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도정치

(세도 정치에서 넘어옴)
조선의 붕당
훈구파사림파
동인서인
북인남인소론노론
대북소북청남탁남준론완론시파벽파
* 붉은 계열은 강경파, 푸른 계열은 온건파
한국의 역사
청동기
시대
고대중세근세근대현대
원삼국
시대
삼국
시대
남북국
시대
후삼국
시대
구한말일제
강점기
미소
군정
분단
고조선고구려
부여
고구려발해고려조선대한
제국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소련
군정
북한
한사군
옥저
동예
신라태봉,후고구려
마한백제후백제미군정대한민국
진한신라신라
변한가야
우산국대한민국 임시정부
탐라국

본래는 世道政治이나 특정 시기의 지칭으로는 勢道政治[1]라 한다.

1 개요

조선 왕조와 대한제국을 멸망으로 이끈 사실상 가장 근본적인 원인.
조선 왕실과 세도 가문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 문자 그대로 헬조선.
국가 단위로 친목질이 지나치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여주는 답안.

국왕에게 위임을 받은 특정인과 그 추종 세력, 즉 외척가문들의 나섬에 의해 이루어지는 조선 정치 형태. 사실 이게 문제가 되는 건 그냥 백성들이 못살겠다고 하는 걸 넘어서서 왕조나 국가를 지탱하는 사회지도층 내에서 균열이 생기고, 다수의 사회지도층이 기존 체제를 대체하는 것만이 자신들이 살 길이라고 판단하게 되기 때문이다.

세도 정치 이전까지 흔치 않았던 대규모 민란이 세도 정치 체제 이후 급증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민란이건 반란이건 지도부는 결국 엘리트들인데 이들이 왕조 혹은 체제로부터 등을 돌린 것이다.

본래 세도정치는 '정치는 널리 사회를 교화시켜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도리'라는 사림의 통치이념에서 나온 이상적인 정치 도의를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국사 시간에는 조선 말기에 벌어진 안동 김씨(장동 김씨[2])와 풍양 조씨[3], 반남 박씨[4] 등의 척신이 주도한 세도정치를 일컫는 말로 쓰인다.

마치 대원군하면 흥선대원군만 의미하는 것처럼 쓰이듯이 고등학교 국사 시간에 이걸 배우면 왠지 그 반에 있는 김씨나 조씨에게 본가를 물어보는 현상이 일어나곤 한다.

이 때문에 실제 안동 김씨나 풍양 조씨를 가진 학생들은 꽤나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특히 안동 김씨는 김방경을 시조로 삼는 구(舊) 안동 김씨와 김선평을 시조로 삼는 신(新) 안동 김씨 이 두 부류가 있는데, 이 중 조선 후기 세도정치 주역들은 신 안동 김씨이다.

하지만 부류는 다르지만 본관이 같다는 이유로 세도정치와는 관 없는 구 안동 김씨들이 억울하게 까이는 경우도 상당하다.

김자점과 백범 김구 선생은 구 안동 김씨이고, 김좌진은 신 안동 김씨이다. 어차피 스트레스를 받는 안동김씨 대다수의 조상님들은 안동김씨와 전혀 상관없는 상민 또는 노비였다.

조선이 제대로 막장으로 치닫기 시작하는 때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급격한 사회적 변화가 나타나는 격동의 시대이기도 한데 비교적 대중적으로는 소외된 시기이다. 그저 "그냥 개판, 막장인 시대" 정도로만 알고 끝나기 때문인 듯.

또한 이 시기 앞에는 정조라는 먹음직한 떡밥이 있고 뒤에는 이 시기 뒤에는 흥선대원군이라는 대형 떡밥이 있는 탓일지도 모른다.

조선은 헬게이트가 열렸다"는 식의 후일담 정도로 다뤄지거나 "안동 김씨의 세도 아래서 흥선대원군은 그들에게 상갓집 개라 불리는 수모를 참으며 야망을 불태웠다" 이런 프롤로그 식으로 묘사되기 마련.

조선사를 공부하며 붕당정치의 폐단에 치를 떨던 학생들은 이 시대를 배울 때쯤 되면 그나마 붕당이 세도보다는 나았구나 하고 치를 떨게 된다 카더라.

중기 이후 조선이 빈 껍데기만 남았다는 대중적인 편견과 달리 조선 정부의 행정력, 혹은 그것을 확보하려는 노력(위정자들의 무능과는 별개로)은 전근대 국가치곤 훌륭한 편이였다. 관료들의 부정부패를 꼬집는 사람도 있지만 부정부패 문제는 조선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초기 관료제 사회(사실 지금까지도)라면 어디든 피해갈 수 없는 병폐였다. 하지만 이것도 세도정치기부터는 옛말, 이후 조선이 정말 처참히 무너지는 걸 보면 나라 말아먹기가 얼마나 쉬운지를 알 수 있다.

세도정치에 관련된 척신(외척) 가문은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대구 서씨, 연안 이씨, 풍산 홍씨, 반남 박씨 등이 있다. 또 여흥 민씨(명성황후가 속한 성씨)도 구한말 친척들이 많이 등용되었기에 이 범주에 넣는 경우도 있다.

2 세도정치의 징조

세도정치는 영조 대에서 부터 그 징조를 보이기 시작했다. 영조는 탕평을 실현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숙종 때부터 시작된 환국으로 붕당이 사생결단을 벌이기 시작하면서 생긴 폐단을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더군다나 영조 당시에는 노론 강경파에 의해서 소론이 역적으로 몰려있었다. 영조는 이런 노론 강경파를 제어하기 위해서 새로운 근왕세력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육성하기 시작하는데 그 때 눈에 들어온 것이 외척, 그중에서도 자신의 사돈인 홍봉한 등의 풍산 홍씨 일가였다.외척은 임금의 사돈, 외가,처가라는 사실만으로도 사회적으로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는데 이에 그치지 않고 왕이 정치적으로 적극 지원한 것이다. 영조의 요구에 풍산 홍씨 일가는 적극 호응하였고 마침내 노론 강경파를 견제하고 자신들이 조정의 대세로 자리잡게 된다.

하지만 이때부터 슬슬 외척세력은 변질하게 되는데 영조가 강력한 왕권을 갖게됨에 따라 그의 충실한 예스맨이 된 것이다.기존에 노론 강경파를 견제해서 탕평을 실현하려던 목적이 증발한 것이다.영조의 절대왕권에 기생하게 된 외척세력은 갖은 폐단을 일으켰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이려는 계획에 동참한 것이다. 그들은 영조 사후에도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훗날 정조가 되는 세손에게도 접근하였으나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세력을 정조가 곱게 볼리가 있나.당연히 거부당하였고 이에 따라 외척세력은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진군 은신군을 왕으로 옹립하기 위해 정조를 모함하기 시작한다. 이에 대한 반발이 여러군데에서 일어났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여태 풍산 홍씨에게 비주류로 전락한 노론 강경파였다. 그들중에서도 일부 소장 세력은 풍산 홍씨 척결을 주장하며 무리를 결성하는데 바로 노론 청명당이었다. 이들 중 리더 격인 김종수는 정조의 스승으로 세손시절부터 정조에게 협조하였다.

3 정조 전후의 세도정치

이 때 등장한 사람이 바로 홍국영이었다.역적아버지를 죽인 외척세력에게 위협을 받던 정조의 심복으로 사서에 "오른날개"라는 표현이 직접적으로 등장할 정도로 정조의 큰 신임을 받았던 그는 정조의 즉위 후 외척을 숙청하며 사실상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올랐다. 홍국영은 그의 동생인 원빈 홍씨를 정조의 후궁으로 들였는데 원빈 홍씨는 그 가례를 치를 때 중국 귀비의 예를 참조하고, 생전에 조정과 약방의 문안을 받고, 사후 시호와 원호를 받는 등 여러 면에서 이례적인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홍국영의 권세는 그리 오래가지 못하고[5] 탄핵당해 강릉에 있다가 34세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정조의 사망 후 정순왕후 김씨수렴청정을 할 때 노론 벽파와 경주 김씨가 정권을 잡고 시파를 몰아냈으나 수렴청정을 거둔 후 정조의 친위세력이자 순조의 외척[6]김조순정순왕후 김씨 일파를 몰아내 사실상 붕당 정치를 끝내고, 세도정치의 막을 열었다. 다만 실질적으로 세도정치가 본격화된 것은 김조순의 아들 김좌근부터라고 보기도 한다.[7]

