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px | ||||
역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 ||||
히딩크호 (2001 ~ 2002) | → | 코엘류호 (2003 ~ 2004) | → | 본프레레호 (2004 ~ 2005) |
역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 ||||
거스 히딩크 (2001~2002) 김호곤 (2002 / 감독대행) | → | 움베르투 코엘류 (2003 ~ 2004) 박성화 (2004 / 감독대행) | → | 조 본프레레 (2004 ~ 2005) |
움베르투 마누엘 데 제주스 코엘류 (Humberto Manuel de Jesus Coelho) | ||
출생 | 1950년 4월 20일 포르투갈 포르투 시 세도페이타 | |
국적 | 포르투갈 | |
신체 | 185cm | |
포지션 | 중앙 수비수 | |
소속 | 선수 | 라말덴세 (1964-1966) SL 벤피카 (1966-1975) 파리 생제르맹 FC (1975-1977) 라스 베이거스 퀵실버스 (1977) SL 벤피카 (1977-1984) |
감독 | SC 브라가 (1985-1986) SC 살게이로스 (1986) 포르투갈 대표팀 (1997-2000) 모로코 대표팀 (2000-2002) 대한민국 대표팀 (2003-2004) 알 샤바브 FC (2005-2006) 튀니지 대표팀 (2008-2009) | |
스탭 | 포르투갈축구협회 디렉터 (2015-현재) | |
국가 대표 | 64경기, 7골 (포르투갈) |
1 개요
포르투갈의 전 축구선수, 전 축구 감독.
2003년부터 2004년까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2 선수 시절
선수시절 포지션은 중앙 수비수. 홍명보처럼 리베로 역할을 맡으며 공격에도 가담해 포르투갈의 프란츠 베켄바워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리더십도 상당해서 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완장을 차기도 했는데 그의 전임 주장이 바로 에우제비우였다.
그러나 선수로서 세계적인 인지도는 떨어졌는데, 이는 그가 국가대표로 활약하던 시기가 포르투갈의 암흑기였기 때문. 1966년 월드컵 반짝 3위 이후 20년 동안 월드컵 본선무대도 밟아보지 못했고 심지어 유로컵조차 예선통과를 못 하던 시기가 정확히 코엘류가 국가대표로 활약하던 시기와 겹친다(...).
SL 벤피카 소속으로만 360경기에 출전한 레전드이고, 잠시 파리 생제르맹 FC와 미국 NASL의 라스베가스 퀵실버스 유니폼을 입기도 했다. 여담으로 라스베가스 시절 팀 동료들이 굉장했는데 펠레와 에우제비우였다. ㅎㄷㄷ[1]
1984년에 SL 벤피카에서 마지막 경기를 치르고 은퇴했다. 프로 통산 424경기 60골, A매치 통산 64경기 6골을 기록했다.
3 지도자 시절
포르투갈 대표팀 감독 시절 [2] | 대한민국 대표팀 감독 시절 |
3.1 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포르투갈 감독직을 맡을 때까지만 해도 지도자로서는 이력이 일천하다는 비판이 있었으나 루이스 피구와 후이 코스타를 필두로 한 이른바 골든 제너레이션의 개인능력을 극대화하는 전술로 팀을 착실하게 만들어 나갔다.
