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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C 바르셀로나 앰배서더 | |
호나우두 지아시스 모레이라[1] (Ronaldo de Assis Moreira) | |
별명 | 호나우지뉴 가우슈 (Ronaldinho Gaúcho) |
생년월일 | 1980년 3월 21일 |
국적 | 브라질(Brazil) |
출생지 | 히우그란지두술 주 포르투알레그리(Porto Alegre) |
신체 조건 | 180cm, 76kg[2], A형 |
포지션 | 윙어, 공격형 미드필더 |
클럽 경력(1994 - ) | 그레미우(1999 - 2001) 파리 생제르맹 FC(2001 - 2003) FC 바르셀로나(2003 - 2008) AC 밀란(2008 - 2011) 플라멩구(2010 - 2012) 아틀레치쿠 미네이루(2012 - 2014) 케레타로 FC(2014 - 2015) 플루미넨시 FC(2015) |
스태프 | FC 바르셀로나 앰버서더(2016~) |
국가 대표팀 경력(1997 - 2010) | 브라질 U-17(1997) 브라질 U-20(1999) 브라질 U-23(1999 - 2008) 브라질(1999 - ) 97경기 33골 |
2005 FIFPro World XI | |||||||||||
FW 안드리 셰브첸코 | FW 사무엘 에투 | ||||||||||
MF 프랭크 램파드 | MF 클로드 마켈렐레 | MF 지네딘 지단 | MF 호나우지뉴 | ||||||||
DF 파올로 말디니 | DF 알레산드로 네스타 | DF 존 테리 | DF 카푸 | ||||||||
GK 디다 | |||||||||||
2006 FIFPro World XI | |||||||||||
FW 호나우지뉴 | FW 티에리 앙리 | FW 사무엘 에투 | |||||||||
MF 카카 | MF 지네딘 지단 | MF 안드레아 피를로 | |||||||||
DF 잔루카 참브로타 | DF 존 테리 | DF 파비오 칸나바로 | DF 릴리앙 튀랑 | ||||||||
GK 잔루이지 부폰 | |||||||||||
2007 FIFPro World XI | |||||||||||
FW 호나우지뉴 | FW 디디에 드록바 | FW 리오넬 메시 | |||||||||
MF 스티븐 제라드 | MF 카카 | MF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 |||||||||
DF 카를레스 푸욜 | DF 존 테리 | DF 파비오 칸나바로 | DF 알레산드로 네스타 | ||||||||
GK 잔루이지 부폰 |
2004 FIFA 올해의 선수상 | ||
수상 호나우지뉴 | 2위 티에리 앙리 | 3위 안드리 셰브첸코 |
2005 FIFA 올해의 선수상 | ||
수상 호나우지뉴 | 2위 프랭크 램파드 | 3위 사무엘 에투 |
2006 FIFA 올해의 선수상 | ||
수상 파비오 칸나바로 | 2위 지네딘 지단 | 3위 호나우지뉴 |
2004 Ballond'or | ||
수상 안드리 셰브첸코 | 2위 데쿠 | 3위 호나우지뉴 |
2005 Ballond'or | ||
수상 호나우지뉴 | 2위 프랭크 램파드 | 3위 스티븐 제라드 |
2006 UEFA 올해의 클럽 축구 선수 | ||
호나우지뉴 |
외계인
짧고 굵은 전성기의 대명사
역사상 가장 화려했던 드리블러
과거 클럽의 부활을 이끈 과거의 선수에서 8년만에 앰버서더로 돌아온 바르셀로나의 레전드 선수
축구에서 자기관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주는 선수[3]
목차
1 개요
2~3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 누구보다 화려하고 폭발적인 전성기를 보여준 선수다. 발롱도르(2005년)·FIFA 올해의 선수(2004·2005년)·UEFA 올해의 선수(2006년)를 연속수상 할 때가 압권이었다. 원래부터 화려했던 그의 플레이 스타일이 가장 폭발적인 시즌이었다.
별명인 Ronaldinho는 한국말로 풀이하자면 작은 호나우두. 많이들 알지만 본명은 호나우두 지 아시스 모레이라(Ronaldo de Assis Moreira)로 호나우두다.
다만, 선배 중에 호나우두가 있기 때문에 작은 호나우두라는 의미의 호나우지뉴로 불리게 된 것[4]. 여담으로 과거 국내에서는 "호나우딩요"라고들 많이 불렀지만, "-dinho"는 딩요보단 지뉴(ˈdʒĩɲu)가 더 원어에 가깝기 때문에 언론매체에서 호나우지뉴라 부르기 시작하면서 이쪽이 정착되었다.[5]
다만 줄여서 부를 때는 "지뉴"라고 부르면 페르난지뉴와 겹쳐서 그런지 여전히 "딩요"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다. 예를 들어, 호나우지뉴와 닮은 외모를 한 더 지니어스:블랙 가넷의 참가자 최연승의 별명이 딩요갓.
브라질 내에서는 호나우지뉴 가우쵸(Ronaldinho Gaúcho)로 불린다. 유럽 진출 이후로는 마케팅 차원에서 가우쵸라는 부분을 뺐으나, 브라질 복귀 이후 자국민에게 친근한 별명인 가우쵸를 다시 살렸다. 페이스북 및 트위터의 표기 역시 Ronaldinho Gaúcho를 사용중이다.
2 활동
2.1 유소년 ~ 데뷔 이후
브라질의 포르투 알레그레라는 곳에서 태어났는데[6] 8살때 갑자기 아버지가 운명했다. 여타 브라질의 축구선수들처럼 가난을 벗어나기위해 공을 찼겠구나싶지만, 호나우지뉴의 형인 호베르투가 프로 팀인 그레미우와 계약한 덕분에 부유한 어린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다만 형은 부상때문에 일찍 선수생활을 접고 지금은 호나우지뉴의 에이전트로 활동중.
처음 축구선수로서 알려진 것은 13세 때 지역팀과의 경기에서 23골을 넣은 것이 언론에 보도되면서이다. 이후 자기 형이 계약했던 그레미우와 계약해서 어린 나이임에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고, 1997년 U-17 대회에서 세계에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2.2 전성기
2.2.1 파리 생제르망
유럽침공의 시작.
이후 프랑스의 명문클럽인 파리 셍제르망으로 이적하는데, 개인기가 뛰어난 브라질 선수들 사이에서도 한결 화려한 묘기 수준의 개인기를 매 경기마다 보여주면서 브라질 국가대표팀에 발탁된다. [7]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에도 브라질 대표로 참가하여 대회 내내 호나우두 - 히바우두 투톱의 밑을 받치면서 브라질의 3R(Ronaldo, Rivaldo, Ronaldinho)로 불리게 된다. 잉글랜드와의 8강전에서는 수비진을 농락하며 동점골 어시스트, 프리킥골, 게다가 퇴장까지 당하는 원맨쇼를 펼치며 브라질의 우승에 빼놓을 수 없는 공헌을 한다.그리고 동시에 그 경기에서 가린샤 클럽의 명예로운 5번째 회원이 된다.
월드컵 이후 인지도와 몸값이 확 높아졌지만, 정작 소속팀인 PSG에서는 감독과의 불화로 인해 출전기회가 줄어드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실력만큼은 레알이라서 유럽 유수의 명문클럽이 노리게 된다. 그리고 2003년 여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영입의사를 밝혀 맨유로의 이적에 99%의 진척률을 보였지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보드진의 병크로 무산되고 만다.[8] 결국 02/03시즌 최악의 부진으로 회장과 감독이 바뀐 FC 바르셀로나가 그를 영입하게 된다.
