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항공 123편 추락 사고

日本航空123便墜落事故
Japan Airlines Flight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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もう、だめだ!(이젠 끝이야!)- 타카하마 마사미 기장의 마지막 외침[2]
항공사고 요약도
발생일1985년 8월 12일
유형정비 불량에 의한 유압계통 이상
발생 위치일본 군마현 다카마가하라 산 능선
탑승인원524명
사망자520명
생존자4명
기종Boeing 747-100SR
항공사일본항공
기체 등록번호JA8119
출발지도쿄 국제공항
도착지오사카 국제공항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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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1월 4일 도쿄 하네다 공항에서 찍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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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5월 3일 도쿄 하네다 공항에서 찍힌 사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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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일 스트라이크 수리 후 추락사고 전에 찍힌 사진. 뭔가 위의 사진들에 비해 갑자기 지저분해진 기체 맨 뒷부분에 주목하자.[4]

[1] [5]
기체 맨 뒷부분을 확대한 사진. 이 사진은 사고기의 1978년 발생한 일본항공 115편 불시착 사고테일 스트라이크로 인한 파손이다. 후술하겠지만, 겉으로 보기보다도 상태는 훨씬 심각했으며, 결국 이 참사의 원인이 되었다.

단일 항공기 최악의 참사

2015년부로 30주기가 되었다.

민간 항공업계의 1985년도는 흑역사의 한 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 해 동안 전 세계에서 대형 항공 사고가 4 터졌다.[6] 그러나 29년 후 같은 현상이 반복되었다. 이 해 8월 12일 [7]오후 6시 57분 경 JAL 소속의 도쿄오사카747-SR46/ 항공기 식별번호 JA8119가 도쿄에서 100km 떨어진 군마 현 부근의 다카마가하라 산 능선(오스타카노오네,御巣鷹の尾根)에 추락하여 탑승객 509명과 승무원 15명, 총 524명중 단 4명만이 생존한 참사로 단일 항공기 사고로는 항공 사상 최악의 인명사고이다. 항공기 탑승객 총사망 순위로도 2위.(사망순위 1위는 테네리페 참사로 이쪽은 583명이 사망했다.)


2 운항 승무원

승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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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 : 타카하마 마사미 (高濱 雅己 49세, 운항부분 지도 교관, 총 비행시간 12,423시간41분)
부조종사 : 사사키 유타카 (佐々木 祐 39세, 기장 승격 훈련생, 총 비행시간 3,963시간 34분)
항공기관사 : 후쿠다 히로시 (福田 博 46세, 엔지니어 부분 교관, 총 비행시간 9,831시간 03분)
수석 사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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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타노 쥰 (波多野 純 39세, 총 비행시간 10,225시간)
부사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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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하라 사치요 (木原 幸代 3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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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다 마리코(赤田 真理子 3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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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타 카오리(藤田 香 2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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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미치 레이코(宮道 令子 3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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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시마 유미코(対馬 祐三子 2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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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 마사요(吉田 雅代 2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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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비나 미츠요(海老名 光代 28세)
스튜어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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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뵤시 유미코(白拍子 由美子 2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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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 미키코(大野 美紀子 2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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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 세이코(大野 聖子 2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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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타노 쿄코(波多野 京子 24세)

당시 이 비행기는 부기장의 기장 승격 훈련을 겸하였기에 사사키 유타카(佐々木佑) 부기장은 기장석에서 비행기 조종을 지시했고 타카하마 마사미 기장은 부기장석에서 관제소와의 교신을 주로 맡았다. 때문에 아래의 교신 내용을 들어보면 기장이 교신을 담당하고, 엔진 출력 조종 등 원래 기장의 역할은 기장이 직접 하지 않고 부기장을 독려하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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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본항공 123편 승무원 배치도
PUR은 퍼서(PURSER) 사무장을 의미
AP 는 부사무장(Assistent purser)
STW는 스튜어디스(Stewardess)

3 사고 경과

3.1 출발

사고가 난 기체 747-100SR은 747-100의 가능한 이착륙 횟수를 늘리고 이륙 최대 중량을 줄인 단거리 버전으로 일본 국내선의 막대한 수요를 만족시키고자 연료 탑재량을 줄이고, 수송량을 극대화시키고, 랜딩기어를 보강한 기종이다. 사고기에는 총 정원 528명중 524명이 탑승했는데 원판인 747-100의 일반적인 3클래스 좌석 배열 정원이 366명인 것을 감안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탑승했는지 알 수 있다. 사고일은 일본의 추석에 해당하며 일본내 2대 명절로 불리는 오봉(お盆) 전날로, 탑승객은 샐러리맨들과 귀향객, 여행객들이었다. 또한 기체는 그날 삿포로 1왕복,후쿠오카 1왕복 비행을 한 후 오사카에서 도쿄로 돌아온 다음 비행을 마칠 예정이었으며,이런 까닭에 항공기관사가 오랜 시간동안 조종실에 탑승하고 있었다(도쿄~후쿠오카 왕복편으로 탑승). 부기장은 다른 비행기에서 기장 승격 시험을 마친 다음 123편을 타게 됐고, 기장은 그날 첫 비행이었다.

당초 이륙 예정 시각은 18시 정각이었으나, 4분 늦은 18시 04분에 이륙. 이후 56분의 비행을 거쳐 오사카 국제공항에 착륙할 예정이었다.
사고가 나기 직전까지 기체의 모든 계기는 정상 작동했고, 연료는 약 3시간을 비행 할 수 있는 양을 탑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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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123편 비행기 티켓
참고로 이 티켓은 생존자인 카와카미 케이코의 티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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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8월 12일 사고발생 1시간전 하네다공항에 착륙하는 Ja8119 편. 사고 바로 직전, 마지막 착륙 시의 비행기가 사진으로 남은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그뿐만 아니라, 아래 다큐멘터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바로 사고가 일어난 그 비행을 위해 택싱하고 이륙하는 장면이 고스란히 영상으로 남아 있기도 하다.

3.2 발생

당일 123편은 하네다 공항을 출발. 예정 대로의 비행을 하고 있었으나 이륙한지 12분이 지난 18시 24분에 고도 24000ft 상공에서 큰 폭발음이 들리고 후쿠다 히로시(福田 博) 항공기관사(FE)의 계기판엔 R5(오른쪽 5번째)도어의 경고등이 점등된다. FE는 이 도어가 떨어져 나갔다고 판단하고 조종사에게 알린 것이며 경고 50초 후에 조종사는 긴급 사태(EMERGENCY)인 '스쿼크 77'[8]을 발신.

사고 직후 비행기가 상하로 요동치며 불안한 모습을 보이자 기장은 긴급 강하를 시도하면서 하네다 공항으로 회항을 요청한다. 하지만 이때 벌크헤드가 날아가고 수직 꼬리날개가 찢겨 날아가면서, 조종타면을 움직이는 유압액이 새어나가[9] 조종 불능에 빠진다. 물론 항공기의 유압계통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보통 다중 계통으로 구성하며 747의 유압계통 역시 4개의 채널로 구성. 하지만 123편은 불행하게도 4계통 모두 찢겨나가고 말았다.

