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어 : בית המקדש(벳 하미크다쉬)
라틴어 : Templum Hierosolymitanum(템플룸 히에로솔리미타눔)
영어 : Temple in Jerusalem(템플 인 저루설럼)
왼쪽 : 솔로몬 성전, 오른쪽 : 헤로데 성전 |
예루살렘 성전 복원 상상모형(헤로데 성전) |
1 개요
예루살렘의 성전 산에 세워졌던 유대교의 총본산. 성서의 기록을 따르면 기원전 957년 솔로몬 대왕이 처음 세운 이래 수 차례 파괴와 재건을 거듭했으나 기원후 70년 유대 전쟁이 티투스에 의해 진압되면서 파괴되어 이후 두 번 다시 재건되지 못했다. 예루살렘 성전 자리에는 이슬람의 바위의 돔이 지어졌으며, 통곡의 벽만이 유대교 성전의 잔해로 현존하고 있다. 예수의 성전 정화가 펼쳐진 무대이기도 하다.
2 연혁
2.1 제1성전(솔로몬 성전)
솔로몬 왕이 세웠다고 하는 제1성전은 수차례 전쟁을 겪으며 파괴된다. 솔로몬 시대의 성전 건축 과정과 성전의 세부에 대해서는 열왕기 상권 6장 1~38절과 열왕기 하권 1장 18절~5장 1절에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땅에서 탈출해 나온 지 480년, 솔로몬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4년째 되던 해 둘째 달 곧 시브월에 솔로몬은 야훼의 전을 짓기 시작하였다. 솔로몬 왕이 야훼께 지어 바친 전은 그 길이가 60척, 나비가 20척, 높이가 30척이었다. 전의 본당 앞에 있는 현관의 길이는 전 자체의 나비 그대로 20척이고 그 나비는 전의 길이에 잇대어 10척 더 나왔다. 전의 창들은 우묵 들어간 틀에 넣었다. 그는 또 전의 벽 둘레에다 건물을 지었는데 본당과 내실을 둘렀고 사방에 돌아가며 곁방들을 꾸몄다. 아래층은 나비가 5척이고 가운데층은 6척, 3층은 7척이었다. 전 밖에는 벽에 단을 두어 버팀들보가 전의 벽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하였다. 돌은 채석장에서 다듬어 준비했기 때문에 전을 지을 때에는 망치나 정이나 그 어떤 연장을 다루는 소리도 성전에서 들리지 않았다. 가장 낮은 층의 입구는 전의 오른쪽에 내었고 나선형 층계를 밟고 가운데층으로 올라가고 또 가운데층에서 3층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이렇게 솔로몬은 건축을 마쳤는데 전의 천장은 송백나무 들보와 널빤지로 되었다. 또 온 성전 곁에 건물을 지었는데 각 층은 높이가 5척으로서 송백나무 재목으로 전과 맞붙게 하였다. 야훼의 말씀이 솔로몬에게 내렸다. "네가 짓는 이 집 말인데... 만일 네가 나의 규범대로 살아가고 내 규정을 따르며 나의 모든 계명을 지켜 그대로 살아가면 나는 네 아비 다윗에게 약속한 바를 너에게 이루어주리라. 그리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저버리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 가운데서 지내리라." 솔로몬은 성전 건축 공사를 마쳤다. 그는 전의 안쪽 벽을 바닥에서 보꾹의 들보에 이르기까지 송백나무 널빤지로 붙였다. 전의 바닥은 전나무 널빤지로 깔았다. 또 20척 되는 전의 뒤쪽은 바닥에서 들보까지 송백나무 널빤지로 지었는데 그 내부를 밀실 곧 지성소로 지었고 이 밀실 앞쪽에 있는 본전은 길이가 40척인데 전의 안에 있는 송백나무에는 호리병과 여러 가지 꽃모양이 새겨져 있었다. 모두가 송백나무이며 돌은 눈에 뜨이지 않았다. 밀실은 전의 가장 깊숙한 곳에 꾸며놓았는데 거기에 그는 야훼의 계약궤를 모셨다. 