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 항목 : 대한민국 국군/인물
김관진(金寬鎭) | ||
200px | ||
1949년 8월 27일 ~ | ||
복무 | 대한민국 육군 | |
기간 | 1972년 ~ 2008년 | |
임관 | 육사 28기 | |
최종계급 | 대장 | |
최종보직 | 합동참모의장 | |
주요보직 | 제3야전군사령관 |
대한민국 육군의 제3야전군사령관 | ||||
19대 이상희 | → | 20대 김관진 | → | 21대 백군기 |
대한민국 국군의 합동참모의장 | ||||
32대 이상희 | → | 33대 김관진 | → | 34대 김태영 |
역대 대한민국 국방부 장관 | ||||||
42대 김태영 | → | 43대 김관진 | → | 44대 한민구 |
1 개요
대한민국의 前 군인, 예비역 대장. 前 국방장관, 現 국가안보실장.
1949년 8월 27일생. 전북 임실군 출신으로 전주북중과 서울고등학교를 졸업(제20회)하고 1972년 육군사관학교 28기로 임관하여 합동참모의장까지 지낸 후 2008년 예비역 대장으로 전역했다. 이후 2010년 11월 23일 발생한 연평도 포격 사건으로 인하여 전임 김태영 장관이 국방부 장관직을 사임하자, 26일에 그 후임 장관으로 내정되었고 내달 4일 정식으로 대한민국 제43대 국방부장관에 임명되었다. 김관진 장관 취임사 전문 그리고 2014년 6월 1일, 전임인 김장수 실장의 후임으로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후보자로 내정되었다. 국방장관직을 후임인 한민구 前 합참의장에게 이임하였다.
2 군인 시절
2.1 생도 시절
육군사관학교 생도 시절 학업 성적이 우수해 육사 기수 중 1명만 선발하는 서독 유학 시험에 합격, 한국에서 1학년을 마친 후 서독 육사에 가서 졸업까지 하고 왔다. 당시 그가 수학했던 1969년 뮌헨의 서독 육사는 대한민국과 비슷한 처지의 후진국 출신 생도들이 유학 중이었고, 그 중 한달에 60달러($)로 생활해야 했던 김관진 생도는 졸업할 때까지 그럴듯한 식당에서 식사 한 번 못해봤다고 한다.
독일 육사가 학사 학위를 주지 않은 탓에 한동안 학력이 고졸로 처리되었다. 나중에 학력이 인정되었다.
2.2 주요 경력
1972년 육군 소위로 임관해 32사단 수색중대 소대장을 시작으로 주요 보직을 거쳤다. 또한 대대장을 제15보병사단 독수리연대에서 보냈으며 이후 여단장 시절 수도기계화보병사단에서 여단장을 했다. 예하 여단인 제 26기보여단(혜산진부대)의 여단장으로 있었다. 이때 수기사의 차상급부대인 제7기동군단의 군단장이 이현부 중장(육사 20기)이었는데, 그가 여단장으로 재임하던 시절 헬기사고로 순직했다.
1999년 육군본부 전략기획참모부 처장에서 제35향토보병사단 사단장(소장)으로 진급했다. 이후 여러 보직을 거치고 2002년 육군 기획관리참모부장에서 제2군단 군단장(중장)으로 진급했다. 또한 2003년 10월 1일에 열린 국군의 날 제55주년 기념행사에서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보국훈장을 받았다.
2004년 5월, 이라크 파병을 총괄하는 합동참모본부 작전본부장에 임명됐다. 상당히 중요한 보직이라 이때부터 언론에 노출되는 빈도가 꽤 높아졌다. 2004년 대한민국을 뒤흔든 김선일씨 사건 당시 이라크 파병과 부대 경계 회의 등에 참여했었다. 10월 14일에는 국회 국방위원회에 가서 동해안에서 잠수함 추정 물체 출현 첩보에 대해 보고했다. 10월 28일에는 이라크에 주둔중인 자이툰 부대 근처에서 폭발물이 터지는 사고가 발생했지만, 일체의 브리핑을 하지 않아 논란이 있었다. 한편, 10월 26일 벌어진 강원도 철원 전방부대 철책 절단 사건과 관련해 "전문가의 소행"이라는 UN군 보고서에 대해 "UN 조사는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기 때문에, 군의 보고가 더 정확하다"는 말을 했다.
