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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일본 문화 받아들이자[1]
목차
반만년 역사 동안 지켜온 우리 민족의 문화는 하루아침에 그렇게 사라지지 않는다-김대중, 국민들을 설득하며
21세기는 문화산업의 시대이며 더 이상의 문화 쇄국정책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김대중, 한일정상기자회견에서
일본 대중문화 개방에 두려움 없이 임하라-김대중, 업무 보고 중에
나무위키가 탄생하게 된 계기일 수도 있겠다(?)
- 김대중 대통령의 일본 대중문화 개방에 대한 국민들을 향한 설득 이후 서서히 1980~2000년대 생들에게 일본 대중문화는 많은 영향을 주었다.
1 개요
김대중 취임 시기부터 4차에 걸친 일본의 대중문화(게임, 영화, 만화, 애니메이션, 노래, 잡지 등...)의 수입을 허용한 정책. 김대중의 업적 중에서 정치성향 불문 비오타쿠 오타쿠 가릴 것 없이 공통으로 인정하는 것 굳이 일본문화 매니아가 아니더라도 극단적인 혐일 주의자가 아닌 한 진보 보수 가리지 않고 누구나 인정하는 김대중의 업적 중 하나다. 오타쿠들이 진보성향이 강한게 이 때문이라 카더라 국가기록원의 설명은 이곳을 참조.
2 초기 인식
1998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은 일본 대중문화를 합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기본적으로 일제강점기 식민지 통치 등 과거사 문제로 인해 일본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은 광복 후 20년이 지난 1965년이나 되어서야 일본과 국교 정상화가 진행되었으며 국교 정상화는 이루어졌더라도 군사정권 시절의 모토는 "반일, 혐일"이었고 일단 과거의 식민지배에 대한 기억이 여전히 남아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일본에 대한 사회적인 반감도 높았던 편이었다. 게다가 정부는 정부대로 통치 논리를 위해 (민족문화 교육이라는 명목 하에) 반일교육을 시켰고, 재야와 학생계층에서는 또 나름대로 매판 자본 비판이나 외세 배격이라는 이유로 일본을 달가워 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전체적으로 일본문화 개방에 대해서 반대가 심한 건 당연지사였다.[2]
그 일례로 광복회 등 호국보훈 단체와 순국선열 유족회 등 애국성향 단체에서 과거 35년간 한반도를 장악지배하여 우리 민족을 고압(苦壓)으로 몰아간 왜놈들의 저질적이고 침략적인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문화분야에 식민지를 만들어낼 우려가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면서 반대했다. 거기에 독도 영유권 문제까지 해결되지 못한 마당에 일본의 대중문화를 개방한다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경제적으로도 우려가 있었는데, 일본에게 국가재정의 반(半)을 파탄시킬 정도로 돈을 퍼줄 대가가 있느냐는 의견도 나왔다. 당시는 일본어만 써도 매국노 취급하던 그런 시대였다.
종교계의 반대도 심했는데 거리 곳곳마다 십자가가 흔했을 정도로 개신교 성향이 강했던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제암리 학살사건이나 신사 참배를 강요한 일 때문에 개신교에서 앞장서서 일본 문화를 배척하는 편이었다. 특히 당시 '낮은울타리'같은 잡지에서는 대놓고 "일본 문화는 마귀적인 우상 숭배 문화이니 죽어도 들여올 수 없다."라는 논지의 글도 있었다. 또 성균관 등 유교 및 유림계도 반발하며 우리 민족을 말살하고 유교문화까지 탄압하며 말살하려고 했던 일본의 대중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일본군과 맞서 싸웠던 조상들에 대한 모독행위라고 비판하였다.
일본은 성적인 컨텐츠가 한국보다 더 많았고 이런 종류의 대중문화가 어느 정도 퍼져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일본 내에서도 이러한 만화나 영화, 드라마에 대해 심의를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일본의 방송국들 대다수가 민영방송이었고 자극적인 내용으로 시청률을 모으려는 민영방송들은 선정성이나 폭력성이 강한 프로그램을 내보내었다. 민영방송이 신문사와 겸업을 하고 있어서 이러한 심의강화 움직임에 대해 대응을 하였던 것. 거기에다가 이러한 심의 움직임에 대해 문화계 내부의 반발이 강해서 결국 이러한 움직임은 흐지부지되었다. 하지만 90년대 이후로부터는 범죄 관련 사건 사고가 자주 일어나면서 심의가 강화되어가고 있다. 당시 한국에서는, 이러한 자극적인 일부 일본 컨텐츠를 전체 일본 문화로 일반화하는 경향이 반일감정 속에 있었고 '일본 문화는 저질 문화'라는 통념이 한국을 지배하던 시기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제작된 컨텐츠가 아니더라도 왜색이 짙다는 이유로 일본을 다룬 영화가 수입 단계부터 불허되거나 수입했어도 개봉을 허용하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1964년 동아일보는 일본 문화가 유입되는 당시 상황은 "제국주의의 새로운 침략 형태"라며 "한국의 얼은 머지않아 일본화된다"거나 "이 민족은 이대로 죽어버리고 싶을 때가 올지 모른다"고 원색적으로 비난했으며, 일본 문화를 향유하는 계층에게는 그들은 TV를 통하여 일본화 되어 가고 있다"거나 "뒷골목에는 일본의 저속한 잡지가"고 유통되고 있다고 비난했다.기사 그러나 기사에 나타난 것과 같이 이미 60년대에도 이러한 제재가 완화되는 경향이 보였다. 그리고 이 당시 일본 문화를 허용해 준 것은 박정희 정부이며, 금지했던 쪽은 전임자인 장면 정부이다.
