러다가 영국의 상황이 점점 위험해지니 더이상 전쟁을 끌고 갈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결국 협상으로 마무리하는 게 양측으로서는 윈윈이었던 셈.

1.2 존 왕의 배신, 그리고 사망

프랑스의 존엄왕 필리프 2세와는 프랑스에 있었을 때 친했기에 한 때 동맹을 맺기도 했지만,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정치적 문제로 인해 대립한 적이 더 많다. 리처드가 즉위할 땐 프랑스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십자군 전쟁 중엔 필리프 2세가 동생인 을 사주해 형에게 반란을 일으키게 만드는 통에 살라흐 앗 딘과 결국 결판을 내지 못하고 귀환하게 된다. 그러나 귀환하던 도중에 오스트리아에서 전에 자신이 모욕[8]했던 레오폴트 5세 공작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는 수모를 겪었다. 그런데 그 '사자심왕' 리처드 1세를 어떻게 사로잡았는지 궁금하다. 그는 신성로마제국의 법정에 기소되었지만 스스로를 열렬히 변호하여 법정을 감동[9](...)시켰다. 오오 리처드 오오 이에 신성로마제국은 리처드에게 국왕에 걸맞는 예우를 할 것을 판결했고 몸값을 내면 석방될 수 있다고 판결했다. 이에 리처드 1세의 모후인 엘레오노르가 잉글랜드에서 모금된 돈을 가지고 하인리히 6세 황제에 주어 리처드는 석방되었다. 리처드 1세가 풀려났다는 소식을 들은 필리프 2세는 존에게 한통의 편지를 보낸다. 그 편지의 주요 내용을 한줄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사탄이 돌아왔소"

이 편지를 받은 존은 기겁해서 자신이 머물던 에브뢰 요새의 프랑스 수비병들을 속여 학살한 다음에 형에게 에브뢰 요새를 바치면서 목숨을 구걸했다.[10] 어머니인 엘레오노르까지 달래자 리처드 1세는 동생의 배신을 용서해주었다. 동생을 용서하고 영국으로 귀환한 리처드는 자신이 임명한 섭정인 윌리엄 롱챔프가 다른 섭정들을 무력화시키고 학정을 펼친 것을 알고 쫓아냈다.

왕에게 쫒겨난 윌리엄 롱챔프는 프랑스로 달아나 필리프 2세와 짝짝꿍하며 놀아났는데 이걸 보고 분노한 리처드 1세는 "미친 개는 몽둥이가 약아니냐?"라며 윈체스터에서 새로이 대관식을 올린 다음에 프랑스를 쳐버릴 준비를 했다. 그런데 때마침 런던에서 윌리엄 피츠오스버트의 폭동이 일어나고, 이어 비도마르라는 리모주 자작과의 갈등이 불거지게 되며 프랑스 출정은 연기되었다.

한 농부가 리모주 자작의 영지에서 묻혀 있던 황금을 발견했는데, 자작은 이것을 리처드에게 넘겨주기를 거부했다. 그러자 리처드 왕은 리모주 성을 공격한다. 1199년 3월 25일 초저녁 리처드는 갑옷을 입지 않고 성벽 가까이 거닐며 상황을 살피다가 성에서 날아온 화살에 왼쪽 어깨의 목 가까운 부위를 맞았다. 아픈 어깨를 감싸고 막사로 돌아온 리차드는 나무 화살을 부러뜨렸다. 그러나 화살촉은 이미 그의 어깨에 깊숙히 박힌 상태였다. 군의사는 왕의 피부를 칼로 가르고 상처를 벌린 뒤 쇠붙이를 꺼내었다. 그렇지만 상처가 심하게 곪아들어가 리처드는 1199년 4월 6일 세상을 떠났다.[11]

어찌 됐건 리처드의 병사들은 리모주 성을 점령하는데 성공하고 모든 수비병들을 교수형에 처했는데, 수비병 중 왕을 쏜 소년병 구르동(Gourdon)이 리처드 1세 앞에 끌려가게 되었다. 리처드가 구르동을 보고 "내가 네게 무슨 짓을 했기에 나를 죽이려 하였느냐?"라고 하자 이에 구르동이 지지 않고 마주 소리쳤다. "당신이 내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나 묻는 겁니까? 당신이 내 아버지와 형제 둘을 죽였습니다. 이제 내 목도 매달겠죠. 그것도 실컷 고문한 다음에 말입니다. 뜻대로 하시오! 하지만 나를 아무리 고문해도 당신도 죽을 거요. 내 손으로 당신의 목숨을 끝장낸 것이오!"

리처드는 소년의 당돌한 모습에 "젊은이, 자네를 용서하노라. 몸 성히 가거라."라며 구르동의 족쇄를 풀고 100실링을 하사할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4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12] 영웅의 죽음치고는 너무나 허무한 죽음이었다.

"나는 내 야심을 템플 기사단에게, 내 탐욕을 수도자들에게, 그리고 내 쾌락을 고위 성직자에게 맡긴다."

리처드 1세의 유언.

사망 후에 그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분리되어 각기 다른 곳에 묻혔다.[13]

2 제3차 십자군 전쟁 : 초인적인 무용담

영국 국회의사당 앞에 세워진 리처드의 기마상

별명인 사자심왕이 말해주듯, 전장에서의 활약은 그야말로 먼치킨이자 두말할 필요 없는 인간흉기. 천재적인 전략가였던 살라딘을 십여 년간 괴롭혔고, 몇몇 전투에서는 승리를 거둘 만큼 전략적인 안목 또한 훌륭했지만, 전술가로서의 능력이 뛰어난 정도였다면 무인으로서의 능력은 진정 초인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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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전선에 나서서 자신의 부하들보다 맹렬하게 칼을 휘둘러댔는데, 살라딘의 병사들이 튼튼하게 만들어 놓은 전열이 리처드가 나타나기만 하면 무너졌다. 수만 명이 얽혀 힘싸움을 하는 전장에서 일신의 힘으로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었던 희대의 용장. 그 활약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위에서 지켜보고 있던 살라딘이 전열이 마구 무너지는 것을 보며 어이가 없어서 저 자가 바로 사탄 아니냐?라는 슬픈 농담을 던졌다고 한다.

이런 생각은 리처드 1세의 적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생각일 수도 있다. 동생 존의 반란을 지원하던 프랑스 왕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가 신성로마제국에서 풀려났다는 말을 듣고 존에게 "악마가 돌아왔으니, 네 목숨은 네가 챙기기 바람."이란 편지를 보내놓고 재빠르게 존을 버리고 자기 살 궁리만 하기 시작했다.

야파 전투당시 리처드가 을 타고 전투를 치르다 말이 죽어버리자, 그냥 칼 한 자루 쥐고 우랴! 하면서 병사들을 때려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광경을 보게 된 살라딘은 "리처드 같이 위대한 왕이 병사들과 어깨를 맞대고 싸운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면서(…)[14] 부하를 시켜 그에게 가장 좋은 말을 가져다 주라고 했다. 리처드는 그 말을 받고 감사를 표하고는, 말을 탄 뒤 방금 전 감사를 표한 살라딘의 병사들을 썰기 시작했다. 둘은 실제로 얼굴을 마주대고 만난 적은 없고 사신이나 편지로 교류했다. 둘은 서로를 상대방 진영에서 가장 훌륭한 인물이라고 칭찬했다. 리처드가 돌아올 땐 예루살렘을 탈환하겠다고 하자 살라딘은 "기왕 뺏길 거면 당신같은 훌륭한 사람에게 뺏기는 게 낫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2.1 아크레 해전과 아크레 공성전(Siege of Acre)

1191년 6월,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가 아크레를 포위하고 성을 탈환하기 위해 공격을 늦추지 않고 있는 가운데 키프로스에서 군을 정비한 후 아크레로 향하던 리처드 1세는 도중에 갤리선을 마주하게 되었다. 왕은 피터 데 바레스라라는 선원을 불러 저 배의 정체를 알아오라 일렀고, 잠시후 자신들이 프랑스 왕의 배라고 밝혀왔다.

