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무너진 베를린 장벽, 1989년 11월 10일 |
철의 장막이 무너지다
냉전의 마지막이자 하이라이트를 장식한 사건이었으며 이 사건을 기점으로 유럽에서는 공산주의가 완전히 몰락했으며 정치적으로 공산주의를 유지한 아시아 공산 국가들도 경제적으로 시장 경제를 도입하는 등 현실 사회주의 국가는 사실상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루마니아는 동구권에서 연달아 공산당 정권이 붕괴하고 민주주의 체제로 바뀌는 과정에서, 무력을 사용하여 유혈사태가 일어난 유일한 나라이기도 하다.[1]
1989년 초 폴란드, 헝가리에서 시작되었고 이런 나비효과 현상은 1992년 5월 알바니아에서 열린 총선에서 공산당의 후신인 사회당이 패배함으로서 혁명은 막을 내린다. 그리고 1993년이나 1994년, 혹은 그 이후에도 그 영향이 계속 어느정도 유지되기는 했었다.[2]
벨벳 혁명이란 용어도 있지만 이는 주로 체코슬로바키아의 무혈 혁명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정확히 말하자면 이는 1989년 동구권 붕괴에 포함된 용어이다.
비슷한 단어로는 동유럽의 가을이나 동구권 붕괴가 있다.[3][4]
1 동유럽
1.1 폴란드
1989년 2월 6일부터 4월 5일까지 열린 자유노조-공산당 간 원탁 회의, 바르샤바 |
폴란드는 경제적으로 그리 안정된 국가는 아니었기 때문에 사실 공산주의 국가치고는 인민의 의한 정치변동이 일어나는 보기 드문 국가였으며 1956년과 1970년에 시위를 통해서 지도자가 교체되는 과정을 겪었다.(물론 그렇다고 해서 전면적인 자유화 조치가 일어난건 아니다.) 그러나 기에레크도 1970년대 후반의 오일쇼크와 외채위기로 파산상태에 직면하게 노동자들의 반발이 다시금 커지게 되었고 이에 따라 레흐 바웬사의 주도로 자유 노조(솔리다르노슈치, Solidarność)가 설립되어 반정부 투쟁이 일어났고 당시 공산정권에서도 딱히 뾰족한 수가 없었기에 일단 자유노조를 인정하기는 했지만 1981년 12월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Wojciech Witold Jaruzelski) 장군이 당 서기장에 오르면서 계엄령 선포[5]를 통해 이를 철저하게 탄압했다.
그러나 이후 10년 가까이 같은 폴란드 출신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지원 아래 반정부 투쟁은 계속 이어졌으며 바웬사는 가택연금 중이던 1983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면서 그 노력을 인정받는다. 그리고 폴란드 정부의 강력한 긴축정책과 노동자 탄압에도 경제는 좀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으며 명분에 금이 가기 시작하면서 1988년에 들어서면서 해빙 분위기가 무르익기 시작했으며 1989년에 이르자 이러한 자유화 과정은 본격화되었다. 역사적인 공산당-자유 노조간 원탁 회의 결과 6월 4일[6]과 6월 18일 두 차례에 걸쳐 폴란드 인민 공화국 최초의 상하원 자유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과정에서 하원의 경우 자유 노조가 원내 제 2정당이 되었지만 집권 공산당인 폴란드 통일 노동자당(Polska Zjednoczona Partia Robotnicza, PZPR)이 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었으며 실제로 상원에서는 100석 중 자유노조가 99석을 가져가는 초압승을 거두었다. 총선 결과로 폴란드는 40여 년 만에 동유럽 공산권에서 최초로 비 공산주의 정권을 탄생시켰다. 다만 야루젤스키가 이 비공산 정권의 대통령으로 재취임했으며 노태우?레흐 바웬사는 1년 후인 1990년 11월 25일에 다시 실시된 대선에서야 비로소 대통령 자리에 오르게되었다.
