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race Grant Underwood
1 소개
대한제국 시대와 일제강점기 한국에 건너온 미국의 선교사. 한국에 장로교를 전도한 최초의 목회선교사이자 연세대학교의 설립자이다. 그의 가문은 대인배 집안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한국식 이름은 원두우인데, 이는 언더우드를 빠르게 발음한 말로, 고종황제가 직접 지어줬다고 한다.
일본인 한정으로 木下키노시타 드립이 먹힌다
2 일생
2.1 젊은 시절
1859년 7월 1일에 영국계 미국인으로 태어난 언더우드는 뉴욕대학교 대학원 신학과를 졸업하고 힌디어와 의학을 배운 후 장로교 목사가 된다. 그리고 당시 영미권의 선교사들이 주로 파견되던 인도 제국에 건너가 목회활동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조선이라는 듣보잡 국가에 파견할 선교사 한 명을 찾지 못한다는 소문을 듣고 조선에서의 선교활동을 결심한다.
그런데 당시의 약혼녀가 조선에 같이 가자는 언더우드에게 묻기를
"그 곳에서는 무얼 먹고 살죠?"
"모르겠소."
"병원은 있죠?"
"모르겠소."
열받은 약혼녀가 다시 물었다. "그럼 당신은 조선에 대해 아는 게 뭐에요?" 그러자 언더우드는 "내가 아는 것은 오로지 그 곳에 주님을 모르는 1,000만의 민중이 살고 있다는 것 뿐이오."라는 멘트를 날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약혼녀는 당연히 넘어오지 않았고, 결국 언더우드는 파혼 통보를 받고 혼자서 조선으로 향하게 된다.
2.2 조선에서의 활동
그가 한국으로 건너가려던 1884년에 갑신정변이 터지는 바람에 후유증으로 외국인 입국이 막혔으며, 언더우드는 1년간 일본에 머물면서 조선인 유학생들에게 한국어를 배우고 감리교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와 함께 헐버트의 도움을 받아 마가복음을 번역하는 작업을 했다.
1885년 언더우드는 호러스 뉴턴 알렌의 도움으로 조선에 입국한다. 알렌이 조선 정부에 제출한 설립안에 의거해 1885년 4월 개원한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 제중원의 설립 목적에는 의학생 교육이 명시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1886년 3월 29일 개교한 한국 최초의 서양 의학교육 기관인 제중원 의학교에서 언더우드는 수학, 물리, 화학 등 의예과 과정의 과목을 가르치면서 본격적으로 선교활동을 시작한다. 언더우드는 1888년에 파견된 선교사이자 제중원의 여의사인 8살 연상의 릴리어스 호튼(Lillias S. Horton)과 결혼했다.
1887년 서울에서는 한국 최초의 장로교 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설립하고, 평양 지방까지 교세를 확장했다. 이 해부터 거의 20년 동안 언더우드는 평안도 전역을 순회하는 선교 여행을 반복했고, 1891년 게일 선교사와 마펫 선교사가 여행에 합류하면서 신앙 공동체를 설립하는 등 본격적으로 서북 지역에 포교활동을 하게 된다.
1894년, 영국 출생의 캐나다 선교사 올리버 에비슨 (Oliver R. Avison)이 조선 정부와의 협상 끝에 제중원을 선교부로 이관받았고, 이로써 제중원은 온전한 사립선교 기관으로 재편됐다. 1900년, 록펠러의 석유회사 '스탠다드 오일'의 창립멤버 중 하나였던 루이 세브란스 (Louis Henry Severance)가 병원 건립을 위해 제중원에 거액을 기부했다. 이 기금을 두고 평양의 선교사들이 문제를 제기했으나 언더우드의 협조에 의해 갈등은 해결되었고, 1904년 제중원은 새로 지어졌으며 기증자의 이름을 따서 세브란스 병원, 그리고 세브란스 의학교가 되었다. 세브란스의 건립에도 언더우드의 공이 컸던 것이다.
번역과 교육에도 힘써서 입국한 직후부터 신약의 4대 복음서를 번역했으며, 한국에 머문 30년 동안 한국어 자료를 모아 한불사전, 한영사전, 한영문법을 편찬했다. 입국하자마자 한국 최초의 고아원 언더우드 학당, 1887년에는 근대적 교육기관인 경신학당을 설립했고, 1915년에는 경신학당을 모태로 경신학교 대학부(현 연세대학교의 전신)를 설립했다. 경신학교 대학부는 1917년부터 연희전문학교의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타자기 재벌이었던 그의 형 존 언더우드 (John Thomas Underwood)가 토지 매입과 교사 건축 비용을 제공했다.[1]
그러나 평양의 새로운 교회 설립, 경신학교 설립 작업과 번역 작업으로 후유증을 얻었고, 일제가 '조선의 모든 교육자는 일본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교육 시행령을 내리면서 일본어 공부까지 겹쳐 과로로 몸을 상하게 된다. 1916년 미국으로 건너가 요양했으나 결국 그 해 10월 16일 57살로 사망했다.