일본 문화가 아니더라도 주로 수입의 중심인 만화, 애니메이션에 대한 부정적인 사회 인식도 한몫 했는데 1950년대부터 정부는 경무대 똥통 사건을 계기로 하여 만화 검열제나 '만화는 불량배들이나 보는 것'이라면서 만화 죽이기에 여념이 없었다. 당시에는 어린이날에 일본 만화책을 '불량만화'라면서 태우는 행사 같은 것이 있었고 심지어 1980년 8월에 사회정화운동의 일환으로 폭력성 만화영화 금지 정책을 시행된 바 있는 그런 사회 분위기에서 만화와 만화영화를 주 문화산업으로 키워나가던 일본 문화 같은 걸 개방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당시의 만화, 특히 일본 만화가 주로 폭력에 포악성을 강조하는 대목이 많고 노출 장면도 잦다는 악평이 있어 일본 문화가 저질 문화로 인식되어 온 것도 더해졌다.
이미 여성들 미니스커트 길이나 재고 장발 단속이나 하던 나라에서 문화개방은 꿈속의 이야기였다
3 인식의 변화
그러나 이렇게 부정적인 입장의 한편으로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일본 문화를 이미 소비하고 있는 중이었다.
주로 해외의 문물에 관심이 많고 외국어가 가능한 지식인 계층이나 외국 출판물을 입수 할 수 있던 중상류층 들이었다. 대표적으로 박정희전 대통령도 사석에서는 일본 영화를 봤다고 하고[3] 그의 딸 박근혜 또한 일본 만화를 즐겨봐서 그녀가 육영재단 이사장으로 재직 중이던 시절에 육영재단에서 만화 잡지 '댕기'나 '보물섬'등을 출판하기도 했다.
엄밀히 말하면 일본 문화 개방 이전에 보고 즐길 만한 사람들은 이미 다 접하고 있었다. 1970~80년대 당시 독재정권 하의 한국이라 할지라도, 무역업을 하거나 여러 이유로 해외에 나가는 사람들은 곧잘 일본 물건들을 사서 들여오고 있었고,[4] 보따리 장수나 비공식적인 루트를 통해 어느정도는 해외 상품이 들어왔다. 남대문 중국 대사관 앞에는 해외서적 서점이 꽤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비록 몇 달 지난 것이어도 일본의 논노를 비롯한 다양한 패션 잡지를 사서 볼 수 있었고, 'Burrn!' 매거진을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당시 락덕후들도 이러한 상점들을 드나들었다.[5] 물론 당시 상황이 상황인 만큼, 몇달 지난 잡지가 들어오는 등[6] 상태는 매우 안좋았지만 그래서 사서 볼 사람들은 다 사서 봤다.