1.2 헝가리
사망 31년 만에 공식적으로 치뤄진 너지 임레의 국장. 말레테르 팔(Maléter Pál)을 포함하여 헝가리 혁명 직후 소련에 의해 처형당한 너지 임레의 측근 4명의 장례식도 같이 열렸다. 부다페스트, 1989년 6월 16일 |
1956년 헝가리 혁명이 실패한 이후 서기장 자리에 오른 카다르 야노시(Kádár János)는 급격한 개혁을 추진하다 소련에 처형당한 너지 임레의 최후를 교훈삼아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계속 잔류하면서도 경제적인 면에서 시장경제 요소를 도입하는 점진적인 개혁안을 채택했다. 이후 30여년 동안 굴라쉬 공산주의라는 헝가리만의 독특한 공산주의 체제가 유지되어왔다. 그 영향으로 헝가리는 1980년대 들어서서 경제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자유화를 점진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카다르의 사망 몇 개월 전인 1989년 1월 12일 헝가리 의회는 집회, 결사의 자유와 자유로운 상업 행위 그리고 개정된 선거안을 통과시켰으며 2주 후인 1월 29일에는 그동안 폭동으로 치부되었던 헝가리 혁명을 민중 봉기로 재규정짓는다. 이에 따라 새로운 시민 및 비 공산계열 준정당들이 결성되기 시작했으며 2016년 현재 헝가리 집권 여당인 피데스(Fidesz)도 오르반 빅토르를 위시한 시민 운동가들에 의해 이때 창당되었다. 5월 2일부터 헝가리는 오스트리아간 국경에 쳐져있던 철조망을 철거하기 시작해 실질적인 국경 개방을 단행했으며 이는 동독인들의 서독으로의 탈출을 사실상 묵인하여 동독 정권을 붕괴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6월 16일 31년 만에 너지 임레가 복권되어 부다페스트에서 국장 및 이장식이 열리면서 헝가리 혁명이 폭동이 아닌 혁명이라는 것이 의회 차원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공식 인정되었다. 9월 18일 열린 원탁 회의에서 헌법 재판소 설치 및 다당제에 기반한 총선 실시가 합의되었으며 10월 7일 헝가리 공산당이 당명을 헝가리 사회당으로 개명했다. 이듬해인 1990년 3월 24일 총선 및 대선이 동시에 치뤄지고 헝가리 인민 공화국이라는 국명도 헝가리 공화국으로 개명되어 헝가리에서 공산주의 체제는 완전히 소멸되었다.
1.3 동독
베를린 장벽 붕괴 다음날 소식을 전하는 서독의 공영방송 ARD의 뉴스 프로그램 타게스샤우. 1989년 11월 10일 |
독일에게는 다시 통일을 이루게 된 계기가 되었다
동독의 민주화 운동은 공산 정권 붕괴를 넘어서서 45년간 계속된 독일 분단에 마침표를 찍게 만들었다. 자세한 내용은 독일 통일을 참고.[7]
1.4 체코슬로바키아
파일:/pds/200705/28/15/d0015015 11053080.jpg
프라하 바츨라프(웬체슬라스) 광장, 1989년 11월 27일 |
프라하의 봄이 실패한 이래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과 같이 동구권 내에서도 손꼽힐만큼 억압적인 통치[8]를 단행했다. 이 같은 억압은 1989년에 들어서도 마찬가지여서 순순히 물러난 폴란드나 헝가리, 불가리아와 달리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동독과 마찬가지로 정권을 내줄 생각이 없었다. 11월 10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는 와중에도 대통령과 서기장 자리를 맡고 있었던 구스타프 후사크(Gustáv Husák)와 밀로시 야케스(Miloš Jakeš)는 정치 개혁을 거부했다. 그러나 이 같은 상황은 몇주도 안되어 반전되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 1주일이 지난 11월 17일부터 프라하와 브라티슬라바를 중심으로 학생 시위가 시작되고 11월 20일에는 프라하 중심에 있는 바츨라프 광장에서만 무려 20만명이 운집한 대규모 비폭력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으며 결국 여기에 굴복해 24일 야케스가 공산당 자리에서 사임했다. 그러나 시위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25일에는 이것의 4배가 넘는 80만 명이 몰려든다. 이와 같은 대규모 무혈 시위에 의해 정치개혁을 완고하게 거부하던 체코슬로바키아 공산 정권도 결국 굴복하고 말았으니 이것이 바로 벨벳 혁명이다. 11월 28일 공산당은 다당제 도입을 중심으로 한 전면적인 정치 개혁을 선언했으며 12월 10일 대통령인 후사크까지 사임했다. 이에 따라 시민 운동 세력이 급부상하기 시작했으며 극작가인 바츨라프 하벨이 차기 지도자로 물색되고 프라하의 봄 당시 소련에 의해 강제로 사임당한 전 서기장 알렉산데르 둡체크도 21년만에 다시 정계에 모습을 드러낸다. 12월 28일 둡체크가 연방 의회 의장에 선출되어 공식적으로 정계에 복귀하고 다음날 하벨도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이듬해 6월 자유 선거가 실시되어 몇 달에 걸친 벨벳 혁명은 막을 내리고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 정권은 완전히 몰락했다.[9]
