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가디슈 전투

Battle of Mogadishu.

1 개요

영문 위키피디아 모가디슈 전투 항목

리틀 빅혼 전투 어게인

소말리아 내전 중인 1993년 10월 3일, 소말리아에 파견된 미군이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슈에서 군벌 요인 납치 작전을 벌이다 발생한 QRF(Quick Reaction Force. 신속 대응군)간의 전투. 작전중에 2대의 UH-60 블랙 호크 헬기가 민병대RPG-7 공격을 받아 모가디슈에 추락하는 바람에 그들의 유해와 생존자를 수습하려는 미군과 민병대 사이에서 이틀동안 교전이 벌어졌다.

이 전투를 다룬 /영화 블랙 호크 다운이 있는데, 영화 쪽이 더 유명하다.

2 발단

2.1 시아드 바레의 22년 독재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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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드 바레(1919~1995), 육군 소장 시절 찍은 사진.

1969년 시아드 바레(Siad Barre) 장군이 무혈 쿠데타[1]를 일으켜 공산국가인 소말리아 민주공화국을 세우고 친소련 정부를 출범시켰다.

또 재미있게도 시아드 바레는 공산국가 지도자들과 자주 만남을 가졌고 공산국가에도 자주 갔었다. 개중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있었다

이런 모든 이야기가 1970년대 이야기이며, 1980년대 들어서는 미국, 중국과 교섭을 위한 정책을 펼쳤다. 실제로 재미있게도 시아드 바레 정부는, 아프리카에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린다면 교과서로 삼아야할 민주주의 정부라며 서방권 국가들의 지지를 받았었다. 심지어 미국도 소말리아를 지지했었다. 왜냐하면 사회주의 정책을 펼치며 친소국가가 되어가던 에티오피아를 침공했고, 소련과의 우호협력조약까지 폐기했기 때문이었다. 오가덴 전쟁의 패전이 소련 때문이라고 보고 소련과 단교하고 친미국 정책을 펼친 것이다. 연도를 고려하지 않아서 무슨 국공합작을 이룬 것처럼 적어놨지만, 실제로는 소련과 관계가 틀어지자 별 수 없이 미국에 손을 내밀었던 것이므로 전향에 가깝다.

하지만 이 시아드 바레라는 인물이 그다지 긍정적인 인물이 못된다는 것이 문제다. 특히 골 때린 것은 친미국 성향으로 알려진 시기야말로 시아드 바레의 막장짓이 제대로 빛을 발하던 시기였다는 것이다. 아이디드를 까기 위해서인지 시아드 바레의 문제점에 대한 언급이 상당히 적은 경향이 있으며, 시아드 바레가 물러나던 시기에 친미지도자를 자처했기 때문에 뭐라고 하기 더 어려운 감이 있다.

우선 시아드 바레는 초기에는 부족주의와 과거의 악습에 대한 개혁을 선포하고 사회주의적인 노선으로 나갔다. 최초 5년 동안은 사회 개혁도 하고, 부족주의 타파도 한다고 하고, 공공사업도 벌였다. 이 시기까지는 평판이 좋았다. 애초에 무아마르 알 카다피사담 후세인이건 막장짓 한 참 시작하기 전에는 나름대로 인기가 좋은 시절도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게 유지가 안되고, 속으로는 곪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2.1.2 어둠

그런데 급격한 부족주의 해체를 포함한 개혁조치들이 대부분 실패로 돌아가고 부족의 권한을 줄이는 것에 대한 반발로 쿠데타와 암살시도가 이어지면서 흑화가 시작되었다. 집권 22년중에서 괜찮았던 초반 5년이 끝나고, 17년간의 암흑기가 시작된 것이다. 권력은 부패한다.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라는 이야기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집권 6년차인 1975년에는 치안법원을 설치해서 사법권을 군사법원으로 만들어버렸고, 이에 반발하는 이슬람 지도자들을 처형하면서 악명을 쌓았다. 그리고 1976년에는 소말리아 사회주의 혁명당을 창당하면서 일당독재를 확립했다.

그리고 여기에 박차를 가한 것이 1977년에 시작된 에티오피아와의 오가덴 전쟁이다. 시아드 바레는 범소말리아주의를 주장하면서 전군을 동원하여 에티오피아를 침공하였고, 소련이 소말리아보다 에티오피아의 손을 들어주면서 소련과도 단교했다. 당연히 오가덴 전쟁은 소말리아의 패배로 끝났고, 미국과 관계가 개선된 것이 이 때문이다. 1980년에는 미군에 바르바라 항구와 사용권과 공군기지를 제공하면서 3000만 달러의 경제원조와 4000만 달러의 군사원조를 받기도 했다.

오가덴 전쟁 패전의 영향으로 1982년부터 반정부 단체의 활동이 거세졌다. 오가덴 전쟁의 패전은 다른 지역에 살던 소말리 난민의 이동을 불러왔다.경제는 더더욱 엉망이 되었고, 에티오피아와의 전쟁으로 피해를 본 소말리아 북부에 있던 부족들은 대놓고 정부에 반발을 시작했다. 이렇게 되니 시아드 바레는 과거에 천명했던 부족주의 타파를 정면으로 역행해서 오히려 자신이 소속된 약소 부족이었던 '마레한(Marehan)'소부족[2], 범소말리아주의의 중심에 있었던 '오가덴(Ogaden)족', 그리고 '둘가한테(Dhulbahante)족'을 자신의 측근세력으로 삼아서 중앙정계로 끌어들여 권력을 독점했다. 이 세력을 영어 약자를 따서 M.O.D.라고 부른다.

사실 그 전에도 지역의 주도권을 쟁취하려고 파벌간의 싸움이 자주 있었으며 범 국가적이었다. 내전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파벌간 싸움이 항상 있어왔으므로 시아드 바레는 당연한 것으로 판단하고 전혀 간섭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가덴 전쟁의 패전은 소말리아 정부에 대한 반대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리비아의 지원으로 1978년 등장한 '소말리아 구원 민주전선(Somali Salvation Defense Force, 약칭 SSDF)'였고, 이어서 소말리아 국내에서도 시아드 바레 반대 게릴라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중 대표적인 것이 이자크(Isaxaaq) 부족이다. 이자크 부족의 주요 거점이 어디냐면, 시아드 바레가 미군에게 넘겨준 바르바라 항구였다. 이자크 족이 이후의 소말릴란드로 이어진다. 이 이자크 부족이 결성한 것이 '소말리아 국민 운동(Somali National Movement, 약칭 SNM)'이다. 하지만 이 세력은 일단 1978년 시아드 바레 군의 강력한 무력진압으로 1978년 일시 소강된다.

2.1.3 소말리아 혁명

하지만 1986년부터 시아드 바레가 자신의 친위세력인 레드 베레[3]를 동원해서 다른 지역을 공격하면서 이제는 상황이 중부와 남부로 번져서 이른바 소말리아 혁명이 시작된다[4]. 여기에 전염병이 돌아서 축산업이 무너지면서 인플레이션을 포함한 경제위기가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시아드 바레는 당연히 발악을 했다. 1988년에는 이자크 족의 중심도시인 하르게이사와 부라오를 공격해서 완전한 내전 상황이라는 것을 입증했고, 1989년 7월에는 수도인 모가디슈에서 일어난 대규모 반대시위를 탄압하고 반정부 지도자 2000명을 체포하였고, 1990년 1월에는 축구장에서 관중들이 정부에 야유를 한다는 이유로 대통령 경호원들이 무차별 발포해서 60여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런 행동으로 시아드 바레 정권은 UN에게 아프리카 최대 인권침해 국가로 완벽하게 낙인찍힌다. 1989년에는 소말리아 애국운동(Somali Patriotic Movement, 약칭 SPM)이 다른 곳도 아니고 오가덴족을 중심으로 결성되었고, 1990년에는 마침내 소말리아 최대 부족인 하비야부족의 통일 소말리아 회의(United Somali Congress, 약칭 USC)가 결성된다. 이런 전개에 대해서 유엔 개발계획(UNDP)은 시아드 바레의 21년 독재가 아프리카 최악의 인권침해사례로 꼽았고, 국제 엠네스티 역시 시아드 바레 정부의 국가보안국(National Security Service, 약칭NSS)이 재판 없는 투옥, 전기고문을 포함한 고문과 강간 등을 일삼고 있다고 보고서를 내놨다. 이 때문에 1990년부터 소말리아에 대한 국제지원이 끊어진다. 이후 시아드 바레의 영향력은 급격히 축소되어서 수도인 모가디슈 중심으로 축소되었다. 1990년 3월에는 모가디슈에도 반군의 공격이 시작되었고, 5월에는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10월 연료값 인상 시위에 대해서도 발포로 대응했다.

결국 1990년 인근 지역을 완전히 점령하고 있던 아이디드의 USC가 12월에는 모가디슈마저도 함락하면서 시아드 바레 정권은 사실상 종말을 맞이했다. 모가디슈에서 밀려난 시아드 바레는 협상요청과 2회 정도의 수도탈환 시도 정도로 저항했지만 결국 실패, 1991년 1월 26일 완벽하게 포기하고 나이지리아로 도주하면서 시아드 바레 집권기는 끝난다. 이후 시아드 바레는 1995년 나이지라아에서 사망한다.

2.2 모하메드 파라 아이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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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하메드 파라 아이디드(1934~1996)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인물이 모하메드 파라 아이디드(Mohamed Farrah Aidid)이다. 이전에 이 항목에 적혀 있는 내용의 시간대가 엉망이었을 정도로 한국내에서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1934년 생인 아이디드는 소말리아 최대 부족[5]인 하브예 부족에 속하는 하브 지디르 소부족 출신으로, 소말리아가 당시의 이탈리아 식민지였기 때문에 이탈리아 로마에서 군사교육을 받았고, 소말리아에서 이탈리아 경찰로 일했고, 1960년 소말리아가 독립한 이후에는 소련에 건너가서 모스크바에서 군사를 배운 인물이다. 이후 시아드 바레에게서 높은 평가를 받았고, 시아드 바레의 쿠데타 이후에는 수석보좌관에 임명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에 체포되어서 6년간 투옥 생활을 했다[6].

이런 상황이 변화된 것은 오가덴 전쟁이 시작된 이후이다. 시아드 바레는 아이디드를 석방해서 준장 진급, 육군참모총장 임명이라는 루트를 거쳐서 오가덴 전쟁에 투입했고, 여기서 공을 세우면서 다시 시아드 바레의 신임을 얻었다. 이후 아이디드는 이후 시아드 바레 정권에서 인도 대사, 정보기관 등의 요직을 거친다.

하지만 시아드 바레의 MOD 우대정책이 본격화 되고 실정이 거듭되면서 부족간의 내전이 격화되었고, 이 때 아이디드가 소속된 하브예 부족이 USC를 결성하면서 아이디드가 이 단체의 군사부분을 총괄하게 된다.

이 당시 파라 아이디드는 까트를 구하려고 USC 소유의 무기를 모조리 처분토록 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카트를 사람들에게 뿌려 USC의 지지도를 높이면서 동시에 USC의 단원으로 끌어들였다. 단원이 되는데 조건은 없었으므로 어린이도 USC의 단원이 될 수 있었다. 이런 과정으로 USC의 단원은 순식간에 불어났고, USC는 소말리아내 최대 반정부 단체가 된다.

또한 파라 아이디드는 성인 남자에게 총을 쥐어주고 우리나라로 치면 부사관에 해당되는 계급을 부여했고, 남자 어린아이에에게는 사병에 해당되는 계급을 부여해 역시 총을 쥐어줬다. 즉 군대를 만든 것이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가 파라 아이디드는 군대의 지휘관이었기 때문이며, 계급논리같은 게 없던 마흐디와 아토도 이런 방식을 받아들이긴 했다.

그리고 여자와 여자아이는 까트 농사를 지어서 까트를 판매하며 돈을 벌었다. 물론 까트 농사만 지은 것은 아니었다.

이후 1991년 1월, 파라 아이디드가 이끄는 USC가 모가디슈를 공격해 시아드 바레를 축출하고 임시정부를 세웠다.

