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대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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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제13대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로 1987년 12월 16일에 실시되어 민정당노태우 후보가 당선되었다.

민주화 진영 입장에선 그야말로 "죽 쒀서 개 준" 선거.(...) 그리고 이로 인해 영호남 갈등은 더 깊게 패여만갔고, 특히 PK와 호남 사이의 갈등이 확연히 심해진 계기가 되었다.[1]

2 배경

신군부는 노태우를 차기 후계자로 지명했으나, 재차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로 하기에는 6월 항쟁등 국민적 저항이 거셌다. 그들은 직선제 개헌요구를 받아들여 발표한 특별선언인 6.29 선언을 하여 헌법을 바꾼다. 국민투표를 거쳐 1987년 10월 29일 확정·공포된 헌법에는 대통령국민의 보통·평등·직접·비밀선거에 의하여 선출한다라는 규정이 세워진다. 이는 이후의 대통령 선거에 그대로 이어진다.

3 과정

3.1 야권후보 단일화

3.1.1 단일화에 대한 기대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시 관심을 모은 후보는 민주정의당노태우, 그리고 야당의 이른바 3김으로 통일민주당김영삼, 평화민주당김대중, 신민주공화당김종필이었다.

오랫동안 민주화 운동을 같이 이끌어 온 김영삼과 김대중에 다수의 유권자들은 단일화를 기대했다. 마침 두 사람은 경쟁하다시피 양보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김대중은 1986년 “나는 다음 대선에 출마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고, 김영삼도 “사면·복권이 이루어진다면 김대중씨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전력투구하겠다”고 했다. 대부분의 국민은 두 사람의 선의와 양식을 믿었다. 단일화는 시간문제로 여겨졌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김대중과 김영삼 간의 사이는 매우 좋았다. 김영삼은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을 화끈하게 밀어준 적이 있었고, 김대중은 그 이후 신민당 총재선거에서 김영삼을 전폭적으로 밀어준 적이 있었다. 5공 시절에는 둘이 함께 민주화투쟁의 양대산맥으로 자리매김하였다.[2] 약 16년에 걸쳐 김대중과 김영삼은 서로 협력하는 관계였던 셈이다.

3.1.2 단일화 합의의 무산

그런데 상황이 점점 이상하게 돌아갔다. 1987년 5월 통일민주당을 창당할 때만 해도 손을 맞잡고 훈훈한 모습을 보여준 그들이었건만, 점점 그들 사이에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사실 위에서는 계속 양김씨의 훈훈한 모습만을 서술해놨지만, 물밑에선 오래전부터 신경전이 치열했다. 일단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와 박빙의 승부끝에 패배 이후로 김대중과 동교동계는 군사정권의 노골적인 탄압을 받고 있었다. 이때문에 김대중은 유신 이후로 일본망명, 국내납치, 체포, 사형선고, 미국망명 식으로 계속 떠돌면서 세력이 많이 약화돼 있는 상태였다. 반면에 김영삼은 유신체제에서도 계속 야당 국회의원과 총재로 활동했고[3], 5공화국 들어서도 가택연금과 정치활동규제에 묶이긴 했지만, 측근들을 내세워서 상도동계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4] 이때문에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 1985년 신한민주당, 1987년 통일민주당 창당은 모두 김영삼계가 주도하고 살아남은 김대중계 일부 인사가 가담하는 형식이었다. 당연히 통일민주당 내에서 지역 지구당 위원장(그러니까 국회의원 후보)와 당직 인선은 대체로 김영삼계 위주였다. 이때문에 김대중계는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6월항쟁 이후 다가오는 대선과 총선에 대비해서 미조직 지구당을 창당하고, 지역조직을 정비해야 한다는 김대중의 제안을 김영삼이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서 회피하면서 불만의 골이 깊어지기 시작했다.[5]

6월항쟁 직후 양김후보 단일화 문제가 불거지자, 어차피 둘 다 양보하지 않을테니 경선을 하라는 제안도 나왔다. 하지만 이미 주요 지구당과 당직을 김영삼계가 장악하고 있는 상태에서 당내 경선은 결과가 뻔할 것이라는 주장과 또 당내경선을 하게 되면 분명 정권의 돈을 앞세운 정치공작으로 당이 엉망진창될 것이라는 지적에 경선제안은 묻히게 된다.[6]

이제 남은 것은 양김간의 자발적인 합의인데, 이게 쉽지가 않았다. 물밑 협상은 지지부진 했고, 위에서 언급된 당내 조직책(국회의원 후보) 선정 문제까지 얽히면서 점점 양 세력 사이에 감정의 골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덩달아서 민주화운동세력도 분열하기 시작했다. 후보단일화(약칭 후단), 비판적지지(약칭 비지) 그리고 독자후보추대(약칭 독후)로 나뉘었는데 후보단일화는 군부와 보수세력에서 거부감이 적은 김영삼으로 후보단일화 하자는 사람들이었고, 비판적지지는 김대중의 선명성, 진보성에 주목해서 우리와 비교적 생각이 가까운 김대중을 밀자는 주장이었다. [7] 특히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쪽에서는 극소수의 독자후보파를 제외하면 대다수가 비판적지지 즉 김대중쪽이였다.[8] 독자후보추대는 더 이상 보수야당에 끌려다니지 말고 진보 후보를 세워서 스스로 정치세력화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민중후보 백기완 후보 추대로 결집했다.[9]

기다리다 지친 재야에서는 비교적 중립적인 인사들이 중심이 돼서 ‘후보단일화추진위원회’까지 만들어 두 사람의 합의를 촉구했고, 동교동과 상도동을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든 끝에 마침내 단일화 일보 직전까지 다가갔다. 그러나 그 합의는 성사 직전에서 무산되고 말았다. 당시 추진위원회 대표의 한 사람이던 장을병[10] 전 민주당 대표의 술회는 이렇다.

