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브러햄 링컨

(에이브리함 링컨에서 넘어옴)
역대 미국 대통령
15대16대17대
제임스 뷰캐넌에이브러햄 링컨앤드루 존슨
공식 초상화
풀네임Abraham Lincoln
출신정당공화당
생몰년1809년 2월 12일 - 1865년 4월 15일(56년 2개월 3일)
재임기간1861년 3월 4일 ~ 1865년 4월 15일(4년 11일)
서명
193cm위너

1 개요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이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 게티스버그 연설

미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이자 가장 인기있는 대통령.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으로 최초로 건국 당시 13주 이외의 지역에서 태어난 대통령이기도 하였다. 미국의 현대사를 논하는데 빠질수 없는 인물이자 정치가로 그가 남긴 게티즈버그 연설은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이 인용된 연설 중 하나이자, 가장 위대한 연설로 손꼽히고 있다. 남북전쟁의 봉합과 노예 해방 선언 발표로 미국을 하나의 나라로 모은 업적으로 영웅시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널리 존경받는 인물이다. 역대 미국 대통령 가운데서도 국부 조지 워싱턴과 함께 가장 후한 평가를 받아, 전문 역사학자들과 미국 대중들 모두에게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손꼽히고 있으며 아직까지도 미국인들이 사랑해마지 않는 대통령이다. 다사다난한 일대기로 대중매체에 자주 등장하기도 한다.

2 생애

2.1 가난, 낙선과 패배로 점철된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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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9년 2월 12일[1] 넉넉치 못한 목수 토머스 링컨(1778~1851)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토머스가 확고한 기독교적 신념의 소유자라 매우 독실한 기독교 가정의 틀에서 자랐다고 한다. 남매로는 누나인 세라 링컨 그릭스비(1807~1828)가 있는데 살던 곳이 워낙 시골 개척지라서 주변 이웃이 없던 탓에 누나와 친하게 지내며 놀았기에 누나와 정이 많았는데 세라는 결혼해서 아기를 낳다가 21살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나 링컨을 슬프게 했다. 링컨 아버지가 그 주에서 3번째 고액 납세자라는 과세자료를 들어서 링컨은 아버지가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아버지와 사이가 나빠 보살핌을 받지 못해서 부유하게 자라지 못했다는 해석도 있다.[2]

그러나 자세한 사정을 알아보면, 링컨의 아버지 토머스 링컨은 원래는 켄터키 주에서 15번째 가는 부농이었으나 링컨이 태어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3번의 파산을 경험한 후 인디애나 주로 건너왔다. 더군다나 재혼 후에 식구가 불어나자 생활고에 찌들었다는 일화는 잘 알려진 것이기도 하고, 링컨에게 공부가 아닌 농사와 노동의 길을 강요하며 생계의 짐을 지웠다는 일화 역시 잘 알려져있고 링컨 스스로도 자주 언급한 바 있다.[3] 그러므로 아버지의 파산 이후로는 식구 모두가 원체 가난하게 살았다는 설이 더 신빙성 있다. 토머스 링컨은 새 아내인 낸시나 딸인 사라와 달리 교육보다는 노동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 인물이었고, 동네 사람들이 "애를 너무 부려먹는다"고 할 정도로 링컨을 빡세게 굴려 아들의 교육받을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 상당히 독선적인 아버지였다고 한다. 아들이 시간을 쪼개 독서와 공부에 매진하면 일을 안하려고 게으름 부린다고 생각했다고. 화전민에 가까운 개척농 집안이었다는 것과 아버지 본인이 까막눈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충분히 그렇게 단정했을 수도 있다.

링컨도 이것에 대해 불만을 품어 이후 자신은 아들(특히 셋째 윌리와 막내 테드)에게 매우 자상하고 친밀한 아버지가 되었다고 한다. 긍정적이시네 링컨: 나는 아빠처럼 살진 않을 거야! 심지어 아버지가 어릴 때부터 굴렸던 기억 때문에 노예해방 사상을 품게 되었다는 주장(영어)도 있다. 즉, 당해봤기에 인간이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노동하는 것에 대한 반감을 품었다는 얘기.

링컨의 친어머니 낸시 링컨(1784~1817, 혼전 이름은 낸시 행크스)은 그가 8살 때 독초를 먹은 소의 우유를 먹고 걸리는 밀크병(Milk sickness)에 걸려 죽었다. 그 후 아버지는 재혼했는데, 새어머니인 세라 부시 링컨(1788~1869)는 책을 좋아하던 링컨을 따뜻하게 감싸주고 지원했다.[4] 토머스 링컨이 아들에게 노동의 길을 강요할 때조차도 링컨을 지지하고 도와주며 그의 배움에 대한 열정을 지원해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링컨은 정규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지만 풍부한 독서로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에이브러햄 링컨 남매의 이 일화는 신데렐라, 콩쥐팥쥐나 지금은 종영한 MBC <꼭 한번 만나고 싶다> 등의 사례로 쌓인 계모에 대한 편견을 해소하는 사례로 흔히 인용된다.[5]

돈을 벌 겸 독립하려는 생각으로 집을 나와 미시시피 강을 따라 루이지애나로 간 뒤 그 후 우체국장, 뱃사공, 측량기사, 프로레슬러 등을 전전하다가 사업을 실패하고 다음해 치른 1832년 일리노이 주 의원 선거에서도 13명 중 8위로 낙선했다. 이듬해 그는 또 사업에 실패. 일설에 의하면 이 두번의 사업 실패의 빚을 갚는 데만도 17년이 걸렸다고 한다.아버지처럼 살기 싫었는데 어째 따라가고 있다

1846년. 첫 하원 당선 당시.1860년. 특유의 수염이 없는 면도한 모습이 정말 어색하다.

그러나 간신히 변호사 자격증을 따고 1834년 일리노이 주 의원 선거에 다시 출마해 당선, 정치생활을 시작한다. 하지만 일리노이 주 의원 의장에는 낙선. 1840년 대통령 선거인단으로도 낙선, 1844년에는 연방하원 의원 공천 탈락, 1846년에야 간신히 하원의원에 당선되니 그의 나이 37세. 엄청 늦은 것이었다. 한국에선 젊은 의원인데?

다시 1855년 연방상원의원 낙선, 1856년 부통령 후보 경선에서도 1/3정도의 지지(110/350)만 받으며 월리엄 데이튼에게 낙선, 1858년엔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시 유명 정치인이던 스티븐 A. 더글러스와 경쟁을 벌인다. 이 선거에서도 링컨은 낙선했지만, 노예 문제에 대해 단호히 반대입장을 밝혀 대표적인 노예제 폐지론자로 우뚝서게 된다.[6] 당시에는 미 연방 상원의원을 주의회에서 간접선거로 선출했기 때문에, 링컨에 대한 지지 자체는 더 높았으나 선출되진 못했다고 한다.

결국 1860년, 노예제 문제로 첨예한 갈등을 빚고 있던 상황에서 링컨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당시 여당인 민주당이 북부 민주당(스티븐 더글러스)과 남부 민주당(존 C. 브레킨리지)으로 쪼개지면서 링컨으로선 어부지리였던 셈이다. 당시 스티븐 더글러스는 노예제를 각 주의 선택에 맡겨야 한다는, 민주당 출신치고 나름대로 중립적인 발언을 해서 브레킨리지를 대표로 한 남부 출신 인사들의 미움을 산 것이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7][8] 또한 이 선거는 당선자의 득표율이 40%를 넘지 않은(39%) 유일한 선거다. 공화당의 분열 덕에 당선된 것으로 유명한 우드로 윌슨도 41%는 됐다(...).

여하간 정리하면 그는 인생에서 두 번의 사업 실패, 10번의 선거 중에 7번의 낙선을 밟았다. 거기에 10살 때 어머니를 잃고, 20살 때 누이를 잃고, 27살 때 약혼자를 잃고, 42살 때 둘째 아들, 53살 때 셋째 아들을 먼저 보내는 슬픔을 겪었다. 그리고 자신도 제 명을 다하지 못했고, 아내도 악처였다고 한다. 게다가 평생의 훼방꾼(더글러스)이 따라붙어 곤욕을 치루기까지 했다. 이 글을 보는 웬만한 위키러들은 최소한 고졸 이상의 학력을 보유하고 있겠지만, 그는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다. 가히 실패와 낙선으로 점철된 인생에서 도약하여 성공한 이룩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라 할만 하다. 이후에도 파란만장한 생을 살다갔지만... 혹시 지금 실패만 거듭하다가 우연히 이 항목을 보았다면, 링컨의 사례를 보고 용기를 얻도록 하자.

물론 당시 미국에서 무학이라는 것은 별 약점도 아니었고, 드문 일도 아니었다. 당시 평균 학력은 무학~초등학교 수준이었고,부자들은 기숙학교나 가정교사를 이용했고 대학도 부유한 집에서 교양 및 과시용으로 다니는 게 아니라면 순수하게 학문 자체를 하려는 사람들만 갔으며, 하다못해 변호사가 되더라도, 변호사 사무소에서 일 좀 배운 뒤에 개업하는 경우가 더 많았을 정도였다. 이처럼 정규교육을 안 받고도 자기 분야에 필요한 실력을 갖추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정규교육과정 자체가 모든 국민에게 적용되어 사회화의 과정이자 공적 학력/실력의 척도인 현대와 비교하면 몹시 곤란하다.

여하간 학벌이 무조건 중요한건 아니라는 정도의 교훈을 주는 예시. 하지만 점점 대학 졸업장 있어도 힘들어지고 있어서 다들 생계를 이으면서 대학에 다니거나 독학사를 따고 있지...

