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해외파 선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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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26일까지의 변화를 반영)

1 미국 진출

이미 1970~80년대부터 이원국, 박철순 등의 선수들이 미국 무대에 도전장을 내민 바 있지만, 이들은 끝내 빅리거가 되지 못했다.

그리고 1994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에 입단한 박찬호가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거로서 성공시대를 열게 되면서 수많은 한국인 유망주들, 소위 '박찬호 키드'들의 미국 진출 붐이 일어나게 된다. 하지만 마무리 투수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김병현과 박찬호를 뛰어넘은 한국인 메이저리거라는 평을 받는 추신수 등 진출자의 대략 20%를 제외하면 메이저리그에서 성공을 거둔 선수들은 극히 드물었고, 아예 빅리그 무대도 밟아보지 못한 채 소리소문없이 한국으로 돌아온 선수들도 많았다.

어쨌든 박찬호의 성공은 한국인 선수들도 메이저리그에서 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지만, 정작 시간이 흐른 후에도 한국프로야구에서 메이저리그로 직행한 사례는 나오지 않고 있었다. 진필중, 임창용 등의 선수들이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미국 진출을 시도하긴 했지만 빅리그 구단들의 냉랭한 평가와 함께 무산되었고, 기대를 모았던 이승엽은 미국 진출이 여의치 않자 일본프로야구 도전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후 2011년 말에 정대현볼티모어 오리올스 입단이 유력시되면서 드디어 한국프로야구에서 MLB로 직행하는 선수가 나오나 싶었지만, 결국 진출은 성사되지 않았다.

그리고 2012년 11월 류현진포스팅 시스템을 통한 MLB 진출에 성공하면서 한국프로야구에서 최초로 MLB로 직행한 선수로 이름을 올리게 된다. 이어 2015년 1월, 강정호 역시 MLB 진출에 성공하면서 야수 포지션으로는 최초로 한국프로야구에서 메이저리그로 직행한 선수가 되었다. 현재까지 한국 출생 메이저리거는 20여명에 달한다. 한국 국적자로만 추려도 15명 내외. 관련 정보는 한국인 메이저리거 참조.

2 일본 진출

해방 전 10여 명의 한국인 야구선수가 일본 프로야구 무대를 밟았다고 전해진다. 박현명(1938)이 오사카 타이거즈(현 한신 타이거즈) 소속으로 처음 진출했고, 해방 후 월북하여 북한 야구계의 원로로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외에도 유완식(야스다 노부오), 김영조, 이팔용(후지모토 히데오, 3세 때 도일, 교진의 200승 투수, 일본야구 최초의 퍼펙트 게임 투수) 등이 1세대 일본리그 한국 야구인으로 불릴 수 있겠다.

이들 이후에 일본 야구계에는 현재까지도 수많은 재일교포들이 일본 리그에서 뛰었으며, 심한 차별 등으로 인해 대부분 귀화하고, 자신의 신분을 숨겼다. 그럼에도 자신이 조선인임을 밝히고 일본야구계의 레전드로 활약한 김경홍(가네다 마사이치, 일본 유일의 400승 투수), 장훈(하리모토 이사오, 3000안타 등을 비롯한 전설적 타격 기록), 김기태(재일교포)(가네시로 모토야쓰), 김소인(가네시로 아키히토), 김일융(전 삼성, 니우라 히사오) 등의 한국계 선수가 많으며 현재에도 많은 유명한 선수, 심지어 마쓰이 가즈오, 니시오카 츠요시메이저리그 선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재일교포 3세, 4세 선수들이 존재한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면, 해방 후 실업야구 시대의 일본 진출은 백인천이 1962년 도에이 플라이어스에 진출하여 외야수로 장기간 활약한 사례가 있고, 이원국(Ernesto Carlos Won-Kuk Lee, 전 MBC)은 도쿄 오리올즈를 거쳐 멕시코리그로 진출해 통산 200승을 거두기도 했다. 프로야구 출범 후 최초 일본 진출은 1996년 선동열으로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현재와 같은 FA제도가 없어서 임대 형식이었다. 1999년 FA제도가 생기면서 국내에서 실력과 명성을 쌓은 유명 선수들이 FA로 진출하는 것이 일본 진출 사례의 대다수를 차지한다.

고교, 대학 아마추어 선수가 일본에 진출한 것은 미국 진출보다 더욱 적다. 1992년 조성민이 최초의 선수이고, 고려대 출신 박봉수가 신인지명 7순위 지명으로 주니치 드래곤즈에 입단하기도 했으나, 박봉수는 재일교포였다[1]. 재일교포를 제외한 한국인 아마추어 선수가 일본 프로야구단에 최초로 지명된 것은 2008년 신인지명(김무영, 신성현)이 되어서였다.

일본에서는 외국인일지라도 자국(일본)에서 고교와 대학을 나온 아마추어 선수는 일본인 선수처럼 대우하기 때문에 정식으로 신인지명에 참가할 수 있으며 외국인 선수 쿼터도 적용받지 않는다. 그 때문에 2000년대 들어서 중학 야구선수들이 일본으로 유학을 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김무영, 신성현, 송상훈[2] 모두 그러한 케이스.

한국프로야구를 거쳐 일본에 진출한 선수들 중에서 크게 성공한 선수들은 투수, 그 중에서도 마무리 투수들이 대부분이었다. 가장 유명한 건 선동열로, 30대 후반이라는 늦은 나이에 일본에 진출했는데 첫 시즌에는 부진했지만 절치부심한 2년차에는 세이브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며 맹활약하는 등 약 3년간 리그 탑 마무리의 자리를 차지했다. 이후 비슷한 위치인 선동열과 정반대 케이스 임창용이 국내에서 부진하다 30대의 나이에 진출하였는데, 일본에 진출한 이후 구위를 완전히 회복해 리그 정상급 마무리로 활약한 바 있다. 오히려 사람들은 일본시절을 리즈시절로 착각한다. 그리고 같은 팀 후배 오승환은 2014시즌-2015시즌 2년 연속 세이브 1위를 차지하는 등 또다른 한국인 특급 마무리의 위상을 일본에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2015시즌은...

반면 정민태, 정민철 등 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한국의 에이스 선발 투수들은 탈탈 털리면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특히. 정민철의 경우는 여러 문제가 얽힌 복잡한 케이스인데 항목에서 보면 이해를 할 것이다. 정민태는 타자판 김태균 멘탈 자체에 충격을 먹고 2군에 짱박힌 채 역시 2시즌 만에 고향 팀 현대 유니콘스로 복귀한다. 그나마 선발로 자리잡아 활약한 건 구대성 정도였고, 이상훈의 경우 혈행장애가 계속 괴롭혀 선발에서 내려와 불펜 투수로 보직을 바꾼 뒤에야 리그 우승으로 제 몫을 하게 된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진출로 야구계를 놀라게 했던 이혜천은 원포인트 릴리프로 뛰었지만 눈에 띄는 활약은 하지 못했고 2년 뒤 친정팀인 두산 베어스로 복귀했다.

타자들은 전반적으로 고전을 면치 못한 경우가 많다. 한국프로야구 최고의 5툴 플레이어로 꼽혔던 이종범이 그 예다. 초반에는 나름대로 잘 나갔으나 시즌 중반으로 향하면서 점차 하락세를 겪게 되었고, 유격수로서 공수 양면에서 기대치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평을 받던 와중에 팔꿈치 사구로 인해 하락세가 더욱 심해지면서 결국 외야수로 전향했다. 이후 호시노 감독과의 불화, 프로 의식 문제, 향수병까지 겹치며 결국 2001년 중반에 친정팀 해태를 인수한 기아 타이거즈로 컴백한다. 컨택 하나는 국내 1인자라고 평가받던 이병규 역시 3년간 출루율 3할을 넘긴 시즌이 단 한 시즌도 없을 정도로 고전하다가 2010년 친정팀 LG 트윈스로 돌아왔다. 주루능력 퇴화는 덤.그러나 뜬금없는 라뱅 쓰리런은 여전했다. 이병규를 뒤이어 2010년 치바 롯데 마린스에 입단한 김태균은 첫 해 개막전 5연타석 삼진이라는 어마어마한 삽질을 보여줬으나 이후 페이스를 끌어올리며 올스타전에도 뽑혔다. 이후 체력이 방전되면서 후반기에는 부진했으나, 어쨌든 21개의 홈런을 때려냈고 팀도 우승했으니 이만하면 첫 시즌치고는 괜찮지 않느냐는 평을 받기도 했으나, 2011년에는 부상으로 몇 경기 나오지도 못하는 와중에 도호쿠 대지진으로 인한 심리적 불안과 가족을 이유로 2년간의 일본생활을 마무리한 후 2012년 한화로 돌아왔다. 김태균과 같은 해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 입단한 이범호는 타격, 수비 모두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이면서 시즌의 절반 이상을 2군에서 보냈다가[3] 결국 1년 만에 짐을 쌌고, KIA 타이거즈로 이적했다. '국민타자' 이승엽의 경우 3년 연속 30홈런을 날리는 등 괜찮은 활약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장기계약 이후에는 부진만 거듭하다가 결국 오릭스를 거쳐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렇다보니 '빅보이' 이대호가 일본에 진출했을 때도 어렵지 않겠느냐는 여론이 많았는데, 이대호는 진출 첫 해부터 팀의 중심타자로 거듭났고 이후에도 꾸준히 3할 타율과 적절한 장타력, 높은 타점14시즌은 제외한다으로 4년간 베스트나인을 두 번 수상했고 2015년에는 일본시리즈 MVP까지 차지하는 등 맹활약을 펼치며 한국프로야구 출신 타자 중 가장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한일 양국에서 홈런왕에 오른 선수가 타이론 우즈 뿐이라는 것은 넘사벽. 글쎄 홈런왕 빼면 이대호 활약도 종합적으로 뒤지지 않는데...

이후 국내에서 고등학교 이상을 졸업한 뒤 곧바로 미국으로 진출했다가 메이저리그 진입에 실패한 뒤 일본으로 진출하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이대은하재훈이 대표적인 사례.

3 해외파 선수 명단

이하는 해외리그에서 활동 중에 있는 선수들 명단이다.
자세한 설명은 아래를 참조할 것
정규시즌 종료후 업데이트

<MLB>

이름소속팀팀 레벨
강정호피츠버그 파이리츠메이저리그(2015~)
김현수볼티모어 오리올스메이저리그(2016~)
오승환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메이저리그(2016~)
이대호시애틀 매리너스메이저리그(2016~)
최지만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메이저리그(2016~)
추신수텍사스 레인저스메이저리그(2005~)
류현진로스앤젤레스 다저스메이저리그(2013~14,16,부상자명단)
박병호미네소타 트윈스메이저리그(2016), 트리플A(부상자명단)

<MiLB>

박병호가 중복되는 이유는 일단 현 소속은 로체스터 (미네소타 AAA) 이므로

이름소속팀팀 레벨
문찬종휴스턴 애스트로스시즌 후 FA
박효준뉴욕 양키스싱글A (승격 가능성 낮음)
윤정현볼티모어 오리올스쇼트시즌 싱글A (방출 가능성 있음)
권광민시카고 컵스루키 (승격 혹은 유지)
손호영시카고 컵스루키 (승격 혹은 유지)
데릭 정토론토 블루제이스더블A
박병호미네소타 트윈스트리플A(부상자명단)

<NPB>

이름소속팀팀 레벨
이대은치바 롯데 마린즈
하재훈야쿠르트 스왈로즈시즌 후 계약 종료

이대은은 2016년 10월 4일 귀국했지만 아직 공식적으로 계약 종료 상태가 아니다. 반면 김무영은 2016년 10월 1일 재계약 불가 공지가 정식으로 떴으므로 위 명단에서 제외했다.

<참고: KBO 드래프트 대기자>

  1. 유예기간 2년이 이미 시작된 선수

김선기(전 시애틀, 현 상무, 91년생, 우완투수) : 2017년 시행 드래프트 (2017년 9월 전역예정)
김성민(전 오클랜드, 93년생, 포수) : 2018년 시행 드래프트
이학주(전 템파베이/샌프, 90년생, 유격수) : 2018년 시행 드래프트

2. 향후 유예기간 2년 산정이 시작될 선수 (2019년 이후 8월 신인 2차지명 대상)

문찬종, 박효준, 윤정현, 손호영, 권광민

  • 고등학교를 미국이나 일본에서 보낸 선수들은 2년 유예 기간을 적용받지 않는다. (강경덕, 심현석(에릭 심), 김무영 등.) 예를 들자면 최근의 이케빈(삼성) 등이 있겠다.

