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달카날 전역 | ||
제2차 세계대전 중 태평양 전쟁의 일부 | ||
[1] | ||
날짜 | ||
1942년 8월 7일 ~ 1943년 2월 9일 | ||
작전명 | ||
Operation Watchtower (망루 작전) | ||
장소 | ||
솔로몬 제도, 과달카날 섬 | ||
교전국 | 연합군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영국 | 일본 제국 |
지휘관 | 알렉산더 밴더그리프트 로버트 곰리 윌리엄 홀시 프랭크 플레처 리치몬드 터너 | 야마모토 이소로쿠 햐쿠타케 하루키치 나구모 주이치 미카와 군이치 츠지 마사노부 |
결과 | ||
미군의 승리 | ||
영향 | ||
태평양에서 연합군의 반격 시작 | ||
전력 [2] | 보병 60,000명 | 보병 36,000명 |
피해규모 | 7,100여명 전사 군함 29척 침몰 항공기 615기 손실 | 19,200여명 전사 군함 38척 침몰 항공기 700여기 손실 |
목차
1 개요
영어 : Guadalcanal Campaign, Battle of Guadalcanal
일본어 : ガダルカナル島とうの戦たたかい
태평양 전선의 스탈린그라드 - 쿠르스크라고 할 수 있는 핵심 전선. 당대 군함들은 이 과달카날에서의 수훈만으로 수훈함인가 아닌가를 결정하기 부족하지 않을 정도이다.
임무는 산처럼 무겁지만, 군인의 죽음은 깃털처럼 가볍다.- 이치키 대좌
"Kill japs, kill japs, KILL MORE JAPS!""쪽바리들을 죽이고, 죽이고, 더 많이 죽이는 겁니다!"
- 윌리엄 홀시가 과달카날 시찰에서 앞으로의 전략을 묻는 기자들에게 한 말.
태평양 전쟁 당시 1942년 8월 7일부터 1943년 2월 9일까지 솔로몬 제도 과달카날과 그 주변 섬, 해역 등지에서 벌어진 미국, 호주, 그리고 현지 원주민 연합군과 일본 사이의 소모전. 최종적으로 일본이 패배하면서 태평양 전선에서 연합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일본 제국 패망의 불씨를 당긴 전투로 평가받는다.
2 배경
비록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이 자랑하던 정예 항공모함 기동부대가 박살나는 참극[3]이 벌어졌지만 엄밀히 따지면 방심하다가 동점을 허용한 상황이나 마찬가지였다.[4] 게다가 비록 연합군에게 칼자루를 하나 넘기긴 했어도 여전히 서태평양에서는 일본군의 강세였다. 이런 상황을 이용하여 일본군은 차근차근 주요 전략적 요충지를 장악하면서 전진할 계획을 세웠다.
한편 미국과 ANZAC(오스트레일리아 + 뉴질랜드) 연합군은 미드웨이 해전을 계기로 숨을 돌릴 기회를 얻었으며, 훗날 일본군을 상대로 펼쳐질 반격작전을 대비하여 재정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1943년에 접어들면 그동안 열심히 쳐갈긴 미국의 쇼미더머니가 저력을 발휘할 시점이라 1942년의 후반부 6개월 동안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지만 않는다면 이길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이 맞물려 미드웨이 해전과 같은 대규모 교전은 없었지만, 주요 섬들이나 요충지를 놓고 양측의 신경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일본군의 소부대가 솔로몬 제도의 과달카날에 상륙하였다. 당시 과달카날에 상륙한 부대는 일본군 해군에서 파견한 비전투원 위주의 부대로 룽가 곶에 비행장을 건설하여 해군 군함들이 안심하고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을 확보하는 것이 우선 과제였다. 그리고 더 넓게는 훗날 연합군의 반격을 견제하기 위한 항공기지로 활용할 목적도 있었다.
문제는 이 보고를 받은 연합군 수뇌부가 뒤집어졌다는 것. 룽가 곶에 비행장이 건설된다면 필시 제로센과 일식육공 등의 사기적인 항속거리를 지닌 기종들이 배치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미국과 ANZAC 사이에 형성된 연결선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다. 만약 이 연결선이 끊어진다면 ANZAC 지역은 고립되고 최악의 경우 일본군의 손에 떨어질 확률이 높았다. 이렇게 되면 미국에게는 서부 해안의 위협이 현실이 될지 모른다는 위기의식도 생겼다. 사실 일본군 일반병들이나 심지어 장교들조차도 과달카날이 어디에 있는 섬인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1942년 6월, 연합군 수뇌부는 일본군이 비행장을 완성할 것으로 추정되는 8월 초순 이전에 과달카날을 탈취하여 훗날 벌어질 반격작전의 초석으로 삼는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에 따라 솔로몬 제도 과달카날과 그 주변에 헬게이트가 열렸다.
3 양측이 지녔던 문제점
그렇다고 어느 쪽이나 상황이 나은 것은 아니었다.
우선 미국의 경우에는 유럽 전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었던 까닭에 새로 조성된 병력이나 물자, 병기의 상당수가 유럽으로 향하고 있었다.[5] 따라서 태평양에서 대대적인 작전을 펼치기에는 어딘가 모자란 것이 많은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갑작스럽게 작전이 결정된 까닭에 제대로 준비된 것이 거의 없었다. 장비도 제1차 세계대전때 쓰던 것들 뿐이고, 게다가 과달카날 상륙을 책임질 해병 제1사단은 6월 중순에 열심히 태평양을 건너오고 있었다. 원래는 상륙훈련을 받고 투입될 예정이었는데 높으신 분들이 그딴 것 다 취소시켜버리고 바로 출발시켰기 때문에 충분한 훈련을 받지 못했다는 문제점도 있었다. 그래서 미군 병사들은 Operation Shoestring. 즉 '신발끈 작전'이라고 부르면서 자조했다. (영어로 shoestring operation은 아주 부족한 지원만으로 가까스로 운영되는 작전이라는 뜻이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과달카날 지역을 담당하는 남서태평양 해역군 사령관이 육군 장성인 더글러스 맥아더였다. 콧대 높기로 유명한 맥아더 입장에서는 해군 놈들이 자신들 영역에서 멋대로 돌아다니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을 것이 뻔했고, 태평양 함대의 제독들도 "큰소리나 뻥뻥치는 밥맛" 정도로 여기던 맥아더의 지휘를 순순히 받아들일 리 없었다.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한 워싱턴의 높으신 분들은 한참동안 수군거린 끝에 과달카날을 태평양 함대 산하의 남태평양해역군의 작전지역으로 밀어넣는 것으로 문제를 덮으려 했다.
더불어 남태평양 해역군 사령관으로 누굴 임명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수면에 떠올랐는데 태평양 함대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제독은 당시 요양을 마치고 일선에 복귀 예정이던 윌리엄 홀시 제독을 추천했다. 하지만 미국 함대최고사령관 어니스트 킹 제독은 평소 눈 여겨보던 곰리 제독을 남태평양 해역군 사령관으로 지명했다. 그리고 이는 킹 제독 최악의 인사로 기록되고 말았다. 인사결정을 내리던 당시에는 곰리 제독은 해군 내에서도 꽤 유능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었으나 실제 전선에서는 참모직을 맡은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격전이 벌어지는 지역의 엄청난 부담감을 짊어지기에는 두부멘탈 한계가 있는 인물이었다.
