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삼국시대 위나라의 황제
조위의 역대 황제 | ||||
1대 세조/고조 문황제 조비 | ← | 2대 열조 명황제 조예 | → | 3대 애황제 조방 |
묘호 | 열조(烈祖) |
시호 | 명황제(明皇帝) |
연호 | 태화(太和, 227년 ~ 233년 1월) 청룡(靑龍, 233년 2월 ~ 237년 2월) 경초(景初, 237년 3월 ~ 239년) |
성 | 조(曹) |
휘 | 예(叡) |
자 | 원중(元仲) |
생몰기간 | 205년? ~ 239년 1월 22일 |
재위기간 | 226년 ~ 239년 1월 22일 |
1.1 개요
조조의 손자이자 조비의 장남. 자(字)는 원중(元仲).
삼국시대 위나라의 2대 황제. 묘호는 열조(烈祖), 시호는 명제(明帝). 나라를 세우지 않았는데도 조(祖)자의 묘호를 최초로 받은[1] 황제이기도 하다.
말년에 실정을 저지렸는데 이것이 위나라 멸망을 이끌었다. 일단 아비인 조비도 암군이었으나 그래도 사마씨 세력의 위험성을 알아 그들에게 중요한 직책을 맡기지 않았지만 조예는 사마씨 세력의 대표주자인 사마의와 사마부에게 나라의 중요한 직책인 병권과 재정권을 쥐어주었고 이는 사마씨 세력을 불릴 수 있는 요소를 제공해주었다. 또한, 말년에 사치에 몰두하면서도 후계자 인선에 신경쓰지 않아 불분명한 후계자인 조방을 지명하고 그 친황세력도 무능한 세력으로 비치해놓은 까닭에 아비가 만들어놓은 위나라 멸망의 시한폭탄을 작동하게 만든 암군이다.
그래도 재위기간 내내 촉한과 오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자국의 우위를 끝내 지켜냈으니 종이 아닌 조가 붙은 듯 하다.
1.2 생애
1.2.1 어머니와 관련된 개인사
아버지인 조비보다 할아버지인 조조를 더 닮았다는 말을 어릴 때부터 들었다. 조예가 태어나자 조조는 조예를 매우 사랑했으며 항상 자신의 곁에 있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연회 때도 항상 데리고 나와 손자바보(...)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조비가 위왕으로 즉위하자 제공이 되었으며, 황제가 되자 평원왕에 봉해졌다.
조예의 어머니 문소황후는 조비가 새로 귀빈이 된 곽여왕을 총애하자 이를 원망하다가 조비의 명령으로 사사되었다. 문소황후가 죽을 때 조예의 나이는 이미 17세였으니 이 사정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조비는 새로 황후로 삼은 곽여왕에게 자식이 없었으니 조예를 그녀의 아들로 삼아 양육하도록 했다. 조예는 내키지 않았지만 할 수 없이 곽여왕을 섬기고 곽여왕 또한 아들이 없었으니 조예를 자애롭게 보살폈다. 어머니의 원수를 어머니로 섬기게 되었으니 정신적인 고통이 상당했을 것이다.
조예의 생모 문소황후 견씨가 조비에게 주살 당했으므로 뒤를 이을 황태자로 세워지지 않았다. 조비는 처음에는 조예를 좋아하지 않았다.
관련된 일화가 전해온다. 조비와 조예가 함께 사냥을 나갔는데 어미 사슴과 아기 사슴이 함께 있는 것을 봤다. 조비가 어미 사슴을 활로 쏴 죽이고 조예에겐 아기 사슴을 쏴 죽이게 했다. 그런데 조예가 울면서 "어미까지 죽였는데 새끼까지 죽일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조비가 네 말이 옳다고 하면서 즉시 활과 화살을 내던지고 조예를 기특하게 여겼다.
226년 5월, 조비는 병세가 위중하자, 조예를 황태자로 삼고 조비가 죽자 조예가 황제로 즉위한다.
1.2.1.1 원희의 자식?