3.1 현역 미국 진출 선수

3.1.1 메이저리그

한국인 메이저리거 문서도 참고할 것.

텍사스 레인저스 외야수. 1982년생.
부산고 재학중인 2000년 8월 시애틀 매리너스와 계약. 2001 신인지명 때 롯데 자이언츠에 1차 지명을 받았지만, 이 지명권은 해외진출로 소멸되었다. 2007년 해외파 특별 드래프트SK 와이번스가 지명해 SK가 추신수에 대한 지명권을 갖고 있다. 2005년 4월 21일 첫 메이저리그 데뷔. 2008년 이후로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주전 우익수로 활약했다. 팀의 주축 타자로 자림매김하며 약체 클리브랜드 타선을 이끈다. 2012년 시즌 후 트레이드를 통해 신시내티 레즈로 이적. FA가 되기 전 1년 동안 1번타자, 중견수 자리를 맡았고, 리드오프로써 역대급 활약을 펼친다. 시즌 이후 FA 자격을 얻어 7년 1억 3000만 달러의 초대형 계약으로 텍사스 레인저스로 이적했다.그리고 먹튀가 됐다고 한다.첫 시즌 역대급 삽질...그리고 두번째 시즌도 역대급 삽질...중이었으나 후반기에 각성했다!! 박찬호 이후 마이너부터 단계를 밟아 메이저에서 꾸준히 경력을 쌓아오며 살아남은 풀타임 한국인 메이저리거. 2016시즌은 부상의 연속.
LA 다저스 좌완 투수. 1987년생. 현재 부상자명단
한화 이글스에서 2006년~2012년까지 통산 98승을 기록한 후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한국프로야구에서 메이저리그로 직행한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역대 한국인 포스팅시스템 최고금액을 보유하고 있다.[4] 진출한 이후 13, 14시즌 LA 다저스 3선발로 자리매김하며 활약했다. 이미 너무나 유명한 선수이기에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2015년 긴 재활을 마치고 2016년 복귀했으나 한 경기를 마치고 다시 팔꿈치 수술. 2017시즌 초 복귀 예정.
피츠버그 파이리츠 3루수. 1987년생.
넥센 히어로즈에서 2014년까지 활약하고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피츠버그 파이리츠와 계약을 맺었다. 한국프로야구에서 메이저리그로 직행한 2번째 선수이자, 야수로서는 첫 번째 선수. 15시즌 기대 이상의 타격과 수비로 주전으로 자리매김+신인왕 후보까지 올랐다. 현재는 주전 3루수로 맹활약중. 다만 부상 여파로 전경기 출장은 무리인 듯.또 성폭행사건에 휘말려 여론이 좋지않다. 그래도 한국 야수 중 최고의 활약을 이어가고 있다. 결국 2번째 시즌을 21홈런으로 마무리.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우완 불펜투수, 1982년생.
한국 야구 사상 최고의 클로저. 단국대학교, 삼성 라이온즈와 한신 타이거즈를 거쳐 2016시즌부터 메이저리그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팀에서 뛴다. 2016 KBO 도박스캔들에 연루되어 1/2년 정지를 받았으나 해외 리그에서는 효력이 없다. 우완셋업 포지션으로 활약중이 었다가 주전마무리 트레버 로젠탈의 부진으로 인해 임시마무리로 승격되어서 15세이브 이상을 기록.
볼티모어 오리올스 좌익수/1루수, 1988년생. 부상자명단.
한국야구 드래프트 미지명자 (신고선수) 출신으로 10년이 채 지나지 않아 메이저리그 FA 계약을 맺게 되었다. 25인 로스터의 끝자리에서 시작해 플래툰 이상의 좌익수로 대박을 내고 있다.
시애틀 매리너스 1루수/지명타자. 1982년생. 시즌 후 자유계약선수.
한국 야구 역사상 최고의 1루수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선수로 그 동안 포지션과 운동능력의 한계로 인해 아시아권에서 정상으로 군림함에도 메이저리그에서는 큰 관심이 없었다. 경남고-롯데 자이언츠-오릭스 버팔로스-소프트뱅크 호크스를 거쳐 시애틀 매리너스와 2016년 연봉 100만, 옵션 포함 최대 400만달러의 스플릿 계약에 합의하였다. 현재 좌완 상대 1루수 플래툰 포지션으로 나서고있으며, 두자릿수 홈런을 기록하는등 쏠쏠히 활약중. 그러나 후반기 이후 부진으로 가치가 많이 떨어지며 AAA로 내려갔다.
8월28일 다시 콜업되어서 이후 무난한 성적으로 시즌 마무리.
LA 에인절스 좌익수/1루수. 1991년생.
2009년 3월 시애틀 매리너스와 계약했다. 2010시즌 미국에서 첫 시즌임에도 포수와 1루수 자리에서 뛰어난 활약을 해 하이싱글A까지 올라갔으나 2011시즌에는 허리부상으로 아예 로스터에서 빠진 채 재활에 매달렸다. 2012시즌 이후 등 수술의 여파로 포지션을 1루수로 전향했다. 시즌 후에는 호주 리그에서 잠시 뛰며 좋은 모습을 보였다. 2013시즌에는 시작부터 3할 타율/4할 출루율/6할 장타율을 찍으며 좋은 모습을 보이고 더블A를 거쳐서 트리플A로 올라왔다. 퓨처스게임에 팬투표로 선발되기도 했다. 2014년 시즌 트리플A에서도 놀라운 눈야구를 곁들인 좋은 타격을 과시했지만, 약물 검사 결과 스테로이드 계열 약물인 Methandienone이 소량 검출되었다. 이후 재심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4월 18일 50경기 출장정지 징계를 받게 되었다. 6월 18일 복귀했다. 복귀 이후는 1루수와 좌익수 포지션을 번갈아 보고 있다. 2015년 3월 5일 열린 샌디에이고와의 시범경기에서 오른쪽 종아리 골절상을 입어 최대 6개월 정도 재활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았으며 다음 날 지명할당 처리되었다. 시즌 종료 후 마이너리그 FA가 된 뒤 볼티모어로 이적했으나 룰5 드래프트에서 LA 에인절스에 지명되어 다시 팀을 옮겼다. 2016년 시즌 개막을 메이저리그에서 시작했다. 이후 AAA와 MLB를 오가며 백업으로 약간의 활약을 했다.
  • 로버트 레프스나이더 (Rob Refsnyder, 한국명 김정태, 뉴욕 양키스 유틸리티 플레이어) 선수는 AAA에서 3루 수비 연습을 한 이후 5월 콜업되었다. 아마도 AAA와 MLB를 오가는 14~15번째 선수가 될 듯 하다. 양키스 내야의 물빠따 덕에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계속 머물고 있지만 내외야 플래툰으로 뛰고 있다.

3.1.2 트리플A

미네소타 트윈스 AAA 1루수/지명타자. 1986년생.
2015년 12월 2일, 4+1년간 옵션 포함 총액 1850만 달러에 미네소타 트윈스와 입단 계약을 체결하였다. 현재 트윈스 주전 지명타자로 활약 중이나, 낮은 타율로 인해 현지에서 서서히 비관적인 시선이 나오는 중. 결국 AAA로 내려가게 되었다. 부상으로 사실상 시즌아웃.
  • 문찬종(Chan Jong Moon)
휴스턴 애스트로스 산하 AAA 유격수/내야수. 1991년생.
충암고 재학 중이었던 2009년 휴스턴 애스트로스와 계약했다. 이 해에 건너갔던 선수들 중 가장 인지도가 낮았으나 2016년 현재 최지만과 함께 살아남은 둘 뿐인 선수. 주로 유격수 수비를 보는 내야 멀티플레이어. 시즌 중 잠시 하이싱글A로 승격되었으나 좋은 활약은 보이지 못했다. 타격보다는 수비로 좋은 평가를 받는듯. 신인들한테 밀려 2013년 시즌은 쇼트시즌으로 시작. 여기서도 성적은 평균 수준이다. 2014년에는 미들싱글A로 복귀했다. 그런데, 팀원 중에 가장 고참급이다. 6월에 다시 하이싱글A로 올라갔다. 2014 시즌에는 하이싱글A 리그에서 지구 우승도 하고, 주로 유격수로 뛰면서 유격수 유망주의 위치를 회복했다. 시즌 후에는 호주리그에서 뛰면서 우승했다. 나름대로 반전의 계기를 잡긴 했지만 그 이상 올라갈 수 있을 지는 미지수. 2015년 더블A 승격에 이어, 승격 후 1주일만에 트리플A까지 올라갔으나 이는 임시 승격이었고 5일만에 다시 더블A로 돌아갔다. 야구 실력에 비해서는 스마트한 플레이와 팀 내에서의 전략적인 태도 등이 높은 평가를 받는 선수. 그러나 2016시즌 시작은 부진하다. 코레아에 이어 브레그먼 때문에 마이너리그에서도 포지션을 못 잡고 이리저리 치이는 중. 트리플A에 1주간 올라가기도 했으나 역시 임시 승격이었고 다시 더블A로 내려갔다. 브레그먼 메이저 콜업과 함께 AAA에 3번째 입성. 이번에는 뭔가 다른 활약을 보여주고 있다! 일단 시즌 후 마이너리그 6시즌이 지나 마이너리그 FA가 될 예정. 군입대를 할 생각이라면 내년이 사실상 마지막 시즌.
  • 한국계 미국인 선수로 최현 또는 행크 콩거("Hank" Hyun Choi Conger, 탬파베이 레이스 포수)가 잘 알려져 있다. 아버지가 외국인 친척에게 양자로 들어가며 성이 콩거가 되었지만 한국 교포 3세로, 혼혈은 아니다. 성숙한 수비력을 중시하는 에인절스 특성상 그동안 중시받지 못했으나, 2013시즌 이후 서서히 팀 내의 중요한 선수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2014시즌 후 휴스턴 애스트로스로 트레이드되었다가, 2015 시즌 후 다시 탬파베이로 이적했다.. 국뽕이라는 이유로 최현이라고 불러서는 안 되고 행크 콩거라고 불러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 존재하나, 최현은 엄연히 본명이며, 오히려 행크라는 이름이 별명이다. 정 정확히 말하고 싶다면 현 최 콩거라고 부르면 된다. 그러나 극악의 도루저지에 공격이 부진하면서 2016년 7월 11일 트리플A로 강등되었고 트리플A에서도 부진하면서 9월 6일 지명할당처리되었다.

3.1.3 더블A

  • 데릭 정(Byung Jo Derrick Chung)
토론토 블루제이스 산하 더블A 포수. 1988년생.
10살 때 미국으로 건너간 한국인 1.5세대이다. 대학시절 포수 유격수 등 상식 파괴 수준의 멀티포지션을 뛰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그럼에도 좋은 교타자로서 또한 포수로서 평가를 받았다. 결국 하위라운더로 지명되었고, 그럼에도 좋은 성적을 보이며 꾸준히 로스터에 살아남았다. AA 레벨 이하의 마이너리거로서는 굉장히 많은 나이인데 (AA 수준에서 28세 이후에 뛰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팀에서 수비적인 면이나 유망주를 이끌어가는 면에서 가치가 있는 선수인가 싶다. 2015~16년 내내 부상으로 거의 경기에 나오지 못했는데, 은퇴나 방출되었다는 말은 전혀 없다.

3.1.4 하이싱글A

  • 피츠버그 1라운더 선수인 코너 조 (Connor Kok-Wy Joe) 선수는 한국계 부모님을 둔 것으로 알려졌다. 2015년 싱글 A 1루수, 2016년 하이싱글 A 3루수로 뛰며 점점 성적이 발전했다. 시즌 후 애리조나 가을 리그를 참가하기도 하면서 내년 AA 승격이 거의 확실하다. 잘만 하면 강정호와 동 포지션에서 만날수도.