1.5 불가리아
지프코프의 처벌을 요구하는 불가리아 시위대, 소피아, 1989년 11월 18일 |
또 다른 이름은 푸른 혁명[10]
토도르 지프코프(Todor Zhivkov, Тодор Живков)가 장기 집권하던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은 동유럽 공산권에서 알바니아와 루마니아를 제외하고 가장 억압적이면서도 안정적인 국가로 꼽혔었으며 큰 소요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11월 10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는 소식이 불가리아에도 전해지자 공산당에서는 그 날로 지프코프를 서기장 자리에서 해임하고 페터르 믈라데노프(Petar Mladenov, Петър Младенов)를 후임으로 지명했다. 믈라데노프는 그동안 고르바초프식 개혁에 반대하던 지프코프와 반대로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할 것임을 약속했다. 여기에 불가리아인들은 고무되어 11월 17일 수도 소피아를 중심으로 다당제 도입등 전면적인 정치 개혁을 요구하는 시위를 대대적으로 벌인다. 이러한 반정부 움직임은 민주 동맹(Съюз на демократичните сили)이라는 반정부 단체 설립을 통해 조직화되었으며 12월 11일 믈라데노프는 일당 독재를 포기하고 자유 선거를 실시할 것을 선언했다. 이듬해 4월 불가리아 공산당은 당명을 불가리아 사회당으로 개명했으며 6월 59년만에 처음으로 자유 선거가 실시됨으로서 불가리아의 공산 체제는 막을 내린다.
1.6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1989년 12월 (출처: 위키피디아). |
이러한 상황 가운데 동구권 중에서는 당시 알바니아와 루마니아의 상황이 제일 심각했다. 특히 동구권에서 연달아 공산정권이 붕괴하는 과정에서 유일하게 유혈사태가 일어난 국가는 루마니아 뿐이었다. 좀더 자세한 내용은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항목에서 '종말' 부분을 참조
외채에 시달리던 타 동구권 국가들과 다르게 루마니아는 외채는 다 갚았다. 그러나 이는 수입은 안하고 수출만 밀어붙이던 괴악한 경제 계획의 산물로[11] 이로 인해 인민들의 생활수준은 동구권에서도 알바니아에 뒤 이은 최악의 수준으로 악화일로에 치달았다.
이런 가운데서도 차우셰스쿠의 통제 정책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소소한 시위도 유혈 진압하여 국민들의 저항을 원천 차단하였기에 1989년 중순까지만 해도 루마니아는 끄떡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지 한달이 지난 12월 16일 헝가리계가 많이 살고 있던 트란실바니아의 도시 티미쇼미라(Timișoara)에서 공산당 정부를 비판하던 개신교 소속 퇴케시 라즐로(Tőkés László) 목사가 정부의 강압에 의해 교구에서 사임하고 지역 주민들이 여기에 항의하자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여 대규모 사상자를 낸 소위 티미쇼아라 사건이 터진 이후 본격적으로 루마니아에도 저항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러한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12월 21일 이란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차우셰스쿠가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자신의 건재함을 알리기 위해 관제 집회를 열었지만 이것이 시민들의 분노로 인해 역효과를 내고 마침내 다음날인 12월 22일 루마니아에서도 본격적으로 반차우셰스쿠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차우셰스쿠의 잔인한 독재를 싫어하던 군인들도 정권의 수혜를 입던 보안군 '세쿠리타테'(Securitate)를 제외하고 시민들 편에 서서 시민들을 도와주게 되고 이는 유혈 사태로 이어지게 된다.[12]
이렇게 차우세스쿠 비밀 보안군과 대결이 일어남으로써 사실상 절반은 준내전 비슷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13] 차우세스쿠는 북한으로 도망치려고 했지만[14] 결국 시민들에게 붙잡혀 체포를 당했고, 그의 아내였던 엘레나 차우세스쿠와 함께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처형됨과 동시에 보안군의 준동도 대부분 진압된다. 이렇게 루마니아도 1989년의 마지막 주를 해피엔딩(...)으로 장식하면서 민주주의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 차우셰스쿠 처형 직후의 루마니아 모습을 보도하는 1990년 1월 5일 당시 MBC 뉴스 영상.#
이 사건을 루마니아 혁명이라고 부르며, 1989년 12월 25일 혁명 이후 루마니아인들은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인 민주화를 쟁취하게 된다.