왜 호나우지뉴가 스페인을 택했냐면, 당시까지만 해도 주니뉴 파울리스타가 미들즈브러 FC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것 외에 많은 브라질 선수들이 잉글랜드에서 환경과 문화적인 차이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일찌감치 떠난 것에 비해 바르사는 이미 호마리우, 호나우두, 히바우두 등의 브라질 스타들이 터를 잡아 놓았기 때문에 더 안전한 선택이라 할 수 있겠다.
2.2.2 FC 바르셀로나
외계인의 탄생 이 놈에게 중력이란게 뭘까
사실 바르사가 호나우지뉴를 영입한 것은 엄청난 모험이었다. 당시 호나우지뉴의 이적료는 막대한 빚을 지고 있던 바르사가 여유 자금을 모두 써야 하는 2,500만 유로였다. 성과에 따른 옵션에 포함된 금액이나 호나우지뉴에게 조항에 충족된 성과를 올리기에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기에 바르사는 흔쾌히 300만 유로를 추가로 냈다. 호나우지뉴는 맨유가 제시한 그 큰 금액을 마다했고, 바르사는 팀의 명운을 걸고 빚을 냈다. 그러나 둘의 도박은 성공을 거두었다. 호나우지뉴는 그 돈보다 많은 것을 바르사에 헌신하며 자신도 역대 최고의 선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이렇게 바르사가 추구한 아름다우며 승리하는 축구는 호나우지뉴로 인해 부활하는 한 계기가 된 것이다.
FC 바르셀로나에서의 첫 시즌인 03/04시즌 초반에는 전년도의 부진으로 인해 팀 자체가 틀이 안잡혀서 본인의 활약도 그저 그랬지만, 후반기에 4-3-3포메이션을 가동하면서 3톱의 왼쪽 윙포워드로 기용되면서 후반기 엄청난 연승의 주역으로 활약하고, 본격적으로 세계 최고의 플레이어로 자리매김한다. 이때 그는 22골 14개 도움을 기록했다.
04/05시즌 본인의 활약도 정점에 오르고, 여름에 영입한 사무엘 에투, 데쿠같은 선수들의 플레이에 힘입어 팀은 99년 이후 6년만에 프리메라 리가 우승컵을 들어올리게 되었다.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당시 주제 무리뉴 감독의 지휘 하에 최강을 자랑하던 첼시와 16강에서 맞닥뜨렸는데,[9] 2차전 스탬포드 브릿지에서 수비진과 체흐 골키퍼가 그저 바라만 볼 수 밖에 없었던 대단한 골을 넣기도 했다.
페트르 체흐의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보자
전설의 궁둥이 씰룩씰룩 골 쌈바~~
하지만 팀이 패배해서 16강 탈락. 2005년에는 유럽 최고 플레이어에게 수여하는 발롱도르를 받기도 했다. 이 시즌에 그는 9골 16도움을 기록했다.
05/06시즌에 호나우지뉴와 아이들은 빛을 발했다. 2005년 11월 19일에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를 메운 7만여명의 마드리다스타들의 박수를 받으며 엘 클라시코에서 혼자 2골을 기록하여 팀을 3-0 승리로 이끌어냈고, 2006년 4월 1일에 열린 안방에서의 엘 클라시코까지 5경기 연속골, 6경기 모두에서 공격 포인트를 올리면서 또다시 프리메라 리가 우승을 차지했다. 엘 클라시코의 영웅이 세계 축구의 영웅으로 등극하는 수순을 밟은 순간이었다.
한편 UEFA 챔피언스 리그 16강에서 공교롭게 또다시 무리뉴의 첼시와 만나게 되었는데, 이번엔 FC 바르셀로나가 복수에 성공하면서 8강 진출[10] 8강에서 벤피카, 4강에서 AC 밀란[11], 결승에서 아스날 FC를 차례차례 꺾고 92년 이후 첫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FC 바르셀로나에 안긴다.
2000년대 최강의 팀 중 하나인 AC 밀란 원정에서 젠나로 가투소와 안드레아 피를로를 농락하는 호나우지뉴 하지만 또다른 외계인이 그를 막아서는데...
한창 잘 나갈 때 그의 포스는 대략 이정도(...)
이 세 시즌 동안 호나우지뉴의 플레이는 실로 대단했는데, 묘기 수준의 개인기를 매 경기 보여주면서도 자기 중심적 플레이가 아닌 팀에 보탬이 되는 플레이를 하여[12] 세계인의 뇌리에 강렬하게 자리 잡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레알 마드리드와의 클래식 더비에서, 하프 라인부터 치고 나가 레알 수비수들을 캐관광시킨 골을 두 번이나 작렬한 것.[13] 오죽하면 레알 홈 관중들조차 허탈한 표정으로 기립박수를 쳐줄 정도였다. 이 기립박수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하나는 굉장히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준 레알 마드리드 선수들에게 보내는 "야, 레알 마드리드! 너네 X신같이 그렇게밖에 못하냐?"라고 조소가 담긴 박수와 다른 하나는 상대 선수의 플레이에 경탄을 담아 보내는 박수.
흔히 호나우지뉴를 개인기는 화려하나 가볍고 이기적인 플레이를 하는 전형적인 기술중심의 남미형 선수라 착각하기 쉬운데, 유튜브에 즐비한 스페셜 영상들만 봐도 이 것이 잘못된 생각이란 걸 알 수 있다. 역습 과정에서 간결한 최소한의 터치로 수비수들을 벗겨내는 스피드, 수비수 서너 명이 달라붙어 밀쳐도 공을 지키면서 버텨내는 피지컬을 가진 선수였다. 공격수로는 크지 않은 182~3cm의 신장으로도 자신보다 훨씬 큰 180대 후반의 수비수 두세 명과 격렬하게 부대끼면서도 밀리지 않았다.[14] 오죽하면 쓰러진 선수가 발을 붙잡아야만 움직임을 멈출 수 있었을 정도다. 또한 힐패스와 페이크패스 등은 자신에게 달라붙은 수비수들의 태클을 피하면서도 필드 전체를 읽고 있다는 엄청난 집중력과 축구지능의 증거이다. 몸의 움직임을 최소화하면서 수비수를 피해 동료에게 볼을 배달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는 것이다. 즉, 이 시기의 호나우지뉴는 개인기와 드리블, 스피드, 피지컬, 패싱, 세트피스, 슈팅 등 공격에 필요한 모든 옵션을 보유하고 제공하며, 감독의 전술폭은 물론 동료들의 움직임까지 활성화시키던 먼치킨이었다.
당시 인간 같지 않은 실력과 독특한 외모[15] 덕분에 붙은 별명이 바로 외계인. 절정의 기량에 달한 호나우지뉴에 대한 브라질 국민들의 사랑과 기대감은 대단해서 고향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졌을 정도였다.
