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 역대 국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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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물이 그냥 수염 많고 근엄한 동네 어르신네처럼 보인다면 큰 착각이다.
벨기에의 역대 국왕
초대 레오폴드 1세 - 2대 레오폴드 2세 - 3대 알베르 1세
Léopold II(레오폴 2세)(프랑스어)
생몰연도 : 1835년 4월 9일 ~ 1909년 12월 17일
재위기간 : 1865년 12월 17일 ~ 1909년 12월 17일
이놈이 인간이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다.
1 개요
식민지 콩고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국민들에게도 온갖 욕과 경멸을 듣고 생을 마감한 폭군. [2]
해릉양왕과 수양제, 충혜왕, 연산군도 이놈 앞에선 성군으로 보일정도...
제국주의 침탈 역사상 최악의 인물로 손꼽힐만한 인간 말종.
벨기에의 2대 국왕으로 자국에선 그럭저럭 통치한 국왕이지만, 콩고 자유국에게는 그야말로 극악무도한 인물이었다. 초대 국왕인 레오폴드 1세와 오를레앙의 루이즈 마리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885년부터 1908년 11월 15일까지 자신이 세운 괴뢰국인 콩고 자유국을 지배했다. 콩고를 식민지로서 악랄하고 가혹하게 수탈하여 수많은 희생자가 나왔는데, 추정치에 근거하면 최소 300만명에서 최대 3000만명에 달하는 콩고인들이 그의 집권기간 동안 희생되었다. (1000만명가량으로 추정한다.) 그야말로 인간도살자라 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인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지도는 상당히 떨어지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벨기에 국민에게는 어느 정도 선정도 베푼 왕이었지만, 식민지인 콩고 원주민들에게는 그야말로 최악의 폭군이 따로 없었다. 지금도 콩고 사람들은 이 사람의 이야기만 들으면 치를 떤다고 한다. 그 당시 수많은 식민지를 착취하던 영국과 프랑스같은 제국주의 국가조차도 그의 콩고 통치를 가리켜 "야만과 잔혹의 극치"라고 비난했던 것만 봐도 그가 어떤 악마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2 젊은 시절
1844년의 레오폴드 2세
이렇게 큐티한 왕자님이 인간말종일리가 없어[3]
너는 사람을 잡는 왕이 될 것이다
레오폴드 2세는 벨기에의 초대 국왕 레오폴드 1세와 프랑스의 마지막 국왕 루이 필리프의 딸 오를레앙의 루이즈 마리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인 루이 필리프가 생후 1년만에 사망해서 차남이지만 장남 취급을 받게 되는데 지리덕후라서 지리 이외에는 관심이 없어서 성적이 별로였다 물론 지리를 좋아하는 그의 성격은 나중에 매우 안 좋은 방향으로 표출된다. 덕분에 어머니 루이즈 마리는 아들이 죽을 것을 걱정하여 그의 건강을 최대한 생각하면서 키웠고 그에게 잔소리를 많이 했다고 한다. 심지어 아버지 레오폴드 1세도 아들에게 만나려면 알현 신청하는 절차를 밟으라고 하고 레오폴드 1세 스스로도 아들에게 말을 전할 때 시종을 통해서 전달했다. 레오폴드의 어머니는 몸이 허약했고 결국 아들의 죽음에 슬픔을 느껴서인지 그녀의 건강이 악화되었고 1850년에 사망했다. 그 때 레오폴드는 15살 이였다. 그는 어머니와 형이 이렇듯 일찍 죽었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껴서 건강에 집착하는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8살에는 오스트리아의 공주 마리 앙리에트와 결혼을 하는데 아이를 어떻게 만드는지 몰라서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 엘버트 공이 가르쳐줘서 자식이 생겼다고 한다. 그런데 뒤늦게 배운 성지식에 맛이 들린 건지 전용요트를 타고 영국에 건너가서 정기적으로 기생관광을 하고 다녀서 훗, 이래야 내 제자답지! 영국 법정에서 문제가 되기도 했다. 다만 못된 것도 함께 가르친 영국 왕태자인 앨버트 왕자도 영국의 창녀촌에 다닌다는 이야기가 나와서 이 사건은 그대로 묻히고 말았다. 이러한 습관은 계속 이어져서 20세기가 되자 레오폴드 2세는 성욕을 주체 못했는지 자신의 손녀뻘이 되는 카롤린이라는 창녀를 정부로 선택했다. 다만 이는 굉장한 악수가 되었는데 해외에서는 콩고의 학살로 레오폴드 2세가 욕먹었지만 정작 이 불륜 사실이 더 큰 문제가 되었고 레오폴드는 이 사건으로 인해서 벨기에에서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되었다. 게다가 자신이 콩고에서 버는 돈은 전부 카롤린에게 또는 건축이나 토목공사에 쏟아부었기 때문에 비난은 더욱 거세졌다. 그렇게 카롤린과 레오폴드 2세와의 사이에서는 아들이 둘이나 태어나지만 서자여서 왕위계승권은 없었다. 다만 둘째 아들은 한쪽 손이 기형이었는데 사람들은 이를 두고서 콩고에서 죽어간 영혼들이 저주해서 아이의 손이 기형이 되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왕위에 오를 당시의 레오폴드 2세
어쨌든 레오폴드는 1855년에 벨기에 상원의원이 되었고. 그는 특히 벨기에와 무역을 발전하는 것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고 국회 상원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다. 그는 이미 국회에 있을 때부터 벨기에의 식민지를 만들고 합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1854년부터 1865년 동안, 레오폴드 해외에 광범위하게 여행을 다니거나 방문하며 인도와 중국 뿐만 아니라 이집트와 지중해의 해안과 아프리카를 여행하고 다녔다. 그러던 중 그의 나이 30세 때 그의 아버지 레오폴드 1세가 1865년 12월 10일에 사망하자 레오폴드 2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벨기에 왕위에 올랐고 12월 17일 취임 선서를 했다.
3 콩고 지배
영국의 잡지 펀치에 실린 레오폴드 2세의 자국 식민지에 대한 폭정을 비판하는 만평.
저런 만평을 쏟아낸 영국, 프랑스, 미국의 제국주의자들도 정도만 다를 뿐 똑같이 악랄한 제국주의적 착취와 확장 정책을 취했음에도 벨기에는 우리보다 더 나쁜놈이라 할 만큼 레오폴드는 원주민들에게 지옥을 보여줬다.
3.1 지배의 시작
레오폴드 2세는 당시의 시대적 흐름에 따라 식민지를 보유하는 것만이 강대한 국가가 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어떻게든 식민지를 얻기 위해 동분서주했는데, 벨기에는 경제력이 괜찮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식민지 구입을 시도했다. 그는 벨기에 정부에게서 돈을 지원받아 스페인에게 필리핀을 구입하려 시도해 보았지만, 자신들의 알짜배기 식민지를 내줄 터가 없었던 스페인이 거절 의사를 날려서 실패했다.그리고 나중에 미국에게 발려서 다 뺏긴다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식민지를 얻기 위해 갖은 방법을 시도해 보았지만, 번번히 실패하고 만다. 따지고 보면 번번히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가 국왕으로 즉위했던 해는 서구 열강의 세계 식민지 쪼개먹기가 절정에 이르던 때라 후발주자인 벨기에가 건드려볼만한 식민지는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이렇게 그의 계획이 차질을 빚던 와중에 당대엔 미개척지[4]였던 콩고가 그의 눈을 사로잡게 된다. 1876년 레오폴드는 아프리카에 벨기에의 근거지를 설립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그때까지도 콩고의 지배자는 정해지지 않았고 레오폴드 2세는 외무부의 아우구스테 램버몬트 남작을 자신의 거처로 불러서 "아프리카에서 뭔가 일을 해 보고 싶네. 다른 나라의 개척자들이 아프리카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자네는 정확하게 알고 있지 않은가.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을 우리도 나서서 평화적이고 인도주의적인 방법으로 시행하여야 하네.개새끼야 그것이 나의 유일한 걱정거리이자 목표일세."라며 그는 콩고를 식민지로 삼기 위해 철저한 계획을 세운다.
1876년 레오폴드는 아프리카를 연구하고 식민지를 만들 목적으로 브뤼셀에서 지리학 회담을 개최했다. 물론 레오폴드 2세는 참가자들이 자신의 진짜 의도를 눈치 채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위장했다. "여러분들을 브뤼셀로 초대한 것은 저 개인의 이익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 의도는 애초부터 전혀 없습니다. 제 나라 벨기에는 자그마한 나라이지만 동시에 행복한 나라이며 저에게 많은 면에서 만족을 안겨주는 나라입니다."라며 이야기하자 많은 참가자들이 레오폴드에게 매혹되었고, 그들은 그를 아프리카에 인도주의적인 행동을 취할 지도자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1876년 9월 14일 브뤼셀에서의 지리학 회담 이후, 레오폴드 2세는 40여명의 벨기에인 실업가, 군인등으로 구성된 국제 아프리카 협회라는 단체를 설립하고 회장이 되었다. 표면적인 목적은 미개척지의 탐험과 더불어 고통받는 흑인을 돕는다는 인도주의였지만, 당연하게도 실제 목적은 콩고 지역을 식민지화하려는 계획이었다. 레오폴드는 자신의 일기에 "아프리카라는 엄청난 케이크를 얻을 수 있는 이번 기회를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다"라고 적었다. 그는 당대의 유명 탐험가였던 헨리 스탠리를 보내 콩고 지역을 탐사했는데 그는 이 탐사를 아프리카 흑인을 돕기 위한 박애주의와 학문적 탐사 때문이라고 둘러댔다. 그런데 이 거짓말이 얼마나 그럴 듯 했는지 레오폴드 2세에게 기부금까지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는 와중에도 뛰어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려 여러 국가들을 구워삶았다. 레오폴드는 자신의 콩고 지배를 강대국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미국에 로비를 하는데 백인우월주의자들은 콩고에 흑인을 위한 나라가 생기면 귀찮은 흑인들이 다 건너가서 살겠지라는 생각을 해서 계획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흑인들도 미국에 계속 있어봐야 백인 밑에서 개고생할 뿐이다라는 생각에 찬성했다라이베리아. 이에 미국정부도 미국인들이 콩고에서 자유롭게 땅을 사고 팔수 있도록 보장하고, 콩고에서는 미국 상품에 면세혜택을 주겠다는 레오폴드 2세의 제안을 수락했다. 이때 콩고의 부족장이 싸인했던 조약문 하나를 미국 정부에 보냈는데 이 문서에 콩고협회가 모든 경제적 이익을 독점한다는 조항을 빼서 미국 정부도 속아 넘어갔다. 어쨌든 미국 정부는 세계에서 최초로 콩고 자유국을 승인한다.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다른 강대국들도 설득하고 당시 외교계의 끝판왕 급인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독일을 설득하는 문제가 남았다. 레오폴드 2세는 이 비스마르크마저 위와 같이 모든 경제적 이익을 독점한다는 조항을 빼서 속였다.[5]
그는 자신을 콩고의 법과 질서 그리고 문명화를 하려는 모범적인 이미지로 포장했고, 결국 1884년 베를린 회의에서 콩고의 실질적 지배권을 확립받을 수 있었다, 여담으로 이 때 그가 얼마나 선전과 거짓말을 잘 써먹었는지 그가 콩고의 지배권을 갖게 되자 각 나라의 대표자들이 열렬하게 환영했으며 일부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에서 뛰면서 박수를 치며 기뻐했다고 한다.