3.3 결말

조종불능에 빠진 직후 위와 같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조종사들은 플랩과 4개의 엔진의 출력을 조정하여 어떻게든 기체를 제어하려고 안간힘을 다한다. 그러나 13500 ft(4114.8m)로 강하한 직후, 조종사는 결국 관제소에 조종 불능을 보고한다. 이후 기체는 약 30분 동안 불안정한 상태로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는데 이는 조종이 불가능한 기체의 기수가 위로 들리게 되면 고도는 상승하고 속력은 감소/ 어느정도 속력이 감소하면 기수는 아래로 떨어지면서 고도는 다시 하강, 속력은 상승/ 속력이 붙은 기체의 기수는 다시 위로 향하는 'Phugoid,dutch roll,stall' 사이클 현상 때문이다. 이 때문에 몇몇 승객들이 남긴 유서가 다소 휘갈기게 적혀 있다.

이러는 와중에 비행기가 요코타 미군기지와 가까워지자 이 기지에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구조대 파견을 준비했으나 거리가 멀어져서 이들은 도움을 줄수가 없었다.

이상 발생 약 30분 뒤 오른쪽 주날개가 지면에 닿으면서(나무에 부딪혔다는 설도 있다.) 기체 후부가 떨어져 나갔다. 여기서 떨어져나간 후부는 꼬리를 따라 떨어져 충격을 약화시켰기 때문에 기적적으로 생존자를 만들 수 있었다. 이 시점에 하네다 공항과 요코타 미군기지 활주로에서는 비상착륙을 준비하였으나 방향타 조종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기체는 몇 차례 선회하면서 후지산 방향으로 향한다. 계속해서 기수가 오르내리는 가운데 플랩이 상승하면서 결국 양력을 완전히 잃고 기체가 급강하하며 6시 56분 산에 수직으로 추락. 기체는 형체도 없이 파괴되었다. 낙하 직전 상승하기 위해 엔진 출력을 엄청나게 올린 상태로 지면에 곤두박질쳤고, 때문에 추락시 속도는 약 350kt(시속 650~700km/h)였으며 그 충격은 수백 G(중력 가속도)에 이를 정도였다고 한다.

충돌 현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으며, 일례로 타카하마 마사미(高濱 雅己) 기장의 시신은 거의 완전히 불타버려 확인가능한 치열 5개만 남은 아래 턱뼈로 신원을 겨우 확인했다. 타카하마 기장의 장녀인 요우코씨는 보이스 레코더가 공개되기 전까지의 15년간을 '519명을 죽여놓고는 뻔뻔히도 잘도 살아있구나'라는 전화를 정말 수없이 받았다고 한다. 2000년에 보이스 레코더가 공개되고 나서야 마지막까지 기장이 애썼다는 것을 인정받았다고.[10] 참고로 요우코씨는 아버지가 못지킨 항공 안전에 헌신하겠다는 목표로 아버지가 근무하던 일본 항공에 현재도 객실 승무원으로 근무 중이다.


비행기가 추락한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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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기내의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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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소 마스크가 내려왔을 당시 찍은 기내 사진.
아직까지는 기내의 분위기가 침착해보인다.
카메라필름은 무사히 보전됐으나 촬영자는 사망했다.
참고로 사진속 왼쪽 흰 와이셔츠가 요시자키 유우조(향년 38세)
작은딸 유카리(향년 6세) 오른쪽 건너편 아들 미츠요시(향년 9세)는 사망했지만
부인인 히로코씨(당시 35세)와 장녀 미키코양(당시 8세)은 생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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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속의 승무원은 뒷날개 오른쪽 맨뒤에 있었던 객실 승무원 오노 미키코(향년 26세)

18시 24분경, 기내에선 "펑"하는 충격음이 들린 직후 각 좌석에 산소 마스크가 내려왔으며 "현재 긴급 하강중. 마스크를 착용해주세요"라는 프리 레코디드 어나운스[11]일본어영어로 방송되었다. 승객들은 승무원의 지시에 따라 산소 마스크와 안전벨트를 착용하고 담배를 끄는 등의[12] 비상 대응을 행했고 일부 좌석에선 수면에 충돌함을 대비해 구명조끼 착용도 이루어졌다. 생존자인 승무원의 증언에 따르면 사태의 심각성은 느끼고 있었지만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 인지할 수 없었으며, 이상 발생 직후부터 낙하할 때까지도 혼란스러운 기색은 거의 없이 승객 전원이 침착히 행동했다고 한다. 18시 30분경, 승객들은 마지막임을 직감하고 불안정한 상태의 기체 내에서 필사적으로 종이에 유서를 쓰기 시작한다. 일반적인 낙하 사고에선 이상 발생에서 수초~수분의 여유도 없이 바로 추락하는 경우가 많으나 현 사고에선 30분동안 비행을 계속했기 때문에 유서를 남길 시간이 생긴 케이스이다.

그 후 충격에 대비하기 위한 '안전 자세[13]'를 취하였다. 기내 방송으로 유아 동반의 부모에게 아이를 감싸는 방법, 신변물을 확인하고 예고 없이 착륙할 상황도 있음을 알리는 방송 등이 흘러나왔다.

조종실에선 도쿄 항공 교통 관리부를 통해 몇번이나 "조종 불능" 신호를 전했다. 하네다 공항 관제에서 123편의 주파수 변경을 지시하나 조종 불능으로 비행기의 위치를 알 수 없었다. 하네다 관제는 '쿠마가야(熊谷, 사이타마현) 서쪽 25마일'임을 알렸다. 사이타마현의 오타키촌 부근을 비행하고 있던 상태였다. 나가노현 카와가미촌에 진입할 때즈음 오른쪽으로 선회하여 오스타카산 방면으로 향하는데 이 부근에서 농사를 하고있던 사람이 머리 위를 천천히 선회하는 123편을 목격하였다. 목격자는 "뭔가 이상한 느낌이었다"고 비행 상황에 대해 증언하였다. 밑의 CVR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하네다로의 귀항을 요청했지만, 조종 불능으로 인해 하네다 공항과 정 반대 쪽으로 계속 멀어진다.

조종석에서는 승무원 사이에 산소 마스크를 착용할지 말지에 대한 대화가 이루어지다가 마스크를 쓰지않은 채 마지막까지 조종을 하기로 한다. 마스크를 쓰고 있으면 목소리가 명확하게 들리지 않게 되기 때문이었다.

기체는 속도와 동시에 엔진의 추진력도 크게 변동하였다. 이미 조종사에 의한 조작은 불가능한 상태였다. 북서쪽 570m 떨어진 계곡 너머 다카마가하라의 산등성이에 동체 후부가 꺾인 채 뒤집힌 상태로 돌격한다. 4명의 생존자는 이 동체 후부의 좌석에 앉아있었기에 피해를 면할 수 있었다. 낙하시 속도는 265노트(시속 490km), 사고 시각은 18시 56분경으로 "もう、だめだ!(이젠 끝이야!)"라는 기장의 마지막 음성과 충격음이 들린 후 CVR가 종료되었다.

5 CVR(Cockpit Voice Recoder)

일본 운수성은 비공개 자료였던 본 기체 조종실의 음성녹음자료를 1999년 11월에 모두 폐기처분하였다고 발표했는데[14], 누군가가 이를 녹음하여 2000년 8월에 방송국에 공개하여 큰 파장이 일었다. 아래가 해당 녹음자료.