특히 이런 기대가 정점에 달한 시기가 2006 독일 월드컵이었는데 당시 에이스 호나우지뉴에, 아직 골감각만은 여전한 호나우두, 브라질에서 보기 힘들었던 강렬한 파워의 스트라이커 아드리아누에 엄친아 카카까지 브라질 공격진의 네임밸류는 정말 엄청났다. 소위 판타스틱4, 천상의 4중주(...)라고 불렸을 정도니. 이에 많은 사람들 특히 브라질 국민들은 자국의 우승을 거의 반쯤 확신하고 있었는데, 문젠 여기서 에이스였던 호나우지뉴가 바뀐 포지션에 적응하지 못하고 예상외로 부진. 결국 8강에서 지네딘 지단이 이끄는 늙은 수탉프랑스에게 덜미를 잡히면서 탈락하고 만다.[16] 이에 분노한 군중들이 호나우지뉴의 고향에 세워진 동상을 불태우기도 했다.이쪽도 은근 냄비
여담이지만 전성기 때 외계인 모드였던 딩요도 사람인지라 꼭 막히는 수비수가 한 두명씩 있었다. 대표적으로 레알 마드리드의 주전/로테이션 센터백이였던 이반 엘게라, AC 밀란의 야프 스탐, 함부르크 SV의 칼리드 불라루즈[17][18]가 있었다. 이 중 스탐은 05-06 챔스 4강전에서 딩요를 말 그대로 꽁꽁 묶어버리며 경기장에서 지워버리는 맹활약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밀란은 결승 진출에 실패한다.[19]
2.3 몰락
파일:Attachment/호나우지뉴/3252161880916341571.jpg
한때 그의 가장 큰 강점이라고도 평가받던 완벽한 보디 밸런스의 변천사
나는 에당 아자르에게 자주 이렇게 얘기하곤 해. 호나우지뉴는 세계최고의 선수였어. 아마 역사상 최고의 선수라고 할 수 있을 거야. 다만, 그 선수는 매일매일 연습을 하는 선수가 아니었고 결국 그 대가는 혹독하게 치르게 되지. 네가 호나우지뉴 또는 메시라고 할지라도 연습을 게을리한다면, 2년 후에는 넌 잊혀지고 다른 신인이 너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거야.
- 사무엘 에투
15/16시즌의 아자르를 보면 소름끼치게 들어맞는다.
그러나 '호나우지뉴의 아이들'의 전성시대는 2년만에 끝났다. 라리가-수페르코파-챔스 3관왕으로 정점을 찍던 05/06시즌 막판과 2006 독일 월드컵에서의 호나우지뉴의 플레이는 예전에 비해 상당히 정적으로 변모하고 화려한 드리블보다는 킬패스만 노리는 모습을 보여주어[20][21] FC 바르셀로나팬들에게 일말의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워낙 외계인인지라 일시적인 컨디션 저하겠거니……했지만 아니었다. 06/07시즌에 이르러 FC 바르셀로나는 여전히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골잡이 사무엘 에투의 장기부상으로 인하여 팀은 삐걱거리기 시작했고, 호나우지뉴는 팀에서 요구하는 다이나믹함을 점점 잃어가며[22] 챔피언스 리그에서 16강 탈락. 프리메라 리가에서도 막판에 레알 마드리드에게 역전 당하면서 준우승에 머물고 만다.[23]
07/08 시즌부터는 본격적으로 막장의 길로 들어선다. 호나우지뉴는 팀 전체 훈련에 1년 동안 단 한번도 나오지 않으면서 나이트 클럽 죽돌이가 되어간다. 늘어나는 뱃살에 움직임은 둔해지고, 게다가 자율적인 분위기를 추구하던 감독인 레이카르트는 이러한 호나우지뉴에 대해 통제를 가하지 못하여 이는 결국 호나우지뉴-에투 간의 갈등, 더 나아가 호나우지뉴와 타 선수간의 감정 간극을 낳으면서 점점 수렁으로 빠져들어갔다[24]. 팀 또한 사무엘 에투의 부상재발과 다른 선수들의 부진으로 이제 갓 20살인 리오넬 메시가 팀을 떠받들다시피 하는 안습한 상황에 이르게 된다.[25] 결정적으로 2007년 12월 23일에 당초 훈련 불성실로 인해 제외되었던 그가 데쿠와 함께 다른 선수들을 제치고 복귀한 엘 클라시코에서 레알 마드리드에게 0-1로 진 게 독이 되어 라 리가에서는 3위로 밀려나고,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그래도 4강까지 오르지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패배. 사실상 후반기에는 그는 팀의 전력에서 완전 제외된 상황이었고 저 성과도 거의 메시 혼자 이뤄낸거라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특히 2008년 5월에 레이카르트가 경질되었던 레알 마드리드 원정에서 1-4 참패를 당한 바르사는 내리 2년을 레알 마드리드에게 타이틀을 내주었다. 바르사를 지지하는 스포츠 신문 <문도 데포르티보>는 헤드라인으로 "창피하다!"라고 내걸었고, <스포르트> 역시 "당신들은 바르사 유니폼을 입을 자격이 없다!"라는 문구를 어떠한 사진 없이 검은 배경에 배치한 1면에 내보내며 극도의 실망을 표했다. 그리고 시즌 이후 실력과 인기 모두를 잃어버린 그를 FC 바르셀로나가 더이상 안고 갈 이유도 의사도 없었던지라 결국 이적시장에 나오게 된다.
바르셀로나 전 부회장이 밝힌 내막에 따르면 호나우지뉴를 내보낸데에는 또다른 이유가 있었는데, 그가 메시에게 악영향을 줄까봐여서 였다고 한다. 예전만 해도 바르샤는 메시를 그냥 재능쩌는 유망주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으나 챔스전 등에서 그가 보통 재능의 소유자가 아님을 알아본 이후부터 식단, 행동습관, 심지어 잠자는 시간까지 몽땅다 계획을 세워주고 따르게 할 정도로 투자를 그에게 몰빵하여 말그대로 축구기계 육성 프로젝트를 가동시켰다. 그러나 팀에서 그렇게 공들여 기르던 메시는, 태업을 일삼으며 클럽과 마찰을 빚던 호나우지뉴를 매우 따르고 있었고 지뉴와 그당시 지적받던 선수들도 막내였던 메시를 무척 아껴서 어딜가든 데리고다니며 거의 가족처럼 대해줬다.
또 호나우지뉴가 몰락한 데에는 개인사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 바르사 입단 초기에 그는 여동생인 데이지, 어머니 미겔리나와 함께 바르셀로나에 살며 축구에 집중했었다. 문제는 여동생인 데이지가 지역 라이벌인 RCD 에스파뇰 선수 에두아르두 코스타와 교제하면서부터 비극이 시작되었다. 이후 데이지는 코스타가 PSG로 이적하자 그를 따라 프랑스로 건너가면서 이에 외로움을 호소하던 어머니까지 고국인 브라질로 돌아갔다. 이미 호나우지뉴 본인은 바르셀로나 생활에 성공적으로 정착했기 때문에 걱정이 없었지만 홀로 남은 집에서 호나우지뉴는 끝없는 외로움을 느꼈고, 성공의 향취와 더불어 자기 관리에 소홀해져 음주가무에 빠진 채 데쿠와 더불어 바르셀로나에서의 밤문화를 즐기게 된 것이다.
