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intenance script (토론 | 기여) |
(차이 없음)
|
2017년 2월 2일 (목) 05:19 기준 최신판
{{틀:문묘 배향 18현}}
고려의 문하시중 | ||||
최영 | ← | 이성계 정몽주 | → | 조선 건국 이서(영의정) |
[1] | ||
이름 | 정몽주(鄭夢周) | |
본관 | 영일 정씨 | |
출생지 | 영천(現 경상북도 영천시) | |
자 | 달가(達可) | |
호 | 포은(圃隱) | |
시호 | 문충(文忠) | |
생몰년 | 음력 | 1337년 12월 22일 ~ 1392년 04월 04일 |
양력 | 1338년 01월 13일 ~ 1392년 04월 26일 |
고려 말의 학자, 관리.
서희의 뒤를 잇는 한민족 최고의 외교관 중 한 사람. [2]
충신 이미지에 가려진 문무 겸비 명재상.[3]
1 소개
고려 말의 문신. 영천 태생이며[4] 본관은 영일 정씨, 호는 포은(圃隱)이다.
그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학문·외교·경제·군사·정치·인품 모두 만렙을 찍은 고려 말기의 먼치킨, 고려 최후의 보루. 선비의 이미지가 강하긴 하지만 실제로는 왜구 토벌에도 공을 세웠던 글자 그대로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그의 조상은 고려 인종과 의종 때 강직한 충신이었던 정습명이다.[5]
여말삼은(麗末三隱, 혹은 고려삼은) 중 한 사람이다. 보통 여말삼은은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목은 이색을 꼽는다. 여말삼은에는 길재 대신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이 들어가기도 하는데 이숭인 또한 정몽주의 제자. 야은 길재(吉再)는 이색과 정몽주의 제자이기도 하다. 길재는 조선 왕조를 섬기지 않았으나 영학파의 영수인 김종직이 그 맥을 이어 거기서 조선왕조의 후반기 정치사조를 지배한 사림파가 나왔다. 한마디로 조선시대 강력한 정치사조는 고려 최후의 충신을 그 학문적 비조로 삼는다.(길재 등은 이들 사림파의 강력한 지지로 인해 결국 중종대에 문묘에 배향되게 된다.)
흔히 정몽주의 학맥은 사림파로만 이어지고 훈구파와는 반대라고 보는 경향이 있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의 또다른 제자인 매헌 권우는 조선왕조에서 벼슬을 하며 세종대왕의 스승이 되어 가르쳤고 정몽주의 성리학적 민본주의는 이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세종대왕의 치세에 영향을 미쳤다.[6] 또한 기술관료로 이름을 날린 정인지 또한 권우의 제자였으므로 정몽주의 학통에 속하고 그외에도 정몽주의 제자나 가까운 사형제(師兄弟)들이 조선 초기 훈구파를 이루었던 관계로 이들 또한 정몽주의 학통을 일부 잇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권근과 변계량 등이며[7], 세종대왕 시절의 명재상으로 이름을 날린 영의정 하연은 정몽주의 마지막 제자였다. 조선왕조의 개창을 반대했으면서도 조선의 양대 정치사조에 모두 시조로서 영향을 끼친 인물로 간단히 축약하자면 여말선초에 어지간히 이름을 남긴 인물치고 정몽주의 제자나 문인이 아닌 사람을 찾기가 힘들며 그들을 통해 비록 조선개국 이전에 죽었지만 조선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조선왕조의 창립을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충절은 조선왕조에서 높이 숭상되었기에 그 후손은 조선왕조 내내 혜택을 받았다. 몇 가지 사례를 들면 세조때 정몽주의 손자로 장손이기도 했던 정보는 사육신의 사건이 일어나자 그들은 죄인이 아니라고 두둔한 죄로 거열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정보가 끌려나간 후에 세조가 정보가 어떤 사람인지를 주변에 묻자 신하들이 정몽주의 장손이라고 대답하여 이에 놀란 세조가 황급히 형을 중지하고 영일로 귀양을 보내는데 그쳤다.[8] 또한 연산군때 밉보인 죄로 처형당한 연산군의 스승 조자서의 아내는 남편이 죄인으로 처형당했지만 정몽주의 증손녀라서 연좌되는 것을 피했다. 그의 무덤도 처음에는 이성계에 반한 죄인이라 하여 승려들이 몰래 묻어줘야 할 정도였지만 조선왕조 건국 이후 복권되면서 거의 왕릉에 비슷할 정도로 우대받으면서 관리되었다. 오히려 조선개국 1등공신이지만 역적으로 찍혀 조선 말기 때 신원받은 정도전과 대접의 차원이 달랐다.[9] 몇 몇 일화에서 보듯이 조선조에 손꼽히는 폭군들조차도 그 후손들을 죽이는 것은 피했을 정도이다.
1990년대 즈음부터 그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이 나오고 재평가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에 정도전에 대한 인식이 대중적으로 재평가되었던 것과 맞물리는 편인데 후술되는 '정몽주가 충신인가 아닌가' 하는 내용은 이와 관련이 있다. 다만 지나치게 '고려의 마지막 충신' 이미지만 강조되다 보니 고려 말 혼란기 속에서 제도 개혁을 위해서 노력한 점이나 왜구 토벌에서도 활약한 점, 왜구에게 포로로 끌려간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활약한 점 등의 능력 있는 정치인으로서의 모습이 가려지는 경향도 큰 편.
2 일생과 업적
출생지는 경상북도 영일[10]이지만 얼마 후 경상북도 영천으로 옮겼다고 전해진다.[11] 후에 크게 될 그릇이라서 그랬는지 작명에도 비범한 일화가 있는데 원래 첫번째 이름은 난을 건네받는 태몽을 꾸고 낳아서 정몽란이었으나 어린 시절, 어머니가 용이 나무 위에서 노는 꿈을 꾸고 마당에 나가보니 나무에 아들이 놀고 있어 몽룡으로 바꾸었고 나중에 주나라 성인을 본받는다는 뜻으로 몽주로 바꾸었다고 한다. 영천시 임고면에 그가 유년기를 보낸 외가가 있었으며, 지금도 임고서원에서는 정몽주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낼 뿐만 아니라 문집의 목판본을 인쇄 발간하는 등 지역의 중요한 위인으로 기리고 있다.
고려에 본격적으로 성리학을 들여왔고 학문적 완성도도 높아서 스승인 목은 이색에게 동방이학의 비조라는 찬사를 들었다. 이때의 일화가 좀 비범한데 당시 성리학 관련 서적이라고는 극히 몇 권밖에 안되던 시절, 그 책을 읽고 정몽주는 그 내용에 대한 주석을 달고 의미를 풀었다. 그 해설을 들은 주변 사람들은 모두 과연 맞는 말인지를 의심했는데 후에 중국에서 성리학 서적이 대거 들어오면서 그 내용이 정몽주가 풀었던 내용과 거의 일치함을 알고 모두들 감탄했다. 훗날 홍건적 토벌에서 공을 세웠다가 김용에 의해 살해되는 김득배의 문생이기도 해서, 살벌한 주변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그 죽음을 기렸다. 공민왕 초기인 1360년 과거시험에 장원으로 합격해 본격적으로 관직에 입문했다. 1363년에는 여진족 토벌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후 전농시승, 예조정랑을 거쳐 성균사성에 올랐다. 1372년에는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친명파에 속하게 되어 친원파였던 이인임 등의 외교정책에 반대하다 언양으로 유배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1년만에 유배에서 풀려나 이번에는 일본 규슈에 사신으로 가서 왜구 토벌의 확답을 받고 왜구에게 끌려간 수백명의 고려인들을 데리고 돌아왔다.[12]
학문에만 지우친게 아니었는지 1380년에는 이성계와 함께 왜구를 토벌하는데 참여했고 특히 이성계가 왜구를 싹쓸이해버린 황산대첩 때에도 이성계의 부장이었다.[13] 사극 용의 눈물에서는 이 점을 고려했는지 이성계가 정몽주를 회유하려 할 때, 이 때의 일을 거론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1383년에는 동북면조전원수로 함경도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했다.
1372년에 처음 명나라에 사절로 파견되었는데 임무를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난파당하여 십 수일을 표류했다. 이 소식을 들은 명나라 태조는 특별히 사람을 보내어 바다 위를 수색하게 했고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당시 난파로 사절단의 2/3이상이 죽고 살아남은 것은 정몽주를 포함한 일부였다. 난파된 바다위에서 발견될 때까지 버틴 것도 엄청나지만 발견된 것도 엄청난 확률...천운이었다고 할 수 있다.[14] 물론 주원장이 정몽주를 수색해 귀환시킨 것은 외교적 문제 발생을 막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구조된 정몽주가 다시 남경으로 올라가 명나라 조정에 들어갔을 때, 그런 조난사고를 겪고도 사신으로서 책무를 다하는 모습에 명나라 태조와 주변 신하들이 감탄했다고 전해진다. 1384년, 명나라와의 관계가 악화되어 아무도 명나라 사신으로 가려고 하지 않을때, 성절사로 명에 건너가 명과의 관계회복에 공을 세웠다. 게다가 이 때는 시간까지 촉박하여 바로 출발한다고 해도 명 태조의 생일에 맞춰 도착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정몽주는 밤낮으로 필사적으로 달려서 기한내에 도착했다. 원래 고려의 성절사가 기한내 도착하지 못하면 그 핑계로 처벌할려고 일부러 기한을 촉박하게 잡았던 명 태조가 도리어 놀랬다고 하며 정몽주에게 말하길 "이번 사절행이 위험한 줄 알고 네 나라 대신들이 서로 미루다가 널 보낸 것이 아닌가. 너는 몇 년전에 왔던 그 사신이 아니냐."고 말하고 후하게 대접했던 것으로 보아 당시 일은 명 태조에게도 감명깊었던 모양이다. 이 때, 명나라가 요구했던 무리한 조공도 철회시키는데 성공한다.