“재야도 두 사람을 놓고 선호가 갈렸고, 김대중씨 쪽이 더 목숨 걸고 민주화 투쟁을 했다는 평가를 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문제는 당선가능성이었으며, 그런 점에서 독재정권이 덧씌운 멍에이지만 김대중씨는 사상적으로 의심스럽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일반 국민 중에도 적지 않다는 점이 지적됐다. 그래서 이번만은 김대중씨가 양보를 하라는 쪽으로 계속 설득했고, 마침내 김대중씨도 받아들였다. 그래서 김영삼씨가 대선 후보를, 김대중씨가 당권을 맡는다는 합의[11]가 이뤄져 기자회견만 앞두고 있었는데, 갑자기 김영삼씨가 딴소리를 하고 나왔다. 1971년 선거 때 대선 후보는 김대중, 당권은 유진산이라는 식으로 분리하다 보니 당과 선대위 사이에 손발이 맞지 않더라. 그러니까 후보도 당권[12]도 자신이 전부 가져가겠다는 것이었다.[13] 김대중씨가 승복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나더러 발가벗고 무조건 항복하라는 거냐?’ 그렇게 단일화는 성사되기 불과 몇 시간 전에 무산되고 말았다.” 관련기사 링크

사실 김대중이 오랜 미국 망명 생활을 하는 동안, 김영삼은 국내에서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기 때문에 야권에서는 김대중에게 양보를 권유하는 세력이 상당했다. 김수환 추기경 역시 양보를 권유했다. 실제로 김수환 추기경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당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될 경우 군부가 용인하지 않으면서 또 다른 정변이 일어날 우려를 했다"는 내용의 견해를 밝힌 적도 있었다.[14][15] 그러나 김대중은 이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야권 원로들이 김영삼에게 양보를 강제하는 것을 '감정적으로 불쾌하게 여겼다.'고 한다.

3.1.3 고려대학교 시국토론회

어쨌든 많은 사람들은 그래도 언젠가는 김영삼과 김대중이 단일화에 합의할 것이라 믿고 있었고, 그래서 두 사람이 함께 참석한 10월27일 고려대학교 시국토론회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다. 국민은 이 자리에서 역사적인 단일화 발표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러나 고려대 민주광장에서 진행된 토론회에 나타난 두 사람의 분위기는 자못 싸늘했다. 이날 토론회의 주인공인 두 사람은 단상에 나란히 앉아 있었으면서도 서로 외면한 채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문익환 목사 등 여러 연사의 연설이 끝난 뒤 마침내 김영삼이 연단에 올랐는데, 그때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청중 사이에서 "우~" 하는 야유 소리가 나왔던 것이다.[16] "(대선 후보를) 사퇴하라! 사퇴! 사퇴! 사퇴!" 이런 외침도 터졌다. 김영삼을 지지하는 청중이 항의하려 했지만, 야유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너무 많아 그 기세에 압도되고 말았다. 결국 김영삼은 정치인생 30여 년에 처음 겪는 굴욕감에 떨며 고려대학교를 떠나버리고 말았다.

반면 김대중이 연설대에 올랐을 때, 고려대학교 민주광장은 마치 그의 개인 유세장처럼 바뀌어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을 연호하는 사람들 앞에서 김대중은 상기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고, 뒤이어 그의 지지자들에게 목말이 태워진 채 고려대학교 앞 안암로를 행진하기까지 했다. 이때 김대중은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 저는 어떤 결단을 내려야겠다는 결심을 굳혔습니다!”라고 외쳤으며, 결국 다음날, 김대중은 자신을 따르는 정치인과 함께 통일민주당을 전격 탈당한다고 선언했다.[17]

3.1.4 평화민주당의 창당과 4자 필승론

당직과 지역조직 인선에서 상도동계한테 배신을 당했다고 생각하던 동교동계는 자신들의 보스 김대중과 함께 일제히 탈당하였다.[18] 김대중은 자기를 따라나선 정치인들과 함께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여 출마함으로써 야권은 분열된 채 선거를 맞았다.

이렇듯 양김이 분열하여 동시에 출마선언을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도 후보단일화를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다. 야권에서 박찬종이 삭발농성을 하고 이철, 홍사덕, 조순형 등 일명 7인의 서명파는 김영삼과 김대중 그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고 끝까지 후보단일화를 촉구하였으며,[19] 김대중이 상술한 재야쪽의 중재안을 다시 들고나와 김영삼측에 자신이 당권을 갖는 것을 조건으로 한 후보단일화를 제안하기도 했지만 허사였다.