3.1.5 싱글A

1996년생 양키스 싱글 A 유격수/2루수.
뉴욕 양키스와 계약했다. 당대 고졸 내야수 최대어로 꼽히며 KT 위즈 우선지명, SK 와이번스 1차지명 유력 후보로 떠올랐으나 일찌감치 양키스의 제의를 받고 마음을 굳혔다. KT와 SK는 그를 끝까지 설득하려고 했지만 끝내 단념. 계약금은 당초 알려진 것보다 약간 적은 116만 달러다. 데릭 지터의 은퇴 후 경쟁에서 살아남는다면 기회가 어느 정도 열릴 것으로 보이지만 양키스가 유격수 자원들을 계속 수집하고 있는데다가 언제든지 돈지랄을 할 준비가 되어있는 팀임을 감안하면 전망이 불투명하다. 선수 자신은 이 부분에 그다지 개의치 않는 인상인데(3년 내에 주전이 되겠다, 즐기면서 하겠다 등) 정말 독한 마음을 먹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든 곳이 마이너리그다. 당초 루키리그를 건너뛰고 쇼트싱글A에 배치될 것으로 알려졌으나 다른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루키리그에서 출발했다. (상위루키리그로, 다른 팀들의 쇼트시즌 싱글A와 큰 차이가 안 나기는 한다. 그리고 한 단계 내려간 원인은 당해 드래프트 1라운드에서 유격수 카일 홀더(대졸) 선수가 드래프트 되었기 때문) 2016년 월반하여 싱글A 배치, 카일 홀더와 유격수/2루수를 나눠 맡을 듯. 2016 시즌 시작은 좋았는데 이후 부진하여 시즌 마무리. 30개가 넘는 도루와 두자리수의 3루타 등 놀라운 스피드가 위안거리로 현재까지는 메이저리그 백업 수준도 쉽지만은 않아 보인다.

3.1.6 쇼트시즌 싱글A

  • 윤정현
볼티모어 오리올스 산하 싱글A 좌완선발투수. 1993년생.
2012년 신인드래프트에서 롯데에 8라운드 지명을 받았으나 동국대로 진학했다. 2012년 대학야구에서 그런대로 준수한 활약을 보였으나 경제적인 이유로 1년만에 중퇴했다. 2013년 7월 16일 정식으로 입단 기자회견을 열었다. 계약금이 3만달러로 이 명단의 선수 중 드래프트된 선수를 제외하고는 가장 낮은 하재훈 선수의 10%수준이며 드래프트 15라운더인 강경덕 선수의 절반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사실상 로또를 긁은 것과 마찬가지. 2014년 4월 초에 가벼운 부상이 있다는 소식이 나왔는데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2014년 루키리그 개막 때에는 로스터에 들지 못했다가 8월 하순에 뒤늦게 포함되었다. 좌완선발이라는 이점 때문인지, 2016시즌 쇼트시즌 싱글A에 올라오기는 했지만 6경기(2선발)에 등판해 승패 없이 평균자책 6.75에 그쳤고 시즌 종료 후 교육리그 명단에 들지 못한 것으로 보아 마이너리그에 계속 머물게 될 지는 불투명한 상태.

3.1.7 루키리그

  • 손호영(Ho-young Son)
시카고 컵스 산하 루키리그 우완투수/2루수/유격수. 1994년 생.
2014년 4월 28일(한국시간) 시카고 컵스와 계약했다. 2013년 충훈고를 졸업하고 홍익대에 진학해 주전 유격수로 뛰었으나 하계리그를 마치고 자퇴한 뒤 방황하다가 미국행을 결정했다. 계약금은 거의 없는 수준. 2년간 2루수/유격수로 뛰며 쇼트시즌 A까지 진행했으나 타격의 한계를 느끼고 2016시즌 루키리그에서 불펜투수로 다시 시작한다. 2016시즌 별 활약 없이 마쳤지만, 2017년 준비를 위한 교육리그는 따라간다.
시카고 컵스 산하 루키리그 우익수/좌익수, 1997년생
116만 달러(또는 100만 달러)의 계약금을 받고 진출한 장충고 출신의 선수이다. 2학년 때 어마어마한 성적을 내며 3학년 초부터 이미 가계약이 이루어진 듯. 파워에서 강점이 있어 강타자를 기대하고 데려간 자원. 첫해 좌익수와 우익수로 주로 나왔다. 스프링캠프 이후 타격 조정을 하다가 2016년 8월 중 1주일간 경기에 나왔다. 계속적으로 체형과 타격 자세나 배트 스피드 등에 대해서 교육받는 중으로 알려졌다.

3.1.8 독립리그

어메리칸 어소시에이션 (A 수준의 독립리그) 에 강경덕, 에릭 심 등 전직 마이너리거가 뛰고 있다. 한국 교포 출신 마이클 허 선수도 여기에 있다.

자세한 사항은 아래 3.5.1. 항목을 참고할 것.

3.2 현역 일본 진출 선수

3.2.1 1군/2군

치바 롯데 마린즈 우완투수. 1989년생.
신일고 재학 중인 2007년 6월 6일 시카고 컵스와 계약했다. 당초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 전체가 미국으로 이민갔다는 얘기가 있었으나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토미 존 서저리 이전 상당히 촉망받는 유망주였으나, 수술 후 후유증을 크게 겪고 있다. 복귀 초기에는 구속이 수술 이전과 차이가 없어서 희망이 많아 보였지만, 2012년 80마일 중후반대의 구속을 보여주면서 팀내 유망주 30위권에서도 밀렸다. (Baseball America 기준). 현재는 평균 구속 89마일, 최고 구속 92마일 정도인 것으로 보인다. 체인지업(일본에서는 포크로 분류된 구종으로 보임)은 항상 좋은 평가를 듣고 있다는게 장점. 2013년 시즌은 안정적으로 시작했으나, 어깨 부상으로 인해 부상자명단에 등재되며 시즌 절반 정도를 날렸다. 그래도 시즌 후반부터 2014시즌 중반까지 지속적으로 3점대의 ERA를 유지하며 건강하게 로테이션을 지켰고, 만 1년간 약 150이닝을 소화하며 충분히 검증을 받았다. 2013시즌 후 마이너리그 FA 자격을 얻었고, 시카고 컵스팀과 재계약을 맺었다. 2014년 7월 7일 트리플A로 승격했다. 구속이 떨어지지만 구위나 브레이킹 볼은 괜찮은 편으로 알려져 있으나 제구가 문제로, 제구가 정확해야 메이저리그 승격이 가능해 질 것으로 보였지만...... 시즌 후 팀과 재계약하지 않고 일본행을 모색하다가 지바롯데에 입단한다는 기사가 스포니치 11월 22일자로 떴고 한 달이 지난 12월 25일이 되서야 계약이 공식 발표되었다. 연봉 5,400만 엔으로 추정. 구속이 최고 154km 까지 나오고 있으며 시즌 개막 후 4월 말까지 4승 무패, 평균자책 3.16으로 겉으로 드러난 성적은 좋아 보이지만 일본 프로야구가 현저한 투고타저임을 감안하면 그리 낫다고 보기는 힘들다. 결국 5월 1일 니혼햄전에서 3이닝 5자책점을 기록하며 평균자책이 4.19로 치솟았고 엔트리에서 일시 제외되었다. 5월 21일에 1군에 복귀한 뒤 2승을 더하며 6승 1패를 기록 중이지만 세부 지표가 그다지 좋지 않은 편이며 결국 불펜으로 내려갔다. 불펜으로 내려간 뒤에는 그런대로 괜찮은 모습이지만 애초 기대치에는 미치지 못하는 편이다. 7월 30일에 선발로 복귀해 호투를 펼치며 시즌 9승째를 했지만 이후 더 이상 승리를 추가하지 못하고 내리 7패를 쌓으며 9승 9패로 시즌을 마쳤으며 팀이 클라이맥스 시리즈에 진출했지만 출전 선수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9월 8일 발표된 2015 WBSC 프리미어 12 예비 엔트리에 포함되었으며 10월 7일 발표한 최종 엔트리에도 들어갔다. 소속 팀에서 보인 들쭉날쭉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프리미어 12 대표에 뽑히는 등 운이 따라 주기는 했지만 2016시즌에도 전년도와 같은 모습이 반복된다면 쉽지 않을 듯. 2016시즌 시범경기에 전혀 등판하지 못하고 개막 엔트리에서 제외되어 2군에서 출발하게 되는 등 팀내 입지가 여전히 확고하지 못한 상황이다. 2016년 4월 13일 1군에 복귀했으나 부진한 투구 내용을 보인 끝에 하루 만에 다시 2군으로 내려갔다. 2군에서도 선발과 중간을 오가며 여전히 기복이 심한 투구 내용을 보였으며 7월 말 ~ 8월 초 잠시 1군에 올라온 것을 제외하면 계속 2군에 머물렀다. 병역 문제가 코 앞으로 다가 왔지만 상무나 경찰청에 합격하더라도 퓨처스리그 출전은 못하기 때문에 이를 두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결국 2016년 10월 13일 열린 KBO 이사회에서 주요 국제대회에 국가대표로 출전한 경우에 한해 퓨처스리그 출전을 가능하게 하기로 결정하면서 원활한 국내 복귀 길이 열렸지만 논란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경찰청 2차 선발에 응시했지만 이번에는 문신 때문에 면접 및 신체검사에서 탈락했고 상무에는 지원하지 않았는지라 사실상 2년을 쉬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야쿠르트 스왈로즈 외야수. 1990년생.
용마고 재학 시절인 2008년 7월 29일에 시카고 컵스와 중견수로 계약 사실을 알렸다. 고교 시절에는 포수였으며 미국에서 외야수로 전향했는데 처음에는 작은 계약금으로 주목받지 못했으나 이내 이학주 다음으로 가장 평가가 좋은 한국인 타자 유망주가 되었다. 애초에 타격에 재능이 있었는데다 발도 빠른 편. 또한, 짧은 경험에도 곧잘 수비를 잘 소화해내고 있다. 하위 마이너에서는 출루율을 등한시한 타격을 보였지만, 상위레벨에서는 타율보다 1할가까이 높은 출루율을 보여주고 있다. 2012시즌 퓨처스게임(마이너리그 올스타전)에 비-미국 팀으로 출전. 중견수 수비는 같은 팀 마이너리그 선수 중 최고 수준이라고 한다(2012년 Baseball America가 팀내 최고라고 인증). 다른 주전 포텐셜 유망주에 밀리면서 (브렛 잭슨, 현재 백업인 맷 셔저, AAA d유망주로 올라온 알버트 알모라) AAA가 한계로 남았다. 애초에도 4외야수 실링으로 평가받았으며 외부 유망주 평가에서는 외면받는 존재기도 했다. 2010년을 정점으로 타율이 점점 떨어지고 있는 가운데 2014시즌 들어서 급격한 부진을 보였다. 후에 알려진 바에 따르면 심한 손 부상으로 인해 타격이 거의 불가능 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2015년에는 부상으로 트리플A 로스터에서 제외되어 루키리그 AZL컵스에 재활차 내려간 뒤 투수로 전향했다. 직구 92마일에 커브를 던질 줄 안다고 한다. 6월에 쇼트시즌 싱글A로 올라갔다. 시즌 종료 후 마이너리그 FA가 되었으나 새 팀을 구하지 못했으며 우선 일본 시코쿠 독립리그를 거쳐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보결 외국인선수로 계약을 추진하는 중이다. 현재 스왈로스는 발렌틴이 타자 용병으로 제 몫을 해 주고 있으나 나머지 3명의 외인은 모두 투수이고, 아주 인상적이지 못한데다 팀 중심타선이 부진에 빠져 있어 비싸지 않고 타격에 도움이 되는 우타 외야수 한 명을 구하려 한 듯 하다. 라쿠텐 등도 관심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2016년 5월 26일 입단이 확정되었다. 6월 8일 1군에 등록되어 8경기 동안 22타수 6안타(2루타 1), 타율 0.273, 2타점을 기록했지만 열흘만에 2군으로 내려갔다가 7월 10일 1군에 복귀해 주로 대타로 출전하다가 7월 31일 다시 2군으로 내려갔다. 시즌 후 재계약은 당연히 확실한 상태는 아니라고.