충격을 받을 수도 있으니 한 번 더 생각해보고 듣도록. 특히 가까운 시일 내에비행기를 탈 일이 있거나, 재난 관련 PTSD가 있는 사람 역시 절대 청취를 권하지 않는다. 강조가 지나치다고 생각하겠지만, 이 음성기록을 들으면 비행기를 탑승한 당사자가 아님에도 생존을 위한 처절함이 생생하게 느껴지며 특히 맨 마지막의 경고음 끝에 충돌음이 들리는 부분이 가장 섬뜩하다.

굳이 사고 당시의 상황을 알고자 한다면 항공 사고 수사대사상 최악의 참사의 해당 에피소드를 보는 것이 그나마 정신적 데미지를 최소화하는 방법이다. 전자는 교신 과정과 기내 상황을 각종 기록을 참고로 하여 극화 형식으로 대단히 급박한 분위기로 표현하고, 후자는 타임 테이블 형식으로 상황을 분석하는 데 집중한다. 신중히 골라서 볼 것.[15]

- 극화버젼


플래시 버전 한국어 영상판

- 사고전부터 추락까지 전체버젼


사고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경우에만 볼 것을 강력권장(교신내용을 보고자 할경우 HD영상으로 전환후 전체화면으로 바꿀것, 마지막 ATC의 경우 CC버튼을 누르면 자막확인가능)

CAP: 기장(타카하마 마사미) COP : 부기장(사사키 유타카) F/E : 항공기관사(후쿠다 히로시) ACC : 항공 관제센터 YOK : 요코다 진입관제소 APC : 도쿄 진입 관제센터

마지막 10초 전에 나오는 WHOOP! WHOOP! PULL UP! 멘트는 항공기 조종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경고음이다. 문서 참조.

6 생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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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편의 좌석표. 분홍색이 생존자들의 좌석. (※ 일본 위키피디아 출처.)

생존자 여성 4인방의 구출 당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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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와카미 케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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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부터 요시자키 미키코, 요시자키 히로코, 오치아이 유미
  • 생존자는 JAL 스튜디어스 오치아이 유미(당시 26세), 요시자키 히로코(35세)와 장녀 미키코(8세), 카와카미 케이코(12세). 형체도 알아볼수 없을 만큼 참혹한 상태로 발견된 다른 희생자들에 비해 기체 맨 끝 좌석에 있었기 때문에 큰 부상없이 생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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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주간 아사히의 표지. 주인공은 당시 생존자 4명 중 한 명인 카와카미 케이코.
생존자 4인방중 언론에 가장 집중이 되어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30년이 지난 지금 외부 언론과 일절 취재를 거부하고 있다. 그래서 그 대신 사고당시 야구부 연습때문에 가족들이랑 홋카이도 여행을 못간 케이코의 오빠인 카와카미 치하루(2015년 시점 44세)를 30주년을 맞이하여 겨우 취재했다고 한다.
2002년 10월 26일 결혼해서 2004년 6월 첫 출산하고 어머니 카와카미 카즈코(사고당시 향년 39세)의 뒤를 이어 간호사를 했지만, 언론때문에 육아도 어려울 뿐더러 당시 기레기들 때문에 등교거부를 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게다가 사고 당일인 8월 12일은 희생된 여동생 카와카미 사키코(향년 7세)의 생일이라서 더욱 비극적인 고통을 겪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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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 사고 발생 10년후 1995년 도쿄 본가에서 인터뷰 당시 촬영한 요시자키 히로코씨 (당시 45세)
아래 : 미키코양과 같이 생존한 엄마 요시자키 히로코(당시 35세) 미키코(당시 8세)
아래 사진의 미키코양은 생존했지만 추락으로 인한 부상으로 사진으로 보다시피 치아나 얼굴에 상처가 심했다. 이 때문에 학교에서 이지메를 당했으며, 고등학교 수학여행을 제외하면 사고 후유증으로 인해 비행기를 단 한번도 못 탔다고 한다.
미키코씨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취재를 일절 거부하고 있으며, 엄마인 히로코씨가 사고 당시 상황을 증언하고 취재진한테 안부만 묻는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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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번승무원이였던 생존자 오치아이 유미(당시 26세)오치아이 유미씨가 같은해 1985년 12월 26일에 방송에 출연한것으로 추정되는 사진
오치아이 유미는 사고당시 비번 승무원으로 일반승객으로 탔음에도 자기 담당 비행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다른 승무원들을 도와 승객들을 구명하는데 힘썼다고 한다. 그 후 2012년에 일본항공 직원들 세미나에 당시 상황과 사고 직후 삶에 대해서 강의했다.
30년이 지난 2015년 현재 오사카 부에 거주하며 그녀 역시 다른 3명의 생존자처럼 취재를 일절 거부하고 있다.

7 희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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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코(マリコ), 쯔요시(津慶), 치요코(知代子). 부디 사이좋게 힘내서 엄마를 잘 도와주거라. 아빠는 유감스럽지만 확실히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다.
원인을 알 수 없어. 이제 5분이 지났다. 이제 비행기는 타고 싶지 않아. 제발 신이시여 살려주세요. (공백)
어제 모두 모여 한 식사가 마지막이라니.. 뭔가 기내에서 폭발한 듯 연기가 나고 강하하고 있어. 어디로 어찌되는 건지.
쯔요시 확실히 부탁한 거다. (공백) (아이)엄마 이렇게 될 줄이야 유감이다. 안녕 아이들을 잘 부탁해. 지금 6시 반이다.
비행기는 회전하면서 급속히 강하 중이다. 정말 지금까지는 행복한 인생이었다고 감사하고 있어.

카와구치 히로츠구(河口 博次 당시 52세), 시체 겉옷의 안 주머니에 있는 메모장에 7페이지 걸쳐 쓰여진 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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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항승무원중 부사무장 쓰시마 유미코(対馬 祐三子 당시 29세)가 불시착에 대비해 남겼던 메모.
미친듯이 요동치는 비행기 안에서도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힘든 극한의 상황에서도
승객들의 안전을 위해 최후의 순간까지도 노력을 했는지 짐작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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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도와줘. 기분이 안좋아. 죽고싶지 않아. 마리코.

시라이 마리코(당시 26세), 비행 시각표의 여백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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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체가 크게 좌우로 흔들리고 있다.
18:30 급히 하강중. 수평 비행중이다.
일본 항공 18:00 오사카행 사고.
죽을지도 모른다. 무라카미 료헤이.
모두 건강히 지내세요. 안녕. 스미코(須美子), 미키(みき), 쿄코(恭子), 켄타로(賢太郎)
18:45 기체는 수평으로 안정해있다. 산소가 적어 기분이 안좋다.
기내에서 "힘내자"라는 소리가 들린다. 기체가 어떻게 된건지 알 수 없다.
18:46 착륙이 걱정이다. 스튜어디스는 냉정하다.