일본이라고 해서 사정이 낫다고 할 수는 없었다. 당시 2차대전 내내 고질적인 문제점으로 지적받던 따로 노는 육군과 해군 지휘부가 말썽이었는데, 과달카날에 비행장을 건설하는 것은 해군 소관이었기 때문에 육군은 물론이고 최고지휘부인 대본영에도 통보하지 않았다. 그 결과, 과달카날이 미군에게 공격받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대본영의 반응은 엥? 과다루카나루? 그거 어디에 붙어있는 곳이지?였으며, 전략적인 가치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과달카날은 일본 항공력을 동원하여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일식육공 같은 괴물같은 항속거리를 지닌 비행기는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그 외에 전투기나 뇌격기, 급강하 폭격기같이 미국의 보급선단을 저지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전력들은 사실상 왕복이 불가능한 장소였다. 게다가 과달카날에서 전투가 지속될 경우 병력과 물자를 보급해줄 여력이 충분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더욱이, 당시 육군은 중일전쟁을 어떻게든 끝내기 위해서 중국전선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과달카날 쪽으로 돌릴 병력이 부족했다. 사실 과달카날이 공격당했다는 보고를 받은 일본 육군의 반응은 대략 "해군이 비행장을 만들었으니 그건 그쪽 소관이고 우리는 그 섬이 뭔지 알 바 아닌데?" (...) 같은편 아니 같은 국가 소속 군대가 아닌가보다 아예 다른 나라라니까
4 과달카날 전투의 시작
1942년 8월 7일 미군은 기습적으로 과달카날 지역에 모습을 드러냈다. 알렉산더 A. 밴디그리프트(Alexander Archer Vandegrift) 소장이 지휘하는 해병 1사단 1만 9천 명[6]에도 의 병력 중 1만 5천 여명이 과달카날에 상륙하고, 나머지 4천 여명은 각각 분산되어 툴라기, 가부투, 타남보고에 상륙했다.
당시 일본군은 툴라기 섬에 나타난 미 해군 군함을 보고나서야 미군이 공격해왔다는 것을 파악했을 정도로 주변경계상태가 개판이었다. 다만 툴라기에서는 일본군 수비대가 필사적으로 저항한 까닭에 상륙 첫날 일본군 수비대 700명을 사살하는 동안 144명의 사상자를 기록하였다. 그리고 과달카날에서는 상륙하는 미 해병대를 본 일본군 설영대가 모두 정글로 도망치는 바람에 다음날 별다른 저항없이 무난히 진격하여 거의 완성되기 직전의 과달카날 섬 비행장을 점령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날밤 미 해군 역사상 최악의 참패로 기록된 사보섬 해전이 치러졌고,[7] 수송선단을 보호하던 해상경계부대가 모조리 떡실신당했다. 이 때 연합군 중순양함 4척을 비롯하여 큰 피해를 입었으며 그 외에도 양국의 수많은 군함이 가라앉아 그 결과 이 사보 해협은 아이언 바텀 사운드(Iron Bottom Sound)라는 별명을 얻었다. 다행히 미군 항공모함이 먼저 철수했다는 것을 몰랐던 미카와 군이치(三川軍一) 중장이 일찌감치 철수하는 바람에 수송선단은 무사할 수 있었으며, 날이 밝자마자 일단 잡히는대로 보급품들을 집어던지고 하루만에 철수해버렸다. 가뜩이나 출발할 때 시간 부족으로 60일치 물자밖에 가져오지 않았는데 이로 인해 실질적인 보유물자는 더욱 줄어들었으며, 제공권과 제해권마저 잃어버리게 된다.
그 결과 "도조 타임"으로 명명된, 매일 정시마다 놀러와서 폭탄 던지고 가는 폭격기와 빤히 보이는 해안가에 놀러와서 함포 쏘고 가는 일본군 구축함과 순양함에 시달렸다. 하지만 간신히 해안에 내려놓은 1대의 불도저와 일본군에게서 노획한 중장비와 물자를 이용해서 악착같이 비행장 건설작업을 진행한 끝에 8월 20일, "헨더슨 비행장"(Henderson Field)[8][9]을 완성시키면서 이와 같은 시련을 극복할 수 있었다.
비행장을 완성할 때까지의 고초가 얼마나 컸는지 일본군이 남긴 식량으로 끼니를 해결하고,[10] 일본군이 남긴 장비로 비행장을 건설하고, 일본군이 남긴 진지를 강화하는 도중에 일본군이 남긴 사이렌에서 일본기의 공습을 알리는 경보음이 들리면 일본군이 파놓은 대피호로 숨는 완전한 일본식으로 산다는 이야기가 현실이 되었으며, 미군이 적에게 제공권과 제해권을 잃은채 전투를 벌인 것은 과달카날이 최후가 되었다고 할 정도로 고생이 심했다고 한다.
4.1 본격적인 전투 돌입 : 테나루 전투
8월 13일, 과달카날이 털렸다는 보고를 받은 대본영은 원래 미드웨이를 공격할 목적으로 차출되었던 육군 제28연대에게 과달카날 공격명령을 하달하였다. 이에 따라 이치기 기요나오(一木清直)[11] 대좌가 지휘하는 선발대 900명이 8월 18일날 미 해병대의 교두보 동쪽을 30km 떨어진 지점에 상륙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병력이 합류하면 미군을 공격하기로 하였는데, 이는 미 해병대의 규모를 2천 명으로 잘못 파악하고 있던 대본영의 삽질(…)이었다. 그리고 당시 일본군 안에 널리 퍼져있던 미군의 이미지란 '겁쟁이'였기에, 한 일본군은 "에이, 뭐 그까짓꺼 그냥 좀 겁만 주면 항복하겠지 그까짓꺼…"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연합군이 전쟁 발발 직후부터 원주민과 민간인들의 지원을 받아 훈련을 시켜서 솔로몬 군도 여기저기 숨어있던 해안 감시원들이 일본군의 동향을 감시한 정보를 통해 구축함이 바삐 오가고 함포까지 쏘고 가는 것을 보고, 일본군이 상륙했다는 사실을 파악한 미 해병대는 즉시 정찰을 하여 일본군의 존재를 확인하였다.
참고로 이 상황을 좀 더 상세히 설명하자면, 이치키 부대는 상륙 직후 자콥 보우자(Jacob C. Vouza, 1900-1984)라는 해안 감시원을 하나 붙잡아[12] 나무에 묶어놓고 고문을 가해 미군의 위치를 알려고 했지만 입을 열지 않자 총검으로 양 팔과 얼굴, 목, 배를 찌른 뒤 죽도록 내버려두고 떠나버렸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이로 줄을 끊고 정글 속 수 마일(…)을 달려 미군 방어부대에 일본군의 상륙 사실을 알렸다. 그 공로로 미국 은성 훈장, 수훈무공훈장, 영국 훈작사 등 각종 훈장을 받았고 나중에는 영국 기사 작위까지 받았다. 뭐가 찔리는지 이 사건은 과달카날전투를 다룬 일본어 위키피디아 항목에선 전혀 언급되어있지 않다[13]
아무튼, 이 사건으로 자신들이 미군에게 발견된 것을 알게 된 이치기 대좌는, 그대로 선발대 900명과 함께 해병대 교두보로 돌격(!). 하지만 일루강 하구 지역[14]에서 방어선을 굳히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미군은 M2 중기관총과 M3 스튜어트 경전차를 비롯한 중화기를 동원해서 맹렬한 사격을 퍼부었고, 예비대를 투입해 이치기 지대 후방을 포위, 섬멸전을 전개하자 일본군은 결국 916명 중 126명만이 살아남고 모두가 전사, 이치기 대좌는 군기를 불태우고 자살했다...라고 했지만... 사실은 같이 돌격하다가 중화기를 정통으로 맞고 거름이 되었다.[15]연대장이 돌격하다가 고깃조각이 되었다고 하면 쪽팔리잖아 더불어 미군에게 '잽스도 별 것 아니네.'라는 자신감을 심어주는 효과까지 낳았다.
이치기 부대의 공격이 실패하자 일본군은 남은 부대와 신병들을 더하여 6천 명 가량의 부대로 재편하고 과달카날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 해군에서도 나구모 주이치 제독을 사령탑으로 앉히고, 새로 편성한 항공모함 위주의 제3함대를 보내서 이를 저지하기 위해 나오는 미국 항공모함들을 격멸시키고 상륙작전을 지원하도록 했다. 한편, 미국 태평양 함대는 항공모함 3척을 작전에 투입했지만 정작 유조선이 부족해서 공급할 연료는 남아도는데 작전 중인 군함들은 제 때 연료공급을 받지 못하는 상황을 맞고 있었다. 이에 따라 항공모함 USS 와스프가 급유를 위해 떠나는 바람에 실질적으로 작전 중인 항공모함은 2척뿐이었다.
