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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여행의 밤: el-miraj> 16세기 페르시아 세밀화.
아랍어, 페르시아어, 우르드어 : محمد
영어 : Muhammad, Mohamad, Mohamed, Mohammad, Mohammed, Muhamad, Muhamed, Muhamet, Muhammed, Muhammet, Mahammad
라틴어 : Mahometus, Machometus
히브리어 : מוחמד
아람어 : ܡܘܚܡܕ
아제르바이잔어 : Məhəmməd, Məmməd
아르메니아어 : Մուհամմեդ
보스니아어 : Muhammed, Muhamed, Mehmed
알바니아어 : Muhammedi, Muhamet, Mehmet
불가리아어 : Мохамед
벵골어 : মুহাম্মাদ
힌디어 : मुहम्मद
디베히어 : މުޙައްމަދުގެފާނު، މުހައްމަދު
풀라어 : Muhammadu, Mamadou
소말리어 : Maxamed, Muxamed
쿠르드어 : Mihemed
터키어 : Muhammed, Muhammet, Mehmet
바시키르어 : Мөхәммәт
타타르어 : Мөхәммәт
카자흐어 : Мұхаммед
키르기즈어 : Мухаммед
타지크어 : Муҳаммад
카라칼파크어 : Muxammed
투르크멘어 : Muhammet
우즈베크어 : Mohammad, Muhammad
위구르어 : مۇھەممەد
러시아어 : Мухаммед, Магомед
일본어 : ムハンマド
중국어 : 穆罕默德
에스페란토 : Mohamedo
풀 네임은 '아부 알-카심 무함마드 빈 압드 알라 빈 압드 알-무탈리브 빈 하심 빈 압드 마나프 알-쿠라이시'.길어
570년 4월 22일 ~ 632년 6월 8일.
이슬람의 창시자. 그러나 이슬람 기준으로는 무함마드가 종교를 '창시' 한 것은 아니므로 무슬림들은 결코 저런 식으로 표현하지는 않는다. 무슬림과 이야기할 때 조심해야 하는 부분이다.[1] 이슬람에 따르면 인류 최초의 무슬림은 아담(آدم)과 하와(حواء)이다. 성경에 따르면 낙원에서 추방된 이후로 아담과 하와는 아라비아에 정착했으며 특히 메카는 주요 예언자들이 다녀간 곳으로 여겨진다. 가령 메카 근방에 있는 '잠잠' 이란 샘물은 모세가 지팡이로 땅을 내리쳤을 때 생겨났다는 전설이 있으며 메카의 중심부인 카바 사원에 있는 검은 돌은 아담과 함께 내려온 운석이라고 여겨진다. 사실 이건 아브라함계통의 종교라면 다 마찬가지이긴 하다. 기독교인들도 예수를 창시자라고 하지 않으며 흔한 기독계열 사이비 종교도 교주를 창시자라고는 안한다.
알라의 25번째 예언자이자 14번째 사도이다. 쿠란에서는 무함마드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예언자나 사도가 없을 것임을 선언하였다. 예언자와 사도는 혼용되어서 쓰이고 있지만 그 둘의 의미는 다르다. 사도가 예언자보다 더 좁은 개념이며 일반적으로 그냥 예언자로만 일컬어지는 인물들보다 사도로 일컬어지는 인물들이 더 신학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진다. 예언자는 이전에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을 확증하는 역할을 한다면 사도는 예언자의 역할과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임무를 맡는다고 한다. 무함마드의 경우 무사(موسى, 모세)의 구약, 다우드(داود, 다윗)의 시편, 이사(عيسى, 예수)의 신약이 전해졌다는 사실을 인정함으로서 예언자의 임무를 수행하였고 쿠란을 계시받아 전달함으로서 사도의 역할을 다했다.
'코끼리의 해' 에 탄생하였다고 하며[2] 태어난 해의 별명인 '코끼리의 해' 는 코끼리 부대의 침공을 받아서 코끼리해라고 한다. 그런데 무함마드가 태어난 해는 그의 친할아버지도 모른다고 한다(...) 저쪽 사람들 문화 자체가 태어난 해에 대해서는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쓰는 기준보다 나이가 한 살 더 많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두자.
오래 전만 하더라도 이슬람권에 대한 무지로 서구식 표기인 마호메트라고 표기하기도 하고 국립국어원에서도 두 가지 표기를 다 인정한다. 그러나 무슬림들은 '마호메트'라는 표현에는 그를 악마(Mahound)로 여기는 서구의 경멸적 시각이 담겨있다고 여긴다. 유럽 쪽의 악마 바포메트가 무함마드의 이름이 약간 변형된 것이라는 말도 있다. 우리가 보기엔 그게 그거일 수도 있겠으나 무슬림에게는 굉장히 실례가 될 수 있다. 그나마 예전에 비해 이슬람과 아랍에 대한 이해가 개미 눈꼽만큼 진전된 지금에는 '무함마드'라는 표기가 더 자주 보인다.
참고로 이슬람을 숭상하는 모든 문화권에서는 무함마드의 초상화나 그의 동상 같은 것은 일절 찾아볼 수 없다. 위 그림과 같이 무함마드가 등장하는 그림이더라도 얼굴은 묘사되지 않는다.[3] 이것은 무함마드의 우상 숭배를 금지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이슬람에 대한 영화를 보아도 무함마드는 화면에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 대표적인 일대기 영화인 The Message[4]에서는 카메라맨이 무함마드인 것 같은 연출을 사용하여 얼굴을 보이지 않고도 등장인물들과 대화하는 방식을 사용한다FPS. 화면에 직접 드러나지는 않지만 등장인물들이 카메라를 바라보면서 말을 하는 식으로 연기한다. .