2.2 분열된 국가를 통합하고 영웅이 되다

1862.10.03. 왼쪽부터 앨런 핑커턴,[9] 링컨, 존 알렉산더 매클러낸드[10]

그러나 남부는 그의 당선 즉시 강한 노예제 폐지론자가 대통령이 된 것에 대해서 심하게 반발하고 당선 직후 연방 탈퇴를 선언했으며, 그의 취임 직후 1달 만에 남북전쟁이 발발한다.

전쟁 중이던 1864년 어렵사리 재선에 성공하였다. 결국 1865년에 남북전쟁은 남부의 항복으로 끝났지만, 종전 11일 후 그는 극렬한 남부 지지자였던 배우 존 부스에게 암살된다. 이 때 주치의가 상처에 미라 가루를 뿌렸다는 기록과 총알 꺼낸다고 눈을 쑤셨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흠좀무. 한편 부스 추적과 일당 재판에 대해서 괴담에 가까운 이야기들이 전해오는데, 역시 대통령 암살이라는 사건이라서 그럴 것이다.

링컨은 아직도 미국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인데, 그의 일생이 마치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11] 영웅적이고 인도주의적인 행보와 거룩한 희생으로 끝맺어졌다는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한 나라로서의 미국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링컨 이전의 미국은 어디까지나 각 주(州)의 연합체였을 뿐 한 나라라는 의식은 희박했다. 조지 워싱턴이 물려준 미국이 주끼리의 이해관계가 맞지 않으면 언제든지 해체할 수 있는 연맹이었다면, 링컨이 물려준 미국은 하나의 나라이자 운명을 같이하는, 그야말로 진정한 '미중국 The United States'였던 것이다. 그때까지 "The United States are~"라고 복수형으로 표현해서 주들의 연합체로 표현하던 합중국을 링컨 이후에는 "The United States is~"라고 단수형으로 표현해 하나의 국가라고 표현하게 되었다. 링컨 기념관에 새겨진 헌사가 '이 성전에는 미합중국 국민들의 마음을 담아 미국을 구원한 에이브러햄 링컨에 대한 기억들이 영원히 간직될 것이다'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래서 링컨은 역대 미국 대통령 인기조사 시에는 거의 항상 1위를 차지하며 역대 미국 대통령 중에서 건국의 아버지 조지 워싱턴보다 미국 국민들에게 더 지지를 받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다. 지금까지도 지속적으로 전문가들에게서 모든 미국 대통령 중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꼽히고 있다. 덕분에 그의 전임자 뷰캐넌과 후임자 앤드루 존슨은 인기조사 최하위를 두고 경합을 벌이는 수준이고, 전전임자인 프랭클린 피어스, 전전전임자인 밀러드 필모어도 바닥을 긴다. 후후임자인 율리시스 S. 그랜트도 1913년부터 50달러 지폐의 모델이었으나 꽤나 최근까지 하위권이었다. 무서운 링컨의 그림자(...).

따지고 보면 까마득히 전인 앤드루 잭슨의 재선 이후 이후 링컨이 당선된 32년 동안 연임에 성공한 대통령이 하나도 없었고, 링컨 이후에도 연임 대통령은 그랜트를 제외하곤 한동안 없었다. 그로버 클리블랜드는 띄엄띄엄 임기를 보냈고, 윌리엄 매킨리암살당했으며, 시어도어 루즈벨트캘빈 쿨리지는 승계 후에야 연임, 윌슨은 반신불수로 보냈으니, 결과적으로 진정한 연임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때나 이루어진 것이다.

3 링컨과 노예제

1865년

링컨은 노예제를 반대했지만 그가 극렬히 몸 바쳐 노예제 폐지에 목숨을 걸었던 것 까지는 아니다. 그의 가장 큰 목표는 미국에서 분리되어 나가려는 남부의 노예 주(州)들을 저지하려는 것이었다.

심지어 일반적인 인식을 생각하면 다소 충격적인 발언도 했다.

연방을 지키기 위해 노예제가 필요하다면 그렇게 하겠다.

연방을 지키기 위해 노예제를 폐지해야 한다면 그렇게 하겠다.
연방을 지키기 위해 두 가지 방법이 다 필요하다면 그 역시 그렇게 하겠다.[12]

이 말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다른 예로, 일리노이 주 연방 상원의원 선거운동에서는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른 말을 했다.

이 사람 저 사람이니, 이 인종 저 인종이니, 다른 인종은 열등하므로 열등한 위치에 놓여야 한다는 등의 이 모든 궤변은 이제 버립시다. 이 모든 걸 버리고 이 땅 전역에서 한 국민으로 단결해 다시 한 번 일어서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선언합시다. -1858년 7월 일리노이 주 북부(시카고) 영어전문
저는 백인종과 흑인종 사이에 어떤 식으로든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평등을 가져오는 것에 찬성하지 않으며, 찬성한 적도 없다고 말하겠습니다. 저는 흑인종Negroes을 투표인이나 배심원으로 만드는 것, 정권을 쥐게 하는 것, 백인들과 결혼하게 하는 것에 찬성하지 않고 찬성한 적도 없다고 말하겠습니다. 거기에 더해서 저는 흑인과 백인종 사이엔 물리적인 차이점이 있으며 그 차이점이 영원히 두 인종이 사회적, 정치적 동등관계로 살아가는 것을 방지할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럴 수 밖에 없다는 점을 고려할때 그들이 평등하게 살 수 없는 한, 그들과 함께 살고 있는 동안 우월한 지위와 열등한 지위가 남아있어야 하며, 다른 그 누구와 마찬가지로 저 역시 백인종에게 우월한 지위를 부여해야 한다는 데 찬성합니다. -1858년 9월 일리노이 주 남부(찰스턴) 영어전문

물론 그 역시 현실 정치가이므로, 그 밖의 다른 정치적, 사회적 문제, 특히 국가의 분열보다 노예제 폐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13] 만일 그렇다면 정치가가 아니라 사회운동가라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영국 및 유럽의 노예해방 사례 등에서도 보듯이 현실의 진보는 당대의 시대적 한계(왕정, 기독교 등)를 고려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역사를 봐도 알 수 있듯이 당시의 시대적 한계를 고려하지 않은 진보와 개혁은 아무리 아무리 그 시대에 필요했던 해결책이라 할지라도 외면받고 사라지기 마련이다.[14]

게다가 위에 언급된 사례는 링컨의 노예해방론자 이미지를 까기 위해 전형적인 왜곡 기법인 체리피킹, 즉 취사선택을 사용했다. 바로 위에서 인용된 바 있는 '연방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노예제를 유지하겠다'는 발언 역시 해당 발언 앞뒤에는 이런 발언이 등장한다. 이게 다 이원복 때문이다

이 싸움에서 내가 견지하는 최대의 목표는 바로 연방을 지키는 것이며 노예제를 지키거나 파괴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그 어떤 노예도 해방시키지 않고 연방을 지킬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고, 모든 노예를 해방시킴으로써 연방을 지킬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며, 일부는 해방시키고 일부는 내버려둠으로써 연방을 지킬 수 있다면 역시 그렇게 할 것입니다. 내가 노예제나 유색인에 대해 취하는 행동은 그것이 이 연방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며, 내가 삼가는 행동은 그것이 연방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중략) 나는 여기서 내 공적 직무에 대한 내 견해에 따라 내 목적을 언급하고 있으며, 모든 사람은 어디서나 자유로울 수 있다는, 내가 자주 표명했던 개인적인 바람을 수정할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공직에 있는 입장이니 국가적 상황에 따라 정 필요하다면 노예제를 유지하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나라를 유지하기 위해서 하는 것일 뿐이고, 자기 자신의 도덕적 판단에 따르면 노예제는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을 절대 바꾸지 않겠다(그러므로,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노예제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현실주의적 인식에 기반한 발언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링컨이 닳고 닳은 정치가라는 점을 생각해보자. 이건 그냥 수사법이다.

참고로 링컨이 이 말을 한 배경은 왜 일을 급진적으로 진행시키지 않느냐는 해방론자들에 대한 답변이었다. 위의 말은 1862년 7월(그러니까 남북전쟁 도중) 통과된 2차 몰수법(Second Confiscation Act)이 제대로 집행되고 있지 않고, 링컨이 여기에 대해서 태만한 태도를 보여 지지자를 실망시키고 있다고 쓴 호러스 그릴리(Horace Greeley, 당시 뉴욕『트리뷴(Tribune)』 주필)의 편지에 대한 링컨의 답장에서 나온 것이다.

전문에서 링컨은 "누군가가 노예제만 폐지된다면 연방이 분열되어도 상관없다 한다면 난 동의하지 않겠다, 누군가가 노예제를 유지할수만 있다면 연방이 분열되든 말든 상관없다 한다면 그 역시 반대한다"라고 밝히며 개인으로서의 링컨이 아닌 대통령으로서의 공직자 링컨은 연방을 지키는 일에 최우선 순위를 둘 것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표명한다. 링컨 개인은 만인의 평등이란 가치를 신봉하였지만 그 가치를 위해 나라가 분열되는 꼴을 내버려둔다면 대통령으로서 옳은 처신이 아니고 또다른 혼란만 초래할 것이라는 나름의 입장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렇게 해명한 것이다. 링컨은 특히 전쟁 초기에는 매우 조심스러운 입장을 비추었다.

그릴리의 편지를 더 살펴보자면 그릴리는 "우리의 철천지원수들에게 반역하여 평생의 압제자들로부터 탈주해온 이들이 자유와 보호를 원하여 우리에게 왔는데 그들이 맞닥뜨린 것은 적의와 감금, 그리고 살해였다고 말한다. "우리가 남부 흑인들이 우릴 위해 싸울 수 있도록 허락하든 하지 않든 간에, 정찰병·길 안내인·첩자·요리사·마부·도랑파는 인부·벌목꾼 등의 흑인이 필요"하다는 이유를 붙여 몰수법을 제대로 집행해 달라고 말한다.