3.2 본격적인 수탈, 그리고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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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의 배설물만도 못한 놈...- 어니스트 시튼
열강들에게서 콩고의 지배권을 인정받은 레오폴드 2세는 콩고 자유국을 창립하고, 헨리 스탠리에게 아프리카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식민지를 개척하자는 제안을 했다. 스탠리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서 레오폴드 2세의 지원으로 벨기에의 은행과 합작하여 1878년 '콩고회사'라는 사설 회사를 만들어서 아프리카 진출에 착수했다. 스탠리의 계획은 아프리카에 도착해서 전 콩고 지방을 돌면서 원주민 추장에게 구슬이나 옷감 등을 선물하고 자신이 가지고 간 종이 위에 그 종족의 표시를 그리거나 X표를 찍게 했다. 대부분 족장들은 이전에 글로 된 문서를 본 일조차 거의 없었다. 아프리카인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호의의 표시로 찍어준 종이는 훗날 아프리카를 침략하는 전면 위임장이 되었다. 아프리카인들은 벨기에 사람들이 자신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저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들이 서명한 종이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자발적으로 우리의 상속권과 계승권을 협회[6]에 양도하고, 영토에 대한 모든 주권과 통치권을 영원히 포기한다. ...(중략)... 영토의 어느 지역에서든 당 협회가 시행하는 작업, 원정사업에 언제라도 노동력이나 기타 수단을 지원한다. 이 나라를 관통하는 모든 도로와 수로의 통행료 징수권, 모든 수렵, 어업, 광산, 삼림개발권은 당 협회가 절대적인 소유권을 갖는다. |
이 종이에는 땅뿐 아니라 노동력까지 제공한다는 내용까지 있었는데, 그 계약은 맨해튼을 양도한 미국의 인디언들의 조약보다 훨씬 더 악질적이였다.[7][8]스탠리의 속임수에 의해 만들어진 문서를 넘겨받은 레오폴드 2세는 500명의 원주민 추장들에게 권리를 넘겨받은 증서를 갖고 있다며 벨기에의 75배 넓이[9]에 달하는 콩고를 자신의 지배 하에 놓는데 성공한다.[10] 그리고 콩고인들은 이 시점부터 지옥행 열차를 타기 시작했다. 벨기에 정부는 왕이 뭐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고 물론 국민들도 애초에 관심이 없었지만, 알려고 해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레오폴드 2세는 콩고 개발에 재산을 쏟아 부었지만 한계가 있었다.[11] 결국 레오폴드 2세는 벨기에 정부에 손을 벌리게 되고 결국 레오폴드 2세가 사망할 때 콩고를 벨기에 정부에 양도한다는 조건으로 벨기에 정부의 돈을 받게 된다. 그는 "콩고 자유국가의 국왕(king Sovereign of the congo free state)"이라는 칭호를 부여받았고 처음에는 콩고의 근대화를 위해 노력하는 좋은 국왕처럼 보였다. 1889년 거의 접근이 불가능했던 산들과 정글을 통과하는 근대식 철도를 깔았고, 1889년부터 90년까지 레오폴드는 브뤼셀에서 노예무역을 없애기 위한 반노예 회의를 열었다. 그는 아프리카 북부의 무슬림들이 노예를 사고 판다고 비난하면서 영국 시민단체인 원주민 보호협회의 명예회장에 임명되고 수도 브뤼셀은 반 노예제도 회의장으로 제공해서 인심을 얻었다. 영국, 프랑스, 독일과 같은 다른 제국의 권력자들이 참가했고 레오폴드는 그들에게 다양한 지역 곳곳에 요새를 세울 것을 제안했는데, 그러면 '아랍' 노예상인들의 급습을 방지할 수도 있고 요새를 대륙 안쪽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운반차들의 거처로도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콩고에서 이런 노예상인들을 몰아내려면 군대를 쉽게 움직이게 철도 등을 깔아야 하는데 돈이 필요하니 콩고에서 수입세를 받겠다고 제안하자 참가국들이 그의 제안에 동의했다.
1891년 레오폴드는 법을 제정하고 1892년 상아와 고무 무역을 독점해 버렸다. 곧이어 우방이-우엘레(Ubangi-Uele) 강 근처와 숲속 주변에 살고 있던 콩고인들을 강제로 추방했는데, 이는 고무나무를 수집하고 상아를 위해 코끼리를 사냥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제 원주민들은 고무나무 수집과 코끼리 사냥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우엘레 마을에서의 모든 무역이 금지되었다. 콩고 원주민들의 생계를 망가뜨리려는 의도가 없었다 하더라도 원주민들은 이미 엄청난 생활고에 시달리게 되었다. 일단 콩고 자유국의 최초의 칙령을 요약하면 콩고 내에 있는 모든 땅은 국가의 소유라는 것이었다. 이는 사실상 몰수선언이나 다름 없는 소리다. 그리고 이 땅에서 나오는 수익의 절반 이상이 레오폴드 2세의 개인 재산이 되었다.
레오폴드 2세는 처음에는 장식품으로 수요가 높은 상아를 주 수입원으로 삼을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원주민들을 시켜 코끼리를 사냥해 상아를 수출하였으나, 예상 외로 수입이 변변찮자(…) 레오폴드 2세는 새로운 수입원을 찾는데, 그 대상은 바로 고무였다. 때마침 세계에는 고무 붐이 일어나고 있었고 콩고에는 '검은 황금'이라고 불리는 고무나무가 국토에 절반 정도나 있었던 것이다.
후술할 내용의 이해를 위해, 여기서 왜 고무 붐이 일어났는지를 잠시 짚고 넘어가자. 콜롬버스도 서인도 제도에서 고무를 보았지만 당시 유럽인들은 고무의 활용 방법을 잘 몰랐다. 18세기 들어서야 고무가 연필 자국을 지우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고, 1823년에는 스코틀랜드의 매킨토시가 옷에 고무를 입혀서 방수복을 만드는 방법을 알아냈다. 그 후 1839년에 미국의 발명가 찰스 굿이어가 우연히 유황을 고무와 조금 섞으면 고무가 차가울 때 잘 굳어지지 않고 또 뜨거울 때에도 끈적거리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혁신적인 발견으로 고무장화나 레인코트의 문제점이 해결되었으며, 드디어 고무의 대중화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1890년 아일랜드의 존 던롭에 의해 공기를 채운 고무타이어를 이용한 자전거가 발명되자 전 유럽에 자전거 열풍이 불어닥쳤다. 이를 시작으로 단 몇 년 만에 고무의 수요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고무의 쓰임새는 무궁무진해서 타이어뿐만 아니라 호스와 튜브는 물론 전기 와이어 등의 절연장비의 주재료로 쓸 수 있었다. 게다가 당시 폭발적으로 규모가 커지고 있던 자동차 산업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고무의 수요량이 급증했는데, 기존의 고무 생산량은 수요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라서 고무 원자재의 품귀현상이 발생했고 고무가격은 1890년대 내내 천정부지로 급등했던 것이다.
이에 레오폴드 2세는 원주민을 몽땅 투입해서 고무 생산에 콩고의 전 역량을 집중하고, 막대한 수익을 올린다. 물론 상아를 비롯한 다른 특산품을 착취하는 것도 여전했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원주민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엄청난 고생을 하고 있었지만 오히려 외부에서는 콩고가 발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1893년 250t도 되지 않았던 콩고 자유국의 고무 수출량은 1901년 6,000t으로 엄청나게 증가했기 때문이였다. 그러나 레오폴드 2세는 전제군주답게 자신의 소유물은 자신이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면서 많은 비난을 무시하고 콩고인을 철저하게 착취했다. 콩고에서 벌어들이는 모든 것은 그의 개인적인 돈으로 돌아갔고 콩고에는 조금의 돈도 돌아가지 않았다.
그저 원주민을 시켜서 플렌테이션 산업을 시키고, 결과물을 값싸게 착취하는 것은 그나마 폭정 선에서 머무르는 것이었겠지만, 이 작자는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고무는 응고된 수액으로 일명 '눈물 흘리는 나무'에서 채취되는데 콩고에서 눈물 흘리는 나무는 란돌피아 종으로 고무를 채취하기 위해서는 칼로 넝쿨의 표면을 벤 다음에 양동이나 항아리를 받쳐서 천천히 떨어지는 수액을 수집해야 한다. 고무 수요의 폭발적인 증가로 마을 인근의 넝쿨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모두 동이 나 버렸기 때문에 콩고 원주민들은 열대우림의 넓은 지역으로 나가거나 나무 위에 올라가 일을 해야만 했다. 그들에게 보호장비는 전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흑인 원주민들이 나무에서 떨어져 등이나 다리, 팔 등이 부러지는 상황이 속출했다. 게다가 연중 열대성 폭우가 빈번하게 발생하여 고무나무가 자라는 지역은 습지가 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고무채취는 아무리 힘이 좋은 사람들도 기피하는 고된 작업이었다.