동부 솔로몬 해전에서 미군은 일본군의 정규항공모함 류조를 격침시켰지만,[16] 엔터프라이즈가 폭탄 3발을 맞고 중파당했다. 다행히 시기적절하게 내려준 스콜 덕분에 사경을 헤매고 있던 생존왕엔터프라이즈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지만, 더 이상의 전투가 어려워진 미국 함대는 철수해버렸다. 이로 인해 거의 성공적인 작전이 될 뻔했으나 나구모 주이치 제독이 갑자기 제3항공함대를 철수시키는 바람에 상륙부대는 헨더슨 비행장에서 출격한 비행대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철수해 버렸다. 상륙부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중순양함 아오바 항목 참조.
이 무렵 미국은 항공모함 부족에 시달리게 되었는데 우선 엔터프라이즈가 중파당해서 진주만으로 끌려갔고, 8월 31일에는 새러토가가 일본 잠수함의 어뢰에 맞고 또 진주만으로 끌려갔다. 게다가 이때 과달카날 방면에서 미 함대의 지휘를 담당하던 프랭크 플레처 제독이 중상을 입었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9월 13일에는 해병 7연대의 증원을 호위하기 위해 출장나왔던 와스프마저 일본 잠수함인 순잠 을형 I-19의 어뢰에 얻어맞고 격침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하지만 그 덕분에 각 항공모함에서 날려보낸 함재기들이 헨더슨 비행장을 기지로 사용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난잡해진 지휘계통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창설한 것이 그 유명한 캑터스 항공대(Cactus Air Force)이다.
한편 8월 26일, 가와구치 기요다케 소장이 지휘하는 6,200명 규모의 제35여단에게 공격명령이 내려왔다. 하지만 지난 번 상륙작전때 항공모함 부대가 일찍 철수하면서 심하게 데인 다나카 라이조 제독이 수송함 제공을 거부하면서 8척의 구축함을 이용하여 4,200명이 상륙하고, 남은 부대(약 2천여 명)는 오카 아키노스케 대좌의 지휘하에 31척의 목재 동력선을 타고 상륙하기로 하였다. 문제는 구축함에 비해 목재 동력선은 느린데다가 방어에 너무 취약했고, 무사히 상륙한 본대와는 달리 오카 대좌의 부대는 미군의 지속적인 공습에 1,600명의 병력을 상실한(!) 끝에 과달카날에 상륙할 수 있었다.
상륙한 일본군은 본대가 미 해병대의 주 방어선을 피해 남쪽에서 기습하고 오카 대좌의 연대가 서쪽에서 지원하는 식의 양동작전을 계획했는데, M.A. 에드슨 중령이 지휘하는 제1기습대대를 주력으로 한 미 해병대 정찰부대가 상륙지점을 급습하여 이 사실을 알아내는 것도 모자라서 물자들을 모조리 털어갔다. 그리고 일본군이 쳐들어올 남쪽방향에 방어선을 구축했는데, 이번에도 반자이 어택을 감행한 일본군을 향해서 105mm 견인곡사포를 비롯한 중화기와 캑터스 비행대의 빠방한 지원을 앞세워서 9월 12일부터 14일까지 계속된 일본군의 야간공격을 좌절시켰다. 이 전투에서 남쪽 능선은 일본군의 피로 물들었는데 그 결과 "피의 능선(Blood Ridge)"이란 이명을 얻었다. 미 해병대에서는 당시 작전을 지휘한 지휘관의 이름을 따서 "에드슨 능선"이란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다.
결국 가와구치 소장의 35여단은 70% 이상의 병력을 상실하며 전멸하였고, 설상가상으로 미군에게 물자를 빼앗긴 까닭에 아사상태에 처하였으며 대부분의 병사들이 말라리아에 걸리는 등 최악의 상황으로 몰렸다.
참고로 이 전투에서 가와구치 소장의 부하중 하나였던 와타나베 히사시키치 중좌가 지휘하는 와타나베 대대는 13일에 미군의 포격을 보고 겁먹어(…) 전투를 포기해 버렸고, 끼리끼리 모인다고 와타나베 중좌의 부하 장교들도 몽땅 비슷한 성향을 보여서 대대 전체가 도망치는 일이 발생했다. 그래서 가와구치 소장은 와타나베 중좌에게 할복을 명했다가 울고불고 하는 모습에 명령을 취소했다고 한다.
4.2 절정으로 치닫는 전투
35여단의 전멸을 기점으로 일본군은 미 해병대의 정확한 규모를 파악하게 되었으며, 제17군 사령관 하쿠다케 하루요시 중장에게 제2사단과 제15사단 총 2만 명의 병력과 각종 화포 80문, 97식 중전차 97식 전차 14대를 갖춘 병력의 지휘권을 부여하고 과달카날을 탈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따라 일본군은 35여단의 상륙 당시 큰 효과를 보았던 여러 척의 구축함을 이용한 병력수송을 시작했는데 미군은 이를 두고 "도쿄 익스프레스"라고 불렀다.
한편 미 해군은 해병 1사단 예하 포병연대인 해병 제11연대를 과달카날에 배치, 포병세력을 증강했고 에스페란스곶 해전이 끝난 직후 미 육군 아메리칼(AmeriCal = America + Caledonia) 사단[17]의 제164연대도 과달카날에 배치하여 1만 9천 명의 대병력을 구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보유 화포는 100문이 넘었으며, 태평양 전선에서 중전차로 명성을 날리는 경전차(…) M3 스튜어트도 다수 보유하고 있었다. (오판으로 전차만 돌입시키는 바람에 수가 팍 줄어버렸지만 히든 카드로는 여전히 유효했다) 무엇보다 헨더슨 비행장에 가용가능한 항공전력이 있었으므로 일본군에 비해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이었다. 다만 초반의 공격은 그리 큰 성과를 보지 못해서 해병 1개 소대가 낚시에 걸려서 단 한 명만 살아남고 전멸한 적도 있었다.
다만 일본군도 이런 정보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10월 12일부터 14일까지 지속적인 함포사격으로 헨더슨 비행장을 무력화시키려고 했다. 이에 따라 고토 아리토모 소장이 지휘하는 함대가 헨더슨 비행장 포격을 위해서 남하했는데, 그 곳에서 노먼 스코트 소장이 지휘하는 64기동부대에게 요격당했다(에스페란스곶 해전). 당시 노먼 스코트 소장은 일본 함대보다 화력면에서도 우세였고 먼저 단종진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초탄 발사에 고토 소장을 전사시키는 등 압도적으로 유리한 조건에서 전투를 시작하였으나 아군 구축함 2척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포격을 중지하여 일본군이 무사히 퇴각할 수 있는 원인을 제공하고 말았다. 에스페란스곶 해전에 대한 추가적인 내용은 중순양함 아오바 항목 참조.
12일의 실패와는 달리 13일에는 공고급 순양전함 공고와 하루나가 진입하여 14인치 대구경 함포를 이용하여 헨더슨 비행장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으며, 14일에는 중순양함 초카이와 키누가사가 8인치 함포를 이용하여 확인사살까지 가했다. 그 결과 활주로 여기저기에 구멍이 뚫리고 모든 비행기 및 항공유를 상실하는 등 헨더슨 비행장에 막심한 피해를 입혔다. 하지만 미 해병대는 악착같이 활주로를 보수하고,[18] 멀쩡한 부품들을 골라내서는 즉석에서 비행기를 재조립하고 무사한 연료 탱크에서 항공유를 뽑아내는 등 그야말로 눈물나는 노력끝에 항공력을 어느정도 복구할 수 있었다. 그 결과 헨더슨 비행장이 무력화되었다고 믿고 상륙작전을 진행 중이던 일본 함대의 뒷통수를 제대로 후려칠 수 있었다. 그리고 보급선이 간당간당한 상황에서 항공기보다 먼저 온 연료를 (보험삼아서) 드럼통 같은데 넣어서 숨겨놨다가 상황이 좋아지자 잊어버렸다가 다시 찾아낸 에피소드도 있다. 역시 저축해두길 잘했지...