1.7 알바니아
티라나에서 엔베르 호자의 동상을 무너뜨리는 시위대, 1990년 12월 11일 |
알바니아의 자유화 물결은 타 국가들보다 1년 늦게 찾아왔다.[15] 엔베르 호자 집권 이후 벌인 폭압 정책은 알바니아를 동유럽 공산권 중에서도 매우 낙후된 경제 상황에 시달리게 만들었다. 1989년 당시 알바니아의 1인당 GDP는 겨우 723달러[16]에 불과해 동유럽에서 가장 낮았다. 특히 호자의 무신론 국가 선포 등의 극단적인 종교 탄압 정책과 외국인과의 대화 및 외국 문물 수입 금지 등의 고립 정책은 알바니아를 매우 억압적이면서 동시에 유럽에서도 가장 크게 뒤떨어진 국가로 만들었다. 이같은 기조는 1985년 호자 사망 이후 집권한 라미즈 알리아(Ramiz Alia)에 의해 조금은 완화되었으나 기본적인 방향은 그대로였다. 이 같은 억압 및 고립 정책은 1989년 타 동구권 공산 정권, 심지어 루마니아의 공산 정권까지 무너지는 과정에서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같은해 슈코더르(Shkodra)에서 이 같은 분위기에 영향을 받은 반정부 시위가 벌어지긴 했으나 큰 주목을 받지 못하였으며 1990년에 들어서도 알리아를 위시한 집권 공산당은 타 국가들의 개혁 상황에서도 기존 스탈린주의 체제를 유지하겠다는 방침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상황 속에서도 타 국가들의 소식이 음성적으로 알바니아 국내에 유통되기 시작했고 이 같은 동구권의 개방 소식을 알고 있는 국민들의 불만은 갈수록 높아져갔다. 결국 해를 넘기지 못하고 전국적인 반정부 시위가 벌어지기 시작했으며 이는 해를 넘긴지 얼마 안된 1991년 2월 20일 수도 티라나에서 시민들이 엔베르 호자의 동상을 무너뜨리면서 절정에 달했다. 결국 알바니아 공산당도 굴복하여 같은 해 3월 1923년 이후 68년 만에 처음으로 자유 선거를 실시했다. 선거 결과 공산당이 승리하긴 하였으나 일당 독재를 유지할 수는 없었으며 이듬해 5월 다시 실시된 총선에서 공산당이 패하면서 동구 공산권 중에서도 최악의 폐쇄 정책을 펼친 알바니아 공산당은 정권을 잃고 만다. 이후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타 동구권 국가들과 달리 알바니아는 극도의 사회 불안 및 궁핍에 시달려야 했으며 이는 1997년 피라미드 사기 사건으로 국민의 대부분이 재산을 잃은 것에 대해 분노하여 일으킨 반정부 폭동으로 절정에 달했고 공산당에서 이름이 바뀐 사회당이 집권하게 되었다. 다만 2000년대 중반 이후 알바니아는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으며 현재는 견실한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있다.
1.8 유고슬라비아
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지도 아래 동유럽 공산권에서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영향력에 있지 않았던 유고슬라비아는 1980년 티토 사망 이후에 외채문제를 겪게 되었고 해결책을 놓고 발흥하는 각 민족별 민족주의로 인한 분열 위기가 서서히 고조되고 있었다. 1987년 들어서서 자유화 요구가 슬로베니아를 중심으로 나오기 시작했으며 동시에 민족주의 발흥에 따라 코소보에서 세르비아계의 시위가 대대적으로 일어나면서 세르비아 VS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간의 갈등이 격화되었다.