레오폴드는 원주민들이 고무 생산을 기피하자 고무를 확보하기 위해서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온갖 방법들을 동원했다. 고무 채취작업은 벨기에에서 파견된 군인들을 이용하여 이를 강제했는데 이들이 사용한 방법은 악랄하기 짝이 없었다. 흑인 마을에 들어가면 곧바로 여자들을 잡아 영창에 가둔 후 가족에게 이를 알렸고 가족들이 이를 풀어달라고 하면 협상을 했는데, 그 조건은 그들이 요구한 고무를 가져와야 여자를 풀어준다는 것이였다. 결혼한 여자의 경우 남편이 고무채취를 거부하면 그 자리에서 사살당했다. 남자들이 정해진 양의 고무를 가져왔다고 해서 그대로 풀어준 것도 아니었고 그들은 여자 1명당 염소 두 마리를 추가로 주어야 아내를 석방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원주민들에게 개인별로 생산 할당량을 지정하고는 이를 맞추지 못한 자들은 손을 절단하는 극악무도한 정책을 펼쳤던 것이다.[12] 거기에다가 아주 자비롭게도(…) 할당량을 못 채운 사람을 한번은 손만 자르고 살려주었지만[13], 두번째는 아예 한쪽 팔을 잘라버리고[14], 거기에 세번째까지 채우지 못하면 목을 잘랐다.. 그리고 이러한 할당량은 한 사람이 죽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사람의 가족이나 주변인을 비롯한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이양되었다. 자신의 몫도 채우기 힘들 판에 남의 몫까지 뒤집어 쓴 자들은 남아날 겨를이 없으니 결국 처형당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처형당한 자의 할당량은 또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고(...) 이하생략
런던에 있는 식민성에 벨기에가 얼마나 잔인하게 아프리카인들을 학대했는지 자세한 기록들과 보고서가 전해졌는데, 대충 요약하면 채찍질, 고문, 강제 노동, 볼모로 잡아놓기, 쇠사슬에 묶어 감금하기, 학살 등을 목격했다는 제보가 쏟아졌다고 한다. 이러하다 보니 할당량을 위해 주민들끼리 돌을 들고 서로 싸우는 일은 매우 빈번하게 벌어졌으며. 나중에는 아예 연좌제 방식으로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마을 전체의 주민을 싸그리 다 죽여버리는 방법까지 사용했다. 이러한 정책에 콩고 민중들이 반항하면 군대를 투입해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최신식 현대병기로 무장한 벨기에군에게 원시적인 무장을 갖춘 콩고 원주민들이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상황이 이 따위이다 보니 콩고의 원주민들 사이에선 백인들의 통조림이 바로 흑인의 팔로 만들어진거라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이 깽판을 치고 있는 와중에도 터키에서 아르메니아 학살이 일어나자 우리가 콩고군을 보내서 막아보겠다며 큰소리치기도 했다.[15]해골 군대를 보내려고 그러시나 게다가 벨기에 정부에서 가끔 "콩고 자유국의 재정 상황 좀 알아보자"라며 자료를 요구하면 역분식회계로 주작질을 한 후에 수익을 축소한 자료를 제출했다. 게다가 국채도 마구 발행했는데 이 국채의 상환기간이 99년이라 최소한 자기 살아 있을 때에는 걱정이 없다보니 이렇게 모은 돈으로 각종 건물이나 기념물을 지어댔다고 한다.
이런 방식으로 레오폴드 2세가 막대한 부를 쌓게 되자 그가 세계의 창부들을 끌어들였다는 이야기가 전 유럽에 퍼지기도 했다. 이와 같은 사실은 1885년 영국에서 열린 법정에서 그의 이름이 거론되면서 알려졌다. 영국 여성인력의 대륙 유출을 억제하는 단계에서 고급 '매음굴'을 고발해서 재판이 열리게 되었는데 그 업소에서 레오폴드 2세의 이름이 나왔다. 증언에서 레오폴드는 젊은 여자들을 꾸준히 공급받는 조건으로 한달에 800파운드를 지불했으며 여자들 중 일부는 10~15세 가량의 처녀였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벌어들인 돈은 학자들이 현재 돈으로 환산한 결과 약 11억 달러에 달한다고 추청한다. 그의 재산은 여러 곳에 숨겨져 있었는데 레오폴드 2세의 사후, 두 딸이 유산을 달라고 벨기에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들은 아버지가 콩고에서 모은 재산은 개인적인 것이므로 상속자인 자신들 것이라고 주장했다.뭐가 니들거야 콩고인들의 피와 땀이지 하지만 벨기에 정부는 레오폴드 2세가 숨겨두었던 대부분의 재산을 찾아내서 국고에 환원시켰다.
일부 시각을 따르면 이런 식으로 사람을 착취하는 수법은 벨기에가 개입하기 이전부터 아프리카의 일부 부족권에서 전통적으로 이루어진 관습이었고 이러한 행위는 현지의 하위 관리자인 흑인들이[16] 자체적으로 행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레오폴드 2세가 이러한 야만적인 풍습을 막으려고 하기는 커녕 오히려 조장하고 이용한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이러한 처벌 방식이 관습적으로 있었다 하더라도 레오폴드 2세 치하의 콩고처럼 막 나가는 수준으로 행해진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여하튼, 레오폴드 2세의 이러한 유혈낭자한 압제 정책은 다른 유럽 열강들이 식민지배하던 여러 아프리카 나라로 퍼져나가 이 나라들이 독립한 뒤 내전에서 반군들이 자신들을 반대하는 주민들에게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그대로 잘 써먹었다. 참 좋은 거 가르친다 이러한 야만적인 방식이 공포감을 확산시키는 것도 있었고 손이 없으면 서명도 못하고 도장도 못 찍으니까 투표권을 행사할 수 없을 것이라는 무식한 생각을 했기 때문.(...)[17][18] 채취해야할 목록에 다이아몬드와 희토류가 추가되었을 뿐이다.
이러한 극악무도하고 악랄한 폭정에 힘입어서, 약 25년에 달하는 그의 통치기간 동안 무려 약 1000만 명에 달하는 콩고 사람이 죽은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다만, 당시에 정확한 통계자료가 있던 것이 아니기에 이 숫자는 추정치이며 정확한 수치는 불명확하다. 1924년 이전의 통계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통치 당사자인 벨기에 측에서는 인구의 15%[19] 정도가 죽었다고 추산했으며, 콩고의 인구가 3000만 명에서 800만 명으로 줄어들었다는 추정치도 있다. 어느 쪽이건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했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백인 병사들은 그 자리에서 몇 명의 원주민을 총으로 사살했다. 그러면서 원주민을 총으로 후려갈기며 '고무를 더 가져와라. 그러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 고 위협했다. 공포에 질린 원주민들은 휴대할 식량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고무나무 숲으로 가려면 왕복 2주일이 걸리기 때문이다. 원주민들이 출발 준비를 하고 있는데 병사들이 왔다. '뭐야 아직도 출발하지 않았어"하며 몇몇 원주민을 처자식 앞에서 사살했다. 가족들은 울부짖으면서 사체를 땅에 묻으려고 했지만 그것마저 허락되지 않았다. 원주민들이 음식을 갖고 있지 않다고 항의하자 병사들은 그냥 떠나라고 호통을 쳤다. 불쌍한 원주민들은 모닥불을 피우는 부싯돌 하나 없이 맨손으로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정글로 가는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과 밤의 추위로 죽어갔다. 물론 더 많은 사람들이 총살당했다."[20]
"예상가(Esanga, 콩고 강의 남쪽) 사람들이 말하기를, 고무 바구니 50개 대신 바구니 49개를 가져온 예상가 마을 사람들은 감금당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을 처벌하기 위해 파수병들이 그들을 찾아왔다고 했다. 예상가 마을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가까운 친척들이 잔인하게 살해당한 끔찍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친척들이 자신들이 보는 바로 앞에서 총살당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숲속에서 남자들이 고무를 캐내는 동안 파수병들은 그들의 아내를 유린하고 잔인하게 다뤘으며 고문하기도 했다. 그들이 직접 겪은 고통들을 헤아려보면 그들이 백인 남성들을 바라보는 견해가 부정적이지 않을까 걱정스럽기도 하다. 우리 선교사들은 가끔 주님을 통한 구원이 이들에게는 조롱하는 것처럼 보일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21]
한 가톨릭 신부는 흑인으로부터 들은 레옹 아킬레 피에베즈(Achille Fievez)라는 악독한 관리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그는 들판에 죽어 있는 시체들로부터 손을 잘라오게 했다. 군인들은 양동이에 담아온 손의 숫자를 일일이 확인했다. ...(중략)... 고무를 내놓지 않겠다는 마을은 완전히 싹쓸이 당했다. 나는 젊은 시절 피에베즈의 부하가 원주민 열 명을 잡아다가 그물 안에 집어넣고 그물에 무거운 돌을 매달아 강물에 던지는 것을 보았다. ...(중략)... 우리는 그 자의 이름을 두 번 다시 듣고 싶지 않다. 군인들은 젊은이들을 사주하여 그들의 어머니와 여동생을 죽이거나 강간하게 했다.
1894년 피에베즈는 한 군인에게 자신이 필요한 물자들을 얻기 위해 저지른 행동을 이렇게 자랑스럽게 말했다.
"나는 그들과 전쟁을 벌였다. 시범은 한 번만 보여주면 충분했다. 흑인 백명의 머리를 자르니까 그 다음부터는 나의 말대로 물자를 갖고 왔다. 나의 목표는 궁극적으로 인간을 위한 것이다. 내가 100명을 죽였지만 그렇게 해서 500명을 살린 것이다."