그리고 바르샤는 호나우지뉴의 방탕한 사생활이 그 자신의 플레이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 역시 좋지 않게 봤지만 클럽의 기대를 한몸에 받던 메시가 그에게 물들까봐 더 걱정했다고 한다.[26] 특히 어릴 때부터 아르헨티나인 특유의 육류식단을 좋아하는 성향이 있던 메시가 밤문화까지 배우고 자제력을 잃기 시작하면 어쩌나하는 염려가 컸다고... 팀 내부에선 호나우지뉴를 내보내지 않으면 선수단 분위기는 물론 결국엔 메시까지도 지금의 자제력을 잃고 망가질 것이란 목소리가 커져갔고 메시가 기대대로 07/08시즌 혼자서 팀을 떠맡는 역할까지 완벽하게 소화해낼 정도로 성장하자 결국 바르샤는 그들의 미래를 하락세의 에이스 지뉴가 아닌 어린 메시에게 걸기로 결정하여 그를 올바른 에이스로 길러내기 위해 호나우지뉴와 기타 선수들을 내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리오넬 메시의 데뷔골을 어시스트하는 호나우지뉴, 바르셀로나의 에이스가 교체되는 상징적인 순간이다.
2.4 AC 밀란
가치가 추락한 호나우지뉴였기에 이적이 될까 싶었지만 다 쓴 선수 비싸게 매입하는 AC 밀란에서 그의 영입을 추진하여 성사. 베를루스코니는 그를 여전히 캄피오네라면서 영입했다지만, 08/09 시즌의 호나우지뉴는 부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나마 나이트는 좀 안가게 됐으니 다행(…). 아예 안 간건 아니다. 다만 바르셀로나에서 맨날 갔을 뿐.
2009년 여름, 레알 마드리드가 AC 밀란의 에이스였던 카카를 영입해갔고 호나우지뉴는 카카의 공백을 메꿔야 하는 중차대한 임무를 맡게 된다. 예전의 다이나믹함은 사라졌지만 살이 약간 빠지고, 볼키핑과 특유의 패스가 살아나주면서 밀란에 상당한 도움을 주었으며, 전성기에 보여주던 특유의 화려한 드리블 돌파도 간혹 보여주기도. 그 와중에 유벤투스전에서 2골을 넣더니 일주일 뒤인 시에나와의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하며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이후로도 그때 그 시절 보단 좋은 활약을 보여주고있지만, 국가대표와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 안습한 상황. 브라질 국가대표 前 감독 둥가는 "모든 선수들에게 기회는 열려 있다. 그러나 지금으로선 호나우지뉴는 나의 계획에 없다" 라고 발언했다.
산 시로에서 치루어진 2009/2010 챔피언스리그 16강 1차전에서는 선발로 나와서 맨유의 수비수 하파엘, 조니 에반스, 리오 퍼디난드를 혼자서 쳐발라버리고 1골 1어시를 올리는 그야말로 외계인의 복귀라 할 만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팀 전체적으로 경기력이 밀리며 맨유에게 3골을 내주며 패배했다. 스피드를 제외한 경기력이 엄청나게 돌아온 모습을 보이며 팬들에게 2차전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하기도 했지만 올드 트래포드에선 밀란 전체가 관광을 당하며 4-0으로 참패하고 말핬다.
참고로 위에서 언급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AC 밀란의 1, 2차전은, 특히나 그 중에서도 2차전은 안드레아 피를로가 박지성에게 문자 그대로 '지워졌던' 그 경기가 맞다.
그리고 2010년 남아공 월드컵 국대에도 끝내 뽑히지 않았는데 카카랑 포지션이 겹쳐서도 있지만 후보조차로도 못뽑히는 이유는 둥가 감독이 더 이상 브라질 특유의 화려한 개인기위주 중심에서 벗어날려는 의도[27]에있다. 덕분에 다른나라 축구팬들에겐 욕만 먹는다. 재미없다고. 유벤투스와 함께 부진한 지에구도 그 이유가 더 커서 뽑히지 못하였다.
2010 챔피언스리그에서 탈락하고 브라질 대통령이 브라질 국대에는 호나우지뉴가 필요하지 않다라고 발언하는 바람에 의욕을 상실할 것을 우려한 일부 팬들이 있었으나, 이후 벌어진 키에보 베로나전에서 지쳐쓰러질 때까지 뛰는 모습을 보여주어 팬들을 훈훈하게 했다.
그리고 10-11시즌 개막전, 그야말로 날아다니면서 팀의 4-0 대승을 이끌었다. 체중도 전성기적과 1kg 정도 밖에 차이나지 않고 세리에 A 어시왕을 찍었던 09-10시즌보다 드리블이 민첩해지고 활동량도 늘어났다...허나, 다시 폼이 떨어지며(...) 벤치만 달구다가, 안토니오 카사노의 영입이 확정되면서 친정팀인 브라질 리그 그레미우로 돌아가는 것에 합의했다가 막판 플라맹구의 기적의 협상개입으로 인해 플라맹구로 이적하는 것에 합의했다고 한다. 결코 짧지 않았던 이 30살의 축구 선수 인생이 대단원의 막을 내릴 준비가 된 것처럼 보였으나... 페이크였다!
2.5 고향에서
이렇게 브라질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사실상 월드 클래스 선수로서의 커리어는 끝난 것처럼 보였다. 허나 아직 젊은 나이기도 하고, 금세 더 나아진 모습을 보였다. 리그에서 꿀떡꿀떡 공격 포인트를 기록 중이고 네이마르의 산토스를 상대로 3골 1어시라는 미친 활약을 펼쳤다. 역시 클래스는 어디 가지 않는다. 게다가 이 경기는 산토스가 플라맹구를 3:0으로 일방적으로 관광때리다 지뉴가 역전시킨 경기라서 더 의미가 크다. 그러나 종합 스코어는 산토스5:4플라멩구…
고향 브라질로 돌아와 플라멩구에서 서서히 몸을 데우며 활약했지만 임금 체불이 이어지자 법정 공방 끝에 계약을 해지했다.
2012년 6월 아틀레치쿠 미네이루로 이적했다. 그리고 계속 해 좋은 모습을 보였고, 이런 클럽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국가대표에 다시한번 발탁되었다. 또 시즌 도중 월드 사커 선정 2000~2009 최고의 선수 트로피까지 받는 영예도 누렸고, 특히 이 시기 호나우지뉴는 어머니의 병 때문에 은퇴할 생각까지 했으나 팬들의 지극정성과 쾌유가 겹치며 은퇴를 그만두게 되었다.
2013년 2월 7일, 잉글랜드와의 A매치 평가전에서 PK를 실축하면서 역적이 되어버렸다(...) 물론 컨디션이 안좋았던 점은 있다. 스콜라리 감독도 꾸준히 경기에 출전하면 다시 감을 잡을것이라는 평가를 했다.나는 믿을거야 호나우지뉴 믿을거야 그 이후 남미의 챔피언스 리그인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을 했다. 본인 또한 대회 MVP로 선정. 대회 우승 직후 호나우지뉴는 "모두가 나에게 이미 끝난 선수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난 아직 더 뛸 수 있다는 걸 이번 우승으로 증명했다." 라며 그간의 설움을 단박에 날려버릴 수 있었다.
2014년 1월 1일엔 '2013 남미 올해의 축구선수상'을 수상해 클라스가 다시 살아나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클라스는 영원하다
그리고 2014년 1월 8일 터키의 베식타쉬와 계약하며 유럽으로 복귀하게 되었다는 기사가 뜨며 유럽 대항전에서 다시 그의 플레이를 볼 수 있을지 모른다는 팬들의 기대가 증폭 중....
...이었는데 왜이렇게 페이크가 많아 갑자기 미네이루 잔류 기사가 뜨며 물거품이 되었다. 미네이루 회장의 잔류 확정 SNS와 더불어 브라질에 남는 것이 확정. 유럽에서 보고싶던 이들에겐 아쉽게 되었으나 본인은 브라질 월드컵을 위해 안정적인 브라질 리그에 남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결국 2014년 자국 월드컵에 뽑히지 못했다.안습미네이랑의 비극이 일어나자 브라질 관중들은 브라질 국가대표팀에게 야유를 보내는 한편, 호나우지뉴의 공백을 실감한 듯 그의 이름을 연호하였다.