2005년 제3야전군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이후 강원도 명예 도민으로 선정했다. 한편 2005년 5월, 노무현 대통령의 자이툰 방문을 다룬 '대통령님, 한번 안아보고 싶습니다'에 저자로 참여했는데, 기밀 유출이 아니냐는 비판이 있기도 했다. 또한 530GP 사건 이후 희생자 장례식에 참여했는데, 희생자의 모친이 "내 아들 살려내!"라고 하자 3분도 안 되어 자리를 떠나 논란이 일었다. 당시 의견이 둘로 나뉘었는데, "제3야전군 사령관이면 하루에도 엄청난 일정이 있으며, 저렇게 이병, 일병을 위해 장례식에 찾아오는 게 대단한 거다."라는 의견과 "최고 지휘자의 입장이면, 희생자의 부모들과 대면해 위로의 말을 건네는 지휘관 다운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게 아니냐."는 의견이 있었다. 어디까지나 판단한 각자의 몫이다.[1]
천안함 사건 이후 김태영 국방장관의 뒤를 이어 국방장관이 되었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군인사를 불신하며 여러 국방장관 후보자들을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었는데, 누군가 김관진을 추천하였고 그 와의 대면에서 몇시간 동안이나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애초에 이명박은 김관진은 노무현 정부 시기 출세한 사람으로 보고 시야에 넣지 않고 있었다고 한다. 이후 그는 국방장관에 임명된다.
3 평가
야전 주요 지휘관과 작전, 전략, 정책, 전력증강 분야 등에서 폭넓은 경험을 쌓고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로 문무를 겸비한 군인이라는 평이다. 특히 군 재직 시 중간보고를 생략한 '원스톱 업무처리'를 강조하는 등 개혁성과 추진력을 겸비했고, 각종 의사결정 시 소신을 갖고 의견을 개진하는 등 합리적이면서 강한 리더십을 보여준 바 있다. 주변에 대한 배려는 자상하면서도 자신에 대해서는 엄격한 '외유내강형'으로 부하들의 의견을 존중하며 일단 방향이 정해지면 강력히 추진하는 스타일이다. 중장이었던 합참 작전본부장 시절 치밀한 이라크 파병 작전을 수립해 자이툰부대가 한 건의 사고도 없이 이라크 북부 아르빌에 입성할 수 있도록 했다.
2010년 12월 장관 취임과 동시에 '행정·관료적 풍토를 타파, 강한 군대를 만들겠다'는 것을 목표로 군의 분위기 쇄신을 위하여 여러 가지 개혁적인 정책을 도입하고 있다. 김관진 장관에게 부정적인 뉘앙스를 보이는 진보 언론에서도 이번 인사에 만큼은 찬사를 보냈다고. 김 장관의 확고한 의지는 2010년 12월 연말 국군장병에게 보내는 '장관 지휘서신 제1호'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서신에서 그는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 출전하면서 한 말인 "원수를 무찌른다면 지금 죽어도 유한이 없다"를 인용하며 우리의 안보를 위협하는 적들은 철저하게 응징하겠다는 각오를 보여주었다. 이것은 비유하자면 체질변화라고 볼 수 있는데, 장성급 인사의 단행이나 보고서 간소화는 모두 그와 같은 체질변화 달성을 위한 시도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심지어는 장성의 상징이던 가죽 권총벨트와 지퍼식 전투화 등도 착용을 금지했다. 차량에 대한 성판 부착은 초기에는 전면 금지를 계획했으나 공적인 자리에서만은 허용으로 계획을 잡았다.
몇 가지 논란도 있는데 2011년 6월초에는 군 비리, 횡령을 고발한 영관급 장교를 오히려 징계하려는 행동으로 인해 비난을 받았다. ### 또한 국방개혁 307 계획에 대해서도 논란이 존재하며, 530GP에서 일어난 일명 김일병 총기난동 사건때는 3야전군사령관으로 지휘라인상에 위치했었다. 다만, 이런 비판 이외에 앞서 이야기된 정책들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국방부 장관 재임기간 동안 2011 해병대 총기난사 사건, 북한군 노크귀순 사건, 대한민국 국방부 사이버사령부의 대선개입 논란, 북한 무인기 추락사건, 제22보병사단 총기난사 사건 등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터졌지만 그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청와대 안보실장으로 승진까지 하였다 뿐만 아니라 2011 해병대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나자 병영문화 개선등을 약속했으나 군 밖에서 느껴질만한 성과는 나오지 않았다. 특히 2011 해병대 총기난사 사건은 해병대 특유의 폐쇄적인 군기문화 때문이지. 모두 김관진 장관의 탓이 아니라는 의견도 컸기 때문이다. 2005년에 일어난 530GP 사건으로 당시 윤광웅 국방부 장관은 사건 발생 3일만에 사임 의사를 표명했다.