3.3 드러나는 진실
이러한 극악무도한 행위가 계속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것이었고 몇번의 폭로가 있기도 했다. 한번은 조지 윌리엄스라는 군인 출신 미국의 흑인이 레오폴드 2세를 만났는데 그는 레오폴드 2세에게 콩고에 돈을 많이 투자했으니 당신은 그 대가로 흑인들에게 무엇을 바라느냐고 물었더니 레오폴드 2세는 "나는 불쌍한 흑인들을 위한 기독교인으로서 의무감 때문에 그랬다면서 투자한 돈을 회수할 생각도 없다"고 답했다고 한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윌리엄스는 감동 먹고 먼저 같은 흑인 기술자 40명을 콩고에 파견 해주기로 결정했다. 그러다가 기술자들을 보내기 전에 콩고에 먼저 가보자는 생각에 콩고에 가봤더니 헬게이트가 따로 없었다. 윌리엄스는 레오폴드 2세와 미국 대통령에게 콩고에서의 학대 행위에 대해서 항의 서한을 보냈지만 레오폴드 2세는 윌리엄스가 자신이 미군의 대령이라고 거짓말을 한 것을 꼬투리 잡아서 "저놈은 사기꾼이에요"라며 주장했고 그러던 와중에 윌리엄스가 병으로 사망하면서 이 학대 행위에 대한 문제제기는 일단 덮어졌다.
그러나 콩고에 머물고 있던 선교사들은 원주민들을 대하는 잔인한 벨기에의 만행에 대한 증거들을 제시하며 논란이 일기 시작했다. 선교사들은 자유국 군인들이 원주민들의 집과 소유물들을 약탈한 증거들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주장들은 뉴스와 신문을 통해서 점점 명확하게 사실로 드러나고 있었으며 특히 그 당시에 영국에서 가장 명성 있는 더 타임즈가 큰 관심을 가지고 보도하기도 했다. 헨리 몰튼 스탠리는 레오폴드 2세에게 영국에서 떠돌고 있는 그 끔찍한 이야기들로 인해 그가 타격을 받게 될 것이라고 그에게 경고했다. "우리 영국인들은 언론에 보도된 내용들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들이오." 그러자 레오폴드는 "만약 콩고에서 그런 학대가 일어나고 있다면 지금 당장 뿌리뽑아야 합니다."라며 반성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리고 헨리 스탠리는 콩고 자유국 서기관 에드몽 반 에드벨데(Edmond van eetvelde)남작에게 "만약 앞으로도 학대가 지속된다면 콩고는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라는 편지를 썼다.
그러던 중 콩고를 오가는 화물을 독점하는 엘더 데스터라는 회사의 직원인 모렐(E. D. Morel)이라는 사람이 화물을 운반하다가 회사의 무역 기록과 콩고 자유국의 무역기록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버렸고, 누군가가 콩고에서의 이익을 가로채고 있으며 원주민들은 제대로 된 대가를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 자료를 수집했고 그 결과로 이익을 빼돌리는 사람이 레오폴드 2세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수집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레오폴드 2세를 압박했다. 심지어 레오폴드 2세가 몇몇 문서들을 없애버리라는 지시를 내린 공문서도 보여주고, 구체적으로 살해당한 원주민들의 명단까지 발표하는 등 이전까지의 다른 폭로자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렇게 계속 일이 커지게 되자 영국인 여성 선교사 앨리스 셀리 해리슨(Alice Seely Harrison)이 사진을 찍어 '콩고 개혁 협회'에 사진을 제공했고 기사를 내면서 콩고에서 벌어진 잔혹한 일들이 세상에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해리슨 여사는 콩고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모렐을 위해서 자기 월급보다도 더 많은 액수의 생활비를 지원해 주었고, 모렐은 이를 바탕으로 콩고개혁협회를 설립했다. 이에 마크 트웨인과 코난 도일등의 유명인사들과 영국의 귀족 및 국회의원 등이 합류하며 콩고에서 벌어진 잔혹상을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미국의 작가 마크 트웨인은 콩고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고서 "우리는 이 사진을 보고 벨기에가 콩고에서 저지른 만행을 멈추게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라고 말했고, 영국의 작가 코난 도일은 1909년에 발표한 콩고의 범죄(Crime of Congo)에서 벨기에의 왕 레오폴드 2세가 식민지인 콩고에서 역사상 최대의 범죄를 저질렀다고 고발하였다.[22]
훗날 애덤 호크실드(Adam Hochschild)의 1998년 작품 레오폴드 왕의 유령(King Leopold's Ghost)에서는 그가 개인 식민지 콩고자유국에 가한 가혹한 노예노역을 통한 무자비한 수탈과 살육으로 1880~1920년 사이에 인구의 약 절반인 천만 명이 희생되었다고 쓰고 있으며 이러한 잔학한 식민운동에 저항했던 인권운동에 대하여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영국의 소식은 독일에까지 퍼지게 되었고 퀄른 지역 신문 콜니셰 자이퉁(the Kolnisch Zeitung)을 통해 보고되었는데 이 보고서에서 자유국 보호령인 술탄 제미오의 사령관 아킬레 파이베즈(Achille Fievez)는 1308번의 수족 절단으로 기소되었다.
레오폴드는 잔악 행위가 조금이게 조금이냐 문제된다는 것을 깨닫자 원주민 보호를 위한 위원회를 구성했고, 이 위원회의 임무는 눈에 띄는 모든 잔악행위들을 없애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 또한 레오폴드 2세의 연막작전에 불과했다. 레오폴드는 이미 위원회가 성공적으로 맡은 일을 실행할 수 없도록 만들어 놓았다. 위원회 소속이었던 선교사들은 서로 수백km만큼 떨어져 있어야 했다, 따라서 적당한 시기에 서로가 만나서 연락하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게다가 이 위원회의 권한은 대단히 제한적이여서 위원회의 업무 자체가 정보를 은폐하려는 고위 관리들에 관한 잔악행위를 관리하고 통제하는 일이었음에도 위원회는 관리들의 잔악행위를 조사하거나 협조하게 만들 만큼의 권한이 허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위원회는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고 위원회의 활동에도 콩고 주민들에 대한 학대 행위는 끊임없이 진행되었다.
당시 콩고에서 찍힌 사진
저 위에 보이는 맨 오른쪽의 백인[23]은 영국 영사관 밑에서 일하던 로저 캐즈먼트(Roger Casement)로 1903년에 콩고로 파견되어서 콩고에서의 잔인행위들을 사진을 찍어서 영국에 보고하여 콩고를 레오폴드 손에서 해방시킨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행한 인물이다. 절대로 벨기에의 학살자가 아니다.
1903년 콩고 영국 영사관 로저 캐즈먼트(Roger casement)가 조사를 위해 파견되었다. 캐즈먼트는 끔찍한 내용의 탄원서들을 발견했다. 나무에 손을 댄 채 총 끝으로 손을 계속 두들겨 맞았다는 젊은 청년의 탄원서도 있었고, 다른 마을에서는 세 명의 어린 아이들, 한 청년과 한 노파의 오른쪽 손목이 잘려나갔다고 쓰여 있었다. 캐즈먼트는 계속해서 보고서를 작성했다. "나는 대륙 내에 있는 두 개의 큰 마을을 방문했다. 나는 마을 인구의 반이 난민이라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몇몇 그룹의 난민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왜 그들의 지역에서 도망쳤는지를 묻자 그들은 계속 하소연했다. 그들은 정부 군인들에 의해 잔인한 대접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삶은 견딜 수 없을 만큼 괴로우며 고향에는 아무것도 남겨진 것이 없다고 했다. 일정량의 고무를 갖다 바치지 않으면 군인들에 의해 죽게 될 것이라고 했다. 군인들에 의해 죽지 않더라도 아사하거나 그들의 요구를 만족시키려 일을 하다가 죽을 것이라고 했다." 캐즈먼트는 콩고의 좀 더 깊숙한 곳까지 조사하려 했지만, 그가 콩고에 도착한 지 6개월 만인 1903년 11월경 영국으로 돌아가 외무부에 자신의 보고서를 올렸다. 이미 충분히 들을 만큼 들었고 볼 만큼 봤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첨언으로 케즈먼트는 더블린 출신의 동시대 아일랜드의 지배 계층으로 군림하던 개신교 영국계 아이리시(Anglo-Irish) 태생이었으나, 한 세대 이전 찰스 스튜어트 파넬, 더 거슬러 올라가면 통일 아일랜드당 처럼 계급적 특권을 부정하고 아일랜드 민족주의 독립 운동에 투신했다. 이 콩고에서의 경험과 보어 전쟁을 겪고 열강의 제국주의를 혐오하게 되어 1차 세계대전 중 아일랜드 독립 운동 세력을 위해 무기 밀매에 관여하며 잠수함으로 독일제 무기를 대주려다가 영국에 의해 반역죄로 사형판결을 받고 처형된다. 그는 영국 대사관 직원이었지만 아일랜드 민족주의자였고 이로 인해 아일랜드 독립군에 잠수함으로 무기를 대주려다가 영국에 적발되었다. 그러나 그를 반역자로 몰 증거가 부족했음에도 영국 정부는 증거 조작까지 해서 그를 반역자로 몰아 사형 판결을 내려버렸다. 물론 이 조작 사실은 훗날 밝혀졌으며, 이로 인해 아일랜드에서는 독립유공자의 시신을 가만히 놔둘 수 없다며 영국에 반환해 줄 것을 요구했다. 결국 그의 시신은 아일랜드로 돌아왔고 다시 장례식이 치뤄졌다. 게다가 치졸하게도 짝이 없게 캐즈먼트의 재판 과정에서 영국 당국은 그의 일기를 압수하여 그가 동성애자라는 것을 알아내 이를 대대적으로 대중에게 공개하고 찍어 내면서 그의 명예를 끌어 내리려고 하였다. 특권층으로 태어나 창창가도를 달릴 만한 능력과 배경이 충분히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인류애적 정의감 하나만으로 모든걸 버리고 인도주의자이자 혁명가의 길을 걸었던 이 의인은 훗날 아일랜드가 독립하면서도 그 사회 분위기를 보수적이고 근엄한 카톨릭 교회가 주도하게 되며[24] 동성애자였다는 이유로 제대로 대접 받지 못하다가 1965년에 되어서야 시신이 아일랜드로 돌아 올 수 있었다.