유유히 지나던 그 배는 리처드가 탄 함선 옆을 지나다가 갑자기 활과 다트를 쏴대며 공격을 해왔다. 리처드 왕은 반격을 지시했고 양측은 바다 위에서 활을 주고받는 교전을 펼쳤다. 그러던중 왕은 대뜸 휴식을 취하겠다며 양손의 무기를 내려놓고 앉아버렸다(...). 지휘관들이 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을 때 리처드 1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래! 제군은 이 배를 아무런 해도 입히지 않고 고이 보내주겠다는 건가! 부끄러운 줄 알라! 그토록 많은 승리를 거두고 이제와서 게으름뱅이가 되어 겁쟁이처럼 무너지겠다는 건가! 적이 한 명이라도 남아 있는 한 휴식은 결코 있을 수 없다! 그대 제군은 똑똑히 들어라! 이 적들을 그냥 도망치게 하면 모두 교수형을 당하게 될 것이다! - 《편력기》

이 말을 들은 병사들은 선택지가 없다는 것을 알고 치열하게 싸웠다. 프랑크군이 갤리선에 도선, 갤리선에 탄 병력들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으나 아군의 피해도 막심해지자 그제서야 리처드 1세는 직접 일어나 칼을 들고 충각전술을 지시했다. 결국 이 전술은 성공적으로 이뤄졌고 리처드 1세의 십자군 원정 첫번째 승리를 거뒀다. 이후 6월 8일에 필리프 2세와 만나게 되었으나 도착하자마자 토착열병에 걸려 드러눕게 되었다. 한동안 거동을 할 수 없게 되었지만 결국 7월 14일 십자군이 치열한 접전끝에 아크레 성을 점령하는 것을 지켜본 후 병이 나았다.

여담으로 공성전에서 열병[15]으로 쓰러져 부대의 사기가 떨어지자 누워 있던 침대채로 전선으로 이동해서 침대에 앉은 자세 그대로 쇠뇌를 쏴 성 위의 적병을 죽여 사기를 올리는 기행을 보이기도 했다. 역시 기행의 나라 영국인답다.

2.2 아크레 학살 사건

한편 아크레를 점령함으로 리처드는 무슬림 병사 2,700명을 포로로 잡게 되는데 이 포로의 처우에 대해 살라딘과 협상을 시작했다. 원래는 성 십자가[16]와 포로의 몸값과 그리스도교 포로 1,500명을 교환하기로 합의했고 기한은1 달로 정했다.

그런데 살라딘은 몸값 조달에 어려움을 겪어 기한이 지나도록 저 협의를 지키지 못했다. (혹은 병력이 올 때까지 기다리기 위해 지키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대신 살라딘은 일단 포로들의 몸값의 일부분만 지불하겠고 나중에 마저 지불하겠다고 재협상을 했는데, 리처드는 이 조건을 받아들이는 대신에 기독교 포로들을 풀어준다는 확약을 요구하였고 동시에 중요한 기독교 포로들의 명단을 제출해줄 것을 요청했다. 살라딘이 이 요청을 거절하면서 다시 재협상에 들어가자 살라딘이 일부러 시간을 끈다고 생각한 리처드는 결국 포로들을 학살한다.(1191년 8월 20일)

이 학살은 아크레에서 몇 km 떨어진 언덕에서 일부러 살라딘의 군대가 볼 수 있는 곳에서 진행했다고 한다. 이 참상을 지켜보던 이슬람 군대는 이곳으로 돌격해왔으나 십자군은 이들을 격퇴하는 데 성공한다.

현대적인 시각에서 보면 빼도박도 못하는 포로학살 맞지만, 이유없는 학살조차 일상다반사로 일어나던 중세의 전쟁에서 합의가 지켜지지 않아 처형했다는 것은 당시 전쟁 양상으로 보았을 때 특별히 잔인한 행동이라고 보기는 무리가 있다. 때문에 이 사건을 두고 살라딘도 리처드를 비난하거나 경멸하지는 않았다. 왜냐면 이슬람 측도 포로 학살을 흔하게 했으니까.

리처드의 입장에서는 실제로 살라딘이 시간을 끌지 않을까 염려했다. 당시 이슬람 세력도 봉건주의였으므로, 술탄인 살라딘의 명령에 의해 지방 영주들이 병력을 몰고 와서 참전하는 식이라 시간이 지날 수록 살라딘의 군대는 모여들었으므로 이를 염려한 것이다. 게다가 리처드는 추가 증원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몇 배나 달하는 이슬람군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17]에서 3,000여명이나 되는 포로를 남겨두고 진군한다는 것은 위험성이 너무 컸다. 참고로 살라딘이 데리고 있던 기독교인 포로 1,500명의 운명은 알려지지 않았는데 풀려났다면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았을 리 없다는 점에서 미루어 역시 처형당했거나 노예가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살라딘이 당대로서는 유례없을 만큼 자비로운 군주였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그런 그조차도 이 사건 말고도 여러 번 포로를 처형하지 않을 수 없던 것이 당시 전쟁 상황이었다.

2.3 케사레아 전투(Battle of Kesarea)

1191년 8월 30일, 리처드가 이끄는 프랑크군과 살라딘의 정찰대이 맞붙었다. 살라딘이 곳곳에 매복시켜놓은 병력들이 끈질기게 포위해 공격했지만 리처드는 아랑곳하지 않고 닥치는대로 썰면서 나아갔다. 그런데 케사레아 근처에서 당시 후위에 있던 부르고뉴 공작의 프랑스군이 살라딘의 투르크군의 매복에 당했다.

후위에 있던 부르고뉴 공작과 그의 프랑스군의 진군 속도는 무척이나 느렸다. 그리고 그들의 느림보 행군 때문에 끔찍한 재앙을 당할 뻔하기도 했다. (중략) 군대가 좁은 길목에 다다랐고 그 길목을 따라 군수품 마차가 지나가야 했다. 그런데 길의 비좁음 때문에 약간의 혼란이 일어났다. 그것을 눈치 챈 투르크군은 대번에 짐마차를 덮쳐 부주의한 병사와 군마들을 쓰러뜨리고 짐의 대부분을 약탈한 다음, 저항하는 병사들이 있으면 사정없이 쳐죽이며 물가로 내몰았다. 양측은 그렇게 목숨까지 던지며 씩씩하게 싸웠다. 이런 와중에 한 투르크군 병사가 에버라드라고 하는 사람-솔즈베리 주교의 부하 중 한 사람의 팔을 베자, 그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왼손으로 칼을 부여잡고는 투르크군과 격투를 벌여 그 모든 적군으로부터 용감하게 자신을 방어했다.

후위에서 아군이 공격당하는 걸 보자 리처드 1세는 "야, 이 이교도 새끼들아! 니들 거기 꼼짝말고 있어! 내가 지금 말을 타고 가서, 네놈들 머리통을 다 날려버리겠어!"설마라며 혈혈 단신으로 적진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투르크군의 머리통을 직접 따버렸으며 좌우 안가리고 닥치는대로 투르크군들을 죽여댔고, 투르크군들은 이 모습에 질려버려 모두 혼비백산해버렸다.

그것을 본 리처드는 당장 구조에 나섰다. 그러고는 벼락같은 고함을 치며 투르크군에게로 달려들어 좌우에서 그들을 칼로 찔러 죽였다. 투르크군은 우물쭈물할 틈도 없이 옛날 필리스티아 사람들[18]이 마카비[19]의 얼굴을 보고 사방천지로 도망친 것처럼 리처드 왕의 얼굴을 보자 혼비백산, 머리 없는 투르크군의 시체 몇 구를 우리 손에 남겨놓고 산꼭대기까지 줄행랑쳤다. - 《편력기》

그의 초인적인 패기로 거둔 이날의 승리로 십자군은 살라딘의 본군이 머물고 있는 지역까지 진격할 수 있게 되었다.

2.4 아르수프 전투(Battle of Arsuf)

아르수프 전투

케사레아 전투 직후인 9월 5일, 리처드 1세는 살라딘에게 조약을 맺자고 사신을 보낸다. 하지만 조약 내용이 살라딘으로써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는데 "살라딘이 이끄는 사라센군의 전면 철수와 팔레스타인 전역을 프랑크족에게 반환"이었기 때문이다. 협상이 결렬되자 곧바로 양측은 전투를 준비하게 되는데 장소는 인근의 아르수프 근처의 숲이었다.

리처드 1세는 2만명의 십자군을 동원했고 그중 12개의 기병대를 뽑았고 보병을 5개로 재편성시켰다. 그후 전위와 후위에 기병대를 배치하고 보병들은 밀집대형으로 해변가를 따라 움직였다. 오후 3시에 3만여병의 투르크군이 달려들었고 전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리처드 왕은 오로지 밀집대형만 유지한 채로 전진하도록 했고 전투 양상은 공격하는 투르크군과 수비하며 조금씩 전진하는 프랑크군의 전투로 전개되었다. 전투가 벌어진 후 한참이 지난 상황에서 구호기사단이 붕괴되어버릴 지경에 이르자 지휘관들이 리처드 왕에게 지원을 해줘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리처드 왕은 "지금은 곤란하다 조금만 기다려달라"며 밀집대형을 유지한 채 수비만 하도록 지시했다.

