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구결번/스포츠

1 개요

프로 스포츠계에서는 팀에 크게 공헌을 한 선수를 기리기 위해서 그 선수의 등번호를 다른 선수에게 부여하지 않고 팀 내에서 영구히 사용하지 않는 관습, 또는 그 번호를 말한다.

프로 스포츠 최초의 영구결번은 1935년 미식축구뉴욕 자이언츠레이 플래허티의 1번이며 그 후 4년 뒤 뉴욕 양키스의 야구 스타 루 게릭의 4번이 영구결번이 되었다.

사실 이 아이디어는 유명 선수가 은퇴한 이후 저지 판매 수익이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상업적인 의미로 시작한 제도였음에도 불구하고,[1] 프랜차이즈 스타라는 상징성의 의미가[2] 덧붙여지면서 현재는 거의 모든 스포츠에 걸쳐 행해지며, 초기 취지를 넘어선 명예로운 대우가 되었다.

재미있는 점은 일본 야구의 경우에는 등번호 자체에도 의미를 두는 현상이 있다는 점. 그래서 일본은 영구결번보다는 번호 세습이 많다. 요미우리의 18번 세습이라든가 등등.[3] 주니치의 20번 세습[4] 이는 일본 야구의 영향을 많이 받은 한국 야구에서도 간간히 눈에 띄는 현상이다. 요미우리 경우만큼 엄격하지는 않지만 팬들 사이에서 롯데 자이언츠의 28번은 좌완 에이스의 번호라는 인식이 있다.2016시즌 현재는 우완고원준이 가져갔다. 이는 90년대 후반 롯데의 좌완 에이스였던 주형광장원준에게 물려준 것 때문이다. 다만 장원준이 군 복무로 자리를 비운 2012년~2013년에는 1차 지명을 받은 신인 우완 투수 김원중이 빌려 쓰기도 했다.

다만 한국과 일본의 번호 세습이 다른 것은 일본은 번호 자체로 의미하는 포지션이나 에이스 넘버(축구의 10번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고 한국에서는 선배가 사용한 번호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 프로야구의 경우, 첫 영구결번은 1986년도에 주전경쟁에서 밀리는 것에 인생을 비관하여 한강에 투신자살한 OB 베어스의 유망주 故 김영신 선수로서, 당시 OB 베어스는 선수 관리에 책임을 통감하고 김영신의 비극을 기억하는 의미에서 그의 등번호 54번을 영구결번하게 되었다. 그 뒤로는 영구결번의 사전적인 의미대로 그 팀에 큰 공헌을 한 선수들의 번호가 영구결번이 되었다.

전 세계 공통으로, 축구 클럽은 12번을 영구결번으로 정해 놓는 경우가 있다. 이는 과거에 12번을 달고 뛴 선수가 큰 공헌을 해서 그런 게 아니라(물론 그럴 경우도 있을 수 있긴 하지만) '우리 팀의 12번째 선수는 바로 팬 여러분들입니다.'라는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그래서 서포터즈들을 12번째 선수라고 부르기도 한다. 단, 아래 하단의 목록들을 보면 알겠지만 보통 레전드가 없는 신생팀에서 언론 보도용, 혹은 상징적인 의미로 결번처리하는 경우가 대부분. 특히나 국내 프로축구단들의 경우 그렇다. 몇몇 구단은 영구결번을 시키기보다는 해당 등번호를 에이스의 번호로 의미부여를 해서 다른 선수에게 물려주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7번 계보.

국내 프로축구단 중에서 최초의 12번 영구결번은 1998년 부천 SK이다. 수원 FC의 영구결번은 특이하게도 2가지인데 1번은 수원 시민, 2번은 수원 FC 지지자들을 위한 결번이라고 하며, 그 밖에도 인천 유나이티드FC 안양도 12번을 팬들에게 헌정하는 번호로 지정했다.

