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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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의

패션 디자이너들이 의상을 만들어냈을 때 그것을 입고 사람들에게 맵시를 볼 수 있도록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뜻한다. 을 돋보이게 하는 게 본분이기 때문에 제대로 된 모델은 자기 자신이 튀는 게 아니라 의상이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걸 최우선으로 삼는다. 그래서 디자이너들 중에는 너무 예쁜 얼굴이나 육감적인 몸매의 모델은 시선을 분산시킨다고 기피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걸어다니는 옷걸이' 라는 농담도 있다.

영역에 따라서 쎄씨 같은 캐주얼 잡지화보 등 캐주얼 브랜드 쪽에서 활동하는 모델과, 소위 명품 브랜드를 광고하는 '하이패션 모델'이 구분 된다.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패션모델은 후자인 하이패션에서 활동하는 모델들이다.

캐주얼한 브랜드 쪽은 연예계 진출을 위한 중간다리 격으로 쓰여지는 경우도 좀 있는 편이고 카달로그나 화보 촬영은 해도 패션쇼는 안 하는 브랜드도 많아서, 아무래도 전문 모델이라는 이미지가 더 강하고 전문성이 필요한 하이패션 쪽이 더 높은 대우를 받는 듯. 사실 이게 직접적으로 구분된 것은 아니고 능력이나 모델 개인의 이미지에 따라서 영역이 달라지는 것이긴 하다. 베네통이나 지오다노 광고 찍었다고 샤넬 런웨이에 못 서는 건 아니다. 다만 후자를 위해 요구되는 능력이 더 많을 뿐.

자신이 입은 의상, 디자이너, 트렌드, 패션의 역사 등에 관해 모두 파악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상당한 노력과 프로 정신이 필요한 직업이다. 행여 제품 이미지에 누가 되지 않도록 피부톤, 자세, 골격, 걸음걸이 등 일반인들은 상상도 할 수 없이 세세한 곳까지 신경 쓰며 살아야 하는 데다가[1] 그 수명도 지극히 짧은 직업군. 그래서인지 모델들(특히 여성 모델들)은 일반인들에 비해 굉장히 일찍 결혼한다. 다 그런 건 아닌데 대다수의 모델들이 워낙 일찍 결혼하다보니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패션모델=일찍 결혼함이라는 인식이 박혀있다.

수명이 짧은 직업인 만큼 모델 활동 이후 진로도 다양한 편인데 크게 연예계 진출과 패션계 내 업종 변환 두가지로 나뉜다. 전자는 보통 배우로 전환해서 연예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는 것이고[2] 후자는 패션계 내에서 포토그래퍼나 디자이너로 이직해 가는 것이다. 후자 같은 경우 모델 활동을 하면서 디자인 스쿨에 다니거나 같이 일하는 포토그래퍼에게 도제식으로 배우는 등 아무래도 직접적으로 연관된 직종이다 보니 연예계 진출보다는 안정적인 듯하다.[3]

사실 패션계 외에서의 활동, 특히 연예계로의 성공적인 진출은 그다지 수월하지 않은 편. 연기력이나 가창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보니... 신디 크로퍼드클라우디아 시퍼도 배우로의 전향에 실패했다. 그레이스 존스 정도가 가수로의 전업에 성공한 정도.

단, 패션모델 출신이기는 하지만 얼굴이 덜 팔린 톱모델급은 아니어서 모델로서의 이미지가 굳어지지 않은 경우라면 배우로의 전업에 성공한 케이스는 종종 있다. 우마 서먼, 샤론 스톤, 캐머런 디애즈, 제이미 킹, 팜커 얀선, 데니스 리처즈[4] 등이 이에 해당한다.

아무래도 날씬해보여야 해서 거식증 환자가 많고 걸리기도 무척 쉽다. 80~90년대에 세계적으로 활약했던 모델 김동수의 책에도 이런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해외에서 활동하던 시절 그녀를 포함한 모델 몇 명이 유명 디자이너의 만찬 파티에 초대받았다. 그냥 참석해서 맛있는 것을 먹으면서 놀기만 해도 돈까지 받는 것이다.[5] 당연히 그런 파티의 음식들도 전부 다 수준급이니 김동수는 '이게 웬 떡이냐' 하고 신이 나서 맛있게 먹고 있었는데 같이 참여했던 모델들 중 몇 명은 식사도 깨작깨작하다가 중간에 자꾸만 화장실을 다녀왔댄다. 그런데 화장실에서 나오는 그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창백하고 헬쓱했다는 거다. 즉 먹다가 중간중간 화장실에서 토해낸 것이다. 파티에 초대받은 이상 아예 안 먹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살이 찔까봐 마음 놓고 먹지는 못하겠으니...

안타까운 것은 저 시절 모델들이 2000년대 패션모델들보다 체중이 보통 7~12kg 더 나간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모델들은 도대체 얼마나 더 스트레스를 받겠는가? 게다가 동구권 개방[6]에 국제화로 과거 자국 내에서만, 세계적 모델이라도 북미와 서유럽에서만 이루어지던 캐스팅 경쟁이 지금은 전세계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요즘은 패션쇼하다 쓰러질까봐 너무 마른 모델을 쓰지 않겠다는 디자이너도 있다 카더라. 정확하게는 업계에서 체질량 지수가 일정 이상 되지 않는, 즉 과도하게 마른 모델을 고용하지 않기로 합의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수준 이하 모델들은 쇼에 설 수 없다. 이에 대한 반향으로 굴곡 있고 건강하게 살집이 있는 '플러스 사이즈 모델' 들이 각광받기 시작하는 추세... 라곤 하지만 여전히 비쩍 마른 모델들이 점령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플러스 사이즈 모델은 개뿔 그래도 체질량 지수로 커트라인을 잡기 전보다는 많이 나아졌다. 삐쩍 마른 모델이 아닌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 패션모델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우승도 하고 특정 브랜드의 메인 뮤즈로 설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혁명이라고 할 수 있을 듯. 마른 몸이었던 모델이 살을 찌워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 된 뒤 "내 인생이 더욱 더 행복해졌다" 고 인터뷰한 적도 있다.

