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치바나 요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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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의자에 앉아서 미군에게 항복 서명을 하는 다치바나 요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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立花 芳夫
1890년 2월 24일 생 ~ 1947년 9월 24일 사망

지치지마의 식인종

1 일생

1.1 출생과 성장

1890년에 에히메 현에서 태어난 다치바나는 1913년에 육군사관학교 25기로 졸업했다.

1.2 장교 시절

다치바나는 졸업 후 보병소위로 임관하여 보병 제12연대에 배속되었다. 1916년 9월부터 1917년 1월까지는 육군 도야마 학교 체조과에서 수학했다. 1923년 8월에 대위로 진급하여 1924년 3월에 보병 제12연대 중대장이 되어 마쓰야마 연대부관, 제11사단 부관, 다카마쓰 상업학교 배속장교를 거쳤다. 1930년에 소좌로 진급하여 보병 제 12연대 대대장으로 승진하고, 1935년 8월에 중좌로 진급한 뒤 보병 제44연대로 이동했다. 독립수비 보병 제9대대, 만주국 군사고문을 거쳐 1938년 7월에 대좌로 승진한 다치바나는 1939년 10월에 보병 제65연대장에 취임하여 중일전쟁에 출정해 선전전에 참가하기도 했다.

1.3 전쟁 발발 이후

1941년에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1942년에 히로시마 연대구 사령관으로 있다가 1943년 소장으로 진급했다. 1944년 5월에 혼성 제1여단장이 되었다가 1945년에 이오지마에서 괴멸한 제109사단이 재편되면서, 그 사단장도 겸임해 중장으로 승진하여 오가사와라 제도의 지치지마(父島) 섬에 주둔했다.

여기까지만 요약하면 여느 평범한 장군의 진급 스토리겠지만, 굳이 이 자의 항목이 작성된 이유는 지치지마에서 벌인 엽기적인 범죄 때문이다. 아래 항목 참고.

1.4 지치지마 섬 식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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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아 전쟁 이후 전범 재판에서 '억울하게 죽어서 유족들의 원통함을 달래고자 에히메현을 지킨 호국 영령 22인에게 참배를 올립니다.

ㅡ 이 식인종이 들어가 있는 호국 신사 안에 새겨진 비문에서

마토바: 뉴기니에 있을 때, 식량부족에 시달릴 때였습니다. 저희는 인육까지 먹어야 했습니다.[1]

다치바나: 살기 위해서라... 용기를 위해서가 아니고?

마토바: 용기를 위해서 말입니까?

다치바나: 그렇지. 중국에서는 그것으로 바비큐 파티를 할 정도였다. 병사들뿐 아니라 전 장교들이 그 만찬을 즐기지 않았겠나?

마토바: 뉴기니에서도 열약한 환경이기는 여기보다 더했습니다. 자체보급에 의지해서 버티던 우리 황군이 어떻게 위기를 넘겼는 줄 아십니까? 아마 형님께서도 경험이 있으시리라 생각됩니다만....

다치바나: 아우님도 산전수전 겪지 않은 것이 없는 모양이군.

마토바: 거기는 지독한 열대환경에다 보급품도 충분치 못한 그런 곳이었습니다.[2] 중국처럼 풍요로운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다치바나: 어허! 중국이 풍요롭다? 아우님!

마토바: 죄송합니다... 형님. 어쨌거나 뉴기니는 미군들에 의해 완전히 보급에 차단되었습니다. 진퇴양난이었던 곳이었는데, 한 가지 방법을 찾았습니다. 역시 천황 폐하의 황군들은 무적이었습니다. 자신의 옥쇄를 동료에게 부탁하는 진정한 옥쇄였던 것입니다.

다치바나: 진정한 옥쇄라니?

마토바:동료들의 굶주림을 면하게 하기 위해 자신의 시신을 주었습니다. 우리 황군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형님도 아시잖습니까?