구호기사단이 거의 붕괴되어갈 쯤, 2명의 기사가 참지 못하고 "성 조지(제오르지오)를 위하여!"를 외치며 달려나갔다. 그러자 그 뒤를 다른 기사들이 따라 나갔는데 리처드 왕도 그 타이밍에 공격 명령을 내렸다. 이를 본 살라딘의 기록관, 바하 앗 딘은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이들 기사들이 보병 부대 중간으로 모여드는 모습을 내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 그들이 창을 부여잡고 마치 한 사람이 소리치는 것처럼 전쟁 구호를 복창하자 보병 부대가 길을 활짝 열어주었다. 그들은 그 사이를 뚫듯이 질주해나와 단번에 사방으로 돌진해가며, 일부는 우익으로 일부는 좌익으로 또 일부는 중앙으로 밀고 들어가 우리군을 초토화시켰다.

이 타이밍에 리처드 왕은 일부 지원 병력을 구호기사단으로 보내고, 본인은 홀로 칼을 뽑고 나아가 살라딘의 병력들을 썰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무쌍난무를 펼쳤는데 그의 활약은 기록으로 보아도 인간이 아닌 느낌을 들게 만든다.

아군이 혼란에 빠진 것을 알자 리처드 왕은 말에 박차를 가해 속도 한번 늦추지 않고 날듯이 구호기사단까지 도착해 원조 부대로 데리고 간 부하들을 그곳에 풀어놓았다. 그러고는 투르크군을 밀치고 나아가 담력같은 소리를 지르며 치명적인 일격을 가해 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의 앞에서 적들은 양옆으로 픽픽 쓰러져갔다. 그렇게 그는 홀로 맹렬하게 투르크군을 밀어붙이며 적을 쓰러트렸고 그의 칼 끝을 피해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느 쪽을 공격하든 그는 자신을 위한 공간을 널찍이 확보한 가운데 사방으로 칼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그가 마치 낫으로 곡식을 베듯 적병의 머리를 계속 내려치며 가증스런 종족을 분쇄해나가자, 자기 동료들의 죽어가는 모습에 놀란 적병들은 전보다 더 넓은 공간을 그에게 만들어주었다.

(중략)

위풍당당한 키프로스 말 위에 앉아 있던 리처드 왕은 자신의 정예부대를 이끌고 언덕으로 올라가 투르크 군을 만나는 족족 요절을 냈다. 적군들이 그의 앞에서 쓰러지면 투구들도 함께 쨍그랑거렸고, 한 번씩 내려칠 때마다 그의 칼에서는 불똥이 튀었다. 이날 그의 공격이 얼마나 맹렬했던지 투르크 군은 곧 불가항력적인 그의 공격을 이기지 못하고 우리 군에게 무조건 길을 내주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후 3번의 전투가 더 치러졌고 살라딘이 적극적으로 지휘하면서 군을 이끌었으나 전세는 뒤집어지지 않았다. 십자군이 700여명의 병력 피해를 입은 반면 투르크군은 최대 7천명이 전사하는 대패를 당하게 된 것이다. 편력기에는 참패 이후 살라딘이 총공세를 한번 더 펼쳤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때 리처드는 단 15명의 부하만을 거느리고 적들을 향해 달려가 적을 그들의 본거지로 밀어 붙였다고 한다. .

(프랑크군이) 막사 준비에 전념이 없던 틈을 타 투르크 대군이 우리 군의 후위를 덮쳐왔다. 왕은 격투소리를 듣고 병사들에게 전투 명령을 내리며 그대로 말에 올라 15명의 부하만을 거느리고, "성모께서 우리를 보우하사"를 큰 소리로 외치며 투르크 군에게도 돌진해 갔다. 그는 이 구호를 두세번 연달아 외쳤고 나머지 병사들도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급히 그의 뒤를 따라 적에게로 돌진해 사라센 군을 그들의 본거지인 아르수프 숲까지 밀어붙였다. 그후 왕은 막사로 돌아왔고, 격렬한 전투에 지친 병사들은 밤새 휴식을 취했다. 다음날 병사들과 그곳에 가보니 32명의 아미르가 죽은 것을 확인했다. - 《편력기》

2.5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이후 승리의 기세를 몰아 아크레 남쪽 60km지점, 현재의 팔레스타인이 위치한 지역까지 내려온 기독교 연합군[20]은 이해 11월 말까지 리처드 왕의 지시 아래 야파의 진지 구축작업과 일부 요새를 복구하는 것에 전념하고 있었다. 이때 윌리엄 드 프레오라는 기사와 단둘이 매사냥을 떠났다가 사라센 군의 기습에 포로로 잡힐 뻔한 적도 있었다.[21]

아르수프 전투의 승리와 야파의 점령으로 십자군의 눈앞에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활짝 열렸다. 이에 기사들과 병사들은 곧 예루살렘을 탈환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기뻐했지만 리처드의 생각은 좀 달랐다.

지도만 봐도 알겠지만 예루살렘은 이슬람 세력에 둘러싸인 섬과 같은 도시였다. 그나마 해안가 도시들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해상을 통한 물자의 보급과 병력이 보충이 가능해서 버텨낼 수 있었지만 내륙도시인 예루살렘을 이런 방법으로 지켜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또한 당시 팔레스티나 지역은 이슬람 세력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고, 이들의 총 병력은 대략 20만정도로 추산된다. 때문에 총 병력이 35,000명 정도였던 1차 십자군이 성공한 것도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슬람 세력이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말이다.

문제는 1차 십자군때의 이슬람 세력은 멀쩡한 상태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당시는 셀주크 투르크나 파티마 왕조나 아바스 왕조나 맛이 가서 술탄이고 칼리프고 그저 이름뿐이었고 동네 마을하나까지 영주를 자처하며 서로서로 자기네끼리 땅따먹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이게 어느 정도로 심각했냐면 이슬람 영주가 십자군과 동맹맺고 옆 동네 이슬람 영주를 공격하는 일은 아주 흔한 일이었고, 한 번은 이슬람 영주와 동맹맺은 십자군이 다른 이슬람 영주와 동맹맺은 십자군과 싸운 일조차 있었다.[22]

때문에 1차 십자군이 안티오크를 점령할 때도 예루살렘을 점령할 때도, 트리폴리를 점령할 때도 다른 이슬람 영주는 그저 강 건너 불구경할 뿐이라 하나하나 십자군에게 각개격파당했다. 만약 전 이슬람이 일치단결해서 공격했다면 십자군 국가의 수립은 커녕 기껏해야 동로마 제국과 가까운 영토 일부를 수복하는 정도에 그쳤을 것이다. 막상 안티오크 공방전만 해도 가장 가까운 알레포의 대영주인 리드완은 안티오크가 공격받은 것을 보며 박수를 치며 좋아하고 있었고 먼 모술의 대영주인 카르부카가 달려왔을 때는 이미 게임이 끝나가는 상황이었다. 그걸 본 카르부카는 안티오크를 먹어치우려다가 가뜩이나 분열된 에미르들을 더욱 분열시켜 개발살나고 모술까지 잃어버린다. 각설하고 1차 십자군의 성공으로 건국된 예루살렘 왕국도 이같은 이슬람 세력의 분열을 이용해 때로는 이슬람 영주들과 동맹맺고, 때로는 싸우면서 90년의 세월을 버텨낼 수 있었다.

그런데 3차 십자군 당시는 사정이 전혀 달랐다. 살라딘이라는 위대한 왕의 등장으로 이슬람 세력은 하나로 통합되었다.[23] 이제 100년전처럼 이슬람 세력의 분열을 이용해 줄타기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1차 십자군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체스판 너머에 상대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설사 리처드가 예루살렘을 점령한다해도 뒤에 어찌될지는 뻔한 일이었다. 리처드와 십자군 병사들이 유럽으로 돌아가고 나면 물밀듯이 몰려온 이슬람군에 예루살렘을 도로 내주는 수 밖에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몇 개월쯤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고 리처드는 생각한 듯 하다. 또다른 이유로는 마찬가지로 1차 십자군의 예루살렘 공성전시는 어느 영주도 십자군의 뒤를 치지 않았지만 3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공성전을 벌인다면 살라딘이 후방을 공격해 올 것을 염려했다.

그렇기 때문에 리처드는 예루살렘으로 진격하는 대신 살라딘과 평화협상을 시작했다. 협상을 통해 예루살렘을 되찾는다면 살라딘이 조약을 어기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후술할 리처드의 여동생과 살라딘의 동생인 알 아딜과의 혼담도 이 때 나온 일이었다. 허나 살라딘 역시 호락호락 예루살렘을 내줄 생각은 없었다.

1191년 11월 마침 살라딘은 당시 영주들의 반발로 일시적으로 휘하 병력을 해산한 상태였다.[24] 이 기회를 틈타 리처드는 일단 예루살렘으로 진격했으나 예루살렘까지 하루 거리를 남겨두고 군대를 되돌린다. 아마도 본격적으로 예루살렘을 점령할 생각이 아니라 일종의 위력시위였던 듯하다.