이후 소말리아가 워낙에 지옥이 되어서 차라리 시아드 바레 시기가 나았다는 소리도 나오는데, 이건 한국전쟁이 터지니까 차라리 전쟁은 없는 일본 식민지 시기가 살기 좋았다고 하는 수준의 이야기다. 소말리아 혁명이 소말리아 내전이 되면서 상황이 개판이 된 것과는 전혀 별개이다.

2.3 밥그릇 쟁탈전 개시

시아드 바레 축출 후, 명목상으로는 알리 마흐디 무하메드가 임시 대통령이 되고 1992년 3월 군벌이 휴전에 합의하면서 UN감시단이 입국하게 된다. 이제까지가 소말리아 혁명이라면,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소말리아 내전기에 접어들게 된다.

우선 소말리아 군벌중에서도 최대세력이었던 USC의 근간을 이루던 파라 아이디드의 무장세력, 마흐디의 무장세력, 아토의 무장세력이 이번에는 자기들끼리 정권을 차지하려고 싸우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시아드 바레를 축출하려고 뭉친 USC가 정권 차지를 목적으로 이젠 갈라진 것이다. 이 배경은 또 부족간의 문제이다. USC는 원래 하브예 부족 최대의 분파인 아브갈 소부족의 지도자인 알리 마흐디가 의장의 자리에서 정치적 지배자 위치에 있었고, 전쟁을 실질적으로 지도한 것은 하브 지디르 소부족 출신이지만 군 경험과 정부내 세력이 있었던 파라 아이디드였고, 아토는 군수품을 제공한 자금원이었다. 그런데 알리 마흐디가 정권을 쥘 상황이 되니 실질적 지도자로 자처하던 아이디드가 반발한 것이다.

결국 대립은 임시 대통령 알리 마흐디와 군사적 경험이 풍부했던 파라 아이디드로 갈라졌다. 그리고 이 와중에 역대급 가뭄까지 겹치며 420~500만 명에 가까운 민간인이 죽으면서 소말리아는 생지옥 그 자체가 됐다. 하지만 USC 내에서의 밥그릇 싸움이 계속 진행됐고, 소말리아 전역에 있는 파벌과 가문들도 파라 아이디드, 마흐디의 무장세력에 합류하고 갈라지면서 사실상 무정부 상태의 내전이 진행됐다.

2.4 평화유지군 파병

파벌간의 미칠듯한 민간인 학살과 환장할 정도로 빠르게 늘어나는 아사자 수를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던지라 UN에서 임시정부에게 연합정부를 세우고 민간인부터 챙기라는 권고조치를 내렸다. 이 조치를 듣기만 했지 일단 정권을 차지해야 그러거나 말거나 할 노릇이라 실제로 행해진 것은 없었다.

1992년 1월에는 UN에서 733 결의안을 통과시켰는데, 이 내용이 소말리아에 대한 무기금수 조치였다. 솔직히 별 실효는 없었던 것이 1980년대 시아드 바레 정권 말기에 이미 군벌화와 내전이 진행되면서 무기는 이미 충분히 소말리아 내부에서 돌고 있었고, 금수결의안을 통과시키거나 말거나 수입될건 다 수입되고 있었다. 애초에 소말리아 군벌들은 특정국가에서 무기를 정식으로 수입하는게 아니라 아토와 같은 무기 밀매상에게 무기를 유통했으니 무기 금수 결의안이 나온다고 해서 변할 것은 없었다.

결국 1992년 4월 21일, UNOSOM-1(United Nations Operation in Somalia I)으로 명명된 작전이 시작되었다. 사실 애초에 UNOSOM-1의 원래 목적은 군벌간의 휴전협정이 이뤄졌으니 이걸 감시하기 위해서 UN이 옵저버 50명을 파견해서 감시한다라는 것이었다. 이 때 파견된 인물이 파키스탄의 임티아즈 샤힌 준장이었다.

하지만 사태가 악화 일로로 가면서 8월 27일 무장병력 3000 명이 투입된 것이고, 소말리아 기근문제가 심각해지면서 9월에 1000여명의 보급부대가 추가되면서 인원은 4,219명의 병력과 50명의 옵저버라는 대규모 인원으로 증폭된 것이다.

결국 이 파견 배급부대에서 식량배급을 하면서 1992년 한 해에만 소말리아에서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 약 200만 명의 아사자는 최종적으로 많이 줄어들었으나 어린이 아사자는 그럼에도 발생돼 7~8만 명의 어린이가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세력의 강화와 지지도 확보를 위해 무장세력이 식량을 탈취하는 일도 발생했으며, 불과 한 달도 안돼 무장세력에 의한 식량탈취는 사실상 일상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아사자 문제가 어느정도 안정된 10월 28일, 아이디드는 UN철군을 주장하고 나섰다. 사실 내전기간 동안에 실전을 겪은 아이디드는 USC 내부에 파벌을 두고 있었고 이 파벌은 '소말리아 국민동맹(Somali National Alliance, 약칭 SNA)'를 개설했는데 USC의 주도권을 이 SNA가 장악하게 되면서 내전이 진행되면 결국은 아이디드의 승리로 끝날 상황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확실한 성공 대신에 불확실한 투표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아이디드는 소말리아 주의를 다시 들고 나온 것이다. 이 때 명분은 '모가디슈 공항이 UN군의 관할에 있는데 이게 부당하다'라는 주장이었다. 그리고 진짜 사고는 이후에 나오는데, 11월 13일에 파키스탄군을 공격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사상자가 나온 UN은 미국에 미군 파병을 요청한다. 이것이 12월 3일에 나온 794 결의안이다.

2.5 아프리카의 뿔

친미 정책(과 동시에 친중국 정책)을 펼치던 시아드 바레가 반란군에 의해 축출을 당해 나이지리아 망명길에 오르자 미국의 발등에 특히나 불이 떨어졌다.

소말리아 북쪽에 위치한 아덴 만을 건너면 예멘이고 동시에 중동이다. 다시 말해 산유국과 가까우며, 그 산유국 중에 하나가 바로 쿠웨이트침공했다가 호되게 얻어맞아 엉엉 울고 있던 이라크다. 1년 전 걸프전처럼 중동에서 유사시 즉각적으로 투입할 수 있는 병력의 주둔지로는 소말리아가 최적이었다. 중동에 미군을 주둔시키기 힘든 데에 결정적인 이유가, 그 당시 이스라엘이 레바논과 전쟁 중에 있었으며 이스라엘 자국 내에서는 팔레스타인과 영토 분쟁이 진행중이었다. 즉 중동 내부에서의 전쟁 불씨가 미군에게까지 번질 우려가 있어서 소말리아말고는 딱히 대안이 없었던 것이다.

사실 원래 시아드 바레 시기 미국은 바르바라 항구를 조차해서 사용하고 있었다. 즉 원래 소말리아 주둔이 가능했었다. 문제는 걸프 전쟁이 벌어지던 1990년대에는 미군 주둔이 문제가 아니고 소말리아 내에서도 시아드 바레 정권이 무너지는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바르바라 항구도 원래 거주민인 이자크 부족이 점거했고 미국과 시아드 바레의 협정은 무시되었다. 미국이 시아드 바레를 실드 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더군다나 소말리아는 아프리카의 동쪽 끄트머리에 있으며, 인도양으로도 바로 진출할 수 있는 아프리카의 뿔이었다. 지리학적으로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소말리아를 안정시키면 나쁠 것도 없거니와 인도양 한복판에 깃발을 꽂을 수 있기도 하여 소말리아의 치안을 확보하는 것은 소말리아에게도 좋지만 미국에게도 있어 중동과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더 나아가 오세아니아 일대 패권을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더구나 UN 평화유지군과 별도의 전투부대 파병은 클린턴 정부 시절이지만, 파병안이 통과된 시절은 아버지 부시 정부였다.

조지 부시는 이미 재선 실패가 확정되어서, 1개월이 지나서 1993년이 되면 클린턴 행정부가 바로 들어서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조지 부시는 아무런 부담도 없이 소말리아 파병을 결정할 수 있었다. 애초에 공화당의 이념에도 맞지만, 일이 잘되면 자신의 공적이 되는 것이고 혹시나 잘못되더라도 이듬해면 이미 자신은 대통령이 아니니까 그 책임을 질 필요는 없어진다. UN이 숙이고 들어온 것을 거절해서 인권에 부정적이란 인식을 줄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었다.

결국 부시의 판단이 얼마나 신속했느냐하면, 앞서 언급한 794 결의안이 UN에서 체택된 것이 12월 3일인데, 미군 해병대 원정단이 처음 모가디슈에 상륙한 것이 불과 1주일 후인 12월 9일이었다.

전형적인 후임자 엿먹어봐라 정책이었던 것이다. 다만 이 엿이 이정도 지옥이 될지는 아마 부시도 모르지 않았을까.

2.6 희망 회복 작전

여하튼 앞서 언급한대로 1992년 12월 9일, UN의 물자수송로 안전 확보, 식량 배급을 담당하는 군대와 배급을 받는 민간인의 안전 확보, 상황발생시 교전 임무를 띠고 미 해병대 1800명[7]이 선봉대로 모가디슈 인근 해안에 상륙했다. 그러니까 전투부대가 투입되었다는 얘기다.

걸프전 이후 미국의 두 번째 전투부대 투입이라는 특종이었던 까닭에 인근 국가는 물론 소말리아 인근 국가에서 활동하는 미 방송국 소속 특파원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와 생중계로 해병대 상륙을 보도했고, 해병대의 상륙이 미국에 생중계되는 황당한 일도 발생했다. 긴장한 상태로 상륙하는 해병대원들을 미리 대기하고 있던 CNN을 포함한 기자들이 카메라 조명과 플래시로 맞이하는 굉장히 엽기적인 장면이 연출된 것이다. 파라 아이디드를 비롯해 USC의 세력들이 생중계를 안 봤을 리가 없다.



실제 생중계 영상.

이 병력이 모가디슈 공항을 인수[8]한 뒤에는 제3강습상륙대대, 제10산악사단[9] 등이 추가로 투입된다. 결국 1993년 3월까지 파병 미군은 25000명으로 증가된다. 이것을 '희망회복작전'이라고 부른다.

미군의 진주로 소말리아의 상황은 급격히 안정되기 시작한다. 사실 미군에 잘못걸리면 엿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알리 마흐디와 파라 아이디드가 미군 해병대 선봉이 상륙한지 3일만에 휴전협정을 체결한 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1993년 1월에는 UN의 제안으로 소말리아 평화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 USC 핵심세력들이 참석해 내전 조기종식 회의를 진행했다. 하지만 "UN이 소말리아에 간섭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평화유지군의 무장해제 및 철수를 요구한다"며 평화유지군의 무장해제 요구를 파라 아이디드가 거절했다.

그래도 미군 덕택에 식량배급이 어느정도 안정을 찾으면서 내전도 소강에 접어든 것은 사실이었다. 식량 배급 차량이 지나는 길목마다 장갑차가 배치돼 무장세력의 공격을 사전에 봉쇄했고, 더 위험한 곳에는 전차공격 헬리콥터가 동시에 투입되는 등 안전확보에 대단히 공격적으로 나섰다.

모가디슈 시내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무장세력의 무기를 압수하고, 소규모 교전으로 무장 세력을 해산시키는 등(부상자가 발생했지만 전사자는 없었다) 미군의 적극성 덕택에 민간인들은 드디어 평화가 찾아온다는 희망에 젖었다. 그리고 소말리아 내 친미 세력이 잠깐이나마 흥하기도 했다.

그렇게 미군의 활약이 잠깐이나마 흥했다. 잠깐이나마…….

2.7 클린턴 발을 빼기 시작하다

이렇게 상황이 좀 안정되자 기근이 좀 소강되었을 때의 아이디드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태도도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일단 급한 불이 꺼졌다고 판단하고 그 이후 미국이 얻을 수 있는 국익과 미래의 역할을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위에 나오는 아프리카의 뿔 항목은 조지 부시 시기의 미국 공화당의 입장이다. 하지만 민주당 클린턴 행정부에게는 이야기가 좀 달라지게 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상황에서 득을 보는 것은 조지 부시 전임 대통령이고, 클린턴은 설거지 하는 입장에서 딱히 이득이 없다는 것도 물론 한축이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는 권한과 책임을 가진 자가 변하면 국제정세 인식도 달라지기 마련인 것에 있다.

