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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 24일 (화) 12:42 기준 최신판
- 상위 문서: 김성근
목차
역대 감독 전적 | |||||||
연도 | 팀 | 경기 | 승 | 패 | 무 | 정규리그 | 포스트시즌 |
1984 | OB 베어스 | 100 | 58 | 41 | 1 | 3위 | - |
1985 | 110 | 51 | 57 | 2 | 4위 | - | |
1986 | 108 | 56 | 48 | 4 | 4위 | - | |
1987 | 108 | 55 | 52 | 1 | 4위 | - | |
1988 | 108 | 54 | 52 | 2 | 5위 | - | |
통산 | 534 | 274 | 250 | 10 | | ||
연도 | 팀 | 경기 | 승 | 패 | 무 | 정규리그 | 포스트시즌 |
1989 | 태평양 돌핀스 | 120 | 62 | 54 | 4 | 3위 | 3위 |
1990 | 120 | 58 | 59 | 3 | 5위 | - | |
통산 | 240 | 120 | 113 | 7 | | ||
년도 | 소속팀 | 경기수 | 승 | 패 | 무 | 정규리그 | 포스트시즌 |
1991 | 삼성 라이온즈 | 126 | 70 | 55 | 1 | 3위 | 3위 |
1992 | 126 | 67 | 57 | 2 | 4위 | 4위 | |
통산 | 252 | 137 | 112 | 3 | | ||
연도 | 팀 | 경기 | 승 | 패 | 무 | 정규리그 | 포스트시즌 |
1996 | 쌍방울 레이더스 | 126 | 70 | 54 | 2 | 2위 | 3위[1] |
1997 | 126 | 71 | 53 | 2 | 3위 | 3위[2] | |
1998 | 126 | 58 | 66 | 2 | 6위 | - | |
1999 | 81 | 17 | 59 | 5 | 8위 | - | |
통산 | 459 | 216 | 232 | 11 | | ||
연도 | 팀 | 경기 | 승 | 패 | 무 | 정규리그 | 포스트시즌 |
2001 | LG 트윈스 | 98 | 49 | 42 | 7 | 6위 | - |
2002 | 133 | 66 | 61 | 6 | 4위 | 준우승 | |
통산 | 231 | 115 | 103 | 13 | | ||
연도 | 팀 | 경기 | 승 | 패 | 무 | 정규리그 | 포스트시즌 |
2007 | SK 와이번스 | 126 | 73 | 48 | 5 | 1위 | 우승 |
2008 | 126 | 83 | 43 | 0 | 1위 | 우승 | |
2009 | 133 | 80 | 47 | 6 | 2위 | 준우승 | |
2010 | 133 | 84 | 47 | 2 | 1위 | 우승 | |
2011 | 93 | 52 | 41 | 0 | 3위[3] | ||
통산 | 611 | 372 | 232 | 13 | | ||
연도 | 소속팀 | 경기 | 승 | 패 | 무 | 정규시즌 | 포스트시즌 |
2015 | 한화 이글스 | 144 | 68 | 76 | 0 | 6위 | - |
2016 | 144 | 66 | 75 | 3 | 7위 | - | |
2017 | |||||||
총계 | 2615 | 1368 | 1187 | 60 | |
1 개요
약한 팀을 맡아 전력을 정비해서 중상위권까지 치고 올라가게 만드는 일이 많아 리빌딩 전문가로 인식되곤 했다. 만년 꼴찌 태평양 돌핀스나 쌍방울 레이더스를 이끌고 2년 연속 포스트 시즌에 진출한 것이 좋은 예. 또한 강팀으로 나가기엔 뭔가 어설펐던 SK 와이번스를 2000년대 후반 왕조시대로 이끈 것도 있다. 하지만 그가 맡은 팀들이 대부분 퇴임 후 성적이 나락으로 떨어졌다는 이유[4]로 혹사 논란의 중심에는 예외없이 거론된다. 즉 약체팀의 에너지를 단기간에 단단히 뽑아먹어서 그가 떠난뒤 뼈다귀만 남긴다는 주장이다. 다만, 반론으로 만년 꼴찌를 단 한해라도 벗어나는것이 지상과제이던 팀을 단 몇년간이라도 강팀으로 만들었는데 좀 혹사면 어떠냐는 지적도 있고, 속된 말로 중도에 모가지당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것이 팀의 전력에 악영향을 끼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떻게 보면 그동안 하위권을 박박 기거나 침체기인 팀을 짧은시간에 상위권으로 올리는데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도 그 대가가 만만치 않다는것 때문에 평이 극과 극으로 갈린다.[5] 그리고 이제 그 팀 올리는것도 못하게 생겼다.
... 는 그저 예전 이야기. 한화 이글스 감독 부임 이후 다 허상이었음이 드러났다. 단점은 여전하지만 그 단점을 상쇄한다는 장점이 다 허상임이 드러났다. 악마하고 거래하면 최소한 당장 얻는거라도 있지... 2015년 상반기는 잘 하다가 후반기부터 죽 미끄러져서 지금에 이르렀으니 악마랑 거래한 게 맞지 않나? 완전 손해보는 거래라고 하면 될 듯
2 아마추어 시절
프로 리그가 생기기 이전엔 마산상고, 충암고, 신일고 감독과 기업은행의 코치 및 감독을 역임했다.
2.1 마산상고 감독
1969년 마산상고 감독을 맡은 것을 시작으로 지도자의 길로 들어선다. 마산상고 시절에 성적을 내지 못했기 때문인지 마산상고 감독 경력은 그의 이력에서 아예 언급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최근에는 마지못해 마산 지역의 영업 차원에서 내려갔다가 잠시 맡은 거라는 식으로 잠깐 언급하고 넘어가기도 한다.
마산상고 시절 선수들을 혹독하게 강훈련시켰다고 한다.
이때부터 선수들을 지옥훈련으로 내몰았다. 선수들이 강훈련에 견디지 못해 쓰러지면 양동이의 물을 부어 일으켜세웠다. 선수들은 이런 김성근을 두고 "사람새끼가 아니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 김성근은 "사실 그때는 선수들을 어떻게 가르쳐야하는지도 몰랐어. 무조건 열심히만 하면 되는 줄 알고 선수들을 훈련으로 몰아넣었어. 그때는 내가 생각해도 심했어. 마산상고에서 가르쳤던 선수들 중 야구선수로 성공한 애는 없지만 그래도 이번에 한국시리즈 우승하니까 마산상고 출신 두세명에게 축하전화가 오더라고"라며 웃었다. 잡초승부사 김성근을 말한다 - 8. 지도자 첫발 독종감독이 되다
마산상고 감독을 맡고 있던 도중 재일교포 선배 배수찬으로 부터 기업은행 코치직을 제안받자 마산상고측과 한마디의 상의도 없이 바로 감독직을 그만두고 다음날 서울로 상경하는 바람에 마산상고측과 관계가 험악해지기도 했다. 때문에 NC 다이노스가 신임 감독 인선 과정에 있던 2011년까지 42년 동안 마산상고(현 용마고)를 방문하지 않았다. 관련기사
2.2 기업은행 코치, 감독
같은 재일교포 출신으로 절친한 선배였던 배수찬[6]으로부터 기업은행 코치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1971년 기업은행의 감독이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배수찬과 관계가 완전히 틀어지고 만다. 배수찬은 김성근이 거짓 정보로 자신을 속이고 자신이 맡았어야할 기업은행 감독 자리를 가로챘다고 주장했다. 배수찬의 주장에 대해 김성근은 오해일 뿐이라고 해명했다. 배수찬 감독이 1986년 작고했기 때문에 이 사건에 대한 진실은 미궁속에 빠져버렸다.
김성근이 본격적으로 감독의 길에 들어선 것은 1971년부터 1975년까지 역임한 기업은행 감독이다. 이때 한일은행 감독이던 김응용과 많이 대결해서 많이 졌다고 한다. 당시 한일은행은 호화멤버를 자랑하던 최강 팀.
2.3 충암고 감독
1976년부터 1979년까지 충암고 감독을 지냈다.
충암고 감독 부임 직후, 대구의 3대 야구명문인 대건고등학교가 야구부를 해체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여 바로 대구로 내려가서 대건고 야구부 18명 전원을 충암고로 영입했다. 여기에 포수 조범현도 포함되어 있었다. 대건고 출신이 주축이 된 멤버로 1977년 봉황기 우승을 이끌었다. 이 대회에서 조범현은 MVP를 차지했다.
1979년 친하게 지내던 김동엽과 만난 자리에서 야구명문 신일고 감독 자리가 비었다는 소리를 듣고는 "내가 거기 가볼까나?"라고 얘기하자 김동엽이 신일고 교장을 직접 찾아가 김성근을 신일고 감독에 앉히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때문에 충암고와 신일고의 경기는 배반당했다고 생각한 충암고 선수들이 독기를 품으며 덤비는 통에 당시로서도 제법 과열된 양상이었다고.
2.4 신일고 감독
1979년부터 1981년까지 신일고 감독을 지냈다.
신일고 야구부는 75년에 창단된 직후 76년과 78년 황금사자기에서 우승을 차지한 신흥 야구 명문고였다. 그러나 김성근 감독이 부임한 79~81년 동안 신일고는 4대 고교야구 대회인 청룡기, 황금사자기, 대통령배, 봉황대기에서 우승은 커녕 결승에도 한번도 진출하지 못했다.[7]
1981년 당시 신일고 에이스였던 이재홍에게 연세대와 건국대에서 동시에 스카웃 제의가 들어왔는데, 김성근이 이재홍에게 건국대로 진학할 것을 명했지만 이재홍이 이를 거부하고 연세대 입학을 고집하자, 김성근은 이재홍을 경기에 출장시키지 않았다. 결국 이 사건의 파장이 커지면서 신일고 감독에서 해임됐다. 기량이 뛰어난 유망주를 입학하면 주위의 대학에 갈 실력이 되지 않는 동기선수도 끼워 입학시켜주는 관행이 있었는데, 마침 건국대가 이재홍을 영입하는 댓가로 신일고의 다른 동기생도 몇명 끼워서 입학시켜 주겠다고 제의해왔던 것이다. 김성근은 동기선수도 입학시킬 수 있는 건국대에 진학할 것을 요구한 것. 김성근 본인은 학생야구는 인성, 의리가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지만, 당시 유망주 끼워팔기식의 입학관행은 부유층 자제의 편법적인 대학입학 방법의 하나로, 공부로 인문계 고등학교도 가기 어려운 부유층 자제를 운동부에 거액의 지원금을 내고 특기생으로 입학시켜 운동부에 이름만 걸어놓고 해당 운동부의 유망주가 끼워팔기 조건을 제시한 대학에 입학할 때 끼워서 입학시키는 것으로 악용되고는 해서 진의는 알 수 없다.
3 OB 베어스
길고 긴, 그리고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그의 커리어의 시작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OB 베어스의 창단 투수코치가 되었다. 당시 OB 구단 단장 겸 대표이사였던 박용민에 따르면, 구단 창단 당시 야구에 대해서 아무도 모르고 글러브 조차 한번도 만져본 적이 없던 시절이라 누가 전 신일고 감독을 투수코치로 추천하길래 김성근을 만나봤다고 한다. 직접 만났더니 무뚝뚝한게 말이 없어서 선수들을 잘 휘어잡을 거 같아서 김성근을 코치를 영입했다고 한다. 김성근은 면접 과정에서 박용곤 두산그룹 회장 및 박용민 단장에게 크게 신임을 얻게 되어서 당시 감독이었던 김영덕 조차도 김성근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OB 투수 코치 시절 김성근은 김영덕 감독과 투수 기용 등에서 파워게임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김성근이 올린 투수를 김영덕이 교체하자 경기 도중 가방을 싸 나가버린 일화는 지금까지도 회자된다.
1984년에 김영덕 감독에 이어 OB의 2대 감독으로 취임했는데, 이 과정과 관련된 여러 이야기들이 있다. 김성근은 자신이 삼성 구단으로 부터 감독 제안을 받았고, 당시 감독 김영덕에게 삼성 감독으로 갈것 같다고 보고 하자 김영덕이 삼성과 뒤늦게 협상하고 감독자리를 차지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삼성 구단이나 김영덕 측의 설명은 또 김성근의 주장과는 다르다. 김성근의 주장은 앞뒤가 맞지 않은 부분이 있는데, 특히 삼성 구단이 결국 김영덕을 택했는데, 그렇다면 애초에 왜 삼성이 김영덕에 접근하지 않고 김성근에게 접근했냐는 것이다. 아무튼 이 사건에 관해서 당시에도 많은 이야기가 오갔지만, 김영덕이나 삼성 구단의 입장은 시간이 지날수록 잊혀진 반면 김성근은 이후 계속 자신의 입장에서 이 사건을 언급하고 있다. 진실은 당사자들만이 아는 일이다. 어쨌든 덕분에 김성근은 OB 감독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OB 베어스 감독으로서 1984년부터 1988년까지 5시즌을 치뤘다. 원년 우승팀을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5년이라는 긴 재임기간 동안 일관되게 중하위권 성적을 전전하자, 애초에 "한국에서 나오기 힘든 한팀 10년 감독을 만들겠다"라면서 감독의 장기집권을 팀의 방침으로 천명했던 박용민 단장조차도 막판에는 김성근을 성적으로 압박하다가 결국 경질 했다.
