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사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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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 Chasse aux sorcières[1]
영어: Witch-hunt

1 역사적인 의미에서의 마녀사냥

1.1 개요

Suffer not the witch to live
우리 교회는 유태인 차별,과학탄압,이단심문,이민족 탄압 그리고 마녀사냥 같은 인류에게 저지른 죄악에 수치심을 갖고 반성해야 한다. 또한 마녀사냥 희생자들은 악마의 종이 아닌 무고한 피해자 임을 인정합니다.

- 교황 요한 바오르 2세

미리 말해두는데, 중세가 아닌 근세에 벌어진 일이다. 혼란스러운 사회에 불만을 가진 집단과 대중이 어디까지 멍청해지고 광기에 휩싸일수 있는지 보여준 사건 중 하나

16~17세기 종교개혁기에 유럽에서 벌어진 학살로 총 6만명이 사망했다고 추정된다.[2] 이 학살 대상이 되는 마녀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버리고 악마와 계약을 맺어 악마를 섬기고, 그 대가로 부여되는 마력을 사용하며, 공중을 날아다니며 마녀 집회에 참석하여 악마와 교접을 하는 자'로 '그 몸뚱이에는 악마의 손톱자국이 늘 있었다'고 전한다. 주로 희생자들이 화형 당하는 이미지로 널리 알려졌지만 화형만이 아니라 목을 매달거나 물에 빠뜨려 익사시키는 등 온갖 방법이 사용되었다.

서양 역사에서 있었던 통칭 '마녀재판' 은 사실 마녀재판이란 번역이 적절치 않으며 '특별재판' 이 적절하다. 흔히 이단심판, 마녀재판으로 번역하는 라틴어 'inquisitio' 는 교회법으로 어떤 특정한 사항이 발생했을 때 임시로 개설하는 '비상설 특별재판' 이기 때문이다. 즉 'inquisitio' 는 꼭 마녀나 이단만을 다루던 재판이 아니다. 하지만 마녀재판이란 단어가 워낙 한국어 언중에게 깊이 들어왔기 때문에 이 문서에서도 그대로 마녀재판이라는 단어를 쓰도록 한다.

독일의 경우 마녀의 재산을 가지지 못하게 했더니 신고율이 급감했다는 기록이 있다. 즉, 지역사회의 갈등이나 재산 등의 문제를 종교적인 명분을 빌려 처리하기도 했다는 것. 원래 마녀재판은 지역 공동체의 불안케 하는 원인을 색출해서 진정케 하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마녀재판이 너무 심해지면서 도리어 지역 공동체가 극도로 분열, 나중에는 마녀재판 그 자체가 악마의 농간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가 되기도 했다. 미국 세일럼 재판이 그 대표적인 예. 이 정도쯤 되면 이단심판관들에게 마을 사람들이 공공연히 적대감을 보일 정도였다.

1.2 시기별 마녀사냥

흔히 마녀사냥은 중세시대에 가장 많이 벌어졌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실제 가장 극심하게 마녀사냥이 벌어진 시대는 근세로서 대표적으로 30년전쟁 기간 독일에서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애초에 마녀사냥이 벌어진 원인이 가톨릭의 권위가 약해지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그 전까지 금지해왔던 마녀사냥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부터이다. 그리고 한 번 몰아치기 시작한 광풍이 그렇게 쉽게 가라앉을 리 없었다. 결국 근세에 정점을 찍은 뒤 가라앉기 시작했다.

근세에 더욱 기승을 부린 데에는 아이러니컬하게도 합리적 사고가 퍼졌던 것도 한 몫을 한다고 추정된다. 이유가 뜬금없이 들릴 수 있겠지만, 원래 중세적 사고에서 성경은 교회의 해석에 따라 해석해야 맞으며, 숱한 우의적 해석이 있었다. 예를 들어 토마스 아퀴나스창세기의 에덴 동산 이야기가 '과거에 있었던 일'이 아니라 '미래에 있을 일'이라고도 했던 것. 하지만 인문주의와 합리주의가 일어나면서 이러한 유연성 있는 해석이 사라지고, 성경을 믿는다면 쓰여진 대로 믿어야 한다....는 식으로 가면서 교리적으로 경직된 것. 이러한 논의가 좀 더 심화된 뒤에야 비로소 경직성이 해소되었지만, 이미 한 세기가 넘은 뒤였다.

마녀사냥이 북유럽에서만 성행하고 스페인 이탈리아 같은 문명적인(?) 남유럽에서는 거의 없었고 있어도 상대적으로 약했다는 편견이 있는데 그건 아니다. 스페인은 마녀사냥이 성행하기전 가톨릭교회로부터 국가단위로 권한을 위임받아[3]더 극악한 종교재판을 했기 때문에 마녀 사냥이 덜 한 것이지 마녀재판 같은 병크가 없었다는걸로 이해하면 안된다.

중요한 것은 12세기 이전의 마녀재판과 12세기 이후의 마녀재판을 비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유는 12세기에 로마법에 대한 연구가 다시 시작되면서 그 전에 있었던 게르만족 풍습에 의한 살리카 법전의 사용빈도가 적어지고 새로운 로마법에 기초한 법전 체계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12세기 이전에는 게르만족 풍습에 의해서 피해자가 있어야만 고소가 가능했었다. 즉 마녀에게 피해를 받은 사람이 있어야만 마녀를 고소 가능했던 것이다.

