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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관
대한민국의 7대 종단(한국종교인평화회의) | ||||||
불교 | 개신교 | 천주교 | 유교 | 원불교 | 천도교 | 한국민족종교협의회 |
대한민국/종교 |
한국에서는 개신교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눈에 띄는 일이 별로 없지만, 사실 교파 별로 따지면 한국에서 가장 신자가 많은 교파는 가톨릭이라고 한다. 개신교는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등 많은 교파로 갈리는 데 비해 가톨릭은 전 세계적으로 단일 종파이기 때문.
신자 수 | |||||
전체 국민 비율 % | |||||
조사 연도 | 종교 없음 | 불교 | 개신교 | 가톨릭 | 기타 |
1985 | 57.4 | 19.9 | 16 | 4.6 | 2.1 |
1995 | 49.3 | 23.2 | 19.7 | 6.6 | 1.2 |
2005 | 46.9 | 22.8 | 18.3 | 10.9 | 1 |
2015 | - | - | - | - | - |
출처 :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 1985, 1995, 2005) |
2 역사
2.1 프롤로그
처음으로 한국인에게 가톨릭이 전해진 시기에 대해서는 다소 불분명하다. 적어도 임진왜란 시기가 되면 가톨릭 신자들이 조선 땅에 발을 디뎠으며, 이 분야의 대표 사례로는 고니시 유키나가, 세스페데스 등이 있다. 또한 이 와중에 일부 조선인 포로들이 가톨릭 세례를 받기도 했다. 또한 2016년에는, 교황 요한 22세가 고려 충숙왕에게 1333년에 보낸 편지가 바티칸에서 발견되었다. 이 편지가 고려에 도착하였는지는 다소 불분명하지만, 편지의 내용에 "왕께서 그 곳(고려)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잘 대해주신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무척 기뻤습니다."라는 구절이 들어있으므로 이미 편지를 발송하던 시기 이전에도 고려에 그리스도인이 (소수이든 다수이든) 발을 디디기는 했음을 알 수 있다. # 다만 '한국 교회'가 세워진 것은 아니므로, 대개의 경우 한국 가톨릭의 시작은 후술할 이승훈 베드로로 잡는다.
2.2 교회의 시작(조선 후기)
한국(조선) 땅에 처음으로 교회가 세워진 것은 조선시대 후기로, 가톨릭에 대한 책이 조선으로 흘러들어오면서 전래된 독특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조선의 가톨릭 교회는 외국인 선교사에 의해 전파된 것이 아니라 책으로 배우면서 자발적으로 신앙심에 눈을 뜬 매우 희귀한 사례다.
가톨릭이 이처럼 독특하게 조선에 전파된 이유는 실학과 관련이 있다. 성리학에 한계를 느낀 몇몇 실학자들이 서양 학문을 배워오는 과정에서 한국에 전해졌다. 정확히는 17세기 중국 베이징의 천주당을 방문한 사신들에 의하여 '서학(西學)'으로 소개되었고, 18세기 후반에 남인 계열의 실학자들에게 신앙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당시에 들여온 책이 <천주실의>였고, 마테오 리치가 한문으로 지은 것이 언문(한글)으로 옮겨지며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게 되었다. 초기에는 서학(서양의 학문)으로서 몇몇 학자들의 '연구 대상'이었다. 이 때문에 이 시기에는 천주교가 아닌 천주학이라는 용어를 썼다. 이 연구회(?)를 지금은 명례방 공동체라고 부른다. 역관 김범우 토마스가 자신의 집을 모임 장소로 내주었다. 가톨릭교회에서 이 집터를 매입하여 세운 건물이 다름 아닌 현재의 명동성당이다. 하지만 모여서 서적을 읽고 연구/토론을 거치며 교리를 습득하고 신앙을 가지는 사람이 생겨났다. 정식으로 신부가 파견되기 전까지는 교인들 사이에서 임의로 주교와 신부를 뽑아 신앙활동을 했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교회법상 허용되지 않는데, 초기 신자들도 이를 나중에야 알게 되어 부랴부랴 베이징 교구에 신부의 파견을 요청하여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입국하게 된다.
후술할 조선의 천주교 박해 수난사, 대한민국의 민주화 투쟁과 더불어 한국 가톨릭교회에서 가장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점 중 하나가 이것이다. 즉, 외국인 선교사에 의해서가 아닌 우리나라 사람 스스로 천주교를 받아들인 것이며, 이는 가톨릭 역사상 거의 유일한 경우라고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한국의 이런 독특한 천주교 역사에 대해 언급했다. # 오죽 특이했으면 당시 교황이었던 비오 6세는 이 사실을 접하고 감격해서 눈물까지 흘렸다고 한다.
최초의 영세자, 즉 우리나라 최초의 가톨릭 신자로[2] 인정받은 이승훈 베드로는 베이징까지 가서 서양인 신부에게 세례성사를 받았다. 이후 조선으로 돌아와 여러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다.[3] 이후 베이징 교구와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최초로 한국에 몰래 들어와 전교를 시작하게 된다. 이 때부터 가톨릭이 한국에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1831년에는 한국 천주교회가 중국 베이징 교구에서 분리되어 조선교구가 설정되었다.
한국에서는 조선조에 들어온 후 크게 4번, 즉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4], 1866년 병인박해에 걸쳐 모진 박해를 받았다. 물론 크게 피바람이 분 것만 4번이었다는 이야기고, 그 사이에 크고 작은 박해와 처형들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특히 1866년의 병인박해가 혹독했는데 이 때만 최소 8,000여 명~최대 20,000여 명이 순교하였을 거라 추정될 정도로 조선의 박해는 매우 가혹한 것이었다. 당시 조선의 법 집행 체계는 해이해진 국가조직 때문에 많이 흐트러져 있어서, 가톨릭 신자라도 주교나 신부 급이 아닌 이상 평신도는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뇌물로 사형을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순교를 택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고 하니 흠좀무.
최초의 순교자는 김범우 토마스로서, 1785년 체포되어 고문의 후유증으로 2년 후 순교하였다. 바로 앞에서 설명한 '명례방'의 장소를 제공한 중인(中人)이었다. 정약용 등은 양반이라서 가벼운 문초 후 방면되었지만, 만만한 중인이라는 이유로 시범케이스로 목숨을 잃었다. 천주교가 본격적으로 전래되기 시작한 것이 18세기 후반이니, 조선 조정의 박해는 상당히 빠른 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801년 이전 박해의 성격은 순전히 종교 박해라고 하기에는 모호한 측면이 있다.
우선 조선왕조 시대에는 현대적인 관점에서 종교라는 개념을 적용하기는 어렵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시점에서 종교임을 부정하는 현대의 유교와는 달리, 과거의 유교는 '진정한 종교는 유교뿐'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이것은 '종교'라는 단어 자체가 과거 유교에서 쓰이던 것과는 의미가 달라졌기 때문인데, 성리학자들이 성리학을 종교라고 생각한 적도 없고, 불교 또한 우리가 생각하는 종교로서의 관념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현대에 쓰이는 서양 단어 religion의 역어로서의 종교가 아니며 말 그대로 학문이라는 개념으로만 존재했다는 것인데, 이처럼 종교라는 개념이 없는데 종교의 자유, 국교, 종교탄압 같은 개념을 적용시키기는 불가능하다. 그보다는 남인에 대한 정치적 견제 및 (조정이 해석하기에는) 혹세무민의 사학에 대한 대응이라 봐야할 것이다.