크로머 백작 에버린 바링(Evelyn Baring)은 캐즈먼트와 약간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견해를 내놓았다. 크로머 백작 역시 콩고 자유국을 1903년 방문한 적이 있었고, 1905년에는 영국 조직 위원회 소속으로 다시 한번 콩고를 방문했던 사람이였다. 게다가 먼저 영국에서 노예를 해방시킨 윌버포스의 증손자도 모렐의 콩고 해방운동을 지지해주었다. 물론 모렐 또한 영국의 식민지배는 지지하는 사람이었지만, 이것은 도가 지나쳐도 너무나 지나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또한 영국의 식민지배를 싫어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모렐은 영국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얻어 낼 수 있었다. 그러자 레오폴드 2세를 규탄하는 대규모 집회도 열렸고 콩고의 실태에 대한 사진전도 열렸으며 손이 잘린 콩고인들의 모습이 영국 국민들에게 그대로 드러났다.
물론 레오폴드 2세도 그냥 물러서지는 않아서 세계 각국의 언론사들에게 돈을 뿌려대서 자신을 지지하는 보도를 내보내도록 요구하며 여론을 바꿔 볼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콩고에서 상아무역을 하던 아일랜드 상인이 콩고에 주둔하는 벨기에 군에 의해서 처형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아일랜드를 지배하던 영국과 처형된 아일랜드인의 사업기반인 독일령 동아프리카를 지배하던 독일에서 들고 일어났다. 백인도 재판없이 처형하는데 흑인들을 어떻게 대우할지는 안봐도 비디오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에 궁지에 몰린 레오폴드 2세는 여론 조작을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했고 레오폴드 2세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각국의 언론들, 특히 돈을 받아 쳐먹은 언론들은 레오폴드 2세가 좋은 인간이라며 기사를 써댔다. 하지만 미국에서 로비스트로 일하던 레오폴드 2세의 변호사가 미국 허스트의 뉴욕 아메리칸지에 레오폴드 2세가 미국에서 뇌물을 뿌려대면서 로비질을 한 것을 폭로해 버렸고 언론사들은 로비를 받은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레오폴드 2세의 말이 모두 거짓임이 드러났다. 이에 미국과 영국과 같은 국가들이 벨기에 정부에게 콩고를 사라고 압력을 넣기 시작했고 벨기에 정부는 결국 레오폴드 2세에게서 콩고를 사는 방법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4 최후
다시 강조하지만 절대 한쪽 손에 뽀샵질을 한 것이 아니다. 그만큼 폭정에 한쪽 손이 잘린 사람이 많았다는 증거이다.
이 작자의 통치가 얼마나 잔혹했는지는 당대의 상황에서 잘 드러난다. 오죽하면 당시 다른 제국주의 유럽 국가들의 군주들까지 자기네들도 식민지를 가혹하게 수탈하고 있는 건 마찬가지임에도(…) "이건 너무 가혹하다"고 레오폴드 2세를 비난했을 지경이었고, 자국 성직자들까지 "가톨릭계 국가의 수치이다, 지옥에 갈 짓"이라는 비난까지 퍼부었다. 이에 레오폴드 2세는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면에서 자신이 비난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모든 잔학 행위가 사실은 아니였고, 어느 정도 과장되기도 했으나과장이 아닌, 명백히 사실로 밝혀진 부분만으로도 충분히 천하의 개쌍놈 콩고에서 잔혹한 일들이 일어나도록 만든 책임자로써 레오폴드 2세에게 책임이 있었다. 그리고 소름끼치도록 야만적인 일들이 콩고에서 자행되었다는 증거들은 넘쳐 흐를 정도로 많았고 콩고에서는 무고한 사람들이 혹사당하고 레오폴드 2세의 이익을 위해서 죽음을 당하고 있었다. 학살의 규모는 엄청난 수준이라서 당시 국회에 보고된 보고서에 따르면 1885년 콩고 자유국이 출범한 이후 콩고의 인구는 3천만에서 9백만 명으로 70% 감소한 것으로 조사되었다.[25] 이로써 레오폴드 2세가 수년간 주장한 인도주의적 관계와 문명화의 목적이 드러났고 콩고 자유국에서 자행된 잔인한 학살과 학대에 대한 기소가 준비되었다. 웃긴 사실은 레오폴드 2세는 자신에게 비난하는 사람들로 인해서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고 하며, 자신을 향한 비난이 전 세계적으로 급격하게 퍼져나가는 이유를 영국의 계략이라고 믿었다. 그는 영국의 국왕 에드워드 7세가 질투심 때문에 콩고 자유국과 자신의 인생과 노력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악의적으로 이런 모든 일들을 계획했다는 괴상한 생각을 가졌다. 특히 1903년 캐즈먼트가 콩고로 파견된 것을 보고 자신에 대한 비판이 영국의 음모라는 생각이 더욱 확신으로 굳어졌다고 한다.[26]
그 때까지 벨기에 정부는 콩고에 대해서 관여하지 않고 있었으나 콩고에서 벌어진 착취와 학살 학대 행위가 너무나도 끔찍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벨기에 정부도 이를 방관할 수만은 없었다. 레오폴드가 콩고에서의 잔악행위를 멈추지 않으니 콩고를 벨기에로 합병하자는 주장이 나왔고 국회는 이 방법을 채택했다. 정부는 레오폴드가 그냥 물러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였고 레오폴드의 식민지인 콩고를 빼앗아 오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1906년 국회에서 콩고를 완전히 합병시키기 위해서 우선 콩고 합병에 대한 합법 초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레오폴드 2세는 이에 대해서 노발대발하면서 화를 내며 "콩고에 관한 나의 권력은 절대로 분산될 수 없다"라고 말하면서, "콩고는 나의 노력의 산물이다. 콩고의 적들이 합병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정권을 바꾸어 현재 진행되고 있는 모든 일들을 방해하고 자신들이 그 이익을 챙겨 부자가 되려는 것이 그들의 전략이다."라고 공표했다. 게다가 벨기에 국회를 과소평가한 나머지 어느 정도 협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막 나가는 방식을 선택했고 콩고에서의 학대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레오폴드 2세는 국회와 정부의 합법적인 절차를 무시하는 폭군 또는 독재자라는 평가를 얻을 정도로 그에 대한 민심이 서서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국회는 4개월 후 비슷한 논의를 시작했고 레오폴드와의 갈등은 지속되었다.
그런데 1906년 12월 13일 레오폴드 2세는 갑자기 마음을 바꿔서 벨기에와 콩고의 합병을 지지하며 합병이 성사되기를 바란다고 주장했다. 레오폴드의 갑작스러운 입장 변경은 곧 미국이 콩고 일에 관여할 것이라는 소식 때문이었다. 레오폴드 2세는 언제나 미국의 입장을 중요시해서, 자신의 인도주의적인 입장을 보여주기 위해서 다니엘 구겐하임(daniel Guggenheim)과 같은 미국의 백만장자들을 초청했고 콩고 자유국 중남부에 있는 카사이 강 입구에 백만 헥타르 이상의 토지를 개발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사업에 투자를 유치했다. 레오폴드는 이런 개발로 콩고의 외국회사들이 부를 축적하게 되면 외국 회사들, 특히 미국회사들에 투자한 자신이 콩고의 통화 공급량을 통제할 수 있게 되리라 믿었다. 하지만 만약에 미국이 다른 유럽 국가들의 편을 들어주게 될 경우 이 개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콩고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이미 영국과 독일은 그에게 등을 돌렸고 미국인들마저 콩고에서의 잔악 행위로 결국 레오폴드 2세에게 등을 돌렸다.
이런 지루한 공방전 끝에 마침내 1906년 12월 14일 벨기에 총리 '바론 베르나르 드 스메 데 나에야르(Baron Beernaert Smet de naeyer)'는 벨기에와 콩고가 합병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레오폴드는 한동안은 자신이 아직도 콩고의 지배자라는 환상에 빠져 있었지만 1908년 10월 18일 권리 양도 협정에 서명을 하도록 강요받으면서 그의 환상은 깨졌다. 그리고 콩고는 마침내 레오폴드 2세의 폭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게 레오폴드 2세는 1908년 콩고 자유국을 자신의 사유지가 아닌 벨기에 정부 소유로 맡기고 물러났다라고 쓰고 쫒겨났다로 읽는다.[27][28] 문제는 회계자료도 안내놓고 이미 많은 돈을 애인 카롤린에게 주거나 공사하는데 써버려서 벨기에 정부는 1908년 콩고 자유국의 빚까지 부담하면서 인수했고, 이로 인해 벨기에 내에서 엄청나게 평가가 나빠졌다.