그 말을 들은 타치바나와 마토바는 껄껄껄 웃어댔다.

본격 사가와 잇세이의 군인 버전

당시 미국은 태평양 전쟁을 마무리하기 위해 요충지였던 오가사와라 제도를 폭격하기로 결정했고, 오가사와라 제도를 폭격하기 위해 미합중국 해군 항공대의 제 51 뇌격대가 오가사와라 제도로 날아갔다. 제 51 뇌격대 대원 중 한 명은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되는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해군중위였다, 부시는 비행기를 타고 오가사와라 제도로 출격하여 8천 피트 상공에서 폭탄을 투하하던 도중에 일본군의 대공포에 정통으로 맞아 비행기가 추락했지만, 떨어지기 전에 간신히 낙하산을 펼쳐서 비행기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미국의 구명정은 상당히 먼 곳에 있었지만 미군기가 강하하고 상승하는 행동을 반복하면서 정확한 구명정의 위치를 낙하산으로 탈출한 자들에게 알려준 덕분에 부시는 간신히 헤엄쳐서 구명정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물론 일본군은 곱게 보낼 생각이 없었으므로 해군 단정 2 척을 파견해서 그를 생포하기 위해서 쫓아왔지만, 미군 비행기들이 단정이 오지 못하게 막아버렸다. 부시는 그렇게 2-3시간 정도 지치지마 앞바다에서 표류하다가 그 후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서 구명정이 지치지마 쪽으로 흘러가던 도중 미 해군 잠수함이 부시를 구조했다.

그 외에도 오가사와라 제도를 목표로 미국이 폭격을 하던 도중에 다른 미 해군기 몇몇도 대공포에 격추되어 총 미국인 9명이 바다에 떨어졌는데, 그네들 중 부시만 유일하게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다. 다른 조종사 8명은 일본군의 포로가 된 후 처참하게 살해당하거나 일부는 잡아 먹히는 비참한 결말을 맞았다.

당시 지치지마에는 일본 육·해군 혼성 제1여단이 주둔해 섬의 수비를 맡고 있었다. 육군은 (당시)소장이던 다치바나 요시오(立花芳夫) 장군이 이끄는 5개 보병대대 등 병력 약 9,000명으로 이뤄졌으며, 일본 해군은 소장 모리 구니조(森國造) 제독 휘하에 지치지마 방면 특별근거지대, 통신대 등 병력 약 6,000명 병력으로 구성되었다.

1945년 3월 이오지마일본군이 전멸하자 일본 본영은 지치지마의 다치바나 장군을 중장으로 진급시키고 제109사단장에 임명했다. 해군도 모리 제독을 중장으로 진급시켰다. 최고 지휘관이 된 두 장교는 미군 포로 학대와 처형, 그리고 식인이라는 엽기적인 사건을 직접 지휘했다. 이들 외에도 마토바 스에오(的場末男) 육군소좌와 요시이 시즈오 해군대좌가 사건에 깊이 관여했다. 각종 문헌에서 다치바나와 마토바가 호형호제하던 사이라고 했지만, 실제론 모리 제독과 요시이 대좌가 함께 호형호제하던 사이였다.

마토바는 굉장히 거칠고 술주정이 심각한 사람이였으며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으면 부하를 반죽음에 이를 정도로 폭행하는 성격이여서 주위의 모든 장병들이 두려워했다. 실제로 마토바는 유도, 검도 등 무술이 총 10단 이상이었고 몸집도 큰데다가 이토록 난폭하므로 주위의 장병들이 두려워함은 당연한 일이였다.

사실 정신이상자 한두 명이 포로를 학대하거나 즉결처형하는 경우는 당시 일본군에서 흔한 일이었다.