조예가 조비가 아닌 문소황후 견씨의 첫 남편이었던 원희의 자식이 아닌가하는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김운회 등은 "삼국지 해제"에서 이 "원가의 복수설"을 정설인 것처럼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정사 삼국지에 따르면 조예가 205년생인데 조조가 업을 완전히 포위하고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 204년 2월이다. 따라서 설령 조예가 205년 1월생이라고 하더라도 204년 4월경에 잉태되었어야 하는데 그 때 이미 업은 조조군에게 포위당해 있었고 원희는 유주 자사로 다른 지방에 있었다. 따라서 조예가 원희의 친아들이려면 유주자사로 나가 있던 원희가 조조군의 포위망을 몰래 다 뚫고 들어와 견씨를 임신시켰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조예는 원희의 아들이 아니라 조비가 문소황후를 얻고 나서(204년 8월) 얼마 안 되어 잉태시킨 자식이라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며, 학계에서는 아무도 조예가 조비의 친아들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당대 사람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이 정도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다.
1.2.2 명군의 면모
유엽이 막 즉위한 조예와 대화를 나누어보고 '진시황과 한무제의 범주이지만 자질은 미약하여 그들에게 미치지 못하오.' 라는 황제 모독의 대역죄평가를 내렸다고도 한다.
전반적으로는 명군의 면모를 많이 보여주었으며 상당히 자질이 있는 군주였다. 역법과 형률에 관심이 많아 즉위 초부터 개정과 개혁을 시작해서 성과를 올렸고 큰 재판이 있을 때마다 직접 방청할 정도로 관심이 많았다. 인사 면에서는 인맥과 친목질만 믿고 관리 자리를 얻어보려는 엽관 활동을 막아서며[2] 경전을 읽고 박사 시험으로 능력있는 관리를 선발할 것을 강조했다.
또한 국가적 위기였던 제갈량의 북벌에 정말 훌륭하게 대처하였다. 특히 촉과 오의 동시 북벌이었던 234년에 그 역량이 빛을 발했는데 사마의에게 최대한의 병력을 내주는 등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촉과 발을 맞춘 동오가 합비를 공격할 때는 직접 합비로 출정하여 손권이 제풀에 움츠러들어 물러나게 만들었다.
제갈량이 사망한 후에는 적극적인 대외 정벌에 나서서 가비능을 암살하고 선비족을 축출하며, 서쪽으로는 다시 삭방군을 설치하고 동쪽으로는 사마의의 공손씨 정벌로 요동까지 직접적인 통치하에 두게 된다. 이러한 조위의 성공적인 팽창은 엄연히 조예의 뛰어난 전략적 식견과 내치에 힘입은 결과였다.
1.2.2.1 황권 약화에 관한 실책
조예의 정치적 실책은 황권과 호족세력의 세력 균형이 조예대부터 본격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본래 조위 정권은 조조라는 군벌이 무력을 바탕으로 영천, 여남을 필두로 한 지방 호족세력을 포섭해 일으킨 정권이었다. 이들 호족세력은 후한 말 청류를 자처하며 환관, 외척으로 이뤄진 탁류에 대립한 이들이었다. 당연히 이들을 영입해 정권을 굳힌 조씨는 통치 과정에서 환관과 외척을 배제했다. 문제는 환관과 외척은 그 폐단이 크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황실과의 관계성을 통해서만 통치 정당성을 얻을 수 있는 집단이기에[3] 권력은 탐할지언정 제위를 가로챌 생각은 않는데 반해 호족은 그렇지가 않았다는 것이다.
그나마 원소 산하의 군벌에서 시작해서 실력으로 호족들을 아우르며 위왕(魏王)이 된 조조는 창업군주로서 가지는 군사적 실적 덕분에 호족들을 누를 권위가 있었으나 은수저 물고 태어난 도련님에다 호족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찬탈에 성공한 조비는 그 정도의 권위가 없었다. 물론 조비가 능력이 없었던 것은 결코 아니지만, 조비 자신의 능력보다는 장남으로서의 '정통성'이 중시되어 조조의 지위를 이어받을 수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장남이라는 유교적 명분으로 호족들의 지지를 모으는 과정이 필요했다.