그에 비하여 12세기 이후에는 피해자의 신고 없이도 마녀의 고소 색출이 가능했다. 소위 황제 시해 음모 이론에 따른 것인데 '황제를 시해하려는 음모만으로도 반역죄에 해당하며 이는 사형으로 다스린다' 라는 로마법 구절을 인용하여 누군가의 신고 없이도 바로 재판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런데 사실 이 로마법도 고대에는 그딴 식으로 해석 안했다. 그렇게 해석했어도 아무 때나 들먹이지는 않았다.

1484년 도미니코회 수도자 하인리히 크라머, 야코프 슈프렝거가 인노첸시오 8세로부터 마녀재판의 권한에 해당하는 권력을 수여받았고 2년 후 <마녀의 망치>라는 책을 출간하여 마녀사냥에 대한 여러 지침(?)을 전파했는데 이는 1517년 종교개혁 이전까지 20쇄 이상이 인쇄되어 상당히 광범위하게 퍼지게 된다.

1532년 신성로마제국에서는 르네상스와 인문주의 영향으로 카를 5세의 카롤리나 법전이 공포되어 실질적인 위해를 가한 것으로 인정될 때만 기소되며 의심만으로는 처벌하지 못하게 규정했지만 역시나 이 시기 종교적 갈등 때문에 별로 준수되지 못했다. 오히려 이 시기부터 종교갈등이 성행하여 마녀재판이 성행하게 된다.

16세기부터 마녀재판은 기존의 방식과 달리 종교재판과 혼재되는 양상이 드러난다. 스페인에서 종교재판이 거의 마무리 되고(?) 16세기 종교 개혁의 영향으로 가톨릭개신교와의 극심한 종교 갈등으로 인해 아직 세속권력과 교회권력을 쥔 가톨릭 지역에서 비교적 소수파인 개신교(루터파, 칼뱅파, 재세례파)등을 처벌하는 용도로 이용되는데 역시 종교갈등이 가장 극심한 독일 지역 특히 가톨릭 지역인 남독일에서 성행했다.

특히나 가톨릭 예수회가 마녀사냥을 주도했다. 예수회는 아이러니하게도 본고장 스페인에서는 프로테스탄트적(개신교)이고 유대적이라 경멸당했으나, 본고장을 벗어난 프랑슈콩테(프랑스내 스페인령) 폴란드, 남독일에서는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반종교교혁의 수단으로 주 대상은 유대인과 프로테스탄트(루터, 칼뱅, 재세례파)였다.

이 시기엔 이미 중세적인 마녀사냥이 아니라 종교갈등 때문에 변질된 종교재판성 마녀사냥이 주를 이었다. 당시 스페인 지배하의 베네룩스 지역에서도 펠리페 2세"마법은 인류의 골치거리"라는 선언으로 마녀사냥이 강화 되었다. 이시기에는 한두 명의 돈 많은 과부를 조지는 중세적 성격에서 벗어나 수십개 마을에서 수백명의 마녀를 체포하거나, 한 마을의 모든 여성들이 마녀로 선언되는 광기를 드러냈다.

마녀사냥은 가톨릭 지역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개신교 지역에선 칼뱅주의가 자리잡은 스코틀랜드가 다른 지역보다 성행했는데 1590년부터 1680년까지 약 4,400명이 처형된 걸로 추정한다. 비슷한 시기 잉글랜드에서 200년간 교수형으로 처형한 일반범죄자가 1천명에 불과한것에 비하면 꽤나 많은 숫자이다. 이 영향으로 청교도들이 이주한 북아메리카에서도 한때 마녀사냥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같은 개신교 지역의 영국 국교회(성공회) 루터주의가 자리잡은 북독일에서는 상대적으로 마녀사냥이 성행하지 않았다.

마녀사냥은 30년 전쟁이 마무리된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거의 수그러든것으로 추정한다. 루터파와 칼뱅파와 종교적 자유가 보장되면서 종교적 갈등이 수그러든 시점이다.

1.3 마녀사냥의 경제

사실 이것은 마녀사냥이 아니라 마녀사이라고 봐야 옳다. 즉 종교의 이름을 팔아 부정한 재산축척과 정적제거, 당시 사회에 퍼져있던 다양한 재앙들로 인한 피지배층 불만 다른곳으로 돌리기,공포조장을 통한 사회통제강화, 개인적인 원한이나 경쟁자 제거 등을 합법화시킨 사업이었다. 심리학에서는 집단 히스테리의 산물로 보고 있다.

마녀 혐의로 기소된 사람들이 무죄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던 이유는, 마녀라고 자백만 하면 규정에 따라 그 사람의 재산을 몰수할 수 있었기 때문에 죽기 직전까지 고문을 해서라도 자백을 받아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처형된 마녀의 재산은 몰수되어 영주·주교·이단심문관 등이 배분하였기 때문에 ‘마녀사냥’은 수지 맞는 장사였다. 뿐만 아니라 체포되어 처형되기까지의 모든 비용도 수감자와 그 집안의 부담이었다.

마녀 혐의자를 체포하고 마녀재판에 회부한 뒤 재판을 통해 고문을 가해서 자백을 얻어낸 후 화형에 처한다. 그리고 마녀 용의자가 사망하면 최후에는 전재산 몰수형에 처한다.