병사/수병들 사정이 열악했던 것으로 유명했던 제2차 세계대전 중에서도 일본군은 병영 악폐습, 가혹행위, 구타가 참전군 군대 중에서도 가장 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미친 군대에서 정신이상자가 발생하는 것은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특히 침략전을 수행하기 위해 정신검증이 되지 않은 인원을 마구잡이로 징병한데다가, 군부 내에서도 명령권자들이 난징 대학살처럼 점령지의 국민들을 사람이 아닌 것처럼 취급해 대량학살을 한 사건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부대의 최고 지휘관들이 관여해 손수 포로구타, 학대, 고문하고 인육을 먹은 사건은 지치지마를 제외하고는 달리 예가 없었다.당시 치치시마에서 벌어졌던 이 처참한 살육을 역사가 제임스 브래들리[3]가 정리했는데, 이 자료에 의하면 포로들에게는 칼 또는 총검으로 생긴 수많은 자상과 죽창으로 찔린 상처가 있었다, 일본군은 미군 포로들을 고문하고, 무자비하게 구타한 후에 참수했다. 훗날 전범 재판에서 지치지마 섬의 군의관들은 죽은 포로의 허벅지를 자른 것을 장교들이 먹도록 강요했다고 증언했으며 섬 수비대의 군의관들이 미군의 간과 고기를 얻기 위해서 포로들를 도살했다고 증언했다.

일본군에 포로로 잡힌 미군 중 해군 통신부사관 마비 머숀에게 일본군은 직접 자신의 무덤을 파고 그 앞에 가서 서라고 명령했다, 그 뒤에 그의 눈을 가리고, 칼로 참수하기 위해 머숀을 무릎 꿇게 한 후 참수했다. 전쟁 범죄 재판에서 이와카와(Iwakawa)라는 이름의 일본의 군인이 증언하기를 "미 해군 포로를 참수하기 위해 칼로 내리쳤을 때, 그는 울고 있었다. 하지만 약간의 신음조차 하지 않았다."라고 증언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마닐라 대학살 당시의 상황처럼 여느 일본군의 학살로 보이지만, 여기서는 포로들을 살해한 후 그 인육을 먹는 엽기적인 식인 사건이 발생했다는 점이 매우 특이하다.

군사재판에 증거로 제출된 당시의 명령은 다음과 같다.

1. 대대(大隊)는 처형된 미군 조종사의 인육을 먹을 것.

2. 칸무리(冠) 중위는 그 인육의 배급을 담당할 것.
3. 데라키 군의관은 처형에 입회하여 장기를 적출할 것.

1945년 3월 9일 오전 9시 대대장 육군소좌 마토바 스에오

발령방법: 칸무리 중위와 데라키 군의를 직접 불러 명령 하달. 다치바나 여단장에게 보고하고 호리에 참모에게도 통고함.

훗날 인육 재료를 준비하는 데 도와 준 일본 육군 군의관은 이 미친 짓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데라키 군의관은 포로의 가슴을 절개한 후 간을 꺼냈고, 나는 약 6파운드 무게 그리고 4인치 정도로 발을 잘라내자, 데라키는 그 크기를 측정했고 그는 허벅지에서 살만을 제거했다"

츠치야 코겐의 증언에 의하면 포로가 된 조종사들은 지치지마에 배치 된 부대마다 한 명씩을 맡아야 했다. 포로가 처형되기 전까지 적어도 일주일의 시간이 있었는데, 그동안 자신의 서툰 영어실력으로 포로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본 중위는 22세였고 츠치야 코켄은 소위 후보생으로 당시 21세였다. 근데 당시에 일본은 계산을 할 때 나이를 말하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에 미 해군 포로는 자신에게 "The same age"(동갑이네)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고 츠치야 코켄은 증언했다. 그런데 당시 검도 2단이던 코켄에게 워렌 본의 참수를 하는 역할이 맡겨졌는데, 당시 자기 부대에 있던 후임 학도병 중에 검도 4단이 있는 걸 알고는 역할을 떠넘겼다. 어찌보면 좀 비겁한 일이긴 한데 그 학도병은 포로 살해로 기소되어 15년 형을 선고 받았다.