1984년 전기리그와 후기 리그에서 모두 2위를 차지하면서 PO에 탈락했다. 당시에는 한국시리즈만 존재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는데, 어이없게도 1년 전체 승률은 OB가 1위였다. OB를 부담스러워 한 김영덕 감독의 져주기 사건이 벌어진 것이 바로 이 때였다. 다만, OB도 해태랑 피장파장의 져주기 게임을 했다. 삼성-롯데가 표면화된 것은 우승 확정 경기라고 공중파 생중계가 있어서 그랬던 것. 1985년은 OB가 대전에서 서울로 연고지를 옮긴 첫 해로 전기리그 2위, 후기리그 5위로 역시 탈락.
플레이오프 시스템이 생긴 1986년 후기리그 1위로 플레이오프 진출했으나 삼성에게 패배했다. 이 당시 제도가 기형적이라서 전, 후기 리그 2위까지 PO자격이 주어지는데, 그 자격을 두 개 가진 팀은 한국시리즈에 직행했다. 그래서 전, 후기 2위였던 해태가 한국시리즈에 직행했다. 1987년은 전기리그 2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만 해태에 패배했다. 모두 2승 1패로 먼저 기선을 잡고 내리 두 경기를 지면서 아쉽게 탈락했기 때문에 뼈아팠다. 1988년은 전기리그 3위, 후기리그 5위로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 투수진의 붕괴가 무엇보다 결정적이었다.
OB 시절 2군 시스템의 도입 및 마무리 윤석환을 기용해 초보적인 형태의 투수분업화 시도를 했다. 다만, 지금과 같은 1이닝 마무리는 아니고, 그냥 윤석환을 선발로 기용하지 않은 정도의 의미다. OB 시절 괜찮은 성과를 낸 것에는 무엇보다 박철순의 복귀를 포기하고, 있는 자원을 적절히 활용했다는데 있다.
임기 초기에는 박용곤 두산그룹 회장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아 종신감독, 못해도 최소 10년 이상 재임할 거라는 얘기도 있었다. 총수 일가 출신인 박용민 단장도 "한국 풍토에서 나오기 힘든 한팀 10년 감독을 만들겠다."라고 천명하기도 했다. 박용민 단장은 김성근이 몰수게임 파동 등 사건를 일으킬 때마다 적극적으로 나서서 언론에 대고 직접 김성근을 감싸주었고 이 때문에 김성근은 몇 차례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성근 감독 자신이 박용곤 회장 등 그룹 수뇌부와 직접 의논해서 일을 처리하려는 모습에 대한 프런트의 반감이 겹치고, 점차 프런트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갈등이 빚어졌다.무엇보다 당시 OB의 프런트가 굉장히 일을 부지런히 하는 축이었기 때문인지도. 박용민 단장 역시 처음에는 김성근 감독을 무척 신임하고 그가 문제를 일으킬 때마다 보호해줬지만, 임기 내내 성적이 나지 않자 결국 김성근에 대한 인내심도 바닥나 그에 대한 신뢰를 거둬들였다. OB 프런트가 자신들의 생각을 관철시키기 위해 밀었던 차기 감독 후보가 코치 시절 김성근과 갈등을 빚었던 이광환이었다.
OB의 타격코치였던 이광환은 김성근과 타격이론의 차이 및 식단에서까지 차이를 나타내며[8] 충돌을 빚어 갈등을 일으키는데, 프런트에서 일단 이광환을 미국으로 지도자 연수를 보내는 것으로 갈등을 봉합했다. 하지만 1988년에 이광환이 귀국하면서 구단은 김성근의 의사와 관계없이 이광환을 2군 감독으로 임명되었고, 선수 콜업 문제 및 처우 문제 등으로 인해 사사건건 갈등하게 이른다. 여기에 프런트가 은근히 이광환의 편을 들었다.
이 때의 상황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세탁기 사건. 당시 선수들은 직접 빨랫감을 날랐는데 이광환 감독이 미국에서 본 것을 따라서 2군 연습장에 세탁기를 도입한다. 이를 알게 된 김성근 감독이 2군에 대한 특혜라고 판단하여 1군에도 요구하지만 프런트는 생트집잡는다고 거부한 사건인데, 결국 1군 선수들은 여전히 빨랫감을 나르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김성근 감독이 이광환 2군 감독보다 파워게임에서 밀렸다는 인식이 선수들 사이에 퍼졌다.
결국 경질 원인은 성적이었다. 원년 우승을 일구어내며 화려하게 등장한 OB구단은 80년대 프로야구에서 우승에 대한 기대와 가능성이 높은 팀 중 하나였다. 그러나 김성근 재임기간 5년 동안 OB 베어스는 6~7구단 체제[9]에서 줄기차게 4~5위를 찍음으로써 인내심 많던 OB 구단 수뇌부의 신뢰를 잃고 말았다. 당시 전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신생구단과 전구단 승수 자판기 삼청태(삼미-청보-태평양) 두 구단은 당연히 깔고 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OB의 성적은 실질적으로 하위권이었다. 김성근이 강팀에서 실패한 것은 삼성에서만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OB도 1982년 원년 우승팀으로 약팀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김성근을 신뢰해왔던 박용민 단장은 김성근 임기 마지막 시즌인 1988년에는 관중석에 가서 김성근의 지인들에게 대놓고 김성근 감독으로는 우승할 수 없다고 보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면서 김성근을 압박했다.
결국 1988년 시즌 종료 후 계약이 종료되면서 김성근은 팀을 나오게 되었다. 실질적으로 박용민이 김성근을 경질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지금도 경질, 해고라는 표현을 쓰는 경우도 눈에 띈다.
하지만 정작 그렇게 감독에 올랐던 이광환 감독도 자율야구라는걸 이해 못한 선수들과 프런트 때문에 1990년 시즌 도중에 해임당하고 이후 1990년대 초반까지 암흑기를 가지게 된다.
4 태평양 돌핀스
1988년 청보 핀토스를 인수하여 태평양 돌핀스를 창단한 태평양 구단 수뇌부는 청보 시절의 잔재를 청산하고 팀을 재편하기 위해 청보 시절 임명된 감독인 강태정을 경질하려고 했다. 때마침 OB 베어스에서 5년간 감독을 역임했던 김성근이 구단과 갈등 끝에 재계약에 실패하고 물러나자 그를 영입했다. 아직 프로야구 역사가 짧아 감독 경력자를 구하기 힘들었던 당시, 뚜렷한 성적을 내지는 못했지만 5년이라는 오랜 감독 경력을 갖고 있었던 김성근은 당시 태평양이 선택할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선택지였다. OB 베어스에서 파벌 싸움으로 갈등을 일으켰던 김성근은 자신을 따르던 코치진의 영입을 요구했는데, 그렇지 않아도 청보 핀토스의 잔재를 청산하고 싶어했던 태평양은 김성근의 요구를 수용하여 기존 코치 중 2군 코치 한명을 빼고 전부 경질하고 김성근 감독이 요구한 OB 출신의 코치들을 영입했다. 신용균 당시 수석코치, 최주억 작전코치, 그리고 이근식, 이종도, 박상열에 프런트의 정진구 차장(현 한국여자야구연맹 회장) 등이 그들이었다. 오늘날 소위 감독들의 코치 사단의 원조다. 그러자 OB 구단 측은 김성근이 팀을 다 털어서 떠났다고 격노했다. 하지만 이들은 OB맨들도 아니었고 어차피 정리대상이었던 사람들이라 김성근 감독이 구제해 준 것이라면서 옹호하는 주장도 있다. 김성근파와 이광환파로 나눠어 내흥에 휩싸여있던 OB에서 김성근에서 이광환으로 정권 교체가 되면서 어차피 정리수순에 놓였을 사람들이었다는 것. 게다가 OB가 이들을 적극적으로 잡으려 했다면 이들이 팀을 떠났겠느냐 하는 것이다.
김성근 돌핀스의 상징 오대산 극기훈련(1989년). 최근에도 김성근 감독이 강연에서 태평양의 정신력을 끌어올린 예로 오대산 훈련을 많이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훈련 도중에 부상자가 속출해서 김성근 감독도 꽤 마음을 졸였던 모양이다. 훗날 SK 시절에도 김성근 감독은 부상자가 발생하면 시즌에 큰 어려움이 생긴다면서 오대산 극기훈련 같은 것은 다시는 안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아래도 나오지만 구단이 규정상 훈련비를 지원할 수 없다고 하자 김성근 감독은 선수들에게 비용을 내라고 해서 훈련에 임했다. 일부 고참 선수들이 이런 훈련이 무슨 효과가 있겠냐면서 반발하기는 등[10] 내흥을 겪기도 했지만, 훈련을 거부하거나 낙오하면 2군으로 떨어진다는 소문에 대부분 선수들은 군말없이 극기훈련에 참여했다.
1989년 태평양이 오대산 훈련을 실시하고 나서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 돌풍을 일으키자, 이듬해인 1990년 삼성 라이온즈, OB 베어스, 롯데 자이언츠, 빙그레 이글스 등이 이와 유사한 혹한기 극기훈련을 따라하면서 혹한기 극기훈련 붐이 일었다. 하지만 정작 극기훈련을 처음 실시했던 김성근 감독은 소리소문 없이 혹한기 훈련일정을 2박 3일로 대폭 축소했다. 부상자 발생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극기훈련을 실시했던 다른 팀에서도 선수들와 코칭스태프들의 반발로 팀 조직력이 와해되고 부상자가 속출하는 등의 부작용이 있었고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혹한기 훈련을 실시한 팀 중에 롯데를 제외하고 삼성, OB, 빙그레, 태평양 모두 전년도보다 성적이 떨어졌기 때문에 곧 이런 혹한기 극기훈력은 자취를 감췄다. 공포의 외인구단이 진짜로 가능하다고 믿고 있던 시절. 이광환 감독의 메이저리그식 자율 야구 이전 한국 야구의 한계로 곧잘 지적된다. 나중에 SK 감독 시절 김성근 감독은 하면 안 되는 훈련이었다고 웃으며 말하기도 했다.
삼미 슈퍼스타즈 시절부터 꾸준히 하위권을 기록하던 태평양은 1989년 정규 리그 3위로 돌풍을 일으킨다. 김성근 전설의 시작. OB 감독 시절 뚜렷한 성적을 내지 못했던 김성근 감독은 오대산 극기훈련 후 태평양을 포스트시즌에 올려놓아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여러 팀에서 김성근을 감독으로 영입하려고 구애하기 시작했고, 삼성, 롯데 등에서 김성근 영입작전에 뛰어들었다는 등 찌라시가 난무했다. 1989년 태평양의 돌풍에는 신인 투수 3인방인 박정현, 최창호, 정명원의 활약이 컸다. 김성근 감독은 이 3인방을 집중적으로 기용(혹사)하여 그해 태평양의 65승 중 45승을 이 세명이 합작하게 했다. 1989년의 포스트시즌 당시 박정현이 무리한 혹사로 쓰러져 구급차에 실려간 것은 당시 많은 야구팬들에게 충격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는데, 관련 글은 박정현 문서로. 이후 이 3인방은 부상으로 고전하며 하향세를 탔는데, 김성근 감독의 투수 혹사가 본격적으로 거론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인천 올드 팬들은 현대의 우승이 아니라 이 시점을 인천야구의 꽃으로 보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김성근은 여기서도 구단과 갈등을 빚게 되는데, 표면적으로 밝혀진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훈련 수당 지급 문제. 당시 지옥훈련은 비시즌 활동 중지 기간에 이뤄졌는데, 이 부분에 대한 수당을 지급하는지를 두고, 구단에서는 원칙대로 월급을 줄 수 없다고 했고, 김성근 감독은 수당 지급을 요구하면서 갈등이 빚어졌다. 그리고 이 와중에 같이 온 정진구 차장과 신용균 코치와도 사이가 멀어진다.