물론 소말리아가 지정학적 위치가 천혜의 요충지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건 미국이 여기에 관심을 가질 때 이야기다. 1980년대 신냉전 시기라면 이 곳의 중요성은 이루말할 수 없는 수준이다. 하지만 '문제는 경제야'를 외친 클린턴 행정부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우선 중동에는 제 1차 걸프전쟁을 거치면서 이집트,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 등 친미세력이 확보되어 있었고, 인도양과 아프리카, 중동을 아우르는 권역이라면 차고스 제도의 디에고 가르시아를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소말리아는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그렇게 손해는 아닌 상황이었다.

결국 클린턴 행정부는 발을 빼기로 결정한다.

1993년 3월 26일 UN 안보리는 814 결의안을 체택하는데, 이 중심내용을 간단히 말하면 UNOSOM-2의 시작이었다. 즉 소말리아에서 평화유지를 담당할 주체가 미국에서 다시 UN으로 넘어간 것이다. 주요 내용은 군벌의 무장해체와 정국 안정화, 추가적인 구호 활동 등이었다. 이 때 중심인물이 되는 인물은 원래라면 UN 평화유지군 사령관인 터키육군 세비크 비르 중장이 되어야겠으, 이때 UN특사로 파견된 인물이 더 중요하다. 바로 미 해군의 조너선 하우 제독이다.

하우를 파견한 것을 마지막으로 미군은 단계적 철수를 시작해서 해병대는 다 빠져나갔고, 5월 4일이 되면 미 제 10 산악사단 병력 1150명만이 소말리아에 남아있었지만 이것도 신속대응권이라는 명목으로 후방 배치된다.

2.8 다국적군 투입

UN은 UNOSOM-2(United Nations Operation in Somalia II)에 따라서 1993년 5월 미군의 철수와 함께 다국적군 약 28,000명[10]오스트레일리아, 오스트리아, 방글라데시, 벨기에, 보츠와나, 캐나다, 이집트, 피지, 핀란드, 프랑스, 독일, 그리스, 인도, 인도네시아, 아일랜드, 이탈리아, 쿠웨이트, 요르단, 말레이시아, 모로코, 뉴질랜드, 나이지리아, 노르웨이, 파키스탄, 스페인, 대한민국, 루마니아, 사우디아라비아, 스웨덴, 튀니지, 터키, 아랍에미리트, 영국, 미국, 짐바브웨가 소말리아에 군대를 파병했다.

미국은 일부를 제외하면 주도 세력에서 제외되었으나 UNOSOM-2 지원을 위해 모가디슈 인근 해역에 함정도 파견하여 후방에서 지원했다.

참고로 대한민국의 파병 부대인 상록수 부대는 특수전사령부 산하 특전여단에서 차출한 병력이 상당수며(자이툰 부대도 특전여단에서 차출한 병력이 상당수다), 소수의 기계화보병, 대형 교전이 있을 것에 대비한 실제 중무장 특수부대[11], 타 국가 파병부대와 교류를 위한 병력도 포함되어 있었다.

UNOSOM-2에 참여한 다국적군의 목적은 평화유지였고 임무는 초동조치부대였다. 즉 군벌세력의 무장을 완전히 해제시켜버린다라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다. 그래서 식량 배급 차량이 지나는 길목마다 장갑차는 둘째 순위로 밀렸고 무조건 전차가 투입됐으며, 좀 안전하다 싶은 곳에도 중무장 병력과 장갑차가 함께 배치됐다.

이 UNOSOM-2의 진행을 아이디드 군의 민간인 공격과 UN군 공격이 원인이다라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USOM-2의 발동이 확정된 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미군의 철수가 이뤄지기 시작하면서 그 공백을 UN군이 이어받기 위한, 유엔 안보리 결의 814에 의한 것이었다. 기존의 소규모 병력으로는 소말리아 치안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는 것이 확정되었으므로, 일단 미군이 급한 불을 끄고 발을 빼게 되자 이 빈 자리를 UN 평화유지군이 메우는 형태로 진행된 것이다.

이런다고 카트 배급과 선전으로 점점 실세가 되어가는 파라 아이디드가 쫄 리 없었다. 파라 아이디드의 무장세력도 점점 이 진행되는 중이었고, 다국적군을 상대로 교전을 해도 안 밀릴 정도였다. 특히나 안방에서 싸워왔던 터라 전술적으로는 파라 아이디드가 훨씬 우위였다. 미군이 빠지고 UN군이 상대가 되면서는 보다 호전적이 되어서, 미군 3명과 이탈리아군 1명 등 4명의 전사자가 발생했고 56명에 달하는 부상자도 생겼으며, 조너선 하우 제독은 아이디드 제거를 위해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2.9 대형사건 발생

1993년 6월 5일, 파키스탄군이 주축이 된 UN평화유지군과 아이디드군이 정면 충돌하는 초대형 사건이 발생했다.

시작은 UN 평화유지군에 불만을 가지고 자신이 지배하고 있던 라디오 방송으로 비난하는 성명을 내보내던 아이디드군에 빡친 UN군이 칼을 뽑아들은 것이었다. UN군은 아이디드 군이 점령하고 있던 선전기구로 활용되던 라디오 시설과 언론사, 무기 시장을 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파키스탄군 경기갑 여단을 파견했는데, 거꾸로 아이디드 군의 매복에 당한 것이다. 이 결과로 파키스탄군 24명이 사망하고 50여명이 부상당하는, UN 평화유지군 사상 최악의 참사가 벌어졌다. 그리고 죽은 파키스탄군의 일부가 시체훼손이 되면서 끌려다니는 것을 동영상으로 촬영해 CNN에 보내고 UN 철수를 요구하는 초대형 사건이 발생한다.

다음 날인 6월 6일, 미국, 영국, 러시아, 프랑스, 중국의 찬성으로 채택된 안보리 837 결의안이 나온다. 요는 발을 빼고 있던 클린턴에게 UN이 아이디드는 나쁜 놈이니까 미군 파견하라고 요청한 것이다.

사실상 UNOSOM-2는 평화유지니 초동조치니 뭐니 다 집어치우고 일단 파라 아이디드를 상대로 싸우는 전투 작전으로 변질됐으며 다국적군도 완전 전투부대가 됐다.

엄청난 사건에 충격도 받았지만 평화유지 작전이 전투작전으로 변질될 것까지 예상을 못한 파키스탄은 핵심 전투병력을 모조리 철수시켰고[12], 짐바브웨와 루마니아, 스웨덴도 이러리라곤 예상을 못해 병력을 철수시키자 이어 다른 나라들도 덩달아 병력을 철수시키기 시작다.

이런 상황 변화에 클린턴은 어쩔 수 없이 공격헬기 몇대와 AC-130 건쉽을 파견했다.

기세가 등등해진 파라 아이디드는 이걸 또 선전하면서 자칭 소말리아의 대통령으로 군림했다.

대통령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마흐디와 아토의 무장 세력과 여전히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저 두 세력은 겨우 목숨을 연명하는 상태였다. 그리고 가장 상황이 좋지 않았던 아토 세력은 싸우길 포기하고 나중에 아이디드의 무장세력으로 완전히 흡수된다.

2.10 지속되는 교전과 각종 사건사고들

걸프전에서 승리한 미군을 상대로 싸우면서 성과를 내는 파라 아이디드를 체포하고, 파라 아이디드가 이끄는 무장세력을 완전 해산시키기 위한 공격이 수시로 진행됐다.

이 공격의 주도자는 조너선 하우 제독이었다. 사실 조너선 하우 제독은 미국에 델타포스 1개 팀을 요청했다가 거절된 상황이었다. 클린턴은 여전히 떨떠름해했던 것이고, 이후의 활동은 사실 미국의 주도라기 보다는 조너선 하우가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벌인 것이다.

우선 6월 17일, 무지하게 신사적인 방법이 동원된다. 우선 헬기에서 '경고방송'을 해서 민간인들의 대피를 유도한 다음에 프랑스, 모로코, 파키스탄 군이 아이디드의 측근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를 뒤진 것이다. 당연히 어린이에게도 통할지 장담못할 장난질이었고, UN군에게 망신만 더해줬을 뿐이었다.

이 장난에 대한 불만을 주도한 것이 UN군 사령관 세비크 비르 터키 장군과 미 육군의 토머스 몽고메리 장군이었다. 결국 이 주장대로 1993년 7월 12일, AH-1 코브라 등을 동원하여 은신처를 공격해서 무장 세력, 동조자 등을 사살하는데 성공했다. 민간인을 대규모[13]로 죽인 건 덤이었다.(...) 그리고 목표물을 잘못 설정하는 바람에 민간인 오폭이 이어졌다.

파라 아이디드는 미군의 오폭을 선전해 효과적으로 이용했으며 덕분에 무장세력을 격파하고 치안을 확보해 평화를 유지한다는 다국적군, 특히 다국적군의 과반수를 차지하는 미군의 이미지는 부정적이 되었다.

그리고 이 오폭으로 이전까지는 온건파로 존재하였던 반 아이디드 파 부족과 군벌들이 아이디드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미국이 소말리아인들을 살육한 것으로 판단하면서 이 상황을 UN평화유지군과 아이디드의 대립이 아니라, 미국과 소말리아의 전쟁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여론 변화로 인해서 이 상황을 취재하던 기자4명이 소말리아 군중에게 살해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와중에도 이상주의자였던 조너선 하우는 아이디드를 국제법정에 세우는 것이 최상이라고 판단해서 미국 정부에 끊임없이 델타포스 파견 요청을 하고 있었고, 이게 거절되자 미친척하고 아이디드에게 25000달러의 현상금을 걸기도 했다. 이에 대해서 아이디드가 소속된 하브 지디르 부족은 현상금이 너무 적다라는 이유로 아이디드에 대한 모독이라고 판단해서 조너선 하우에게 100만달러의 현상금을 걸어서 조너선 하우를 엿먹였다.

8월 8일에는 험비가 원격통제지뢰에 피격돼 미군 헌병 4명이 사망하며, 2주 후인 8월 22일 똑같은 방법으로 7명이 부상당했다. 상황이 점점 안 좋아지자 빌 클린턴 대통령은 엄청난 비판에 직면했다. 그래서 이 상황을 단숨에 끝내버릴 작전을 구상하기 시작한다.

3 태스크 포스 투입

8월 22일, 미합중국 육군 소장윌리엄 F 개리슨 장군이 지휘하는 JSOC(Joint Special Operations Command)가 소말리아에 파병된다. 파병된 부대는 레인저 3대대 B중대, 델타포스 C분견대, 160특수전항공연대 "나이트 스토커"(The Night Stalkers) 예하 헬리콥터 16대(MH-60 블랙호크, MH/AH-6 리틀버드)와 조종사 및 정비병, DEVGRU[14], 제24 특수전술대대 소속 CCT항공구조사의 총인원 450여명이 파견되었으며,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모가디슈 바로 앞 바다에 CVN-72 에이브라함 링컨 항공모함과 항공모함 소속 제11 비행단도 배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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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말리아에 파병된 실제 레인저의 단체 사진.

사실 이들이 얼마나 자신만만했느냐 하면 모든 작전이 3주로 끝낸다라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첫 1주일 동안에 병력을 소말리아에 전개하고, 2주차에는 아이디드를 색출해서 검거하고[15], 3주차에 아이디드의 잔존 세력과 지휘체제를 붕괴시킨 다음에 깔금하게 소말리아를 떠난다라는 것이었다. 평화유지와 치안확보는 아직 철수하지 않은 제10 산악사단을 주축으로 추가파병될 병력과 후속 파병될 평화유지군의 임무였다.

대통령부터 시작해서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받는 JSOC은 계획보다 다소 이르게 전력 전개가 끝나면서, 8월 30일 새벽 2시에 첫 작전을 시작했다. 개리슨 장군이 지휘하는 레인저와 델타 포스팀이 패스트로핑을 했고 전범 9명을 체포했다. 다만 다음날 이들이 전범이 아니라 국제구호단체 요원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개망신을 당하게 된다. 이후 이들은 4번이나 더 출격했으나 번번히 허탕을 쳤다. 그렇게 목표인 3주의 시간이 모두 흘러갔다.