미군 포로는 츠치야 코켄과의 대화 중에서 "내 나라(미국)에서 어머니가 자신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라고 말했는데 츠치야 코켄은 미군 포로와의 대화 중에서 아직도 그 말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말이라고 증언했다. 그는 훗날 만약 자신이 미군 포로의 목을 베었다면 자신도 전범이 되어서 처벌을 받게 되었을 것이라고 증언했으며, 그런 현실을 목격한 것 때문에 이런 전쟁을 반복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으로 이어져서 자신이 전후에 변호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증언했다.

치치시마의 경우는 기아나 식량 부족이 원인이 아니었기에 사람들은 더욱 경악하고 분노했다. 당시 지치지마의 식량상황을 보더라도, 배급량이 5홉에서 3홉으로 줄었지만 본토보다는 훨씬 사정이 나았다. 따라서 인육사건의 동기는 사기진작을 위한 소영웅주의나 엽기적인 호기심, 그리고 포로를 학대하는 일본의 군사문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데에 있는 것 같다는 평이 있지만 그러나 여러 정황들을 보건데 특별한 술안주가 먹고 싶어서라는 이유였다는 점이 가장 유력하다.

아래에 나오는 다치바나 장군의 당번병이 인육을 먹던 일본군의 주연(酒宴) 당시의 상황을 묘사하면서 한 증언 중, 다치바나가 미군의 손발 고기와 내장을 먹고서 "이거 맛있군. 한 접시 추가!(これは美味い。お代わりだ!)"라고 했다고 진술한 것도 이걸 뒷받침해준다.

그러다가 일본 제국이 마침내 항복하고 태평양 전쟁이 종결되자 1945년 9월 2일, 지치지마에도 미군이 상륙했고 1945년 9월 3일 다치바나 요시오 장군과 모리 구니조 제독이 대표로써 미 해군 함정에서 정식으로 항복했다. 맨 위에 있는 저 사진이 바로 이 때 찍은 사진이다. 항복 교섭을 할 당시에 미군은 "낙하산으로 탈출한 미 해군 조종사는 몇 명 있는가? 만약 살아있다면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싶다."라고 질문했다.

그러자 당시 교섭에 나섰던 호리에 요시타카 참모[4]는 "방공호에서 포로 전원이 폭사했다"라고 둘러댔다. 이런 대답을 듣고 미군 대표 스미스 해군대령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했고 까다로운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이미 지치지마 섬 식인 사건의 공범과 그 부하들은 전범으로 처벌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 세밀하게 증언을 맞추어 두었다. 포로들의 가짜 묘도 만들고 전 부대원에게 반드시 침묵하라고 명령했다.

미군 지휘관인 렉시 해병대령은 의외로 항복한 일본군을 너그럽게 대했다. 항복한 일본 육해군의 본토 귀환 작업도 순조롭게 이루어졌고 호리에는 사건이 드러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안도했다. 그러나 마토바 부대의 귀환은 자꾸 연기되었는데 그 이유는 미군은 사실 그 동안 일본 본토로 조사관을 파견하여 귀환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또는 여러가지 정황 증거들을 바탕으로 진상을 파악하고 있었다.

1.5 전범재판

여러가지로 조사해보던 미군은 지치지마 섬에서 인육을 먹은 사건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호리에에게 “잔학행위의 수괴는 육군의 다치바나와 마토바 그리고 해군의 모리와 요시이가 아닌가?”하고 다그쳐 물었다. 미군은 결국 여러가지 정황 정보들을 확보하여 "포로가 된 미 해군 조종사들은 일본 육해군에게 끔직한 만행을 당한 끝에 살해되었고, 일본군은 살해된 사람을 요리로 만들어 잡아먹었다. 그리고 이 사건의 주범은 육군에서는 타치바나 장군과 마토바 소좌, 해군은 모리 제독과 요시이 대좌다."라며 의 군사재판에 이들을 기소했다, 그리고 이 식인 사건에 연루되었던 일본 육해군들에 대한 체포가 이어졌다. 게다가 이 인간말종들이 체포된 결정타가 바로 호리에 요시타카 소좌의 얼굴 상태였다. 다른 이들은 멀쩡한데 호리에 소좌의 얼굴은 얼굴이 검붉게 울퉁불퉁 부어올라 있었는데다가 피로 끈적끈적하게 젖어있었고 팔에 붕대를 감고 나와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원인은 피터질 정도로 마구 구타해댔기 때문이다.