프로야구는 2월부터 10월까지가 공식적인 활동기간이고, 연봉은 이 기간에 한정하여 분할 지급되는 것이 현재까지의 원칙이다. 즉 프로야구 선수는 이 기간 외에는 돈을 받지 않으므로 집단 훈련을 할 의무가 없고, 구단은 훈련을 하건 말건 돈을 지급하지 않는다. 선수협이 결성되면서 이 문제가 공식화되어서 선수들에 대한 비활동기간 훈련 금지 규정이 KBO에 의해서 지정되고, 수차례 재확인 되지만 김성근으로 대표되는 일선 감독들의 반발과 성적을 원하는 구단측의 입장으로 슬쩍 넘어가고 있다. 2000년대 비활동기간 훈련 금지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것도 김성근 감독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계기는 임호균 각서 파동. 구단은 삼미 시절을 상징하던 임호균이 노쇠하여 1988년과 1989년 통틀어 1승도 올리지 못하자 그를 방출하려 하였고, 김성근 감독이 이에 정면으로 대항하였다고 김성근 감독 본인 스스로 주장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임호균은 김성근 감독 부임 전에 이미 스스로 은퇴를 결심했고, 임호균의 몸값이 부담스러웠던 구단 측도 이를 받아들이고 해외 연수를 추진하던 중이었다. 이 때 김성근이 노련한 리더가 필요하는 이유로 그를 붙잡은 것이었다.# 김성근 감독은 임호균이 시즌 동안 선발로 출장해서 5승을 하지 못하면 사임하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쓰게 된다. 각서 사건에 휘말려서 좋은 결말 나온 적이 한번도 없는 프로야구의 전례[11]처럼 이 과정에서 프런트와 사이가 틀어진 김성근은 실력 때문이든 아니든 임호균을 단 한경기도 선발 출장시키지 않았다. 당연히 선발승도 0. 여기에 태평양의 순위도 5위로 하락하면서 김성근 감독이 계약 기간을 못채우고 잘리게 된다. 사실 당시에는 1989년 포스트시즌의 돌풍으로 김성근 감독의 몸값이 상한가를 치면서 삼성 등 여러 팀의 러브콜을 받고 있던 시절이라 김성근 감독이 팀을 옮기기 위한 꼼수로 각서를 작성했다고 하는 소문이 무성했다. 김성근 감독은 이러한 의혹을 전면 부인하면서 제자를 위해 자신이 희생한 것이라 강변했지만, 후에 임호균이 인터뷰에서 내막을 밝히자 김성근이 삼성 감독으로 가기 위해 임호균을 내서워 일부러 각서를 쓰고 잘린 게 아니냐는 의혹이 집중 재조명되었다. 어쨌든 임호균 각서파동 이후 김성근 감독은 OB 시절 경력까지 합해 프런트와 대립하는 감독으로 이미지를 굳힌다.
태평양 시절부터 전통적으로 인천 팬들이 김성근 감독을 좋아했다고 김성근 개인팬들이 주장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김성근이 태평양에서 해임되자마자 삼성 라이온즈 감독에 취임하자 도원아재들은 김성근이 더 좋은 팀으로 옮기기 위한 구실로 각서사건을 만들었다고 보고 그를 비난했었다.
김성근 개인팬들은 김성근이 떠난 후 태평양이 다시 하위권으로 처졌다고 주장하지만 사실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김성근 감독 첫해인 1989년 쥐어짜기 운영으로 인해 이미 2년차인 1990년 태평양은 5위로 쳐졌다. 김성근 감독이 경질된 후 1991~1992시즌 동안 박영길, 정동진 감독이 거둔 성적은 5위, 6위. 김성근 감독 2년차와 큰 차이없는 이 성적을 급격히 하락이라고 묘사한 것은 비약이다. 정동진 감독은 모회사인 태평양이 좋지 않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1994년 태평양을 2위로 이끌기도 했다. 하지만 태평양 돌핀스는 1년을 더 버티지 못하고 현대에 매각되었다.
김성근 감독 경질 이후 태평양의 성적이 서서히 떨어진 배경으로는 김성근 감독 시기 태평양의 부흥을 이끈 투수 3인방이 거듭된 부상으로 몰락한 것으로, 이를 상징하는 것이 1989년 플레이오프의 박정현의 혹사였다. 박정현은 1차전 14이닝 완투, 3차전 구원등판해 7이닝째 던지다가 당한 허리 부상으로 쓰러져 구급차에 실려나갔다. 이런 상황은 이미 1990년 김성근 감독 재임시기 태평양이 5위로 물러앉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김성근 감독이 유임되었어도 별수 없었을 것이란 것이 주된 분석이다. 때문에 이 이후 김성근 감독 퇴임이후 팀의 하락세와 혹사논란이 본격화되었다. 이후 한참을 하위권에 머물던 태평양은 정동진 감독이 1994년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면서 잠깐 역대 최고의 성적을 내며 부활한 뒤 현대로 바뀌게 된다.
??? : 우와, 내가 저 때 입단 안 한게 다행이지.[12]
5 삼성 라이온즈
▲1992년 LA 다저스와의 합동 훈련. 하지만 김성근 감독은 메이저리그 야구를 배우라는 의미에서 구단이 주선한 이 합동훈련 일정을 반으로 줄이자고 주장했다. #
한화를 맡기 전 김성근 최악의 흑역사이자, 삼성의 556 암흑기의 단초가 된 시기.
쉽게 말해서, 삼성 김성근=한화 김응용으로 요약된다.[13][14]
정동진 감독 1990년 한국시리즈 준우승[15] -> "김성근 감독" : 1991년 3위, 1992년 4위 -암흑기의 시발점. -> 우용득 감독 1993년 "준우승" -> 1994~1996년 556 삼성 역대 최악의 암흑기.
10여 년 뒤의 선동열과 함께 삼성 역사상 최악의 감독. 주로 올드팬들은 김성근 또는 서정환을,[16] 최근 팬들은 김성근이 삼성 감독을 한 적이 있다는걸 몰라서 선동열을 최악으로 꼽는 경우가 많다. 아래에도 나오지만 애초에 둘다 까이는 행동들이 참 극도로 흡사하고 야구장에서 팬들을 몰아낸 건 똑같기 때문에 올드팬들은 어쨌거나 2번의 우승이라는 결과물을 만든 선동열을 '그나마' 더 높게 치고 최근 팬들은 김성근이 삼성 감독을 한 적이 있는걸 몰라서 김성근을 더 높게 친다. 어쨌거나 최악으로 손꼽히는 감독으로 선동열, 서정환과 자웅을 겨루는 탑쓰리다.
1989년 김성근이 태평양 돌핀스의 감독에 부임하여 오대산 지옥훈련 후에 1년만에 팀을 포스트시즌에 올려 놓자 삼성 수뇌부는 김성근을 삼성 감독의 적임자로 여기게 되었다. 당시 삼성 수뇌부는 뛰어난 전력에도 불구하고 삼성이 우승을 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정신력이 부족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투수 코치 출신인 김성근이 리그 최강의 타선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뒤쳐졌던 투수진의 기량을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1991, 1992년 감독으로 활동. 부임 첫해 3위, 이듬해 4위라는 성적을 찍었다. 하지만 1990년 한국시리즈에서 LG에 패배한 뒤 영입된 터라서 2년 연속 그보다 못한 성적을 내자 경질당했다.
특히 1992년 롯데 자이언츠와의 준 플레이오프가 결정타였다. 첫경기인 신인 염종석과 성준의 맞대결에서 산발 4안타로 완봉패한 것은 성준 역시 완투를 했으며 염종석이 워낙 특급신인 포스를 보였기 때문에 그렇다고 칠 수 있었다. 하지만 3전2승제의 2번째 경기에서 그해 7승을 거두며 부진했던 박동희[17]에게 마치 전경기의 데자뷰라도 보여주는 것처럼 산발 4안타 2경기 연속 완봉패로 무기력하게 탈락해버린 것이 결정타가 되었다. 이런 경기들로 인해서 김성근은 8,90년대를 관통하는 큰 경기에 약해서 우승할 수 없는 감독이라는 이미지가 생겨버리게 된다. 2000년대 SK 왕조를 경험한 최근 팬들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과거의 편린이다. 실제로 야구계에서는 2000년대 들어와서도 '우승할 수 있는 감독'이라거나 '승운이 따르는 감독' 등은 따로 있다는 인식은 여전히 존재한다...특히 이희수나 류중일을 보면...
당연히 우승이 아니면 어떤 것도 의미가 없던 삼성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경질 대상이 된 것이다.
여러 모로 김성근 감독에게도 흑역사다. 사실 전임 감독인 정동진 감독이 한국시리즈에서 졌다는 이유로 짤린 것을 감안하면, 2년 버틴 것이 용한 정도. 사실 김성근 감독이 3위로 첫시즌을 마무리하자 많은 언론들이 김성근 감독의 경질을 예측하는 기사를 쓰기도 했다. 그래도 삼성 구단은 김성근을 한번 더 믿고 1년 더 유임했다.
굳이 김성근 감독을 두둔해주자면 1980년대 중후반 우승만 못했을 뿐 투타에 있어 리그 최강급이었던 삼성에 비교하면 이 시기 삼성의 전력은 부상과 주축선수의 노쇠 등으로 비교적 좋지 않았다. 1989년엔 팀 타율은 2위였으나 방어율은 꼴찌였고 1990년에는 팀타율 4위에 방어율은 5위로 리그 중간정도 전력의 팀이라 할 수 있었다. 실제로 정동진 시절 페넌트레이스만 보자면 2년연속 4위였고 부임 첫해는 4위이기는 했어도 승률 5할대 밑이었다. 여기서 더더욱 야구에 만약은 없다는걸 간과하고 이런 저런 이유로 김성근 감독 부임전 상황을 최악으로 어떻게든 몰아가 보자면 한국시리즈에서 진출한 1990년에도 당시 준플레이오프 상대인 빙그레는 부상자 속출로 김영덕 감독의 유임을 둘러싼 잡음으로 시즌 막판부터 무너져내렸서 자멸한 것이고, 해태와의 플레이오프에서도 9회에 김용철의 외야플라이가 바람을 타고 넘어가 홈런이 되는 등 어느정도 행운이 겹친 결과라고 이야기 할 수도 있겠다. 당시 홈런을 맞은 선동열은 김용철의 타구만 보고 외야 플라이를 확신하고 마운드에서 내려오고 있었는데 어...어...하다가 타구가 담장을 넘어가버렸다고 회고했다. 물론 만약 넣으면 다 우승하지.
김성근 감독 본인이나 그의 팬들은 당시 삼성 전력이 하위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미 80년대 후반의 전력하고 비교하면 내리막에 접어든 전력이었던 것. 김성근 본인도 아직까지도 삼성이 자기가 맡아본 팀 중에 선수층으론 최고의 팀이라고 회고하고 있으나 최근의 자서전에서는 당시 삼성은 거의 리그 최하위권이었다고 깎아내렸다. 어떻게든 그때 상황을 나쁘게 몰아보자면 실질적으로는 김성길, 유명선 정도가 에이스 역할을 했으니 김성근에게 주어진 전력은 준우승팀이 아닌 리그 중위급 팀이라고 할 수는 있겠다.물론 김성근은 당시에 이런 기사가 날 만큼 있던 있던 투수력마저도 더 떨궜다.
하지만 이런 변론과 달리 당시 삼성은 팀 사상 최고의 전력이었다. 1991년 시즌을 앞둔 삼성은 우승을 하기 위해 작정하고 대대적인 투자를 감행하여 삼성 역대 최고의 전력, 우승후보 0순위로 꼽혔다. 김성근 감독이 원한 코치들을 모두 영입했을 뿐만아니라 김성근 감독이 요청한 선수를 모두 싹쓸이로 영입해서 선수단 규모가 60명에서 75명으로 15명이나 증가했고 팀의 연봉 부담액도 2억 7천만원이나 늘었다. 특히 崔一彦, 尹錫環, 申慶植, 李光吉, 許圭沃, 曺凡鉉, 崔洪錫(최홍석) 등 7명의 외인부대가 대거 뛰어들어 팀 창단 이래 가장 완벽한 전력을 갖췄다는 평을 받았다.당시 기사 삼성의 엄청난 투자 때문에 1991년 2월 4일 무분별한 선수 확충을 자제하자는 KBO 사장단 회의가 열렸을 정도였다. 전년도 준우승팀인데다가 타팀에서 7명을 현금트레이드로 데려왔고 그밖에도 신인선수를 수혈하는 등 김성근 감독 부임과 함께 총 15명의 선수를 사다줬던 삼성의 프런트는 당연히 삼성이 우승 전력이라고 생각했고 우승은 커녕 가을 광탈을 했으니 짤리는 건 당연하다.
김성근을 옹호하는 입장의 사람들에게 '그럼 김성근이 삼성에서 잘한건 또 뭐가 있냐'고 물으면 별 대답을 못하는것도 사실이다. 패넌트레이스야 어떻게 됐든 1990년에 준우승을 한 삼성은 김성근 시절 3위, 4위로 성적이 계속 나빠지니 당연히 김성근을 내쫓고 다시 1993년 준우승을 한 뒤엔 556의 암흑기를 거치게 되는데, 이 팀을 다시 포스트시즌으로 올린 감독은 아이러니하게도 백인천이고 궤도에 올려놓은 감독은 서정환이며 우승 팀으로 만든 감독은 김응용이다.