때문에 호족들에게 상당부분 양보를 해야했고 이거 말고 다른 이유도 있지만 구품관인법같은 호족들을 위한 정책이 조비 대에 시행된다. 게다가 조비는 뛰어난 형제들을 경계한다는 이유로 조조의 직계 황족들까지 통치구도에서 축출해버리면서 유사시 조씨 사직을 지킬 방패는 더욱 얇아졌다. 조비의 형제인 조조 직계 친족은 빈객들과 사적인 대화를 하는 것도 금지되고, 수도에 상경하는 것도 금지되어 철저하게 연금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이 정책은 조예 시대에도 답습되었다.
조비라고 이 문제점을 모르진 않았던 터라 최소한의 안전장치들을 설치했다. 하나는 군권만은 조씨[4]가 철저히 장악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황제를 보좌하고 정책 입안과 결정을 맡은 내조를 장악하는 것이었다.[5] 그래서 조비 시기 군부 일인자는 대사마 조인이었고 조인 사후에는 조휴와 조진이 대사마, 대장군이 되어 동서전선을 담당했다. 내조의 경우 호족 출신이지만 유주와 병주라는 변방 출신이라 황제라는 끈이 없으면 출세하기 힘들었을 유방과 손자에게 맡겨 황실의 보위에만 충실하게 했다.[6]
그러나 조예는 유능하다는 이유 하나로 대호족인 사마씨에게 군권을 넘겨줌은 물론 그 동생인 사마부는 재정부 장관격인 도지상서에 제수해 사마 형제에게 군사와 재정을 몽땅 넘겨주었다. 이미 구품관인법 덕에 호족들이 관직 독점과 유력 호족을 중심으로 하는 '관맥 형성'이 시작된 상황에서 실질적인 권력까지 넘겨줘버린 것이다.
게다가 조예는 혈통의 문제로 정통성이 약한 조방을 후계자로 삼아놓고도 주색을 즐기며 본인 건강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고 죽기전엔 유방과 손자의 이간에 넘어가 숙부 조우와 황실 친인척들을 차기 조정의 실세로 삼으려는 계획을 파기하고 조상과 사마의의 연립 정권을 만들었다.
이 때문에 조방 대에 이르면 힘으로 역성을 이뤄낸지 겨우 십수년 된 시점+어리고 정통성이 약한 황제+부실하고 무능한 친황세력+실권을 거머 쥔 유능한 호족이라는 조위에겐 최악의 조합이 완성된다. 촉오에 맞서 위를 지켜낸 것도 조예지만 멸망의 트리거를 당긴 것도 조예인 것이다. 결국 조위의 위엄을 갖춘 황제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은 딱 조예까지로, 그 다음 황제인 조방부터는 사실상 충실한 신하인 척 했던였던 사마씨의 꼭두각시 황제 정도로 전락해버린다.
1.2.3 말년의 사치
말년에는 갑자기 정신줄을 천국에 고이 모셔놓고 지름신에 심시티만 남아 사치를 좋아하는 결점이 두드러졌다. 조예는 백성들에게 노역을 시켜 궁전을 크게 짓고 후궁들을 많이 거느렸다.[7] 조예 후반기 치세의 문제는 황후가 죽고 장마가 들어 기주에선 사람과 재물이 떠내려가는 물난리가 나자 보다 못한 고당륭이 올린 상소에도 어느정도 드러난다.
