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유신

(유신체제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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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1972년 10월 17일 한국에서 발생하였던, 박정희헌법 개정을 가장한 친위 쿠데타. 독재 정치의 신호탄이기도 한 법이였다.

박정희가 위헌적 계엄과 국회해산 및 헌법정지의 비상조치 아래 위헌적 절차에 의한 국민투표로 1972년 12월 27일에 제3공화국 헌법을 파괴한 것을 말한다. '박정희가 자신의 종신집권을 위해서 만든 반민주적 헌법이자 친위 쿠데타.[1] 누구나가 동의하는 박정희 정권의 실책이며, 한국 민주주의 역사의 어두운 시대를 보여주는 사건 중의 하나다.

그리고 박정희는 이런 독재를 '한국식 민주주의'라며('우리식' 이라는 단어도 자주 사용) 포장했고, 박정희정부의 핵심인물이었던 김종필은 '박정희 다음엔 내가 직선제 투표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야지' 라는 계획이 있었으나 이 때문에 자신의 대선 출마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2] 야당의 유력 정치인이자 민주화 운동가였던 김대중김영삼은 이로 인해 난관을 맞게 된다. 당시 신문 기사(1972년 10월 18일).

2 배경

3선 개헌으로 박정희의 대통령 선거 출마가 가능하게 되었지만, 1971년 4월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과의 사투 끝에 당선되었다(7월 1일 취임). 하지만 정권을 떠난 민심에 의해, 뒤이은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이 개헌 저지선을 확보하였고, 앞으로 계속 이 헌법으로 연임하기에는 이 속이 뻔히 보이는 짓에 대해 야당과 국민의 반발이 너무 거셀 것은 분명하였다.

3 쿠데타

3.1 과정

만일 국민 여러분이 헌법 개정안에 찬성치 않는다면 나는 이것을 남북 대화를 원치 않는다는 국민의 의사 표시로 받아들이고 조국 통일에 대한 새로운 방안을 모색할 것임을 아울러 밝혀두는 바입니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의 특별선언 중

집권 직후, 우선 박정희는 1971년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 일명 국가보위법을 제정하였다. 그 후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는 국회를 해산하고[3] 모든 정치활동과 정당활동을 중단시켰다.[4] 그 뒤 조윤형, 이종남, 조연하, 김녹영, 김경인, 최형우, 이세규, 박종률, 강근호, 나석호, 류갑종, 김한수, 김상현야당 국회의원들을 감금한 뒤 고문했다. 장소는 육군보안사령부[5], 6관구 헌병중대, 5관구 헌병대 같은 곳들이다. 고문행위에는 침대각목으로 3일동안 전신구타하기, 알몸에다 구타하기, 찬물을 끼얹고 링거 주사를 준 다음 구타하기, 거꾸로 매달아 난타하기, 물고문 따위 등이다.[6]

그리고 오후 7시, 박정희는 대통령 특별선언과 함께 비상조치를 선포했는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리고 말미에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통일을 가지고 새헌법(유신헌법)은 통일을 위한 헌법이니, 이것에 반대하는 것은 남북통일을 반대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1) 1972년 10월 17일 19시를 기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 활동의 중지 등 현행 헌법의 일부 조항 효력을 정지시킨다.

(2) 일부 효력이 정지된 헌법 조항의 기능은 비상 국무 회의에 의하여 수행되며, 비상 국무 회의 기능은 현행 헌법의 국무 회의가 수행한다.
(3) 비상 국무 회의는 1972년 10월 27일까지 조국의 평화 통일을 지향하는 헌법 개정안을 공고하며, 이를 공고한 날로부터 1개월 이내에 국민 투표에 붙여 확정시킨다.
(4) 헌법 개정안이 확정되면 개정된 헌법 절차에 따라 늦어도 금년 연말 이전에 헌정 질서를 정상화시킨다.

그리고 다음날 18일엔 다음과 같은 계엄포고 1호를 발표한다 .