부임한 두 해 모두 단기전에서 롯데와 준플레이오프를 치렀으며 1991년의 준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비를 맞으면 15회까지 완투한 롯데 박동희를 상대로 1회 구원등판한 김성길을 15회까지 던지게 한 것은 당시에는 명승부라는 말도 들었으나 지나친 혹사였다. 실제로 이 해 김성길은 계투와 마무리로 시작해서 선발까지 마구잡이로 등판했으나 이후 몰락하고 김성근 전 감독의 대표적인 투수 혹사사례로 꼽힌다.
이 시기의 일화로 1991년 7월 14일, 해태 타이거즈와의 대구 홈경기를 앞두고 우완 선동열과 좌완 김정수 둘 중 누가 나올지 모르자 일단 좌타자 일색인 오더와 우타자 일색인 오더 두 장을 작성한 다음 해태의 오더가 심판원의 손에 넘어온 것을 확인한 후, 배대웅 수석코치를 시켜 슬쩍 심판원에게 상대 선발이 누구인지를 물었다. 그 의도를 전혀 감지하지 못한 심판원이 선동열이라고 말해주자 배코치는 양쪽 뒷주머니에 나란히 꽂고 나온 두 장 중에서 선동렬을 상대로 준비한 우완투수용 오더를 꺼내려다 낌새를 챈 해태 김봉연 수석코치에게 붙들렸고 결국 두 장의 오더를 모두 빼앗겨 망신을 사고 말았다.
4월 페넌트레이스 벽두부터 10차례 안팎의 가짜오더를 작성하며 스포츠맨쉽을 던져 버린 이 일화에 대해 당시 언론들을 꼬리가 길어 잡힌 약삭빠른 잔꾀, 비신사적인 승부욕, 사기극과 같은 평가를 했다.
한두번도 아니고 밝혀진것만 10여차례. 이길 수만 있다면 스포츠맨쉽 따위 가져다 버리시는 분.
이 시기까지는 전형적인 고전적 지도자로 홈런을 친 뒤 셀러브레이션이 과도하다는 이유로 선수를 질책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이걸 증언한 인물이 당시 삼성 선수이자 전 SK의 감독인 이만수. 이만수와 김성근은 이미 이전부터 마찰이 있었는데, 김성근의 이만수 팔꿈치 근육을 보고 사인을 알아차렸다는 말부터 시작해서이게 사람 눈으로 가능한가는 둘째치고 삼성 시절 이만수에 대한 홀대와 SK에서 구단의 차기 감독으로 내정된 이만수에 대한 대우를 생각하면 사실 사람인 이상 김성근 감독과의 관계가 좋을 수 없다. 이미 SK의 내홍의 뿌리는 8,90년대부터 깊어왔던 것.
하지만 이를 금지시키니 이만수의 성적이 대폭 하라는 바람에 원래 대로 돌리기도 했다. 1980년대 프로야구를 기억하는 팬들이라면 그 당시 홈런을 친 타자들이 거의 '오도방정' 수준의 셀러브레이션을 하면서 홈으로 들어오는 걸 많이 기억할 것이다.
아울러 당시 노쇠한 조범현, 신경식과 같은 자기 제자들을 대거 영입했다가 이게 썩 성공적이지 못하면서 체질 개선에도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프랜차이즈를 은근히 홀대한다는 평도 있었을 정도니까. 뭐, 이만수는 홀대기미였지만 박승호는 상당히 중용했다. 아! 김성근 감독, 일부 팬들이 그당시 삼성 상황이 안좋았다고 우겨주는 와중에 리빌딩은 커녕 오히려 역으로 늙은 선수들을 데려왔었네요. 아, 망했어요.
여러모로 삼성 올드 팬들에겐 1차 암흑기인 556 암흑기보다도 더 야구보기 싫었던 시절로 기억되는데[18], 투수 혹사는 혹사대로 시키고 성적은 성적대로 못냈기 때문. 어찌보면 삼성팬들만 암흑기라 주장하는 445 시절과도 상통하는 면이 있다. 실제로 삼성 라이온즈 갤러리에서는 김성근 시절과 선동열 시절을 동급으로 치환하는 경우가 많은데, 공통적으로 투수가 지나치게 혹사당한데다가 경기가 계산대로 안 흘러가면 경기를 포기하는 점, 프랜차이즈 스타 홀대 등을 이유로 들고 있다. 게다가 삼성 감독으로써 잘 하지도 못 했으면서, 류중일을 선동열이 만든 밥상에 숟가락만 얹었다는 식의 인터뷰를 하는 등의 사건으로 인해 선동열과 거의 한통속 수준의 취급을 받고 있다
또한 특유의 마음대로 올리기 때문에 타자는 기록좋은 선수가 없었고 투수는 그냥 혹사당했으며, 팀캐미가 무너졌고 팬심은 멍게강점기 수준이었다는게 그 시절 삼성팬들의 평가.[19] 그리고 앞을 본 리빌딩은 커녕 오히려 늙은 제자들만 트레이드해와서 나이만 올라갔으며 팀 내외적으로는 스포츠 정신도 없었다. 삼성은 김성근이 나가고 그와 커넥션이 있던 선수들을 정리하고 난 뒤 우용득이 취임한 1993년 단 1년뿐이었으나 스텟으론 굉장히 강력한 팀이 되어 김성근때는 상상도 못한 준우승을 다시 했다.
실제로 강기웅, 김성래, 이만수, 류중일 등의 프랜차이즈 스타들과 불화가 있었고 팀의 선수단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삼성의 수비 시스템을 갈아엎으려 하다 이것에 대해 몇몇 선수들이 반발했다는 설이 있었고, 김성근의 경질 이후 삼성의 수비 시스템은 류중일이 체계화시킨 매뉴얼대로 확정되었다는 점 때문에 류중일과 사이가 틀어진 게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 이 주장의 연장선에서 나온 추측이 라디오볼에서 사람 좋기로 유명한 모 감독이 김성근에 대해 강한 비토를 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사람이 류중일이 아니냐는 것. 다만 이 주장은 2013년과 2014년 국가 대표팀의 전력분석원이 다름아닌 김정준이라는 것 때문에 반박하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평소에 사이 안좋던 지도자들끼리도 국가대표팀 코칭스태프를 맡은 동안에는 휴전하는 경우가 적지 않아서 진실은 저 너머에...당시 삼성 수비에는 역대 최고의 키스톤 콤비로 꼽히는 강기웅-류중일이 있었고 다른 내야수비도 리그 최정상급이었다. 아무리 자기 스타일이 아니라고 해도 현상 유지만 해도 당시 리그 최정상급 수비이며 2014년 현재까지도 김성근이 바꾸려고 했던 그 삼성 수비 시스템은 리그 최고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데 그걸 바꾸자고 들었다는점은 당연히 삼성팬들에게 좋은 소리를 듣기 힘들다.
이런 삼성에서의 흑역사에도 불구하고, 삼성은 2000년에 김성근을 다시 불러서 한 시즌 동안 2군 감독을 맡겼다.이 때 이듬해 호세한테 참교육을 받은 <s>영쑤에게 죽도록 죽빵을 갈겨가며 인간구실하게 만들어놨다. 정현욱도 그랬고</s> 삼성이 김응용을 영입하기 전에 김용희를 잠깐 감독으로 앉혔는데, 김용희를 견제하기 위해 불러들였다는 이야기가 있다.[20] 한편 2000년 삼성은 드림리그 3위를 했으나 매직리그 2위 롯데보다 승률이 높아서 준 플레이오프를 치르게 되었다. 일단 1군 감독 시절과 달리 이 시절은 무난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KBO 기념방송에서도 선수단과 프런트와의 마찰을 자꾸 이야기 하는걸 보면...본인도 삼성 감독시절은 마뜩치 않아하는 듯.
내가 잘하면 내가 잘한거요. 내가 못한건 전부 프런트가 잘못했고 코치가 잘못했고 선수가 잘못했고.
다른 감독 밑에선 다 잘하던 선수들이 자기 밑에서만 마찰이 많았다면 자기가 잘못이었다는 생각은 못하나?
결론적으로 김성근의 삼성 시절은 위의 우승전력이 아니었다는 일부 타 팀 팬들의 다음년도 선수들 성적보면 도무지 말도 안되는 의견도 있긴 하나. 김성근 본인도 나이가 있는 자기 제자들을 기용하고 미친듯한 투수 혹사에 팬심도 부숴버리고 스타들과 싸워대며 팀캐미 박살도 냈고 위에도 나오듯 스포츠맨쉽에 있어서는 그야말로 이길 수만 있다면 어떤 치사한 짓거리라도 다 하던 수준이었기 때문에 여러모로 이후 556 강제 리빌딩 암흑기를 부채질했으면 했지 삼성에서 잘한게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훗날 자서전 《야신 김성근, 꼴찌에서 일등으로》에서 '삼성 선수들의 엘리트 의식 때문에 통제하기가 어려웠다'고 적어서 삼성팬들에게 두고두고 까였다. 비겁한 변명입니다!! 게다가 1997년 부정배트 의혹 사건 때도 당사자인 LG 트윈스가 아닌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인 김성근이 공문을 보내어 전수조사를 의뢰하기까지 하는 등 악연에 가까운 행보들이 계속 이어져오기도 했다. 이는 삼성 팬덤이 반김성근, 친김응용 성향이 강한 원인 중 하나이다. 김성근 체제가 삼성 암흑기의 신호탄이였는데 반하여 김응용 체제는 21세기 화려한 삼성 역사의 신호탄이였으니 더더욱...
6 해태 타이거즈
삼성에서 짤린 뒤, 전국의 고등학교를 돌며 아마 선수들을 코치하고 프로야구 경기장을 늘 찾으며 경기를 분석하는 등 야인생활을 전전했다. 김성근이 스포츠서울 객원기자로 현장을 돌고 있을 때 비행기에서 우연히 해태 이상국 단장과 만났는데 이것을 인연으로 이상국 단장이 그를 해태 투수 인스트럭터로 영입하게 되었다. 해태 김응용 감독과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김응용 감독은 김성근을 인스트럭터로 영입하는 것을 허락했다. 인스트럭터로 4개월 일하다가 정식으로 2군 감독이 되었다. 나중에 해태에 들어간 이유를 묻자, "김응룡 감독이 해태에서 하도 우승을 많이 하자, 어떻게 그렇게 하는건지 궁금해서 갔다." 고 말했다.[21]
김응용은 호적상 1941년생인데 실제는 1940년생이라고 한다. 김성근은 1942년생. 하지만 김성근은 옛날부터 그를 '응용이'로 불렀다고. 고교 졸업연도가 같기 때문에 동기생이라고도 할 수 있다고 한다. 덕분에 김응용이 선수시절 때 김성근의 그런 호칭에 부아가 치밀었을 정도라고...지금이야 같이 늙어가는 처지고 현장에서 경쟁하는 사이도 아닌지라 별다른 말도 없다. 아마도 세월이 흐르면서 김응용이 받아들인 듯. 그런데 김응용은 1940년생인 장훈씨와 친구로 지내는데, 김성근은 장훈씨를 선배로 모신다. 지도자가 되고 나서도 김성근과 김응용 감독은 이중오더 사건 등으로 서로 좋지 않은 관계였다. 김성근이 해태로 오고 나서도 단 둘이 밥을 먹은 것은 단 한번밖에 없었을 정도로 관계는 여전히 냉랭했다고 한다.
애초에 해태에서 2군은 주전들이 사고칠 때 유배.. 보내는 곳이었고 해태 자체가 구단이 3류 재벌이라 2군에 돈쓰는걸 아까워해서 기아자동차에 인수되고서 한참 후에도 제대로 된 2군 구장도 없었다. 몇십년 후에 챌린저스 필드라는 훈련장을 만든다. 함평에서 논두렁 가운데에 컨테이너 몇개 박아 놓은 게 시설의 전부.. 1군도 무등구장 지하에 쇠봉에 콘크리트 부어서 만든걸 역기라고 그것도 박충식이 트레이드전 제대로 웨이트 하거나 가르치는 사람이 없을정도로 안습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2군에서 김성근의 역할은 멀 해볼려 해도 어려웠을 것이다.
이 시기 2군 감독인 김성근 밑에서 지도받은 선수 신인 투수가 임창용과 이호준이다. 이들은 노랭이 해태에서 비교적 유망주 투수로 꼽혀서 일본으로 연수를 보냈는데 김성근 감독을 피해서 땡땡이를 쳤다고 한다. 알다시피 이호준은 강속구 투수임에도 깃털직구라서 김응용 감독이 타자로 전향시켰고, 나중에 강타자로 터졌다. 임창용도 김성근 혼자키운걸로 아는 사람이 많은데[22] 해태왕조의 투수조련은 유남호 투수코치가 상당부분 공이 컸고 신인 투수를 처음부터 1군에 박아 놓고 키운건 역시 김응용.