2 일대기
2.1 출생 당시 환경
2.1.1 부족
아랍의 역사에서 개인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부족이다. 아랍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씨족(부족)에 속하게 되며 이에 속하지 못하면 보호받지 못한다. 사막이라는 환경에서 혼자 살아남기는 거의 불가능하니.
무함마드는 상어를 토템으로 삼은 쿠라이시 부족의 하심 씨족으로 태어났다. 가계도는... 하심이 압둘 무탈리브(압드-알 무탈리브)를 낳고 무탈리브가 압둘라(압드-알라)를 낳고 압둘라가 무함마드를 낳았다(족장의 직계혈통이다. 물론 큰 의미는 없다).
무함마드의 아버지 압둘라는 메카의 으뜸가는 미남이었다. 이 외모를 무함마드가 이어받은 듯하다. 그러나 아버지는 요절했다. 안습. 미인박명도 아니고 그리고 '아미나' 가 빛으로 아이를 잉태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빛으로 태어나는 건 예언가의 필수요소인 듯 싶다. 예수를 두고 라틴어로 lumen de lumine(빛에서의 빛), nata lux de lumine(빛에서 난 빛)이라 일컫기도 하는 것을 보면.
그리하여 무함마드의 어머니 '아미나' 는 시아버지 압둘 무탈리브에게 보호를 요청했다.
그리고 무함마드가 11살에 할아버지가 죽고 '압둘 미나프(무함마드의 숙부. 후에 아부 탈리브로 불린다[5])' 가 족장이 된다.
이슬람측에선 다윗의 멀고 먼 후손이라고 주장한다. 예수랑 멀고 먼 사촌이란 이야기. 사실이라고 증명할 수도 없고 거짓이라고도 증명할 수도 없다(...) 아브라함교 신자들을 포섭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냐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2.1.2 메카의 상황
당시 메카의 인구 구조는 소수의 거상과 절대 다수의 노예(...)가 있었다. 해방 노예라도 사실상 주인이 있는 어쨌거나 노예인 자들이 많았다. 그 외에도 장사 혹은 용병 일을 목적으로 온 여러가지 목적의 기독교인(외국인), (가난한)장인들, 그리고 고아와 과부들이 있었다.
한마디로 거상과 그지들밖에 없단 소리다. 그리고 이 틈을 타 몇몇 여성들이 상업활동에 뛰어들어 거상이 되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가 성령을 보내겠다고 선포했는데 이를 무슬림은 무함마드라고 한다. 쿠란에 따르면 전대의 선지자가 무함마드를 예고했다고 한다. 이에 대한 근거는 후술한다.
2.2 어린 시절
태어나기도 전에 아버지가 죽었고 6살엔 어머니가 죽었고 11살엔 할아버지가 죽어 직계혈통이 끊어져버렸다. 완전 사망 플래그. 직계혈통이 없는 고아라서 족장인 숙부에게 맡겨진다. 상인인 숙부를 따라 아랍을 돌아다니게 되었다. 기독교의 성지에서 한 수도승이 무함마드가 성경에서 나온 성령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마 여기서 라술 알라(신의 사도)란 별칭이 붙은 듯 싶다. 그리고 당연히 이야기를 들은 당시엔 깔끔히 무시된 듯하다(...) 이래저래 돌아다니며 무함마드는 말의 중요성을 배우게 되는데 이게 아마도 '쿠란' 이 성서이면서 마치 시와 같이 된 까닭일 듯 싶다(아랍 사람들이 유난히 시를 좋아한다는 점도 한 이유일 듯하다).
2.3 청년기
가난한 무함마드는 나이가 무려 25살이 되도록 결혼을 못했다. 사촌에게 청혼한 적 있지만 퇴짜맞았다. 당시 기준엔 이상적인 결혼이다. 하지만 그가 일하고 있는 상단의 주인 하디자와 가까운 사이가 되면서 상황이 달라진다. 하디자는 부유한 미망인이었으나 40대라 무함마드랑 워낙 나이차가 많이 나기 때문에[6] 무함마드의 씨족은 이 결혼을 반대했지만 결국 누님 하디자의 적극적인 구혼에 넘어갔다.
그녀와의 결혼 이후 무함마드의 인생은 고속도로를 피게 된다. 다만 대를 이을 아들은 없었다(아들을 낳긴 했지만 일찍 죽었다). 대신 양자를 들여 잇게 했다고 한다.
2.4 각성
하디자의 후원하에 명상에 전념하게 된 무함마드는 610년에 메카 교외의 히라 산의 동굴에서 천사 지브릴(가브리엘)의 계시를 받는다. 갑자기 지브릴이 나타나 무함마드에게 '읽어라!' 라고 소리치자 벙찐 무함마드는 '나는 문맹이라 읽을 줄 모릅니다' 라고 하자 지브릴이 무함마드를 세게 껴안은 후 '읽으라!' 를 두 번 반복하였다.