그 밀실은 길이 20척, 나비 20척, 높이 20척인데 순금으로 입혔다. 또 송백나무 제단도 만들었다. 솔로몬은 전의 안쪽을 순금으로 입혔고 밀실 앞쪽에는 사슬을 늘여놓았는데 그것도 금을 입힌 것이었다. 그는 전 전체를 금으로 입혔다. 밀실에 있는 제단도 금을 입혔다. 밀실에는 올리브 나무로 높이 10척 되는 거룹을 둘 만들어놓았다. 거룹의 한쪽 날개가 5척이고 다른 날개도 5척이었다. 그래서 날개 한 끝에서 다른 날개 끝까지는 10척이 되었다. 다른 거룹도 10척이 되었다. 두 거룹이 같은 치수, 같은 모양이었다. 한 거룹의 높이도 10척이고 다른 거룹의 높이도 역시 10척이었다. 솔로몬은 이 거룹을 전의 가장 깊숙한 곳에 두었는데 거룹의 날개는 펼쳐져 있어 한 거룹의 한쪽 날개가 한 벽에 닿았고, 다른 거룹의 한쪽 날개가 다른 벽에 닿아 있었으며 각각 나머지 날개는 전의 중앙에서 서로 잇대어 있었다. 솔로몬은 거룹에 금을 입혔다. 그는 전의 온 벽을 돌아가며 거룹과 종려나무와 핀 꽃모양을 돋을새김으로 새겨놓았다. 또 성전 안팎의 바닥을 금으로 입혔다. 내실로 들어가는 입구의 문은 올리브 나무로 만들었는데 상인방과 문설주가 오각형을 이루었다. 두 올리브 나무로 만든 문에는 거룹과 종려나무와 핀 꽃모양을 돋을새김으로 조각하고 그 위에 금을 입혔다. 거룹모양에도, 종려나무 모양에도 금을 입혔다. 본전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문은 올리브 나무로 만들었는데 문설주는 사각형을 이루었다. 두 문이 전나무로 되어 있었는데 한쪽 문이 두 부분으로 접혔고 또 다른 문도 두 부분으로 접혔다. 그 위에다가 거룹과 종려나무와 핀 꽃모양을 새겨놓았다. 그리고 그 위에 금을 고루 입혔다. 또 다듬은 돌 3줄과 송백나무 1줄로 들보를 만들어 안뜰을 지었다. 제4년, 시브월에 야훼의 전 기초를 놓았다. 그리고 제11년 8월 곧 불월에 전이 그 설계한 대로 완공되었다. 솔로몬이 공사를 시작한 지 7년째 되던 해였다.열왕기상 6장 1~38절(공동번역)
솔로몬은 야훼를 모실 성전과 자기의 궁전을 짓도록 명령하고 짐꾼 70,000명, 산에서 돌 떠내는 사람 80,000명, 감독관 3,600명을 모집하였다. 그리고 나서 솔로몬은 띠로 왕 히람에게 사람을 보내어 청을 넣었다. "당신은 본인의 선친께서 궁을 지으실 때 송백 재목을 보내주셨습니다. 이제 본인은 본인의 하느님 야훼의 이름을 모실 집을 지어 바치려고 합니다. 거기에서 분향제를 올리고 거르지 않고 제사 상을 차려 올리며, 아침 저녁으로 번제물을 바치고자 합니다. 또 안식일과 매달 초하루와 우리 하느님 야훼께서 정해 주신 절기마다 번제를 드리고자 합니다. 이스라엘은 언제까지나 이렇게 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어떤 신보다도 크신 분이시라 본인이 지어 바칠 집도 커야 합니다. 저 하늘, 저 꼭대기 하늘도 좁아서 못 계실 분에게 무슨 수로 집을 지어드리겠습니까? 본인이 무엇인데 어찌 감히 그분께 집을 지어드리겠습니까? 다만 향이나 피워 올리려는 뜻밖에 없습니다. 이제 본인은 당신에게 금은과 놋쇠와 쇠를 다룰 줄 알며, 붉은 비단, 진홍 비단, 자주 비단을 짤 줄 알며 조각도 할 줄 아는 기사 한 사람을 청합니다. 다윗 선왕께서 길러주신 기술자들이 유다와 예루살렘에 있습니다.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일을 할 기사를 보내주십시오. 또 레바논의 송백과 전나무와 오동나무를 청합니다. 레바논에서 나무를 벨 줄 아는 일꾼들이 당신에게 있는 줄 압니다마는 본인도 일꾼을 보내어 같이 일하게 하겠습니다. 본인은 놀랄 만큼 큰 집을 지으려고 합니다. 그러니 재목을 많이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채벌 기술자들에게 본인은 양곡을 대어주겠습니다. 