다만 모든 종목에서 영구결번이 있는 것은 아니다. 아래의 영구결번 명단을 보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있는 4대 구기종목 중에 유일하게 배구만 빠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배구는 매 랠리 때마다 선수의 포지션 위치가 서버가 위치한 후위 오른쪽 부터 시계 방향으로 전위 오른쪽 까지 지정되어 있으며, 서브권을 가져올 때마다 이 위치가 한 칸씩 회전한다. 서브를 넣는 순간에는 코트 안에 있는 11명의 선수가 자신의 포지션에 맞게 서 있어야 되며 이 순서가 바뀌게 서 있는 경우 포지션 폴트가 된다. 그 외에도 후위에 위치한 세 명은 어택 라인 안쪽 공간을 밟고 떠서 공격할 수 없는 규정도 있다. 이 때문에 심판과 기록석에서는 매 랠리 때마다 선수의 등번호를 가지고 위치를 계속 확인하고 있는데, 만약 번호가 제각각이면 이 작업에 애로사항이 꽃피기에 번호를 1번부터 20번까지로 제한하므로 영구결번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2016년 3월 3일 안산 OK저축은행 러시앤캐시배구단에서 시몬의 등번호 13번을 영구결번으로 했지만 이는 구단의 임의 조치일 뿐이다.

아래는 프로 스포츠에서 영구결번된 번호와 해당 선수의 목록이다.

2 국내

2.1 농구

2.1.1 남자농구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 영구결번
No. 10
김병철[5]
서울 삼성 썬더스 영구결번
No. 10
김현준[6]
서울 SK 나이츠 영구결번
No. 10No. 13
문경은전희철
울산 모비스 피버스 영구결번
No. 10No. 14
우지원김유택
원주 동부 프로미 영구결번
No. 9
허재[7]
전주 KCC 이지스 영구결번
No. 4No. 11
추승균이상민

2.1.2 여자농구

인천 신한은행 에스버드 영구결번
No. 0
전주원
용인 삼성생명 블루밍스 영구결번
No. 11No. 5
박정은이미선
청주 KB 스타즈 영구결번
No.10
변연하

2.2 배구

안산 OK저축은행 러시앤캐시 영구결번
No. 13
로베르틀란디 시몬 아티스

2.3 아이스하키

안양 한라 아이스하키단 영구결번
No. 91No. 43
심의식[8]패트릭 마르티넥[9]

2.4 야구

두산 베어스 영구결번[10]
No. 21No. 54
박철순김영신
롯데 자이언츠 영구결번
No. 11[11]
최동원
삼성 라이온즈 영구결번
No. 10No. 22
양준혁[12]이만수
한화 이글스 영구결번
No. 21No. 23No. 35
송진우정민철[13]장종훈
KIA 타이거즈 영구결번
No. 7No. 18
이종범선동열[14]
LG 트윈스 영구결번
No. 41
김용수[15]
SK 와이번스 영구결번
No. 26
박경완

2.4.1 임시결번

해외진출 등올 팀을 떠난 선수가 복귀하면 언제든 다시 달 수 있도록 임시결번하는 사례도 있다. 그러나 임시결번이 반드시 영구결번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두산 베어스 임시결번
No. 50
김현수
삼성 라이온즈 임시결번
No. 21No. 36
오승환이승엽[16]
넥센 히어로즈 임시결번
No. 16No. 52
강정호[17]박병호
한화 이글스 임시결번
No. 99
류현진
NC 다이노스 임시결번
No. 4No. 16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18][19]

2.5 축구[20]

대전 시티즌 결번
No. 18No. 21
김은중최은성 [21]
부산 아이파크 영구결번
No. 16No. 24
김주성송종국[22]
부천 FC 1995 영구결번
No. 12
헤르메스[23]
수원 삼성 블루윙즈 영구결번
No. 38
윤성효[24]
수원 FC 영구결번
No. 1No. 12
수원시민리얼크루
인천 유나이티드 영구결번
No. 12
[25]
FC 안양 영구결번
No. 12
안양시[26]
서울 유나이티드 FC 영구결번
No. 12
서포터즈

2.6 한국 레이싱

  • 엔트리 33번은 2000년 10월 제주 코리아랠리에서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故 이기철 드라이버의 당시 출번 번호이었다. 그래서 공식적으로 영구결번되었다.