정조실록에 의하면, 적어도 정조 시절에는 불교의 일부 종파라고 조정이 여겼으며, 당시에는 그냥 세상이 어지러우니 생겨난 사학 중 하나로 보았다. 그러나 이후 윤지충 바오로가 신주를 태워 버리는 진산 사건이 일어나고, 대규모의 박해인 신유박해가 터진다. 그 후 황사영 백서 사건이 연이어 터지면서 박해는 더욱 심해진다.[5] 황사영이 백서에 적은 '프랑스 황제가 직접 군대를 보내 조선을 정복해 달라'는 내용이 명백한 간첩행위 및 반역행위이기 때문. 예전에는 적당히 장형이나 귀양으로 끝났을 법한 사안도 얄쨜없이 사형장으로 끌려 가게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조선을 일컬어 '한 번 가면 돌아올 수 없는 죽음의 땅', 심지어 "순교하러 가는 곳"이라고 부를 정도였으니 그 살벌함을 짐작할 만하다.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는 중국, 조선 등으로 파견되는 신부와 주교를 전담하여 관리했는데, 1839년 기해박해 때 처형된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 주교[6], 모방 나 베드로 신부, 샤스탕 정 야고보 신부 등이 조선 최초의 프랑스인 순교자로서 유명하다. 이중 모방 나 베드로 신부는 김대건 안드레아,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를 신학생으로 선발하여 양성, 마카오로 유학보냈다. 최방제는 유학 도중 병사하지만, 김대건과 최양업은 무사히 살아남아 신부가 되었다.
병인박해 기간 중에 천주교 신자들의 목을 벤 곳이라는 잠두(蠶頭)봉은 그 뒤로 머리를 자르던 산이라 하여 절두산(切頭山)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한국전쟁이 끝나고 1956년 한국 천주교에서 사들여 성지로 조성하게 되었다. 지하철 2호선을 타고 당산철교를 건너다 보면 철교 북단 동쪽에 바짝 붙어 있는 작은 바위산이 있고, 바위산 정상에 성당이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절두산 순교성지이다. 아담하게 조성한 야외공원과 유물을 전시한 박물관도 있기 때문에 신자가 아니더라도 한 번쯤 가서 구경할 만하다.
1886년 프랑스와 수교 이후 프랑스가 적대국이 아니게 되어 천주교가 간첩 및 반역행위가 아니게 되었고, 프랑스 측의 요구로 가톨릭을 선교할 수 있게 됨으로써 선교가 허락되었다. 그러나 정작 제대로 믿는 사람들은 박해 때 싸그리 다 죽었고, 개항 이후에도 여러 차례 교난을 겪으면서 진통을 겪는다.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한국전쟁이 벌어질 때까지 대부분의 시골에서는 양반-상놈 체계가 잘만 유지되었음을 상기하자. 국가에서 탄압 해제를 선언했다고 해도, 깡촌에서는 가톨릭을 믿는다는 이유로 이웃 주민들이 구타, 약탈, 강간, 살인을 저지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이렇게 100년 동안이나 계속된 박해의 후유증은 상상 이상으로 컸다. 또한 프랑스 등 유럽에서의 전교 지원 또한 미미하여 미국을 앞세운 개신교에 세력이 밀리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혹독한 박해를 겪고도 자생하여 교회를 유지시킨 역사는 바티칸 등 세계에서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는다.
탄압당한 신자들은 복자나 성인의 대열에 들어가기도 하였는데, 특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을 방문하면서 여의도광장에서 당시 순교자들 중 103명을 한꺼번에 성인으로 시성한 것도 이러한 평가가 배경에 깔린 것이다. 복자나 성인으로 추대되려면 교황청에 의해 한명 한명 지루할 정도로 철저한 심사를 거쳐 추려 낸다는 점에서 김대건 안드레아, 정하상 바오로와 101위 동료 순교자 103명은 아주 굉장한 숫자이다. 또한 한꺼번에 시복/시성된 숫자로서도 가톨릭 역사상 최대이며, 시성식 장소가 성 베드로 대성당이 아니라는 것 가톨릭 역사상 유래가 없는 일이라고 한다. 이는 한국 가톨릭이 가장 자부심을 느끼는 역사이다. 그리고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때 조선왕조 치하의 순교자 제1차 시복(124명) (즉,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을 했다.
물론,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1801년 박해의 원인이 된 황사영 백서 사건은 지금도 말이 많다. 이 황사영은 다산 정약용의 큰 형인 정약현의 사위였다. 이 백서 사건 덕에 이루어진 가톨릭 박해로 정약현의 아우인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는 참수형으로 순교하고, 세례는 받았으나 실질적으로 가톨릭 신자가 아닌 정약전, 정약용까지 18년씩이나 유배를 당하게 된다. 어쨌든 이 사건에서 신앙의 자유를 보장받기 위해 외국 군대를 불러들여 자기 나라를 지배하라고 하는 건 누가 봐도 매국노가 할 짓이다. 그것도 군함 수백 척과 정예군 5~6만 명을 보내달라고 했다.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이 고작 2천 명도 안되었음에도 그 난리가 났던 걸 생각해보면, 이 정도 병력이 침략하면 조선은 임진왜란급 전란에 시달렸을 것이다. 물론 당시 프랑스는 나폴레옹이 유럽 각지와 멀리 아이티를 비롯한 곳에서 싸움을 벌이느라 조선에 이 많은 병력을 보낼 형편은 못 되었지만, 병인양요 급의 파병은 마음만 먹으면 가능했다.