1998 FIFA 월드컵 예선에서는 독일에게 지지 않는 저력을 보여줬으나 우크라이나에게 발목이 잡히며 승점 1점 차이로 예선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유로 2000 예선에서는 루마니아에게 1패를 당하며 조2위로 밀리긴 했으나, 기존의 루이스 피구, 후이 코스타, 주앙 핀투 등에 더하여 시망 사브로자, 세르지우 콘세이상, 아벨 사비에르, 파울레타 등이 팀의 주축으로 기용되면서 전 포지션에 구멍이 없는 팀이 완성되었다. 누누 고메스, 베투 등 젊은 자원들이 발탁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유로 2000 본선에서는 독일, 잉글랜드, 루마니아와 A조에 배정받게 되었다. 당시 중론은 전통의 강호 두 팀과 다크호스 두 팀이 한 조에 묶여 죽음의 조라고 부르면서도 당시만 해도 유럽축구의 변방으로 취급받던 포르투갈이 통과하기는 힘들 것이라는 평이 많았다.[3]
그러나 이러한 평가가 무색하게 포르투갈은 첫 경기부터 A조 최강으로 꼽히던 잉글랜드에 3-2 역전승을 거둔다. 전반 초반 베컴의 크로스를 받은 폴 스콜스와 스티브 맥마나만에게 두 골을 연달아 내주며 역시 포르투갈은 안되나 싶었지만, 루이스 피구가 벼락같은 중거리슛을 성공시키며 분위기를 반전시켰고, 주앙 핀투와 누누 고메스가 각각 동점골과 역전골을 넣으며 명승부를 마무리지었다. 이 경기는 명승부답게 환상골이 속출한 경기로 유명한데, 피구의 중거리슛은 잉글랜드 골키퍼 데이비드 시먼이 꼼짝못하고 공만 쳐다본, 유로 2000 포르투갈 하면 항상 자료화면으로 나오는 그 유명한 골이다. 수비수 발에 맞고 굴절이 됐네 안됐네로 아직까지 의견이 분분하다. 주앙 핀투의 골은 수비를 끌어낸 피구가 우측에 빠져 있던 루이 코스타에게 준 공을 루이 코스타가 정확한 크로스를 올렸고, 이 공을 주앙 핀투가 니어 포스트 방향으로 다이빙 헤딩을 하며 파포스트에 공을 맞추며 득점한, 극한의 헤더 테크닉을 선보인 골이었다. 누누 고메스의 마무리골 역시 루이 코스타의 30미터짜리 전진패스가 만들어낸 작품.
2차전 상대는 예선에서 일격을 당한 바 있던 루마니아였는데 0-0 팽팽한 균형이 계속되던 중 후반전 교체 투입된 코스티냐[4]가 후반 49분에 아무도 기대치 않았던 골을 넣으며 극적으로 1-0 승리. 이미 2승으로 8강 진출이 확정되었으니 마지막 독일전은 설렁설렁 할 법도 한데 세르지우 콘세이상의 해트트릭을 앞세워 3-0 완승을 거두며 독일을 영혼까지 털어 버렸다. 진짜 무서운 건 8강전을 대비해 주전골키퍼 바이아를 비롯해 피구, 후이 코스타 등을 빼고 경기한 결과가 저거라는 거다. 이렇게 포르투갈은 3전 전승으로 8강에 진출한다.[5]
8강전에서 누누 고메스의 멀티골로 터키를 가볍게 2-0으로 제압하고 준결승에서 프랑스를 만나게 되는데, 고메스와 티에리 앙리가 한 골씩을 주고받은 상태에서 연장전 후반 말미에 사비에르가 페널티킥을 허용하고[6] 지네딘 지단이 깔끔하게 성공, 이게 골든골이 되면서 포르투갈의 이변은 준결승에서 마무리된다.
3.2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유로 4강의 업적을 세웠음에도 포르투갈 축구협회는 코엘류와의 계약을 갱신하지 않았고, 코엘류는 모로코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잠시 맡았다가 팀이 세네갈의 이변의 희생양이 되며 2002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하자[7] 다시 백수 신세가 된다.
그러다 거스 히딩크의 후임자를 물색하던 대한축구협회의 제안을 받아들여 2003년부터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게 되는데, 재미있는 사실은 대한축구협회가 감독직 후보로 마지막까지 코엘류와 저울질하던 상대방이 세네갈 감독으로 코엘류에게 아픔을 안겨줬던 브루노 메추 감독이었다는 것이다. 한편 계약기간은 1년 6개월, 즉 2004년 7월에 열리는 2004년 AFC 아시안컵까지였다.[8]
부산 아시아드 주 경기장에서 콜롬비아를 상대로 감독 데뷔전을 치렀다. 결과는 0-0 무승부. 이어 서울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린 한일전에서 비록 후반 막판 개그골을 허용하며 패하긴 했지만 일본을 상대로 유례없이 가둬놓고 패는 모습을 보였다. 두 경기 모두 내용면에선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수 개월 전 월드컵 4강에 진출했던 영광의 기억에 도취된 탓에, 중견 강호를 상대로 1무 1패의 성적을 받아든 코엘류를 두고 여론은 그리 미덥지 않았단 거다. 감독으로 겨우 2경기를 치뤘는데 벌써부터 미덥지 않다고? 문제는 앞서 말했지만 수 개월 전 4강의 기억에서 그 누구도 헤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감독으로서 코엘류도 첫 승을 고대할 수 밖에 없었고...
