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서』 「관장마황조전(關張馬黃趙傳)」 | ||||||
관우 | 장비 | 마초 | 황충 | 조운 |
張飛
(165? ~ 221)
관우, 장비는 모두 만인지적(萬人之敵)이라 칭해진 당세의 호신(虎臣)이었다. - 진수
나는 연인(燕人) 장익덕이다! - 삼국지연의
목차
1 개요
후한 말과 삼국시대 촉나라의 인물. 유비 휘하의 장수. 자는 익덕(益德). 탁군 사람.[1]
2 정사
2.1 초기 생애
탁주의 민간 전승에 따르면 장비는 사대부 집안 출신으로 문무를 겸비하고 서화도 뛰어났다.
청나라 시대의 역대화기록에 따르면 장비는 줘저우인으로 미인도를 잘 그렸다.
유비가 처음 거병할 때부터 관우와 함께 그를 따르기 시작했는데 기록이 매우 부실하다. 장비의 출신 성분을 두고도 말이 많은데 전부 추측일 뿐 검증된 바가 없다. 참고로 연의와 다르게 정사에서는 유비, 관우, 장비가 의형제였다는 기록은 없으나 여하튼 서로가 서로에게 각별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장비전에 따르면 젊어서부터 관우와 함께 유비를 섬겼는데, 관우가 몇 년 연장이어서 장비는 그를 형으로 섬겼다.
관우전에 따르면 유비가 향리에서 사람의 무리를 모으니 관우는 장비와 함께 그를 위해 적을 막아냈다. 유비가 평원상이 되자 관우와 장비를 별부사마로 삼고 부곡(部曲)을 나누어 통솔하게 했다. 유비는 두 사람과 함께 잠자며 같은 침상을 썼고 은혜가 형제와 같았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는 종일토록 시립했고, 유비를 따라 떠돌아다니며 고난과 위험을 피하지 않았다.
2.2 서주에서
선주전에 따르면 유비가 서주를 다스리게 되었다. 원술이 와서 유비를 공격하자 유비는 우이, 회음에서 이를 막았다.
선주전 주석 영웅기에 따르면 유비는 장비를 남겨 하비를 지키게 하고, 군을 이끌고 회음 석정에서 원술과 싸웠으나 이기고 짐을 되풀이했다. 도겸의 옛 장수인 조표가 하비에 있었는데, 장비가 그를 죽이려 했다. 조표는 둔영을 견고히 하고 수비하면서 사람을 보내 여포를 불렀다. 여포는 하비를 차지하고 장비는 패주했다.
여포전 주석 영웅기에 따르면 여포가 물과 뭍으로 동쪽으로 내려와 하비 서쪽 40리 되는 곳에 도착했다. 유비의 중랑장 단양 사람 허탐은 밤을 틈타 사마 장광(章誑)을 여포에게로 보냈다. 그가 말했다.
장익덕(장비)이 하비상 조표와 서로 다투어 익덕이 조표를 죽이니 성중에 대란이 일어 서로 믿지 못합니다. 단양병 천 명이 서쪽 백문성 안에 주둔하고 있는데 장군께서 동쪽으로 왔다는 말을 듣고 모두 기뻐하고 있습니다. 장군의 군사들이 성 서문으로 향하면 단양군이 즉시 성문을 열어 장군을 안으로 들여보낼 것입니다.
이에 여포는 밤중에 진격하여 새벽에 성 아래에 도착했다. 날이 밝자 단양병이 성문을 열어 여포의 군사들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여포는 성문 위에 앉아 보병과 기병으로 불을 놓아 익덕의 군을 대파하고, 유비의 처자식과 군자금, 부곡(部曲), 제장들의 가족을 노획했다.
선주전에 따르면 유비는 원술과 한 달 넘게 서로 대치했는데, 여포가 빈틈을 타 하비를 습격했다. 하비의 수장 조표가 배반하고 그 틈에 여포를 맞아들였다. 여포가 유비의 처자를 사로잡자 유비는 군을 돌려 해서에 주둔했다.
유비가 조조를 수행해 여포를 격파하고 함께 허도로 돌아온 뒤 조조가 장비를 중랑장으로 임명했다.
선주전 주석 오역에 따르면 조조가 여러 차례 친근한 자를 은밀히 보내 제장들이 빈객을 맞아 주연을 베푸는 자가 있는지 엿보게 하니, 번번이 이 일로 인해 장수들이 해를 입었다. 유비는 이때 문을 닫아걸고 사람들을 거느리고 무청(蕪菁)을 심고 있었는데, 조조가 사람을 시켜 문 안을 엿보게 했다. 그가 떠난 후, 유비가 장비, 관우에게 말했다,
내가 어찌 채소나 기를 사람이겠느냐? 조조가 필시 의심을 품었으니 더 이상 머물 수 없다.
그날 밤 뒤쪽 울타리를 열어 장비 등과 함께 경기병을 타고 떠나며, 하사받거나 선물 받은 의복을 모두 봉해 남겨두었다. 이에 소패로 가서 군사들을 거두어 합쳤다.
명제기 주석 헌제전에 따르면 나중에 유비가 소패로 가게 되었는데, 장비도 따라 갔다. 장비가 진의록을 만나서 말했다.
그대는 처(두씨)를 빼앗아 간 사람에게 부하 노릇을 하고 있으니, 이게 도대체 무슨 꼴이란 말이오? 우리랑 같이 갑시다.