비록, 후속조치를 위해서 대통령이 유임시켰기 때문에 실제로 사임하진 않았지만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국군 통수권의 2인자이자 국방부의 수장이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주었던 전례와는 큰 차이를 보인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사고가 났다고 해서 무조건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옳다는 것은 아니다. 물론, 장관 본인은 열심히 사태 해결을 약속했다. 어찌됐든 김관진 장관은 헌정 사상 유일하게 재임기간 중 총기난사 사건이 두 번 일어난 국방부 장관이라는 오명을 안고 가게 되었다. 이후 제28보병사단 폭행사망 사건이 후임 한민구 장관 시기에 뒤늦게 국민들에게 알려지게 되었지만 이 사건이 발생했던 시기는 엄연히 김관진 국가안보실장의 국방장관 재임 시절에 일어난 일이었으며, 무엇보다 이 사건 발생 후 자세한 정황까지 보고받았음에도 두 달이 넘는 기간 동안 사건해결에 대한 의지를 보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예 축소를 하려 한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관련 기사 사단장이 아닌 하급 책임자들만을 징계해서 사건의 비중을 낮추려 한 조치만이 이루어진 것을 보면 충분히 의심을 받을 만하다.
그 외에도 보고를 받았음에도 이러한 보고를 더 윗선에 보고하지 않고 침묵하는 등의 모습도 보였기 때문에 사건 은폐 의혹은 더욱 더 신빙성을 얻고 있다. 2011 해병대 총기난사 사건 이후의 병영문화 개선 약속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던 셈이다. 이 때문에 책임을 지고 국가안보실장에서 퇴진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물론, 김관진 실장의 능력이 뛰어나고 국방부 장관에 있을 때 일어난 일이라 퇴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이렇게 끊임없는 사고가 터져나가고 아무런 개선도 되지 않았음에도 그가 재임기간 중 사임을 하지 않고 끝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래에 나오듯이 천안함, 연평도 사건을 거치며 군의 기강과 전투태세를 다잡고 개인적으로는 청렴하고 법을 준수하는 '군인다운 모습'을 어필하여 안보와 인성을 중요시하는 국민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모 부대를 방문했을 때 어떤 중대장과 악수하면서, "긴장하지 마, 내가 그리 겁나냐?"라고 당연하죠 그걸 말이라고 ㄷㄷㄷ 말한 장면이 찍힌 영상이 화제가 되며 참군인 이미지메이킹에 일조했다.
또 다른 이유로는 군 내외로 라인이 탄탄해서 파워 게임을 할 때 전혀 밀리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기무사 장경욱 사령관/국방장관 한민구와 갈등을 일으켜 모두 이겼다 - 국방 장관 때 기무사를 때려 잡아놓고 본인이 안보실장이 된 뒤엔 잘 써먹고 있다는 비판도 있지만).
또한, 박근혜 대통령 당선 이후 곧 유임되었고 또 국방 비서관으로 청와대에 입성하였는데 이는 항상 자신이 믿는 사람만을 사용하는 박근혜 대통령의 성향도 한 몫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4 여담
파일:Attachment/laserkim.jpg
강렬한 눈빛 때문에 '레이저 김'이라는 별명이 있다. 갓관진
2011년 5월 2일 트위터 계정을 만들고 공식적으로 트위터 활동을 시작했다. 트위터 주소 민감한 정보와 현안을 제외한 다양한 국방정책에 대해 장관 본인이 직접 국민과 소통의 장으로써 트위터를 활용할 것이라고 한다. 한편, 2012년 1월 2일 국방장관의 트위터로 7사단의 한 병장이 직접 소원수리 멘션을 보내는 일이 발생했다. 당시 취임한 사단장이 전방 격오지 사단의 휴가에 1일씩 붙여주던 '1야전군 위로 포상'과 함께 잡다한 포상 휴가들을 일거에 폐지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위로포상의 삭감 때문에 그 병사 뿐만 아니라 다른 병사들의 분노도 하늘을 찌를 기세였고, 이 포상휴가 삭감은 7사단이 소속된 제2군단 내의 전 부대에 전파되기까지 했다. 이에 김 장관은 알았다며 사실 확인후 시정할 것이라는 답을 보냈다. 당연하게도 해당 병사는 상급 지휘관들에게 분노를 샀고, 그러니까 우리는 직통으로 말하는건 멀리하고 지휘체계를 거쳐야 합니다. 물론, 군대내 폭행은 무조건 직통으로 말하고 최대한 널리 알려라 그리고 해당 병사는 얼마 후 다른 잘못을 저질러 영창을 갔는데, 누구나 진짜 이유는 그 사건 때문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야자타임하자고 하니, 진짜 말 놓아서 한대 얻어맞은 것과 같은 것이다.