게다가 부산은 일본 TV와 라디오가 잡히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일본 음악을 접할 수 있었다.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가 유행하기 시작한 지역도 부산/경남이었다.[7] 1980년대쯤 되면 한국이 소비사회로 진입하면서 일본 노래가 다운타운[8]에서 대놓고 유행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를 1차 일본문화 붐으로 보기도 한다. 나이트 클럽에서는 콘도 마사히코나 C-C-B, 안전지대, 마츠다 세이코의 노래가 울려퍼지기도 했고, 명동과 이태원의 음악다방에는 일본음악 애호가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게다가 일본 문화가 싫다고 해도 가전제품은 일제가 좋다는 사실은 모두가 동의하고 있었다(...). 베트남 전쟁에 다녀온 장병들은 미군 PX에서 미군들과 쇼부[9]를 쳐서 산요 TV나 소니 라디오를 사서 들어오는 경우가 비일비재 했다.[10] 이러한 분위기를 중심으로 세운상가, 용산 전자상가 등지에서 일본 상품이 유통되면서 덩달아 일본 문화 컨텐츠도 돌아다니기 시작했고, 또한 한국의 빽판 전통에 힘입어, 80년대에는 복제판 레코드와 테이프가 유통되었고 90년대에는 복제판 CD나 비디오등이 유통, 만화책도 해적판 만화책 등으로도 일본의 만화책들이 수입되기 시작하면서 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결국, 중상류층에서 이런 문화를 접하면서 1990년대 초중반 PC통신에서 오타쿠는 고급문화라는 식의 이야기들이 나오는 배경이 되었다.[11] 80년대 중반 세운상가와 청계천을 유령처럼 떠돌던 1세대 오타쿠들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12]
또한 자체적으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것[13]보다 일본, 미국에서 애니 수입하는 게 훨씬 싸게 먹힌다는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수입된 일본 애니메이션들이 하나둘씩 공중파에서 방영되기 시작한다. 정확하게는 합작애니메이션인 황금박쥐가 TBC를 통해 방영되기 시작되면서 인기를 얻게 되자 TBC에서 본격적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을 수입방영하기 시작했고 KBS와 MBC에서도 이를 따라해 일본 애니메이션을 방영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이 당시의 일본 애니메이션들은 뾰로롱 꼬마마녀같은 예외적인 케이스를 제외하면 한국 정부의 훈령에 따라 방송사들이 왜색 분위기, 또는 일본어 서체가 있거나 일본적인 성격이 짙은 부분은 모두 삭제 및 영상편집기술이 빈약했던 당시에는 모자이크나 블러 처리로 대충 수정하는 방법으로 배제, 지명같은건 도쿄→서울, 오사카→부산, 교토→경주 등으로 한국적 분위기로 수정하고 캐릭터 이름 역시 모두 한국식으로 수정하고, 이름도 일본식 이름보다는 한국식 이름으로 고치면서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일본문화라고 인식하는 이들이 별로 없었지만, 하여튼간에 일본 문화가 어느정도 친숙해지기 시작하는데 기여했다. 물론 이에 대하여 문제제기나 항의가 상당했지만 애니메이션에 대한 인식 자체가 미비했던데에다가 애니메이션 제작자체가 상당히 돈이 드는 일이라 방송심의가 엄격했던 시절이었음에도 일본 애니메이션은 계속해서 방영되었고 오히려 국산TV애니메이션 제작-방영이 1987년에 와서야[14] 이루어질 지경이었다.
거기에 금지에도 불구하고 방송 프로그램의 포맷이나 만화 캐릭터, 작품[15], J-POP 등에 대해서 표절이 대단히 많았다. 표절/공식 판정, 클로버 문고, 다이나믹콩콩코믹스 등 문서 참조. J-POP 표절 사례는 특히 일본문화 개방 직전인 90년대에 극에 달했는데 단적인 예로 이 시절 최고의 그룹이던 룰라는 자신들의 대표곡인 천상유애가 하필 일본가요 표절곡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대중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이전까지 유능한 싱어송라이터였던 홍수철은 일본가요 하나를 아주 대놓고 표절해서 히트치다가 표절 사실이 밝혀지면서 가요계에서 아예 매장을 당했다. 심지어 만화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라서 학습 만화의 대표주자중 한명인 이원복조차도 초기작에서 치바 테츠야의 작품들을 표절했다. 결국 무조건적인 차단은 오히려 음성적인 부작용을 불러온다는 법칙에 따라 개방의 필요성도 요구되기 시작한다. 한국에서 포르노가 불법인 것을 보면 이해하기 쉽다. 오죽하면 불법자료가 많고 검색하기 쉬운 곳에선 국내에 저작권이 있는 물건은 검색이 금지된 경우도 많고 저작권 자료라는 명목으로 요금도 비싸지만, 포르노는 검색도 쉽고 저작권도 없어서 싸게 받을 수 있다.
이렇게 상반된 사회적인 분위기 속에서 노태우 대통령 때에 일종의 여론 떠보기를 시도하면서 문화 개방이 처음으로 수면위로 부상한다. 이런 언론 떠보기는 연이은 일본의 망언과 상기한대로 일본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이었던 태평양 전쟁 유족회 같은 각종 단체들의 반대, 그리고 평소 표절을 하던 작가, 대표적으로 배금택이나 이로마같은 인물들의 거센 반대까지 합쳐져서 이루어지지 못하게 된다. 이들은 노태우 대통령 때 문학작품의 해적판을 원천적으로 금지하던 베른 협약 가입을 추구하자 '베른 협약 가입은 출판 창작의 자유를 제한한다'라면서 반정부 투쟁을 하기도 했다.