그러다가 투입 한 달 만인 9월 21일, 아이디드 지지 세력으로 합류한 오사만 알리 아토를 체포하는데 성공한다. 영화에서처럼 블랙 호크를 탄 델타 포스 저격수가 움직이는 차량을 저격해서 체포한 건 아니다. 헬기 레펠로 깔끔하게 내려가서 아토만 잡아간 것이다. 다만 문제는, 이 작전이 대낮에 한 강습작전이라는 것이다. 5번을 연속 실패한 나머지 눈에 뵈는게 없던 것이었다.

3.1 최초의 블랙 호크 추락

아토를 체포하자 화가 치민 파라 아이디드는 미군이 보이면 생포고 뭐고 다 필요없고 무조건 죽이고, 미군의 차량은 무조건 파괴하라고 지시한다.

때마침 9월 25일, 모가디슈 남쪽 공업지대(New Port Facility) 상공을 유유자적 비행하던 제101공중강습사단 소속 블랙 호크를 무장세력이 포착한다. 수십 발의 총격을 받은 헬기는 조종불가 상태에 빠졌고, 이후 최초 발사한 RPG-7에 한 방에 격추돼 3명의 승무원이 사망한다.

아이디드는 이걸 대대적으로 홍보했고, 본인이 직접 라디오에 출연하기까지 해서 자기가 직접 격추시켰다고 말하기도 했다.

참고로 후술할 내용을 미리 말하자면, 9월 25일 추락한 블랙 호크가 유일하게 한 방에 격추된 블랙 호크다. 10월 3일, 고딕 서펀트 작전 중 격추된 다른 두 대의 블랙 호크는 중기관총의 대공사격과 100여 발 이상의 RPG-7 로켓탄의 추격을 받다가 격추됐다.

이 부분은 블랙 호크 다운 영화에서 완전히 생략됐다.

4 작전명 고딕 서펀트

파라 아이디드의 집권을 원치 않던 세력과 파라 아이디드 세력 내 정보원으로부터 파라 아이디드의 스케줄을 미리 받고 있던 JSOC은, 9월 25일 발생한 블랙 호크 다운 사건으로 파라 아이디드 체포에 속도를 내기로 결정한다.

주변인들을 차례대로 체포해 세력의 힘을 약화시킨 뒤 파라 아이디드를 체포한다[16]는 기존 계획에서 조금 더 나아가, 파라 아이디드의 참모인 오마르 살라드 엘미(Omar Salad Elmi)와 명목상 내무장관이자 정치고문인 모하메드 하산 아왈(Mohamed Hassan Awale)을 먼저 체포하기로 결정한다.

하브 지디르 부족은 매주 미군 반대 집회를 가졌는데, 이 집회에 연사로 오마르 살라드가 연사로 참석한다는 것과 이 집회 이후에 하산 아왈레가 모여서 하와들 하브예 부족과 만남을 가질 것이라는 첩보를 CIA가 감청으로 얻어냈다.

JSOC는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집회에 참석한 살라드를 미행했고, 살라드가 EH-60헬기와 EP-3C 정찰기의 추적을 받으면서 이동해서 하산 아왈레와 만나는 것을 소말리아 정보원을 현장에 투입시켜서 확인했다. 이 정보원은 영화와 마찬가지로 자동차가 고장난 것처럼 이 모임이 있는 건물 앞에 자동차를 주차시킨 다음 차가 고장난 것처럼 보닛을 열어놓아서 목표물을 만들었다.

9월 29~30일 사이에 개리슨 장군은 펜타곤에 조기경보기, AH-64, AC-130, M1 에이브람스, 브래들리 장갑차를 요청했다. 작전 지역이 적의 본진 정중앙이고, 상대해야 할 적의 수가 너무 많아서였다. 하지만 펜타곤은 거절했다. 작전의 규모가 너무 커지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작전명은 고딕 서펀트(Gothic Serpent)로 확정됐다. 이하 작전 내용을 설명하자면

  • 모가디슈 공항에는 경비병력만 남는다. 총 쏠 수 있는 모든 병력이 들어가서 하산 아왈과 살라드 엘미를 체포한다.
  • 아홉 대의 험비와 석 대의 M939 5톤 트럭에 탑승한 지상군(호송대)이 먼저 출발해 목표건물 인근에서 기다린다.
  • 델타 포스는 MH-6 리틀버드를 타고 목표 건물로 이동해 실내로 직접 침투한다.
  • 레인저는 MH-60L 헬리콥터에서 패스트 로프로 투입돼 목표 건물의 모서리 쪽 코너(총 4곳)에 자리를 잡고 목표 건물을 방어한다.
  • 상공에서 지상엄호는 AH-6 리틀버드가 담당한다.
  • 델타 포스가 목표를 획득하면 지상군이 목표 건물로 움직이며, 동시에 레인저는 목표 건물로 철수한다.
  • 델타 포스와 획득한 목표물이 지상군의 차량에 탑승한다.
  • 가장 마지막에 합류할 레인저도 지상군의 차량에 탑승한다.
  • 그리고 철수한다.
  • 30분이면... PROFIT!

블랙 호크로 투입될 레인저는 총 4개 분대이며 마이클 D. 스틸 대위(Cpt. Michael D. Steele)가 지휘한다. 스틸 대위의 호출부호는 줄리엣 64(Juliet 64)이다. 마찬가지로 각 분대의 분대장도 줄리엣 호출부호지만 번호는 2x번대다.

  • 초크 원(Chalk One) : 지휘관 래리 페리노 중위, 목표 건물의 남동쪽 코너 방어. 스틸 대위가 이 분대에서 레인저를 지휘한다.
  • 초크 투(Chalk Two) : 지휘관 톰 디토마소 중위, 목표 건물의 북동쪽 코너를 방어. 이 분대엔 M203 유탄사수가 두 명, M60 사수가 한 명이었다.
  • 초크 쓰리(Chalk Three) : 지휘관 션 왓슨 중사, 목표 건물의 남서쪽 코너를 방어.
  • 초크 포(Chalk Four) : 지휘관 맷 에버스만 하사, 목표 건물의 북서쪽 코너를 방어. 이 분대엔 M60 사수, M249 사수가 한 명씩 있었다.

위의 분대가 탑승하는 블랙 호크와 상공 엄호 및 다른 임무를 가진 블랙 호크의 호출부호는 아래와 같다. 참고로 영화에선 모조리 미니건을 부착하고 나오는데 레인저가 탑승한 헬리콥터만 미니건을 부착했다. 다른 헬리콥터는 50구경 중기관총M60D 기관총을 부착했다.

  • 슈퍼 61(Super 6-1)[17] : 클리프 월콧 준위(CWO), 도노반 브라일리 준위(CW3)가 조종한다. 기관총 사수 1명, 델타 포스 저격수인 대니얼 부쉬, 짐 스미스 등 조종사 외 3명이 탑승했다. 편대장 기체다.
  • 슈퍼 62(Super 6-2)[18] : 마이크 고피나 준위가 조종하며 부기장, 게리 고든, 랜디 셔가트, 기관총 사수 2명, CCT 1명, 항공구조사 3명 등 총 10명이 탑승했다.
  • 슈퍼 64(Super 6-4) : 마이클 듀란트 준위(CWO), 레이 프랭크 준위(CW4)가 조종한다. 이 외에 기관총 사수 2명(윌리엄 클리블랜드, 토마스 필드)과 초크1도 탑승했다. 때문에 스틸 대위의 호출부호가 줄리엣 64.
  • 슈퍼 65(Super 6-5) : 리차드 윌리엄스 대위가 조종한다. 초크2가 탑승했다.
  • 슈퍼 66(Super 6-6) : 스탠 우드 준위(CW3), 게리 풀러 준위(CW4)가 조종한다. 초크3가 탑승했다.
  • 슈퍼 67(Super 6-7) : 제프 니콜라스 준위(CW3), 샘 섐프 준위(CW2)가 조종한다. 초크 4의 헬리콥터다.
  • 슈퍼 68(Super 6-8) : HH-60M 메디백 호크(Medevac hawk) 기종이다. 댄 졸로타 준위가 조종한다. 이 외에 부기장, 기관총 사수 2명, 군의관 3명, CCT 2명, 델타 저격수 1명이 탑승해 SAR 임무를 수행하는 헬리콥터다.
  • 로미오 64 aka C-2(Romeo 6-4 aka Command & Control-2) : 지휘 헬리콥터다. 영화에서 'C-2' 하는 게 바로 이 헬리콥터다. C-1(씨원)은 모가디슈 공항. 톰 매튜 중령과 개리 하렐 중령이 탑승하며 각각 헬리콥터 지휘와 지상군 지휘 및 길앞잡이 역할로 나뉜다.

델타 포스는 킬로(Kilo)라는 호출부호를 사용하며, MH-6 리틀버드는 바버(Barber)라는 호출부호를 사용한다. 총 4대의 MH-6 리틀버드와 16명의 델타 포스가 투입됐다.

  • 바버 51 & 킬로 11 : 에릭 바나가 연기한 델타 포스 대원 노먼 후트 깁슨이 탑승한 헬리콥터.
  • 바버 52 & 킬로 12
  • 바버 53 & 킬로 13
  • 바버 54 & 킬로 14 : 목표 건물의 옥상에 착륙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역할.

MH-6 리틀버드와 같이 투입돼 AH-1, AH-64 역할을 한 AH-6 리틀버드의 호출부호는 스타(Star)이다. 보다시피 투입된 헬리콥터들 가운데 호출부호 넘버링이 4로 제일 앞자리다. 작전 종료 후에는 성난 무장세력이 모가디슈 공항에 쳐들어올 것으로 예상돼 미리 반격하려는 등의 초계 활동 이유로 모가디슈 상공을 며칠간 비행할 예정이었다. 때문에 가장 앞자리 번호가 주어졌고, 제대로 된 공격 헬리콥터도 없는지라 그만큼 중요한 편대였다.

  • 스타 41 : 칼 마이어 준위(CW3)와 케이스 존스 준위(CW5)가 조종한다. 작 중에서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엄청난 활약을 했다.
  • 스타 42
  • 스타 43
  • 스타 44

대니 맥나이트 중령(Ltc. Danny McKnight)이 지휘하는 지상군(호송대)의 호출부호는 유니폼 64(Uniform 64)이다. 맥나이트 중령이 탑승한 지휘차량에만 무전기가 있고, 다른 차량에는 무전기가 없다. 지상군에 SEAL팀 x명과 델타 포스 x명이 동승해 같이 투입됐다.

아이린(Irene)은 체포할 요인을 지칭하는 암호명이면서 동시에 작전개시 암호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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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호텔. 목표 주변에 있던 건물이다.[19]

목표 건물이 있는 블럭은 흑해(Black Sea)라는 암호명으로 명명됐다. 해당 건물은 큰 특징이 없기 때문에 맞은편에 있는 올림픽 호텔(Olympic Hotel)이 실제 목표 건물을 지칭하는 암호명으로 지정됐다. 잠깐... 저게 호텔이라고? 그래서 올림픽 호텔을 지칭하면 올림픽 호텔이 아니라 목표 건물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흑해의 북서쪽과 남동쪽에 각각 암드 포스 거리(Armed Forces Street)와 내셔널 거리(National Street)이 있었으며,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무기 시장(바카라 시장)이 바로 암드 포스 거리를 가운데에 두고 좌우에 걸쳐있다. 그리고 북동쪽이 할와대그 거리(Hawlwadag Street)다.

앞서 말한 슈퍼63 지휘헬기와 함께 투입된 조기경보기라는 것이 실제로는 대잠초계기P-3이다.

4.1 작전 개시

1993년 10월 3일 13시 50분, 소말리아 정보원에 의해 살라드 엘미가 목표 건물에 들어온 게 확인됐다. 하산 아왈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먼저 입장한 것으로 추측됐다. 14시 49분에는 다른 무장 세력 가문의 수장과 두 명의 보좌관이 입장한 것으로 확인됐다. 그리하여 15시 32분에 지상군과 C-2 헬기가 내셔널 거리로 가장 먼저 출발하고 다른 헬리콥터는 몇 분 후에 이륙한다.