벨기에는 레오폴드 2세가 원하는 대로 힘있는 국가가 되어 있었지만 콩고인들을 물론이고 벨기에 정부와 국민, 전 세계적인 여론, 그의 친구와 벨기에의 모든 정부관료들은 그를 혐오했고 그의 아내와 3명의 딸 가운데 2명에게서도 외면받았다. 다만 그의 정부인 블란차 들라크루아(Blanche Delacroix)라는 여인만이 그의 편이었다. 그녀는 레오폴드 2세와의 사이에서 두 명의 아들을 낳았고 레오폴드 2세는 두 아들의 출생에 기뻐했지만, 벨기에의 다수를 차지했던 가톨릭 신자들은 교리상 남녀의 불륜 관계에 대해서 굉장히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불륜 행각은 벨기에 이들에게 혐오감을 불러 일으켰다. 이 막장 국왕은 벨기에 가톨릭 신자가 다수인 국민들에게도 외면받았고, 특히 그의 가족과 친척에게도 버림받는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레오폴드 2세가 콩고 자유국을 잃었을 때 그의 나이는 75살이었으며, 그는 콩고를 잃고 큰 충격을 받아서인지 오래 살지 못했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으며 병에 시달려서 그의 말년은 별로 좋지 못했다. 1909년 12월 초에 창자가 막히는 심각한 고통에 시달렸고 그 어떠한 치료법이나 약도 효과가 없었다. 레오폴드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는 쿠린 신부를 불러서 자신의 정부 블란차 들라크루아와 결혼을 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드 본 남작부인이라는 작위를 내려주었으며, 많은 재산을 카롤린에게 물려주고 며칠 후에 지옥으로 회수되었다. 블란차는 그의 임종을 지켰고 그가 죽자 대성통곡을 했으나 한 사람이 레오폴드의 시신에서 통곡하는 그녀를 끌어내버렸다.[29] 참 잘했어요
레오폴드 2세의 장례식
죽기 한 달 전 레오폴드는 그나마 양심이 살아났는지 자신의 장례식을 조촐하게 치르도록 당부했다, 그는 화려한 장식이나 추모 행렬 등이 없이 간단하게 장례식이 진행되기를 바랬다. 하지만 이러한 초라한 장례식은 죽은 왕에 대한 모욕으로 보일 수가 있었으며 그의 뒤를 이어 왕위를 이은 조카 알베르와 정부가 끝까지 그를 잔인하게 대우했다는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가 있었기에 레오폴드의 요구를 씹고무시하고 화려한 장례식을 치르기로 결정했다. 레오폴드가 사망한 후 그를 브뤼셀에 있는 궁궐에 이틀 동안 머물게 했고 그 후에 그의 지위에 어울리는 성대한 장례식을 치뤄주었다. 그러나 국민들은 왜 저런 놈한테 국가의 돈을 들여서 저렇게 성대한 장례식을 치뤄주느냐는 비난이 퍼부었다. 그래서 추모 행렬이 지켜보던 국민들을 레오폴드의 관을 실은 행렬이 지나갈 때 국민들은 온갖 야유와 욕설을 퍼부었으며 분노한 사람들이 레오폴드 2세의 관에다가 침을 뱉기도 했다. 그렇게 레오폴드 2세는 국민들에게 엄청난 경멸을 당하며 땅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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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 혹은 결과적으로 사망에 이르게 한 콩고인이 적어도 400만 이상. 많게는 천만 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이러한 학살 규모는 인류 역사를 전부 통틀어도 많지 않다. 게다가 국익을 위해 저지른 것도 아니고 자신의 사유재산을 불리려고 한 짓이라 동정할 만한 일고의 가치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엄청난 규모의 학살에도 불구하고 레오폴드 2세는 세계적으로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데, 이는 레오폴드 2세의 학살은 유럽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콩고에서 이루어진 것이고 조직적으로 은폐되었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국제사회에 알려지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던 것도 있고 당시 식민지 수탈이 상식이었던 제국주의 시대라는 시대적인 배경 탓이 크다. 게다가 반 세기도 지나지 않아서 전 세계에 충격과 공포를 선사한 오스트리아 출신 독재자의 계획적인 대량학살이 너무나도 엄청난 나머지 상대적으로 묻힌 감이 있다.[30]
인원 수만 따지면 히틀러와 엇비슷함에도 이렇게 인지도 면에서 차이가 나는 것은 히틀러의 학살은 유럽에서, 같은 백인을 상대로 했다는 점이 클 것이다.
레오폴드 2세의 가면이 벗겨지기 전까지 당시 벨기에인들은 거의 대부분 레오폴드 2세를 좋아하던 편이였다. 식민지 수탈은 어느 정도 있는 것은 용인하던 것이 당시의 시대상황이였고 무엇보다 국민들은 레오폴드 2세가 정말로 콩고에서 인도주의적인 정책을 하고 있으며 레오폴드 2세의 선전으로 인해 그를 인도주의적인 국왕으로 생각했다. 게다가 콩고가 자신의 사유지였음에도 착취한자신의 돈으로 건물을 지어주기도 하고 어느 정도 자신의 재산을 국가에 기부하기도 했기 때문에 벨기에 사람들은 대단히 좋아했다.
그러나 레오폴드 2세의 가면이 벗겨지자 상식적인 사람들은 이 사람을 더 이상 지지하지 않았고, 그가 거짓말을 했으며 콩고를 벨기에 정부에 돌려주지 않으려고 별에 별 추태를 다 부리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그는 의회를 무시하는 독재자 같은 인간으로 찍혀서 의회주의자들에게도 버림받았고, 그가 여자를 밝히며 창녀들을 끌어들이는 놈이며, 실제로 창녀와 결혼해서 자신의 가정을 내팽개치고 창녀 사이에서 아들을 두 명이나 낳았기 때문에 부도덕한 인물로 찍혀서 벨기에의 보수적이거나 카톨릭을 믿는 사람들에게도 레오폴드 2세는 경멸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식민지를 약탈한 이유가 국가를 부유하게 하기 위해서였다면 또 모르지만 그저 자신의 탐욕을 위해서만 저질렀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아무리 극우파적인 벨기에 우파들도 그를 함부로 지지하지 못할 정도로 벨기에의 여론은 좋지 못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 당시 벨기에 사람들은 레오폴드 2세를 매우 나쁘게 평가했고 그가 죽었을 때 사람들이 온갖 야유를 퍼붓고 그의 관에 침 뱉을 정도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레오폴드 2세의 학살도 잊혀지면서 벨기에 우파들은 레오폴드 2세에 대한 재조명을 하려고 했다. 이러한 학살 사건을 두고서 일부 벨기에 우파들은 이에 대해 식민지 확장은 어디까지나 시대적 조류에 따라 행동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콩고에서 일어난 일은 분명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래 독일이 벨기에인을 학살한것도 어쩔 수 없었지 그리고 우파의 특성상 굳이 언급은 안 하지만 왕의 개인적인 욕심으로 인한 과오로 덮으려는 논리도 있다. 그러나 프랑스나 영국, 포르투갈 식민지 나라들이 서로 연방을 이루거나 언어 교류국으로 동맹을 이루거나 국제행사를 가지는 거와 달리 여긴 르완다 같은 나라에겐 개무시당하며 앞선 나라들이 지금도 식민지권 상당수에서 영향력을 가지는 거와 달리 벨기에는 그다지 영향력도 가지지 못하고 있다.[31] 사실 착취나 학살등만 따지면 영국,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독일 등도 똑같았음에도..
그리고 놀랍게도 대다수의 현대 벨기에 사람들은 이놈이 그냥 벨기에의 왕이였던 사람 정도로 또는 나라를 부강하게 만든 왕 정도로 알고 있다고 한다. 레오폴드 2세가 죽은 이후 이른바 위대한 잊기(Great Forgetting)라고 쓰고 결국은 역사왜곡 이라고 읽는다이라는 운동이 일어났고 이 때문에 벨기에 사람들은 이놈이 어떤 놈인지도 모르고 현재까지 살고 있을 정도다. 실제로 르완다 학살 문제를 벨기에 관광객이 안타깝다고 하자, 그 자리에 있던 미국인이나 프랑스인들이 코웃음치며 "늬들 벨기에가 저지른 일이잖아?" 라고 하자 그 벨기에인은 무슨 소리인지 몰라 했던 일화까지 있다.
심지어 벨기에 외무장관이었던 루이 미셸[32]이라는 사람은 2010년에 레오폴드 2세에 대해 영웅이라고 평가하고 비난을 받을 자격이 없으며 벨기에인들이 (콩고를)발전 시켰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1 2
식민지의 경우 그나마 르완다나 부룬디는 평가가 객관적인 편이나[33] 콩고에서는 그냥 인간 대접을 하지 않는다. 레오폴드 2세에 대한 콩고 일대의 사람들은 이놈을 그냥 지옥에서 강림한 마왕이라고 칭한다. 콩고인들이 레오폴드 2세에 대해서 치를 떠는 것은 일제의 전식민지(조선반도+대만)인들의 대다수가 일제강점기에 대해서 학을 떼는 것 정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다. 일본은 가혹했으면 가혹했지 당시 식민지인들을 수백만씩 처형하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당대의 일본보다 한술 더 뜨는 수준의 야만적인 폭정이었던 것. 다만 이것은 양국의 상황이 달랐다는 것을 고려해야 하는데, 일본이 레오폴드 2세가 콩고를 통치한 방식과 비슷하게 식민지인을 무자비하게 처형하는 방식의 유혈적인 압제를 펼쳤더라면 반일 감정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심해졌을 것이 자명했을 것이다. 일본이 그러한 막장스러운 통치를 진행했더라면 식민지 전역에서 봉기가 일어났을 것이며, 이는 장기적으로 양 국가의 완전한 '합병'을 바랐던 일본 측에선 오히려 제 살을 깎아먹는 행위였다. 이는 식민지를 처음 얻었던 일본이 식민지인의 자유를 억압하던 헌병경찰통치를 펼치다가 이 방침이 영 아니라는 것을 알자 교묘한 회유책으로 전환하여 문화분열통치를 했던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필요 이상의 압제로 민심을 완전히 돌리는 것은 좋지 않다고 본 것이다. 게다가 일본은 장기적으로는 조선을 아예 일본 영토로 병합하고 조선인도 일본인처럼 만들려는 생각까지도 갖고 있었는데 이를 위해서는 친일 세력을 많이 육성해야 했다. 반면 레오폴드 2세는 그저 이득만 얻으면 되었던 것이므로 콩고 거주민들의 민심을 관리할 필요가 없었다.[34] 심지어 이 폐기물 때문에 훗날에도 나라가 쑥밭이 되고 말았으니 콩고 사람들에게 거의 가루가 되도록 까이고 있다.
6 기타
레오폴드 2세의 동상
청동이 아깝다 이 청동은? 그것마저도 좀 낭비 같다
그의 악랄한 유산은 21세기까지 지속되고 있으며 자이르 내전이나 인종청소도 모두 그의 악랄한 식민통치가 그 원인인 것이다. 잔혹함으로 치면 전범으로 기소되어도 할 말없는 벨기에의 흑역사. 다만 유색인종은 같은 인간 취급도 하지 않았던 당대 서구사회의 백인우월주의 의식과 식민지 수탈이 상식이었던 제국주의 시대라는 배경이 겹쳐서 그는 히틀러급의 학살을 벌였음에도 죽을 때까지 잘 먹고 잘 살았다.