정치에 갓 입문한 초짜 시절의 링컨은 어떻게 보면 그의 정적 더글라스보다 더한 인종차별로 보일수 있는 발언을 하기도 했는데 노예제를 폐지하고 흑인 노예를 아프리카로 되돌려 보내자고 주장했기 때문이다.[15] 그러나 꽤 많은 링컨 연구자들은 링컨의 주장이 인종차별적이라고 하기보다는 당시 현실을 고려한 결과라고 본다. 즉, 흑인 노예들이 해방되고 난 뒤에도 미국 사회의 편견과 차별사상 때문에 제대로 진입을 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한 결과라는 뜻이다.

링컨은 전쟁 초반, 노예 해방의 급진적 진행에 대해 다소 유보적인 입장을 취한다. 일례로 헨리 할렉(Henry Halleck) 장군은 노예들이 드나들며 적에게 군사정보를 보내고 있다고 믿고서는 1861년 11월에 전선에서 모든 탈주 노예(contraband)의 부대 입대를 금지시키고 추방하는 명령을 내렸는데, 링컨은 어떤 항의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거기다 남부와 마찬가지로 북부 역시 붙잡힌 노예들이나 연방세력으로 돌아선 탈주 노예들이 자유인이 되긴 커녕 수용소에 갇혀 많은 숫자가 죽었다. 존 C. 프레몬트 장군이 1861년 7월, 미주리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연방에 반대한 그 주의 노예 소유주들의 모든 노예들은 자유라고 발표했을 때와 1862년 5월에 데이비드 헌터 장군이 조지아, 플로리다 및 사우스캐롤라이나의 모든 노예는 자유라고 선언하는 명령을 발했을 때도 링컨은 즉각 무효화시켰다고 한다. 이는 두번 다 전쟁 초기에 일어난 일인데 링컨은 이에 대해 노예해방에 대한 성급한 시도는 경계주의 상실을 의미하며, 켄터키 주를 잃는 것은 전체 전투에서 지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 전쟁 초기 양상이니 경계주와 북부 민주당원들의 남부 전향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같은 결단을 내린것이다.

그리고 두번의 장군령 모두 해방론자들 사이에서 나름의 지지를 얻긴 했지만 문제가 많았기에 링컨으로선 이를 취소시킬 수 밖에 없었다. 우선 프레몬트 장군의 경우 상관인 링컨 대통령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독단적으로 미주리주에 계엄령을 선포했는데 그 내용이 엄청난 파급효과를 불러왔다. 북 경계주인 미주리 지역에서 활발한 테러 활동을 벌이던 남부 게릴라들을 견제하기 위해 북군이 장악한 지역에서 "총을 소지한 민간인은 군법재판을 통해 처형될 수 있다"는 계엄령을 발표한 것인데 이 조치에 대한 보복으로 남군은 북부 지지자들을 처형했고 미주리 주 주변에선 그야말로 대학살이 벌어졌다. 그리고 프레몬트의 남부 지지자의 소유인 노예는 모두 해방된다는 선포는 미주리와 켄터키, 그리고 북부를 지지하지만 노예해방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수백만 명을 남부 지지자로 만들었고 오히려 더 큰 테러를 불러왔다. 경계주의 이탈, 그중에서도 특히 켄터키의 남부화가 연방의 확실한 분열과 패전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던 북군으로선 가장 두려워하던 상황이 초래된 것. 링컨이 그 조치를 취소시킬 것을 건의하지만 프레몬트가 듣지 않고 오히려 아내를 보내 링컨을 상대로 협상을 제시하자 링컨은 자신이 나서서 계엄령을 해제하고 문제를 일으킨 프레몬트를 2개월후 해임시킨 뒤 율리시스 그랜트를 임명하는 결정을 내렸다.

또 한명의 장군인 데이비드 헌터는 군사적 능력을 포함한 여러 방면에서 프레몬트보다 훨씬 유능했고 경험이 많았으며 충성심 등에 있어 링컨이 의심의 여지가 없었을 인물이란 것이 역사학자들의 평이다. 헌터의 장군령의 궁극적인 의의는 그릴리가 편지에서 요구한 것과 마찬가지로 흑인 병사들의 자유 참전이었다. 그러나 헌터의 장군령은 당시에도 말이 많았는데 우선 탈주 노예들 중 자신의 자유의지로 참전하는 용병들은 극소수에 가까웠고 백인 부대원들이 아무 설명도 없이 일하고 있는 노예들을 납치하듯 강제로 끌고 가서 입대시킨다던가 하는 경우가 많아서 흑인들 사이에서도 괴담이 돌곤 하였다. 프레몬트 때와 달리 링컨은 헌터 장군에 대해 자신의 친구이자 정직한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조치를 취소시켰고 이후 1주일 뒤 흑인 병사들을 모집하는 것 자체는 당연히 찬성이지만 강압적으로 참전을 강요하거나, 전쟁에 적합하지 않은 흑인들까지 강제 동원시키는 것을 반대할 뿐이라고 입장을 표명했다.

당시 의회에는 흑인 병사 참전을 찬성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반대하는 여론도 만만치 않았는데 반대 여론은 역시나 전쟁 초기 링컨이 가장 신경쓰고 있었던 켄터키 주를 앞세운 경계주의 의원들이었다. 헌터의 장군령이 무산으로 돌아간 이후 의회에서는 대안으로 1,2차 몰수법을 발의하는데 링컨은 이 법이 무조건적인 사권박탈법이라고 말하면서 법이 수정될 때까지 서명하는 것을 거절했으며, 거부권을 행사하지는 않았지만 그 법에 대한 자신의 불만을 표명하고 이를 수행하지 않았다.[16] 이에 대해 링컨은 의회 권력으로 이를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전쟁 사령관 직권으로 실현되어야 한다고 보았고 노예 해방 선언을 준비하게 된다.

어쨌거나 링컨은 자신의 생애 내내 노예제를 반대해왔으며 노예제를 미국의 암덩어리로 여겼다. 적절하다!! 그의 행보를 보면 알겠지만 링컨은 급진적인 혁명가라기보다는 점진적인 폐지론자에 가까웠다. 당장 해결하기에는 어렵지만 연방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사라져야할 악습이라고 생각했던 것.

그릴리와의 편지 답장에 대해서 오랫동안 여러가지 해석이 있어왔으나 일부를 제외한 대다수 역사학자들은 이것이 링컨이 노예제를 정치적으로만 이용했다거나, 노예제에 대해 반대하는 인물은 아니었다는 것의 근거가 될수 없다고 말하고 있으며 링컨이 노예제를 철저하게 연방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만으로 생각했다는 의견에도 반박하고 있다. 일부 역사학자들의 경우 그의 발언이 오히려 북부의 백인 지상주의자들에게 노예제 철폐가 아닌 "연방의 유지"라는 명분을 제공하여 그들을 회유하려는 수단이었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역사학자 스티븐 오츠의 경우 링컨이 전쟁 초반 경계주들의 이탈과 북부 민주당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했던 발언들만이 선택적으로 인용되어, 링컨이 했던 노예제 반대에 대한 다른 수많은 발언들과 당시의 정치적 군사적 맥락이 철저히 무시당하고 그릴리의 답장에 대한 해석이 왜곡되고 있다고 자신의 저서에서 지적했다.

노예정책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이 세상에서 잘못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나는 대통령이라는 나의 직책이 이러한 의견에 대해 판결을 내려야 한다는 것을 이전까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고백하건데 그동안 내가 결과를 지배한 것이 아니라 결과가 나를 지배했었던 거 같다.

링컨 본인은 대통령이라는 자신의 직책과 정치인으로서 눈치를 살필 수 밖에 없던 상황에 대한 나름의 회한이 존재했던 것 같다.

또한 초반에 급진적인 법안이 중립 입장을 취하고 있는 주들을 자극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몸을 사리긴 했어도 링컨은 꾸준히 자신이 직접 제정할 노예 해방선언을 위한 준비를 성실하게 해나가고 있었다. 링컨은 반대의사를 표명했다고 알려진 몰수법에 대해서도 의회의 권력만으론 시행시킬수 없을 것이란 생각에 자신의 직권으로 그것을 가능케하고자 계획을 세워나가고 있었다. 실제로 2차 몰수법이 발의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노예 해방선언의 초안을 내각에 발표했고 이듬해에 마침내 노예 해방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남북전쟁이라는 상황과 여러가지 정치적 상황에 신경을 쓰고 있었는데도 과감하게 노예 해방을 발표한 것, 수정헌법 13조를 통과시켜 노예제를 완전히 폐지한 것은 그 기저에 깔린 정치적 배경을 감안하더라도 위대한 업적이다.[17] 링컨의 해방선언은 향후 미국의 역사가 인종차별의 철폐로 이어지도록 방향을 결정하였다. 노예제 폐지와 인권 향상에 링컨은 커다란 공적을 세운 것이다.

4 개인사

사적으로 링컨은 굉장히 매력없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193cm의 위너거구였지만 비쩍 마르고 잘생겼다고 보긴 힘들기 때문.[18] 별로 멋대가리가 없었고, 촌에서 올라온 사람인지라 미국 남부 특유의 사투리가 약간 섞인 억양에다 목소리도 얇았다고 한다.[19][20] 얼굴도 촌스럽고 못생겨서 그의 정적들은 틈만 나면 그를 고릴라에 비유했는데 그 중에는 연방군 사령관이자 그의 재선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가 된 매클레런도 있었다. 그는 딱히 민주당스러운 건 없었지만 전쟁영웅 이미지와 링컨 재선 저지를 위해 후보로 옹립되어 상당한 득표를 했다.