시대적 흐름에 따라 1990년 1월에 들어서면 본격적인 자유화 논의 단계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자유화 논의와 더불어서 이미 발흥하기 시작했던 민족주의가 이 시기에 들어서면 본격적으로 수면 위에 떠오르면서 유고슬라비아의 분열이라는 뇌관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4월에 실시된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자치 공화국의 총선에서 민족주의자들이 다수를 차지했으며 이는 11월에 실시된 보스니아와 마케도니아에서도 마찬가지였고, 세르비아 총선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따라 각 공화국간 독립 요구가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했고 결국 1991년이 되면서 지옥의 문이 열리고 만다. 이후의 전개는 유고슬라비아 내전 참고.
이렇게 유고슬라비아 내전이라는 대규모 유혈 참극 끝에 2000년대 이후 유고슬라비아는 7개국으로 분리되었으며 서로에게 뿌리 깊은 상처와 불신을 남긴채 현재는 간헐적인 폭력 시위가 벌어지는 코소보를 제외하고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은 상태이다.
2 소련
동유럽 혁명의 여파로 소련 체제도 큰 타격을 입고 결국 몇년후 소련마저도 붕괴되어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등 15개 국가로 분열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소련의 붕괴 참조.
3 영향과 의의
동유럽은 아니지만 아시아 국가인 몽골도 1990년 무혈 민주 혁명으로 공산주의 정권이 붕괴되고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 기반한 민주주의 국가로 전환된다. 그리고 예멘에서도 사회주의가 종식되고, 예멘이 통일이 되었다. 동유럽은 물론,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오세아니아[17]의 여러 나라에도 영향을 끼쳤다. 캄보디아에도 1993년에 크메르 루주 독재가 종식되고 다시 왕정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공산주의가 완전히 약해졌고 소련의 붕괴에 영향을 주어서 1991년 냉전이 종식되었다. 한국의 경우는 1989년과 1990년에 동유럽 여러나라들과 수교를 맺게 되었다. 북한의 경우는 소련은 물론 동유럽의 이웃들이 사라진 셈. 그 이후에는 자유주의vs공산주의가 아닌 민주주의vs전체주의(예를 들면 파시즘)의 대립으로 나타났다. 지금의 남북관계도 표면상으로는 여전히 자유주의vs공산주의지만 실질적으로 민주주의vs전체주의로 돌아섰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아시아 공산권의 경우 중화인민공화국, 라오스, 베트남이 개혁 개방 정책을 통해 정치적으로는 일당 독재를 유지하면서도 경제적으로는 사실상 시장 경제 체제로 전환한 상태이다. 현재까지 공산주의를 계속 고수하는 쿠바도 2015년 미국과 복교하면서 경제적으로 개혁 개방 정책을 펼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그리고 공산권 붕괴 이후에 동유럽의 경제는 오히려 한동안 악화되었고 다시 성장을 재개하는데는 상당한 시간이 소모되었다.[18] 1990년 당시 서독의 국민 소득은 15,000, 동독 10,000, 체코슬로바키아 8,000, 헝가리 6,000이었으며 2016년 현재도 그 비율 격차는 오히려 커졌다.가장 빨리 성장한 폴란드의 예로 보아도 서독:폴란드는 3:1이었으나 지금도 3:1이다.
소련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던 바르샤바 조약기구는 1991년에 해체된다.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낫과 망치 문장도 이 시기 이후로 사라지고 말았다.
4 문제점과 해결해야 할 점들
체제 전환 이후 구 소련권 국가(특히 러시아, 벨라루스[19])과 내전을 겪은 일부 구 유고슬라비아 연방 소속 국가(특히 보스니아, 코소보)들을 제외한 동구권 국가들은 민주주의 체제와 시장 경제 체제가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정착했으며 체제 전환 실패로 큰 진통을 겪은 루마니아, 불가리아, 알바니아도 4반세기가 지난 현재 시점에선 안정적인 경제 성장을 이룩하고 있다.