그래서 진의록은 장비를 따라 수백 리를 갔는데, 후회를 하며 되돌아가려고 했고 그래서 장비가 진의록을 죽였다.
유비는 조조를 배반하고 원소, 유표에게 의지했다.
하후연전 주석 위략에 따르면 200년, 하후패의 종매(하후씨)가 13살일 때 고향 집에 있었는데, 땔나무를 줏으러 나왔다 장비에게 사로잡혔었다. 장비는 그녀가 양가의 딸임을 알아채고 아내로 삼아 딸을 낳았는데 뒤에 그 딸이 유선의 황후가 되었다.
2.3 삼고초려
제갈량전에 따르면 유비가 제갈량과의 정이 날로 깊어졌다. 관우, 장비 등이 불쾌한 기색을 보이자 유비가 다독이며 말했다.
내가 공명을 얻은 것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다. 원컨대, 제군들은 이에 관해 다시 말하지 말라.
이에 관우, 장비가 불평을 멈추었다.
2.4 장판파
유표가 죽고 조조가 형주로 들어오자 유비는 강남으로 달아났다. 조조가 하루 낮, 하루 밤을 추격하여 당양 장판에 이르렀다. 유비는 조조가 갑작스럽게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처자식을 버린 채 달아났고, 장비로 하여금 20기를 이끌고 뒤를 끊도록 했다. 장비는 물가에 의지한 채 다리를 끊고는 눈을 부릅뜨고 창을 비껴 잡으며 외쳤다.
내가 장익덕이다. 앞으로 나와 생사를 가름하자!
감히 접근하는 적군이 아무도 없었고 이 때문에 마침내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다.
구체적인 묘사는 상단의 기록이 전부이기 때문에 이 보다 더 자세한 정황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따라서 장비가 다리를 끊은 것이나 조조군을 대치한 것이 정확히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오늘날 우리로서는 추측할 수 밖에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진수는 장비의 용맹과 담력을 강조하기 위해 저 에피소드를 기록으로 남겼다는 점이다. 이미 적군이 한 번에 우르르 몰려 올 수 있는 상황에서 움츠러들지 않고 당당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장비의 대담함과 용기를 증명한다. 이 때 조조군이 5000 VS 21의 상황에서 장비를 두려워 해 공격하지 못했다는 것은 장비가 비범하게 활약하여 전국구급으로 명성을 날려왔을 터인데, 정사에서 특별히 전해지는 기록은 없다.
2.5 적벽대전
선주전 주석 강표전에 따르면 유비는 비록 부끄러움을 느끼고 주유를 남다르게 여겼으나 내심 반드시 조조군을 격파할 수 있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이 때문에 서로 어긋나게 뒤에 남아 관우, 장비와 함께 2천 명을 이끌며 주유에 매이려 하지 않았으니 이를 진퇴의 계책으로 삼았다.
2.6 남군 공방전
적벽대전 이후 주유군과 유비군은 남군에서 조인군과 대치하는데 여기서 관우와 장비도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주유전 주석 오서에 따르면 유비가 주유에게 말했다.
만약 장익덕이 천 명을 거느리며 경을 따르고, 경이 2천 명을 나눠 나에게 추가해줘, 서로 도우며 하수로부터 들어가서 조인의 후미를 끊으면, 조인은 내가 들어간 것을 듣고 필시 달아날 것이오.
주유가 2천 명을 그에게 더해줬다.
유비가 강남을 평정한 뒤 장비를 의도태수 정로장군으로 임명하고 신정후에 봉했고, 그 뒤 남군태수로 전임시켰다.
선주전 주석 헌제춘추에 따르면 손권은 유비와 함께 촉을 취하고자 하여 사자를 보내 유비에게 고했다. 유비는 스스로 촉을 도모하고자 했으므로 이를 거절하며 말했다. 손권이 이를 듣지 않고 손유를 보내 수군을 이끌고 하구에 주둔하게 했다. 유비는 손유군이 통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말했다.
너희가 촉을 취하려 하면 나는 응당 머리를 풀어헤치고 입산(入山)할 것이니, 천하에 신의를 잃을 수는 없다.
관우를 강릉, 장비를 자귀에 주둔시키고, 제갈량은 남군에 의거하게 하고 유비 자신은 잔릉에 주둔했다. 손권이 유비의 뜻을 깨닫고 손유를 불러 돌아오게 했다.
2.7 유비의 입촉
조운전 주석 조운별전에 따르면 손권은 유비가 서쪽을 정벌한다는 말을 듣고 배들을 대거 보내 여동생을 영접하게 했는데, 손부인이 은밀히 유선을 데리고 오로 돌아가려 하니 조운이 장비와 함께 군사를 이끌고 강을 가로막고는 유선을 구해 돌아왔다.
조운전에 따르면 유비가 가맹에서 환군해 유장을 공격하고 제갈량을 불렀다. 제갈량이 조운과 장비 등을 이끌고 강을 거슬러 서쪽으로 올라가며 군현들을 평정했다.
유비가 익주로 들어간 뒤 군을 돌려 유장을 공격했고, 장비는 제갈량과 함께 물을 거슬러 올라가며 군현들을 나누어 평정했다. 강주에 이르러 유장의 장수인 파군태수 엄안을 격파하고 산 채로 붙잡았다. 장비가 엄안을 꾸짖으며 말했다.