오죽하면 링컨 - 더글러스 논쟁 중에 더글러스가 링컨이 두 얼굴의 사나이라고 비난하자 "저한테 얼굴이 하나 더 있다면 이 얼굴을 하고 다니겠습니까!"라고 받아쳤을까... 링컨도 울고, 더글라스도 울고, 전미가 울었다 참고로 저 발언을 한 더글라스는 본래 링컨을 개발살내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와서 시동을 걸기 위해 두 얼굴 드립을 날렸다가 난데없는 링컨의 심히 공감되는 자학개그에 관중들이 빵 터져버려 그 상태로 데꿀멍했다고 한다.[21]

여러분, 우리는 고릴라를 만나기 위하여 아프리카에 갈 필요가 없습니다. 일리노이 주 스프링필드에 가면 링컨이라는 고릴라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의 정적 에드윈 스탠턴이 한 말. 스탠턴은 더글러스 못지 않은 링컨의 숙적으로 선거기간 내내 연설할 때마다 링컨을 잘근잘근 씹으며 그를 공개적으로 적대시했다고 한다. 둘은 노예제에 대한 입장이 같아서 함께 더글라스를 상대해야 한 것을 계기로 처음 만남을 가졌는데 불같은 성격의 스탠턴이 그 당시 촌뜨기 신출내기 변호사이던 링컨을 자기와 함께 묶었다는 것에 노발대발했다는 일화도 있다. 하지만 그의 능력을 알아본 링컨은 참모진들이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반대를 했음에도 그를 남북전쟁 중 국방장관에 임명한다.[22][23]

외국 귀빈들에게 따로 귓뜸해주지 않으면 대통령이라고 도대체 상상도 못할 저 인물이 지껄인 시시껄렁하고 두서없는 연설을 읽으면, 미국인이라는게 부끄러워 뺨에 경련이 올 정도다.[24] - 시카고 타임즈 지[25]

1863년 링컨의 한 연설에 대한 신문 사설의 평가다. 그런데 중요한건 저 연설이 바로 그 유명한 게티즈버그 연설이었다는 것. 이렇듯 임기 내내 당시 미국 엘리트의 조롱과 멸시를 한몸에 받는 인물이었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정치력을 발휘해서 미국을 구해냈다는게 정말 안 믿겨질 정도.

그를 눈여겨 본 그레이스 베델이라는 소녀가 편지로 그에게 턱수염을 길렀으면 하고 조언한 일화는 유명하다. 미국에 보존되어 있는 링컨이 살았던 집에 가보면 실제로 이 편지가 그의 집무실 벽에 꽂혀 있는 걸 볼 수 있다. 실제로 링컨은 그 후로 기르기 시작한 턱수염 덕분에 사람들에게 친근감을 주었고, 인자하고 따뜻한 인상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야사에 따르면 링컨의 친구가 어떤 사람을 요직에 추천했더니 생긴 게 마음에 안든다고 기용을 안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남자는 40이 되면 자기 외모에 책임을 져야 한다." 댁이 할 말이냐 그래서 턱수염 길렀잖아 그리고는 "추천해준 사람을 만나 보니 재주는 많아 보였는데 얼굴에서 덕을 찾아볼 수 없었네. 솔직히 미안한 말이지만 그 사람의 얼굴은 성경 한 구절도 안 읽어 본 사람 같았다네!"라고 덧붙였다. 다만 링컨이 기독교인이라는 것은 여러모로 논쟁의 여지가 있다. 이건 그냥 기독교도여야 했던 게 당연했던 당대 문화적 배경의 반영.

자유분방하게 자랐기에 행동에도 그다지 기품이 없고, 업무 중에도 책상 위에 발을 올리고 책을 읽는 등 거리낌없이 행동했다. 성격은 쾌활했지만 분위기를 못 읽는 눈새였던 듯하다. 그의 측근들은 링컨이 시도때도 없이 썰렁한 농담부장님, 아니 대통령님 개그을 해대는 것이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고 회고했다(...).

젊었을 적에는 싫어하는 사람을 비방하는 글을 익명으로 신문사에 올렸는데, 그 사람이 알아내고서는 결투를 할 뻔한 적도 있었기에 그 일로 링컨은 겁을 먹어 자중했다고 한다. 젊은 시절의 링컨은 자수성가한 변호사답게 거리낌없이 남을 모욕하거나 자기 도취적인 발언을 일삼았는데 이 시점부터 변화하기 시작해 중앙 정계에 진출하는 시점에서는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소심한 링컨의 인격으로 발전했다고 한다.

성격이 제법 소심했는지 대놓고 남 앞에서는 욕이나 비난을 못하고 뒷담화를 하거나 노트에 일일이 그 사람을 욕하는 글을 잔뜩 써놓았다고 한다. 게티스버그의 연방군 사령관 조지 미드가 대표적인 케이스. 미드의 경우는 게티스버그 전투 승리 이후에 후퇴하는 남부연합군을 쫓지 않아서 사실상 전쟁의 종결을 방치한 측면이 있다. 물론 그가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는 점도 변명의 여지가 있지만 뒤늦게 추격했을 때조차도 상당한 전과를 올렸고 그 며칠 사이에 충분한 기회가 있음에도 놓쳤다는 게 안습. 사실 그 정도의 실책을 거두고도 즉각 해임이나 공개적인 비난을 하지 않은 링컨이 대인배다.[26]

4.1 링컨과 악처, 그리고 우울증

젊은 시절에 에이미 스튜어트(1812~1836)라는 여성을 사랑하여 청혼까지 했는데 그녀도 링컨을 좋아하여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로부터 몇달 안가 그녀가 갑작스럽게 장티푸스로 죽은 탓에 슬픔에 빠져 한동안 여성을 사귀지 않았다가 1842년에 메리 토드라는 여성을 소개받아 결혼하게 된다. 공교롭게도 메리 토드의 전 남친은 더글러스였다(...). 대통령 선거에 이어 또다른 승리를 거머쥔 링컨

하지만 그의 아내가 된 메리 토드 링컨(1818~1882)은 악처로도 이름을 떨치게 된다. 링컨은 공처가로도 유명했는데 메리는 아들과 형제자매를 전시에 잃은데 이어 자신의 남편마저 눈앞에서 암살로 잃은 후 시작된 극심한 편집증히스테리 때문에 자주 신경질을 부렸다고 한다. 링컨 사망 이전에도 어느 정도 있었으나 사망 후에 심해졌다. 사망 이전의 히스테리는 대부분 남부 출신 영부인에 대한 북부 사람들의 비방이 원인이었다. 사실 메리 링컨의 여동생은 남군 육군 준장의 아내였는데, 그가 서부에서 전사하자 그 전투가 연방군의 승리였음에도 공식석상에서 눈물을 보이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남부에 살던 동생을 백악관으로 불러서 며칠 묵고 가게 하기까지 하는 등, 전시에는 그다지 적절치 않아 보이는 행동을 하기도 했다. 이런 행적 덕에 남편은 미국 역사상 최고의 대통령으로 꼽히는 반면, 메리 토드는 최악의 영부인으로 꼽히곤 한다.

훗날 메리 링컨은 큰아들 로버트 링컨(1843~1926)[27]에 의해 비밀리에 정신병원에 구금된다(...). 하지만 탈출해서는 아들을 까버렸다(...). 한편 링컨 역시 우울증이 매우 심해서 메리와의 결혼식 당일에도 일어나지 못해 결국 결혼식을 다음날로 연기해야 할 정도였다. 그러니 정치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매우 힘든 삶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만 악처설을 정적들이 남부 출신으로 노예주의 딸이었던 메리 링컨을 잠재적 반역자로 간주한 내전 시기의 견해가 증폭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다만 부부 간의 사이는 제법 좋았는지 특별히 갈등없이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링컨이 부인의 성화를 참고 살았다는게 중론(...).

여기에 한 가지가 추가되니, 한국에도 번역되어 나온 책인 데버러 헤이든의 <매독>[28]을 보면 링컨이 매독 말기로 인하여 뇌가 상당수 파괴되어 있었다고 한다. 메리 토드에게 옮은 건 아니고 링컨이 젊을 때 알고 지내던 여자에게 옮았다고 한다. 일설에는 링컨 막내아들인 토머스(1853~1871)의 병사 역시 이 후유증으로 보기도 한다. 다만 다행히(?) 링컨이 총에, 그것도 뇌에 맞아 죽는 통에 정신질환의 말기 증세까지는 겪지 않았다고 한다.이뭐병 그러나 아내인 메리는 그 뒤 17년 동안 서서히 증세가 나타나면서 같은 신발을 64켤레나 마구 사고 거리에서 욕하면서 날뛰고 그야말로 참혹하게 지내야 했다고 써 있다. 이런 걸 보면 아들이 어머니를 정신병원에 가둔 것도 아주 조금은 납득이 된다

링컨은 선천적으로 지병을 갖고 태어났다. 그 병명은 마르팡 증후군으로 육체적으로는 팔과 다리가 비정상적으로 길어지며 척추나 다리가 휘기도 하며 정신적으로는 신경쇠약을 동반한다. 이것이 링컨의 우울증에 일조했다. 또한 그의 키가 지금으로 쳐도 엄청나게 크지만, 당시로서는 괴물처럼 여겨질만큼 어마어마하게 큰 것도 이 질병의 영향이 크다고 한다.

링컨은 거의 평생에 걸쳐 우울증에 시달려 왔는데 어떤 계기를 통해 우울증이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설명은 없다.살면서 그토록 많은 실패와 시련을 겪었는데 우울증이 없다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냐? 가장 인기있는 설은 그가 20대 중반일때 장티푸스로 사랑하던 여인 에이미 스튜어트를 잃고는 깊은 슬픔에 빠졌다는 것이다. 링컨의 정신장애는 그가 훗날 대통령이 되고 나서 아내의 히스테리, 어린 아들의 죽음, 전쟁으로 인한 수많은 살상 속에서 더욱 악화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링컨은 평온한 성정을 유지했고 오히려 초조·불안해 하는 각료들에게 농담을 던져 긴장을 풀어주곤 했다. 실제로 링컨 본인은 "나는 울지 않기 위해서 웃는다, 그게 전부야, 그것밖에 다른 이유가 없어."라고 말한 적이 있다(...).