5월부터 9월까지 괌에서 이 사건에 대한 군사재판이 열렸다. 지치지마 관련 사건의 피고는 다치바나 장군 이하 25명이었는데, 트럭 섬에서 자행된 포로 생체해부[5] 등 중부태평양 각지의 만행에 연관된 전범 용의자는 모두 63명에 달했다. 그 가운데에서도 지치지마 섬 식인 사건이 가장 주목을 끌었다, 재판 과정 중에서 가해자들이 피해자들에게 가했던 처참한 증언이 이어지기 시작했는데, 특히 다치바나 장군의 당번병이 인육을 먹던 일본군의 주연(酒宴) 당시의 상황을 묘사하면서, 다치바나가 미군의 손발 고기와 내장을 먹고서 "이거 맛있군. 한 접시 추가!!(これは美味い。お代わりだ!)"라고 했다고 증언하자 법정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게다가 재판에 나온 배심원 절대다수와 재판 방청객 전원이 일본인이었는데도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였다.

이런 점 때문에 이들을 감시한 미 육군 헌병들도 머리 끝까지 빡쳐있었고[6], 이 쓰레기 이외에도 사형받은 놈들 전부를 구타했는데, 그 중 2인은 사형당하기도 전에 헌병들의 손에 맞아 죽었고, 특히 그 중 한 개인 요시이 시즈오(吉井静雄)는 뻔뻔하게도 죄를 부인하며 "무차별 폭격을 한 미군이 나쁘다. 조종사는 당연히 처벌받아야 한다. 인육은 전의고양과 사기진작을 위해 먹도록 했다. 모든 명령은 내가 내렸으므로 부하들에겐 책임이 없다"라고 지껄여댔다. 게다가 일본의 전진훈 운운하면서 "군인이 포로로 잡힌 것은 엄청난 수치이며 포로는 어떤 행위를 당해도 그것은 정당한 것이였다[7]"라는 개소리를 지껄여대면서 헌병들에게 어그로를 끌어버렸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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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인간말종들의 처참한 재판 내용은 당연히 신문에 나오지 않으면 이상한 것이였고 이 재판 내용은 미군 신문인 "괌 뉴스"에서 연일 '캐너벌리즘(cannibalism·식인풍습)'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재판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보도했으며, 일부 내용은 미국 본토 신문에도 발행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재판에 대한 기사가 갑자기 신문에서 사라졌다. 이상하게 생각한 호리에가 왜 신문에서 이 기사가 사라졌는지를 미군 측에 문의하자 "상부 명령으로 기사의 게재가 금지되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 이유는 희생된 미 해군 장병들의 어머니들이, "명예롭게 전사한 줄만 알았던 우리 아들이 저런 끔찍한 야수들의 손에 살해되어서 먹혔다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우리 아들을 명예롭게 기억하도록 제발 기사가 나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라며 절규에 가까운 탄원을 내렸기 때문에 기사 게재가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하기사 아들이 전쟁 영웅으로 죽어도 부모 입장에선 가슴 찢어지는 판에 자기 아들이 이런 쓰레기들한테 고통스럽고 잔인하게 죽었다는 걸 알면 미치지 않은 것이 놀라울 정도다만...