대군이 당도했는데 어찌 항복하지 않고 감히 맞서 싸웠느냐?
엄안이 대답했다.
경(卿) 등이 무도하게 우리 주를 침탈했으니, 우리 주에는 다만 머리를 잘리는 장군은 있을 뿐 항복하는 장군은 있을 수 없소.
장비가 노하여 끌고 가서 머리를 자르라고 좌우에 명했지만, 엄안은 안색이 변하지 않으며 말했다.
머리를 자르면 자르는 것이지 어찌 화를 내는가!
장비가 이를 장하게 여겨 풀어주고 그를 빈객으로 삼았다.
장예전에 따르면 장비가 형주로부터 점강현을 지나 촉군으로 들어갔을 때, 유장이 장예에게 병사를 주어 덕양현의 맥하에서 저항하도록 했는데, 군대는 패배하여 성도로 돌아왔다.
장비는 지나는 곳마다 승리하고 성도에서 유비와 만났다. 익주가 평정된 후 제갈량, 법정, 장비와 관우에게 각각 금 5백 근, 은 천 근, 전 5천만, 비단 천 필을 하사하고,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각기 차이를 두어 포상했다. 장비를 영(領) 파서태수로 삼았다.
마초전 주석 산양공재기에 따르면 마초는 유비가 후대하는 것을 보고 유비와 더불어 말하며 늘 유비의 자(字)를 부르니 관우가 노하여 그를 죽일 것을 청했다. 유비가 말했다.
다른 사람이 궁박해져 내게로 귀의했소. 그런데 경 등이 분노하며 내 자(字)를 불렀다하여 죽이자 하니, 천하 사람들에게 무엇을 보이겠소!
장비가 말했다
그렇다면 응당 예(禮)를 보여야지요.
다음 날, 크게 모이며 마초를 청했는데, 관우, 장비가 함께 칼을 쥐고 곧게 서 있었다. 마초는 좌석을 둘러보았을 때 관우, 장비를 보지 못했다가 그들이 서 있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니 마침내 다시는 유비의 자(字)를 부르지 않았다. 다음 날 탄식하며 말했다.
내가 이제야 패망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주인의 자(字)를 부르다 하마터면 관우, 장비에게 죽임을 당할 뻔 했구나.
이후로 유비를 존중하며 섬겼다.
유파전 주석 영릉선현전에 따르면 장비는 일찍이 유파가 머물고 있는 곳을 찾아갔는데, 유파가 그와 말을 하지 않아 장비는 매우 분노했다. 제갈량이 유파에게 말했다.
장비는 비록 무인이지만, 그대를 경모하고 있습니다. 주군께서는 지금 문무를 결집하여 대사를 정하려고 하십니다. 그대는 비록 고상한 천성을 갖고 있지만, 굽히려는 뜻이 적습니다.
유파는 말했다.
대장부가 이 세상에 살면서, 응당 사해의 영웅들과 교제해야 합니다. 어찌 무사와 함께 말을 하겠습니까?
2.8 한중 공방전
조조가 장로를 격파하고 하후연과 장합을 남겨 한천을 수비하도록 했다. 장합은 별도로 제군(諸軍)을 지휘해 파서로 내려가 그 백성들을 한중으로 옮기려 하니, 탕거, 몽두, 탕석으로 진군해 장비와 50여 일간 서로 겨루었다. 장비는 정병 1만여 명을 이끌고 다른 길을 따라 장합군을 요격하여 교전했는데 장합군은 산길이 좁아 앞뒤가 서로 구원할 수 없었고 장비가 마침내 장합을 격파했다. 장합은 말을 버린 채 산을 타며 단지 휘하 10여 명과 함께 샛길을 따라 퇴각했고, 장합이 군을 이끌고 남정으로 돌아가니 파(巴) 땅은 안정을 찾았다.
아마도 장비는 우회로를 따라 좁은 길목을 행군하는 장합을 급습한 것으로 추정된다. 장합은 위나라에서도 다섯 손가락에 꼽힐 정도의 명장이자 전략가인데,[2] 이에 맞서 장비가 멋진 승리를 거둔 것으로 보아 앞서 설명되었던 것과 다르게 장비는 단순히 용감한 무부가 아닌 용병에 뛰어났던 사령관이었음을 알 수 있다.
탁주의 민간 전승에 따르면 장비가 장합을 격파한 후에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바위를 종이 삼고 전장에서 휘두르는 장팔사모를 붓 삼아 입마명(立馬銘)이라는 시를 새겼다.
삼국지집해 장비전에 따르면 팔몽산은 장비가 장합을 격파한 곳이다.
한나라 장군 장비가 병사 1만 명을 이끌고 팔몽에서 적의 수장인 장합을 격파했으니 이에 말을 멈추고 글을 새기노라.「汉将军飞, 率精卒万人, 大破贼首张合于八蒙, 立马勒铭.」
대략 장비가 친히 쓴 것이다.
명나라 시대의 태평청화에 따르면 쓰촨성 류장현에서 장비가 절벽에 새긴 입마명이 발견됐다.
양부전에 따르면 유비가 장비와 마초 등을 파견하여 저(沮) 길로부터 나와 하변을 취하도록 하였으므로, 저, 뇌정 등 일곱 부족 1만여 부락이 모반하여 유비에게 호응했다.