당시 김대중의 참모들 가운데서는 조윤형처럼 김영삼에게 대권과 당권 모두 양보해버리자는 의견을 개진한 사람도 없지 않았다. 그래서 나온 설 중엔 김대중이 대선출마 포기조건으로 차기 총선에서 자신에게 국회의원 공천권의 20%[20]만이라도 보장해달라고 김영삼에게 최후의 제안을 하였으나 김영삼이 그것마저 거절했다는 말도 있지만 확실한건 아니다.[21]

이로 인해 동교동계 정치인들의 감정이 격앙되었을 때, 정신승리를 위해 한화갑 등이 YS와의 결별을 주장하면서 들고 나온 것이 이른바 4자 필승론.

당시 국내 유권자 수는 25,127,158명(2510만)이었다. 지역별 유권자 수와 후보별 우세 지역을 분류해보면 다음과 같다.

서울6,332,346명
경기3,270,127명
부산2,233,092명김영삼 우세
경남2,122,061명김영삼 우세
경북1,782,461명노태우 우세
충남1,708,727명김종필 우세
전남1,580,881명김대중 우세
전북1,241,878명김대중 우세
대구1,236,326명노태우 우세
강원1,018,999명
인천955,271명
충북854,232명김종필 우세
광주520,488명김대중 우세
제주270,629명

후보들에게 우세한 지역에서의 유권자 수를 더한 것과, 서울-경기-강원-인천-제주의 유권자 수를 더하면 다음과 같은 결과가 도출된다.

김영삼4,315,553명
김대중3,343,247명
노태우3,018,787명
김종필2,562,959명

각 후보들의 연고지가 아닌 서울-경기-강원-인천-제주의 유권자수가 11,847,372명.

선거에 후보들의 연고지역 유권자들만이 투표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특정 후보의 우세가 점쳐지지 않는 11,847,372명의 유권자들도 표를 행사하게 된다. 이에 김대중 후보는 자신의 연고지인 호남을 시작으로, 유권자 수는 많지만 각 후보들과는 연고가 없는 서울-경기권을 공략하는 선거 전략을 세운다.

즉, 노태우 후보와 김영삼 후보는 인구가 많은 영남에서 대결하며 표가 갈리게 하고, 김종필 후보는 이미 한물 간 사람인데다 인구가 적은 충청지역만 압도한다면... 김대중 자신은 연고지인 호남지역을 기반으로, 인구가 많은 수도권(서울/경기권)에서 승부를 점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네 사람이 모두 나와도 결국 노태우가 김대중이 이기는 선거', 4자 필승론이었다.

3.2 지역감정의 악화

전술한 것처럼, 선거구도가 이렇게 정해지면서 각 후보가 자신의 지역을 기반해서 결집하는 구도로 선거양상이 흘러갔다. 가령 노태우 후보는 전북 전주에서 유세를 가질 예정이었지만, 7년 전인 1980년 5.18 광주시민 학살의 원흉인 신군부의 일원이었던 노태우 후보에 대한 전북 주민들의 반감으로 유세 현장에서 폭력 시위가 발생했고, 결국 유세가 중단되었다. 이 시위는 mbc9시 뉴스에서 방영되었다.

이후 김대중이 광주에서 80만 인파를, 김영삼이 부산에서 100만 인파를 동원하자, 각 후보의 연고지역별로 유권자들이 뭉치는 현상은 가속화되었다. 노태우는 경상북도대구광역시(TK)의 지지와 함께 다른 지역(여권 성향이 강한 경기도, 강원도와 충북, 서부경남)의 유권자들을 모았고, 김영삼은 부산광역시경상남도(PK)를 중심으로 지지자들을 결집시켰다. 그리고 김대중은 전라도, 김종필은 충청(충청남도)를 중심으로 지지층을 결집시켰다.

더 막장이었던 것은 당시의 정보기관과 공영방송들이 지역감정을 더 부추기는 식으로 선거판을 몰고 갔다는 것이다. 특히 노태우, 김영삼이 광주로 유세 갔을 때에는 프락치를 동원해 노태우, 김영삼에 대해 투석행위를 하도록 하여 지역감정을 악화시켰고, 거꾸로 김영삼이 부산에서 "우리는 깨끗이 하여 어제의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자"라고 할 때는 이 발언을 9시 뉴스 첫번째 방송화면으로 자꾸 내보내 호남인들을 격분시켰다(...)

3.3 지지도의 변동

당시 빅 3 후보들은 여의도 광장에 100만 인파를 운집시키며 세력을 과시했다. 이렇게 각 후보들이 경쟁하듯 대규모 옥외집회를 열었던 것은 그때의 대통령 선거에서 여론조사가 언론에 공표되지 않았던 데도 원인이 있다.

다만 한국갤럽 등이 조사를 했고, 실제 선거결과와도 비슷하게 나타났으므로 여당(민주정의당)과 전두환 정권은 여론의 향방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원래 지지는 김대중이 좀 더 높았으나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의 영입으로 부동표가 몰리면서 김영삼이 노태우를 제치고 40%의 지지율로 1위에 올라섰다는 이야기도 있다. 예를 들어 워싱턴 포스트타임(주간지) 등은 미국 국무부 관계자의 말을 빌려 "김영삼이 앞서고 있다"라고 보도하는 등, 당시 판세를 보면 김영삼이 1위, 노태우와 김대중 후보가 2위자리를 다투었고, 김종필이 4위, 신정일이 꼴찌였다는 것이다. 미국 언론의 보도를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최소한 김영삼이 대선 직전까지 노태우와의 격차를 크게 좁히고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22][23]

하지만 여기서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거대한 북풍이 터지면서 선거판도가 바뀌기 시작한다.