왜구와의 교섭 성과도 그렇고 이와 같이 명나라와의 관계 등 외교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계속 성과를 올린 것을 보면 외교적 능력도 압도적이었다. 일본과의 외교 협상에서는 후에 그의 죽음을 안 일본인들도 애도할 정도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15]
1389년, 이성계가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태생이라 주장하며 폐위시킨뒤 공양왕을 옹립할때 동참했다. 흥국사 9공신(이성계, 심덕부, 지용기, 정몽주, 설장수, 성석린, 조준, 박위, 정도전)의 하나로서 이성계파로 여겨지게 되고, 반이성계파의 테러의 대상으로 오르기까지 했다. 그렇게 수문하시중의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이성계의 저의가 다른데 있다는 것을 느끼고 이성계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1392년, 이성계가 사냥 중 낙마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성계가 멀쩡히 돌아오는 바람에 실패했다. 이후 이성계의 기색을 살피기 위해 병문안을 핑계로 이성계의 집에 방문했다. 기록으로는 이때 이방원과 술자리를 했고 이방원이 하여가를 읊자, 단심가로 화답했다고. 이 부분을 용의 눈물에서는 이성계와 정도전이 정몽주를 회유하기 위해 일부러 이성계가 낙마한 것처럼 꾸며서 정몽주가 일을 도모하게 한 후, 개경으로 귀환한 이성계가 정몽주를 용서함으로써 한편으로 끌어들일 계획이었으나 실패한 것으로 각색했다. 또, 같은 사극에서 이방원과 서로 시조를 읊는 이 장면이 등장하는데, 구구한 말 없이 비장한 표정으로 딱 시조만 주고받도록 깔끔하게 처리한 명장면이다. 이 두 시조는 한국인이라면 대다수가 들어봤을 정도로 유명한 시조.
어쨌든 이것으로 이방원은 정몽주가 이성계의 신왕조 수립에 동참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자신의 부하 조영규 등을 시켜 선지교에서 정몽주를 살해했다.선죽교 퍽치기 공식 기록인 실록에는 조영규가 먼저 말을 공격해서 말이 넘어지자 정몽주도 땅에 떨어졌다가 일어나 달아났는데, 이것을 고여가 쫓아가서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이성계 낙마~정몽주 피살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에 대해서는 당시 기록이 서로 미묘하게 다른 내용으로 남아있어 학계에서 논의가 분분하다. 다만 대부분의 기록은 정몽주가 낙마한 이성계의 병문안을 가기 전에 자신을 죽이려는 암살계획에 대해서 알았다는 점에서 공통되며[16] 이 때문에 학자들 사이에서는 왜 죽을 줄 알면서 병문안을 갔는지에 대해서도 연구거리이다.[17] 하여튼 이 난리 중에 정몽주의 동생도 형과 같이 죽음을 당했고, 다른 동생은 유배되었다.[18]
이 선죽교에서의 죽음은 이후 그야말로 전설이 되었다. 먼 후대 사람도 아니고 정몽주 본인의 제자였던 권우나 권근의 저술에도 여러 이야기가 전해지며 당대 사람들의 증언도 각양각색이다. 대표적으로 전해오는 야사에 의하면 정몽주는 죽을 것을 알고 자신을 수행하던 머슴 김경남[19]에게 너는 어서 피하라고 충고했으나 충직한 머슴은 같이 죽겠다고 하여 그를 뒤따라갔다. 이 설은 권근이나 권우가 머슴역을 대신하는 경우도 있다.[20] 정몽주는 이 때 일부러 나귀를 거꾸로 타서 자객들을 기다렸다고도 한다. 어차피 죽을 것이면 죽일 사람 얼굴을 봐서 뭐하겠나라는 설도 있고 부모가 주신 몸을 상하게 되는데 그 꼴을 정면으로 볼 수 없어서였다는 설도 있다. 이것도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그대로 재현했다. 나귀를 거꾸로 타고 가는 것과, 수행하던 종에게 집에 돌아갈 것을 권유했으나 종이 그것을 거부하고 함께 죽은 것 등.
태조실록에는 이성계를 문병하고 이어 판개성부사 유원의 문상을 갔다 오느라 원래 다다르기로 예정되었던 곳에 정몽주가 제 시간이 되도록 오지 않자 이방원이 초조해 하는 모습도 실려 있다. 처음에는 자신을 습격하는 조영무 등에게 고함을 지르다 타고 있던 말이 먼저 칼에 맞고 바닥에 쓰러진 것을 다시 일어나서 집 쪽으로 뛰어가려다 철퇴에 거듭 맞아 죽었다고 되어 있다. 충격적인 것은 이 사태가 백주대낮에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벌어진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아들이 독단으로 정몽주를 죽인 것을 안 이성계는 대노하여 이방원을 크게 혼냈다. 실록에 의하면 이성계가 이방원에게 크게 화를 내는 자리에 신덕왕후가 곁에 있었지만 이성계가 너무 화를 내서 그녀도 어쩌지 못했다고 한다. 한창 한소리 듣던 이방원이 "어째서 어머니께서 변명해 주지 않으십니까?"라고 말하자 신덕왕후가 "공(公)은 항상 대장군(大將軍)으로서 자처(自處)하였는데, 어찌 놀라고 두려워함이 이 같은 지경에 이릅니까?"라고 말했다고. 사실 이성계 본인은 그다지 정몽주를 죽일 생각도 없었고, 오히려 정몽주를 죽이면 자신만 욕을 먹는 상황이었지만 이미 일어난 일이라서 결국 정몽주를 역적으로 죽였다고 선포하고 목을 효수했다. 실제 정몽주는 이성계를 직접적으로 위해할 군사력이 없었고, 이성계를 설득해 고려왕조를 유지한 채 온건개혁책을 펼 것을 설득하려고 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게다가 정몽주는 이성계와 매우 가까운 사이기도 했는데. 정도전 또한 정몽주의 소개로 이성계와 만났다. 이러한 관점에서 정도전이나 조준 등의 유배는 강경파를 이성계에게서 분리하려는 생각에서 이루어졌다는 것. 실제로도 이성계는 공적으로도 사적으로도 여러 차례 은퇴를 희망하는 등 정치적 투쟁에 지쳐 있었고, 야심과 충성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었다. 어쨌든 이방원의 행동은 이성계가 보기에 대단히 마땅치 않았던 것 같다. 이후 조선이 개국되고 왕위에 즉위한 후에도 조선왕조 실록 태조편에서 정몽주를 죽인 일과 관련하여 이성계가 "대신을 멋대로 죽였으니 누가 비난하지 않겠는가."라는 취지의 말로 간접적으로 이방원을 디스하는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 정몽주가 고려에 가진 영향력은 단순한 재상의 수준이 아니었다. 조선개국에 가담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조준에게 조견이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조선 개국에 대해서 조준이 동생을 설득하려 하자,조견이 "또 달가(達可, 정몽주의 字) 는 이 나라의 기둥이자 주춧돌인만큼 만약 한 마디 말과 한 가지 일이라도 달가와 달리하기를 구한다면 이것은 국사를 해치는 것이고 나라가 망하기를 재촉하는 것입니다."[21]라고 말할 정도였고 조준도 여기에 토를 달지 않았다.명문가 출신에 이성계측 주요인물인 조준의 가문에서 달가(=정몽주)와 뜻이 다르면 역적이자 나라를 망하게 하는 일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의 위상이었으니 이성계 측이 그토록 그를 한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던 것도 무리가 아니었던 것이다.[22]이런 점에서 이방원이 한 일은 이성계와 당시 고려 전체에 매우 큰 충격을 주었을 것은 자명하다.
그의 시신은 산중의 중들이 충신의 시체를 방치할 수 없다하여 목숨을 걸고 밤에 몰래 옮겨 장사지냈으며, 시중의 상인들도 며칠간 상점을 철시하고 충신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전한다. 게다가 일본에 이 소식이 전해지자, 그를 만나고 알게 된 일본인들마저 따로 제를 지냈다고 한다.[23] 다만 그의 시신을 수습한 이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이설이 존재하는데 당시 정몽주와 가깝게 지냈던 명문가 우현보가 수습해 묻었다는 말도 있다.[24]
한편, 정몽주가 피살당한 다리는 당시 선지교라는 이름이었으나 정몽주가 죽은 자리에서 붉은 대나무가 났다하여 이름이 선죽교로 바뀌었다. 개성에 남아있는데, 다리에 있는 붉은색 얼룩이 정몽주의 피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북한에 간 유홍준 교수나 여러 인물이 선죽교를 찾아가봤더니 북한에서도 정몽주를 기려서 선죽교에 아예 보호대를 설치하여 함부로 밟지못하도록 만들었다. 이 선죽교 다리에는 붉은 얼룩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런데 얼룩의 범위가 60년 전과 지금이 좀 다른 듯. 역설적이게도 후에 2차 왕자의 난이 이 선죽교를 사이에 두고 벌어진다. 일설에 따르면 조선 말기까지 남아있던 선죽교의 혈흔에 대한 증언과 현재 개경에 남아있는 혈흔이 상당히 다르다고 하며 이 때문에 일제시대에 훼손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이도 있다.