조휴전에 따르면 유비가 장수 오란을 보내 하변에 주둔하게 했다. 유비가 장비를 보내 고산에 주둔케 하여 군의 배후를 끊으려 했다. 의논하던 많은 사람들이 이를 의심하자 조휴가 말했다.
적이 실제로 길을 끊고자 하면 응당 복병으로 몰래 행군해야 하는데, 지금은 오히려 먼저 성세를 과장하니 이는 실제로는 그들이 이를 실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땅히 적군이 아직 집결하지 못했을 때 급히 오란을 공격해야 할 것이고 오란이 격파되면 장비는 달아날 것입니다.
조홍이 이를 좇아 진병했고, 오란을 공격해 대파하니 과연 장비는 달아났다.
유비가 한중왕이 되자 장비를 사방장군 중 우장군, 가절로 임명했다.
위연전에 따르면 유비가 한중왕이 되어 성도로 옮겨서 다스리게 되니 중장(重將)을 얻어 한천을 진수케 해야 했다. 중론은 필시 장비가 될 것이라 하였고 장비 또한 내심 자신했으나, 유비는 위연을 뽑아 독한중 진원장군으로 삼고 한중태수를 겸하게 하니 일군(一軍)이 모두 놀랐다.
221년, 유비가 칭제하고 장비를 거기장군, 영(領) 사례교위로 올리고 서향후로 올려 봉했다.
2.9 죽음
당초 장비의 웅장위맹(雄壯威猛)은 관우에 버금갔으므로 위의 모신 정욱 등이 모두 관우와 장비를 칭하길 만인지적이라 했다.
관우는 병졸들은 잘 대해주었지만 사대부에게는 교만했고, 장비는 군자는 경애했지만 소인은 돌보지 않았다. 유비가 늘 이것을 경계하여 말했다.
경은 형벌로써 사람을 죽이는 것이 벌써 지나친데 또 매일 장정들을 채찍질 하고는 그들을 좌우에 있게 하니 이것은 화를 초래하는 길이오.
그러나 장비는 이를 고치지 않았다.
선주전에 따르면 221년 6월, 거기장군 장비가 주변인에 의해 해를 입었다.
유비가 오를 정벌할 때 장비는 군사 1만 명을 인솔하여 낭중에서 출발해 강주에서 만나기로 했다. 막 출발하려고 할 때 장비 휘하의 장수 장달, 범강이 장비를 죽이고 그 수급을 지닌 채 물길을 타고 내려가 손권에게로 달아났다. 장비 영(營)의 도독이 표를 올려 유비에게 보고했다. 유비는 장비의 도독이 표를 올렸다는 말을 듣고 말했다.
아! 장비가 죽었구나.
앞서 유비가 늘 장비에게 형벌이 가혹하니 이를 고치라고 충고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범강과 장달의 살인은 가혹행위로 인한 상관 살해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고대의 군법이란 것은 굉장히 가혹했기 때문에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아무것도 아닌 일로도 목이 날아갈 수 있었다. 그래서 범강과 장달이 대체 어떤 실수를 하고 어떤 형벌을 받았기에 하필 이릉대전 직전에 그들이 장비를 암살했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없으니 현대의 우리에게 있어 이 부분은 상상의 영역이다.
계한보신찬에 따르면 관우와 장비는 무용이 뛰어나며, 몸을 바쳐 세상을 바르게 하고, 주상을 봉대하였으며, 기세는 호랑이처럼 장렬하였다. 주상의 좌우를 지키며, 전쟁터로 번개처럼 달려나가 격투하여 주상의 곤란함을 구하고 대업을 도왔다. 그렇지만 사람들과 교제하거나 대응함에 있어서는 무례하고, 아울러 흉악한 일을 초래하게 되었다. 그들의 얕은 생각과 몸을 훼손시키며 나라를 구한 태도를 애도한다.
후주전에 따르면 260년 가을 9월, 장군 관우, 장비, 마초, 방통, 황충의 시호를 추증했다. 죽고나서 수십 년이 지나고 나서야 시호가 내려진 것인데 장비의 시호는 환후(桓侯)라고 했다.
3 가족 관계
- 하후씨 - 장비의 아내, 하후연의 조카딸.
- 장포 - 장비의 장남.
- 장소 - 장비의 차남.
- 경애황후 - 장비의 장녀, 유선의 황후.
- 장황후 - 장비의 차녀, 유선의 황후.
- 장준 - 장비의 손자, 장포의 아들.
장비의 가족 관계는 상당히 재미있는데 장비의 아내는 하후연의 조카딸인 하후씨라는 기록이 있다. 위략에 따르면 하후연의 형제의 가족이 기근을 이기지 못하여 모두 죽어버리자 홀로 살아남은 어린 여자아이를 하후연이 데려다가 길렀다. 하후연의 조카딸이 땔나무를 주우러 숲으로 왔다가 장비에게 보쌈당했다고 한다. 당시 하후씨가 13세여서 장비 로리콘 설 등의 루머가 나돈다.