그리고 정말 갑자기 개종운동에 뛰어들었다. 나이 40대의 아저씨가 되고 난 뒤에. 우선 아내인 하디자(55세), 두 양아들, 친구 아부 바크르 등 우선 가까운 사람부터 포교했다. 그의 포교 정신은 부자, 명문가의 딸, 가난뱅이 등 가리지 않았으나 자신의 씨족만큼은 제대로 포교할 수 없었다. 그가 포교하지 않으면 돈을 주겠다고 제안할 정도였다. 그래도 숙부는 키운 정인지 무함마드를 씨족 단위로 지켜주었다. 사람들이 탄압을 하려고 할 때마다 '니네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우리 하심 가문이 단체로 일어설 거임!' 라고 무함마드를 커버해줬다.[7]
그리고 그가 이슬람을 이야기하는 동안 공공의 적이 되어 아내와 그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이 보이콧 대상이 되어 파산하였다. 당시 순례는 상인들의 짭짤한 소위 대박상품이었다. 그런데 이슬람이 우상 숭배를 금하면서 당시 성행하고 있던 수많은 다른 종교의 우상 숭배와 순례행위를 규탄했으니 당연히 이슬람은 탄압 대상일 수밖에.[8]
거기에 파산의 영향으로 아내 하디자가 향년 65세로 죽고 이틀 후 숙부 아부 탈리브가 죽었다. 즉, 무함마드는 이틀만에 2명의 강력한 후원자를 잃어버린 셈. 그리고 아브 라합이 족장이 되었는데 이 사람은 그다지 무함마드에 호감을 가지지 않았다. 결국 무함마드는 씨족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되었다. 현대 기준으로는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라는 말.
2.5 헤지라(聖遷[9], 이슬람 기원)
야스리브라 불리는 땅이 있다. 비옥하고 기름진 이 땅은 아라비아에 토착한 히브리인, 아라비아 부족 등 수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지만 당장 내일을 보장할 치안이 없었다. 당장 같은 아랍 부족들끼리도 전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회의 끝에 이슬람의 무함마드를 중재자로 선택하였고 그를 초대했다.
출발날 당일 밤에 무함마드의 침대가 습격받았지만 무함마드 측은 이미 이를 예상해 무함마드를 대피시킨 상태였다. 습격 당시 침대엔 무함마드의 사촌동생이자 양자인 알리가 죽음을 무릅쓰고 대신 누워있었다. 습격자들은 낚였다는 걸 알고는 분노했지만 알리를 죽이진 않았다.
알리의 희생과 여러 친구들 덕분에 무함마드는 야스리브의 반대쪽으로 도망가는 낚시를 했으나 메카인 역시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아 그들을 추격했다. 그러나 그들이 숨은 동굴 입구에 거미줄을 쳐준 거미, 그들이 숨은 곳에 둥지를 튼 비둘기 등의 여러 기적 덕에 메카인들로부터 간신히 탈출해 야스리브에 정착하였다. 그리고 야스리브의 이름은 '마디나트 안 나비(선지자의 성읍)'로 바뀌었는데 영어로는 메디나라고 불리는 도시가 바로 이곳이다.
이것이 헤지라(성천聖遷)이다. 헤지라는 무함마드가 메카를 떠난 날이 아니라 마디나에 도착한 날을 기준으로 하며, 이 날은 서기로는 622년 7월 16일이었고 훗날 이슬람 기원[10] 원년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때 타고 입성한 낙타의 이름인 '카스와(Qaswa, 뜻은 '귀의 1/4이 잘린')'까지 역사에 남았다.
그곳에서의 삶도 험난했는데 무슬림인 척하는 위선자들(무나피쿤) 등이 여러가지 암적 요소로 작용했다. 유대인이라고 해서 딱히 차별하지도 않았으나 이것이 결국...
2.6 지하드(聖戰)
비록 메카로부터 탈출해 땅을 얻었으나 원주민들에게도 갑자기 증가한 인구는 부담이었다. 게다가 그들에게 갑자기 줄 땅이 땅에서 솟아날 리도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굶어야 했다. 결국 선지자 무함마드는 특단의 조치로 약탈 명령을 내렸다. 지하드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곧 메카인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625년 봄 3,0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원정을 온 것이다. 메디나 근처 오호드 산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무함마드가 1,000명 정도의 병력으로 대항했다. 그러던 중 위선자 300명이 탈영해 버렸지만 기세로 메카인들을 몰아넣었다. 그러나 재물에 눈이 팔려 진영이 무너졌고 역공당해 패배했다.
결국 메디나에서의 입지까지 위험해져 버렸다. 유대인, 위선자, 이민족 등이 노골적인 적대감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한 시인은 메카에 항복하고 무함마드의 목을 팔자고 대놓고(...) 말하기까지 했다.
627년 메디나를 향해 온 메카의 1만 명의 원정부대와 3천의 무함마드의 부대가 참호전을 펼쳤고 기적의 모래바람 덕분에 승전했다. 기적이다. 기적.
그리고 반역자 청소에 들어가게 되었다. 전투 중 메카의 편을 든 1,000여 명의 유대인, 메카에 항복하자고 말한 시인(2년 전 일이었는데!) 등을 철저히 응징하였다.
628년엔 도망간 유대인들을 추격해 덤으로 유대인의 도시에서 조공을 받게 된다. 유대인 입장에서는 과거엔 베두인족에게 바치던 것을 무슬림들에게 바친 걸 볼 때 이거나 저거나 큰 차이는 없는 모양.
2.7 귀환
628년 무함마드는 메카에 '순례' 를 하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메카와의 협상 끝에 3일 동안의 메카 체류를 허락받았다. 그 다음해인 629년엔 자신의 씨족과 화해하였고(아브 라합이 죽은 터라 수월하였다) 630년엔 무슬림의 죽음을 이유로 1만 군대를 이끌고 가 메카를 무혈 정복하였다. 메카에 들어 오면서 "진리가 이제 왔으니 거짓은 무너졌도다!"라고 외쳤던 일화가 유명하다. 그 후 모든 우상을 파괴하고 카바 성전을 이슬람의 성소로 선포하였다.
이로서 그는 통치자가 되었다.
2.8 정복 이후 죽음까지
귀족들에게 이슬람을 믿지 않으면 귀족 자리도 없다고 협박한 끝에 귀족들이 모두 무슬림이 되었고 소위 이슬람 법전이라 할 만한 신앙고백, 기도, 지즈야, 순례, 금식 등 이슬람 기본 5개조를 포함한 규칙을 공포했다.