무라카미 료헤이(村上 良平 당시 43세), 회사명이 적힌 봉투에.
야마사키 도요코의 소설 '지지 않는 태양'이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하였는데, 픽션이기에 조금씩 다른 부분이 있지만 이 유서는 그대로 나온다. 승무원들이 처절하게 노력하는 동안 승객들은 비행기 구석구석에 유언을 새기고, 마지막 사진을 찍어 남겨두었다.
  • "마치코(まち子), 아이들을 부탁합니다." 라는 유서를 남긴 타니구치 마사카츠(谷口 正勝) 씨의 장남 아츠시(篤志) 군은(당시 13세) 아픈 엄마를 대신하여 혼자 가족을 대표하여 아버지를 모셔오겠다며 씩씩하게 현장에 왔다가 비보를 전해 들었다. 죽음의 개념조차 잘 다가오지 않는 어린아이가 혼자서 아버지의 죽음을 전해 듣고 충격에 빠져 비틀거리는 모습이 전파를 타고 전국에 생중계 되면서 일본 열도를 슬픔에 빠뜨린 바 있다. 훗날 장성한 아츠시 군은 모두가 생각하는 것처럼 든든하고 근엄한 아버지라기보다는 항상 촐랑대는 좀 못믿음직스러운 아버지였는데 그런 아버지가 그 무서운 순간에도 어떻게든 자신들에게 힘을 주려고 가족을 위해서 필사적으로 유서를 남긴 걸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미어진다고 회고했다고.
  • 당시 9세였던 미야지마 켄(美谷島 健) 군은 고시엔이 보고 싶어서 오사카의 친척집을 방문하려 혼자 비행기에 탔다가 변을 당했다. 일본항공에서는 당시 어린이 VIP라고 해서 승무원이 현지 공항에서 보호자에게 직접 어린아이를 데려다 주는 서비스를 제공했는데, 켄 군의 어머니 미야지마 쿠니코(美谷島 邦子 당시 38세) 씨는 도쿄에서 오사카까지 비행기로 1시간 거리인 데다가 친척들이 공항까지 마중을 나와준다는 이야기에 괜찮을 거라 생각하고 아이를 혼자 보냈다가 그것이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고. 이에 혼자 아이를 보냈다는 죄책감, 추락하는 비행기 속에서 아이가 얼마나 엄마가 보고 싶었을지에 대한 자책 등으로 고통에 시달리던 이 여성은 몇 번이나 죽으리라 결심했으나 분명 자신처럼 자책감에 살 희망을 잃어버린 유족들도 많을 것이라 생각하고 용기를 내어 유족들에게 위로 전화를 돌렸고 이것이 후일 812연락회라는 유족모임으로 발전하게 되었다고. 이 여성은 30년이 지난 2015년에도 생존 중이며 군마현의 산 속에 있는 아들의 위령비 앞에 아들이 좋아하는 장난감과 과자를 사서 놓아둔다 한다.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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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모토 큐(본명 :오오시마 히사시)키타하라 요코(본명 요시다 유미코)

'위를 보며 걷자'로 아시아인 최초로 빌보드 차트 1위를 기록한 가수 사카모토 큐도 이 사고에 휘말려 4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더욱 안타까운 건 지인의 선거유세차 오사카로 향한 것인데 늘 이용했던 전일본공수의 여객기에 탑승하려했지만 하필 만석이라 할 수 없이 123편에 탔다가 변을 당했다. 이외에 다카라즈카 가극단의 67기생, 설조의 키타하라 요코(北原 遥子 본명: 요시다 유미코吉田 由美子)가 이 사고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장래가 촉망된 배우가 오사카에 있는 지인을 만나러 가다가 변을 당한 것이 안타까움과 가슴 아픈 슬픔을 금치 못했을 정도였다.

  • 이 사고로 당시 한신 타이거즈 구단 사장 나카노 하지무(中埜 肇)도 목숨을 잃었는데, 때문에 한신 선수들이 우승 의지를 불태워 그 해 센트럴리그일본시리즈에서 우승한다. 창단 50년만의 첫 우승이자 우승을 눈 앞에 두고 사망한 나카노 사장의 영전에 바친 선물인 셈(나카노 사장은 구단 사장으로 취임한 후 사망하기 하루 전날까지 경기를 마치고 로커로 돌아오는 선수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격려했었고,그의 사고 소식을 접한 선수들의 충격은 아주 컸었다고 한다.).아울러 이 사고 이후로 일본의 프로야구 선수들은 일본 3대 도시권에서 이동 거리가 너무 먼 홋카이도/큐슈/도호쿠/오키나와 경기 및 해외 전지훈련 이외에는 비행기를 이용하지 않으며, 오키나와와 해외 훈련을 제외한 세 지역은 선수 자율로 신칸센 등을 이용하여 이동하고 합류하는 것도 허용한다.
  • 글리코 모리나가 사건으로 협박을 받던 하우스 식품 사장 우라카미 이쿠오(浦上 郁夫)도 사건 종결을 알리는 신문기사를 읽고 오사카 본사로 가던 중 이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그 외에도 일본에서 이름이 알려진 몇몇 인사들이 123편을 탔다가 목숨을 잃었다.
  • 사고 다섯 달 전 이바라키츠쿠바시에서[17] 열리고 있었던 1985 츠쿠바 엑스포[18],사건 전날 도쿄에서 개최 되었던 코믹 마켓을 관람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참가자,구경꾼들과 당시 동인계에서 촉망받던 동인 작가 히모토 코린(緋本 こりん, 본명:이코마 아야코 生駒隆子)도 목숨을 잃었다.
  • 일본에서 대뇌생리학에 한 획을 그은 대뇌생리학의 권위자이자 오사카대학교 전임교수였던 츠카하라 나카 아키라(塚原仲晃)도 1986년부터 일본 교육부의 주도하에 시작 예정이었던 대뇌 가소성 연구를 대비해 사고 당일 교육부 협의를 하러 도쿄에 갔다 이 비행기를 타고 돌아오던 중 향년 51세로 변을 당했다. 실제로 츠카하라 나카 아키라는 당시 세계적인 뇌 신경학자여서 일본 뇌 생리학계뿐만 아니라 전 세계 학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36 세의 젊은 나이로 오사카 대학 교수로 취임하여 시냅스,기억에 관한 연구에서 세계를 선도했다는 평가도 있었다. 고인 사후 1987년 뇌의 가소성과 기억이라는 제목으로 가노쿠니야 서점에서 발간 되었으며 사고발생 25년후인 2010년 이와나미 복간 문고에서 복간되었다.
  • 국제 결혼한 영국인 킴블 매슈즈와 니시구치 마사코(西口 昌子) 부부가 신혼여행을 마치고 이 비행기를 탔다가 변을 당해 주위를 안타까움을 자아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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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리니스트 유카와 다이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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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자인 유카와 아키히사씨와 왼쪽이 다이애나의 친모
현역 바이올리니스트겸 싱어송라이터로 활동중인 혼혈인 유카와 다이애나 씨의 아버지 유카와 아키히사(湯川 昭久) (향년 56세)도 이 당시 비행기를 타고 희생되었는데 사고 발생 한달 후 1985년 9월 16일 부인 베이리씨는 다이애나를 출산했다. 한마디로 자신의 아버지를 뱃속에 있을때 잃어버린 셈. 다이애나의 엄마는 남편을 잃은 후 영국 런던으로 망명하여 생전 남편의 뜻이였던 음악가의 길을 따라 딸인 다이애나씨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쳐 2000년에 데뷔를 시켰다. 하지만 다이애나는 혼외자식이었기 때문에 유카와라는 성을 가질 수 없었지만, 2000년 영국 고등법원 판결로 자신의 이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다이애나는 현재까지도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2009년 8월 12일 자신의 아버지를 비롯한 520명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음반도 제작했다. 그녀는 자신의 음악을 듣고 즐거움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 만석이었던 만큼 외국인 희생자들도 상당수였다. 중국인독일인 희생자가 각각 1명, 미국인 희생자는 6명. 엄밀히 따지자면 미국인 희생자 6명중 3명은 한국계이다.
  • 한국계 미국인이던 故전옥자씨(당시 42세)는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외국인 학교를 다니던 아들 크리스토퍼 킴 한가위(당시 16세)와 스코트 킴 한솔(14세)를 데리고 남편이자 당시 오사카 중앙일보 판매위원장이던 김종욱씨를 만나러가기 위해 이 비행기를 탔다가 변을 당했다. 사고 당시 남편 김종욱씨 이종사촌 형이자 서울특별시청 뒤에 있는 뉴국제호텔 회장이였던 김유만씨가 전옥자씨 친정식구들에게 연락을 해서 세 모자가 사고기에 탑승했다고 연락했었다. 그리고 故 전옥자씨의 남동생 전유식씨가 도일하여 세 모자의 죽음을 확인했다고 한다. 김종욱씨 식구는 68년 결혼후 72년 미국으로 이민해서 시민권을 획득하고 77년 귀국 외국인 학교를 재학중이였는데 외국인학교 교우 바비킴은 크리스토퍼는 성적이 굉장히 우수했지만 비행기 사고로 비명횡사를 해서 안타깝다고 전했다.
  • 한국인 희생자는 3명이다. 故안시오(安時燠 당시 52세) 故정순덕(鄭順德 당시 47세) 밑에 기타항목에 故이혜경(李惠慶 당시 21세) 이며 안시오씨는 일본에서 태어나 재일 한국인으로 살다 사고 발생 10년 전부터 계속 한국을 오가며 송이버섯 수출상을 하였다. 이후 사고발생 5년 전인 1980년 부인 오공순씨(사고당시 나이 32세)와 결혼하여 슬하에 장녀 안희경양(당시 4세) 차녀 안연정양(당시 3세) 아들 안도영군(1세)를 두고 있었으며 송이버섯수출민 지문날인문제로 김포공항을 통해 일본으로 출국하고 오봉을 지내기 위해 오사카의 친척집으로 가던 도중 변을 당했다. 그리고 정순덕씨는 당시 큰딸인 정화양(당시 28세)과 일본 도쿄 아카사카에서 의류상을 했었다. 실제로 故정순덕씨는 전 영화배우 최지희 씨의 친척인데 일본 도쿄 아카사카에 터를 잡은 최지희씨의 초청으로 큰딸과 의류상을 했었으며 작은딸 영화씨(당시 24세)는 한국에서 유치원 교사를 했었다. 정순덕씨의 여동생 정영순씨(당시 38세)는 일본에 있는 조카 정화씨로부터 정순덕씨가 오사카에 수금하러 지인을 만나러 가는 도중 이같은 변을 당했다고 들으면서 울먹였다고 한다.