(전략)...지금 천하는 빈곤하고 황폐하며, 백성들은 1석도 비축한 것이 없고, 나라에는 1년을 버틸 만큼 비축한 것이 없건만, 밖으로는 강한 적이 있어 폐하의 군대가 국경에서 싸우고 있으며, 국내에서는 토목공사가 한창이라 주와 군에 이르기까지 온통 소란하오니, 이러다 적이 쳐들어오기라도 한다면 신하와 백성들이 명을 받들어 맞서 싸우지 못할까 두렵사옵니다. 또한 지금 장수와 병사들의 봉록이 눈에 띄게 깎이어 예전과 비교하면 5분의 1에 지나지 않으며...(후략)
이때 일화 하나를 들자면 도교에 심취해 이슬을 받아 먹겠다고 구리로 된 크고 아름다운 신선 모양의 동상을 장안에서 낙양으로 옮기다가 이게 자빠지는 바람에 부역하던 사람이 엄청나게 죽었다고 한다. 결국 부숴가며 옮긴 뒤에 동인을 두 개나 만들었다고 한다. 동상이 들고 있던 승로반이라는 쟁반에 맺히는 이슬에 옥가루를 태워먹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데 이슬 받아 먹어봤자 남는건 체내 중금속일 뿐이었지 않은가...
잔잠, 고당륭, 노육, 진군, 양부 등 신하들이 조예의 사치에 대해 상소문을 많이 올렸는데, 그걸 일일이 다 읽으면서 약간은 받아들이기도 하고, 설사 따르지는 않더라도 좋은 충고를 잘 들었다고 제대로 답장을 했다고 한다. 면전에서 심한 간언을 해도 참아넘기고 오히려 따르기까지 했으며 한 달에 수천 개의 상소를 읽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실천하지는 않으니 아무 효용이 없었다.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 사후 조예를 묘사할 때 양부를 포함한 신하들이 조예의 사치를 말리려고 하다가 파면당하거나 목이 달아나는 묘사가 나오는데, 정사에서 이 사람들은 딱히 처벌을 당하지도 않고 주변에서 처벌하자고 했으나 조예가 말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간언한 고위 대신들을 죽이지 않았을뿐이어서 자치통감에 따르면 조예는 성질이 대단히 급하여 궁궐 짓는 기한이 늦어지면 곧바로 담당자를 불렀는데 담당자가 뭐라고 변명하기도 전에 바로 죽여버렸다고 한다.
1.2.4 죽음
235년, 한진춘추에 따르면 조예가 새어머니인 곽여왕을 죽인다. 조예는 곽여왕에게 항상 원한을 품고, 자주 울며 생모 견씨가 죽을 때의 상황을 물었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곽여왕이 말하길 "선제(조비)께서 친히 죽이신 건데, 어찌하여 나에게 책문하는 것이냐? 또한 너는 사람의 자식이 되어, 죽은 부친을 원수로 삼고 추궁하며, 전 모친을 위해 그 뒤의 모친을 능멸하고 죽일 수 있느냐?" 분노한 조예는 곽여왕을 핍박하여 죽이고 그 머리카락은 헝클어지게 하였고 그 입에 엄청난 양의 쌀겨를 들이부은 다음 땅에 묻었다고 한다.[8]
237년 조예는 자신의 황후인 명도황후를 자결시키고 조예의 병세가 위독해지자 명원황후를 두번째 황후로 삼는다.
239년에 조예는 35세의 나이에 요절한다.
조예가 죽을 때, 조예는 연왕 조우, 하후헌, 조조(조휴의 아들), 진랑, 조상과 함께 조방을 보정하게 하려고 했으나, 진랑 등과 사이가 나쁜 유방과 손자가 조우, 진랑, 조조를 헐뜯고 조상과 사마의를 추천했다. 결국 명제는 조우, 하후헌, 진랑, 조조를 면직하고 조상과 사마의에게 뒷일을 맡긴다.
1.3 가족 관계
피는 못 속인다고 자신도 아버지처럼 처 명도황후 모씨를 죽이고 명원황후 곽씨[9]를 귀비로 그리고 두 번째 황후로 맞이했다. 이 모습은 어떻게 보면 가정폭력의 대물림과도 비슷하다.
조예에게는 친자식으로써 청하왕 조경(曹冏), 번양왕 조목(曹穆), 안평왕 조은(曹殷), 평원의공주 조숙(曹淑),[10] 제장공주(齊長公主)까지 3남 2녀가 있었다.