3.3 국내리그로 복귀한 현역 선수

SK 와이번스 외야수. 1990년생.
한화, 현대에서 활동한 포수 김상국의 아들. 2009년 3월 시카고 컵스와 55만 달러에 계약했다. 어깨 재활로 1년을 날리고 우투에서 좌투로 바꾸었으며 그로 인해 2011년에야 데뷔. 그 이후에도 순탄치 못한 선수생활을 이어가다 결국 2013년 6월 방출되었다. 군 복무 후 재도전한다는 설이 있었으나 귀국 후 모 인터뷰에서 자신이 직접 아니라고 밝혔다. 2016년도 신인드래프트 2차 지명에서 SK 와이번스에 9라운드로 지명되었다. 거포 타자로 꽤나 주목받으며 SK가 이후 드래프트에서 김성민과 같은 해외파 드래프트에 주목하는 계기가 되었다.
KIA 타이거즈 우완투수. 1979년생.
성균관대 재학 시절인 1999년 2월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 계약. 1997 신인지명 때 해태 타이거즈에 고졸우선지명을 받았지만, 2007 해외선수특별지명으로 인해 소멸되었다. 2007 해외선수특별지명 때 현대 유니콘스에 지명되며 현재는 넥센 히어로즈가 그 지명권을 계승[7][8]했고 2012년 국내 복귀했다. 2014년 4월 10일 KIA 타이거즈의 신인 투수 김영광과 맞트레이드되었다.
상무 피닉스 우완투수. 1991년생.
세광고 재학 중이었던 2009년 4월 시애틀 매리너스와 계약했다. 2012년 쇼트시즌에서 출발했으나 미들싱글A로 도중에 승격되었다. 150km 정도의 직구를 포함한 4개의 구질을 구사한다고 한다. 성적 자체는 그다지 좋지 않았으나, 2013년 깜짝 승격되었다. 중계투수로 2013년에 전환해 평균자책점은 7.00으로 심각한 수준이나 K/9가 8~9에 육박하며 꽤 많은 삼진을 잡고 있다. 스프링캠프는 AA에서 뛰며 뛰어난 스터프에 대한 구단의 믿음을 받고 있음을 보여주었고 다시한번 하이싱글A에서 메이저리그를 향한 희망을 갖는다. 그러나 2014년 들어 부진을 보이면서 미들싱글A로 내려갔다. 일단 미들싱글A에서는 안정감을 찾긴 했지만 상위 단계에서 부진하고 하위 단계로 내려와서 회복세를 보이는 양상이 반복되면서 미래가 불투명해 보였다. 결국 2015년 4월 7일 방출되었다. 이후 별다른 근황이 알려지지 않다가 2015년 10월 23일 발표된 상무 서류전형 합격자에 포함되었다. 고양 원더스 시절의 정영일, 남윤성이 교류전 출전이 불허되었던 예를 봤을 때 최종 명단에 들어가기는 힘들 것으로 보였으나 11월 25일 발표한 최종 합격자에 들어갔다. 이로써 복귀 해외파들이 상무나 경찰청에서 병역을 이행할 길이 열리기는 했지만 KBO는 상무 입대와는 별개로 유예 기간은 그대로 적용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2016년 1월 12일 열린 KBO 이사회에서 KBO 리그 팀을 거치지 않고 외국으로 나갔다가 귀국해 군경 팀에 입대한 복귀 해외파 선수의 퓨처스리그 출전을 불허했지만 그 이전에 상무 행이 결정된 김선기는 이를 적용받지 않는다. 퓨처스리그에서는 초반에 원 포인트 릴리프로 기용되다가 선발로 보직을 변경했다.
kt wiz 투수. 1990년생.
2008년 세계 청소년대회 우승 당시 주전 포수였다. 2009년 1월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 계약해 미국으로 진출했다. 2012년 시즌 중 방출되었다. 이후 강원도 원주에서 의장대로 군복무를 마치고 2015년도 신인 2차지명에서 KT 특별지명에서 KT 위즈에 지명되었다. 2015년 동계훈련을 기점으로 투수로 전향했으며 kt 불펜의 필승조로 자리잡았다.
  • 김진영
한화 이글스 우완투수. 1992년생.
2010년 2월 시카고 컵스와 계약했다. 계약금 120만 달러를 받았으나 기대에 못 미치는 편으로, 2012년에는 중계투수로 나왔다. 2013년 4월에 퇴단했으며 사회복무요원 복무는 알려진 것과는 달리 2013년 10월부터 이행 중이다. 그의 귀국 소식이 알려진 뒤 한동안 2016년도 신인 1차지명 가능성에 대한 얘기가 나왔으나 규약상 불가능하다.(야구규약 105조 2항과 3항, 107조 3항 참조) 고로 2차 지명으로 가야 한다. 귀국 사유는 아버지의 건강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2016년도 신인 드래프트 2차 지명 대상으로 알려졌으나 귀국이 2013년 4월이었던 반면 컵스와의 계약 해지가 8월 이후로 늦어지면서 결국 1년 공백기를 더 보내고 2017년도 신인 드래프트 2차지명에 나오게 됐다.
한화 이글스 1루수. 1982년생.
2009 시즌 종료 후 FA로 치바 롯데 마린즈에 입단했다. 원래는 3년 계약이었으나 2년만에 돌아오게 되었다. 돌아오게 된 이유와 그에 대한 비판은 항목 참조.
롯데 자이언츠 외야수. 1991년생.
덕수고 재학 중인 2009년 시카고 컵스와 계약했다.[9] 2011 시즌 후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로 트레이드되었다. 2012년 싱글 A, 더블 A, 트리플 A를 모두 경험했고 대체로 대수비로 출전했다. 수비 평가는 매우 높았으나 타격은 별로였다. 팔꿈치 부상으로 2013년 3월 24일 방출되었으며 귀국 후 토미 존 수술을 받았다. 2013년 11월부터 사회복무요원으로 복무했으며 2016년도 신인드래프트 2차 지명에서 롯데 자이언츠에 2차 3라운드로 지명되었다.
kt wiz 1루수. 1991년생.
2009년 6월 LA 다저스와 계약했다. 2012년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하기도 했으나 전체적으로 부진했다. 결국 2013년 6월 방출되었으며 귀국 후 사회복무요원으로 복무 중이다. 2016년도 신인드래프트 2차 지명에서 예상을 깨고 kt wiz에 전체 1순위로 지명되었다. 2016년 1군 데뷔도 성공했다.
SK 와이번스 좌완투수. 1987년생.
2005년 있었던 2006 신인지명 때 두산 베어스에 1차지명을 받지만, 입단을 거부하고 메이저리그 행을 꿈꿨다. 그리고 1년이 지난 2006년 5월이 되어서야 텍사스 레인저스와 마이너 계약을 맺었다.(…) 어쨌든 남윤희의 진출 이후 다시 고졸 유망주들의 미국행이 가속화되었으나 10년이 지나도록 단 한명도 MLB 무대를 밟지 못하고 있다. 참고로 넥센 히어로즈김상수(투수), 두산 베어스김현수, 삼성 라이온즈모상기, KIA 타이거즈임한용 등과 고교 동기. 여담으로 남윤성의 입단 거부로 김현수가 지명을 못 받았다는 얘기가 있지만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다. 이 때 김상수(투수)(삼성), 모상기(삼성), 박진원(두산) 등 다른 동기 3명은 지명받고 입단했다.[10] 즉, 그냥 당시 스카우트들이 김현수를 높게 평가하지 않은 것. 진출 초반만 해도 빠른 메이저리그 승격이 기대되었으나 부상, 수술 등이 겹치며 실전 공백이 길어졌고 결국 2011 시즌 후 방출되었다. 2012년 독립 야구단인 고양 원더스에 입단했지만, KBO의 결정에 따라 프로야구 2군 팀과의 교류 경기에는 출전하지 못했다. 새로 부임한 이상훈 코치가 많은 관심을 보였지만 2013년 3월 경 원더스를 떠났다. 퇴단 후는 근황이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8월 7일 KBO가 해외 출신 선수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트라이아웃에도 불참했다. 이유인즉슨 그가 아직 군 미필이라 7월에 육군훈련소에 입소했음이 뒤늦게 알려졌다. 훈련소 퇴소 후 김포시에서 사회복무요원으로 복무했다. 2016년도 신인드래프트 2차 지명 대상이었지만 몸을 더 만들기 위해 트라이아웃에 불참하면서 2017년도 2차 지명을 기약하게 됐다. 나이가 30줄이고 수술을 받은 후 실전 공백이 5년이 넘어가는 터라 지명 가능성은 불투명했으나 예상을 깨고 정영일로 해외파 재미를 본 SK가 6라운드에서 지명했다.
LG 트윈스 우완투수. 1983년생.
덕수정보고 재학 중인 2001년 5월 29일 시카고 컵스와 계약했다. 이후 탬파베이 데블레이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텍사스 레인저스를 거쳤으나 눈에 띄는 활약을 못하고 부상 때문에 결국 방출되어 한국으로 돌아왔다. 2010년 중반부터 공익근무요원으로 군복무를 했다. 2007 해외선수특별지명 때 LG 트윈스에 지명되었다. 군 복무를 마친 뒤 우여곡절 끝에 2013년 1월 31일 LG에 입단했다. 13시즌 10승을 기록하며 성공적으로 국내 복귀 후 첫 시즌을 마쳤다.
LG 트윈스 좌완투수. 1980년생.
신일고 재학 시절인 1997년 10월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와 계약. 1999년 전에 진출한데다 신인지명 절차 없이 복귀해 2007 신인지명 때 LG 트윈스의 1차지명을 받고 국내에 복귀했다.
롯데 자이언츠 우완투수. 1980년생.
경남고 재학 시절인 1999년 보스턴 레드삭스와 계약. 1999 신인지명 때 롯데 자이언츠에 1차지명을 받았지만, 이 지명권은 해외진출로 소멸되었다. 2007 해외선수특별지명 때 롯데 자이언츠에 지명되어 국내에 복귀할 때도 롯데에 복귀했다.
한화 이글스 내야수. 1990년생.
김무영과 마찬가지로 고교 때 일본에 유학간 케이스로, 2008 신인지명 때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4순위로 지명되었다. 위의 김무영과 함께 한국인 최초로 일본 프로야구단에 지명된 선수가 되었으나 1군 데뷔조차 못하고 2013시즌 종료 후 히로시마에서 방출되었으며 이후 고양 원더스에 합류했다. 교류전에서 꾸준히 중용되었으나 2014년 6월 7일 고려대와의 연습 경기에서 십자인대가 파열되는 부상을 당해 재활만 6개월이 소요된다는 진단을 받았다. 외국에서 고등학교 이상을 나왔기에 프로 팀들이 바로 데려갈 수는 없었고 2차지명을 거쳐야 헸기에 2015년도 신인 2차지명에 참가했지만 부상 재활 중이라 결국 지명받지 못했다. 고양 원더스 해체 후에도 계속 재활에 매달리다가 김성근 감독이 새로 팀을 맡은 한화 이글스 육성군에 합류했다. 5월 27일 정식 선수로 등록되었다.
  • 신진호
NC 다이노스 포수. 1991년생.
2009년 3월 캔자스시티 로얄스와 계약했다. 루키리그에서는 좋은 성적을 보여주어 시즌 중 싱글A로 승격되기도 하였으나, 그곳에서는 별 활약이 없이 다시 루키리그로 돌아왔다. 수비 재능은 좋다고 하는데 아직 다듬어지지 않았으며, 타격이 문제인듯. 2013년 다시 싱글A에서 시작하고 있으며, 성적은 평범한 수준이었다. 2014년 5월 7일 자진해서 방출을 요청해 팀을 나왔다. 그런데 이게 방출이 아닌 임의탈퇴여서 계약 관계가 2016년 4월이 되서야 끝나는 바람에 당초 나올 예정이었던 2017년도 신인 2차지명에는 나올 수 없게 됐다고 한다.[11] 자신의 인스타그램이 2016년 8월 2일에 시행하는 트라이아웃에 참가한다는 글을 남기면서 구제 여부 논란이 있었는데 서울지방법원 심리에서 '신인 2차지명 참가는 받아들이되 MLB 사무국에서 계약 종료 시점을 방출이 아닌 실질적인 계약 실효(失效)일로 볼 경우 최종 지명 대상이 된다'는 판단을 함에 따라 일단 조건부로 트라이아웃에 참가했으며 8월 18일에 최종 지명 대상이 된다는 결정이 나왔다. 2년간 급여를 받지 않고, 선수 활동을 하지 않은 점이 실질적인 계약 실효로 인정되었다고. 병역은 한동안 미필로 알려졌으나 면제로 확인됐다. NC 다이노스에 2차 1라운드 지명.
  • 안태경
롯데 자이언츠 우완투수. 1990년생.
부산고 재학 중 2008년 8월 텍사스 레인저스와 계약했다. 2012년 시즌 개막 전 방출되었다. 2012년 가을 현역으로 군에 입대했으며 2014년 7월 전역했다. 2015년도 신인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로 롯데 자이언츠에 지명되었다.
KIA 타이거즈 우완투수. 1986년생.
KIA 타이거즈에서 2005년~2013년까지 뛴 후, 2014년 FA자격으로 마이너리그 트리플A의 노포크 타이즈에 입단했다가 1년만에 KIA로 복귀했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조.
KIA 타이거즈 내야수. 1981년생.
2009 시즌 후 FA로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 입단. 원래는 2년에 추가로 1년이 옵션으로 붙었지만 여러 이유로 1년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 시절에 원 소속팀이었던 한화가 아니라 KIA 타이거즈에 입단했다. 자세한 사항은 항목 참조.
LG 트윈스 외야수. 1974년생.
2006 시즌 후 FA로 주니치 드래곤즈와 3년 계약을 맺고 입단. 3년 계약이 끝나고 LG로 다시 돌아왔다.
삼성 라이온즈 1루수. 1976년생.
2003 시즌 후 FA로 지바 롯데 마린스에 입단. 요미우리 자이언츠, 오릭스 버팔로즈 등을 거치고 2012 시즌 국내 복귀.
삼성 라이온즈 우완투수. 1988년생.
2007 신인지명 때 연고팀인 한화 이글스로 1차지명을 받았지만, 입단하지 않고 상무에 입대했다. 전역 후 2008년 10월 LA 에인절스 오브 애너하임과 계약했다. 많은 한국인 유망주들의 고민 중 하나인 군문제를 이미 해결한 상태지만 다른 선수들에 비해 나이가 많은 편. 2012년 방출되어 미국의 독립리그인 페코스 리그 소속 라스크루시스 바케로스에 입단했으나 그곳에서도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고 방출되었다. 2013년 겨울에 호주 프로야구 리그 퍼스 히트에 입단하여 재기를 노렸으나 2경기만 등판한 채 팔꿈치 부상으로 시즌 아웃되었고 토미 존 서저리 후 재활에 들어갔다. 야구규약 105조 2항에서 언급한 외국 프로구단에 그가 거쳐간 미국 독립리그와 호주 프로야구 리그가 포함되지 않음에 따라 2015년도 신인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로 삼성 라이온즈에 지명되었다.
NC 다이노스 우완투수. 1990년생.
부산고 재학 중인 2008년 8월 시카고 컵스와 계약했다. 아쉽게도 계약 이후 네 시즌 동안 루키-싱글A 사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고 심지어 2011년 이후에는 불펜 자원으로 분류되어 있다. 공이 빠르나 제구에 문제가 있고 정신적으로 적응을 잘 하지 못하는 듯 하다. 결국 2013년 3월 24일자로 방출되었으며 귀국 후 현역으로 입대했다. 2016년도 신인드래프트 2차 지명에서 NC 다이노스에 2차 1라운드로 지명되었다.
SK 와이번스(2014~2015년은 상무 소속) 우완투수. 1988년생.
2007 신인지명 때 KIA 타이거즈의 1차 지명을 받았지만 2006년 7월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오브 애너하임과 계약했다. 입단 후 팔꿈치 부상으로 수술과 재활 과정을 거쳐 기대보다 활약하지 못했다. 결국 2011년 5월 30일 팀에서 방출되었다. 2012년 독립 야구단인 고양 원더스와 계약했지만, KBO의 결정에 따라 프로야구 2군 팀과의 교류 경기에는 출전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고양 원더스를 나왔다. 이후로 간간이 사회인 야구에서 활동하다가 2013년 3월 6일 일본 독립리그 가가와 올리브 가이너즈에 입단했으나 거기서마저 거의 등판하지 못했다. 국내 복귀 유예기간이 지난 7월 1일자로 독립리그를 떠나 신인드래프트 2차지명에 응하기로 했으며 2013년 8월 7일 KBO에서 주관한 트라이아웃에 참가했다. 8월 26일 실시한 2차지명에서 SK에 5라운드에 지명되었다. 정식으로 KBO 소속 선수가 되어 제약이 사라지자 상무에 지원했으며 11월 19일 최종 합격하여 군 문제를 해결하게 되었다.
넥센 히어로즈 1루수. 1982년생.
부산상고 재학 시절인 2000년 6월 보스턴 레드삭스와 계약. 부상으로 퇴단한 수 2007 해외선수특별지명 때 삼성 라이온즈에 지명받았다. 하지만 사실 채태인은 해외선수특별지명 대상이었던 다른 선수들과 달리 보스턴과의 계약이 끝난 지 2년이 지난 상태라 굳이 특별지명을 통해 구제를 해주지 않아도 무방한 상태였다. 즉 KBO의 구색 맞추기, 사람수 맞추기로 넣어진 셈.[12] 여담으로 2001 신인지명 때 두산 베어스의 지명을 받았지만, 이미 채태인은 보스턴과 계약한 상태. 못 먹는 감 찔러보기 식으로 지명한 것. 결국 지명받은 선수가 해외진출하면 지명권이 소멸되는 규정에 따라 두산의 지명권도 소멸되었다(…). 이후 넥센에 김대우와 트레이드되어 이적.
  • 황건주
연천 미라클 우완투수. 1989년생.
2008년 SK에 1차 지명된 투수로 프로에서는 이렇다할 활약을 하지 못한 채 SK 1차 지명 흑역사의 한 축을 담당하다가 2014년 군복무를 마치고 방출되었다. 방출 이후 고양 원더스에 입단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퇴단하며 은퇴하는 듯 하였으나, 오스트리아 야구 리그 비너노이슈타트 다이빙 덕스에 최향남과 함께 입단하였다. 2016년 2월 연천 미라클의 트라이아웃에 참가했으며 3월 25일 최종 합격했다.