위략은 철저하게 위의 시각에서 서술된 저작이기 때문에, 특히 정통성 측면에서 위와 상극인 촉한에 관한 기록에 있어서 그 신뢰성이 강하게 의심받고 있고, 실제로 유선 벤허설처럼 누가봐도 왜곡인 기록이 위략에 산재해 있다. 하지만 장비가 하후씨 집안의 여식을 처로 삼은 것에는 딱히 부정적인 뉘앙스가 깔려 있지 않고, 또한 위의 개국공신이자 필두 명장인 하후연 집안에 대한 신상 정보이기도 하니 왜곡의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고 여겨진다. 또한 유선이 하후패를 매우 우대하였던 정황을 보더라도 이는 사실에 가깝게 생각된다.
여담으로 후한말 중국의 경제 사정은 호적의 80~90%가 유실될 정도로 국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던 때였기 때문에 하후씨의 고아가 땔나무를 하러 산에 가도 크게 이상할 것이 없다. 건안 5년이면 황제가 끼니를 거르고 관리가 길거리에서 굶어 죽던 삼보의 난으로부터 불과 5년 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다.
한편으로는 장비가 하후씨를 납치했다는 기록은 위나라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기록이라는 추론도 있다. 조조는 유비의 심복들에게 관직을 줘가며 포섭을 시도했다. 장비에게 조조는 중랑장 관직을 주었는데, 아예 하후씨를 장비에게 시집보내 인척으로 만들어 확실하게 포섭하려고 했지만[3] 장비가 결국은 유비에 대한 충성을 버리지 않고 후에 다시 유비 세력으로 돌아가자 이에 대한 변명으로 장비가 하후씨를 납치했다고 했다는 추측이다.
장비의 아들은 요절한 장포, 시중을 지낸 장소가 있다. 장비의 손자는 장포의 아들로, 면죽성에서 제갈첨과 함께 등애의 공격에 맞선 가운데 전사한 장준이 있다. 장비에게는 두 딸이 있었는데, 모두 후주 유선의 황후가 되었다. 황실의 외척이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위상이 촉한에서 얼마나 높았는지 알 수 있다.
4 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자(字)가 동음의 익덕(翼德)으로 나온다. 이것은 장비의 이름에 '飛(날 비)'가 있기 때문에 이에 어울리고자 '翼(날개 익)'을 대신 사용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하지만 의미를 고려하면 정사의 자(字)인 익덕(益德)이 맞다. '덕을 더욱 더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연의에서는 그야말로 호걸에 전형적인 막내 캐릭터로 등장하는데, 주호 속성이 붙어서 술이라면 사족을 못쓰고, 선의에서 한 일이 안좋게 되어 유비를 곤란하게 만드는 등, 왠지 말썽꾸러기 막내동생(?) 이미지로, 굵은 사람에겐 굵게 대하고 가는 조무래기들은 하찮게 여기는 호걸다운 모습으로 묘사된다.
연의에서 장비는 연나라 상류층 후손이라서 스스로를 '연인 장비'라고 칭하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도원결의 직전까지 집안이 몰락하여 장비는 소와 돼지를 잡는 고기 장사를 하고 있다.[4]
연의의 여러 각색 판본 중 하나에 따르면 장비가 돼지고기를 팔고 있었는데 관우가 커다란 항아리를 장비 근처까지 들고 와서 그 항아리 속에 든 고기를 사람들에게 공짜로 나눠줬다. 장비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머리끝까지 화가 나는 상황이다. 옆에서 자기 물건보다 싸게 팔아도 열받는데 아예 공짜로 나눠주고 있다. 관우의 이 행동 때문에 관우와 장비는 싸움이 났다. 이 싸움을 유비가 중재해서 이를 계기로 유비, 관우, 장비는 도원결의를 맺었다. 단 이는 여러 판본 중 하나일 뿐이다.
싸움에서 여포를 제외하면 천하무적. 여포와 라이벌 구도를 세워 두 번의 일기토가 있었다. 첫번째 삼영전여포에서는 약간 밀려서 무예가 조금 아래라는 이미지였다. 덕분에 여포와 독특한 라이벌 구도를 형성한다. 여포에게 호승심 같은 것을 느끼며 싸움에서 도전하려 하지만, 여포의 인성에 대해서는 가루가 되도록 깐다. 삼영전여포에서 여포가 정원, 동탁을 양부로 섬겼기에 삼성가노(성 셋 가진 종놈)라는 불명예스런 이명을 지어준다.
여포가 서주에 있던 유비에게 투항한 이후로도 계속 장비는 여포 늑대론을 주장하며 끝까지 여포를 미워하는데, 이 때문에 역으로 여포의 장인으로 설정된 조표가 끌어들인 여포가 서주를 뺏는다. 간신히 우여곡절 끝에 소패로 돌아온 유비였지만 다시 장비는 여포가 상인에게 구입한 말을 대량으로 도적질하면서 또 전쟁을 일어나게 한다.
서주에서는 여포와 1:1로 맞짱떠서 밀리는 기색없이 100합을 싸웠는데 연의에서 무신급으로 띄워주는 여포와 이 정도로 대등한 매치를 벌인 건 장비가 유일하다. 게다가 여포가 서주를 기습할 때, 장비의 용맹을 알고 있어서 추격하지 않았다는 서술까지 있다.
관우가 조조에게 신세를 지고 있을 때 안량의 목을 벤 직후 조조가 관우의 무예을 찬탄하자 관우는 조조에게 "저는 별 것 아닙니다. 제 아우 장비는 적장의 목베기를 주머니 속 물건 꺼내듯이 합니다."라고 말하여 장비의 무서움을 각인시켜준 바가 있다.[5] 이는 고사성어 낭중취물의 유래가 된다. 이에 조조는 "장비란 이름을 옷깃에라도 적어두었다가 가볍게 상대하지 말라."라며 부하들에게 주의를 주었고, 이것은 장판파에서 현실화된다.