밀 20,000섬, 보리 20,000섬, 포도주 20,000말, 기름 20,000말을 당신의 일꾼들에게 대어주겠습니다." 띠로 왕 히람이 솔로몬에게 회신하였다. "야훼께서 그의 백성을 사랑하셔서 당신을 왕으로 세워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히람의 회신은 이렇게 계속되었다.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는 찬양받으실 분,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 다윗 왕에게 만사를 현명하게 처리할 줄 아는 지혜로운 아들을 후계자로 주셔서, 야훼께 집을 지어 바치고 자신의 왕궁을 짓게 하신 분이십니다. 이제 본인은 기술자 후람 선생을 보냅니다. 그는 내가 믿는 사람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단 지파 사람이요, 아버지는 띠로 사람입니다. 그는 금은과 놋쇠와 쇠와 보석과 나무를 다룰 줄 알며, 붉은 비단과 자주 비단과 모시와 진홍색 비단을 짤 줄 알며, 조각을 할 줄도 압니다. 갖가지 고안을 다 해내는 사람이니, 무엇이든지 부탁하십시오. 본인이 존경하던 당신의 선왕 다윗께서 길러주신 기술자들을 데리고 무엇이든지 해낼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당신이 약속하신 밀과 보리, 기름과 포도주를 본인의 일꾼들에게 보내주십시오. 우리는 당신에게 필요한 만큼 레바논에서 벌목을 하여 뗏목으로 엮어 요빠 앞바다까지 운반해 가겠습니다. 예루살렘까지 올려 가는 일은 당신이 담당하십시오." 솔로몬은 선왕 다윗이 전에 거류민을 조사한 것처럼 이스라엘 국내에 있는 거류민을 조사해 보았다. 그랬더니 거류민의 수는 모두 153,600명이었다. 그 중에서 70,000명을 짐꾼으로 징용하고 80,000명은 산에서 돌 떠내는 일을 시켰다. 그리고 그 일꾼들을 부리는 감독으로 3,600명을 뽑았다. 솔로몬은 선왕 다윗이 환상으로 본 예루살렘 모리야 산에 야훼의 성전을 짓기 시작하였다. 그 곳은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이었는데 다윗이 사두었던 것이다. 성전을 짓기 시작한 때는 솔로몬이 왕이 된 지 4년째 되던 해의 2월이었다. 솔로몬은 하느님의 전을 지을 때 이렇게 기초를 놓았다. 옛날 자로 집 길이는 60척, 나비는 20척, 성전 본관 앞 현관은 나비가 10척, 길이가 집 나비 그대로 20척, 높이가 120척이었다. 현관 안벽은 순금으로 입혔다. 본관 안벽에는 전나무 판을 대고 순금을 입혔다. 그 위에는 종려나무 가지와 꽃줄 모양도 새겼다. 본관 안은 번쩍이는 보석으로 꾸미고 금박을 입혔는데 그 금은 바르와임에서 들여온 것이었다. 본관 안 들보와 문지방과 벽과 문짝은 모두 금박을 입혔고 벽에는 거룹들을 새겼다. 그리고 지성소를 지었는데 길이는 집의 길이대로 20척, 나비도 20척이었다. 내부는 순금 600달란트로 금을 입혔다. 그것을 박는 금못의 무게만도 50세겔이 나갔다. 다락방도 금을 입혔다. 지성소 안에는 거룹 둘을 들였는데, 그것은 나무를 깎아 만들어 금을 입힌 것이었다. 이 거룹들이 날개를 펴고 있는데, 그 길이는 20척이었다. 날개 하나의 길이는 5척인데 한 쪽은 성전 벽에 닿았고 한 쪽은 다른 거룹의 날개에 닿았다. 또 다른 거룹의 날개 하나도 길이가 5척인데 한 쪽은 성전 벽에 닿았고 한 쪽은 다른 거룹의 날개에 닿았다. 그래서 이 두 거룹이 날개를 펼친 것이 20척이었다. 이 거룹들은 서서 똑바로 성소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또 자주실과 붉은 실과 심홍 색실로 휘장을 짜고 그 위에 거룹들을 수놓았다. 