재판 결과 다치바나 장군[9], 마토바 소좌, 이토 중좌, 요시이 대좌, 나카지마 대위에게는 사형이 선고되었고, 가토 대좌, 야마시타 대위, 도키 대위, 사토 대위는 종신형에 처해졌다.[10] 해군의 가미우라 소좌는 구류 중 자결했으며, 일본 본토로 귀환한 뒤 도망갔던 고야마 소위는 집 근처 야산에서 역시 자결했다.

모리 제독의 경우 종신형을 받았지만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남방 전선 당시 포로 학살 사건의 죄를 부하 장교인 호리우치 도요아키 해군 대좌에게 뒤집어씌워 처형당하게 만든 전적이 있는데, 후일 진상이 밝혀지면서 네덜란드 측에 의해 다시 기소되었고, 결국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형에 처해졌다. 이때 네덜란드 측에서 얼마나 머리 끝까지 빡돌아버렸는지, 그냥 총살한 게 아니라 루이스 경기관총으로 쏴죽였다. 그리고 호리우치 대좌의 유족들에게 사죄의 편지와 배상금도 지불했다.

1.6 처형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미 육군 헌병들에게 증오의 대상으로 찍혀 재판 및 수감 중에 상당히 가혹하게 다뤄졌다고 한다. 나머지 4명도 죽는 순간까지도 두들겨 맞았고 아예 두 명은 사형이 집행되기도 전에 맞아 죽는다.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잘못을 참회했던 나카지마 노보루는 그나마 덜 맞았다.[11] GHQ 기록에 의하면 당시 전범이 수감된 곳의 교도관들이었던 미 육군 헌병들이 그를 매일 두들겨 팼으며, 심지어 같이 수감되어 있던 일본 육군 장군 4명에게도 매일 두들겨 맞았다고 한다. 자기들도 전범이지만 자기들은 그냥 전쟁 범죄자인 반면 저놈은 아예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때려도 된다는 게 이유였다. 게다가 이 장군들의 부하들까지 옆방에서 원정와서 이 식인귀를 두들겨 팼다. 야 신난다! 이때 당시 이놈들이 얼마나 맞았는지 이와카와 타카시(岩川隆)의 저서 孤島のつちとなるとも라는 책에 잘 드러나 있다 이 책에 의하면 다치바나 장군과 마토바 소좌는 집중적으로 구타를 당했는데 처형 전날까지 밟고, 걷어차고, 때리고, 이놈들을 벽에다가 던지는 방법으로 구타를 했으며 이놈들이 기절하면 얼굴에 물을 마구 퍼부어서 정신을 차리면 또다시 때려대는 엄청난 구타였다고 한다.이들을 폭행한 죄수 중에는 무타구치 렌야 밑에서 임팔 작전 당시 사단장을 했었던 사람도 있었는데,"'무타구치도 식인하라는 지시는 내리지 않았다'라고 일갈했다고.

이런 식의 구타는 다치바나와 마토바의 사형집행일까지 계속되었다고 하는데, 그들의 수감기간이 무려 1년이 좀더 넘는데, 그동안 저들은 일본군이 숱한 이들에게 저지른 폭력의 일부라도 죗값을 치룬 셈이다.

이들은 사형집행 당시 인사불성이 되어 유언도 남기지 못한 채 교수형이 집행되어 뒈졌다.

1.7 죽음 이후

일본이 미국으로부터 주권을 되돌려받은 뒤 일본내에서 전범들에 대한 명예회복운동(…)이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A급 전범을 제외한 B, C급 전범들이 일괄적으로 무죄, 석방 조치를 받으면서[12] 이 인간까지 무죄 처분을 받아버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범이 아니긴 커녕, 일본 내부의 법적인 처분만 전범이 아닐 뿐, 국제적으로는 당연히 전범으로 분류되어 있다.[13]

다치바나 요시오는 에히메 현의 호국신사에 있는 '순국 22열사의 비'에 이름이 올라가 있으며, 거기서 영령으로 모셔지고 있다. 에히메 현 항목을 읽다가 보면 잘 가다가 뜬금 없이 에히메 대학 바로 옆의 에히메 호국 신사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게 이놈 때문이다.