김 장관의 집무실 의자 뒤편 벽에는 북한 국방위원장 김정일의 사진과 함께 인민무력부장 김영춘, 군사보좌관 김격식 등 북한군 수뇌부의 사진이 A4용지 크기로 걸려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국방장관에 해당하는 북한의 인민무력부장 김영춘은 2000년대 중반 후계자 김정은의 생모 고영희(2004년 사망)의 군내 우상화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또한 김격식은 2005년 김 장관이 합참 작전본부장을 마치고 서울과 수도권 방어를 주 임무로 하는 3야전군사령관을 맡았을 때 반대편에서 서울과 경기 북부를 공격대상으로 하는 2군단을 지휘하고 있었다. 군 관계자는 "당시 두 사람 간에 눈에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꽤 있었다."고 말했다. 김 장관이 2006년 11월 ~ 2008년 3월 합참의장이었을 때 김격식은 김영춘에 이어 군 총참모장(2007년 4월 ~ 2009년 2월)을 맡았다. 김격식은 이어 황해도와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관할하는 4군단장으로 내려왔는데, '강등'이라기보다는 전권을 갖고 NLL을 무력화하라는 임무를 띠고 왔다는 게 우리 군의 분석이다. 2009년 11월 대청해전, 지난해 11월의 연평도 포격 도발은 김격식이 주도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고, 2010년 3월의 천안함 폭침은 그가 김영철 정찰총국장과 함께 일으킨 도발이라고 한다. 이렇듯 대남도발에 많은 전과를 올려 김정일에게 상당한 총애를 받아왔고 일찌감치 후계자인 김정은의 측근으로 분류돼 2011년 9월 그의 군사보좌관으로 승격되었다. 이러한 적들의 사진이 장관의 집무실에 걸려있다는 것에 대해 국방부 관계자는 "적이 장관의 등을 노려보고 있는 만큼 한시도 적을 잊어선 안 된다는 마음가짐일 것"이라고 해석했다.
2011년 8월 10일 언론의 보도에 의하면 김관진 장관 암살을 위한 간첩단이 국내에 잠입중이라고 했으나, 이는 언론의 추측성 보도로 판명났다.
2011년 11월 10일 단행된 '후반기 장성 진급 및 보직 인사'는 청와대나 기무사의 영향력이 없었던, 김 장관이 전권을 행사한 인사라고 알려졌다. 이번 인사는 설령 진급 해당자가 정권이 바뀌었다는 이유로 인사상 불이익을 받았거나 심지어는 지금은 없어진 군내 사조직 하나회 출신일지라도(!) 출중한 능력을 인정받았다면 대거 발탁한 보기 드문 인사였다는 평이다. 기사 해당 인물들은 육사 36기[2] 김현집과 최익봉으로 둘 다 동기중 1차로 중장으로 진급했다. 하지만 다른 조직도 아니고 불법적 권력찬탈과 헌정유린 세력으로 규정된 하나회 출신이 기용된만큼 반발에 부딪히는 것은 어쩔 수 없으며, 문제를 삼아도 할말이 없다.
11중대장 | 단결! 근무중 이상 무!!!!!! ↗ |
김관진 장관 | 네가 중대장이구나~ (인상을 찌푸린다.) |
11중대장 | 예. → 찌빌중대장! ↗ |
김관진 장관 | 고생이 많다. (인상을 핀다.) |
11중대장 | 아닙니다! → |
김관진 장관 | 긴장 하지 마. 내가 무슨 겁 나냐? (싱긋 웃는다.) |
11중대장 | 아 → 닙 → 니 ↘ 다 ↘ |
2012년 7월 31일 중부전선의 한 부대를 방문, 부대 현황을 보고받은 뒤 장병들을 격려했다. 그런데 당시 김 장관이 도착했을 때 그를 영접한 한 중대장이 군기가 바짝 든 채로 장관과 악수를 한 모습이 네티즌의 눈에 띄어 인터넷 전반에 화제가 되었다.
