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학부/법과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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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천하제일 서울법대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현수막...)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홈페이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동창회 홈페이지

1 개요

서울대학교 최고(最古)의 단과대학이다. 약칭은 서울법대.

서울법대는 2017년까지 존속하고, 그 이후에는 폐지된다. 그러나 동창회 측에 따르면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역시 약칭으로는 '서울법전원'이 아닌 '서울법대'를 사용하기로 하였다고 한다.[1] 아무래도 '서울법대는 대한민국 최고'라는 인식이 있다 보니 그 명성까지도 물려받고 싶은 듯. 기존의 약칭을 계속 쓰는 게 현실적으로 편하기도 하다. 정작 명성의 주 요인이었던 법학부는 사라지지만, 법과대학 폐지 이후 기존 법대의 인프라와 교수진은 당연히 전부 법전원 소속으로 옮겨가게 된다.[2]

2 연혁

경성법과대학
1895법관양성소
1909한성법학교
1911경성전수학교
1922경성법학전문학교
1944폐지
1946경성법과대학 학부
경성법과대학 예과
경성법과대학 전문부
경성제국대학
1926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률학과
1927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
1937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 제1류
1945경성대학 법문학부 법학과
서울대학교
1946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
1948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률학과[3]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과[4]
1953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과
1975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
1981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사법학과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공법학과
1997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부
2018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폐지 예정

3 역사

3.1 법관양성소와 경성법전

개학연도는 법과대학의 전신인 법관양성소가 설립된 해인 1895년이 기산점이다. 사법관료 양성을 위해 설립된 법관양성소는 일제 강점 이후, 그 기능을 잃고 경성전수학교, 경성법학전문학교로 그 계통이 이어진다. 경성법학전문학교에서는 서기 등 법원직원을 주로 배출하였으며, 변호사시험에 응시하여 변호사가 되거나 상급학교인 대학에 편입하여 고등문관시험에 응시해 사법관료가 된 사람들이 종종 나오기도 하였다.

3.2 경성제대 법문학부

상기한 경성법학전문학교 계통과 함께 1926년에 설립된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 역시 법과대학 구성에 있어 한 축을 이룬다. 경성제국대학 법과는 실무자 양성이 목표인 경성법학전문학교와 달리, 행정, 사법관료 양성과 법학연구를 목적으로 하였다. 이 때문에 재학생 상당수가 고등문관시험 사법과나 행정과에 응시하였다. 일본 본토의 도쿄제국대학이나 교토제국대학과 달리, 경성제국대학은 법학부가 아닌 법문학부 체제를 택하고 있었기 때문에 법학과 단일 학과에서 법률학, 정치학, 경제학 등 지금보다 포괄하는 영역이 넓었다. 1930년대 중후반에 이르면 법학과 내에서 법률, 정치, 경제, 제 분야에 해당하는 이수코스를 분류하기도 하였으나, 마찬가지로 법문학부 체제를 채택하고 있는 도호쿠제국대학, 규슈제국대학과 달리 경제학사 학위과정을 끝내 제공하지는 않았고, 경제학 집중과정에 해당하는 법학과 제3류 역시 그 구성이 순수경제학보다는 정책분야에 편중되었다.