태종이 그를 공식 복권시킨 후에는 정몽주의 아들도 조정에 나아가 벼슬을 했다. 장손인 설곡 정보라는 인물도 벼슬을 했는데 충신의 집안에서 충신이 나오는 것인지 단종에게 절의를 지키고 그 삼년상을 치렀기에 결국 사사당했다. 그 후손들도 대대로 벼슬을 했으며 그 중에는 우의정을 지내거나 학문의 거두가 된 이들도 나오는 등, 나름대로 번창한 편이다.
3 능력과 인물됨 및 평가
고려 말의 유능한 관리이자 뛰어난 성리학자였으며 성리학의 입장에서 고려를 개혁해보려고 애썼다고 한다. 스승인 이색이 이르기를 동방 이학(理學)의 비조. 개성에 5부학당과 지방에 항교를 세웠는데 이런 교육체제는 조선에서도 그대로 계승했다. 주자가례를 실천한 최초의 인물이라고도 한다. 또한 친명파로서 명나라와의 외교관계 진작에 앞장섰으며 왜와의 대외교섭도 맡았는데 실제로도 뛰어난 성과를 남겼다. 당시 명나라 태조 홍무제는 고려와 원의 사이를 의심하고 또 고려를 견제하기 위해 상당히 까다롭게 굴었는데 그 때문에 당시 대명외교는 지난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몽주는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홍무제에게 억류당한 이전 고려사신들을 풀려나게 해주고 고려의 입장을 이해시켜 목적을 달성해냈으니 그 능력을 보면 알만하다. 대일본외교 또한 대단한 수완을 발휘하였는데 당시 포악하기로는 손꼽히는 왜구들한테 거의 단신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찾아가 국제관계를 설명하고 설득하여 잡혀온 고려인 포로 수백명을 구출했는데 이 때의 상황이 눈물겹다. 당연히 처음부터 왜구나 일본의 영주가 설득에 응한 것은 아니어서 시간이 걸렸고 준비해간 돈도 떨어져서 앞으로 어찌해야 하나, 하고 탄식하는 시도 남겼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애쓴 끝에 고려인 포로를 데리고 돌아왔고 이후에도 왜구의 노비로 혹사당하는 고려 양민들을 구출하기 위해 사재를 털고 다른 대신들을 설득하여 돈을 모아 그들을 고려로 데리고 오기도 했다. 정몽주의 이런 노력에 감탄한 일본의 영주가 그때마다 고려인 포로를 백여명씩 돌려보내주었다. 고려, 조선을 통틀어 끌려간 양민구출에 이렇게 노력을 기울인 관리가 상당히 드물다는 것을 볼 때, 사재까지 털어가면서 그들을 구출한 점은 실로 높이 평가해야 할 부분.
또한 언변이 대단히 뛰어났다. 스승인 이색은 정몽주를 가리켜 "횡설수설이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없다."[25]라고 하면서 동방이학의 비조로 추대한다고 하였으며, 명나라 홍무제 또한 정몽주의 언변이 뛰어나서 고금의 예에 어긋남이 없다고 평하였다.
꼬장꼬장하고 문신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실제로는 대단히 배포가 크고 호방한 인물이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그가 남긴 시와 기록을 보면 당대에서부터 현재까지 호방하다는 감상이 꼭 등장한다. 또한 대단히 침착하여 큰 일을 결단하는데 낯빛이 변하는 일이 없었고 극비로 처리해야 하는 일에서 한 치의 허투름도 없었다고하니 세상 사람들이 그를 일컬어 왕좌지재(왕을 보필할 재주)발음에 주의하자라 하였다.
또한 명나라의 법인 대명률을 참고한 신율을 편찬해 법률의 정비로 국가의 혼란을 수습코자 노력했다. 군사적으로도 어느정도 능력이 있어 이성계의 왜구토벌 등에 따라 여러차례 종군하면서 공을 세웠고 의창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는 정책을 펼쳤는데 이후 이 의창은 조선왕조가 들어선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지게 된다. 또한 왜구의 침략으로 황폐화된 조운시설을 재건하여 국가 재정을 회복시켰고[26],원칙도 없이 엉성하게 처리되던 회계출납도 개혁하여 담당관리를 두고 엄중히 관리하여 부정을 막았으며 인재를 뽑아쓰는 일에도 이전과 다르게 엄중히 살펴서 행하여 허투른 인물이 발탁되는 일이 없어졌다고 한다.그야말로 만능 관리였던것 같다. 한마디로 학문의 대가이면서 외교, 군사, 법률 및 행정에도 뛰어났던 대단한 인물이다.
이러한 능력과 인품으로 민중들 사이에서 인망도 대단히 높았다. 여말선초를 살았던 박신이라는 관리는 백성들이 무기의 병화를 입지않고 편안히 먹고 자는 것이 모두 선생의 공적이라고 말할 정도. 게다가 한창 세를 불려서 고려에서 상대할 자가 없던 이성계 일파와 맞서 팽팽히 대결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정치력 또한 보통이 아니며 그만큼 나라에 대한 충성심과 용기도 강하였다. 하지만 끝내 이방원에게 살해당해 고려의 멸망을 막지는 못했다. 이렇듯 다방면에 걸친 뛰어난 능력과 업적에 더해 충절까지 겸했기에 후대에 평가가 매우 높았다.
정몽주의 충절은 조선 초기에는 조선 건국에 반대했다고 하여 언급조차 안되었지만 세종 이후 유교적 충효를 강조하기 위해서 다시 부각되기 시작했다. 재미있게도 정몽주를 때려잡은 태종 이방원은 자신의 즉위 원년에 정몽주를 영의정으로 추증하고 익양부원군으로 봉하였으며 세종은 삼강행실도에 정몽주의 충절 항목을 실어 그의 충절을 본받게 하고자 했다. 실제로 세종대왕은 고려사를 편찬하면서 고려 왕조의 충신들에 대해서 상당히 객관적으로 평가하려고 노력했는데 그 중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여말 삼은에 대해서 평가하기를,
- 목은 이색은 학문은 뛰어나지만 절의를 지키지 못했고, 관리로서의 재능이 낮으며 정치적 역량이 부족하다.
- 야은 길재는 절의를 굳게 지켰지만, 성격에서는 모가 난 사람이었다.
- 포은 정몽주는 절의를 지켰고 관리로서 뛰어나며 인품이 순후하고 성실하다.
라 하여 이색이나 길재와 비교해도 매우 좋은 평을 내리면서 그가 충신임에 대하여 재론이 필요없다고 하였으며 그 학문적 능력에 대해서도 높이 평가했다. 이와 같이 정몽주는 단순히 그 충절만 평가된 것이 아니라 외교적 업적같이 관리로서의 능력도 높이 평가되었는데 워낙 충성심이 강조되다보니 현대에 들어서는 충신이라는 것 빼고는 한 게 뭐가 있냐고 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 물론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정몽주가 명, 왜와의 외교나 왜구 토벌, 내정분야에서 세운 업적을 전혀 모른다.(...)
어쨌든 객관적으로 보면 당연히 명신이자 충신으로 존경받을 인물이었지만 조선왕조 개국을 반대한 점 때문에 조선 왕들에게 많은 딜레마를 안겨주기도 했다. 실제로 위에서 정몽주를 높이 평가했던 세종대왕은 용비어천가에서는 정몽주를 반역의 괴수이자 천명을 거스르는 인물로 묘사했는데 읽고 있으면 거의 대마왕같다. 그러나 시대가 흐르면서 그에 대한 평가는 계속 높아졌고 조선 왕들도 후대로 갈수록 역적도당이 아닌 충신으로 인정하게 된다. 명종때 정몽주의 고향에 그를 추모하기 위하여 임고서원이 창건 되었으며 중종은 사림파의 요구를 받아들여 문묘에 정몽주의 위패를 안치하게 했다. 중종은 정몽주가 이씨의 원수라고 하면서도 그 충절을 포장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는데, 이는 성리학 윤리와 질서를 추구하며 건국되었으면서도, 건국과 찬탈 과정에서 그 윤리와 현실이 벌어졌던 조선의 정치와 윤리의 괴리를 보여주고, 그러면서 자신들의 명분이 손상됨에도 성리학 윤리를 버릴 수도 없었던 왕들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27] 정몽주의 묘에 비석을 세울 때는 그가 고려의 신하로 죽은 뜻을 더럽혀서는 안된다고 조선왕조가 추증한 벼슬을 기재하지 않았을 정도.[28][29] 이와 같이 조선 초기는 물론 훗날 송시열을 비롯한 사림파들도 정몽주를 찬양해 마지 않았다.
조선왕조 성종실록에 의하면 '그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만약 한 번 마음만 바꾼다면 개국(開國)의 원훈(元勳)이 될 것이니, 누가 그를 앞설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나, 정몽주는 끝내 신하로서의 절개를 지켜 죽어도 의(義)를 잃지 않았던 것입니다.'라고 평가된다.
또한 후대로 갈수록 이러한 경향은 현저해진다. 영조는 과거시험에서 정몽주의 후손이 장원급제한 것을 알고 기뻐하는 시도 남겼으며 숙종은 정몽주의 시를 모방하여 여러 편의 시를 남겼다.