험비와 트럭 무리가 모가디슈 시내로 들어온다는 소식이 민간인을 통해 무장 세력에 빠르게 전파됐다. 이미 미군에 대한 불신이 쌓일대로 쌓여 자체적으로 무장한 민간인, 즉 민병대들은 모가디슈 거리 곳곳에 쓰레기 더미와 불타는 타이어 등을 쌓아 지상군의 접근을 사전에 봉쇄해 내셔널 거리 방향이던 것을 암드 포스 거리로 돌렸다. 다시 말해 민병대가 함정을 판 것이다.

이걸 알 리 없는 지상군은 길이 막혔다고 징징댔고, 하늘에서는 거리를 잘 볼 수 없고 동시에 타이어가 불타면서 발생시킨 연기 때문에 잘 보이지도 않아 더 남서쪽에 있는 비아 아그포예(Via Agfoye) 거리로 돌렸었다가 P-3 기가 다시 길을 가르쳐 줘 암드 포스 거리로 되돌아갔다. 결국엔 시작부터 꼬였다. 이런 와중에 민병대들은 메가폰을 들거나 해서 시민들에게 "나와서 너희 집을 지켜라!"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소말리아어로 "Kasoobaxa guryaha oo iska celsa cadowga!"("Come out and defend your homes!")이다.

먼저 대기하고 있어야 했던 지상군은 헬리콥터가 현장에 도착한 15시 40분경에 암드 포스 거리에 도착했다. 사실 델타 포스와 레인저가 탑승한 헬리콥터도 목표 건물에는 굉장히 늦게 도착한 것이다. 중기관총과 소총 등을 무차별적으로 쏘아대며 대공화망을 만드는 바람에 접근 자체가 쉽지 않았고, 여기에 RPG-7도 헬기가 보이기만 하면 되는대로 쏴대는 통에 고도를 낮추기도 쉽지 않았다.

특히 슈퍼67이 많은 총격을 받아 아예 총격이 덜 한 곳, 그러니까 처음 예정된 곳보다 훨씬 북쪽까지 올라가서 초크 4를 하차시킨다. 이 와중에 토드 블랙번 일병[20]이 밧줄을 놓쳐 그만 21m 상공에서 추락을 해 첫 부상자가 발생했다. 그리곤 깨알같은 Elf down! 영화에선 RPG-7 때문인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론 블랙번 일병이 실수로 밧줄을 놓쳤다. 같은 시각에 초크1, 초크2, 초크3는 목표지에 패스트 로프로 착륙해 목표 건물을 에워쌌으며, 15시 42분에 델타 포스도 목표 건물 진입에 성공하며 공식적으로 작전이 시작됐다.

투입하고 2~30분 가량은 총격전이 일절 없었다. 구글링을 하면 나오는 실제 모가디슈 전투 당시 땅에서 찍힌 사진이 모두 이때 찍혔다.

다만 목표 건물에 들어가 섬광탄 등을 이용해 방을 수색하고 다니던 델타 포스를 도망치려는 민병대 또는 목표물로 오인해 초크1, 초크2에서 델타 포스를 향해 발포했다. 그리고 델타 포스도 응사했다.(...) 레인저와 델타 포스간 총격전이 10분 가량 이어졌으며, 델타 포스가 먼저 아군의 오인사격임을 알아채고 쏘지 말라고 무전을 보낸 덕에 사격이 멈추게 됐다.[21]

그러나 이 총격전 소리를 자신들에게 쏘는 것으로 오인해 성난 민간인이 목표 건물 일대로 몰려오기 시작하지만 여전히 총격전은 없었다. 초크4에서 부상자가 발생했고, 애초에 방어하기로 한 지역보다 더 먼 곳에 갔음을 확인한 C-2는 험비 3대를 차출해 블랙번을 후송시키기로 결정하고, 초크4도 목표 건물로 철수시켰다가 방어 지역으로 재투입하기로 결정한다. 이에 따라 초크4가 목표 건물로 철수를 진행하며, 블랙번을 호송할 험비 3대가 먼저 목표 건물로 출발한다.

15시 58분, 델타포스의 요인 체포를 기다리며 암드 포스 거리에서 대기하던 지상군 행렬 중 가장 후미에 있는 5톤 트럭 한 대에 RPG 로켓포가 날아와 25명의 부상자가 동시에 발생한다. 이들이 다른 트럭에 탈 수 있도록 하차해서 엄호를 하다가 2명이 추가로 부상당한다.

16시, C-2 헬기와 P-3는 모가디슈 곳곳에서 목표 건물 일대로 모여드는 민병대를 포착한다. 그러나 이미 목표 건물 일대에 민병대가 있었는데, 워낙 많은 민간인 무리에 섞여있어서 누가 무장을 했는지 파악을 할 수 없는 통에 그냥 싸잡아 민간인으로 판단을 내려버리곤 목표 건물 일대에서 아직 총격전이 진행되진 않는다고까지 판단했다. 간헐적이지만 총격전이 진행되고 있기는 했다. 블랙번을 데리고 목표 건물로 철수하던 초크4와 암드 포스 거리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초크2에서 총격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16시 02분에 목표물이 확보됐다. 체포한 사람은 하산 아왈과 살라드 엘미를 비롯해 무려 210명에 달했다. 같은 시각, 블랙번을 데리고 초크4가 목표 건물에 도착했다. 목과 척추 등에 큰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2분 후에 험비도 도착했다. 험비는 즉시 블랙번을 데리고 철수했고, 초크4는 방어 지역으로 다시 출발했다.

그런데 지상군의 목표건물 도착이 늦어졌다. 길목이란 길목이 죄다 막혀서 목표 건물로 들어갈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길을 알려줘도 제대로 보이지 않아 안 보이는 까닭에 막힌 길만 알려줬고, 목표 건물로의 접근이 늦어지자 낮은 고도에서 관측하기 위해 슈퍼61과 스타42, 스타43이 고도를 낮춰 지상군 엄호 등을 하며 막히지 않은 길을 대신 지상군에게 알려주며 지상군의 길을 터줬다.

C-2가 고도를 낮추지 못한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이미 모가디슈 상공은 RPG-7과 무차별적으로 쏘아대는 중기관총으로 만들어진 화망 때문이었다. 그리고 영화처럼 헬기가 멈춰있던 게 아니라 매우 높은 고도에서 계속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지상군의 진입이 늦어진 이유는, 블랙번을 데리러 목표 건물로 향하던 험비 3대가 지나친 길을 민병대가 또 막아버려서다. 블랙번을 태운 험비 3대도 왔던 길로 되돌아가려다가 막혀서 우회를 했다. 그러다가 스타 41 헬기의 지상 지원을 받으면서 모가디슈 북동쪽 끄트머리에 있는 10월 21일 거리(21 October Street)를 통해 겨우겨우 시내에서 빠져나오는데, 이 과정에서 제프 스트러커 하사가 운전하는 험비의 기관총을 잡고 있던 도미닉 필라 하사가 머리에 총탄을 맞고 즉사하고 말았다. 첫 번째 전사자가 발생했다.

16시 15분이 되어서야 지상군이 목표 건물에 도착해 목표물과 델타 포스를 함께 태우기 시작했다. 이미 트럭 한 대를 잃은 마당이라 남은 두 대의 5톤 트럭은 물론 험비에까지 정원 초과 현상이 일어났다.

16시 17분, 가장 끄트머리의 험비에 있던 클레이 오딕 일병이 AK-47을 쏘면서 달려오는 민병대를 포착하고 50구경 기관총을 쏘려고 험비의 거치대에 올라가다가 총격을 당해 부상을 입는다.

16시 18분, 레인저에 교전 중지 명령이 하달되고 목표 건물로 철수 명령이 떨어진다.

4.2 블랙 호크 다운

16시 20분, 아무거나 맞으라며 민병대가 무차별적으로 쏘아대던 RPG-7 로켓에 슈퍼 61이 진짜로 맞아버린다. 영화와 달리 실제로는 꼬리의 회전익과 충돌하며 폭발해 꼬리 자체가 사라졌다. 그래도 명색이 대전차무기인데 영화처럼 폭죽 효과 좀 일어난다는 게 말이 안 된다.(...)

슈퍼61은 목표 건물로부터 북동쪽으로 3블럭 정도 떨어진 곳에 추락한다. 말이 3블럭이지, 거리상으론 280~450m 사이이다. 클리프 월콧과 도노반 브라일리 준위가 그래도 최대한 가까운 곳에 추락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기 때문에 이 정도.

16시 21분, 슈퍼 61의 추락지로 민병대가 몰려가기 시작했다.

16시 23분, 목표물 탑승이 아직 끝나지 않은 지상군 호송대 쪽에서 부상자 2명이 발생했다.

16시 24분경, C-1(모가디슈 공항)은 현장의 병력 전체가 추락지로 이동해 민병대의 접근을 봉쇄하라고 명령을 내린다. 같은 시각 트럭에 RPG-7 직격탄이 날아와 꽂혀 부상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체포한 요인 상당수도 부상을 당한다. 결국 목표 건물 앞에 트럭을 버리고 남은 트럭 하나에 탈 수 있는 모든 병력과 요인이 뒤섞여서 탑승한다.

16시 26분, 목표물을 모두 태운 지상군 트럭, 험비 무리가 추락지로 이동을 시작했다. 지상군 차량에 초크 1,2,3,4가 다 탈 수 없어 스틸 대위는 뛰어서 추락지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한편 마이클 듀란트와 레이 프랭크가 조종하는 슈퍼 64가 상공을 배회하면서 슈퍼61의 추락지를 1차적으로 봉쇄하면서 대니얼 부쉬, 짐 스미스 델타 포스 측 저격수 두 명의 생존을 확인한다. 스미스는 슈퍼61 안에서 추락지를 방어했고 부쉬는 영화에서처럼 밖으로 나와 사격했다.

16시 27분, 스타41이 현장에 도착한다. 스타41은 지상에 완전히 착륙하지 않았으며, 대신 케이스 존스 준위가 뛰어내려 슈퍼 61에 접근해 부쉬와 스미스를 데리고 조종사의 전사와 승무원의 중상까지 확인한 다음 스타41로 돌아왔다. 그때까지 스타 41에 혼자 남은 칼 마이어 준위는 한 손으로는 사이클릭 조종간을 잡고 헬리콥터의 자세를 유지하면서 신속하게 이륙을 준비하고 다른 한 손으로 MP5K 기관단총을 쏘아대는 다급한 상황이었다.(...)신컨 존스 준위, 부쉬, 스미스 일행이 왔을 때 비로소 착륙했으며, 조종사 두 명 말고 탈 공간이 없을 AH-6에 두 저격수를 태우고 유유히 모가디슈 공항으로 복귀하려는데, 추락지 인근에서 고전하는 초크2의 지상지원을 해주고, 총격을 받아 휘청이는 슈퍼65와 함께 복귀했다.(...)

16시 29분, 추락지 근처에 도착한 슈퍼68에서 군의관과 항공구조사가 내려서 추락지로 접근했다. 영화에서처럼 추락지 한 가운데로는 접근하지 못했다. 이들은 슈퍼 61 내부에서 중상을 당한 승무원을 치료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슈퍼 68도 RPG-7 로켓에 피격됐으며, 조종석 창문이 반쯤 깨질 정도로 격렬한 총격을 받았다. 다행히 추락은 하지 않고 간신히 모가디슈 공항에 복귀했으나 총격으로 인한 유압상실과 엔진출력 저하로 모가디슈 공항 활주로에 거칠게 불시착[22]해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탑승자 전원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지만 다행히 헬기가 파괴되지 않고 버텨서 사망자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슈퍼68은 이후 다시는 모가디슈 상공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같은 시각 바버 51과 바버 52가 모가디슈 공항에서 총알과 전투식량을 갖고 모가디슈로 날아갔다. C-1에선 교전이 30분 내에 끝나지 않을 것이란 판단을 내렸다. 이어 바버 54와 슈퍼 66도 모가디슈 공항에서 총알과 현장에 투입되지 않은 델타 포스 측 저격수를 추가로 싣고 날아갔다.