3 국외

3.1 미국 야구

  • MLB 각 구단별로 수많은 영구결번이 있다. 뉴욕 양키스의 경우에는 영구결번이 16개로 가장 많고[27], 놀란 라이언의 경우에는 3개팀에서 영구결번이 있다.[28] 자세한 것은 MLB 해당 팀 항목 참조.
  • 또한 메이저리그에는 전 구단이 영구결번으로 지정한 번호가 있다. 그 번호는 42번, 주인공은 재키 로빈슨. 메이저리그 최초의 흑인 선수. 그리고 그를 기리기 위해 그가 데뷔전을 치른 4월 15일은 메이저리그의 모든 선수들이 42번을 달고 경기를 하며, 그의 편견을 없애는데 일조한 당시 브루클린 다저스의 주장인 피 위 리즈는 통산 타율이 고작 .269인데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팀에서도 영구결번 처리되었다.[29]

그리고 재키 로빈슨 이외에 등번호 42번을 달고 뛴 선수 중 유명한 선수가 둘 있었는데 바로 브루스 수터마리아노 리베라다. 이 둘은 각각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뉴욕 양키스에서 재키 로빈슨의 영구결번과 함께 묶어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한편 1997년에 42번이 전구단 영구결번으로 지정될 당시에 다저스를 제외한 팀에서[30] 이미 42번을 달고 있던 선수는 예외적으로 본인이 원할 경우 은퇴할 때까지 같은 번호를 계속 달 수 있도록 조치했는데, 이에 해당되는 대부분의 선수는 몇년 안에 사라졌지만 리베라는 2013년까지 뛰었다. 그가 영구결번 확정 및 은퇴를 한 뒤에는 현역에서 42번을 달고 뛸 수 있는 선수는 이제 나오지 못한다. 그래서인지 42를 뒤집은 24번은 빅 리그에서 가장 인기 있는 등번호라고 한다. 자세한 건 항목 참조.

3.2 일본

3.2.1 센트럴 리그

요미우리 자이언츠 영구결번
No. 1No. 3No. 4No. 14No. 16No. 34
오 사다하루나가시마 시게오쿠로사와 토시오사와무라 에이지카와카미 테츠하루가네다 마사이치
한신 타이거스 영구결번
No. 10No. 11No. 23
후지무라 후미오무라야마 미노루요시다 요시오
주니치 드래곤즈 영구결번
No. 10No. 15
핫토리 츠구히로니시자와 토시오
히로시마 도요 카프 영구결번
No. 3No. 8No. 15
기누가사 사치오야마모토 코지구로다 히로키

3.2.2 퍼시픽 리그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준영구결번[31]
No. 90
카게우라 야스타케[32][33]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영구결번
No. 24
이나오 가즈히사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영구결번
No. 10
팬 넘버[34]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영구결번
No. 100
오오코소 요시노리[35]

3.3 대만

중신 슝디 엘리펀트 영구결번
No. 67
증기은(曾紀恩)

3.4 축구

3.4.1 독일

1.FC 쾰른 영구결번
No. 10
루카스 포돌스키[36]

3.4.2 이탈리아

SSC 나폴리 영구결번
No. 10
디에고 마라도나[37]
AS 리보르노 칼치오 영구결번
No. 25
피에르마리오 모로시니[38]
AC 밀란 영구결번
No. 3No. 6
파올로 말디니[39]프랑코 바레시
브레시아 칼치오 영구결번
No. 10No. 13
로베르토 바조비토리오 메로
아탈란타 BC 영구결번
No. 14
페데리코 피사니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영구결번
No. 3No. 4
자친토 파케티 [40]하비에르 사네티[41]
제노아 CFC 영구결번
No. 6
지안루카 시뇨리니
칼리아리 칼치오 영구결번
No. 11
루이지 리바[42]
AC 키에보 베로나 영구결번
No. 30
자송 마옐레

3.4.3 잉글랜드

맨체스터 시티 영구결번
No. 23
마르크 비비앙 푀[43]
스완지 시티 AFC 영구결번[44]
No. 40
베시안 이드리자이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 영구결번
No. 6No. 38
바비 무어딜런 톰바이즈
첼시 FC 영구결번
No. 25
지안프랑코 졸라[45]
퀸즈 파크 레인저스 영구결번
No. 31
레이 존스[46]
포츠머스 FC 영구결번
No. 1No. 13
아론 플래허번[47]
리즈 유나이티드 FC 영구결번
No.17
미신적 이유 (....) [48]

아스날 FC - No. 9

3.4.4 프랑스

RC 랑스 영구결번
No.17
마르크 비비앙 푀[49]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영구결번
No. 28
마티유 발부에나
올랭피크 리옹 영구결번
No. 16No. 17
루크 보레이[50]마르크 비비앙 푀[51]