60년대 트위기를 필두로 한 런던스윙 시대를 제외하고는 패션모델은 날씬하되 건강해보이는 여성이 주류였다. 운동으로 다져진 길고 가늘고 섹시한 육감적안 스타일. 특히 슈퍼모델 전성기인 80년대에서 90년대 초반까지의 모델을 보면 하이패션 모델과 커머셜 모델, 플레이보이 등의 잡지의 글래머 모델이 큰 차이가 없는 누구나 부러워 하는 건강미인들이다.

이것이 옷보다 모델이 더 돋보이는 현상과 슈퍼모델들의 높은 콧대에 질린 디자이너들이 말 그대로 걸어다니는 옷걸이 옷에 집중할 수 있는 비주얼의 모델을 찾고 질 샌더 등 미니멀리즘이 주류가 되면서 90년대 중반 이후 패션 모델은 정말로 옷걸이 수준의 가늘기화가 진행되어 날씬을 넘어 말르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초기 waif 모델의 시작이던 케이트 모스가 지금 패션쇼에선 짧고 굵어보이는 미친 상황. 그래서 이들을 보통 하이패션 모델로 따로 분류해서 부르고 있다.

캐나다 출신의 톱모델 코코 로샤가 뚱뚱해졌다고 일을 못 구할 때 그녀의 사이즈는 키 178cm에 53kg였다. 에이전시가 그녀에게 한 말은 "네가 거식증에 걸리길 바라는 건 아니지만 거식증에 걸린 것 같이 보이면 좋겠다" 였다고...

2000년대 중반 이후 안티거식증 난리에서도 파리 패션쇼에서[7] 마른 여성 패션쇼에 서려면 키-125의 체중이 최대 허용치라 한다. 80년데 슈퍼모델들이 키 178에 60kg 정도에 미국 사이즈 4, 6(한국 사이즈 55~66)인데 반해 지금 패션쇼 모델들은 보통 178cm에 50kg 미달, BMI로 기아 상태라고. 그런 이유로 커머셜 모델, 글래머 모델계의 최고 런웨이 중 하나인 빅토리아 시크릿에서 에이스였던 미란다 커도 하이패션 모델로의 전향을 위해 볼륨을 없애는 심한 다이어트를 했다. 하이디 클룸도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와 볼프강 윱에게서 요즘 런웨이에 서기에는 너무 덩치가 크다고 디스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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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부터 80년대~90년대 초반의 신디 크로퍼드, 90년대 중후반의 케이트 모스, 2000년대 중, 후반의 톱클래스 하이패션 모델인 스네야나 오노프카, 2011년 이후 유럽 패션쇼의 유망주로 디자이너 콜을 가장 많이 받는 신예 클로에 메미세빅이다. 해가 갈수록 모델들이 더더욱 극단적으로 길고 가는 마른 몸이 되고 있다.

이와는 별개로 패션모델에 대한 일반인들의 생각은 정신 나간 디자이너들의 기묘한 옷을 입는 피해자들, 많은 이들의 동경을 받는 패셔니스타,[8] 얼굴이 안돼도 승부할 수 있는 세계,[9][10] 치열한 프로들의 세계 등으로 다양하다.

한국에서의 남성 모델들의 경우 9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인식이 매우 좋지 않았다. 차승원도 고등학교 시절 패션모델하겠다고 말했다가 담임한테서 빠따를 맞아야 했을 정도였다. 당시 남자 패션모델하면 거의 게이 내지는 정신병자 취급당하던 시절이었으니.

2 역사

2.1 초기

모델은 1853년 "오뜨 꾸뛰르의 아버지" 찰스 프레데릭 워스(Charles Frederick Worth)[11]에 의해 처음으로 직업으로서 정립되었다. 그는 자신의 아내 마리 워스(Marie Worth)에게 자신이 디자인한 옷의 모델이 되어줄 것을 부탁했고, 이런 종류의 모델링을 "하우스 모델"이라고 불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러한 하우스 모델은 파리의 패션하우스들 사이에서 흔해졌다. 이 때 모델은 신체치수에 대해 엄격하지 않았다. 패션 하우스는 고객들을 위해 다양한 체형을 가진 모델들을 기용하여 옷을 시연했다.

모델을 모집하기 위해 사진사와 패션 하우스들은 그들이 원하는 모델을 공모했다. ‘안개 같은 금발과 유리 같이 반짝이는 눈, 둥근 팔과 어깨, 포동포동할 것’과 같은 공고문이 붙었다. 1910년대 패션모델의 미덕은 온화함이었다. 20년대 코코 샤넬의 등장과 더불어 패션모델의 기준이 바뀐다. 대담하고 강한 의지력을 가진 독립적인 여성의 이미지가 등장한 것이다. 한 쪽 발을 다른 쪽 발 앞에 놓고, 힙을 앞으로 기울이고 한 손은 주머니에 꽂고 다른 손은 자유롭게 몸짓을 전달하는 ‘코코 포즈’를 개발해 퍼뜨렸다.

최초의 슈퍼모델, 리사 폰사그리브스의 화보(1951)

패션사진이 발달하면서 모델들의 역할이 확장되기 시작했지만, 1950년대까지 모델들은 대체로 유명하지도 않았고 처우도 매우 열악했다. 최초로 이름이 알려진 모델은 1930년대에 유명했던 리사 폰사그리브스(Lisa Fonssagrives)로 알려져있는데, 그래서 그녀를 "최초의 슈퍼모델"로 부른다. 그녀는 200번이 넘도록 보그의 표지모델을 하면서 이름을 알렸고, 이 때문에 오늘날까지 보그지는 모델들의 커리어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1946년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모델 에이전시 중 하나인 "포드 모델스(Ford Models)"가 설립되었다. 1940년대 가장 많이 활동한 모델은 "징스(Jinx)"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징스 팰컨버그("Jinx" Falkenburg)였다. 시간당 25달러를 받았는데, 당시로서는 꽤 많은 액수였다. 파리에서는 미국 텍사스 출신의 도로시아 처치(Dorothea Church)가 최초의 흑인 모델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당시 모델들은 대체로 패션계 내에서만 유명했고, 밖에서는 알려지지 않았었다. 1950년대 모델들은 오늘날의 모델들과 비교해 더 풍만했는데, 당시 탑모델 중 한 명이었던 윌헤미나 쿠퍼(Wilhemina Cooper)의 신체 사이즈는 38"-24"-36"이었다.