그러나 조경은 226년, 조목은 229년, 조은과 평원공주는 232년 모두 요절했다.[11] 조예의 친자식 중 장성한 것은 제장공주뿐으로 이도와 결혼하여 세 아들을 낳았으나, 이도가 죄를 지어 죽음을 당하자[12] 임개에게 재가했다.
친자들이 모두 사망하자 조예는 양자로 조방, 조순 형제를 어디선가 데려왔다. 친아들들이 모두 죽어 후계자가 없었던 조예는 결국 근본도 알 수 없는[13] 조방, 조순 형제를 양자로 삼았다.
조예는 그 중 조방을 선택했고 후계자로 삼았지만, 나이도 어리고 황가와 정확한 연고도 알려지지 않은 조방은 정통성이 부족했다. 결국 이런 아이를 양자로 삼고 후계자로 정한 것은 조위를 망하게 한 최악의 선택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아버지처럼 황족들을 구속하고 특히 조진, 조휴 같이 믿을 수 있는 황실의 방계 인사들까지 죽으면서 사마의의 권력은 급부상했다. 결국 고평릉 사변으로 조상을 죽인 사마의가 어린 조방을 대신하여 권력을 손에 쥠으로써 조위는 멸망의 길로 가고 만다.
1.4 기타
세설신어에 의하면 긴 머리의 미소년이었다고 하는데 당시 위나라에서는 긴 머리가 유행했다고 한다.[14] 패션에도 독특한 것을 추구했는지 꽃을 꽂은 모자와 소매가 짧은 비단옷을 입었다는 기록이 있다.
수신기에 나오는 일화가 있다. 화완포라는 생물은 남방이나 서역의 화산에 사는 불쥐로 그 털로 옷을 해 입으면 불에 타지 않는다고 한다. 이에 위 문제 조비는 자신의 책 전론에 그런 동물은 없다고 논증했으나, 그 후 명제 조예 때 진짜 화완포가 진상 되자 전론을 새긴 비석에 그 부분을 부랴부랴 깎아 냈다고 한다.
여담으로 고려의 공민왕과 비슷한 인물이다. 군주로서 권력을 제대로 행사했던 사실상의 마지막 인물이라는 점, 즉위기 초반에는 명군의 면모를 보였지만 말기로 갈수록 암군으로 퇴보했던 점, 후계자들의 혈통이 불분명하고 허수아비 노릇만 하다가 실권자들에게 폐위되고 선양을 하거나 죽임을 당했다는 점, 공민왕과 조예 사후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점 등 너무 흡사한 포지션에 위치한 왕이다.
1.5 미디어 믹스
배한성, 배칠수의 고전열전에서도 등장. 성우는 박영화/최상기(49화)[15] 원래 똑똑하고 어진 황제였지만 제갈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수능 끝난 고3처럼 완전히 딴 사람으로 변해 놀고먹자 황제가 되어 버렸다. 그 뒤 신하들과 게임을 하는데 하필이면 공공칠빵 하다가 빵!할 때 죽는다. 연의의 내용을 그대로 따라 제갈량의 북벌 정복을 방해했다가, 제갈량이 죽자 방탕하게 지내버린다.
삼국전투기에서는 장발이었다는 고증을 넣어 라우 르 크루제로 패러디되었다.(...) 원전대로 후궁들을 모으는데 그 후궁들이 레이디X버틀러의 히로인들(...)
삼국에서는 84화부터 등장. 한국어 더빙판 성우는 윤호. 일본어 더빙판 성우는 키시오 다이스케[16]. 첫 등장에서 무능한숙부들인 조진, 조휴의 말을 따르며 그들을 중용하며 사마의에게 의심을 품게 된다. 한 때 제갈량에 대비해 모병한 사마의를 죽이려고 하지만 사마의의 변명을 듣고 파직으로 그치는 등 점차 총명한 면모를 보인다. 이후 조진, 조휴의 연패에 사마의를 기용하고 신용한다. 하지만 한편으론 그 재능을 높이 사면서 교묘히 경계해간다. 대놓고 압박하는 것이 아니라 칭찬하지만 교묘하게 사마의가 헛점을 짚어 실책하도록 유도하려고 한다. 95화에서 사망하는데 조상이 사마의를 주살하도록 권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마의가 달려오자 조방을 부탁하고 죽는다.