연의에서의 장판파 이야기는 좀 더 각색된다. 우선 병사들에게 뒤에서 흙먼지를 일으키게 만든 장비는 장판교에서 서서 조조군을 가로 막는다. 조조의 장수들이 잇따라 도착했지만 동쪽 숲에서 흙먼지가 이는 걸 보고 제갈량의 계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무도 가까이 가려 하지 않았다. 장비는 우레와 같은 큰 소리로 겁을 주고 그 기세에 하후걸이란 장수가 말에서 떨어지니 조조를 비롯한 대군이 밀물 빠지듯 줄행랑을 쳤다.
조선의 경연장에서도 선조가 장판파 대목을 언급했던 걸 가지고 유학자들이 갑론을박하기도 했다. 아무대로 이 장판교 대목은 연의 안에서도 꽤나 임팩트가 컸긴 컸나보다. 특히 연의가 허무맹랑하다고 극딜한 신하가 기대승이었는데 위에서 보듯 정사에서도 장비가 장판교 위에서 대군을 막아낸 기록은 확실히 남아 있으니, 헛다리 짚은 쪽은 오히려(...) 기대승이었다.
마초와도 승부를 내지 못한 유이한 캐릭터이기도 하다.[6] 1:1로 하루종일 싸우고도 승부가 나지않아 횃불을 켜놓고 밤중까지 싸운 일화도 있다. 다만 승부는 나지 않았지만 당시 장비는 전성기가 지난 4~50대의 나이였고 마초는 아직 팔팔한 30대였다.
최후 묘사는 정사에서는 단순히 수급을 취하는 것만 나온 반면, 연의에선 관우의 죽음을 애도한다며 3일 내로 휘하 장병들이 쓸 흰색 깃발과 흰 갑옷을 준비하라는 명령의 기간을 늘려줄 것을 요청한 범강, 장달을 오히려 채찍으로 벌하는데, 앙심을 품은 두 사람이 장비의 목을 베어 오나라로 도망친다. 향년 55세라고 나오는 것으로 보아 연의에서는 167년생으로 설정된 것을 알 수 있다. 정사에선 오에 귀순한 범강과 장달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연의에서는 귀순 후 손권이 유비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돌려보내 둘 다 장포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나온다.
4.1 연의의 피해자?
연의의 최대 피해자 중 한 명이라고도 볼 수 있는 인물. 힘은 세지만 계책에 서툰[7] 경솔하고 단순 열혈하며 정이 많은 연의에서와 달리 정사의 장비는 지용을 겸비한 호걸이다. 관우와 더불어 만인지적 칭호으로 명성이 자자했고 인간흉기이자 용병에 능한 장수로서, 위에서도 손꼽히는 명장 장합이 이끄는 군세를 한중에서 완전히 초토화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연의에서의 모습과는 달리 정사에서는 술에 취해 실수한 기록은 없다. 연의에서 술에 취해서 하비성을 빼앗기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은 상관인 조표가 여포와 내통한 것이 원인이었다. 또 연의에선 꾀를 쓰는데 서툴다거나 어진 선비를 몰라보고 날뛰는 등 어수룩한 모습을 보이지만 실제로는 포로로 잡은 적장도 뛰어난 인물이라면 격식을 갖추어 엄중하게 대했다. 연의를 통해 정립된 망나니의 모습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8]
여러모로 연의에서 재구성된 인물. 하지만 연의의 묘사가 단순히 장비를 깎아내리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정사에서의 장비는 호걸이라고 할 수는 있으나 인간적인 매력을 느끼게 하는 부분은 의로움을 제외하면 전무하다. 그러나 연의로 인해 구축된 용맹무쌍하면서도 단순하고 순진한 장비의 성품이 서민들로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다는 것이다. 확실히 연의에서 장비가 벌이는 실책은 독자의 입장에서 안타까움을 느끼게 할지언정 미워할 마음이 들게 하는 일은 없다. 오히려 탐관오리를 매질하거나 형제의 정에 눈물을 쏟는 등 인간적인 면모가 부각되거나 민초들의 심정을 대변해 주는 경향이 있다.[9] 개그 캐릭터로서의 일면도 존재해서 제갈량의 초려에서 유비와 나누는 대화는 만담에 버금간다.[10]
이러한 모습들로 볼때 장비는 엄연한 삼국지연의의 마스코트인 셈이다. 이는 유비나 여포 등 연의에서 입체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들과도 공통되는 점이다. 연의에서 묘사되는 유비의 무위의 치는 현대인의 관점에서 무능력자로 비쳐질 수 있으나, 연의가 저술될 당시에는 매력적인 인물상으로 생각되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4.2 연의에서의 장비의 지략
사실 장비가 연의에서는 지략이 부족하다는 오해가 많지만, 잘 읽어보면 성격이 앞뒤 안가려서 실수를 많이 저질러서 그렇지 오히려 지략이 있는 인물로 묘사하였다. 처음에는 정말 단순무식 자체의 그런 모습에 가까웠지만 점차 완전체에 가깝게 성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즉 성장형 캐릭터. 공명이 이를 알고는 장비가 지모를 썼다며 유비에게 경하드렸다. 애시당초 역사 속의 장비도 지용의 겸비한 호걸인 만큼 그 활약상을 그려내면서 장비의 용병술이 잘 드러난 부분이 생겼고 이로인해 연의에서도 처음엔 단순무식 캐릭터에서 차츰 성장하여 지략까지 겸비한 완전체로 성장하는 모습을 잘 그려주었다.