8 사고 원인

추락한 항공기는 사고 7년 전 1978년 6월 2일 이타미 공항에 착륙중 테일 스트라이크로 후미에 손상을 입어 제작사인 보잉에 정비를 의뢰한 기체였다. 벌크헤드라고 부르는 비행기의 기압을 유지하는 격벽이 손상을 입어 일본 항공에서 수리할 수 없었기 때문.

그런데 보잉의 기술자(정비 총담당자)는 이를 수리하면서 규정상 두 줄의 리벳이 박힌 이중 철판으로 동체와 고정하도록 한 것을 한 줄의 리벳이 박힌 이중 철판만으로 고정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런 자만한 태도가 나중에 여러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게 된다. 이후 계속된 비행에 따른 기압 변화로 인한 금속피로를 이기지 못해, 이 벌크헤드가 터져나가버리면서, 비행기의 방향 안정성을 유지하는 수직 꼬리날개를 날려버렸고, 이 때 승강타,방향타면을 움직이는 동력을 제공하는 유압의 분배기인 토크 박스를 터트려 유압이 새어나가게 되었고 결국 유압과 조종능력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사실 78년 테일 스트라이크로 인한 동체의 변형이 수리 후에도 남아 사고 직전까지 캐빈 뒤쪽의 화장실 문이 잘 닫히지 않는다든지, 바람이 새어든다든지 휘파람 소리가 나는 등의 결함이 있었다고 한다. 이건 기체가 이미 뒤틀려버려서 생긴 문제로 당연히 정상 기체가 아니며 벌크헤드가 터지지 않았더라도 결국 어떤 식으로든 사고가 날 기체였다. 이를 폐기처분하지 않고 노선에 계속 투입한 일본 항공도 제정신이 아니였던 것.


벌크헤드의 위치와 추락하기 전 아마추어 사진가가 찍은 사진에서 JAL123을 확대한 모습. 수직 꼬리날개 전체가 날아간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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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크헤드의 자세한 위치
다만 사고의 주원인은 벌크헤드 파손이지만, 이후 폭발적인 감압 여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폭발적인 감압이 없었다고 하는 측에서는 조종실 음성기록을 근거로 산소 마스크 착용할 여유가 있었음을 지적하지만, 폭발적인 감압이 일어났다고 해도 무조건 그 직후 기내의 사람들이 의식을 잃지는 않는다. 보통 이 상태에서는 순간적으로 수증기 응결이 일어나므로 감압을 알 수 있으며 자동(수동 가능)으로 산소마스크가 좌석 근처에서 터져 나온다. 때문에 아무리 감압이 일어나더라도 의식을 잃기 전 산소마스크 쓸 정도의 여유는 있다.

9 사고 후

일본 측은 사고 원인 조사 후 보잉을 형사고발하였으나 기각당했다. 일본 항공은 피해자 측에게 총 7억 8천만엔을 배상하였으며 회장은 퇴임하였다. 그리고 자만한 태도로 520명의 목숨을 떠나가게 한 정비 총담당자는 자살하였다. 만일 이 정비 총담당자가 살아있었다면 위버링겐 상공 공중충돌 사고에서의 관제사의 사례같이 유족들에게 린치 또는 살해당함으로써 잔인하게 죗값을 치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19]

또한 보잉 측의 정비가 올바르지 못했다는 것이 명백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항공은 보잉에게 책임을 전가한다는 소문에 한동안 시달려야만 했다. 보잉이 주요 고객인 일본 항공을 보호하기 위해 책임을 "뒤집어 썼다"는 식의 소문이 돌았다고. 항공 사고 수사대에 따르면 당시 일본에서는 일본 항공에 책임을 전가하는 분위기였다고도 전한다. 다만 일본 항공의 잘못도 아주 없지는 않은게, 기체 변형이 일어나 화장실 문이 제대로 닫히지 않는다는 클레임이 들어왔음에도 그들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이미 한 차례 사고가 일어났던 비행기인만큼 더 신경써서 관리를 해야 했을 텐데 그러지 못한 것이 잘못.

이 사고로 인하여 일본 항공은 물론 전 일본 항공 업계가 큰 손실을 입었다. 일본 국내선의 수요는 25%나 감소했으며, 이마저도 많은 이들이 일본 항공 대신 전일본공수로 갈아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사고 이전에도 일본 항공은 경쟁사인 전일본공수보다 신뢰가 떨어지는 상태였고 국내외적으로 추락사고가 많았으며 당장 이 사고로 사망한 사카모토 큐도 원래는 일본 항공을 믿지 못해 전일본공수의 비행기를 타려고 했을 정도이다. 워낙 큰 사고였기 때문에 이 사고의 영향은 지금까지 이어져 일본은 도시 간 이동에 있어서 항공 수요보다 신칸센등 철도와 육상 교통의 수요와 이용률이 훨씬 웃도는 특이한 현상을 보이게 되었다. 즉 항공업계의 침체는 수십년간 계속되는 반면 JR은 장기적으로 반사이익을 봤다고도 볼 수 있다.