3.4 기타 리그로 복귀한 현역 선수

전 롯데 자이언츠 우완투수.
2015-2016 윈터 시즌 호주 프로야구에서 뛰었다. 팀은 시드니 블루삭스
전 두산 베어스, 야쿠르트 스왈로즈, NC 다이노스 좌완투수.
2015-2016 윈터 시즌 호주 프로야구에서 뛰었다. 팀은 애들레이드 바이츠.

3.5 해외에 진출했던 은퇴, 방출선수

양쪽 모두 진출했던 경우 미국 진출쪽에 소개. 이 중 미국 진출 중 메이저리그에서 뛴 선수는 굵은 글씨로 표시

3.5.1 미국 진출

  • 강경덕(Kyeong Kang)
전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산하 더블A 좌익수 및 지명타자. 1988년생.
고교 시절 미국으로 건너가 드래프트된 케이스. 뛰어난 유망주는 아니지만 무난하게 팀의 기대만큼 성장하며 차근차근 마이너 팀을 거쳐 왔다.[13] 다만 탬파베이 마이너리그 내에 외야수가 많다는 점과, 수비에서 어필하지 못해 지명타자로 출전했다. 워낙 유망주 뎁스가 두터운 팀이다보니 2013년 템파베이 팀이 많은 외야 유망주를 보강하며 오히려 마이너리그에서 한 단계 내려가며 시작하는 굴욕도 겪었다.(물론 금방 다시 승격) 메이저리그 팀에서는 특별한 재능이나 특징이 없어서인지 관심 밖이었고, 2013시즌 종료 후 마이너리그에서 6년을 보냈기에 FA 자격을 갖춰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마이너 계약을 맺었다. 스프링캠프는 AAA에서 보냈지만 결국 더블A에서 승격을 노리게 되었다. 2015시즌 애틀랜타로 다시 이적했으나 2016 스프링캠프 직후인 4월 1일 방출되었다. 이후 현재 미국 독립리그에 있다.
한화 이글스, 뉴욕 메츠, 오릭스 버팔로스 등, 현 시드니 블루삭스 좌완투수. 1969년생.
2001년부터 2004년까지 일본 오릭스 버팔로스에서 활약하다 미국 진출을 타진했었다. 처음에는 뉴욕 양키스에 입단한다는 얘기도 나왔지만 2005년 1월 9일 결국 뉴욕 메츠와 계약했다. 메츠에 있을 당시 랜디 존슨을 상대로 2루타를 친 것은 전설의 레전드급 일화. 하지만 이 때문에 부상을 얻어 1년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에서 은퇴한 후 새로 생긴 호주리그에서 마무리 투수로 2년 활동 후 2012-13시즌에는 중간계투로, 13-14시즌엔 12-13시즌에 마무리를 보던 선수가 팀을 옮김에 따라 다시금 마무리로 자리 잡았다. 시드니 블루삭스 최고의 스타 중 하나로, 세이브왕 3회, 최고구원투수 상 2회에 빛나는 뛰어난 활약을 보이고 있다. 2015년에는 재활로 인해 등판하지 못했고 로스터에서도 제외되어 있으나, 은퇴는 아니고 어깨 재활로 인해 1년 쉬고 복귀할 예정이라고 한다.
  • 강인균
전 미네소타 트윈스 내야수. 1989년생.
배명고 재학 시절 파워히터로서 재능이 있다고 평가받았다. 고교 재학 중 미네소타 트윈스와 계약, 미국으로 진출했지만 2년만에 방출되었다. 2012년에는 사회인야구 1부리그에서 활동했다.
KIA 타이거즈 스카우트. 1979년생.
동산고 재학 시절부터 포수 유망주로 유명했다. 인하대 재학 시절인 1999년 11월에 시카고 컵스와 계약했다가 무릎부상으로 2005년 퇴단했다. 이후 국내로 돌아와 해설자로서 활동하다가 다시 야구선수로서 복귀를 꿈꾸며 국내팀 입단을 타진했다. 그러나 1997 신인지명 때 현대 유니콘스에 고졸우선지명된 지명권은 해외진출로 소멸되었고 또한 불과 몇 개월 차로 국내 복귀 2년간 입단 금지 조항에 걸리며, 그 때문에 법정 절차를 거치는 등 순탄치 않은 과정을 거쳐 겨우 2007 신인지명에 참가했다. KIA 타이거즈에 2차 5라운드로 지명되었지만 결국 무릎부상 때문에 그 다음해에 은퇴했다. 은퇴한 후로는 KIA에서 스카우트로 일하고 있다. 스카우트로서의 평판은 그다지 좋지 않은 편.
  • 김병일
피츠버그 파이리츠 우완투수. 1976년생.
동국대 재학 시절에 손꼽히던 대어 투수였으나, 1999년 9월에 피츠버그 파이리츠와 계약했다. 이후 몇 년만에 은퇴했다.
LG 트윈스 우완투수. 현 MBC 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 1977년생.
고려대 재학 시절인 1997년 11월 보스턴 레드삭스와 계약. 1996 신인지명 때 OB 베어스의 고졸우선지명을 받아, 이후 OB를 계승한 두산에도 지명권이 유효해 별다른 절차 없이 국내에 복귀했다. 2013시즌 종료 후 구단의 코치 연수 제의를 거절하고 합의하에 방출되었으며 LG로 이적했다. 2014년 11월 17일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후 MBC 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이 되었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산하 루키리그 포수. 1993년 생.
대형포수감으로 2011 신인지명에서도 상위권 지명이 가능했지만, 야탑고 재학 중인 2011년 3월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와 계약을 맺었다. 2012년 볼티모어와의 부정계약으로 물의를 빚은 김성민과는 동명이인이다. 루키리그에서 2012년 12경기, 2013년 10경기 출전에 그쳤고 2014년에도 일단 루키리그에서 시즌을 시작했다. 이전 두 시즌과는 달리 4할대 타율과 20경기도 안되어서 홈런 3개를 치는 등 타격에서 이미 루키 수준을 한참 지나친 것으로 보여져 바로 싱글A 진입. 그러나 2014년 쇼트싱글A에서의 성적은 그리 좋지 못했다.(타율 0.192, OPS 0.576) 2015시즌에는 초반에 무난한 출발을 보였지만 시즌이 끝나가는 시점에서 타율이 0.204로 떨어지면서 루키리그로 강등되었다. 성적이 나아지지 않는다면 상위 레벨로 올라가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였고 결국 2015년 12월 29일 방출되었다.
한화 이글스 우완투수. 1980년생.
2001년 3월 6일 대학 동기인 이승학과 함께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계약했다. 부상으로 2003년 방출되어 한국으로 돌아왔다. 1998 신인지명 때 삼성 라이온즈에 고졸우선지명을 받았지만, 해외진출로 소멸되었다. 국내 복귀 후 2년이 지나고 신인지명에 참가했지만 부상 경력으로 부르는 팀이 없었고 결국 2007년 롯데 자이언츠에 신고선수로 입단했다. 2012년 시즌 후 롯데에서 방출당했다. 그 후 한화 이글스에 입단하였으나 여기에서도 별 활약을 보이지 못하고 시즌 종료 후 방출되었다. 2016년 현재 마산고등학교 야구부 코치.
  • 김재영
보스턴 레드삭스 투수. 1979년생.
중앙고에 재학 중이던 1997년 10월 6일 보스턴 레드삭스와 계약했다. 1999년 4월에 방출되었으며 2000년 대불대(현 세한대)에 진학해 졸업할 때까지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한화 이글스 우완투수. 1973년생.
1994년 1월 LA 다저스와 계약. 원래는 1999년 전에 진출한데다 신인지명의 절차를 거치지 않아 국내 복귀시 신인지명 절차를 받아야 했지만, 2011년 말 국내 복귀를 하며 다른 구단의 양해를 얻어 별다른 문제 없이 연고팀이라 할 수 있는 한화에 입단했다.[14] 메이저리그 통산 124승 등의 기록을 세웠다. 명예의 전당 후보에 한국인 최초로 오름. 2012년 시즌 후 은퇴를 선언했다. 미국 124승 일본 1승 한국 5승 통산 130승 기록.
OB 베어스 투수. 1954년생.
연세대 중퇴 후(재학 중 성무(공군) 야구단에서 군 복무를 했다.) 밀워키 브루어스에 입단, 2년간 활동하며 더블 A까지 승격되었다. 1982년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하면서 귀국했다.
오릭스 버팔로스 우완투수. 1980년생.
참고로 백차승 등의 미국 진출 후 무분별한 유망주들의 해외진출을 막기 위해 해외 진출 선수가 국내 복귀시 "최종 소속 팀과의 계약이 완전히 종료된 시점으로부터 2년 이내에 복귀할 수 없음"이 규정화되었다.[16] 2년간 독립리그에서 활동하다가 2012시즌 일본 오릭스와 계약했다. 2군에서도 성적이 좋지 않아 시즌 후 방출되었으며 이후 이렇다 할 소식이 없다가 2015년 2월 4일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의 입단 테스트에 참가한다는 소식이 알려졌으나 결국 테스트에서 탈락했다. 이후 7월에 치바 롯데 마린즈 2군에 합류했으나 1군 등판 기회를 얻지 못했으며 시즌 후 팀을 나와 한신 타이거스의 테스트를 받았으나 탈락했다. 법적으로 KBO 리그에서 뛰는데에는 문제가 없으나(그가 받았다가 풀린 징계는 대한야구협회에서 내린 것으로 KBO와는 무관하다.) 2016년 현재 미국 시민권자이기에 외국인 선수 자격으로만 입단이 가능한 상황인데다 병역법 위반 문제(국적 때문에 법적인 처벌은 못 하지만)가 걸려 있는 터라 한국에서 더는 볼 일은 없을 듯 하다.
뉴욕 메츠, 템파베이 레이스, 기아 타이거즈 우완투수. 현 SBS Sports 해설위원. 1977년생.
인하대 중퇴 후 미국으로 건너가 메이저리거로 활약하였다. 해당 항목 참조. 국내 복귀 이후에는 기아 타이거즈에서도 좋은 기록을 쌓았으며 미-한 통산 1350이닝 70승을 기록하였다. 2016년 스프링캠프 도중 은퇴했으며 SBS Sports의 야구 해설위원이 되었다.
  • 서재환
뉴욕 메츠 외야수. 1975년생.
서재응의 친형. 서재응과 같이 1997년 11월 뉴욕 메츠에 입단했다. 1998 신인지명 때 연고팀인 해태 타이거즈에 2차 10라운드로 지명될 정도로 그리 실력 있는 선수는 아니었고, 사실상 동생 덕에 미국 땅을 밟은 택이었다. 입단한지 1년 만에 은퇴했다. 이후 서울고등학교 야구부 코치로 일했다고 한다.
  • 서정민
롯데 자이언츠, 보스턴 레드삭스 투수. 1974년생.
경남고 시절 팀의 에이스로 활약했으며, 1993년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해 롯데에서 활약하다 방출되자 보스턴 레드삭스에 입단했다. 1년만에 퇴단, 은퇴했다.
LG 트윈스 투수, 현 넥센 히어로즈 투수코치. 1973년생.
2004년 두산 베어스에서 은퇴하고 다시 야구를 하고 싶다며 2006년 11월 1일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마이너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부상으로 1년만에 다시 은퇴를 선언했다.
  • 심현석(Eric Sim)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산하 우완투수. 1989년생.
미국에서 대학교를 나와 드래프트로 지명된 강경덕 선수와 유사한 경우. 원래 포수였던 그는 2013년 하이싱글A와 미들싱글A 사이를 움직이다가 2014년 잠시 더블A 팀에 등록되었다가 미들싱글A로 내려왔다. 트리플A까지 잠시 올라간 적은 있으나,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타격은 2할대 초반의 타율과 장타력 부재를 보여주지만 좋은 수비로 팀 내에 자리잡았었다. 2014년 시즌 말미에 투수로 2차례 등판 후 정식으로 투수 전향을 위한 훈련을 시작했다. 2015시즌은 쇼트싱글A에서 보냈으나 시즌 종료 후 방출되었다. 현재 독립리그 투수로 뛰고 있다.
  • 안병학
시카고 화이트삭스, 롯데 자이언츠 투수. 1980년생.
원광대 재학 시절인 2001년 1월 보스턴 레드삭스와 계약했다. 이후 시카고 화이트삭스로 이적한 후 2004년 방출되었다. 부천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99 신인지명 때 해태 타이거즈에 2차 4라운드로 지명받았지만 원광대학교로 진학했으며, 이 지명권은 해외진출로 소멸되었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에 복귀한 후 2년이 지나고나서 신인지명에 참가했지만 지명받지 못했고 2008년 롯데 자이언츠에 신고선수로 입단했다. 하지만 재기에 실패하고 2008년 4월 신고선수 계약이 해지되어 롯데 자이언츠에서 방출당했다.
  • 엄종수
한화 이글스 포수. 1973년생.
1998년까지 한화 이글스에서 활동하다 방출된 후, 사이버대에서 코치로 활동하다 미국 진출을 꾀한 특이한 케이스. 2001년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와 계약했지만 1년만에 방출, 은퇴했다.
  • 오철희
보스턴 레드삭스 외야수. 1981년생.
진흥고 재학 시절인 1999년 보스턴 레드삭스와 계약했다. 이미 고교 시절부터 큰 체격에 파워히터로 알려진 유망주였으나, 미국 진출 1년만에 적응하지 못하고 국내로 복귀했다. 이후 몇 차례 신인지명에 지명을 받으려 타진했으나 모두 실패로 끝났다.
  • 유병목(유선우로 개명)
두산 베어스 우완투수. 현 MBC 스포츠플러스 MLB 담당 해설위원. 1979년생.
2001년 두산에서 방출되고 보스턴 레드삭스에 입단했다. 의외로 하이싱글A까지 초고속으로 올라갔으나 이내 한계를 드러내며 싱글A, 쇼트싱글A로 떨어졌고 결국 방출되었다. 귀국 후 야구교실을 열다가 2015년 MBC 스포츠플러스의 메이저리그 담당 해설위원으로 합류했다.
LG 트윈스 좌완투수. 현 LG 트윈스 코치. 1971년생.
주니치에서 계약이 끝날 무렵인 1999년 12월 24일 보스턴 레드삭스와 계약했다. 2년간 활동하고 다시 LG 트윈스로 복귀했다. 사실 1997년 말에도 미국 진출을 꾀했으나, 당시 LG 프런트에서 현재의 타 리그 선수가 MLB에 진출할 때에 적용되는 포스팅 시스템이 아닌 트레이드 방식으로 진출시키려다 메이저리그 타 구단이 그에 대해 반발하고 MLB 사무국도 포스팅 시스템이 아닌 진출 방식에 대해 거부해 LG 프런트는 망신살만 샀다. 다시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공개입찰을 받았지만 이번엔 보스턴이 태도를 돌변해 싼값을 부르며 결국 이상훈은 메이저리그 대신 일본 주니치를 선택했다. 항목 참조.
두산 베어스 우완투수. 현 kt wiz 코치. 1979년생.