3.4 KAL기 폭파 사건

선거가 유례없이 치열한 지역대결의 장이 되어가던 무렵, 선거를 바로 앞둔 1987년 11월 29일 정말 도움 하나도 안되는 쓰레기같은 북한에 의해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이 발생하였다. 때마침 터져준 북한의 잔혹한 테러로 인하여 수많은 국민들이 경악하였고, 오랜 기간 독재정권 치하에서 강제적으로 학습된 안정논리와 색깔론이 다시금 고개를 쳐들었다. 역시 같은 독재세력끼리 상부상조

김대중이나 김영삼이 대통령이 돼버리면, 야당 출신 인사로서의 한계 때문에 군부를 제대로 지휘할 수 없어, 북한과 전쟁이 일어나거나, 북한의 테러를 제대로 제어할 수 없게 되는 것 아니냐는 되도않는 걱정이 확산되었다.

마침 김대중에 대해서는 1970년대 일본에 망명해 있던 시절에 조총련을 통해 북한과 연계되었다는 루머가 워낙 파다했기 때문에, 김대중과 북한 간에는 모종의 커넥션이 있다는 것을 철썩같이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마찬가지로 김영삼에 대해서도 김대중과 같은 당 소속이었으니 결국 대통령이 되면 김대중에게 이용 당하여 나라를 북한 김일성이한테 통째로 갖다 바치지 않겠느냐는 단순한 사고를 자랑하는 여론이 급격히 늘어났다.[24] 나중에는 김대중이 북한을 시켜서 KAL기 테러를 일으켰다는 루머까지 돌기 시작하면서, 대선 분위기는 안보를 강조하던 여당의 노태우에게 유리한 국면으로 흘렀다.

4 결과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선거
기호후보명정당득표수득표율순위당선유무
1노태우민주정의당8,282,73836.6%1당선
2김영삼통일민주당6,337,58128.0%2낙선
3김대중평화민주당6,113,37527.0%3낙선
4김종필신민주공화당1,823,0678.1%4낙선
5홍숙자사회민주당--사퇴[25]
6김선적[26]일체민주당--사퇴
7신정일한주의통일한국당46,6500.2%5낙선
8백기완무소속--사퇴[27]
선거인수25,127,158투표수23,066,419
무효표수463,008투표율89.2%

4.1 결과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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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노태우가 제13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북한의 테러는 분단국가에서 철통 같은 안보가 중요하다는 일명 안정심리와 색깔론을 점화시켰고, 이것이 노태우 당선은 군사정권의 연장이라는 비판을 일정 부분 희석시키면서 유권자들이 선거를 바라보는 구도 자체를 상당부분 바꾸어 버렸다. 막판 노태우의 반등에 북한이 힘을 보탠 셈이다(...). 이때 당선자 득표율이 36.6%이었는데 이는 직접선거로 선출한 대통령 중 가장 낮은 지지율이다.[28] 다시 말해서, 야권의 분열로 인해 국민의 40% 미만이 지지하는 후보가 당선된 셈.[29][30]

앞서 김대중 후보를 탈당과 독자출마로 몰고 간 4자 필승론도 결과적으로는 완벽하게 빗나갔다. KAL기 테러 참사 직후였던지라 보수 계층 표가 결집하여 상당수 지역에서 노태우 후보가 앞설 수 있었다.

의외로 노태우 후보가 경기도에서만 1,204,235표(41.44%)를 득표하여 타 후보들에 비해 경기도 지역에서 압승을 거두고, 김영삼 후보의 연고지인 경남에서도 792,757표(41.17%)를 득표하는 선전을 했던 것. 김종필 역시 충남에서만 691,214표(45.03%)로 압승을 거뒀을 뿐, 충청북도에서는 노태우에게 밀렸다. 실제로 부산이 주요 지지기반이던 김영삼과 대구가 지지기반이던 노태우는 서로 각자의 도시에서 60% 정도의 표를 얻었다. 70~80% 정도로 표를 얻을 것이라는 김대중의 계산과는 달리 김영삼이 경남에서 압승을 거뒀어야 하는데 예상이 빗나간 셈. 대구, 경북에서도 김영삼이 30%~40% 가까운 득표를 해서 표를 잠식했지만 YS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에서도 노태우가 40%의 득표율을 올려 쌤쌤 상쇄되어버렸다.(...)

호남과 함께 DJ의 비빌언덕이자 김대중 후보 그 자신이 승부를 걸었던 수도권의 경우, 최대 승부처답게 예상이 어려웠으나 경기도 교외 지역, 인천 등 나머지 지역에서 노태우가 1위를 차지함으로써 당선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김대중은 서울 대부분의 지역에서 4자 구도임에도 야도답게 2~3% 차이로 힘겹게 승리를 거뒀다. 김영삼강남구(현재의 강남구, 서초구), 강동구(현재의 강동구, 송파구), 여의도, 목동, 과천시 등 주로 아파트 밀집지역과 중산층 이상 주거 지역 등에서 1위를 차지한다.[31]

위의 지역별 득표율을 보면 한 가지 주요한 특징이 발견된다. 부산, 경남과 광주, 호남 지역에서 김영삼(호남), 김대중(영남)[32]의 득표율이 노태우보다 낮았다. 특히 광주지역의 경우 김영삼의 득표율이 5공화국의 후계자인 노태우보다 낮았다는 사실은, 김영삼과 김대중 지지자의 골이 돌이길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지역 맹주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를 반영하고 있었다. 87년 대선을 기점으로 한국 정치사는 지역맹주간의 권력투쟁으로 요약되며, 다음년도 88년 총선과 3당 합당을 거치면서 더욱 격화된다. 3당 합당을 통해 영, 호남 지역구도가 완성되었지만 본격화된 시기는 87년 대선으로 이 때부터 정치인은 지역구 당선과 대통령 선거 승리를 위해 지역감정을 선거전략의 제1순위로 올려놓기 시작했다.

