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센-프랑스 전쟁

(프프전쟁에서 넘어옴)

Alphonse-Marie-Adolphe_de_Neuville_-_Les_derni%C3%A8res_cartouches_(1873).jpg
Alphonse-Marie-Adolphe de Neuville - Les dernières cartouches (1873).
Franco-Prussian-War.jpg
French troops at the Battle of Mars-la-Tour, Franco-Prussian War. Painting, The Line of Fire by Pierre-Georges Jeanniot, (1886).
spicheren-roter_berg.png
Carl Röchling: Schlacht bei Spichern.
AKG73670.jpg
스당 항복.[1]

한자普佛 戰爭
영어Franco-Prussian War
독일어Deutsch-Französischer Krieg
프랑스어Guerre franco-allemande de 1870

1870년 7월 19일~1871년 5월 10일

1 개요

어떻게 보면 엠스 전보 사건과 더불어 제1차 세계대전과 그 이후의 역사들을 결정짓게되는 근본적인 계기[2]

과거 나폴레옹에게 당했던 치욕을 그대로 되갚아주다

일명 프프전 보-불[3] 전쟁. 오랜 세월 분열되어 있던 독일이 통일되어 독일제국이 건립되고, 나폴레옹 3세제2제정이 무너졌다.

2 배경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승리하고 독일 통일의 주도권을 쥔 프로이센이었지만, 라인강 이북의 불완전한 통일이었고[4] 가톨릭 지역인 남부 독일 바이에른, 바덴, 뷔르템베르크에 대해서는 우위를 점하지 못한 채 끝난다. 이후 룩셈부르크 분쟁 등으로 프랑스와 갈등을 빚던 비스마르크는 결국 프랑스를 격파해야 독일이 통일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장대한 계획의 실행에 돌입했다.[5]

비스마르크의 외교정책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비스마르크는 패전한 오스트리아의 영토를 전혀 요구하지 않았다. 오직 프로이센 주도하의 독일 통일과 오스트리아의 독일연방 탈퇴만을 요구하는 것으로 전쟁을 끝내어 오스트리아와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시켰다. 대신 하노버 왕국 등 오스트리아의 동맹국들에 가혹한 병합이나 영토 할양 조치와 반프로이센 군주 추방 등을 시행해 독일에서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을 매우 약화시켰다.

아울러 러시아이탈리아와는 군사적 동맹 관계를 유지했으며, 영국과도 친선 정책을 펼쳤다. 아직 프로이센이 세계 정책을 펼치기 전인 유럽의 신흥국이었고, 영국의 식민지 정책과 충돌했던 프랑스를 프로이센이 공격하는 게 영국 국익에 부합했기 때문에 영국은 중립적이었다.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 앨버트공이 친프로이센파라 죽은 후에도 정책이 유지되는 측면도 있었고 영국 왕실과 프로이센은 사돈지간이었다.[6]

더군다나 프랑스는 나폴레옹 3세의 병세에 인도차이나 및 이탈리아 원정, 멕시코 내전 개입 등으로 국제적 고립을 자초하는 판국이었다. 즉, 전쟁이 나도 프랑스를 도와줄 나라가 없었다.

이탈리아 원정을 표면적으로만 보면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가 이탈리아 통일의 주역인 사르데냐 왕국의 대(對)오스트리아전을 지원한 것이었으므로 이탈리아는 통일 과정에서 프랑스의 덕을 봤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직 교황령을 남긴 이탈리아가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 전면적으로 참가할 이유가 부족했으며, 프랑스는 그 이탈리아 원정에서도 중간에 이탈리아를 버리고 오스트리아와 독자적으로 휴전해 버렸으며, 이 때문에 샤르데냐 왕국은 프랑스와의 조약의 파기를 고려 할 정도로 분노하였다. 프랑스의 이탈리아 원조는 공짜가 아니었고, 이탈리아에서 니스와 샤르데냐 왕국의 시초였던 사보이(안시 포함)를 할양받는 대가로 참전한 것이었는데, 니스와 사보이는 고스란히 집어삼킨 주제에 전쟁에서는 중간에 마음대로 발을 뺐으니 이탈리아인들이 분노한 것도 당연했다. 게다가 이탈리아는 프로이센과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동맹을 맺은 상태였으니 어차피 프랑스를 도울 가망은 없었다.[7] 도리어 이탈리아는 프랑스군이 주둔한 교황령을 완전히 확보하길 원했기 때문에 프랑스에 적대적인 편이었고, 민병대가 독자적으로 교황령을 공격하기도 했다.