황사영 백서는 의금부 관리들이 보고서를 올린 뒤 백서를 문서궤에 넣어 보관하기에 앞서 한 부 베껴두어 세상에 전하게 되면서 내용이 「벽위편」이나 「동린록」과 같은 척사관계 기록에 포함될 수 있었다. 그 백서의 사본 가운데 하나는 프랑스인 선교사들의 손에 들어와 1860년대, 다블뤼 안 안토니오 신부[7]가 조선 가톨릭회사에 관한 비망기를 작성할 때에도 주요 자료로 활용되었다. 그리고 프랑스인 신부들이 병인박해와 같이 이 사본의 내용을 들먹이면서 병인양요의 명분이 되었으니 기어코 조선에 전란을 가져오게 했다. 약 1천여 명의 사상자 및 규장각 서고를 비롯한 무수한 문화재를 프랑스가 약탈하게 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된 셈이다. 당시 실권자인 벽파들이 가톨릭 박해에 크나큰 명분으로 삼아도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안동 김씨의 당시 실권자이자 시파인 김조순은 "천주교인에 대한 대규모 처형은 민심을 요란하게 만든다"고 보류했는데, 김귀주를 비롯한 벽파들이 "천주쟁이들이 크나큰 화를 불러올 것"이라고 김조순에게 거듭 간청하다가 이 백서 사건이 드러나면서 제대로 기회를 잡았다. 결국 온건책을 쓰던 김조순도 백서 사건을 전해듣고 충격과 공포에 빠져 결국 강경책을 쓰게 한다. 결국 황사영은 거열형이라는 참혹한 형벌을 받고 죽었다. 나아가 지방 유생들 등 '가톨릭은 양놈 군대의 침략을 권유하는 사교'라는 전국적인 인식이 퍼져 가톨릭 혐오에 이르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
이 때문에 그를 순교자로 기리면서도 천주교회에서는 황사영의 이러한 외세의존적인 태도를 비판한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굿뉴스 홈페이지 가톨릭대사전에는 "한편,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황사영의 ‘대안제시’를 반민족적 행위로 규탄하고 있다. 그러나 근대 민족주의가 성립되지 않았던 상황 아래서 제시되었던 그의 ‘몽상’을 반민족주의로 규정하는 데에는 재고가 요청된다. 그러나 그의 '대안제시'는 마땅히 비판을 받아야 한다. 그는 신앙의 자유라는 좋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무력의 사용, 국가생존권의 부정이라는 좋지 못한 방법을 사용하고자 했기 때문이다"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
그리고 한국 가톨릭 주교회의에서 추진 중인 124위 시복시성에 황사영 알렉시오, 그리고 그를 도왔던 황심 토마스, 김한빈 베드로 등은 결국 최종 시복시성 대상자에서 제외되었다. 이유는 "황사영이 순교자인 것은 확실하지만 교회 밖, 즉 국가에 해를 끼칠 수도 있는 행위를 했기 때문에 제외했다"고 한다. 그들은 1990년 최초로 시복시성 계획 당시에는 명단에 있었지만, 2000년대 최종 확정 과정에서 제외되었다. 이외에도 배교 행위가 강력하게 의심되는 정약용과 정약전도 보류되었는데, 말이 보류지 사실상 시복시성할 의사가 없다는 의미다.
다른 수치스런 역사로는 100년 후 벌어진 1901년 이재수의 난이다. 제주도에서 프랑스인 신부를 주축으로 행패가 워낙 심했기에 제주도민들이 들고 일어나서 제주도 내 가톨릭인 300여 명을 살해할 정도로 그만큼 반감도 장난 아닌 걸 알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이재수 항목 참조. 100년 가까이 묻혀진 이 사건은 1999년 영화 <이재수의 난>으로 잠깐이나마 알려졌다. 당시 이 영화를 "반가톨릭 영화로 봐야 하는가?"라는 등의 논란이 가톨릭 내에서 있었다고. 제작비 40억원으로 만들어 5억원 남짓 벌어들이는데 그친 흥행 실패 말고도 평도 매우 나쁜 작품으로 괜히 묻혀진 게 아니니 찾아서 볼 필요는 없다.
그 외에도 개화기 시절의 외국인 신부라는 특권을 남용하여 조선 관청에 난입하여 죄수를 탈옥시키고 주민들을 폭행하거나 범죄를 저지르고도 신부들이 대놓고 천주교 신자를 옹호하는 등, 구한말의 천주교는 매우 안 좋은 쪽으로 기록을 계속 남겼다. 그러나 2011년 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 안중근 토마스 의사 등 551명을 추가로 시복시성하겠다고 나섰는데, 여기에 황사영과 이재수의 난 때 사망한 교인 중 24명이 포함되어 있어 비판을 받았다.[8] 이에 대한 천주교계 내부에서의 반발까지 거셌는지, 결국 황사영과 이재수의 난 때 죽은 교인 중에 누구에 대해서도 시복시성 절차를 진행시키지 않았다.
박해 당시의 경험 때문에 한국 천주교 측에선 개고기에 대해 친숙하다고 한다.[9] 하지만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고, 불교에서 개종한 이들의 상당수는 아예 거부한다고.[10]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지내면서 개고기를 먹으며 목숨을 이어갔다는 야사가 있다고 한다. 신학교의 식단에 개고기가 올라오기도 하며, 성당이나 천주교 단체에서 여는 음식 바자회에 개고기 음식이 올라오기도 한다.[11] 한편으로는 동학도 교리 때문에 천주교의 이단 중 하나라고 유교 지배층들에게 탄압받는 원인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참고로, 2014년 8월 16일에 조선왕조 치하의 순교자 제1차 시복(124명)을 했고, 시성을 추진하고 있다. 그리고 조선왕조 치하의 순교자 제2차 시복시성(133명), 근현대 신앙의 증인 시복시성(81명), 총 214명의 시복시성을 추진하고 있다. 여기에는 황사영(본인), 황심, 이재수의 난으로 숨진 사람(1명), 한국전쟁 중에 공산주의자들에게 살해된 사람들이 포함돼 있다. 단, 김한빈, 정약용, 정약전, 이재수(본인), 안중근은 없다. 이에 대해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위원장 안명옥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주교는 "현재 기초자료 수집 단계에 불과하며 앞으로 10여 년간에 걸쳐 진행될 사안"이라고 말했다. 특히 신학적 측면에서 유교와 천주교와의 화해, 더 폭넓은 신앙적 시야가 필요한 연구가 동반돼야 할 것이라고도 말했다.
2.3 일제강점기
한국 천주교의 흑역사
이 시절 대부분의 종교가 그랬듯 진정한 복지부동을 넘어서서 적극적인 친일 행위를 보여준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해서 이는 정치적인 일이니 막지 않는다고 했을 정도. 신사참배 자체가 교황청에 의해 허용된 것은 1936년의 일인데, 교황청이 허용하지 않던 시기에도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신자들의 독립운동을 탄압하고 독립운동을 밀고하는 등, 추악함의 절정을 보여주었다.[12]
외국인 신부들이 개별적으로 조선인을 도와준 사례가 종종 있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외국인(서양인)으로서의 개인적 영향력에 불과했다. 이마저도 민족운동을 하는 성직자들에게 국가의 일에 개입하지 말라며 경고를 주거나 대놓고 징계에 처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아들을 신부로 키우려 했던 안중근 토마스 의사를 교회 차원에서 애써 외면하였던 사실도 었었다. 1972년 안중근 의사 탄생 100주년 기념 미사가 명동성당에서 성대하게 봉헌되는 등, 안중근 의사에 대한 긍정적 평가 자체는 예전부터 많이 이루어졌지만, 교회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건 1990년대부터의 일이다.
교회 지도자인 주교들이 거의 대부분 서양인들이었던 일제강점기 때는 아예 대놓고 무시하기도 했으며, 해방 이후에도 한동안 애매한 태도를 보여왔다는 걸 생각해 보면 놀라운 일이다. 이것은 그저 교세 확장에만 몰두하던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13] 주교와 외국인 선교사들이 당시 조선 천주교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제사 문제로 박해를 당한 영향도 있겠지만 이는 너무나도 사회에 대한 종교의 영향력을 포기한 처사였다. 이 때문에 일제강점기의 가톨릭을 친일적이라면서 비판하는 학자들도 많이 있다.
