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민주화운동/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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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가로 광주 사태, 광주사태라는 표현은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명백한 왜곡이므로 여기로 넘겨집니다.

5.18 민주화운동의 옛 이름인 광주사태에 대해서는 5.18 민주화운동 문서를, 1971년 경기 광주대단지사건에 대해서는 광주대단지사건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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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역사왜곡
광주민주화운동 진보편향 명칭설5.18 역사왜곡/TV조선5.18 역사왜곡/채널A5.18 연고대생 북한간첩설

목차

1 개략

사회학자들은 경제가 어려워지면 나타나는 파쇼 현상의 첫 단계로 해석합니다.

-sbs 뉴스에서

파시즘. 파시즘입니다. 그러니깐 '힘쎈 권력자가 등장해가지고 싹 쓸었으면 좋겠다'는 자포자기 심정이죠. 광기, 폭력, 학살

- 김동춘 교수가 SBS에서 인터뷰 중 한 말에서[1][2]

“뭐라고? 600명이 뭔데?”(전두환), “이북에서 600명이 왔다는 거예요. 지만원 씨가 주장해요”(정호용) "어디로 왔는데?"(전두환), "5.18때 광주로. 그래서 그 북한군들하고 광주 사람들하고 같이 봉기해서 잡았다는 거지."(정호용) “오... 그래? 난 오늘 처음 듣는데” -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의 2016년 5월 발언#[3]

1995년 12월 19일, 대한민국 국회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관련된 것에 대해 특별법[4]을 가결, 통과시켰고 5.18을 '합법적 활동'으로 규정하였다.

이름대로 광주 민주화 운동[5]이 항쟁이나 민주화 운동이 아닌 폭동이라고 주장하는 설로, 이를 주장하는 대표적인 인물과 단체로는 지만원[6]과 전사모, 일베저장소 등의 단체들이 있다. 심지어 천하의 그 전두환조차도 지만원이 북한군 600명 왔다는 얘기를 전해 듣더니 "처음 듣는 얘기"라고 시크하게 씹어버렸다(...) 당연히 북한군 개입설의 성지 중 한 곳인 일베는 뒤집어져 버렸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사진 몇 장이나 자칭 탈북자란 사람의 증언 인터뷰 등만을 보고서 광주 민주화 운동을 폭동이라 믿고 있다거나, 북한에서 파견된 간첩들이 개입한 일이라 생각해 왔다면, 당신은 날조된 자료와 언론플레이에 놀아나 속고 있거나 아니면 속고 있던 것이다.

민주화 운동을 왜곡하는 세력 중에서는 경기도 광주시광주광역시를 구별못하는 이들도 있다.[7] 제대로 알지 못 하면서 왜곡된 사실을 반복적으로 주장하는 것. 심지어 영문 위키피디아에도 광주폭동이라고 기재되어 있기도 하다.

어떤 사람들은 아예 광주민주화 운동을 전라도가 독립하기 위한 독립전쟁이라고 말하기도 하며, 개념을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린 몇몇의 초딩들은 폭도들의 잔당이 아직도 건재하고, 이 잔당이라는 작자들이 천안함세월호를 침몰시켰다는 심히 삼류 양판소스러운 얘기들을 지껄이기도 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광주 민주화 운동은 대한민국 국회에서 합법행위로 규정된 지 오래 되었고, 단 1명의 북한군도 개입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북한군에 의한 폭동도 당연히 아니다. 또한 그 민주화 운동은 높은 시민의식 속에 법적 정당성은 물론 도덕적, 윤리적 정당성까지 있는 숭고한 역사적 행동이다. 다만 전두환이 일으킨 폭동을 진압하려 했다고 하면 맞는 말이 된다. 광주는 총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회의 폭동이야. 계엄군을 진압하지 않을 수 없잖아? 물론 진지하게 따지자면 당시 전두환에게 완전한 국가적 권력이 있었으므로, 전두환의 폭동이라는 표현은 전혀 맞지 않다. 전두환의 대학살극이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 된다.

이들의 문제는 첫째는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입장[8]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위해 부정한다는 점이고, 두번째는 대한민국의 무고한 국민이 다수 사망한 사건임에도 북한과의 연관성 문제로[9] 사실을 왜곡하여 고인들을 사실상 모독한다는 점이다. 안타깝게도 극우의 이런 만행은 아직까지도 현재진행형이다. 일베를 중심으로 5.18에 대한 왜곡은, 이미 30년도 지났고 대법원에서까지 몇차례나 판결이 났고 거기에서 조작왜곡으로 판명된 기관의 자료를 다시 집중적 조직적으로 도배하는 행위, 또 왜곡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특정지역에 대한 비하와 몇몇 단어들을 (민주화를 부정적 표현으로 쓴다던지) 하는 논란거리를 점화한다던지 하는데 있어서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이들이 주장하는 폭동설은, 대한민국의 헌법 기관인 사법부, 입법부, 행정부, 헌법재판소가 이론 없이 확인한 민주화 운동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반헌법적 발언[10]이며, 광주 민주화 운동에 참가하셨던 분들에 대한 모독이니 함부로 꺼내지 않는게 좋다. 그냥 말이 아니라 정말 형사법의 처벌을 받을 수 있는 일이다. 이러한 이유로, 나무위키의 편집지침상 민간인 학살 행위를 저지른 세력에 대해 옹호하는 서술을 금지하고 있고, 이 폭동설이 민간인 학살 옹호의 예시로 당당히 나와 있으며, 따라서 이 문서는 왜곡에 대한 반박 형태로만 작성되어야 한다.

2 실상은 거짓

내용을 보자면 은근히 설득력 있어 보이고, 그럴듯해 보이는 증거자료도 꽤 많은 편이라 낚시당하기 딱 좋다.

하지만 조금만 파고 들면 인터넷에서 나도는 증거랍시고 내놓은 것들이 부실한데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논리적으로 오류투성이인 주장들도 많은 편. 일부는 북한 개입설과 함께 주장하고 있다!

이들의 주요 논지는 전두환이 정권에서 내려온 이후, 김영삼이 대중들에게 정부의 신뢰를 얻기 위하여 5.18 사건을 민주화운동이라고 왜곡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김대중은 전두환에게 복수심을 갖고 전두환이 최초 발포명령자라고 구라를 쳤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추측성에 기댄 부분이 굉장히 많기에 이것을 진실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결론을 내리자면 그저 거짓 음모론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2.1 북한 개입설

북한이 5.18 민주화운동 당시 특수부대를 투입했다고 하는 설. 북한이 개입한 사실이 진실이라고 주장한다. 대체적으로 5.18 사건이 나자 북한군이 투입되었다는 주장과, 일어나기 이전부터 주민들을 선동하여 5.18이 일어났다는 주장 등으로 북한이 개입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끼리도 서로 잘 맞지 않는다. 아래 내용들은 인터넷에서 주로 회자되는 내용임을 밝힌다. 5.18 북한개입설 보도사건처럼 언론에 떴다가 난리가 나기도 하는 쉰 떡밥들이기도 하다. 애초에 광주까지 몰래 침투 할 수 있는 군사력이 있었다면 청와대가 남아났겠냐[11]

계엄령이 떨어진 광주에 북한군이 단 1명이라도 들어왔다면, 그래서 그 북한군을 사살하였다면 그 치적은 국방사에 있어 길이길이 남을 최고의 자랑거리에 일선 사수부터 장성급까지 그 이유로 훈장이 쏟아져야 하나, 그런 이야기도 없다. 당시 현장에서 직접 취재한 적이 있는 기자인 조갑제 역시 단 1명의 북한군과도 연관이 없다는 꾸준한 주장을 하고 있다. 오히려 그는 5.18 자체가 숭고한 반공 민주화 운동이자 계엄군의 총에 힘없는 민간인이 맞아 죽은 사건임을 강조하며 35년이 지난 2015년 현재도 그 논조는 변함없다. 북괴는 오판말라!라는 현수막이 찍힌 사진이 바로 조갑제 기자가 찍은 사진인데 이 말의 의미는 혼란스러운 틈을 타 북한군이 개입하는 일을 막기 위한 시민의 순수한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정설이다. 이 현수막만 봐도 북한군이 개입할 틈이 없다는 것이 드러난다.

아니 애초에 1981년 4월 18일, 중국 심양에서 열렸던 덩샤오핑-김일성간 회담에서 김일성이 "우리가 광주사태와 같은 인민봉기에 개입하지 않은 데 대해서 …(중략)… 이에 대해서 우리 정치국은 여러 번 토의를 했다. 미군이 남조선에 있는 한, 만일 우리가 개입하면 또 미국과 싸워야한다. 따라서, 우리는 남조선 사건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 차례 천명한 바 있다."라며 개입하지 않았다고 인정했다.[12]

또한, 삼성그룹 자본의 동양방송(TBC)은 전두환 정부 언론반의 위압기운(국가 관리 차원 실행)으로 KBS, MBC[13]에 알렸다는 (국가 내란 엄폐를 실현하기 위한) '북한 군중의 광주 장악설'로 위장 보도한 일에 대해 1980년 5월 22일에 동양 제3 라디오의 '뉴스 기상도' 프로그램에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 현황' 보도로 정부한테 반박하다가 언론통폐합이라는 정부 공식 조정 방책에서 KBS로의 공식 강제 통합으로 흡파(흡수+파산)당하였다.[14]

2.1.1 전두환의 증언

월간지 신동아 2016년 6월호에 실린 인터뷰의 내용을 일부 발췌한 것이다. 원래 시기상 맨 밑단에 있다가 워낙에 임팩트가 큰 발언인지라 최상단으로 올라왔다. 전두환은 분명 5.18 학살의 책임자는 맞으며 그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런 전두환조차 적어도 북한군 개입을 부정하였다는 것 자체는 매우 의미있는 사건이다.

기자 : "5.18당시 보안사령관으로서 북한군 침투와 관련된 정보보고를 받은 적이 있습니까?"

전두환 : "전혀."
이순자 : "지금 그 말을 하는 사람은 각하가 아니고 지만원이란 사람인데, 그 사람은 우리하고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고, 독불장군이라 우리가 통제하기도 불가능해요. 그걸 우리와 연결시키면 안 돼요."
고명승 : "북한 특수군 600명 얘기는 우리 연희동에서 코멘트한 일이 없습니다."
전두환 : "뭐라고? 600명이 뭔데?"
정호용 : "이북에서 600명이 왔다는 거요. 지만원 씨가 주장해요."
전두환 : "어디로 왔는데?"
정호용 : "5.18 때 광주로. 그래서 그 북한군들하고 광주 사람들하고 같이 봉기해서 잡았다는 거지."
전두환 : "오... 그래? 난 오늘 처음 듣는데"

일베 민주화 운동 떡밥의 최후의 날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2.1.2 김일성: 미국이 무서워서 개입 못했다

미국과 중국이 외교관계를 맺고 관계를 크게 바뀐 뒤에 북한의 태도는 크게 바뀐다. 다음은 그걸 잘 보여주는 회담이다. 1981년 4월 심양에서 김일성과 등소평이 회담을 한 내용이다.

김일성: 1979년 남조선 사태(12.12 군사반란) 이후, 남조선 인민들의 봉기가 전국적으로 파급되는 등 혁명적 상황이 앞으로 다시 재현될 수도 있고, 군대 내에서 혼란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문제의 결정적인 관건은, 미국이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는가 하는 데 있다.

미국은 전두환 정권을 등장시켰다. 그러나 남조선 정세발전을 보면 한동안은 안정될 것 같다. 등소평 동지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는 남조선 문제를 처리하는 전략방침에 대해서 모택동 주석과 주은래 총리가 살아 계실 때 연구 결정해 놓았는데 미군이 남한에 주둔하는 상황하에서, 우리가 남조선 인민봉기에 개입한다면 전쟁이 일어난다. 때문에 우리는 개입하지 않는다. 우리가 광주사태와 같은 인민봉기에 개입하지 않은 데 대해서 남조선의 혁명가들은 우리를 비판하였다. 인민들이 죽는 것을 우리가 수수방관했다는 것 이다.

이에 대해서 우리 정치국은 여러 번 토의를 했다. 미군이 남조선에 있는 한, 만일 우리가 개입하면 또 미국과 싸워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남조선 사건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 차례 천명한 바 있고, 남조선 혁명가들에게 무조건 문제를 너무 단순하게 보아서는 안 된다고 설득했다.

세계는 지금 조처에 제 3차 대전이 폭발할 위험성을 내포하는데, 조선에서 먼저 싸움을 일으켜 세계를 재난으로 끌고 갈 수는 없다. 우리는 남조선 인민들로 하여금 민주화투쟁을 강화해서, 담판(협상)을 통해서 평화적인 방법으로 통일문제를 점차 해결할 수 밖에 없다. 부차적인 방법으로는 해결될 가능성이 크지 않다. 그러니 시험해 볼 만한 것이다. 다른 방법이 없기 대문이다.

요컨대 지금 상황화에서는 혁명의 방법, 폭력의 방법으로는 정권을 쟁취할 수 없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쟁취한다는 것은 환상이다. 지금 유일한 방법은 연방제를 쟁취하는 것이다. 그것은 주로 미국에 대해서 공작을 해서 미국이 연방제를 동의하도록 하는 것이다. 연방제는 남조선의 현행 사회제도와 정권을 그대로 유지하고, 우리도 변경하지 않으며, 두 정권 위에 최고민족회의를 설치해서 동등한 인원으로 의회를 구성하고, 남북이 각기 1년씩 의장을 맡는 것이다. 이것은 쌍방 모두 유익하다. 여러 분야에서 협력의 폭을 넓히고, 교류를 해서 정치상으로 오해를 제거하고 남북 이산된 가족이 서로 왕래하게 한다.

미군 문제에 관해서, 미국과 남조선이 미 군사기지를 보유하는 것이 서울이 염려되고, 또 소련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라면 다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만약 미국이 연방제에 동의한다면 쿠바관타나모와 같이 진해만을 미국에 제공해서 미군을 그곳에 집결할 수 있게 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원하는 바는 아니지만 부득이한 상황을 말한 것이다.

만약, 미국이 소련을 견제할 군사기지가 곡 필요하다면, 이런 양보를 해서 우리의 연방제에 대한 미국의 동의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우리를 믿지 않을 것이다.

재작년에 등소평 동지는 나에게 적당한 시기를 선택해서, 조선반도에서 미국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을 것이라는 설명을 발표하는 것을 고려해보라고 말한 바 있다. 원래 작년 봄에 그런 성명을 발표할 작정이었는데 남조선 형편의 변화로 그만두었다. 우리는 미국과 적대관계에 있었지만, 앞으로는 친선관계를 수립할 수 있다.

우리는 반드시 미국과 손을 잡아야 하며, 중국이 조선·미국 관계개선에 협조해 주기 바란다. 지금 남조선 경제가 우리를 초월하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경제 문제는 밑에 사람들이 토의할 것이다. 끝으로 말할 것은, 우리가 먼저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니 동지는 안심하라.』 - "심양(瀋陽)에서 등소평과 김일성의 대담기록". 1981. 4. 18., 오진용, 김일성시대의 중소와 남북한, 2004, 나남출판, 81~83쪽에서 재인용.