1950년대는 우아함과 정적인 아름다움 대신 개성이란 가치가 가장 중요한 척도가 되기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패션의 발랄한 측면을 드러내기 위해 디자이너 지방시는 체구가 작은 오드리 헵번 같은 말괄량이 타입의 모델을 선호했고 발렌시아가는 순수함을 강조하기 위해 평범한 모델을 썼으며, 피에르 가르댕은 동양적인 여성미를 드러내기 위해 히로코 마츠모토란 일본계 모델을 기용했다.

Jinx Falkenburg의 화보. 왠지 핀업 걸 스타일이 느껴진다.

dorothea-towles3.jpg 최초의 흑인 모델, 도로시아 처치. 역시 대표적인 핀업 걸 스타일의 포즈.

2.2 1960년대: 산업의 시작

1960년대가 되면서 모델 에이전시들이 설립되기 시작했다. 유럽에서는 비서 서비스가 모델 에이전트처럼 활동하면서 메세지 수신이나 예약에 대해 주당 요금을 받았고, 대부분의 모델들은 이런 청구서들을 직접 처리했다. 특히 독일에서는 다른 누군가의 수입의 일정금액을 대가로 하여 에이전트로 활동하는 것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스스로를 비서라고 칭했다.

당시 모델들은 극소수의 모델들이 파리나 뉴욕으로 진출하는 것 외에 대부분 한 국가에서만 활동했다. 나라마다 다른 노동법 때문에 다른 나라에 진출한다는 것 자체가 생소한 개념이었다. 그런데 1960년대 이탈리아에 패션하우스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패션잡지들도 잇달아 창간하면서 패션모델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에이전시들이 모델료를 볼모로 삼아 모델들에게 취업비자도 없이 이탈리아로 올 것을 강요하는 일은 매우 빈번했다. 모델료는 당연히 현금으로 지급했고, 모델들은 세관원들에게 들키지 않게 돈을 숨기고 다녀야했다. 파리밀라노의 고급 호텔에 경찰들이 급습하여 취업비자 없는 모델들을 검거하는 일이 드물지 않을 정도였는데, 경쟁 에이전시가 경찰에 일부러 신고해서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났다고 루머도 파다했다. 이런 혼란을 피하고자 모델 에이전시들은 국제적으로 규모를 키우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마릴린 에이전시는 파리와 뉴욕에 사무소를 두고 업무를 처리했다.

1960년대 말에는 런던이 유럽 최고의 시장으로 떠올랐다. 런던에서는 모델링에 좀 더 체계적이고 혁신적인 접근을 시도했고, 이 시기부터 모델들은 유명인으로 떠오르게 된다. 트위기를 비롯해 진 슈림튼(Jean Shrimpton), 조아나 럼리(Joanna Lumley), 타냐 말렛(Tania Mallet), 실리아 헤이먼드(Celia Hammond), 페넬로페 트리(Penelope Tree), 폴린 스톤(Pauline Stone) 등이 당시 영국의 패션계를 장악했고 이들의 선배들과는 다르게 수입도 매우 좋았다. 트위기는 16세의 나이로 1966년 "올해의 얼굴"로 뽑히기도 했다. 키 작은 모델들과는 계약을 기피하기는 했지만, 이 때까지만 해도 모델 에이전시들은 모델들의 신체 사이즈에 대해 그렇게까지 구속하지 않았다. 당시 키 167cm, 가슴둘레 32에 보이쉬한 헤어스타일의 트위기는 이상적인 모델의 기준을 바꾸어놓기 시작했다. 트위기는 영국 평균 임금이 월 60파운드인 시절에 시간당 80파운드를 벌었다. 한 시간만에 남들 월급보다 많이 벌어갔던 것... 트위기의 헤어스타일이 "트위기컷"으로 명명되기까지 하는 등 트위기는 그야말로 당대의 스타일 아이콘으로 떠오른다.

02-jean-shrimpton-beauty-vogue-1965.jpg 진 슈림튼(1965)
트위기

1967년 런던의 탑 모델 에이전트 7명이 "런던 모델 에이전트 협회(Association of London Model Agents)"를 만든다. 이 협회의 설립은 모델링을 보다 전문적인 영역으로 정립하고, 패션 산업을 바꾸는 데 일조하게 된다. 그러나 점점 모델이 하나의 전문직으로 인식되어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델들은 촬영 전에 헤어와 메이크업을 모두 하고 와야 했다. 반면 모델 에이전시들은 주로 모델의 홍보와 브랜딩만을 책임졌다.

같은 해, 모델이었던 윌헤미나 쿠퍼는 남편과 함께 윌헤미나 모델스(Wilhemina Models)라는 모델 에이전시를 차린다. 그리고 1968년에는 FM Agency와 Models 1이 설립되어 오늘날 모델 에이전시들이 하는 기능과 비슷하게 모델들을 대표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말 모델들은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처우가 더 좋아졌다. 포드 모델스는 모델들에게 선입금하기 시작했고, 다른 지역에서 올라와 살 곳이 없는 미성년 모델들에게 집을 제공하기도 했다.

2.3 1970-80대

70년대 모델 에이전시들은 점점 더 비지니스에 눈을 뜨게 되었고, 홍보 차원으로도 계속해서 새로운 시도가 이루어졌다. 이쯤 에이전시들은 모델이 미디어에 노출되는 방식을 통제하기 시작했고, 모델 홍보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기도 했다.