가장 욕을 많이 먹은 것은 신민회 105인 사건.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8대 교구장이자 가톨릭의 지도자이던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주교는, 안중근 일가족과 가깝게 지냈으며 사형 직전의 안중근에게 고해성사를 주었으나, 그 때문에 2개월간 명령 불족종으로 미사 집전을 금지당한 니콜라 빌렘 신부에게 후술할 정보를 알게 되었다. 안중근 토마스 의사의 사촌동생 안명근 야고보로부터 '조선인들이 데라우치 마사다케 총독 암살을 꾀하고 있으며, 그 중심에 안중근의 동생 야고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 이것을 눈길을 헤치고 가서 일본군 아카보 장군에게 밀고하여 이것이 105인 사건의 원인이 되었다.
3.1 운동 또한 일제강점기 초기 조선총독부의 철저한 감시와 탄압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있던 종교계가 주도한 독립운동이라 민족대표 33인이 전원 종교계 인사들이었다. 이 중 천도교와 개신교가 주류를 이루었고 불교 역시 만해 한용운과 백용성이 참가했지만 천주교는 단 1명도 참여하지 못 했다. 이러한 가장 큰 원인은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10대 교구장이자 최초의 한국인 주교인 노기남 바오로 대주교 이전에는 한국 가톨릭 교회의 대표격인 서울대교구(강점기 당시 경성대목구)장이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이어서 민족 운동보다는 교회의 교세 유지에 더 큰 무게를 두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당시 풍전등화와 같던 교회의 운명을 보존하려는 교황청의 노력과 맥락을 같이 하기는 했지만, 당시 나치와 공산주의를 강력히 비판하는 회칙을 반포한 교황 비오 11세나, 표면상으로는 중립을 유지했지만 비밀리에 나치의 눈을 피해 유대인들을 구제하려 노력한 교황 비오 12세의 행동과도 크게 대비되는 모습이다. 일제강점기 내내 보여준 이러한 친일행각 때문에 많은 신자들이 개신교로 개종했다는 설도 있고, 이 때의 경험을 반면교사 삼아서 이후 군사독재 시대 민주화 운동에서 천주교가 종교계에서는 가장 앞장서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철저한 정치와 종교의 분리(정교분리)이긴 했다. 이게 교회의 자발에 의한 것이 아닌, 군국주의 국가의 강압에 의해 이루어진 거란 게 문제였지만. 몇몇 교구에는 아예 본당에 일본 헌병이 들어와 사제들에게 "너님들은 군대를 가세요. 주님의 뜻입니다" 따위 소리까지 당당하게 지껄였다고 할 정도였다.
위의 이유 외에도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조선 정부가 탄압을 했던 병인박해 등의 기억이 생생히 남아있던 시기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들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탄압을 가했던 나라를 굳이 독립시키자고 적극적으로 노력할 필요가 없었으니... 그래도 간도 지방에서 무장 독립 투쟁을 했던 의민단 등 평신도 차원에서의 독립 운동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2.4 해방 직후
해방 이후 북쪽에 소련군이 진주하고 공산주의가 들어옴에 따라 간도의 연길교구[14]와 함흥교구, 평양교구의 신자, 수도자, 사제들은 모진 고난을 받았고 심지어 만주의 수용소에 끌려가 모진 고통을 겪은 독일인 수도자들도 있다. 이때 원산에 있던 덕원자치수도원은 남쪽으로 내려와 왜관 근처에서 수도원을 다시 재건한다. 성 베네딕토회 왜관 수도원. 공지영(마리아) 작가의 소설 《높고 푸른 사다리》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해방 및 6.25 전쟁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한 개신교계 구호단체가 한국에 구호물자를 배급하면서 상대적으로 개신교의 교세보다 뒤쳐지게 된다. 물론 상대적이란 것이지 가톨릭 신자 수도 꾸준하게 늘었다. 이승만과 미국 덕에 개신교가 세가 급격하게 늘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가톨릭 교회에서도 자체 판단하기론 1907년 개신교 평양 대부흥 이후 교세가 역전된 걸로 자체 판단하고 있다.가톨릭 인터넷 굿 뉴스
2009년 12월 28일, 1949년부터 1952년까지 북한에서 사목활동을 하다가 북한 공산정권에 의하여 순교한 덕원수도원장 신상원 보나파시오 사우어 아빠스를 비롯한 함흥교구, 덕원자치교구, 연길교구의 순교자 38위에 대한 시복재판이 열렸다.# 이 외에도 평양교구장 홍용호 프란치스코 주교를 비롯한 평양교구 순교자 81위에 대한 시복시성도 추진되고 있다.#
이 당시 천주교는 현대의 보수 개신교보다 더욱 보수적이고 반공적이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우리 대한민국은 극동의 민주보루로서 우리 가톨릭은 천주를 거스르고 신을 부인하는 저 악마의 소산 공산주의에 대한 투쟁을 개시한지 이미 오래전이다. 이렇게 우리는 벌써 다만 국민의 의무로서만이 아니라 또한 가톨릭의 전우로서 대한민국이 가장 필요로 하는 비행기의 헌납운동에 더욱 힘쓰자. 물론 우리는 국민으로서 또는 직장의 일원으로 그외 또 여러부분으로 이 국민운동에 벌써 많은 부담이 있는줄 안다. 그러나 우리는 반공의 최후전사로 자인하는 가톨릭이다. 우리의 정신을 다시 한 번 표시하자. 우리는 가톨릭 신자이기에 누구보다 더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을.— 가톨릭시보 1949년 11월 10일자 社告
나는 이같이 부르짖고 싶다.“볼세비키 공산주의는 내 자신의 적이요, 전 조선 가톨릭 20만 신도의 적이며 이 강산 3천만 동포의 적이며 더한층 전 세계 그리스도교의, 아니 이 우주 창조 후 아담으로부터 조물주이신 천주를 믿는 전 인류의 무덤과 저의 영혼의 적인 것이다. 옛날 네로 황제는 로마를 불살랐지만 공산주의는 전 세계의 침략자며 전 세계에 불을 놓아 멸망으로 이끌고 있는 20세기의 네로이며 지상의 뱀은 아담과 하와를 속였지만 공산주의자들은 전 인류를 그 감언이설로 속여 유혹하고저 하는 20세기의 뱀인 것이다. 공산주의적 볼세비키는 그리스도교와 그리스도교 문화에 대한 극도로 철저한, 즉 다만 이론적이 아니고 실천적 선전포고를 의미한다. 저들은 어떠한 신학적 비판적 神論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전투적 反神主義를 의미하는 것이다. 암흑의 권력이며 천주를 저주하는 마귀가 천주께 항전하였으니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은 우리 모든 신자뿐만 아니라 천주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일치단결하여 최후의 승리를 천주께 의탁하며 그 보호를 믿고 이 도전에 응전하지 않으면 아니되겠다.- 윤공이 <가톨릭청년>(1947.11)에 기고한 <볼세비키적 공산주의를 배격함>
2.5 군사독재 시절
조정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해 박해를 받았던 구한말과 저항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심지어 친일행위를 벌이기도 했던 일제강점기, 그리고 4.19 혁명 이전까지 극렬 보수반공적인 모습을 보이던 한국 천주교가 변화된 모습을 보인 것은 군사독재 시절로 평가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거치며, 천주교는 과거보다 더 민중 친화적이면서 사제들의 사회 운동 참여도 더 적극적으로 변한다. 정교분리를 강조하게 되면서, 오히려 가톨릭 쪽이 정치 권력의 눈치를 덜 볼 수 있게 되었다. 군사독재정권 시대에 탄압을 받는 민주주의, 인권 탄압을 반대하면서 정부와 큰 대립각을 세우며 이 점이 한국사회에 크게 부각되었던 것이다.