7 쌍방울 레이더스
현재 단기 속성 과외 전문가 김성근 감독 명성을 만들어낸 시기.
자칫하면 영원히 끝날수있었던 프로 커리어를 반등시켜 이후 20년 가까이 현장직을 맡을수 있게 된 전환점.
자신의 능력을 모두 뽐낸 쌍방울 시절
1996년에 레이더스의 감독이 된다. 1991년 창단 이후 단 한 번도 포스트 시즌에 진출해보지 못하고, 꼴찌만 밥먹듯이 하던 약체팀이었지만, 김성근 감독의 지휘 아래 1996년에 정규리그 2위를 하는 기적을 일으켰고, 창단 첫 해 가공할 현질로 무장한 현대 유니콘스를 상대로 플레이오프에서 2승을 거두며 벼랑 끝까지 밀고 갔으나 결국 내리 3연패를 당하며 돌풍은 멈추었다. 그리고 팀에서는 바람잡이 선발(...)에 이은 벌떼 야구로 사상 초유의 20승 구원투수가 나왔다. 사실 이 장면을 최초로 보여준 것은 1984년의 롯데였다. 다만 이 때의 롯데와의 차이는 쌍방울이 구원투수 김현욱을 결정타로 사용한 반면에, 롯데가 사용한 것은 선발 투수 최동원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어떤 점에서는 1984년 롯데의 최동원 활용법과 이후 해태에서 선동열을 마무리의 위치에서 위력병기로 활용한 것을 조합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일단 일반적인 구원투수 벌떼 전략과는 좀 다른 형태였다. 당시 선수진에 대해서는 쌍방울 레이더스 문서 참조.
1997년에도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 등 호성적을 거두지만, IMF의 여파로 모기업이 부도를 맞이하며 지원이 끊겼다. 그래서 선수단은 조규제, 박경완, 김기태 등을 팔아 얻은 돈으로 겨우겨우 예산을 맞추게 되었고, 프로야구 팀이 싸구려 여관방을 전전하고 동네 기사식당에서 외상음식을 먹어가며 시즌을 치렀다. 참고로 이 장면을 기억하는 야구팬들은 이후 현대 유니콘스의 마지막 몇년간의 모습과 히어로즈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벌인 행동에 대해서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1998년과 1999년에 다시 하위권으로 추락했다. 1998년에는 주축이 모조리 나가버린 상황 속에서도 6위를 찍으며 분전했지만, 1999년에는 도저히 버틸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1999년 중도 해임되었지만, 아무도 감독을 비난하지 않았다.
상황에 맞춰 최대한의 능력을 뽑아내는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이 쌍방울 시절이다. 어쩌면 기본 전력이라는 측면에서는 우승을 차지한 SK 시절보다 더 약했기 때문에 가장 높은 평가를 받기도. 일단 전주 야구장의 펜스를 높이고, 투수들을 적재적소에 기용하면서 성적을 끌어올렸다. 고정된 선발은 없었지만,[23] 상황에 맞춰서 언더핸드와 우완 투수, 좌완 투수를 적절히 배합하면서 승리를 일궜다. 특히 홈 경기에 강해서 홈구장 17연승이라는[24] 대기록을 작성한 것도 이 시절.
이것에 대해서는 묘한 소문이 존재하는데 전주에 원정 온 팀의 선수들이 묵는 원정숙소에 귀신이 나타나서 원정팀 선수들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고 결국 경기력 저하로 패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귀신의 존재 여부는 확실치 않지만 이런 소문 때문에 원정팀 선수들이 제대로 숙면을 취하지 못한 것은 사실인 듯. 예전 모 방송에서 이 이야기를 다루었고 김성근 감독도 이런 소문을 들었다고 인터뷰한 적이 있다. 이 때 이르러 전주시민들은 비로소 쌍방울 레이더스를 해태 2중대 팀이 아닌, 우리들의 홈 팀으로 받아들였다. 쌍방울 시절부터 팀과 같이 해 온 박철호 SK 와이번스 전 홍보팀장은 김성근의 업적에 대해 "김성근 감독이 부임하고 나서 전주구장에 암표장사가 나타났다. 이거 하나로 충분하다."라고 회고했다.
당시 신장암에 걸려서 신장 한쪽을 제거하는 큰 수술을 받기도 했지만 선수들에게는 담석이 있을 뿐이라고 속였고, 수술을 받은 뒤에는 바로 재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어떤 면으로 보나 절망적인 형편 속에서 악전고투를 해야 했던 그는 1999년 올스타전 직후 해임당했고 이 소식을 들을 당시 김성근 감독은 "모든 것이 끝났다."라는 씁쓸한 여운이 담긴 말을 남기며 떠났고, 그 말대로 이후 레이더스 역시 그 해를 마지막으로 해체되었다.
요컨대 쌍방울 시절은 김은식 기자의 표현대로 "없는 살림에도 천하를 재패하기 위한 야심을 숨기지 않고, 이를 진짜 실현할 뻔한 위대한 순간"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 듯 하다. 지금도 김성근 야구의 진수는 SK 와이번스 때가 아니라 쌍방울 레이더스 시절에 나왔다는 평가가 많다.
다만 바로 쌍방울의 전성기였건 97시즌은 쌍방울이 페이롤 1위였던 시즌이었다는 것. 이게 어느 정도냐면 이 당시 잘나가던 해태나 LG뿐만 아니라 그 돈질한다던 삼성, 현대보다도 페이롤이 높았던 것. 사실 IMF로 이미 운명이 정해져있었던 것이나 다름없었던 구단의 존폐에는 사실 큰 영향이 없었겠지만,[25] 이러한 방만한 운영과 선수단 연봉관리가 이후 구단 해체 및 재창단이라는 과정을 거치게 만든 것도 일정 부분 사실이다. 그러나 이 점 하나에만 집착하는 것도 당시 상황의 본질을 제대로 못보게 한다는 점에서 좋은 일은 아니다. 오히려 시즌 2위를 찍은 1996년에는 연봉이 최하위권이었다. 이때 김기태가 구단 최초로 연봉 1억을 받긴 했지만[26] 나머지는 별 볼일 없던 셈. 이런 선수들 가지고 구단 사상 첫 포스트시즌 진출에 연고지 내에서도 위상이 커졌는데[27] 어느 구단이 미쳤다고 연봉 안 올려주고 투자를 안 해줄까? 이 구단이면 그럴지도. 그게 팀 규모에 비해 무리한 규모이긴 했지만 투자 근거가 없는 건 아니다. 2016년 현재, 시대에 전혀 맞지 않는 자신만을 위한 팀 운영으로 모든 사람들의 욕을 먹고 있지만, 20년 전 거의 맨손으로 돌격대를 지휘할 때에는 명감독의 진수를 보여주었다고 평가할 만 하다.
여담으로 먼 훗날 김성근 감독은 자기가 맡은 팀 중 제일 애착이 가는 팀이 어디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망설이지도 않고 "쌍방울 레이더스"라고 얘기한 적이 있다.
8 LG 트윈스
야신이라는 타이틀을 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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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에 삼성의 2군 감독을 맡았다가 김응용 체제가 들어서면서 코치진 개편으로 해임된 후, 2001년에 LG로 옮겨서 2군 감독이 되었다. 그러다가 이광은 감독이 2001년 최악의 모습을 보이자 시즌 중간에 2군 감독에서 1군 수석코치 겸 투수 운용의 전권을 위임받더니, 예정된 수순으로 감독 대행이 되었고 시즌 후 정식 감독이 되었다. 2001년의 경우 이광은 재임 시절에 워낙 망쳐놔서(9승1무26패) 결국은 4위 한화와 겨우 1경기 차이인 6위에 그쳤지만 실제로 승률은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2002년보다 2001년 감독대행 시기의 승률이 더 높았다. 물론 신윤호 혹사 논란이 따라가기는 했지만, 입단해서 7년동안 아무 활약도 없어서 잘릴 예정이었던 신윤호는 그 때의 활약으로 그 이후로도 프로에서 7년 더 연봉을 받고 살았다.
2001년에 망가진 팀을 수습하여 어느 정도 끌어올렸고, 2002년에 목표를 70승으로 잡은 뒤 초반 부진을 딛고 여름부터 치고 가면서 막판에 두산 베어스를 제치고 4위를 기록한 후 준플레이오프, 플레이오프를 거치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여 최강 삼성을 턱밑까지 몰아붙인 기적의 명승부를 연출했으나...
한 해 더 할 수 있겠다고[28] 안심하고 있자, "이건 김성근의 야구지 LG 야구가 아니다"라는 말과 함께 짤렸다. 결정적인 계기는 2002년 시즌과 함께 사장, 단장이 바뀐 것인데, 새로 부임한 어윤태 사장은 1994년 우승 당시 단장이었기 때문에 LG 야구의 특징인 '신바람 야구'의 신봉자였다고 한다. 그래서 김성근 야구라고 생각해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고. 항간에는 더 윗선의 높으신 분도 좋아하지 않았다고도 한다. 항간에는 김성근 감독이 구느님 구본무 당시 구단주에게 직접 찾아갔다는 소문이 있고, 당돌하다고 여긴 구단주가 노했다는 얘기도 있다. 아니 나이도 세살이나 어린놈이 노하긴 뭘 노해!? 박진영과 god 쭈니형 보는 것 같네 그리고 한국시리즈 준우승을 했기 때문에 LG 전력이 괜찮은 편인걸로 생각한 듯 하다.
이렇듯 김성근의 표면적인 해임 원인은 우승 실패였지만, 실제로는 2002 시즌 초반의 성적 부진, 프런트와의 갈등과 관련된 문제였다. 성적과는 별개로 팀이 잘 나가던 시즌 후반에 현수막을 걸고 뜬금없이 해임을 요구하는 팬들이 등장하기도 하는 등 팬들 사이에서의 호불호도 크게 엇갈렸고, 소수 극단적인 까들은 6668587667의 원인이 김성근과 연관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들의 주장은 김성근 때부터 2002년 드래프트에서 고영민, 조동찬을 거르고 김우석을 1라운드에서 지명한 이해할 수 없는 신인 지명[29]과 재일교포 이일의, 제자였던 심성보 등 자기 라인에 해당하는 선수 기용이 시작되었고, 2001 ~ 2002년의 투수진 혹사가 비밀번호의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허나 어윤태 - 유성민 체제로 바뀐 프런트는 김성근을 지원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를 자르려고 뒤에서 방해 공작을 펼쳤는데 FA가 된 양준혁을 안 잡고 보상선수도 돈으로만 받은 것에서부터 시작, 외국선수 계약에 있어서 2001 시즌 준수한 활약을 보인 투수들인 더그 린튼과 에프레인 발데스를 내보내고 은퇴를 준비하던 공갈포 톰 퀸란을 데려온 행동과 시즌 후에 고려대 인맥이 있는 당시 한화 이글스 감독이었던 이광환을 영입하기 위해 김성근을 자르려는 움직임을 보인 것이 당시 김성근과 프런트의 대립을 보여준 것이었다.
이후 LG 트윈스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견해가 있으나, 대체로 전통적으로 프런트의 입김이 강했던 LG 트윈스 프런트와의 알력 및 구단주의 의향이 아니었는가 하고 추측한다. 김성근 감독 성향상 프런트가 선수 기용 등에 대해서 간섭하는 것을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 럭키회 키워드로 검색해보면 그 흑역사의 실마리가 잡힐 것이다. 2002년 겨울 김성근의 해임 소식이 전해지자 팬들은 김성근 지지파와 반대파로 나뉘어져 서로 키배를 벌였고, 일부는 잠실 야구장 앞에서 항의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특이한 점은 지지파와 반대파들 모두 김성근의 갑작스런 해임을 비판했다는 점에서 동일한 의견을 보였지만 반대파는 이광환의 취임을 수용하자는 주장을, 지지파는 김성근의 즉각적인 복귀를 주장했다. 그리고 이 흑역사를 11년 뒤 두산 베어스의 김진욱 감독이 이 테크트리를 그대로 밟았고, 두산은 2014년에 6위로 추락하고 말았다.