최초의 세도정치로 불리는 홍국영은 물론[8] 김조순과 안동 김씨 또한 노론 벽파에 대항하기 위해 정조가 의도적으로 키웠다가 그렇게 된 것이니[9], 결국 원인은 붕당을 해결하려고 애썼던 정조의 정책에 원인이 있다고 봐야 타당하다. 실제로 정조는 개인의 역량을 기반으로 정치 세력의 개편을 꾀했으나, 그가 갑작스레 사망하고 그의 뒤를 이은 후계자는 아직 어린 아이였기 때문에 구축점을 잃었다. 순조가 무능한 왕은 아니었고 오히려 벽파 숙청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괜찮은 역량을 보였으나 그는 정치에 너무 쉽게 지쳐나가떨어졌고 홍경래의 난을 계기로 그야말로 질려버려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는 등 정치에 손을 떼고 결과적으로 안동 김씨 세력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되었다. 결국 일련의 '개편'이 기존 정치 질서의 파괴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덧붙여 거시적인 관점에서보면, 조선 중기 사림들의 집권 이후 권력의 수도권 집중화에 따른 예견된 흐름으로도 볼 수 있다. 조선은 중기까지 지방의 중소지주 출신이라도 학문적 소양이 뛰어나고 과거에 합격하면 조정 출사가 어렵지 않았으나 1700년대 들어서면서 사림이 중앙사족과 지방사족으로 나뉘어쥐고, 수도권 출신이 아니면 과거 급제는 물론, 과거에 합격해도 관직을 얻지 못하는...권력의 중앙집권화 현상이 심화된다.[10]

영조 후반기, 즉 170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 조선 중기 관직을 놓고 싸웠던 붕당들이 노론 일당 밖에 남지 않았고[11], 한양출신이 아니면 관직 얻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거기다 풍산 홍씨, 경주 김씨 같은 가문이 노론 일당 내에서 북당,남당으로 계파를 만들고 당을 주도하는 흐름을 보였으니[12], 이미 영조 후반기부터 세도 정치의 조짐이 보였다 할 수 있다.

영조 이후 정조는 등극과 함께 풍산 홍씨 가문과 경주 김씨 가문을 아작내고 척신정치를 척결하고, 몰락한 남인,소론 등에게 힘을 실어주어 영조 전반기 이전의 당파정치,탕평정치의 복원을 꾀했다. 그러나 독재 일당인 노론 내 강경파 벽파가 끝까지 이를 거부함으로써 정조의 이런 구상이 말년에 한계에 다다른다. 그것으로 그가 꺼낸 카드가 자신의 구상을 도울 척신 카드였고[13], 그것이 자신이 사돈으로 삼은 노론 시파 김조순이었던 것. 하지만 정조 사후, 노론 내부 벽파,시파 간의 피보는 끝장 권력 투쟁과 함께 노론이란 마지막 붕당은 소멸되고, 그 붕당을 이루고 있던 권세가문들 일부가 남아 권력을 장악하는 세도정치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결론: 다 정조 때문이다

3.1 권력 견제 장치의 실종

우선 조선조 정치의 대표적인 특징은 공론을 중시하는 정치이다. 사헌부의 대관과 사간원의 간관을 대간이라 해서 왕권 및 의정부와 육조를 감찰하고 탄핵하게 해서 권력의 견제장치를 만들어놨다. 그런데 이 탄핵할 대간들조차 붕당정치를 거치면서 하라는 비리에 대한 폭로나 정책 비판은 하지 않고 증거 없이 정적을 공격하는 정치공세. 즉 풍문탄핵만 계속 하고 있었다. 이는 각 당의 이익만 대변하는 당론이 되어 상대파를 공격하고 탄핵하였다는 것이다. 이를 개혁할 필요성은 이미 선조대부터 지적받아오던 사항이었다. 영조와 정조는 이것을 막기 위해서 영조대에 청요직을 혁파하고, 정조대에는 영조의 이러한 정책을 계승하면서 말년에는 아예 탄핵을 제한하는 금령을 설치해버렸다. 그래서 정조 말기로 갈수록 탄핵 총 횟수는 계속 줄어들고 그나마 한 탄핵도 70%가 불허당하는 상황이었다. 물론 당시에는 탕평정책에 필요한 부분이었지만 순조시기에 아예 일당전제화가 된 상태에서 왕권은 시망이 되었고 그나마 권신들을 견제할 수 있는 대간의 탄핵권을 정조시기에 찍어눌러놨다.

세도가들은 기존의 의정부와 6조를 무력화하고 국가의 최고 정치기구가 된 비변사의 요직을 차지하고 권력의 핵심이 됐다. 비변사는 이미 주요 관직에 대한 인사권을 비롯하여 행정·경제·사회 정책 등 국정의 거의 모든 부문을 장악한 상태였고, 딱 한가지. 언론 활동은 제외되었다만... 상술했다시피 이 시기에는 공론과 언론활동이 극도로 약화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일반인들이 조선에 대해 짜증내는것들(붕당, 간관) 다 박살내놓으니까 ㄹㅇ 헬게 강림

4 19세기의 세도정치

4.1 순조 시대(1800~1834)

19세기 순조 시대의 세도정치는 왕의 장인인 김조순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왕의 처가인 '안동 김씨' 가문을 주축으로 왕의 모친 가문은 '반남 박씨' 가문이 우대를 받는 형태로 전개됐다. 세도정치를 확립한 김조순은 얼핏 보면 간신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론 겸양의 처세와 지방 인재 추천 등으로 당시엔 군자로 불렸던 인물.(오히려 김조순이 유명한 간신들과 비슷한 오명이 있었더라면 세도정치의 방향이 바뀌었을 지도) 그런 김조순이 굳건하던 순조 시대에는 홍경래의 난을 제외하면 중앙정치가 안정화됐다는 건 아이러니다. 그러나 오래 유지된 조선 정치사회체제의 모순(삼정의 문란)은 계속 심화되어 갔고, 그가 효명세자, 순조와 비슷한 시기에 함께 죽으면서 그의 자식들, 조카들 그리고 친족들이 김조순이 쌓아 놓은 기반을 바탕으로 점차 막장 행보를 달리며 헌종, 철종 대에 세도정치가 가진 문제들이 심각하게 표출된다.

시파였던 안동 김씨[14]천주교에 제법 온건하였다. 안동 김씨의 봉사손이 천주교 혐의로 신유박해 때 처형되기도 했을 정도. 또 고증학에 나름대로 관심을 가지는 등 '성리학 유일사회' 조선 치고는 상당히 특이한 모습을 보인다. 문제는 이들이 이에 관대했을 뿐이며, 또한 현실 개혁에는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점.

이 때 효명세자의 장인이 된 조만영은 조득영의 아우로, 조득영은 김달순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려 순조 초 벽파, 시파 간 싸움에서 벽파를 아작내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로 이 점이 순조는 특별히 그의 동생인 조만영의 딸을 세자빈으로 삼는데 이것이 풍양 조씨를 세도 가문의 반열에 올려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인터넷에선 이 풍양 조씨 가문이 노론 벽파였다고도 하는데, 이는 잘못된 정보로 풍양 조씨 가문은 노론에 속한 듯 하지만 세도가문이 되기 전엔 시파, 벽파라 하기에도 뭐한 한미한 가문이었다.

그런데 흔히 세도정치를 설명할때 순조 34년, 헌종 15년, 철종 14년을 합쳐 63년간, 반올림해서 60년을 세도정치 시기라고 하는 경우가 많은데 엄밀히 말해서 틀린 것이다. 순조가 즉위한 후 4년간 세도정치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던 벽파가 집권하고 있었고 정순왕후 김씨가 죽은 뒤 2년간은 시파, 벽파 대립 시기였으며 그리고 한동안은 소론 대신 이시수, 이병모 등과 시파계 대신들이 조정을 주도해나가는 형식이었다. 그리고 홍경래의 난이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순조는 나름 열심히 정사를 보았다. 국정 장악에는 별 관심이 없고 민생에만 주로 관심을 보여서 성과가 미미했다는 것이 함정이었지만. 홍경래의 난이 터진 이후로 본격적으로 순조는 정사를 노골적으로 귀찮아하면서 대신들에게 일을 맡겼다. 효명세자의 대리청정도 비슷한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각설하고 순조 시대는 어디서부터 세도정치로 설명해야할지 애매하긴 한데 김조순은 조금 전에 설명했듯이 막후 정치를 즐겨 안동 김씨가 전면에 나서는 것을 삼갔고 그가 죽은 후인 순조 32년이 되어서야 안동 김씨가 전권을 장악하여 우리가 흔히 아는 세도정치를 이루게 된다. 게다가 헌종 시기에는 헌종이 스물이 되면서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함에 따라 안동 김씨가 박살나기 직전까지 간 적이 있었다. 따지자면 순조의 마지막 2년, 헌종 초반 12~13년, 철종 14년 정도가 진짜로 세도가문이 조선을 지배한 시대였다.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1832년에 영국 동인도회사의 상선 암허스트호가 조선으로 와서 통상을 요구한 역사가 있다. 이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최초로 이양선과 접촉한 사례인데 최초로 통상을 요구한 서양상선인데, 일본에서 미국의 페리가 함포외교로 강제로 개항한 사례와 달리, 암허스트호는 아무런 무력적 압박 없이 평화로운 요구였는데다, 머무르는 동안 감자를 재배하는 신농법을 알려주거나 의료봉사를 해주는 등 우리가 그간 조선말기에 당해온걸로 무작정 나쁜 이미지만 가지고 있던 당시 서양세력들과는 180도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1832년은 순조의 마지막 2년으로, 바로 앞 문단에서 읽었겠지만 하필이면 참 절묘하게 세도정치의 본격적인 시작과 겹친다. 교조주의로 치닫던 조선의 당시 상황과 겹쳐 이러한 평화적인 요구에도 매몰차게 조선은 거부한다. 참고로 암허스트 호의 방한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의 원인이 된 쿠로후네 사건(1853)보다 무려 21년이나 빠른 접촉이었다. 조선의 세도정치가 한반도에 얼마나 심각한 병폐를 가져왔는지 이것만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4.2 헌종 시대(1834~1849)