파일:Attachment/ranger.jpg

16시 30분, 톰 디토마소 중위가 이끄는 초크 2가 추락지에 도착했다. 추락지가 워낙 가까웠기 때문에 초크 2는 그냥 직선으로 달리다가 추락지가 보이자 좌회전 한 번 하고 도착했다. 16시 32분에 맷 에버스만 하사가 지휘하는 초크 4도 추락지에 도착했다. 초크 4 역시 쭉 달리다가 좌회전해서 다시 쭉 달리니까 추락지였다.

4.3 P-3의 우울

16시 30분부터 본격적으로 P-3가 지상군이 가야 할 길 C-2에 보고하고, C-2가 지상군에 보고하는 과정으로 지상군의 이동이 개시됐다.

헌데, P3는 대잠초계기다. 대지상전용 조기경보기 용도로 쓰기엔 뭔가 부족한 게 많다는 말. 그래도 어느정도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일단 앞서 말한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면, P-3가 스캔한 지상 상황을 전송받은 ▶ C-2는 새 명령을 받으려고 ▶ C-1에 보고하고 ▶ 상황확인 뒤 새로운 계획을 세워 명령을 보내면 ▶ C-2는 지상군에게 보고를 하는 방식이다.

이런 복잡한 과정이 복잡한 시가지에서 계속해서 빠르게 변하는 교전 상황을 전혀 따라가지 못했고, 실제 지상군에 명령이 도달할 때쯤이면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어 있는 사태가 계속 된 것이다.

이러다보니 민병대가 미처 막지 못한 길을 제때제때 찾을 수 없어서 공중에 있는 헬기에 의존해야 하는 지상군으로선 추락지로 들어가고 싶어도 막상 해당 위치에 도착하고 나면 막힌 길에 도착해 들어갈 수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헬기의 도움을 받거나, C-2의 고도를 낮춰서 육안으로 지상을 내려다보게끔 하자니 화망은 여전하고 눈 먼 RPG-7 때문에 위험했다. 그래서 C-2도 더 높은 고도에서 지상을 한 눈에 들여다보는 P-3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는데, 알려달라는 건 다 알려줘서 P-3도 이만저만 고생이 아니었다.

덕분에 지상군은 같은 길을 계속 왔다갔다 반복하면서 추락지 주변을 싹 다 돌았다. 영화처럼 길을 잃은 적은 없다. 추락지로 접근할 수 있는 길이 막혀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찾아다니느라 움직인 것. 이러다보니 사상자가 늘어나고, 눈치로 P-3와 C-2의 통신이 느려서 지상군에 도달하는 통신도 느리다는 것을 알게 된 맥나이트 중령은 "P-3와 우리를 직접 연결시켜달라"고 요청했다. 그리하여 직접 연결이 돼 P-3 측으로부터 "최대한 빠르게 알려주겠다"는 대답을 들었지만, 막상 현장에 도착하면 또 막힌 길.

답답하기는 지상군을 엄호해주던 스타 42와 스타 44도 마찬가지였고, C-2나 C-1도 자기들대로 답답하고, P-3는 열심히 알려주고 있는데 현장으로부터 쌍욕까지 먹으니 잘 알려주고 싶어도 알려줄 엄두도 못 내게 됐다. 심지어 상대 쪽의 무전기 잡고 있는 사람이 중령(...)이며 중계소 역할 해주는 C-2에서 무전 받는 사람도 중령(...). 후라이팬에 기름 두르고 불 위에 올려서 뜨겁게 달군 다음 손바닥을 10분 동안 올려놓으면 왜 욕이 나오는지 알 수 있다.

보다 못해 개리슨 장군이 P-3에 직접 연락을 해서 "안 막힌 길은 전부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16시 35분에 지상군이 도착했으나 역시 막힌 길. 민병대의 로켓포 공격과 저격에 사상자를 내는 와중에 초크1과 이들을 따라 이동하는 델타 포스는 실제로 길을 잃어버리고 만다. 심지어 당시 CIA 국장의 사위였던 얼 필모어(영화에서는 윌리엄 피츠너가 연기한 샌더슨[23]이 던진다.)가 건물 창문으로 수류탄을 던지다가 총격으로 사망하면서 레인저의 두려움이 한 층 증가됐다.

4.4 슈퍼 64 추락

16시 38분, 초크2, 초크4가 방어 중인 슈퍼 61 추락지에 바버 51과 슈퍼 65가 날아와 탄약과 전투식량, 수통을 보급했다. 같은 시각 스타 41이 기관포와 로켓포로 한바탕 휩쓸고 지나갔고 슈퍼 62가 항공구조사와 CCT를 추가로 투입한다.

16시 40분, 추가 지상지원을 위해 슈퍼64가 추락지로 날아가다가 그만 RPG-7 로켓에 피격된다. 이 역시 하늘에 있는 헬리콥터를 보고 조준도 안 하고 대충 쏴대 날아다니던 것에 맞은 것이다. 슈퍼 64는 목표 건물에서 500여m 남쪽, 추락지에선 무려 850여 미터나 되는 곳에 추락을 했다.

모든 병력이 슈퍼 61 추락지에 묶여있는데 또 추락을 해버리니 개리슨 장군은 해당 기체에 대한 구조를 포기한다. 어차피 다 죽었을 거니까. 더군다나 민병대 무리가 또 몰려들고 있었다. 하지만 게리 고든과 랜디 셔가트는 슈퍼 64의 추락을 목격했으며, 때문에 C-2에 슈퍼 64 추락지 투입을 요청한다. 그러나 C-2는 허락을 안 해줬다. 어차피 다 죽었을 거니까.

16시 41분, 지상군도 헬리콥터가 또 추락했다는 무전을 받는다. 맥나이트 중령은 C-2에 "슈퍼 64 추락지에는 갈 수 없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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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슈퍼 64' 실제 추락 사진. 바로 이곳으로 두 델타 포스 저격수가 자원해서 내려간다. 슈퍼 64가 추락하면서 이미 주변 지형지물을 싸그리 쓸어버렸다. 그래서 보다시피 적들은 포위가 가능하지만 방어는 불가능한 곳이 됐다.

16시 42분, 게리 고든과 랜디 셔가트의 추락지 투입 요청이 계속되자 C-1과 슈퍼 62가 연결됐으며, 죽을 수도 있다는 개리슨 장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결국 투입 허락을 받아낸다.

16시 43분, 슈퍼 64의 추락지에 랜디 셔가트와 게리 고든이 투입됐다. 윌리엄 클리블랜드와 토마스 필드, 레이 프랭크의 전사를 확인하고 마이클 듀란트의 생존을 확인한 그들은 슈퍼 62와 스타 41의 지원을 받으면서 시체를 인근 가옥에서 수습한다. 영화에서 마이클 듀란트와 랜디 셔가트가 나눈 대화는 실제이다. "호송대는 어디 있습니까?"라는 듀란트의 물음에 셔가트는 "더 이상 구조대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하고 헬기 조종석에 꽂혀있던 MP5k 기관단총과 레이 프랭크 준위가 착용하고 있던 권총, 그리고 자신의 탄창(M1911 탄창)을 건네줬다.

영화에서처럼 둘이서만 치열하게 싸운 것은 아니다. 슈퍼 62는 RPG-7 로켓에 맞아 파키스탄 다국적군이 주둔하는 모가디슈 운동장 인근 지역에 불시착했다. 스타 41은 계속 상공에 남아서 민병대의 접근을 봉쇄했다. 나중엔 슈퍼 61 추락지에 있던 스타 43과 교대로 날아다니며 방어를 했으며 슈퍼 67이 탄약을 보급해주는 등 족히 한 시간에 달하는 17시 40분까지 버텼다.

이 전인 17시 00분경, 토드 블랙번을 데리고 철수했던 험비 3대가 슈퍼 64의 추락지로 출발했다. 17시 41분, 게리 고든의 사망 후 17시 42분 랜디 셔가트가 사망한다. 마이클 듀란트는 포로로 생포된다.

원래 이슬람교 전통에 따라 시체 훼손은 엄격히 금지되고 24시간 안에 매장해야 되나 오폭과 선전, 그리고 교전으로 울분이 폭발한 군중들은 시체를 끌고 다닌 것으로도 부족해 거꾸로 매달아 오물과 돌을 던지기까지했다. 나중에 사우디아라비아 다국적군이 시체를 수습하려다가 수천 명의 성난 군중에 쫓겨나게 된다.[24] 다행히 둘의 시체는 사우디아라비아를 통해 본국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시체를 끌고 다니며 훼손하는 장면을 파라 아이디드 무장 세력의 인물로 보이는 사람이 녹화해 인근 나라에 있는 미 방송국 특파원에게 전달했고, ABC가 특종으로 보도하면서 아침에 생방송으로 가정에 송출됐다. "델타 포스도 죽는구나."라는 말이 이때 나온 말.

4.5 The Lost Convoy

한편 16시 43분, 할와디그 거리에 막히지 않은 길이 있다는 C-2의 보고를 받고(그리고 C-2는 P-3에서 보고를 받았다.) 할와디그 거리로 돌아왔으나 막히지 않은 길을 찾지 못한 지상군은 다시 할와디그 거리를 질주한다. 그러다가 RPG에 집중 피격을 받아 마지막 한 대 남은 트럭이 격파된다. 이 피격으로 델타 포스 측 티모시 마틴의 허리가 반토막이 났고[25], 운전대를 잡고 있던 리차드 코왈레스키 일병의 허리에는 불발탄이 꽂힌다. 사상자 수습을 위해 전 병력이 할와디그 거리 한복판으로 쏟아져 나와 총격전을 벌였고, 케이시 조이스 하사가 사망하고 로렌조 루이스 하사가 중상을 당한다. 스타 42, 스타 44는 물론 슈퍼 61 추락지를 방어하던 스타 43까지 투입됐으나 몰려드는 민병대가 헬기에 대한 공격을 중단한 적이 없었고 화망도 여전히 만드는 중이었다.

수습은 16시 52분이 되어서 끝났다. 시체를 더 이상 담을 공간이 없어 탄창, 수류탄, 수통 등 필요한 것만 챙기고 전투현장에 시체는 모조리 버렸다. 그리고 16시 54분, 맥나이트 중령이 "임무 종료" 무전을 보내오며 지상군의 임무는 실패(The Lost Convoy, 실패한 호송대)했다.

16시 56분 지상군은 철수 명령을 받았다. 모가디슈에서 나가는 것도 그냥은 불가능해서 스타 41과 스타 42의 근접 지원을 받았다. C-2도 이번엔 직접 지상 낮은 고도까지 내려와서 길을 직접 보고 지상군에 길을 알려줬다.

17시 34분, 슈퍼 64 추락지로 들어갈 길을 찾지 못한 험비 3대가 지상군과 함께 모가디슈 공항으로 돌아간다. 같은 시각, 슈퍼 61 추락지에서 초크4 소속 제임스 스미스 상병이 민병대에 둘러싸여 총격을 받는다.

5 구조 작전

17시 46분, 지상군 전체 병력이 모가디슈 공항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약 99명의 병력이 슈퍼 64 추락지에 묶여 있었다. 스미스 상병의 부상이 심각했으나 슈퍼 64 추락지로 스타41, 스타43, 스타44 외엔 투입이 불가능했다. 사람으로 치면 곧 사망판정을 내려야 할만큼 모든 블랙 호크가 심한 피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16시를 기점으로 교전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는데, 그 이유는 너무 어두워서 야간전투가 없을 것으로 예상해 야간투시경을 가지고 오지 않은 레인저와 델타 포스 눈에 뵈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이건 민병대도 마찬가지라 양측 모두 자리만 지킬 뿐 교전은 거의 진행되지 않았다.

17시 08분, 슈퍼 66이 물, 탄약, 응급의료 약품 등을 슈퍼 61 추락지에 보급했다. 이 과정에서 RPG-7에 또 피격됐지만 다행히 어떻게든 버텨냈다. 슈퍼 66이 내려놓고 간 보급품도 스미스 상병의 부상에 도움이 되지 않았고, 결국 20시 27분, 제임스 스미스 상병은 사망한다.