계엄포고 1호

1972년 10월 17일 19시를 기하여 하기 사항을 포고함

(1) 모든 정치 활동 목적의 옥내외 집회 및 시위를 일절 금한다. 정치 활동 목적이 아닌 옥내외 집회는 허가를 받아야 한다. 단, 관혼상제와 의례적인 비정치적 종교 행사의 경우는 예외로 한다.
(2) 언론 출판 보도 및 방송은 사전 검열을 받아야 한다.
(3) 각 대학은 당분간 휴교 조치한다.
(4) 정당한 이유없는 직장 이탈이나 태업 행위를 금한다.
(5) 유언비어의 날조 및 유포를 금한다.
(6) 야간 통행 금지는 종전대로 시행한다. …

유신헌법안 찬반투표는 그뒤인 11월 21일에 이뤄졌으나 반대세력을 탄압하거나 압력을 가했으며, 반대 의견은 아예 꺼내지도 못하게 했다. 그리고 이 찬반투표에도 부정투표가 있었으며, 이것을 알리지 못하게 압력까지 가했다. 실제로 당시 선거관리위원 이 모 씨는 부정투표함을 발견하고 선관위원장에게 보고했는데, 이후 사퇴압력을 받다가 결국 해직당했으며 12월에 청량리 정신병원에 끌려가 강제 입원당했다가 3월에 퇴원했다. [7][8]

국민투표를 통과했기 때문에 독재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는데, 이것은 온갖 절차적 위법이 있더라도 투표만 통과하면 합법이라는 논리가 된다. 게다가 일반적인 개헌이라면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 심의와 의결을 거쳐야 하는데, 국회를 해산시키고 대통령이 임명한 장관들이 국무회의에서 헌법을 심의하고 통과시켰다. 이미 실질적 측면은 고사하고 절차적 타당성마저 상실한 것이다.

더군다나 국민투표는 계엄령의 공포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계엄령 하에서 유신헌법 개정안에 대해 반대하는 일체의 토론이나 집회, 언론보도는 모두 금지됐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투표에 참여하는 국민들은 투표가 의미하는 정확한 내용과 문제점에 대해 알 수 없었던 것이다. 투표 당시 있었던 일화 중에는 이런 이야기도 있다. '섬마을 주민들이 투표를 하기 위해선 육지로 와야 하는데, 풍랑으로 뱃길이 끊기자 바다를 헤엄쳐서 왔다.' 아무리 투표가 중요한 행사라고 해도 11월 중순이란 초겨울의 풍랑이 이는 바다를 헤엄쳐서 올 정도였다면 정상이 아니다. 그리고 아예 정치활동을 금지시켜, 사회적으로 '유신 반대'라는 의견을 낼 수 없게 틀어막아 버리고 국민 투표를 한 것이다. 또한 국민투표를 앞두고 각종 언론에는 10월 유신을 지지하자는 표어가 계속해서 올라왔고, 유신에 대한 지지 투표를 하자는 국정 홍보물들이 쏟아졌다. 이 정도면 시작부터 공산당 투표나 다름없는 행각이다.

사실 이 유신개헌의 국민투표 통과에는 7.4 남북 공동 성명이 결정적인 계기였다. 왜 주요 정책결정기관 이름이 통일주체국민회의가 되었는지를 생각해 볼 일이다. 당시를 회상하는 이들을 보면 이 때 당연히 통일이 되는 줄 알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즉 공동선언으로 조성된 통일 분위기를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한 것이다. 이는 북한도 마찬가지로, 1972년 사회주의 헌법을 선포하고 1인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국가주석을 신설하였다.

당시 득표율. 투표율 91.9%, 찬성 92.2% 이상의 압도적 지지율을 보인다.

3.2 미국보다 북한에 먼저 통보했다

이미 옛날부터 일련의 쿠데타를 북한에게 사전 통보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있었는데, 학자들이 미군 문서들을 확인한 결과 사실로 드러났다. 비밀자료들에 따르면, 박정희 정권은 10월 유신 쿠데타를 일으켜 헌정변개 하기 전, 이 사실을 미국보다 북한에게 먼저 통고했다.