『김일성의 미국에 대한 이런 식의 '짝사랑'은 좀처럼 식지 않았다.』- 오진용, 김일성시대의 중소와 남북한, 2004, 나남출판, 71쪽
『김일성과 등소평의 대화를 주의해서 보면, 김일성이 대남전략과 관련해서 매우 세세한 부분까지도 상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김일성은 등소평에게 '대미 전략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을 털어놓고 있다.

심지어 김일성은 미국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라면 쿠바의 관타나모처럼 '통일 후'에 진해항을 미국에게 내줄 용의가 있다는 점까지 밝히고 있다. 김일성의 미국에 대한 '짝사랑'의 정도가 이런 수준이었고, 매우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오진용, 김일성시대의 중소와 남북한, 2004, 나남출판, 84~85쪽

요약

1. 미국이 무서워서 '광주사태'(5.18 광주민주항쟁)에 개입 못 함
2. 미국과 친해지기 위해라서라면 진해항을 미국에게 주겠다고 함.
3. 미국과 친해지게 해달라고 중국에게 구걸 (그러나 등소평은 끝내 이뤄주질 않음)

2.1.3 시민들의 장갑차 운용

일반 시민들은 군용 장갑차를 몰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북한 특수부대가 개입하여 장갑차를 몰았을 것이라고 하는 주장.

실제로는 일반인들도 군용 장갑차를 모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1980년대 당시 광주에 있는 방위산업시설은 아시아자동차(현 기아자동차 광주공장)가 유일했는데 [15] 1976년 기아자동차에게 인수된 이후 적자를 줄이기 위해 당시 KM900 장륜식 장갑차를 생산하였다. 이탈리아의 자동차 제작사 피아트에서 설계한 것으로, 궤도식 장갑차와 달리 일반인들의 운용에 큰 어려움이 없다고 한다.[16] 광주 시민들은 이 자동차 공장에서 군용차량과 장갑차를 탈취하여 계엄군에 대항하였다.

그리고 당시 시민군 중에서 군대에서 장갑차 운전을 하다 온 사람이 있었다면 차륜형이든 궤도형이든 충분히 몰 수 있었을 것이다.

2.1.4 시민들의 전차 운용 및 개발

시민들이 장갑차를 운용했다는 주장에서 더욱 악질적이고 판타지스러운 얘기로 변질된 주장이다.

시작하기 앞서 일러두자면 이 설을 최초로 주장한 이들은 다름아닌 사이버민족방위사령부로, 종북주의자들이다.[17]

대체적으로 이들의 주장은 북한이 시민군에게 전차를 수십대 공여해줬는데, 공여된 전차의 대부분은 T-72였으며, T-80T-90은 소량을 지원해줬으며, 공여된 전차들은 모두 시민군에 의해 운용되었고, 대부분이 시민군에 의해 자폭 처리되었다고 한다. 거기에 시민군이 독자적으로 전차를 설계했는데, 이 전차의 프로토타입이 매우 뛰어나서 이 프로토타입과 설계도를 이후 입수한 계엄군이 이 설계도를 약간 손봐서 서방식 전차처럼 수정해서 전차를 생산했고, 그 전차가 바로 K-2 전차라는 것.이건 또 뭔소리여... 두산 인프라코어의 알바가 분명하다 이후 이 설계도는 한국이 중국과 러시아에게 팔았는데, 중국은 이 설계도를 99식 전차를 개발했는데 참고했으며, 러시아는 아르마타를 개발했는데 참고했다고 한다.역시 종북들이 지껄인거답게 너무나 병맛스럽다.

밀리터리에 관한 지식이 조금만 있어도 이 주장을 뜯어 보면 완전한 헛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단 T-90은 5.18이 일어난 한참 뒤에 개발된 물건이며, 북한은 T-72와 T-80을 전혀 보유하지 않고 있다. 자기들도 보유 못한 물건들을 어떻게 북한이 시민군에게 공여해줬고, 도대체 북한이 어떤 능력으로 사방이 봉쇄된 도시에 전차 같은 중장비를 수십대씩 보내줄수 있겠는가?[18] 한반도에 T-80이 처음 들어온 것도 90년대 한소수교로 인한 1차 불곰사업 때이다. 그리고 시민군이 전차를 설계했다고 하는데, 전차는 그렇게 쉽게 설계하고 프로토타입을 한달도 안되는 기간만에 뚝딱 찍어낼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19] 인도의 아준 전차가 괜히 악명을 떨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K-2 전차는 K-1 전차의 후계 기종이기에 K-1의 설계를 바탕으로 설계가 되었으며, 아르마타는 T-95를 바탕으로 제작됐으며, 현대 전차와의 설계 사상과 운용 사상부터가 판이하게 다른데, 뭐하러 구세대 전차의 설계를 참고하겠는가?

사족으로 이런 허무맹랑한 양판소스러운 얘기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더 나아가서 시민군이 전투기와 헬기를 운용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쯤 되면 오히려 이런 장비를 갖고도 허무하게 무너진 시민군의 전술 운영은 매우 문제가 많았고 무능했다는 이야기 밖에 안 된다. 결국 시민군들께도 결례인 주장이다.

2.1.5 북한제 무기 발견

북한군의 무기가 다수 발견되었으며, 실제 그 증거 또한 가지고 있다고 하는 주장. 주로 AK소총이 발견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또한 먼저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당시의 국시는 반공이었다. 광주민주화 운동 또한 빨갱이를 잡는다는 명분하에 계엄군이 진군한 것이다. 근데 AK소총이 실제로 다수 발견되었다면 분명 전두환 정권이 이를 증거삼아 자신이 저지를 행위를 옹호했을 것이다.[20] 그러나 인터넷을 아무리 뒤저도 실제로 AK소총이 발견되었다는 뉴스나 정확한 증거자료는 찾기 힘들다.

파일:Attachment/광주폭동설1.jpg
한때 5.18에 관련된 박물관에서 북한제 총이 나왔다는 말이 나돌았다. 그 무기의 정체는 PPSh-41... AK 소총도 아니고 2차대전 당시 쓰던 총기다. AK47이 베트남전에서 쓰인지 10년이 더 넘은 시점에서 북한이 뭣하러 파파샤를 줄까? 그것도 일반군이 아닌 특수부대라는 사람들에게. 하지만 폭동설 지지자들은 PPSH-41이 시가전에서 굉장히 뛰어나며, 내구도도 오히려 높았기에 주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반론이 나왔다. 위 사진의 확성기를 자세히 보면 Q마크가 있는데, Q마크는 82년도부터 나왔다. 게다가 유물 전시회도 아닌 그냥 시민군 체험 행사. 그냥 촬영용 소품을 가져다 전시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장전손잡이도 없는데다, 방아쇠울이 제대로 구현되어있지 않고, 무엇보다 안전장치가 없다. 가까이서 찍은 사진을 보면 총기 전체가 나무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안전장치도 없는 실총을 유리막과 같은 어떠한 보호 장치도 갖추지 않은 채 저런 식으로 전시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애초에 불가능하다.

2.1.6 당시 무기고 습격과 탈취의 전문성 여부

이런 주장을 하는 인물의 대표로는 파워블로거대사가 있다. 당시 시민들의 무기고 습격 전개를 보면 최소 1천명 이상의 인원을 조직하고 각 습격대의 책임자와 목적지를 정해서 동시 습격을 지시해야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당시 무기고 습격에는 이런 전문성은 전혀 필요없다.

1990년대 초에 예비군 무기 이관 사업이 있기 전까지는 전국의 경찰서나 파출소, 출장소에 무기를 보관했다. # 당시 무기고는 보안이 허술한 경우가 상당했고 그에 따른 범죄가 여럿 일어났다.

카아빈 삼정 모두 예비군서 훔쳐

한편 문과 이가 3년동안 범행에 사용한 총은 카아빈 3정으로 이총들은 이들이 자살한 후 현장에서 각각 발견됐다. 이들 총은 모두 칠이년 구월 사이리밤 구시부터 이튿날 새벽 육시사이 경기도 평택 군팽성 면 모예비군 분산무기고에서 도난당했던 총으로 확인됐다.

경찰에 따르면 도난당일밤 무기고를 지키던 야간근무자 사명은 무기고에 자물쇠를 잠가놓은 채 근무지를 이탈, 마을로 내려가 있었다는 것인데 경찰은 그동안 수사결과 총기의 행방을 찾지 못 하고 있었다.


동아일보 1974.07.29#
예비군 교육중 카빈 도난

김씨 총기 수사서 드러나

이정수씨 피납사건의 용의자로 검거된 김지홍 씨가 숨겨둔 카빈 총의 출처 수사에서 서울성동 구 신사동 예비군중대에서 카빈총 일정을 잃어버린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예비군의 무기관리가 소홀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동아일보 1972.10.10#
청년구속 예비군무기소서 총 훔쳐

청년 구속
예비군 무기소 총 훔쳐
대전 일일 보령경찰서는 예비군 무기소에서 총을 훔친 서울서대문 구 연희 일동일팔 김영국씨를 특수절도 혐의로 구속했다.

김씨는 지난달 이십구일밤 본적지인 보령군 웅천면 독산이 예비군무기고의 문을 부수고 카빈1정과 실탄60발을 훔쳐 달아난 혐의다. 충남도경은 현지무기고 관리책임자를 문책할 방침이다.


동아일보 1971.12.02#
영등포 공포 3시간

카빈 든 10대 둘 다방서 난동
경관 두명 사살
백여발 난사
네명 중경상
예비군무기고 총 훔쳐 심야인질 손님이 검거

십칩일 밤 십시 삼십분경 서울영등포 구 영등포 사가이제일나사2층 대호다실(주인 박동근, 사이)에서 강원도 영월서 상경한 박모(17) 김모(16)군 등 2명이 예비군 무기고에서 훔쳐 갖고 온 카빈총을 난사, 손님과 종업원등 팔 명을 인질로 삼고 영등포 경찰서 중앙 파출소 정윤종 순경과 행인 김봉주 씨 등 이명을 쏴죽이고 행인 한병호 씨 등 사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동아일보 1971.08.18 #

또 카빈 5정 도난

예비군 무기고 실탄 9백발도
직장예비 무기고에서 보관중이던 소총과 훈련용 실탄이 관리소홀로 대량 도난당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9일 경찰에 따르면 전남 여수시 충무동 한전 여수 지점 직장 예비군 무기고에서 보관중이던 카빈소총 5정과 훈련용 카빈 소총 실탄 9백발이 지난 4일 상오 9시부터 7일 사이에 도난당했다는 것.

이 같은 총기류 도난 사고는 지난 7일 하오 3시 한전 여수 지점 경비원이 순찰근무중 무기고 출입문을 잠가놓은 철제 빗장이 파손돼 있는 것을 발견, 무기고 내부를 확인한 결과 밝혀졌다.


경향신문 1982.03.09 #
허술한 예비군 무기고

두 중학생 소총 3자루 훔쳐

예비군 무기고에서 소총 3자루를 훔쳐낸 중학생 2명이 경찰에 붙잡혀 구속영장이 신청되었다.

경찰에 따르면 같은 마을 친구인 대구시 D 중 3년 조모군(15)과 경북달성군 D중 3년 이모군(15)등 2명은 지난 1월 22일 밤 9시경 달성군 옥포면 모 예비군 무기고에서 담을 넘어 환기창을 뜯어내고 침입, 이무기고에 있던 M1소총 1자루와 카빔[21]1자루를 훔쳐내 무기고에서 1백m가량 떨어진 비닐하우스에 숨겨두었다가 다음날 3km정도 떨어진 야산바위틈에 묻었었다는 것.

또 이 들은 1월 25일밤 9시 경 같은 방법으로 이 예비군 무기고에서 M1 1자루를 다시 훔쳐냈다.


동아일보 1982.03.05 #

보면 알겠지만 무기소 습격의 전문성은 전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여러 시민들이 무기고의 위치를 인지한 상태이며 그 무기고 습격에는 어떠한 전문성도 요구되지 않지만 미리 조직하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다는 주장은 상식적으로도 납득이 되지 않는다.

그 외에도 대사 문서에 가면 이 조직적 논란에 대한 자세한 반박이 있으니 조직적 습격설에 관심 있는 사람은 확인해 볼 것.

2.1.7 북한의 5.18 기념

북한이 5.18을 기념하기때문에 북한이 개입한 것은 사실이라는 주장.

하지만 북한은 4.19와 6월 항쟁도 기념한다. 4.19 혁명과 6월 항쟁도 북한이 개입했다는 주장이 없는 것이 다행이다. 북한은 4.19 혁명, 6월 항쟁, 부마항쟁, 미선이 효순이 사건도 자기들 입맛에 맞춰 왜곡해가며 기념한다. 이것은 단지 위의 사건들을 반정부 투쟁으로 내부 선전하기 위해 써먹는 것에 불과하다. 중국에서 2.28 사건을 기념한 것과 일맥 상통한 것.

5.18을 왜곡하는 우익 세력들 중 4.19 혁명도 북한 간첩이 일으켰다고 생각하는 세력들도 존재하긴 한다. # 그런데 저 말은 곧 나는 헌법 정신을 부정하겠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22]

2.1.7.1 5.18 남파간첩 위령비

북한에서 위령비가 나왔다. 남파간첩에 대한 위령비라고 한다.

하지만 애초에 위에서 언급했듯 북한 고위간부 출신의 탈북자들이 줄줄이 광주에 군대를 보낸 적이 없다고 언급한 것이 유머.[23] 이 사실을 배제한다 하더라도, 저 위령비가 실제 광주에 남파된 간첩을 위한 위령비라는 증거 자체가 없다. 그동안 남파한 무장간첩들이 한두명이야? 단순히 5.18 사건 발생 후로 한달 뒤에 만들어진 비석이란 이유로 이것이 북한 개입설의 증거가 된다는 것은 억지와 추측에 불과한 주장일 뿐이다.

저 위령비에 쓰여진 대로면 사상자가 150여명이다. 광주에서 시신 100여구가 어딘가에 묻혀있다는 말이 돌았다고 한다는 주장 때문에 이것이 더 사실처럼 들린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나타난다. 당시 계엄군의 사상자는 20여명. 그러면 나머지 130여명은?

그나마 가장 가능성 있는 가설은 위의 4,19 혁명과 6월 항쟁의 그것과 같은 내부 선전용이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주장에 의하면 사진에 광주에 파견된 간첩들이라고 나온다는데 사진에서는 전혀 광주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도 없고 이러한 위령비는 북한 도처에 산재한다고 한다.

2.1.7.2 북한에서 출판한 《광주의 분노》

1985년 조선노동당 출판사에서 출판한 《광주의 분노》 라는 책에 북한의 특수부대가 개입하여 직접 보고하지 않았다면 도저히 알 수 없는 상세한 정보가 담겨있고, 이것이 북한 개입의 증거라는 주장.

구체적으로 광주의 분노라는 책을 보면, 사망자들의 명단과 정보(직업, 나이 등)가 담겨있고, 어느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했는지까지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어 이 주장은 그럴 듯 해 보인다.

하지만 이 책은 북한이 당시 남한에 널려있던 흔한 정보들을 수집하여 짜깁기해 만든 선동용 불쏘시개에 불과하다. 사망자들의 명단은 사건이 끝난지 한 달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언론사들에 의해 공개되었다.

광주사태 사망자 명단-1980년 6월 5일자 동아일보

또한 무기고를 탈취한 것도, 당시 언론사들에 의해 어느 무기고를 탈취했는지와 당시 정황이 상세히 보도되었다.