결국 애꿎은 사람을 마녀로 몰아서 돈 뜯어내려고 살인을 한 것이다. 그래서 마녀사냥이 마녀사인 것이다. 당연히 주 타겟은 부잣집 과부였다. 가족은 없고 가진 것이라고는 엄청나게 많은 돈밖에 없는 나이 많은 여자들이 희생자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다른 경우로는 의사와 성직자가 라이벌관계였던 산파나 혹은 약초지식을 알고 있던 자들을 제거하여 수입을 늘리고자 고발하는 경우도 있었다.

여담이지만 바늘로 찌르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자 가운데는 '찌르면 바늘 끝이 뒤로 밀려나게 하는 장치'를 만들어 사용함으로서[4] 많은 마녀를 억지로 만들어 고액의 수입을 올리는 자도 있었다고 한다.

또 한편으로는 마녀사냥은 사람들의 오락물이었다. 인권 의식이 개판이었던 당시에는 공개고문과 공개처형은 재미있는 구경꺼리였고 고대로마 콜로세움에서 검투사들이 서로 죽이거나맹수의 밥이 되는것을 환호한 로마처럼 사람들은 고문으로 인한 희생자의 고통과 잔인한 처형을 낄낄거리면서 즐기고 환호하는 잔인함을 보여주었다.

1.4 마녀사냥의 또 다른 실체

단순히 종교적 광기로 보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이걸 종교적 광기로만 볼 수 없다고 한다. 이 때 당시가 16세기에서 17세기 소빙기(경신대기근 시절과 유사)였다는 점 그로인한 대기근, 붕괴되어가는 봉건사회 그로 인한 공동체 의식 약화, 교황권과 교회의 권위 약화, 30년 전쟁(1618∼1648), 각종 반란, 악화되는 경제상황,흑사병 가축들의 전염병이 당시 농촌사회에 일어났고 사람들은 연속된 불행에 대한 납득할 만한 이유를 찾아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찾아낸것은 바로 악마였다. 하지만 악마는 실체가 명확하지 않았고 이에 대한 책임을 물릴 수가 없는 존재였다. 그리하여 찾아낸 것이 더 실체가 명확한, 그들과 결탁한 마법사와 마녀였다. 결국 마녀사냥으로 마녀를 죽이고 원인을 차단했으니 우린 안전하다라는 안정감과 사회를 하나로 통합하는 역할을 해주었다. 결국 종교라는 것은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했고 실제로는 최소한의 생활이 불가능해지자 사람들의 이기심은 하늘을 찔렀고 그결과 이 집단이기심이 종교라는 가면을 쓰고 나온것이라는 것이다. [5]

1.5 마녀사냥의 희생자들

'마녀사냥'이라는 단어 때문에 희생자를 대개 여성에 한정하여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사실 마녀 재판에 걸린 남자사탄의 제자라고 부르며 마녀재판에서 희생당해 죽었기 때문에 우리말 번역어인 마녀(魔女)는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물론 여성의 지위가 낮았던 시대이니만큼 여성이 주로 타겟이 되었던 점은 있으나, 스페인 등 남성이 더 많이 희생된 지역도 많았다고 한다. 일단 명목은 마녀사냥이지만 실제 마녀사냥에 희생당한 사람들은 권력의 희생자들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공통적으로 권력싸움에서 밀려난 눈엣가시적 존재나, 종교에서 아무런 득을 입지 못하고 민간 신앙에 기댔을 뿐인 못 먹고 못 살던 하층민들이 주로 희생자가 되었다.

특히 재산이 많은 과부들이 주로 타겟이 되었는데, 당시 여성의 지위도 별 볼일 없었고 남편이 없으니 '악마와 간통했다' 는 식으로 덮어씌우기 편했던 데다 무엇보다도 당시 독일법상 마녀재판으로 몰수된 재산의 일부는 마녀로 누군가를 지목한 사람의 몫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덤으로 '아름다운' 과부는 어떻게 뜻대로 해보려다 거절당해 앙심을 품은 남성들이나 질투한 여성들이 신고하는 사례가 많았다고. 또한 가톨릭 지역에서는 이단자였던 개신교 신자들도 상당수가 희생되었다.

나이가 많은 여성일수록 마녀로 몰려 죽는 경향이 있었고[6][7] 어머니가 마녀인 경우 아이들까지 악마의 자식으로 몰려 함께 처형당하기도 했다.

1.6 마녀 감별 방법

논리성과 신빙성의 근거가 전혀 없는 만행
마녀를 찾아내는 데에는 말레우스 말레피카룸이란 책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도미니코회 소속 사제 2명이 합동으로 쓴 책. 우리말로 <마녀의 망치> 혹은 <마녀의 추>라고 번역한다. 그 이전까지 마녀에 대해 떠돌던 온갖 전설과 민간신앙을 정리하고 집대성한 매뉴얼적인 책이다.[8]

이 책은 비록 가톨릭 수도자들이 썼지만 그 이전까지 전해오던 모든 이미지를 종합한 것이기 때문에 개신교권에서도 참고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자기들이 보기에도 친숙한 이야기들만 나오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영국에서는 그 영향력이 크지 않았다. 영국은 섬나라라 대륙의 전통을 집대성한 말레우스 말레피카룸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마녀 혐의로 기소된 희생자는 우선 몸에서 악마의 흔적을 찾아내기 위하여 전신의 체모(體毛)를 깎이고, 특히 음부(陰部) 등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을 검사받는가 하면, 몸에 바늘을 찔러서 아프지 않고 피가 나지 않으면 그것만으로 마녀라는 단정을 내리기도 하였다.