교회와 정부가 정면으로 충돌하기 시작한 것은 1971년, 故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 전국으로 생방송되던 성탄 자정미사 강론 도중 박정희 정권의 장기집권을 정면으로 비판한 일로 시작된다. 1971년 성탄 미사에서 대놓고 "비상대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것이 왜 나라를 위해 유익한 일입니까?" 라며 돌직구를 날렸던 것. 이에 빡친 박정희 대통령이 KBS에 전화를 걸어 방송 중단을 지시했고 성탄미사 생중계는 중단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후 직접 교황청에 연락해서 김수환 추기경의 직위해제를 요구했다. 물론 교황청은 이를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으며 오히려 추기경에게 이 사실을 조용히 알렸다고 한다. 당시 군사정권과의 갈등은 상당히 심각했는데, 대표적으로 유신헌법 체제인 1974년 당시 원주교구장 故 지학순 다니엘 주교가 체포되었던 사건, 1975년 4월9일 대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지 18시간 만에 전격적으로 사형이 집행된 인혁당 사건을 선교회와 외국 언론을 통해 세계에 폭로한 것을 빌미로 메리놀외방전교회 소속 시노트(한국명 진필세) 신부가 강제퇴거당한 사건 등이 있으며, 지금까지 가톨릭 교회 안에서 진보적인 목소리를 내는 정의구현사제단도 이 때부터 결성되어 활동하기 시작했다. 다만 박정희는, 정교분리를 내세워 공개적인 갈등을 빚었지만 가톨릭 자체에 대한 태도는 의외로 호의적이어서 맏딸 근혜를 서울 성심여자중학교, 성심여자고등학교, 서강대학교에 보냈으며, 종교를 가졌으면 가톨릭 신자가 되었을 것이라는 발언이 훗날 소개된 적까지 있다.
전두환 정권에서는 박정희 정권보다는 직접적 대립은 적었던 것 같지만 오히려 군사정권의 막장성은 이전보다 더 심해진 모습을 보이게 되고 교회는 더 큰 대립각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84년 첫 방한 일정에 광주광역시를 포함시켰던 점과 아래의 저 명언이 명동성당에 공권력 투입을 정부관계자들이 무려 추기경에게 협박하던 상황에서 나온 것을 보면 당시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1987년 6·10 민주항쟁이 절정으로 치닫고, 시위 주동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피신하고 있던 명동성당으로의 공권력 투입이 임박할 때 김수환 추기경이 남겼던 말은 역사적 명언으로서 부족함이 없다.
성당 안으로 경찰이 들어오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신부들, 수녀들이 있을 것이오. 우리를 다 넘어뜨리고 난 후에야 학생들이 있을 것이오.
사회 전체가 군사정권 아래 숨죽이고 있던 시절, 그와 여러 사제들의 용기 있는 언행이 한국의 민주화에 크게 기여했다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앞서 말한 자발적인 신앙 전래, 박해 수난사와 더불어 한국 가톨릭 교회가 가장 자부심을 느끼는 역사 중 하나이다. 근데, 이렇게 쓰고 보면 뭔가 거창한 것처럼 보이는데, 당시 김수환 추기경은 공권력 투입을 통보하러온 정부 관계자에게 '주말에는 항상 미사가 있습니다' 투의 어투로 이 말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만 보면 가톨릭이 진보적인 종교라고 오해하기도 하는데, 가톨릭 항목에도 있다 시피 가톨릭은 상당히 보수적인 종교다. 타 종교의 관용적인 이미지같은 것들은 바티칸 2차 공의회 이후 교황들과 각나라 주교들의 노력으로 이뤄진 것이다. 다만 한국같은 경우 당시 군사정권이 비상싱적인 막장이라 보수종교인 진보로 보였을 뿐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할건 박정희 군사독재 시절부터 전두환 신군부 시절까지 당시 야당의 거두였던 김대중이 가톨릭 신자였다는 것이다.[15] 장면부터 시작해서 가톨릭 교회는 대체적으로 가톨릭 정치인에게 매우 관대했다. 게다가 김대중만 그런게 아니라 이효상같이 정부 인사들도 가톨릭 신자들이 있었다.
즉, 가톨릭은 정치적으로 양다리를 걸친 상태였고, 여당이든 야당이든 필요에 의해서 서로의 이익을 위해서 뒤를 봐주는 관계였다. 한국인 최초 주교인 노기남 바오로 대주교를 필두로 하는 주교회의는 대체적으로 군사정권과 관계가 완만했으며, 오히려 박정희의 은사이자 대구 가톨릭계의 거물이였던 전 총리 이효상 및 여러 천주교인 정치인들과 끈끈하게 유착하여 서로 뒷문거래를 하는 등 정교유착적인 면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는 위에 언급된 노기남 대주교를 필두로 하는 주교들은 될 수 있으면 일제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정부랑 충돌을 피하려고 했고, 오히려 같은 이권을 얻을려고 친정권적인 자세를 취했다.
당시 총리였던 이효상은 대구 가톨릭계의 거물이였고, 막강한 권력을 바탕으로 가톨릭 교회의 뒤를 봐줬으며, 실제로 그는 교황청 대십자기사훈장을 받고, 그의 둘째 아들인 이문희는 신부로 서품된 지 7년만에 주교로 승진했으며 나중에 천주교 대구대교구 교구장으로 착좌한다. 밑에서 언급되는 성지조성과 관련된 부동산 및 여러 이권을 이 당시에 많이 봐줬다고 한다.
괜히 박정희가 육영수와 대구대교구 주교좌성당인 계산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딸인 박근혜가 세례를 받고 가톨릭계인 성심여자중학교, 성심여자고등학교, 서강대학교에 간게 아니다. "가톨릭 재단 소속이였던 경향신문은?" 이럴 수도 있으나 경향신문은 가톨릭 신자인 장면 사도 요한을 밀어주다가 이승만에게 찍혀서 정간 먹고 이후에는 1962년 이준구 사장이 서울대교구로부터 신문사를 사실상 인수함으로써 군사정권 때는 천주교랑 별 상관 없는 언론이였다. 천주교 대구대교구는 제5공화국 출범 시기 국보위에 참여한 이력도 존재한다.