광주 데모사태 닷새째-1980년 5월 22일자 동아일보

당시 언론과 출판은 계엄공고 제 2호에 의해 검열을 받고 있는 상태였다.계엄공고 제 2호-1979년 10월 27일자 동아일보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소요사태' 로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선전하던 당시에는 언론사들을 앞세워 당시 상황을 낱낱이 밝힐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신군부는 언론사들의 사건 보도를 허용하고, 보도자료를 자신들이 날조한 '시나리오' 에 버무려 선전한 것이다.

당시 신문에도 상세히 보도된 자료들을 북한이 못 구했을 확률은 0%에 가깝다. 무함마드 깐수 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남한에 침투한 간첩들의 간단한 업무가 남한의 신문자료 전송이다. 북한 특수부대 수백명이 계엄령이 발령된 남한의 방어선을 뚫고 침투해 광주에 들어갔다가 다시 계엄군을 따돌리고 북한으로 복귀할 확률과, 남한의 신문 한 장을 구할 확률 중 어느것이 더 높은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2.1.8 시민군측 카빈소총 사상자

시민군이 쏘던 카빈소총에 의한 사살이 시민군측에서도 나왔으니, 이것은 북한군이 쏜 것이 아니냐는 주장. 카빈소총을 북한제의 카빈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계엄군은 광주의 7개 주요 통로를 봉쇄했는데 그 중 하나가 광주교도소였다. 광주교도소는 호남고속도로와 국도 옆에 붙어있는 교통요충지이다.[24] 계엄군이 봉쇄한 7개 도로에서는 사상자가 많이 발생했다. 대표적으로 17명이 사망한 주남마을 미니버스 총격사건이 있다.

하지만 당시 카빈소총과 계엄군이 사용하던 M16소총 중 어느 총에 맞았느냐에 대한 분류는 육안으로 판명해야 했었다고 당시 관계자가 밝혔다고 한다. 이 부문은 위키백과에 정리되어 있으니 참고하자.

또한 1996년 부검 전문가 황적준 교수가 검찰 사체 검안서를 검토한 월간지 기사가 있다. 관심 있는 사람은 읽어보길 바란다. 완전 공개 검찰 작성 5·18사망자 165명 부검 자료 몇몇 희생자는 계엄군의 총격으로 사망했음에도 검시 보고서에 카빈으로 인한 총상이라 되어 있었다고 한다.

2.1.9 "5.18 광수" 특수부대 안면분석

지만원의 사이트에서 생산되는 소스인데, 당시 광주를 촬영한 사진들에 등장하는 시민군의 얼굴들을 분석(?)해 보니 북한 군부의 유명인사 및 실세들과 동일인물이라는 주장이다. # 즉 이들이 광주로 유유히 들어와서 봉기에 성공한 후 유유히 북으로 돌아가 그 공적으로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는 식의 논리. 여기서 "광수" 는 북한 특수군의 이명으로 보인다.

더 말할 것도 없이 SBS "마부작침" 팀에서 각잡고 달려들어서 처절하게 깠다. 전문 분석기관에 의뢰한 뒤 실제 당사자를 찾아서 인증하고, 그들의 등본까지 떼어다가 확인사살했다. 그와 동시에 시리즈물로 왜곡의 현실왜곡의 메커니즘, 왜곡의 원인까지 전부 다루기도 했으니 한번 읽어보자.

2.1.10 탈북자의 증언

사실상 위의 반론들을 모두 제시한 뒤에 우익들이 할 말 없으면 내놓는 마지노선이 바로 탈북자 임천용씨를 비롯한 몇몇의 증언에 따른 주장들이다.

북한의 고위층이 포함된 탈북자들의 증언이니 100% 진실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들의 주장은 논리적으로 헛점 투성이며 사실이라 보기에 부족한 점이 너무나 많다.

애초에 이들의 주장은 매번 달라져 일관성이 하나도 없다.
한국논단 인터뷰
2006년 기자회견
뉴스한국 인터뷰

세 번의 주장 모두 침투경로와 다시 돌아간 경로, 그리고 투입된 병력 수도 다르다. 결국 신뢰성이 없는 자료인 것이다. 게다가 투입된 병력들도 가장 적게 잡은게 400명 이상. 상식적으로 이것이 가능한 일일까? [25]

강릉시 무장공비 사건을 보아도 2~30명도 주민들의 신고로 발견된 무장간첩들, 그들이 400명이나 내려올 수 있었을까. 애초에 이만한 수의 무장간첩들이 내려올 수 있었다면, 이 설을 지지하는 몇몇 우익세력들이 옹호하는 신군부의 무능만 증명하는 꼴이 된다. 아니, 애시당초 정통성 없는 놈들에게 뭔 유능함을 바라는 거야??

만약 정말로 400명 이상의 특수부대가 광주에 침투했다면 이건 이미 침투가 아니라 상륙작전 수준이다. 광주에서 벌어진 일을 가지고 작당하고 월남하여 제 2의 한국전쟁을 계획하려 한 게 아닌 이상에야 불가능한 인원수다.

또한 이 무장간첩설이라는게 신군부의 당시 주장으로서 제시되는 그리고 일부 사이트에서 지금도 제시되는 79년 말 거제도 지역의 간첩사건과 일본 정보부 정확한 소속은 하는 사람 입마다 다른게 미스테리의 첩보에 의한 80년대 남침 음모설과 짬뽕되었던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때도 침투 관련 자료는 단 3명이었다.

또한 탈북자의 증언이 화제거리가 되자 다른 탈북군인 협회에선 이 주장이 현실성 없다고 반박했다. 또한 마찬가지로 탈북자 출신인 주성하 기자 역시 북한개입설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했다. #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광주에서 벌어진 일들은 이 특수부대들이 서로가 공수부대와 시민군으로 분장하고 소요를 일으키고 실제 해외 언론에 보도된 잔학행위는 모두 이 사람들이 저지른 일이다. 그리고 이런 잔학행위를 찍어서 실시간으로 북한에 생중계해 북한 사람들도 그 상황을 알았다는 이야기다.북한 아틀란티스설

광주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해서 북한에서 심도있게 보도한 건 사실이고 광주를 소재로 한 여러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것도 사실이지만 거기서 묘사된 광주는 다분히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평양에서 재현한 것에 불과하다.[26]

2.1.11 그 외의 개입설

  • 윤기권씨의 월북 사건을 보면 북한의 개입 내지는 종북세력의 준동을 짐작할 수 있다.
➜ 이 사람은 현재 광주민주화 운동 유족들에게도 흑역사로 간주된다. 어차피 핵심 요원도 아니었고 정신적으로 문제가 많았다는 게 중론. 사실 윤기권은 당시 고등학생이었고 정확한 증거도 있다. (이게 왜 중요한 사실인가 하면, 당시 학생을 포함해 미필자들에겐 집총을 금지했다. 당시엔 교련으로 인해 학생들도 총을 조금은 다룰줄 알았는데도 말이다.) 고등학생도 북한 간첩이 보낸거라고 우기기엔 좀 그렇다. 애초에 이것은 개인의 문제이다[27]. 거기다 이 사람외에 월북한 5.18참가자는 없다.
  • 5.18 당시 시체들 중에는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망자들이 있는데, 이는 바로 북한에서 내려온 간첩들이다.
➜ 신원미상 시체중에는 영유아 시체도 발견되었다. 고로 북한군 시체라는 증거는 신빙성이 떨어진다. 참조

2.2 광주폭동설

2012년 말 무렵부터 북한군 개입설이 신뢰성을 잃으면서 고개를 들고 있다. "어쨌든 무력을 이용한 폭동이 일어난건 사실이니 군인은 폭도를 사살해야만 했다."라는 주장이다. 이 논리는 전형적인 명분을 이용한 합리화로 신군부 자체적으로는 정당성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시민군의 정당성을 깎아내리려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러한 명분에 의한 책임전가는 오히려 신군부의 부당함을 성토하는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다. "무력을 이용해 군사반란을 일으킨 게 사실이니 시민은 군인을 공격해서라도 정당화시켜야 한다."라는 명제도 성립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근데 이 말은 안통하는게 저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12.12는 혁명이지 군사반란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발단이 된 1979년 12.12 군사반란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군사반란이며 이 시점에서 이미 신군부는 대한민국 군대로서의 자격을 상실한다. 그러므로 신군부는 대한민국에 대하여 어떠한 물리력을 행사할 권리가 없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5.18 진압의 주체는 최규하 대통령이었다"는 반론도 있지만, 이미 12.12 사태로 신군부가 정권을 탈취한 이후의 일이므로 그런 변명은 옹색하기만 할 뿐이다.

2.2.1 국회 해산

1980년 5월 12일 여야는 20일 임시국회를 열어 비상계엄을 해제하고, 유신헌법을 개정하는 논의를 진행시키기로 합의했다. 양당 국회대책 계엄해제 논의 등 활성화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선포와 동시에 보안사가 민주공화당을 이끌던 국회의원 김종필, 이후락, 박종규, 김진만 등을 국회의 동의없이 불법체포하고 신민당을 이끌던 이철승, 김영삼을 가택연금에 처하면서 임시국회는 정상적으로 열릴 수 없게 됐다. 더욱이 1980년 5월 20일 노태우의 지시를 받은 33보병사단 101연대 소속 병력이 대한민국 국회의사당을 봉쇄하고 국회에 등원하던 국회의원의 출입을 금지함으로써 제10대 국회는 실질적으로 해산 상태에 처했다. 제10대 국회의 역할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의결에 따라 만들어진 국가보위 입법회의가 대체했다.

신군부의 5월 17일 비상계엄 확대 조치는 국회가 계엄령 해제, 개헌 논의를 이끌어 나가게 되면 군의 정치적 입지가 축소될 것을 우려하여 단행된 정치테러의 성격이 짙다. 1997년 대법원은 이처럼 국회의원 등의 권한을 침해하거나 배제함으로써 그 권능행사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한 것은 국헌문란(내란죄)에 해당된다고 판결내렸다.

2.2.1.1 비상계엄 확대는 정당한 법절차를 받았다는 주장

명분론 중 특히 자주 사용 되는 것이 "비상계엄 확대는 정당한 법절차를 받았으며, 당시 일개 군인에 불과한 전두환에겐 실권이 없었다. 모든 사태를 좌지우지 한 흑막은 최규하이므로, 모든 책임은 최규하에게 물어야 한다."라는 주장이다.

간단히 말해, 전두환5.18에 별로 관여되지 않았으니 5.18의 책임은 최규하가 져야한다는 소리인데 전두환은 1980년 4월 14일 이후 제10대 중앙정보부장 서리도 겸직했기 때문에 국무회의에도 참여가 가능했었고 5.17비상계엄확대에도 관여 가능한 상태였다. 또한 이시기 중앙정보부장은 국무회의에서 국방장관보다 높은 직위였음으로 매우 깊게 관여되어 있다.

5.17일 전군지휘관회의에서 육참총장이 참여한 가운데 비상계엄 확대가 결의 되었고 그날 저녁 국무회의에서 통과되었는데, 이 당시 국무회의가 열리던 중앙청을 계엄군이 둘러싸고 신분증을 검사하며 위압적인 행위를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대법원에서는 비상계엄 확대에 대해 "내란 행위자들이 헌법기관인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을 강압하여 그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한 것으로 보아야 하므로 국헌문란에 해당한다."라고 판시하였다. 즉, 비상계엄행위 자체가 국헌문란행위에 의해 발효된 것이다.
또한 당시 계엄군 사령관이였던 이희성 육군참모총장은 전두환이 임명에 관여[28]했으며 확대계엄 당시 계엄군 투입에 대해 최규하 대통령의 사전재가를 받은 일이 없고, 통상적으로 사후에 허가를 받았다라는 증언을 하였다.

즉, 확대계엄(전국계엄) 때는 계엄사령관이 대통령에게만 계엄 내용을 직접 보고하도록 되어 있어 다른 국무위원들이 개입할 수 없고, 심지어 계엄사항조차 최규하는 볼짱다본 후 사후보고만 받았을 뿐이다. 그러므로 최규하 대통령이 총책임자이고 전두환이 일개 사령관이니 모든 책임은 최규하에게 있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이처럼 명분론을 내세울 경우, 오히려 시민군이 어떠한 수단을 사용했더라도 그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논리라 할 수 있을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신군부의 만행을 합리화할 수 없는 것이다.

2.2.2 김대중 석방운동 혹은 배후조종이라는 주장

인터넷 일각에서의 김대중 전 대통령 고인모독 및 왜곡조작과 연계된 것으로, 광주민주화 운동은 계엄령 철폐를 주장하며 일어난 것이지 특정인의 석방운동이나 배후조종에 의해 일어난 일이 아니다.

중요한 점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광주시민들은 서로 당시의 상황을 잘 모르고 있었다는 것, 김대중 대통령은 체포된 이후 며칠이 지나서야 광주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았으며 광주시민들도 kbs 다큐 <푸른눈의 목격자>에 의하면 서독의 방송기자가 광주시민에게 전해준 외국신문을 통해 이미 계엄군의 폭력사태가 발생한 이후 알게되었다는 것을 알수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배후라는 주장은 5.18이 진행되고 있을 때는 없다가 이후 김대중 내란음모조작사건을 조작하며 거기에 덧씌우면서 나타났다는 점을 주목해야한다. 김대중은 "알지도 못하는 학생에게 몇백만원의 금액을 주고 광주에서 일을 벌이라는 지시를 내렸다" 는 혐의를 썼다가 이후 무죄 판결을 받았다.

현재 김대중 대통령이 회고를 하며 '나를 위해서 광주시민들이 죽었다' 같은 발언과 김대중 선생을 석방하라는 현수막을 같이 캡처하여 김대중이 조장하고 석방을 빌미로 일으킨것이라 유포왜곡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상기했듯이 광주시민들과 김대중 전 대통령 서로가 각자의 일이 벌어진 후 나중에 알았으니 전혀 맞지않는 일이다. 더욱이 김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곳[29]에서 벌어진 일이며 김대중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지속적인 차별을 받다가 희생당한 일이니 당연히 지지자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하는 말이다. 그 합성사진들은 이 감사표현인 '나를 위해서'라는 것을 자신이 조종했다로 왜곡하는 것.

2.2.3 최규하의 민정이양 약속

박정희 사망 이후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다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된 최규하가 민주적 헌법으로의 개헌과 정권 이양을 약속했는데, 그것을 믿지 않고 시위를 일으켰으니 폭동이라는 주장.

이것 역시 터무니없는 주장인데, 당시 비상계엄이 선포된 명분은 '대통령의 유고로 인해 국가의 안보가 위험해질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대통령이 새로 당선된 이후에도 계엄령은 해제되지 않았다. 이에 전국에서 대학생들이 계엄해제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5월 14일 전국 32개 대학 가두시위

5월 16일 국무총리 신현확이 늦어도 연말까지 개헌안을 확정하고 추후 선거를 실시해 정권을 이양하겠다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5월 16일 국무총리 신현확 담화 발표

그러나 바로 그 다음날인 5월 17일 정부는 신군부의 주도하에 보안의 예비검속을 통해 김대중, 김종필를 비롯한 주요 정치인들을 합동수사본부로 불법 연행했다.

주요 정치인 연행 직후 신군부는 비상 계엄령을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하고, 이와 동시에 계엄사령관 이희성 명의로 '계엄포고 제10호'를 발령하면서 정치활동 금지, 대학교 휴교령, 언론보도 사전검열 강화, 집회 및 시위 금지 등의 조치를 내렸다.