3.4.5 기타

  • 네덜란드
AFC 아약스 영구결번
No. 14
요한 크루이프
  • 포르투갈
SL 벤피카 영구결번
No. 29
미클로스 페헤르[52]
  • 러시아
PFC CSKA 모스크바 영구결번
No. 16
세르히 페르쿤[53]
  • 그리스
PAOK FC 영구결번
No. 17
파나기오티스 카추리스
  • 벨기에
클뤼프 브뤼허 KV 영구결번
No. 23
프랑수아 스테르셀
  • 스위스
FC 바젤 영구결번
No. 2
마시모 세사로니
  • 브라질
SE 파우메이라스 영구결번
No. 12
마르코스
  • 미국
로스앤젤레스 갤럭시 영구결번
No. 13
코비 존스
  • 일본
요코하마 F. 마리노스 영구결번
No. 3
마쓰다 나오키[54]

3.4.6 스페인

스페인 프리메라 리가에서는 영구결번이 제도적으로 불가능하다.

스페인 프로축구 협회의 등번호 규정(...)상 25인 엔트리는 1~25번의 등번호외에 달 수 없고, 25인 엔트리 외의 선수는 등번호 배정이 사실상 불가능하며[55], 골키퍼는 무조건 1, 13, 25만 달수 있는 엄격한 규정을 적용한다.역시 만악의 근원 스포츠 협회

이런식으로 영구결번이 불가능하고 등번호가 고정되니 스페인 내에서는 영구결번이 아닌 등번호 물림이 더욱 주목받는다. 애초에 축구의 등번호는 포지션과도 어느정도 연결되어 있어서 의미있는 등번호는 주로 1~11번 이내지만 팀의 레전드급 활약을 펼친 선수가 은퇴, 이적 후 그의 등번호를 누가 물려받느냐에 대해 팬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편.

다만, 번호 하나를 비워두고 25인이 아닌 24인 엔트리를 쓰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영구결번을 강행한 케이스가 세 팀 있다. 물론 이렇게 하면 협회로부터의 경고를 받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쿼드에 손해까지 보며 영구결번을 지정했다는 것은 해당 선수가 그만큼 구단에 많은 것을 헌신한 것에 대한 답례로 봐도 무방하다.[56]

이 중 한 팀은 RCD 에스파뇰으로, 팀의 유스 출신이자 주장에 팀 레전드이자 지역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센터백 다니엘 하르케[57]가 그 케이스. 팀에서 사랑받던 스타인 다니엘 하르케가 2009년 프리시즌 중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그의 등번호 21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하였다.[58] 이때 스페인 축구 협회에서 경고했으나 무시하고 진행해 버렸고 결국 21번이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었다.

또한 세비야 FC의 안토니오 푸에르타가 경기 도중 사망해 그의 등번호였던 16번의 영구결번화를 추진하였지만 이 규정때문에 때문에 무산되었고, 결국 푸에르타와 친한 사이였던 다비드 프리에토가 번호를 이어받았으나 2011년 프리에토가 팀을 떠난 이후 16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나머지 한 팀은 레알 베티스인데, 2012년 팀의 주전 선수인 미키 로케[59]가 골반암으로 사망하자 그의 등번호인 26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다른 팀의 경우는 사실상 없다. 협회의 경고도 경고지만, 긴 시즌을 1명 부족한 상황에서 치르는 게 힘들기 때문.

3.4.7 팬에게 헌정한 경우

말 그대로 구단 서포터즈 및 팬들을 위해 특정 번호를 영구결번으로 지정하는 것을 말하며, 이 경우 보통 12번이 영구결번이 된다.

3.5 농구

  • NBA의 경우에는 각 팀마다 수많은 영구결번이 있다. 각 팀별로 장기간 공헌했거나 짧지만 임팩트 있는 활약을 펼친 선수들을 영구결번하는 편. 특히 보스턴 셀틱스는 영구결번이 원체 많아 30번대 이전에 남는 번호가 별로 없다.[60] 번외로 마이애미 히트는 전혀 상관없는 23번(마이클 조던)까지 영구결번 처리했다(...) 이 경우 팀 역사가 짧기도 하지만, 약간 대중 인기 영합의 측면이 강하다.