돌이켜보면 이름값에 비해서는 월드컵에서의 활약이 크게 돋보이지는 않다. 유일하게 활약했던 2002 월드컵은 호나우두의 8골에 묻힌감이 없잖아 있고 2006독일 월드컵은 프랑스에게 털리며 주가 폭락과 더불어 폼 추락. 2010남아공 월드컵과 자국에서 열린 2014브라질 월드컵은 뽑히지도 못했고...그렇다고 그를 평가절하 할 수는 없지만, 짧은 전성기와 더불어 레전드 급으로 보기에 어려워지는 이유 중 하나.
뜬금없이 팀을 무단 이탈하여 자유계약 신분으로 풀렸다. 과거 바르셀로나 동료였던 데쿠의 친선 경기에 참가하기 위해 팀에 말도 없이 떠났는데 그 이후로 연락이 안됐다고. 그래서 미네이루는 깔끔하게 자유계약으로 풀어줬고 호나우지뉴는 다른 리그로의 진출을 노리고 있다고 한다.[28]
2014년 9월 6일 리가 MX 소속의 케레타로 FC로 이적하였다. 피파3 유저들의 환호성이 여기까지 들린다 [29]
2015년 7월 11일 플루미넨시 FC로 이적하며 브라질로 복귀하였다. 피파3 유저들의 환호성이 또 여기까지 들린다가 울게 됐다![30]
2015년 9월 29일자로 플루미넨시와 계약을 해지했다.
현재까지는 무직이며 아직 은퇴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최근 이적시장에서 여러 팀의 러브콜을 받고 있다.
1년이 다 되도록 소속팀이 없는데 이러면 이천수의 예가 있듯이 폼이 엄청나게 떨어지게 된다. 2016년 여름 이적 시장에서 팀을 찾지 못하면 거의 은퇴 수순이라고 봐야할듯.
2.6 다시 바르셀로나로
16-17 시즌 여름 이적시장이 끝난 직후 바르셀로나가 미국 진출을 노리며 9월 6일 런칭하는 뉴욕 애비뉴 지사의 공식 앰버서더로 임명되었다.
8년만에 자신의 최전성기를 구가한 클럽으로의 복귀이며 구단 측에선 과거의 전세계구급의 인기와 호나우지뉴의 독특한 패션 스타일을 바탕으로 구단을 대표할 공식 앰버서더 적임자라고 발표하였다. 불과 며칠 전 레알 마드리드 CF의 앰배서더로 호나우두가 임명된 것을 견제한 것으로도 보인다. 관련기사
3 플레이스타일
외계인 감히 정의하기도 어려운 스타일
전성기 시절의 호나우두는 알고도 못 막았지만, 호나우지뉴는 정말 몰라서 못 막았다.
호나우지뉴의 플레이는 예측할 수 없다. 그가 왼쪽으로 갈지 오른쪽으로 갈지 알아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를 상대하는 수비수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호나우지뉴의 플레이를 예측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 뿐이다.- 윌리엄 갈라스
호나우지뉴가 뛰어난 선수라는 점은 트릭을 사용할 때와 단순하게 경기를 풀어나갈 때를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기가 0:0일때 호나우지뉴는 오직 패스에 집중한다. 그가 트릭을 사용하는 것은 경기를 이기고 있을 때 뿐이다 - 펠레
수비수들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리플레이 버튼이 필요할 것이다-프랑스 스포츠 전문지 레퀴프
볼을 다루는 능력과 돌파하는 드리블, 시야, 패스와 연계능력, 마무리능력까지 완벽하게 갖춘 드리블러형 공격수이자 플레이메이커. 흔히들 크랙이라고 생각하지만 플레이메이커에 가깝다. 누구도 구사하지 못하는 탈지구급의 드리블과 개인기와 함께 킬패스에 능한 선수였고, 또 그게 매우 효과적이라서 적팀 수비수들은 호나우지뉴를 막다가 패스 한방에 골로 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이에 정점을 찍는 것이 바로 육체능력이다. 상대 수비수들과 거뜬히 경합할 만한 힘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또 그들을 휙휙 제끼고 나갈 스피드까지 갖췄다. 여기에 탄력과 유연함까지 겸비했다.
전성기 시절에는 주로 수비벽을 허무는 돌파에 초점을 두고 빠른 드리블과 개인기를 사용해 적팀 수비수를 깨부순뒤, 동료에게 마무리를 양보하는식의 플레이를 많이 하였다. 하지만 절대 슛능력이 나쁜것이 아니다. 틈틈히 기회가 날 때마다 골대를 가르는 매서운 중거리 슈팅과 키퍼가 손 쓸수없는 절묘한 각도로 차는 섬세한 슈팅은 기립박수가 절로 나온다. 물론, 지뉴가 그리 골욕심이 많은 선수도 아니고, 주 포지션이 처진 공격수 혹은, 공격형 미드필더, 포워드 윙어로 뛰다보니 마무리보다는 공격의 중심을 잡고있는 경우가 많다. 넓은 시야와 축구지능까지 굉장히 뛰어난 편이라, 볼을 어떻게 움직이고 누구에게 패스해야 공격이 쉬워지는지 잘알고 있는 선수이다.
또한, 가장 역대급 재능이라고 할 수 있는게, 공을 감지하는 몸의 감각인데, 등,뒤꿈치등 다른 개인기쩌는 선수들도 잘 쓰지 않는 신체부위를 가지고도 기가막힌 패스를 해냈다. 돈룩패스든, 등패스이든 그가 원터치로 전달하는 왠만한 패스에 그는 그렇게 시선을 잘 두지 않았다. 물론 공이 오는 각도와 튕겨나갈 방향을 잘 예측한 플레이이긴했지만 신통방통한 임펙트는 그가 외계인으로 불리는데 큰 일조를 했다.[31] 또한 전성기시절엔 공을 위로 띄워 트래핑을 하던, 드리블을 하던 속도가 줄지 않는 엄청난 능력을 선보였다. 거기다 상황판단이 빨라, 템포를 잡아먹지 않으면서 패싱력까지 쩔어 빠른역습중에 킬패스까지 뿌릴 수 있는 선수였다.
위의 그 감각을 가장 잘 설명할 영상잠깐 이거 안대 한쪽에 구멍뚫려 있잖아? 사실상 사비가 1등...[32]
프리킥도 굉장히 잘찼고 코너킥을 전담할만큼 슈팅능력이 뛰어났다.
지뉴의 또다른 장점은 바로 볼에 대한 집념인데 잇몸을 드러내고 모두 x된거야 아주 루즈볼을 차지하려는 열띤 모습이 거기서 비롯된다. 전성기 시절에는 왕성한 활동량까지 붙어 말 그대로 축구공을 들고 다니며 그라운드를 누볐다. 그야말로 결점 자체가 없었던 화려한 선수였다.
하지만 점점 나이를 먹고 자기관리에 실패하며[33] 바디 밸런스가 붕괴하면서[34], 예전같은 화려한 드리블 돌파는 자주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외계인은 외계인이라 깔끔한 슈팅과 수비수 한두 명정도는 이제 걸어다니면서(...) 지나가는 정신나간 드리블은 여전하다. 피를로가 전수한 산책축구 게다가 특유의 패싱 감각은 여전히 남아 있어, 돌파보단 패스와 크로스로 플레이하는 미드필더에 가깝게 스타일이 변화했다.