연의에서 장비가 보여준 지략은 다음과 같다.
- 유비가 조조의 밑에 잠시 의탁했다가 원술과 원소의 합류를 저지한다는 명목으로 군사를 빌려 탈출한 뒤 서주를 점거하고 조조는 유대와 왕충을 보내 토벌하게 한다. 첫 전투에서 관우가 왕충을 사로잡자 장비는 호승심에 자신도 유대를 잡아보이겠다며 나선다. 장비가 문자 그대로 며칠을 개지랄부르스를 춰도 유대는 무응답으로 일관했다. 그러자 장비는 야습을 계획하는 한편, 주정을 하는 척하며 부하 중 한 사람을 트집 잡아 죽도록 패고 야습전에 제사지낼 제물로 쓴다고 한 후 측근들에게 몰래 명해 풀어주라 한다. 그 병사는 적진에 가서 야습을 알리고 적장도 야습에 대비하는데 장비는 무슨 생각인지 병력을 셋으로 나눠 여러 방향에서 처들어 가게 한다.[11] 드디어 적진에 입성했지만 야습에 대비해 진을 비워서 함정에 걸려서 도주하는 장비를 추격하던 유대는 갑자기 말머리를 돌린 장비가 맹공을 퍼붓자 후퇴하는데 이미 진은 장비가 산을 넘어 뒤를 치게 한 부대가 점령한 상태. 당황해서 우왕좌왕하는 유대를 장비가 창대로 낙마시키고 생포한다. 원작에 언급이 없어서 확실치는 않지만 짜고친 고스톱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 장판파에서 병사들에게 먼지를 일으키라하여 대군이 숨어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그러나 그 뒤 다리를 끊어버려서 조조의 의심을 사 도루묵이 되었다.
- 엄안이 성안에 틀어 박힌 채 수성에만 신경을 쓰자, 장비는 샛길 기습을 계획한다. 장비군의 움직임이 수상치 않자 엄안도 장비의 의도를 눈치채고 매복 작전을 구사한다. 물론 기습 작전은 페이크였고 엄안히 공격한 장비도 대역일 뿐이였다. 양쪽 협공을 받은 엄안은 사로잡힌다.
- 산 지형을 이용해 장합을 잡기 전에도 장합이 성에 처박혀 안 나오자 몇날 며칠을 술판을 벌이고 논다. 유비는 그 이전의 술로 인해 벌인 실수들을 생각해서 강제소환을 하려하나 그 작전을 눈치챈 공명은 오히려 좋은 술을 수레가득 보내고 유비에게 장비가 계략을 쓰고 있음을 언질해준다. 술이 도착하자 장비는 역시 공명이라면 눈치 채고 도와줄줄 알았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하며 더욱더 크게 술판을 키운다. 그 꼴을 본 장합은 "저 털보자식이 날 우습게 봐도 정도가 있지!!"하며 전군을 동원해 기습 공격을 하지만 술판의 상석에 있던 장비는 허수아비 인형. 그리고 진짜 장비가 술에 전혀 안취한 채 장합을 공격한다.
아니 근데 장비는 퍼마셔도 꽤 멀쩡한 성격 아니었나대패한 뒤 성으로 숨어 들어가 농성을 하자 주변 백성들을 통해 우회로를 알아내 산을 타고 넘어가 기습한다. 그리고 역시나 장합은 대패한다.
5 평가
중국사를 통틀어 관우, 한세충과 더불어 만인지적의 칭호를 받은 인간흉기.
용맹, 지휘, 전술, 전략 모두 따라올 자가 없는 용장. 장판파에서 단기로 조조의 대군과 맞선 용맹, 유비의 입촉 시절에 형주에서 출발하여 파서를 박살내며 낙성까지 고속도로를 뚫어 기동전에 능한 것을 입증하였고, 한중 공방전에서 훗날 제갈량의 진격을 여러번 막아내는 명장 장합과의 장기전 이후 별동대 기습으로 군세를 말 그대로 몰살시키는 전공을 세우고 한중 방어선을 초토화시켰다. 이후에 그 조조가 한중을 회복하려 출병했어도 회복하지 못했다. 수천년이 지나가는 중국사에서도 장기전에 능한 장수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주군이자 군사적 재능으로 조조 다음가는 군웅이었던 유비조차 이릉에서 장기전에 휘말려 대패한 것만봐도 꾀 없는 장수라는 이미지가 강한 장비로선 파격적이다. 번성 공방전에서 온 천하를 진동시킨 관우와 더불어 만인지적이라는 평을 받은 유이한 장수. 주인인 유비가 도망다닐 때도 이미 천하의 이름을 떨친 관우와 더불어 절대 두마음을 품지 않은 의리, 위연이 자기를 제치고 한중태수로 임명되었을 때도 불평 한번하지 않는 대인의 그릇까지 겸비한 호걸이었다. 단기로는 항우, 별동대를 지휘하면 하후연, 대군을 이끌면 법정이 되는 연의가 아닌 정사에서 기록되있는 사기 캐릭터.