게다가 10월 17일에는 헨더슨 비행장 포격 소식을 듣고 달려온 항공모함 USS 호넷의 함재기와 구축함 2척이 일본군의 상륙지점을 기습해서 아직 정리되지 않았던 보급품들을 태워버렸다. 이러한 일련의 피해로 인하여 일본군은 화포 50문, 탄약과 물자는 거의다 날려먹었다. 특히 타다남은 식량을 아무리 긁어모아도 2주일치 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절망적이었다.
결국 하쿠다케 중장은 일단 양륙한 1만 2천 명의 병력과 30문의 화포로 헨더슨 비행장을 공격하며, 당초 화포를 앞세워 공격하려던 계획을 변경하여, 부대를 본대와 보조부대로 나눠서 서로 협격하는 작전을 채택하였다. 문제는 남은 화포들을 전장까지 이동시킬 방법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에, 결국 분해하여 병사들이 부품 하나랑 포탄 하나씩 가져가는 방법을 선택했지만 병사들은 가뜩이나 개인군장도 무거운데 화포와 부품까지 지고 가는 것은 무리여서 중도에 부품이나 포탄을 버렸기 때문에 화포전력이 사실상 무력화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대본영이 제17군단에 파견한 참모가 그 유명한 자칭 작전의 신 츠지 마사노부 중좌였다. 무엇보다 야간에 착검돌격으로 반자이 어택을 하면 미군 따위는 발라버릴 수 있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미 한 차례 미군의 화력을 경험해 본 가와구치 소장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게다가 항공정찰 사진을 받아든 가와구치 소장은 이대로 돌격하면 전멸이라고 주장하고 작전에 반대하였지만, 예정지점에 늦게 도착했다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가와구치 소장은 해임(…)당했다.[19] 게다가 가와구치 소장의 후임인 쇼치 대좌는 막 도착해서 과달카날의 지형도 잘 모르는 상황이었다[20]. 그 결과 원래 가와구치 소장이 지휘하던 부대는 전투가 벌어졌을 때 엉뚱한 곳으로 돌격(…)해버렸다. 참고로 군 전투 사령부에서는 가와구치가 파면된 줄도 몰랐단다.(…) 이 무렵 츠지 중좌는 대본영에 '미군은 아직까지 눈치도 못채고 있음'[21], '정글은 예상외로 얇기 때문에 진격에 문제없음'[22], '미군은 테니스장에서 테니스를 치고 있음', '오늘밤은 승리가 확실하기에 내일은 무선으로 만세를 보낼 것임' 따위의 '전선보고'를 보내고 있었다. 게다가 총공격의 명령이랍시고 내려진 것도 천우신조에 따라 일거에 비행장의 적들을 격멸하여 덴노의 성지에 보답하라라는 요상망측한 소리였다. 장교급인 제2사단의 한 중좌는 저 명령을 듣고서 "뭔소리인겨?뭘 어쩌라고?"라고 속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장교급이 저럴 정도면 일반 사병들은 어찌 생각했을지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한편 이 무렵 남태평양 방면 미군에서도 큰 변화가 있었다. 당초 니미츠 제독은 해병대가 더 버틸 수 있도록 지원만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면 과달카날의 사수는 문제가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런데 곰리 제독은 부임 당시에 부여받은 목표인 호주와 미국 서해안의 연결선 방어에만 집착하면서 전황이 변했음에도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여전히 지원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실제로는 후방에서 지속적으로 보급되는 병력과 물자가 있었고 피지 방어 임무가 미 육군에 넘어가서 뉴질랜드 3사단이 자유로운 상태이기에 이들에게 누메아 방어를 맡기면 아메리칼 사단을 과달카날에 바로 투입할수 있는 상황이라 결코 병력이 모자라는 상황이 아니였다. 게다가 니미츠 제독의 시찰에 동행했던 육군항공대 사령관 햅 아놀드 대장이 후방에서 놀고 있는 많은 항공기들을 보고는 "안 그래도 유럽에 보낼 비행기도 모자라 죽겠는데 그쪽에서 이런 식으로 하면 앞으로 재미없을 것"이라 화를 내었고 거기에 남태평양 해역군의 사령부인 누메아의 보급 혼란상까지 더해지면서 니미츠 제독의 심기를 제대로 긁고 말았다.
결국 니미츠 제독은 곰리 제독이 패배주의에 사로잡혔다면서 강한 불쾌감을 드러냈고 진주만으로 돌아오자마자 킹 제독에게 인사교체를 건의했다. 킹 제독도 곰리 제독의 능력부족에 대한 문제를 계속 전해듣고 있었기에 니미츠 제독의 의견을 수용하여 곰리 제독을 해임하고 그 후임을 추천받아 홀시 제독을 새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부임하자마자 바로 과달카날 시찰에 나선 홀시는 앞으로의 전략을 기자들이 묻자 싸움닭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쪽발이 놈들을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는 겁니다!(Kill japs, kill japs, kill more japs)"라고 외쳤고, 과달카날 주둔 미군에게 그야말로 남태평양해역군 사령부가 보유한 거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줬다. 이런 홀시의 부임에 과달카날의 해병대는 말라리아에 걸려서 야전병원에 누워있던 병사들까지 뛰쳐나와서 만세를 부를 정도로 기뻐했다.
한편 일본군의 본대는 본대대로 사정이 생겨서 24일 총공격하기로 결정했지만, 보조부대는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23일 총공격을 감행... 그나마 있던 47mm포 개조 치하 카이는 유럽 전선에서는 "이걸 대체 어따가 써먹냐?"고 불평을 듣던 37mm M3A1 대전차포에게 털렸으며,[23] 해병대는 해병대대로 새로 배치된 M1918 155mm 곡사포로 일본군 전차와 보병들을 박살냈다. (나중에는 일본군 150mm포에 고생했다). 다행히(?) 24일에는 미군이 공격방향을 잘못 가늠하는 바람에 일본군이 남쪽에 설치된 해병대 방어진을 돌파할 뻔했으나 곧 추가된 증원부대와 자발적으로 지원에 나선 육군 병력에 의해서 좌절되었으며, 25일에는 보조부대를 박살낸 포병들이 남쪽으로 포격지원에 나서는 바람에 완전히 털렸다. 이 전투로 일본군은 8,700명이 전사하였으며, 이 전투를 지휘한 2사단마저 모든 전투력을 상실했다(마타니카우 강의 전투). 존 바실론이 싸운 바로 그 전투다.
일본 해군도 이러한 지상공격에 발맞춰 미국 해군의 항공모함들을 수장시키기 위해 제3함대를 파견했는데, 워낙 항공모함이 부족하여 5주만에 전선으로 복귀한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이 이들과 맞붙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미국의 함재기 부대는 경항공모함 즈이호와 쇼카쿠에 타격을 주었지만, 호넷이 대파되어 결국 전투가 끝난 후 일본군이 발사한 어뢰에 처분되었다. 엔터프라이즈 역시 폭탄 두발을 맞았으나 전투력과 항해력은 유지했고,[24] 호넷의 함재기들을 수용한 후에 철수하였다.(산타크루즈 해전).
이 해전은 전술적으로 보면 미국 함대의 피해는 결코 작지 않았다. 이 때의 피해로 미 해군은 엔터프라이즈가 복귀할 때까지 잠시나마 태평양에서 운용 가능한[25] 항공모함이 단 한 척도 없는 상태가 되고 만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군의 피해도 작지 않았다. 미국 함대가 선보인 대공원형진과, 아군의 대공포화에 격추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근접 요격까지 시도하며 방어에 나선 미 함재기들의 공격에 일본기들의 형편없는 내구력이 시너지를 발휘하는 바람에 많은 함재기들이 대량으로 격추당하여[26] 일본군도 큰 피해를 입고 추가 공격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가장 뼈아픈 손실은 바로 숙련된 조종사들의 상실이었다. 이후 일본 해군은 이 전투처럼 세련된 전법을 펼칠 수 없게 되었다.