3.6 아이스 하키

  • NHL 역시 역시 수많은 팀이 영구결번이 있다. 웨인 그레츠키의 99번은 NHL 모든 팀에서 영구결번되었다.

3.7 사이클

  • 2011년 지로 디탈리아에서 사고로 사망한 바우터 베일란트 선수(라디오섁-트렉)의 당시 배번 108번.
지로에서의 배번은 각 팀의 경기 성적에 따라 매 해 바뀌지만 108번은 영구결번이다.

3.8 포뮬러 1

  • No.17 : 쥘 비앙키 (프랑스)
2014년 일본 그랑프리에서의 사고로 혼수상태를 헤매다 2015년 7월 17일 끝내 숨을 거둔 쥘 비앙키의 당시 엔트리 넘버인 17번이 포뮬러 1 최초의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었다.

3.9 기타

모두들 가슴을 펴고 플레이해라. 너희들이 달고 있는 등 번호는, 모두 긴테쓰 버팔로즈의 영구결번이다.(みんな胸を張ってプレーしろ。お前たちが付けている背番号は、すべて近鉄バファローズの永久欠番だ).

나시다 마사타카 당시 긴테쓰 버팔로즈 감독.[61] 자세한 것은 명언/야구 항목 참조.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영구결번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div></div>
  1. 특히 재키 로빈슨의 42번 전 구단 영구결번의 경우 MLB의 인종차별에 대한 이미지 제고용으로 뜬금없이 이루어졌다는 비판이 있었다.
  2. 그래서 보스턴 레드삭스나 LA 레이커스 같은 팀은 영구결번에 대한 자체 규정이 꽤 까다롭다. 단, KBO에는 프랜차이즈 스타가 아닌 선수가 영구결번인 경우가 있다.
  3. 요미우리의 18번은 후지타 모토지-호리우치 츠네오-구와타 마스미-기사누키 히로시-스기우치 토시야로 이어진다.
  4. 이는 요미우리에 대한 반발 심리가 있었다. 역대로 20번을 단 주요 선수로 스기시타 시게루, 호시노 센이치, 궈위엔치(한국식독음:곽원치, 일본식음독:가쿠 겐지), 선동열 등이 있다.
  5. 근데 정작 김병철은 단 한 번도 뛰어보지 않은 고양시에서 은퇴식을 가졌다. 연고이전으로 인해 빚어진 촌극.
  6. 주희정이 이 등번호를 잠시 동안 썼다가 김현준 코치의 사망과 함께 이 등번호가 영구결번이 되면서 30번으로 변경.
  7. 사실 전성기는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 시절이었으나 팀이 사라지는 바람에... 마지막 소속팀이었던 원주 동부 프로미에서 영구결번을 해준 케이스다.
  8. 한국의 웨인 그레츠키로 불리면서 한국 최고의 아이스하키 선수로 군림한 선수이다.
  9. 체코 출신 아이스하키 선수로 안양 한라에서 6년간 뛰면서 팀을 두 차례 아시아 리그 정상에 올린 선수. 한국 프로 스포츠 사상 최초의 외국인 영구결번 선수다.
  10. 윤동균의 10번도 영구결번 되었으나, 항명파동으로 경질되면서 영구결번도 해제되었다.
  11. 2011년 9월 30일자로 지정. 2011 시즌 당시 11번을 가지고 있던 이정민 선수는 2012년 시즌에 45번을 배정받았다.
  12. 원래 2011년에 별세한 장효조 선수가 달던 번호지만 통산 타율을 제외한 모든 부분에서 양준혁이 앞서며, 지정 당시에는 2010년에 은퇴한 양준혁 선수의 번호로 영구결번 처리되었다.
  13. 그런데 정민철의 전성기 시절에 달던 번호는 55번이었다. 55번은 윤규진에게 넘겨주었다가 윤규진의 군 입대로 신인 이태양이 달고 있다가 윤규진이 복귀하면서 다시 번호를 받았고 이태양은 22번으로 바꿨다. 23번은 2005년부터 달기 시작했으나 정작 이 번호를 달고 제대로 활약한건 2007년뿐이다. 다만 정민철 빠돌이(...)이자 초-중-고 후배인 윤규진에게 번호를 물려주게 한 것은 정민철 본인의 의사다. 자세한 이야기는 항목 참고.