그리고 다치바나 요시오는 야스쿠니 신사에도 봉헌돼있다. 아니 무타구치도 흑역사로 치는 것들이 그것보다 넘사벽으로 더한 놈을?[14] 고만해, 미친놈들아!

2 평가

2.1 일반적인 평가

근·현대 문명국 장군 중에서는 유일하게, 보급이 부족하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포로를 술안주로 잡아먹은 초유의 사태를 벌인 작자.

2.2 일본에서의 평가

일본을 위해 싸우다가 죽은 순국선열로 평가받으며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지고 있으며, 수많은 일본인이 그에게 참배하고 있다. 이 정도면 정말 할 말이 싹 사라진다.

3 기타

  • 일각에서 다치바나 장군이 싱가포르 학살의 진범이라는 주장을 하는데, 답부터 말하면 사실이 아니다. 이 사건은 츠지 마사노부 참모가 독자적으로 결정했거나, 아니면 야마시타 도모유키 장군의 지시라는 설이 유력하며[15] 그는 이 시기 제13사단 65연대장으로 복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차라리 중국에서 만행을 저질렀을 가능성은 충분하지만[16] 싱가포르 학살과는 관련이 없다는 이야기.
  • 한국어 위키피디아에 있는 타치바나 요시오 항목을 보면 무타구치 렌야가 같이보기 항목에 기재되어 있다. 독립유공자님을 욕되게 했다.[17]
  • 참고로 옆방에는 해군소장 이누즈카 고레시게 제독[18]이 있었는데, 미 육군 헌병에게 "저 친구들은 왜 허구한 날 두들겨 맞습니까?" 라고 물어본 뒤 헌병들이 "저놈들은 식량이 풍족한데도 사람을 잡아먹은 천하의 개쌍놈들입니다."라고 답하자 아연실색을 했다고 한다.