정치적 라이벌인 정도전 또한 그를 가리켜 "도덕의 으뜸"이라고 평가했는데 실제로 이 둘은 상당히 막역한 사이기도 했지만 청렴한 관리기도 했던 정몽주의 도덕성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의 충신 이미지 때문에 간과하는 경우가 있는데 정몽주는 상당한 경지에 들어선 시인이다. 위에서 정몽주의 능력을 설명할 떄 유능한 관리이자 뛰어난 성리학자였다고 평한다. 성리학자로서 가진 사상과 식견을 자신의 시에 고도로 승화시켰다. 한문학이나 그에 관련된 전공을 한다면 한번씩 짚고 넘어가게 된다.
3.1 정몽주는 충신인가?
정몽주의 행적을 연구한 일부에서는 정몽주를 충신으로 보는 것은 지나친 미화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이런 시각에서는 정몽주는 충신이 아니라 단지 대세를 잘 살펴서 줄타기를 잘한 노회한 정객일 뿐이라고 평가된다. 이러한 정몽주가 충신으로 미화된 것은 그를 충신으로 미화, 격상하여 표본으로 삼음으로써, 조선조가 가장 두려워하는 역성혁명을 방지하기 위한 선전 수단으로 활용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볼 수 있는 소지는 정몽주가 이인임의 친원정책에 반기를 들어 같은 신진 사대부들과 함께 반대운동을 벌인데서부터 시작된다. 얼핏 이인임의 친원정책에 반대한 것은 외교문제일 수도 있었지만 속내는 친원파인 이인임의 권력을 견제하려는 목적이 강했다. 그러나 신진 사대부들의 반이인임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고 정몽주를 비롯한 반이인임 운동에 관여한 자들은 유배되거나 죽임을 당했다. 그런데 정몽주는 1년만에 유배에서 풀려나왔다. 이는 강경파로서 완전히 찍혀 유배지에서도 훼방을 받았던 정도전은 물론(정도전의 조모가 우현보 일족의 종이었기에 더욱 차별받았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상당히 빠른 것으로 능숙한 외교관이었던 정몽주는 당시의 집권세력인 친원파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즉, 정몽주는 줄타기를 매우 잘한 것이다.[30]
정몽주를 충신으로 보기에 어렵게 만드는 요인은 이성계에 대한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정몽주는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는데에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지 않았고 최영의 몰락에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이성계가 우왕과 창왕은 신돈의 자식이라고 주장하며 그들을 폐위하는데도 반대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찬동해 공양왕을 옹립하기까지 했다. 우왕을 자기 집에 초대해서 성대한 잔치까지 벌였던 사람이 말이다. 물론 이성계가 역성혁명의 뜻을 가지고 있었다는걸 처음에는 몰라서였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성계의 행보에 반대하지 않고 동참한 것은 이성계를 이용해 권력을 잡으려는 목적에서 그랬다는 시각이 있다.
이런 시각에서 볼때 정몽주가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대했던건 고려에 대한 충심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역성혁명에 찬동해도 자신에게 돌아올 이득이 적다면 고려 왕실을 유지해서 자신이 권력을 잡는 편이 낫다고 계산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정몽주가 백성을 위한 민본주의적 성리학을 도입했다고 하나 백성에 대한 충성은 고려충신 정몽주와는 전혀 다른 문제다. 백성에 대한 애민정신과 국가에 대한 충성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그리고 역사적 평가를 봐도 고려의 멸망은 백성들에게 훨씬 나은 결과를 가져왔다. 정몽주의 충성 대상을 백성으로 두면, 고려 멸망을 막으려고 한 시도는 뻘 짓이 되는 것이다. 여러모로 봐도 고려왕조와 고려백성을 분리시킨 다음에 고려백성에 대한 충성 이야기를 하는 것은 현대적 관점에서 끼워맞춘거나 마찬가지다.
또한 이와는 별도로 인품이 고결하고 도덕적으로 훌륭한 점도 과장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한 예로 이성계가 낙마한 틈을 타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시도할 당시 정몽주의 행동을 보면 고결한 도덕군자의 모습은 보기 힘들다. 간관들을 조종해 공양왕에게 정도전 일파를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몰아붙이는가 하면, 관원들을 시켜 정도전 일파를 고문해 죽여야 한다고 엄명을 내리는 등 대단히 냉혹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31]
이런 정몽주가 만고의 충신이 된 이유에 대해서는 조선 왕조가 역성혁명에 부정적인 성리학자들을 회유하기 위해 성리학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치는 정몽주를 미화하고 떠받들었다는 것이다.
정몽주가 충신으로 미화된 근본적인 이유는 새로운 역성혁명을 방지키 위한 측면이 크다 할 수 있다. 역성혁명으로 건국된 조선왕조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다른 역성혁명에 의해 전복되는 것이다. 때문에 조선왕조의 건국을 가장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몽주를 성인으로 격상하면서 충의 표본으로 삼아 그를 통해 전 대신과 백성들에게 충효사상을 주입하여 역성혁명을 근원적으로 방지하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역성혁명을 일으킨 개국공신인 정도전은 태종 이후 고종 때까지 450년 동안 역적 취급을 받으며 철저히 격하되었다.
3.2 정몽주는 충신이다!
우선 해배가 빨랐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정몽주를 친원파에 우호적이었다고 보는 것도 지나친 비약이다. 그보다는 차라리 정몽주의 국가적 인망을 고려한 결정이었다고 보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 실제로 정몽주는 20대 초반에 이미 세 번 연속 장원급제를 한 일로 명성이 고려 전역에 퍼져있었으며 관직에 나간 이후로는 아예 정몽주는 신진 사대세력의 필두로서 젊은 선비들 사이에서는 정치에 나서지 않는 스승 이색을 능가하는 존경을 받으며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즉 정몽주에 대한 해배조치는 권문세족이 신진사대부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실제로 사서의 어떤 기록에도 정몽주가 친원파와 결탁 혹은 연대를 맺고 있었다는 실제적·정황적 증거는 나타나지 않는다.
또 '충성의 대상은 백성'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정몽주는 충신이 맞다. 앞에서 언급된 일본에 잡혀 간 포로들을 송환해 온 것이 별 것 아닌 걸로 보일 수도 있지만,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시대까지 통틀어 외국에 포로로 잡혀간 백성들을 구해오기 위해 그처럼 발벗고 노력한 정치가는 정몽주 외에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당시 중국과 일본은 모두 전란에 휩싸여 있어서 여기에 사신으로 가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보장할 수 없어서 태풍으로 표류하기까지 하는 고초를 겪으면서도 계속 사신행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만 봐도 대단한 인물이다. 정몽주 이전에 일본에 사신으로 간 나흥유는 반죽다가 겨우 돌아왔다. 나흥유가 겨우 고려로 돌아와서 왜인들은 고려인을 싫어한다고 사신을 보냈다가 목만 돌아올 것이라고 한 말에 다들 겁먹었음에도 정몽주는 기어코 갔던 것을 보면... 심지어 명나라로 갈 때는 죽는 게 거의 확정사항일 정도로 위험한데도 거절하지않고 가서 기어코 목적을 달성했다. 이러한 행동은 결코 노회한 정객이나 권력에 눈 먼 대신에게서 나올 수 있는 행동이 아니다.
당시 부패한 고려 말의 정치판에서 그만큼 청렴하고 양심적인 정치인이 드물었던 것도 사실. 그리고 외교활동만 한 게 아니라 자신의 사재까지 털어가며 일종의 모금운동까지 벌였다. 그의 충성의 대상은 '조정' 이전에 바로 '백성'이었던 셈. 즉, 고려의 마지막 기둥이자 양심적이고 청렴결백했던 정치가였음은 변함이 없다. 그의 죽음이 알려지자 평범한 백성이나 상인들도 그 죽음을 애도한 것은 이러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유교의 민본주의 사상을 지나치게 끌어내어 짜맞춘 논리라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이건 애시당초 정몽주가 유교(성리학)를 본격적으로 도입한 당사자로서 유교의 가르침에 따라 행동했을 것임을 고려하면 그가 민본주의를 받아들인 건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정치가가 백성을 위해 노력했다면 당연히 좋게 평가받는 것이다.
사실 백성에 대한 충성을 비현실적인 소리로 본다고 하여도 정몽주에 대한 충신 이미지가 사라지진 않는다. 바로 왕씨 고려라는 왕조에 대한 충성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왕과 창왕을 폐지한다고 해도 새로 옹립한 왕도 왕씨이다. 왕위에 앉아있는 사람만 변했지 왕씨가 다스리는 고려 왕조는 변하지 않는 것이다. 즉 정몽주 입장에선 왕이 왕씨왕조라면 타협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여차직하면 무장의 지배도 뒤집힐 수도 있는 것이고. 애초에 고려는 무신정권을 겪었던 나라이고, 공양왕은 대놓고 이성계에게 무신정권을 제의하기도 했다. 이씨 무신정권이 성립되었다면 정몽주는 잘하면 왕가도나 정지상, 못해도 왕조의 보호 정도의 위치는 할 수 있다. 이건 당시 정몽주의 현실판단력이라면 충분히 고려할 수 있는 문제이다[32]. 조선건국세력들은 이전의 권력자와는 달리 고려라는 국가 자체를 없애려고 하였고 이게 충돌한 것이다.