이에 대해서는 양승함 박명림 지주형 편, 『한국대통령 통치자사료집 VIII: 박정희(4) 유신체제의 형성』, 연세대학교 국가관리연구원, 2010 참고. 특히 8~19쪽의 해제 및 아래의 문서들을 참조. "ROK Touting North Korean Treat", 1971. 5. 26, POL KOR N-KORS 1/1/70, box 2421, RG59; "ROK Emphasis on North Korean Thtrst", 1971. 12.1, POL KOR N-KOR S 1/1/70, box 2421, RG59; "Intellignce Note: Park increases his power to counter emergency situation", 1971. 12. 10, POL 15-1 KOR S 12-7-71, Box 2426; "US-ROL Difference on North Korean Threat", 1971. 11.22, POL KOR N-KOR S 1/1/70, box 2421, RG59" "Untitled [I called on President Pakr…]", 1971. 12. 13, POL 15-1 KOR S 12-7-71, box 2426, RG59; "President Park's View of north Korea Threat", 1972. 4. 6, POL 15-1 KOR S 12-7-71, box 2426, RG59; "president Park's Comment on South-North Talks, Korean Question at UN", 1972. 8. 23, POL KOR N-KOR S 7-14-72, box 2422, RG59; "Martial Law and Government Changes-Timing of Action", 1972. 10. 25, POL 23-9 KOR S 2-28-72, box 2427, RG59; "North South Contacts", 1972. 10. 31, POL KOR N - KOR S 10-12-72, box 2422, RG59; "Intelligence note: South North Talks, A Pause Rapid Progress", 1972. 12. 18, POL KOR N - KOR S 10-12-72, box 2422, RG59; "Domestic Political Prospects", 1972. 8. 22, POL 15-1 KOR S 12-7-71, box 2426, RG59. "Prime Miniister's Attitude toward current ROK Government Actions", 1972. 10. 17, POL 15 KOR S 1/1/70, box 2425. RG59.

박명림, 박정희 시기의 헌법 정신과 내용의 해석, 주석9​

그리고 이에 대한 박명림 교수의 평가:

"'박정희 정권이 유신체제의 구축을 북한에 미리 알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북한 역시 암묵적으로 침묵을 통한 사실상의 동의를 표했다는 점이다. 여러 비밀문서를 통해 볼 때 반공태세 확립은 유신체제 수립의 명분도 실질도 전혀 아니었다는 점이다. 오직 권력을 연장하기 위한 의도와 욕망이었을 뿐, 남북대결은 박정희 개인의 초주권적 초헌법적 종신집권을 위한 동원요소에 불과했던 것이다."

박명림, 박정희 시기의 헌법 정신과 내용의 해석―절차, 조항, 개념, 의미를 중심으로, 역사비평사, 역사비평 96호- 2011.가을, 2011, 118쪽

4 내용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1. 대통령 직선제의 폐지 및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접 선거.

2. 국회의원의 1/3을 대통령 추천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
3. 대통령에게 헌법 효력까지도 일시 정지시킬 수 있는 긴급조치권 부여.
4. 국회 해산권 및 모든 법관 임명권을 대통령이 갖도록 하여 대통령이 3권 위에 군림할 수 있도록 보장.
5. 대통령의 임기를 6년으로 연장하고, 연임 제한을 철폐하여 종신 집권을 가능케 함.

유신헌법 전문 보기.[9]

이 법안의 주요 내용은 대통령 직선제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뽑는 대통령 간선제로의 변경, 대통령이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임명하는 유신정우회[10], 헌법의 기본권을 중단할 긴급조치[11]등을 시행할 권리 등이 있었다. 게다가 모든 법관(판사)의 임명권을 대통령이 가지게 되는 등, 사실상 대통령 1인이 혼자서 입법, 행정, 사법[12][13] 을 모두 맡게 된 것이다. 또한 대통령 임기도 6년으로 늘리고 중임 및 연임 제한도 폐지해서, 사실상 종신집권이 가능해졌다. 거기에 더해서 구속적부심사제[14] 폐지, 이미 위헌 판결을 받은, 군인, 군무원 등의 이중배상청구 금지를 헌법 조항으로 신설[15], 국회의 대통령과 행정부에 대한 중요한 견제수단인 국정감사 그리고 국정조사 권한의 폐지에 더불어, 대통령에게 헌법개정권과 국회 해산권도 부여하였다. 게다가 유신 헌법은 대통령을 행정, 입법, 사법 삼부위에 위치하는 국가 영도자라고 규정하였다. 나치의 히틀러와 똑같은 종신총통제였던 것이다.