그해 5월, 일본 도쿄에서 치러진 한일전에서 후반전 교체 출장한 안정환의 결승골로 승리하며, 드디어 감독 부임 이후 첫 승을 신고했다.[9] 뒤이어 국내에서 벌어진 남미 강호와의 2연전...
첫 상대는 우루과이였다. 지금까지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우루과이를 상대로 승리해본 적이 없다. 우루과이가 저력있는 강호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 우루과이를 상대로 대표팀은 무차별 공세를 퍼부었다. 우루과이전 슈팅수는 17-7. 믿지 못하겠지만 대한민국이 17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애무축구는 이때도 빛을 발했다. 17-7의 압도적 슈팅수에도 불구하고, 0-2로 패배하고 만 것. 당시 스트라이커로 나섰던 최용수와 차두리는 적절한 찬스에서 적절하게 홈런(...)을 때려주었다. 이날 경기에서 데뷔한 것이 바로 조재진인데, 프랑스 월드컵 조별리그 네덜란드전에서 이동국이 선보였던 것과 비슷한 중거리포를 남기며 강한 인상을 남겼다. 당시 상무에서 뛰느라 짧은 머리로 간지를 뿜었던 것은 덤(...).
월드컵 4강 신화에서 헤어나지 못한 국민들은 자신보다 한 수 아래로 여긴 우루과이에게 홈에서 0-2로 패배한 사실을 놓고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성급하게 코엘류 경질론이 나올 지경이었다. 더구나 남미 강호 2연전의 다음 상대는 아르헨티나.망했어요
당시 분위기가 얼마나 초상집이었냐면, 4강 진출로 병역의무를 면제받고 기본군사훈련을 받느라 훈련소에 입소한 안정환을 잠시 훈련소에서 빼오기까지 하였다. 상상이나 가는가? 이등병도 아니고, 훈련병을 훈련소에서 상암으로 끌고 오다니... 물론 안그래도 AC 페루자에서 방출당한 뒤 J리그로 선회하며 기량이 주춤했던데다, 군사훈련까지 받았으니 도저히 필드에서 뛸 상태는 못됐다(...).[10]
그리고 치뤄진 아르헨티나전. 대한축구협회는 지난 경기에서 2골을 허용한 것을 수비불안으로 파악했다. 코엘류는 데뷔전부터 우루과이전까지, 포백 수비의 정착에 힘썼다. 문제는 홍명보의 존재로 인해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은 3백에 익숙한 상태였단 거다. 한동안 홍명보를 대표팀으로 부르지 않고 송종국 등 대체자들을 활용하며 3백, 4백을 다양하게 시험해왔던 전임 감독 거스 히딩크도 다시 홍명보 중심의 3백 수비로 복귀한 바 있었다. 국내리그를 파행까지 시켜가며 전폭적 지원을 받았던 히딩크마저 이럴진대, 코엘류가 월드컵 4강으로 높아진 기대 앞에서 단기간에 4백을 정착시키기는 불가능했다.
결국 아르헨티나전에서 대표팀은 다시금 전가의 보도를 꺼내든다. 바로 멀티플레이어 유상철 카드였다. 유상철을 중심으로 다시 3백으로 전환한 대표팀은 놀라울 만큼 끈끈한 수비력을 보여줬고, 비록 패배하기는 했으나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단 한 골만 내주며 경기 내용면에서도 나무랄 데 없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렇지만 여전히 국민들의 시선은 싸늘했다.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 모두 지난 월드컵에서 조별리그도 통과하지 못한 팀인데, 우리는 지난 대회 4강팀이니까. 현시창.