1970년대 초 스칸디나비아에는 다리가 긴 장신인데다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모델들이 많았지만 이들을 써줄 클라이언트들은 별로 없었다. 포드 모델스가 스카우팅을 개척한 것이 바로 이 시기이다. 북유럽의 모델들은 에이전시들이 주최하는 모델 콘테스트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이는 1980년 포드 모델스가 시작하게 되는 "포드 모델스 세계슈퍼모델 선발대회(Ford Models Supermodel of the World)"로 이어지게 된다. 포드 모델스는 또한 이국적인 느낌을 주는 브라질 모델들에게도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고, 브라질 사무소를 차리기에 이르게 된다.

이 시기는 Sport Illustrated Swimsuit Issue가 발간된 때이기도 하다. 이 잡지는 제목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수영복을 입은 모델화보를 실었는데, 풍만하고 건강미 넘치는 캘리포니아 모델의 사진에 모델의 이름을 적어두었다. 그러자 이 모델들이 유명인으로 떠오르고, 이후 이 잡지는 슈퍼모델의 척도로 여겨지게 되었다.

SISwim_1980s.jpg 80년대 Sport Illustrated Swimsuit Issue의 표지.

1970년대는 모델계에 중요한 이슈가 많았던 때이기도 했다. 1974년 비벌리 존슨이 흑인모델로서는 최초로 보그의 표지 모델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비롯하여 그레이스 존스, 나오미 심스 등이 흑인 모델의 길을 닦았다. 1975년에는 마고 헤밍웨이가 향수 브랜드의 전속광고모델 계약을 하면서 전례 없는 백만달러 규모의 계약을 성사시키고 그 해 시사잡지인 타임(주간지)지의 표지모델이 되어 "새로운 미인"의 전형으로 등장했다.

보그의 표지모델이 된 최초의 흑인 모델, 비벌리 존슨

오늘날 영향력 있는 대부분의 탑 모델 에이전시들은 70년대와 80년대초에 설립되었다. 이 에이전시들은 오늘날의 에이전시들이 운영하는 표준을 창조해냈다. 1974년에는 Nevs Models가 세계 최초로 남성모델 전문 에이전시로 런던에 설립되었고, 파리의 엘리트 모델스Elite Models와 일본의 프라이데이즈 모델스Friday's Models가 1975년에 설립됐다. 그 다음해에는 싱가포르에 Cal-Carries가 아시아 최초의 체인형 모델 에이전시로 설립되었다. 1977년에는 Select Model Management와 Why Not Models가 밀라노에서 문을 열었다. 80년대까지 Premier Model Management, Storm Models, Mikas, Marilyn, Metropolitan Models 등의 모델 에이전시 줄줄이 문을 열었다.

80년대가 되면 대부분의 모델들이 모델을 전업으로 삼기 시작했고, 유럽 각지를 오가고 세계 여러 나라에서 일하는 것이 보편화 되었다. 모델링이 글로벌해짐에 따라 모델 에이전시들도 글로벌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1980년 포드 모델스는 포드 모델스 세계슈퍼모델 선발대회를 시작했고, 파리의 엘리트 모델스가 뉴욕에도 사무실을 열었다. 1981년에는 화장품 회사들이 탑 모델들과 고가의 홍보계약을 체결하기 시작했다. 1983년이 되면, 엘리트 모델스는 Elite Model Look competition이라는 이름으로 자체 모델 컨테스트를 시작한다. 80년대 뉴욕에서는 "모델 전쟁"이라고 부르는, 모델들과 광고를 두고 포드 모델스와 엘리트 모델스 사이의 경쟁이 격화되었다. 모델들은 엘리트와 포드, 윌헤미나를 오가며 활동했다.

1970년대 후반 뉴욕에서 짧은 머리의 중성적인 느낌을 가진 보이쉬한 외모의 모델들이 트렌드가 되었다. 그러나 유럽은 정반대였다. 여성스러운 이미지의 미국 모델들이 대거 유럽으로 떠났다. 1980년대 중반쯤 부터는 거대한 헤어스타일이 유행했고, 보이쉬 스타일은 물러갔다. 50년대부터 70년대초까지 유행했던 풍만한 모델들이 다시 각광 받았다. 패티 핸슨(Patti Hansen) 같은 모델은 화보 촬영에 시간당 200달러, TV광고에 2000달러를 받았다. 그녀는 80년대 동안 매년 평균 300,000달러를 번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패티 핸슨

500 80년대 CK 광고모델이었던 브룩 쉴즈. 1980년 14살의 나이에 최연소 보그 표지모델이 되었고, 논란이 됐던 캘빈 클라인 진의 광고에 출연하여 유명해졌다.

2.4 90년대 이후

1990년대 초반은 80년대 후반의 슈퍼모델들이 지배했다. 당대에 가장 성공한 모델 중 한 명이었던 린다 에반젤리스타(Linda Evangelista)는 보그와의 인터뷰에서 "하루에 10,000달러 이상 벌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아요"[12]라고 하여 화제가 됐는데, 이 발언 이후 모델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다. 그녀를 비롯하여 나오미 캠벨, 신디 크로포드, 크리스티 털링턴, 스테파니 시모어 같은 당대의 탑 모델들은 세계에서 가장 얼굴이 많이 알려진 모델이 되었고, 그에 걸맞게 어마어마한 수입을 거두었으며, 모델 산업 자체에도 어마어마한 부를 가져다주게 되었다. 메이블린크리스티 털링턴과 1년에 12일 일하는 것을 조건으로 계약하면서 무려 80만 달러를 지불해야 했다.

kate-moss-lindbergh-de-5729105.jpg Heroin Chic의 상징, 케이트 모스

90년대 중반에는 건강미 넘치는 기존의 미적 관념에 대항하여 창백한 피부, 눈 밑 다크서클, 각진 골격으로 특징지어지는 "헤로인 시크(Heroin Chic)"라는 트렌드가 뉴욕과 런던의 패션 에디터들 사이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다. 본래 헤로인 중독으로 고생하던 모델 제이미 킹(Jaime King)에게 영감은 받은 것이었지만, 정작 헤로인 시크의 상징이 된 것은 캘빈 클라인 모델로 등장한 케이트 모스였다. 한편, 헤로인 시크 트렌드에도 불구하고 건강미 넘치는 클라우디아 쉬퍼는 1,200만 달러를 벌었다. 속옷 브랜드 빅토리아 시크릿과 Sport Illustrated Swimsuit Issue의 인기 덕분에 타이라 뱅크스하이디 클룸 같은 건강미 있는 슈퍼모델에 대한 수요는 지속됐던 것이다. 1990년대 중반이 되면 많은 아시아 국가들에서도 모델 에이전시들이 설립되었다.