  14. 당초 해태 타이거즈에서 영구결번이었다. 그런데 구단이 기아에 매각되면서 눈치 없는 기아의 프런트진이 해태잔재 없애기의 일환으로 영구결번을 없던 걸로 하고 당시 유망주이자 신인 최고액 계약금을 받았던 김진우에게 주려고 했다가 팬들에게 가루가 되도록 까이면서 기아에서도 영구결번으로 남게 되었다. 정작 18번을 잠깐 받았던 김진우도 구단이 주니까 받기는 했지만 부담이 되었던 눈치. 선동열 본인이 KIA 감독으로 복귀할 때 이 번호를 되살리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영구결번의 취지를 살리고자 감독 선동열에게는 90번을 부여. 그리고 되살리지 않아서 다행이 됐다. 만약 되살렸으면 등번호가 흑역사가 되었을 듯.
  15. KBO 최초로 영구결번식을 치른 선수.
  16. 이승엽이 일본에서 활동했던 2004년부터 2011년까지 임시로 결번 처리되었으며, 지금은 다시 달고 있다. 은퇴 시 영구결번이 확정된 사항. 물론 옆에 분처럼 인생 모르는거지만 이승엽 현재 상황을 봤을때 글쎄?
  17. 김하성이 강정호가 떠난 후 16번을 달고 싶어 했으나 구단에게 거부당했다고 한다.
  18. 세월호 참사 추모로 인해 10개 구단중 유일하게 해당 번호가 임시결번으로 지정되었다. 9번은 비공식 결번으로 현재 김종호가 달고 있으므로 제외한다.
  19. 그리고 영구결번이 아닌 임시결번 성격이 강하다. NC 관계자의 말로도 의도하고 비워둔게 아니라 선수단 이동등으로 번호가 4번과 16번이 비워져서 이를 추모하는 의미로 활용한 것이라고 밝혔기 때문.
  20. 유독 팬에게 헌정하는 12번 영구결번이 많다. 12번째 선수인 팬을 기리기 위해서 + 신생팀의 홍보수단으로 활용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21. 은퇴 후 21년간. 기간이 정해져있는 결번이기 때문에 "영구결번"이 아니라 "기간결번"이라고 불러야 맞다.
  22. 송종국의 페예노르트 이적 이후 영구결번으로 지정했었으나 실제로 팀에 공헌한 기간도 짧고, 나이도 어리기에 별 다른 이유가 없었는데 단지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축이었다는 이유 하나로 축제 분위기에 휩싸여 낼름 영구결번시켰다는 비판을 받았다. 거기다가 한국으로 컴백하며 수원 삼성 블루윙즈로 이적하는 바람에 부산은 이중으로 병크를 날린 셈이 되었고 축구 팬들에게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이에 부산은 눈치를 보다가 슬그머니 영구결번을 취소해 흑역사가 되었다. 영구결번의 본래 의미를 개나 줘버린 사건. 당연한 소리지만 이후 이 병크의 주인공들은 모두 부산 프런트직에서 잘렸다.
  23. 부천 SK 시절부터 내려오던 전통으로 부천 FC 1995 창단과 동시에 12번을 영구결번처리함으로써 계승.
  24. 1998년 윤성효 선수가 은퇴한 후 수원 구단에서는 영구결번을 비공식적으로(?) 지정하여 이후 38번을 아무도 달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팬들도 38번을 결번으로 알고 있었으나 2008시즌 김현준 선수가 38번을 달게 되었다(...). 그래서 애초에 영구결번 같은 게 없었다는 얘기가 대세를 이루던 중 차범근 감독의 후임으로 그가 부임하게 되자 수원 구단에서는 행정에 착오가 있었다며 2011년 다시 38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하였다......가 2016시즌에 유한솔이 등번호 38번을 받았다......가 착오가 있었다며 37번으로 바꿔 달았다. 기억상실증 수준
  25. 시민구단으로 출범한 취지를 살려 12번째 선수인 서포터즈와 팬들을 위해 창단과 함께 12번을 영구결번. 인천 유나이티드 12번 영구 결번
  26. 창단식과 동시에 안양시민에게 헌정하는 방식으로 12번을 영구결번 처리했다.
  27. 향후 데릭 지터의 2번까지 영구결번이 된다면 양키스에서 한자릿수 등번호를 달 수 없게 된다.
  28. 텍사스 레인저스 34번, 휴스턴 애스트로스 34번, LA 에인절스 30번