다만 이거와 별개로 뒤로는 전두환 시절에도 밀월관계를 유지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1980년 언론 통폐합을 할 때 1도 1신문사 원칙을 내세워 가톨릭계 신문사인 매일신문에 당시 영남 구독율 1위인 영남일보를 합병시켜줘서 현재 매일신문이 경북지역의 제 1신문사가 되게 하는데 큰 도움을 준 것. 실제로 매일신문은 해당 항목을 확인해보면 알겠지만, 논조가 굉장히 보수적이다.
2.6 문민정부~현재
故 김수환 추기경은 1970~80년대에 시국관련 발언을 자주 해서인지 주변에서 정치를 좋아하는 줄로 안다고 하였다. 정작 본인은 그때마다 "성직자가 언제까지 이런 얘기를 해야 하나"라고 입버릇처럼 중얼거리며 한탄했다고.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될 때 "아~ 이젠 목소리 높여 민주화를 촉구하지 않아도 되고, 정권과 팽팽하게 대립할 필요도 없겠구나"라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고 한다(참고: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 문민정부가 가져다 준 여유).
더군다나 김수환 추기경은 시위대 탄압에 항의하여 함께 단식투쟁하던 신부들에게도 "난 예나 지금이나 아무리 명분이 좋다고 하더라도 사목자가 사목현장을 오랫동안 비워두고 무슨 일에 몰두하는 것은 찬성하지 않는다. 사목자의 본분은 자신에게 맡겨진 양떼를 돌보는 것이다. 그 본분에 소홀하면서까지 정신을 빼앗길 만한 일은 사목자에게 없다. 과거 전주교구 신부들이 유신정권에 대한 항의 표시로 무기한 단식농성에 돌입했을 때도 이같은 논리로 농성을 중단시켰다."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하였다.(참고: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 명동성당 경찰병력 투입과 노동운동). [16]
2000년대 이후 유입되는 신규 신자의 수가 우리나라 종교 중 가장 많다. 2위는 불교. 개신교의 몇몇 관습에 실망한 신자들이 가톨릭으로 옮겨가는 요인이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로 보인다. 다만 1995년부터 2005년까지 개신교가 14만 명 감소한 데 비해 가톨릭이 200만 명 이상 증가하였다. 이는 10년 동안 70% 이상 증가한 수치인데, 새로운 종교인을 거의 가톨릭이 흡수한 셈이다. 과거의 경향과는 달리는 무교인이 종교를 갖는 빈도가 점점 줄어드리라 예상되므로 가톨릭의 성장세는 다소 완만해질 것이라는 주장이 있었으나 이를 반박하기라도 한 듯 2009년 12월에는 인구 대비 신자 수가 사상 처음으로 10%를 돌파했다. 사실 반기독교 여론에서 가톨릭은 빠지는 경우가 많아 반감도 없었고[17] 1984년과 198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2차례 방한과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후 가톨릭 열풍이 불기도 했다.
특히 가톨릭과 개신교가 같은 예수 믿는 그리스도교인데도 너무 비교되는 모습 때문에 가톨릭과 비교하며 개신교를 까는 경우도 늘었고, 개신교인들도 "진정한 믿음을 찾을련다" 며 오염된 자기 교단에 등을 돌리고 가톨릭으로 갈아타는 경우가 많아졌다.[18] 당초 개신교가 중세 가톨릭이 썩었다는 이유로 종교 개혁을 일으킨 것을 감안하면 웃기는 현상이 아닐 수 없다.[19] 교황의 방한 과정에서 보여준 소박한 모습, 한반도 평화를 위한 기도 등의 모습으로 좋은 인상을 많이들 받았고, 이때 극단적 반기독교 세력이 인터넷에 교황을 함부로 까는 글을 올렸다 뭇매를 맞기도 했다.
이명박 정권의 4대강 정비사업에 대해 주교회의 차원에서 반대 태도를 표명하였다. 정치적인 이유가 아닌 '생명보호'라는 교리의 실천을 이유로 들고 있다. 예를 들어 배란주기관찰법을 피임수단으로 인정/권장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 사업 예정지에서 시국미사를 개최하고 전국의 가톨릭 교회에서 반대 캠페인을 벌이는 등의 활동은 이러한 결정에 따른 것인데, 2010년 12월 8일에는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의 4대강 사업 관련 발언으로 교계 안팎에서 갈등 상황이 빚어진 바가 있다. 정진석 항목 참조.
2012년 5월 10일, 정진석 추기경의 서울대교구장 사임 신청을 교황청이 수락하였다. 후임 서울대교구장으로 염수정 안드레아 서울대교구 총대리 주교가 서임되어 6월 15일에 취임하였고, 6월 25일에 착좌 미사가 거행되었다.[20] 2014년 2월 22일에는 서울대교구 염수정 대주교가 추기경으로 공식 임명되었다. 이로써 한국에서 3번째 추기경이 탄생하였다.
2014년 5월 7일 발표된 '교회 통계 연감 2012'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가톨릭 신자는 약 531만 명에 달했다. 한국 천주교회는 사순, 대림시기 판공성사를 6회 이상 안본 신자는 성당에 안 나오는 신자인 냉담자로 분류하되 일단 통계에 표시한다. 한국의 신자 수는 전 세계에서 47번째, 아시아에서는 5번째로 많은 숫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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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적으로 수도권 및 전라남도에서 신도의 비율이 높고, 반면 경상도 지역에서는 대체로 비율이 낮은 편이다[21]
수도권에서는 위의 이미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서울특별시 남동부지역과 과천시, 성남시 및 고양시 등 1기 신도시 지역에 주로 신자가 많으며, 특히 서해5도나 강화도 등 부속도서들이 가톨릭 강세인 인천광역시가 가톨릭이 많다. 인천의 백령도는 중국과 가까워 일찍이 복음화된 곳으로 섬 주민들의 과반수가 현재도 가톨릭 신자이고 대한민국 해병대의 6여단 군종 신부는 지역 유지일 정도이다. 인천 본토도 사정은 마찬가지라서 가톨릭이 인천가톨릭대학교와 인천성모병원을 갖고 있다. 애초 그리스도교 자체가 중국과 왕래하기 쉬운 해안지대에 주로 전해졌고 내륙은 전파가 늦었다. 인천의 경우 그리스도교 초 강세 지역이라서 인천에 정착한 화교들도 가톨릭과 개신교를 주로 믿는다. 차이나타운에 아예 중국인교회가 2개나 있을 정도.[22]
특이하게도 경상도는 타 지역에 비해서 불모지인데, 워낙 불교 강세지역이라 압도적으로 불교 신자 수가 많으며 개신교 신자들도 좀 된다. 영남지역에 가톨릭 신자가 드문 것은 지리상 가톨릭 복음이 미흡한 것도 한 몫한다. 물론 대구광역시, 부산광역시와 울산광역시 등의 대도시 지역은 가톨릭 신자가 조금이나마 있다.[23] 부산에는 영남에서 몇 안되는 가톨릭 사립학교인 성모여자고등학교가 있다.[24] 영남권 출신 가톨릭 신자 유명인으로 오상진(아브라함)과 김태희(베르다)를 꼽을 수 있다.[25][26]
호남권의 경우 전북지역은 개신교 초 강세인데 비해 전남지역은 가톨릭이 강세다. 광주광역시만 해도 가톨릭 사립학교법인인 살레시오회(남자수도회)와 살레시오수녀학원(여자수도회)이 있을 정도. 이 두 곳에서 관리하는 학교가 살레시오초등학교, 살레시오여자중학교, 살레시오여자고등학교(이상 수녀학원), 살레시오중학교, 살레시오고등학교(이상 남자수도회)까지 5군데나 된다. 광주 출신 가톨릭 신자 중 대표적인 인물들이 류화영과 류효영 자매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가톨릭 신자인 남도 출신이었다.