2001년 3월 6일 대학 동기인 김일엽과 함께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계약했다. 2006년 퇴단해 국내에 복귀했다. 1998 신인지명 때 롯데 자이언츠에 고졸우선지명을 받았지만, 해외진출로 소멸되었다. 2007 해외파 특별 드래프트 때 두산 베어스에 지명되었다. 애초에 두산보다 순번이 빨랐던 롯데는 같은 연고 출신인 송승준과 이승학 사이에서 고민했었다. 이승학은 군 면제에 보다 즉전감인 반면 부상경력이 있었고, 송승준은 보다 젊었지만 군 문제가 걸려 있었다.[17] 결국 롯데는 송승준을 선택했고 두산은 남은김병현, 이승학, 채태인 중 당시로선 그나마 제일 쓸만했던 이승학을 뽑았다. 2009년 부상으로 방출, 은퇴했다. 2014년 신생팀 kt wiz와 계약했다는 기사가 뜨기도 했으나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2014시즌 종료 후 상무 피닉스 야구단 투수 코치가 됐으며 2015시즌 종료 후 kt의 3군(빅또리) 투수코치로 이동했다.
  • 이시몬
시카고 컵스 우완투수. 1983년생.
2002 신인지명 때 LG에 2차 3라운드에 지명되었지만 인하대에 진학했다. 대학에서는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해 지명권이 풀렸고 2006년 12월 뜬금없는 시카고 컵스 행을 발표했다. 입단한지 2년만에 은퇴했다. 90마일 이상을 던질 수 있으나 소위 말하는 새가슴으로 인해 좋은 공을 못 던졌던 것이 원인이라고 본인이 인터뷰에서 밝혔다. 미국에서 사회인야구를 하다가 2012년 고양 원더스 트라이아웃에도 참여했으나 탈락했다.
  • 이원국
전 멕시코리그 우완투수. 1949년생.
고교 졸업 후 1966년 도쿄 오리온즈에 입단, 백인천에 이어 두 번째로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한 한국선수가 되었다. 그러나 일본 선수들의 견제로 2년만에 귀국했다. 그리고 1968년 초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몬트리올 엑스포스,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등의 마이너 팀을 전전하며 트리플 A까지 승격되기도 했으나 끝내 메이저리그에 오르지 못했다. 결국 1972년 중순에는 멕시코로 가서 멕시칸리그에서(당시 AAA수준) 사비나스 파이레츠, 포사리카 등의 팀에서 11년간 활약하며 최우수선수상, 철완투수상을 수상하며 멕시코리그 최고의 투수로 이름을 날렸다. 기록은 <한국야구사>와 멕시코 명예의 전당 홈페이지에 차이가 있는데 전자는 통산 150승 85패, 후자는 149승 128패 1126탈삼진 154완투 33완봉 통산방어율2.81(멕시칸리그 역대 6위기록)이라고 한다. 어느쪽이나 어마어마한 기록. 1979년에는 무려 270이닝(270이닝 이상 던진 투수는 1970년대 마이너리그에 여섯명 뿐이란다.) 19승14패 방어율 2.53을 기록하기도. 윈터리그인 멕시칸퍼시픽리그에서는 통산 16승 23패 방어율 2.97 161탈삼진을 기록했다. 본래 미국에 가정을 꾸렸으나. 1983년 MBC 청룡의 요청으로 한국으로 귀국했다. 그러나 기후 부적응, 김동엽 감독과의 불화 등으로 1년만에 미국으로 돌아갔다. 한때는 사비나스의 단장으로 2년간 근무하다가 현재는 건축사업가로 일하고 있다고 한다. 멕시칸리그 명예의 전당 후보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롯데 자이언츠 우완투수. 1986년생.
개명 전 이름은 이준휘로 2005년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했었다. 2008년 방출된 후 2009년 5월 LA 다저스와 마이너 계약을 맺었다. 2011년 말 귀국해 다시 롯데에 입단했다. 2012년 시즌 후에 신고선수로 신분 변동되었다가 정식 선수로 복귀. 2013년 드디어 1군 무대에서 어느 정도 이름을 보였지만 2014시즌부터는 1군 마운드에 서지 못하고 있다. 2016년 9월 4일 경찰 야구단에서 전역한 전준우, 김사훈, 신본기의 등록을 위해 웨이버 공시되었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산하 트리플A 유격수. 1990년생.
충암고 재학 중인 2008년 4월 17일 시카고 컵스와 계약했다. 2011년 맷 가르자 트레이드 당시 탬파베이로 트레이드되었다. 많은 유망주 평가에서 상위권에 랭크되기도 했다. 이학주에게 있어 최대의 장점은 수비능력인데 이미 탈 아시아급의 메이저리그 상위권 수비를 보여준다고 평가할 정도이다. 2012년 룰5 드래프트를 앞두고 40인 로스터에 포함되었다. 2013년 4월 상당한 타격실력을 선보였으나 경기 중 전/후방십자인대 파열 부상으로 시즌아웃되면서 커리어가 꼬이기 시작했다. 재활은 성공적인 편으로 2014년 초에도 팀내에서 기대받는 유망주였으나, 이후 타격이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으며 4년의 옵션이 지난 이후 지명할당 처리되었다. 시즌 종료 후 마이너리그 FA가 되었고 샌프란시스코로 옮겼다. 이 과정에서 에이전트와 손발이 맞지 않았는지 일본 진출설까지 흘렸으나 트리플A에서 도전을 계속 이어가게 됐다. 그러나 샌프란시스코의 유격수(브랜든 크로포드)와 2루수(조 패닉) 자리가 워낙 굳건한 데다 백업진까지 갖추어진 팀으로 이학주는 보험용 마이너리그 선수일 뿐. AAA에서 유격수로 줄곧 기용되고 있으나 콜업하려는 시도는 없었다. 결국 6울 3일(현지시간 6월 2일) 옵트아웃을 행사했는데 72시간 내에 샌프란시스코가 액티브 로스터에 넣지 않으면서 자유계약 신분을 얻었다. 이제는 메이저리그 도전을 지속하거나 일본/한국리그로 가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포지션이나 선수 특성 상 미국에서 백업으로 남을 수 있다면 가장 좋을 것이다. 일본리그에서 뛰기에는 파워가 부족하며 그를 필요로 하는 팀이 현실적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18] 한국 복귀 시 계약 관계 종료 후 2년이 지나야 응할 수 있는데다가 병역 문제로 인해 30대에나 선수생활을 하게 된다는 문제가 있다. 최대한 빨리 복귀하려면 7월 27일 이전에 결정을 내려야 한다.[19] 결국 귀국을 결정했다.
KIA 타이거즈 사이드암 투수, 1977년생
해태-삼성-야쿠르트-컵스를 거쳐 2014년 국내복귀. 기나긴 커리어는 해당 항목을 참조. 대한민국 14번째 메이저리거. 불명예스럽게 은퇴... 하는가 싶었는데 KIA 타이거즈와 계약했다. 2016년 말 KBO 복귀.
  • 장재형
미네소타 트윈스 포수. 1986년생.
2007년 8월 미네소타 트윈스와 계약 사실이 알려졌다. 2010년 방출되었다.
  • 정석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우완투수. 1973년생.
1997년 12월 LA 다저스와 계약했다. 2년만에 퇴단, 은퇴했다. 현재는 사업가로서 활동 중이다.
NC 다이노스 사이드암 투수. 1979년생.
동의대 졸업 후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에 입단, 애틀란타 산하 마이너팀에서 활동하며 메이저 콜업을 기다렸으나, 매번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고배만 마시다 결국 2009년 방출되었다. 그리하여 국내 복귀를 꾀했지만 국내 복귀 후 2년 동안 입단 금지 조항이 걸린데다 나이가 많아 지명받지 못했다. 2011년에는 일본 진출도 타진했지만 실패했고, NC 다이노스에 트라이아웃에 합격했다.
여담으로 한때 병역비리에도 연루되어 구속된 뒤 국내로 돌아와 현역으로 복무한 후 다시 애틀란타에 입단했다. 꿈을 포기하지 않고 다시 도전한 그 열정도 대단하지만, 또 그런 선수를 다시 받아준 애틀란타 구단도 대인배. 2012년 퓨처스 리그에서 셋업맨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2013년 들어 시즌을 앞두고 실시한 해외 전훈에서 제외되었고 시범경기에서도 부진을 보였다. 이후 줄곧 2군에 머물다가 8월 7일 LG 트윈스와의 경기에서 뒤늦게 1군 데뷔전을 치렀다. 그러나 2014년 들어서는 계속 2군에 머물면서 상당히 부진한 성적을 보이고 있으며 그나마 5월 9일 이후로는 등판 기록이 없고 별다른 소식이 없어서 사실상 전력 외 판정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시즌 종료 후 결국 방출되었으며 이후 울산공고 야구부 코치가 됐다. 2016년에는 다시 덕수고등학교로 이적.
  • 정영진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내야수. 1977년생.
1999년 말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 계약했지만 1년만에 방출, 은퇴했다.
보스턴 레드삭스, SK 와이번스, 삼성 라이온즈 투수. 현 삼성 라이온즈 코치. 1975년생.
1998년 3월 보스턴 레드삭스와 계약. 1998 신인지명 때 쌍방울 레이더스에 1차지명을 받아 2002년 보스턴에서 방출되고 지명권을 계승한 SK 와이번스에 입단했으나 2004년 병역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된 뒤 방출되었다. 공익요원으로 복무를 마치고 2008년 삼성에 입단해 두 시즌을 더 뛰고 은퇴했다. 은퇴 후 성남고를 거쳐 대전고에서 코치를 하다가 2014년 삼성의 코치가 되었다.
NC 다이노스 코치. 1972년생.
1995 신인지명 때 LG 트윈스에 2차 5라운드로 지명되지만, 1994년 10월 5일 캘리포니아 에인절스와 계약하며 한국인 타자 중 처음으로 미국행을 선택했다. 하지만 끝내 메이저리그를 밟지 못하고 멕시코리그까지 강등되자 국내로 복귀하였다. 2000년 LG 트윈스의 1차지명을 받으나 2년 만에 방출되었고, 2002년부터 2006년까지는 두산 베어스에서 주전 외야수로 나름 쏠쏠한 활약을 했다. 이후 롯데 자이언츠를 거쳐 2008년 KIA 타이거즈로 이적하였다. 팬들이 기억하는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2009년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 3루타를 치고 어퍼컷 세레모니를 하는 순간. 2009년 우승 후 은퇴를 하였고, 이후 KIA 타이거즈의 코치를 시작으로 지도자로서 활동 중이다.
  • 최은철(Eunchul Choi)
볼티모어 오리올스 루키리그. 1983년생.
여타 선수들과 달리 아마야구 경험이라곤 대구상고(現 상원고) 시절에 2개월간 야구부 활동이 전부. 이후 2007년부터 미 독립리그, 멕시칸리그에서 활동했다. 한때 국내팀 입단도 타진했으나 모두 실패했고, 2011년 말 정대현의 통역으로 미국 진출을 돕다 정작 본인만 볼티모어와 계약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전 출전은 없었으며 2012년 스프링캠프 직후 은퇴. 루키리그 코치 및 극동담당 스카우터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위의 윤정현 투수의 볼티모어 영입으로 스카우터 경력을 시작. 2015년에 인천에서 야구관련 사업을 시작했다. 이름은 Choi's Elite Baseball Group으로 야구 교육, 재활, 체력센터 등을 운영중이다.
  • 최창양
삼성 라이온즈 우완투수. 1973년생.
중앙대학교를 중퇴한 후 1994년 12월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계약했다. 하지만 진출한지 1년 만에 트레이드로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했다. 이 때문에 유망주 빼돌리기[21] 등의 뒷말이 많았으며, 결국 신인지명 절차 없이 해외에 진출한 선수는 복귀시 신인지명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조약이 신설되었다. 그럼에도 미국행 러시를 이루자 2년 유예 규정이 추가된다. 1996년 4월 21에 롯데 자이언츠를 상대로 2실점 완투승을 기록하였고 이어 26일에 한화 이글스를 상대로 완봉승을 기록하여 팬들의 기대를 모았지만 이후 큰 활약을 하지 못하고 2000년 은퇴했다.
기아 타이거즈 우완투수. 1971년생.
2005년 11월 24일 클리블랜드와 계약했다. 이전에 프로에서 활동하다 MLB로 진출한 이상훈, 구대성이 있었지만 이들은 KBO가 아닌 NPB에서 활동하고 간 것이라, 순수 KBO 출신 중 미국 진출을 한 건 최향남이 최초. 하지만 메이저리그 승격 조건을 두고 팀과의 협상이 결렬되어 1년만에 한국으로 복귀했다. 2008 시즌 중 다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계약했지만 별다른 활약 없이 방출, 이후 LA 다저스에 입단했지만 역시 방출되었다. 일본 독립리그까지 갔다가 다시 롯데로 복귀했다. 2012년-2013년 기아 타이거즈에서 뛴 후 다시 메이저리그 진출을 노렸으나 어디에서도 오퍼가 들어오지 않자 단념하고 고양 원더스로 옮겼다. 고양 원더스가 2014년을 끝으로 해체함에 따라 사실상 은퇴할 것으로 보였으나, 2015년 3월 오스트리아 리그 비너노이슈타트 다이빙 덕스에 입단했다. 오스트리아 리그 생활을 1년만에 끝내고 글로벌선진학교 야구부 코치로 합류했다가 전임 김혁섭 감독이 사임하면서 감독이 되었다.
  • 최현욱
전 미네소타 트윈스 외야수. 1989년생.
2007년 8월 고교 동기인 최형록과 미네소타 트윈스와 계약했다. 국내 스카우트들은 둘의 계약이 의외라는 반응. 신인지명에 참가했으면 하위 라운드 지명이나 아예 미지명될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했었다. 2010년 방출되었다. 군 복무를 마친 후 코치활동 중이며 2016년 8월 2일 실시한 트라이아웃에 참가했으나 지명을 받지 못했다.
두산 베어스 내야수. 1989년생.
2007년 8월 고교 동기인 최현욱과 함께 미네소타 트윈스와 계약했다. 김상수, 안치홍, 오지환, 이학주, 허경민 등 드래프트 동기들 중 내야수 인재가 많아 프로입성이 여의치 않자 미국으로 간 케이스. 최형록의 경우 최현욱보다 미네소타 팀내 평가는 좀 더 나았다. 2011년 시즌 중 방출. 2014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8라운드로 두산에 지명되었다. 그러나 1군에 올라오지 못한 채 2015시즌 종료 후 선수단에서 제외되었다.
KIA 타이거즈 1루수. 현 MBC 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 1979년생.
고려대 재학 시절인 1999년 시카고 컵스와 계약. 1998 신인지명 때 해태 타이거즈에 1차지명을 받았지만, 2007 해외선수특별지명으로 인해 소멸되었다. 2007 해외선수특별지명 때 KIA 타이거즈에 지명되어 국내에 복귀할 때도 KIA에 복귀했다. 2015시즌을 끝으로 은퇴해 MBC 스포츠플러스에서 메이저리그 중계 해설을 맡고 있다.