남미 2연전의 충격 탓이었는지, 한동안 대표팀은 흔한 친선전 없이 수 개월을 흘려 보냈다. 그리고 맞이한 AFC 아시안컵 예선전. 한국은 오만-베트남-네팔과 한 조로 묶였고 각각 1-0, 5-0, 16-0으로 대파하며 간만에 시원한 승리를 거두었다. 비록 아시아 약체팀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지만, 같은 해 3월 일본 원정에서 한 골 차 승리 이후 승리라는 것을 구경도 못해봤기에(...) 다시금 여론은 호의적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대형사고가 터졌다.
국내에서 3경기, 오만에서 3경기를 치루기로 합의하고 진행된 예선전이었기에 대표팀은 곧 오만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한국시간으로 새벽, 베트남에 0-1로 패배한다. 한국은 물론이고 FIFA조차도 경악한 참사가 벌어진 것이다. 이날 FIFA 홈페이지의 메인은 한국의 충격패로 장식되었다. 베트남전 패배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2차전인 오만과의 경기에서는 오만에게 1-3으로 역전패한다. 그리고 또다시 FIFA 홈페이지는 한국의 충격적 연패를 메인으로 다루었다(...). 이른바 오만 쇼크.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을 참조. 하지만 네팔을 7-0으로 이겨 아시안컵 본선에 간신히 진출한다.
이 기록적 대참사로 코엘류호는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경질여론이 드디어 수면 위로 부상했으나 아직 부임 1년 밖에 안된 점을 감안, 대한축구협회는 유임을 결정한다. 유례없는 참사와 감독의 경질론이 불거진 어수선한 상황에서, 그해 가을 대표팀은 유럽 강호와의 평가전을 계획한다. 본래 크로아티아와 상대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오만 쇼크의 충격 탓인지 그보다 한 수 아래인 불가리아로 평가전 상대가 결정되었다. 그리고 또 패했다. 안정환이 1:1 상황에서 때린 슈팅이 골포스트를 맞고 나가기도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한편 한중일 3국은 '동아시아축구연맹'의 창설을 합의했다. 그 결과물로 그해 12월 일본 도쿄에서 제1회 동아시아연맹컵이 개최되었다.
홍콩과의 1차전에서 대표팀은 홍콩에게 동점골을 얻어맞아 불안함이 되살아나는가 싶었지만 흔들리지 않고 침착하게 경기해서 3-1 낙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2차전 상대는 중국. 10여년 전 뜨거운 화제를 모은 을용타가 등장한 바로 그 경기였다. 전반부터 대표팀은 중국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마침내 후반 막판, 코너킥 경합 상황에서 주장 유상철의 헤딩이 골문 앞에 가로선 중국 수비수의 머리에 맞으며 들어가 결승골을 뽑아낸다. 그러나 후반전 들어 중국 선수와의 충돌로 이을용이 퇴장당하며 대표팀은 수적 열세에 빠진다. 그러나 중국은 수적 우위를 전혀 살리지 못했고, 안정환이 수비수를 여럿 제치며 때린 중거리슛이 중국의 골포스트를 맞고 흘러나오기도 했다. 후반 막판 경합상황에서, 중국측의 헤딩이 우리측 골라인에 아슬하게 걸렸다. 당연히 골라인에만 걸리고 말았으니 경기는 그대로 속개되었는데, 중국 선수들은 떼거지로 골세레머니를 하며 뛰어갔다.(...) 이렇게라도 하면 주심이 득점으로 인정해줄 것으로 여겼, 아니 우겼다고 밖엔... 당연히 주심은 휘슬을 불지 않았고, 볼을 잡은 이관우는 그대로 중국진영을 향해 돌진했다(...). 몇몇 제정신인 중국 수비들이 이관우에게 달려들었고, 이관우는 1:1 상황에서 중국 키퍼를 제치지 못하며 추가골을 넣지 못했다. 결국 경기는 1-0 승리로 마감.