이로서 3선 출마"다시는 국민에게 표를 달라고 하지 않겠습니다."(…)[16]라던 박정희의 연설과, "박정희가 이번에도 집권하면 총통제가 실시될 것입니다."라던 김대중의 연설 모두가 맞아떨어지게 되었다. 국민과 야당은 이것에 크게 반발했지만 계엄령과 긴급조치를 통해 반대파들을 잠재웠다. 이 과정에서 벌어진게 김대중 납치사건민청학련 사건, 인민혁명당 사건, 고 장준하 선생 의문사 사건 등을 들 수 있겠다.

4.1 문제점

권영성 교수가 쓴 헌법학원론(법문사)에서 일부를 발췌하자면...

1. 기본권 제한의 사유로서 국가안전보장이 추가되고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는 조항을 삭제하였다.

2. 자유권적 기본권이 약화되고, 노동3권의 주체와 범위가 대폭 제한되었다.
3. 회기의 단축[17]과 국정감사권의 부인 등으로 국회의 권능이 대폭 축소되 대통령에게 정식으로 국회해산권이 주어졌다. 국회해산권은 원래 내각제 국가에서 국회의 내각불신임권에 대응하기 위해 총리에게 주어지는 권한이다.[18]
4. 대법원장을 비롯한 모든 법관을 대통령이 임명 또는 보직하거나 파면할 수 있게 함으로써 사법권의 독립을 위협하였다.
5. 헌법위원회를 설치하여 여기에 위헌법률심사권 · 위헌정당해산결정권 · 탄핵심판권 등 헌법재판권을 부여하였다.[19]

우익인사로 유명한 조갑제마저도 유신 헌법에 대해서는 강제 정권 영구화로 인해 한국이 보수주의자들이 그토록 욕하는 북한과 동급의 막장으로 떨어졌다는 점에서 욕먹어도 할 말이 없다는 식의 한발 물러선 발언을 월간조선에 했다.[20] 더불어 월간중앙의 인터뷰에서 2008년 아우인 박지만과 재산싸움을 벌이던 박근령을 인터뷰할 때도 여러 말을 하던 도중에 박정희의 선거생략과 영구정권화에 대하여 독재라고 욕먹어도 할 수 없지 않냐고 깠다. 아버지가 민주주의의 투사(...)라고 옹호하던 박근령도 선거를 생략한게 민주주의는 못된다는 기자의 말에 반론하지 못했다.

이게 어느 정도인지는 당시 유신 정권을 비판하는 지하 유인물 중 하나가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당시 학교의 '반공 교과서'에서는 북한의 선거제도에 대해 설명하며 후보는 한명이고 실질적으로 반대를 할 수 없으며, 항상 99% 이상의 투표율 및 찬성표가 나온다고 비판했다. 이 유인물에서는 앞면에 이 교과서의 내용을 그대로 써 놓은 뒤, 바로 뒷면에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99%의 투표율과 찬성표로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는 당시의 신문 기사를 그대로 써 놓았다. 조갑제도 이후 "유신시대에 나온 수많은 지하 유인물 중에서 이것만큼 간결하고 탁월하며 뚜렷한 메시지를 제대로 전달하고 있는 것은 없다."라고 높이 평가할 정도이다.