그래도 싫어하는 사람들은 무지하게 싫어하는 지라 레오폴드 2세에 대한 암살시도도 있었다.
1902년에는 이탈리아의 무정부주의자인 젠 나로 루비노에 의해서 레오폴드 2세에 대한 암살 시도가 있었다. 그는 레오폴드 2세에게 세 번이나 총을 쏘았지만 레오폴드 2세는 맞지 않았고 그는 그 즉시 체포되었고 레오폴드 2세는 조금도 다치지 않았다고 한다.아까비
물론 그가 죽어서까지도 그는 비난의 대상이 되어서 2008년 당시에는 이 사진처럼 테오 필 드 지로라는 미술가가 레오폴드 동상에다가 빨간색 페인트를 칠하기도 했다. 참고자료 이런 일 외에도 종종 레오폴드 2세의 동상은 페인트칠과 낙서 등의 반달리즘을 당하기도 한다. 착한 반달리즘 인정합니다.
콩고 사람들은 그렇게 학살하고 일을 못한다고 손목을 자르거나 일가족을 초토화 시키는 것에 비해서 웃기게도 자신은 건강 염려증 환자였다. 레오폴드 2세는 건강 염려증 증세가 있어서 자신의 건강을 지나치게 걱정해서 괴상한 행동을 자주 했다. 그는 자신의 턱수염을 보호할 방수천을 항상 가지고 다녔는데, 그 이유는 턱수염이 비에 젖어서 감기에 걸릴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였다. 또한 주변에서 누군가가 재채기를 하면 재채기를 통해서 어떤 병에 걸리지는 않을까 공포에 떨기도 해서 레오폴드 2세의 보좌관들 중 몇몇은 이러한 그의 공포심을 이용하여 휴가를 얻어내기도 했다. 보좌관이 감기에 걸린 척 기침을 하는 행동을 하면 레오폴드는 그를 이유 불문하고 반드시 쉬게 하였고 하루나 이틀 정도의 휴가를 얻을 수 있었다. 레오폴드 2세는 감기에 걸린 사람이 완전히 회복하기 전까지는 자신이나 궁정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못하게 했으며 이는 다른 전염성 질병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나이가 들면 들수록 건강을 위해 운동에 매달렸고 그는 전염병을 극도로 두려워했다고 한다.
벨기에에서는 레오폴드 2세의 권력이 제한되어 있는 입헌군주제였기 때문에 벨기에에서는 겸손한 모습을 보여야 했다. 한 번은 레오폴드 2세와 조카이자 왕세자인 알베르 왕자가 회의를 하다가 왕자가 창문을 여니 서류가 바닥에 떨어지는데 레오폴드 2세는 그것을 주우라고 명령하자 명색이 왕세자인 알베르 왕자가 서류를 주우려고 하자 신하들이 대신 주우려고 했는데 레오폴드 2세는 신하들에게 입헌군주가 되려면 허리를 숙이는 법도 배워야 한다고 왕세자가 줍게 놔두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웃긴 사실은 콩고 자유국에서 행한 악행을 보면 레오폴드 2세는 그야말로 전제군주이자 폭군이 따로 없었다는 것.
의외로 한국 근대사에도 엮이는데, 그의 사망 후 명동성당에서 치러진 추도 미사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이완용을 이재명 의사가 습격해 척살을 시도했으나 아쉽게도 실패했다.
이를 다룬 서적으로는 '레오폴드 왕의 유령(King Leopold's Ghost)'이 있으니 관심있는 분들은 참조해 보실 것.
은근히 정신병 증세가 있었다고 하며 가족관계는 매우 좋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정확히는 막장 드라마 그 자체였다. 거의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가정사가 개판이라서 우스갯소리로 콩가루 집안의 끝판왕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엮여서 저주를 받은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아버지 레오폴드 1세가 사별한 첫번째 부인 샬럿 공주를 평생 잊지 못 했고 어린 정부까지 뒀지만 그래도 아내 루이즈 마리를 아내로서 존중한 것에 비해 레오폴드 2세는 아내 마리 앙리에타를 싫어하고 무시했으며 외아들 레오폴드가 죽자 아내의 탓으로 돌리기까지 하였다. 레오폴드 2세에게는 일찍 죽은 아들 하나와 딸 3명이 있었는데 장녀 루이즈는 낭비벽이 심하고 젊은 장교와 바람을 피우다가 레오폴드 2세에 의해 정신병원에 감금되었다. 그러자 이 장교가 정신병원에 갇힌 루이즈 공주를 구해냈다, 문제는 이러고서 행복하게 살았답니다가 아니라 레오폴드 2세가 루이즈 공주의 낭비벽 때문에 재산을 압류해 버렸다뭐야 이거 둘째 딸 스테파니 공주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루돌프와 결혼했는데, 루돌프 황태자가 애인 마리아 베체라하고 함께 동반 자살하게 된다. 셋째 딸 클레망틴 공주는 그나마 레오폴드 2세와 대화를 할 수 있는 공주였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조카의 손자 뻘 되는 보나파르트가의 5대 종손인 빅토르 나폴레옹과 사귀고 있었다. 레오폴드 2세는 당시 프랑스 제3 공화정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했기 때문에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는 빅토르 나폴레옹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지만 자신이 사망하는 바람에 클레망틴과 빅토르 나폴레옹의 결혼을 막지 못했다. 이렇게 딸들과 사이가 안좋으니 레오폴드 2세는 현실에서 아주 막장 드라마를 찍고 있는 루이즈와 스테파니 공주에게는 재산은 일절 물려주지 않으려고 했고, 결국 그녀들은 레오폴드 2세의 정부 카롤린과 법정다툼까지 벌이려고 했다. 게다가 장남이였던 "브라반트 공작 레오폴드"도 있었지만 물에 빠졌다가 폐렴으로 일찍 사망한다. 한마디로 완전히 콩가루 집안이 따로 없다. 그러자 포기를 모르는 레오폴드 2세는 다시 아들을 얻으려 노력했지만 공주들만 태어나자 전부 포기하고 조카 알베르 1세를 왕세자로 책봉할 수밖에 없었다. 레오폴드 2세의 여동생 카를로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동생인 막시밀리안 대공과 결혼했는데, 둘 사이의 금슬은 상당히 좋았으나 대공비로 평온하게 살 수 있었던 카를로타의 삶은 나폴레옹 3세의 오지랖 때문에 막시밀리안이 멕시코의 황제 막시밀리안 1세#s-2로 추대된 것을 계기로 완전히 꼬여 버린다. 막시밀리안 황제는 베니토 후아레스의 혁명군에 의해 제정이 무너지자 총살형을 당했고 남편을 구하기 위해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며 호소하던 카를로타는 미쳐 버리고 만다. 답이 없다. 레오폴드 2세는 미친 여동생을 마이즈 성에 가둬버렸고 카를로타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까지 생존했는데 제1차 세계대전때 벨기에가 쑥을 재배하는 쑥대밭이 되는 가운데에서도 독일의 우방인 오스트리아 황제의 제수라서 그런지 성은 파괴되지 않고 무사했다.
디시위키에 어떤 또라이가 초포풍미화를 시켜놨다(...)본격 현실 무시 나중에 누가 진실을 밑에 써 놨지만
7 건설왕
이런 막장행보와는 달리 현재 벨기에 국내에서의 평가는 나쁘지는 않은 편이다. 내치를 비교적 잘 한 면도 있지만 콩고에서 착취한 막대한 이익을 건물을 짓는 데 썼기 때문이다.[35] 콩고에서 착취한 돈으로 벨기에에 건물들을 지어서 국민들로부터 공구리"건설왕" [네덜란드어: Koning-Bouwer]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주로 브뤼셀, 오스텐드, 엔트웝프에 지었다. 문제는 이러한 건물을 짓는 것에 거의 대부분의 돈을 투자했고 콩고에서 갈취한 돈을 가지고 애첩 블란차와 함께 프랑스나 다른 국가로 쇼핑이나 하고 다녔는데 특히 블란차는 프랑스에서 당시 금액으로 한번 쇼핑할 때 300만프랑을 사치하는데 써댔다. 게다가 벨기에인들의 복지 향상에는 그렇게까지 많은 돈을 추가한 것이 아니었으며 이렇게 벨기에에 지어댄 건물들이 그의 정부나 자기 자신을 위해서 지은 것이라는 사실이라는 점이다.
레오폴드 2세는 자신의 애인이 편하게 길을 다니라고 도로를 만들어주던지 애인을 위한 건물들을 막 지어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 건물들을 국가의 소유로 만들어버렸는데 이렇게 한 이유는 레오폴드 2세가 건물을 운영하는 비용을 자신의 돈으로 지불하기 싫어서 국가에 맡겨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이 사실이 들통 나버리자 벨기에 국민들에게 오히려 더 비판 받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때 지었던 건물들을 현재까지도 잘 써먹고 있어서 현재는 이 건물들 때문에 레오폴드 2세에 대한 평가가 나쁘지 않은 편이라고 한다.역사의 아이러니 하지만 벨기에가 예전과 달리 경제적으로 그리 풍족하지 못한 상태에 밑에 소개한 무수한 건물들은 돈먹는 하마 애물단지가 되어버렸기에 엄청난 유지비를 이젠 벨기에가 모조리 부담해야하는 작은 자업자득이다...
레오폴드2세 집권기 때 지어진 대표적인 건축물, 브뤼셀의 Cinquantenaire의 개선문.
테르뷰렌시(Tervuren)의 중앙아프리카 박물관 착취한 것도 자랑이다
엔트워프 중앙 철도역.
- ↑ 이거, 괜한 허세가 아니다. 이분은 나치가 덴마크를 침공했을때 덴마크의 유태인들을 악마로부터 보호하고 대놓고 나치에게 개기는 위엄을 보여주셨다.
- ↑ 레오폴드2세 제위 당시 백인우월주의가 만연해있었는데 백인이었던 벨기에인이 봐도 이건 아니다 싶을정도로 흑인에게 가혹행위를 멈추지 않는 레오폴드2세를 보고(벨기에인도 양심은 있었는지 그당시 상황을 벨기에의 수치로 여기고 있다.)엄청난 비난을 했었다.