5 기울어진 전세 - 과달카날 해전[27]
10월 27일 2사단의 패배소식을 접한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은 이대로 전선을 유지하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 하에 대본영에 과달카날을 포기할 것을 건의했지만 대본영은 언제나 그랬듯이 육군 38사단을 추가배치하여 다시 공격한다는, 현실과 동떨어진 지시를 내렸다. 이 지시에 따라 대규모 수송부대와 전함이 중심이 된 핸더슨 비행장 포격부대를 출격시킨다.
이 무렵 과달카날의 미군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전폭적인 지원하에 전력증강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이미 주둔하는 지상군만 2만 5천 명에 캑터스 항공부대는 P-38 라이트닝을 비롯한 188기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11월 12일 일본의 상륙을 대비하여 아베 히로아키 소장이 지휘하는 제11전대가 헨더슨 비행장 포격을 위해 출항하는데, 당시 과달카날 근해에는 미군의 증원부대를 수송하기 위한 선단과 이들을 호위하기 위한 함대가 있었다. 일본군이 비행장 포격을 기도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이 함대가 출동하여 11월 13일 새벽 첫번째 야간 해전(1차 과달카날 해전)이 벌어졌다.
일본의 11전대가 전함 기리시마와 히에이를 보유했던 반면 미 해군 호위함대는 중순양함 위주로 비교적 약체였다. 때문에, 상대적으로 약체인 미 해군이 도망갔을 것으로 생각한 아베 제독은 그만 허를 찔렸다. 미군 역시 전투에서 경험부족을 드러내면서 큰 손해를 보게 되었다. 하지만, 서로가 뒤섞인 가운데 혼전 양상으로 전개되어 캘러헌 제독과 스코트 제독이 전사하는 등 미 함대가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먼저 꼬리를 말고 물러난 건 일본 함대였다. 일본 함대 지휘관이었던 아베 제독은 자신이 승좌한 히에이가 전투 시작과 동시에 난타전의 한복판에 휘말려버리자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전의를 잃고 휘하 함대를 철수 시켜버렸다. 결국 11전대는 전함 1척 구축함 2척을 잃은 채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비행장 공격부대의 작전 실패로 상륙부대는 작전을 일단 취소했지만, 11월 14일 새벽 상륙부대를 호위하던 미카와 중장의 함대가 비행장에 공격을 가했다. 하지만 중순양함의 8인치 함포로는 위력이 부족해서 약간의 피해를 입힐 뿐, 결정적인 타격은 입히지 못했다. 되려, 미 항모 엔터프라이즈와 핸더슨 비행장에서 출격한 미군 항공기들에게 중순양함 키누가사와 6척의 수송함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곤도 제독이 지휘하는 2함대가 1차전에서 살아남은 11전대의 잔존 세력 및 미군의 폭격에서 살아남은 수송함 4척과 구축함 5척과 함께 헨더슨 비행장 포격을 위해 접근하고 있었다. 당시 이들을 저지할 수 있는 미 해군 병력은 USS 엔터프라이즈 중심의 제16임무부대 밖에 없었다.[28] 이에 따라, 미군은 윌리스 A 리 소장에게 엔터프라이즈를 호위 중이던 미국의 신예전함 노스캐롤라이나급 전함 2번함 워싱턴과 사우스다코타급 전함 네임쉽 사우스다코타를 이끌고서 연료를 가장 넉넉하게 실은 4척의 구축함들과 함께 제64임무부대로 재편성하여 출동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날 밤 리 제독이 이끄는 제64임무부대가 일본 함대에 접근했는데 일본 해군 정찰기가 미국의 전함을 못보던 함종의 중순양함으로 착각하는 바람에 곤도 제독이 미 해군의 전력을 얕보게 만들었다. 전투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미군 구축함들은 전멸당했지만 그 대신 위협적인 93식 어뢰를 거의 다 소모시킨 덕분에 전함들은 안심하고 전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사우스타코타가 전기 공급 문제가 일어나서 버벅거렸지만 신예 전함 워싱턴이 신형 레이더와 강력한 주포로 기리시마를 격침시켰고, 잔존 일본 함정들이 반격을 가했지만 전함의 화력에 압도당하여 퇴각하고 말았다.(2차 과달카날 해전)
다음날에는 캑터스 항공부대와 엔터프라이즈 함재기가 합작으로 일본군 수송선단을 전멸시켰고 결국 일본군은 6천 명의 전사자와 함께 화포와 식량, 탄약 등을 포함한 보급품 1만톤 중에서 단 5톤만을 건지게 되었다.
이를 기점으로 일본 해군은 제해권과 제공권을 완전히 상실하였으며, 일본 육군 역시 더 이상의 공세를 취하지 못하고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는 지경이 되어버렸다.
5.1 절망적인 일본군
대부분의 장병들이 굶주리고 있다... 기아가 많은 생명을 뺏었고 우리의 전선을 갉아먹고 있다. 우린 끝났다.- 오다 겐사쿠(小田健作)소장, 1943년 과달카날의 상태를 보고하며
1942년 12월 27일.(전략)
이 무렵, 오스틴 산에는 이상한 '생명판단학'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한계점에 접근하고 있는 육체의 지탱가능일수의 통계결과를 다음과 같이 분류한 것이다.
그런데 비과학적인 이 생명판단학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일어설 수 있는 인간의 수명은 30일.
몸을 일으켜 앉을 수 있는 인간은 3주일.
누운채 일어설 수 없는 인간은 1주일.
누운 채 소변을 보는 인간은 3일.
말을 할 수 없게 된 인간은 2일.
눈을 깜박이지 못하는 인간은 1일.
아아, 인생 50년이라는 말이 있지만, 나는 이제 22세로 끝장이 나려는가?
- 미 해병 1사단과 대치하다 전멸한 일본군 부대의 어느 병사의 일기
과달카날 해전에 맞춰서 미 해병대는 1개 대대를 투입해서 서쪽 공세를 시작했다. 그동안 헨더슨 비행장과 그 주변 방어에만 집중하던 것을 벗어나서 일본군에 대한 공세로 전환한 것이다. 11월 12일 처음 교전한 공격부대는 12월 3일 헨더슨 비행장이 보이는 고지까지 진격해서 과달카날 동쪽의 일본군을 소탕했으며 다른 부대는 마타니카우 강을 건너서 일본군의 주력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군은 2만 명 정도가 고립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야간에 구축함들이 물자 든 드럼통을 약속된 장소에 내려놓고 가는 식(일명 쥐 수송)으로 보급받고 있었다.
쥐 수송을 방해할 작전은 처음에는 킨케이드 소장이 지휘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킨케이드 제독이 북태평양 해역군 사령관으로 부임하면서 부사령관인 라이트 소장이 지휘를 맡게 되었다. 그 영향으로 구축함 위주로 편성된 일본 해군보다 압도적인 전력을 갖추고 있었고, 단종진을 형성하여 먼저 우위를 점하고 있었음에도 라이트 소장의 착오로 대처를 제대로 못하는 동안 일본군 구축함이 근접해서 일제어뢰사격을 가하는 바람에 오히려 일본 해군에게 또다시 발렸다.(타사파롱가 해전)
이 전투에서 중순양함을 투입하고도 호되게 데인 미해군은 일본 수상함대의 전투력을 경계하게 되었고, 과달카날 전역에서 일본군의 쥐 수송을 저지하는 수단으로 어뢰정과 캑터스 비행부대의 항공기, 어뢰정을 투입하게 된다.