정치 전략으로도 심각한 문제였는데, 완벽한 자살골이었다. 박정희는 5.16 군사정변으로 이전 정권을 엎긴 했어도, 국민투표로 정당한 선거로 집권하면서 정통성과 정당성을 가졌고 군부와도 거리를 둘 수 있었다. 이런 정통성 덕분에 쿠데타에도 불구하고 박정희가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반대하던 세력을 어느 정도 억누를 수 있었고, 야당도 적절하게 통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신으로 선거를 무시하며 집권함으로써 박정희는 이 정당성을 완전히 날려먹는다. 그 말인즉슨 박정희가 어차피 뭘 해도 찍어 줄 골수 지지층을 제외한 나머지 층을 죄다 등돌리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민주공화당의 경우 내부적으로 박정희의 장기집권에 불만을 가지고 차기를 노리는 움직임까지 나오는 등 박정희의 리더십이 약해진 가운데, 유신으로 인해 박정희 친위세력과 그 외 세력으로 나뉘고 또 유신으로 인한 지지율 폭락까지 겹치면서 정당으로써의 생존 가능성이 바닥을 치게 된다. 유신 전까지만 해도 민주공화당은 어느 정도 지지가 있었기 때문에 만약 약속대로 박정희가 물러나고 공화당에서 차기 후보가 나와서 박정희가 지원하는 형태로 갔다면 대통령은 못해도 당의 존립은 가능했을 것이다. 본인도 전직 대통령으로서 일종의 전관예우를 받으며 요직에 앉아 있었으면 나쁘지 않은 대우를 받으며 영향력도 나름대로 행사할 수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유신체제를 시행함으로 인해 박정희는 빼도박도 못할 흑역사를 찍게 되었고, 그 결과 당과 본인의 미래도 불투명해진다.

4.2 순기능(?)

  • 유신헌법이 당시 반공(反共)기조와 결합하여 뜻하지 않게 화교 네트워크의 고착과 성장을 억제했다는, 정식 연구는 아니고 개인적 수준의 의견이 간혹 있다. 현재 중국 본토와 동남아를 비롯하여 전세계에 화교 네트워크가 퍼져, 이들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경제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등 나름의 영향력을 가지는 것에 비해, 당시 한국의 무대뽀 반공기조가 인천 차이나타운을 기반으로 정착한 한국 내 화교 세력들의 성장을 억제하는 데 뜻하지 않은 효과를 거두었다는 것. 물론 이에 대해 화교라는 특정계층만을 싸잡아 인권탄압한 제노포비아라는 비판과, 한국보다 이민역사가 오래된 캐나다, 미국, 일본 등이 그렇지 않았는데 수만명 정도였던 한국 내 화교가 무슨 큰 힘을 썼겠느냐는 반론도 있다. 또 이 주장에 반박하는 사람들은 자국민조차 고문당하던(...) 시절에 사실상 화교까지 챙겨주긴 무리가 있었고, 캐나다, 미국은 백인위주사회에 일본은 일제강점기 시절 이주한 사람들이라 경제권을 쥘 수 없었으며, 화교의 숫자가 많아 경제권을 쥘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라 기존의 화교들이 큰 힘을 발휘하던 곳에 공산화 된 중국에서 도망친 중국인들이 몰려든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판단은 각자 알아서. 그리고 어차피 유신 헌법 이전부터 대한민국은 화교들을 여러가지 방법으로 규제하면서 경제적으로 성장하지 못하게 찍어누르고 있었다. 화교 규제는 유신헌법이나 반공 기조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이건 말 그대로 견강부회 수준의 말장난에 불과한 이야기.
  • 특이한 의견도 튀어나왔다. 전직 국회의원으로 6선을 지낸 새누리당 소속 홍사덕[21]이 10월 유신은 강성수출을 위한 수단이었다(...)고 말한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70년대 유신정권 시절은 석유파동과 함께 실질적 증세인 부가가치세 도입 등으로 인해 경제성장률보다 물가상승률이 더 높았던 극심한 인플레이션 시대로, 전태일 열사가 분신자살하던 시절이었다. 대외 경제성장이야 수출 100억 달러, 1000억 달러를 찍으며 양적으로 커졌지만 정작 일반 국민의 입장에서는 실질소득이 감소하고 있었다. 특히 2차 석유파동이 터지고 난 후엔 경제성장률마저 떨어진[22] 최악의 상태를 기록한다. 그리고 한국 경제가 이걸 뒤집게 되는(경제성장률이 물가상승률보다 높은) 진정한 의미의 경제 르네상스 시대는 83년부터이다.

5 폐지

이른바 '유신 체제'는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저격함으로써 결국 일단락되었다. 그리고 이때 수사를 맡은 전두환박근혜에게 청와대 금고에서 발견한 6억원 가량의 돈을 격려비 명목으로 준 것이 확인되어 이후 논란이 되기도 했다.