- ↑ 콩고를 착취한 악랄한 폭군이 어릴적에는 미소년이었다니 거 참....이라기 보단 루이 14세를 비롯한 수많은 유럽 왕들의 어린시절 초상화처럼 매우 미화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 ↑ 사실 콩고자체는 이미 15세기부터 유럽인과의 교역으로 라틴문자와 기독교가 들어온 지역이지만 이 시기 들어서는 당시 주도권을 잡았던 바콩고 왕국은 이미 몰락한지 오래였고, 수십여개의 국가들이 서로 다투던 형국이었고, 굳이 종주권을 주장할려고 하는 국가라면 포르투갈과 네덜란드가 정도가 있는데 이미 두나라는 이미 세가 악화된지 오래였기 때문에 딱히 종주권을 주장할만한 처지는 안됐다.
- ↑ 물론 비스마르크조차도 레오폴드 2세의 콩고협회와 콩고 부족장들 간의 조약 내용을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 ↑ 레오폴드 2세가 위장으로 만든 국제 아프리카 협회
- ↑ 레오드폴 2세의 경우는 계약으로 인해 원주민들의 인권이 극심하게 침해되었다. 맨허튼과 관련한 미국 드라마 대사들을 보아도 지들이 잘했다고 하진 않는데 이건 그것과 비교도 안되는 터라...
- ↑ 게다가 맨허튼 지역을 판 원주민부족이 분쟁을 조장할려고 일부러 다른 부족의 땅을 자기네 땅인것 마냥 팔았단 설도 있는데 이같은 경우엔 오히려 피해자가 네덜란드가 된다.
본격 제국주의자 통수치는 원주민의 위엄 - ↑ 남한과 호주에 대입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거의 서유럽 전역에 필적하는 넓이의 땅이다.
- ↑ 그가 세운 콩고 자유국은 벨기에 정부 소유의 식민지가 아니라 그의 개인 사유지가 되었는데, 이유가 참 가관이었던 것이 당시 벨기에 의회에서 식민지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콩고는 그가 죽기 직전에 국가에 소유권을 반납하고 나서 벨기에령이 되었다.
- ↑ 투자자를 모집해서 돈을 끌어 모으면 되지만 그러면 콩고에서 나는 이익을 혼자 쳐 먹을 수가 없어서 모집을 안 했다(...)
- ↑ 이러한 정책은 앞서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잘 써먹었다.
- ↑ 현지의 벨기에 군인들은 지급받은 총알이 낭비되거나 사냥, 혹은 반란에 사용되지 않고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사용했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보통은 이것을 시신의 오른손으로 증명했는데 간혹 군인들이 총으로 동물을 사냥하거나 인간들을 빗맞추기라도 하면 아예 살아있는 사람들의 손을 잘라서 바쳤다고 한다. 1896년에 독일에서 발행된 신문에 의하면 지방 행정관이 단 하루에(!!!) 잘린 손 1,308개를(!!!) 받은 적도 있다고 한다.
- ↑ 현지의 벨기에 관리들은 열심히 일하는 증거로 잘린 팔이 가득한 바구니를 내세우고 다녔다(…).
- ↑ 그리고 지금 터키에서 아르메니아 학살을 비난하던 벨기에에게 큰소리치는 까임거리로 잘 활용되고 있다...아르메니아 학살을 비난할때마다 터키는 그 시절 네놈 벨기에놈들은 황제 레오폴드 2세란 놈과 같이 콩고에서 뭔 일 했냐? 맞받아치고 벨기에
수꼴우파들은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하다가 터키에게 비웃음당하기 일쑤.... - ↑ 콩고 전역에 상주하고 있는 벨기에군은 숫자상으로는 얼마 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내치를 위해서는 좋든 싫든 현지인을 이용해야 했다. 유명한 예시로 투치족은 벨기에가 르완다를 통치할떄 편애받았다. 이는 훗날 또다른 비극의 씨앗이 된다.
- ↑ 특히 시에라리온과 라이베리아 그리고 우간다의 신의 저항군이 많이 써먹는다. 이들 반군 중에서는 아예 레오폴드 2세에게 경의를 표하는 자들까지 있다고(...)
- ↑ 이것은 영화 블러드 다이아몬드초반에서 주인공 중 한 명인 솔로몬 반디의 마을에 반군들이 쳐들어왔을 때 나온다.
- ↑ 원래 가해국들은 자신들의 만행을 최대한 축소하려는 경향이 있다.
- ↑ 영국의 선교사 스크리워너가 전한 참상. 히로시의 질투하는 문명
- ↑ 또한 1905년 존 해리슨 목사는 그들이 얼마나 잔인하게 처벌을 받았는지를 묘사하는 기사를 작성했다.
- ↑ 웃긴 사실은 코난 도일은 영국의 보어전쟁을 지지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뭐 보어전쟁에서 영국의 적이었던 보어인들도 흑인들을 괴롭히던 인간들이었지만.
- ↑ 첫번째 사진의 인물은 로저 캐즈먼트가 아니라 다른 인물이다
- ↑ 이것도 황당하기 짝이 없는게 실질적으로 독립 투쟁 과정에서 아일랜드 카톨릭 교회는 당국에 대한 복종만을 종용했지, 개인 단위로 신부나 성직자들이 참여한 것 빼고 독립에 기여하고 기관 차원에서 뭐 도저히 한게 없다. 이러면서도 독립 이후에는 아일랜드 사회 분위기와 민족주의를 주도하는 기관으로 군림하며 청소년 색스 스캔들, 인신매매 따위나 일으키다가 결국 현대 와서는 엄숙한 사회적 분위기와 성직자들의 부정불패에 진저리가 난 아일랜드 국민들이 카톨릭 교회를 떠나고 있는 모양세다
- ↑ 물론 이 수치는 당시 나온 수치이므로 조금 신빙성이 떨어지는 점도 있다.
- ↑ 정말 이소리가 개소리인게, 정작 영국보다는 덴마크의 군주였던 프레데릭 8세와 크리스티안 10세(이 당시엔 왕세자)가 가멸차게 깠다. 게다가 이들은 다른 제국주의 국가의 군주들보다도 명분이 있는게, 이 두 사람은 노예제를 평생토록 혐오했다.
- ↑ 그 이후에 콩고민주공화국쪽의 상황은 그나마 잠잠해졌지만, 벨기에 정부 소유가 되어도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여전히 원주민들을 강제 노동시켜서 고무를 얻어냈고 콩고 자유국의 관리들도 전부 레오폴드 2세 밑에 있다가 벨기에 정부 소속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다만 한번도 콩고에 가보지 않은 레오폴드 2세와는 달리 새로 왕위에 오른 알베르 1세는 콩고도 방문하고 손이 잘린 사람들도 직접 만나서 처우를 개선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약속은 어쨌건 실천이 되긴 했다. 손목절단도 사라지고 강제노동 대신 세금을 거두었다. 물론 세금 낼 돈 마련하느라 알아서 고무 채취하고 상아채취를 해야 했지만 말이다.
똑같은 거 아니야?게다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광산을 개발하면서 조금 나아졌을 뿐 다시 가족을 인질로 잡고 노동을 시키는 것이 반복되었고 손은 안 자르지만 채찍으로 두들겨 갈기는 것은 여전 했다고 한다. 안습 게다가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르완다-부룬디 지역을 할양받으면서 투치족과 후투족간의 갈등을 조장하는 방식으로 통치했고, 덕택에 벨기에는 후의 르완다 내전의 원흉 중 하나로 꼽힌다. - ↑ 참고로 땡땡의 모험 작가인 에르제가 땡땡의 모험 시리즈 중에서 우익사상에 빠져들었던 젊은시절에 그린 <콩고에 간 땡땡>이 이 시절에 그린 작품이었는데 당대 벨기에 정부의 행태나 강제노동을 묘사하지 않은채 원주민들을 문명화교육(을 빙자한 세뇌교육)시키며 코뿔소 등 야생동물도 잡는 다는 식의 내용으로 그려졌다. 후일 작가 자신의 성향이 바뀌고나서부터는 이 작품을 흑역사로 여기기 시작하여 인종차별주의적인 색체를 빼는 방식으로 수정했기는 했지만 원 작품 자체의 인종차별주의적 성향이 너무 강하다보니 현재도 준 흑역사급의 작품으로 여겨지고 있다.
- ↑ 웃긴 사실은 블란차는 레오폴드 2세가 회수된 지 1년 만에 재혼했고 레오폴드 2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을 그냥 내팽겨쳐두고 살았다.
악마의 아내 - ↑ 공교롭게도 히틀러가 벨기에를 점령할 때 레오폴드 2세를 들먹이며 우리랑 같은 길을 가자면서 합병하자는 개드립을 시전한 적이 있다.
- ↑ 르완다 내전 당시 군사적 개입을 주장하던 벨기에에 대한 국제 사회의 대답은 참으로 안습하게도 "니네가 그렇게 만든거잖아? 닥쳐."였다. 결국 벨기에는 홀로 쓸쓸히 총리 경호를 위한 군사를 파견했고, 장대하게 말아먹고 돌아왔다.
- ↑ 2014년에 38세라는 나이로 최연소 벨기에 총리가 된 샤를 미셸의 아버지다.
- ↑ 애시당초 레오폴드 시절에 지배를 받은 것도 아니고, 벨기에 정부의 분할 통치 정책은 당대 식민지 지배국들 대부분이 써먹던 방식이었다.
- ↑ 게다가 단일민족국가라 민심의 단합이 쉬웠던 한반도와 다르게, 콩고는 식민 통치 이전부터 수많은 부족이 거주하면서 갈등을 빚던 곳이라 압제자에 맞서 단합하기도 어려웠다.
- ↑ 일본으로 치면 일본 국내에서 메이지 덴노가 자국에 황금기를 열어놓았기 때문에 우호적인 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본(당시에는 일본 제국)의 식민지배를 받았으며 착취와 폭정을 겪어야 했던 대다수의 식민지인들에게는 대마왕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