여담이지만 구축함을 이용한 일본군의 쥐 수송은 한동안 미 해군에겐 골칫거리이자 트라우마로 남아있었다. 훗날 뉴조지아 전역에서 경순양함을 투입했지만 역시 별 재미를 보지 못했고(쿨라만 해전, 콜룸방가라 해전), 항공기와 어뢰정만으로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 동안 해상전에서 별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구축함이 카운터 파트가 되어야 했으며, 이들 구축함이 일본군 구축함에 대한 대응 카드가 된 것은 레이더의 성능이 개선되고, 알레이버크 제독이 새 전술을 개발하고 나서부터이다.(벨라만 해전)
일본 해군은 12월 3일부터 11일까지 구축함을 이용한 물자보급을 시도했는데, 낮에는 캑터스 항공부대의 항공기들이 날아와서 구축함들을 위협했으며 밤에는 어뢰정들이 불쑥 나타나서 기관총과 어뢰를 난사하는 형태로 보급을 방해하는 바람에 대부분의 물자를 내려놓지 못했다. 심지어 미군 어뢰정의 기습으로 구축함이 격침당하자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은 야마모토 제독은 그만 구축함을 이용한 보급작전 자체를 취소해버렸다.
그 뒤로는 잠수함을 이용한 수송작전(일명 두더지 수송)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잠수함 바깥에 드럼통을 매달아놓고 목적지에 도착하면 바다 위로 떠올라서 내려놓는 식이었지만 이걸 파악한 미군에게 드럼통을 내려놓으려고 부상한 잠수함이 기다리고 있던 어뢰정에게 격침당하는 일이 잦아지자 이것도 중단됐다.
결국 특수한 장치를 이용해서 드럼통을 자동으로 떼어내거나 작약(포탄이나 어뢰, 지뢰 등에 충전되어 그것을 폭발시키는 화약)을 제거한 어뢰에 보급품을 싣고 약속된 장소로 발사하는 식의 보급을 시도했는데 이 경우에는 오발이나 기타 몇 가지 변수로 인해 보급품들이 엉뚱한 곳으로 떠내려 가 버리는 경우가 많았었다. 게다가 얼마 안되는 물자 보급을 위해 비싼 어뢰를 쓰는 것도 문제였다. 고로 이 작전도 중지되었다.
결국 충분한 보급품을 받지 못한 일본군은 기본적인 보급품 부족에 시달리는 상황이 되었고, 동시에 미군의 공격을 대비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정글과 같이 인간이 생존하기 가장 어려운 지형에서 군부대가 이렇게 고립될 경우 어떤 일을 겪게 되는지는, 이 목차의 도입부에 소개된 '생명판단학'을 다시 한 번 참조하자.
5.2 미군의 총공격
11월 29일, 과달카날 전투 초기부터 작전을 수행하던 해병대 1사단은 휴식과 재정비를 위하여 호주로 철수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에 따라 12월 9일, 밴디그리프트 소장과 해병 1사단은 호주로 떠났고 아메리칼 사단의 알렉산더 패치 소장이 지휘권을 이어받았다. 그리고 1943년 1월까지 꾸준한 병력 증강을 받았다.[29]
일본군은 과달카날에서 항공 작전을 수행하는 것의 어려움을 뒤늦게 깨닫고[30] 뉴 조지아섬 문디아에 비행장을 건설하여 미군에 대항하려 하였다. 이를 위해 활주로 한복판에 일부러 나무를 심는 등 철저하게 위장하여 자신들의 의도를 감추려 하였지만, 12월 5일 미군이 이를 파악하고 다음날부터 대대적인 공격을 가하였다. 그래도 악착같이 비행장 건설을 진행하여 12월 말에 완성시키고 34대의 제로기를 배치하였으나 다음날 새벽에 대규모 공습을 받아 26대가 파괴되는 피해를 보고 남은 제로기들을 철수시키면서 비행장 역할을 상실해버렸다. 후일 이 비행장은 반년후 카트휠 작전의 일환으로 뉴 조지아섬에 침공한 미군에게 점령되고 비행장을 보수하고 난뒤 솔로몬 항공 사령부까지 옮겨오면서 솔로몬 제도에서 가장 많은 항공기가 뜨고 내리는 최대의 항공기지가 된다.
한편 미 지상군은 12월 17일부터 제132연대를 동원하고 75mm, 105mm, 155mm 곡사포와 캑터스 항공부대 소속 폭격기 부대의 지원을 받으면서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오스텐 산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작 600명뿐이던 일본군 수비대는 1월 초까지 미군의 공세를 버텨냈다. 1월 14일 고립된 일본군에게 철수명령이 떨어졌지만 대부분 최후까지 저항하다가 죽기로 결정했고 오카 대좌가 이끄는 소수만이 탈출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탈출한 이들은 경계 중이던 미군 병력한테 걸려서 전멸당했고 23일에는 나머지 병력도 전멸당했다.
1월 16일 당시 과달카날에는 아메리칼 사단, 육군 제25사단, 해병 제2사단 총 4만 8천 명의 미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에 충분한 병력을 확보했다고 판단한 패치 소장은 미군에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일부 병력을 일본군 후방에 상륙시켜 퇴로를 차단시키는 한편 압도적인 화력 지원을 등에 업고서 일본군을 거세게 몰아붙였다. 결국 1월 23일, 일본군 사령부가 설치되었던 코컴부나가 미군의 손에 넘어갔다. 이로 인해 일본 제17군은 패치 소장이 지휘하는 미군에 완전히 포위되어 대대적인 해상철수작전이 실행되지 않는다면 모두 포로가 되거나 전멸당할 수 밖에 없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
5.3 일본군의 철수
사실 일본군은 12월 31일 어전회의를 통해 과달카날 철수를 결정한 상태였다. 이에 따라 1월 9일 세부적인 작전계획이 수립되었다. 지상에서 발진한 항공기들에게 1월 28일부터 철수가 완료되는 2월 초까지 제공권을 장악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철수작전을 기만하기 위하여 야노 중좌의 1개 대대를 파견하여 미군이 일본군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하도록 했다.
한편 미 해군은 암호해독을 통해 일본군이 항공기들을 집결시키고, 대규모 수송작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였다. 게다가 새로 교체된 육군 부대가 나타나서 역습을 가했다는 보고를 듣자 니미츠 제독과 홀시 제독을 비롯한 미 해군 지휘부는 일본군의 대공세가 시작될 것이라는 오판을 하였다. 이에 따라 증원군이 급파되었으며, 이들을 호위하고 일본 수송선단을 저지하기 위해 기펜 소장에게 호위항공모함 2척이 포함된 함대를 주어 과달카날로 급파하였다.
하지만 대서양에서 대잠작전만 수행해왔던 기펜 제독은 태평양 전쟁이 항공력 위주의 싸움이란 것을 잘 모르고 있었으며, 중간에 예정보다 늦어질 것 같자 느려터진 호위항공모함을 떼어내고 다른 수상함들만 거느리고 과달카날로 급행하는 실책을 저지르고 말았다. 결국 일본 해군 항공기들에게 신나게 두들겨 맞았으며 최초로 야간공습을 당한 부대라는 별로 달갑지 않은 이름까지 남겼다. 그래도 피해는 두들겨 맞은 것에 비해서는 그리 크지 않아서 중순양함 1척을 잃고 구축함 1척이 대파되는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렌넬 섬 해전) 하지만 굳이 상실할 이유가 없었던 전력인 중순양함을 잃었다는 점에서 니미츠 제독과 홀시 제독의 뚜껑이 제대로 열렸다.[31]
이 전투를 계기로 미군은 일본군이 대공세를 펼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으며, 패치 소장에게는 일본군의 대공세를 대비하여 현 지점을 사수할 수 있도록 방어진지를 구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덕분에 미군은 참호를 파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 사이 일본 제 17군은 약속된 지점에서 구축함에 승선하여 철수할 수 있었다. 한 번에 철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해상철수는 3번 반복되었고, 그 사이 미군이 눈치챌 수 없도록 조명탄을 터뜨려 가면서 헨더슨 비행장을 폭격했다. 그리고 2월 7일 모든 일본군이 철수했다.