전쟁의 계기는 스페인에서 시작되었다. 스페인은 1700년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이후 부르봉 왕조가 계속 왕위를 차지한 이래 전통적으로 프랑스와 친선을 유지했고 나폴레옹 전쟁 당시 잠시 험악한 관계였다가 이후 계속 친교를 맺었던 나라였다. 1868년 스페인 여왕 이사벨 2세가 혁명으로 쫓겨나면서 왕위가 비자, 스페인은 유럽의 왕가들을 탐색하다가 빌헬름 1세 친척 호헨촐레른-지크마링겐 가문[8]의 레오폴드 왕자에게 왕위를 제의한다. 이에 비스마르크는 "그거 괜찮네"라는 반응을 보였고 레오폴드 왕자는 처음에 제안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정작 호엔촐레른 가문의 수장 빌헬름 1세는 이에 반대했다. 왜냐하면 그는 전형적인 왕권신수론자로 신의 은총으로 내려진 왕권을 폭도들이 무엄하게 갖다 바치는 게 어처구니가 없었기 때문이었다.[9] 여기에 프랑스의 압력까지 가해지며 당사자인 레오폴트 공이 왕위를 사양하였다.[10] 하지만 프랑스의 격한 반응을 보고 비스마르크가 이용할 계획을 세운다.

일단 스페인 왕위 계승 문제는 일단락되는 듯 하였으나 문제는 다른 방향에서 터져나왔다. 나폴레옹 3세는 앞으로 두 번 다시 이러한 일이 없도록 빌헬름 1세에게 문서로서 보장할 것을 요구했다. 1870년 7월 13일, 나폴레옹 3세의 대리인인 주 프로이센 프랑스 대사가 빌헬름 1세와 만나 이를 요구했고, 애시당초 스페인 왕위에 관심도 없던 빌헬름 1세였지만 프랑스의 이런 과도한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이 소식을 전보로 접한 비스마르크는 이것을 기회로 삼아 전보의 내용을 프랑스 대사와 빌헬름 1세가 단순히 대화를 나눈 것이 아니라 휴가중인 국왕에게 다짜고짜 쳐들어와 무례한 요구를 늘어놓은 대사 vs 열받아서 말도 안 듣고 쫓아낸 국왕 수준으로 바꿔 버렸다! 그리고 이를 영국 신문에 공개했다. 비스마르크는 여기서 객관성을 더 보이고자, 프로이센이나 프랑스가 아닌 제3국 영국 신문을 통해 보도하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엠스 전보 사건이었으며, 어처구니 없는 프랑스측의 오역까지 겹쳐 양국의 여론은 들끓었다.

물론 엠스 전보 사건은 구실중에 하나였고 엠스 전보 사건이 있기 전부터 나폴레옹 3세는 독일서 스페인 왕위를 받아들일경우 선전포고한다고 이미 으름장을 늘어 놓았고 보오전쟁 이후 프랑스가 중립의 대가로 자연국경선 드립을 치며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독일의 라인란트 병합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하고[11] 나서 프랑스와 프로이센 양국은 얼마 안가서 한판 크게 벌일 준비를 대놓고 했기 때문에 영국의 외무장관은 "이 시대의 수치"라고 비난할 정도였다. 엠스 전보 내용도 당시에 여론을 들끓게 만드는 계기는 맞지만 내용 자체는 크게 바뀐 것 없고[12]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보기 무리가 많다. 선전포고 당시 양국에선 전쟁 찬성이 압도적이었고 평화드립을 치는 것은 매국노 취급을 받았다. 프랑스는 건방진 프로이센을 손봐주고 독일과 프로이센에서는 사사건건 독일 내 문제에 '상전'노릇하는 프랑스를 꺾어놓을 필요가 있었다. 전쟁의 원인으로 거론된 스페인 왕위는 이미 스페인은 이미 옛날옛적에 심심하면 폭동이나 터지는 허약한 2류국가로 전락했고 왕의 권위보다는 교회나 귀족들이 힘이 더 셌으며 이미 실추된 스페인 왕실의 권위가 아니더라도 유럽 왕실 어느나라 왕이 된다고 동맹관계를 맺는다는 건 중세때나 가능했지 19세기엔 시대착오적인 발상이었다.[13]