다만 이러한 준수한 경제 성장에도 불구하고 사회 혼란 속에서 급증한 빈곤층 문제는 상당히 심각한 편이며 서유럽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경제 사정이 열악한 건 여전하다. 정치적으로 볼 때 중유럽 국가들의 경우 폴란드와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구 동독 지역 등지에서 경제 위기를 틈타 극우 세력들이 준동하는 현상도 일어나고 있다.[20] 공산주의 붕괴 이후 인종 문제로 갈등을 겪은 발칸 반도 국가들의 경우 코소보 내 알바니아인, 세르비아인 간의 갈등은 현재 진행형이며 알바니아 본토도 선거를 실시할 때 마다 부정 선거 논란이 벌어지는 등 민주주의 정착 측면에서 다소 어려운 양상을 보이고 있다. 특히 동유럽권 절대 다수 국가들이 인구 감소로 몸살을 앓고 있으며 이는 불가리아, 루마니아를 포함한 남동 유럽권이 특히 심각하다. 2016년 최근에는 마케도니아에서도 정치인들의 부정부패로 인한 불만으로 시위가 일어났었고 7월 이후 시위는 종식되었다. NATO가 여전히 있지만 이들의 군사개입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자세한 것은 NATO 문서에서 문제점 항목을 참고.
5 대중매체
이원복의 <만화로 떠나는 21세기 미래여행>에서 본격적인 21세기의 시작이라는 말이 나온다.
한편 2009년에는 동유럽 혁명 20주년을 맞이했다.[21]
2012년에는 낭만의 길, 야만의 길, 동유럽 역사기행이라는 책이 나왔는데 이 책을 참고하는 것도 어느 정도 흥미로울 것이다.[22]
언론에서는 아랍의 봄이 동구권 붕괴와 비슷하다는 이야기도 나온다.[23]
6 여담
21세기 이후에도 비슷한 나비효과 및 도미노 현상으로 2000년대의 색깔혁명[24]이나 2010년대의 아랍의 봄이 나타난다.
한편 북한에서는 1992년에 프룬제 군사 쿠데타 사건이 일어나서 김일성 정권을 없애려 했으나 실패했었고, 1995년에는 6군단 쿠데타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었다. 동구권 붕괴와 소련의 붕괴, 중국의 개혁 등을 보고 그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7 같이 보기
- ↑ 하지만 루마니아의 혁명은 내전이 아닌데 비해 유고슬라비아는 내전으로 변하는 사태까지 일어나고 만다.
- ↑ 알바니아의 경우는 1997년 내전에 준하는 소요 사태가 일어나는 바람에 이후에는 치안 회복 및 경제 재건에 있어 상당한 시간을 소모해야 했으며, 구 유고슬라비아권은 2001년 마케도니아 소요 사태가 끝날 때까지 10여년 가까이 유혈 사태를 겪어야 했다.
- ↑ 1989년 11월 9일에 본격적으로 체코슬로바키아의 벨벳혁명이 일어났는데 계절이 가을이었다. 또한 가을은 "풍요"를 상징하기도 하거나, 1848년을 봄으로 비유해서인지 이를 비교하여 1989년의 혁명을 가을로 비유하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 ↑ 혁명의 이름은 경우에 따라서 다르게 부르는데 일본에서는 "동유럽 민주화 혁명"이라고 부르며, 구 동구권에서 집중적으로 일어났기에 동구권 붕괴라고도 불리게 되었다. 한편 동유럽의 범위는 다양하지만 대체로 2000년대 초반까지는 동구권의 나라들도 동유럽으로 묶였기에 항목의 제목은 1989년 동유럽 혁명이 더 정확하다.
- ↑ 다만 야루젤스키가 이렇게 초강경하게 나간 것은 그 자신의 신념보다도 소련 서기장 브레주네프의 무언의 압력에서 기인했다. 2005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당시 폴란드 국경에 소련군이 계속 집결하고 있던 상황이라 헝가리 혁명이나 프라하의 봄 같은 유혈 사태를 막기 위해 자신도 어쩔 수 없었다고 밝힌 바가 있었으며# 사실 그 또한 본래 귀족의 자제 출신이었다가 소련군에 강제 징집당한 군인 출신이라 공산주의에 그렇게 심취하지도 않았다. 실제로 그는 고르바초프의 개혁을 지지했으며 국민들의 신임을 잃자 1990년 대통령직에서 깨끗이 하야했다. 2014년 타계 이후로도 폴란드 내에서 매우 논쟁적인 인물 중 하나이다.
- ↑ 이 날은 지구 반대편인 중국에서 천안문 6.4 항쟁이 일어났지만 모두 다 아는대로 유혈 진압에 의해 실패하고 말았다.
- ↑ 사실 독일의 통일은 단순히 동독의 민주혁명 뿐 아니라 베를린 장벽이 사라진 것도 한 몫을 했다.