3 사건 사고
3.1 대구 희망원 사건
항목 참조.
4 납세와 재정 관련 정보
4.1 납세
가톨릭은 한국의 모든 종교단체 중에서 개신교의 한 갈래인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와 더불어 자발적으로 세금을 납부하여 온 단 둘뿐인 종교이다. 2006년 회계법인에 의뢰하여 스스로 외부감사를 받은 뒤 그 결과를 언론에 뿌리기도 하였다. 이는 대한민국 종교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다. 신자들이 낸 헌금과 교무금 등도 모두 종교기부금으로 처리하여 소득공제 혜택을 주고 있다. 처음엔 교무금만 하더니 어느새 주일 헌금까지. 각 교구별로 원천징수해서 납부한다는 듯.
다만 신자 입장에서 소득공제를 받기는 껄끄러운 편인데, 절차가 까다로운 게 아니라 믿음의 문제 때문이다. 특히 헌금은 자신이 가진 것의 일부를 하느님께 온전히 드리는 중요한 행사인데, 거기에서 세속적인 소득공제 등등을 받자면 그 의미가 퇴색되는 것 같이 느껴지기 쉽기 때문이다. 때문에 알면서도 신청하지 않는 사람도 많은 편이다. 다만 만일 그게 문제가 있는 행위였다면 가톨릭 측에서도 처음부터 허용하지 않았을 테니 판단은 각자 내리도록 하자.
총 16개의 교구중 12개 교구에서 세금을 낸다. 안 내는 4곳 중 2곳은 제주교구와 군종교구. 제주교구는 사람이 적다보니 헌금이 절대적으로 적어서, 그리고 군종교구는 특성상 수입 자체가 없다보니 제주교구를 제외한 다른 교구들의 지원금으로 운영되기 때문이다. 매년 10월 1일 국군의 날이 끼어 있는 주일의 헌금은 모두 군종교구로 간다. 이때 군종교구에서는 각 성당에서 신자들의 기부금도 받는다. 나머지 2곳은 평양교구와 함흥교구로 이들에 대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한편, 가톨릭의 모든 성직자들과 수도자들도 세금을 납부하고 있으며 4대보험에도 가입되어 있기 때문에 나이가 들고 은퇴를 하면 국가에서 국민연금을 수령한다.
4.2 재무제표와 수지 내역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교구 살림을 투명하게 신자들에게 알리겠다는 뜻에서 2007년부터 매년 교구청 재무제표를 공개하고 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2016년 6월 공개한 서울대교구 2015년도 재무제표를 보면, 2015년 12월 말 현재 재단법인 천주교 서울대교구 유지재단(교구청)의 자산은 7,066억 원이다. 2014년보다 336억 원 늘어났다. 자산 대부분은 토지와 건물로 5,653억 원 규모이며, 부채는 63억 원으로 2014년보다 25억 늘었다.
서울대교구 산하 각 본당들은 분기별로 자금 수지 내역을 공개하고 있다.
5 교구
☧ 한국의 천주교 교구 | |
서울관구 | 서울대 · 인천 · 수원 · 의정부 · 춘천 · 원주 · 대전 · 평양 · 함흥 |
대구관구 | 대구대 · 부산 · 안동 · 마산 · 청주 |
광주관구 | 광주대 · 전주 · 제주 |
교황청 직속 | 군종 · 덕원자치수도원 |
평양교구, 함흥교구, 덕원자치수도원은 침묵의 교회임 |
한국 가톨릭교회에는 17개 교구가 존재하며 교황청 직속의 면속구와 군종교구가 각각 1개씩 존재한다. 17개 교구는 면속구와 군종교구를 제외하면 모두 3개의 관구에 나뉘어 속한다. 관구는 하나 이상의 교구들이 하나의 대교구를 중심으로 뭉쳐 지역교회로서의 연대를 이루는 것으로 중심 대교구의 대주교가 관구장을 겸한다. 예를 들어 서울대교구의 대주교는 동시에 서울관구 관구장 주교를 겸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에 교계제도가 확립된 것은 1962년이다. 그 이전에는 정식 교계제도 설정 이전에 임시적 성격으로 '대목구(Apostolic Vicarate)' 체제가 설정되어 있었으며, 대목구장들은 사실 관할 대목구의 주교가 아니라 명의주교로 주교품을 받은 후 실질적인 대목구 관할 업무를 맡았다.
덕원자치수도원, 평양교구, 함흥교구, 서울대교구 황해감목대리구, 의정부교구 일부(개성본당 및 관할 공소), 춘천교구 일부(평강본당, 포내본당, 이천본당 및 관할 공소)는 북한 치하로 넘어가 침묵의 교회라 하여 현재 실질적으로 관할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 지역은 아래 취소선으로 표시.
여담이지만, 몇몇 교구의 관할구역은 법원 관할지역과 똑같다. 광주관구는 아예 광주고등법원 관할구역이라 할 수 있으며, 수원교구 내의 성남대리구와 안양대리구는 아예 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과 안양지원 관할구역과 동일하다. 대전관구도 이 지역 자체가 대전지방법원 관할구역이다. 이 외의 지역은 약간씩 차이가 있다.[27]
- 관할구역 : 서울특별시
- 황해감목대리구(옛 감목대리구청 장연성당): 1942년 폐지, 2008년 부활.
- 천주교 춘천교구(주교좌 죽림동성당)
- 천주교 원주교구(주교좌 원동성당)
- 천주교 대전교구(주교좌 대흥동성당)
- 천주교 평양교구(주교좌 서포성당) - 서울대교구 대주교가 대리
- 관할구역 :
평안남도, 평안북도
- 관할구역 :
- 천주교 함흥교구(주교좌 없음) - 춘천교구 주교가 대리
- 부서져서 없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없다! 사실 원래 함흥교구는 원산대목구로서 원산성당을 주교좌로 하였는데, 1940년 원산대목구가 함흥교구와 덕원자치수도원구로 분리되면서 1945년까지는 일제의 탄압으로, 이후에는 북한의 탄압으로 주교좌 본당을 짓지 못하였다. 그나마 있던 원산성당은 1949년 폐쇄되었다.