재미있는 것은, 후임으로 이광환 감독이 부임했으며 프런트는 처음부터 후임으로 이광환을 준비했었다는 OB 시절의 악연이 반복되었다는 것. 또한 이광환 감독 부임 후 OB와 LG는 각각 암흑기를 겪는다. 다만 이걸 이광환의 무능으로 평가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데 실제로 꼬여가는 상황은 이광환이 아니라 김성근 본인이 있었어도 해결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서용빈, 유지현, 이상훈, 김재현 등을 정리하려는 의도 등은 상당히 윗선에서 진행되었고 이게 실제로 드러난 2003년 7월부터 이광환 감독은 이를 반대하다 시즌 후 2군으로 좌천당하게 된다. 김성근 감독의 성향상 역시 이광환이 겪은 것과 마찬가지의 길을 걸었을 가능성이 99%이다. 이 10년 간의 끔찍한 비밀번호를 김성근의 제자인 김기태가 끊었다.
그리고 최근 김성근 감독이 강연에서 2002년 한국시리즈 뒷이야기를 자주했는데...
2002년도는 이건 여러분들이 심각하게 들어야 되는 문제라고 보는데,LG가 8회초에 2점 놓고, 4점 리드했어요, 그때. 4점 리드면 이기는 거예요, 거의 다,
8회니까. 그런데 4점 들어온 다음에 내가 번트 지시를 했다고. 그럼 번트를 하면,
보내기 번트를 시켰는데 써드 코치가 사인을 놓쳐버렸어요.
근데 거기서 번트를 성공했다, 한 점 들어왔으면 세상의 비난 무지 받았을 거예요.
근데 내가 냈다고, 냈는데, 코치가 사인을 놓쳐버렸어요. 놓치는 순간에 졌다 싶었다고,
나는. 이건 거짓말이 아니고, 내가 직감이 왔다고, 졌다 싶었어요.
아니나 다를까 9회에 뒤집어졌잖아요. 그 문제는, 그게 나한테 좋은 경험이 됐는데,
그때 그 한국시리즈가. 한국시리즈는 우승하는 게 목표지, 준우승이 목표 아니에요.
6차전에서 지든, 5차전이 되든 그런 건 별 문제가 아니에요.
7차를 어떻게 이기냐 하는 문제였지. 그때 이상훈이라고 하는 피쳐가 클로져였는데,
이상훈이를 내가 6차전에 써버리면 7차전에 쓸 토막이 안돼요.
그럼 7차전 못 이기는 거예요.
물론 흐름이 있으니까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거지만, 승부라고 하는 것은.
그러니까 거기서 번트를 대면 이상훈이 안 쓰고 7차에 갔으면 가능성이 있은 거예요.
번트 하나 실패하니까 졌다 싶은 거예요
마, 그때는 아쉬움이라고 하는 것은 큰 역전패, 마지막에.
그리고 혼신의 힘이라고 하는 걸 아이들에게서 봤고,
그때는 준플레이오프, 플레이오프, 코리안시리즈, 3단계를 올라왔으니까,
지칠 대로 지친 한없이 지친 상태였어도 애들은 잘했지 않나 싶은데,
내가 야구장에서 눈물을 흘린 게 그때가 처음이에요.
뒤에 기대가지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는데,
사장은 지니까 기분 좋아서 김감독 수고했어, 그러더라고,
그리고 결국은 자르더라고요.
이 사실을 안 LG 팬들은 뒷목을 잡았다고... 여담으로 그 때의 3루 코치는 김용국이었다.
박영태의 인터뷰#에 따르면 이때 시즌이 끝난 후 롯데의 코치진인 박영태와 양상문을 영입하려는 시도를 했다고 한다. 실제로 양상문은 2002년 투수코치로 영입되어 팀 투수진 재건에 공헌했다.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김성근~이광환 시기만 한정해서 양상문은 나름 능력자였다. LG 투수진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도 그가 롯데 감독으로 가면서부터였다. 그런데 2011년에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는데... 이 둘을 영입하려던 이유는 아마도 자신의 구단 내 입지를 강화하려 했던 모양인데, LG에 있던 기간의 코칭 스탭들은 가토 하지메와 양상문, 이홍범, 이철성을 제외하면 구단과 연관이 있던 코치들이었다. 또한 연장선상으로 2002년 시즌 중 박정태와 임경완의 영입을 타진했었고[30] 실제로 성사 직전까지 갔으나 무산된 적이 있었다.
9 치바 롯데 마린즈
WBC 1회 예선전에서 국민감독 김인식과 함께.
제2의 야구 인생을 알게 해준 스승 바비 발렌타인[31]을 만나게 된, 언론플레이법을 배운 김성근 지도자 인생의 터닝포인트.
LG 트윈스 감독에서 해임되고 2년의 시간동안 해설위원을 역임하다가 일본프로야구팀인 치바 롯데 마린즈에서 팀소속이 아닌 이승엽 개인 인스트럭터로 지낸다. 당시 같은 팀에 있었던 이승엽에게 여러가지 조언을 하며 집중지도한다. 감독이었던 바비 발렌타인 감독이 적당히 눈감아줘서 가능했다고. 이승엽이 초기에 일본에서 부진했었기 때문에 김성근의 영입을 부탁했다는 설도 있다. 김성근 감독은 이때 선진야구를 현장에서 접하면서 기존의 야구관에 칼을 대고 더욱 발전했다고 자평했지만 2016년 기준 실상은 언론플레이와 팬서비스로 경기장 밖에 자신의 편을 만드는 법을 배운 것 외에 야구적인 측면에서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발렌타인 감독 역시 인맥이나 언론 플레이 능력이 뛰어난 반면 신인 육성에는 힘을 기울이지 않았다가 말년에 추락을 거듭했는데 현재 김성근 야구도 답습하고 있다.
한편 지바 롯데 마린스 정식 1군 코치라는 과장된 커리어가 있는데 이승엽이 뛴 2004~2005 시즌은 코칭스탭이 아니었다. 이승엽이 고용한 개인 인스트럭터일뿐이다. 정식 코치로 발령난건 이승엽이 퇴단하고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한 2005 시즌 말이며, 이때 받은 직함도1~2군 순회코치(인스트럭터)일뿐 타코나 투수코치처럼 보직이 정해지지 않고 주로 2군에서 선수들에 조언하는 역할에 그치는 제한된 보직이다.[32] 상식적으로 일본에서는 코치선발시에는 선수나 코치커리어 또한 매우 중요시하기 때문에 자국보다 야구수준이 처지는 나라 인물에게 야구 코치를 한번에 정식으로 줄리가 없다. 김성근의 일본야구 경험은 고교야구 뿐이고, 프로는 커녕 대학-실업야구 경력도 없는데다가, 일본에서 리틀야구팀 지도자도 한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니시오카를 죽탱이 날려서 교육시켰다는 둥의 일화는 일본 코치-선수문화로 볼때 별 신빙성이 없다. 일본 코치들은 한국처럼 코치-선수가 사제 관계로 엮이는것이 아니고, 현역때 200승을 하든 3000안타를 쳤든지 간에 아무리 스타출신 코치라도 선수가 먼저 도움을 요청하기 전에는 간섭하는것이 금기시 되기 때문이다.
하여튼 김성근의 자서전에 따르면 여기서 보고 느낀 것을 통해 완전히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김성근으로 변신했다고 주장한다. 체계적인 일본의 프로야구 시스템을 통해 시야가 확장되었으며, 메이저리그 1000승 감독인 바비 발렌타인의 지도법을 보고 아구관이 넓어져 그 여파로 엄청난 양의 공부를 소화했다고 한다. 2007년 SK 감독으로 부임하고 난지 얼마 안되서의 인터뷰를 보면 바비 발렌타인을 자신의 제2의 야구 인생을 알게해준 고마운 스승으로 생각한다고 허심탄회하게 밝혔다. 지도자로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는 눈을 갖게 되었고, 수많은 야구 전문서적과 재활의학서적까지 독파하게 된다. 당시 얼마나 공부를 많이 했냐면 하도 오래 앉아있는 바람에 치질이 생겨 오랜기간 고생하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이처럼 일본에서의 시간은 김성근을 선진적인 지도자로 변신시키는 계기가 된다. 그 전까지는 약팀을 강팀으로 만드는 능력은 있으나 우승까지는 힘든 감독 정도였지만, 이 때의 체험을 통해 완전히 다른 지도철학을 보여준다고 그와 그의 팬들은 주장했다.. 지도자 생활하면서 외국에서 활동한건 이때가 처음이다.
언론과 팬들에게 보다 열린 마음으로 대한다든가, 매일 타순을 변화무쌍하게 조정한다든가. 훈련방식도 위의 태평양 돌핀스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무조건 많이 굴리면 장땡이라는 사상에서 벗어나, 선수 개개인의 강약을 분석하고 부족한 부분을 효율적으로 보강하기 위해 체계적으로 분석해서 접근하는 방식으로 진화했다고 주장한다. 특히 언론과 팬에 대한 자세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이 주목할만한 부분이다. 자세히 보면, 이후 SK 와이번스 부임시절 김성근 감독에 대한 부정적인 기사 못지 않게 긍정적인 기사도 많이 쏟아지는 편인데, 팀의 호성적과 일본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언론플레이와 자서전 등을 간행하면서 자신의 팬기자들[33]을 양성한 덕분이다. 다음은 당시 상황을 회상한 내용이다.
"LG 감독에서 물러났을 때부터 SK 감독으로 다시 부임하기까지 5년의 시간이 걸렸다. 첫 2년은 해설위원으로 활동했다. 매 경기 꼼꼼하게 메모하면서 양 팀의 경기를 정리했다. 신기한 것은 내가 경기 '안'에 있었을 때는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바깥'에 있자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는 거다. 큰 변화였다. 야구를 보는 시각이 확장됐다. 시야가 넓어지니 여유가 생겼다. 더 큰 단계의 승리를 염두에 둘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진 지바 롯데 코치 생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메이저리그 1000승 감독인 바비 발렌타인 감독을 만난 일이다. 그는 한국의 감독들과는 달랐다. 내가 놀란 것은 야구를 대하는 태도였다. 그는 경기장에서 자기감정 표현에 무척이나 솔직했다. 워낙에 튀는 발언과 다양한 표정으로 메이저리그에서도 유명했던 사람이다. 지바 롯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그의 표현방식이 지나친게 아닌가 싶었지만, 그는 진지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가 가진 긍정적인 에너지가 놀라웠고 그것이 팀의 분위기를 바꿨다. 모든 선수들이 인사를 잘 했고 밝고 활기찬 분위기에서 훈련을 했다. 결코 훈련이나 경기 운영이 대충대충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할 것은 제대로 지키면서 활력있는 플레이가 펼쳐졌다. 나중에는 나도 적응해서 팀의 분위기에 녹아들었다"
"언젠가부터 시야가 좁아지면서 많은 것을 놓친 것이 아닐까, 반성하게 되었고 야인으로 지낸 5년의 세월이 나를 가르쳤다....나는 야구를 즐기는 방법을 배웠고, 야구장 안에서는 냉철했지만 그 밖에서의 생활에는 여유가 생겼다. 청바지도 즐겨 입게 되었으며 원정 경기를 가면 청바지에 모자를 쓰고 MP3 플레이어의 이어폰을 귀에 꽂고 걷기도 하게 되었다...난 이때 비로소 야구가 '생활'에서 '인생'으로 바뀌었다고 말한다...성찰이 있고 끊임없는 배움이 있고 더 넓은 시야, 세계 야구라는 큰 틀에서 일본 야구, 한국 야구, 아시아 야구를 생각하게 되었다."
상술한 내용은 김성근 자서전 리더는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 챕터 4 205페이지에서 발췌하였다.
10 SK 와이번스
우승 3번, 김성근 감독 최대의 전성기
SK 왕조를 이끌다
2007년에 SK 와이번스의 감독에 취임한다. 인천에서의 정착을 위해 결국 필요한 것은 성적이라는 점을 깨달은 SK 쪽에서 과감하게 영입했다고 한다. 사실 김성근 자신의 회고로는 "이래가지고 어떻게 야구하냐"는 말이 이만수 수석코치 입에서 나왔을만큼, 팀도 아니었다고 하지만[34], 그래도 2003년과 2005년 PO에 진출한 경험이 있고 2006년에도 4강 후보였으나 용병 문제로 탈락했으니, 기본 전력은 있었다고 해도 무방했다. 그러나 이런 선수들의 기본 전력만 믿고 방심하거나, 다소 느슨하게 플레이하는 것을 다잡고, 선수들을 조련해서 더 나은 기본기와 많은 연습량을 통해 수비력과 기동력의 향상을 이끌어낸 것은 김성근 감독의 공이라고 볼 수 있다. . 특히 최정, 정근우, 김강민 등의 유망주들을 국가대표급 선수로 성장시킨 것은 김성근 감독의 조련이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선수들의 성장을 김성근 감독만의 공으로 보지 않는 시각도 있다.