한편 분위기를 봐서는 쳐들어올 때가 됐는데 상황이 너무 잠잠하게 전개되자 미군은 당황하였으며, 조심조심 전진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2월 9일 과달카날의 서쪽 끝에 도달한 미군은 일본군이 버리고 간 쓰레기를 보고서야 일본군이 그 동안 왜 그 난리를 쳤는지 깨닫게 되었다.
모든 보고를 받은 패치 소장은 2월 9일 오후 4시 25분, 홀시 제독에게 "과달카날에서 조직적인 저항이 끝났다"라는 보고를 올렸고 그것을 기준으로 과달카날 전투가 끝났다.
또 같은 시기에 뉴기니의 부나-고나에서도 연합군이 승리를 거두면서 동시에 이뤄진 2개의 전역에서 연합군이 승리를 거두었다.
전과 보고를 받은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는 미군이 지상에서 일본을 맞아서 올린 최초의 승전"이라고 치하했다.
한편 대본영에서는 다음과 같은 대국민 사기전과발표를 행했다.
과달카날에서 아군은 압도적으로 우세한 적 세력을 맞아 심대한 손실을 입혔으며, 작전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 군은 과달카날을 발판으로 삼아 한층뒤로전진하는 것이다.
6 그 외의 이야기
- 과달카날 전투에서 나가토급 전함이나 야마토급 전함이 동원되지 않은 것에 대해 의아해하는 말이 많은데, 이유는 별 것 없고 이들의 속도가 느려서다. 실제 과달카날에서 일어난 해전의 주역들은 30노트로 속도를 유지 할 수 있었던 수뢰전대와 제6전대[32], 공고급 순양전함, 그리고 항공모함들이었다. 이들의 느린 속도로는 수뢰전대는커녕 항공모함과도 발을 맞추어 움직일 수 없었고 실제로 한번 투입되었던 무츠는 속도가 맞지 않아 낙오되어 구축함 3척이 호위를 위해 도로 돌아갔다 오는 삽질을 해야했다. 투입되어 봤자 활약은커녕 핸더슨 비행장이나 엔터프라이즈에게 얻어맞고 일본 해군의 사기나 뚝 떨어트렸을 것이다.
어서와! 해병대항공대는 처음이지?
- 히요급도 저속이었지만 이들은 함포가 아니라 항공기를 쓰는 항공모함이었기에 느린 속도로도 전역에서 이탈하거나 사정거리까지 닿는데 애로사항이 훨씬 적었고 거의 정규 항공모함에 준하는 성능을 가지고 있던 개조 항공모함이었기에 투입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이 판단은 옳아서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호넷을 격침시키고 엔터프라이즈를 회항시키는데 한몫 한 항공모함이 바로 이 히요급의 2번인 준요.
- 다만 11월 12일에 있었던 과달카날 해전 당시엔 엔터프라이즈는 그 전날에 누메아를 출항한지라 도저히 시간내로 달려올수 없었기에 이때 나가토급과 야마토급을 투입하지 않은것은 실수이다.
- 이탈리아 해군의 경우에는 아프리카로 향하는 2만톤의 수송선단을 호위하기 위해 전함 4척을 포함한 10만톤에 달하는 전투함대를 출격시켜 무사히 보급을 마친 사례가 있다. 거기에 신형전함인 리토리오까지 이탈리아군은 과감히 출격시켰다.
- 이런 사례를 생각해보면 나가토급과 야마토급까지 과감히 출격시켰으면 캘러헌 제독의 함대는 산산조각이 났을것이고 핸더슨 비행장 또한 10월의 포격은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엄청난 타격을 입었을것이기 때문이다.거기에 일본군 38사단 또한 무사히 상륙하여 전투가 장기화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차하면 워싱턴에 당하는 함이 저 둘이 됬을수도 있다....다른건 몰라도 그때 거리가 너무 근거리고 급습당한거라 그자리에 어떤함이 있어도....
- 마타니카우강 전투에서 일본군 1개 대대가 지리를 몰라 헨더슨 비행장 남쪽에 새로 만든 예비 활주로에 도착하고 그곳을 헨더슨 비행장이라 착각하여 "헨더슨 비행장 진입" 보고를 올렸다. 하지만 사령부는 이를 점령이라고 잘못 생각하여 공격 성공을 의미하는 "만세" 암호를 대본영에 타전하였다. 그 결과 일본의 히로히토 덴노가 육군을 치하하는 조서까지 내렸다. 심지어 라바울의 일본군 기지에서 방송보도반원들을 보내 기념촬영을 하려고 했다! 물론 그들이 탄 비행기는 착륙 코스에 진입하자 일본군이 너무 어이없는 일을 저지르는 것에 놀란 미군이 가만히 있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갑자기 집중사격을 하는 바람에 빠져나가지도 못하고 개발살.[33] 나중에 오보라는 사실을 알고 크게 실망했다.
파일:Attachment/과달카날 전투/g259446a.jpg
번역하면 '홀시 제독 가라사대 "쪽발이들을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는 것이다!" 제군들이 자신들의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면 그 노랭이 개자식들을 죽이는데 일조하는 셈이다.' 라고 쓰여져 있다. 쩌는구려..
- 홀시 제독은 11월 7일~9일까지 과달카날 시찰에 나서서 "Kill japs, kill japs, KILL MORE JAPS!(쪽발이들을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는 겁니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 미 해군은 과달카날 전투를 시점으로 VT 신관을 일선에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다만 생산량이 딸렸던 초기에는 전선에 투입되는 양이 적어 그리 많은 전과를 올리지는 못했던 모양. 그리고 VT 신관이 본격적으로 그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은 전쟁 말기에 들어 일본군이 카미카제 특공대를 운용하기 시작한 이후부터가 되었다.
- 과달카날 철수당시 일본 육군과 일본 해군이 누군가의 책임이냐를 놓고 논쟁을 벌이다가 그냥 전선정리를 위하여 병력을 뺀다는 식으로 합의를 봤다. 그리고 과달카날의 일본군 수뇌부에게는 철수사실을 전달하였지만, 현장에 있던 병사들에게는 사기가 떨어지지 않도록 새로운 공격을 위해 재배치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실제로 일부 부대는 재배치되었는데 다름 아닌 무타구치 렌야가 기다리고 있는 인도 방면 전선.(…) 지못미.[34]
- 과달카날 해상철수는 알류샨 열도에 고립된 일본군의 철수 작전(키스카 섬 탈출 작전)과 함께 너무 성공적인 작전이어서 태평양 전쟁 양대 미스테리로 불리고 있다. 무엇보다 그동안 보여준 일본 해군의 수준을 봐서는 절대 성공시키지 못할 것 같은 작전이 대성공을 거두었으니(…)
- 아직 미국이 제대로 된 생산력을 보여주지 않은 상황에서도 일본군은 미국과의 소모전을 감당해내지 못했다. 그리고 1943년 미국이 쳐갈긴 분노의 쇼미더머니가 Operation CWAL급 포스를 선보이기 시작하자 그대로 미군의 물량에 짜부라졌다.
- 이 전투에서 육군 보병으로 싸우다 부상을 입은 제임스 존스(James Jones)는 이후 이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 <씬 레드 라인>을 집필했고, 이는 두 차례 영화화되었다.
- 왜인지는 모르지만 과달카날 섬의 일본군은 제빙기를 가지고 있었다. 미 해병대는 이것이 설치된 건물을 '도조 제빙 회사'라고 불렀고, 거기에 '새 경영진이 운영함'(...)라는 글을 덧붙인 간판을 올렸다.(TOJO ICE CO. UNDER NEW MANAGEMENT)
- 엔터프라이즈가 결국 과달카날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공헌하기는 했지만 제대로 수리가 완료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리하게 투입된 것이라, 전투 종결 후 수리 겸 대대적인 개장을 위해 본토로 돌아가게 된다. 다행히 피뢰된 사라토가의 수리가 완료되어 엔터프라이즈의 빈 자리를 메꿨지만, 작전 가능한 항공모함이 한 척이라는 것은 미 해군 입장에서는 불안요소였다. 이 때 영국에서 정규 항공모함의 대여를 제안하고 이를 미국이 수락, 일러스트리어스급 항공모함 HMS 빅토리어스가 USS 로빈[35]이라는
가명코드네임으로 미 태평양 함대에서 활동하게 된다. 에섹스 급이 전선에 도착할 때까지 사라토가와 팀을 이뤄 뉴 조지아 상륙 등에서 활약하였고 43년 10월 중순에 태평양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영국 스카파 플로우로 복귀했다
- ↑ 과달카날에 상륙하는 미 해병대.