3.5.2 일본 진출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우완투수. 1985년생.
고교 때 일본으로 유학간 케이스로, 일본에서 대학까지 졸업하고 독립리그에서 활동하다가 2008년 신인지명 때 소프트뱅크에 6순위로 지명되었다. 아래의 신성현과 한국인 최초로 일본 프로야구단에 지명된 선수가 되었다. 오랜 독립리그와 2군리그 생활 끝에 2012년에 첫승을 기록하고 중계 투수로서 상당히 자리 잡은 모습을 보여 줬는데(데뷔는 2009년) 일본에서 처음 선수를 시작한데다 주목도가 떨어지는 추격조(패전조) 역할이라 한국에 쉽게 알려지지는 못하였으나 이승엽, 이대호와 상대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2014년 이대호와 같은 팀인 만큼 좋은 활약을 보여준다면 더욱 지명도를 높일 수 있을 것으로 보였지만 4월 30일 등판을 마지막으로 2군으로 내려갔으며 7월 중순에야 1군으로 복귀했다. 적지 않은 나이에 군 미필이어서 2014년 아시안게임 대표팀에 선발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으나 예비 엔트리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2015시즌 전 팔꿈치 수술을 받은 후 이후 계속 2군에 머물렀으며 2군 리그에서 17경기에 등판해 1패, 평균자책 5.68(19이닝 13실점 12자책), 5피사사구 16탈삼진의 부진한 성적을 남긴 채 2015년 10월 4일 방출되었다. 이후 라쿠텐의 마무리 캠프에 합류해 테스트를 받고 다시 기회를 얻게 됐다. 개막전 엔트리에는 들지 못하고 2군에서 출발했다가 1주 지나서 1군으로 올라왔으나 단 2경기 등판에 그친 채 다시 2군으로 내려갔고 2군에서도 부진한 성적에 등판 간격이 길어지는 등 자리를 잡지 못한 끝에 2016년 10월 1일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았다.
  • 김시철
재일교포 출신이지만 국내에서 중고등학교(배문중-배문고)를 졸업한 특이한 케이스(정확하게는 NPB 진출을 염두에 두고 고3 때 일본 하카타고로 전학). 1977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했으나 부상으로 인해 1군에 얼굴도 못 내밀고 방출되었고, 이후 포항제철에 입단해 재활에 매달리다가 1982년 MBC 청룡의 창단 멤버로 합류했으나 단 1승만을 남긴 채 시즌이 끝난 뒤 방출되었다. 통명은 이시카와(石川).
  • 박봉수
재일교포 3세. 위의 김시철처럼 국내에서 고등학교(휘문고)를 졸업하고 고려대에 진학했으나 어른의 사정으로 자퇴한 뒤 일본으로 귀화, 1998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주니치 드래곤즈의 지명을 받았으나 1군에 한번도 올라오지 못한 채 2000년 방출되었다. 이 후 삼성 라이온즈 신고선수로 입단했으나, 여기서도 통산 7타수 무안타라는 흑역사만을 남긴 채 2002년 방출되었다. 통명은 아라이 타카히데(新井奉秀).
전 SBS 스포츠 NPB 전담 해설위원. 1943년생.
고교 졸업 후 실업야구단인 농협에서 활동하다 1962년 도에이 플라이어즈에 입단해 20년간 일본에서 활동했고 명구회 입성을 앞뒀음에도, 1982년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하면서 MBC 청룡의 창단감독 겸 선수로 한국에 귀국했다.
KIA 타이거즈 감독. 1963년생.
1996년 임대형식으로 일본에 진출, 주니치에 입단해 마무리투수로 4년간 활약하고 은퇴했다.
  • 송상훈
주니치 드래곤즈 코너외야수/코너내야수. 1993년생.
중학교 졸업 후 일본 고교로 진학해 2년간 유학을 했다. 팀의 4번타자 겸 에이스로 팀의 지역대회 우승이나 준우승을 여러번 이끌어 현 대표로도 뽑혔을 정도. 3학년 때 귀국해 신일고로 편입했다. 2012 신인지명 때 LG 트윈스에 지명되었으나 LG 입단 의사가 없어 LG에서는 교섭권을 포기, 그리고 같은 해 열린 일본 신인지명에서 주니치에 6순위로 지명되었다. LG에는 외야수로 지명되었으나 주니치에서는 투수로 활동한다고. 2012시즌이 끝난 뒤 기존 계약이 해지되고 육성선수(한국프로야구에서는 2014년까지 이에 해당하는 용어로 신고선수라는 말을 썼다.)로 신분이 바뀌었으며 다시 타자로 돌아왔다. 2014년 10월 1일에 전력외 통보를 받았다는 보도가 나왔으며 11월 말에 공식적으로 구단 홈페이지에서 삭제되었다. 2016년 8월 2일 실시한 트라이아웃에 참가했으나 8월 22일 시행한 드래프트에서는 지명을 받지 못했다. 나이를 감안하면 육성선수 정도는 가능할듯.
한화 이글스 주루코치, 현 MBC SPORTS+ 해설위원. 1970년생.
1997 시즌 후 임대형식으로 일본 주니치 드래곤즈에 입단. 3년간 활동하고 국내에 복귀했다.
한화 이글스 투수코치. 현 MBC SPORTS+ 해설위원. 1972년생.
2000년 최초로 FA로 일본에 진출, 요미우리에 입단했다. 팔꿈치 부상으로 2년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화 이글스 투수코치. 1970년생.
2001년 FA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했지만 2년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두산 베어스 투수코치. 1973년생.
대학 졸업 후 일본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했다. 7년간 활약하고 2002년 부상으로 은퇴했다. 방송인과 해설가로 활동하다가 선수 복귀를 선언, 2005년 한화 이글스에 입단했다. 3년간 계투로 활동하다 은퇴했다. 안타깝게도 2013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참고로 조성민은 이전에 신인드래프트에 참가하지 않은 채 일본에 진출했기 때문에 2004년에 있었던 2005 신인지명에 참가했다. 그러나 지명받지 못해 신고선수로 한화에 입단했다[22].