삼국지 10,11 |
삼국지 12,13 | 삼국지 13 |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무력 빼고 모든 능력치가 70대 이상이다. 군사적 재능을 보여준 것을 반영하여 보통 아버지보다 전투에서 굴리기엔 좋은 편인데 무력이 낮은건 밸런스 문제인 듯 하다. 가뜩이나 위는 사기인데 조예까지 능력치가 먼치킨이 되어버리면 촉과 오는 어떻게 살라고
삼국지 3에서는 아버지보다 모든 능력치가 골고루 좋은 데다가 지력이 작은 아버지와 같은 스텟이라 군사가 가능하다. 숨겨진 능력치인 야망, 운, 냉정, 용맹도 할아버지보다는 못하지만 모든 면에서 아버지보다는 높다.
삼국지 4 능력치는 무력 62 정치73 매력73 지력 80. 지력으로 앞서지만 정치,매력이 아버지인 조비에 비해 상대가 안되고 특기가 단 2개이다.
삼국지 5에서의 능력치는 56/81/74/80으로 아버지보다 구리다. 통솔이 없어졌는데 무력에서 그만한 평가를 못받는 바람에.. 참고로 조비의 능력치는 75/72/77/85. 거기에 아버지도 물론 가지고 있는 조조군 종특에 가까운 추행 진형도 없는지라 여러모로 안습. 물론 위는 조예가 굳이 친정을 나갈 필요가 없으니 큰 패널티까지는 아니지만...
삼국지 9에서는 80/50/85/89. 기사와 제사, 누선과 덫을 가지고 있다. 통솔이 나름 준수하니 내정하다가 가끔 수전이 일어나면 써보자. 여담으로 조조 사후 조비, 조창, 조식, 조웅 4형제에 의해 위가 분열되었다는 설정의 가상 시나리오인 조씨 분열에선 엉뚱하게도 아버지 조비 대신 숙부 조창의 밑에 있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75/48/84/82/90에 명사 특기도 있고 총 특기 개수가 11개인 준수한 무장이다. 조조, 조비가 군주이더라도 굴리기 좋으며, 본인이 군주일 경우는 의천검(무력 +5), 옥새(매력 무조건 100), 조황비전(퇴각 성공 100%), 전론(지력 +2) 등을 물려받아 75/53/86/82/100이 된다.
삼국지 11에서 특기는 급습이지만 무력이 54다. 무력이 공격력에 반영되기 때문에 부장으로 출전하는게 더 낫다. 조예가 군주인 경우 부장으로 출진시킬 수 없으므로 특기를 다른 특기로 바꾸는 것이 더 낫다. 콘솔판 추가 시나리오인 영웅난무의 영토는 장사. 조우, 조환, 조방, 조진, 학소, 왕쌍, 손례, 사마부, 고당륭, 대릉, 마균, 비요, 한덕을 부하로 데리고 있다. 문제는 근처에 유비가 있다는 점. 원상이 막는 동안 동쪽의 동탁을 정벌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삼국지 12에서는 일러스트가 전신을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커짐에 따라 조예는 장발인 일러스트로 나오게 되었다.[17] 또 전법은 전공성강화 지력도 높아서 공성병기 중에서 하나이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삼국지 11, 삼국지 12 모두 상소를 올리지만 조예에게 무시당한 양부와 혐오무장이 아닌데 이는 양부도 마찬가지이다. 그 이유는 고증무시가 아니라 혐오무장으로 하면 죽이거나 추방을 하기 떄문이다.
삼국지 13에서는 아버지 조비와 비슷하게 삼국지 12 일러스트에서 황제 복장이 추가되었다.