마지막 3차전 경기는 홈팀 일본과의 한일전. 2003년에는 우연찮게도 일본과 3차례 한일전을 가졌다. 대표팀은 일본과 막상막하의 치열한 경기를 펼쳤다. 후반에 들어 대표팀은 호재를 맞는다. 일본의 공격수 오쿠보 요시토가 퇴장당한 것. 수적으로 앞선 대표팀은 일본을 거세게 몰아붙였다. 안정환이 상대 수비수와 골키퍼까지 따돌리며 텅 빈 골문을 향해 날린 크로스가 아쉽게 흘러나가기도 했다.[11] 결국 열 명이서 싸운 일본에게 승리를 거두지 못한 채, 경기는 무승부로 막을 내렸다. 3차례의 한일전에서 1승1무1패를 기록했고, 제 1회 동아시아 연맹컵에서는 2승1무로 우승을 차지했다. 코엘류호의 첫 국제대회 우승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여론은 싸늘했다. 앞서 수차례 언급했지만, 오만 쇼크에도 불구하고 작년에 이룩했던 4강신화의 기억은 잊기에는 너무도 가까운 영광의 과거였다. 그런 마당에 오만 쇼크는 물론이고, 수적우위에서 싸운 일본에게 승리를 거두지 못한 점은 국제대회 우승에도 불구하고 여론을 반전시키기엔 한참 부족했다.
해가 바뀐 2004년, 2006 FIFA 월드컵 독일 아시아지역 2차예선을 앞두고 대표팀은 오만과의 평가전을 마련한다. 앞서 치욕을 안겨준 오만에 대한 복수전의 의미도 있었다. 해외파가 총출동한 가운데 울산 문수구장에서 열린 평가전에서 대표팀은 오만이 자책골을 2골이나 넣는 등 5-0으로 모처럼 낙승을 거둬 오만 쇼크를 설욕했다. 그리고 이어진 레바논과의 월드컵 예선전에서 뜻 밖에 페널티킥의 위기를 맞지만 이운재의 선방과 곧 이어 차두리가 어깨슛으로 골을 넣고 후반전에는 설기현이 안정환과 부딪혀 광대뼈가 함몰되는 부상을 입어 또다시 위기를 맞은 상황에서도 작년에 불운한 실수를 범했던 조병국이 코너킥 상황에서 공격에 가담하여 헤딩으로 골을 추가하며 2-0으로 승리하며, 비록 아주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승리를 챙기며 순조로운 출발로 여론이 다시금 호의적으로 돌아서려던 찰나...
진짜 초대형 참극이 벌어졌다.
몰디브에서 열린 2006 FIFA 월드컵 독일 아시아지역 2차예선 원정전에서, 몰디브와 0:0으로 비기는 대참사가 일어났다.[12] 이날 경기는 국내파로 구성됐던 오만 쇼크와는 달리, 박지성과 차두리를 빼고 해외파도 총출동한 경기였다. 한국 현지는 물론이고, 세계가 놀란 대참사였다. 그리고 작년에 이어 세 번째로 대한민국은 FIFA 홈페이지 메인을 장식했다(...). 여론은 부글부글 끓다 못해 폭발해버렸고, 결국 코엘류는 자진사퇴 형식으로 경질되었다.