한편, 1192년 봄까지 협상을 했지만 쉽게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내줄 생각이 없다는 걸 알게 된 리처드는 전략을 바꾼다. 먼저 아스칼론, 가자, 다룸을 점령해 살라딘의 영지인 이집트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보급로를 차단하는 데 성공한다. 그렇게 후방을 정리한 다음 1192년 6월 예루살렘으로 재진격한다. 그러나 이번에도 리처드는 군사력으로 예루살렘을 점령할 생각은 없었던 듯하다. 예루살렘으로 전진하는 와중에도 살라딘과 끊임없이 회담을 계속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군사력으로 정복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한 리처드는 아예 이집트를 공격하기로 생각을 바꾼다. 당시 이슬람 영주들은 살라딘을 따르고 있었지만, 그건 수백년간의 충성의 결과가 아니라, 살라딘의 그 동안 쌓은 군사적 업적과 부유한 이집트의 영주란 사실 때문이었다. 그런데 만약 리처드가 이집트를 공격하는 데 성공한다면 살라딘은 실각할 수밖에 없고 다시 한번 이슬람 세력은 분열할 수 있다. 설사 이렇게 일이 잘 풀리지는 않더라도 이집트를 공격하면 최소한 살라딘을 압박해 협정을 유리하게 이끌어 낼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

그러데 당시 성지 예루살렘의 공략에만 몰두해 있었던 부르군디의 공작이 이를 반대하고 나섰다. 또한 이 때 프랑스왕인 필리프 2세의 잉글랜드령 침공 소식도 듣게 된다. 결국 리처드는 다시 한 번 군대를 추스릴 겸 해안으로 군대를 되돌린다. 그 때 수세에 몰려 있던 살라딘의 군대가 야파를 공격한다.

2.6 야파 전투(Battle of Jaf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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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파 전투

1192년 7월 27일, 살라딘은 야파 요새를 침공한다. 십자군은 이 전투에서 맹렬하게 저항하는데, 그 맹렬한 저항은 무슬림의 역사가들마저 감동시킬 정도였다. 하지만 맞서 싸우는 투르크 병사들의 어그로는 올라갈 데까지 올라가, 마침내 전황이 불리해졌을 때 십자군들이 살라딘에게 예루살렘이 그리 했던 것처럼 자신들도 투항할 수 없겠냐고 하자 살라딘은 그들의 항복을 접수하면서도 그들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말한다.

요새로 퇴각하고 도시를 포기하라. 지금 무슬림 군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25]

잠시 후 어그로가 오를 대로 올랐던 무슬림 군대가 야파 시내로 몰려와 닥치는대로 약탈을 저지르기 시작했고 수비대 생존자들은 모두 성채에 틀어박혔다. 살라딘은 부대를 수습하여 야파 방위를 위해 성채를 비롯한 주요 거점들을 장악하려 했지만 전리품에 취한 무슬림 군대는 살라딘의 통제를 무시하고 날뛰었다. 한편 막 팔레스타인을 떠나려던 리처드는 야파가 함락당했단 소식을 알려오며 '슬픔에 겨워 자신의 옷까지 쥐어뜯는' 전령들의 통곡에 크게 분노, "하느님이 살아 계심에 그분의 도움으로 내 할 일을 하고야 말리라."라고 외치며 군대를 소집하여 야파로 달려갔다. 살라딘의 병사들은 토요일 아침, 리처드의 갤리선에서 울려퍼지는 나팔 소리에 놀라서 잠에서 깨어났다. 살라딘은 리처드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해안에 군대를 배치하는 한편, 항복한 십자군 수비대에게 성채를 넘겨받아 야파 방어에 쓰려고 했다. 리처드가 도착한 줄 모르던 수비대는 순순히 성채를 넘기려 했다. 그때 살라딘의 부하들 중에서도 인정이 넘치기로 유명한 늙은 영주인 주르디크가 십자군을 지금 보내줬다가 분노한 무슬림 군대가 십자군들을 도륙할 것이니 십자군들을 위해 안전한 퇴로를 마련해주자고 주장함으로 성채를 넘겨받는 일이 늦어졌다. 하지만 무슬림 병사들은 십자군을 위한 퇴로를 마련해주는 일에 매우 불만스러워하며 일을 대충했고 이 때문에 49명의 수비대원과 49명의 수비대원의 아내, 49필의 말만이 성채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수비대원들은 해안가로 접근한 리처드의 범선 35척과 갤리선 15척을 발견했다.

마음이 바뀐 수비대원들은 다시 성벽에 짱박혔고 바하 앗 딘에게 자신들의 항복을 철회한다는 매우 정중한 문구를 보낸 다음에 무슬림 병사들을 급습해 도시 밖으로 몰아냈다. 열이 뻗칠대로 뻗친 투르크군과 살라딘은 야파 시내로 몰려가서 수비대를 다시 성채로 몰아넣고 성벽을 맹폭하기 시작했다. 헌데 간신히 나타났던 리처드의 범선은 이상하게 접근을 안 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무슬림의 함성 소리와 휘날리는 살라딘의 깃발 때문에 구조 요청을 듣지 못해, 무슬림군만 가득한 야파 요새의 공략 중요성을 토의하며 시간을 끌고 있었던 것. 절체절명의 순간, 수비대가 다시 항복을 구걸하기로 마음을 먹었을때 사제 한 명이 바다에 뛰어들어 리처드의 범선까지 헤엄쳐 갔다. Somebody Help me! 영국군이 그를 구조하여 갑판에 올리자 그는 리처드에게 부르짖었다.

"숭고한 왕이시여. 우리 병사들은 지금 전하의 구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저 도살자들의 칼날에 쓰려져가고 있나이다. 마치 도살을 기다리는 양들처럼 목을 앞으로 길게 빼고 있습니다. 수비대는 전하를 통한 하느님의 구원이 없는 한 그 자리에서 죽고 말 것입니다."

이에 리처드가 노하여 외쳤으니,

"당치도 않다!"

그 때까지 굳이 공격해야 할 필요가 있나 하고 고민하던 리처드는 구조 요청을 듣자마자 전속력으로 야파 요새로 돌진한다. 리처드는 배가 정박하기도 전에 바다로 뛰어들어 자신의 유명한 덴마크제 도끼를 휘둘러 닥치는대로 무슬림 병사들을 베어내었고 혼비백산한 무슬림 군대는 순식간에 와해되어 야파 해안을 영국군에게 내주었다. 그리고 선박용 신발만 신은 채 80명의 병사들만으로 야파 요새 안에 들어왔던 병사들을 모조리 몰아냈다. 전투 직후 살라딘이 보낸 의전관 아부 바크르에게 리처드는 웃으며 물었다.

"당신들의 그 전능하신 술탄은 어째서 내 모습만 보고도 도망치신 거요? 맙소사. 나는 갑옷은 고사하고 싸울 준비도 없이 선박용 신발[26]만 신고 있었는데 말이오? 대체 살라딘은 왜 도망을 갔던 것이오?"

실제로 이때 리처드군은 단 3필의 말만을 가지고 공격을 감행했다. 믿기 힘든 사실이지만 이건 기독교 쪽 역사가도 무슬림 쪽 역사가도 똑같이 인정하는 사실이니...이때 살라딘 왕 옆에서 야파 요새가 단 1명의 무력으로 허무하게 빼앗기는 걸 지켜본 역사가는 리처드를 두고 "저 새낀 인간이 아님"이라 단정지었다.사도인 듯 결국 살라딘은 6만 2천이라는 병사들을 데리고 와서 요새를 점령할 뻔했지만 시간만 끌다가 리처드라는 희대의 괴물 때문에 야파 요새를 다시 빼앗기고 만다. 그리고 리처드는 살라딘에게 강화를 제의했지만 아스칼론의 소유권 문제 때문에 결렬되었다.

야파에서 큰코 다친 살라딘은 8월 5일 새벽, 리처드가 점령한 야파를 향해 7천의 병력을 동원, 기습 공격을 시도했다. 이때 리처드 왕의 병력은 기사 54명, 기마기사 15명, 보병 2천명에 불과했으며 무너진 성벽을 마저 보수하지 못해, 그곳에 목책을 치고 진을 치며 방어를 할 정도로 열세였다. 그러나 리처드 1세의 지휘 아래 십자군은 투르크군을 상대로 치열하게 싸웠으며 리처드 왕의 무쌍난무로 인해 또다시 불리한 전황도 뒤집어 엎었다.