다만 이 사고의 충격이 워낙 컸던지 일본 항공은 이 사고 이후 현재까지 단 한 건의 인명 사고도 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원가 절감을 이유로 정비를 아웃소싱하는 상태이며, 이 사고 20주기 기념으로 위령제를 지낸 2005년 8월 12일호놀룰루로 가던 JALways(JAL소속의 저가항공사)의 DC-10이 이륙 직후 엔진 고장으로 화염을 내뿜으며 부품을 시가지에 떨구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2015년 8월 12일 8시 사고 30주기를 기념하여 TBS에서 "8.12 일본항공 점보기 추락사고 30주년의 진상"을 방영하였다.

10 삽질음모론

일본 정부는 퍼붓는 비, 산에 추락하여 구조하기 불리한 지형, 저녁무렵에 추락하여 시계가 확보되지 않기에 결국 추락 후 12시간이 지난 아침에야 구조활동을 시작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참고로 이는 사고 현장에 처음 도착한 자위대 헬기 조종사가 생존자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고 보고했기 때문이라고. 당시 생존자의 증언에 의하면 추락 직후에는 살아있는 사람이 많았고 헬기 소리가 들렸을 때 필사적으로 손을 흔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헬기는 생존자가 없다고 판단, 돌아가 버리고 결국 생존자 상당수가 비까지 내리는 추운 밤을 견디지 못하고 저체온증으로 숨졌다고 한다.

아래는 사고 당시의 보도와 이후 이어진 무수한 썰을 정리한 것이다. 다만 당시 일본의 보도매체들이 구조를 주도한 자위대와 미군의 정보통제 속에서 온갖 추측성 정보를 바탕으로 보도를 했음은 감안해야 한다. 추락현장에서 방사능이 검출됐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중성자탄에 의한 테러라는 보도까지 나왔을 정도.

  • 추락 확인 직후, 미 공군C-130 수송기가 탐색에 나서 20분만에 기체를 찾아냈으며, 탐색구조헬기가 2시간 후에 기체 추락 현장에 도착했다. 즉시 가장 가까운 주일미군 기지인 요코다 기지에 경보를 발령했고 주둔중인 미 해병대는 구조활동을 시작할 수 있도록 일본 정부에 허가를 요청하였지만, 구조활동은 자위대의 책임이라며 거절하고 탐색구조 헬기의 이탈을 요구했다.
당시 미군측의 요청은 '우리가 당장 달려가서 구조를 개시하겠다'가 아닌 '많은 부상자가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 사태이니 의료반과 헬기를 준비해두었다'였다는 모양이고 이에 자위대 측은 '감사한다. 대기 바람.'이라 답했을 뿐이라는데, 사고 직후 미군의 헬기가 현장에 도착했던 것도 사실이고 이 헬기가 구조활동을 개시하기 직전에 상관으로부터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던 것 또한 사실이라는 당시 구조헬기 승무원의 증언이 있으며 이 사실에 대해 함구령까지 떨어졌다고. 이 철수명령에 자위대가 관여했는지는 미지수.
  • 도쿄공항에서 자위대측에 구조대 파견요청을 한 것은 비행기가 추락한 후 약 2시간이 지난 시점. 이유는 '정확한 추락지점이 파악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구조요청을 낼 수 없다.'였다고. 그나마 123편에 문제가 생겼다는 정보는 추락 이전부터 자위대측에 전해진 상태였고, 덕분에 자위대의 대책본부는 비교적 빠른 시간에 개설돼 움직이기 시작했다. 때문에 항공자위대의 탐색구조헬기가 추락 후 1시간만에 현장에 도착했지만, 해당 헬기의 전문분야는 해상구조였고 적외선 장비 등의 야간구조 장비를 탑재하고 있지 않아 생존자를 인지하지 못하고 그대로 철수.
덧붙이면 자위대의 제1공정여단의 여단장이 사고지점의 야간 강하를 제안하지만 기각당했다. 이 제1공정여단장은 정부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 독자적으로 부대를 움직였기에 모반의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훗날 좌천되었다.
  • 헬기로 추락지점을 파악한 항공자위대가 지상자위대에 추락지점에 대한 정보를 전했지만, 항공자위대와 지상자위대의 지휘체계가 판이하게 달라 지상자위대가 정확한 추락지점을 파악하고 도보로 도달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소모하고 만다. 추락지점 파악에 민관경이 모두 투입됐지만, 서로 추락지점에 대한 정보가 달라 구조대를 혼란에 빠뜨렸을 뿐. 결국 구조대가 도보로 추락지점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은 추락 후 14시간이 지난 다음날 오전 9시.
  • 일본 정부는 사고가 난 직후 전원 사망했을 것이라는 성급한 결론을 내리고 인명구조보다 사고 기록 수집을 우선시했다. 여기에 상술한 구조대 도달 지연까지 겹치면서, 사고 직후 도착한 의료진들은 많은 이들이 쇼크와 추위로 사망했음을 확인한다. 추락한 직후 비가 내려 큰 폭발이 일어나지 않아 의외로 많은 사람이 살아 남았으며, 상기 항목에도 나오는 생존 승무원 오치아이 유미의 증언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의 신음이 들렸고, 한 남자아이와 그의 어머니가 서로를 애타게 부르는 것도 들었다고.
구조 활동을 벌였을 당시 뉴스와 신문에 생존자가 7명이라고 보도되어 있었다. 먼저 생존자로 보고된 4명 이외의 다른 3명을 더 구출하였다는 것인데, 4인이 생존한 현장에서 200m 급경사를 오른 지점에서 아사히 신문의 사회부 기자가 "지금 막 3명의 생존자 구출! 1명은 들 것이 필요없을 만큼 건강하며 구조대원에게 안겨있다"고 무선으로 보고한 것이다. 후지 테레비의 뉴스 레포트(ニュースレポート)에서도 "현장은 참담한 상황입니다. 곧이어 들 것에 실린 7, 8세 소년이 실려오고있습니다."라고 생중계. 그러나 이 추가로 발표된 생존자 3명은 금방 지나지않아 미디어에 온데 간데없이 언급이 사라지게 되었다.
위에서 언급된 3명의 생존자 중 들 것이 필요없을 만큼 건강한 1명은 사진으로 보이는 소년으로 추정되며 뉴스에서 언급된 들 것에 실린 7, 8세 소년과 동일인물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즉 생존자는 8명이라는 얘기이며, 의사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사진 상으로 (근육이 접힌 방법으로 볼 때)자력으로 팔을 들고 있다고 하는데 이 시점에서 이 소년은 무사히 살아있던 것으로 보이나 이 이후의 소식은 전혀 알 수 없으며 생존자 명단에도 사라져있다.(공식 생존자 4명은 여성 뿐이다.) 음모론을 떠나서도 참으로 기묘한 일. 과거에 구출 8명, 생존 4명이라는 자료도 있었는데 이로 미루어보아 당시에는 생존하였으나 어떤 문제로 사망했을 가능성도 있다.
  • 또한 8월 13일 오전 9시~10경 소방대원이 추락 현장에서 짐승들이 다니는 길을 올라가는 도중에 내려오는 중학생정도의 남자를 포함한 남성 4명의 일행을 만났는데 충격적인 현장에서 내려왔음에도 인사해도 대답 없는, 아무 말도 하지않는 수상한 집단이었다는 것이다. 이 남성들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이즈카 사토시 [飯塚訓]저, '추락 현장, 남겨진 사람들' p,119,5행) 사실 워낙 끔찍한 사고로 수많은 시체들은 실종되었기에 밝혀지지 않은 생존자일 수도 있다. 혹은 지나가던 사람들이 큰 충격을 받고 말이 없던 것일 수 도 있다. 건장한 성인 남성이라도 시체를 실제로 보면 기겁하며 큰 충격을 받기 마련이다. 특히 이 사고의 시체는 정말 충격적이었다. 사고로 오체분시된 시체도 많았다.
  • 이 이유를 알 수 없는 서투른 사고 처리를 두고 자위대의 오인으로 인한 격추, 무인기와의 충돌, 또는 미국이 알면 좋지 않은 물건을 화물로 싣고 있었다는 등의 음모설도 돌았지만, 대개는 그냥 관료들의 멍청한 병크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몇십 년 후에 발생한 또다른 대사건에서도 여전한 것을 보면 이쪽이 맞는 것 같다.(...) 구 제국 일본군에서부터 이어지는 이 유구한 전통