뒤이어 비스마르크가 프랑스의 벨기에 병합 논의를 언론에 노출시켰고 이에 영국은 벨기에의 중립을 보장했다. 영국은 이미 식민지에서 프랑스와 충돌한데다가 빅토리아 여왕의 삼촌이 국왕인 벨기에 왕실과의 의리도 존재했고 무엇보다 1830년 벨기에의 독립을 보장한 조약에 조인해서 국제법상으로도 개입의무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오스트리아 제국도 프랑스의 바람과 달리 1867년 헝가리를 독립시키면서 동군연합이 성립되고 복잡한 내부 사정 때문에 중립을 지키고 러시아도 크림전쟁 때 전유럽이 다굴을 놨을 때 프로이센만 빠진데다가 폴란드 반란 때 프로이센이 진압을 도와준 '은혜'를 보답하고자 역시 중립. 이탈리아는 비스마르크의 부추김에 화답하여 프랑스군대가 지키던 로마를 털고 합병시킨다.

결국 1860년대 이후 국민감정은 악화된 데다가 이미 선전포고 한다고 으름장 벌인 체면도 있고 지속적인 삽질로 벌어진 국내 불만도 잠재울겸 나폴레옹 3세가 1870년 7월 19일, 프로이센에 선전포고함으로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비스마르크는 영국을 비롯한 제3국에 나폴레옹 3세의 여러 침략적 삽질을 상기 시키고 방어전쟁을 선포했다. 그리고 프로이센과 비밀리에 군사동맹을 하고 있던 독일 남부 제후국가들이 일제히 참전하면서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14]

3 전개

1870년 7월 31일 독일프랑스의 국경

먼저 전쟁을 선포했음에도 멕시코 내전 개입 등으로 정신이 없는데다 대규모 전쟁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던 프랑스는 개전 1달여 동안 국경 지대의 요새도 돌파하지 못하고 쩔쩔 매고 있었다. 반면, 4년 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으로 실전 경험까지 쌓은 프로이센의 육군 참모부는 대규모 상비군은 철도를 이용한 신속한 동원 효율적인 참모체계로 프랑스보다 동원이 빨랐다. 프랑스군은 병력 소집도 안된 상태에서 독일의 국경 지역인 자르뷔르켄을 20만 병력으로 공격했지만 프로이센군은 이미 라인강 서안에 38만 5천이나 집결되어 있었고 3주안에 3개 군단이 증원될 예정이었다!

결국 역으로 프랑스의 국경 요새 일부가 프로이센군에게 격퇴되었고, 쫓겨난 프랑스군 13만 명이 거꾸로 메츠 요새에 포위되었다. 이에 프랑스군은 메츠 요새 구원을 위해 대규모 작전을 전개, 각지에서 프로이센군을 격파하여 진격했으나 이건 이미 대규모로 결집한 적군 사이로 아군을 축차 투입하는 삽질이었고 몰아내기는 커녕 생각보다 많은 적군을 보자 변변한 전투도 치르지 못하고 박살이 나서 쫓기게 된다.

1870년 9월 1일, 스당 전투 당시 병력배치

황제 나폴레옹 3세가 직접 이끄는 12만의 대군이 메츠 요새로 진군했으나, 새로운 프로이센군이 메츠로 가는 길을 막아섰고, 몇 차례의 소규모 전투 끝에 돌파가 여의치 않자 프랑스군은 일단 가까운 스당 요새로 후퇴했다. 그리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헬무트 폰 몰트케는 20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물샐틈 없이 스당 요새를 포위했다.

이후 프로이센군은 요새를 향해 화력을 총동원하여 대대적인 포격을 퍼부었고, 이 포격에 실질적인 프랑스군 총사령관이었던 마크 마옹이 중상을 입으면서 프랑스군의 지휘계통이 무너져 버렸다. 그래도 프랑스군은 악착같이 포위망 탈출을 위해 노력했으나 특히 4차례에 걸친 기병돌격은 프로이센군 포병의 십자포화에 실패로 돌아갔고[15], 애시당초 임시로 들어간 스당 요새에 식량이나 탄환이 충분히 비축되어 있을 리도 만무했다. 거기다가 프로이센군이 본격적으로 공세를 개시하니, 9월 1일, 나폴레옹 3세가 항복함으로써 전쟁은 사실상 끝났다.[16] 나폴레옹 3세가 겁쟁이가 아니라 애초에 스당 요새로 쫓겨들어간 순간 별 대책이 없었다. 병력도 적고 화력도 프로이센군이 강했기 때문... 나폴레옹 3세는 항복을 하면서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에게 자비를 구하려고 했으나 비스마르크가 이를 막아섰고, 결국 아무런 관용 없이 장교를 제외한 병사는 모두 무장 해제 당하고 포로로 잡힌다.