4.1.1 IF : 만약 단일화를 했었다면, 누가 이겼을까?

사실 양김은 민주화를 위해 투쟁을 했고, 양김의 지지층 모두 다 민주화에 대한 욕심이 있었지만, 그 두명의 지지층은 서로 이질적이였다. 김영삼의 주요 지지층은 원래 PK지역에 살고 있던 토박이들과 해당 지역 출신들이 다수 포함된 수도권 지역의 중산층이었던 반면, 김대중을 주로 지지하는 사람들은 호남지역 주민들과 수도권과 PK에 이주해 있던 호남출신 노동자, 서민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영삼의 지지층은 박정희-전두환의 TK정권이 조장한 지역감정에 휘둘렸지만, 부마민주항쟁 같은 TK정권의 박해로 인하여 오히려 박정희-전두환에 대한 반감도 많이 가졌다. 그래서 박정희-전두환에 대한 반감정서는 김대중의 지지층과 공유를 했었다.

4.1.1.1 단일화 후보가 이겼을 것이다.

양김이 단일화를 했었다면 단일화 후보가 이겼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즉 부산경남과 호남의 득표율을 흡수를 해 민주인사 후보가 승리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사실 단일화로 인해, 단일화 후보가 다른 후보의 지지층을 흡수하는 사례는 많았다. 예로 들자면 영호남 지역감정이 생기기 시작한 7대 대선도 김영삼과 단일화를 못했다면 경상도 남부, 즉 부산경남에서 30% 후반의 득표율은 받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김영삼의 사실상 활동 지역이였던 부산광역시에서 40%의 득표율로 선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또한 15대 대선16대 대선 때도 호남-충청연합인 DJP연합과 울산을 대표하는 정몽준과 부산, 경남을 대표하는 노무현의 단일화로 김대중, 노무현이 다른 후보의 지지층도 흡수하기도 했다.[33]

그렇기 때문에 양김이 단일화를 했다면 "혹시 김영삼(김대중)이 당선되면, 우리지역에도 콩고물이 떨어지지 않을까?" , "독재자보다는 낫다"라는 심정으로 단일화 후보에게 투표를 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4.1.1.2 노태우가 이겼을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말하듯이 부산경남 유권자들도 "호남 사람이 대통령 되는 것은 절대로 안돼"라는 정서가 일정부분 존재했다. 왜냐하면 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진 TK정권의 치세 동안 TK만큼의 혜택을 받지는 못했지만, 지역에 다양한 혜택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김대중으로 단일화했으면 부울경과 그 지역 출신들이 많은 강남 3구에선 그동안 자신들의 발전에 도움을 주었던, 박정희-전두환의 후계자인 노태우에게 몰표를 던질 가능성도 있었고, 그러면 양김 득표율의 단순 합산 비율인 55%까지는 안 나올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34] 또한 호남에서는 그 당시에 영남 특히 TK에 대한 비토가 심했었다. 왜냐하면 호남은 TK정권이라고 불리는 박정희-전두환 정부의 개발독재에도 소외되었을 뿐더러 7년 전에 학살이 일어났다. 그렇기 때문에 PK의 김영삼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의 비토는 있었고, 김영삼으로 단일화를 했다고 해도 호남 유권자들과 노동자들의 표가 일정부분 떨어져 나갔을 확률이 있다.

4.2 논란

4.2.1 컴퓨터 여론 조작설

선거가 끝난 후 사람들은 결과에 어안이 벙벙했다. 여론조사가 발표되지 않았을 뿐더러, 이전 선거와 판이하게 다른 결과, 즉 각 후보들이 자기 지역에서 이토록 강력한 지지를 받을 것이라는 것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호남에서 김대중 몰표가 그랬다. 이에 김영삼, 김대중 후보는 선거 후 광고를 내면서 "적당한 수치로 여론조작을 해서 발표했다"라는 주장을 내세웠다. 앨빈 토플러의 저서 "미래 쇼크"에서도 정보시대의 특성을 다루는 한 사례로 이 사건을 언급했을 정도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냥 헛소문이었다. 이후로도 14대 대선16대 대선, 18대 대선 등에서 컴퓨터 여론조작설이 나왔지만 모두 정확한 근거는 없었다. 14대 대선에서 컴퓨터 조작설과 검증을 내세운 정주영 후보 측의 공조 요청에 김대중이 실소한 것도 이때 이미 한번 당해봤기 때문. 하지만 공교롭게도 5개월 후에 제주 MBC에서 선거방송 리허설을 하다가 그 장면이 송출되는 방송사고가 일어나는 바람에 이 설이 잠시나마 설득력을 얻어 민정당이 제주도에서 전패하기도 했다.