그리고 5월 18일 새벽 2시에 신군부는 국회를 무력으로 점령한 뒤 봉쇄했고, 헌정중단 사태가 발생했다.

또한 최규하 전 대통령은 발표 때 "이 정부는 과도정부가 아니라 안정을 위한 정부"라며 민정이양을 부정하는 뉘앙스의 표현으로 자기 정부의 입장을 발표했다.

요약하면 정부가 개헌과 정권 이양을 약속한것은 사실이나, 집회의 자유 등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계엄령을 해제하지 않았고 이는 많은 국민들에게 정권이 한 약속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만들었다. 그리고 비상계엄 전국 확대와 주요 정치인 연행으로 국민들에게 신군부가 정권을 탈취하려 한다는 확신을 갖게 했고, 이것이 광주민주화운동의 시작으로 이어진 것이다.

2.2.4 미국 헤리티지 재단의 보고서

미국 워싱턴 D.C.에 위치한 헤리티지 재단[30]이 1985년 작성한 보고서가 광주 폭동설의 근거로 자주 인용된다.[31] 물론 헤리티지 재단의 입장이 미국의 공식 입장은 아니다.해당 보고서 전문만 놓고 보면 헤리티지 재단은 광주 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여겼던 것 같다. 그러나 6.29 선언 이후의 보고서를 보면, '신군부에 의한 학살', '민주화 운동' 으로 입장을 선회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1988년 보고서2005년 보고서2011년 보고서

쉽게 말해, 1985년 보고서는 광주 민주화운동이 '사태' 에서 '민주화 운동' 으로 재평가를 받기 이전에 작성된 것이다. 언론과 출판이 통제되던 당시 상황에서 미국의 수도에 위치한 재단에서 확인 가능한 사실은 많지 않았다. 헤리티지 재단은 당시 확인가능한 선에서 보고서를 작성한 것이고, 이후 입장을 정반대로 선회했기 때문에 광주 폭동설의 근거가 될 수 없다. 그리고, 해당 보고서에서는 북한군 개입설에 대해 전혀 다루지 않았다.

2.2.5 교도소 습격사건

교도소를 습격했는데, 이것 자체로도 폭동이라고 불릴만하다는 주장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은 반론이 있다.

5.18 당시 광주교도소장이었던 한도희씨는 1995년 한 지방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시민군이 80년 당시 광주교도소를 습격했다는 계엄사의 발표는 사실이 아니다"라고 증언했다.

일부에서 법원판결을 들기도 한다. 법원판결에 따르면 시민군이 교도소주둔 계엄군을 공격했다는 것이다. # 그러나 법원판결에선 시민군이 교도소 주둔 계엄군을 공격했다는 내용만 나오지, 교도소 습격했다는 내용은 없다. 만약 교도소 주둔 계엄군을 공격할 정황이 "교도소 습격"말고 없다면 당연히 교도소 습격설이 타당하나, 당시 교도소 상황을 그렇지가 않았다.

근본적으로 광주교도소는 광주에서 담양, 곡성 쪽으로 빠져나가는 29번 국도와 호남고속도로 동광주 인터체인지가 교차하는 곳 사이에 자리 잡은 교통의 요충지이다. 즉 광주교도소가 궁벽한 땅끝마을에 있어서 거기까지 찾아간 것이 아니라 광주에서 담양, 곡성, 순천방향으로 피난을 가던지, 놀러가던지 하려면 광주교도소 몇미터 옆을 스쳐갈수 밖에 없는 구조이다.

사건 직후 계엄사는 폭도들이 교도소를 5차례 습격 하였다고 주장하였고, 현재 광주 민주화 운동을 왜곡하는 세력은 6차례 습격 하였다고 주장한다.
광주교도소는 최초 31사단이 지키고 있었는데, 이때 광주 시위대 차량이 2차례 도로를 지나가려고 했지만 철수 권고로 자진 철수 하였고, 이후 3공수여단에게 인계 하였을 때 주로 전투가 발생 하였다. 나중에 다시 20사단이 광주 교도소를 인계 받은 후에는 교도소 인근에서 총격전이 일어나지 않았다.

일부는 광주교도소 습격 여부를 알려면 3공수여단의 전투상보를 살펴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1995년 검찰에서 작성한 5.18관련 사건 수사결과(1995.7.18)에 따르면 1980년 5월 22일 00:40경 시위대가 고속버스 2대, 픽업 1대, 1/4톤 트럭 3대 등 차량 6대에 나누어 타고 광주교도소에 접근, 3공수여단과 교전을 벌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같은 날 09:00경 시위대 6명이 트럭에 탑승하고 기관총 사격을 하면서 광주교도소에 접근했으며, 경계근무 중이던 3공수여단 11대대 11지역대 병력과 총격전이 벌어져 시위대 3명이 사망하고 수명이 부상을 입고 도주하였으며 3공수여단은 고속버스 2대, 트럭 1대, 픽업 1대와 LMG 1정, M1소총 1정, 칼빈 4정과 실탄 약 4백발을 회수하였다고 하고 있다.[32]

이런 일이 왜 일어났는지는 다음을 보면 알 수 있는데 당시 3공수여단의 임무는 두가지였다.

3공수,265/1,261 광주교도소 경계, 남부 고속도로 차단[33]

3공수여단은 남부 고속도로 차단을 하면서 교도소 부근에서 수많은 학살을 벌였다.

5. 21.의 자위권 발동과 함께 다량의 실탄을 지급받고 광주시 외곽 주요 지점에서 봉쇄작전을 수행했던 계엄군들이 무차별 발포에 나서는데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 계엄군들은 외곽봉쇄지역에서 무차별적으로 총기를 난사했고, 외곽지역에서는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계엄군의 발포로 인해 가족과 함께 광주교도소 앞을 통과하던 차량, 아이들과 함께 광주를 떠나던 사람, 계엄군 주둔지역의 마을주민 등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 3공수여단이 철수해 봉쇄작전을 수행했던 광주교도소 부근에서도 민간인 살상이 발생했다. 당시 3공수여단이 경계했던 광주교도소 부근은 광주-담양을 오가는 길목에 위치했다. 광주교도소는 민간인 학살이 빈번하게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불순분자들의 선동에 따른 폭도들의 습격을 격퇴한 것으로 설명됐다. [34]

해당 부분을 다시 보자.

당시 3공수여단이 경계했던 광주교도소 부근은 광주-담양을 오가는 길목에 위치했다. 광주교도소는 민간인 학살이 빈번하게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불순분자들의 선동에 따른 폭도들의 습격을 격퇴한 것으로 설명됐다

실제로 3공수여단 전투상보에도 무장시위대가 "바리케이드로 돌진"한 것으로 나온다.

익일인 5.22일 08:20-08:50까지 수색작전 실시하였으나 흔적은 발견 못함, 수색작전간 노획버스 1대로 정문에서 약 50미터 이격지점에 도로를 차단, 수색 복귀 후 09:00경에 2 1/2톤 탑승한 폭도 6명이 기관총을 난사하면서 교도소로 접근했으나 50미터 전방의 바리케이트에 봉착 진출을 못하자 이에 11대대에서 즉각 응사 2명 사살, 4명은 부상을 입고 도주 전과(아군 : 피해 무, 2 1/2톤 1대 노획, 칼빈 1정, 실탄 230발, 엠원 1정, 엘엠지 1정 노획)

전투상보에도 "바리케이드에 봉착"한 사실이 드러난다. 교도소 습격 목적이란 건 3공수여단의 주장일 뿐. 3공수여단의 추측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본다면 "3공수여단의 바리케이드에서 벌어진 충돌"이다.

원래 3공수여단은 당시에 미리 수하를 한 뒤에 발포해야했다. 그러나 3공수여단은 그러지 않았다.

5. 21. 18:49 전교사는 ‘확인사격 지시(전상자전 제611호. 5. 21. 20:55)’를 하달했다. 수하 불응시 사격하라는 지시였다. 그러나 송암동 20사단 사건, 광주교도소 발포, 주남마을과 녹동마을 주민들에 대한 총격 등은 수하 자체가 없는 발포였다. 5. 24. 외곽봉쇄 작전 부대교대 지시가 내려졌다. 이때 전 부대에 사격을 중지하고 먼저 확인한 뒤 불응하거나 먼저 사격하면 대응 사격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하지만 이 지시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이날 하루 두 차례나 오인사격이 있었다.[35]

당시 3공수여단은 민간인을 무차별로 학살했지만 그것조차 "불순분자들의 선동에 따른 폭도들의 습격을 격퇴한 것"으로 착각 혹은 왜곡했다. 그러니 교도소로 접근하지 않은 무장시위대도 교도소 습격으로 착각했으며, 무장시위대 한테는 교도소 습격이 목적이 아니라도 교도소 경계 병력을 공격할 동기가 존재했다.

이런 상황이기에 무장시위대가 교도소를 습격했을 거란 증거는 없었다. 그러자 계엄군은 교도소를 습격했다는 왜곡행위를 벌였는데 국방부 조사결과 날조로 밝혀졌다.

전남합수단에서 작성한 「광주교도소 습격기도사건」에는 당시 광주교도소에 복역 중인 류락진의 처 신애덕과 동생 류영선이 시위에 가담해 교도소를 습격, 복역 중인 류락진을 구출하도록 선동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특히 류영선은 시위군중과 함께 교도소를 습격하다 총상으로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광주교도소 습격기도사건」(보안사, 󰡔383-1989-8󰡕, 89쪽). 그러나 이 개요는 ‘5. 18’을 불순분자의 소행으로 몰기 위한 의도에서 조작됐음이 위원회 조사결과 밝혀졌다. 류락진이 광주교도소에 복역한 것과, 류영선이 총상으로 사망한 것은 사실이나 당시 신애덕은 합수부에 의해 시위주동자로 예비검속됐던 딸 류소영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또 류영선은 소재를 모르는 조카 류소영을 찾으려다 계엄군의 과격진압을 보고 시위대에 합류했다가 5. 21. 전남도청 앞 발포로 머리에 관통상을 입고 사망했다. [36]

죽은 사람은 변호를 할 수가 없다. 그러니 죽은 사람이 습격했다는 조작을 벌인 것.

2.2.6 윤한봉의 사전 무기고 답사에 따른 조직적 폭동이었다?

파일:변희재.jpg
변희재는 트위터에 이런 주장을 소개한 적이 있다. 그럼 윤한봉이 '사령관'이며 이에 따라 사전 답사과 5.18과 관련됐다는 주장은 사실인가?

일단 그 출처가 된 게 윤한봉 자신의 증언인데 정작 그 증언 안에도 그런 내용은 없다.

4월 1일인데 아무도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아. 뭔 쓸데없는 소리 한다느니 회의 분위기 깬다느니 여 다른 나라 이야기 하고 앉았다느니 그런 식으로 우스워 보인거지. 내가 잔뜩 다급해가지고 그래도 지방에서는 부산은 부마항쟁으로 피해를 많이 봤으니까……근데, 아무도 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더라고. 돌아와 가지고 아예 4월 달부터 본격적으로 사람들한테 그 이야기를 했어. 개똥이를 만나면 이 이야기, 또 두셋이 만나면 이 이야기, 아무도 내 이야기에 귀를 안 기울이고, 아 쓸데없는 소리 왜 자꾸 해싸요,아이고 그런 날이 좀 왔으면 좋겠소 내가 봤을 때는 어림 반푼어치도 인자 어림없다 이거지, 민중들이 무슨 들고 일어나야 그러지. 우리가 뭐 부마항쟁은 예측이라도 했었냐. 아 그건 어떤 특수한 조건 속에서 이루어진 거지, 아이고

윤한봉은 무기답사를 주장하긴 했으나 주변 사람들에게 씹혔다.

다 잡아간거다. 기습 당한거죠. 아 이거. 와 눈 앞에 캄캄해져불죠. 왜 그냐면 기습을 예측을 못했으니까. 뭐 뜬 눈으로 밤 새우고 새벽에 이제 집에서 빠져 나가 가지고 시내 용화 후배네 집에 가서 잤어요. 안전한 곳에 가서 동태를 살펴 보니까 엉망이지. 다 잽혀들어가불고. 전대 조대 할 것 없이 전부 접수되어버리고 학생회 간부도 일부 도망가고 일부 다 잽혀불고. 긍게 인제 박살나분거야, 박살이. 아무 준비없이. 와 그때처럼 내가 후회스러웠을 때가 없었어. 왜냐면 나는 21일부터 25일로 봤지, 17일날 밤에 당할 것을 생각을 못하고, 기습에 대해서는 예측을 못했거든. 그래가지고 19일날 아침에 새벽에 빠져나갔지, 광주로. 뭐 인제 연락할 길이 없는 거야.[37]]

그런 상황에서 윤한봉은 대비도 없이 당했다고 한다.

윤한봉 증언을 근거했는데 정작 윤한봉 증언에서도 그런 내용 없다.

2.2.7 시위대가 과격시위를 해서 공수부대원이 진압했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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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18일, 7공수여단이 벌인 행위에 대한 동아일보 기자의 증언

일요일이었다. 날씨는 아주 화창했다. 평균기온 16.3도로 아침을 약간 쌀쌀했지만 낮의 최고 기온은 25.1도까지 올라간 아주 쾌청한 날씨였다.