1878년 빌헬름 캄프하우젠(Wilhelm Camphausen) 작품, 스당 전투 이후 비스마르크와 포로로 잡힌 나폴레옹 3세

4 국민방위정부

항복 후에도 비스마르크는 나폴레옹 3세에게 대우를 극진히 했는데 나폴레옹 3세의 정부가 무너지면 항복받을 대상이 없어지고 전쟁이 길어지기 때문이었다. 비스마르크의 바람과는 달리 파리에선 제정이 붕괴되고 공화정이 들어선다. 그러나 주력군이 모두 붕괴되고, 황제가 포로로 잡혔다는 충격적인 소식에 열받은 파리 시민들은 루이 쥘 트로쉬를 대통령으로 하는 국민방위정부를 만들어서 항쟁을 지속하기로 결정하였다. 패퇴한 프랑스군이 파리를 중심으로 일부나마 모이기 시작하였으며, 그들과 함께 국민방위정부는 국민방위군을 조직하였다.

전쟁이 끝난 줄 알고 좋아라 했던 프로이센은 당황해 하면서도 프랑스 영내로 깊숙히 진격, 9월 15일 파리 외곽에 당도하였다. 그리고 국민방위정부에게 알자스-로렌을 할양하는 조건으로 항복할 것을 요구했고, 국민방위정부에선 그대신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의 식민지를 할양하는 안을 고려하였으나 대통령인 루이 쥘 트로쉬가 영토를 1인치라도 할양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기 때문에 전쟁의 연장이 결정되었다. 9월 19일 봉쇄선을 구축한 프로이센군은 파리에 물자 및 인력이 반입되지 않게 하여 말려죽도록 유도하였다. 하지만 프로이센군도 예기치 않은 진격으로 보급난을 겪었기 때문에 현지인에게 물자를 구매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사회주의자 출신인 내무 장관 레옹 강베타가 열기구를 타고 파리를 탈출해 군대를 규합한 뒤 오를레앙을 프로이센군에게서 탈환하였다. 하지만 10만의 프로이센군이 지방에서 봉기하는 프랑스군을 진압하기 위해 추가로 투입되었기 때문에 12월 4일 오를레앙은 재함락당하고 1월 10일 르망 전투에서 프랑스 남방군은 괴멸되었다. 프랑스의 북부군도 곧 프로이센군에게 격퇴되었고, 동부군은 일시적으로 프로이센군을 위협하였지만 역시 격퇴되면서 파리는 완전히 고립무원의 처지로 빠져버렸다.

결국 약 4개월에 걸친 포위로 식량이 바닥나고 동물원의 모든 동물들[17], 그걸로 부족해 쥐까지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자 국민방위정부는 평화를 제의했다.

5 결과

독일 제2제국 선포식[18]

결국 해가 바뀐 1871년 1월,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고 빌헬름 1세는 비스마르크의 설득으로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제2제국)의 탄생을 선포하고 초대 황제로 즉위했다. 베르사유에서 즉위한 것은 프랑스 황제를 꺾었다는 등의 황제 드립이랑 별 상관 없다. 전쟁 중에 독일 지역 각국의 군주들이 명목상 군통수권자라 전쟁터에 있었기 때문. 나폴레옹 3세는 황제를 하든 말든 나폴레옹이란 이름 자체가 유럽의 높으신 분들[19]에게는 적법한 왕위를 찬탈한 자에 '폭도 두목'쯤으로 여겨졌고 왕관도 아랫것들인 시민 계급의 추대로 받았기 때문에 그깟 황제관 열번 갖다 줘도 버릴 수준이었다. 높으신 분들 생각으론 통치 가문의 왕위는 신에게 받은 것이고 황제는 군주들이 추대하는 것이 유럽 전통이다.[20]