5 평가

“내가 볼 때 링컨의 기묘한 점은 스스로를 객관화하는 점입니다. 즉, 또 하나의 자신이 자기 스스로를 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매우 기이하고 섬뜩하며 고도의 지능적인 현상입니다. 링컨에 관한 한 모두 그가 얼마나 지능적인 인물이었던가를 잊고 있습니다. 사실 그가 행한 모든 조치는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계산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일을 하는 방법을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 남북전쟁의 저자 셸비 푸트

“링컨은 '차갑고 계산적이며 냉정한 이성'을 갖춘 마키아벨리적 근대 정치가였다. 배신한 자를 철저히 응징하고, 목표를 위해서는 핏발을 세우며 '쉴 줄 모르는 엔진'을 켜고 돌진하는 인물이었다.”

- 링컨 전문가 데이비드 도널드, 저서 링컨(1995)에서

“링컨은 미국의 블라디미르 레닌, 미국의 오토 폰 비스마르크에 비견할 수 있다. 독재권력을 행사하면서 고도로 집중화 된 체제를 구축했다는 이유에서다.”

- 문학평론가 에드먼드 윌슨(Edmund Wilson, 1895-1972)

“링컨은 필요할 경우 매우 단호한 조치를 취하기도 했지만, 결코 독재자는 아니었다.”

- 노무현, 저서 노무현이 만난 링컨(2001)에서

“독재권력이 링컨보다 더 안전하고 고결한 사람의 손에 쥐어진 경우는 없었다.”[29]

- 링컨 숭배자 제임스 포드 로즈(James Ford Rhodes, 1848-1927)

미국에서 링컨의 위상은 인도에서 간디의 위상과 비슷하다. 노예 해방과 미국의 성장에 기여한 업적에 대한 지지도 있거니와, 대중적인 영향력이나 신뢰도 또한 엄청나다. 미국인들이 그를 부르는 애칭중 하나가 Honest Abe정직한 아베(정직한 에이브)일 정도.[30] 전문가들의 평가도 상당히 후한 편으로 전문가와 대중 모두에게 고르게 사랑받고 있다. 역대 대통령 평가에서 거의 부동의 원톱을 고수하고 있으며 아무리 못해도 최소 3위안에는 들 정도로 이런 투표나 조사 등에선 사실상 미국의 국부 워싱턴의 유일한 대항마다. 흠좀무

미국인들 사이에서는 영웅이자 위인으로 추앙되는 만큼 상당히 강력한 절대 까방권의 소유자. 그만큼 인정받는 대통령이기도 하고, 미국인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다. 흑인 인권 운동가였던 마틴 루터 킹도 표절 등 그의 결함을 지적하는 사람은 천하의 개쌍놈 취급을 각오해야 한다는걸 생각해보면 링컨과 상당히 비슷하다. 노예제 해방이라는 업적 덕에 프레드릭 더글러스나 마틴 루터 킹, 버락 오바마와 같은 흑인 인사들에 의해서도 자주 언급되는 인물이다.

특히 버락 오바마의 경우 공식 출마 선언 장소부터 링컨이 '갈라진 집' 연설을 한 장소인 스프링필드주 청사 광장으로 정하여 링컨의 신념을 언급하거나 당선되자마자 링컨의 취임식 기차여행을 오마쥬하여 본인 역시 기차를 타고 워싱턴으로 입성하는 등 링컨을 상당히 의식하는 편이다. 선임 대통령 링컨이 서명한 노예 해방법안이 백몇년 뒤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라는 나비효과를 낳은 셈이니 오바마에게 있어선 의미가 남다른 인물일듯. 케네디만큼은 아니지만 언론이나 오바마 지지자들 사이에도 두 대통령을 어떤 식으로든 연결지으려는 썰들이 많다.

앞서 말했고, 또 당연한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말 뒤집기를 잘했다고 한다. 정치가는 정치가구나 다만, 말 잘 뒤집는 닳고 닳은 정치가라는 이미지는 어린이용 위인전 등에서 무슨 도덕, 정의와 정직의 화신처럼 나타나는 링컨의 이미지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 것일 수도 있다. 당시의 평가 중에는 정치가 중에서는 제일 솔직하고 가식없는 인물이라는 평도 많으니 참고할 것. 예를 들어, 카를 마르크스 같은 경우도 '다른 사람들이 한 뼘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면서도 이념을 위해 싸운다고 말할 때, 링컨은 이념을 위해 전쟁을 벌이면서도 한 뼘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 싸운다고 말한다'고 평한 바 있다.

레프 톨스토이는 링컨에 대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자라고 극찬하였다. 아마 자신들의 소작농도 최대한 해방시키려는 톨스토이의 견해 때문일 것이다.

5.1 비판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이자 법학자인 라이샌더 스푸너의 비판.

"피로 얼룩진 돈을 빌려주는 이 사업은 사람이 저지르는 죄 중 가장 독하고 냉혹한 것이라 불릴만 하다. 이것은 마치 노예 매매상에게, 강도에게 그리고 해적에게 돈을 빌려다 주고 그들의 하수구로 돌려받기를 원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소위 "정부로부터 빚진 돈을 되갚기 위해" 강도, 노예 포획, 살인을 범하는 작자들이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참담한 악한들이리라."


현대 자유지상주의를 대표하는 론폴의 견해를 기반으로 만든 론폴 vs 링컨 영상.

구 남부연방 지역 출신들에게는 남북전쟁으로 과거 자신들의 생활영토를 깡그리 파괴했던 인물인 까닭에 종종 독재자 내지는 악당으로 묘사하는 경우도 있는데, 남부의 경우 미국 헌법에서 허용된 '저항권' 내지는 '혁명권', 즉 기본권리에 대한 중대한 침해가 이뤄질 경우 저항할 권리가 있다는 부분에서 나름대로의 이유는 있다. 내분과 전쟁이라는 국가 초유의 사태와 권력의 수단을 동원한 것 또한 비판받는다.

또한 자유지상주의자들과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들도 링컨을 굉장히 싫어한다.

5.2 미국 현대 정치에서 링컨이 미치는 영향

2005년 퓰리처 상을 받은 바 있는 작가 도리스 컨스 굿윈은 링컨의 대통령 재임기간에 대한 역사서인 권력의 조건(Team of Rivals)을 출판했다. 당내 정적들을 내각에 포함시키는 등을 부각해 링컨의 관용적인 리더십을 재조명한 책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특히 버락 오바마 현 대통령이 민주당 예비후보 시절 탐독한 책으로 유명하다. 오바마가 민주당 후보가 되자 미국 내에서 이 책을 너도 나도 사느라 동났다고 한다. 오바마는 이 책에 나와있는 링컨의 용인술을 실제로 사용하기도 했는데, 힐러리 클린턴의 국무장관 기용,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의 연임 등이 그것이다.

링컨의 내각은 윌리엄 수워드 국무장관, 샐먼 체이스 재무장관, 에드윈 스탠턴 국방장관 등 능력있고 자존심 가득한 인사들로 채워졌는데, 수워드는 사실상 공화당 창당에 1등 공신이었던 사람이라 경선때 가장 유력한 대통령 후보로 점쳐지고 있었다. 국무장관직도 자신이 촌뜨기 링컨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수락한 것인데 링컨도 이것을 알고 있었다. 또 다른 경선 라이벌인 체이스 역시 입각 전후로 자신이 링컨보다 뛰어난 인물이라는 점을 공공연하게 떠들어댔고 민주당원인 스탠턴은 사사건건 링컨에 대해 "비천하고 교활한 촌뜨기", "빼빼 마른 무식한 놈" 같은 악언을 퍼부어댄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런 결점들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입각한 후 하나같이 전시국가 운영에 있어서 뛰어난 수완을 보여주게 된다. 힐러리 클린턴도 오바마의 최대 경쟁자였고, 로버트 게이츠는 전임정부인 부시 행정부 때부터 국방장관을 역임해 왔다. 그리고 퇴임 후 실컷 오바마와 조 바이든을 깠다 실제로 오바마는 자신이 가장 본받고 싶은 대통령 롤모델로 링컨을 꼽은 바 있다.

6 링컨과 기독교

링컨의 종교적인 믿음 부분에 관해서는 현대의 역사가들도 헷갈리는 부분이 많다. 다만 기독교 여부가 아닌 이신론무신론의 여부로, 그는 어느 교회에도 정식으로 다닌 적이 없었고, 우선 본인은 종교적 믿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자신의 종교적 취향을 숨기는 쪽에 가까웠고, 대신 타인의 믿음은 존중하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주변의 친구들 역시 링컨이 기독교인이라고 생각될 만한 언행을 한적이 거의 없다고 말하였다. 오히려 친구들 앞에서는 이신론자 내지는무신론자라고 생각되는 언행을 했다. 다만 이후 아내 메리의 증언을 들어보면, 기독교나 타 종교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인물이었고, 말년 상심에 빠진후부터는 기독교적 믿음에 집착을 나타냈다는 묘사를 보아 아들의 죽음등 일련의 사건들이 그의 종교에 대한 생각에 심적인 변화를 일으켰을 수는 있다. 어린 시절을 살펴보자면, 링컨의 아버지인 토머스 링컨이 매우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지라 기본적으로는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 기독교적 믿음이나 사상에 대해선 상당히 잘 알고 있었고 그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다만 어린시절부터도, 확고한 신자였던 아버지와는 다르게 링컨은 자유분방한 쪽이었다고 한다.

공식석상에서의 링컨의 언행을 보면, 기독교인이라 봐도 괜찮은 수준으로 보이나, 이도 정치적인 립서비스일 가능성이 높다.[31] 링컨이 정적들에게 허구한 날 트집 잡히던 것 중 하나가 기독교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링컨이 평생을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살았다는 주장은 아인슈타인이 죽기 전에 신을 믿었다는 정도의 소문이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32] 다만 아인슈타인과 다른 점이라면 링컨은 실제로 말년에 기독교적 믿음이 강해졌다는 것.