2012년 큰 논란이 된 한일 군사정보포괄보호협정과 관련해 "국민의 이해와 필요성이 있다면 다시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2013년 3월 22일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면서 새로 내정했던 후임 국방장관 후보자 김병관 예비역 대장이 자진 사퇴함으로서, 김관진 現 장관이 유임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에 따라 이명박 정부의 마지막 국방부 장관이자 박근혜 정부의 첫 국방장관으로서 국방업무를 계속 총괄하게 되었다. 이에 뒷이야기가 좀 있는데, 골치아픈 일도 다 그만두니 유학 중인 딸이나 보려고 관사에서 짐 다 빼고 미국으로 건너갈 준비를 하다가 덜컥 유임 결정이 내려졌다고... 말년이라고 무시하던 실무자들이 유임 후 굽신굽신하는 모습을 꼬집기도 했다. 참여정부 시절 장성으로서 10년이 지나도록 중용되는 몇 안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를 두고는 참여정부에서 국방개혁과 전작권 반환을 적극 추진하였지만 보수정권에서는 180도 바뀐 모습을 보이는 줏대없는 인물이라는 비판이 있다. 군인 김관진과 국방장관 김관진의 행적이 너무 대비된다는 것인데, 이에 대해서도 금뱃지나 달아보겠다고 정계 기웃거리는 똥별들보다는 묵묵히 튀는 일 없이 주어진 소임에 충실하는 게 낫다는 긍정적 시선도 있다. [3] 하여간 하나회 이후의 국방장관 중 이렇게 군 시절과 장관 시절의 행적이 대조되는 인물도 드물다.
2013년 6월 28일 정전협정 60주년을 맞아 KBS에서 방영한 4부작 다큐멘터리 "DMZ:DMZ를 바라보는 4사지 시선"에 일반전초(GOP)소대장이 “제가 병사들보다 좀 더 어리버리합니다. 이렇게 곧 적과 만날 상황이라고 생각하면 또 떨립니다. 약간 두렵기도 하고…”라며 “나는 (GOP에서 근무하는 것에) 되게 자부심을 느낀다, 내 목숨을 담보로 하니까. 나는 자부심을 느끼는데 사람들이 몰라주니까 답답하고 안타깝다."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 이 발언을 한 소대장이 자질이 부족하다며 징계크리를 날렸다 어쩌면 징계받고 gop를 탈출하려는 의도였을지도
해당 소대장이 발언의 의도는 죽을 위험도 있고 그에 대한 무서움이 있지만 목숨 바쳐 지키겠다는 것이다. 이런표현은 미국의 전쟁영화나 군사다큐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데 왜냐면 이런표현은 우리 모두의 안전을 위해 자기를 희생한다는 느낌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4] 독립군 자서전만 해도 이러한 표현이 넘쳐나고 백선엽 장군의 자서전에서도 보인다. 그리고 gop촬영하는데 사단이나 연대에서 정훈장교 안붙이고 대사검토 안했을까? 머 당시 퇴역군장성들이 난리쳐서 그런거였다지만
2014년 6월 1일 세월호 참사 수습 실패로 인한 분위기 쇄신을 위해 사퇴한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의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2015년 8월 22일 판문점에서 북한과의 대화에 나선다.
북한에서는 김관진 실장을 김관진놈이라고 부르며, 훈련 때 목표물에 사진이나 그림을 붙여놓고 훈련한다고 한다.GOP에 근무한 어느위키니트에 따르면 축소 사격에서 김씨 3代를 가지고 한다고한다.
2016년, 국회운영위원회 회의에서 사드 배치를 발표했다. # 표정이
- ↑ 전임 주한미군 사령관 스캐퍼로티는 집무실에 같이 일하다 전사한 동료들의 유물을 모아놓고, 늘 마음에 새긴다고 한다. 한국식으로 말하면 제단인 셈이다. 한편, 전방 목함지뢰 사건이 발생하자 제일먼저 병원에 방문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국방부는 언론을 의식해서 한국군 장성이 먼저 가야 한다며 가는 것을 만류했다.
- ↑ 여담이지만 하나회는 육사 11기~36기에 존재했는데 김현집과 최익봉은 하나회 끝물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 ↑ 문민통제를 기본으로 하는 한국군의 특성상 제복군인은 정부의 방침을 따르는 것이 당연하기도 하고...
- ↑ 쓰레기 치우는게 즐겁다는 사람과 쓰레기 치우는게 싫지만 모두가 안해서 한다는 사람 중에 누구에게 미안함을 느끼는지 생각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