UN 다국적군과 협의로 관할지역내 발생이 예상되는 우발사태에 대한 군사적 요구와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기존 작전을 훨씬 확장시켜 모가디슈 시내에서 모든 전투 병력을 탈출시키는 새로운 작전이 구상된다. 그리하여 JSOC 소속 지상군의 차량이 중무장을 하고 다시 모가디슈 시내로 투입됐고, 이 뒤를 말레이시아, 독일 다국적군 소유의 100여 대가 넘는 장갑차와 파키스탄 다국적군 소유의 M48 전차가 따랐다. 10산악사단 소속 블랙 호크와 코브라 공격헬기의 지원을 받았으며, 10산악사단 전체 병력과 14보병연대 예하 2대대, 그리고 말레이시아와 파키스탄 UN 다국적군 등으로 이루어진 구조대 병력이 23시 23분에 모가디슈 공항과 모가디슈 운동장에서 출발했다.

모가디슈 공항에서 출발한 일부 병력이 다음 날인 10월 4일 01시 55분경에 슈퍼 64의 추락지에 도착했다. 하지만 듀란트는 물론 시체도 찾을 수 없었다.

02시경, 슈퍼 61 추락지에도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구조대가 도착했다. 그 전부터 스타 41, 스타 42, 스타 43, 스타 44가 지속적으로 슈퍼 61 추락지를 비행해서 진입에 큰 어려움은 없었지만 그래도 공격은 계속 돼 말레이시아, 파키스탄 다국적군에서도 사상자가 발생했다.[26] 그리고 말레이시아 다국적군 소유의 장갑차 한 대가 RPG-7에 격파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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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는 임대가 상대적으로 수월한 장갑차가 맹활약을 하는 것처럼 나오지만, 실제로는 파키스탄 다국적군 소유의 M48 전차가 대활약을 했다.

03시에 월콧 준위의 사체를 마지막으로 꺼내며 구조 작전이 종료된다. 그리고 시내에 남겨둔 시체 등을 찾느라 밤 내내 모가디슈 시내를 들쑤시고 다닌다. 몇 구의 시체를 제외하고 다 찾지 못했지만 재정비를 위해 05시 30분부터 모가디슈 시내에서 파키스탄 다국적군이 주둔하고 있는 모가디슈 운동장으로의 탈출이 시작됐다.

실제로 장갑차며 트럭이며 수거한 시체와 잔해 등으로 꽉꽉 차서 몇 명의 레인저가 차량에 탑승하지 못했다. 몇 명은 천장에 타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응사를 하다가 머리를 맞고 험비 안에 나뒹구는 동료를 하루종일 봤는데 과연 천장에 레인저가 탔을까? 블랙 호크 다운 영화 후반부에 두 발로 뛰어서 모가디슈 시내를 탈출하는 장면은 극적인 연출이 아니라 실제이며, 모가디슈 운동장에 도착하기 직전까지 교전이 계속 됐지만 사상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들이 뛴 길은 '모가디슈 마일'(Mogadishu Mile)이라고 부른다.[27]

6 피해

공식적인 발표에 따르면 미군은 18명이 죽고 73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1명이 포로가 되었다. 말레이시아군에서도 1명이 사망하고 7명이 부상당했으며, 파키스탄군 역시 1명의 사망자, 2명의 부상자가 나왔다.[28]

소말리아의 경우 아이디드 쪽의 발표에 따르면 315명이 죽고 812명이 부상당했다. 하지만 이후 미국과 UN의 자체조사에 따르면 약 1500에서 3000여명 정도가 사망 혹은 부상당했다고 한다. 일단 21명의 소말리아 민병대가 포로가 된 것은 확실하다.

사망자 18명 + 부상자 73명은 월남전 이후 벌어진 마야게즈 호 승무원 구출작전의 실패[29] 다음으로 미군에게 큰 피해 규모였고[30], 전면전인 걸프전에서조차 50만 명의 미군 중 294명이 전사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뼈아픈 피해였다. 또한 그 18명이라는 사망자가 세계적으로도 최고 수준의 특수부대인 델타포스, 미 육군 최정예 보병인 레인저, 그리고 야간 침투가 전문인 정예 강습 조종사인 것을 감안하면 '20명에 근접하는 사망자'는 씻을 수 없는 상처이다.

이후, 2011년 8월 5일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의 공격으로 미군 헬기가 격추, 네이비 씰에서도 최정예인 DEVGRU 대원 25명을 비롯한 미군 31명(과 아프간 정부군 7명 포함 모두 38명 즉사)이 전사하면서 헬리콥터 격추 피해로 이 전투의 피해를 넘어섰다.

6.1 고딕 서펀트 작전의 문제점과 또 다른 문제점들

작전에 문제가 많기는 했다. 현지 사정을 잘 아는 것은 현지에 주둔 중인 JSOC인데, 제대로 이야기를 듣지도 않고 고딕 서펀트 작전을 승인해버렸다. 그 결과 야간 잠행이 특기인 특수부대와 야간 비행이 특기인 특수전 조종사들이 대낮에 헬기를 띄워서 지옥의 한 가운데로 몰려갔다.

거기다 위에서 말한대로 160 특수전항공연대는 부대 별명이 '나이트 스토커(Night Stalker)'로 불리던 부대로, 미 육군에서도 야간 항공 작전에서 특출난 실력을 지닌 조종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나이트 스토커의 훈련 중에는 달도 안 뜬 컴컴한 밤맨눈으로 저고도 비행을 하는 것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사람들과 장비들을 주간 작전에 투입했음은, 결과가 좋았어도 개판이 당연히 예상되는 것이었다. 회담 시간이 낮이기는 했지만, 회담 시간을 알아냈으니 목표물 미행을 통해 야간에 데리고 오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그 전에 아토를 잡았을 때는 대대적으로 싸울 준비를 하고 밤에 쳐들어가서 아무 일도 없이 데리고 왔었다. 그만큼 밤이 어둡고, 월광에 기댈 정도로 인프라가 없는 동네라 제아무리 소말리아 사람들이더라도 미군 상대하기엔 굉장히 껄끄러운 시간대. 아토를 잡았을 때 교훈을 무시하고 대낮에 특수부대를 지옥에 던져놨으니 작전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있나?

사실 이런 지시를 내린 데에 이유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당시 클린턴 미 정부는 러시아에서 일어났던 보리스 옐친의 쿠데타 진압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정치·외교적으로 불리해질 수 있는 중화기 투입은 사리고 있던 상황이다.

그리고 지상에서 차량과 합류하여 되돌아온다는 부분은 말로만 대단했다. 블랙 호크 같은 몸집의 헬리콥터가 모가디슈에 착륙할 공간이 마땅치 않고, 착륙에 성공하더라도 그 순간이 가장 취약한 순간이라 험비를 선택한 것.

하필이면 선택지가 험비 말고 없었다는 것이다. AC-130, AH-64 아파치, M1 에이브람스는 고사하더라도 M2 브래들리라도 보내줬어야 했다. 하지만 개리슨 장군이 이 요청을 너무 늦게 한 것도 문제였다. 빨리 했더라도 브래들리가 왔을까 싶지만 애초에 경보병 부대만 덩그러니 보내놓고 "특수부대니까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오인한 펜타곤에게 더 큰 문제가 있다.

특수부대는 개개인은 강하다. 하지만 일당백으로 싸우면 다 이기고, 정면으로 부딪히면 다 이기는 천하무적이 아니다. 이들의 강점은 어디까지나 몰래 접근해서 목표물만 치고는 다른 적에게 반격 받기 전에 빠지는 것이다. 그 점에서 특수부대만 던져놓은 것은 삽질이나 다름없다. 예전처럼 해병대를 다시 데려다 놓거나, 10산악사단이라도 원상태로 되돌려 놨으면 무리는 있겠지만 안 죽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델타 포스의 시체를 보는 충격은 없었을 터.

즉, 결과만 놓고 정리하자면 사실상 화력지원은 거의 없다시피한 상황에서 오직 보병과 험비만으로 사방에 중화기로 무장한 적진 한가운데를 대낮에 대놓고 들어갔다 나오는 임무였던 것이다.

더구나 계속된 미국의 압박과 적십자위원회원 54명 체포, 아토의 체포 등, 겪어볼 수 있는 모든 것을 경험해 풍부한 경험으로부터 파라 아이디드는 자기가 어떻게 잡힐 것이란 예상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더욱 모습을 감추면서 라디오를 통한 선전만 해댄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조너선 하우 UNOSOM 지휘관과 파라 아이디드의 대결 양상이 치열했다. 그러다 보니 아이디드가 미국을 상대로 싸우는 소말리아 유일의 인물이란 이미지가 생겼다. 본인이 이런 이미지를 잘 이용하기도 했다.

이라크 전쟁에서 후세인에게도 이런 이미지가 있는데, 파라 아이디드의 이미지를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답습했다. 그야말로 외부의 적에 대항해서 내부를 결집시키는 형태로, 미군이 스스로 상대를 최악으로 만들어버린 셈이다. 총 하나 들고 미군에 쏘아댄 사람이 모조리 아이디드의 세력이 아니라 무장한 민병대인 점도 이 때문이다.

이후 JSOC의 중장비 요청을 거절한 레스 애스핀 당시 국방장관은 클린턴에 의해 해임됐다. 그런데 레스 애스핀 장관도 이 꼴이 날 줄 몰랐을 것이다. 작전계획안을 보고 "이야, 이거 제대로 꿀 빨다 오겠구만?" 했을 텐데 작전보고서를 받고 "이야, 이거 제대로 꿀 빨고 왔네?" 했을 사람(……).

더욱 심각했던 문제는, 아토를 체포한 것외에는 별 다른 작전이 없었고, 무장 세력의 공격도 이상하리만치 조용한 JSOC이 목표는 아니라서 모가디슈 시내에서 점점 피해가 발생해갈 때까지 JSOC 병력들이 대단히 방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사전 정찰이 적었는지 아니면 정말 민병대가 건물 지붕에서 사격한다는 점을 몰랐는지, 지붕에서의 사격에 병사들이 죽거나 큰 부상을 입었다. 공격을 성공시키는 데 필요한 조건이 바로 위에서 아래로 공격하는 것인데, 본인들만 위에서 아래로 공격할 줄 안다고 생각을 한 모양이다.

전투 당시 빠른 전투를 위해 몇몇 장비를 챙기지 않았다. 그 결과 슈퍼 61이 추락하면서부터 뭔가 큰 문제가 있음을 깨닫긴 했지만 몸처럼 생각도 가벼워 뭐가 잘못됐는지 깨닫질 못했다. 모가디슈에 고립돼 탄약이 떨어지자 헬기로 탄약 보급을 받았을만큼 필수품이 부족한 상황.

그런데 이런 가정하에서 미군 vs 민병대 사상자 수를 비교하면, 오히려 미군의 피해는 적고 민병대는 도륙을 당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사실상 미군 한 명, 한 명이 백발백중으로 민병대를 쓰러트린 것에 가까웠기 때문에 이래저래 이들의 전투력은 뛰어났다는 결론을 도출하는 보고서도 몇 종류 있다.

물론 제대로 훈련을 받은 정예부대와 민병대라는 차이도 있겠지만, 민병대들이 민간인들을 총알받이로 쓴 것도 있다. 게다가 카트를 거하게 빤 민병대들이 제정신일리 없으니 아군 오사도 꽤 있었을 것이다.

7 결과

이 사건 이후로 미국은 두 번 다시 약소국의 내전에 끼어들지 않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이 작전 이후 미국은 소말리아에서 완전히 손을 떼버렸고, 르완다보스니아에 평화유지군 파병도 꺼리게 된다. 나비효과랄지 서방세력과 함께 개입하지 않았던 르완다 내전에서 약 80만 명이 죽었다. 정작 여기는 그냥 제노사이드고 투치족에게 권력을 줘도 보복할 힘이 없어서 미군이 작정하고 갈아엎어도 전혀 문제가 안 됐는데도 말이다.[31]

1994년 3월 아이디드와 알리 마흐디가 다시 휴전에 합의 되었고, 1994년 11월 UNOSOM-2의 종료가 결정되면서 1995년 3월을 기점으로 소말리아에서는 UN군을 비롯해 모든 다국적군이 철수를 한다.