독일 제국 선포식에서 북독일 연방 제후와 남독일 3개 국가 군주들이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를 독일 제국 황제로 추대했다. 결국 독일 제국 황제는 군대와 제후국 군주들의 추대로 이어진 것이지 시민 계급에 빚진 게 없었기 때문에 독일 제국 시대 내내 군과 황제는 입헌에도 불구하고 초법적인 지위를 이어 나갔다. 막상 빌헬름 1세는 프로이센 왕국이 사라지는 것이나 다름없고 황제 자리를 외교상 타국 군주가 오면 수여하는 '명예 대령'에 비유하며 탐탁해하지 않았다고 한다. 비스마르크는 '아랫것들'이 좋아하는 민족주의 때문에 통일 국가는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설득했다. 전쟁 승리의 삼인방 프로이센 재상 비스마르크, 육군 참모총장 몰트케, 국방 장관 폰 론(Von Roon)은 독일에서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국민방위정부는 항복 조건으로 파리에서 1871년 3월 1일 독일군의 개선식을 하루동안 하는 것을 허용하여[21] 시민들은 이를 한심하게 봤고[22] 이후에도 제3공화정은 두고두고 까였다.

이후 독일과 프랑스는 종전 조약인 프랑크푸르트 조약을 체결하였다. 오스트리아엔 관대하였던 비스마르크였지만 프랑스는 앞으로 재기불능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필요성 때문에 자그마치 50억 프랑에 달하는 배상금을 요구하고, 17세기 베스트팔렌 조약 전후로 지속적으로 조금씩 프랑스의 영토가 되었던 알자스-로렌 지방을 가져갔다.

그러나 먼저 선전포고하고도 안방에서 처참하게 발렸다는 사실에 프랑스는 이미 큰 충격을 받은 상황이었다. 몇십 년 전만 해도 프랑스는 전 유럽을 석권할 정도로 유럽 최강급의 육군력을 지니고 있었고, 그 위력은 그 때까지 의심받지 않고 있었으므로. 물론 프로이센이 18세기 프리드리히 대왕 이래 유럽 최정예 육군 이미지는 있었지만 나폴레옹 시대 이후 러시아군을 제외한 유럽 최고의 육군 La Grande Armée(위대한 군대)가 안방에서 제대로 된 전투도 없이 추태를 보인 것이었다.[23] 이런 상황이었으니, 당시 프랑스에 가해진 충격은 막대했다. 병력 손실은 프랑스가 35만 프로이센 연합군이 11만.

나폴레옹 전쟁 이후 극악의 출산율로 루이 14세 때 유럽의 중국이라 불리던 물량이 정체된 반면, 영국과 독일은 산업혁명과 영아 사망율 감소로 100여년 동안 3~4배씩 인구가 증가한 상태였다. 더구나 프랑스는 2차 산업혁명이 일어난 중공업(제철, 화학, 전기) 중 철광석석탄 생산이 빈약해 영국과 독일에 크게 뒤떨어진 농업국가였다.

그러는 와중에 프랑스인들은 내분을 벌였고,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정부인 파리 코뮌을 만들었다. 하지만 파리에서 탈출한 대통령 아돌프 티에르는 지방군을 모아서 반격을 했고, 그 와중에 도움을 받은 상대가 방금 전까지 싸우던 상대인 독일이었다(...) 티에르는 파리 코뮌을 진압하기 위해 프랑스군 포로를 석방해 줄 것을 독일에 요청하였고, 독일이 이를 수락하였다(...) 파리 코뮌은 안 그래도 '또' 내분을 벌이던 상황에 지방의 지지도 얻지 못하고, 도리어 티에르가 석방된 포로로 전력을 보강하여 공격하니 100일도 안되어서 몰락(...)

여하간 프랑스는 빠른 시간내에 50억 프랑을 모금해서 배상금을 완납, 비스마르크를 놀라게 했다. 비스마르크는 50억 프랑을 배상하려면 최소 5년 이상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 실제론 1년 8개월 정도만에 다 갚았다고 한다.[24] 몇년 동안 배상금을 무기로 프랑스를 요충지 요새를 점령하려고 했는데 실패한 셈.

이렇게 배상금을 지불한 것이 경제사적으로 중요한 1873년의 대불황의 중요한 원인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당시 프랑스는 포도 농장을 초토화시킨 필록세라병과, 누에 미립자병 유행으로 주요 산업인 와인과 비단 생산이 초토화되고 있었는데, 여기에 50억 프랑에 달하는 배상금까지 지불하니 경제 공황을 야기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다만 이것은 추정중 하나고, 독일의 탈러 은화 생산 중단으로 보기도 한다.