4 트리비아
침대 위에서도 개인기가 어마어마하다고 한다.(...) 2002 월드컵 당시 호나우지뉴와 잠자리를 했다는 영국 랩 댄서인 리사 콜린스는 인터뷰에서 "그는 마치 드릴 같았다.(like a pneumatic drill)"고 말하는 바람에 호나우드릴(...)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또 그의 전 애인은 "그는 경기장에서도 그렇지만 침대 위에서도 환상적인 예술가"라고 극찬(?)했다.[35] 이로 인해 06년 폭스스포츠에서 선정한 역대 플레이보이 축구인 7위에 오르기도 했다.(...)
앞니 때문에 개그맨 박준형이 한때 호나우지뉴를 따라하기도 했다. 사실 박준형 뿐 아니라 한창 유명할 땐 많은 연예인들이 웃길려고 호나우지뉴 흉내를 종종 냈다.
최초로 축구선수의 이름을 딴 R9(브라질의 호나우도의 RONALDO의 R과 그의 상징적인 등번호 9를 합친 브랜드.)브랜드를 만든 나이키는 호나우지뉴의 활약상을 보고 R10을 만들지만....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호나우지뉴가 NASA의 협력업체를 방문한 사진이 올라오자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한 외계인" 등의 드립이 흥했다.
이분과 많이 닮았다. 머리를 풀면 이 아가씨랑도 닮았다.
2013년 치아미백과 잇몸성형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본인의 바로 다음 세대에서 슈퍼스타로 떠오르게 된 리오넬 메시와의 인연으로 유명하다. 클럽 내부에서는 메시파와 호나우지뉴파로 여론이 갈리어 내부적인 다툼이 발생했지만 호나우지뉴 본인은, 성격도 내성적이고 나이도 가장 어렸던 메시의 1군 적응을 가장 적극적으로 도와줬다고 한다. 메시가 1군 훈련에 처음 합류했을 때 첫만남을 가졌는데, 당시 실빙요나 챠비등 1군 선수들이 메시의 재능에 깜짝 놀랐었고 특히 호나우지뉴는 메시는 자기보다도 더 뛰어난 선수가 될거라며 극찬을 퍼부었다고 한다. 중요한건 이당시 메시의 나이가 16살, 말그대로 상꼬맹이 시절이었다는 것. 덕분에 이 이야기를 들은 주변 선수들이 팔불출이 심하다며 웃었다고 한다. 훈련을 마치고 호나우지뉴 본인이 평소 잘 알던 기자에게도 방금 나를 뛰어넘을 만한 선수를 만나고 왔다고 이 이야기를 했는데 이 기자도 어이없어 했다고 한다. 그러나 본인은 진지했던 모양인지 자신의 절친인 코비 브라이언트를 만나는 자리에도 리오넬 메시를 대동하고 나가선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될 녀석을 소개해주겠다고 당당하게 말해서 브라이언트도 속으로 어이없어 했다고 한다.[36] 호나우지뉴는 이때부터 메시를 눈여겨보고 거의 가족처럼 대해주었다고 하는데, 조국인 브라질과 불구대천의 라이벌인 아르헨티나 출신에, 성격도 전혀 달랐던 어린 유망주 메시와 당시 최고의 스타였던 호나우지뉴의 우정은 상당히 주목 받았었다.
단순히 립서비스 뿐이 아니었던 것이, 이당시 메시가 B팀으로 차출되며 더이상 1군 훈련에 합류하지 않게되자 1군 선수들과 호나우지뉴가 당시 감독 레이카르트를 찾아가서 B팀에 있을 재목이 아니라며 메시의 1군 승격을 강력히 요구했다고 한다. 물론 메시는 어릴때부터 바르셀로나 내부에서도 유명한 미래의 스타였지만 외국인인데다 허약한 피지컬이란 제약이 있었고 무엇보다 그렇게 어린 나이의 실전경험도 없는 선수를 성인팀에 넣는다는 것은 지금으로봐도 대단한 도박이었다. 메시의 월반 속도는 그 실력을 감안하고 봐도 비정상적으로 빠른 구석이 있었는데 여기에는 메시의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봤던 클럽 내부 인물들과 호나우지뉴 등 1군 멤버들의 강력한 푸쉬도 한몫했다. 이후 호나우지뉴는 메시의 데뷔골까지 어시스트하며 그를 살뜰히 챙겨주었다. 호나우지뉴는 이 장면을 자신의 축구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꼽고 메시라는 선수의 시작을 알린 장면이라며 평생동안 잊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이후 바르셀로나를 떠난뒤에는 자신의 축구 인생에 있어 유일한 후회는 메시가 커가는 모습을 좀더 오래도록 지켜보지 못했단 것 하나 뿐이라는 말까지 했다. 그가 메시에게 얼마나 각별했는지 알수 있는 일화.
메시 역시 호나우지뉴를 친형처럼 따랐기 때문인지 그의 이적을 반대했었다. 호나우지뉴가 떠나고 본인이 원탑 에이스를 맡으면서 본격적인 성장을 꽃피웠음에도 당시 바르셀로나 회장이 이젠 메시가 새로운 리더라며 그의 집으로 찾아왔을 때 내 친형과 같던 사람을 떠나보냈다며 몹시 원망했다고 한다. 2015년 당시 카탈루냐 방송사에서 등번호 10번의 전임자이던 호나우지뉴에게 싸인한 져지를 선물하는 이벤트를 마련했는데 메시는 인터뷰 영상에서 당시 상황을 회고하며, 팀이 (호나우지뉴를) 그런 식으로 대접하면 안되는 거였고 그의 명성에 걸맞는 대우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호나우지뉴는 자신이 새로운 도전이 필요했던 거고 팀과 자신 사이에 갈등이 없었으며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5 기록
5.1 우승 기록
- 그레미우 (1998 - 2000)
- 코파 술 미나스[37] (1) : 1999
- 히우그란지두술 주 주별리그 (1) : 1999
- 파리 셍제르망 (2001/02 - 2002/03)
- UEFA 인터토토 컵 (1) : 2001
- FC 바르셀로나 (2003/04 - 2007/08)
- 스페인 라 리가 (2) : 2004/05, 2005/06
-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2) : 2005, 2006
- UEFA 챔피언스 리그 (1) : 2005/06
- UEFA 슈퍼컵 준우승 (1) : 2006
- FIFA 클럽 월드컵 준우승 (1) : 2006
- AC 밀란 (2008/09 - 2010/11)
- 이탈리아 세리에 A (1) : 2010/11
- 플라멩구 (2011 - 2012)
- 리우 데 자네이루 주 주별리그 (1) : 2011
- 아틀레치쿠 미네이루 (2012 - 2014)
- 미나스제라이스 주 주별리그 (1) : 2013
-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1) : 2013
- 레코파 수다메리카나 (1) : 2014
-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 코파 아메리카 : 1999
- FIFA 월드컵 : 2002
-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 2005
5.2 개인 수상
-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최우수 선수 : 1999