대표팀 부임초기 코엘류는 홍명보가 은퇴한 수비라인을 포백으로 변화를 꾀했고, 패스와 테크닉 위주의 전술을 표방했다. 당시 유행하던 일명 '크리스마스트리 전술'이라는 4-3-2-1전술을 썼고 당시 한국으로는 파격적으로 맨 앞선의 1에 안정환을, 2에는 박지성, 이천수를 배치하기도 하는 등 한국이 그동안 금과옥조처럼 지켜오던 '떡대되는 타겟 스트라이커'를 버리고 기술적인 공격진으로 청사진을 그리기도 했다. [13] 이관우가 중용된 것도 바로 코엘류 시절의 일이다.[14] 조재진, 조병국, 김두현, 김동진, 정경호, 최성국 등 젊은 선수들을 과감히 발탁하면서 2002년 한일 월드컵 이후의 국대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하였다.[15]
그러나 국민들은 그에게 히딩크를 기대했지만 여러모로 히딩크와 코엘류가 놓인 처지는 판이하게 달랐다. 일단, 코엘류 본인부터가 히딩크와는 정반대로 자율적, 방임적 팀운영을 추구하는 스타일이었다. 황금세대를 이끌었던 포르투갈에서는 이게 선수들의 개인기량을 극대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지만, 4강 신화의 뽕 단맛에서 아직 깨지 못한 한국에서는 이게 독이 되었다. 또한 월드컵 개최라는 초유의 이벤트를 위해 K리그를 포함한 한국축구 전체가 국가대표팀를 위해 희생했던 히딩크호 때와는 달리, 월드컵 이후에는 K리그 구단들도 무조건적인 희생을 수인하지 않았고, FIFA의 차출규정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며 축구협회의 차출을 거부하기도 했다. 코엘류가 한국을 떠나면서 남긴 "14개월 동안 실제 훈련장에서 훈련한 시간이 72시간에 불과하다."는 말이 이러한 국가대표팀과 K리그의 갈등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또한 박성화, 최강희 당시 코치도 도움은 커녕 감독의 말을 듣지 않는 등, 온갖 월권을 행사하면서 간섭하였는데 그 전말은 SBS 그것이 알고 싶다 프로그램에서 조셉 아우구스토 피지컬 트레이너가 증언하기도 하였다.
파일:WfCo6UG.jpg
게다가 오만 쇼크 당시 기술위원이 아무도 국가대표팀에 동행을 하지 않는 등, 대한축구협회의 지원도 히딩크 때에 비하면 부족했고 올림픽 축구의 중요성을 타국에 비해 높게 보는 한국의 풍토도 코엘류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축협은 한국문화에 대해 이해가 부족한 신임감독을 잘 지켜주지도 않았으며 02년 이후 기대가 너무 높아진 국민들은 평가전이나 중요하지 않은 경기도 무조건 승리, 그것도 압도적인 승리만을 원했다. 게다가 감독이 원하는 축구가 한국이 기존에 해오던 축구가 아니라서 국민들이 이해하기 어려웠던 점도 있다. 이래저래 악조건이 겹친 셈이다. 한국축구가 월드컵 4강 이후 후진적이었던 행태를 개선해나가는 과도기적 과정에 낀 감이 없지 않다.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성적이 좋았으면 경질까진 가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오만쇼크나 베트남에 진 걸 넘어가더라도 적어도 몰디브에 0:0으로 비긴 건 사실 그 어떤 변명의 여지가 없는 건 사실이다.
결국, 경질당한 코엘류는 이후 포르투갈에서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다가 잠시 알 샤바브, 튀니지에서 감독을 맡았었다. 알 샤바브 감독인 2006년에는 AFC 챔피언스리그에서 울산 현대와 만나 이천수와 최성국 등 한국 대표팀 시절 때의 제자와 재회했으나 이들의 활약에 의해 1차전 울산 원정에선 6-0으로 참패하고 2차전 홈경기에서도 1-0으로 지며 경질되었다. 이어서 튀니지 감독을 맡아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본선진출을 노려 나이지리아에게 지지 않으며 승점에서 2점이나 앞서며 월드컵 진출이 유력했으나 예선 마지막 경기인 모잠비크 원정에서 후반 38분 실점하여 예상치 못한 패배를 당하며 나이지리아에게 승점 1점 차이로 밀려 탈락해서 감독 자리에서 물러났다.
2024-11-03 06:35:16일 현재는 포르투갈 축구협회 디렉터로 소속중이다.