하지만 링컨이 성경과 신학에 관심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링컨은 신이 인류를 향해 가진 계획이 있다고 믿고 있었고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즉 이신론적 생각은 있었지만 성경과 기존 신학을 배제하진 않았다는 것. 그렇기에 링컨과 개인신앙(그리스도론과 삼위일체론) 그 자체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링컨은 기독교인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링컨과 교회의 기존 교리(혹은 교리로 보이는 분위기)로 봤을때 링컨은 이신론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말년에는 특히, 가장 사랑하던 아들 '윌리'를 병으로 잃은 후에는 기독교 신앙(예수를 구세주라고 언급하면서)에 대한 집착이 강해졌다며 개인적인 신앙고백을 한 적도 있다. 아내인 메리는 링컨은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종교적인 인물이었다고 표현하였으나 아들 윌리가 죽은 이후부터는 그가 기독교적 믿음에 의지하여 신에게 자기자신을 바쳤다고 했다고 한다, 즉 이 시점에서 링컨이 무신론자였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역사가 알렌 C. 구엘조는 링컨의 신앙을 '칼뱅화된 이신론'이라고 불렀다. 그 1999년 저술하고 출판한 <링컨:구원자 대통령> (Lincoln: Redeemer President)에서는 그의 유소년기에 접했던 칼빈주의 사상과 뿌리가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했다. 이 구엘조의 칼뱅화된 이신론(Calvinized Deism)이란 흔히 우리가 알고있는 신의 창조 후 인간역사에 무개입하는 그 이신론을 뜻한 것이 아니다. 칼뱅의 대표적 신학사상인 그리스도의 구원론과 예정론은 창조후 신의 무개입과는 정면으로 반대되는 것인데 이러한 모순적인 뜻으로 사용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이기 때문. 구엘조의 칼빈주의적 이신론이란 건강한 정교분리를 갈망하고 당시 혼란스런 종교적 패러다임에서 벗어나고 싶은 링컨의 내면을 대변하고자 사용한 단어라고 할 수 있다(여담으로 구엘조는 조지 W. 부시 행정부 아래 국가 인문 위원회 National Council in Humanities 위원으로 임명되었었다. 흠좀무).

링컨의 신앙관에 관해 언급하는 저명한 연구서적으로는 옥스퍼드 대학의 미국사 교수인 리처드 커워딘(Richard Cawardine)이 집필한 <링컨:목적과 권력의 삶> (Lincoln: Life of Purpose and Power) 인데 이곳에서 커워딘은 링컨의 북부 복음주의적 신교도들을 그들이 신의 택함 받은 사람들이라는 오래된 믿음을 조성하고 키워 미 합중국의 깃발 아래 결집시킨 그의 능력을 강조하고 있다. 2006년 2월 19일자 뉴욕타임즈의 커워딘 교수의 책에 대한 기사에서는 이에 대해 "이러한 특출난 재능이 무신론자이거나 불가지론자로 의심되었던 사람에게서 나왔다. 하지만 결국 그는 종교적 회의론자인 동시에 연방의 유지와 노예해방을 어떠한 높고 신비한 목적과 동일시한 것으로 보인다."고 링컨의 내면을 묘사했다. 해당 NYT 기사

중립적인 시각에서 보면 그는 어느 교단의 멤버가 아니었으며, 만인평등 정신에 위배되는 노예제도에 찬성하거나 침묵했던 당시 맹목적 종교인들에 대한 비판자 이자 회의론자였으며 어릴적부터 칼빈주의적 사상에 깊게 영향을 받아 복음주의적 바탕에서 성경의 권위를 인지했던 사람이라는 게 다수 현대 역사가들의 결론이다.[33]

7 기타 이야기

  • 그 슬퍼보이는 눈과 인자한 얼굴, 깡마른 인상으로 인해 잘 매치가 되지 않지만, 힘이 엄청난 장사였다고 한다. 키는 크지만 마른 몸매이기 때문에 약한 인상임에도 불구하고 젊은 시절에는 파워가 잔뜩 붙는 종류의 것만 골라 막노동을 했기 때문에 엄청나게 힘이 셌다고...
  • 동네에서 꽤 세다고 이름 난 불한당이 시비를 걸어온 일화가 유명하다. 결국 시비를 피할 수 없어서 맞장을 뜨게일대일 싸움이 벌어졌고 많은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키는 크지만 깡마른 링컨보다는 다부진 체격의 불한당의 승리를 점친 사람들이 많았는데, 예상과는 달리 링컨이 상대를 가볍게 발라버렸다고... 그리고 링컨과 불한당은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 소년만화냐
전말을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어서 자료를 인용하자면...
1831년, 링컨은 일리노이주 뉴 세일럼으로 이사하였다. 이 동네에는 '클래리즈 그로브 녀석들'이라는 동네 젊은이들의 패거리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항상 패거리의 리더인 잭 암스트롱이 동네에서 가장 강한 싸움꾼이라 자랑하고 다녔다. 당시 링컨은 덴튼 오풋이라는 사람의 가게에서 서기로 일하고 있었는데, 오풋은 '링컨이야말로 동네에서 가장 강한 사내'라고 주장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사장님이 웬수다 이 이야기를 들은 잭 암스트롱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어느 날 그는 링컨에게 한 판 붙자고 제안을 했고, 링컨은 승낙했다. 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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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리즈 그로브 녀석들'(Clary's Grove Boys)의 리더 잭 암스트롱.'
두 사람이 붙은 날, 많은 사람들이 와서 왁자지껄 떠들고 구경을 하며 돈내기를 했다고 한다. 싸움이 아니라 타이틀 매치인가보다 링컨은 키 193cm에 몸무게 85kg 가량 되었으나, 보다 많은 사람들이 훨씬 키가 작지만 '황소처럼 힘이 세다'고 알려진 잭 암스트롱에게 걸었다.
싸움이 시작되자, 두 사람은 서로 탐색전을 펼쳤고 서로 끌어안고 용을 썼으나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그러나 차츰 암스트롱이 밀리기 시작했다. 결국 암스트롱이 힘에서 밀리자 링컨은 암스트롱의 목을 잡고 팔을 뻗어 들어올린 채 암스트롱이 꼬마인양 흔들어댄 후 내동댕이쳤다. 쵸크슬램??!! 이 모습을 본 '클래리즈 그로브' 패거리는 분노하여 링컨을 공격하고자 하였다. 링컨은 오풋의 가게 쪽으로 물러나 가게 벽을 등지고서는 '전부 상대해 줄테니 한 놈씩 덤비라'고 요구하였다. 링컨이 아니라 언더테이커인가보다 언더테링컨
이런 링컨의 모습을 본 잭 암스트롱은 그의 용기에 크게 감동하여 패거리를 만류하였고, 링컨이 손을 잡고 악수를 나누며 "이봐, 이제는 에이브(Abe)가 우리 중 최고다! "라고 외쳤다. 이 일이 발생한 이후 암스트롱과 링컨은 친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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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트롱에게 쵸크슬램을 먹이는 링컨(...)
  • 젊은 시절 링컨의 벌목실력 또한 당시 자주 회자되던 이야기였다. 실제로 링컨의 젊은 시절을 묘사한 그림 중에는 그가 거대한 도끼를 들고 나무를 베는 모습이 많다. 링컨을 알고 지내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몇 배 이상 빠르게 엄청난 도끼질로 나무를 넘겨대던 괴력의 이야기를 자주 했다는 듯. 저 아래 "도끼질로 뱀파이어 때려잡는 링컨"의 괴랄한 상상은 이 이미지에서 파생된 것. 링컨:뱀파이어 헌터라는 영화가 몇 년 전 개봉했는데, 이 이미지에서 파생된 듯 하다. 인자한 빼빼마른 할아버지 같은 링컨 대통령이 사실 젊었을 적에는 엄청난 파워캐릭터였다는 것이 유쾌한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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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이런 이미지... 청룡언월도를 옆에 끼고 춘추를 읽고 계신 관공
  • 존 F. 케네디와 공통점이 많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링컨과 케네디의 공통점 항목 참조. 하지만 이건 역시 도시전설이다. 케네디가 링컨처럼 인생에 굴곡이 많고 여러 번의 실패와 고난을 겪으면서 살아왔다면 모르겠는데 케네디는 태생부터 초일류 엘리트 집안 출신이었고 링컨의 인생과 비교하는거 자체가 굴욕일 정도로 인생에서 성공과 탄탄대로를 누리며 살아왔다.
  • 장남인 로버트 토드 링컨은 미국 역사상 4건 있었던 대통령 암살 사건에 3번이나 연관이 있었다. 가필드 대통령, 매킨지 대통령 둘 다 그를 만나거나 만나러 갔다가 암살당했기 때문이다.
  • 그림 실력 향상을 위해 소묘를 할 때 애용되는 모델. 워낙 얼굴의 요철이 강해 윤곽이 두드러지는지라 해칭하는 맛이 일품이다.
  • 게이 의혹이 있어 게이바의 뮤직비디오는 1863년 백악관을 무대로 하는 것으로 패러디되기도 했다. 여기에 대해선 다른 의견도 있다. 자세한 설명은 게이바 항목을 참조하기 바란다.
  • 예전에는 이런 유머글이 돈 적이 있었다.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망나니 짓만 하는 아들을 둔 아버지가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불러 훈계를 했는데, "에이브러햄 링컨이 네 나이 때는 무엇을 했는지 아니? 열심히 독서하고 공부했단다." 이 말을 들은 아들 왈, "아, 그 사람 저도 알아요. 아버지 나이 때는 대통령이었잖아요!"