그는 메카 정복 이후 신의 사도라는 지위를 빌려 인간위에 군림하는 초월적 존재나 절대군주가 될 수 있었으나 오히려 평범한 지도자이기를 자처했다. 그는 왕관을 쓰지 않았으며 옥좌 대신 마룻바닥에 앉아 통치했고 스스로 옷과 신발을 고쳐 입었으며 대추야자와 보리빵을 즐겨먹는 소박하고 겸손한 인간으로 남기를 원했다. 그에 대해서는 근대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에 의해 많은 부분이 왜곡되어 탐욕스럽고 호색하며 편협하고 잔인한 혹세무민의 정복자 정도로 폄하되었으나 현대에 들어서는 사회개혁 운동가로서의 면모와 박애주의, 인자, 중용, 인내, 용맹 등을 겸비한 인격자로서 재평가받고 있다.
무함마드는 검소하기로 유명했는데 통치자가 되고 나서도 거친 깔개 위에서 잠을 청했고 한 되도 안되는 보리와 물, 약간의 대추야자로 끼니를 때웠으며 그가 죽고 나서 남은 것은 생전에 끌고 다니던 당나귀 한 마리와 죽고 나서 기부하기 위해 남겨놓은 약간의 땅밖에 없었다고 한다. 뒤에 2대 칼리프가 되는 우마르는 무함마드의 이런 생활상을 보자 눈물을 흘리며 '로마나 페르시아의 황제[11]들은 현세를 즐기며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사도이신 당신께서는 이런 보잘 것 없는 것들만 가지고 계신다' 라고 말하자 '그들이 누리는 것들은 보잘 것 없는 현세의 향락의 일부일 뿐이다. 내세에서 우리에게 주어질 것은 그 어떤 사람들에게도 주어지지 않은 특별한 것들이니 나는 이것으로 족하다' 라고 말한 일화가 있다.
다만 이슬람의 실질적인 창시자답게 다소 독선적인 면은 있어서 유대인들과의 종교 논쟁에서 여러 번 논파당하자[12] 예루살렘을 향해 절하던 규칙을 메카 방향으로 바꾸는 등의 생떼는 좀 있었다.
그는 자신이 공포한 규칙과 법의 수호자였다.
그 후 632년 마지막 메카 순례를 마치고 메디나로 돌아온 뒤 건강이 악화되어[13]그의 자택에서 애처 아이샤가 보는 가운데 사망하였다. 죽기 전에 남긴 말은 "주(알라)여, 나의 사투에 함께 하소서."였다.
그의 유해는 검소하게 장례를 치뤄 오늘날 메디나의 예언자의 모스크에 묻혀있다.
다만 한국에서 그의 최후가 좀 잘못 알려진 게 있는데 '그가 죽었을 때 승천했다' 라는 잘못된 정보가 있다. 승천 전설 (미라즈 전설)은 그의 죽음이 아니고 천사 지브릴(가브리엘)의 도움으로 메카에서 예루살렘의 알 아크사 사원(바위의 돔)을 경유하여 천국에 승천한 뒤 여러 옛 예언자들을 본 후 계시를 받고 다시 돌아온 전설을 말한다. 헷갈리지 말자.
2.9 사후
누가 알았겠는가. 그의 추종자들이 중세 최고의 제국을 만들 줄. 그의 사후 이슬람은 칼리프 통치 체제가 되었고 우스만 이븐 아판의 사후엔 시아파와 수니파로 나눠지게 되었다.
무함마드는 고작 20여 년 만에 그 방대한 아라비아 반도를 손에 넣었고 이것은 전설이 되었다. 그 손에 의해 중세 최고의 제국이 태동하였다.
시아파나 아바스 왕조 항목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알리의 사후엔 무함마드의 후손에게 정통성이 있다는 주장이 나타나며 무함마드의 혈족 하심 가도 이를 주장한 세력 중 하나였다. 오스만 제국 이후에도 이들은 종교적인 힘을 갖고 있었고 그 덕분인지 근대에 영국에 의해 세워진 이라크, 요르단의 국왕은 하심 가의 일원이다.
3 무함마드와 성경
무슬림들은 무함마드가 이미 성경에서 등장이 예언되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성경 신명기 18장 18절의 '내가 그들의 동족 중에서 너(모세)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말하리라' 라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 가 무함마드라고 주장한다.
기독교에서는 요한 복음서 5장 47절에 나온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14]과 사도행전 3장 22절~24절에서 위의 신명기 구절을 정확히 인용하며 이를 예수 그리스도라 증언하는 사도 베드로의 설교를 따라 이를 예수로 해석하고 있다. 또한 예언자가 그들의 동족(유대 혈통) 중에 나온다고 써져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이었으나 무함마드는 유대인이 아니라는 점에도 주목한다. 그리고 모세는 하느님에게 직접 말씀을 들었다면 무함마드는 지브릴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들은 것 역시 차이점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슬람은 무함마드와 모세의 공통점이 더 많다는 점을 들어 이를 부정하고 있다. 무함마드와 모세는 부모가 있었고 결혼을 하고 자식을 두었고 자연사했지만 예수는 성적 관계 없이 기적으로 잉태되었고 결혼도 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에 의해 승천(기독교에서는 죄를 뒤집어쓰고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하고, 승천)하여 모세와 예수는 매우 차이가 많다는 점을 주장한다.
또한 무슬림들은 성경 이사야서 제 29장 12절 '또 (사람들이) 그 책을 글 모르는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그가 대답하기를 나는 글을 모른다 할 것이니라' 에서 천사 지브릴이 무함마드에게 '읽으라' 라고 했을 때 '나는 읽을 줄 모릅니다' 라고 대답함으로서 성경이 무함마드의 계시를 완벽하게 예언했다고 주장한다[15].