마침내 리처드는 쇠뇌병들을 앞쪽으로 내보내 사라센 기병대를 향해 일제히 화살을 퍼붓도록 했다. 그러자 창병들은 쇠뇌병들이 지나갈수 있도록 자신들이 앉아 있는 사이로 길을 내주었고, 이어서 공격에 박차를 가한 결과 마침내 전투는 적의 궤멸로 막을 내렸다. 퇴각의 순간 리처드는 15명의 말 탄 기사와 함께 돌격해 그 비할 데 없는 용맹함으로 사라센 군을 덮치며 좌우로 칼을 휘둘러 그들의 머리를 쪼개고 사지를 절단냈다.

투르크 군이 결국 퇴각을 결정하고 후퇴하자 리처드 1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15명의 기마기사와 함께 추격, 적을 썰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리처드 1세가 탄 말이 화살에 맞아 쓰러졌고 리처드는 낙마를 하며 위기의 순간을 맞이했다. 이때 위에서 언급했던 살라딘이 그에게 말 2필을 보내준다.

그렇게 한창 치열하게 전투를 하고 있는 중에 아마 리처드의 말이 쓰러져 죽었던 모양이다. 별안간 투르크 군 한명이 말 2필을 이끌고 그의 앞으로 달려왔다. 그것은 왕이 말에서 떨어지는 것을 본 살라딘이 "그토록 용감한 용사가 땅바닥에서 싸워서는 안 될 일"이라며, 날쌘 아랍말 2필을 보내준 것이었다. 리처드도 똑같은 기백으로 그 말들을 받아들여 싸움을 계속했다.

말을 선물받은 리처드는 그 답례로 투르크군을 열심히 썰어댔고, 이런 정신없는 난전중에 살라딘의 투르크군은 후미로 침투해 도시를 점령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리처드가 말머리를 돌려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고 그를 뒤따르던 15명의 기사와 함께 적들을 저지했다.(!) 그야말로 동에번쩍 서에번쩍 혼자서 전투의 흐름을 지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모습인데, 이 내용은 편력기 뿐 아니라 살라딘의 서기관이었던 "바하 앗 딘"도 인정하는 내용이다.[27]

결국 살라딘은 군대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 날의 전투로 십자군측은 단 2명만이 사망[28]했던 반면에, 살라딘군은 700명 이상이 사망했고 1,500+2마리나 되는 말을 잃었다.

2.7 평화협정

야파 전투의 승리이후 리처드는 살라딘과의 강화회담을 진행하고 1192년 9월 2일 3년 강화 조약을 체결한후 10월 9일 아크레에서 배를 타고 영국으로 돌아갔다.[29]

십자군은 아스칼론을 되돌려주고 이슬람 세력의 예루살렘 지배를 인정했다. 대신 살라딘 역시 해안가 기독교 도시들을 침공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으며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기독교도들의 안전을 약속했다. 이 조약은 26년간이나 지켜지게 된다. 리처드가 떠나고 5개월 뒤에 살라딘은 병으로 숨을 거둔다.

3 정치적인 면

여기까지만 보면 엄청난 무장이지만 가장 큰 문제점은 그는 일국의 장수가 아니라 일국의 왕이라는 사실이다.

전쟁에만 열중해 내정을 전혀 돌보지 않았고[30], 막대한 전비를 감당하기 위해 무거운 세금을 물렸으며, 심지어는 십자군에서 귀환하던 도중 오스트리아에 포로로 잡혀[31][32] 또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는 통에 영국의 국고가 바닥나게 만드는 등, 정치적인 면으로는 그야말로 막장. 사실 정치를 못했다기 보단 정치를 안 했다. 제위기간의 대부분을 전쟁터에서 보냈으니...

그나마 다행인 건 그의 어머니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가 아키텐의 군주이자 영국왕의 대리인으로서 괜찮은 신하들과 함께 내정부분을 상당수 처리해줬다는 것. 엘레오노르가 없었다면 플랜태저넷 왕조는 리처드 1세 당대에 붕괴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혹자는 리처드 1세를 "사자의 심장을 가졌으나 사자의 영혼을 가지지는 못했다"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4 살라딘과 무슬림에 대한 태도

리처드는 애초에 이슬람 교도에 대해 증오심을 갖던 인물은 아니었다. 심지어 리처드는 여동생인 조안나[33]를 화평사절로 온 살라딘의 동생인 알 아딜[34]과 결혼시켜 예루살렘의 공동 통치자로 삼으려고 했다. 이렇게 되면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간의 분쟁이 사라지리라고 여겼던 것이다.

허나 이 계획은 기독교 성직자들의 반대와 더불어 "날 이슬람 교도에게 시집보낼 생각이냐?"고 열받은 조안나의 반대에 직면하게되자 리처드는 알 아딜에게 당신이 기독교로 개종하는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당연히 살라딘의 동생이 개종할 리는 없으니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

또한 리처드는 평화협상에 따라온 알 아딜의 아들인 알 카밀[35]을 기사로 임명하기도 했다. 여동생을 이슬람 교도에 시집보내려던 계획이나, 적의 조카를 기사로 임명하는 등 이러한 행동들은 리처드가 이슬람 교도에 대해 맹목적인 증오심을 갖고 있던 인물이라면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리처드는 십자군 원정에서 귀향길에 살라딘이 병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에 리처드의 부하들이 조금만 더 성지에 머물렀다면 예루살렘을 탈환했을 거라고 아쉬워하자, 리처드는 "만약 우리가 계속 남아 있었다면 살라딘은 결코 눈을 감지 못했을 것이다"고 멋지게 평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리처드는 살라딘을 위대한 왕이라고 평했으며 의심할 바 없는 이슬람 최고의 지도자라고 말한 적도 있다.

5 평가

적어도 당대에 전쟁에 관해서는 따라올 만한 사람이 없었다. 살라딘 또한 이슬람 세력을 통합하고 하틴 전투에서 기독교군을 박살내었으며 예루살렘 왕국을 멸망시키는 등 여러차례 비범한 군사적 재능을 보여주었던 인물이었으나, 전략적으로 월등히 유리한 상황에 있던 살라딘조차 전장에서는 리처드를 상대로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물론, 군 지휘관이 아니라 왕으로서는 살라딘이 종합적으로 더 뛰어난 인물이겠지만. 비단, 십자군 전쟁만이 아니라 잉글랜드에서의 권력 투쟁, 메시나 전투, 키프로스 전투등은 물론이고, 나중에 프랑스왕 필리프와의 전투에서도 언제나 승리했다.[36]

단순한 야전지휘관으로서만이 아니라 전략적인 측면도 매우 뛰어난 인물이기도 했다. 당시 누구보다도 보급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그의 군대는 언제나 충분한 보급을 받았으며 부상병을 회향시키곤 했다. 아르수프 전투와 그 전후의 진격 당시에도 리처드 1세는 온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상태에서 무모한 내륙 진격을 시도하지 않고 한쪽 측면은 십자군에 참여한 도시국가들의 해군으로 보호받게끔 해안선을 따라 진격하였으며, 해군의 함선에 보급품을 싣고 측면 엄호를 받아가면서 움직였다.

특히 당대 인물들이 흔히 성지라는 명성에 눈이 어두워 예루살렘 공략에만 집중했으나 리처드는 사실상 항구가 없는 예루살렘을 기독교 세력이 지배한다는 것이 무리라는 것을 알았고, 그 때문에 예루살렘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집트를 공략하려 했다. 프랑스왕의 영국령 침범으로 인해 이집트 공략은 시행할 수 없었으나, 리처드의 계획이 전략적으로 올바른 판단이라는 것은 후세의 사가들의 공통된 의견이기도 하다. 십자군 원정 후 귀국한 뒤에 리처드 1세는 필리프 2세에게 잃어버린 영지들을 수복하면서 샤토 가야르라는 성을 쌓았는데 워낙에 위치가 절묘해서 그 필리프 2세도 리처드 1세 사후 8개월간의 공성전으로 이 성을 함락시키기 전에는 노르망디 지역에 손을 뻗을 수 없었다.[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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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토 가야르(Château Gaillard)

당시에도 리처드와 3차 십자군의 무용담은 유럽에 널리 퍼졌고, 특히 잉글랜드에서는 대단히 인기가 높았다. 후에 독일의 하인리히 6세에 사로잡힌 리처드의 몸값을 지불하기 위해서 엄청난 세금이 거두어졌음에도 오히려 잉글랜드에서는 영웅적인 왕으로서 평가가 더 높아졌다. 그러나 이 인기는 1198년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인해 새로운 세금을 거두자 크게 낮아지게 된다. 요컨대 통치자로서의 능력은 꽝이라는 말.