이 때 손발을 묶어 물 속에 던져 가라앉으면 무죄이고 떠오르면 유죄라는 감별법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일명 물의 길. 돌에 묶어서 빠뜨리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알다시피 사람은 기본적으로 물에 살짝 뜬다. 그러므로 대다수의 경우는 이런 식으로 물고문 당하고 끌려나와서 화형.

또다른 감별법인 일명 불의 길의 경우 달궈놓은 쇠판을 걷게 하여 사망하면 무죄, 살아나면 마녀로 보았다. 이렇게 한 이유는 간단한데 정말로 악마의 종복이라면 자연물도 그 자를 거부할 터인즉 불에 닿아도 타지 않고 물에 빠져도 익사하지 않으리란 것이었다. 문제는 이런 식으로 따지면 자연물도 거부한다면 화형으로 죽지도 않을 것이라는 모순이 생긴다는 것인데, 그걸 상식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애초에 마녀사냥 따위를 했을 리가 없다. 또한 그런 판단이 가능한 이가 있었다고 해도 그걸 입밖으로 꺼냈다간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이런 즉각적인 감별법 외에도, 희생자에게서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각종 고문을 가했는데, 기록으로 남아 있는 고문 묘사를 보면 쏘우 저리가라 할 정도로 사람을 고깃덩이마냥 취급했다는걸 알 수 있다. 신체 위에 몇백 kg에 달하는 무게추를 올려놓거나, 목구멍에 깔때기를 꽂고 계속 물을 퍼붓거나, 사지를 죄거나, 가시투성이 의자에 앉히거나, 등 뒤로 손을 묶은 다음 높은 곳에 매다는 등... 끝끝내 스스로의 결백을 주장하는 사람은, 풀려날 만한 사건이 생기거나, 자백을 할 때까지 몇 달이건 붙잡혀 고문을 당하곤 했는데, 연이은 고문으로 고통스러워하던 사람을 보다 못한 감옥 간수가, 차라리 없는 사실을 날조를 해서라도 빨리 인정하고 고통에서 해방되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고 권유했다는 기록도 있다.

보통 마녀임이 인정되면 즉시 화형당할 것을 알기 때문에 희생자는 극렬하게 자신이 마녀임을 부정하는데, 생살이 갈리는 고문을 받고 나면 결국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없는 말을 지어내 거짓 자백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한 가톨릭 신부가 이걸 우연히 보고나서 충격으로 시름시름 앓았다고 카더라. 결국 일단 한 번 마녀 혐의로 기소된 사람의 최후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고, 다만 얼마나 빠르게 마녀임을 인정하느냐에 따라서 얼마나 고통을 당하고 죽을 것인지가 정해지는 셈이었다.

때때로 마녀사냥에서 기적적으로 풀려나는 경우도 있었는데, 자진해서 재산을 헌납하거나, 권력층에 연줄이 있는 경우거나, 지역에 따라서는 '가임기 여성'인 경우에 방면되는 경우도 있었다. 대개 마녀 행위의 주도자를 많이 밀고한 사람이 방면되기도 했는데, 이 경우는 '마녀들의 집회에 참석한 다른 마녀를 대라.'라는 질문에 살기 위해 자기가 아는 사람 이름을 줄줄이 읊는 것이다.

실제로 한 할머니가 길을 잃고 인근 숲을 헤메다가 마녀로 찍혀 고문을 받던 중 '또 다른 마녀'로 한 남자를 지목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 남자는 할머니가 길을 잃고 헤메다가 우연히 지나친 무고한 시골 총각이었다.[9] 영문도 모르고 마녀로 지목당해 끌려가는 총각이 황당해하자 할머니 왈,

"나도 자네가 마녀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네. 자네가 나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인 것도 알고 있지. 나를 용서하게. 그러나 만약 또 그 고문을 받게 된다면 난 또다시 자네의 이름을 댈 수 밖에 없을 걸세."

이 사례만 들어봐도 마녀사냥의 희생자가 어떻게 나왔는지 안 봐도 뻔하다.

1.7 지역별 마녀사냥

마녀사냥은 사실 유럽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기록을 보면 상당수의 고대 사회에서 소위 '마법사'들이 탄압받으며 죽는 이야기가 나오고 이와 같은 악습은 아프리카인도 공화국, 파푸아뉴기니의 오지에서는 아직까지 일어나고 있다. 당장 구글신에서 검색만 좀 돌려봐도 마을 주민들에게 몇몇 사람들이 마법사라고 구타받는 비디오가 나돌 정도이니...

마녀사냥이 이처럼 시대를 초월하는 글로벌한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인류학자들은 마녀사냥이 단순히 유럽에서만 일어난 종교적,역사적인 이벤트이기보다는 인간의 집단 폭력성을 배출하는 방식 중 하나라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10]

유럽사에서의 마녀재판은 지역마다 워낙 양상이 다양해서 연구자들이 머리칼을 쥐어뜯는 주제 중 하나다.