4 비판
4.1 사생활
몇몇 아내들을 개인의 탐욕과 성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결혼했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9번째 아내인 사피야 빈트 후야이는 본디 유대인 부족인 카이바르의 부족장인 케나나 이븐 알-라비(Kenana ibn al-Rabi)의 아내였으나, 정복전쟁의 일환으로 카이바르를 점령한 무함마드는 케나나를 고문해서 살해하고 가장 젊은 아내인 사피야와 결혼한다. 무함마드에 의해 가족들이 몰살된 샤피아는 자기는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겠다고 했고, 그냥 노예로 삼으라고 했지만 무함마드는 그녀의 말을 씹고 강제로 결혼한다.[16]
자이나브 빈트 자흐시도 아들의 부인에게 성욕을 품고 결혼한 경우인데, 무슬림들은 자이나브와의 결혼을 '가장 선한 인간' 무함마드가 저지른 '사소한' 실수 중 가장 커다란 것으로 보기도 한다. 무함마드가 의붓아들 자이드가 없을 때 집을 방문했다가 옷을 갈아입는 자이나브를 보고는 은근히 그녀를 취하고 싶다는 제스처를 보냈고, 이를 눈치챈 의붓아들 자이드가 그녀와 이혼하기로 했다고 하자 주위의 시선이 두려워 체면상 일단 거절하는데, 눈치 빠른 자이나브는 이후 남편에게 대놓고 개기며 순종하지 않았고, 이혼당한 뒤 무함마드에게로 바로 가서 결혼한다. 여기서 뜬금없이 알라가 계시를 내리는데 무슬림이라면 양자의 며느리와 결혼해도 옳다는 계시(...) 이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각자 알아서 생각하자[17].
또한 12살[18]의 아내 아이샤와 결혼했는데, 이 때문에 소아성애자라는 의심을 받기도 한다.[19]
4.2 메카 거주민들에 대한 습격과 학살
메디나에 있던 시절, 초기 무슬림들은 타 부족에 비해 생계 유지가 어려웠는데, 이를 본 무함마드는 메카인들을 습격해서 약탈하고, 시리아를 오가는 무역 대상들의 상품을 습격해서 강도질하는 것으로 재산을 축적했다고 한다. 또 무함마드는 이슬람화 되기 이전의 메카에 있는 쿠라이쉬 부족과 싸워 승리한 후 쿠라이쉬 부족과의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죽어가는 이웃 부족민들에게 쿠라이쉬 부족을 어떻게 할지를 물었는데, 그는 다 죽이라는 말을 했고, 무함마드는 이를 알라의 판결이라며 옳다고 칭송한 뒤 대학살을 자행했다. 흠좀무.[20][21]
4.3 유대인 학살
메디나에 있던 시절, 긴장 관계인 유대인들과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던 중 유대 부족인 바니 카이누카 지역에서 유대 상인이 유목민 여자를 희롱한 적이 있었는데, 이 때문에 유대인과 무슬림들 사이에 분쟁이 발생한다. 이에 무함마드는 보름동안의 포위전으로 유대인들을 제압한 뒤 모조리 학살해야 된다고 주장했지만, 지역 유지인 압둘라의 중재로 재산 몰수와 추방이라는 관대한 처분(?)으로 끝낸다. 이 몰수한 재산으로 무슬림의 형편이 좀 나아졌다고. 또 위의 유대인 부족 살해 및 고문 전적도 있고, 무함마드는 메카 세력과의 후다이비아 조약 이후에도 아라비아 반도 내의 유대인들에게 학살과 약탈, 추방을 자행한 전적이 있는데, 특히 유대인 거주 지역이었던 카르바르 지역으로 가서 그들을 쫓아내고 재산을 몰수했다.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이 도를 넘은 반유대주의 행보의 쿠란적 근거가 무함마드의 행적에서 나온다는 비판도 받는다.
5 이야깃거리
저서로는 23년간 하나님께 받은 계시들을 기록한 책인 쿠란이 있다. 물론 본인이 직접 쓴 건 아니고 구전되던 내용들을 나중에 모아서 책으로 낸 것.(논어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예수가 신약성서를 기록하지 않은 것과 똑같은 이치.
쿠란의 시적 구조 덕분에 그는 종종 시인이냐는 질문을 받았고 그때마다 아니라고 했다. 쿠란은 아랍이 낳은 최고의 문학 중 하나라고 한다.
단테의 신곡에서는 기독교를 분리/내분시켰다는 이유로 지옥에 있다.[22]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이단 지옥에 있는 게 아니라 사기 지옥에 있다는 것. 이런 서술로 볼 때 그 당시에도 이슬람을 기독교의 연장으로 보았다는 걸 알 수 있다.
게임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는 어떤 직위건 히스토리를 볼 수 있는데, 수니파와 시아파의 칼리프 직위 계보를 보면 다른 칼리프들은 다 그냥 랜덤생성 얼굴이지만 무함마드만은 정말 종교적으로 적절하게 구현되어 있다. 역설사의 역덕 기질이 정말 잘 발휘된 부분.
쿠란의 의하면 4명의 아내만을 가지라 했지만, 정작 무함마드는 계시에 따라 13명의 아내를 가졌다.(...) 이렇게 많은 아내를 두는 통에 아내들은 "무함마드는 기도와 향수, 여자를 세상에서 제일 좋아한다"며 자조적으로 말하기도 했다고. 일부다처제 아래서 여자들의 설움이 느껴진다
- 첫 아내 하디자 빈트 후와일리드(خديجة بنت خويلد) : 사이가 좋았던 걸로 유명. 무함마드는 그녀의 생전엔 다른 아내를 두지 않았다.