리처드 왕은 노새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며 로빈에게 말했다. "정말, 그대는 주위에 훌륭한 젊은이들을 많이 두었군, 로빈. 내 생각에는 리처드 왕조차도 이런 근위대는 몹시 마음에 들어할 것이네." 그러자 로빈이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이 사람들이 내 부하들 전부는 아니오. 지금 50여 명 정도는 내 오른팔 리틀 존과 함께 다른 볼일을 보러 나가 있고. 하지만, 리처드 왕에 대해서는, 내 말해 두는데, 그분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피를 마치 물처럼 하나도 아깝지 않게 쏟아 붓지 않을 사람이 우리 중에는 단 한 사람도 없소. 당신들 성직자들은 우리의 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소. 하지만 우리 용사들은 우리의 행동과 꼭 닮은 그분의 용감한 위업 때문에 그 분을 충심으로 좋아한다오."

『로빈 후드의 모험』

영국에서는 여러가지 무훈담의 주인공으로 등장, 대단히 인기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특히 로빈 후드 민담에서는 로빈 후드의 든든한 조력자로 항상 등장한다. 그도 그럴 것이 외모에서부터 '왕의 모습에 어울리는 준엄한 용모'라고 묘사되기 때문. 기록에 따르면 '얼굴이 멋지고 키가 크고 몸의 형태가 나긋하고 균형잡혔으며 머리는 황갈색으로 나풀거리고 팔이 길어 일반사람보다 검술에 더 걸맞았다'고 한다. 이런 후문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리처드의 매력에 매료되어 그를 칭송하였다고 한다. 나라의 국정을 잘 돌보지 않았던 군주임에도 불구하고 후대에까지 이렇게 사랑받는 인물도 사실 그다지 많지 않다. 무엇보다 영국인들 사이에서는 리처드의 무용담은 아직도 자국민들의 자랑거리라고 한다.

의외로 프랑스인들의 평가도 그리 나쁘지 않은데, 태어난 곳은 옥스포드지만 자란 곳은 푸아티에라서 은근히 프랑스인으로 분류하는 주장도 있다.

필리프 2세의 업적에 비해 별로 한게 없다며 까는 사람들도 있는데 애초에 중세초한전쟁, 삼국지 같은 난세가 아니고 전쟁을 하더라도 매우 많은 관습과 제약이 있었다. 필리프 2세가 리처드를 공격하지 않겠다고 서약까지 하고 통수친 건 지금도 잉글랜드에서 까이며 당시에도 문서까지 들고 노르망디의 행정관(FitzRalph)까지 찾아가서 자기땅이라고 주장했지만 지지(casus belli)를 받지 못했다. 교황 첼레스티노스 3세에게 찾아가 서약이 무효라며 주장했지만 그것도 안먹혔다.

그렇다고 필리프가 저렇게 통수까지 치면서 리처드를 상대로 크게 재미를 봤냐면 그것도 아니다. 필리프가 잉글랜드의 프랑스령을 빼앗은 것은 막장으로 손꼽히는 존 왕 때의 일이지 리처드 시절이 아니다. 국익 앞에 약속이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런 논리면 리처드와의 약속을 굳게 지킨 살라딘조차도 통일을 못했다며 까여야 한다.[38]

마지막으로 전략이라는 단어는 매우 폭이 넓은데, 어떤 사람의 경우는 "전쟁을 전반적으로 이끌어 가는 방법이나 책략. 전술보다 상위의 개념"(출처:네이버 백과사전) 정도로 이해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보다 포괄적인 국가경영까지 전략에 포함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후자의 입장이라면 리처드 1세는 좋은 평가를 받기 힘들다. 내정문제에 있어서도 존왕의 폭정이 당대 영국 백성을 힘들게 만들었다는 인식이 전반에 퍼져 있으나 실상은 리처드 1세의 처신 문제 해결을 위한 증세의 탓이 크다. 특히 외교분야에 있어서는 막장으로 지독할 정도로 신의가 없고 대부분의 주변국으로부터 '통수왕'이나 '배신왕'로 인식되고 있었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그러니 그냥 리처드 1세는 전쟁에 특화된 사람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6 그 외

  • 미트스핀의 의혹을 받고 있는 왕이기도 하다. 일설에는 첫번째 약혼녀의 오빠, 즉 필리프 2세와 그렇고 그런 사이였고, 나중에 첫번째 약혼녀과의 결합에 대비해서 정조를 지키고 "소돔을 기억해서 부정한 행위를 삼가라"라는 경계를 들었다는 점이 그 증거로 제시되곤 한다. 아, 그동안 참고로 약혼녀는 리처드의 아빠랑 열심히 으쌰으쌰했다. 그로 인해 결국 파혼해 필리프 2세의 원한을 샀다. 그는 끝내 어머니인 엘레오노르 드 아키텐의 주선으로 아라곤 공주 베렝가리아와 결혼한다. 이전 항목에서는 '자기 애인을 추기경으로 임명했던 프랑스의 필리프 2세와는 달리 분명한 증거가 없으므로 여전히 논쟁중인 사항'이라고 되어 있었는데 사실 동성애자라는 물증이 전혀 없는 것은 필리프 쪽이다. 당대의 기록은 물론이고 후대 역사학자들도 리처드와의 관계를 제외하고 말하자면 필리프가 게이라고 볼 만한 증거가 전혀 없다는 사실에 합의를 보고 있다. 게다가 필리프 2세 시절에 프랑스 왕에게는 추기경 서임권이 없었다.

아무튼 프랑스의 왕이었던 필리프 2세와의 동성애 논란은 주요 떡밥. 물론 그럴 가능성이 높지는 않지만 두 사람이 어렸을 적부터 교류가 잦았고 실제로도 젊은 시절에도 사이가 그리 나쁘지 않았던 건 사실이다. 다만, 훗날 십자군 전쟁 이후로 서로 사이가 나빠지고 관계도 막장이 되었다.

  • 사실 십자군 원정 이전부터 필리프는 리처드를 좋게 볼 수 없었다. 필리프의 목표는 프랑스 내에 영국이 차지한 영지를 점거하는 것이었고, 카페 왕가가 이전부터 헨리 2세에게 농락당해 왔기 때문에 필리프는 영국의 플랜테저넷 왕가에게 결코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었던 입장이었다. 실제 필리프는 리처드가 아버지 헨리 2세 플랜테저넷에게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이를 지원하면서 방대했던 영국령(영국, 아키텐, 앙주, 노르망디 등 프랑스 왕령의 수배에 달했음)의 분열을 꾀했으나, 헨리 2세가 급사하고 형 둘이 전사한 리처드가 왕위를 이으면서 실패하여 원한이 쌓였다. 더군다나 십자군 전쟁 과정에서도 자주 충돌하면서 사이는 더욱 악화되었다.
  • 배 멀미를 심하게 했다는 설도 있다. 영국군이 성지로 향하는 도중 과도할 정도로 자주 정박하곤 해서 지중해 항해가 예상보다 늦어졌는데 이게 리처드의 배멀미 때문이라는 것. 귀국길도 군대와 함께 함대로 오지 않고 육로를 택한 것도 배멀미가 원인이었다는 말도 있다. 배멀미를 심하게 안했으면 오스트리아에서 포로가 되는 일도 없었을지도...
  • 영국의, 아니 유럽 최고의 기사, 기사도의 꽃으로도 불리운 윌리엄 마샬에 의해 패배한 적이 있다는 자료가 국내에 굴러다니고 있는데,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실제로 알려져 있는 자료를 자의적으로 호도한 감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윌리엄 마샬 항목을 참조.

7 대중문화에서의 사자심왕 리처드

이 시대를 다룬 이야기들을 보면 리처드의 인생이 워낙 드라마틱하고 기사의 로망을 그대로 구현한 인물이라서인지 '간사한 국왕 필리프 2세[39]에 맞서는 고결한 기사 리처드 1세'의 이미지가 형성되었다. 물론 국왕으로서의 역량으로 둘을 비교하면 명군이라 할 수 있는 필리프에 비해 리처드는 막장이지만.