성전 정면에는 높이가 35척 나가는 기둥 둘을 만들어 세우고 그 위에 높이 5척짜리 대접받침을 얹었다. 목걸이 모양으로 꽃줄을 만들어 그 기둥들 머리에 둘렀다. 그리고 석류 모양 100개를 만들어 그 꽃줄에 달았다. 이 기둥의 하나는 성전 본관 앞 오른쪽에 세우고 다른 하나는 왼쪽에 세웠다. 오른쪽 기둥 이름은 야긴이라 하고 왼쪽 기둥 이름은 보아즈라 하였다. 솔로몬은 또 놋으로 제단을 만들었는데, 그 길이가 20척, 나비가 20척, 높이가 10척이었다. 그 다음 그는 바다 모형을 둥글게 만들었다. 한 가장자리에서 다른 가장자리에까지 직경이 10척, 높이는 5척이었다. 줄로 그 둘레를 한 바퀴 돌리면, 30척이 되었다. 이 둥근 통 밑에는 소 모양을 한 것들이 머리를 바깥으로 하고 빙 둘러서서 그 둘레가 30척이 되는 바다를 떠받치고 서 있었다. 이 소들은 십(+)자로 서 있었는데, 바다 모형을 부어 만들 때 함께 부어 만든 것이었다. 바다는 이 12마리 소 등에 얹혀 있었는데, 3마리는 북쪽을 바라보고 3마리는 서쪽을 바라보고 3마리는 남쪽을 바라보고 3마리는 동쪽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이 소들은 모두 궁둥이를 안쪽으로 하고 등으로 바다를 떠받치고 있었다. 바다 가장자리의 두께는 한 뼘 나비였다. 그 가장자리는 잔의 가장자리와 비슷하게 꽃무늬를 새겨놓았다. 그리고 그 바다 모형에는 물을 3,000말 담을 수 있었다. 대야는 얹는 대 10개를 만들어 다섯은 오른쪽에 두고 다섯은 왼쪽에 두어 번제물을 씻는 데 쓸 물을 담아두었다. 바다에 담긴 물은 사제들이 씻을 물이었다. 금으로 등경 10개를 규격대로 만들어, 5개는 본관 안 오른쪽에 놓고 5개는 왼쪽에 놓았다. 또 제사 상 10개를 만들어 본관 안 오른쪽에 5개, 왼쪽에 5개를 두었다. 또 피 뿌리는 쟁반 100개를 금으로 만들었다. 그는 또 사제만이 들어가는 뜰과 큰 뜰을 만들었다. 이 큰 뜰의 대문에는 문짝 둘을 만들어 달고 놋쇠를 입혔다. 바다는 성전 오른편 동남쪽에 놓여 있었다. 후람이 재받이와 부삽과 피 뿌리는 쟁반들을 만드니, 이로써 솔로몬 왕이 하느님 전에 해놓으라고 시킨 모든 일을 다 마친 것이다. 그 물건은 이런 것이었다. 기둥 2개와 그 두 기둥 위에 꽃관 같은 둥근 장식과 이 두 기둥 위에 있는 꽃관 같은 둥근 장식 2개에 씌울 그물 둘, 이 두 그물에 2줄로 달린 석류 400개, 대야 10개와 그 받침대 10개, 바다 하나와 그를 떠받치는 소 12마리, 재받이와 부삽과 집게였다. 후람 선생은 야훼의 성전에서 쓸 이 모든 기구를 놋쇠로 만들고 닦아서 솔로몬 왕에게 바쳤다. 왕은 이 기구들을 수꼿과 스레다 사이에 있는 요르단 강 분지 흙바닥에서 부어 만들게 하였다. 솔로몬이 만든 이 모든 기구들이 어찌나 많았던지 놋쇠의 무게는 이루 다 달아볼 수조차 없었다. 솔로몬이 하느님 성전에 두려고 만든 기구들은 이런 것이었다. 금제단과 빵을 차려놓을 제사 상들과 지성소 앞에 규정대로 켜놓을 순금 등잔들과 등경들, 순금으로 만든 꽃장식과 등잔과 부집게, 순금으로 만든 칼들과 피 뿌리는 쟁반과 종지들과 향로들, 그리고 성전 문, 곧 금으로 만든 안쪽 지성소 두 문짝과 본관 두 문짝이었다. 솔로몬은 이렇게 야훼의 성전을 위하여 할 일을 모두 마치고 선왕 다윗이 거룩하게 바친 금은과 그 밖의 모든 기구를 가져다가 하느님의 성전 보물 창고에 두었다.역대기하 1장 18절~5장 1절(공동번역)
헉헉 졸라 기네
2.2 제2성전
솔로몬 성전은 바빌론 유수 때 전소되어 폐허로 남았다. 포로시대 이후 느헤미야[1] 당시 제2성전이 건축되었다. 키루스 대왕의 도움으로 재건되기는 했지만[2], 솔로몬 성전에 비하면 훨씬 축소된 규모였다.