- 사우다 빈트 자마(سودة بنت زمعة)
- 아이샤 빈트 아부 바크르(عائشة بنت أبي بكر)
- 하프사 빈트 우마르(حفصة بنت عمر)
- 자이나브 빈트 후자이마(حفصة بنت عمر)
- 힌드 빈트 아비 우마이야(هند بنت أبي أمية)
- 의붓아들의 부인(!)이자 무함마드의 고종사촌 자이나브 빈트 자흐시(زينب بنت جحش)
- 주와이리야 빈트 알-하리스(جويرية بنت الحارث)
- 몇몇 유대인 부족 정복 중 얻은 라이하나 빈트 자이드(ريحانة بنت زيد)
- 역시 유대인 정ㅋ벅ㅋ 중 얻은 유대인 여자 사피야 빈트 후야이(صفية بنت حيي)
- 라믈라 빈트 아비 수프얀(رملة بنت أبي سفيان)
- 이집트 콥트 정교 신자 마리아 빈트 샤문(مارية بنت شمعون)
- 삼촌의 처제 마이무나 빈트 알-하리스(ميمونه بنت الحارث)
이중 일부는 입지적인 의미에서(첫 아내인 사우다나 8살의 아이샤), 일부는 과부들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얻은 아내들도 있고, 개인의 정욕을 따른 결혼도 했다.
그의 아내 사랑은 당시 아랍의 모범(!)이었고 한다. 철저히 평등의 이름 아래 매일밤 한 명씩의 여자와 잤다. 정력 킹왕짱 선지자. 하지만 아내들을 공평하게 대우했다는 것도 사실 현실은 시궁창이었던게 8번째 아내였던 마리아 빈트 샤문이 아들을 낳자, 너무 기쁜 나머지 그녀하고만 계속 어울려 다른 부인들의 질투에 큰 문제가 되었다는 언급이 있다(...)
기존 아랍의 전통을 깨고 부인을 딱 4명까지만 가지라 하였고[23] 여성의 유산상속권을 허락했다. 이는 현재까지 이슬람의 규칙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워낙에 세계 각지의 무슬림들이 여기저기에 이 규칙을 멋대로 왜곡해 무함마드 이름과 쿠란을 팔아먹는다.
그외 법으로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반복을 금지했다.
간음과 여성의 사회적 권리에 대해서는 시대적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그의 여성차별관이 노골적으로 나타나있다. 한 아내가 남편이 바람 피는 것을 목격했는데 반드시 4인의 증인이 필요한 반면(만약 4명을 못 찾으면 허위사실이라고 해서 20대의 채찍을 맞아야하는 형벌을 받아야 한다!)남편이 아내가 바람피는 것을 알아 낸다면 한 명의 증인만이 필요하다는 골때리는 차별규정을 도입한다거나, 그리고 간통을 했다고 돌팔매질로 여자를 죽이는 당시의 관습[24]을 용인하고, 이 점이 쿠란 및 하디스에 기록되어 이후 이슬람권에서 대대로 문제가 되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 문제는 대단히 심각한데, 여자가 결혼전에 성적인 관계를 가졌다면 샤리아에 입각해 돌팔매로 여자를 죽이는 관습이 아직도 이어져있고, 심지어 이슬람권 보수주의 국가들의 상당수에선 지금도 강간을 당한다 해도 남자가 문제가 아니고 강간을 당한 여자가 문제라고 해서 여자를 죽이거나, 죽이지는 않더라도 여자가 자신이 강간당했다는 사실을 증명할 최소 4명의 증인들을 못찾아서 되려 억울하게 자신이 처벌당하는 등 (그러면서 자기들은 '무함마드가 도입한 훌륭한 이슬람적 법/관습'이라고 생각하는) 악습이 아직도 많다. 흠좀무.
또한 무함마드는 생전에 무에자(معزة)란 이름의 고양이를 대단히 아꼈다고 한다. 기도를 하던 도중 무에자가 와선 옷자락 위에서 잠이 들자 고양이를 깨우고 싶지 않다며 옷자락을 잘라내곤 자리에서 일어설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성향 때문인지 현재까지도 무슬림들 중 상당수는 고양이를 애호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고양이가 마시던 물로 손을 씻기도 할 정도이며, 그에 반해서 개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하게 생각해서 "개가 있는 집에는 천사도 들어오지 않는다" 하고 가르쳤다. 그래서 이슬람에서는 개를 실내에서 키우는 것을 더럽게 여기고, 개가 실내에서 침이라도 흘리면 일곱 번은 닦아내야 다시 예배를 드릴 수 있을 만큼 깨끗해진다고 본다. 예배를 드리는데 개가 들어오면 무효가 된다고 할 정도이다.