이후 효명세자의 의문스러운 이른 죽음이 따르긴 했지만, 효명세자의 아들이자 순조의 손자인 헌종 집권기에 이르자 풍양 조씨는 안동 김씨에 못지않은 세도를 부린다. 이들은 그간 관대했던 천주교에 탄압을 가했으니, 효명세자가 장수했다고 할 지라도 조선의 근본적인 면이 개혁되었을지는 의문이다.

헌종 시대는 풍양 조씨가 안동 김씨를 능가하는 세도까지 부리지 않았을까라는 견해가 있다. 흔히 세도정치를 설명할 때는 순조 - 안동 김씨 우세, 헌종 - 풍양 조씨 우세, 철종 - 안동 김씨 우세로 설명하는 서적들이 꽤 있다. 헌종기에 풍양 조씨가 우세했다고 보는 근거는 1. 기해박해의 주도 세력이 풍양 조씨라서 천주교에 비교적 관대했던 안동 김씨를 제어하기 위한 정치적인 사건이라는 것, 2. 야사에서 헌종이 조병구에게 했다는 "외숙의 목에는 칼이 안 들어갑니까?"라고 압박을 줬다는 기록 3. 당시 풍양 조씨의 조병헌이 남양 홍씨에게 권세가 넘어갈 것을 우려해 김재청의 딸을 경빈으로 삼게 했다는 야사 등이 거론된다. 또한 당시는 안동 김씨의 수장 김유근이 중풍으로 상태이상에 걸려 있기도 했다.

하지만 애초에 풍양 조씨가 우세했다고 제기되는 근거들은 결정적이 되지 못한다. 야사가 섞인 것은 둘째치고 일단 기해박해의 주도세력은 풍양 조씨가 아니라 풍양 조씨의 겹사돈인 이지연 형제였는데 결국은 그들이 주도한 박해에서 안동 김씨는 김건순을 비롯한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고 특히 김조순 일가는 아무런 타격도 없었다. 게다가 이지연은 결국에는 안동 김씨의 눈 밖에 나서 숙청된다. 게다가 조병헌은 풍양 조씨 들중에서도 헌종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완전히 따로 놀던 사람으로 그의 행보는 풍양 조씨 전체와는 별 관계가 없다. 그리고 헌종 시대에도 왕실 최고의 어른인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했고, 김유근이 상태이상에 빠져 있어도 김좌근이나 김흥근 같은 김조순의 아들이나 조카들이 그 자문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보면 헌종 시대에도 안동 김씨의 세력이 풍양 조씨보다 좀 더 컸다는 견해가 비교적 설득력이 있다. 더욱이 기해박해를 주도한 우의정 이지연은 풍양 조씨와 겹사돈 관계였는데 기해박해 이듬해에 탄핵을 받고 유배크리를 먹는다.

게다가 순조 32년 이후로 명실상부하게 최고 권력자로 떠오른 안동 김씨를 몰아내고 풍양 조씨가 권좌를 차지했다면 그것은 과거의 1인자인 안동 김씨에 대한 도전이 있었다는 소린데 정작 안동 김씨가 최고 세력이라는 데에 이견이 없는 철종 시대에 안동 김씨가 풍양 조씨들을 압박한 정황은 보이지 않는다. 헌종의 안동 김씨 견제책에 앞장 선 조병헌이 예외적으로 사사된 일이 있긴 하지만 그 외에 조득영, 조인영 조만영 형제, 조병구를 비롯한 풍양 조씨 실세들은 철종 조에서도 잘 먹고 잘 살았으며 안동 김씨가 편찬한 헌종, 철종 실록에서도 매우 우호적인 기록을 해놨다. 심지어 조인영 등은 안동 김씨 정권 하에서 정승까지 해먹었다. 만약에 풍양 조씨가 안동 김씨를 능가하는 세를 구축했다면 안동 김씨가 뿌린 철종조의 피바람에서 무사할 리가 없다. 헌종에게 충성하며 안동 김씨를 압박한 수많은 관료들이 유배가는 판국에 풍양 조씨 대부분은 무사했고 오히려 승진했다. 이를 볼때 안동 김씨가 오히려 풍양 조씨들을 자기가 제어가능한 밑의 세력으로 보고 있었다는 추론도 가능할 것이다. 더군다나 김좌근 등의 안동김씨 실세들이 늙어서 물러날 즈음이 되도 안동 김씨는 철저한 가문 관리로 김병국, 김병기, 김병학을 비롯한 신진 엘리트들이 많은 반면에 풍양 조씨는 조득영, 조만영, 조인영, 조병구, 조병헌등이 죽은 이후에는 조성하, 조영하 정도를 제외하곤 내세울 인물도 없었다. 그나마 조성하, 조영하도 김병국, 김병기, 김병학 등이 대원군, 고종에 의해 크게 쓰인 것과 대조적으로 별로 한 일도 없던 것으로 보아 실력도 없던 것으로 보인다.

여하간 헌종은 성년이 된 뒤 수령의 가렴주구를 규탄하고 나름대로 세도정치를 벗어나려는 여러 시도를 했으나 일찍 요절함으로서 꿈을 이루지 못했다. 헌종의 딸도 모두 요절하거나 자식이 없어, 왕통은 단절 되었고 이제 왕위는 방계인 철종에게로 넘어간다.

4.3 철종 시대(1849~1863)

헌종 사후, 권력욕에 혈안이 된 안동 김씨가 약간의 무리수를 두어 철종을 옹립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철종의 혈통상 그의 옹립을 무리수라 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워낙 왕실 후손이 귀해지는 바람에 정말 당시 촌수를 따져도 철종이 가장 왕실과 가까운 혈통이었기 때문이다. 철종 즉위가 무리수라고 보는 의견 중에는 '강화도령'으로 농사나 짓던 무지렁이를 왕위에 올렸다고 보는 경우도 있는데, 철종은 강화도에서 그리 오래 머물지도 않았으며, 어지간한 종친들이 읽는 경서 정도는 읽고 있었다. 다만 철종의 비를 안동 김씨로 또 맞아들인 건 분명히 무리였다. (순원왕후 역시 반대했다.)

안동김씨의 세도는 여하간 절정에 올라, 각지의 수령과 주요 관직을 모두 안동김씨가 독차지 하게 된다. 더이상의 다른 성씨들에 대한 고려도 필요 없었던 것.

철종기에 이르면 지구적인 기상 재앙에 따른 가뭄과 홍수, 그에 따른 기근으로 결국 그동안의 모순이 송두리 째 드러나면서 철종이 죽는 해(1862)와 다음 해에는 전국적으로 민란이 마구 일어난다. 동학이 크게 번성한 것도 이 때. 조선만의 일은 아니어서 청나라도쿠가와 막부에서도 같은 사건들이 일어났고, 청은 이 때 문까지 따였다. 일본도 마찬가지.(단, 이쪽은 피해가 적었지만)

철종이 죽자 왕통은 다시 한번 끊겼고, 조대비에 의해 정조의 동생 은신군의 양자의 손자가 되는 방계 쪽 인물인 고종효명세자의 양자로 삼아 왕으로 삼게 된다.[15]

4.4 고종 시대(1863년 이후)

이 사이 순조의 비가 죽으면서 효명세자의 아내인 신정왕후가 왕실의 웃어른이 되었고, 흥선군과 이해가 일치한 풍양 조씨는 철종 사후 일종의 연립정권을 구상한다. 그 결과가 고종이다. 그의 재위 초반부는 흥선대원군과 전주 이씨가 주도하고, 약간의 풍양 조씨, 김병학, 김병국, 김병기를 포함한 병자 돌림의 안동 김씨 엘리트들, 권력에 소외된 남인이 중심이 된 영남 유림, 소론, 북인 인사들의 연합체로 보면 된다. 거기에 서북인, 함경도인, 고려왕족들까지도 중용되었다. 대원군 실각 이후에는 이최응, 흥친왕을 비롯해서 대원군에게 불만이 있었던 종친들, 안동 김씨, 여흥 민씨, 박규수를 비롯한 일부 대원군 일파의 연립정권이 들어선다.