파일:4uTaa9s.jpg 빅토리아 시크릿 런웨이에 선 클라우디아 쉬퍼, 타이라 뱅크스, 하이디 클룸, 지젤 번천, 아드리아나 리마

1990년대 말이 되면 헤로인 시크의 시대는 끝난다. 10대 청소년의 의상이 주류 패션에 침투하고, 10대 팝 음악 시장이 커지고, 브리트니 스피어스크리스티나 아길레라 같은 아티스트들이 인조 가죽과 배꼽티를 유행시켰다. 좀 더 어린 수요층으로 인해 신인 모델들은 디지털 시대에 맞게 더 섹시해져야 했다. 지젤 번천을 필두로 아드리아나 리마, 알레산드라 앰브로시오 같은 브라질 모델들이 런웨이에서 각광 받았고, 2000년대 내내 광고모델로도 활약했다. 이러한 변화의 원인을 당시 패션잡지들이 표지모델로 패션모델보다는 연예인들을 주로 채용했던 것에서 찾기도 한다.[13]

2000년대 후반에는 젬마 워드릴리 콜 같이 중국 인형이나 외계인 같이 생긴 모델들이 유행하게 된다. 그리고 2000년대 내내 포드 모델스와 넥스트 모델 매니지먼트는 서로의 모델을 훔쳐갔다며 법적 분쟁에 얽힌다.

젬마 워드릴리 콜

하지만 2000년대 모델계의 가장 큰 논란은 패션위크에 참가한 하이패션 모델들의 건강문제였다. 70년대부터 모델들의 건강이 우려사항이 되어 온 가운데, 어린 패션 모델들이 식이장애(주로 거식증)와 약물 남용으로 사망한 사실이 언론에서 크게 다뤄지기 시작했다. 영국 패션 협회는 디자이너들에게 16세 미만의 모델을 쓰지 않겠다는 계약에 사인하도록 했고, 2012년 3월 3일 보그는 식이장애가 있는 모델들과 16세 미만 모델들을 금지했다. 비슷한 움직임이 스페인, 이탈리아, 이스라엘 등 여러 나라에서 일어나 최소 BMI지수를 넘긴 모델만 쓸 수 있도록 바뀌기도 했다. 2013년에는 뉴욕주에서 18세 미만 모델들에 대한 아동노동의 법적 보호를 강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프랑스 등은 깡마른 모델들을 롤모델로 삼아 일부러 거식증에 걸리는 10대 소녀들이 늘어나자 패션잡지들이 모델들의 몸매 후보정을 못하도록 규제하기도 했다.

아래 두 장의 거식증 모델 사진들을 보면 그야말로 촉루와도 같은 몰골을 볼 수 있다.

%EA%B1%B0%EC%8B%9D%EC%A6%9D%EB%AA%A8%EB%8D%B82WEB.jpg 거식증에 시달리는 패션 모델

73122_45515_5742.jpg 28세로 사망한 모델 이사벨 카로. 거식증에 시달리게 되면서 그 문제점을 고발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한편으로 패션계는 점점 더 다양성을 추구하고 있기도 하다. 중국 등 아시아 시장의 성장과 아시아인들의 신체조건 향상으로 아시아계 모델들의 등장이 많아지고 있고, 백인이 아예 없는 모델 에이전시가 런던에 등장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의족을 한 에이미 물린스, 다운증후군을 가진 호주 소녀 메들린이 패션모델로 등장하기도 하고, 도브베네통은 어린 아이부터 노인까지, 평범하기도 하고 뚱뚱하기도 한 보통 사람들을 모델로 기용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도브의 Real Beauty 캠페인

3 4대 컬렉션에서의 비백인 모델

4대 컬렉션(파리, 밀라노, 뉴욕+런던)에서 비유럽계 모델은 정말 많지 않았다. 시대의 슈퍼스타였던 베벌리 존스, 이만(데이비드 보위의 부인), 심지어 그레이스 존스마저 인종차별의 벽에 부딪혔을 정도였다. 쉽게 설명하면 힙합 페스티벌에서 에미넴이 인종 때문에 출연 기회가 박탈당하는 것

슈퍼모델 전성기의 톱3인 나오미 캠벨마저도 인종의 벽에 부딪혔다.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이 프랑스판 보그지에 '캠벨이 왜 표지모델로 안 나오냐, 자꾸 그러면 광고 더 이상 안 준다' 고 하고 캠벨의 절친인 린다 에반젤리스타크리스티 털링턴이 '캠벨에 대한 인종차별을 그만 두지 않으면 우리도 출연 거부한다' 고 선언할 정도였으니 말 다한 거다.

그나마 흑인 모델은 좀 기회가 있었지만 동양인은 신체조건에 대한 편견으로 아예 프로파일북도 안 보고 퇴짜였고, 90년대부터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14] 오리엔탈리즘이니 인종차별에 대한 인식 때문이니 하지만, 진짜 이유는 동북아시아의 패션시장 공략이다. 유럽이나 북미에서의 성장은 이미 한계에 부딪혀진 상황일 뿐 아니라 불경기로 시장 위축이 심각한 상황에서 동북아가 떠오르기 시작했기 때문에, 신흥 시장 공략을 위해 그 시장 출신 인물들을 모델로 쓰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불황으로 아시아 시장에서의 성장이 길인 업계는 하이패션보다는 중산층 대상의 브랜드들이 더 절박하다. 유럽과 북미에서는 중산층 붕괴로 고만고만한 가격의 브랜드들은 도산을 걱정해야 할 판인데 중국은 이들에게 마지막 돌파구인 것이다. 짝퉁이 넘치고 가난한 사람도 넘치지만 일단 인구가 하도 많으니까.