독일은 마녀사냥이 가장 심한 곳이었는데 그마저도 지역마다 서로 대단히 달랐다. 해당 지역을 통치하는 권력자의 성향에 따라 강하게 영향을 받은 듯하다. 가끔 어떤 재판은 10년이 넘게 계속 됐으며, 혐의자가 석방되어 집행유예를 받았다가 다시 체포되어 심문받고, 다시 훈방 조치되고를 반복하기도 했다.

이러한 마녀사냥은 도시처럼 번화한 곳보다 시골에서 더 잔인하게 시행된 경우가 많았다. 도시에서는 고문을 하더라도 법대로 하라고 따질 사람이 많지만 시골에서는 법에서 정한 제한 따위 다 무시하는 경향이 많아서 그렇다. 또한 마녀라고 해서 여자만 잡은 게 아니었다. 기회만 되면 마녀라고 몰아갈 수 있을 만한 독거 노인을 몰아서 잡았는데 그 중에는 남자도 상당했다고 한다. 물론 전체적인 비중으로 따지면 여성 희생자가 더 많지만 모스크바의 경우 희생자의 70% 이상이 남성이였다.

독일에서는 17세기 중엽의 10년 동안에 2살 난 어린이를 포함하여 1,000여 명이 처형된 데 비해, 영국의 경우 알려진 것과 달리 마녀사냥은 적은 편이였으며 처형당한 숫자는 지나치게 과장된 것일 뿐 실제로는 마녀로 고발되어도 무죄로 풀려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독일과는 반대로 마녀를 처형시키는 것이 죽인 마녀에게서 압수한 것보다 돈이 더 드는 데다가 마녀사냥이 미신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또 독일 등 다른 나라와는 달리 영국은 마녀를 사형시킬 때 화형이 아닌 교수형에 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였다.[11]

여담이지만 영국 뇌르틀링겐에서는 약 56번에 걸친 혹독한 고문에도 끝까지 마녀가 아니라고 뜻을 굽히지 않아서 결국엔 풀려났다는 강철의 여인이 있었다고 한다.

개신교 국가에서도 마녀사냥은 많이 이뤄졌다고 한다. 마녀가 종교적·사회적으로 위험시되지 않게 된 18세기에 와서는 박해가 격감하여 병리학적으로 다루어지게 되었지만 개신교 신자들이 이주한 미국에서는 꽤 근대까지 자행되었다. 이런 역사가 있는 탓인지 기독교권에선 여성을 보고 마녀라고 하면 심한 욕인 듯.

대표적인 사례가 세일럼 재판으로 이때 이 재판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유명한 작가 너새니얼 호손[12]의 조상이었는데 그 사실을 알게 된 호손은 자기 성을 'Hathorne' 에서 'Hawthorn' 으로 바꿔버렸다고 한다. 세일럼 재판은 당시에도 말이 많았는데 완전 무죄는 거의 2000년대에 되어서야 이루어졌다. 아서 밀러가 이 사건을 걸작 희곡 크루서블로 남겼고 영화화도 되었다. 아서 밀러는 매카시즘의 희생양이었기 때문에 무엇을 풍자했는지는 상상 가능한 일이다.

지역재판 건수처형 건수
영국 본토와 북미 식민지~5,000~1,500–2,000
신성 로마 제국 (독일, 네덜란드, 스위스, 로렌, 오스트리아, 체코)~50,000~25,000–30,000
프랑스~3,000~1,000
스칸디나비아~5,000~1,700–2,000
동유럽 (폴란드, 리투아니아, 헝가리, 러시아)~7,000~2,000
남유럽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10,000~1,000
합계~80,000~35,000
< 1450년 ~ 1750년 사이에 유럽의 각지에서 벌어진 마녀재판과 처형의 추정 건수 >

이러한 정신나간 마녀사냥은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한 시민의식 성장과 과학기술 발전으로 18c말엽부터 사라졌으며 2003년 요한 바오르2세가 마녀사냥을 교회의 잘못으로 인정하였다.

위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이 마녀사냥의 끔찍한 경험 때문에 현대의 유럽 지역에서는 '작은 사회' 에 대해 의외로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경우는 국가에서 나서서 '마법 사용자' 들을 처벌한다. 그딴 게 있을 리는 없고 유럽의 마녀사냥처럼 정적이나 껄끄러운 인사들 제거를 위해 사용된다는 의견이 대체적으로 지배적.

1.8 그 밖의 이야기

유명한 천문학자 케플러의 모친도 마녀로 몰렸다.[13] 사형까지는 안 가고 어찌저찌 풀려났는데 후유증으로 사망한다. 막상 케플러는 마녀 사냥을 아주 지지하는 사람이었다.[14]

참고로 잔 다르크는 희생자가 아니다. 마녀로 기소되기는 했지만... 정확하게 말해서 잔 다르크는 마녀사냥이라기보다는 이단심문의 희생자로 잉글랜드와 프랑스, 친영국파 가톨릭 교회[15]의 이해관계가 합일되면서 희생된 경우이다. 잉글랜드 측에서는 백년전쟁 말기의 잉글랜드군을 무찌른 잔 다르크를 제거하기를 원했고 프랑스는 국왕보다 인기가 높아지는 잔 다르크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이에 잉글랜드는 부르고뉴파의 도움으로 잔 다르크의 신병을 양도받았고 프랑스 국왕은 잉글랜드로부터 적절한 뒷돈을 받으면서 그것을 묵인했다. 친영파 가톨릭 교회는 이미 짜여진 각본대로 잔 다르크의 이단 혐의를 입증했으며 이를 문서화시킨 뒤에 잉글랜드 국왕에게 넘겨버렸다.