연의에서 묘사되는 관우와 장비의 이미지는 관우는 침착한 성격, 장비는 물불 가리지 않는 성격이지만, 정사에서 보여지는 모습은 관우는 열혈, 장비는 냉혈로 연의와는 반대이다. 관우의 경우, 일화마다 솔직함이 묻어있는 모습이 많이 보이고, 장비는 유비에게 충고를 들을 정도로 부하에게 봐주는 것이 없었다.
이러한 면모에서 관우와 장비는 사람을 대함에 문제가 있었다. 관우는 대인에겐 오만했지만 소인에겐 관대했다. 반대로 장비는 대인은 존중했지만 소인에게는 가혹했다.
- 사로잡히고도 의연한 태도를 잃지 않는 엄안을 존중하여 회유하는 데 성공했다.
- 식자로 유명한 유파에게 대놓고 모욕을 받고도 그냥 덮고 넘어갔다.
- 유비가 자신을 추천하는 중신들의 의견을 뿌리치고 위연을 한중태수로 삼았을때도 군말없이 수긍했다.
- 인품이 비루한 상관인 조표와는 반목했다.
- 평소 수하들에게 가혹했고 하필 이릉대전을 앞두고 부하인 범강과 장달에 의해 살해당한다.
수십년 간 깨지고 도망가는게 일상사였던 유비군 소속으로 그런 행동을 하고도 수십년 간 무탈했던 점이나 혹독하게 대하면서도 그런 이들을 계속 옆에 둔 것을 보면 단순히 포악했던 것이 아니라 군법에 따른 나름의 훈계로, 형벌을 통해 소인도 군자처럼 행동하길 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인물 감정에 일가견이 있는 유비는 장비가 아랫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것을 지적해왔는데, 결국 장비는 이로 인한 부하의 배신으로 목이 달아난 것이다.
6 기타
서민에게 친근한 이미지 덕분인지 삼국지가 연극으로 공연되기 시작하던 송나라, 원나라 시대에는 장비가 주인공이었으며, 현대에도 장비는 중국인들이 매우 좋아하는 삼국지의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그래서 장비가 관련된 민간 설화나 야사 또한 굉장히 많은 편이다. 호즙주에 관련된 이야기라든가, 적장과 지혜를 겨루기 위해 한 벙어리 문답 등이 유명하다.
장비가 서화에도 조예가 깊었다는 설이 있는데, 이는 후세에 지어진 이야기로 여겨진다. 여러 창작물 등에서 이를 소재로 사용하는 것을 생각하면 중국에서 이는 나름대로 인기 있는 소재인 듯하다.
임진왜란 당시의 민간 야사에 의하면 선조는 장비의 환생이며, 전란 중 관우가 도와주었다고 한다. 참고로 만력제는 유비라서 임진록에는 만력제의 꿈에 관우가 나와서 선조가 장비의 환생이라며 파병을 역설하는 장면이 있다. 서민들 사이에서 장비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하게 해주는 부분이다.
명나라 시대의 소부에 따르면 양귀비와 장비가 등장하는 우스운 이야기가 있다. 어떤 사람이 들판의 해골을 수습해줬는데 그날 밤 "비요. 비요."라는 말을 듣고 문을 열어주니 양귀비의 혼령이 와서 고맙다면서 운우지정을 나누었다. 그 말을 들은 다른 사람이 흑심을 품고 들판의 해골을 수습했는데 다시 그날 밤 "비요, 비요."라는 말을 듣고 문을 열어주니 장비가 있어서 답례로 밤을 함께 보냈다(...). 도둑은 안들었겠다.
7 미디어 믹스
- 장비/기타 창작물 문서 참조.
8 관련 항목
- ↑ 유비, 간옹과 동향이다.
- ↑ 장합이 제갈량의 1차 북벌을 막은 건 물론 이후에도 제갈량의 북벌을 막는데 혁혁한 활약을 했다.
- ↑ 조조는 손책이 강동에서 세력을 떨치자 조인의 어린 딸을 손씨 가문에 시집보내어 인척 관계를 맺는 정치적 계산을 한 사례가 있다.
- ↑ 그래서 중국에서는 장비를 도축업자의 시조로 보는 곳도 있다.
- ↑ 실제 기령을 전투력 측정기로 삼아서 비교하면, 기령은 관우와 30합을 싸워서 패색을 보이는 정도에 그쳤지만, 장비와 싸울 때에는 10여합에 목숨을 잃는다.
- ↑ 다른 한 명은 허저.
- ↑ 사실 연의의 장비도 무조건 무식한 닥돌형 장수는 아니다. 이하 후술.
- ↑ 물론 연의에서도 엄안에게 예를 갖추는등 영 안나오는건 아니다.
- ↑ 단 유비를 죽이려 한 차주의 죄없는 일가를 몰살한 행위는 예외. 유비도 너무 잔인했다고 야단쳤다.
- ↑ 삼국지 판본에 따라 관우나 제갈량 같은 인물들은 경어체의 정중한 말을 쓰는데, 장비는 구어체를 쓰며 속어를 남발하는 등 속된 말로 양아치스러운 말을 쓴다.
- ↑ 셋 중 한 부대는 산을 돌아 후방을 기습하는 임무를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