하지만 흥선 대원군이 집권한 이후 왕권 강화를 추진하면서 풍양 조씨들은 사실상 토사구팽되었고[16] 안동 김씨 역시 대원군 섭정기에 세력이 크게 꺾이긴 했으나 김병학이나 김병국처럼 대원군과 관계가 좋았던 인물들이 요직에 중용되기도 했고, 대원군조차도 안동 김씨의 수장인 김좌근을 나쁘지 않게 대접해 주었다.

각설하고, 고종이 왕이 되고 흥선대원군이 실세가 되면서 조선에는 대격변이 일어나게 된다.[17] 세도정치로 유림이고 당이고 다 무력화된 상황에서 가문만 억누르면 왕권을 견제할 수단이 사라져버렸고 대원군은 그 환경을 활용할 수 있을 정도로 정치력이 뛰어난 인물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대원군이 세도정치를 극복하려고 뽑아 놓은 명성황후가 고종 친정이후 오히려 뒤통수를 쳐서 세도정치 시즌 2인 여흥 민씨 척족정치를 이룬다.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와 다른 점이라면, 고종의 왕권이 헌종, 철종처럼 위해를 받은 건 아니라는 것. 그리고 민씨 척족들의 득세에 (친위세력이 없었던) 고종의 의중이 반영되었다는 점이다.

다만 표면적으로 보면 여흥 민씨 척족들이 단순히 명성황후의 가문이라 득세한 듯 보이나, 실상은 좀 다르다. 고종의 어머니인 흥선대원군의 부인과 흥선대원군의 어머니(남연군의 부인)부터가 여흥 민씨였다. 명성황후가 왕비로 선택된 것도 흥선대원군의 외가이자 처가였기 때문.[18] 한마디로 대원군 집안은 여흥 민씨와 3대, 4대에 걸쳐 혼인을 한 셈이다.

여기서 명성황후는 고아이기에 그 일가가 없으니 척신정치는 행할리 없을 거라는 흥선대원군의 고려가 있었던 것. 근데 고종이 아버질 쫓아내고, 어머니 쪽 친족들과 그 외 여흥 민씨 성을 가진 이들을 중용해 버리며, 대원군의 고려는 말짱 도루묵이 된다. 그런데 애초에 흥선대원군도 안동김씨를 대체하기 위해서 전주이씨 종친(이른바 '선파')을 대거 등용했으니 김씨 세도정치를 왕족 세도정치로 대처했을 뿐이며, 민씨의 세도정치도 이런 맥락에서 계승성(...)이 있다는 평가도 있다. 뭐 일단 대원군의 인사 정책은 소외된 소론, 남인, 북인, 서북인, 영남 유림, 함경도인, 고려왕족까지 모조리 망라한 진정한 의미의 탕평이었고 전주이씨 우대는 왕권강화와 왕실위상 증진의 맥락에서 벌어진 것이니 좀 오버스러운 평가긴 하다.

5 세도정치기의 모습들

5.1 정치

살펴보면 세도정치 시기에 일어난 사건들은 이미 정도의 차이일 뿐 영조, 정조 때도 이미 일어난 수준의 문제들이었다. '조선의 르네상스'로 불리는 영조, 정조(조금 과장하면 양란 이후의 모든) 시기에도 민란은 꾸준히 일어났고 정감록은 아무리 늦게 잡아도 정조 시기에 돌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붕당 정치가 사실상 붕괴되고 지방 세력이 시궁창이 된 것도 이 시기였다.

이미 이 시기는 과거에 진출하는 중앙사족과 지방에서 세력을 유지하는 지방사족의 구분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영조 시기 노론의 일당 독재는 오히려 강화되었으며, 정조 또한 서울 지방의 소론과 남인들을 등용하는 선에서 탕평책을 마쳐야 했다. 때문에 지방 차별은 완화되지 못했고, 이인좌의 난 당시 경상도는 반역향으로 찍히기도 했으며, 순조 시기 홍경래의 난 또한 사전의 준비 작업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정작 이 두 왕 시기에 탕평책을 시행하면서 붕당 정치의 마지막 체계조차 무너졌다는 비판을 받는다.

하지만 최소한 영조와 정조는 시대의 문제가 무엇인지 모르지 않았기에 이를 진단하고 폐단을 고치려는 노력은 꾸준히, 그것도 조선사에 꼽힐 정도로 열심히 했다. 격동의 시기에 별 대책도 없이 조선을 쇠퇴의 길로 몰아넣은 것이 세도정치임은 부정할 수 없다. 점증되는 외세의 위협에 대해서는 그저 수신하소서라는 말 외엔 어떤 대책도 세우지 못했으며, 2차 아편전쟁으로 인한 북경 함락으로 동요하는 민심을 다독거리는 것은 커녕 천주교를 족칩시다라는 말 외에는 하지도 않았다. 이양선이 들어왔다는 장계가 올라올 때마다 무슨 녹음한 것 같이 이 두 이야기만 반복했다. 한마디로 아무 대책 없었던 거다. 그러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치부를 가리고 공적을 부풀리기 위해 실록을 축소은폐하고 부풀리고 과장하였다.

수역별단, 일성록에는 아편전쟁, 태평천국에 대해 당시 국왕들이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지 보여주지만 실록에는 그딴거 없다. 철종실록의 경우 철종 12년 3월 ~ 5월까지의 기록이 다합쳐 3쪽이 채 안된다. 당시 조선의 민중들 사이에 청나라가 곧 멸망한다는 소문이 퍼져 도성에서 도망치는 일이 속출하고 있다고 일본 쓰시마번주막부로쥬에게 문서를 보냈을 정도인데 실록만 보면 정말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은 평온한 시대로 되어 있다. 까놓고 말해서 일제가 편찬한 고종, 순종 실록보다도 부실하다. 기록이 없어서 그렇다

즉 세도가문이 욕을 먹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특별하고 사악한 정치를 해서가 아니라 한 나라의 권력을 장악한 자들이 일을 안하고 푹 퍼져 있어서 내정개혁과 부국강병을 팽개친 덕분에 내우외환을 동시에 극대화하여 식민지화의 길을 열어버렸다는 것에 있다.

5.2 경제와 사회의 혼란

아이러니하게도 18세기에 비해 19세기는 조선의 무역에 좀 더 숨통이 트인 시기였다. 면화, 고추, 담배 등의 재배가 나름대로 성숙한 상태였으며, 18세기 인삼 종자의 일본 유출과 미국 백삼의 수입 등으로 쇠퇴했던 인삼 무역이 홍삼 가공업의 흥성과 재배삼의 확산 등으로 인해 호조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드라마 상도의 주인공 임상옥이 활동한 것도 이 시기. 이로 인해 의 가격은 안정되었다.

한편 조선에서 공노비의 폐지(정순왕후 김씨 수렴시대)[19] 등으로 노비가 10% 이하로 줄어들고 양반이 70%에 이른다고 할 정도로[20] 일반민의 사회적 지위가 상승한 시기 또한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시기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성리학이 민중 사이에 보편화된 시기도 같은 시기에 걸친다.

그러나 조선 국내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일반 농민들에 대한 수취가 날이 갈수록 심해져 농민의 불만이 폭발지경까지 왔다. 그렇게 악랄하게 수취한 조세가 똑바로 쓰인게 전혀 아니고 관료와 수령과 향리들의 탐학으로 무의미하게 소비되었으며, 이로 인해 국가 재정도 파탄 단계에 이르렀다는 점이었다. 말 그대로 밑 빠진 독에 물 붓느라 양민들만 죽어나는 상황. 사실 공노비 해방이나 연좌제의 완화[21]도 이 과정에서 양민 수를 늘리려는 필사적인 시도였다.