- ↑ 물론 인접한 폴란드나 헝가리에 비해 그랬다는거지 동구권 내에서도 유별나게 폭압통치를 펼쳤던 루마니아나 알바니아에 비하면 상당히 자유로운 편이었다.
- ↑ 이후 민주화 과정에서 둡체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단일 정부 구성 협의에 실패한 체코와 슬로바키아 양측은 결국 1993년 1월 1일 부로 분리독립되어 소위 '벨벳 이혼'을 실행하게 되었다. 다만 분리 이후에도 양국간 우호 관계는 계속 유지되고 있다.
- ↑ 평화롭게 혁명을 이루었고, 평화를 상징하는 푸른색(파란색)으로 비유한 혁명.
- ↑ 다만 이건 비단 루마니아만의 일은 아니고 상당수 중남미 국가들이나 이집트 등의 제3세계 국가들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 ↑ 혁명 당시 국민들은 루마니아 국기 가운데에 그려져 있던 공산당 문장을 도려내어 이를 혁명군 깃발로 쓰면서 무력 저항을 했는데, 이는 혁명의 목적이 차우셰스쿠 일족과 공산당 타도임을 알리는 상징적인 행위였다. 이러한 행위는 헝가리 혁명이라는 선례가 있다. [1], 시민들을 도와주는 군부 및 군인들
- ↑ 아랍의 봄으로 비유하자면 다른 주변국가들과 달리 유일하게 내전으로 혁명이 시작된 리비아와 비슷하다. 차우세스쿠의 최후는 카다피처럼 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 혁명도 내전이라고 보기는 어려운게 만일 진짜 내전이라면 시민들조차 시민군이 되어서 싸워야 내전인데 적어도 루마니아는 그정도까지는 아니었다.(다만 몇몇 시민들도 무장을 하거나 사실상 시민군이 되긴 했으나 규모나 상황까지 볼 때 적어도 내전이라 보긴 애매했다) 그 때문에 내전이 아닌 유혈사태로 표현된다.
- ↑ 북한이 아닌 다른 나라로 도망을 치려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 ↑ 루마니아조차 1989년 12월에 성공하여 1990년이 되기 전에 공산독재를 종식한데 비해 알바니아는 사실상 1990년 12월이 되어서 시위가 되었으며, 본격적으로 1991년에 독재자들로부터 독립되었다.
- ↑ 차우셰스쿠하에서 경제 붕괴 상태에 놓인 루마니아도 같은 해 1인당 GDP가 1,789달러였으니 알바니아의 경제 수준이 얼마나 형편없었는지 알 수 있다.
- ↑ 오세아니아에서는 공산주의가 없었지만 바누아투에서는 친소 사회주의 독재 정권이 있었다. 물론 1991년에 해산되었지만.
- ↑ 공산주의 시절 말기의 무능, 붕괴이후의 혼란, 그리고 무엇보다 당시 동유럽이 서방에서도 할 수 없었던 신자유주의 정책의 실험장이 되었던 탓도 있다.
- ↑ 이 두나라는 일단 경제는 성장하기는 했지만 정치면에서는 그야말로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 이는 아시아의 몽골도 마찬가지이다.
- ↑ 2009년 11월 베를린에서는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을 맞이하였고 여러 행사도 열렸다.
- ↑ 단 이 책에도 몇 개의 오류가 좀 있다. 그냥 간단히 볼 수 있는 책 정도로 보면 될 것이다.
- ↑ 확실히 나비효과로 인한 영향력으로 인해 여러 정권들이 같이 무너졌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동유럽 혁명은 거의 성공이거나 평화로웠던 반면, 아랍의 봄은 일부 아랍 국가들이 내전으로 시달리거나 극단주의 단체들이 나타났다는 점에서는 확실한 차이점이 보인다. 게다가 아랍의 봄이 성공되거나 개혁을 이룬 나라들은 많지가 않다.
- ↑ 2003년 조지아의 장미 혁명이나 2004년 우크라이나의 오렌지 혁명, 2005년 키르기스스탄의 튤립 혁명, 2006년 벨라루스의 수레국화 혁명(jeans revolution), 2007년 미얀마의 샤프란 혁명, 2009년 이란의 녹색 혁명, 2011년에서 2012년 러시아의 눈꽃혁명, 2014년 타이완의 해바라기 혁명이나 우산 혁명, 2015년 아르메니아 전기 혁명, 2016년 마케도니아 색깔혁명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