잔 다르크가 서명한 자백서에는 '자신은 자신의 이단 행위를 회개하며 다시는 정통된 신앙에 도전하지 않겠다' 는 내용이 적혀있었으며 동시에 '이와 같은 일이 또 발생시 어떤 벌도 달게 받겠다' 고 하였다. 이때 문맹이었던 잔 다르크는 자신이 어떤 문서에 서명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뒤에 잉글랜드에서 다시 한 번 잔 다르크를 마녀로 기소하면서 어쩔 수 없이 잔 다르크는 화형대로 올라갔다.

1.9 마녀사냥이 등장하는 창작물

게임, 영화, 소설, 만화, 애니메이션 캐릭터 중 마녀사냥으로 희생당하는 사람은 대표적으로 악마성 시리즈리사 부인이 있다. 이 주제의 자세한 사항은 옆의 인물로 들어가 2번째 주석을 참고할 것. 더불어 이 자체를 주제로 삼은 마녀의 속죄라는 에로게가 존재.

진짜 마녀를 찾는 사람은 마녀 항목으로 가자.

  • 크루서블
  • 노틀담의 꼽추
  • 더 헌트
  • 마녀에게 내리는 철퇴 - 마녀로 몰려 참혹하게 죽은 소녀들이 악마와 계약하고 마녀가 되어 고문당하고 처형당하며 쌓인 원한을 마력의 원천 삼아 자신을 죽인 고문 도구, 혹은 처형법을 마법으로 연성해내 싸운다는 설정. 참고로, 마녀사냥의 배후에는 마왕이 있다는 설정(말레우스 말레피카룸의 진짜 저자가 마왕)이다. 여담이지만 새로운 마녀가 나타나 새로운 고문 도구를 사용할 때마다 나오는 고문 도구에 대한 설명이 이게 만화 잡지에 실리는 만화인지 료나 상업지인지 분간이 안되는 수준이다.그리고 작가의 료나에 대한 열정은 다음 작품에서도 빛난다. 마녀들은 계약하면서 정신력도 강화된 모양인지 자신이 받았던 고문을 별 부담감 없이 입에 올리지만 사지가 다 부러진 채 바퀴에 묶여 길바닥에 죽을 때까지 구경거리 겸 노리개로 내버려지는 처형을 당한 마녀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행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걸로 보아 단체로 PTSD를 앓고 있는 듯 하다. 다만 워낙 마이너한 소재에 스토리도 무리수가 좀 심해서 연재 중단 크리를 맞아 이젠 마왕이든 PTSD든 아무래도 좋게 되어버렸다.
  • 마녀의 속죄 - 에로게인지라 화형이나 고문은 검열삭제(작 중에서는 속죄의 의식으로 표현)로 대체된다.
  • 백조 왕자
  • 베르세르크 단죄편
  • 장미의 이름(영화판)
  • 음마요녀 - 4번째 에피소드
  • 네이버 웹소설 - 마녀, 소녀: 위의 마녀사냥도 나오기는 하지만 아래의 마녀사냥이 주로 다뤄진다.
  • 위쳐 시리즈 - 이쪽은 마법사나 마녀가 원래 가진 능력을 활용해 사회 상류층으로 살았고, 일반인이라도 원한을 품었거나 특정한 주술적 의식을 행한다거나 하면 상대방에게 저주를 걸거나 죽었어도 유령으로 되살아나거나 하는 게 가능하다. 중세 유럽의 미신이나 주술, 설화가 정말로 사실인 세상이 배경이기 때문. 그러나 인류 사이에서 이터널 파이어 교단이 득세하면서 마법사와 마녀, 엘프나 드워프 등의 이종족, 주술 사용자 및 신봉자, 약초사, 연금술사들을 마구잡이로 화형시키고 있다. 이쪽 세계 마녀는 곱게 죽어주지 않기 때문에 칼과 마법 무효화 수갑으로 무장한 전문 마녀사냥꾼도 존재한다.
  • 애스커 - 캐릭터 중 템페스트가 튜토리얼에서 마녀사냥으로 불태워지려다 간신히 살아남아 도망친다.
  • 레이튼 교수 VS 역전재판
  • 신세계에서 - 배경설정으로만 언급되는 수준. 초능력자들이 세계 곳곳에서 발현되면서 초능력자들의 범죄와 일탈이 문제가 되자 미국을 위시한 일반인 세력들이 마녀사냥과 비슷한 초능력자 사냥을 벌이고 이에 초능력자들이 반격하여 세계는 멸망하고 만다. 후반부에 초능력자를 단번에 죽여버리는 세균 병기인 '사이코 버스터'가 나오는데 거기에 동봉된 설명서를 보면 초능력자를 악마라고 부르며 과거의 마녀사냥도 초능력자들의 존재를 어렴풋히 눈치챈 선조들의 지혜라는 언급이 등장한다. 당시 초능력자들에게 일반인이 느낀 공포가 얼마나 컸는지 가늠할 수 있는 부분. 사실 이렇게 취급받아도 할 말없는 짓을 초능력자들이 저지르긴 했다. 초능력자들이 처음 등장하고 나서 한 일이 선행이 아니라 강간살인 같은 범죄였는데다가 몇 명이서 대도시 내의 수천만명을 깡그리 몰살시켰고 전쟁 후 초능력자들 세상이 된 후에도 온갖 나쁜 짓은 다 했다.
  • 변옥의 슈베스터 -
  • 뱀파이어 더 마스커레이드 - 중세시대 일반인들이 벌인 마녀사냥에서 운나쁘게 마녀사냥에 걸린 일부 뱀파이어들이 죽음을 당하자 이에 깜짝 놀란 뱀파이어들은 지금까지 인간 사이에서 노골적으로 정체를 드러내며 활동하던 노선을 바꾸어 인간 사회에 숨어들어가 이른바 마스커레이드를 시작하게 된다. 사실 더 큰 진짜 이유는 트레디션과의 전쟁에서 승기를 거머쥔 오더 오브 리즌이 그동안 가만히 두었던 초자연체들을 대대적으로 사냥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미 평범한 인간들이 일으킨 마녀사냥에도 부담을 느끼고 있던 뱀파이어들은 수천 명의 계몽된 자들의 지휘를 받고 각종 과학병기로 무장한 수만 명에 이르는 오더 오브 리즌의 군대를 도저히 당해낼 재간이 없었고 그로 인해 인간들 사이로 숨어들어가는 일이 가속화된다.