역관광 아빠는 웬만해서 눈물이 안 나는 사람인데 눈물이 나오네

다만 이게 여러 버전이 있어서 링컨이 아니라 존 F.케네디를 넣는 경우도 많았다. 무엇보다 아버지가 40대라면 케네디가 딱(링컨은 51살에 대통령이며 케네디는 44살에 대통령이 되었으니)이었으니... 아빠와 아들을 직장 상사와 부하로, 링컨을 고르바초프로 바꾼 버전도 있다.
  • 링컨의 사진중 하나는 합성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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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 사진은 사실 링컨의 풍모가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해서, 당당한 체구의 정치인의 사진에 링컨의 머리만 붙인 것이다. 웃긴 것은 그 정치인이 존 칼훈이라는 것. 존 칼훈은 부통령을 두 차레나 지냈을 정도의 유명 정치인이지만, 주의 분리와 독립, 노예제도 유지를 지지했던 남부 옹호세력의 거두였다.
  • 링컨은 남북전쟁 당시 전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보기위해서 자주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곳을 방문해 군인들과 밤새 놀고 이야기 하길 좋아했다고 한다. 전쟁이 거의 끝나갈 무렵, 당시 남부연합 해군의 가장 강력한 철갑군함이었던 메리맥(Merrimack) 함[34]이 버려져 있던 한 해군 기지를 공략하는 군대를 시찰갔다. 가서 지휘관에게 공격을 하지 않는 이유를 물어보자 대장은 "수심이 얼마정도인지 가늠할 수 없어서입니다" 라고 대답했고, 링컨은 흔쾌히 "그럼 여기 나하고, 육군장관하고 재무부장관하고 가서 확인하고 오겠네." 라고 말했고, 장병들의 극구 반대에도 밤에 몰래 미국의 최고 권력자 세명이 가서 수심을 확인하고 아침에 멀쩡히 돌아왔다. 이후 이 이야기는 링컨의 모험담중 링컨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 중 하나가 된다.
  • 남북전쟁 당시 당장 전쟁을 그만두라는 어명(...)을 내리신 노턴 1세에게 소환장을 받은 바 있으나 가지 않았다. 역도
  • 에이브러햄 링컨을 암살한 존 윌크스 부스는 링컨을 암살하고 난 후 "독재자의 말로는 언제나 이렇다." 라는 의미의 라틴어 "Sic Semper Tyrannis"를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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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본 글을 사진과 인용문이 있다고 해서 다 믿지 마라."라는 명언도 있다. 어?!

8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 박물관이 살아있다 2에서는 링컨 기념관에 있는 링컨 대리석상 모습으로 등장. 이 작품에 등장하는 물체들이 다 그렇듯 아크멘라 석판의 힘으로 생명을 얻었다. 석상이라서 그런지 비둘기를 무척 싫어하며, 파라오 카문라가 소환한 라의 병사들을 겁먹게 만든다(...).[35]
  • 미국의 국민 애니메이션 심슨에도 가끔 출연한다. 역대 대통령 중에서는 상당히 긍정적인(?) 이미지로 묘사되는 편. 의외로 심슨 가문과 놀라운 인연을 가지고 있는데, 노예제가 성행하던 시절 심슨 가문의 딸인 일라이자 심슨이 자신의 집에 숨겨주던 노예 버질을 일라이자의 어머니 메이블 심슨이 대신 데리고 도망치던중 버질과 메이블이 수배를 당하게 되고 난관에 봉착한다. 이때 이들을 지켜보던 링컨이 그들을 돕는다. 트레이드 마크인 모자를 빌려주며 메이블의 마지 심슨 스타일의 눈에 띄는 머리를 감추라고 제안한 것. 이때 메이블이 어떠냐고 물으니까 아래가 불룩한 난로같다고 대답하곤 메이블이 못마땅해하자 "솔직한 에이브(Honest Abe)잖아요"라며 껄껄 웃고 변명한 뒤 이름값 하시네 난 너무 재밌는거 같다며 스스로는 만족한다(...). 이후 메이블과 버질은 도망쳐서 새 가정을 이루고 그들 사이에서 아이도 태어나는데 이 아들이 현재 호머 심슨의 아버지되는 에이브 심슨의 증조부인 에이브러햄 심슨 1세다.걍 고조부라 하지 링컨이 버질과 메이블을 탈출을 직접적으로 도와주었으니 링컨의 이름을 따서 지었을 가능성이 높은듯. 할로윈 특집 에피소드로 유명인사들에게 광고비를 지불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광고에 출연할 정도로 유명인사를 호머 심슨이 돈을 받고 죽이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어떤 광고에 조지 워싱턴과 링컨이 격렬히 키스를 하는 광고가 천국에 방영된다. 조지 워싱턴은 분노하는데 비해 링컨은 불편해하는 척 하면서 웃고 있다(...). 나중엔 천국에 간 호머 심슨의 엉덩이를 주무르며 엔딩. 링컨의 아내도 자신의 그런 지향을 이해했다고...
  • 팀 포트리스 2에선 1850년대 블루팀의 첫번째 파이로는 에이브러햄 링컨이었다고 한다.팀 포트리스 2의 게임모드중 아레나 모드가 제일 좋다고 연설한바가 있으며 1857년에 운좋게 계단을 발명하였고 암살당하지는 않았으나, 계단의 사용법을 완벽히 익히지 못해 포드 극장의 연구소에 있는 계단에서 로켓 점프를 하다가 사망하였다.
  • Ugly Americans에선 좀비가 되었으며(...), 그 세계의 현 미국 대통령이기도 하다. 트웨인과 존 윌크스 부스가 2차 암살을 계획하나...
  • 어드벤처 타임에서는 화성의 왕으로 나온다. 자신의 오해로 제이크가 죽게 되자, 자신의 불멸을 대가로 되살린다.
  • 2010년 로버트 레드포드 감독의 영화 음모자(The Conspirator)는 링컨 암살을 다루고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링컨은 작중 초반에 죽고(...) 링컨 암살자들 가운데서도 메리 서럿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 여담으로 잭 런던의 소설 강철군화의 인용문에 따르면 링컨은 그가 죽기 직전 "이 나라는 통합되었지만 이제는 정치의 나라가 아니라 트러스트(=재벌)의 나라가 된다."라는 투의 말을 남겼다고 한다. 과연 그의 말대로 되니, 이제 미국의 향방을 가르는 것은 노예제도가 아닌 경제였다.
  • 키아누 리브스가 이름 없던 시절 나온 영화 엑설런트 어드벤쳐에도 나온다. 이 영화는 타임머신을 타고 잔 다르크, 루트비히 판 베토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칭기스 칸, 빌리 더 키드,프로이트 같은 역사적 위인을 현대로 데리고 오면서 벌어지는 코미디영화인데 링컨은 그나마 덜 망가진다. 미국 백화점 여기저길 둘러보는데 흑인들도 많이 오고가는 걸 보고, 놀라워하고 백화점 안에서 연설하다가 사람들이 미친 놈보듯이 하지만 일부는 그래도 연기 잘하네? 라는 투로 손뼉까지 쳐준다. 그리고...경비원들에게 끌려나간다... 전자 키보드 연주에 매달리는 베토벤이나 백화점 안에서 사람들을 흥미롭게 보고 정신 분석학을 이야기하는 프로이트와 더불어 그나마 잘 나온 셈. 칭기스 칸은 가장 망가지고...나폴레옹도 망가지고 잔다르크는 에어로빅 강사가 된다든지 캐붕된 다른 위인들에 견주면 확실히 나은 편이었다.
  • 스티븐 스필버그가 이 책의 판권을 사들여 영화로 제작했으며 제목은 링컨으로 2012년 12월 16일(미국)에 개봉. 링컨 역을 맡은 배우는 다니엘 데이 루이스 이다. 작중에서 링컨과의 싱크로는 100%를 넘어서 어마어마한 연기력을 보여준다. 영화 상에 딱히 액션이나 볼거리는 없는 잔잔한 드라마를 가진 영화로, 극적인 재미는 없어도 진지한 주제의식과 함께 배우들의 연기력과 영상미가 돋보인다. 영화 해설은 이 글을 참조.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이 영화로 2013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흥행도 대박이라서 제작비 6500만 달러로 저렴하게 만들어 북미에서 1억 8220만 7973달러를 벌어들였다. 뉴욕 타임즈에서도 이례적으로 다수의 영화평이 나오는 등 미국에서는 대중적 흥행과 더불어 지식인들의 격찬을 받고 있다. 하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북미를 제외한 세계 흥행수익은 9300만 달러로 역시 미국인들 역사적 이야기라서 다른 나라에선 그다지 흥미로운 구석이 없는 듯 싶다. 3월에 한국에서도 개봉했으나 전국 10만 관객을 겨우 넘기면서 막을 내려 개봉한지 모르는 사람들도 많다.
  • 브라이언 싱어의 시리즈 영화 엑스맨 2에서 백악관의 큐레이터가 링컨의 초상화 앞에서 그가 취임식에서 16대 대통령으로써 첫번째로 한 말을 관광객들에게 소개한다. "우리는 적이 아닌 친구입니다. 우리는 절대 적이 되서는 안됩니다. 열기에 긴장했을 수 있지만, 우리의 유대감을 깰 수 없습니다.[38]" 이어 큐레이터는 이를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말이라고 하며 영화의 오프닝이 시작된다.
  • 그밖에도 2012년 6월에 팀 버튼이 제작한 에이브러햄 링컨: 뱀파이어 헌터(…)가 개봉했다. 소설이 원작. 에이브러햄 링컨이 뱀파이어 헌터로서(...) 대통령이 된 것도 사실 뱀파이어들로부터 미국을 구하기 위해서라는 것. 저 도끼로 뱀파이어들을 때려잡고 다닌다.정작 그걸 권유한 것은 온건파 뱀파이어... 당연히 미국에서도 컬트 영화취급.
  • 음악 'Gay bar'뮤비에서는 링컨이 연상되는 인물이 게이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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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난투 스매시 브라더스 4에서 Mii 파이터가 나왔다(...). 고인드립

9 관련 어록

게티즈버그 연설.
"A house divided against itself cannot stand."