11 예방?

이 사고 이후 조종사들을 모아서 모든 유압이[20] 상실된 상태의 비행기를 착륙시키는 것을 시뮬레이션하였는데, 단 한 명의 조종사도 비행기를 무사히 착륙시키지 못했다. 참고로 모든 유압을 상실한 기체가 그대로 추락하지 않고 아무튼 착륙이라도 한 경우는 1989년 7월유나이티드 항공 232편 사고와, 2003년 11월 22일 이라크 바그다드를 출발하는 DHLA300 화물기가 이라크 반군의 지대공 미사일에 피격당해 왼편 날개 일부 손상으로 3계통의 유압을 모두 상실한 후 바그다드 국제 공항에 비상 착륙한 두 건 뿐이다. 이외에는 미국의 B-52 스트라토포트리스 폭격기도 비행시험 중 수직 꼬리날개가 통째로 뜯겨나간 일이 있었으나 이쪽은 유압 계통은 온존하여 제어가 가능했고 무사히 착륙하였다. 해당 문서 참조.

NASA 드라이든 연구소는 Propulsion Controlled Aircraft(PCA)라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였는데 유압이 상실되었을 때 비행기가 엔진의 출력만을 통하여 비행기가 무사히 착륙하게 해 주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였으나 항공기가 유압이 나갈 확률은 극히 드물다는 이유로 이의 채용은 항공사 자율에 맡겼다. 그리고 이 장비를 장착한 항공사는 2014년 시점에도 한 곳도 없다. 다만 이는 항공업계의 안이함 때문만은 아니고 이 프로그램에 제약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프로그램의 골자는 모든 유압이 나간 상태에서 좌우 엔진 출력으로 선회하고 상승과 하강을 조정하는 것인데, 이것은 모든 것이 다 정상인 상황에서 '유압회로'만 전멸한 경우에 쓸 수 있다. 그러나 복수 유압회로가 전부 전멸하고도 기체의 모든 부분이 완전하며 무게중심이 쏠려있지 않고 연료 상황도 무게중심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수준일 때만 효과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2003년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일어난 DHL기 SA-7 피격사고를 볼 때 어느 정도 항공기에 손실이 있어도 엔진 출력만으로 비상착륙 하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당시 DHL기는 날개가 손상되어 항력이 비대칭적으로 발생했고 연료가 새어 나가 화재가 발생한 상황이었다.

JAL123편이 유압 계통 완전 소실 후에도 30분이나 비행한 것이 기적이라고 하는 것은 물론 이 때문이다. 만약 비행 균형 유지에 이상을 끼치는 요소가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사고발생 직후 회복불가능의 회전을 일으켜 즉시 추락했을 것이다.

12 관련 영상



후지 TV에서 사고 30주기를 맞아 특별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생존자 요시자키 히로코씨의 발언을 토대로 드라마 형식으로 다큐멘터리가 제작되었다.