다리 짧은 아시안과 가난한 흑인 사절을 은연 중에 내세우던 아베크롬비 & 피치, 홀리스터 회사도 결국 아시아 시장에 노크했다. 한국에서의 멍청한 모델 덕에 오히려 이미지 망쳐 생각 있는 인간은 이거 입으면 안 된다고 광고해서 그렇지

아시아계 남자 모델들의 서구 진출은 훨씬 드물지만 이전보다는 상대적으로 많이 허문 편이다.

비록 성공적이지는 못하지만 차승원도 파리 무대에 섰고 김영광은 디올 옴므 패션쇼에 서기도 했다. 김영광은 그때 쇼 스태프의 실수로 클로징 무대에 나오는 기회도 얻었다.

2013년에는 'Dae Na'라는 이름으로 해외 활동중인 모델 나대혁이 2012년 한국 남자로서 모델 랭킹 50위 순위에 진출하더니 2013년 상반기 집계에서는 20위권으로 순위가 올랐다. 2014년 상반기 순위는 46위. 하지만 27위에 박성진이 랭크되어 50위권 내의 한국인 남자 모델은 이로써 두 명이 되었다. 수입순위에도 오르거나 베테랑 대우도 해주는 모델을 배출한 일본, 중국보다는 뒤늦지만 지금 잘나가는 동양모델들을 보면 이젠 꽤 일본 중국모델과 비슷해졌다.

근데 사실 이게 애매한 게 단순 모델 랭킹보다 수입 랭킹, 섹시한모델 랭킹, 인더스트리 아이콘, 뉴 슈퍼, 레전드이런식으로 나눈 랭킹자료가 더 권위적이고 인정받는다. 여성모델이나 남성모델이나 기존 모델랭킹에서 1위를 몇 달씩 찍거나 비백인로써 경쟁력으로 오랫동안 보여줘야 인더스트리 아이콘이나 뉴 슈퍼에 등재된다고 보면된다. 레전드는 그야말로 넘사벽

성공적으로 유럽과 뉴욕에서 활동중인 농구선수 출신의 모델 이혜정에 따르면 유럽이나 뉴욕 진출은 출연료도 세지만 워낙 비용(항공료, 이동비, 생활비, 숙소 등)이 많이 들어 그 자체로 돈을 번다기보다는 커리어적인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

3.1 2010년대 들어 주목받는 한국 남자 모델

우리부터도 여자 모델은 몰라도 동아시아 남자가 흑인,백인 남자 모델들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은 오랫동안 당연히 하지 못했다. 아예 아시아밖에서는 모델 활동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본 것.

하지만 중국 명품소비시장이 부상하면서 아시아계 모델의 수요 자체가 늘었다.

데릭 램, 겐조, 꼼 데 가르송같이 브랜드의 수석 디자이너 자체가 아시아인이라서 아시아인에게 좀 더 호의적일 수도 있는 브랜드에도 나오지만, 에르메스 멘즈, 휴고 보스, 캘빈 클라인, 에르메냐질도 제냐같이 돈많고 몸되는 백인 남자의 백인 남자에 의한 백인 남자를 위한 브랜드까지도 뚫은 것.

게다가 이들은 패션쇼에 등장하는 정도에서 더 뛰어넘어 아예 휴고보스, 캘빈클라인, 제이크루 같은 브랜드의 광고 메인모델로 나오고있다.미국판 지큐,에스콰이어 화보,그것도 가장 모델 조건을 까다롭게 본다는 명품 수트[15]에도 등장한다.

이미 중국의 자오 레이는 몇년전부터 모델 랭킹 16위까지 진출하더니 수입 랭킹에도 오르면서 여성모델 리우웬[16]을 잇는 중국출신의 슈퍼스타모델이며 그외 모델 랭킹에 진입한 하오 슌 상이나 인더스트리 아이콘에 오른 중국계 미국인인 필립 황도 인정을 받고있다 있고, 일본에서도 아이콘에 오른다케스케 우에다나 신예모델로 불리는 사토시 토다도 있으며 한국의 경우에는 나대혁이 한국 최초로 남자 모델 랭킹 50의 벽을 뚫고 몇 년째 탑50로 활동하고 있으며,박성진은 20위권에 랭크되었다. 유혁재는 근육질의 마초간지 작살 백인 남자 전용(?) 브랜드라는 돌체 앤 가바나 메인으로도 나왔고,디자이너 돌체가 감탄하면서 올해 가장 섹시한 아시아 남자가 왔다고 했다고..돌체는 게이이다.더는 상상말자

4 업계의 현실

믿어지지 않겠지만 모델들에 대한 처우는 한국이 훨씬 좋다. 어디까지나 탑모델이 아닌 보통의 모델들의 경우. 한국의 경우 디자이너, 패션 에디터, 모델 간의 관계가 좀 더 가족적이고 정이 강한지라 인연을 맺은 사이라면 어지간한 큰 결점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냥 캐스팅을 하지만, 서구는 얄짤없다. 이하 내용은 비교적 내부 폭로가 있어온 서구 패션계의 내용임을 감안하고 읽자.

슈퍼모델 전성기가 끝난 후 모델들은 말 그대로 옷걸이로써 역할에 충실하게 되고 쉽게 교체된다. 패션모델들의 주류가 어린 미성년 모델들이고 동유럽 출신들이 많아지면서 모델들에 대한 혹사가 점점 심해지는 현실.