  • 로빈 후드와 자주 엮이며, 로빈 후드를 다룬 창작물에서는 거의 반드시라고 할만큼 등장한다. 열에 아홉이면 찌질이(...) 존 왕과는 다른 대인배로 묘사된다. 일단 로빈 후드부터 존 왕보다는 리처드 1세를 더 존경하기도 했고. 디즈니 애니메이션인 로빈 후드에서도 결말 부문에서 등장. 동생이 존이 찌질이에 갈기도 제대로 안 난 사자로 나온 반면. 그는 갈기도 멋있게 난 말 그대로 사자왕의 모습을 보여준다. 한국판 성우는 박상일.
  • 월터 스콧의 중세 로맨스 소설 아이반호에서는 신분을 숨기고 홀로 모험을 찾아 돌아다니며 활약하는 모습을 보인다. 작품의 중요한 주제가 약 1세기 전 침략을 당해 피지배층이 된 색슨족과 바이킹의 후예로서 침략전쟁으로 잉글랜드를 차지한 노르만족 사이의 갈등인데, 리처드는 기득권층인 노르만 혈통의 왕이면서도 색슨과 노르만 사이의 화합을 위해 동분서주한다. 노르만 귀족이 색슨족에 대해 불의를 저지르자 로빈 후드와 힘을 합쳐 그 귀족의 요새에 공성전을 벌여 함락시킨다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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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기스칸 4 일러스트
  • 코에이푸른 늑대와 흰 사슴 시리즈에선 전통의 플레이 가능 캐릭터였다.《원조비사》와《징기스칸 4》때 와서도 무시무시한 전투력을 자랑하지만 정치는(…). 전투만 무려 98이다. 칭기즈 칸이나 라이벌 살라흐 앗 딘보다 더 높은 수치. 전투 중 공격하면 전용 대사가 뜨기도 한다.[40] 여러 가지로 우대한 느낌. 또한 정치가 낮긴 하지만 부하 중에 그걸 커버할 '월터'[41]라는 재상이 있어서 내정은 월터에게 맡기고 폭주하듯이 친정하고 다녀도 상관없다. 하지만 게임 시스템의 한계상 중동으로 원정가기 전에 프랑스를 밟고 가야 한다. 지중해로 돌아가려고 해도 스페인과 이탈리아가 걸리적거린다. 실제 역사와는 달리 이런 나라들은 외국 군대가 자기 영토에 들어오면 공격해버리니까. 일본의 징기스칸 시리즈 관련 웹에서는 로빈 후드를 얻자마자 프랑스를 쳐서 필리프 2세를 잡고, 신성로마나 스페인을 무시하고 바로 지중해를 건너 북아프리카로 쳐들어가 십자군 원정을 재현했다는 플레이 경험담도 있었다.[42] 또한 실제 역사에서는 1시나리오 시작 후 10년 뒤에 사망했지만 자연사가 아니기 때문인지 게임상 수명은 실제 역사보다 비교적 긴 편이다.
  • 일본 전국시대우에스기 겐신과 묘하게 이미지가 겹친다. 무력으로는 당대 상대할 자가 없었으며, 신실한 성격에 여자를 멀리하는 등. 일생의 라이벌 살라흐 앗 딘의 경우는 다케다 신겐과도 비교가 가능할 듯?[43] 그런데 사실 징기스칸 4에서 다케다 신겐의 위치에 있는 인물은 프랑스의 필리프 2세. 둘의 능력치를 보면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의 신겐, 겐신 능력치와 비슷하다.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2 : 에이지 오브 킹에서 바바로사 캠페인 6번째에 동맹군으로 등장한다. 체력 220의 패러딘으로 등장하는데 마지막 미션에서 사라센 공격시작 후 바바로사는 이미 죽었고 지원군은 한줌밖에 안 된다는 걸 알고 성벽 + 공성무기에 닥돌하다가 죽어버린다(…). 관련 캠페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캠페인 내내 바바로사의 뒤통수를 호시탐탐 노리던 헨리(하인리히)의 별명이 '사자왕'이라서 제대로 스토리를 안 본 게이머들은 그를 리처드로 아는 사람이 있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게다가 하인리히는 왕이 아니고 공작이었기 때문에 원래 별명은 사자이며 '사자왕'이라 한 것은 오역이다.[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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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와 같이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DS 에이지 오브 킹스에 미나모토노 요시츠네, 리처드 1세의 미션이 등장한다.
  • 어쌔신 크리드에선 초반에 아크레의 포교자들이나 예루살렘, 다마스쿠스의 포교자들 사이에서 이름을 들을 수 있고 후반에 가서야 제대로 등장한다. 아크레에서 말을 타고 몬테페레스의 월리엄과 신경전을 벌었고 성전기사단의 그렌드 마스터인 로베르트 사브레가 마시아프의 암살단을 삭쓸이하기 위해 리처드가 있는 아르수프로가 그를 설득하려 했다. 허나 도중에 알테어가 도착해 그의 앞에서 로베르트의 실체를 폭로하자 이에 리처드는 두사람에게 대결을 제안했고 그 대결에서 승리한 알테어는 살라딘과 화친하라는 조언을 하면서 마시야프로 돌아간다.
  • 십자군 이야기에서는 인간흉기답게 권왕님이 되셨다.# 그리고 지상 최강의 생물이 된 아버지와 세기의 대결을 펼친다. 이후 어머니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앞에서는 애교를 부리는 모습과 그에 걸맞는 마마보이 버전(단행본 2권의 모습)도 등장한다. 여담으로 큰형인 헨리는 토키, 제프리는 켄시로, 동생인 존은 쟈기.
리처드 : 십자군은 기사의 의무다무다무다무다