세째 일요일이어서 상가에는 문을 닫고 쉬는 점포가 눈에 띄게 많았다. 한달이면 대개 첫째와 세째 일요일은 쉬는 날로 정하는 점포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농촌에는 바야흐로 모내기철을 앞두고 그 준비에 온 힘을 쏟고 있어서 집앞과 논밭에는 활기가 넘쳐 흘렀다.
그런 일요일이었다.
광주직할시 북구 북동 180번지 앞 큰길. 금남로의 연장이어서 그냥 금남로길이라고 불리어지는 길이다.
……얼룩무늬 군복에 머리에는 방석망이 달린 헬멧을 쓰고 손에는 방패와 방망이를 든 1개중대 가량의 공수부대 군인들.……대결이 이 횡단보도 위에 도착할 무렵 내려진 명령이었다. 그러자 군인들은 횡당보도선에 맞추어 일제히 멈추어서서 대오를 가다듬고 있었다.
유동 3거리에서 4백50m쯤 떨어진 횡단보도. 여느 횡단보도와 마찬가지로 하얗게 칠해져 있었다. 이 횡단 보도는 북동 180번지와 누문동 62번지를 연결하고 광주제일고등학교로 들어가는 길로 이어져 있다.
짧고 숨막히는 시간이 흘렀다. 시계의 짧은 바늘이 4자 위에 서고 긴 바늘이 12자 위에 이르렀다.
바로 4시 정각이었다.
바로 이때였다. 대열을 따라온 초록색 1.5톤급 차량 위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갑자기 찢어지는 듯한 금속성으로 위압적인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거리에 나와있는 시민 여러분, 빨리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빨리 돌아가십시오."
……스피커에서 귀가를 종용하는 방송이 나온 지 1분이 지났을까. 이번에는 짧은 순간을 두고 엄청난 명령이 뒤따라 튀어나왔다.
시민들에게 한 것이 아니라 지휘관이 부하들에게 내린 명령이었다.
"거리에 나와있는 사람은 전원 체포하라."
딱 한마디. 이 명령 이외 어떤 세세한 행동지침이 나올 법한테 그렇지도 않았다. 아무런 군더더기도 없었다.
……
이 명령이 떨어지자 현장은 순식간에 수라장으로 돌변해버렸다.……시위했던 학생들만 잡는 것이 아니라 젊다고 보여지는 사람이면 보는대로 두들겨 패고 잡아 끌었다. 순간적인 일이었다. 비명소리와 고함소리가 사방에서 터져나왔다.
……
'저놈 잡아라' '저기 간다'는 소리와 동시에 '아이구' '억' 소리가 터져 나와 거리는 삽시간에 지옥으로 변해버렸다.
횡단보도 바로 옆, 북동 276번지 3층 건물 2층에 있는 동아일보 광주지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2명의 공수부대원이 고양이가 쥐를 잡으려는 듯한 자세로 뛰어 올라왔다.
두 사람 모두 대검이 꽂혀 있는 M16소총을 앞으로 내밀고 서슬이 퍼렇게 되어 있었다. 마치 총검술시범을 보이는 자세처럼 착검한 M16소총을 앞으로 겨누고 있었다. 곧 아무에게라도 방아쇠를 당겨 버릴 자세, 아니면 금방 찔러 버릴 듯한 그러한 모습이었다.
……
마침 일요일인데도 출근한 정은철총무는 바깥의 시끌벌적한 사태와는 관계없이 자기 책상에 앉아 무엇인가 열심히 쓰고 있었다.
그는 '시위를 한일도 없음은 물론 구경조차 하지 않았던 터라 무슨 상관이 있으랴'는 듯 태연하게 자기 일을 부지런히 하고 있을뿐이었다.
그런데 두 군인은 다짜고짜로 정총무의 뒷 덜미를 낚아챘다. 정씨는 의자와 함께 뒤로 벌렁 넘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자 두 군인은 정씨를 마구 짓밟고 개머리판으로 짓 이기는 것이었다. 곧 숨이 끊어 질 것 같았다. 큰 일이었다.
……
정총무는 얼마나 맞고 밟혔는지 반항하는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있었다.
두 군인은 사무실 바닥에서 기진맥진해 찍 소리도 못하는 정총무의 두발을 양쪽에서 하나씩 붙잡고 끌고 내려갔다. 바닥에 끌린 채였다. 마치 죽어있는 짐승을 끌고 내려가는 것 같았다. 2층 계단을 내려갈 때도 그대로 끌고 내려갔다.
……이 날 그는 자기가 맡은 구역의 수금실적이 나빠 하루 전날 지사장으로부터 질책을 받고 일요일인데도 출근했다가 당한 것이다.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담당구역 수금을 하기 위해 출근한 배달학생 박준하군(광주공고 1년)도 수없이 맞고 짓밟혔다. 그리고나서 끌려나가다 계단에서 실신해버렸다. 그러자 비로소 그들은 그대로 팽개쳐 두고 내려가 버렸다.
……동아일보 광주지사 바로 앞쪽에는 두대의 트럭이 유동 3거리 쪽을 향해 정차해 있었다.
……
그 차량에는 길거리와 건물 안팎에서 붙잡혀 끌려온 사람들이 가득가득 실리고 있었다. 얼마나 맞고 밟혔는지 머리와 코, 입에서 피를 토해 내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그들의 하얀 옷자락은 피에 젖어 엉망으로 되어있었다.
어떤 사람은 기진한 듯 눈만 껌벅껌벅하는 모습도 보였다.
한 사람이 붙잡혀왔다. 그의 머리나 코에서는 피가 줄줄 쏟아져내렸다. 웃옷은 갈기갈기 찢겨진 채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끌고 온 군인이 대기 중인 군인에게 인계하면 또 한 차례 군화발이 날아오고 몽둥이 세례가 쏟아졌다. 그리고 짐짝 실리듯 트럭위로 이끌려 올라갔다. 그러면 거기에 있는 또 다른 군인이 '이 새끼 머리 숙여'라며 군화발로 머리와 등을 짓밟는다. 숨소리 조차 들리지 않아야 끝이 난다.
……
그때 마침 택시 한대가 지나가려다가 이들에게 붙잡혔다.
감색 양복에 하얀 와이셔츠를 입은 젊은 남자와 색동 저고리에 빨간 치마를 입은 예쁜 새색시가 차에서 끌려 나왔다. 한 눈으로 보아도 신혼부분임에 틀림 없었다.>……이 길은 시내 중심가에서 광주공항이나 고속버스 터미널 또는 광주역으로 빠져나가는 길목이다. 그래서 이 신혼부부는 공항이나 역쪽으로 가고 있는 듯했다.

그들 조차도 예외가 아니었다. 택시에서 끌려나오자마자 신랑은 무자비한 몽둥이와 장작개비 그리고 군화발 세례를 받았다. 이유도 없었다.
순식간에 일이었는데 신랑은 '아이구, 눈이야'하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눈을 붙잡고 땅바닥으로 뒹굴고 있는 것 이 아닌가
……
신부도 군화발로 채였는지 한복은 엉망이 된 채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다.
"사람 살려!"
신부는 자신의 몰골은 돌아보지도 않고 땅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신랑을 붙잡고 엉엉 울며 절망적으로 울부짖었다.
"이 쌍년"
군인들은 또 다시 신부를 걷어차며 욕지거리를 하더니 '빨리 꺼져'라고 소리를 질렀다.-당시 동아일보 광주 주재기자 김영택의 증언. 김영택, 현장기자가 쓴 10일간의 취재수첩, 1988, 사계절, 11~22

1980년 5월 19일, 11공수여단의 행위에 대한 11공수여단원 하사의 증언(본인은 5월 18일로 잘못 알고 있음),

쓰고 있는 베레모를 벗고 방탄 헬멧으로 바꾸어쓰라는 이 지시는 곧 차량에서 하차를 의미하고 어디선가 시위대와 맞닥뜨려 시위진압을 의미한다는 걸 사전교육을 통해 저희는 잘 알았답니다. 차량은 다시 양복 복개상사에서 좌회전으로 돌려서 전차량 금남로에 단숨에 달려가 관광호텔 앞에 정차를 하니 여기저기 돌멩이가 어지럽게 길바닥에 나뒹굴고 있더군요. 차량에서 하차는 하지 않고 기다리는데 시위대는 전부 도망갔으니 전 병력이 하차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잠시 시간이 흐른뒤(2~4분)"하차"하는 명령이 하달되더군요. 이 명령이 곧 우리 귀에는 "무자비하게 젋은 사내는 두들겨패라"는 지시로 들렸읍니다.……차량에서 하차하니 이미 다 시위대는 뿔뿔이 도망치고 누군가에 이 증오심을 풀어야겠는데 시위대는 없고 무두다 그 근처 관광호텔, 다방, 이발소 등등 건물을 수색하기 시작했답니다. 그때 나는 관광호텔 뒤에 있는 미도장인가 하는 여관을 7~8명이서 수색하기 위해 갔더니 앞에 철문이 닫혀 있더군요. 아무리 문을 두들겨도 안 열어주어 담을 타고 다른 사병이 넘어 들어가서 철문을 여니 몇몇 종업원이 우르르 나오더니 우리 집에는 아무도 없다고 하더군요.
차라리 뒷문을 통해 피했으면 좋았을 텐데, "이 개새끼들이 겁대가리 없네"하면서 태권도 동작 발차기로 2단 뛰어차기로 일부는 때리고 일부는 진압봉으로 구타를 시작했읍니다. 이 진압봉은 서두에 설명했듯이 너무나 단단하고 무게가 있어서 조금만 힘을 가해서 때리면 손목이나 팔목으로 막으면 팔이 부러지는 것이었읍니다. 4~5명의 종업원이 불과 2~3분 사이 하얀 와이셔츠에 나비 넥타이는 간 곳이 없이 시멘트 바닥 위에 나뒹구든 것이었읍니다. 다시 일으켜세워서 4명을 전체 벽에 뒤로 기대게 하자 마침 지역대장 소령이 오더군요. 구타 에는 장·사병이 따로 없었읍니다. 그는 무릎을 꿇게 한 다음 신고 있는 군화발로 있는 힘을 다해서 얼굴을 한 번씩 차는 것이었읍니다.
모진 것이 사람의 목숨이었읍니다. 얼굴은 뭉개지고 피는 쏟아지고 군화발의 충격으로 인해서 뒷머리를 시멘트 벽에 그토록 강하게 부딪쳤지만 쓰러진 사람은 없더군요. 다만 눈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얼굴로 변했지요. 한편 함께 수색하던 일부 병력 2~3명은 각 객실을 수색하여 젊은 사람은 무조건 밖으로 집합시키고 있었읍니다. 10여 명 이상의 20대 30대 젊은 사람들이 공포의 표정으로 2열종대로 집합하더군요. 그중 30대 중반의 사나이는 신혼여행 왔다고 사정을 하더군요.저희하고는 대화가 필요없었읍니다. 무조건 무자비한 구타요, 연행 이외의 방법은 통하지가 않았읍니다. 신부가 나와서 사정사정하더군요. 눈물도 피도 없었읍니다. 일단 붙잡힌 시민들은 일차례 구타가 시작되었읍니다. 왜냐하면 도망을 못 가게 한다는 이유요, 기를 죽인다는 이유였읍니다. 다음 차례는 무조건 옷을 벗기고 팬티만 입히는 것이었읍니다. 그리고 차고 있던 본인의 혁대로 뒤로 손을 묶고 묶인 손으로 자신의 벗은 옷을 듣고 저희가 타고왔던 트럭 옆으로 끌고가서 다른 연행자와 함께 금남로 도로 한가운데 30~40명씩 집합 후 뒤로취침, 앞으로취침, 좌로굴러, 우로굴러 등 혹심하게 기를 죽이고 트럭 뒤에 2열종대로 집합시키는 것이었읍니다. 그후 차량에 탑승하면 손은 뒤로 묶인 상태에서, 보통 성인도 타기 힘들 정도로 높은 차량을 타는 것이었읍니다. 뒤에서 다른 연행자가 머리를 들어서 밀어 올리고 타는 연행자는 죽도록 올라타는 것입니다. 생과 사의 갈림길이요, 또한 몽둥이 세례 때문에 인간의 한계는 어디까지인지 모를 정도로 무섭더구요. 차량에 탑승하면 2~3명의 통신병이 기다리고 있다가 "고개숙여" "고개숙여" 지시합니다. 왜냐하면 고개를 들고 서로 상대방의 얼굴을 보면 용기도 생기고 특전사 요원이 2~3명이라는 것을 알면 집단으로 대항하여 도주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이라도 고개를 들거나 옆사람을 보면 위에서 기다리는 요원이 또한 몽둥이로 등을 사정없이 내리친답니다. 그리고 차량으로 조선대학교 종합운동장으로 이동시킵니다. 고통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차량이 연병장에 클랙슨을 울리면서 도착하면, 잔류하고 있던 행정병이나 취사병 경계 대기병 등이 진압봉을 들고 모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차량에서 하차시켜 다시 줄을 세워 다시 기합과 구타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글로 적을 수 없도록 구타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체육관 건물에 수용시킵니다. 앞뒤 문에는 4~5명씩 초병을 세우고, 안에서 4~5명이 구타를 또 한답니다. 그리고 잠시 대기하다가 상무대 31사단으로 보내집니다. 시위를 하였든 하지 않았든지 젊은 사람이라는 죄로 끌려가는 것입니다. 한번 붙들리면 3~4차례 극심한 구타와 기합 등으로 인간의 한계를 지나버릴 정도로, 인간으로서 견디기 힘든 고통이 따르는 것입니다.- 11공수여단 63대대 소속 나◯◯, 「광주사태에서 나는 무엇을 했나 - 광주사태 당시 투입됐던 어느 계엄군의 수기」, 윤재걸,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 1987, 실천문학사, 35~37쪽 ( 편저자 윤재걸은 이 수기를 「내가 보낸 '화려한 휴가'」라는 제목을 붙였다. - 윤재걸,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 1987, 실천문학사, 21쪽.) 참고로 이 수기가 실린 책에선 정작 수기를 쓴 사람의 정보가 전혀 없고 '공수부대원'이라고만 되어있다. 다만 글 내용을 봤을 때 11공수여단과 일치하니 11공수여단이라고 추측할뿐이었다. 그러나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12․12, 5․17, 5․18사건 조사결과보고서』, 2007, 12쪽, 64쪽에서 이 수기를 쓴 사람이 11공수여단 63대대 소속 나◯◯씨 라는 것이 밝혀졌다.

과격시위는 커녕 시위자체와 무고한 사람들이 수없이 계엄군의 몽둥이와 군홧발과 개머리판에 구타당했다. 그리고 끌려가면서 구타당하고, 끌려간 뒤에도 계속 구타당했다. 이런건 "시위진압"이 아니다. 대법원은 이것을 폭동적 시위진압이라고 평가했다. 시위진압이라는 행위가 폭동수준이였다는 것이다.

2.2.8 공수부대원이 18일 죽었다는 증언이 있다?

2.2.8.1 공수부대원이 18일날 실종되서 19일날 시체로 발견된 증언이 있다?

김충립 전 특전사 보안반장은 다음 증언을 한 적이 있다.

- 5·18이 유혈사태로까지 번진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1980년 5월 계엄을 확대해 김대중·김영삼을 잡아넣으면 광주에서 '소요'가 날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한 판단 아래 소요를 진압하기 위한 부대를 배치한 것이다. 계엄을 확대하지 않으면 김대중이 대통령을 하게 돼 있었다. 군은 장악했다고 하지만 정권창출이 안 될 판이었다. 그래서 신군부는 계엄을 확대해서 김대중에게 정권이 넘어가는 것을 막으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5월 17일 김대중을 잡아넣으니까 '김대중을 석방하라'고 요구하는 데모가 일어났다.

5월 18일엔가 처음으로 부대가 진입했는데 그날 특전사 병사 하나가 행방불명이 됐다. 그 병사를 못 찾고 있었는데 다음날엔가 하수구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당시 (병사들의) 격분은 말로 다할 수 없었다. 그때부터 자위권이 발동됐다고 봐야 한다. 군에 위해를 가하는 사람들을 사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데모 진압은) 유혈사태로 번진 것이다. 처음에는 실탄을 장착하지 않았다가 병사가 시체로 발견된 이후 실탄을 장착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을 것이다."

- 하지만 특전사 병사의 사망은 장갑차에 의한 사고사였다는 주장이 있다.

"아니다. 시위대에 끌려가 행방불명이 됐다가 시체로 발견됐다. 당시 특전사에서 그런 상황을 서면으로 보고받았다. 사고사였다면 '사고사'로 보고가 올라왔어야 하는데, 분명히 하수구에서 시체로 발견했다고 보고받았다."- "5·18 '북한-미국 개입설'은 사실무근"

그러나 글을 보면 알겠지만 김충립 보안반장은 목격한 것이 아니라 "보고를 받은 것이다." 이건 곧 다시 말해 실제 계엄군 기록을 검증하여 확인이 가능하다는 것 이다. 그리고 확인해보면 알겠지만 그런 사람 없다. 당시 계엄군중 현재까지 최초 사망자로 확인된 사람은 3공수여단 정관철 중사인데, 3공수여단은 20일부터 광주에 왔다.# 18일~19일에 죽은 계엄군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 반박있으신 분들은 18일~19일에 죽은 계엄군이 누군지 알려주시길 바란다.