진삼국무쌍 시리즈에는 생각보다 자주 출연한다. 다만 클론 무장인데다 황제나 되는 사람이 사마의의 부하 장수처럼 아무데나 대충 배치되어 있으니... 진삼국무쌍7에도 합비신성 전투에 중간에 끼어있는 클론 무장으로 나오는데 그나마 여기서는 아버지인 조비의 부하로 나오니 체면치레는 한 셈...
2 후한 말의 장수
趙叡
(?~200)
200년에 관도대전이 일어날 때 독장으로 순우경, 수원진, 한거자, 여위황 등과 함께 오소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조조의 기습을 받아 패하면서 수원진, 한거자, 여위황과 함께 참수되었으며 순우경은 붙잡혀 코가 잘렸다가 참수되었다. 오소를 함께 지키던 사졸 1천여명도 죽임을 당해 코가 잘리거나 식량으로 사용하던 소와 말도 입술과 혀가 잘렸으며 이것을 원소군에 보내자 장병들이 모두 놀라 두려워했다고 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수원진과 함께 군량을 조달하다가 군량을 쌓은 곳에 불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급히 구원하러 달려왔다가 오소를 공격하던 조조군이 군사를 되돌려 싸우자 수원진과 함께 전사한다.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조예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div></div>- ↑ 종보다는 조가 더 격이 높다. 조선의 정조를 참고.
- ↑ 여기서 걸린 게 필궤, 하안, 이승, 정밀, 환범 등등의 인사들. 이들은 조예가 죽은 후에야 조상의 도움으로 출세하는데, 결국 고평릉 사변으로 정권을 잡은 사마의의 손에 제거된다.
- ↑ 그래서 이들의 권력이 커질수 있었던 것이다. 황제가 황권강화 수단으로 이들을 이용했으니까.
- ↑ 단, 조비의 형제들처럼 제위에 도전할 수 있는 조조 직계가 아닌 위나라 개국공신인 조조의 사촌형제들의 후손인 방계
- ↑ 내조의 강화는 전한 한무제 시절부터 황제권 강화를 위한 꾸준히 추진되었다. 후한의 경우 광무제 시기 상서가 외조로 떨어져 나가면서 중서가 내조의 핵심이 되었다. 즉, 후한과 위는 상서령보다 중서령이 실세였다.
- ↑ 다만 이들은 말년에는 자기 보신만 하다 사마의에 붙어서 조위 멸망의 방아쇠를 당긴다.
- ↑ 물론 눈에 띌 정도의 재정적 붕괴나, 세금이나 통화 체계의 혼란은 없었지만, 당시 위나라 사람들은 조조 이래로 3대에 걸쳐 허리가 휘어질 지경이었던 건 분명하다.
- ↑ 이 방식은 문소황후가 죽을 때 받은 초빈으로 조예는 똑같은 형벌로 원수를 처형한 것이다.
- ↑ 우연히도 조예의 계모인 곽여왕과 성씨가 같다.
- ↑ 의(懿)라는 시호를 받았는데 역사상 공주 신분으로서 시호를 받은 최초의 인물이다.
- ↑ 4명 모두 3년을 넘기지도 못했다. 평원공주의 경우 이 때 문소황후 진씨의 일족인 진황(甄黃)도 죽었는데 둘을 합장하고 명혼식을 했다.
- ↑ 세 아들은 살아남았다고 한다.
- ↑ <위씨춘추>와 <세설신어>에서는 조창의 아들인 임성왕 조해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근거는 없다.
- ↑ 삼국사기의 기록에도 위나라 사람들은 긴 머리를 좋아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당대의 유행이었던 듯 하다.
- ↑ 말투가 국어책 읽기다.아마 의도적인 국어책 읽기로 보이지만...
- ↑ 진삼국무쌍 시리즈에서는 사마소 역을 전담하고 있다.
- ↑ 기타 단락의 세설신어에 언급된 장발이었다는 이야기를 코에이가 듣고 참조한 모양. 전작에서는 장발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