- 관할구역:
함경남도(원산시, 고원군, 문천군, 안변군 제외), 함경북도
- 천주교 부산교구(주교좌 남천성당)
- 울산대리구
- 관할구역 : 울산광역시
- 천주교 안동교구(주교좌 목성동성당)
- 천주교 마산교구(주교좌 양덕성당)
- 천주교 청주교구(주교좌 내덕동성당)
- 광주관구
- 천주교 광주대교구(주교좌 임동성당)
- 천주교 전주교구(주교좌 중앙성당)
- 관할구역 : 전라북도
- 천주교 제주교구(주교좌 중앙성당)
- 관할구역 : 제주도
- 관할구역 :
함경남도 원산시, 고원군, 문천군, 안변군
- 관할구역 :
- 옛 조선관구 소속 교구 : 연길교구(1907년 북만주대목구에서 조선대목구 관할로 편입 → 1922년 원산대목구 관할로 편입 → 1928년 연길지목구로 독립 → 1937년 연길대목구로 승격 → 1946년 심양관구로 편입, 현재는 심양관구 길림교구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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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인구주택총조사에서 종교 관련 조사를 표본조사로 하였다.
- ↑ 사실 임진왜란 시기 조선인 신자에 대한 재인식 등등으로 인해, '최초의 신자'라는 호칭은 흔들리고 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의 시작이 이승훈 베드로가 받은 세례에서 시작되었음은 부정되지 않는다.
- ↑ 가톨릭 교리상으로는 신자도 세례를 줄 수 있다. 다만 어디까지나 임종이 가까운 환자처럼 급박한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허용되며, 이마저도 완전한 형태를 갖추기 위해서는 영세자의 상태가 호전된 뒤에 반드시 충분한 보충 교리를 받고 사제에게 세례를 받아야만 한다. 세례성사 참조.
- ↑ 이때 최초의 한국인 신부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순교했다.
- ↑ 다만 이상하게도 황사영 백서 사건 이전에는 조선 정부가 양반만 잡았다느니 부녀자는 죽이지 않았다느니 하는 오해가 있는데, 이는 근거가 없다. 신유박해 때 순교하여 시복된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 중에는 아이와 여인들도 있다. 또한 백서 사건 이전에는 박해가 가록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병인박해와 비교하면 소규모로 보일 뿐이지 신유박해는 당시로서는 조선 역사상 초유의 대규모 박해였다. 상식적으로 남녀노소 사농공상 가리지 않고 300명을 죽인 사건을 소규모 작해라 부르진 않는다.
- ↑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2대 교구장
- ↑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5대 교구장. 병인박해 때 순교, 1868년 시복,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 때 시성되었다.
- ↑ 참고로 개신교에서도 조선인들을 죽인 무장 상선인 제너럴 셔먼호에 탑승하여 조선에서 효수된 미국인 로버트 저메인 토머스 목사를 순교했다며 '토마스 교회'를 세우고 찬양하고 있다. 이점에 대해선 개신교 내부에서도 논란이 있다.
- ↑ 그래서일까... 성당 모임에서 복날이 임박하면 "언제 한번 개 파티 하자"(개고기 먹자!!!) 한다고 한다.
- ↑ 이들은 불교 시절의 관념이 남아 있어서 그렇다. 한 편집자는 3대 종교를 겪었으나, 개고기만큼은 불교(특히 천태종) 시절의 관점으로 보고 있다.
- ↑ 모든 성당이 다 그렇지는 않다.
- ↑ 다만 신사참배에 대해서는 좀 옹호할 건덕지가 있는데, 일본 신사참배는 중국식 제사와 세트로 묶여서 교리적으로 토론되던 사항이다. 그리고 20세기에는 종교적 지향점 없이 전통적이거나 국가적 의례 등의 이유로 이런 행위를 하는 것은 우상숭배가 아니라는 관점이 강해지고 있었으며, 그렇기에 신자가 중국식 제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교황청의 관점도 어느날 갑자기 바뀐게 아니라, 중국과 일본 천주교회의 관점을 교황청이 옳다고 보증을 서준거에 가깝다. 즉 정치가 아니라 순수하게 종교 본연의 입장에서 보다면, 중국식 제사를 허용한다면 일본식 신사참배도 허용하여야 했다.
- ↑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8대 교구장
- ↑ 연길교구는 조선인 신자가 많다는 특성상 조선관구에 속해 있었다.
- ↑ 오죽했으면 가톨릭의 별명이 김대중교였겠는가.
- ↑ 참고로 이때 노조도 대규모 병크를 터트렸다. 명동성당 안에 쓰레기 방치하는걸 넘어 성탄구유에 오줌을 싸갈기는 천하의 개쌍놈 짓거리를 하는 바람에 신자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 ↑ 실제로 인터넷에서 허구한 날 동네북으로 까이는 개신교, 은근히 비리가 터져 땡중이니 소리 듣는 불교에 비해 가톨릭은 비리나 말썽이 거의 없어 여론이 우호적인 편이다.
- ↑ 개신교 인구가 급감하는 데는 이렇게 교파 이동으로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경우가 많아서이다. 물론 타종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경우도 많지만 가장 돋보이는 경우는 같은 그리스도교인 개신교에서의 교파 개종. "개신교는 술담배도 금하고 너무 융통성 없어 안 맞는다"며 개종하는 사례가 많다.
- ↑ 현재 개신교계 중 진보적인 성공회나 루터교 등의 교파를 중심으로 제3종교개혁론이 나올 정도이다.
- ↑ 다만 정진석 추기경의 추기경직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선종 시까지 계속 유지된다.
- ↑ 물론 비율이 낮아도 대구광역시와 부산광역시, 울산광역시 등 대도시는 인구 자체가 많기 때문에 절대적인 수는 적지 않아 주교좌가 설치될 정도로 신자가 꽤 많은 편이다. 울산 출신인 오상진, 부산 출신인 김태희도 가톨릭 신자이다.
- ↑ 그리스도교 신자가 많은 중화권으로는 홍콩, 마카오, 싱가포르가 있다.
- ↑ 위에 지도에서 가톨릭 항목을 보면 대구, 부산 등의 대도시권에만 초록색이 칠해져있다. 특히 경상도 내륙을 중심으로 불교가 주류인데, 그럴수 밖에 없는 게 불국사나 해인사 등 고찰이 많은 곳이다.
- ↑ 영남권에서는 이상하게 가톨릭 학교를 찾기 힘든 편인데 부산에 성모여고가 있다.
- ↑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문재인(디모테오)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또한 가톨릭 신자다. 김태희의 경우는 출신 학교 때문에 부산보단 울산을 떠올리는 분들이 많을 듯.
- ↑ 여담이지만 문재인은 부모님이 이북 실향민 출신이고, 김태희, 오상진은 아버지가 전라도 출신이라는 것은 함정(...)...
- ↑ 이를 뒷받침해주는 부분이 바로 대교구 설치에서 드러나는데, 서울을 제외한 지방 대교구를 대구와 광주로 설정한 이유가 정부 수립 이후 설치된 지방 고등법원 소재지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참고로 부산은 의외로 늦은 1987년, 대전은 1992년에 설치되었고 수원에 고등법원이 2019년에 설치될 예정이라고 한다.
물론 수원교구가 대교구로 승격되는 건 아니다. 부산과 대전도 아직 그대로인데.. ㅠㅜ이 와중에 광역시 소재지임에도 불구하고 고등법원이 없는 인천과 울산은 의문의 1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