만약 김충립 전 특전사 보안반장의 증언이 정확한 것이라면 오히려 당시 계엄군 사이에 유언비어가 떠돌았다는 뜻이다. 다시말해 유언비어 때문에 "격분"을 했다는 증언이 된다.

참고로 보안사 내부에서 사실과 다른 유언비어들이 퍼졌다는 건 이미 검증된 사실이다.

광주에서 최초의 발포는 5. 19.에 있었다. 5. 19. 16:50 광주시 계림동 광주고와 계림파출소 사이에서 시위진압에 나섰다가 멈춰선 장갑차를 시위대가 공격하자 11공수여단 63대대 작전장교 차○○ 대위가 M16을 발포했고,(195:당시 11여단 63대대장 조창구 중령은 차○○ 대위로부터 보고를 받았다고 검찰에서 진술했다) 당시 조대부고 3학년인 김영찬이 유탄에 총상을 입었다. 5. 20. 01:00 보안사는 현지505보안부대로부터 “5. 19 고교생 1명(인적사항 미상)이 우측 대퇴부에 총상을 입고 전남의대병원에 입원 수술을 받았다.(196: 보안사, 광주사태 일일 속보철 (5. 20. 01:00, 505), 383-1980-89, 113쪽.)는 보고를 받았다. 505보안부대는 “관내 4개 파출소 파괴 집결 데모대가 쇠파이프 및 면도칼을 소지했던 점으로 보아 특정 배후 조직에 의한 조직적이고 기동력 있는 데모대로 판단”하며, “데모 진압병력에게 실탄을 미지급코 있고 경계병력만 1인당 10발씩을 분출, 장교가 통합 보관코 있을 뿐 아니라, 5. 19. 발포 사실 전무하였음을 감안할 때 고교생은 특정 데모세력에 의해 무성 권총으로 사격, 계엄군이 발포한 것으로 선동키 위한 지능적 수법”이라며, 계엄군의 발포를 부인하며 불순세력의 선동수법으로 판단했다. 계엄사령부도 고교생 총상자 확인 결과 에서 “김영찬(조대부고 3년. 19). 5월 19일 17:00 광주시 계림동 5거리에서 데모대에 가입. 장갑차에 방화하려다가 복부 관통 상해를 입고, 전남대 병원에 후송. 총탄 출구가입구보다 적으며 다수의 파편이 박혀 총기 제원 판단 곤란”으로(197:계엄사, 충정업무 일일 주요사항 (보안사, 383-1980-92, 54~55쪽 인용).) 상황을 파악했다. 그러나 당시 장갑차를 몰고 시위진압에 나섰던 11여단의 전투상보, 상급부대인 31사단과 전교사의 상황일지 등에는 5. 19. 발포에 관련된 어떤 내용도 찾아볼 수 없다. 11공수여단에서 상급부대에 보고를 하지 않은 채 발포 사실을 은폐한 것으로 판단된다. 당시 동구청은 계엄사나 보안사와는 다른 보고를 했다. 동구청은 “광주고에 서 계림파출소 사이 장갑차가 고장으로 있을 때 시민에게 총 발사로 국교생 2명, 중학생 1명, 고교생 1명 부상, 계엄군 차량으로 후송”으로 보고했다.(198: 광주시 동구청, 5․18사태일지 (광주광역시 5․18사료편찬위원회, 5․18 광주민주화운동 자료총서 제20권, 14~15쪽 인용). 여러 명이 부상당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실제로는 1명만 총상을 입었다.) 그러나 김영찬을 후송한 것은 현장 부근에 있었던 공중보건의 정은택(현 원광대교수)씨였다. 정은택씨는 부근의 외과병원으로 김영찬을 후송하여 응급수술을 한 뒤 전남대병원으로 이송했다. 계엄사와 보안대에서는 “실탄도 지급되지 않은 상황에서 군인들이 총을 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린다고 정은택씨에게 출석을 요구했으나 그는 다음날 곧바로 공중보건의로 근무하러 광주를 떠났다고한다.(199: 5․18 첫 총상자와 그를 구한 의사의 만남 , 연합뉴스, 2007. 5. 11.) -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12․12, 5․17, 5․18사건 조사결과보고서』, 2007, 79~80쪽

보안사는 공수부대가 쏜 것을 시위대가 쏜 것이라고 착각해놓고는 오히려 무고한 의사를 유언비어를 퍼트린 사람으로 몰아서 출석을 요구하기까지 했다. 보안사 내부에서도 이렇게 유언비어가 퍼졌으니 검증은 당연한 것인데, 유사역사학 집단은 검증도 없이 "당시 계엄군이 18~19일날 계엄군이 죽었다고 증언했다"는 소문을 퍼트린 것이다.

2.2.8.2 공수부대원이 18일날 실종되고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18일날 실종됐는데 그 사람이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없다."는 주장이며 위의 김충립 증언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위의 김충립 증언에선 분명히 "발견됐다."고 증언하고 있다. 김충립 전 특전사 보안반장의 증언에 근거해도 틀린 것이다.

2.2.9 5.18을 성격이 다른 사건과 비교하는 행위

2.2.9.1 프랑스 대혁명처럼 이기면 혁명, 지면 폭동이다?

이 주장은 근본부터 틀린 주장이다.

프랑스 대혁명의 평가문제는 "언어적 전환"에 근거한 것인데 '프랑스 대혁명은 반란이기도 한데 반란이라 부르지는 않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5.18 광주민주항쟁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 왜냐면 5.18 광주민주항쟁은 프랑스 대혁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프랑스 대혁명과 유사한 '언어문제'는 없다는 것이다. 예로 프랑스 대혁명은 행위주체가 반란이었는데, 5.18 경우는 행위주체가 상대를 하던 집단이 반란군이었다. 프랑스 대혁명에선 마리 앙투아네트루이 16세가 내란 행위를 한 적이 없다. 그러나 전두환5.17 내란을 벌이며 내란행위를 했고 이 과정에서 5.18 민주화운동이 벌여졌다. 덧붙힌다면 4.19 혁명도 5.18의 경우와 유사하다 할 수 있다. 이승만자유당은 불법정권찬탈행위와 4.19의 내란행위를 벌였고, 학생들과 시민들은 이 행위에 저항하려는 목적으로 폭력을 쓰고 그 과정에서 4.19 혁명이 일어났다. 4.19 혁명5.18 민주화운동은 발생 이유나 내란 주체에 대한 성격이 프랑스 대혁명같은 사건과는 전혀 다르다

간단히 말해서

내란행위내란의 주체
프랑스 대혁명 - 1792년 8월 10일 봉기자코뱅주의자 나 과격 혁명가들
4.19 발포이승만 세력
12.12 군사반란, 5.17 내란전두환 세력

4.19 혁명이나 5.18 민주화운동프랑스 대혁명처럼 체제를 부수는 게 아니라, 원래 민주주의 체제로 돌아가는 게 목적이다. 오히려 이승만이나 전두환이 기존 민주주의 체제를 막은 독재세력이다. 친독재 세력들은 이승만이나 전두환루이 16세마리 앙투아네트와 같은 처지인걸로 착각하거나 혹은 일부러 선동하는 것 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이것은 역사왜곡 세력뿐만 아니라 리버럴, 사회주의자, 보수주의자, 진보주의자들도 범하는 오류이다.

이 내용과 유사한 내용을 김재춘(5.16 군사정변, 제3대 중앙정보부장) 씨도 말씀한 바 있다.

김종필, 김재춘, 김계원, 장세동 씨 등 10여 명이 둘러앉았다. 전두환 씨는 불참.

국회가 화제가 되고 얘기는 80년 광주문제로 옮아갔다.
장세동(전두환 정권의 국가안전기획부장 경호실장) 씨가 광주사태는 진주민란이나 홍경래의 난 같은 것이라는 취지로 80년 5월의 광주상황을 설명해갔다. 그러자 김재춘씨(3代 정보부장)가 무뚝뚝하고 직선적인 성격 그대로 '무슨 그따위 얘기를 아직도 하고 있는 거요. 여기 여기 앉아 있는 사람들을 바보로 아는가. 당신네들이 총칼 들고 정권 잡가고 저지른 짓을 무슨 홍경래 반란이라고?'하며 내쏘았다. 그 자리에서 어떤 분은 웃으며 일어서면서 '국회에서 특위 조사할 것도 없이 결론이 이미 나와 버렸군' 하여 웃고 헤어졌다. (당시의 한 참석인사)


김충식, 2012, 남산의 부장들, 782

김재춘 씨는 5.16 군사정변에 가담했을정도로 반공주의가 강한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도 내란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분명히했고, 내란행위의 주체를 왜곡하려하자 직선으로 반발했다. 내란행위의 주체는 광주시민이 아니라 전두환 세력이라는 건 5.16 군사정변 세력한테도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흔한 오해가 있는데, 독재정권을 비판하는 사람은 프랑스 대혁명을 찬양할 것이라는 오해이다. 그러나 이승만정권이나 전두환 세력의 국가폭력을 규탄하는 사람 중에선 프랑스 대혁명 수정주의자[38]도 있으며 부흥카페에선 프랑스 대혁명의 방데학살을 이승만 정권의 제주도 초토화 작전[39]과 비교하기도 한다.

2.2.9.2 5.18이 LA 폭동과 성격이 같은데 이름만 다르게 부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같지 않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기표(記標)뿐만 아니라 기의(記意)도 유사하지 않다.

  • 행위의 목적도 다르다.
  •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내란범도 아니고, 국헌문란폭동을 벌인 적도 없다.
  • LA폭동에 개입한 군인들은 무고한 시민들을 대량으로 무차별로 두들겨 패거나 대검으로 찌른 적도 없고, 감금해서 여러명을 학살한 일은 더더욱 없다.
  • 마찬가지로 무기없이 국기 들고 달려오는 시민들에게 발포행위를 한 적도 없다.
  • 무고한 시민들에게 수사없이 학살하는 행위를 벌이지도 않았고, '자기 군인들끼리 오인사격해놓고 무고한 시민을 즉결총살한 행위'는 더더욱 벌이지 않았다.

기의(記意)가 전혀 유사하지 않는데도, 마치 언어만 다르게 부르는 것처럼 선동을 한 것이다.

2.2.10 그 외의 폭동설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킨 신군부에 충성하는 이상, 계엄군은 일체의 정당성을 잃는다. 그들이 광주시를 포위한 순간, 계엄군은 쿠데타 위헌세력에 봉사하는 일개 무력집단으로 전락했을 뿐이다. 한마디로 12.12 군사반란 당시 신군부를 진압하려다 그들에게 역으로 제압당한 장태완 전 수경사령관의 말대로 반란군이며 탱크로 머리통을 날려버릴 존재들이 되었을 뿐. 전두환 역시 오늘날까지도 일체의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의 예우에서 제외되고 있는데, 이는 전두환이 당시 대한민국 정부 권위를 대표하지 못했다는 성찰이다. 전두환 정권이 자신들의 부족한 정당성과 명분을 권위주의 통치로 찍어누른 것도 그 때문이었다.
  • 최초 발포명령자는 전두환이 아니다.
➜ 이것은 애매하다. 문제의 애국가 발포 사건 당시에 직접 명령을 내린 사람이 누구인지는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허나 사법부 측에서는 계엄군이 먼저 발포했다고 보고 있다. 더욱이 이 점만을 근거로 5.18 당시 공수부대의 각종 만행들을 부정하려 들거나 사건에 대해 전두환이 책임질 필요가 없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 시민군은 무분별한 파괴를 일삼았다.
➜ 아니다. 미필자와 미성년자는 무기를 주지 않았고, 신분증도 확인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시민군은 잘 조직되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잘 조직된 시민군은 대민약탈 같은 무분별한 폭력이나 파괴행위를 일삼지 않았다.
  • 광주시민은 '민주화' 를 요구한 적이 없었다.
➜ 당시 광주시민들의 시위구호는 계엄철폐 독재타도, 전두환, 신현확 물러나라였다. 이게 민주화가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인가?
  • 유네스코에서는 5.18을 uprising 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무력이 사용된 반란 혹은 폭동을 의미한다.
➜ 몇 가지로 간단히 반박할 수 있는데 5.18의 가치가 그렇게 훼손되어야 한다면 이는 유네스코까지 함께 바보 만드는 것밖에는 안 된다. 또한 uprising 이라는 단어 자체의 의미는 폭동이라기보다는 봉기에 가까운 개념이고, 이런 정도의 의미는 3.1운동이나 4.19 혁명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유네스크는 이미 5.18과 관련된 기록물들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으며 선정이유로 한국 뿐 아니라 아시아 전체의 민주주의에 있어서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꼽는다. 애초에 유네스코에서 5.18을 가리킬 때는 그냥 uprising이 아니라 May 18 Democratic Uprising, 즉 민주적 봉기라 표현한다. 이는 외국 언론 등도 유사하며, 비슷한 표현으로는 May 18th Kwangju Democratization Movement가 있다. 참고자료1 유네스코가 말하는 5.18의 진실 EBSi : 폭동이 아닙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 시민들이 버스를 몰고 계엄군에게 돌진해 사상자가 났으므로 계엄군의 사격은 정당하다.
➜ 이는 5월 21일, 도청 발포 직전 실제로 있었던 버스 돌진 사건의 책임을 시민들에게 돌린 주장이다. 19~20일에 운행하던 버스와 택시의 기사들까지 폭행당해 사망한 것에 분노한 기사들이 차량을 몰고 시위대와 함께 도청 앞에서 차량시위를 벌였다. 이 때 공수부대 측에서 버스를 향해 최루탄을 쏘았고, 버스 안에 최루탄이 터지자 당황한 기사 배용주 씨가 미처 버스의 시동을 끄지 못하고 내리는 바람에 버스가 그대로 달려서 전경들이 치여 사망한 것. 이 당시 공수부대가 버스에 실탄 사격을 하여 운전사인 김복만 씨가 사망하기도 했다. (광주매일 '正史 5.18' <61> 출처)다만 계엄군이 그것까지 알 수는 없었을 것이다.
  • 어쨌든아몰랑 5.18은 폭동의 한 종류라고 규정되어야 하며, 굳이 타협하자면 민주화폭동(?) 정도가 될 것이다. 과격진압을 비판하는 것은 부당하다.
➜ 상기되었듯 신군부가 헌정질서를 준수하면서 적합한 과정을 거쳐 국민의 손으로 당선된 권력이라면 이 말이 옳겠지만 현실이 그게 아니니 틀렸다는 것이다. 신군부는 쿠데타로 헌정질서를 훼손한 반란모의 세력이며, 5.18 시민군은 무너진 헌법정신을 바로잡기 위한 국민적 저항이다. 이미 신군부의 12.12군사반란 그 자체가 국가전복을 위한 군사폭동인 것이다. 그리고 전두환과 노태우는 이미 1995년에 군사반란 및 내란수괴 혐의 즉 폭동죄로 처벌받았다. 또한 이미 사법부에서 전두환 일당의 5.18에 대한 과격진압은 엄연한 학살행위라고 판결하였기에 과격진압이라고 비판하는거는 정당하며, 과격진압을 비판하는것은 부당하다는거는 순전히 개소리에 불과하다. 또한 타협 용어라는 '민주화폭동'이라는 말은 사전에 존재하지 않은 단어이기 이전에, '민주화폭동'이라는 용어는 5.18을 일종의 폭동으로 간주한다는 의미이기에 결코 타협 용어가 될수 없다.
  • 어쨌든아몰랑 5.18은 과도하게 미화되고 포장된 사건이며, 객관적으로 성역없는 재조사를 해 봐야 한다.
김대령편견 및 고정관념/역사 항목 참고. 87년 민주화 이전 지속적으로 폭동이라 명예훼손 당해왔고 국가전체적으로 왜곡작업을 진행하여 사실이 밝혀지기 전까지 잘못 알려져 있었던 일이다. 그것이 밝혀지고 복권된 일인데 과도하게 미화되었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되는 소리, 유가족들은 그 이전까지 관련자들의 묘지에 찾아가지도 못했다. 또한 객관적인 성역없는 재조사는 이미 노태우 정권부터 지금까지 몇차례나 진행을 한 후에 대법원에서까지 확정된 판결이라는 것을 숨기고 아직 미완이라는 이미지를 주기위해 왜곡을 하는 것이다. 즉 정권 바뀔 때마다 재조사를 숱하게 해서 나온 결과물이 현재의 5.18에 대한 인식이다. 이걸 보고 미화되고 포장된 성역이라고 하는 건 마치 창조설자들이 진화론을 두고 자기들이 반박조차 못할 만큼 고귀하게 취급되는 성역이라고 싸잡아 욕하는 것과도 같다.
  • 5.18 당시 부상을 당하거나 PTSD 등으로 고통을 당하는 계엄군 및 경찰들에 대한 보상이 필요하다. 이 보상이 이뤄지지 않는 것은 후대에 5.18이 과도하게 미화되고 포장된 사건이라서 묻혔기 때문이다.
➜ 당시 진압에 참가했던 계엄군 및 경찰 개개인에 대한 보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그들에게 '폭동 진압'을 하라고 강요했으면서 정작 제대로 된 '보훈'을 하지 않은 전두환 정권에게 책임이 있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보상과, 5.18 운동 자체의 정당성은 엄연히 별개의 문제이다. 또한, 대법원 판결에 근거하면 이들은 전두환 내란 세력에게 이용당한 집단이며, 또 다른 역사의 피해자들이다.
  • 5.18은 전라도가 독립하려고 했던 사건이며, 이를 진압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은 분열됐을 것이다.
➜ 만약 전라도가 독립할 목적이었다면, 오히려 대한민국 내에서 문제들이 생기는 것을 좋아하고 문제가 더욱 커지게 부채질 했을텐데, 광주 시민들은 되려 목숨 걸고 대한민국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다. 약간의 생각만 할줄 알아도 이게 얼마나 개소리인줄 알 수 있다.
➜ 나무위키 내에 앙망문 문서에 앙망문의 원문과 해석이 있으니 참고하자. 거기에 5.18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 유튜브 등지에서 김대중노무현이 "광주는 총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폭동이야"라는 발언을 하는 영상이 있다. 이런 영상들이 있으니 5.18은 폭동이다.
➜ 유튜브 등지에서 올라온 영상들은 김대중과 노무현 대통령을 전두환의 광주 폭동 발언에 합성한, 엄연히 조작된 영상이다. 이따위 조잡한 합성영상만을 근거로 5.18은 폭동이라고 할수 없다.
  • 전두환이 주도한 폭동이다.
➜ 이것은 맞는 이야기다. 하도 폭동, 폭동 해대니 폭동의 주어, 주체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맞는 이야기" 부분에 걸린 링크가 그 폭동을 가리키는 링크이니 참조할 것.