또한 상기의 비판 항목에 있는 “조선왕조의 수립이 백성의 생활에 더 나은 결과를 가져왔으므로 고려왕조를 지키려고 했던 그의 행동은 뻘 짓이다.”라는 요지의 비판도 원인과 결과가 배치된 대단히 결과론적인 주장이다.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입장에서 보면 조선왕조 전반기 명군의 출현[33]을 알고 있으므로 정몽주 측의 행동이 답답하게 여겨질지 모르나 당대 사람에게 그러한 사실은 예측불가능한 미래의 일이었다는 것을 명심해야한다. 고려말 당시 상황에서 이성계 측이 과연 백성을 위하여 역성을 주장하는지 권력을 탐하는 것인지는 판단이 불가능한 사항이다. 이것은 예측이 아니라 예언의 영역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당장 고려말에 “조선이 건국되면 뛰어난 명군이 나타나서 황금시대를 맞게 될 테니 역성혁명에 찬성해달라.”고 했다면 미친 소리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실제 상황이 조선초에 일어났다는 것 또한 고려할 필요가 있다. 왕씨 대학살과 고려 충의파에 대한 숙청 및 배제로 많은 피가 흘렀으며 그 이후에도 조선 개국세력 내에서 권력다툼으로 두 차례에 이르는 왕자의 난이 발생하여 조선 초 정국은 대단히 불안했다.[34]
오히려 당시 일반적인 상식론과 과거 사례에 입각해서 예측해본다면 역성으로 나라가 뒤집히게 되면 새로운 왕조가 구 왕조의 왕족과 지배층을 대량학살하거나 숙청하는 피바람이 불 것이며 심한 경우 내란이 발생할 수도 있다. 이 정도로 정국이 불안해지면 백성의 생활에도 악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 실제로 조선이 개국되자 왕씨 대학살과 고려 충절파에 대한 탄압이 있었던 것만 봐도 이것은 충분히 고려해야만 하는 사항이었다. 반대로 만약 이성계 측이 혁명을 단념하고 개혁에 주력했다면 왕조 교체와 함께 숙청된 온건 개혁파 인물들까지 포함한 개혁이 가능했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훗날 태종이 정몽주를 영의정에 봉하고 사대부들의 귀감으로 삼은 것 역시, 물론 왕조에 충성을 다하라는 프로파간다의 목적이 있었겠지만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충성의 표본을 제시하기 위해서라면 정몽주 이외에도 왕조를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은 충신들은 역사 속에 많이 있었고, 태종 입장에서도 단지 프로파간다의 목적을 위해서 자신이 살해한 정몽주를 충의의 화신으로 내세우는 것은 오히려 왕조의 정통성에 적지 않은 위험부담을 지는 셈이다. 태종이 당시 고려의 주춧돌이나 다름없던 정몽주를 살해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단순히 프로파간다만을 고려해서 그를 존숭하기에는 정치적 부담이 매우 컸다. 아무리 말을 잘 포장해도 결국 충신이며 명신을 살해했다는 결론은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왕조의 정통성에 다소 흠결이 생기더라도 정몽주를 인정하고 추증함으로써 얻는 이로움이 더 크리라는 태종의 계산이 들어갔을 것이며, 따라서 이것은 오히려 당대 정몽주의 위상이 그의 사후에도 영향력을 끼칠 정도로 거대했다는 반증이 될 수 있다. 이렇게 따지면 프로파간다의 목적으로 정몽주를 끌여다 붙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몽주를 어떻게든 존숭할 필요가 있었기에 자기모순의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정몽주를 높일 수밖에 없었다고 해석하는 것도 결코 무리한 비약은 아닐 것이다.[35]
또한 인터넷 상에서 일부가 그의 도덕성과 관련하여 왕과 권신의 인척을 실력이 없는데도 과거에 부정합격시켰다고 주장하고 그게 사실인줄 아는 경우도 많은데 이는 사실과 전혀 다르다. 실제로는 과거의 부책임자 격이었던 정몽주가 우왕의 애첩인 의비 노씨의 동생 노구산을 너무 실력이 모자라서 불합격시켰는데 우왕이 노발대발하여 과거 자체를 무효화시켰다. 그러자 다른 대신들이 의비의 아버지 노영수에게 아들을 다시 과거보게 하라고 하자 노영수는 아들과 같이 불합격된 다른 10명도 응시시키는 조건으로 이에 응하여 결과적으로 아들을 부정합격시켰고 또한 문윤경이란 자가 친구의 글을 베껴서 정몽주가 그를 내쫓았으나 과거 총책임자였던 염국보(염흥방의 형)가 합격시켜버렸다. 이에 대하여 최영이 한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즉 정몽주가 부정합격에 관여한게 아니라 제대로 처리한 것을 우왕과 권신들이 개입하여 뒤집어버린 것이다. 왕과 권신의 인척이 과거에 응시해도 실력대로 처리했는데 왕과 권신들이 뒤집어버린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를 정몽주가 권신과 결탁했다며 정몽주 비판론에 인용하는 것은 명백하게 사실관계의 오류다. 물론 제대로 사료를 살펴보는 역사학자들은 이런 말을 안하지만 그냥 떠도는 말로 역사적 인물을 비평하는 몇몇 네티즌들이 이런 말을 유포하며 비판론의 근거로 써먹는다.
또한 이방원의 회유에 따라서 이성계 편에 붙었다면 손쉽게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36] 충절을 지켜 고려왕조에 순절한 점, 사리사욕이나 탐욕을 부리지 않았던 점 등을 볼 때, 단순히 권력을 추구했다고 보기는 힘들며, 초기에 이성계에게 협조했던 것은 그 시점에서는 아직 그가 역성혁명을 노린다는 점이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는 것이 옳다.[37] 그리고 정몽주로서는 고려왕조를 개혁하기 위한 실질적인 무력의 뒷받침을 해줄 수 있는 인물로 그때까지 고려의 변방출신인데다 같이 목숨을 걸고 싸운 적이 있는 이성계를 신뢰했을 것이라는 추측 또한 가능하다. 당시 최영은 충신이긴 했으나 정몽주를 비롯한 신진 사대부가 추진하는 개혁에 반대편에 선 인물이었으므로 개혁을 통한 고려왕조의 지속을 노린 정몽주로서는 그를 몰아내기 위해 최영과 반대편에 선 무신세력의 도움을 필요로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다소 마키아벨리즘적인 인식이긴 하지만, 위에 언급된 정몽주의 냉혹한 면모는 목적 달성을 위해 불가피했다는 해석도 있다. 정몽주가 상대한 이성계 일파는 이미 조정의 모든 실권(특히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이들을 제거하기 위해선 비정상적인 방법도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 도덕적 정당성만으로는 왕조를 지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도전(드라마)에서는 이러한 해석 위에서 군자 정몽주가 정쟁의 온갖 수단을 사용하며 느끼는 갈등을 묘사한다.
4 묘소
묘소는 용인시에 위치한다.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원리 소재. 혈죽에 관한 일화가 있는 민영환 묘소도 존재하기에[38] 혈죽용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역사가 만든 우연?
원래는 고향인 경북 영천으로 이장하려고 관을 옮기던 중 명당자리를 발견하여 그 자리에 이장하고 자손들이 터를 잡게 된 것이 현재 묘소라고 한다. 상당한 명당인데 후에 선조의 왕비인 의인왕후 박씨가 승하하여 그 능터를 찾던 지관이 적당한 곳을 발견했는데 그곳이 바로 정몽주의 현 묏자리였다. 이에 선조는 난색을 표하면서 명당을 얻기 위해 충현의 무덤을 파헤칠 수 없다하여 다른 곳을 찾아 의인왕후를 매장토록 했다. 정몽주의 무덤이 있는 곳 일대를 능골이라고 하는데 바로 이러한 일화에 따라서 왕릉 자리로 택지될 정도의 명당터라는 뜻이라고 한다. 위에도 잠시 언급했지만 조선 시대에 복권되면서 무덤 또한 대단히 크고 화려하게 단장하여 거의 왕릉 수준으로 다듬어져 있다. 유림의 정몽주에 대한 존경심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여담으로 정몽주의 손녀가 명당터를 얻어서 자신의 시갓집을 잘되게 하려고 무덤자리에 물을 부어서 정몽주의 원래 무덤자리로 예정되어 있던 명당을 훔쳤다는 야사가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 야사에 나오는 손녀는 실제로는 정몽주의 손자인 설곡 정보의 딸인데 그 딸이 이석형이라는 인물에게 시집가 자식을 낳고 젊은 나이에 죽자 정보가 원래 자기 무덤자리로 찍어놓은 곳에 딸을 묻었고 이석형도 후에 죽어서 아내 무덤 가까이에 묻히게 된 것이다. 이 야사는 후에 이석형의 자손이 크게 번창하자 생긴 이야기다. 실제로는 그 두 집안이 서로 가까워서 정씨 가문의 선산에 이씨 가문의 묘소가 같이 혼재되어 있었는데 일제 시대 선산 분쟁이 일어나 이씨 가문의 묘소가 모두 이장되어 나가고 이석형의 무덤만 남은 것이라고 한다.
5 후손들
정몽주의 아들 정종성은 대단한 효자였는데 고려말 아홉 효자 중 한명이었다고 한다. 정몽주가 참살당하자 이성계 일파가 그를 역적으로 선포하고 효수했기 때문에 가산은 모두 적몰되었는데 정종성은 동생과 함께 피신하여 숨어살았다. 지방에 있는 친척들의 도움으로 근근히 살았다고 하며 태종 때 정식 복권된 뒤에도 '정씨의 아들인데도 전하가 봐줘서 살아있는줄 알아라.'라는 식으로 폭언을 들었고 조정 권신들에게 매질을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어쨌든 부친의 복권 이후에는 조선 조정에 출사했다. 이 정종성의 딸은 조선 정종의 서자로 5번째 아들인 선성군과 결혼하였으며 서녀는 양녕대군의 장남 이개의 첩[39]이었으므로 역설적이게도 정몽주는 조선왕실과도 인척지간이 된다. 한편 정종성의 얼녀는 조선시대 가장 욕먹는 찬탈인 세조 집권을 도운 한명회의 첩이기도 했는데 반대로 아들인 정보는 단종에게 충의를 다해서 결국 거열당할 뻔하다가 유배되고 가산을 적몰당한다. 정보에게 사형을 선고한 후 그가 정몽주의 손자라는 것을 뒤늦게 안 세조가 '충신의 자손을 죽일 수는 없다'고 하면서 감형한 것.