수입에 있어서는 보통 몇 달에 한 번 정산해서 에이전시에서 받는데 이것저것 다 떼다 보면 막상 받는 금액은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경우가 많다. 에이전시에서 제공하는 아파트도 나중에 돈을 받을 때 비용을 뗀다. 각 국을 다니는 모델들의 이동 경비, 캐스팅 시의 교통비, 식대 모두 모델 개인 부담이다. 어떤 모델들은 모델계 은퇴를 각오하고 변호사를 고용해서야 제대로 돈을 받았다 한다. 어떤 경우에는 출연료 대신 화보용이나 런웨이용 의상을 받도록 강요당하기도 한다. 500달러짜리 명품 티셔츠가 밥값을 내줄 수는 없다고

톱클래스급을 제외한다면 모델들은 주업인 모델 일보다는 아르바이트가 주요 수입원이 된다. 레스토랑이나 카지노 웨이트리스나 바텐더 등 시간 일정을 조절할 수 있는 일을 병행하는 일이 많은데 몸매가 우수해서인지 팁이 많다나.

모델계 밖에서의 취업에 한계가 있는 미성년 모델들의 경우 실컷 일하고나면 오히려 에이전시에 빚을 지고 있는 경우도 많다. 나중에 모델이 필요없어지면 그 빚은 그냥 에이전시에서 탕감해주어 버린다는데, 자비가 아니라 오히려 토사구팽 잔인해보인다.

미성년 모델들에 대한 성희롱도 문제이다. 패션계 밖에서는 상상도 못할 당장 감방에 끌려가고 아동 성범죄자 꼬리표를 달 일들도 비일비재하다. 뜬금없이 누드를 강요받는다거나 자세를 잡아준답시고 모델들의 몸을 불쾌하게 더듬는다거나... 외부에서는 당장 소송감이 될 외모에 대한 노골적인 비하와 지적 등. 단, 유색인 모델의 외모에 대한 직설적인 언급은 인종차별로 몰리면 곤란하니까 자제한다나.[17][18]

다이어트 강요, 노동법을 전혀 적용받지 못하는 열악한 근무 환경(에이전시에 소속된다 해도 모델들은 개인 사업자이므로 최저임금 등을 적용받지 못한다) 등의 일들이 모두 "일의 일부"로 변명되고 이에 대한 항의는 좁은 패션계에서 매장당할 수 있다. 80년대에 활동하던 전직 모델은 비교적 잘 나가던 와중에 체중문제로 예약된 아르마니쇼에서 짤리자, 며칠 내로 소문이 다 나서 그 날로 일이 다 없어졌다고 했다.[19]

CSI : Crime Scene Investigation의 한 에피소드에서도 이와 관련된 주제를 다룬다. 제목이 '배고픈 예술가'다.

위에 언급된 김동수도 젊은 시절 파리에서 활동할 때, 주변 모델들을 보면 다들 다이어트 겸 돈도 아낄 겸해서 아침을 바게뜨 한 조각에 물로 떼우는 걸 많이 봤다고 한다. 자기는 도저히 그렇게 먹고는 못 살기에 매일 인근의 중국집으로 출근도장을 찍어가며 산라탕을 먹었더니 모델로 일하면서 번 돈이 순식간에 다 없어져서, 귀국을 해야하나 걱정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우스갯소리로 미성년자를 위한 보호는 차라리 포르노 업계가 더 잘 한다는 말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유럽국가에서도 초 A급이 아닌 모델들은 파트타임이 대부분이며, 직업에 따르는 스트레스나 경제난 때문에 마약이나 매춘에 허덕이는 사람도 많다. 겉은 화려하지만 정말 매우 힘든 직업.

5 모델 에이전시 목록

5.1 국내

에스팀(Esteem)
YG케이플러스(YG K-Plus)
에이전시 가르텐(Agency Garten)

5.2 국외

Elite Models
Ford Models
NEXT Model Management
IMG Models

6 패션모델 혹은 패션모델 출신인 인물들(실제)

★표시는 모델 출신 연기자.

6.1 국내

6.2 해외

6.2.1 백인

6.2.2 흑인

단 14명뿐인 레전드에 등재된 흑인여성모델 3명
  • 그레이스 존스
  • 키모라 리 시몬즈
  • 알렉 웩
  • 세실리 로페즈
  • 리야 케베데 - 에티오피아 출신으로 까다롭기로 유명한 에스티 로더의 최초 흑인모델이며 빅토리아 시크릿에도 진출했고 현역 당시 나오미 켐벨과 쌍두마차로 잘나가던 모델
  • 조안 스몰스 - 전 세계모델랭킹 1위
  • 알레니스 소사
  • 조단 던 - 1990년생의 젊은배우지만 어린나이에 임신해서 긴 휴식을 취하다 2009년에 아이를 출산하고 다시 복귀해서 현재 빅토리아 시크릿에서 활동
  • 샤넬 이만
  • 야스민 워세임 - 흑인 전설의 톱모델 샤넬 이만보다 더 아름다운 얼굴이라고 평가받는 모델. 한국 모델 송경아가 뉴욕활동 당시 MAC 캠패인을 같이 했는데 실물이 너무 예쁘다고 극찬한 바 있다.