2.3 제3성전(헤로데 성전)
예수께서 성전을 떠나 나오실 때에 제자 한 사람이 "선생님, 저것 보십시오. 저 돌이며 건물이며 얼마나 웅장하고 볼만합니까?" 하고 말하였다.마르코 복음서 13:1 (공동번역)
키루스 대왕 이후 약 3, 4백년이 흘러 마카베오 시대를 지나 헤로데 대왕이 백성들의 인기를 끌기 위해 성전을 재건하여 제3성전을 세우게 된다. (제2성전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3] 이후 제3성전은 로마인과 유대인 간의 갈등(막중한 세금과 로마 당국의 유대교에 대한 지나친 간섭, 그리고 칼리굴라 황제의 병크)때문에 벌어진 유대 전쟁 당시 티투스 장군[4]에 의해 파괴되었다.[5] 이후 예루살렘과 성전을 잃은 유대인들은 안식처를 잃고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유대인의 디아스포라)
참고로 종교적 이유만으로 로마 제국이 이 크고 아름다운 성전을 개발살낸 것은 아니다. 당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주요 국책사업으로 플라비우스 원형 경기장 건설이 있었는데,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게 보통 커다란 건물이 아닌지라 자금이 네로 황제의 바다만큼 큰 인공 호수가 있다는 황금 궁전을 갈아다 넣어도 부족할 정도였다. 해서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인 티투스가 성전의 화려한 금박들을 죄다 벗겨내서 아버지에게 갖다바쳤던 것. 그리고 경기장 건축은 본인인 티투스 대에도 계속되다가 도미티아누스 시대에 완공된다.
예수의 성전 정화는 이 제3성전이 무대다. 개요에도 있듯이 이 성전 중 파괴를 면하고 겨우 남은 부분이 통곡의 벽.
3 기타
바티칸의 시스티나 경당이 성경에 나오는 예루살렘 성전의 수치를 토대로 건설되었다. 교황 식스토 4세가 이러한 건축을 하도록 명령한 것은, 시스티나 경당이 새로운 예루살렘 성전이요, 곧 로마가 예루살렘을 대신하는 새로운 성지로 자리매김했음을 암시하기 위해서였다.- ↑ 해당 시대를 기록한 성서는 에스라, 느헤미야, 학개가 있다.
- ↑ 이 때문에 현대에도 유대인들 사이에서 키루스 대왕의 인기는 최상급을 자랑한다.
- ↑ 이게 왜 제3성전이면서 제2성전이냐면, 헤로데 성전은 본질적으로 제2성전을 개축한 것이기 때문이다. 폼페이우스가 B.C. 63년 예루살렘을 함락시키면서 지성소까지 들어갔기 때문에 성전이 침탈당한 것으로 생각했으나, 사실 건물은 멀쩡했고 헤로데는 그것을 개수한 것 뿐이다. 게다가 헤로데가 유대인에게 천하의 개쌍놈이라는 취급을 받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헤로데의 성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유대인에게 굴욕이었다. 그래서 따로 이것만 순서를 안 붙이고 헤로데 성전이라고 하기도 한다.
- ↑ 나중에 로마 제국의 10대 황제가 되는 그 티투스가 맞다. 이때 당시는 군대의 지휘관. 자세한 사정은 해당 항목 참조
- ↑ 유대인들의 재봉기를 막기 위해 그들의 구심점이라 할 수 있는 종교적 요소를 파괴해 버린다. 반역을 막기 위해 어느 정도의 오명을 감수하고 폐위된 왕을 처형한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