정보 사건 때문에 이후로 가문이 기울었다고 하는데 그래도 이후로 과거에 급제해 벼슬한 이들은 계속 나오긴 했다. 이 정보는 후에 단종이 복위되면서 역시 표창되었으며 조선 후기 신료들에게 '가문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않았다.'는 평을 받는다.[40] 단종의 충신들을 복권한 정조 또한 정보를 가리켜서 '과연 그 할아버지의 그 손자다.'라고 하며 생육신들보다도 윗 줄에 있어야 할 것이라고 평하였다.[41]
정보의 사위인 이석형 또한 뛰어난 문장가로 고위 관직을 지낸 사람이다. 세조 밑에서 벼슬했고 그의 총애를 받긴 했지만 역시 사육신의 절의를 기리는 시를 남겼다.
조선 인조와 효종 때 우의정을 지낸 정유성 또한 정몽주의 자손으로 그 손자 정제현은 효종의 딸 숙휘공주와 결혼하여 인평위가 되었다. 또다른 손자 정제두는 양명학의 거두로써 이름을 떨쳤다.
조선 후기에 종가의 대가 자주 끊어져서 그 후계문제로 여러 차례 조정에서 논쟁이 일어났으며 이와 관련해서 조정대신들이 옛 일을 상고하거나 종손으로 양자입적할 후손들을 물색하였고 왕명으로 양자입적의 예외를 인정하는 등, 중요한 사안으로 확대되었다. 이것은 정몽주가 조선 후기를 지배한 사림파의 비조였기에 그 종가의 후계문제가 정치적인 색깔을 띄게 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러한 종손의 후계문제를 다른 가문들이 따라하기도 하여 문제가 되었다고 한다.
6 기타
후에 정적이 되는 정도전과는 동문수학 사이이며 야사에서는 서로를 동심우(同心友, 같은 뜻을 가진 벗)이라 부를 정도로 가까웠다고 하며 맹자에 관한 서적을 그에게 주었다고 한다. 이 맹자는 역성혁명을 다룬 서적으로 정도전의 사상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런데 정몽주는 오히려 고려 왕조 최후의 보루로서 정도전과 대립했다는 점에서 대단한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정도전은 정몽주를 '도덕의 종장, 문채의 으뜸'이라고 평하였고 항상 '선생'이라고 부르며 존경심을 표현[42]했으며 정몽주 역시 정도전에 대해서 '정생은 막빈에 든 사람 중 가히 으뜸'[43]이라는 내용의 시를 지어 보내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친우였고 역사적으로는 이상을 부딪히는 정적이었으며 한 사람은 자신의 나라를 지키고 한 사람은 새로운 세상을 열려 했다는 점 등등 인상적인 대비점이 많아서 자주 함께 거론된다. 또한 태종의 집권 이후, 조선의 설계자인 정도전은 간신으로 비하되고 고려의 충신 정몽주는 동방의 성현으로 성균관에 모셔지는 등 후세의 아이러니컬한 평가도 눈길을 끈다.
극심한 반불론자였던 정도전과는 달리 불교를 그렇게까지 배척하진 않았던듯하다. 정몽주는 "삼한에 불교가 바야흐로 유행하니, 왕사성(王舍城, 인도)에까지 가서 구할 필요가 있겠나"라고 말할 정도로 불교가 유행했던 사회 환경에 살았기 때문에 불교와 인연을 끊을 수는 없었다. 정몽주가 승려와 자주 접촉했던 시기는 공민왕 5년으로 그의 나이 20세되던 해인데, 이해 여름에 김중현(金仲賢)이란 친한 벗과 함께 책을 가지고 원증국사 보우(圓證國師 普愚, 1301∼1382)를 방문한 일이 여러 차례 있었다. 따라서 정몽주가 불교의 여러 경전을 통해 불교교리를 접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시문을 통해 불교교리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심지어 정도전은 정몽주에게 자중을 바라는 서한을 보낸 일도 있었다.
그러나 정몽주는 결코 유학의 도를 떠나 불교에 탐닉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그가 한편으로는 불교를 이해하는 측면이 있지만 역시 유자로서 불교를 비판하고 있는 사실을 보면 잘 알 수 있다.공양왕(恭讓王)이 찬영(粲英, 1328∼1390)을 맞아들여 왕사(王師)로 삼으려는 것에 대해 반대의 입장을 표명하기도 했으며 유,불이 높은 경지에 있어서 서로 통할 수 있음을 한편으로 인정하지만, 구체적 현실을 논함에 있어서 불교는 미흡함이 있으며 불교처럼 현실을 벗어나 도를 찾기보단 유학경전을 통해 현실내에서 진리를 찾을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정몽주의 불교관은 많은 당시 유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던것으로 단순히 불교의 폐단뿐만 아니라 불교의 이론적인 부분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간 것을 알 수 있다.[44]
정몽주의 제자 중에 권우라는 인물이 있는데 후에 조선왕조에서 벼슬을 했고 충녕대군이 세자가 되자 그 빈객이 되어 학문을 가르쳤다. 이런 관계로 세종대왕은 정몽주의 손제자격이 된다.
정몽주의 제자 또는 사제(師弟)인 권근은 그 파에 속하여 이성계의 반대파에 섰으나 스승이 이방원에게 피살된 이후에는 바로 이성계 측에 붙어(...) 조선에서 높은 벼슬을 지내고 태종 이방원의 딸 경안공주를 며느리로 들이는 등 권세를 누렸다. 후에 정몽주의 신원을 적극 주장하여 태종이 정몽주를 복권시키는 단초를 마련하였다. 비록 절의를 끝까지 지키지못했다하여 후학들에게 변절자로 비난받기는 하지만 외교면에서 공을 세웠고 문필과 학문에 뛰어났다.
변계량 또한 정몽주의 제자로 외교문서를 전담할 정도로 뛰어난 문장가이자 중신이었다. 선대를 모시는 법도를 엄격히 하여 정몽주의 행한 바를 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세종 시절 명신으로 이름을 남긴 영의정 하연은 그 부친이 정몽주의 옆집에 살았던 인연으로 그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마지막 제자이기도 했다. 그의 강직함에 감탄한 태종이 그의 손을 잡고 치하할 정도였다고 한다.정몽주를 죽인 태종 치세에 다수의 신하가 정몽주 제자와 문인들이었으니 태종도 뜨끔했을듯
당대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왕을 보필할 재주라 하여 왕좌지재라고 칭하였는데, 같은 평가를 받았던 역사적 인물로는 순욱이 있다. 공교롭게도 순욱은 정몽주처럼 당시 무너져가는 후한을 일으키기위해 진력하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으며, 조조를 보필하여 권력을 잡았으나 오히려 나중에 가서는 조조의 역심을 알고 이에 대립하다 죽었다는 점에서 많은 부분이 유사하다. 특정 권력가(이성계, 조조)에게 매우 중요한 존재였고, 그 세력의 힘을 통해 무너져가는 나라(고려, 한)를 다시 일으키려는 생각이었으나, 오히려 그 권력가(이성계, 조조)에게 역모의 마음이 있어 이를 계기로 관계가 틀어지고 대립하다 죽음을 맞이하며 후에 결국 왕조가 교체된다는 점까지도 똑같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왕조를 위해 왕을 버린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친명파였던 정몽주의 입장에서는 친원파인 최영의 말만 듣는 우왕과 그 자식인 창왕을 좋게 볼 순 없어서 그들에게 신돈의 자식이란 굴레를 씌워서 폐위시키고 죽이는데 동의를 했던 것. 위의 내용을 반영한 것인지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정몽주는 왕조 유지를 통해 성리학적 이념을 지키려 하면서, 수단적 측면에서 현실적이고 냉혹한 정치가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고향인 경상북도 영천시에서 상당히 밀어주는 인물로, 임고면에 위패를 모신 임고서원이 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허가 돼 있다가 1965년에 대충 건물만 복원한걸 2009년부터 증축하여 지금은 상당히 으리으리하게 꾸며놓은 모습을 볼 수 있다. 면사무소보다 더 크다.(...) 때문에 포항시에서 불편한 기색을 보이기도 했다. 포항시와 영천시는 서로 우리가 포은 선생의 고향이라고 분쟁을 벌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포은 선생의 또다른 고향인 포항시 남구 오천읍 문충리는 오천 읍내에서 꽤 떨어진 한적한 곳이고, 동해고속도로 포항~울산구간 공사 때문에 동네 주민들이 개발에 부정적인 인식이 많았기에[45] 이를 노려 영천시가 포은 유적지 개발을 선점한 것. 영천시에서는 포은 선생의 생가, 임고 서원, 가설 선죽교를 새로 복원했으며 영천에는 포은초등학교와 포은고등학교가 있다. 그리고 포항에는 포은중학교와 포은중앙도서관, 정몽주로가 있다.