이후 양국의 국민 감정은 크게 악화되어 서로를 제1 주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25] 결국 프랑스는 이 때의 분노를 50년 뒤 몇 배 이상으로 갚고야 만다. 독일 또한 이 때의 프랑스의 복수에 분노하여 20년 후 또 다시 갚는다. 그리고 5년 뒤 프랑스는 이 독일의 복수를 "나는 독일이 너무 좋다. 그래서 이었으면 더 좋겠다"다시 되갚는다. 고만해 미친놈들아[26]

패전으로 프랑스의 여론은 극도로 국가주의-애국주의 성향이 강해졌고[27][28] (당시 안 그런 나라가 없다지만) 이 과정에서 인종 차별도 더욱 득세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발생한 사건 중 하나가 드레퓌스 사건이다. 비스마르크에 낚인 나폴레옹 3세는 프랑스 공화 정부가 들어서면서 강제 퇴위당하자 갈 곳을 잃고 영국에 망명해서 쓸쓸한 최후를 맞이했다.

한편 전쟁의 양상을 보고 유럽 각국에서 참모 체계의 유용함을 목격하고 프로이센과 비슷한 참모 체계를 배우고 각국에 적용하는 계기가 된다. 19세기 초반까지 지휘관의 전술적인 능력에 의존하던 전쟁의 양상이 보오전쟁과 보불전쟁을 통해 효율적인 참모 체계로 병력 동원, 이동, 지형 연구, 장비 및 병력 보급에 이전까지 주먹구구식으로 행해졌던 것을 군에도 기술화된 '관료'인 참모들이 좌우하는 현대적인 양상의 전쟁이 시작이 된 셈.

한편 프랑스군 또한 참모 제도를 도입해 이번 전쟁에서 계획이 철저하지 못했던 점을 반복하지 않게 했고, 장비를 현대화했으며 철도를 이용한 보급과 증원 체제를 정비했다. 그 결과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의 슐리펜 계획이 먹히기 시작하고 프랑스의 제17계획이 먹히지 않는 막장에 도달했음에도 보불 전쟁의 교훈을 이용해 꾸역꾸역 방어에 성공했으며, 사실상 독일 하나를 상대로 미국과 영국까지 끌어들여서 다구리를 쳤음에도 한참이나 걸렸지만 결국 제1차 세계대전의 승자는 프랑스가 되었다.

6 대중 문화에 끼친 영향

프랑스의 작가 알퐁스 도데는 패전에 충격을 입고 국가적, 민족적 관점에서 소설 마지막 수업을 쓰게 된다. 모파상의 단편들인 두 친구비곗덩어리역시 이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직접적인 영향은 아니지만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인 피에르 드 쿠베르탱은 보불 전쟁 이후 프랑스의 침체기에서 올림픽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다. 교육학을 전공한 쿠베르탱은 프랑스의 몰락 원인을 청년의 신체가 허약했다는 점에서 찾았고, 나라의 근간인 청소년들의 신체를 운동경기로써 단련하는 것으로써 프랑스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었다고 믿었다. 이렇게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체육 발전을 주장하던 쿠베르탱은 19세기 말엽부터 유행한 국제주의에 영향을 받았고, 이를 바탕으로 근대 올림픽을 부활시키게 된다.

대체역사 호사가들에겐 이 전쟁을 사라예보 사건을 넘어서 진정한 제1, 2차 세계대전의 시발점으로 본다고. 애초에 이 전쟁만 아니었으면[29] 독일 제국 대신 북독일 연방만 남고, 프랑스도 독일에 그렇게 척지지 않고, 훗날 빌헬름 2세가 영국에 경쟁심 붙을 이유도 없어 경사났네 경사났어로 유럽의 백년 평화가 지속되었을 것이라는 이야기.. 뭐 1차대전까지만 해도 충분히 반세기의 평화기지만.. 만약에 참고.