이것은 양란 이후 200년 넘게 평화기를 누리면서 인구가 크게 증가한데 반해 18세기 중엽 이후 조선은 경작지가 확장되어도 수확량이 증가하기는 커녕 정체 혹은 쇠퇴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왜냐면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이전의 3분의 1 정도로 수확량 감소가 이루어진 탓이다. 인구의 증가로 벌목과 화전이 심해지면서 전국의 산이 민둥산이 되었고 이로인해 대규모 홍수가 일어나면서 생산량이 줄어들었던것. 19세기 초의 실학자인 서유구는 이를 지적하여 이를 받아들인 조정에서 소나무의 벌채를 금하기도 하였으나 당시의 행정력으로는 체계적인 산림관리를 하기란 불가능한일이였다.[22] 인구증가와 토지생산성의 하락은 농민들의 생활을 악화시켰고 이와함께 걷어들일 세금이 줄어들면서 국가재정 또한 파탄에 이르게 되었다. 국가재정이 악화됨으로 인해 종전까지 농민들의 생활을 보호해주던 환곡제도는 농민을 수탈하는 제도로 변질되었고 이로인해 농민층의 불만은 크게 고조되었다. [23]

또한 양반 계층의 폭증으로 인해 세제의 구조는 군역의 면세 계층이 납세 계층보다 훨씬 많아지는 기형적인 역피라미드 형태를 이루게 되었다. 이로 인해 세입도 줄어들었고, 이런 상황에서 환곡 제도는 재정의 곤란으로 붕괴하거나 아예 수취의 도구로 변질되었다.[24]

이러한 경제적인 압력은 자연히 농민들의 봉기를 부르게 된다. 다만 이 때의 농민 봉기가 흔히 알려진 것처럼 '못 살겠다 갈아보자' 식의 대규모 봉기였다고 볼 수는 없다. 농민 봉기의 문제를 떠나 대부분 조선인들이 사회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은 '임금의 덕을 척신 가문과 탐학한 수령들이 가리고 있다' 는 인식이었다[25]. 때문에 농민 봉기도 수령과 향리들을 사살하여 중앙에 항의하면, 새로 도착한 수령이나 안핵사 등이 주동자 일부를 처벌하고 나머지 농민들은 대개 훈방한 뒤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수준에 그쳤다.[26] 홍경래의 난은 주동자가 뚜렷하고 목표가 중앙 조정을 겨냥한 굉장히 특이한 사례. 하지만 이러한 구도와 해결책의 실패는 후의 동학농민운동에서 폭발하여 국가를 뒤흔드는 수준에 이르렀으니, 사회 구조가 틀어진 것은 부정하기 힘들다. 특히 후술하겠지만 반란 지도부 대부분은 양반이었다.

게다가 이 시기의 봉기는 이전과는 차원이 달랐던 것이, 봉기를 지휘하는 지도부가 몰략 양반이건 토착 사회지도층이건 '기득권층' 에 속했기 때문이다. 보통 민생고로 나라가 위기에 빠지더라도 기존의 기득권층은 국가를 지탱하기에 어지간한 경제난에도 정부가 바로 망하지는 않는데, 이 기득권층 내에서 균열이 생긴다면 정권 자체의 기반이 뿌리뽑히게 된다. 세도 정치가 임술 농민 봉기 이후 몰락한 것도 진짜 이유는 바로 기득권층인 양반 사회 내에서 세도 세력을 적대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서 사회지도층 내에서 이제는 저들에게 권력을 맡겨서는 안된다는 나름의 공통 분모가 형성된 것이다. 여기까지 가면 사실상 미래는 없다고 봐도 된다.[27]

사실 동학농민운동 이전에도 진주에서 시작된 봉기가 전라, 경상, 충청의 3남에 퍼지자 세도정치가들도 대책을 세운다. 그런데 이들이 세운 대책이란게 철종더러 수신에 힘쓰라는 거 정도다. 안동김씨 김좌근도 풍양조씨 조두순도 이때는 가문을 뛰어넘어 한목소리로 말하는 기적을 보였다. 구체적인 방안을 요구하자 각지의 선비들에게 의견을 묻자는 등... 결국 철종의 주도로 삼정의 기본 틀은 유지하되 문제점은 개혁하기 위해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지만 농민 봉기가 잠시 수그러들자 바로 이정청을 날려버렸고, 몇년 뒤에는 문제 해결에 나서긴 했지만 그것도 흥선대원군이 집권하고 압박을 가하는 바람에 마지못해서 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들 세도정치가들이 삼정의 문란과 농민 봉기에 자발적으로 내놓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5.3 외교와 국방

이 당시엔 별 쓸모없어 보이는 종계변무가 이루어졌다. 원래 종계변무란 명나라 사서 대명회전에 태조 이성계가 고려말의 간신 이인임의 자손으로 잘못 기록된 것을 고친 것을 말한다. 선조 때 이것이 해결되고 이후 영조 때 다시 청의 공식 사서 대청회전에 대명회전의 고친것을 다시 기록하게 했다. 이는 당시 국가 권력의 정통성을 위해서 중요한 일로 취급받았지만, 철종 대에는 청나라의 이름없는 학자가 쓴 이십일략사의 오류를 당시 청에 사행사로 파견된 윤치수가 발견하여 청나라 관리에게 고쳐달라고 요구했다. 문제는 청나라 관리들 조차 이런 듣보잡 역사서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다는 것. 그런데 윤치수는 북경에서 이걸 30권이나 찾아내 기어이 고치게 한다. 이렇게 유능한 분들이 어째서 국내의 현실 개혁에는 그리도 무능했을까? 어쨌든 이 공로로 철종은 엄청나게 길고 아름다운 시호를 획득하게 된다.

국외의 가장 큰 위기인 태평천국과 혹시 모를 서양의 침입에 대해서도 뒷북을 치는 무능한 모습을 보였다. 태평천국이 가장 왕성할 때는 광서적비, 장발적으로 부르며 곧 진압될 것이라고 말했고, 10년이 넘도록 진압되지 않자 그제서야 위기감을 가지기 시작했으나 정작 이때 태평천국은 남경사변으로 자멸의 길을 걷고 있었다. 물론 태평천국의 정보를 전적으로 청나라로 파견되는 사행사에게 의존하고 있으며 이들 사행사가 공간적, 시간적 제한으로 정보 수집이 힘든 건 사실이다.[28]

하지만 이보다 더 문제는 세도정치 세력들의 입맛에 맞게 정보를 짜집기 하는 것이다. 특히 2차 아편전쟁으로 북경이 함락되고 함풍제가 열하로 도망치는 미증유의 사태가 일어나자 조선은 열하에 문안사를 파견한다. 그리고 문안사로 파견된 사신이 돌아와서 말하길 청나라는 땅이 넓고 변란이 없던 때가 없다며 별일 아니다고 말한다. 함풍제가 열하로 도망친 것도 그냥 사냥하러 갔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혹시 모를 서양의 침입에 대해서는 서양이 원하는 건 교역인데 우리 조선은 찢어지게 가난하니 걔들이 올 일 없음이라고 진단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국왕은 수신해야 한다고 구체적인 대책을 제시한다.

물론 전부 다 헛소리였다. 함풍제는 영불 연합군의 공격에 청군이 개발살나자 진짜 겁을 먹어서 열하로 도망쳤다가 거기서 나오지도 못하고 병으로 죽었고, 청이 변란이 잦던 건 맞지만 19세기에는 외부에서 직접적으로 나라를 식민지화하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점이 전혀 다르며, 서양이 내세운 것이 말이 좋아야 교역이지 실제 목표는 척화 세력이 말한 것처럼 식민지화였다. 물론 식민지가 되는 걸 막으면서 교역을 통해 근대화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게 정답이지만 이들은 거기까지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난하기 때문에 오히려 식민지로 만들기는 더 쉬웠고, 지정학적인 가치가 과시가 목적이라면 쓸데가 없어도 식민지를 만드는 게 당시 유행이기도 했다. 그나마 미국 정도가 식민지 개척에 관심이 적었는데 이것도 라틴아메리카 장악이 우선이라 그냥 내버려둔 것일 뿐.[29] 일본이 아니라 해도 영국이나 프랑스에 의해 식민지가 될 가능성이 높았던 이유다.

국방은 그야말로 막장이었다. 문제를 개선할 생각은 커녕 지극히 무관심하여[30] 할 생각조차 없었다. 이러니 2천만에 가까운 인구에도 군대는 허약하기 그지없었다. 정조때도 국방력이 엉망이라서 박제가와 이익이 조선의 국방이 너무나 개판이라고 한탄할 정도. 당시 국내에 숨어있던 프랑스 신부가 무기고에는 무기는 커녕 썩고 녹슨 나무토막 쇠토막만 있을 뿐이니 군함 한 대만 끌고와서 대포 몇 방만 갈기면 알아서 무너질 거라고 말했을 정도. 결국 신미양요병인양요때 탈탈털리지만 그래도 알아서 무너질 정도는 아니라는 것을 인증하는 것을 끝으로 흥선대원군이 실각한 1910년. 결국 그 말은 현실이 됐다. 특히 홍경래의 난때 발생한 반란군과 동학농민봉기의 동학농민군도 진압못하고 쩔쩔맬 정도로 조선의 국방은 형편없었다.