3 남남갈등이간질 선동을 위한 오류들

3.1 6.25 유공자분들과 비교해서 보상금이나 혜택이 불공평하다?

6.25 국가유공자5.18민주유공자6.25 참전유공자
등록기준사망, 상이, 보국훈장사망, 상이, 구속참전 (사망, 상이 피해 없음)
등록인원311915명4271명226506명
보훈급여월 46만원~월 422만원없음월 17만원
교육지원수업료 면제수업료 면제(구속자는 생활등급 6급이하)없음
취업지원상이자 본인 (가산점 10%), 자녀 (가산점 5%)자녀 (가산점 5%)없음
의료지원상이자 본인 (100% 감면) 유가족 (60% 감면)상이자 본인 (100% 감면) 유가족 (60% 감면) 구속자 본인 (50% 감면)본인 (60% 감면)
대부지원주택, 농토, 사업주탁, 농토, 사업 (구속자는 생활등급 4급 이하)없음
묘지안장현충원 안장5.18 국립묘지 안장국립호국원 안장
국립시설무료 또는 할인무료 또는 할인무료
가스비상이자 1~3급 지원상이자 1~3급 지원없음
보훈처 출처국가유공자5.18민주유공자6.25참전유공자
  • 6.25 유공자는 국가유공자 와 6.25 참전유공자가 있다. 6.25 국가유공자는 가족사망, 본인장애 같은 피해사실이이나 보국훈장 이상 공훈기록이 있는 분들이다. 6.25 참전유공자는 참전했지만 피해사실이 없는 분들이다. 5.18 유공자는 시위에 참여해야만 지정당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사망, 본인장애, 구속 및 수감 같은 피해사실이 있어야만 지정받을 수 있다.
  • 같은 피해를 입은 경우엔 6.25 유공자분들이 5.18 유공자분들보다 혜택이 좋다. 국가유공자와 다르게 5.18 민주유공자는 달마다 연금을 받지 않는다. 상이군경은 달마다 116만원~422만원, 전몰군경 유가족은 달마다 48만원~143만원을 받는다.
  • 국가유공자는 자녀 혹은 형제1 인에 한해 보충역 6개월 복무 병역혜택을 준다. 그러나 5.18 민주유공자에게는 그런 혜택이 없다.
  • 유공혜택을 비교한다면, 6.25 상이군경 > 6.25 전몰군경 유족> 5.18 부상자 > 5.18 사망자 유족 > 5.18 관련 수감자 > 6.25 참전 유공자 순서이다.

3.1.1 5.18 피해자들이 보상금을 많이 받은게 불공평한 대우라는 증거?

5.18 보상에는 순수한 유공값뿐만 아니라 피해보상도 포함되어 있다. 비록 내란세력 탓에 벌어진 것이지 하지만 가해자의 주체는 "우리나라"인 한국이다.[40] 그와 달리 6.25전쟁의 침략 주체는 북한, 소련(현 러시아), 중공(현 중국)이다. 피해보상이라는 개념에서 차이가 있기 때문에 "보상금을 많이 받은 것"은 불공평하다의 근거가 되지 못 한다.

3.1.2 5.18 유공자의 자녀가 공무원 시험을 휩쓴다?

일베에서 5.18 민주유공자예우에 대한 법률이 악법이라면 선동을 하는데 퍼트리는 게 "5.18 유공자 자녀가 가산점 혜택을 받아 국가 채용시험을 휩쓴다"는 것이다. 재특회의 선동과 성격이 유사한 행위이다.

그렇다면 정말 사실일까?

200520062007200820092010201120122013
총계831,785848,745859,138870,060878,780871,092857,151861,817858,834
국가유공자(계)764,133775,769779,620781,940782,430766,499745,844752,035745,452
- 독립유공자6,0116,2816,4426,6426,7666,9427,0987,2147,312
- 전공상군경123,519132,125139,190145,881151,954156,570160,962177,883182,851
- 전몰순직군경56,00556,23956,36156,25555,91355,62555,45555,31354,998
- 참전유공자486,696484,934477,781470,088460,950437,095408,944394,657379,634
- 기타91,90296,19099,846103,074106,847110,267113,385116,968120,657
고엽제후유의증 및 고엽제후유증 2세환자36,46340,32143,60446,68849,90052,69255,16649,00648,717
5.18민주유공자3,9543,9784,0124,0424,0624,0904,0954,1914,252
특수임무수행자1,7751,9172,2712,3332,3023,1133,2613,4963,575
중장기복무제대군인25,46026,76029,63135,05740,08644,69848,78553,08956,838

통계청 보훈대상자 현황 수

본인 또는 자녀가 국가 채용시험에서 취업지원 가산점을 받을 수 있는 유공자는 국가유공자, 고엽제피해자, 특수임무수행자, 5.18 민주유공자 이다. 여기서 5.18 민주유공자는 비중은 1%정도일뿐이다.

또한 2006년 이전엔 본인 뿐만 아니라 자녀한테도 10% 가산점을 부여해서 유공자 합격률이 높았지만 2006년 국가유공자 가족에게 주어지는 가산점 제도를 헌법재판소에서 헌법불합치 판결을 내려 자녀에게 주는 가산점을 5%로 낮추는 법안이 통괘됐다. 유공자 자녀 합격률이 훨씬 낮아졌는데 5.18 민주유공자 자녀는 여기서 비중이 더더욱 낮다.

5.18 재단 사이트의 2003년 5.18 민주유공자 등록현황 통계에 따르면 전체 유공자 3586명 중 70%가 넘는 2556명이 호남권에서 산다.# 5.18민주유공자 자녀 혜택이 어느정도 영향력을 미치는 알 수 있는 기준은 호남권이다. 그런데 전라도는 5.18유공자 말고도 다른 유공자들도 많다. 2010년 보훈연감을 보면 보훈처 광주지청이 관할하는 전몰군경, 상이군경 같은 호남권 국가유공자는 2만7857명으로 5.18 유공자 전체를 압도한다#

거기다 호남권에서 취업지원 가산점을 받아서 합격한 유공자 자녀도 다른 지역에 비교해서 많은 편도 아니다. 사이버국가고시센터 9급 공무원 지역응시 합격자 통계에서 2013년 취업지원 가산점을 받은 유공자 합격률은 많은 편이 아니다. 2013년 기준으로 해서 가산점을 받은 유공자 합격률은 수도권 6.7%(전체합격자 281명, 취업지원 합격자 19명), 강원도 0%(29명, 0명), 충청도 11.3%(53명, 6명), 전라도 6.25%(48명, 3명), 경상도 8.9% (134명, 12명), 제주도 0%(3명, 0명)이다. #

5.18 민주유공자는 2013년 기준으로 그렇게 영향력이 높지 않다. 5.18 민주유공자 자녀가 다른 지역에서도 볼 수 있지 않느냐는 주장도 있는데 그건 다른 유공자들도 마찬가지로써 가산점 혜택이 없는 사람보다는 공무원 시험에 상당히 유리하다.

3.2 결론

이와 같이 5.18 광주폭동설을 뒷받침할 만한 정확한 증거가 없다. 반면 전두환이 일으켰다는 정확한 증거는 수도 없이 많다.

증거도 없는 상황에서 북한이 개입되었다는 주장은 그냥 상큼하게 씹어주는 것이 옳다. 거기다 국가에서 공인된 자료들은 김대중, 노무현 기간에 조작되었다고도 주장하기도 한다. 이를 다시 말하면 일부 왜곡세력 소스로 제공받는 자료들만 철석같이 믿고 나머지는 전부 거부하겠다는 거다.[41] 나랑 의견이 다르기 때문에 나는 이것을 불신하겠다 또한 5.18이 폭동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곧 그만큼 신군부 세력의 정체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거나 아무리 좋게 말해도 전두환 정권에 대해 지나치게 나이브한 관점을 갖고 있다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다.

나머지는 이곳이곳을 참조해보자.

대법원 전원합의체 96도3376 판결은 다음과 밝히고 있다.

5·18내란 행위자들이 1980. 5. 17. 24:00를 기하여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등 헌법기관인 대통령, 국무위원들에 대하여 강압을 가하고 있는 상태에서, 이에 항의하기 위하여 일어난 광주시민들의 시위는 국헌을 문란하게 하는 내란행위가 아니라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한 행위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난폭하게 진압함으로써,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에 대하여 보다 강한 위협을 가하여 그들을 외포하게 하였다면, 그 시위진압행위는 내란행위자들이 헌법기관인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을 강압하여 그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한 것으로 보아야 하므로 국헌문란에 해당한다.

그래서 결론은, 5.18은 폭동이 맞다. 5.17 군사반란에서 이어지는 전두환이 일으킨 군부 폭동이다.지금까지 글이 너무 많아서 멍때리고 있던 위키러들을 놀라게 만드는 부분

4 관련 법정공방

4.1 2012년의 지만원의 무죄판결 논란

2012년 12월 27일 5.18 폭동설과 북한 개입설을 강력하게 주장해 온 지만원이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판결을 받자, 일부 우익단체와 네티즌들이 마치 법원이 5.18을 폭동으로 인정한 것인 양 호도하고 있다. 5.18은 김대중 등이 일으킨 내란사건 그러나 지만원이 무죄를 받은 것은 폭동이라고 한 주장이 진실되어서가 아니라, 피해자가 특정되지 않아서 법원이 무죄 판결을 내린 것이다.

4.1.1 지만원은 왜 무죄가 되었나?

명예훼손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명예훼손은 피해자가 특정되어야지 성립하므로 정치인들, 경기도인들 등 집합명칭을 사용한 경우에는 명예훼손이 성립하지 않아 죄를 물을수가 없는 상태다. 물론, 구성원의 수가 적어 특정인이라 추정가능하다면 명예훼손이 성립될 수 있다. 하지만 전두환의 지시아래 강제진압되어 피해를 입은 5.18 피해자가 한두명이 아닌 상황이라 5.18 피해자 중에서 누구라 특정할 수가 없어 명예훼손이라는 죄를 물을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니까, 지만원의 주장은 5.18 피해자의 명예를 훼손시키는 내용이지만 5.18 피해자가 지나치게 많아 개개인에 대한 명예훼손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법원의 논리이다.

4.1.2 법원 판결문 요약

1심 판결문[42]에서는 '5.18민주화운동은 이미 그 발생 배경과 경과, 계엄군과 광주시민 사이의 교전 사태의 발생원인, 경과, 그 밖에 인명피해의 발생원인, 5.18민주유공자들의 지위와 그에 대한 보상, 예우 등에 관하여 법적 및 역사적 평가가 확립된 상태이어서 이 사건 게시글을 통하여 5.18민주유공자나 참가자들에 대한 기존의 사회적 펑가가 근본적으로 바뀔 수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한 마디로 이런 개소리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판시하였으며, 이러한 1심의 논지는 고등법원[43]과 대법원[44]에서도 유지되었다.

간간히 말해, 지만원의 주장은 대한민국 법률이나 학계와 사회 양측이 내린 역사적 평가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개소리인데 이 개소리의 피해자를 특정 할 수가 없어 명예훼손에 대한 법률을 적용 할 수가 없을 뿐이지 지만원의 주장이 진실해서 무죄가 아니란 것이다.

4.1.2.1 지만원의 김대중 명예훼손 재판

5.18 민주화운동 때 시민을 학살한 것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김일성과 짜고 보낸 북한의 특수부대였다는 글을 쓴 지만원에게 항소심에서 사자명예훼손죄를 인정해 집행유예형을 선고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9부(강을환 부장판사)는 "(광주시민 학살 책임자로서) 전두환 신군부세력에 대해 사형을 선고했던 사법적 판단 등 밝혀진 사실과 다른 바, 지씨는 사법부와 입법부의 판단이나 그 과정에서 밝혀진 사실은 모두 무시한 채 자신의 생각을 무분별하게 게시했다"며 징역6월 집행유예2년을 선고했다.