BiBi 아이리스의 시대적 배경은 이 전쟁 종료 후 12년이 지난 1883년이지만, 이 전쟁 때문에 주인공의 운명이 바뀌어버렸다. 여주인공 아이리스가 태어나기 전, 아버지인 미르벨 자작이 이 전쟁에서 전사했다는 언급이 나온다. 덕택에 아이리스의 엄마 미르벨 자작부인은 임신 중에 이 사실을 들은데다가 뱃속의 아이가 딸일 경우 한 푼의 유산상속도 못 받는다는 시아버지의 통보까지 듣고 심각한 산후 우울증으로 고생하여 갓 태어난 아이를 돌보지도 못하게 되었다. 덕택에 아이리스는 태어나자마자 엄마에게 버림받았다는 오해로 한동안 갈등을 빚기도 한다.
  1. The Capitulation of Sedan.
  2. 오죽하면 이 전쟁이야말로 근대에서 현대로 교체되는 진정한 분기점이라는 이야기가 있을정도다.
  3. 보로사(프러시아)-불란서(프랑스).
  4. 하노버, 헤센-나사우, 프랑크프루트는 프로이센에 합병되고 작센은 프랑스의 견제로 연방에는 가입하지만 합병은 면한다.
  5. 사실 보오전쟁에서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에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떼어주며 중립을 요청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보오전쟁 이전부터 최종 승부를 프랑스와 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6. 프로이센 프리드리히 왕세자와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인 빅토리아 공주가 결혼.
  7. 이들 지역은 현재까지도 프랑스령이다. 이탈리아가 비시 프랑스 때 집적거리긴 했지만.
  8. 프로이센 왕실 호엔촐레른 가문의 방계이다.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가문은 가톨릭이고, 프로이센 왕가는 개신교 칼뱅파였다.
  9. 빌헬름 1세는 1848년 혁명 때도 형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자식이 없어서 동생이 왕위계승자임)와 달리 왕세제(王世弟)로서 강경진압을 내세워 혁명세력에 쫓겨서 잠시 망명했고 보오전쟁 때 동맹국이 된 통일 이탈리아 왕국에도 폭도들이 혁명으로 만든 나라라며 부정적이었다. 그래서 당시 비스마르크가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는다는 소리에 경악했지만 결국엔 비스마르크 뜻대로 관철시킨다.
  10. 쿨하게 거절한 것은 왕위에도 별 욕심이 없었지만, 스페인은 혁명으로 원래 왕가인 부르봉 가문 왕을 쫓아내고 내전 상태였으므로 기반도 없는 외국 출신 왕이 가서 무슨 험한 꼴을 당할지도 모르는 판이었다. 게다가 본인은 호엔촐레른 가문의 가주였고 자식들은 후사가 없는 동생 루마니아 왕의 자리를 물려받기로 약속되어있어서 아쉬울 게 없었다. 결국엔 1874년 스페인에는 부르봉 왕조가 복귀하고, 레오폴드의 차남 페르디난트가 루마니아 왕으로 즉위하였다.
  11. 애초에 룩셈부르크와 벨기에를 자기땅도 아닌데 준다고 낚은건 비스마르크다.. 비스마르크는 중립국 두 나라의 프랑스 합병을 영국이 절대로 인정하지 않을것을 내다봤기 때문에 돈도 안드는 낚시질을 한것
  12. <케임브리지 독일사> -마틴 키친-
  13. 유럽 왕실과의 혈연이 나라 사이에서의 외교관계를 나타내기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국가간의 결속을 다지거나 하는 정도지 왕실이 주도적으로 혼인관계를 맺은 타국에 국가가 외교정책을 펴는게 아니었다. 예를 들어 세계 1차 대전 당시 영국,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 벨기에, 바이에른등의 왕가들은 서로 친인척관계였다(...) 프랑스는 1830, 1848 혁명 이후 유럽 왕실과의 연결 고리가 끊어지고 나서 자기 나라에 없던 왕실사이의 교류가 외교정책에 미치는 영향을 과대평가한다.
  14. 남부 제후국, 특히 바이에른은 프로이센에 적대적이었지만 민족주의 감정이 들끓어올라서 자칫 중립이나 프랑스 편을 들었다간 혁명으로 왕가가 쫓겨날 판인데다가 비스마르크가 하노버를 합병하면서 챙긴 왕실 금고로 바이에른 왕실을 구워 삶았다. 그 돈으로 지은 궁전이 노이슈반슈타인 성.
  15. 스당 요새에서 포위를 뚫으려고 프랑스 기병대의 자살에 가까운 돌격이 몇번 이어지자 빌헬름 1세는 "진정 용감한 사람들" 이라며 경의를 표하기도 한다.
  16. 참고로 스당 전투 직후 이탈리아군은 프랑스군이 주둔하고 있던 교황령 로마로 진군했다. 이어 10월에 국민 투표를 거쳐 로마를 병합,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로 선포했다. 이탈리아로서는 보-불 양국의 싸움에서 어부지리를 한 셈.