-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득점왕 : 1999
- 리우데자네이루 주 득점왕 : 1999
- 시드니 올림픽 남미 예선 득점왕 : 2000
- FIFA 월드컵 베스트 팀 : 2002
- FIFA 100 : 2004
- 프리메라 리가 최우수 외국인 선수상 (2) : 2003/04, 2005/06
- EFE 트로피 (1) : 2004
- FIFA 올해의 선수 (2) : 2004, 2005
- UEFA 선정 최우수 공격수 (1) : 2004/05
- 발롱도르 : 1위 (2005), 3위 (2004)
- FIFPro 올해의 선수상 (2) : 2005, 2006
- UEFA 올해의 선수 (1) : 2005/06
- UEFA 올해의 팀 (3) : 2004, 2005, 2006
- FIFPro 월드 베스트 XI (3) : 2005, 2006, 2007
- 골든 풋 상 (1) : 2009
- 브라질 실버볼 : 2011, 2012
- FIFA 클럽 월드컵 득점왕 : 2013
- ESM 베스트 11 (3) : 2003/04, 2004/05, 2005/06
- 옹즈도르 : 1위 (2005), 2위 (2006), 3위 (2002, 2004)
- 월드사커 선정 올해의 선수 (2) : 2004, 2005
5.3 출전 기록
시즌 | 클럽 | 소속리그 | 리그 | FA컵 | 대륙대회 | ||||||
경기 | 득점 | 도움 | 경기 | 득점 | 도움 | 경기 | 득점 | 도움 | |||
1998 | 그레미우 | 브라질 세리에 A | 14 | 1 | 0 | 2 | 0 | 0 | 15 | 3 | 2 |
1999 | 그레미우 | 브라질 세리에 A | 17 | 6 | 0 | 3 | 0 | 0 | 4 | 2 | 0 |
2000 | 그레미우 | 브라질 세리에 A | 21 | 14 | 0 | 6 | 6 | 0 | - | - | - |
2001/02 | 파리 셍제르망 | 프랑스 리그앙 | 28 | 9 | 8 | 6 | 2 | 0 | 14 | 2 | 2 |
2002/03 | 파리 셍제르망 | 프랑스 리그앙 | 27 | 8 | 6 | 7 | 3 | 0 | 4 | 1 | 2 |
2003/04 | FC 바르셀로나 | 스페인 라 리가 | 32 | 15 | 11 | 6 | 3 | 1 | 7 | 4 | 2 |
2004/05 | FC 바르셀로나 | 스페인 라 리가 | 35 | 9 | 10 | 0 | 0 | 0 | 7 | 4 | 4 |
2005/06 | FC 바르셀로나 | 스페인 라 리가 | 29 | 17 | 15 | 2 | 1 | 1 | 12 | 7 | 6 |
2006/07 | FC 바르셀로나 | 스페인 라 리가 | 32 | 21 | 8 | 4 | 0 | 1 | 11 | 3 | 3 |
2007/08 | FC 바르셀로나 | 스페인 라 리가 | 17 | 8 | 2 | 1 | 0 | 0 | 8 | 1 | 2 |
2008/09 | AC 밀란 | 이탈리아 세리에 A | 29 | 8 | 6 | 1 | 0 | 1 | 6 | 2 | 1 |
2009/10 | AC 밀란 | 이탈리아 세리에 A | 36 | 12 | 18 | 0 | 0 | 0 | 7 | 3 | 1 |
2010/11 | AC 밀란 | 이탈리아 세리에 A | 11 | 0 | 3 | 0 | 0 | 0 | 5 | 1 | 1 |
2011 | 플라멩구 | 브라질 세리에 A | 31 | 14 | 7 | 5 | 1 | 1 | 3 | 2 | 0 |
2012 | 플라멩구 | 브라질 세리에 A | 2 | 1 | 0 | 0 | 0 | 0 | 8 | 2 | 6 |
2012 | 아틀레치쿠 미네이루 | 브라질 세리에 A | 31 | 9 | 15 | 0 | 0 | 0 | - | - | - |
2013 | 아틀레치쿠 미네이루 | 브라질 세리에 A | 14 | 8 | 2 | 2 | 0 | 2 | 14 | 6 | 7 |
2014 | 아틀레치쿠 미네이루 | 브라질 세리에 A | 2 | 0 | 0 | 0 | 0 | 0 | 7 | 1 | 2 |
2014/15 | 케레타로 FC | 멕시코 리가MX | 25 | 8 | 4 | 4 | 0 | 0 | - | - | - |
2015 | 플루미넨시 | 브라질 세리에 A | 7 | 0 | 0 | 2 | 0 | 0 | 0 | 0 | 0 |
- ↑ 외래어 표기 규정에 따르면, 로망스제어 및 게르만어권(영어 제외)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는다. 이때 발음의 변화는 반영하지 않는다.
- ↑ 2002 FIFA 월드컵 당시 체격
- ↑ 그 반대로 자기관리 따위 하지 않고도 기량을 유지했던 선수로는 요한 크루이프가 있다.
- ↑ 이병규(1983)을 작뱅이라 부르는 것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 ↑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inho"를 쓰는 주니뉴(Juninho)는 여전히 주닝요라고 불리는 경우가 훨씬 많다.
초딩요도 그렇고 - ↑ 참고로 2014 월드컵때 한국이 알제리에게 4:2로 졌던 곳이다...
- ↑ 왼쪽에서 올려준 크로스를 왼발로 받아서 오른쪽으로 띄운 후, 그대로 공중에서 한바퀴 돌아 오른발 시저스킥으로 마무리한 골은 실로 경이로울 정도.
- ↑ 맨유 보드진이 원래 합의한 금액에서 돈을 깎으려다가 열받은 PSG가 맨유와의 협상을 거부했다고 한다. 또 마케팅을 생각해서 못생긴 외모 때문에 그렇게까지 적극적이진 않았다는 말도 있다. 그리고 호나우지뉴를 놓치고 대신 영입한 선수가 바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 ↑ 이 경기는 챔피언스 리그 역대 최고의 경기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하였다.
- ↑ 이때 역시 상기 언급한 전시즌 궁둥이 씰룩씰룩 골에 버금가는 '오른발 감아차기 슈팅'으로 대박골을 터트렸는데 당시 센터백으로서 완전무결이었고 셋피스시 득점력까지 갖추고 있던 존 테리를 피지컬로 쳐바르고 넣은 골이 바로 그것이다. # 존 테리의 두번째 흑역사로 불리기도 한다.
첫번째는 당연히 '대단한 선택' - ↑ 논란거리인 일명 푸욜의 셰브첸코 장풍사건이 밀란전에서 발생하였다.
- ↑ 화려한 개인기 위주의 플레이를 시도하는 일반적인 선수들은 화려함과 실속을 둘 다 챙기기는 정말 어렵지만, 호나우지뉴는 화려하고 예측하기 힘든 개인기를 뽐내면서 템포가 상당히 빨랐고 연계에도 착실히 신경을 썼기에 화려함과 실속 양면을 모두 챙겼다. 다만 실속이란 면에선 기복이 심하다는 평도 있는데, 호나우지뉴의 연계는 동료들이 예측 할 수 있는 안전한 연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 때문에 기복이 심하다고 평가하는 것인데, 거꾸로 동료들의 수준이 호나우지뉴의 수준을 못 따라간다고 할 수도 있다.
- ↑ 지금은 세계적인 수비수지만 당시엔 포텐 충만한 유망주였던 세르히오 라모스를 두 번이나 관광보내고 득점을 했다.