(스스로) 분열된 집안은 유지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신이 우리의 편이냐가 아니라, 우리가 신의 편에 있느냐는 것일세."

ㅡ 남북전쟁 종결 후 자신의 비서가 "신께서 우리 편에 있었다는 것에 감사하다"고 말했을 때 한 대답.

Home Sweet Home

즐거운 나의 집

남북전쟁 전에는, 사람들은 '미국들은(the United States are)'이라고 말했지. 하지만 남북전쟁 후에는 '미국은(the United States is)' 이라고 말했어. 링컨 아래, 우리는 하나가 되었지.
If you want to test a man's character, give him power.

그 사람의 성품을 알고싶다면, 그에게 권력을 줘 보라.

Whichever way the war ends, I have the impression that I shall not last long after the war...

어떤식으로 전쟁이 끝나던지 전쟁뒤에 나는 얼마 못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군...

You can fool all the people some of the time, and some of the people all the time, but you cannot fool all the people all the time.

모든 사람들을 잠깐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또 일부의 사람들을 영원히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The ballot is stronger than the bullet.

표는 총알보다 강하다.

  1. 찰스 다윈과 같은 해 같은 날 태어났다. 조선 효명세자와 동갑내기.
  2. 하지만 위키백과네이버 캐스트에서는 원만한 관계로 묘사되고 있다.
  3. 가족 소유의 농장에서만 일한게 아니라, 주변 이웃들의 농장에 품삯을 받고 일손으로 보냈다.
  4. 여담으로 그녀도 재혼 당시 미망인이라서 의붓아우 2명이 있었는데 이들도 링컨과 친형제처럼 잘 지냈다.
  5. 비슷한 사례로 독립운동가 이범석도 계모의 보살핌을 받았다.
  6. 이때 링컨과 더글라스가 벌인 세차례의 토론은 아직까지도 미국 역사에 남은 명토론으로 기억된다.
  7. 이처럼 링컨과 대립을 한 최대의 거물 정치인이었지만, 막상 남북전쟁이 터지자 연방주의자였던 더글러스는 링컨에게 협력해 전국을 순회하면서 무려 30만의 의용군을 모으기도 했다. 이 인물도 어지간한 걸물이다.
  8. 더글러스는 유권자 선거에서는 100만 표 넘게 받았지만 선거인단은 12명밖에 못 얻는 충공깽한 결과를 보여주었다.
  9. Allan Pinkerton, 1819.08.25~1884.07.01
  10. John Alexander McClernand, 1812.05.30~1900.09.20
  11. 사실 목수의 아들이란 공통점도(…).
  12. 다만 이 부분은 노예해방론자라는 이미지를 까기 위해서 교묘한 편집기술을 사용했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한다.
  13. 남부가 떨어져 나가던 시기에도, 끝까지 연방에 남길 고수하던 미주리, 켄터키, 델라웨어, 메릴랜드 등 노예제 주들은 적지 않게 있었다. 만약 링컨이 노골적으로 노예제에 반대 표시를 했다면 이들은 아마 연방에서 탈퇴했을 것이고 어쩌면 남북전쟁의 흐름이 바뀌었을지도 모를 노릇이다.
  14. 대표적으로 그라쿠스 형제의 예를 봐도 알 수 있는데, 제대로 된 세력 없이 급진적 주장을 내세운 이들 형제는 그들을 눈엣가시로 여긴 귀족들에게 살해당하고 토지개혁 역시 좌절되고 만다.
  15. 이 주장은 당시에는 비교적 널리 동조를 받았으며, 국가의 주도로 전면적으로 실시되지는 않았지만 민간 차원에서는 실행하는 움직임이 있었고, 그 결과 라이베리아가 건국되었다.
  16. 출처, 일부 한역(오역주의)
  17. 전쟁이 끝났으니 노예 해방합시다! 그럽시다! 와! 이런 분위기가 결코 아니었다. 노예는 여전히 남부의 자산이었고 노예해방은 자산 강탈로 비추어졌다. 북부에서도 서민층은 자기보다 밑인 흑인노예와 동급이 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이를 반영한 여당과 야당 모두 노예해방에 조심스럽거나 적대적이었다.
  18. 1990년대 초반에 출간된 모 위인전에는 72kg이었다고 나왔다. 193cm에 72kg면 꽤 마른 것이다. 키가 크고 마른걸로 보아 그가 마르팡 증후군 환자였다는 설도 있다.
  19. 이해가 잘 안간다면 심슨 가족의 클레투스 가족이나 우리나라 경상도 억양이랑 비슷하다고 생각해보자.
  20. 2012년작 영화 링컨을 보면 링컨역의 대니얼 데이 루이스가 일부러 목소리를 하이톤으로 내는 것을 들을 수 있는데, 당대의 기록을 참고해서 재현한 것이라고 한다.
  21. 그리고 여자친구를 링컨에게 뺏긴 더글러스 입장에선 더더욱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22. 1920년대 괴담으로 스탠턴이 링컨 암살의 배후라는 이야기가 있다. 존 제이크의 소설, 클라이브 커슬러의 모험 소설에서는 이 시각을 깔고 있다. 그러나 실상은 링컨과는 대통령 되기 전까지만 해도 사이가 매우 나빴지만 이라기보단 스탠턴이 일방적으로 갈궜다 이후 그가 자신을 보직에 올려준 뒤로는 사이가 원만해졌다고 한다. 어른의 사정 스탠턴은 링컨과 그의 정부에 충성심을 보이며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링컨의 훌륭한 지지자가 되어주었고 링컨 역시 "그는 부서지지 않는 바위같이 날 지탱한다, 그가 없었다면 나는 부서졌을지도 모른다"고 할 정도로 그를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
  23. 그는 이후 링컨이 피격당해 후송되자 한달음에 달려와 그 곁을 끝까지 지켰고 그의 사망 후엔 "이곳에 가장 위대한 사람이 누워 있습니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스탠턴은 링컨의 암살 후 후임자인 존슨 대통령과 갈등을 빚고 파면되었고, 이것은 미국 최초의 탄핵이 발생하는 계기가 된다.
  24. "The cheek of every American must tingle with shame as he reads the silly, flat, and dishwatery utterances of the man who has to be pointed out to intelligent foreigners as the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25. 더글러스를 지지한 친 민주당, 반 링컨파 신문이었다.
  26. 미드를 변호하자면, 당시 미드가 이끌던 군대는 북부의 남쪽전선 주력이었는데, 당시 북군은 여러 똥별들의 삽질로 남군의 명장 에게 연전연패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드는 리를 상대로 게티스버그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으나, 거꾸로 패배하면 오히려 북부가 남부의 공세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고, 미국의 수도가 버지니아에서 약간만 더 올라가도 공격할 수 있는 워싱턴 DC였음을 생각하면 신중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만약에 미드가 리를 추격해서 괴멸시키는데 성공했다면 남북전쟁이 더 빨리 끝났겠지만...
  27. 풀 네임은 로버트 토드 링컨, 상당히 높은 관직을 맡았고 사업에도 성공을 거두었다. 링컨의 네 아들 가운데 가장 오래 살았으며 유일하게 결혼하고 자손을 남겼다. 그리고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이후 제 20대 대통령 제임스 가필드와 25대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 암살사건과도 연관이 있다. 정확하게는 두 대통령 모두 암살 직전 자기가 죽는 꿈을 꾸고 이를 알아보려고 로버트 링컨을 불렀지만, 그가 오기도 전에 암살당한 것. 두 차례의 사건을 겪은 뒤, 로버트 링컨은 대통령과 관련된 곳에 출입하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28. 이 책자를 보면 처칠의 아버지인 랜돌프에서부터 모파상, 니체, 히틀러 등등 무수한 인물들이 매독으로 망가진 것에 대하여 분석하고 있다. 단 히틀러 매독설은 논쟁의 여지가 있다.
  29. 링컨이 '선량한 독재자' '자비로운 독재자' '위대한 독재자'였다는 뜻이다.
  30. 젊은 시절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할 당시 성실하고 정직한 품성 덕에 사람들이 붙여준 별명이라는 설이 있다.
  31. 실제로 대통령 임기를 수행하면서 링컨은 현실은 시궁창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미국을 올바르게 이끌어 주시리라 믿는다는 식으로 이야기 하기도 했다. 그 이외에도 1846년연설문 이런것도 있다.
  32. 아인슈타인범신론자이다.
  33. 위키피디아의 Abraham Lincoln and Religion 항목 참조
  34. 남군측이 붙인 정식 함명은 CSS 버지니아.
  35. 안그래도 커다란 석상이 살아 움직이는데다가, 목록에도 나와 있지만 링컨은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제일 키가 컸다.
  36. 초반에 묘사된 자본주의 비판 연설은 실제 링컨의 연설로 알려진 이야기. 다만 실제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37. 관계있다면 관계있는 이야기인데, 마르크스 역시 남북전쟁 당시 명확하게 북부측과 링컨의 입장을 지지한 바 있다. 1848년 혁명 당시 사이가 틀여저서 변절자라고 비판하던 옛 동료가 남북전쟁에서 북군 장교로 참전했다는 소식을 듣고 더 이상 비판하지 않았을 정도. 대서양 건너 유럽에서 지지하는 게 무슨 소용이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마르크스의 주 수입원이 미국 신문에 기고한 원고료였다는 점에서, 미국과 마르크스가 관계없다고는 할 수 없다.
  38. We are not enemies, but friends. We must not be enemies. Though passion may have strained, it must not break the bonds of our affec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