  29. 다만, 피 위 리즈는 해당 항목에서 보듯, 선수로서 아무 업적도 없는 듣보잡 선수가 아니다. 로빈슨과 리즈가 뛰던 시대는 투고타저 시대였고, 리즈 본인은 2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자신의 전성기 커리어 3년을 손해봤다. 또한, 올스타 10회에 다저스 구단 통산 WAR 2위를 기록하는 등 한 시대를 풍미한 유격수였다.
  30. 다저스는 그전부터 영구결번되어 있었다.
  31. 호크스는 공식적인 영구결번이 없으며 실질적인 영구결번이나 다름없는 '준영구결번 취급'이라는 카테고리가 있다.
  32. 실존 인물이 아니라 만화 캐릭터에게 영구결번을 지정한 사례이다! 자세한 사항은 아부상 참고.
  33. 여담으로 아부상 연재 시작년도인 1973년부터 계속 준영구결번이었으나 2016년부터 외국인 선수 로베르트 수아레스가 사용하게 되어 그 길던 준영구결번 기간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참고로 아부상의 원작자인 미즈시마 신지에게 허락을 받고 쓰게 되었다고..
  34. 팬들을 위해 비워 둔 번호이다.
  35. 선수는 아니고, 파이터즈의 現 모기업인 닛폰햄의 창업자이자 닛폰햄 파이터즈 시대의 첫 오너다. 2009년 일본 야구전당에 입성했는데 이것을 기념해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었다.
  36. 포돌스키가 선수 생활을 은퇴하기 전까지 영구결번으로 지정하기로 했으나 2014년부터 파트리크 헬메스가 이 번호를 사용하고 있다.
  37. 원래는 아르헨티나 유소년과 성인 대표팀에서도 영구결번이었으나, 피파가 허용하지 않아 취소되었다. 현재는 리오넬 메시가 이 번호를 달고 있다. 메이저급 대회인 월드컵, 남미 대륙 컵에서는 결번 없이 1번부터 23번까지를 사용하고 24번부터는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썼지만 친선 대회에서는 10번을 사용하지 않곤 했다. 대회에는 항상 달고 나가야 한다는 결정이 있은 후에는 많이 희석되어서 친선 경기에도 10번을 사용하는 일이 많지만.
  38. 이탈리아 2부 소속이던 경기 당시,심장마비로 사망하고 말았다.어렸을 적 부모님을 여의고 누나,장애인 동생과 같이 살아왔는데,인간승리 케이스.이 기구한 사정을 알게된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했다.
  39. 단, 아들인 크리스티안 말디니가 1군에 합류하게 되면 3번을 물려받게 된다.
  40. 인테르에서 1960~1978년까지 뛰었던 공격형 풀백. 63-64, 64-65 2년 연속 유러피언 컵 우승에 기여했다. 이후 인테르에서만 기술 고문관, 보드진, 홍보 대사, 부회장, 회장까지 지냈다가 2006년 사망했다. 이후 영구결번.
  41. 인테르의 영원한 주장, 은퇴 후 인테르의 부회장으로 임명되었다.
  42. 이탈리아 역사상 A매치 최다 득점자이자 최고의 공격수이다. 왼발 슛이 폭발적이어서 천둥소리(Rombo di Tuono)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43. 카메룬 국가대표팀 출신 선수로 2003년 컨페더레이션스컵에 참가했다가 콜롬비아와의 준결승 경기 도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이후 임대 소속이었고 완전이적이 확실시되던 소속팀 맨체스터 시티에서 영구결번 처리.
  44. 연고지는 웨일즈에 있다.
  45. 공식적으로 영구결번으로 지정한 것은 아니지만 졸라가 팀을 떠난 2003년 이래로 구단 차원에서 이 번호를 다른 선수가 사용하도록 하지 않고 있어 사실상 영구결번 취급을 하고 있다.
  46. 잉글랜드 청소년 대표팀 출신 유망주로 2006년 퀸즈 파크 레인저스 FC에서 데뷔했으나 2007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이후 퀸즈 파크 레인저스에서 영구결번 처리.