한편 김영삼은 과학적인 여론조사와 선거전락의 필요성을 절감, 미래의 소통령김현철에게 이 임무를 맡겼다. 그리고 김현철 산하의 여론조사팀이 1995년 민주자유당(현 새누리당의전신)이 창립한 여의도연구소의 바탕이 된다.

4.2.2 부재자 투표 논란

구로구청에서 투표가 진행 중이던 투표일 오전 11시에 구로구 선관위가 의문의 투표함을 몰래 빼돌리다가 발각되었고, 이어서 의문의 투표함과 투표용지, 인주 등이 연달아 발견되었다. 결국 이에 항의하는 시민들과 학생들이 구로구청을 점거하고 농성에 돌입했고, 정부는 최루탄을 동원하면서 진압, 1,034명을 연행하고 208명을 구속했다.# 참고로 이 당시 구속된 시민들 중 일부는 2001년에 민주화 운동 유공자로 인정받았다. 다만 이 시점에서 이 투표함이 부정투표의 결과물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었으므로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인한 피해를 인정받은 형태로 이루어졌다.

이후 선관위가 문제의 투표함을 되찾았으나 이미 대선 결과에서 노태우 후보와 김영삼 후보의 표차가 200만 표 가까이나 났기 때문에 당락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하여 이 투표함은 개표되지 않았다. 이 투표함은 개표되지 못하고 있었다가 2016년에 와서야 개표되었다. 개표 결과는 유효표 4243표 중 노태우가 73.8%인 3133표를 득표했고, 김대중 575표, 김영삼 404표, 김종필 130표 순.# 참고로 구로구 을 선거구에서 노태우 후보가 득표한 비율은 28%였는데 적어도 1992년 총선때까지도 군 부재자 투표에 부정이 있었다는 이지문 중위의 폭로가 나왔던걸 봐서는 당시 전국단위 선거를 치렀을때 군인을 대상으로 한 부재자 투표에서 광범위한 부정이 저질러졌다는걸 알수가 있다. 뭐 어쨌든 부정은 부정이라는것이다

5 여파

물론 보수표가 40%도 안 된 것은 아니었다. 김종필 후보의 경우 당 이름 신민주공화당에서 볼 수 있듯 말 그대로 민주공화당의 계승을 표방하고 있었기에, 노태우와 김종필의 표를 합치면 44.7%의 표 비율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는 양김 후보의 55%에 비해 훨씬 적은 것이다. 12대 총선에 비해서도 훨씬 보-혁 간의 격차가 벌어진 셈이며, 야당 범민주 세력이 이와 같은 득표를 얻기 위해서는 17대 총선의 58%까지 17년이 더 필요했다. 대통령 선거와 뒤이은 13대 총선"TK vs PK vs 충청 vs 호남"의 구도로 진행됨으로써 잠잠해져가던 지역감정이 되살아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3당합당으로 인해 호남권의 소외로 이어지게 되었다. 또한, 양김의 분열로 인해 기존 민주권이 분열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6월 항쟁의 주도 세력들이 진보보수로 갈라서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당장 양김의 분열이 직접적으로 보수-진보를 가르는 계기가 되었다고 보기는 좀 어렵다. 어찌되었건 두 사람 모두 보수주의적 성향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 김영삼이 "의회민주주의"을 내세우고, 평민당의 김대중이 재야 세력을 끌어안으면서 정치적 색깔 차이가 조금씩 드러나게 된다. 또한 이른바 '보스 정치'로 알려진 스타 정치인 위주의 정치가 성행하게 되었다. 다만, 충청의 경우 3당합당 당시에는 보수 표를 주는 지역이었으나 후에 김종필이 이 지역을 김대중에게 넘기며 DJ 쪽으로 편입되면서 김대중의 당선에 매우 큰 기여를 하게 되었다. 15대 대선은 경북+경남의 이회창 vs 전라+충청의 김대중 구도가 난 것도 이 영향이었다.

독재를 청산하고자 했던 민주화가 야권에 의해 스스로 좌절되었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좌절감이나 패배감을 안은 야권 입장에서는 역대 최악의 선거로도 꼽힌다.[35] 때문에 양김은 눈앞의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국가의 미래를 망쳤다는 혹평을 듣는다. 더불어 김대중은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 당시 자기가 말한 연설문의 내용을 그대로 실천했다는 까임도 받았다.[36] 늦게서야 정신을 차린 김대중과 김영삼은 "그때 나라도 양보했어야 했다"며 이 일을 후회하는 언급을 여러번 했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버스

그렇지만 노태우 후보의 승리가 노태우 정부의 성공을 의미하지 않았다. 6공은 전체적으로 순탄치만은 않았는데, 대선의 낮은 지지도는 13대 총선에서 역대 세 번째의 여당 최소 의석(125석)으로 드러났으며[37], 여소야대 국회에서 호남 지역구 압승으로 부활한 김대중과 만만치 않은 의석을 얻은 김영삼은 김종필과 공조하며 6공을 몰아붙이면서 어느정도 관계가 회복된다. 이때문에 노태우 정권은 부족한 정통성과 지지 속에 시달릴 수 밖에 없었다.