3.3 경성법전과 경성제대 법문학부의 통합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은 이러한 서로 다른 배경을 지닌 경성법학전문학교와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라는 양 교의 통합을 통해 발족하였다. 그러나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해방이 되자, 경성법학전문학교는 독자적으로 대학승격을 추진하였고 경성제국대학 역시 일제의 잔재를 떨쳐내고자 경성대학으로 개칭하고 법문학부 법학과를 법학부라는 하나의 학부로서 독립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고 있었다. 1946년이 되면 경성법학전문학교는 가칭 서울법과대학이라는 이름으로 학부과정, 전문부과정, 예과과정 편입생과 신입생을 모집하는 공고를 낼만큼 독자적 대학승격운동이 진척을 본 상태였다. 경성대학 역시 법문학부 구성 및 법학부, 문학부의 승격에 있어서는 난항을 겪었으나, 기존의 법학과를 법학과, 정치학과, 경제학과로 분과하고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경성대학 1회 졸업생에게 경제학사 학위 역시 부여하는 등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1946년 7월 미 군정이 국립서울대학교안을 발표하고 경성법학전문학교와 경성대학 법과계통을 '법과대학'이라는 하나의 단과대학으로 통폐합하기로 결정되면서 각 교의 정상화 노력은 무위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른바 '국대안 파동'이라 불릴만큼 국립서울대학교안에 대한 좌익계열 교수진, 학생의 반발이 격렬하였고 국립서울대학교 호가 출범한 9월경이 지나서도 동맹휴학 등 분란이 이어졌으며, 1년이 지난 1947년 경에 이르러서야 학내의 혼란은 잦아들게 된다.

3.4 문리대학과의 강의실 분쟁

국대안 파동으로 인한 혼란은 진정되었지만, 이후의 초기 법과대학에서는 문리과대학과의 강의실 분쟁으로 진통을 겪게 된다. 경성대학 법문학부 중 법학과는 경성법학전문학교와 통합하여 법과대학이 되었으나, 실제로는 법학과가 경성법학전문학교에 흡수되는 형태였다. 이로 인해 초대 법과대학 학장으로 경성법학전문학교 교장 고병국 교수가 취임하였고 교사 역시 경성법학전문학교가 위치한 청량리에 위치하였다. 그러나 법과대학의 한 축은 경성대학 법문학부 법학과였고, 법과대학 측에서는 그에 해당하는 만큼의 동숭동 교사를 사용할 권리가 있다고 보아 동숭동 교사 이전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동숭동 교사를 쓰고 있던 문리과대학 측은 경성대학 법문학부의 온전한 계승은 문리과대학이므로 강의실 양도를 거절하였고 이로 인해 강의실 사용을 두고 분쟁이 발생한 것이다. 이 강의실 분쟁에서는 법대 측이 패하였으나, 동숭동 캠퍼스 근처 위치한 구 경성공업전문학교 교사를 쓰고 있던 공과대학 일부 학과가 공릉동 공과대학 부지로 이전함에 따라 법과대학은 새로 교사를 마련하여 동숭동으로 이전하게 된다. 지금 보면 사소한 문제라 할 수 있겠으나, 각종 회고담에 꽤 비중 있게 남아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서울대학교 총장 이춘호의 사임을 불러오는 등 그 여진이 컸다. 서울대학교 각 단과대학의 독립성이 통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막강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이후의 법대 캠퍼스를 문리대 캠퍼스와 합쳐 동숭동 캠퍼스라고도 부르지만, 법대만을 따로 가리킬 때에는 낙산캠퍼스라고 한다. 낙산장학회는 여기서 따온 이름이다. 지금의 사대부초, 사대부여중 자리가 그곳인데 현재도 법대 정문과 법대문방구가 남아있다.

3.5 법학과와 행정학과

1975년까지 존속한 법과대학 행정학과는 1948년 신설된 학과로 이름과 달리 행정학을 가르치는 학과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김증한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단과대의 소속 학과수에 따라 지원에 차등이 있었기 때문에 보다 많은 지원을 받기 위해 행정학과를 증설하였다고 한다. 일본의 구제 법학부(우리나라의 법과대학에 상당) 역시 법률학과, 정치학과의 두 체제였고, 경성제대 또한 세 개의 류를 둔 전례가 있었기 때문에, 교수진이 단일학과보다는 두 학과를 두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판단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측된다. 59년 행정대학원이 설립되자 학부 과정 행정학과의 교과과정 및 학칙도 개편되어 1963년도 졸업생부터 행정학사 학위를 수여하기로 예정되었다. 그러나 내부의 반발로 교과과정이 복구되었고, 1968년도 졸업생까지는 원칙은 법학사, 원하는 자에 한해서만 행정학사 학위를 수여하였다. 이후 1969년부터는 학과 불문 법학사만을 수여하게 되었다.