3 후대의 평가
같은 조선에서 활동했지만 알렌은 중앙집권적인 선교방식을 지향했으나 언더우드는 민중에게 직접 다가가는 아래로부터의 선교방식을 지향했다. 또한 선교활동을 하면서도 자기 잇속 챙기기 급급했던 알렌과는 달리 청렴결백했으며 자신의 집을 고아원 겸 교회 건물로 기꺼이 내놓을 정도였다. 하지만 의외로 자신의 선교방식과 교리에 대해서는 일체 타협을 하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다른 선교사들과 갈등을 겪기도 하고 일제에 의한 압력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장로교에서는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로, 연세대학교에서는 설립자로 추앙하고 있으며 한국 교회사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1928년 연희전문학교 교정에 동상이 세워졌다. 하지만 1940년대 태평양 전쟁 중에 일제가 포탄을 만든다고 동상을 뽑아가는 바람에 광복 이후에 다시 세우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엔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이 동상을 또 뽑아가는 바람에 전쟁이 끝나고 3번째 동상을 다시 만들게 되었다.(...)
4 대인배 집안
위인들의 후손은 보통 말로가 좋지 않은 경우도 많지만, 이 집안은 대부분 사람이 대인배다. 가문의 구성원 전원이 한국식 이름을 갖고 있으며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다고 한다. 아래의 인물들은 각 세대의 장남이며,이게 이 집안의 업적 전부가 아니다.
- 2대 - 호러스 호톤 언더우드(Horace Horton Underwood, 한국명 원한경)
- 언더우드 집안의 2대 호러스 호톤 언더우드(Horace Horton Underwood, 한국명 원한경) 박사는 제암리 학살사건을 외신에 알렸다. 대학 인가를 받고 취임하게 된 연희전문학교 교장 시절에는, 자신이 미국 국적을 가졌기에 치외법권을 내세워 일제의 손에서 최현배, 정인보 등 한국어 학자들을 보호하면서 한국어 연구에 힘쓰게 했다. 하지만 조선어학회 사건이 터지면서 연희전문학교는 가장 많은 피해를 입게 되고, 교원 겸 연구원으로 근무하던 이윤재 박사와 한징 박사는 옥사한다.[2] 원한경 박사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진 태평양 전쟁 직전에 일제를 피해 미국으로 떠났다가, 광복 후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연희전문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1951년 부산에서 한국전쟁 구호사업을 돕던 중 심장마비로 병사한다.
- 3대 -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주니어(Horace Grant Underwood Jr. 한국명 원일한)
- 언더우드 집안의 3대가 되는 손자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주니어(Horace Grant Underwood Jr. 한국명 원일한)는 한국전쟁 당시 인천 상륙작전에 유엔군으로 참전했으며, 정전협정 당시에는 통역관을 맡았다. 전역 후에는 장로교 목사가 되었으며 장로교 계열 미션스쿨인 한남대학교와 배재대학교의 설립에 이바지한다. 1980년에는 광주 민주화 운동의 실상을 해외에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이로 인해 전두환 정부에 의해 강제추방당했다. 전두환 실각 후 복권되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으며 연세대 이사를 역임하고 한국 땅에서 삶을 마쳤다. 연세대 대학교회 루스채플에 이 분의 이름을 딴 원일한홀이 있다.
- 4대 - 호러스 호톤 언더우드 주니어(Horace Horton Underwood Jr. 한국명 원한광)
- 언더우드 박사의 증손자 원한광 박사는 연세대 영어영문학과에서 30년간 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국인의 영어교육론에 대해 연구했으며, 한미교육위원단장을 역임했다. 2004년 아버지 원일한 박사가 작고한 후 언더우드 일가의 모든 고서 보관본과 근대사 자료를 기부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3대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주니어 박사가 세상을 떠난 후, 언더우드 일가의 대부분은 2005년에 한국 땅을 떠나 미국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2011년 10월, 방우영 조선일보 상임고문의 영향으로 이사회가 교단파송이사에 대한 조항을 삭제[3]하게 되자, 조선일보가 연세대 법인의 지분을 노리는 것이 아닌가 또는 법인을 사유화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쏟아져나왔다.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2012년 현재까지 한국에서 컨설턴트로 활동중인 언더우드 박사의 3대손 피터 언더우드(Peter F. Underwood, 한국명 원한석) 씨와 4대손 리처드 언더우드(Richard A. Underwood, 한국명 원특한) 씨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협력을 얻어 연세대 사유화 반대운동을 벌이고 있다.#
5 연세대학교의 기념 현황
1. 교내에 언더우드 동상이 있다.
어서와 등록금을 내놓아라
2. 언더우드 일가 기념관도 운영 중이다.
3. 해외 벽지나 오지 등 선교활동이 어려운 지역에서 15년 이상 선교활동을 한 사람을 대상으로 연 1회 언더우드선교상을 시상한다.
[1]
4. 연세대학교 '언더우드 국제대학(Underwood International College)' 이 하나의 단과대학으로 존재한다. 줄여서 UIC라 부른다.
http://uic.yonsei.ac.kr/ko/main.asp
5. 연세대학교 국제캠퍼스의 기숙사는 12개의 하우스(House)로 이루어져 있는데 호그와트놀이? 이 중 언더우드 하우스가 있다.
http://yicdorm.yonsei.ac.kr/contents.asp?mid=m02_03
6. 연세대학교 국제캠퍼스의 중앙도서관 이름은 '언더우드 기념 도서관'이다.
http://uml.yonsei.ac.kr/
사실 이름 짓기 귀찮아서 웬만한 건 그냥 다 언더우드 붙인다
6 기타
그의 형 존 토머스 언더우드 (John Thomas Underwood)가 바로 유명 타자기 브랜드 언더우드의 설립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