3.5.3 대만 진출

빙그레 이글스, 삼성 라이온즈 투수. 1962년생.
1994~5 시즌에 한국인 처음으로 대만프로야구 쥔궈 베어스에서 뛰었다. 항목 참조.
  • 이외에도 총 15명의 선수가 진출했으며 그 이름은 다음과 같다.
윤경희(전 한화, 윤경영으로 개명), 김동호(전 해태, LG), 김형균(전 OB), 감병훈(전 삼성), 박인구(전 삼성), 김종국(전 삼성), 유병선, 이준[23](전 삼성), 최동진(전 현대), 김경태(현 SK 재활코치), 김제빈(전 롯데), 김덕칠(김도윤으로 개명, 2년간 13승 기록하며 그나마 활약한 케이스).

이들 중 감병훈, 김종국은 삼성 소속 시절인 1994년 경험을 쌓기 위해 파견되었다. 당시 대만팀 진궈 베어스(현 신농 불스)와 자매결연을 맺었기에 가능했던 일. 애초 한희민의 진출도 자매결연 맺은 후 진궈팀 사장의 요청으로 이뤄졌다.

팀 이름이 적혀있지 않은 선수는 미지명 또는 실업야구에서 뛰던 선수들이다. 대부분 좋은 성적을 기록하지 못했다. 자세한 정보는 http://chinesebaseballstory.tistory.com/447 를 참고할 것.

  1. 여담으로 박봉수는 고교 시절에도 쌍방울 레이더스에 지명을 받았기에 역대 최초로 한일 양국 신인지명에 지명된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2. 2012년 LG 트윈스에서도 지명을 받은 적이 있다.역대 2번째로 한일 양국 신인지명에 지명된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팀도 똑같네 그러나 후술하는 것처럼 1군 출전 기회를 잡지 못한 채 방출되었다.
  3. 이 때 2군에 가 있는 이범호의 빈 자리를 메웠던 선수가 로베르토 페타지니였다.
  4. 2,573만 7,737달러 33센트
  5. 엄밀히 말하면 외할머니만 한국인인 쿼터 코리안이다.
  6. 아버지는 미국인, 어머니는 한국인.
  7. 히어로즈는 현대 유니콘스를 계승하는 팀이 아니라 새로 창단된 팀으로 당시 이 김병현의 지명권 계승 때문에 논란이 되었다. 하지만 KBO가 다 그렇지 뭐
  8. 그러나 쌍방울과는 별도임을 표방했던 SK가 쌍방울이 지명했다가 대학으로 진학했던 선수들(정대현, 박정권 등)의 지명권을 그대로 가져간 사례가 있었기에...
  9. 당초 아시아 청소년대회에 참가하는 청소년대표팀에 들어 있었으나 이 계약으로 인해 대표팀에서 제외되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메이저리그 팀과 계약한 선수들은 예외없이 청소년대표에서 탈락시키고 있다.
  10. 비슷한 경우로 추신수의 미국 진출 당시 부산고 동기인 정근우가 신인 2차지명 때 보복성으로 지명을 받지 못했다는 설이 있었지만 정근우는 작은 체구 때문에 발전 가능성을 낮게 봤던 게 미지명 사유였다.
  11. 다시 말해 캔자스시티 구단에 여전히 묶여 있다는 뜻이다. 야구규약에는 분명히 최종 소속 팀과의 계약 관계가 완전히 종료된 시점부터 2년이 지난 뒤에 복귀가 가능하다고 명시되어 있다.
  12. 다만 신인 드래프트를 거쳐야만 하기에 근 1년을 더 쉬어야 했지만 그걸 좀 더 앞당긴 셈이 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고교 대선배인 김응용 당시 삼성 라이온즈 사장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13. 탬파베이 레이스는 유망주가 잘 한다고 바로 올리지 않고, 마이너리그 단계를 차근차근 밟게 해 실력을 확실하게 다지도록 하고 메이저로 부른다.
  14. 이는 신인 특별 지명 당시 한화만 유일하게 지명하지 못했던 것이 작용했다.
  15. 문서를 보면 나오지만 미국 시민권을 취득해 한국 출신 미국인이 되었다.
  16. 이 기간 중 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현역 일반병이나 사회복무요원으로만 복무가 가능하며 군팀인 상무와 경찰청 입대는 사실상 불가능하다.(위의 김선기의 경우처럼 입대 자체가 가능하기는 하지만 KBO가 퓨처스리그 출전을 공식적으로 막았기 때문에 사실상 불가능.) 2년 경과 후 복귀하는 선수는 반드시 KBO에서 주최하는 트라이아웃을 거쳐야 하며(다만 이 트라이아웃이 규약에 없는 임의 행사이고 선수들이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는데다가 일부 구단이 사전에 미리 접촉했다는 의혹을 받는 등 잡음이 일고 있다.) 1차 지명 대상에서 제외된다. 따라서 2차 지명에만 나설 수 있고 지명을 받고 입단하더라도 계약금을 받지 못하며 연봉도 신인 최저 연봉만 받는다.
  17. 사실 해외파 특별 드래프트을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 선수가 이승학이었다. 미국에서 더 이상 버티기 어렵게 되자 국내 복귀를 결심했지만 군 면제가 오히려 걸림돌이 되어 2년을 꼼짝없이 날릴 위기에 처했기 때문.
  18. 일본은 외국인 선수 보유가 무제한이어서(1군 등록은 4명까지 가능하며 투수 또는 타자 몰빵은 금지다.) 외국인 선수를 육성선수로 데려오거나 보험용으로 데려오는 경우가 많다.
  19. 야구 규약상 복귀 해외파, 외국학교 출신을 대상으로 한 2차지명 신청은 2차지명일 30일 전까지 받으며 2차지명이 8월 넷째 주 월요일로 관례화되어 있음을 봤을 때 2018년 2차지명은 8월 27일에 치르고 참가 신청은 7월 27일까지 받게 된다. 따라서 2016년 7월 27일 이전까지 국내 복귀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20. 2014시즌 도중 '정진'으로 개명.
  21. 게다가 그는 당시 롯데 연고였던 마산고등학교 출신이다.
  22. 신고선수로 입단하려해도 해당 연도 신인드래프트에 참가해야만 한다.
  23. 이해창의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