- ↑ 과달카날 전역에 참가한 군함 수를 아시는 분은 추가 부탁드립니다.
- ↑ 일본군이 입은 인적 피해, 그 중에서도 조종사의 피해는 해전의 규모에 비해 그리 크지 않았다.
- ↑ 물론 우세인 분위기였다가 동점을 허락했다는 상황 자체가, 상황을 리드하고 있던 일본군에게는 굉장한 부담이었을 것이다. 쉽게 이해하려면, 온라인 팀 게임에서 게임이 비벼지는 상황을 생각하면 될 듯.
- ↑ 90%가 유럽으로 갔다는 말도 있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태평양 함대에서 작성한 보고서에서도 15%로 명시했고 이것도 태평양 함대가 엄살을 부린 것이라는 말이 정설이다. 물론 유럽과 태평양에 배정된 물자의 차이는 대단히 큰 것은 사실이었다.
- ↑ 당시 가용한 병력을 긁어모으다보니 해병 1사단의 3개 해병연대(1, 5, 7해병연대) 중 두개 연대(1, 5 해병연대), 2사단 예하연대인 2해병연대의 일부 대대, 1기습대대, 1낙하산대대 등 매우 잡다한 편성이었다.
- ↑ 더 퍼시픽 1화에 간접적으로 묘사됐던 해전. 밤에는 "쪽발이들 때려잡는구나 불꽃놀이 개쩌네 ㄷㄷㄷ" 하며 즐겁게 관전
역시 남의 집 불구경은 재밌다하던 해병대가 날이 밝자 해변으로 밀려온 엄청난 수의 시체들을 보고 아 씨바 할 말을 잊었습니다. 덕분에 로버트 레키가 있던 해병대는 보급이 끊겼다. - ↑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 함대를 가장 처음 발견하고 공격을 개시했다가 기체가 피탄되자, 일본의 항공모함 카가에 자살공격을 시도하다가 바다에 추락하여 전사한 뇌격기 부대의 지휘관 로프튼 헨더슨 소령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 ↑ 훗날 과달카날이 있는 솔로몬 제도가 독립하고 수도 호니아라가 과달카날 섬에 지어지면서 이 비행장은 오늘날의 호니아라 국제공항이 된다.
- ↑ 이 상황은 미드 더 퍼시픽에도 나왔다. 밥 먹으러 간 식당 메뉴가 '아침 - 쇠고기 없는 쌀밥, 점심 - 치킨 없는 쌀밥, 저녁...(이하 생략)', 그나마 식기에 담긴 밥에는 구더기가...이걸 본 해병대원의 불평에 취사병의 대답이 걸작이다. "고기라고 생각하고 드십쇼."
- ↑ 루거우차오 사건에서 무다구치 렌야(당시 연대장) 휘하의 대대장이었는데, 그의 대대에 소속된 중대의 한 병사가 똥 싸느라 늦어서 잠깐 실종된, 중일전쟁의 도화선이 된 병사였다(…).
- ↑ 팬티, 정확하게는 요의(loincloth) 속에서 성조기를 발견했다고 한다. 아니 왜 전쟁포로의 팬티를 벗겼던 것일까?
지들이 입으려고 했겠지. 아니, 그 전에 왜 팬티에 국기를 넣어놓은 것일까? - ↑ 찔릴 만도 한 게 이것도 전범행위이기 때문이다. 미드웨이 해전 당시 아라시에서 미국 제3뇌격비행대대의 웨줄리 프랭크 오스무스(Wesley Frank Osmus) 소위에게 한 짓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면 된다.
- ↑ 단, 미 해병대 지도에는 테나루강이라 기재되어 있어서, 테나루 전투로 기록된 곳이다.
- ↑ 전투 후에 일루강 주변으로 악어들이 모여들어 시체들을 먹어치워서 사상자 집계가 대략적이었다. 미군은 대략 일본군 전사자를 800여명, 일본은 770명 정도로 추정했다.
- ↑ 류조는 경항모 수준의 소형 항모였지만, 일본 내에서는 정규항공모함으로 분류되었다.
- ↑ 전쟁 초기에 미 본토의 여러 주에서 파병보낸 주방위군 보병연대(제132,164,182연대)들(물론 진주만 기습 이전에 주방위군은 이미 연방 소집이 완료된 상태였다.)을 규합, 현지에서 사단급으로 편성했고 창설 장소가 당시 남태평양 전구의 사령부가 있던 뉴칼레도니아 섬(프랑스령)이었던 것에서 이름이 유래한다. 이 사단의 후신인 미 육군 제23보병사단은 베트남 전쟁 중기에 파병되었다.
- ↑ 무사한 예비 활주로를 사용하기도 했다
- ↑ 대체로 츠지에게 반대한 것이 해임의 원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 ↑ 행군하면서도 "아직 멀었나? 아직도? 아직이야?"는 말이 나도는 판이었다.
- ↑ 이미 일본군의 병력규모를 거의 파악하고 진지보강까지 끝내놓은 상태였다.
- ↑ 츠지는 3일이면 간다고 장담했으나... 실제로는 1주일이나 걸렸다.
- ↑ 거기다 산탄을 넣어서 잘써먹었다
본격 대형 고기 분쇄기 - ↑ 여기서 어뢰를 9발이나 회피하고 한발은 아군 중순양함이 몸빵했는대 불발
- ↑ 미 해군 전체로 보면 항공모함 레인저가 하나 남아 있었지만, 당시 레인저는 대서양 전선에 있었다.
- ↑ 자료에 따라 다르나 180기가 격추되었다는 자료도 있다.
- ↑ 일본 측에서는 '제3차 솔로몬 해전'이라 부른다
- ↑ 사실상 미군이 동원 가능한 유일한 항공모함이었다. 새러토가는 진주만에서 수리중, 레인저는 대서양에 있었고 나머지 넷은 전부 침몰되었다. 그래서 엔터프라이즈는 수리를 거듭하면서 계속 전쟁에 투입되었다.
- ↑ 해병 1사단이 떠나고 과달카날에 있었던 병력으로 공세를 펼치기에는 부족했다. 그래서 12월중에는 교두보 남쪽의 오스텐 산에 제한적인 공격만 할 수 있었다.
- ↑ 일본기들의 주요 발진기지는 라바울과 부갠빌섬의 부인 기지 등이였는데 이들 기지에서 이륙후 과달카날에 도달하면 체공시간이 20분이 채되지 않았다고 한다.
- ↑ 이 일을 계기로 상부에 단단히 찍힌 기펜은 이후 전투에서 사실상 열외(...)되었다. 하지만 홀시 제독도 나중에는 이것보다 몇 갑절이 넘는 바보짓을 했다.
- ↑ 구식 중순양함 4척으로 편성된 부대로 기함은 중순양함 아오바이며 후루타카, 카코, 키누가사가 소속되었다. 사보섬 해전부터 과달카날 해전까지 미카와 제독이 지휘하는 제8함대의 중핵으로 활동하며 미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으나, 격렬한 전투에서 차례로 소모되었고 과달카날 전투가 끝날 무렵에는 아오바 한 척만 살아남았다.
- ↑ 그나마 2대 중 1대는 어찌어찌 도망갔다.
- ↑ 그리고 과달카날 전투와 임팔 작전에 모두 투입되고도
운좋게 불행했던생존(!!!)한 병사가 있었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그나마 과달카날이 임팔보다는 나았다고 한다.(...) - ↑ 그 로빈 후드에서 따온 것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