어쨌든 강훈련과 일본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더 원숙해진 투수 운용을 바탕으로 2007년 정규리그 1위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여 구단 최초이자 김성근 감독 생애 최초로 한국시리즈 우승이자 통합 우승을 경험하게 된다. 2007년 한국시리즈에서는 다니엘 리오스의 약물 파워 투구를 앞세운 두산에게 초반에는 고전했지만, 프로야구 역사상 최초로 2패 후, 4연승이라는 기록을 세우면서 역전 우승에 성공했다. 4차전의 선발 김광현과 시즌 내내 부진했던 김재현, 가을동화 전설을 쓰기 시작하는 조동화의 활약이 빛났던 경기.
김성근 감독의 야구가 막강하다는 평을 들은 것은 2008년으로, 정규시즌 내내 독주하면서 선두 자리를 내놓지 않았다. 2008년 2위와의 승차는 무려 13게임. 126경기 기준으로 최다승인 83승을 기록하면서 역대급 강팀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2008년 한국시리즈에서도 다시 두산을 만나 1차전을 내줬지만, 내리 4경기를 잡으면서 우승. 다만, 김성근 감독 자신이 소망하는 아시안시리즈에서는 일본시리즈 우승팀인 세이부 라이온즈에게는 승리했지만 어이없게도 대만의 퉁이 라이온즈에게 참패하면서 결승 진출이 좌절되었다.
2009년에는 시즌 전 이진영의 LG 트윈스 이적, 시즌에 들어서면서 박경완, 송은범, 김광현이 부상으로 이탈하고, 채병용이 부상에 시달리는 등, 온갖 악재 속에서 8월 한 때 3위까지 밀려났지만, 후반기 막판 20경기에서 기록한 성적이 20전 19승 1무. 프로야구 최다 연승 기록을 세우면서, 우승 매직넘버 단계에 있던 KIA 타이거즈를 턱밑까지 추격하여 1위 KIA와 반게임도 되지 않은 승률차이로 정규시즌 2위를 기록했다. 그리고 PO에서도 두산에게 먼저 2패를 당했지만, 내리 3연승을 기록하면서 한국시리즈에 올랐다. 한국시리즈에서는 KIA와 7차전까지 가는 사투를 벌인 끝에 결국 끝내기 홈런으로 패배하면서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이때 SK 와이번스 선수단은 채병용 등 선수생명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혹사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투혼을 보여줬다. 참고로 정규시즌 19연승 기록은 이듬해까지 이어지면서 총 22연승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2010년에 채병용, 윤길현이 군입대를 했지만, 에이스 김광현의 복귀와 정우람,이승호,전병두,고효준의 강력한 좌완 불펜(스윙맨)을 앞세워 시즌 내내 선두를 지키고 정규시즌 우승에 성공. 이어 삼성 라이온즈 상대로 4전 전승으로 완승을 거두면서 3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에 성공했다. 팀 통산 세 번째 우승 및, 개인 통산 세 번째 한국시리즈 우승. 이로써 2007년부터 2010년까지 4연속 한국시리즈 진출이라는(해태와 타이기록) 기록을 세웠다. 또한 인천예수라는 별명을 얻은 것도 이 시기.
이전까지는 우승경험이 없었기에 큰 경기에서 약한 감독이라는 평도 2002 LG의 준우승과 특히 '2007, 2008, 2010년의 SK의 우승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2011년 시즌 김광현, 송은범의 부상으로 인한 부진, 뛰어난 외국인 투수영입에 실패했음에도 그의 쌍방울 시절을 연상케 하는 스윙맨을 최대한 활용하는 투수운용으로 시즌초 선두권을 달렸지만 전병두 등 계투진의 혹사 여파와 정상호, 박경완의 부상으로 프로 입단후 포수경험이 거의 없던 최동수를 지속적으로 포수로 기용하는 극단적인 용병술이 실패하면서 7월에는 결국 3위로 떨어진다. 게다가 시즌 중 재계약 문제로 프런트와 마찰을 빚었고 결국 2011년 8월 17일 이번 시즌까지만 하고 SK 감독직을 그만 두겠다고 공개 발언을 하였다. 계약 만료 시즌에 스스로 시즌 중 재계약 거부 선언을 하는건 매우 이례적인 일. 관련기사.그리고 다음날인 8월 18일에 바로 구단에서 경질되었다.. 본인 말로는 감독 인생 동안 12번 째 해임... 빨간 장갑의 마술사랑 동률이 머지않았다
당연히 야구계와 SK팬들은 뒤집어졌다. 일각에서는 이만수 2군 감독을 차기 감독으로 밀려는 SK그룹 상층부의 태도와 거듭된 간보기에 질려서 스스로 물러나겠다는 폭탄선언을 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2007년 SK 감독으로 부임할 당시부터 프런트에서 그의 사단도 아니며 원하지도 않은 이만수를 수석코치로 부임시켰고, 타 팀 감독의 계약기간이 3년인데 반해 2년 단기 계약을 맺었으며, 2007 시즌 초 홈구장 만원사례 따른 팀의 간판인 것처럼 대규모 팬티 퍼포먼스를 벌인 것을 볼 때, 프런트의 의도에 따른 2년 후 차기감독이 이만수인 것은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예상 외로 김성근 감독 부임 이후 2연속 우승을 하며 최고의 성과를 거뒀고 그에 따라 2009년 3년 재계약을 하였고 구단 내 김성근 감독의 영향력도 커지게 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재계약 후 2009 시즌 준우승, 2010 시즌도 1위를 질주하는 시즌 중반 이만수 당시 수석코치를 2군 감독으로 보내고 프런트와 마찰을 빚으면서 이를 차기 재계약을 위한 이만수 코치에 대한 견재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35] 재계약 후 당시 구단 사장의 막걸리 야구 발언이나 김성근 감독의 이진영 등 FA 유출과 소극적인 영입태도에 대한 구단에 불만을 나타내며 프런트와 감독간 파워게임을 하는 듯한 이상기류가 흘렀다.
2011 시즌 직전 넥센 히어로즈 김성근 감독처럼 계약 마지막 해였던 김시진 당시 넥센 감독과 일찌감치 2014년까지 3년 재계약을 맺었고 김성근 감독은 언론에 이 사례를 들면서 언론 인터뷰를 통해 프런트측에 계약 종료 전 재계약을 압박했는데 프런트는 공식적으로는 시즌 및 계약종료 후 재계약 결정[36]한다고 했지만 재계약을 위해 김성근 감독과 만났다고 한다. 그러나 이만수 2군 감독의 양해문제 등 재계약 협상과정에서도 갈등이 불거져 김성근 감독은 이 과정을 언론을 통해 불만을 터뜨렸고# 2011년 8월 17일 SK와이번스와 재계약 포기선언을 하며 구단측에 불만을 터뜨렸다.#
호성적의 최소한의 척도인 포스트시즌 진출 경력이 없는 김시진 감독의 재계약을 생각하면 감독부임기간에 우승3회, 준우승 1회를 거둔 김성근 감독의 계약종료 전 재계약 요구는 정당해 보이나, 연봉 미계약 선수는 훈련분위기를 해친다며 스프링캠프 제외할 정도로 팀워크를 중시하면서 본인 계약에 관한 갈등은 시즌 중에 언론에 지속적으로 흘리면서 팀분위기를 어수선하게 하는 내로남불적 행태를 보였다. 프런트 측도 김응용, 선동열 감독의 장기부임한 감독들의 재계약 사례를 보면 계약종료 후 재계약은 했어도 계약 마지막해 내부적인 계약여부 결정 및 언론 발표가 있었던 것을 볼 때 계약에 대한 모호한 태도는 매끄럽지 못한 일처리로 비판받아 마땅하다.
어쨌든, 이러한 김성근의 재계약 포기발언 다음날, SK 프런트는 김성근 감독을 전격 경질하고 이만수 2군감독을 감독대행으로 임명해 남은 시즌을 꾸려가겠다고 발표했다. 그래도 올해까지는 김성근 감독을 볼 수 있을 거라고, 나아가 김성근 감독이 마음을 돌려 재계약 할지도 모른다고 희미하게나마 기대했던 감독팬들은 프런트에 대해 분노를 터뜨렸다.
게다가 경질 통보를 문학구장에서 받았다는 기사까지 떴다!! 경기를 준비하기 위해 문학구장에 출근한 순간 해고통지를 받고 짐을 챙겨 경기장을 떠나야 했다고 한다. 김성근 감독의 아들이자 같은 팀 김정준 코치의 말에 따르면, 김감독은 재계약 포기선언을 한 날 밤에 머리를 짧게 깎고 와서 "앞으로 남은 경기는 잘 치러야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강성 감독팬들의 분노는 문학구장 소요 사태로 이어지게 되고 나아가서는 이만수 감독과 프런트에 대한 비토 여론으로 발전하고, 김성근 감독만의 악성 팬덤으로 변질되기도 하였다.
경질 상황을 김성근 감독의 입장에서 요약한 박노준의 칼럼이 있다. 김성근 감독 경질 왜?
게다가 김성근 전 감독과 SK 프런트가 결정적으로 틀어진 이유에 대해서 김성근 전 감독 입장에서의 인터뷰에서 나오면서 아마도 SK 프런트의 수뇌부가 건재한 이상, 김성근 감독이 SK 와이번스로 재부임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SK 와이번스와 후임 이만수 감독에 대해 지속적으로 비난을 하면서# 국내외 타 프로구단과의 계약을 의식하는 행보를 보였으나 좌절되고[37] 후술하는 독립구단 고양 원더스 감독으로 부임한다.
과거 김성근 감독이 나간 후 OB와 LG는 암흑기를 걸었는데, SK는 김 감독이 2011시즌 중간에 나간 후 이만수 감독 아래에서 그 해 준우승을 했다. 2012시즌에도 준우승을 차지하였지만, 이후 2013, 2014년에는 각각 6위와 5위를 기록하며 포스트 시즌 진출에 실패했고, 이만수 감독은 계약만료로 팀을 떠났다. 이는 김성근 감독과 후임 감독간의 지도력 격차 때문인지 김성근 감독의 본인 부임시 성적 최우선의 투수혹사 등 근시안적 선수 운용에 따른 부작용 때문인지 논란이 있다. 이전에는 전자의 의견이 우세하였으나 김성근 감독이 2015년 한화 이글스에 부임 후 보인 행태로 인해 후자가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그렇다고 감동님을 명장으로 보기는 힘들다. 무엇보다 이 작자가 김광현 세계일주나 박희수에게 한 짓은 김성근에 절대 안뒤진다.
하여튼 여기까지는 여러가지 논란이 있으나 명장이라는 말에는 부정할 수 없는 실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 당시 타팀 팬들도 SK를 강하기는 하지만 자기들이 못이기니 너무 노잼야구, 쪼잔한 야구라서 꼴보기 싫다는 등의 이야기가 있었다. 어쨌거나, 강팀을 운영하는 명장이라는 사실 만큼은 분명했었었으나...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냥 여기서 끝냈어야했다.
현재 SK 와이번스 팬들의 김성근 감독에 대한 감정은 "전병두등 과도 있지만 어쨌든 SK 왕조라는 좋은 추억을 안겨준 고마운 감독."정도다. 단 이들은 현재 한화를 맡고있는 김성근 감독에 대해선 비판적인 입장.
11 고양 원더스
커리어 첫 독립리그 감독 그리고 존경받는 사회적 리더라는 명성 혹은 허명
자신의 이름 석자 명예를 위해 한 선수의 인생을 망가뜨리다.
이후 야인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2011년 12월 5일 고양 원더스의 초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독립리그 팀 감독을 맡은 감독은 그가 처음이다. 고양 원더스에 대한 이런저런 말들이 있긴 하지만,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여러 선수들을 프로구단으로 진출시키고 5할 이상의 승률을 유지하는 등 활약을 펼쳤다.
프로에서 방출되거나 미지명된 선수들로 호성적을 거두면서 높은 평가를 받은 데다가 각종 자서전 출간과 그를 미화한 다큐멘터리 영화 개봉으로 소외받은 약자들의 편에서 재기를 돕는 존경받는 사회적 리더로 이미지 메이킹하여 그의 개인팬층을 확산되고, 정치권 등에서 그와 사진찍기 위해 찾아오거나, 리더십 강연요청이 물밀듯이 들어왔다. 청와대에서도 강연을 하고 강연수익으로 인한 세금만 수억원을 납부할 정도.