4 관련 항목

5 외부 링크

  1. 근무하던 부대에는 식량 부족 따윈 없었다.
  2. 당연하지만 이놈이 중간에 보급품을 빼돌려서 그랬다.
  3. 이오지마 전투에서 그 유명한 두 번째 성조기 게양 사진에 실린 6명 중 한 명인 해군 의무하사 존 브래들리의 아들이다.
  4. 그는 훗날 재판에서 무죄를 받는데 이유는 미군 포로를 구해주려다 들켜서 전쟁 끝날 때까지 일본군에게 구타당했기 때문이다. 3월 9일부터 9월 1일까지, 6달간 거의 쉬지 않고 구타당했다. 무죄를 선고받을 만하다.
  5. 더 충격적인 건 이 건에 한해선 모리 제독이 이 사건의 진범이고 다치바나 장군은 공범이다.이 악귀들은 까도까도 계속 나오네?
  6. 아니 애초에 군인들 뿐만 아니라 전 미국인들의 증오의 대상이었다. 특히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는 나이를 먹고 대통령이 된 후에도 일본하면 아주 치를 떨었다. 그 식인 사건의 희생자가 그의 동료였고, 부시 자신도 만약 아군 잠수함에 구조되지 않았으면 같은 꼴이 날 뻔했기 때문이다.
  7. 어이가 없는 내용이긴 한데 연합군에게 공식적으로 잡힌 일본군 최초의 포로는 진주만 공습에서 있었다. 그런데 그 포로를 일본군에서는 진주만 공격대 명부에서 아예 지워버렸다.
  8. 심지어 "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심판하지 말아라. 너희가 남을 심판하는 그 심판으로 하나님께서 너희를 심판하실 것이요, 너희가 되질하여 주는 그 되로 너희에게 되어서 주실 것이다."라는 마태복음의 일부를 나불대는 패기를 선보였다! 이 패기 넘치고 군인 정신이 투철한 군인에게 크게 감동받은 미군들은 보답으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받들어 이 자식을 잘근잘근 밟아 짓이겨버렸고, 이 놈은 아프다고 울부짖으며 죽어갔다. 서방측 주축국에서 이 새끼처럼 어그로를 끌어 떡이 되도록 맞은 새끼도 있다
  9. 포로살해와 시체훼손 등의 국제법만 적용되었다. 식인혐의는 제외.
  10. 참고로 이 재판의 재판장은 도쿄 전범 재판에서 전범들에게 무죄를 주장한 법조계의 흑역사 이자 일빠 인도인 판사 라다비노드 팔 판사였다. 그렇지만 이런 사람마저 "내 평생 법조계에 머물면서 이런 미친 놈들은 본적이 없다"고 사형선고를 내렸다. 아무리 법의 불소급 원칙을 들어야 한다지마는 이건 도를 넘어섰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사람은 상당히 친일적인 성향을 가지고 A급 전범들에게 무죄를 내려서 군국주의에게 면죄부를 내렸다. 이런 인간 말종마저도 학을 떼고 사형이나 종신형을 내릴정도이니, 이놈들이 얼마나 제정신나간 놈들인지 설명이 필요한가?
  11. 나카지마 노보루는 사형을 집행하기 전에 눈물을 흘리면서 이런 유언을 남겼다. "포로가 되면 역적으로 취급하는 일본의 국가적 풍토가 결국 외국인 포로에 대한 잔학행위로 발전한 것 아닙니까. 포로학대는 일본 민족 전체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개인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것은 잘못 아닙니까. 나는 국가를 증오하면서 죽어갑니다." 사람 죽여 놓고서 무슨 소리야? 그런데 일본군의 포로 대우 사정을 보면 나카지마 노보루의 이 말은 사실에 가깝다는 게 함정이다. 당장 일본군에 의해 벌어진 연합군 포로들의 죽음의 행진만 봐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군은 아군이 연합군의 포로가 됐을 경우 명부에서 이름을 빼버리기까지 했다. 당장 진주만 공습 문서에서 미군의 포로가 된 일부 파일럿들에 대한 기록을 보자.
  12. 일본에서 일방적으로 처리한 것은 아니고 2차대전 승전국 과반수의 동의를 얻어내긴 했다.
  13. 이 부분은 서독의 자체 재판과 국제 전범 분류의 괴리와도 유사하다. 예를 들어 프란츠 폰 파펜의 경우 서독에서는 전범으로 분류되어 있지만 국제 전범 재판에서는 전범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14. 무타구치 렌야를 다치바나 요시오와 비교하는 건 어떤 의미로 무타구치에게 모욕이다. 무타구치는 적어도 식인같은 짓을 명령하진 않았다. 그리고 무타구치 렌야는 포로를 석방한 휘하 병사를 묵인한 일도 있으며, 상부에서 내려온 학살 명령을, 사람이 사람을 죽일 순 없다며 무시한 일도 있다.
  15. 연합국에서는 이 설을 차용하여 사형을 집행했다.
  16. 실제 범죄 행위를 저지를 당시의 그의 발언들을 살펴보면 틀린 주장 같지는 않다.
  17. 무타구치는 무능하고 엄청 뻔뻔하긴했지만 적어도 타치바나 요시오처럼 인간이길 포기하지는 않았다. 사실 항목을 보면 자세히 나와 있지만, 무타구치는 군인으로서 능력과 소양은 코메디 그 자체지만 인간으로서 도덕심이 마비된 전범과는 거리가 멀었다.
  18. 복어계획 관여자이자 자신의 부대에 있는 조선인 징용자와 정신대 사람들에게 차별 없이 대한 군인이다. 본래 이 곳 수감자가 아니었으나, 마닐라 학살 재판에 대한 증인으로 서는 동안 잠시 이감되어 머물고 있었다.
  19. 소니 빈은 도시전설에 불과해서 실체 여부가 확실하지 않지만, 이 놈은 실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