3.3 코엘류호 경기 결과
상대팀 | 경기결과 | 스코어 | 비고 |
콜롬비아 | 무 | 0 : 0 | 친선경기 |
일본 | 패 | 0 : 1 | 친선경기 |
일본 | 승 | 1 : 0 | 친선경기 |
우루과이 | 패 | 0 : 2 | 친선경기 |
아르헨티나 | 패 | 0 : 1 | 친선경기 |
베트남 | 승 | 5 : 0 | 2004년 AFC 아시안컵 2차예선 |
오만 | 승 | 1 : 0 | 2004년 AFC 아시안컵 2차예선 |
네팔 | 승 | 16 : 0 | 2004년 AFC 아시안컵 2차예선 |
베트남 | 패 | 0 : 1 | 2004년 AFC 아시안컵 2차예선 |
오만 | 패 | 1 : 3 | 2004년 AFC 아시안컵 2차예선 |
네팔 | 승 | 7 : 0 | 2004년 AFC 아시안컵 2차예선 |
불가리아 | 패 | 0 : 1 | 친선경기 |
홍콩 | 승 | 3 : 1 | 동아시아 연맹컵 |
중국 | 승 | 1 : 0 | 동아시아 연맹컵 |
일본 | 무 | 0 : 0 | 동아시아 연맹컵 |
오만 | 승 | 5 : 0 | 친선경기 |
레바논 | 승 | 2 : 0 | 2006 FIFA 월드컵 독일 아시아지역 2차예선 |
몰디브 | 무 | 0 : 0 | 2006 FIFA 월드컵 독일 아시아지역 2차예선 |
총 18전 9승 3무 6패
중견 이상팀과의 친선경기에서 승리는 일본전이 유일하다. 18번의 A매치 통틀어 단 3번만 무승부를 기록했는데, 문제는 그 중 하나가 몰디브와의 무승부였다.
4 기타
최근 모습 1 | 최근 모습 2 |
한국 감독 시절 갓 20세였던 딸의 미모가 화제가 된 바 있다. 한일전 때 서울 월드컵 경기장 관중석에서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응원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었는데, 이 때문에 한 때 국내 한정 코엘류의 호칭이 장인어른이었다.
선임 당시 통역 문제로 축구협회가 골머리를 앓았다. 원래는 영어를 잘한다는 정보가 있어서 그냥 별 문제없을거라 했는데 생각보다 영어 실력이 떨어졌던 것. (...)[16] 그래서 브라질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는 포르투갈어 통역관을 섭외했으나 코엘류 감독이 직접 통역관 후보들과 면담한 후 프랑스어 통역관이 기용되었다고. 실제로 코엘류 감독은 프랑스어를 영어보다 더 잘 구사했다.
오만 쇼크, 베트남 쇼크가 벌어진 이후에 공항에 토마토와 날계란 던지러 가자고 선동한 네티즌이 있었다. 그런데 이 네티즌은 스포츠조선 측의 기자였고, '축구협, 성난 네티즌들 '집단행동' 예고에 긴장'이라는 제하의 조작기사까지 작성했다. 해당 기자는 기사를 일부러 조작한 게 아니라고 변명했지만, 당시에도 악랄한 기레기들의 수작을 잘아는 네티즌들은 이를 믿지 않았고, 해당 기자는 결국 해고되었다.#
여담으로, 당시 팽배했던 안티 조선일보 분위기에 편승해 조선일보 계열사 사원을 보내버렸다고 희희낙락했는데... 정작 해당 기자는 노조 출신이었다. 이뭐병. 근데 어차피 노조자체가 프락치 취급을 받는지라 딱히 동정받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나중에 국가대표팀의 감독이 되었던 조광래는 이 당시 미친듯이 코엘류를 깠다. 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조광래 항목 참고.
유로 2016 결승전에서 시상식때 모습을 비췄다.#- ↑ 이 시절 월드클래스급 선수들에게 미국은 외도 또는 유람격으로 한두시즌쯤 다녀오는 것이 유행이었다. 코엘류가 미국에서 활약했던 시절 NASL 올스타 2진에 선발됐었는데, 1진 멤버가 펠레, 프란츠 베켄바워, 고든 뱅크스, 조지 베스트였으니 말 다한거다.
- ↑ 코엘류는 선수 시절부터 콧수염을 길렀다.