추가바람

2 인터넷에서의 마녀사냥

Witch hunt

인터넷 등에서 불특정 다수가 죄가 없거나 윤리적인 잘못을 저지른 한 사람 혹은 소수를 거세게 몰아붙이는 것을 말한다. 마녀재판이라고도 한다. 개인정보 유포죄와는 엄연히 다른 개념으로, 개인정보 유포죄가 상대방의 사생활 등의 개인정보를 외부로 유포하는 행위에만 국한된다면, 마녀사냥은 허위사실을 퍼트려 소수의 상대방을 궁지로 몰아넣는 행위로, (허위) 개인정보 유포 외에도 명예훼손이나 모욕죄에 걸리는 행위도 마녀사냥의 범주에 들어간다. 유의어로 인민재판이 있다.

한때 신상털이로 유명했던 코갤과, 수평폭력의 대명사 일베저장소는 마녀사냥의 온상으로 꼽힌다. 특히 코갤 등 신상털이를 자주 하는 곳은 실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라고 얼굴이나 전화번호 등의 신상까지 까고 보니 전혀 다른 무고한 사람이었던 사례도 꽤 있다.[16] 소위 말하는 '~~녀'들의 신상 중 이런 사례가 많았다. 웬만한 루머도 여기서 생산되거나 커지고 아니라는게 완전히 밝혀져도 계속 깔 정도니 말 다했다. 해당 문서 참조. 이외에도 여성시대메갈리안 등이 이러한 사례에 해당한다.

특정사이트뿐만 아니라 페이스북같은 SNS에서는 하루가 머다하고 마녀사냥이 일어나고 있기도 하다. 아니, 사실상 지금 일어나는 마녀사냥의 대부분은 이런 SNS가 주도하고 있다고 봐도 된다.

굳이 신상털이가 아니더라도 다수의 사람들이 상대가 잘못을 저질러 각종 비판을 받고 있는데도 그게 선을 넘어서 상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듯한 공격적인 언행을 저지를 때도 있는데, 이러한 행위는 엄연한 비난이자 일종의 폭력이다. 그러나 주의할 점은 이 표현이 사람의 관점에 따라서 천차만별로 평가될 수 있기 때문에 합리적인 근거에 기반한 비판도 싸잡아서 '마녀사냥하지 말라'고 변호를 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17] 판단은 각자의 몫이나, 너무 앞뒤 가리지 않고 맹렬하게 비난하거나 인신공격, 신상털이 등의 행동을 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

상대가 명백히 죄를 치렀거나 상대가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경우 이를 근거로 비판을 하는 것은 합당하나, 그게 도가 지나쳐 욕설을 퍼붓거나 나쁜 놈으로 매도하는 등 상대에게 정신적 상처를 주는 행위는 실제 마녀사냥을 하는 사람과 다를 바 없는 공격적인 언행이므로,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며 비판하고자 하는 점만 정중하게 비판을 하는 것이 마녀사냥이라는 지적을 피하는 길이다.

냉전 이후 현대사회의 체계와 법적 이론, 윤리관들은 시민 저항권외에 사적 권력의 행사를 엄중하게 경계하고 있다. 긴급피난이나 정당행위의 성립요건이 까다로운 것이 그 일례이다. 개개인의 윤리적 잣대에 의해 집단적 광기에 편승해 공격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삼가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이러한 취지에서 볼 때 '죄가 없으면 모르겠는데, 죄가 있는 사람을 비난하는 것이 무슨 마녀사냥인가', '정부나 사회지도층을 비난하는 것도 마녀사냥아닌가'라는 식의 주장은 가장 위험한 생각일 수 있다. 애초에 죄가 있는 자들을 국가가 시민들의 사적 처벌을 막고, 공적으로 처벌하기 위해 만든것이 현대 형법이고, 윤리적인 잘못에 대해서 처벌할 수 없도록 법으로 규정해 놓은 것이 죄형법정주의이다. 또한, 정부나 지배층의 공적인 인물들에 대한 저항은 저항권으로 보장되어 있는 현대시민의 권리이다. 이를 혼동하는 것은 자제해야할 것이다.