5.4 문화와 실학

문화적으로는 정치나 경제의 어려움만큼 쇠퇴를 겪지는 않았다.

김삿갓(본명 김병연), 정수동(본명 정지윤)[31] 등 시대에 비판적인 문학가들이 등장한 것은 정치, 경제의 혼란을 반영한 것이라 하겠으나, 막말로 김삿갓이 방랑하면서 굶어죽지 않았다는걸 상기하자 서양 사상이 쏟아들어오고 이규경, 최한기, 정약용 등 기존 사상의 한계를 지적한 신사상가들의 등장이 절정에 다다랐으며, 한치윤, 김정호 등 기존의 국학 문화를 집대성한 인물들이 출현하기도 한 시기이다.

소위 '북학파'의 계승이라고 볼 수 있을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중국과의 교역과 함께 김정희 등의 인사들도 활발히 활동한 시기가 이때다. (물론 김정희는 경주 김씨라 안동 김씨의 잦은 탄압을 받았는데도 이정도.) 그리고 세도정치기의 마지막 시기에 장승업이 나타났다.

도자기, 가구, 민화 등 또한 원숙한 모습을 보였으며 현재 남아있는 수량도 이 시기의 것이 제법 많다. 단 이러한 문화 또한 대외 무역이 침체하고 경제가 전반적으로 악화되면서 서서히 쇠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6 평가와 의의

하여튼 대체적인 평가는 개판. 그야말로 나라가 망할 적의 모습을 하나둘 정도가 아니라 무더기로 보여준다. 민생은 당연히 바닥을 쳐 유망민과 도적, 농민 봉기가 폭증했으며 콜레라(1820년 대유행) 등 새로운 질병 또한 유행하였다. 여담이지만 감자 등 구황 작물이 도입된 때도 이 때. 천주교가 민중 속으로 퍼져 가고 갖가지 도참론이 유행했으며 이 시기의 끝자락에 동학이 창시되는 등 조선 민중은 새로운 세계를 절실히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치명적인 것은 기득권층의 이탈인데, 이 때부터 이전까지 견고하게 유지되던 양반 사회의 구성원 상당수가 지역이나 정치적 이념이 문제가 아니라 단지 저렇게 답이 없는 자들에게 권력을 맡길 수 없다는 이유로 반체제로 돌아서기 시작한다. 당장 세도 정치기에 벌어진 반란은 이전의 반란과 달리 대부분이 양반 주도 하에 이루어졌고, 지역 사회의 적극적인 후원까지 받았다. 흥선 대원군이 신속하게 권력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사정 때문이다.

자본주의 맹아론을 기반으로 한 자생적 근대화론자들은 이 시기 농민 의식의 성장이 이루어졌다는 점을 강조하지만, 솔직히 농민이 불만을 안 가지면 이상한 시기라 19세기까지 옹호하는 이론은 비판의 여지가 너무 많다.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도한 '낙성대 학파'가 조선을 평가하며 내놓은 '소농 사회론'에서도 18세기에 대해서는 비교적 우호적 평을 내놓으나, 이 시기 대외 무역과 농업 생산량의 감소, 조세 체제의 붕괴 등 경제적 차원의 붕괴가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6.1 조선 후기 세도정치가 조선의 멸망을 부르게 된 이유

순조-철종 시기의 세도정치가 조선의 멸망의 원인을 제공한 이유는 이 시기부터 기존의 지배 체제 구성원들이 왕조로부터 본격적으로 등을 돌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보통 왕조의 몰락은 기존 기득권층 내에서의 분열로부터 시작되게 마련인데 조선도 예외는 아니다. 물론 이전에도 반발은 있었지만 홍경래나 이인좌처럼 지역차별 혹은 정치적 반감에서 비롯된 것인 반면 이번에는 순수하게 답이 없는 정권이라고 인식하고 등을 돌린 것이 결정적인 차이다.

그리고 그 원인은 부패의 상설화에 있었다. 특히 세도정치의 서막을 제시한 김조순이 막후에서 실세를 이루면서 그가 추천한 여러 신하들도 권세가와 인맥을 가져서 벼슬길에 오르는 방식을 더 선호하게 되는데 이 후 지방의 수령직으로 내려가가게 된 이들은 권세가에게 바친 많은 재물들의 빚을 갚고, 자신의 재산을 축재하기 위해 수많은 백성들을 고혈을 쥐어짜게 된 것이다.

농사가 풍작이건 흉작이건 수령들의 약탈로 농민들은 굶주릴 수 밖에 없게 되었고, 유랑하게 되거나 도적이 되는 등 오늘날 아프리카난민들과 비슷한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나라에게 밥줄을 빼앗기고, 떠돌아다니는 이들에게 애국심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찾을 수 없었을 것이고, 이러한 원인들이 국가의 기반부터 무너뜨리게 된 것이다. 또한 조정은 백성들이 바친 많은 세금들이 수령과 권세가들의 주머니 속에 들어가는 것도 모른채 아끼고 또 아끼면서 정부를 운영해야하니 군대를 키우고, 국력을 다지려고 해도 그럴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백성들만 쥐어짜이면 그나마 기득권층 내에서는 시스템이 잘 돌아가니 그래도 낫다. 문제는 양반과 중인. 또한 평민 출신이되 사실상 기득권에 가깝던 상인 및 부능들. 즉 지역 토호까지 수탈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일반 백성들을 잘 통제하라고 이들에게 적당히 권력을 밀어 줬고 토호들은 중앙 정부의 뜻을 충실히 따랐는데, 이들이 수탈 대상이 되면서 오히려 백성들 편에 서서 기득권층을 적대시하게 된 것이다. 임술 농민 봉기의 시작인 진주민란만 해도 백낙연이 진주의 양반들까지도 가혹하게 수탈하여 맨 처음 이의를 제기했던 것은 진주의 양반들이었고 이후 삼남 전역에서 벌어진 대부분의 민란의 지도부가 양반이었던 것은 바로 이런 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실 조선 역사를 보면 척신 세력이 날뛰었던 시기는 이전에 한 번 존재한 바 있었다. 명종 시기 문정왕후윤원형 세력이 번영할 때가 그 때이고, 그 때도 민생은 파탄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때는 사림파성리학을 중심으로 사회 개혁론을 내놓으면서 정치를 개편하려 노력하였고, 되려 지금은 서경덕, 이황, 기대승, 조식 등 유학자의 전성기로 기억된다. 또한 그때는 윤씨 가문 일당 독재가 아니라 정순붕, 임백령, 최보한, 이기등의 다른 공신들이 건재하였고 윤씨라고 마구 설치는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때는 차라리 친 문정왕후의 경원대군 옹립파의 집권 시기라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또한 민생은 파탄됐다고 해도 아예 벼랑끝에 내몰리는 일은 드물었고 또한 기득권층 내의 결속력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임꺽정과 같은 도적은 많이 나왔어도 제대로 된 지도부의 지휘를 받는 반란군은 없었다는 것이 그 증거다.

반면 세도정치 시기는 실학 등이 나왔다 한들 중앙으로 전혀 진출하지 못했고, 결국 우리의 기억 속에 남은 이미지는 하나다. 답이 없다. 막판에는 몇몇 세도 권력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기득권 사회에서 배제됐고, 당연한 일이지만 이들은 반란을 일으키거나 아니면 매국노가 되거나 아예 다 때려쳐 버리거나 셋 중 하나를 택하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일제강점기. 조선이 이렇게 마무리되어 갔기 때문에, 기득권층에 속하는 양반들도 대부분 조선 사회를 포기했다. 조선말 여러 사건에 대한 매천 황현의 반응은 당시 유학자들의 조선사회에 대한 심정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6.2 세도 가문들이 똑똑한 왕족들을 마구 죽였다?

다만 권력에 눈이 먼 세도가문들이 왕손들에게 닥치는대로 역모 혐의를 뒤집어씌어 마구 죽였다는 말들이 많이 퍼져 있고 나무위키에도 그런 식으로 설명된 경우가 많은데 까놓고 말해 헛소리다. 세도 가문 집권 기간 동안 해를 입은 왕손이라 해봐야 두셋에 지나지 않는다. 경평군과 이하전, 은언군의 서손자이자 전계군의 아들인 이원경인데 이 중 이원경, 이하전은 모두 역모에 휘말려 죽은 것이라 본인들은 억울해도 세도가문의 음모가 개입될 여지가 없다. 그리고 이하전은 덕흥대원군의 후손으로 왕위 서열에서 안드로메다급으로 까마득하고 경평군은 아예 죽지도 않고 유배됐다.[32]

우선 이쯤 돼서 조선 왕실의 왕위 서열 1순위들은 소위 '삼종의 혈맥'이라 불리는 효종-현종-숙종조로 이어지는 라인의 후손들이었다. 이 라인의 계승자였던 사도세자는 네 아들을 두었으니 각각 정조,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이다. [33]

이중에 은신군은 영조 47년 김귀주가 홍봉한을 탄핵하는 과정에서 '추종을 외람되이 거느리고 방자하게 굴었다'는 이유로 은언군과 함께 유배를 갔다가 일찍 죽었고[34] 은전군은 정조 시기에 홍계능의 역모에 휘말려 죽었고 은언군 역시 유배 되어 있었다. 은언군의 경우 그의 아들 상계군은 정조의 양자로 완풍군으로 호를 고쳐 들어갔다가 일찍 죽었고[35] 아들을 잃은 은언군은 정조의 표현에 따르면 '사람의 형상만 겨우 갖추어' 유배의 처지였다. 그러다가 문양해의 옥사가 터지자 은언군을 죽이라는 청이 들어왔는데 정조는 끝까지 지켜냈으나 정조 사후 벽파가 집권하면서 홍봉한의 아들 홍인한과 함께 사사되었다.