묘소가 있는 경기도 용인시에서도 밀어주고 있다. 수지구를 관통하는 국도명이 포은대로이며, 수지구에 위치한 대규모 문화시설인 포은아트홀과 포은아트갤러리가 그의 호를 따서 명명되었다.
김씨 정권의 붕괴를 우려해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를 역사 교과서를 통해 권력에 눈이 멀어 나라를 팔아먹고 고구려 영토를 되찾을 기회를 날려버린 대역죄인이라고 가르치는 북한에서도 정몽주를 고려의 충신으로 강조하고 있다. 비록 김씨 정권에게 충성하라는 뜻이 깔린 것이지만 북한에서도 정몽주의 충심을 인정하고 있는 모양.#
고려사 이색전에 따르면 술에 취하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주사가 있었다고 한다.
7 사극에서의 정몽주
- 개국 : 송재호[46]
- 조선왕조 오백년 추동궁 마마 : 김기일
- 용의 눈물 : 정승현[47]
- 신돈 : 김한
- 대풍수 : 박준혁
- 정도전 : 임호. 정몽주(정도전) 문서 참고.
- 육룡이 나르샤 : 김의성. 정몽주(육룡이 나르샤) 문서 참고.
대하사극 용의 눈물에서 성우 겸 배우인 정승현씨가 정몽주 역을 맡았다. 발성이 좋고 무게감 있는 중신으로서의 모습을 잘 보여주어서 좋은 평가를 받는다.
2014년작 대하사극 정도전에서는 왕 전문배우로 유명한 임호가 정몽주 역을 맡았다. 처음에는 배우의 나긋나긋한 기존 이미지 때문에 다소 어울리지 않는다는[48] 평도 있었으나 극이 진행되면서 다른 주연급에 밀리지 않는 무게감을 보여주며 2대 최종보스 평이 나아졌다. 특히 처음의 순수한 이상을 지닌 선비에서 무너져가는 왕조를 지키기 위해 상대와 마찬가지로 괴물로 변모하는 모습이 임팩트있게 묘사되었다. 역대 정몽주 역 중 가장 젊고 잘생긴 배우라는 평도 있다.[49] 자세한 것은 정몽주(정도전) 항목 참고. 그리고 육룡이 나르샤에서 정몽주 역을 맡은 김의성 배우는 실제 정몽주와 닮았다는 칭찬인지 디스인지 모를 애매한 평을 받았다
<용의 눈물>과 <정도전>, <육룡이 나르샤>의 정몽주를 비교해보면 90년대 중반과 2010년대의 정몽주 평가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 수 있다. 과거에는 강직한 인물로 고려를 마지막까지 지킨 충신 이미지가 강했다면, 최근에는 강직한 인물로 그려지는 것은 맞지만 결국 새 나라를 열려는 세력에 맞서는 최후의 정적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 근래들어 정도전이 급진적 개혁가로 재평가되고 있는 것과 궤를 같이한다. 이에 대한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의 분석도 있다.‘육룡’ 제작진이 정몽주를 야비한 인물로 묘사한 이유
다만, 진정한 정몽주의 모습은 다 드러난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극에서 정몽주를 다룬다고 하면 위화도 회군~선죽교 피살 사이의 시기, 즉 역성혁명을 막기 위해 고심하는 고려 최후의 충신으로서의 모습을 묘사하는데 집중한다. 반면에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에도 필사적으로 나라를 구원하고, 포로를 데려오는 등 여러 업적과 유능한 외교관 겸 행정가로서의 면모는 거의 묘사되지 않는다. 또한 문신이면서 직접 전쟁터에 나서는 등 복합적인 모습은 KBS 사극 정도전을 제외하면 언급도 거의 되지 않는다. 천재이자 엘리트이면서 유배와 사신행, 조난과 전쟁 참전 등 여말선초의 인물치고도 많은 일화와 복합적인 면모를 가진 인물인데도 새롭게 조명되는 많은 역사적 인물에 비해서 여전히 평면적인 묘사에 그치는 상황.
다만 이게 어느 정도는 어쩔 수 없는 것이, 대개 여말선초의 사극은 주로 이성계 측이 주인공이 되는데 여기서 정몽주가 있는 그대로 나오면 조선건국의 정당성이 그만큼 떨어지고 주인공이 악역스럽게 인식될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대하사극 정몽주가 한번 나와야 이것이 제일 큰 모순이다. 정몽주의 일생은 애국과 애민이 두 가지가 공존이고 목숨을 다한 사람이다. 죽을 자리인 것을 알면서도 목숨을 걸고 명나라와의 외교를 성공시키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일본과의 외교에도 필사적으로 매달려 결국 백성들을 되찾아왔다. 심지어 이는 국가적 일이라기 보다는 정몽주가 거의 개인으로 일구어 낸 일이다. 그 뿐만 아니라 황산대첩에서 이성계와 같이 싸웠다. 비록 전투원이 아닐 지 몰라도 전쟁터에 나가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이다. 그리고 망가진 조운제도를 되살리고, 청렴한 인사정책 등 마치 소설 속의 주인공 같은 행보다. 그런데 만약 이런 정몽주의 모습이 나와버리면 그야말로 "어째서 이런 인물을 죽여가면서까지 왜 조선을 건국한 거야?" 라는 모순이 발생한다.[50]
여담으로 그가 선지교에서 피살당해 죽었을 때는 백주대낮이었는데, 여말선초를 다루는 사극들은 한결같이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서인지 항상 야밤으로 바뀐다(...) 백주대낮의 칼부림이었단 사실은 이방원이 여러 의미에서 정몽주 참살을 과시하고 싶었다는 사실을 드러내기도 한다.
참고 :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 정몽주 영정. 포은의 옛 집터에 세워진 경기도 개성 숭양서원 소장 영정의 상반신 부분을 1880년에 옮겨 그린 것이다.
- ↑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일본의 억류 된 포로를 사재까지 털어서 데려 온 사람이 정몽주이다. 그리고 의심이 많고 언제 폭발할 지 모르는 주원장에게 인정받아 고려와 명나라의 관계를 개선 시킨 사람이 바로 정몽주이다.
- ↑ 충신이라는 이미지가 결코 나쁜 것이 아님에도 가려졌다고 평가받는 것은 밑에 '7. 사극에서의 정몽주'의 중간 부분을 참조. 사극같은 문화매체 뿐만이 아닌 일반적인 대중 인식도 크게 다르지 않다.
- ↑ 정몽주 선생은 본관이 영일이기는 한데 고향은 영천이라는 설과 포항이라는 설 2가지가 있다. 그런데 영천시는 포항시와 서로 우리가 정몽주 선생의 고향이라고 분쟁을 벌이기도 했다. 포항에는 정몽주 선생의 호를 딴 포은중앙도서관과 포은중학교, 정몽주로가 있다. 이에 질세라 영천시에는 포은초등학교와 포은고등학교(원래 금호여고였으나 2014년에 남녀공학으로 전환하면서 교명을 변경하였다.)가 있다. 어쨌든 현재 영천이라는 쪽이 좀 더 우세한 편으로, 영천에는 임고서원과 가설 선죽교, 새로 복원한 포은 선생의 생가가 있다.
- ↑ 무신정변이 일어나기 전에 막장가도를 달리던 의종에게 목숨걸고 간언한 인물이다. 원래 의종을 보살피고 보좌했으나 의종이 정사를 내팽개치자 이를 간언하다가 결국 왕의 눈 밖에 나자 자결했다.
- ↑ 일부 사극(뿌리 깊은 나무?!) 등의 영향으로 세종대왕이 정도전의 영향을 받았거나 그의 사상을 이었다고 여기는 경우가 있으나 실제 사료에서 이를 뒷받침하는 기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면 오히려 세종대왕이 정몽주의 손제자로 그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편이 맞다. 그 외에 세종대왕 치세의 신하들 또한 정몽주의 학통이 대부분이다.
- ↑ 권근 본인도 태종대의 대신이며 그의 손자가 한명회와 함께 세조를 옹립하고 훈구파의 대표인물이 된 권람이다. 변계량은 태종과 세종대의 명신으로 높이 평가받은 인물.
- ↑ 영일은 정몽주의 고향이다. 따라서 유배지 또한 상당히 배려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실제 유배지 및 관련 사적은 경남 산청에 남아있어 실제는 달랐을 수도 있다.
- ↑ 다만 정도전의 후손들은 정도전과 무관하게 역적으로 멸문지화를 당하지 않고 대대손손 고관대작을 지냈다. 심지어 연산군때엔 정도전의 증손자인 정뭄형이 우의정에 제수될 정도였는데 얼마 안가서 대간의 탄핵으로 물러났는데 그때 대간이 꼬집은 이유도 정도전의 후손이라는 이유가 아닌 50년이나 벼슬하면서 큰 실적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정작 정도전 본인은 시체도 제대로 수습안되고 장례도 치뤘는지, 묘소는 어디인지 자손들도 모른다.
- ↑ 現 경상북도 포항시. 이런 이유로 포항에는 관련 사적지가 여러 군데 있으며, 포항 시립도서관의 이름이 포은도서관이었다.
- ↑ 이 바람에 포항시와 영천시는 서로 우리가 정몽주 선생의 고향이라고 싸우기까지 했다.(...) 관련 기사 영천에는 포은초등학교가 있다.
- ↑ 현재 다자이후 시에 있는 간제온지(觀世音寺)가 바로 당시 정몽주가 머물렀던 곳으로 전해지며, 정몽주 본인이 지은 한시도 남아 있다.