6 관련 항목

  1. 이미 7대 대선에서 지역구도가 생겼지만, 그래도 도시가 많았던 부산경남에서는 덜 심했다.
  2. 김대중이 유신체제, 신군부 등으로부터 수차례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옥고를 치르면서 살아남은 재야의 투사였다면, 김영삼은 야당의 당수로서 제도적 차원에서 공개적으로 민주 투쟁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외국의 사례로 비유하자면 '김대중=넬슨 만델라(남아공 아프리카 민족회의)','김영삼=레흐 바웬사(폴란드 자유노조)'에 해당하는 역할을 했던 셈.
  3. 물론 군사정권의 저열한 정치공작 때문에 김영삼도 야당내에서 사꾸라들과 싸우느라 힘겨웠고, 정치공작이 더이상 통하지 않자 박정희 정권은 아예 김영삼을 국회에서 제명하는 는 폭압적인 조치를 취했다. 여기에서 더 나가서 박정희는 김영삼을 체포후 감금할 것을 지시했는데, 작전실행 4일전에 김재규한테 살해당하면서 없던 일이 돼 버렸다.
  4. 대표적으로 최형우가 회장을 맡고 상도동계 인사들이 관리하던 민주산악회가 있다. 김영삼은 가택연금에서 풀린 뒤에는 민주산악회 회원들과 함께 매주 전국의 명산을 올랐다.
  5. 당시 통일민주당은 전국조직이 완전하게 갖춰진 상태가 아니었다. 특히 충청, 강원 지역의 경우 국회의원 선거구에 지역사무소는 커녕 당원 한명도 없는 곳도 있을 지경이었다. 오랜 기간 군사정권의 탄압으로 야당 조직이 무너진 곳이 많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런 상태에서 선거를 치룰 수는 없기 때문에 김대중은 시급히 39곳의 지구당을 창당해야 한다고 제안한 것이다. 물론 이곳들의 지역책임자로는 자신과 가까운 인사들을 대다수 추천했다. 즉 자기쪽 지분도 인정해달라는 의미인 것이다.
  6. 이 경선안을 계속 주장한게 홍사덕이다.
  7. 당시의 김대중은 확고한 한미동맹 관계와 주한미군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것만 빼면 재야와 학생운동, 노동운동 세력에 많이 가까웠다. 국가보안법 완전폐지, 노동3권 완전보장, 공무원/교사 노조 허용, 국제노동기구(ILO) 가입을 내걸고 있었다.
  8. 그리고 후술하겠지만 이게 엄청난 나비효과를 일으킨다.
  9. 하지만 독후파들도 민주화를 위해선 단일화가 필요하다는 쪽이였고, 실제 백기완 후보는 후보단일화를 주장하면서 선거운동 도중에 사퇴하였다.
  10. 본래 성균관대 정치학 교수 출신으로 이후 국회의원, 성균관대 총장 등을 역임했다. 2009년 타계.
  11. 구체적으로 대통령 후보는 김영삼, 당총재와 국회의원 공천권의 70%는 김대중이 갖는다는 안이었다. 당내 지분을 김영삼3 : 김대중7로 나누는 것으로 일견 김영삼이 일방적으로 불리해 보이지만, 대선에서 승리하면 김영삼이 막강한 대권을 쥐는 것이므로 사실상 동등하다는게 재야쪽 논리였다. 대통령중심제 국가에서 특히 제왕적 대통령이란 평가까지 나오는게 대한민국 대통령이므로 요새도 보면 알잔아 나름 균형을 맞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2. 여기서 당권이란건 결국 국회의원 공천권이다.
  13. 대선국면이 본격화되면서 상도동계 일각에서는 대권과 당권의 분리는 선거유세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들은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권은 소장파의 김대중에게, 당권은 대여온건파의 유진산에게로 분리되면서 일사분란한 선거운동이 이루어지지 못했고 그래서 패배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실제 제7대 대선은 군사정권의 막대한 금권, 관권, 부정선거로 패배한 것이란게 정치권과 야당지지자들의 중론이다. 지금도 대권/당권 분리 때문에 패했다고 보는 사람은 사실상 없다.
  14. 이보다 앞선 서울의 봄 시절, 훗날 12.12 군사반란으로 신군부에게 체포되는 정승화 계엄사령관조차도 "다른 후보는 모르겠지만 김대중 후보는 사상이 불순한 자다. 김대중 후보가 대선에서 당선된다면 군부는 좌시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을 지경이었다. 신군부 반란군에게 체포된, 정치군인과는 거리가 먼 그조차도 당시 그런 인식을 가졌을 지경이니... ㅎㄷㄷ
  15. 소위 군부 김대중 비토론은 당대에 광범위하게 퍼져있었다. 오랜기간에 걸친 군사정권의 호남차별과 색깔론 공세가 이런식으로 나타난 것이다.
  16. 지금이야 김대중과 김영삼 모두 특정 정파의 보스 정도로 여겨지기 일쑤지만, 1987년 당시까지만 해도 양김은 민주화의 거목으로 존경받는 정치지도자, 선구자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둘 중 한쪽을 지지하는 사람도 다른 쪽을 감히 나쁘게 말하지는 않았다.
  17. 일설에는 김대중의 출마를 당시 정권이 이면에서 부추겼다는 주장도 있다. 지지자들을 위장해서 수많은 지지편지와 선거자금을 보내고, 김대중이 유리하다는 정보를 계속 흘려서 독자출마로 유도했다는 것이다. 대선 직후에 시중에 상당히 크게 돈 소문이지만 물론 구체적인 근거는 없다. 이와 별개로 6.29 선언에서 직선제를 받아들인 것도 "표 분열이라면 노태우가 필승"이라는 전략이 있었기 때문이란 말도 있지만, 이는 반대로 양김이 단일화한다면 노태우는 필패가 된다.(...) 고로 양김이 분열할지 단일화할지 가능성은 반반이던 상황에서, 군부정권이 쉽게 이런 결정을 내리진 못했을 것이다.