은언군에게는 상계군과 풍계군, 두 아들이 있었는데 이중 상계군은 앞서 언급했듯이 정조 10년에 갑작스레 죽었고 풍계군은 은전군의 양자가 되었다가 후사 없이 죽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서자 전계군 이광 뿐이었다.[36] 이광은 아비가 사사됨에도 불구하고 운좋게 살아남았고 순조의 비호로 결혼도 했다. 그의 아들론 이원경, 이경응, 이원범이 있었는에 이중 이원경은 민진용 역모 사건 때 죽었고 헌종이 죽을 때에 돼서는 삼종의 혈맥의 후손이라곤 이경응, 이원범 두 사람밖에 없었다.[37]

이 중에서 세도 가문들이 똑똑한 왕족은 곤란하다고 마구 모함해서 죽인 흔적은 없다.[38][39] 역모로 몰려서 많이 죽기는 했다. 왕족들이란 예부터 역모에 거론되면 억울하게 죽어야할 처지였고 이원경의 경우만 해도 민진용에 의해 추대되려 했다는 이유로 죽었지, 모함을 당해 죽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와 연계해서 철종도 무리수를 둬서 옹립했다고들 하지만 그럼 누굴 추대한단 말인가? 예외라 해봐야 그의 형인 이경응 밖에 없지만 형이 아니라 동생을 세웠다는 것을 트집잡을 건덕지는 없다. 어차피 철종의 승계로 생기는 문제는 이경응이 승계해도 마찬가지다. 이경응이 왕위 승계에서 탈락한 이유는 병이 있었고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첩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철종의 어머니는 이광의 정실이 죽고 다시 맞아들인 계실이며 영의정으로 추증된 염성화의 딸이다. 그래봤자 파주출신 외가는 몰락한지 오래였다.

6.3 외국의 사례와의 비교(일본과 서양을 중심으로)

한편 오래 전 일본의 헤이안 시대에도 이런식의 세도정치가 이루어졌다. 일명 섭관정치. 그리고 이 동네도 귀족 세력이 커지다가 사무라이가 날뛰고 덴노는 시궁창이 되는 막부 정치가 열렸다. 그렇게 시작된 가마쿠라 막부 역시 외척인 호조 가문에 의한 싯켄 정치가 벌어져 결국 망하게 되었다. 이외에도 척신 정치의 예시는 많으나, 동양 역사서에서 매일같이 까이는 게 척신 정치라는 점을 생각해보자.

일본에서는 이걸로 일제강점기 식민사관을 주장하던 측에서 정체성론의 한 근거로 제시하기도 했다. 즉, 조선의 세도정치시기는 일본의 헤이안 시대와 비슷하고 흥선대원군의 정치는 일본 상황(上皇)의 원정(인세이院政)과 흡사하다는 것. 여기에 조선 말 상황은 일본의 사무라이나 유럽의 기사 계급이 생겨나지 않은 정체된 사회이니[40] 일본의 도움(을 빙자한 침략)이 없었더라면 조선은 항상 그 자리에 머물렀을 것이라는 것. 거기다 이들은 농업 생산량이라든가 상업같은 것까지 비교하여 조선 후기를 가마쿠라 시대의 초기 상황으로 보았다.

물론 통치 구조 면에서 민주주의적인 발전이 부진했던 것은 사실이나, 단순히 통치 구조의 형태가 비슷하다고 해서 이를 정체의 흔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또한 15세기 후반 이후 거의 완성된 계층인 양반만 하더라도 이전의 지배 계층보다 충분히 지방으로 확산되어 농업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으므로, 충분히 통치 계층의 저변이 확대된 사례로 꼽을 수 있다. 게다가 18~19세기는 앞서 말했듯 일반민의 사회적 지위가 상향평준화된 시기이며, 생활 농서의 편찬과 장시의 전국화 등으로 충분히 성숙한 서민 경제 구조가 이루어졌다고 평가받고 있다. 서민 경제의 단계를 이루었다고 볼 수는 없는 가마쿠라 막부에 비교하는 것은 곤란한 이론적 비약. 자세한 내용은 조선 항목 참조.

게다가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의 발전 단계를 단순히 서유럽의 발전과정과 동일시하고 그 시각을 다른 사회들에 강요하는 유럽중심주의에 가까운 이론적 한계점으로 인해 근래에는 빛이 많이 바랬으므로 이 이론을 그대로 받아들이는건 넌센스. 더 자세히 들어가자면, "현실에 구현된 노예제나 봉건제, 봉건제와 자본주의 사회간 구별이 얼마나 뚜렷한가? 나아가 이 사회들이 구별 불가능할 정도로 차이가 흐릿하다면 구별이 의미가 있는가?" 같은 문제들도 제기된다.

게다가 마르크스는 유럽의 역사를 통해 이론을 세웠지만, 정작 유럽에서도 기본적 계급구조는 오랜 시간동안 거의 온전히 유지된 상태로 도시화가 진행되었다는 이론이 현제의 주류다. ("장기 중세" 이론은 여기서 출발한다.) 영국을 제외한 모든 근대는 자연적 발전과정을 거치지 않았으며, 영국의 근대마저도 상당히 우발적인 것들이었다는게 이미 20세기 중반부터 나오던 연구들. 마르크스의 사회 구분 방식(노예제나 봉건제 같은)이 여전히 사용되고 있긴 하지만 그건 마르크스주의의 사회구별법을 대체할 대안이 아직 충분하지 않고 범주로 보자면 나름 쓸만하기 때문.