당시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을 지내고 나중에 국무총리를 역임한 남덕우의 회고록에서는, 박정희가 "유신 헌법의 대통령 선출 방식은 내가 봐도 엉터리야. 그래가지고서야 어떻게 국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겠어?"라는 말을 했었다고 한다. 일단 1969~78년까지 대통령 비서실장을 했던 김정렴의 주장 중에, 박정희가 1978년에 자동으로 당선되면서 유신 2번째 임기를 시작할 당시에 '이번만 하고 그만두고 1984년에 김종필을 총리로 지명하겠다'는 말을 했다는 주장도 있고, 또는 81년 광복절 또는 국군의 날에 핵무기 보유를 대내외에 발표한 후 하야하고, 후임으로 김종필을 염두해뒀다는 설도 있다. 이러한 주장 이면엔 애초에 독재를 한 것도 핵무기 개발을 위해서였다는 소리도 있다. 하지만 이 시나리오는 아직 정론으로 증명될만한 사료가 없다.

즉, 비판론자들의 입장에서 봤을땐 일부 박정희 광신도들이 독재를 옹호하기 위해 무리하게 짜낸 소설로 치부해도 딱히 할 말이 없다는 것. 단순히 생각해도 그로부터 몇십년이 지난 21세기 초반 북한이 계획한 핵무장에도 핵실험이 수차례 동반됐는데 그런 핵실험 한번 없이 '핵 프로젝트'가 완성에 있다? 초등학생이 생각해도 뭔가 이상하다는걸 느낄 것이다.

설령 사실로 쳐준다 치더라도 그게 미제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자위용으로 핵을 만든다는 (그리고 그를 통해 내부단결과 독재를 합리화하는) 저 북한의 논리와 다를게 먼가? 그놈의 자주드립이 여러 사람 망친다 또 떠들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이 이 핵 프로젝트에 대해 얘기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인물이 이휘소 박사인데, 이휘소 박사는 기본적으로 핵무기와 독재자를 싫어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게다가 애초 이휘소 박사의 전공은 핵무기 관련 분야도 아니었다.

총리 드립을 친게 사실이라고 친다면 의원 내각제를 생각했던 것일지도 모르는데, 이미 국민들에게 표를 안 받겠다면서 유신헌법 선포를 했던 사람이니 그리 신뢰성이 있진 않다. 큰소리 치다가도 막상 다가오면 권력을 내려놓기 아쉬워 딴소리 하는게 권력자들의 습성이니. 아님 김종필에게 총리 자리만 주고 자긴 북쪽 김일성처럼 죽을 때까지 상왕 노릇을 할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

현실적으로도 의원 내각제는 가능성이 낮은게, 일단 수치상으로도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은 지지율이 8대 총선 때로부터 -10%나 되었고, 게리맨더링유신정우회가 아니었다면 다수당을 차지할 수 없었다. 1978년의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아예 신민당보다 득표율까지 떨어졌으며, 역시 유신정우회를 제외하면 과반수조차 확보하지 못했다. 민주공화당은 이미 3선 개헌 때부터 공화당 총재 박정희에 대한 항명 사태가 벌어질 정도로 내부 이반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라 유신 체계에서 박정희의 '친위세력'인 유신정우회로 여당이 양분되면서, 소외당한 것이나 다름없는 공화당은 유신기간 동안 정치적으로 무기력한 존재로 몰락해갔다.

즉, 내각제를 하려고 해도, 공화당은 의원 내각제 하에서 정국 주도권을 유지할 수 있을 만한(일본자유민주당 같은) 국민의 지지와 독자적인 정당 조직력, 그리고 의회 정치 능력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6 '금지곡'이 된 노래들

'금지곡'은 한국 역사에서 대중가요가 처음으로 등장한 1920년대부터 있었다. 아리랑, 봉선화, 눈물젖은 두만강 등 민족감정을 고취하는 노래가 일본에 의해 '금지곡 1호'가 되었다. 해방 후 분단정부의 수립과 함께 월북 작가들의 곡은 무조건 금지곡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를 조금이라도 풍자하거나 비방한다는 '혐의'가 있으면 창작자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금지곡' 딱지를 붙였다. 음악계에 있는 사람들은 지금도 검열을 아주 싫어하는데, 음악 검열이 8~90년대까지 계속 되었다는 것은 한국문화계의 흑역사다.