헨리 2세 : 네놈이나 실컷 다녀오라오라오라오라

필리프와의 동성애설을 채택했는지, 그와 필리프의 관계에 대한 묘사는 그야말로 사랑과 전쟁(...)을 방불케 한다.
  • 어쩨 리들리 스콧의 작품에서는 대우가 영 좋지 못한데 킹덤 오브 헤븐에서는 마지막에 주인공인 발리앙에게 자신의 군세에 합세하라는 권유를 던졌지만 이미 전쟁의 참상을 보면서 열정을 잃은 그에게 자신은 그저 대장장이일 뿐이라며 거절당했고, 또다른 작품인 로빈 후드에서는 정신상태가 불안정한 상태로 나오면서도 화살비가 내리는 전장에서 아무런 보호장비 없이 맨몸으로 돌진하는 호쾌한 모습을 보이고 나중에는 로빈 후드에게 아크레 대학살에 대한 뼈아픈 직언을 들으면서 그를 가두는 모습을 보였지만 잠시 병사들이 식사하는 사이에 석궁을 들면서 대등했던 취사병에 의하여 목에 화살이 꿰뚫려 생을 마감하는 안습한 모습을 보인다.
  1. 이건 웬만한 왕보다 영지가 넓었던 어머니 엘레오노르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푸아티에 백작 작위도 동일.
  2. 참고로 왕위에 오르기 전 영주 시절에도 그의 통치가 매우 강압적이고 가혹해서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킨 적도 있다. 물론 리처드 1세가 반란군을 박살내긴 했지만 영주 시절부터 통치방식이 이렇게 개판이었으니 왕이 되고 나서 좋은 왕이 될 수가 없었다. 왕이 되고도 전쟁 벌인다고 세금을 미친 듯이 거둬서 귀족과 백성들에게 증오를 받았고 후임자 존 왕이 그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기도 했다.
  3. 단순히 영어만 보면 그런 생각이 들지 몰라도, 그 의미를 보면 결국 사자와 같은 용감한이라는 말이 부각된 것인지라 잘못되었다고 하기도 영 뭐 하다.
  4. 이 과정을 다룬 영국 연극/영화 <겨울 사자들>이 명작이다. 당대의 명배우들이 참여하여 여러번 리메이크되었다.
  5. 정확하게는 협박 수준이 아니라 부자가 각기 군대를 이끌고 무력충돌을 벌였으며, 이 과정에서 정신적 충격 등으로 건강이 악화된 아버지 헨리 2세가 급사한다. 그의 또다른 별명인 '나쁜 자식, 나쁜 형제, 나쁜 남편, 나쁜 국왕'의 첫번째 타이틀 획득.
  6. 정확히는 앵글로-색슨족이 사용하던 고대 영어다. 현대 영어는 고대 영어와 프랑스어가 혼합된 것.
  7. 실제로는 그에 못 미치지만 중세 유럽기준으로는 상당한 규모의 대군이고 살라딘도 그 이동에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한다.
  8. 레오폴트5세는 자신 역시 십자군의 일원이며 위대한 제국의 공작인만큼 왕과 동일한 예우를 받아야한다고 주장했다고 리차드의 무릎에 의해서 자신의 공작령 및 군대를 상징하는 깃발이 부서지게 된다. 아마 이일로 앙심을 품은듯. 물론 리처드의 행동은 외교적으로 굉장히 큰 실책이다.
  9. 중세의 그림에서 리차드1세가 하인리히6세의 발밑에 엎드려 간청하는듯한 그림이 있다.
  10. 이때문에 존은 프랑스에게 찍히고 만다.
  11. 전근대에는 혈액 공급이 없다보니 수술하고나서 부작용으로 사망하는 사람이 흔했다.
  12. 하지만 구르동은 리처드의 부하 장군(주군이 구르동의 화살에 맞았을 때 자신이 직접 환부를 헤집으며 화살을 꺼내려 했을 정도로 충성심이 강했다고 한다. 물론 위생적 관점으로 보면 그게 화가 된 것이지만)에게 산 채로 껍질이 벗겨진 다음에 교수형 당해 죽었다. 왕께선 널 용서하셨을지 몰라도 나는 널 용서할 수 없다
  13. 머리는 샤루 수도원, 심장은 노르망디의 루앙, 유해는 퐁테브로 수도원. 각 지방이 인기 좋았던 왕의 유해를 모시길 원했고, 왕 사후에도 지배권이 있음을 보이려는 퍼포먼스 성격이었다.
  14. 이건 당시 기사와 말에 대한 정서를 염두에 둬야 하는 부분인데, 당시 기사가 말이 없다는 것은 큰 수치로 여겨지던 때였다. 원탁의 기사 전승에서도 기네비아를 구하기 위해 갔다가 말을 잃어버린 랜슬롯이 짐마차를 빌려탔다는 이유만으로 주변 사람들, 심지어 기네비아에게까지 면박을 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살라딘 입장에선 비록 적이지만 평소 존경했던 리처드가 그런 수치를 당하게 생겼으니 신경쓰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
  15. 일사병이나 열사병이라는 설도 있다.
  16. True cross. 즉 예수 그리스도십자가형을 받은 진짜 십자가 라고 여겨지는 유물.
  17. 리처드가 통솔한 병력은 2만 이하, 보통 18,000명 정도로 학자들은 보고 있으며 이슬람 세력은 다 합친다면 20만 정도로 파악되지만 봉건주의 시대라 저 병력을 전부 살라딘이 통솔할 수는 없었고 살라딘이 동원할 수 있었던 병력은 최대 5만 정도였던 걸로 파악된다. 특히 이슬람 세력도 기독교 세력만큼 단합이 되지 않아 서로 배신을 일삼고 말안듣다보니 동원력이 떨어졌다.
  18. 옛날 팔레스타인 서남부에 살며 이스라엘 민족과 끊임없이 충돌했던 민족. 성경골리앗이 필리스티아 사람이다.
  19. 기원전 167년, 시리아 셀레우코스 왕조의 종교적 박해에 대항해 일어난 마카비 전쟁의 지도자. 본명은 "유다"이고, 쇠망치라는 뜻의 마카비는 그의 별명이다. 마카비 전쟁 문서 참고.
  20. 십자군 원정을 온 병력들 + 기존에 예루살렘 지역 일대에 위치한 기독교 병력들.
  21. 프레오가 그를 아랍어로 왕이라는 뜻인 "말리크"라고 칭하는 모습을 본 아랍병사들이 그들이 지나가는 것을 막지 않았다고 한다.
  22. 후에 이 일을 들은 당시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인 보두앵 2세는 이들을 불러서 개갈굼 혼내고 이후는 적어도 십자군끼리 싸우는 일은 없었다.
  23. 뭐, 엄밀히 말하면 살라딘도 누르 앗 딘이 어느 정도 통합해놓은 걸 물려받은 점도 있었지만, 이를 유지하고 아이유브 왕조가 끝내 십자군을 몰아낼 수 있었던 건 누가 뭐래도 살라딘의 카리스마 덕분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24. 이슬람도 봉건시대였으므로 술탄인 살라딘의 명령에 영주들이 병력을 끌고와 참전하는 식이였는데 살라딘이 오랜기간 소집하자 병력의 유지비를 부담했던 영주들은 해산을 요구한 것이었다.
  25. 살라딘은 웬만하면 적들을 살려주는 편이었다. 심지어 예루살렘을 정복했을 당시 포로들을 돈을 받고 풀어주었으며 돈이 없는 자들에게는 자신의 돈으로 풀어주었다. 잔혹했던 리처드 1세와는 정 반대의 인물.
  26. 이시대의 선박용 신발은 튼튼한 샌달 내지는 슬리퍼에 가까운 물건이다.
  27. 참고로 바하 앗 딘은 이날 패배 원인을 살라딘이 너무 관용을 베풀어줘서라고 분석했다. 하긴 말에서 떨어졌다고 말을 갖다줬으니
  28. 다만 부상자는 다수 발생했다.
  29. 이때 리처드는 "3년 조약이 끝나면 와서 예루살렘을 되찾겠소."라는 편지를 보냈고 살라딘은 이에 대한 답변으로 "기왕 뺏긴다면 다른 사람이 아닌 리처드 그대에게 기꺼이 잃겠노라."라고 답장을 보냈던 것은 유명하다.
  30. 그가 재위 기간 중 영국에 있었던 것은 불과 6개월 뿐이라고 한다. 그 틈을 타 귀족들이 힘을 길러 왕권 약화에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31. 십자군 원정때 오스트리아 영주인 레오폴드 5세의 깃발을 패대기치고 우습게 보다가 원한을 샀다. 서유럽에서 수위를 다투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대리인에게 행하는 태도로는, 아무리 이때 영국이 마찬가지로 서유럽에서 이름날리는 강대국이었다지만 상당히 그릇된 편.
  32. 이 일화는 마스터 키튼에서도 나온다. 직접적인 얘기는 아니고 외국에 나간 영국 왕족이 위험에 처했을 때 세계 각지의 정부 요원들에게 알리기 위해 방송국에서 '도나우 강 근처의 동물원에서 사자가 표범 우리에 들어가서 나오지 못하고 있다'라는 말을 반복한다. 여기서 도나우 강 근처의 동물원은 오스트리아, 사자는 리처드 1세, 표범은 레오폴드 5세를 뜻한다.
  33. 시칠리아의 군주인 굴리엘모 2세와 결혼했으나 굴리엘모 2세가 1189년에 사망하는 바람에 미망인으로서 시칠리아의 통치자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탄크레디가 조안나의 상속을 인정하지 않고 포로로 잡아두자, 이에 빡친 리처드는 3차 십자군을 나서는 길에 먼저 시칠리아의 메시나에 상륙해 탄크레디부터 박살내고 여동생의 지위를 돌려주었다.
  34. 살라딘 사후에 술탄이 된다.
  35. 알 아딜의 뒤를 이어 술탄이 되었으며 비교적 기독교도에 호의적인 인물이었다. 나중에 6차 십자군 당시 프리드리히 2세와 평화협정을 맺는다.
  36. 그러나 이렇게 리처드가 회복한 프랑스령은 실지왕 존이 모조리 까먹고 만다.
  37. 이 성을 함락시키는 과정이 참으로 드라마틱한데, 원래 이 성은 리처드 1세가 심혈을 기울여 설계해 사실상 난공불락의 성이었으나.... 존 왕 시절에 성을 개수하면서 화장실을 고치는 과정에서 그 동안 노출이 되지 않았던 하수구가 노출되었다. 덕분에 필리프 2세가 이 성을 공격할 당시에 도저히 공략방법이 보이지 않던 와중에 존 왕 시절에 개수되어진 하수구를 보고, 병사들로 하여금 그곳을 기어 올라가게 했고, 똥과 오물로 범벅이 된 프랑스 병사들이 화장실을 통해 성 안의 예배당으로 출현해 영국군이 혼비백산한 사이 침투한 프랑스 군이 성문을 열어 리처드 1세가 그토록 아꼈던 샤토 가야르가 함락당했다. 이후 필리프 2세는 치를 떨게 만든 이 샤토 가야르를 일부를 남기고 파괴하도록 지시해 그 이후로는 요새로써의 기능은 물론 도시로써의 기능도 완전히 상실했다. 근본적으로 리처드가 설계한 상태에선 어떤 약점도 없었지만 존이 손을 대면서 한순간에 함락되었기 때문에 존의 무능력을 상징하는 사례로도 언급된다.
  38. 리처드 1세와 3차 십자군이 귀환한 뒤의 해안가 기독교 도시들은 그야말로 바람앞의 등불로 살라딘과 그 후계자들이 마음만 먹으면 한 방에 날려버리고 중동의 기독교 세력을 완전히 축출할 수 있었다. 물론 살라딘은 이런 약속을 깨는 비열한 짓은 하지 않았다.
  39. 실제로 중세를 배경으로 한 여러 무훈담에서 필리프 2세는 악역을 자주 맡는다. 본인부터가 정략과 권모술수의 대가였기 때문인데 이런 무훈담에서는 비열한 인물로 많이 묘사되는 편.
  40. "나야말로 리처드 더 라이온하트! 너의 불운을 원망해라!"그야 원망할 만도 하다라거나, "싸움이야말로 내 삶의 보람! 우와아! 피가 끓는다!"
  41. 당연히 실존인물. 유능한 관료로 리처드가 전쟁으로 싸질러 놓은 것을 수습하는 데 힘썼다.
  42. 요컨대, 실제 역사와는 달리 십자군이고 뭐고 자국령에 들어오면 무조건 공격해버리는 인공지능의 한계. 하긴, 살라딘이 아바스 칼리프를 공격하는 세계니 상관없나?
  43. 서로를 인정하고 때로는 흠모하기도 하였던 애증의 관계.
  44. 둘이 전혀 관련이 없지는 않아서 리처드의 누나인 마틸다가 하인리히의 두 번째 부인이라 하인리히와 리처드는 인척 관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