- ↑ 물론 2000년 시점에도 피구와 루이 코스타, 주앙 핀투 등은 월드 클래스 선수들로 분류되었기에 당시 포르투갈의 공격력만큼은 세계 수준이라는 평을 들었다. 하지만 지명도가 부족했던 선수들의 수준은 베일 속에 가려져 있었기에 당시 포르투갈은 A조 내에서는 잉글랜드, 독일 다음의 3순위 전력으로 평가받는 편이었다.
- ↑ 2006 월드컵 네덜란드와의 혈전에서 퇴장당하는 그 선수 맞다. 사실 후이 코스타를 빼고 홀딩 미드필더인 코스티냐를 넣은 교체 자체가 승점 1점만 챙기자는 의도가 강했다.
- ↑ 여담으로 독일은 이렇게 광탈하면서 녹슨 전차군단이라는 멸칭을 얻고, 에리히 리벡 감독이 물러나고 대신 루디 푈러 감독이 선임되면서 절치부심한 결과 2002 월드컵에서 준우승까지 기록한다. 역시 독일의 월드컵 DNA란... 참고로 이 때 같은 시각 잉글랜드도 루마니아에게 패하면서 숙적 둘이 같이 손잡고 광탈했다.
- ↑ 이 판정이 당시에도 엄청난 논란이었고 지금까지도 뒷얘기가 많다. 사비에르가 공으로 손을 쳐냈다기보다 공이 손에 와서 맞은 쪽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지단의 골로 경기가 끝난 후에도 포르투갈 선수들은 심판들을 둘러싸고 거세게 항의했고, 피구는 지단이 페널티킥을 차기 전부터 이미 분노하며 유니폼을 벗고 피치를 빠져나가기도 했다. 그리고 이 페널티킥을 지시한 주심이 바로 2년전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하석주를 퇴장시킨 귄터 벵쾨였다.
- ↑ 마지막 한 경기를 남겨놓고 7경기 무패로 잘나갔는데 최종전에서 세네갈에게 0-1로 뜬금패를 당하며 승점은 동률, 골득실에서 뒤지며 세네갈에 밀려 탈락한다.
- ↑ 하지만 코엘류 본인은 나중에 "나는 한국이 좋고 더 머무르고 싶다."라면서 2006년 독일 월드컵까지 지휘봉을 잡겠다는 속마음을 드러냈다.
- ↑ 이 당시 일본은 유효슈팅을 단 1개만 기록했다. 모든 슈팅을 합쳐도 겨우 3개.
- ↑ 실제로 안정환은 이날 경기에서 대기만 했을 뿐 출전하진 않았다. 가끔 중계화면으로 짧게 머리를 민 안정환이 비칠 때마다, 관중석에선 환호성이 울렸다.
- ↑ 이때 빈 골문을 향해 정경호가 몸을 날렸는데, 정작 공은 정경호의 머리에 맞지 않고 그대로 흘러나가고 정경호의 몸만 골망을 갈랐다(...). 당시 중계를 하던 송재익의 해설이 일품이었다. "아! 머리가 조금만 더 컸더라면...!"
정경호는 머리가 큰 편이다. - ↑ 이 경기가 한국 시각으로 3월 31일 밤에 있었는데, 다음날 아침에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만우절 농담을 해도 말이 되게 하라"며(...) 안 믿는 사태가 왕왕 벌어졌다 카더라. 그만큼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 ↑ 결과적으론 결국 최용수, 설기현, 조재진 등 타겟스트라이커로 회귀하긴 했다.
- ↑ 불운하게도 이관우는 오만쇼크와 몰디브 참사에 모두 출장했다(...).
- ↑ 참고로 이 당시 기회를 얻었던 젊은 선수들 중 상당수가 이후 2000년대 중후반 국가대표팀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선수가 되었다. 다만 이 선수들이 2002년 월드컵 선배들을 뛰어넘지 못해 그대로 묻힌 것이 다소 아쉬운 부분. 축구계에서는 소위 골짜기 세대라고 부른다고 카더라...
- ↑ 포르투갈어권, 스페인어권 사람들의 평균적인 영어실력은 언어학적 유사성 덕분에 맘먹고 익히고자 하면 다른 언어 사용자들보다 쉽게 익힐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해도 생각보다 썩 좋은 편이 아니다. 영어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