7 참고 항목

8 세도가문 일람

9 19세기 세도정치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

  1. 그래서 영어로 Politics by/in powers(즉, 힘에 의한 정치)이다.
  2. 장동 김씨라고도 불리는 건 세도 정치를 이끈 안동 김씨 가문이 조선 중기 한양 내 장의동에 자리를 잡았던 일파(척화파의 거두 김상헌이 대표격이다.)이기 때문이다.
  3. 풍양은 오늘날의 경기도 남양주 지역의 옛 이름이다.
  4. 이 반남과는 관계 없고 전라남도 나주 지역의 지명.
  5. 정조가 즉위하여 정점에 오른 후 그가 몰락할 때까지 걸린 시간은 겨우 4년이었다.
  6. 노론 시파인 김조순의 딸을 순조의 비로 삼은 것은 정조의 유지였다.
  7. 김좌근은 김조순의 3남으로 아버지 김조순과 첫째 형 김유근의 사후 안동 김씨를 대표하는 인물이 됐다.
  8. 단 홍국영은 정조가 적절한 선에서 잘라내버렸고 김조순 역시 정조가 그의 아들 김좌근이 집권할 때까지 살아있었더라면 정조가 그만큼 살 정도로 건강했으면 애당초 김조순이 떠오를 일도 없었겠지만 안동 김씨의 위세가 그리 커지지 않았을 수 있으나 애당초 급격한 건강 악화에 안동 김씨를 무리하게 끌어들인 것이 정조다.
  9. 엄격하게 말하자면 벽파가 적이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사도세자 추숭이 궁극적 목표였던 정조의 입장에선 매우 골치아픈 아군이었을 것이다. 사도세자의 추숭을 한다는 것은 영조의 결정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고 당시 조정을 차지하고 있던 노론에 대한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남인인 채제공이 그토록 사도세자 추숭에 매달렸던 것이고 소론 서명선조차도 채제공에게 위협을 느끼고 노론과 입장을 같이한 것이다.
  10. 1800년대 순조 초 서북지방에서 일어난 홍경래의 난의 가장 큰 원인이 이거였다. 서북지방의 차별은 과거부터 있었으니 그렇다쳐도 과거에 조정의 이황, 조식 등 주요 인물을 배출하고 했던 영남지역과 이발 형제와 명문가를 다수 배출한 호남지역이 각각 이인좌의 난과 정여립의 난으로 역적동네로 찍히면서 실각했고 지방출신은 잘해야 충청, 황해도 지역으로 국한되었다.
  11. 소론,남인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실권을 이미 상실했다. 특히 소론은 영조 31년 이후로 공통된 정치적 의리를 갖추기 못하고 사실상 망한 상태였고 그나마 남인이 체제공 중심으로 최후의 재기를 노리지만 벽파에 의해 망한다.
  12. 사실 영조 후반기는 말만 탕평정치지 실상은 노론 일당만이 실권을 쥔 상태에서 이 노론을 왕이 척신들로 제어하는 척신정치였다. 사실 탕평이라는 명칭을 왕부터가 공개적으로 썼다는 것 자체가 그만큼 당시 붕당정치가 위태로웠다는 것의 반증이다.
  13. 즉위 초기에 기존 척신 가문들과 새로이 척신가문이 되려 했던 홍국영을 아작냈음에도...
  14. 모든 안동 김씨가 시파였던 건 아니였고, 김조순을 주축으로 한 세력들이 시파였다. 벽파에 서서 김달순처럼 아작난 안동 김씨들도 있다.
  15. 다만 효종 이후의 직계왕통이 단절된 가장 큰 이유는 세도정치 말고도 효종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현종은 효종의 외아들이였고, 숙종현종외아들이였다. 숙종은 아들이 몇명 있었지만 영조 빼고는 대가 끊기고, 영조도 사도세자 이외에는 아들이 요절... 이렇게 효종 이후로 아들들이 귀해지면서 (거꾸로 정통성은 보증되었으나) 결국 효종에서부터 내려온 직계 왕통은(양자 제외) 철종을 끝으로 단절된다. 그나마 사도세자가 아들을 많이 봤지만 이쪽의 후손들은 역모크리...
  16. 그렇다고 유방이 공신 죽이듯 하는 것을 연상하면 심히 곤란하다. 애당초 조대비와 조영하, 조성하 형제를 빼고 대원군과 커넥션이 있었던 조씨도 없었고 조씨들을 마구 죽인 것이 아니라 김씨들과 마찬가지로 조씨들에게 이전과 같은 세도권력을 주지 않은 정도였다. 조대비가 정치에서 물러나면서 권력을 대원군에게 준 것도 있고.
  17. 경복궁 증건에, 만동묘, 서원 철폐와 호포제, 사창제 실시에 당백전 발행까지... 이전 같았으면 이야기만 나오고 바로 휴지통에 버려졌을 일들이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은 몇년 동안에 전부 시행되고 그대로 이루어졌다.
  18. 참고로 여흥 민씨는 조선사 통틀어 왕비를 여섯 배출한 노론 내 손꼽히는 명문 가문이었다. 인현왕후가 대표적이고, 순종의 첫 왕비 조차도 민씨다. 4대가 민씨라니 후지와라 급이네
  19. 홍경래의 난 당시에 가담자 대부분을 참수한 것도 이런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과거에는 주동자와 핵심 간부만 처형하고 나머지는 노비로 전락시켰는데, 이제는 그럴 수가 없으니 그냥 다 처형해 버린 것이다. 게다가 일부 반란군의 처형은 16세 미만 청소년 범죄자의 사형을 금한 당대 기준으로도 명백한 불법이었다.
  20. 물론 대구의 통계 한정이지만 아마 다른 지역도 큰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
  21. 이전에는 반역자 등 중범죄자의 가족들을 다 노비로 전락시켰지만 19세기 이후에는 당사자만 처형하고 가족들은 노비 전락 없이 지방으로 추방하거나 유배하는 등 탄압이 좀 완화됐다.
  22. 양민들로선 벌목과 화전이 생계가 달린일인지라 발발하여 정부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계속 했다. 한마디로 생계 대책도 해주지않고 금지하니 잘될리가 없다.
  23. 19세기 인구증가와 토지생산성의 한계에 따른 사회불안은 조선뿐만이 아니라 중국,일본 등 대다수의 동아시아 국가들이 겪는 일이였다. 기존의 생산력으로는 더 이상의 인구부양이 불가능해진 것. 동아시아 뿐만 아니라 이 당시 유럽과 인도에서도 기근이 발생하여 이로 인해 사회불안이 심해졌다.
  24. 이런 상황은 중국에서도 역시 비슷하게 진행되어 청나라때의 세율은 일종의 인두세로 변하게 되었다. (이런 토지세 <-> 인두세로의 사이클은 한나라당나라 등 중국사에서 매우 흔한 일이다.) 이후 고종시대 제법 전매를 통한 재정충당이 보이긴 하지만 적어도 순조~철종기의 조선에서 이러한 변화는 없었다.
  25. 근왕 의식은 후의 동학농민운동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26. 왜냐면 죄다 처벌하다간 진짜로 반란일으켜 사태가 악화되니까.
  27. 실제 역대 왕조나 국가의 멸망 원인을 보면 하나같이 주요 사회지도층의 이탈 혹은 이반이 발견된다.
  28. 비슷한 케이스가 조선통신사에서도 종종 일어났다.
  29. 필리핀의 경우도 스페인 때려잡고 나서 얻어먹은 쪽에 가깝다. 물론 받아낸 다음에는 철저하게 수탈했다. 반항하는 필리핀도 아작내버렸고.
  30. 정조 때의 국방정책과 비교하면 확연히 알 수 있다. 어떻게 하면 60년만에 나름대로 굳건했던 방비체계가 허물어 졌는지 기가 찰 지경... 명성황후는 더했으니 놀랄 것도 없다
  31. 정만서와는 다른 인물이다!
  32. 그것도 작호만 박탈하자는 왕의 주장을 안동김씨가 무시하고!
  33. 그에 앞서 정조의 형인 의소세손이 사도세자가 죽기 전 일찍 죽었다.
  34. 이 와중에 홍봉한, 김시묵 등 탕평파들이 대거 삭출되었으나 이내 복귀했다.
  35. 홍국영의 야망에 너무 노골적으로 개입되어 있는 처지라 스스로도 언제 죽을지 몰라 전전긍긍했고 이에 아비 은언군이 자신이 죽을까봐 미리 선수를 쳐서 독살해버렸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36. 살아 생전엔 군호를 못 받았고 그의 삼남 철종이 왕이 되면서 군호를 받았다.
  37. 실제로는 한명 더 있다. 익평군 이희로 풍계군의 친자이자 상계군의 양자이다. 단, 이희는 상계군의 역모 그리고 풍계군 또한 은언군의 친자이나 은전군의 양자로 가서 역모와 관련이 있어 애초에 논의조차 되지 못하였다.
  38. 피로 이어진 왕족 자체가 거의 없는데 흔적이 있을리가...
  39. 애초에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왕실 자손이 귀해진다. 이런 카당에 마구 죽일수가 없다.
  40. 다시 말하지만 일본사학계에서는 조선의 양반계급을 일본의 후지와라 가문같은 봉건귀족이나 고대 로마의 봉건귀족으로 보았다.
  41. 순조, 헌종 조에 권세를 누린 세도가문. 다른 가문들과의 연대를 꾀한 김조순의 뜻에 의해 우대받았으나 동시기의 최종보스인 안동 김씨와 안동 김씨 급은 아니지만 크게 득세했던 풍양 조씨에 밀려서 듣보잡 취급이다.
  42. 정순왕후 김씨, 김한구, 김귀주, 김관주, 김일주 등으로 대표되는 강력한 외척. 라이벌인 풍산 홍씨나 후의 안동 김씨만큼 떵떵거리진 못했지만 실력자들이 널렸있는 강력한 가문이었고 풍산 홍씨와의 일전을 벌여 몇번 이기기도 했으나 영조에게 밉보여서 숙청된 이후에 홍인한에게 밀려났고 정조의 즉위를 도왔으나 척신을 우려한 정조에 의해 숙청당했다. 순조 즉위 후에 생존한 김관주 등이 정승을 했으나 정순왕후 김씨 사후에 다시 나가리되었다.
  43. 홍봉한, 홍인한, 홍국영으로 대표되는 영조 말~정조 극초반의 세도가문. 홍봉한의 권세는 영조 47년 즈음에 무너졌고 그 뒤를 홍인한-정후겸 콤비가 영조가 죽는 순간까지 유지했으나 정조에 의해 숙청당했고 정조의 측근 홍국영이 득세했으나 무리수를 두다가 개발살난다.
  44.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순조, 헌종 때에 빛을 본 세도 가문 중 하나다. 근데 안동 김씨, 풍양 조씨의 위엄에 눌려서 듣보잡 취급. 대구 서씨보다도 강했던 반남 박씨도 듣보잡 취급인데 뭘
  45. 유명한 명성황후의 친정. 고종조의 세도 정치를 주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