만일 무함마드가 이슬람이 아닌 기독교 쪽으로 갔다면 역사가 달라졌을까 하는 의문이 있고 해리 터틀도브의 대체역사소설 비잔티움의 첩자처럼 아랍 세력이 기독교 문화권에 편입되어 동로마 제국이 유럽과 중동을 제패했을 것이라는 가정도 있지만 대다수의 역사학자들은 그랬더라면 아랍 기독교와 유럽 기독교가 여전히 서로 이단이라며 죽어라 싸우고 있으며 역사는 그리 달라지지 않았으리라는 주장을 한다. 어느 유럽 대체역사소설에선 과거로 간 기독교 과학자가 무함마드를 만나 자신이 가브리엘이라고 속여(첨단 기술을 동원) 그가 기독교 목사가 되게 하는데개신교가 생기기 800년이나 전인데 목사라니 미래로 와보니 십자군 전쟁도 그대로 벌어졌으며 아랍 기독교랑 유럽 기독교가 죽어라 싸우고 있었다. 9.11 테러도 아랍 기독교 과격파로 달라진 것 뿐인 탈레반이 일으켰고 여전히 미국이 아랍에 주둔하며 아랍 기독교랑 갈등을 빚었고 달라진 거 하나도 없었다. 결국 무함마드를 개종시키더라도 역사를 바꿀 수 없었다고 과학자는 절망하며 끝난다. 다만 서구와 중동의 갈등같이 거시적인 역사는 바뀌지않더라도 일부 전근대적인 이슬람 극단주의나 샤리아같은 악습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6 아랍 남성 이름
동명이인 |
ㄱ · ㄴ · ㄷ · ㄹ · ㅁ · ㅂ · ㅅ · ㅇ · ㅈ · ㅊ · ㅋ · ㅌ · ㅍ · ㅎ |
그의 이름은 아랍 세계에서 사람들에게 붙이는 가장 인기 있는 이름[25]이며 의미 자체는 아랍어로 '찬양함·칭송함'을 의미하는 حمد(ḥammada)에서 온 것으로 '찬양받는 자'라는 의미를 지닌다.[26] 보통 장남은 대부분 이 이름이다(...) 아랍 문자로는 محمد라고 쓰며 모음을 붙여 쓰면 مُحَمَّدٌ(/mʊˈħæmmæd/)로 표기된다. '함'으로 표기되는 /ħæm/의 ح 발음은 '무성 인두 마찰음'이라고 하는데 쉽게 예시를 들자면 가래 뱉을 때 내는 '카' 소리를 'ㅋ'이 아닌 'ㅎ'이라고 해보면 안다. 정 모르겠으면 EBS 제2외국어 아랍어를 들어보면 된다.
이 이름으로 유명한 사람은 방글라데시 그라민 은행 총재 무함마드 유누스, 전 복싱 선수 무함마드 알리, 스파이였지만 유능한 학자인 무함마드 깐수(정수일), 셰이크 무함마드 두바이 국왕, 탈레반 최고 지도자 물라 무함마드 오마르('물라' 는 이름이 아니라 이슬람 성직자에게 붙는 칭호다.), 이집트 혁명으로 대통령이 되었다가 군부에 의해 축출당한 전 대통령 무함마드 무르시 등이 있다.
2014년 영국에서 태어난 신생아의 이름 중 가장 많은 수가 바로 무함마드이다.[27]- ↑ 이슬람에서는 우주가 창조될 때부터 있었으나, 잘못된 방법으로 인류에게 전달되었고, 이를 정리하기 위해 신이 무함마드를 내려 보냈다고 가르친다.
- ↑ 570년인지 571년인지 미상이지만 570년을 유력하게 본다.
- ↑ 사실 위의 그림도 무함마드의 형상화에 상대적으로 관대한 시아파를 국교로 삼은 페르시아(사파비 왕조)였기에 무함마드의 얼굴을 그리지 않는 선에서 타협을 볼 수 있었던 것이지, 만약 수니파 지역이였다면 얄짤없었다.
- ↑ 한국판 제목은 '예언자 마호메트'. 다만 DVD에선 메세지란 원제로 나왔다. 1976년작으로 사막의 라이온 감독이자 할로윈 시리즈 제작자인 무스타파 아카드가 감독했다.
- ↑ 아랍 사람들의 아들 사랑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예이다. '아버지' 란 뜻을 가지는 단어의 주격 형태인 아부(ابو) 뒤에 자신의 아들 이름을 넣는다. 즉 '탈리브 아범' 이라는 의미.
- ↑ 하디자의 나이가 40세보다는 좀 더 젊었을 거라고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녀는 무함마드와 금슬이 좋아 6남매를 두었는데 출산 연령을 고려할 때 40대 여성이 아이를 무려 6명이나 낳는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까진 아니더라도 굉장히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 ↑ 아직도 세계의 일부 지역에서는 가문간에 허락 없는 살인이 나면 대를 물려서 복수한다. 심지어는 미국 마저도. 물론 남부 시골의 아주 극소수 지역에서만이지만.
- ↑ 무함마드가 이슬람을 설파하자 사람들이 무함마드에게 침을 뱉고 흙을 뿌리며 욕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무함마드가 기도 중에 우크바 이븐 아비 무이드라는 자가 다가와서 무함마드의 목을 졸라 죽이려다가 아부 바크르의 제지로 실패한 적도 있었다.
- ↑ '성스러운 이동'이라는 뜻으로 중국 등 한자문화권의 무슬림(회교도)은 으레 이렇게 부른다.
- ↑ 예수 탄생을 원년으로 잡는 서기, 단군의 고조선 개국(개천)을 원년으로 삼는 한국의 단기(檀紀)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다만 음력이라서 날짜 계산은 꽤 복잡하다는 것 같다. 아시는 분이 추가바람.
- ↑ 당시 아랍인 관점에서는 로마제국이나 페르시아 제국이 세계최강의 강대국이면서 세상의 전부였다. 중국은 너무 멀었고 프랑크 제국은 미개인에 불과했다.