  47. 처음에는 존중의 의미로 주전 골키퍼를 의미하는 1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했으나, 2003년부터 플래허번이 생전에 사용했던 13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만 2011년 스티븐 헨더슨이 이 번호를 이어받았다.
  48. 2014년에 마시모 첼리노가 구단주가 된 이후, 첼리노가 불운의 숫자라고 믿는 17번을 결번시켜버렸다. 구단주가 바뀌면 영구결번에서 풀릴지도 모르겠으나 현재까지는 영구결번처리 중.
  49. 맨체스터 시티에서도 푀의 등번호를 영구결번으로 지정했기 때문에 동일 인물이 2개팀에서 영구결번이 된 몇 안되는 축구계의 사례 중 하나가 되었다.
  50. 2011년 팀의 서브 골키퍼인 안토니 로페스가 이 번호를 이어받았다.
  51. 2008년 국가대표 후배인 장 마쿤이 이 번호를 이어받았다.
  52. 헝가리 국가대표팀 출신 선수로 2004년 비토리아 SC와의 리그 경기 도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이후 벤피카에서 영구결번 처리.
  53. 우크라이나 국가대표팀 출신 선수로 2001년 FC 안지 마하치칼라와의 리그 경기 도중 상대 선수와의 충돌로 인해 뇌진탕을 입은 뒤 열흘 후 뇌출혈로 사망했다. 이후 CSKA 모스크바에서 영구결번 처리.
  54. 1995년 요코하마에 입단하여, 1999년부터 2010년까지 요코하마에서 12년간 3번을 달고 뛰다가 마츠모토 야마가 FC(3부리그 팀)로 이적한 후 2011년 8월 훈련도중 급성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이에 전 소속 팀인 요코하마가 그를 기려서 J리그 최초로 3번을 영구결번하기로 결정했다.
  55. 다만 20세 이하 미성년 유망주의 경우에는 스쿼드에 들어가지 않아서 25번 외 등번호를 받아도 출장은 가능하며, 김영규가 알메리아에서 이 방법으로 라리가에 데뷔했다.
  56. 단 풋볼 매니저에서는 그런 거 없이 영구결번의 장착이 가능하다. 사실성이 높은 게임이라 각 팀의 영구결번 제도도 완벽하게 구현되어 있는데, 협회 쪽에서 반대해서 그런지 구현하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57. 다니엘 하르케는 1983년 1월 1일 바르셀로나 지역에서 태어나 고향 팀 유스에서 시작해 레전드가 된 정통 프랜차이즈 선수이다. 에스파뇰 구단뿐 아니라 바르셀로나 전 지역에서 존경받았으며 카탈루냐 더비 라이벌이자 원수 팀인 FC 바르셀로나의 선수들까지 그를 존경할 정도였다고.
  58. 2010년 FIFA 월드컵 결승전에서 지역 라이벌 FC 바르셀로나안드레스 이니에스타는 결승골을 넣은 후 상의 셔츠 안에 있는 '다니 하르케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다(Dani Jarque siempre con nosotros)'라는 메시지를 보이는 세레모니를 하여 하르케를 추모했다.그리고 탈의세레모니를 이유로 옐로카드를 받았다.
  59. 스페인 청소년 대표팀 출신 유망주로 2005년 리버풀 FC에서 데뷔한 이후 하부 리그를 임대다니다 2009년 레알 베티스에 정착해 활약했다.
  60. 실상 LA 레이커스와 더불어 NBA 에서 최대 명문팀이기에 당연히 영구결번이 많을 수 밖에 없으나, 단지 오래 활동했을뿐 큰 활약이 없었던 선수나 시즌 중 갑자기 사망한 선수들까지 애도 차원에서 지정하는 바람에 영구결번이 지나치게 많은 것도 사실이다. 라이벌인 LA 레이커스만 해도 영구결번은 10명이 채 되질 않는다. 명예의 전당 들어가기가 레이커스 영구결번보다 쉽다는 말도 나온다. 같은 동네 모 야구팀과는 정반대.
  61. 오릭스 블루웨이브와의 흡수 합병으로 인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 긴테쓰 버팔로즈의 시즌 최후의 시합에 앞서 선수들에게 했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