하지만 사회의 통념에 반하고 인권, 자유 같이 현재의 보편적인 권리와 상식에 반하고 남에게 피해를 입히는 일을 해서 마땅한 비난과 처벌을 받는 자를 옹호하기 위해서 마녀사냥을 당한다는 의미로 소위 물타기를 시전하는 사례도 늘고 있으며 이에 반박하는 의미로 억울한 사람이면 모르지만 진짜 마녀를 사냥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인가? 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2.1 마녀사냥이 묘사된 창작물

2.2 실제 마녀사냥 사례

  1. 마법을 부리는 자 sorcièr(소시에)의 여성화 + 수렵 Chasse aux
  2. 계몽주의로 인해 반기독교 감정이 만연했던 19세기 초에는 무려 8백만 명이 마녀사냥으로 목숨을 잃었다는 주장이 진실처럼 받아들여졌고 아직도 이와 같은 수치를 검증 없이 사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물론 당시 유럽의 인구를 생각해볼 때 말도 안되는 이야기이다.
  3. 레콩키스타로 이베리아를 기독교 왕국이 탈환하자 식스토 4세 교황청 내부 반발에도 불구하고 세속왕국에 종교재판 권한을 주는 전무후무한 특권을 내린다.. 이 병폐가 너무 심해서 최악의 교황으로 불리는 알렉산데르 6세가 폐지할 정도 스페인 종교재판의 피해자는 최소치가 마녀사냥의 피해자를 10배이상 뛰어넘는다. 최소 30만에서 최대 200만 까지 본다. 스페인 에서는 스페인 유대인 80여만중 40여만 정도가 죽거나 강제개종, 추방당한 걸로 추정함.
  4. 아래에서 쓰여있지만 마녀감별법 중 바늘로 찔러보는 방법이 있었다. 아파하지 않거나 피를 흘리지 않으면 마녀로 간주했다고.
  5. 현대에 들어서도 이러한 사건들은 존재했다. 대표적인 예가 반공주의 매카시즘이다. 당시 냉전사태에 사회주의를 몰아낸다는 목적으로 사람들을 선동하였다.
  6. 젊은 가임기 여성은 인구 수, 즉 세수를 늘리기 위해 필요했으므로 무죄방면한 사례가 있음
  7. 소위 마녀라 하면 떠올리는 '심술궂게 생긴 노파'의 이미지를 여기서 찾는 경우도 많다.
  8.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책이기 때문에 라틴어-영어 대역판이 미국에서 출판되기도 했다.
  9. 심지어 이 시골총각은 처음에 길 잃은 할머니를 도와주려 했었다고 한다.
  10. 실제로 '인터넷 악습' 항목에서도 볼 수 있듯이 단순히 누군가를 불로 태우지 않는다고 해서 마녀사냥이 아닌 것은 아니다. 중국홍위병 사태만 생각해봐도 자신이 위협을 느끼는 대상에게 사람들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쉽게 이해가 가능하다. 단지 전근대 사회에서는 이와 같은 집단 광기가 종교적인 이유로 배출되었던 것이고 현대 사회에서는 이념적인 이유로 배출되는 것이라는 차이만이 있을 뿐...
  11. 다만 교수형에 처한 뒤 시체를 불로 태웠다. 그리고 독일이나 다른 나라는 마녀를 화형으로 사형시켰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마녀는 무조건 화형이라는 인식이 박힌 것일지도...
  12. 유명한 <큰바위 얼굴>, <주홍글씨>의 저자이다.
  13. 케플러가 자기 엄마는 외계인과 결혼한 마녀라는 내용의 소설을 썼는데 그걸 진짜로 믿은 사람이 있었다.
  14. 하지만 케플러는 자신의 모친이 마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해냈고 그 덕분에 그 지역에서 마녀사냥이 주춤해지는 효과가 있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모친은 후유증으로 그만...
  15. 이전 문서에서는 교황청이 작당했다고 되어 있었는데, 사실과 다르다. 잔 다르크의 재판이 있었을 당시 로마 교황 마르티노 5세가 선종하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을 때고, 오히려 잔 다르크는 교황청이 분열 되었을 당시 로마 교황을 정통으로 여기고 있었고 로마 교황청에다가 자신이 받은 재판이 부당하다며 항소까지 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윈체스터 추기경과 친영파 프랑스인 보베 주교 피에르 코숑이 정치적으로 제멋대로 재판을 진행할 수 있었다. 물론 잔 다르크의 항소 시도 자체가 막혔고, 로마 교황청에 전달이 되었다고 한들 잔 다르크의 운명이 크게 바뀌었으리라 장담하기는 힘들었지만. 나중에 그녀의 명예회복 재판은 교황청에서 정식으로 열었다.
  16. 물론 잘못한 사람이라고 해서 무작정 신상부터 까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17. 가령 비판을 받는 인물이 범죄영 좋지 않은 행실로 주위 사람들로부터 민폐를 끼칠 때 등.
  18. 5월 12일, 현재까지도 반성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법적 대응이 필요하다. 최초 유포자 2명은 약식 기소 되었다.
  19. 이 캣쏘우 범인 헛지목 사건은 동물사랑실천협회도 마녀사냥에 동참한 꼴이 된 사건이다. 일단 신고를 하면 조사를 할 수 밖에 없다. 네티즌 말만 믿고 고발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