지만원이 2009년 11월 자신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탈북자들의 수기에 의하면 김대중은 김일성과 짜고 북한특수군을 광주로 보냈다 합니다. 이들에 의해 광주시민들이 학살을 당했지요. 5000년 역사에 이 인간 이상으로 악한 존재는 없습니다"는 글을 실어 사자명예훼손혐의로 기소됐다.

재판부는 이에 대해 "지씨가 인용한 탈북자들의 수기내용은 출처나 증언자들이 불분명하고 내용이 검증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일성의 공모에 대한 구체적인 진술을 담고 있지 않으며, 객관적인 근거도 없다"고 판단했다.

지만원의 주장에서 피해자가 구체적으로 명시된 경우에는 충분히 유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5 5.18 기념재단과 광주광역시의 법률조치 선언

2012년 겨울을 기준으로 인터넷에서 5.18에 대한 비방내용이 확산되자 5.18 기념재단과 광주광역시에서는 5.18 운동을 비방하는 네티즌을 상대로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동시에 광주 교육청에서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5.18 민주화운동의 인식을 제고하는 교육을 강화하는 한편, 5.18에 대한 비방 내용을 정정하고 비방 네티즌을 신고하는 청소년 단체를 조직할 계획에 있다.

다만, 지만원 재판과 같은 이유로, 겁주기 이외의 법적 효과는 갖지 못한다.

6 폭동설을 주장하는 이들의 문제점

이미 5,18 광주 민주화운동은 역사적, 사회적 재평가가 끝난 상태이다. 하지만 그래도 끝까지 폭동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이러한 문제점이 있다.

국가에서 이미 공인하고 판결이 난 증거자료에 대해 부정한다는 측면, 민주화운동이라고 판결난 상태에서 폭동설을 가설이 아닌 진실이라고 우기는 태도.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의 근거는 우익 중에서도 극우로 평가받는 지만원의 '주장'이다. 여기에 전두환과 신군부에 대한 옹호가 포함된 것은 덤이다. 사실 이 설 자체가 지지자들이 우파와 좌파로 갈리는 것도 특징. 우파계열 사이트에 가보면 폭동설이 당연하다는 듯이 다뤄진다. 이들은 민주화운동이라고 부르면 좌빨이라고 욕하며, 지역드립까지 서슴치 않는다.[45]

당연하겠지만 우익계열 모두가 이 설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는 극우 언론인으로 평가받지만 1980년 당시 이 현장에 직접 잠입취재[46]를 했던 조갑제 당시 부산국제신보 기자는 5.18을 "개소리 집어쳐라! 빨갱이 폭동 좋아하네! 이건 민주화운동 맞는데 뭔 이상한 소리야!"라고 못박아 말했으며 아직도 5.18이 민주화 운동이란 것만은 부정하지 않고 있다.

일각에선 조갑제가 해임된 이유를 5.18 민주화운동을 취재한 것 때문이라 주장을 하기도 하는데, 조갑제가 해직된 실질적 이유는 악명높은 포항 석유 발견 사건에 대해서 그건 뻥임, 중정이나 높으신 분들이 국민여론 돌리려고 지어낸 것임이라는 정부의 언론조작을 폭로한 르포기사를 썼기 때문이다
위영상에서 시위군중이 했지 북한군 얘기가 아니라고 하자 말이 바뀐다

박근혜 역시 5.18은 민주화운동이 맞다고 인정하였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도 2015년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따라 불렀으며 그 노래는 북한 따위와는 전혀 관련 없고 피해자의 영혼 결혼식을 위한 노래라고 밝혔다. 이정도면 김무성 대표 역시 민주화 운동이 맞다는 발언을 한 것으로 봐야 한다. 아니, 오히려 2016년 5월 18일에도 광주 기념식 가겠다고 공언까지 했다. 참고로 배경지식 하나 넣자면, 김무성 역시 김문수(前 경기도지사)처럼 80년대 전형적인 민주화 운동에 투신한 사람이며 특히 김문수도 2006년 기념식에서 눈물까지 흘렸다. 읽는 사람은 바로 전 까진 아 글쿠나 식이었지만 갑자기 진지해질 것 같다

일베저장소, 지만원 등 극우세력이 그렇게 좋아하는 새누리당 계열에서조차 5.18에 대해 숭고한 민주화 운동이라고 일단 겉으로는표명하는 사람들이 이명박, 박근혜, 김문수, 김무성 등등 해서 수두룩하며, 역시 극우세력이 좋아하는 대표적 극우 언론인인 조갑제의 주장도 부정하는 것이 저런 인터넷 극우의 상황이다. 한 사건 부정하려고 여태까지 지들 레퍼런스 제공해준거 다 부정할 기세

최근 5.18 시민군으로 참여해 옥고를 치른 한 남성이 36년만에 무죄가 선고되었다. 기사의 내용에 따르면 내란실행 혐의로 기소돼 실형을 살았던 남성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고 밝혔다. 신군부가 일으킨 쿠데타가 내란 행위에 해당하기 때문에 이에 반발한 것은 죄가 될 수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재판부는 '"전두환 등 당시 군부가 일으킨 군사행위는 내란행위에 해당한다"'며 "'김씨의 행위는 헌법의 존립과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행위로 범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무죄 선고이유를 설명했다. 이번 재판에서 만일 검찰이 항소하지 않아 무죄가 확정된다면 A씨가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도 승소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시민들이 무기고에서 총을 꺼내고 계엄군과 총격전을 벌였기 때문에 얼핏 보면 정말 폭동이 맞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당시 계엄군은 내란을 일으킨 '반란군이였기 때문에 그들의 행위가 폭동이 아닌 것이다! 근데 폭동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걸 몰라요.

7 북한 선전기관의 왜곡

광주 인민봉기가 일어나 미 국무장관 머스키, 국방장관 브라운, 대통령안보담당보좌관 브레진스키, 미 중앙정보국장 터너 등은 긴급모의를 벌려놓고 광주 인민봉기를 진압할 흉계를 꾸미었다.

국가안보담당 특별보좌관 브레진스키는 항쟁을 ‘무쇠주먹으로 진압해야 한다’고 폭언하였으며 ‘초전박살’, ‘젊은이 싹쓸이 작전’의 살인수법들도 불사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따라 대 살육작전을 현지에서 조종 지휘할 데 대한 임무를 받은 남조선 강점 미군사령관 윅캄(위컴)은 의로운 항쟁자들을 ‘버릇없는 망나니’, 지어는 ‘들쥐’로 모독하면서 ‘공수특전대’ 5개 여단과 보병사단, 기갑부대, 항공대를 비롯한 7만 여명의 방대한 무력과 장갑차, 중포, 군용직승기와 지어는 항공모함전단까지 광주의 평화적 주민들을 살육하는데 투입하도록 명령했다.
참조

북의 선전매체 우리민족끼리는 이상과 같은 내용으로 광주민주화운동을 반미/종북봉기로 위장하며, 학살의 주역을 '미국'으로 왜곡하는 선전을 하고 있다.

참 쓸데없게도 북한에서 하는 이런 헛소리로 인해 광주폭동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더욱 강하게 북한 개입설을 주장한다. 북한 주장대로 북한의 주도로 일어난 반미/종북 봉기가 맞다는 것. 극과 극은 통한다 하여간, 북한 싫어한다는 것들이 북한 말은 아주 잘들어요

  1. 김동춘 교수는 2014년 기준으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가기관인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상임위원으로도 일한 경력이 있고 『전쟁과 사회』는 2005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주빈국이 뽑은 ‘한국의 책 100권’에 선정되었고, 2010년 한국·중국·일본·대만·홍콩 등을 대표하는 ‘동아시아 100권의 인문도서’로 선정되었고, 독일어·영어·일본어로 번역·출판되었다. 작가소개출처
  2. "사회학자들은 경제가 어려워지면 나타나는 파쇼 현상의 첫 단계로 해석합니다." # 이 뒤 김동춘 교수의 인터뷰도 나온다.
  3. 이걸 넣는 이유는 전두환이 잘해서가 아니라 하도 북한군 북한군 거리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들이 숭배해마지 않는 바로 그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하는 이야기라서 그렇다. 어떻게 보면 일베저장소지만원 관련 세력을 비꼬는 의미도 약간 들어가 있다 보면 된다. 분명히 전두환이 학살의 주동자라는 것만큼은 100% 사실이지만 저 말도 일베저장소 세력의 근간을 뒤흔들어버릴 임팩트가 있는 말이다. 그리고 이미 일베가 뒤집어졌다(...)
  4. 당시 의안명은 5·18민주화운동등에관한특별법안 링크이며 현재의 법령명은 5ㆍ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5. 광주민중항쟁 또는 광주민주화항쟁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6. 인터넷상에 5.18북한군개입설을 조직적으로 유포한 최초의 인물이다.
  7. 실제로 몇몇 정신병자들은 경기도 광주시에서 일어난 광주대단지사건 때의 사진들 및 증언들을 가지고와서 광주민주화운동때의 일이라면서 왜곡을 저지르거나, 광주대단지사건을 '사태'나 '폭동'이라고 평가하는 유명인들의 평가를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평가라고 억지를 부리며 우기는 놈들이 있다.
  8. 대한민국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 그리고 헌법재판소는 "5.18은 광주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일어난 민주화운동"이란 평가를 오랜 시간에 걸쳐서 반복적으로 확인하였다. 민주화 이후 집권한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은 물론 소위 보수정권인 이명박, 박근혜도 이런 평가를 공식적으로 뒤집지는 않았다.
  9. 광주 폭동설은 북한의 소행이라는 주장
  10. 여기서 민주화운동 왜곡세력들의 모순적인 면을 볼 수 있다. 통합진보당이 해산 당한 이유가 반헌법/위헌 요소로 인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훼손으로 인한 것이었는데, 정작 민주화운동 왜곡세력들이 통합진보당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보고 자유민주주의적 기본질서의 중요성을 설파하면서 정작 이에 대해선 본인들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훼손하는 반헌법적 발언을 하고 있다.극과 극은 통한다.
  11. 당시 한국의 치안 상태를 보면 특수부대를 전라도까지는 커녕 서울 이북 지역까지 잠입도 천운의 도움을 얻어 겨우 할 수 있었을 지경이다.
  12. 등소평사상연보, pp.188~189, 오진용, 『김일성시대의 중소와 남북한』 p.81.에서 재인용
  13. 그 중 광주MBC가 1980년 5월 20일에 광주 난민들한테 방화당하였음
  14. 1987년 10월 동안 전두환의 대통령 임기 날짜에 다가오기 전에는 이병철이 카톨릭 종교인들에게 마지막 네 번째 질문으로 "지구의 종말은 오는가?"라며 카톨릭 교의 배타성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15. 현재도 동일함
  16. 추가설명은 KM900문서 참조
  17. 종북들은 종종 이 설을 신봉하며, '북한은 광주에 전차를 대규모로 보낼 정도로 강하다!'라는 개소리들을 자주 짓걸인다.
  18. 김일성이 축지법을 쓸수 있다 하더라도, 수십대의 중장비를 봉쇄된 도시에 단기간만에 보낸거는 불가능하다.
  19. 아무리 선진국이라고 해도 전차는 설계에서, 프로토타입 생산까지 최소 1년 이상은 걸린다.
  20. 실제로 악명 높은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증거물로 내세운 게 흔히 볼 수 있는 라디오로서 이것으로 북한 방송을 청취했다라는 식으로 증거자료라고 내놨던 시절이다. AK나 북한 혹은 중국제 총기 한점이라도 발견되면 이만큼 좋은 자료가 어디 있을까?
  21. 카빈의 오타
  22.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4.19 혁명이 나온다.
  23. 황장엽의 발언, 문서에서 광주로 검색 [1]
  24. 원래 2차전 비포장 국도 밖에 없었지만, 1970년대 호남고속도로가 개설되고 기존의 국도가 4차선으로 포장되는 바람에 교통요충지가 됐다고 한다. 2014년 안으로 광주교도소는 삼각동으로 이전될 예정이다.
  25.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세계의 군사학, 전쟁, 게릴라전투를 연구 하는 사람들의 연구 대상이 되었어야 했다. 그리고 꼭 연구학자가 아니더라도 전쟁에서의 승리 비책을 찾는 국가라면 돈을 주고 서라도 배우고 싶은 사례가 아닌가? 적국의 최남쪽의 내륙 도시에 400명(혹은 그 이상)이 되는 인원이 몰래 들어와 폭동을 일으키고 흔적도 없이 다시 자기네 나라로 돌아가는데 성공했다면 어느 나라가 그 비법을 배우고 싶어하지 않겠는 가? 그런데 어느 학자도 이 사건을 그런 방향으로 연구 했다는 기록은 없고, 어느 나라도 이것에 대해 북한에 "비법"을 배우고 싶다며 매달렸다는 언론 보도등은 없다.
  26. 신의주 학생 의거나 북한내의 반정부 투쟁을 영화화하면서 북한산에서 촬영하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
  27. 이걸 북한 개입의 증거라면, 역시 민주화 유공자로 인정받은 김완섭을 근거로 5.18은 친일파의 준동이다라고 할 수도 있다.
  28. 12월 13일 전두환이 이희성 육참총장이란 메모를 보여줌 - 12.12 5.18 7차공판 지상중계 -13기사 참조
  29.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경력은 제3대 총선 당시 전남 목포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도전한 것이 시작이다.
  30. 보수주의 성향의 싱크 탱크로, 미국 정부의 정책 결정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31. 물론 상식적인 주장이 아닌, '미국도 폭동으로 생각한다!' 정도의 주장이다.
  32. <5·18 관련 사건 수사결과> 110페이지, 서울지방검찰청·국방부검찰부, 1995. 7. 18
  33. 12.12, 5.17, 5.18 국방부 조사 결과 보고서 93쪽
  34. 12.12, 5.17, 5.18 국방부 조사 결과 서서 94~95쪽
  35. 12.12, 5.17, 5.18 국방부 조사 결과 보고서 102쪽
  36. 12.12, 5.17, 5.18 국방부 조사 결과 보고 118쪽
  37. 연구소 자료총서 3권에서 확인가능
  38. 여기서 수정주의는 프랑스 학계를 기준으로 한다면 1980년대의 프랑스와 퓌레다. 한국에선 프랑스 대혁명에 대한 학문은 1980년대 기준도 새로운 편이다.
  39. 4.3 사건 이후 이승만 정권이 계엄령을 한 후 벌인 대량학살 작전이다.
  40. 한국이 피해보상 책임이 없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런 논리는 현 일본정부나 현 러시아한테도 적용이 가능하다.
  41. 미국 정부가 로스차일드 및 유대인들의 금권력을 숨기려고 조작한다거나, 추락한 UFO를 숨기려고 조작한다거나, 보건당국이 백신의 위험성을 숨기려고 조작한다거나, 독일 정부가 아우슈비츠 희생자수를 늘리려고 조작한다거나, 한국 정부가 천안함이 미국 잠수함에 의해 침몰당했다는 자료를 숨긴다거나 하는 등등의 음모론과 하등의 차이가 없는 것이다.
  42. 수원지방법원 안양지원 2011. 1. 19. 선고 2010고합51 판결
  43. 서울고등법원 2012. 8. 23. 선고 2011노308 판결
  44. 대법원 2012. 8. 23. 선고 2012도10670판결
  45. 애초에 이문제는 민주주의와 진실의 관점에서 봐야지 좌우정치성향으로 보면 안된다.
  46. 정확하게 말해서는 회사에 휴가내고 무단 결근해서 허락없이 광주로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