하지만 실상은 상술하였듯이 고양 원더스 부임 전과 부임 후에도 늘 국내외 프로구단 감독으로 부임을 노리고 있었고, 재능기부 및 봉사로 비춰진 세간의 인식과 달리 고양 원더스에서도 연봉 2억원에 기사 딸리 외제 관용차량 지원, 자신의 사단코치 대부분 기용할 수 있어 프로구단 감독 수준의 대접을 받고 일했다. 게다가 데럴 마데이 등 외국인 투수 5명이 전체 시즌 경기이닝의 대부분을 맡은 것이 밝혀지며 긍정적으로만 비춰지던 그의 고양 원더스 시절이 재평가되었다. 승리와 감독 개인의 명예에 집착해서 독립야구단 본연의 창단목적인 육성을 도외시한 승부 중심의 운영을 했다는 것이다. 백번 양보해서 승리 집착이야 선수들이 승리하는 만큼 다른 구단 눈에 띄고 다시 프로에 입성할 확률이 높아지니[38] 그것까지는 넘어갈수 있다 치더라도.. 도저히 그 넘어갈 수준에서 끝나는게 아니란게 문제 거기서도 당연히 혹사를 시켰고2014시즌 원더스 주요 외국인 등판일지
2013년 8월 27일 한화 이글스 한대화 감독이 경질되면서 언론과 한화 팬들 사이에 하마평에 오르내리기도 했고 실제로 기사도 많이 터져나왔으나, 8월 29일에 고양 원더스와 2년 재계약을 맺으면서 이 하마평은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정확히는 한화 이글스에서 감독제의가 왔었고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김승연 회장의 아들이 직접 모셔오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이에 김성근 본인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지만 김성근 본인의 요구사항 중 하나가 한대화 감독을 시즌 끝까지 유임해달라는 것이 였는데 한화 프런트가 이를 어긴 탓에 무산되고, 결국 고양 원더스에 잔류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 김성근 본인의 주장. 하지만 한대화 문서에서 볼 수 있듯이 김성근과 한대화의 악연을 생각하면 그냥 김성근의 언플일 가능성이 높다. [39] 2015년에 한화감독에 부임하여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이 때 이 발언도 재평가 되고 있다.
2014년, 이 상황이 다른 팀에서 다시 또 반복되었다. 그러나 LG의 경우는 상극이 될 가능성이 있는데, 이미 한번 안좋게 떠난데다 경험 많은 베테랑과 수비를 중시하는 김성근의 성향상 2군을 폭격 중인 팀내 유망주들의 1군 정착에는 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14년 8월 28일 고양 원더스의 시즌 마지막 경기를 끝으로 계약이 종료되었다.(자동재생 주의) 벌써부터 주목을 받는중. 9월 11일 고양 원더스의 해체가 발표되었다.
김성근 감독 인생에서 13번째로 감독을 타의로 그만두게 되었다. 빨간 장갑의 마술사랑 동률이네 김성근 감독 본인은 경질과 야인 생활의 반복이 익숙 할 수 있다. 하지만 프런트와 마찰없이 팀이 통채로 와해되어서 감독직을 내려 놓는 경우는 처음이라고 한다. 쌍방울의 경우는 와해 단계까지 왔지만 그 전에 명목상 경질이다. 그리고 10월 25일 고양원더스 해체 한달여 만에 한화 이글스 감독으로 부임한다.
12 한화 이글스
한화 이글스 역대 최악의 금지어
그간의 커리어를 일순간에 말아먹은 최악의 오판들로 가득찼던 시기
절대 포기하지 않는 투혼의 팀 이미지를 만들어 줬지만, 야신이라는 이미지를 말아먹고 실패한 감독이 될 가능성이 높다.
리빌딩이 필요한 시기에 연이어 우승 청부사를 초빙한 팬들의 실책
임기 마감 후 자세히 추가 바람
12.1 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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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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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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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2017년
아무래도 계약 끝날때까지 계속할 모양.이었으나. 이날 저녁 상반된 기사가 나왔다.. 아직 경질될지 그룹에 재신임받아 17년에도 한화 감독을 맏을지는 불명. 계속 감독을 맡을지의 유무는 10월 26일에 발표될 예정이다.- ↑ 페넌트레이스 4위였던 현대에게 지면서 3위
- ↑ 4위였던 삼성에게 졌으나 삼성이 플레이오프에서 LG에 지면서 3위
- ↑ 경질 당시
- ↑ 김성근의 저주 참조
- ↑ 일부 팬들의 평을 빌자면 김성근을 감독으로 올린다는건 악마와의 거래와 똑같다고 한다.
적절하다 - ↑ 당시 배수찬은 기업은행 타격코치를 맡고 있었다.
- ↑ 임기 마지막해인 1981년 메이저대회는 아니지만 화랑기에서 우승했다. 때문에 훗날 신일고 시절도 우승 감독으로 김성근의 커리어 항상 언급된다.
- ↑ 당시 김성근 감독은 경기 전에 배를 든든히 채워야 한다는 쪽이었고, 이광환 감독은 경기 전에는 되도록 가볍게만 먹어야 한다는 쪽이었다. 오늘날로 보면, 이광환 감독 쪽이 맞는 의견이다.
- ↑ 1986년 이전까지는 6개 구단 체제, 1986년 빙그레 창단이후 7개 구단 체제
- ↑ 당시 태평양의 주전 포수 김동기는 이때 "칼이라도 쥐어준다면 당장 목에다 찔러주고 싶었다."고 1989 시즌뒤에 인터뷰에서 얘기했고, 김일권은 오대산훈련에서 얼음물 입수하자마자 튀어나와서 김성근감독 면전에다 "야이 십새캬!!"라고 욕설을 했다(....)
정작 당시 김성근감독은 김일권뿐만 아니라 다른쪽에서도 욕설이 터져나와도 눈하나 깜짝안했다고. - ↑ 장명부의 승수에 따른 연봉차감 각서, 당시 고관절 질환을 앓았던 김재현 각서 사건 등
- ↑ 염경엽 감독은 1991년에 입단했다.
- ↑ 물론 이 당시 삼성은 포스트 시즌 진출 단골 팀이었고 2013년 김응용이 맡은 한화 이글스는 비밀번호를 만들어 내는 과정이었지만 각 팀 팬덤에게 어마어마한 비난을 받았다는 점에서 비견될만 하다.
둘다 성적 제자리 찍기를 했다는 점도 - ↑ 이제는 삼성 김성근=한화 김성근이라는 설이 대세이다. 김응용도 99를 찍었지만, 김응용은 적어도 유망주를 육성하려는 노력이라도 했다. 인터뷰와 송창식 혹사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으나, 이중인격자이자, 송창식, 박정진, 권혁을 모두 족쳐버린 김성근보다는 덜하다는 평을 받는다.
- ↑ 패넌트레이스 4위
- ↑ 최근에도 삼팬들 사이에서 삼성 최악의 흑역사 두번째 감독를 놓고 김성근과 서정환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 물론 알다시피 압도적인 최강은 SUN
멍게(...) - ↑ 실제로 1992년의 롯데는 우승팀이고 박동희는 롯데의 우승에 결정적 공헌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이 시점의 삼성에게는 당연히 알 수도 없고 중요한 것도 아니다.
- ↑ 실제로 관중수 자체가 556 시기가 훨신 더 많다. 김성근 시기는 특별한 외부요인 없이 KBO리그의 관중수가 계속 늘어나던 황금기에 삼성만이 단지 '김성근 꼴보기 싫어서'라는 이유로 89,90년 및 93,94,95,96년과 비교할때 대략 평관 2,000명(거의 1/3)이 날아갔다. 많은 팬들이 구단에 항의하기 위해서 야구장에 가지 않거나 선수단 버스위에 올라가는 등 김성근 경질을 위한 행동을 실천했으며 이 시기 이런 삼빠아재의 예로는 영화감독 장진이 있다.
- ↑ 실제로 역대 관중현황을 보면 리그가 팽창하고 다른 팀들은 현상유지 혹은 관중이 늘어나던 호황기에서 삼성만 유독 김성근 시절만 관중이 확연히 줄었다. 김성근 부임전인 1990년 평관 7222명, 김성근 퇴출 후 1993년 평관 8557명인 팀이 김성근 시절만 5680명, 5011명으로 관중동원에 블랙홀이 생겼다. 성적이 문제가 되는것도 아닌게 역대 최악의 성적을 내던 556시절에도 평관은 8천명, 9천명, 7천명대로 김성근 시절과는 비교 할 수없이 인기였다. 그냥 삼성시절 김성근 자체가 선동열마냥 인기가 엄청나게 없었다.
- ↑ 당시 사장에 바로 전 감독이었던 서정환을, 타격 인스트럭터로 전의 전 감독이었던 백인천이 있었다.
- ↑ 나중에 해태에서 나올때는 김응용 감독의 비결이 뭔지 궁금해서 봤는데 아무리 봐도 이해를 못하겠으니 나왔다고 말했다.
- ↑ 입단 초기에 놀기 좋아했는데 김성근도 못잡은 사생활을 잡은건 이순철이라고 한다. 김성근 말도 안듣고 염색하고 다녔는데 해태 군기반장 이순철에게 잡혀가서 조용히 참교육받고(?) 다음 날 머리를 빨아서 다시 나왔다고..
- ↑ 그래도 1996년 시즌 초중반까지는 나름 고정선발은 있었다. 그 고정 선발이었던 류현승은 초반에 커리어 하이 페이스로 나가다가 10경기만에 부상으로 시즌 아웃, 박성기는 5월 이후 부진, 김원형도 1995시즌에 비교해서 좋은 시즌은 아니었고, 김기덕, 오봉옥은 상황따라 여러 보직을 맏던 전천후. 믿을 만한 선발은 성영재 하나. 그래서 모든 팬들이 기억하는 벌떼 마운드가 생겨난 것.
- ↑ 17연승 기록 작성의 순간이 진짜 장관이었다. LG전 0-0 상황에서 9회초 신인 안재만에게 데뷔 첫 홈런을 내줘서 0-1로 뒤쳐졌다가 바로 9회말에 김호가 끝내기 2점홈런을 날리는 명승부를 만들어냈다.
바로 다음날 안재만에게 또 홈런맞아서 연승기록이 끊긴 건 비밀 - ↑ 이미 1996년부터 무주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무주리조트나 쌍방울 건설에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었다.
- ↑ 이건 김성근 감독의 뜻이라기 보다는 90년대 초 부터 이어졌던 우타 장종훈-좌타 김기태 라이벌 구도에서 1995시즌 끝나고 장종훈이 연봉 1억으로 먼저 계약하니까 김기태도 자존심 상 거기에 뒤쳐질 수도 없고, 구단 위신에도 관련있다 보니(우리도 팀 프랜차이즈 스타가 있고 타팀 못지않게 대접 잘 해준다는 식의...) 구단-선수간 뜻이 서로 잘 맞아서 장종훈보다 1천 많은 1억 1천에 계약을 했다.
- ↑ 이전까지는 해태의 기반을 약화시킬려고 쌍방울을 창단했다는 말까지 나돌았을 만큼 전주시 내에서의 인기도 별로였다. 그러나 1996년부터는 구단 사상 최초로 평균관중 4천명을 돌파했고, 주말 쌍방울 홈경기는 표를 구하는 게 전쟁인데다 위에 나온 대로 암표까지 등장했다. 김성근 감독이 오고 성적이 오르고나서야 비로소 연고지에서 해태의 인기를 누르는데 성공한 것.
- ↑ 게다가 3년 계약이었다.
- ↑ 저 시기 지명한 신인들은 다 전멸했다.
- ↑ 대신 LG는 안병원과 손지환을 트레이드 대상으로 제시했다.
- ↑ 다만 나이는 발렌타인이 김성근보다 열 살이나 젊다.
- ↑ 요미우리에선 김기태를 영입하여 이승엽 담당으로 두었다가 역시 능력을인정하여 정식코치가 되었다.
- ↑ 스포츠춘추 박동희, 이데일리 정철우, 오마이뉴스 김은식, 스포츠서울 장강훈 등
- ↑ 김성근 감독은 아주 옛날부터 자신의 팀에 대해 엄살이 심한 편이다. SK임기 내내 SK의 전력은 저평가 하였다.
- ↑ 호성적을 거두면서 코칭스태프에 변화를 주는 경우는 거의 없고, 2011 시즌도 이만수를 2군 감독에 부임시켰던 것은 2010, 2011시즌 구단의 1군 호성적에 대한 공을 이만수와 나눠갖지 않기 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 ↑ 일반적인 재계약 방식으로 계약 종료 전 연봉까지 확정한 재계약은 KBO에서는 예외적인 방식으로 넥센히어로즈 시절 김시진감독과 NC다이노스 김경문 감독이 유이하다.
- ↑ 김성근 감독을 비꼬는 주장 자체는 걸러봐야 할 글이지만 글 내 기사 링크의 흐름을 보면 고양원더스 부임은 미사여구의 인터뷰와 달리 후순위였던 것을 알 수 있다.
- ↑ 육성한다고 성적에 신경 안쓰고 맨날 지면 그것도 큰 문제다.
- ↑ 당시 한화 팬덤들 사이 반응도 김성근..설마..? 하다가 김응룡으로 방향이 틀어지자 김성근? 그게 누구임?으로 바뀌었으니..
김응룡이 한화를 말아먹은건 다른 문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