행정학과는 종합화 과정을 거치며 사회과학에 해당하는 행정학이 사회과학대학에 속해야 하며 이미 유사학과인 정치학과가 있으므로 폐과하기로 한다는 의견이 수용되면서 관악캠퍼스가 이전과 함께 1975년 폐지되었다. 행정학과의 인원은 법학과가 수용하였으나,급속한 통합으로 인해 학사행정상 단일 과에서 법대 정원을 모두 맡아 교육하기가 어렵다는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되었고 외국의 사례가 주요 논거로 제시되었는데, 당시 프랑스는 법과대학을 사법학과, 공법정치학과, 경제학과의 3개의 학과로 운영하고 있고, 일본이 법학부를 사법, 공법, 정치, 세 개의 전공으로 구분하고 있었다.

3.6 사법학과와 공법학과

결국 1981년 사법학과와 공법학과로 분리되었다. 법학과, 행정학과 시절의 압도적인 법학과 선호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사법학과가 공법학과보다 학생들의 선호에 있어 강세를 보였으며,[5] 1980년대의 시대상을 반영한 것인지 공법학과의 경우, 학생운동권 학생이 많았다고 한다. 사법학과, 공법학과 양 체제는 1997년 법학부로 통합되면서 종식되었다.

3.7 로스쿨 도입 이후

2008년을 마지막으로 법학교육이 전문대학원체제로 전환되면서 법과대학 신입생을 모집하지 않고 있다.

4 학생회

단과대학 학생회 슬로건: 살아있다는 것은 싸우는 것이다

각 반 및 반내 학회 배정은 신입생 성명순이었다고 한다.

분반 명칭: A반, B반, C반, D반.

학생회가가 있다.[6]

1. 동포의 가슴에 동트는 새날 / 살아 살아 일어선 청년학도여 / 하나로 주인되는 해방의 한 길 / 열고 열어 나서자 굴레를 깨고 / 학생회 깃발 아래 내 사랑 법대여 / 온몸으로 난타하라 정의의 종을
2. 그대의 가슴에 날리는 깃발 / 민중의 아들딸 청년학도여 / 자주 민주 통일의 피어린 역사 / 이어서 이루리 사슬을 끊고 / 학생회 깃발 아래 내 사랑 법대여 / 온몸으로 난타하라 정의의 종을

5 출신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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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리고 법전원생들이 맞춘 과잠바를 보면 서울대 로고 안에 法大라고 쓰고 다닌다.
  2. 지금도 교수들은 '법과대학 교수'이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이지만, 법대가 폐지되면 오로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만 남게 된다.
  3. 일반법학전공, 사법학전공, 형사법학전공, 비교법학전공의 세부전공을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존재
  4. 일반공법전공, 외교학전공의 세부전공을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존재
  5. 일단 법학과로 입학하였다가 2학년 올라가면서 사법학과, 공법학과 중에 선택하였다. 두 과의 인원을 거의 같게 나누므로 성적에 따라 '잘리는' 인원이 생길 수 있었다(...). 두 과는 필수과목이 조금 다를 뿐 다른 차이는 없었다. 과가 다르답시고 사법학과끼리 공법학과끼리 따로 노는 것도 아니었고...
  6. 이동민(85학번) 작사, 이헌영(86학번) 작곡.
  7. 2010년 2월에 미등록으로 제적되었다.#
  8. 검사 출신, 전 한나라당 대표. 현 창원시장. 전 인천광역시장인 안상수와는 동명이인(한자 이름은 다르다).
  9. 국제법학자 겸 정치인. 형법학자인 이상돈(1961)과는 동명이인(한자 이름은 다르다).
  10. 소설 '장군의 아들'을 쓴 소설가.
  11. '미궁'으로 유명한 가야금 연주가 그 황병기가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