모가디슈 전투 이전에 미군에 잡혔던 오스만 아토는 이후 아이디드를 떠나서 알리 마흐디 파벌에 합류했다.

이 사건의 영향도 조금은 있겠지만, USC의 시아드 바레 축출 이후로 소말리아는 사실상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됐다. 아이디드는 이 사건 이후 빌 클린턴 대통령과 회담차 미국이 보내준 수송기를 타고 워싱턴 DC로 오기도 했으며[32], 1995년 6월에는 소말리아 대통령을 자처하기도 했다. 하지만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지는 못했고, 지역 군벌에 대한 통제력도 없어서 결국 모가디슈를 중심으로 알리 마흐디와 지배력을 다투는 상황으로 회귀했다.

그리고 1996년 7월말에 모가디슈에서 다른 무장세력의 공격을 받았고[33], 8월 2일 사망했다. 생각해보면 자업자득이다. 자기 배만 채우며 난민은 없는 사람 취급을 하고, 도리어 학살까지 하면서 소말리아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 벌은 받은 셈.

진짜 골 때린 것은 모하메드 파라 아이디드의 후계자로 셋째 아들 후세인 파라 아이디드가 추대되었는데, 이 경우도 좀 복잡하다. 후세인은 16세에 자신의 모친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미국에 귀화했다. 심지어 미군에 자원입대를 했기 때문에, 소말리아에 미군 해병대가 처음 투입된 희망 회복작전에 참여하면서 소말리아에 미군 신분으로 파견되어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모하메드 아이디드가 사망한 다음에 하브 지디르 부족에 의해서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물론 후세인도 대통령으로 인정은 받지 못했지만, 캘리포니아에서 대학을 나와 미군에 들어간 미국인인 관계로 모하메드와는 달리 소말리아를 국제사회에 편입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중.

마이클 듀란트를 납치했던 사람은 훗날 미국으로 망명해서 관련 다큐멘터리 등에 가끔 등장한다.

7.1 훈장 수여자

영화가 배경이 된 전투 이후 미 국방부에서 병사들에게 수여한 훈장들은 영문 위키에서 확인가능하다.

마이클 듀란트는 결국 구출되지 못했지만 그래도 군중이 아닌 그나마 이성적인 아이디드 직속 병력의 손에 넘어갈 시간을 벌었다.[34] 그리고 그럭저럭 괜찮은 대우를 받다가 11일 뒤에 석방됐으니, 결국 게리 고든과 랜디 셔거트의 희생은 헛되지 않았다. 두 명의 델타포스 대원에겐 사후에 미군 최고의 훈장인 명예 훈장이 추서됐다. 이는 베트남 전쟁 이후 21년 만에 추서된 것이었다.

7.2 UN군의 뻘짓

참고

8 기타

셔거트와 고든 모두 미 해군의 수송함 T-AKR-295(랜디 슈거트), T-AKR-296(게리 고든)의 함명으로 붙었다.[35]

훗날 2002년 알 카에다의 기지중 하나에서 게리 고든의 GPS 추적기가 발견되었다...고 했는데 알고보니 동명이인인 헬기 조종사의 것으로 밝혀졌다.
  1.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피가 흐르긴 했다. 시아드 바레가 배후에 있었던 것으로 거의 확실시 되는 대통령 암살이 먼저 있었고, 그 다음이 쿠데타로 이어졌기 때문.
  2. 다로드 부족이라는 거대 부족의 일부였다. 시아드 바레는 마레한 소부족만을 지원했기 때문에 다로드 부족은 반대파에서 활동했다.
  3. 소말리아 식으로는 Duub Cas.
  4. 이 시기를 소말리아 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시아드 바레 정권을 몰아내는 것은 미국 정도를 제외하면 서구권에서도 지지를 받았다. 시아드 바레 정권이 워낙에 개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게 이후에 소말리아 내전으로 변하면서 평가가 다시 다운된다.
  5. 소말리아의 부족은 하브예 25%, 이자크 22%, 다로드 20%, 라한웨이 17%로 이어진다. 시아드 바레가 소속되어서 중용한 마레한 소부족이나 오가데니는 다로드의 일파.
  6. 아이디드의 투옥 원인은 확실하지 않은데 '아이디드가 재 쿠데타를 모의했다는 설'과 '부족주의 타파를 내걸은 바레가 하브예 부족에 영향력이 큰 아이디드 제거했다는 설'이 공존한다. 뭐 둘 다일 수도 있고.
  7. 여기에 당시 투입된 해병대 병력은 제15해병원정단, 제7해병연대와 제11해병연대 각각 1개 대대였다
  8. 이걸 점령이라고 하는데 원래 모가디슈 공항은 아이디드의 요구사항에도 나오는 것처럼 UN군 영향하에 있었다. 영화상에서 나오는 미군 본부가 바로 모가디슈 공항이며, 해병대가 철수하면서 인수했다.
  9. 누가 번역했는지 모르겠지만 영화상에서 '10번째 산'이라고 자막에 나오는 게 바로 제10산악사단이다. 스타41의 콜사인도 구분을 못해 구조헬기(…). 도대체 스타 포원을 어떻게 읽으면 저렇게 창조할 수 있는거지?
  10. 전투병력 20000, 후방 지원병력 8000으로 구성되었다.
  11. 특전사 한 개 대대급이 파병됐으나 공식 발표는 없었고, 다행히 실제 교전도 없었다. 때문에 중무장 경비부대, 5분 대기조로서의 역할이 더 컸다.
  12. 마지막까지 전차부대가 남아있었다. 추가로 앞서 설명한 안보리 결의 837호의 내용이 파라 아이디드를 체포하는 전투작전이다보니 파키스탄은 반대표를 던졌다.
  13. 아이디드 측은 여자와 아이 포함 73명 사망, 수백의 부상자로 발표했고, 미국은 남자 20명으로 발표했다. 적십자사의 발표는 54명 사망에 부상자 196명이었다.
  14. 델타포스와 DEVGRU는 팀원부족 등의 사유가 발생하면 서로 지원을 해준다. 이 작전엔 DEVGRU 소속 5명 1개팀이 참가했다.
  15. 이들의 목적은 무조건 모하메드 파라 아이디드를 체포해서 법정에 세우는 것이었다. 이게 안 되면 사살이었지만 2순위였다. 아이디드를 국제전범재판에 세운다는 것은 조너선 하우의 절대적 지론이었다.
  16. 왜 파라 아이디드부터 체포를 하지 못하냐면, 파라 아이디드를 먼저 체포해버리면 그 세력 내에 다른 간부가 지휘권을 물려받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쉽게 설명해 피라미드의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지 않고 밑에서부터 올라가는 것.
  17. 영화에선 초크4의 헬리콥터로 등장한다.
  18. 영화에선 초크1 또는 초크2의 헬리콥터로 등장한다. 실제로는 엄호 헬리콥터였다.
  19. 흔히 이 건물이 목표 건물이라 착각하는 사람이 많다. 주변 건물과 달리 흰색에 층수가 높은 건물이라 눈에 띄어서 일종의 표식으로 사용된 건물이고, 목표 건물의 특징이 없어서 목표 건물을 부르는 암호명으로 지정된 것이지 절대 목표건물이 아니었다. 논픽션 블랙호크 다운은 물론 각색된 영화, 심지어는 위키피디아에서도 이 건물이 목표였다는 말은 한마디도 없다.(위키에는 설명이 부족해서 좀 혼동될 수 있다.) 사건 관련 정보나 논픽션에서는 이 건물이 일종의 기준점이고 목표 건물은 그 주변의 건물이란 언급이 엄연히 나온다. 올림픽 호텔과 실제 목표건물 위치.
  20. 캐리비안의 해적과 반지의 제왕으로 유명한 올랜도 블룸이 이 병사를 연기했는데, 후송되는 장면 이후 등장이 없다(…). 그래서 배우 팬들조차 나왔는지를 모를 정도다.
  21. 블랙 호크 다운 영화판의 무삭제 버전에서도 등장하는 장면이지만 레인저의 명예실추 등을 이유로 삭제됐다. 응사를 하지 않고 쏘지 말라고 무전을 보내는 델타 포스 대원들과 달리 무작정 쏴대는 레인저의 모습이 일품이다.
  22. 호버링 후 수직착륙이 아니라 고정익기처럼 수평비행상태로 활주로에 터치다운
  23. 모티브가 되는 인물은 폴 하우.
  24. 사우디는 UN 소속이지만 소말리아의 적으로 간주되지 않았는데 이들이 차를 타고 와서 수습하려고 하다가 그 광경을 보고 분노했다. 사우디 장교 왈: "무슨 짓을 하는 거냐? 죽은 사람한테 왜 이런 짓을 하는거냐? 이러고도 너희가 사람이냐?" 성난군중 왈: "너희들 그 시체 건드리면 죽여버린다.그러니 그냥 가라!" - 당시 소말리아 대중들의 미군에 대한 적개심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고작 10명 정도 차량 2대에 탄 사우디군은 쫄아서 물러나야 했지만 사우디군 장교는 죽은 이를 건드리는 게 이슬람교에서도 금기시하는 거 아니냐며 욕설을 퍼부으다가 부하들이 말려서 그도 물러났다.
  25. 현장에서는 생존했지만 독일 다국적군의 야전병원에서 결국 전사한다.
  26. 파키스탄군 2명 부상, 말레이시아군 7명 부상, 1명 전사.
  27. 하지만 영화에서는 차이가 있다. 실제로 영화에서 주인공이였던 매트 에버스맨의 경우엔 맥나이트의 수송대의 험비에 탑승했던 관계로 그때 철수 명령 받았을 때 가장 먼저 철수하였다.
  28. Rick Atkinson (31 January 1994). The Washington Post.
  29. 1975년 5월 12일 미국에서 캄보디아 크메르루즈 정부에게 나포된 마야게즈호의 승무원들을 구출하기 위해 해병대를 보냈다가 정보 부족으로 41명의 미군 사상자를 비롯해 96명이 부상당하거나 포로로 붙잡힌 사건. 정작 마야게즈호의 승무원들은 다른 곳으로 이송되어 나중에 석방되었다.
  30. 1983년 레바논 베이루트 미군기지에서 자폭 공격으로 미군 241명이 때죽음 당한 것도 있지만 이건 전투라고 볼 수 없으니 제외.
  31. 실제로 폴 카가메는 권력을 잡은 뒤에도 후투족에게 직접적인 보복을 하지 못했다. 물론 일부가 총살되긴 했지만 그것도 제노사이드 재판을 열어 범법자를 처단하는 형식이었고 그나마도 악질이 아닌 일반 가담자는 전부 마을 재판으로 넘겨서 가볍게 처벌했기 때문에 그 수가 얼마 안 됐다.
  32. 그런데 이때 명령으로 아이디드를 경호한 사람들이, 불과 얼마 전 아이디드의 부하를 잡으러 갔다가 지옥을 경험한 델타포스 대원들(!)이었다. 당시 델타포스 대원들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33. Novalogic사의 게임 '델타 포스 : 블랙 호크 다운'에서는 마지막 미션으로 모가디슈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개고생한 주인공이 반 아이디드 세력이 시간을 끌어주는 사이에 아이디드의 비밀 벙커에 잠입하여 암살하는 것으로 나온다. 무기는 MP5SD와 클레이모어 2개와 수류탄 몇개 뿐이다. 그걸로 플레이어는 모든 것을 혼자서 스스로 해결해야한다. 들켜서도 안되며 지원 그런 거 없다. 말 그대로 Black Operation.
  34. 제3세계의 전쟁에서는 흔한 일이다. 군중을 내세워서 전투를 치른 뒤 상대편에서 중요한 인물을 포로로 잡으면 직속 부대원들을 투입해서 군중을 강제로 해산시키는 것이다. 아이디드가 잔혹하긴 했지만 그래도 아예 기본 판단력조차 없는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국가 수준의 광신자는 아니었다.
  35. 미 해군측 작명법 중에서 기록할만한 수준의 공을 세운 사람의 이름도 짓기도 하며 잘 보면 함명 중에 이등병의 이름이 붙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