13 기타

  • 추락 후 30분이 지나고 나서 일본 방송에 속속 속보가 올라오기 시작한다. 링크는 저작권 문제로 폭파됨.
    • TV 아사히(ANN)에서는 쇼프로그램 '월요스페셜 90'이 방송 중이었는데 자막으로 479명이 탄 하네다발 오사카행 일본항공 여객기가 사고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전했고, 쇼프로가 끝난 후 뉴스 속보 프로그램을 편성하여 소식을 전했다.
    • 니혼 TV(NNN)에서는 생방송인 '더 톱 텐(ザ・トップテン)'이 막 시작되고 남녀 진행자(사카이 마사아키, 사카키바라 이쿠에)가 참가자를 소개하는 시점이었다. 문제는 해당 방송이 생방송 중이었기 때문에, 남자진행자가 '잠시 긴급 뉴스 때문에 뉴스 스튜디오스테이션(스타디움?, 스튜디오가 일어 발음상 스타지오.. 로 들린다)으로 장면 바꾸겠으니 죄송염'이라고 말하고 보도국으로 장면이 전환되어, 추락장소(나가노 현 키타아이키촌) 등 상세한 정보를 전했다. 이런 상황이 프로그램 진행 중 3~4번 반복되다 프로그램 종료 후 바로 뉴스 속보 프로그램 행.
    • NHK에서는 다큐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었는데, 자막으로 속보를 내보내고. 속보 프로그램을 편성해 '여객기가 레이더에서 사라졌다!'라는 방송을 하였다.
    • 개그맨이자 국민MC일본의 유재석 아카시야 산마도 원래 123편에 탑승할 예정이었으나,일이 예정보다 일찍 끝나 전일본공수로 갈아타 화를 면했다. 이 때문에 아카시야 산마는 충격을 못 이겨 3년 가까이 활동을 중단했다.
  • 고바야시 모토후미의 작품 속 영원한 루저 나카무라 쇼토쿠가 자위대에 있을때 이 사고의 처리에 참가했다는 뻥을 쳤다. 작가의 언급에 따르면 처음 작품을 그릴 당시에는 나카무라가 직접 경험담이랍시고 이야기를 했지만 나중에 들춰보니 그 이야기는 나카무라의 선배의 경험담으로, 나카무라 본인은 파견나간 적이 없었다. 뽀록 난 후 나카무라가 어떻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후 JAL123기 관련 자료와 위 만화를 실은 겐분 매거진(고바야시 모토후미가 부정기적으로 발간하는 개인지) 특별호가 발매되었으나 어디까지나 작가 개인이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하였기 때문에 자료집 용도로는 다소 부족한 편. 이외에 JAL123기 파편과 희생자들 사진이 실린 사진집이 발매된 적도 있었으나 엄청난 항의에 못이겨 바로 절판되었다. 넷상에서는 이 사진집에 실린 사진을 구할 수 있으나 실제 희생자 사진을 적나라하게 실었으므로 열람은 권하지 않는다.기레기들이 몰려드는 건,동서고금이고 뭐고 없다.
  • 요코야마 히데오의 소설 "클라이머즈 하이" 에서 이 사건을 다루었다. 소설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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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에서 본 사건를 소재로 한 노래와 뮤직비디오가 가수 루이(LUEY 본명은 남경호이며 현재는 배우 박해진의 일본활동및 공연기획담당 관련기사) ""루(淚)-그대가 힘들면""이라는 이름으로 2001년 말에 제작되었다. 앨범 발매 전에는 약 6~7분 가량의 긴 분량의 버젼이 엠넷 등의 케이블 방송에서 파일럿 형식으로 사전 공개 되었다. 사고과정이 조금 더 상세하게 묘사되어 조종사들이나 탑승객들의 모습이 조금 더 비중있게 나오며, 이의 배경음악으로 '루'의 MR 파트가 중간에 추가로 삽입된다. 하지만 후에 나온 버젼에서의 시작과 끝부분에 들어가는 신문보도나 희생자를 위한 추모 문구가 없던지라, 해당 항공사고를 모르는 사람이 볼 때는 그냥 뮤직비디오에서 자체적으로 만든 극본 정도로만 생각할 정도다.
그리고 앨범 발매 이후에는 위의 영상과 같은 원곡의 길이에 맞춰 재편집되고 전반부의 신문보도 자료와 후반부의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 문구가 추가로 삽입된 5분짜리 버젼으로 정리되었다. 이 사고로 한국인도 여섯 명이 희생되었으며 그 중 한 명이 위 뮤직비디오에서 하지원이 연기한 인물인데, 이 인물이 가수 루의 소속사 빅캐스트 스타플러스 사장 이규덕씨의 조카인 故 이혜경 씨라는 사연이 1집 활동 당시 소속사를 통해 소개되기도 했다. 뮤직비디오 초반부에 하지원의 배역 소개에서 한문 자막으로 나오는데 실제 인물의 본명이다.
실제 이 인물은 재일교포로 연극을 공부했으며 귀국 한달을 앞두고 홀로 항공편에 올랐다가 안타깝게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으나, 사귀던 애인과의 결혼을 앞두고 있다가 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은 뮤직비디오에서의 극적인 연출을 위한 설정이었을 뿐 모델이 되는 故 이혜경 씨는 당시에 애인이 없던 평범한 20대 아가씨였다고 한다. 그래서 고수가 맡은 이혜경씨의 애인으로 나오는 김태우라는 캐릭터는 사실 가공인물이다.
  1. 1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한 사건이나, 일본의 격심재해법에 의한 격심재해는 아니기 때문에 이 틀을 사용한다.
  2. CVR 내용이 글로 공개되었을 당시에는 판독 불능으로 쓰여있었으나, 이렇게 말했다는 게 정설.
  3. 오사카에서 테일 스트라이크를 일으키기 1년 전이다.
  4. 참고로 1980년에 테일 스트라이크를 일으킨 중화항공 611편 공중분해 사고의 비행기도, 흡연이 허용된 여러 해 동안 균열이 생긴 비행기 뒷부분으로 연기가 흘러들어가면서 후미에 갈색 타르 자국이 생겼다.
  5. 잔인하거나 소름끼치는 사진은 아니지만 사람에 따라 방심하고 보다 깜놀할 수도 있는 사진이므로 링크 처리.
  6. 200명 이상 사망자 발생 사고를 기준으로 해서 저 중에는 빠졌지만 이베리아 항공 610편 추락사고델타항공 191편 추락 사고 또한 큰 사고였다.
  7. 델타항공 191편 추락 사고가 일어난 지 열흘 째 되는 날이기도 하다.
  8. '트랜스폰더의 비상사태를 알리는 상태 번호.이건 민항관제용 레이더에서 비행기를 구분할 수 있게 해주는 코드를 발신하는 장비. 이륙하기 전 관제탑의 지시에 따라 4자리 번호를 장입한다. 7500은 공중 납치(Skyjack), 7600은 무전기 고장, 7700은 기체의 고장이다.
  9. 유압계통은 유체의 특성 덕에 작동한다. 유압에서 유압액이 사라지면 유압계통은 그냥 고철덩어리가 될 뿐이다. 더 이상 유압계통으로써의 기능은 전혀 하지 못 한다. 사람이 피가 사라진 수준. 아니면 엘리베이터에서 줄이 사라졌다고 생각해보자.
  10. 과거에 한국에서의 서해 훼리호 침몰사고에서도 선장과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생존한 것 때문에 선장이 배를 버리고 도망갔다는 소문이 언론을 통해 퍼지며 유가족에겐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다. 이준석 선장에게 쏟아진 비난을 생각해보자. 결국 한 언론에서 선장의 사망을 밝혀내었으나 유가족들의 상처는 영원히 남았다.
  11. Pre-Recorded announce. 긴급시 자동적으로 흐르는 방송으로 좌석 벨트 착용과 마스크 착용을 지시하는 음성.
  12. 당시는 기내 흡연이 가능했다. 이는 중화항공 611편 공중분해 사고에서 중화항공의 정비불량의 근거로 쓰이기도 했다.
  13. 앞좌석에 양 손을 짚고 머리 부분을 끌어안듯 숙여 전신을 긴장시키는 자세
  14. 원래 사고의 영상이나 음성파일은 외부에 유출시키지 않는다. 유족들에게 큰 트라우마가 될 수 있기 때문. 경주 마우나리조트 붕괴사고에서도 붕괴 당시 영상이 있으나 공개하지 않는다고 경찰이 못박았다.
  15. 참고로 사상 최악의 참사에서는 일본 경찰과 자위대가 NTSB의 조사에 대단히 비협조적이었다는 뉘앙스의 전개를 보여준다.
  16. 사카모토 큐 항목에 언급된 '천국에 있는 내 아이에게'라는 드라마가 이 여성의 시점으로 전개된다.
  17. 당시엔 군이었음.
  18. 일본항공은 이 엑스포의 스폰서 중 하나였다.
  19. 물론 위버링겐 사고의 경우는 관제사도 사실상 피해자였다. 자세한 건 위버링겐 상공 공중충돌 사고 항목을 참고하자.
  20. 유압계통은 비행기의 방향 전환 장치인 엘리베이터, 러더 등을 조정하는 구동계이다. 자동차 수리점의 리프트나 포크레인의 팔을 보면 은색 막대가 달린 부품이 위잉치킨 하고 부드럽게 움직이는데 이게 유압계통. 물리를 배우면 나오는 내용인데, 유압계통을 달면 더 먼 거리를 이동하는 대신 힘을 줄일 수 있다. 이 부분은 위키러 지식이 짧아서 패스. 간단히 생각해 비행기 핸들의 파워 스티어링. 즉 힘을 줄여준다. 하지만 자동차의 파워 스티어링은 없어도 파워 핸드로 극복할 수 있지만 비행기의 유압계통이 고장난다면 아예 조종을 못 한다. 자동차로 따지면 핸들과 바퀴가 연결이 끊겨서 핸들을 100바퀴 돌려도 소용이 없는 상황. 결국 123편은 핸들이 아예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든 살리려고 애쓴 것이다. 747-400 전의 기종들은 완전 동력식 조종장치라서 유압이 상실되면 그대로 끝이지만 400은 파워 어시스트라고 해서 케이블과 푸시 풀 로드의 백업으로 파일럿이 젖먹던 힘까지 내서 어떻게 해볼 수 있긴 하다.
  21. 구조작업이 조사 착오그리고 삽질 및 추락 현장 접근의 어려움 등으로 추락 12시간 후에야 시작되어 추락당시에 살아남은 생존자 대다수가 죽고 4명만 살아남았다는 걸 포인트로 잡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