  18. 이때 동교동계에서 유일하게 따라가지 않고 통일민주당에 잔류한게 김상현(1935) 의원이다. 김상현은 김대중의 미국 망명 기간 중에 국내에서 그를 대리해서 민추협 의장권한대행을 맡을 정도의 최측근이었으나, 이때 결별하면서 감정의 앙금이 쌓이게 된다.
  19. 이들 7인의 서명파는 다음해인 1988년 13대 총선에 전부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박찬종만 당선되고 나머지는 모두 낙선하였다. 이후에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20. 당시 국회의원 지역구 분포를 봤을때 20%면 호남지역과 서울 몇 자리 정도에 해당한다. 즉 자신을 따르는 동교동계 인사들의 자리를 보장하라는 것이다.
  21. 옛날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영삼이 당내 대선후보경선에서 패할 때 김대중에게 아무런 지분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런데 김대중은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시 김영삼에 비해 세력도 훨씬 딸리면서 자꾸 지분 달라며 김영삼에게 지저분하게 흥정을 요구해대니 김영삼 입장에서는 확 짜증이 났을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전버전에 누가 적었는데 이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1971년 7대대선 당시 김대중은 대통령 후보였지만, 당총재는 아니었다. 즉 국회의원 공천권은 없었다는 이야기. 오히려 유진산 총재와 김영삼, 고흥문 등의 범주류(속칭 진산계)가 당을 장악하고 잇었다. 이미 자신들이 당을 장악하고 있는데 뭘 또 요구를 하나. 그리고 7대 대선 직후에 치뤄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야당인 신민당의 국회의원 공천은 당총재였던 유진산이 직접 했으며, 이 과정에서 진산 파동도 일어났다. 반면에 1987년에 김영삼은 내가 대통령도 하고 (국회의원 공천권을 가진) 당총재도 해야겠다는 식으로 나온 것이다.
  22. 김영삼 후보는 당시 이 보도를 믿고 있었으므로 최후까지 후보 단일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영삼계쪽에서는 정승화 영입 직후의 분위기가 유지됐다면 무조건 이기는 선거였다고 회고하는 사람들이 많다.
  23. 실제 부정이 있었든 없었든 간에 김영삼은 여론조사가 선거 전략 수립에 미치는 영향을 통감하고 다음 대선에서는 선거 캠프 내에 동숭동팀이라는 자체 여론조사 팀을 꾸리게 된다. 이를 기획한 사람이 김영삼의 차남 김현철.
  24. 김영삼은 어머니가 북한 공비에게 피살당했기에, 군사정권들도 김대중에게는 빨갱이 이미지을 씌웠어도 김영삼에게는 대놓고 사상이 불순하다며 몰아세울 수가 없었다.
  25. 얼마 남지 않고 관제 야당으로 전락한 혁신주의 사민주의 세력의 후보다. 김영삼 지지를 주장하며 사퇴.
  26. 전 해양수산부장관, 국회의원 김선길의 친형.
  27. 양김이 분열되자 "재야 후보"로 출마했으나 군부 독재 종식을 내세우며 사퇴, 이후 14대 대선에서도 다시 출마한다.
  28. 2위가 1997년 대선 당시 김대중의 41%.
  29. 뒤집어보면 북의 테러로 여객기가 폭발하고 수백명이 사망하는 초유의 북풍이 터졌는데도 집권당 후보의 지지율이 40%에도 못미쳤다는건 민정당과 5공화국 정권이 얼마나 인기가 없었는지를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30. 노태우 후보의 부인인 김옥숙이 전두환의 부인인 이순자한테, "도대체 민정당은 왜 이리 인기가 없냐"면서 쏘아붙였다는 카더라도 있다.
  31. 이러한 지역들은 3당 합당이 되어 그 후 신한국당이 들어서면서 자연스럽게 보수 계열 강세지역이 되었다.
  32. 지역감정이 극심한 시절이어서 대구와 경상북도에서는 김대중 득표율이 김종필 득표율보다 낮은 지역이 있었다.
  33. 김대중김종필의 지역기반인 충청도, 노무현정몽준의 지역기반인 울산광역시.
  34. 물론 이에 대해선 애초 단일화에 실패한 양김에 대한 실망감에 이탈한 지지층이 있기 때문에 단일화 했으면 오히려 단순 합산보다 더 올랐을 것이란 반론도 있긴 하다. 역사에 IF란 없지만.
  35. 극단적으로는 10월 유신 이후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선출보다도 더 나쁘게 보는 사람도 있다. 말 그대로 다된 밥에 재를 뿌린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36. 제가 대통령이 된다면 권력욕에 휩싸였다는 여러 사람들과 똑같이 되지 말라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권력이라는 것이 알 수 없는 힘을 가진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37. 국회의원 수가 200명 이상이 된 헌정 이후부터 여당이 최소 의석이 된 사례를 보자면 1등은 16대 총선, 2등은 20대 총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