  17. 가장 먼저 희생된 것은 덩치 큰 코끼리였다. 그 코끼리는 파리 시민들의 귀여움을 받던 동물이라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 했지만 딱히 막지는 않았다.
  18. 당시 비스마르크는 남들처럼 군청색 제복을 입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황제 빌헬름 1세의 특별 지시로 눈에 띄는 흰색 제복을 입은 것처럼 묘사됐다.
  19. 자국 프랑스에서조차도 마찬가지다. 왕당파 부르봉 지지파는 물론이고 다른 왕당파인 오를레앙파에서도 씹어댔다. 한편 나폴레옹 3세는 왕당파를 견제하려고 좌파를 이용할 정도였다.
  20. 선제후, , 황제 참조. 서양 황제를 동양 황제로 여기는 건 번역상 오류이다.
  21. 이것은 중세적 로망이 남아있던 빌헬름 1세의 강력한 건의 때문이었고 비스마르크는 주저하지만 프랑스 신정부에서 의외로 이의없이 받아들인다.
  22. 모두 검은 기를 내걸고 안 나왔다는 소린 국뽕 섞인 뻥이고 많은 파리 시민들이 요즘 시대에도 이딴 게 남았나 하고 신기해서 구경 나왔다.
  23. 물론 나폴레옹이 몰락한 1814년, 1815년 두 번에 걸쳐 외국 군대에 파리가 털렸지만 여러 나라가 쳐들어 온 것이었고 이번엔 사실상 프로이센 1개국에 발린 것이니. 더구나 프랑스 육군은 이미 크림 전쟁에서 러시아를 바르며 복수했던 상황이었다. 애초에 러시아 원정도 동장군 디버프
  24. 당시 50억 프랑은 프랑스 GNP의 25%에 해당되는 금액이었다고 한다. 출처는 Devereux, Michael B., and Gregor W. Smith. "Transfer problem dynamics: Macroeconomics of the Franco-Prussian war indemnity." Journal of Monetary Economics 54.8 (2007): 2375-2398.
  25. 이러한 상호 적대감은 비스마르크의 프랑스 고립 정책으로 몇 배 더 강해졌다.
  26. 아닌 게 아니라 자기들도 좀 심했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2차 대전 후에는 프랑스와 서독이 주도해서 유럽 통합 기구의 발단이 되었다고 하는 유럽 석탄 철강 공동체(ECSC), 유럽 경제 공동체(EEC) 등을 세우고 이것이 유럽연합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27. 특히 오를레앙이 함락당하고 알자스-로렌을 빼앗긴 탓인지 백년전쟁 당시 로렌 지방 출신이면서 오를레앙을 지켜냈었던 잔 다르크가 국민적인 영웅으로 더욱 부각되었다. 그런데 당시 독일에서도 잔 다르크가 독일령이 된 로렌 출신이니 자기네 사람이라는 드립이 나오기도 했다.(...) 흔히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별 볼 일 없던 그녀를 영웅으로 조작했다는 수정주의 이론이 교양 지식처럼 퍼져 있지만, 단순히 그렇게 보는 시각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자세한 내용은 잔 다르크 항목 참조.
  28. 또 이 시기에 불어 역사상 특이한 언어 운동도 일어났는데 '구개수 전동음'으로 발음되던 r을, 라틴어처럼 '치경 전동음'으로 발음하자는 복고 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적대국인 프로이센/독일을 위시한) 주변국에서 유럽의 중심이라면서 정작 대부분 유럽인들이 구사할 수 있는 전동음을 구사할 수 없다고 깐 적이 있기 때문이다. 패전한 뒤에 얼마 안 있어 1888년 국제음성기호가 막 발표되던 참이라 음성학에 대한 관심이 크게 태동되고 있던 시기였다.
  29. 그중 한 가지 예를 들어서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엠스 전보 사건을 접하고 나서 나폴레옹 3세는 전혀 선전포고할 생각이 없었다. 수십년간 유럽 정치판에서 굴러먹은 감각으로 볼때 프로이센과의 전면전은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 특히 1860년대 후반부터 혹시 모를 실전에 대비해 보고 받은, 장부상 머릿수만 많고 실력이 떨어지는 프랑스군의 실상을 알고 현실은 시궁창이란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현실은 이렇게 알고 있다 한들 격렬하게 들끓는 국민 감정을 막을 수 없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