6.2.3 황인

  1. 작은 문신이라도 함부로 할 수 없고 드러나는 부위에 큰 흉터가 있어서도 안되며 여름에 팔다리나 목만 타는 일이 없도록 철저하게 조심해야 한다. 걷는 보폭, 골반 움직임, 어깨 위치도 철저해야 하고 살이 접히지 않을 정도로 날렵한 몸매를 유지해야 한다.
  2. 성공 케이스를 꼽자면 변정수차승원, 이천희, 강동원 등이 있다. 영화 《진주만》과 《화이트칙스》, 《블러디 발렌타인》에 나왔던 제이미 킹, 캐머런 디애즈, 우마 서먼, 샤론 스톤 등도 원래 모델 출신이다.
  3. 타이라 뱅크스장윤주도 자신이 직접 촬영을 맡은 적이 있고 지젤 번천은 직접 패션 브랜드를 런칭하기도 했다.
  4. 리처즈는 너무 섹시한 이미지로 패션모델로서의 경력은 그냥 다들 잊는 듯.
  5. 실제로 유명인들이 참석했다는 것만으로도 그 파티가 유명해지고 파티의 물도 좋아지니 때문에 이런 의뢰가 많다고 한다. 그래서 파티에만 유난스럽게 등장해서 결국에는 파티광이라는 비아냥을 듣는 발연기 배우들도 당연히 존재한다.
  6. 이게 참 암울한 것이 사실 동부권의 어린 소녀들 중 에이전트들에게 캐스팅 제의를 받운 상당수가 모델로서 출세를 하고 돈을 많이 벌어서 가족들을 돕는 것을 것을 목표로 삼고 이런 캐스팅 시장에 뛰어드는 경우가 많다. 그녀들로서는 지극히 불안정한 고용 환경과 내전이 빈번한 자국에 있느니 차라리 더 안정된 서유럽과 북미가 주축이 되는 패션계에서 일하는 것이 더 이상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은 진짜 냉혹하지만... 아래에 언급된 카르멘 카스나탈리아 보디아노바가 바로 이런 어려운 환경에서 목표를 이룬 동유럽 출신의 대표적인 모델이다.
  7. 패션의 최고 중심지이자 여타 유명 콜렉션들도 뒤로 밀리게 한다는 파리컬렉션에서는 마른 모델 고용이 유난히 심하다. 오죽하면 skinny보다도 더 마른 paris skinny라는 말이 나온 정도이다. 유난히 마르고 키 큰 여성에게 어울릴 법한 미니멀리즘 디자인으로 유명한 디자이너 정구호가 한국에서 마른 모델에게 맞추어 제작한 의상과 싸이하이 부츠도 파리에서는 모델들에게 너무 크더라고 말한 정도.
  8. 아이엠어모델, 도전슈퍼모델 코리아(도슈코), 프로젝트 런웨이 코리아 등이 한국에서 불러 일으킨 열풍을 생각해보라. 웹툰 《패션왕》도 그런 열풍 덕에 더욱 주목받았다. 종합편성채널 MBN이 사서 편성 안 돼 빛을 보지 못했던 것을 배급해 살려준 《왓츠업》에서도 모델 출신 이수혁이 나오고 《왓츠업》이 방송사를 찾지 못하는 동안 그는 SBS 사극뿌리깊은 나무》에서 윤평 역할로 출연했다.
  9. 실제로 잘 나가는 모델들의 외모를 보면 예쁘고 잘생긴 경우도 있으나 한국인들의 생각하는 미모 기준에 매우 미달인 외모의 모델들도 엄청 많다(...) 특히 동양계 모델의 경우 동양인들 눈에는 연애는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못생겨 보이는데 정작 모델계에서는 극찬을 받으니...
  10. 단, 이 경우는 말 그대로 개성으로 밀고 나가는 모델들이고 예쁘다는 소리를 듣는 동양인 모델들은 리우 웬이나 페이페이 순처럼 한국인 눈에도 꽤 예쁜 모델들이다. 특히 웬은 동아시아인 최초로 빅토리아 시크릿의 모델로도 섰다. 그렇지만 아예 하이패션으로 넘어가면 판에 박은 듯한 예쁜 얼굴보다는 이질적이고 개성적인 외모를 선호하는 것은 사실인 듯. 모델 얼굴만 보느라 제품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그거대로 문제라서... 다만 그냥 못생기면 되는 게 아니라 포스가 있어야 한다. 적어도 자신의 얼굴이 가진 개성을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
  11. 파리에 "House of Worth"라는 하이패션하우스를 차린 영국인 디자이너로, 패션하우스로 대표되는 오뜨 꾸뛰르를 탄생시킨 인물로 평가된다. 디자인도 디자인이지만, 당대 패션산업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은 인물로서 패션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
  12. we don't wake up for less than $10,000 a day
  13. 오죽하면 "슈퍼모델의 죽음"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14. 70년대 말 피에르 가르댕이 방한했을 때 자기 쇼에 설 여성 모델로 키 175cm 이상을 요청했다. 한국에서는 당연히 구두굽 포함해서 175cm인 줄 알았었다. 그게 아니면 그 조건에 맞는 모델 자체도 없었고... 지금은 동북아에서도 여성 패션모델은 서구 기준과 거의 차이가 없다. 리얼리티 쇼에 나오는 키 작은 런웨이 모델 그거 다 쇼이다. 현실에서는 아시아에서도 디자이너들이 런웨이 모델들을 왠만하면 174cm 이상을 원한다.뭐 가끔식 170cm 정도하는 모델들이 나오기는하지만...
  15. 이정도면 잡지 에디터선에서 오케이 떨어지는 것에서 끝이 아니고,본사에 오케이 사인을 받아야 한다
  16. 한 때 여성모델순위 3위까지 했으며 현재는 랭킹을 벗어나서 인더스트리 아이콘에 등재된 동양최고의 여성모델.
  17. 뭘 입혀도 안 어울린단 식으로 돌려 말해 메인으로 세우지 않으려는 경우는 왕왕 있다
  18. 케이블에서 한국인 모델의 뉴욕 패션위크 오디션을 촬영했을 때 이게 적나라하게 나온다. 스탭들중 한명이 '얘는 가슴이 없어서 뭘 입어도 안어울려' '이미지가 우리 브랜드랑 안맞아'라며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혼자 캐스팅에 딴지를 건다.
  19. 제니퍼 스트릭랜드의 《걸 퍼펙트》라는 책에 잘 나와 있다. 한국에서도 출간된 책이다. 이 경우 런웨이 쇼 당일 리허설에서 디자이너의 손짓 하나로 경력이 다 망쳐진 경우이다. 그때는 80년대라서 살이 쪄서가 아니라 너무 말라져버려서 무슨 마약중독자같다는 이유로.
  20. 1989. 5.31~2009. 11.19. 파리 자택에서 자살한 채로 발견되었다.
  21. 한국인이지만 일본에서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