금지곡이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큰 상흔을 남긴 시기는 유신시기이다. 유신정권은 1975년 6월 21일에 1차로 43곡을 금지곡으로 발표한 데 이어 추가 심사를 거쳐, 같은 해 동안 모두 223곡을 금지곡으로 발표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금지곡으로는 김민기의 아침 이슬, 송창식의 왜불러, 김추자의 '거짓말이야'[23], 패티 김의 '무정한 배', 신중현의 '미인',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 '기러기 아빠' 등을 들 수 있다. 당시 유행하던 웬만한 곡들은 모두 금지곡에 포함되었다.

주된 이유는 왜색풍, 창법 저속, 불신 풍조 조장, 퇴폐성이라는 이유였다. 하지만 당국이 들이대는 금지곡의 잣대는 타당하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1970~80년대 최고의 민중가요로 알려진 '아침이슬'은 1973년에 건전가요로 선정될 정도로 발표 초기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란 가사가 문제가 되었다. '붉은 태양'이 북한의 지도자를 나타낸 것이라는 이유로 하루아침에 금지곡이 되었다.그럼 태양이 파랗냐 '거짓말이야'는 "거짓말이야, 사랑도 거짓말 울음도 거짓말"이라는 가사가 당시의 정치현실을 빗댄 것으로 비쳐졌고, '기러기 아빠'는 "아빠가 월남 파병 용사로 죽어서 돌아오지 못하는 걸 빗댔다."는 이유로 금지곡 목록에 올랐다. '미인'은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라는 가사를 운동권에서 '한 번 하고 두 번 하고 자꾸만 하고 싶네'라고 개사해 유신 정권을 비판하는 노래로 부르면서 금지곡이 되었다. 피해의식

그리고 이 금지곡들로 인하여 한국 록 음악은 큰 정체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훗날 아티스트 신해철은 유신 시대를 기점으로 한국과 일본의 대중음악 수준이 (특히 록 음악) 큰 차이로 벌어지게 되었다고 분석을 하였다. 실제로 2010년 중잔을 기준으로 보면 아이돌 음악등은 수준차이가 없다고 봐야하나 대중적인 인기나 인지도등을 고려하면 한국 록음악은 일본 J-Rock에 비하여 뒤쳐진것은 사실이다