- ↑ 무장으로서의 능력보다는 군내 사무나 병법논의 등을 맡았을 가능성이 높지만 문신이면서 장수로 활약한 이들이 있고 정몽주 자신도 이미지와는 달리 문약한 인물이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여러차례 전투에 참여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볼 때, 무신 적성도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 ↑ 십수일을 표류하는 와중에도 끝까지 외교국서를 놓치지 않고 버텼다. 배에 실려 있었던 말안장을 뜯어 먹으면서 버텼다고...
- ↑ 한 급수 씩 밀리긴 하나 이후 조선 초에도 외교, 국방, 내정을 섭렵한 올라운더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신숙주. 이 둘은 시호 또한 문충으로 같으나, 부귀영화를 버리고 스러지는 고려를 위해 순절한 정몽주와 세종대왕의 눈물겨운 부탁도 저버리고 수양대군의 패륜행각에 동참한 신숙주는 대비를 이루고 있다.
- ↑ 이성계의 이복형 이원계의 사위인 변중량이 정몽주의 제자였는데 그가 스승에게 암살계획을 알렸다고 한다.
-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정몽주 자신의 도박 비슷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정몽주 자신이
고려 왕조를 지키기 위해서권력자 이성계에게 거스르는 온갖 정치 공세를 다하면서도 진작에 죽지 않고 있는 것은 이성계 자신이 그런 식으로 피를 흘려가면서 왕조를 찬탈하기보다는 모양좋게 모두의 지지를 받아 즉위하고 싶다는 속셈(정몽주는 그것을 과욕이라고 불렀다) 덕분이고, 그것 때문에 진작에 자신 따위 마음만 먹으면 제거해버리고도 남았을 이성계가 자신을 죽이지 않고 있음을 잘 알고 있는데, 이성계 쪽에서 암살이든 뭐든 쓸 생각이라면 경호원을 데리고 가봤자 아무 소용없을 게 뻔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다했고 이제 어떻게 흘러가는지 한 번 보자 하는 심리였다고. - ↑ 유배된 동생은 살아남아 형의 문집을 발간했다고 한다.
- ↑ 이 때 같이 죽은 머슴의 이름에 대해서는 여러 이설이 있다. 용씨(龍氏)성의 머슴이었다는 말도 있다. 참고로 용의 눈물에서는 이상인이 배역을 맡았었다.
- ↑ 권근 본인의 말에 따르면 그날 권근이 끝까지 모시고 가려고 했으나 군인들이 거리를 분주히 다니는 모습을 보고 정몽주가 주변 사람들을 모두 돌려보냈다고 한다.
- ↑ 조선왕조실록 정조 14년에 조견을 제사지내자는 건의에서 나오는 기록.
- ↑ 근데 사실 이 기록을 곧이 곧대로 믿으면 안된다. 왜냐면 이건 조선개국공신인 조견을 고려의 충신이라고 윤색한 과정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에...하여간 그렇다고 하더라도 정몽주의 위상이 그만큼 대단했으며 몇백년이 지난 후대에도 '당시엔 그의 말대로 하지 않으면 곧 역적이나 다름없었다'고 그의 위상을 높게 봤다는 것으로 해석하는게 좋을것이다.
- ↑ 그 중에는 절에 정몽주를 위하여 시주하는 이들도 있었다.
- ↑ 후에 정도전이 우현보의 세 아들을 곤장을 때려죽인 사건에 자신의 어머니가 우현보 집안의 종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이 점이 작용했다는 말도 있다.
- ↑ 우리가 사용하는 횡설수설의 어원이다. 원래 이 말은 언변이 뛰어나다는 뜻으로 사용되었으며 여기서는 정몽주가 늘어놓는 말 중에 이치에 틀린 말이 없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횡설수설이라는 말이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 ↑ 조운제도가 황폐화된 시절에는 각지의 세금이 걷히지 않아 재정에 큰 지장을 초래했다.
- ↑ 훗날 숙종대의 사육신 복권이나 영조대의 추증, 두문동의 재발견도 이러한 맥락에서 보아야 할 듯하다. 다만 이 경우는 국왕이 필요에 의해서 써먹었다는 느낌이 매우 강하긴 하다.
- ↑ 택리지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는데 조선에서 내린 의정부 영의정이라는 벼슬을 새긴 비석은 벼락을 맞았지만 고려의 문하시중이라 적힌 비석은 그대로 몇십년을 멀쩡하게 남아 있었다고 한다.
- ↑ 또다른 의미에서는 학맥의 문제이기도 하다. 조선의 극초기를 제외한 거의 전시기를 점령한 사대부들, 관학파, 훈구파, 사림파의 학맥에서 정몽주는 상당히 중요한 위치에 있다. 특히 정몽주와 비슷한 연배의 인물들이 조선건국에 부정적이었고 비판도 강했던데 비하여, 정몽주는 다른 사람도 아닌 태종이 괜찮게 말을 해줬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밀어줘도 부담이 없었던 케이스이다. 그래서 정몽주의 입지 회복은 엄청나게 빠르다.
- ↑ 그러나 염흥방처럼 변절 후 이인임과 결탁하여 토지침탈과 월권 등 횡포를 부리는 것도 아니었고, 이색처럼 이런 무리들과 친인척 관계를 맺고 친교를 가지는 것도 아니었다.
- ↑ 참고로 조선 건국 후 정도전은 정몽주 일파인 이숭인, 이종학 등에게 이 방법을 똑같이 행하여 보복한다. 공식적으로는 곤장 100대를 치게 한 다음, 엉덩이뿐만 아니라 몸통 전체를 때려서 죽게 만든 것. 참고로 이숭인의 경우는 그가 특별히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의 뛰어난 문재를 정도전이 시기해서 죽였다는 기록이 있다.
- ↑ 아무리 성리학자라도 고려말 조선초에는 이정도 융통성은 있었다. 가장 꼬장꼬장한 것으로 평가받는 사육신만 해도 계유정난까지만해도 소극적 참여 혹은 우호적 방관의 위치에 있었다. 이게 끝나는건 세조가 직접 왕위에 오른 다음이다. 정몽주에 비하면 좀 더 완고해진 것이지만, 조선후기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인식과 실제 역사적 인물들의 행동은 차이가 있다.
- ↑ 말 할 것도 없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대왕을 말 할 것 이다. 실제로 조선 건국에 정당성은 세종대왕이 가지고 있을 것 이다. 당장 조선이 건국 되지 못했다면 훈민정음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 이기에
- ↑ 실제로 KBS 드라마 정도전에선 직접 정몽주의 입을 빌어 이런 해석을 피력하고 있다.
- ↑ 또한 태종은 정몽주의 서출손녀를 자신의 며느리로 삼았으며 정몽주의 아들 정종성에 대해서도 태종의 측근과 마찰을 일으켰을 때 그를 두둔하면서 비교적 약한 모습을 보였다. 정몽주 암살에 찬동했던 그의 형 정종도 정몽주의 손녀를 며느리로 삼으며 후대했다. 정몽주의 암살에 대해서 태종과 그 주변 인사들이 죄책감을 느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 ↑ 조선왕조실록에도 공식적으로 언급된 이야기이다.
- ↑ 이러한 관점에서 정몽주는 이성계가 최씨정권같은 무신집권체제를 노리는 정도로 평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이 있다.
- ↑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 소재.
- ↑ 혹은 후실이지만 정보가 단종과 연루된 일로 첩으로 강등되었다고도 한다.
- ↑ 이게 그냥 보기에는 별로지만 사실은 엄청난 평가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가문의 명성이란 정몽주를 가리킴인데 정몽주가 받는 평가를 생각하면 실로 어마어마한 평가.
- ↑ 정보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과거에 급제해 출사한지 얼마 안되어 혹독한 신고식을 당해서 사망하고 만다. 후에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자 정보는 그 아들이 살아있었다면 반드시 이 일에 참여했을 것이니 차라리 일찍 죽은 것이 다행이었다고 말했다한다. 물론 본인도 사육신을 옹호하여 거열형을 당할 뻔했다.
- ↑ 꼭 그렇지만은 않았고, 정도전이 정몽주에게 사적으로 보낸 서신에서는 격의 없이 자인 '달가'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정도로 허물없는 막역지우였던 사이였다.
- ↑ 이 당시 정도전은 이성계의 막료가 되어 막 함흥으로 나아가는 때였다. 즉 이성계의 사람들 중 정도전만한 사람이 없다는 뜻.
- ↑ 출처 : 여말선초 사상적 패러다임의 전환 탐구, 정성식.
- ↑ 고속도로가 통과하는 산이 마을 선산이었던지라 묘소가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보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 ↑ 용의 눈물에서는 태종의 장인이자 세종대왕의 외할아버지 민제 역을 맡았다.
- ↑ MBC 특기로, 1961년에 데뷔한 원로성우.
- ↑ 이것은 대중들의 정몽주에 대한 인식이 고려에 대한 일편단심을 끝까지 지킨 노신의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극중에서 정몽주는 이제 본격적으로 자신의 이상을 펴보려고 하는 젊은 선비의 모습이니 마냥 어울리지 않다고 하긴 힘들다.
- ↑ 영정을 봐도 알겠지만 그렇게 미남형은 아니시다(...)
- ↑ 현재까지 이 물음에 명쾌하게 답해주는 작품은 없다. 오늘날에는 결과론적으로 후대의 위대한 성군 세종대왕의 존재가 이에 대한 명분으로 보이기도 하겠지만, 그 당시로서는 앞으로의 일을 전망조차 할 수 없었던 시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