- ↑ 유대인 율법학자들 시선에선 '웬 아랍인이 요상하게 변형한 유대교'를 상대하느라 좀 잔인하게 찍어눌렀을 것이긴 하다. 게다가 무함마드는 유대교 교리에 그다지 박식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 ↑ 하디스에 의하면 유대인 여자(노예로 추정된다)가 준 상한 양고기 음식(혹은 독을 탄 음식)이 원인이 되어 식중독에 죽었다고 한다. [1]
- ↑ "너희가 모세를 믿었다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 그가 나에 관하여 토라(성경)에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 ↑ 바로 그 전 구절인 11절의 '글 아는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고 하면 대답하기를 그것이 봉인되어 있으니 나는 못 읽겠노라 할 것이요,'는 생략한 것. 고대사회에서는 '예언서'는 기록되어 진 후 왜곡이나 날조방지를 위해 봉인되어 함부로 취급하지 못하게 했다.
- ↑ 여담으로 신명기에는 전쟁 포로 가운데 여자를 자기 아내로 삼는 율법에 대해 "그를 네 집으로 데려갈 것이요 그는 그 머리를 밀고 손톱을 깎고 또 포로의 옷을 벗고 네 집에 살며 그 부모를 위하여 한 달 동안 애곡한 후에 네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의 남편이 되고 그는 네 아내가 될 것이요, 그 후에 네가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그의 마음대로 가게 하고 결코 돈을 받고 팔지 말지라 네가 그를 욕보였은즉 종으로 여기지 말지니라"(신명기 21:11~14)라고 적고 있다.
- ↑ 참고로 성경 레위기 18장 15절에는 며느리와의 성관계를 금지한 구절이 있다.
- ↑ 혹은 9살
- ↑ 그것도 첫째 아내인 하디자가 죽자마자 한 결혼이었다. 아이샤의 아버지는 무함마드가 천사 지브릴에게서 알라의 계시를 받아온 직후에 개종해 무슬림이 된 인물이자 무함마드 사후 초대 정통 칼리파로써 움마(이슬람 공동체)를 이끌게 되는 아부 바크르인데, 이슬람의 전파에 그의 재력과 인맥이 크게 도움이 되었던, 무함마드의 최측근으로 활약했던 인물이었다. 더욱이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자신을 가장 가까이서 지지하던 아내와 부족장 삼촌이 이틀 간격으로 죽고 새로 부족장이 된 사람은 사이가 안 좋아서 그야말로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절박한 상황이 된 무함마드로써는 현실적으로도 기댈 데가 아부 바크르밖에 없었다고 할 수도 있다. 즉 무함마드가 아부 바크르의 어린 딸과 결혼한 데는 다분히 정략적인 의도도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포교하는 것도 일단 목숨이 붙어 있어야 할 수 있는 거지아부 바크르 항목 참조. - ↑ 다만 이 부분의 경우는 애매한 것이 애초에 쿠라이쉬 부족 때문에 다 죽게 된 사람들 보고 "얘들 죽일까, 살릴까?"라고 물어본 자체는 마치 피해자에게 가해자를 어떻게 처벌할지를 물어보는 것과 마찬가지이고 그들 입에서 저것들 다 죽이자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기는 하다. 상술했듯이 가족 내지 부족 단위로 무언가 피해를 당하면 이에 대해 대를 물려서라도 보복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풍조에서(동양에서도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걸려도 늦은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복수를 정당화하듯이) 무함마드만 뭐라고 하기는 뭐한 점이다. 다만 후술하듯 본인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법을 금지했고, 정당한 복수라고 하기에 방법도 다소 잔인했다는 것이 문제였다면 문제였지.
- ↑ 구약의 경우에도 적이라고 낙인찍은 상대에게는 일단 가차없었다. 신명기 20장 10절에서 17장 사이에 모세의 입을 빌어 "네가 어떤 성읍으로 나아가서 치려 할 때에는 그 성읍에 먼저 화평을 선언하라. 그 성읍이 만일 화평하기로 회답하고 너를 향하여 성문을 열거든 그 모든 주민들에게 네게 조공을 바치고 너를 섬기게 할 것이요, 만일 너와 화평하기를 거부하고 너를 대적하여 싸우려 하거든 너는 그 성읍을 에워쌀 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네 손에 넘기시거든 너는 칼날로 그 안의 남자를 다 쳐죽이고 너는 오직 여자들과 유아들과 가축들과 성읍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을 너를 위하여 탈취물로 삼을 것이며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적군에게서 빼앗은 것을 먹을지니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基業)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지니 곧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령하신 대로 하라."라고 한 대목이 등장하는데, 유대인을 따르지 않는 타민족에 대한 강경한 학살은 여호와의 뜻이란 거다.
- ↑ 역사적으로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기독교 역시 파생 종교인 건 맞지만 순서로 따지면 어찌됐든 기독교 기준으론 이슬람은 신흥 종교니까.
- ↑ 이슬람은 일부일처제가 원칙이다. 그러나 아내들을 모두 평등하게 사랑할 수 있다면 4명까지는 가져도 좋다고 한 것. 근데 사람 특성상 이게 불가능한지라 이슬람 법학자들은 웬만하면 그냥 하지 말라고 한다. 그래서 실제로 2명 이상의 부인을 가진 사람들은 약 2%도 되지 않는다. 사실 그놈의 지참금 문화 때문에 돈을 못 내서 결혼을 못하는 모쏠 남자들이 이슬람 세계에선 수두룩하다.
- ↑ 이건 21세기인 아직도 하는 곳이 많다... 그것도 이슬람의 이름으로
- ↑ 덕분에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이들이 선택한 이름이라고 한다. 참고로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이가 가진 성씨는 리(李)라고.
이 둘이 합쳐진 무함마드 리는 중국계 회교도나 회족말고는 없을 듯 - ↑ 같은 의미의 이름으로는 그리스어 에파이네토스(Ἐπαίνετος)가 있다.
- ↑ 무함마드Muhammad, 모하메드Mohammed, 모함마드Mohammad 등 영어 표기에 따른 철자 차이를 모두 합한 결과. 한겨레 가디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