- ↑ 호나우지뉴가 얼마나 단단한 피지컬의 소유자인지를 보여준 대표적인 경기가 바로 상기의 챔피언스리그에서의 첼시전이다. 라리가보다 훨씬 거친 신체접촉을 하는 첼시의 수비진을 상대로 힘과 기술 양면에서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 ↑ 호나우지뉴는 고가의 명품 브랜드 의류를 자주 입었는데 기자가 이에 대해 묻자, "내 생긴게 이런데 옷이라도 잘 입어야 할 것 아뇨!"라고 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 ↑ 의외라 할 수 있겠지만 이 판타스틱 4는 잘 생각해보면 공수 밸런스 같은 거 하나도 안 잡힌 스쿼드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06월드컵 브라질의 팀 밸런스는 제 호베르투가 분투하는 가운데 에메르손과 질베르투 실바가 번갈아 거드는 형국. 네임밸류 높은 공격수 4명을 죄다 무리하게 집어넣다보니 기형적인 전술이 나온 것. 그리고 저 넷의 공통점은 공격적인 선수라 수비가담이 좋지않다. 그래서 8강전에 압박축구로 나온 프랑스의 수비에 제대로 막혔다.
- ↑ 이후 첼시로 이적하여 먹튀가 된 네덜란드의 국가대표 출신 수비수. 거친 태클과 타이트한 맨마킹으로 분데스리가에서 활약, 카드도 꽤 수집했었다.
- ↑ 이때 호나우지뉴를 먹었다...가(불라루즈의 별명이 식인종인 것에 유례) 체해서 폼이 망가 졌다 카드라
- ↑ 결정적으로 캄프 누에서 열린 2차전에서는 밀란에게 주도권이 밀리고 셰브첸코에게 선제골을 허용했으나 푸욜의 장풍꽈당 사건으로 골이 무효화되고, 탈락하고 만다.
- ↑ 당시 브라질 국가대표팀에서 호나우지뉴의 화려한 플레이에 대해 굉장히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아예 호나우지뉴를 따로 불러놓고 '예측 가능한 행위'를 하라는 주문을 했을 정도.
- ↑ 주전 여부를 놓고 실랑이를 벌였기 때문에 뛰고싶었던 호나우지뉴는 스타일을 강제적으로 바꿔야만 했다.(이 때부터 우울증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대표팀 자체에서 호나우지뉴에 관한 불만이 많았다는 것... 모 TV 프로에서 당시 경기 영상을 분석했는데, 호나우지뉴가 비어있든말든 일부러 주지 않는 모습들이 자주 잡혔다. 카카나 호나우두의 경우 쳐다봐놓고 안 줘버리는 행위도 자주 했을 정도. 호나우지뉴가 코치진과 실랑이를 벌였기 때문에 잘해주기 뭐한 측면이 있긴 하지만, 축구계에서 좋은 주장은 이런 일을 해결하곤 하는데 카카나 호나우두나 위대한 리더형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 ↑ 호나우지뉴 개인적인 부분에서는 이미 06 월드컵에서 축구에 완전히 흥미를 잃어버렸다고 한다. 떠오르는 메시에 대한 푸쉬 여부를 놓고 바르샤 이사진들의 알력다툼이 일어난 시점도 이 때. 당연히 호나우지뉴는 반대파의 핵심 인물이었다.
그런데 이 부분도 반강제적인 상황이었다고 한다. 안습그리고 앞서 06 월드컵 시절부터 겪기 시작한 조울증을 확진받았다고 한다. 프로 의식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조울증을 확진받을 정도면 육체적 부상과 같은 수준으로 일종의 병이라고 봐야 된다. - ↑ 사실 승점은 똑같았고 골득실은 바르셀로나가 앞섰으나, 프리메라 리가는 골득실보다 승자승 우선이다. 그해 엘 클라시코 결과는 1무 1패로 열세였기때문에 레알이 우승했다.
- ↑ 회장인 라포르타가 직접 영입한 선수라서 못 건드렸다는게 정설.
- ↑ 다만 이 상황에 대해서는 당시에 있던 알력 다툼(떠오르던 메시파 vs 호나우지뉴파)에서 밀려났기 때문에 호나우지뉴가 아예 포기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호나우지뉴 본인부터가 팀 내에서 받는 푸쉬 여부를 가지고 보드진과 꽤 오랜 기간을 다투었던 전력이 있다.
- ↑ 특히 바르셀로나의 전성기를 함께한 감독이라 불리는 이 당시 코치 과르디올라가 메시에게 가장 큰 관심을 갖고있던 사람 중 하나였고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철저하게 관리했는데 지뉴의 나태함을 특히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그와 어울리는 것에 대해 메시에게 여러차례 경고를 했다고 한다. 과르디올라는 선수들의 피치밖 사생활에 대해 엄격하기로 소문난 감독이라서 더 그랬다는 이야기가 많다.
- ↑ 그런데 둥가의 이러한 선택은 일견 만용으로도 보이나 06년 독일 월드컵 시절을 생각해 보면 남아공 월드컵에서 그다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현역 주장 시절처럼 어느 정도 독선적이었고 과도하게 자기 생각을 밀어붙인 경향이 있다. 현역 국대 시절에는 동갑내기 베베토가 잘 뒷받침했지만, 감독으로서는 무리수였다. 그러나 남아공 월드컵 이후 14년 브라질 월드컵을 목표로 브라질은 둥가식과 기존 브라질식의 축구를 절충하는 과정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수행해냈다.
그리고 브라질은 멸망했다근데 감독은 다시 둥가 - ↑ 이 부분이 말이 많은게 미네이루가 대인배처럼 풀어줘서 그렇지 결코 프로 선수가 보일 행동은 못된다. 아직 자세한 전말은 알려져있지 않으나 사생활이 문란하긴 했어도 아드리아누처럼 무단 이탈하지는 않았는데..
- ↑ 설명을 하자면 10월 말 패치에서 브라질 리그 라이센스 종료로 브라질 리그와 함께 2014년 10월 초에 브라질에서 뛰던 선수들이 전부 삭제될 예정이었다. 호나우지뉴는 패치 계획 발표 한달 전에 라이센스가 있는 멕시코로 이적하면서 생존(?). 참고로 삭제되는 선수의 대표격으로 카카가 있다.
- ↑ 2014 후반기 로스터패치에는 브라질 리그에서 뛰던 선수들이 삭제되었지만 2015 전반기 로스터패치에는 생성제한으로 바뀌면서 은퇴한 선수나 계약이 안된 리그에 있는 선수 생성제한으로 바뀌었으며 그 현상으로 시세가 2배이상 급등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하지만 피파16에서 브라질 리그를 다시계약하면서 호나우지뉴는 생성제한이 안된다.
대신 안데르손이 생성제한 풀리고 아드리아누나 파투,디다가 부활하겠지 - ↑ 심지어 정확했다.
- ↑ 물론 우리가 왜 두개의 눈을 가졌는지 생각하면 한 눈으로 저만큼 해낸것도 대단한 일이다.
- ↑ 바르셀로나 말년에 팀 훈련에 단 한번도 참가하지 않고 클럽에서 술만 마시고 놀기에 바빴다.
- ↑ 호리호리한 체형에서 배가 나온, 마치 조기축구회의 아저씨들 같은 모습으로 변했다.
- ↑ 하루에 8번이나 했다고 한다(....)
부러운 놈일세 - ↑ 메시가 정말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되고 난 뒤, 둘은 나중에 터키 항공광고를 같이 찍게 되는데...
- ↑ 미나스제라이스 주에서 개최된 축구 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