말로는 반공한다면서 바로 옆 공산국가가 몇년전 하던 짓과 별 다를 바가 없었다. 아무래도 박정희가 세븐 갤러리를 했었나 보다 그리고 더 웃기게도 현재 그 공산국가 통치자들은 '한국식 민주주의' 마냥 '중국식 민주주의'라는 개념으로 독재를 합리화하고 있다.
  1. 그러나 박정희는 79년도 초에 당시 청와대공보비서관인 선우연 의원에게 "1981년 10월에 (대통령을)그만 둘 생각"이라면서 "10월 1일 국군의 날 기념식 때 핵무기를 내외에 공개한 뒤에 그 자리에서 하야 성명을 발표할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법 개정의 목적 그자체는 대통령 본인 의지로 내려오기 전까지는 실질적으로 종신집권이긴 하다.
  2. 박정희가 암살당한 후에도 '그래도 국민이 뽑은 직선제로 당선되고 싶다' 라며, 유신 헌법을 거부하고 김대중, 김영삼과 자주 회담을 가졌으나, 전두환의 등장으로 셋 모두 감금되어버린다.
  3. 당시 헌법에는 대통령의 국회 해산권이 없었다
  4. 동아일보, 1972. 10. 18 기사, 헌법기능 비상국무회의서 수행
  5. 정동 분실과 서빙고 분실 등
  6. 동아일보, 1975. 2. 28 기사, 고문정치종식 선언 참조.
  7. 연합뉴스, "불법저항 명예직도 민주화관련자 인정" <법원>
  8. 뉴스 내용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인정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거부했다. 법원 판결에 따라 민주화운동유공자로 인정받은 것이다.
  9. 한자로 된 실제 원문은 이쪽.
  10. 대통령이 국회의원의 3분의 1 - 전국구(비례대표)- 을 임명. 임기는 다른 국회의원들 임기의 절반인 3년. 정확하게는 대통령이 '추천'하고 이 추천한 1/3의 국회의원 명단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찬/반 투표로 선출하는 것. 이들은 원내 교섭단체를 만들어 사실상 하나의 정당으로서 활동했다.
  11. 제4공화국 기간 동안 박정희 대통령은 총 9번의 긴급조치를 발동했으며, 이 중 긴급조치 1호는 2007년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재심권고 결정이 내려진 뒤 2010년 12월 16일에 대법원에 의해 위헌 판결을 받았고, 2011년 3월 15일 이를 위반하여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던 오종상씨(2011년 현재 70세)에게 구금기간동안의 피해보상금 1억 8천여만원을 지급하라는 판결 역시 내려졌다.
  12. 대법원장을 비롯한 모든 법관을 대통령이 임명, 보직, 징계 형식의 파면 가능
  13. 이 때문에 당시 반민주적 헌법 하에서 법관직을 할 수 없다며 사퇴하는 판사들도 있었으며, 사시 합격 후 사법권의 독립 없이 대통령에게 임명되기 싫다며 일부러 판사 임용을 거부하고 변호사가 된 사람들도 많았다.
  14. 피의자가 구속된 경우에 피의자나 피의자의 가족, 변호인, 고용주 등이 정말로 구속 사유가 있는지 알아봐 달라는 청구를 하는 것으로, 이게 들어오면 법원은 48시간 내에 피의자의 심문, 증거품 조사 등을 거쳐서 합당한 사유가 없다고 판단시에는 직권으로 피의자를 석방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 제헌헌법부터 있었으며 유일하게 7차에만 삭제되었던 조항 중 하나이다. 애초에 유신헌법의 대부분의 조항이 그렇지만.
  15. 자신이 밀던 법률이 위헌판결을 받자 애초에 헌법에 그 조항을 넣으면 될 거 아냐? 라는 생각으로 만든 조항이다. 헌법 자체를 구속할 상위법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헌법조항의 위헌 시비는 순수하게 이 조항 때문에 나온다. 일단 헌법재판소는 위헌법률심판이지 위헌헌법심판이 아니라는 이유로 관련 소송이 들어오면 모조리 각하하는 중이다. 문제가 많은 조항임에도 현행 헌법까지 살아 있는 이유는, 6공화국 헌법을 만든 자들이 대부분 민주화 운동가들이다 보니 군인이나 경찰에게 당한 게 워낙 많아 치가 떨려서 그렇다는 카더라 아닌 카더라가 있다. 문제는 그들을 탄압했던 고문경찰이나 고위군인들이 아닌, 죄 없는 일반 사병과 의경들의 구제수단마저 막혀버렸다는 점.
  16. 물론 겉으로는 '이번을 마지막으로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라는 뜻이지만, 실제로는...
  17. 국회의 연간 회기 일수가 최대 150일로 제한되었다. 자주 열면 귀찮으니까.
  18. 국회가 행정부를 견제할 수 있는 중요 수단인 국정감사와 국정조사는 1987년 6공화국 헌법에서야 부활한다.
  19. 이건 헌법재판소와 같지만 문제는 유신 헌법 시기 단 한 건의 헌법재판도 없었다는 것이다. 헌법재판소가 초기에 대법원보다 한직이라는 인식이 굳어지게 되는 주요한 요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20. 조갑제는 기자였을 당시 가장 강경한 유신 반대파였다. 기자였을 때의 조갑제는 지금과 달리 독재정권에 비판적이였으며 기자의 원칙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그는 한국의 다수 보수 정치인이나 언론인(혹은 기성세대)처럼 독재 시절에는 독재자를 까다가 민주화 이후에는 찬양하는 특이한 성향을 가진 인물이다. 전체주의 북한과 그를 추종하는 종북을 욕하는 사람이면, 당연히 남북 독재자는 다 욕해야되는거 아닌가? 아니면 역사는 반복된다.
  21.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출마했으나 정세균에 밀려서 낙선했다.
  22. 심지어 80년엔 마이너스 성장까지 기록한다.
  23. 심지어 김추자는 이 노래를 불렀다는 이유 하나로 심지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기까지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