1996년까지도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김모씨 曰 : "일본놈들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겠다"), 독도 영유권 문제와 1998년 한일 어업협정 파기 문제로 국민들간의 반일(反日) 감정이 짙었으나,[16] 결국 1998년 10월 20일, 양국 합의하에 1차 개방이 되면서 만화와 4대 국제 영화제 수상 영화를 시작으로 일본문화를 공식적으로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위성방송항목을 참조하면 성인방송(...) 시청을 목적[17]으로 디렉TV재팬이나 스카이퍼팩트의 수신기(셋톱박스)를 밀수입 하기도 했다.
4 개방
1차 개방으로 영화, 비디오, 만화를 우선 개방되었으며, 이후 계속해서 합의를 거쳐서 조금씩 더 유입시키는 식으로 진행되었으며, 한일간에 마찰이 발생하면 개방이 일시적으로 중단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했다. 2001년에는 일본의 중학교 역사 교과서 왜곡문제와 당시 수상이었던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문제로 인해 개방이 전면 중단되기도 하였다. 이에 맞춰서 애국 및 호국단체 등에서는 일본 저질문화 퇴출운동 및 대국민 서명운동을 통해서 일본 문화 전면개방 및 수입정책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였다.
4.1 영화
4.1.1 개방 이전
영화의 경우 한때 일본색 뿐만 아니라 일본인이 출연하거나 일본 업체가 제작 스탭으로 참여해도 일본 영화로 간주되어 상영이 거의 불가능했다.
- 공작왕(1989) - 애초에 일본에서 만들어진 동명의 만화 원작인 데다가 일본인 감독과 스탭진이 다수 참여했으며, 일본 배우도 2명이나 주연으로 출연했던 이 영화는 당초 국내 개봉이 관계법상 불가능했으나 원표와 글로리아 입을 주연으로 개작한 홍콩판이 종로 허리우드 극장(현 허리우드클래식극장)에서 우여곡절 끝에 개봉 성공했다.(당시 홍콩판을 상영해야 한다는 단서 조항을 걸고 개봉했다.)
- 미완의 대국(未完の対局, 1987) - 중일 합작으로 만들어진 바둑영화. 양국에서 이렇다할 평을 받지는 못했지만 작품성을 인정 받았다고. 수입사 한진흥업은 법정 소송까지 가며 수년간 심의 요청을 받아내려 했으나 일본인이 스탭으로 공동 참여했다는 이유로 수입 불가. 소송 도중인 1988년 5월에 수입사가 들여오지 못해 일본 대사관에서 상영한 기록이 있다.
- 아키라(1988) - "폭풍소년"이라는 제목으로 홍콩영화로 속여서 개봉..
- 파워레인저 더 무비(1995) - 해당 작품은 미국 사반 엔터테인먼트에서 공룡전대 쥬레인저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며 감독이고 스탭진, 출연진이 하나같이 미국인인 데다가 멤버들이 수련하는 무도가 태권도인 점에서 국내 상영에 문제될 것 없는 작품이나, 원전이 일본 작품인데다 토에이가 제작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국내 상영관까지 확보된 상태에서 수입 불가.
- 세번 건넌 해협(1995) - 하하기키 호세이의 동명의 소설(국내에서는 '해협'이란 제목으로 정발.)을 원작으로 하여 일본의 베테랑 감독 고야마 세이치로가 영화화하고 한국계 일본인 배우 미쿠니 켄타로와 인기 가수이자 탤런트인 미나미노 요코가 주연으로 나온 이 작품은 일제 시대 징용으로 끌려 갔다가 일본인 여자와 결혼한 뒤 해방을 맞았으나 한일 양국 어디를 가도 배척을 당하는 한 가족의 기구한 운명을 주제로 했고 장훈 등의 재일교포 유명인사들이 제작비를 후원한 영화였으나, 문화체육부(현 문화체육관광부)의 일본 국적 영화 수입불가 방침으로 인해 국내 개봉은 물론 11월 6일 서울 힐튼호텔에서 예정된 시사회조차 무산.
- - 참고 : '공연윤리위원회 X파일' - 송락현 하이텔 게시글에서.
아래는 왜색 논란으로 개봉 과정에서 잡음이 일었던 영화들이다.
- 벽안의 나비부인(My Geisha, 1962)#: 미국 영화사가 제작했지만, 출연한 미국 영화배우가 게이샤로 분장해 일본 풍이 느껴져 개봉 논란.기사 1963년 12월 31일 중앙극장 개봉.
- 8월 15야의 다집(The Teahouse Of The August Moon, 1956)#: 일본 배우가 출연하고 배경이 일본이어서 왜색이 짙다고 상영 허가 보류. 후에 공보부가 상영을 허용했는데, 미국의 원조 정책을 그린 영화로 왜색으로만 볼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라는 의견. 세기상사주식회사 수입·배급, 1963년 8월 24일 대한극장 개봉. 그러나 국내에서 찾기 어려웠던 일본 풍경이 관객의 호기심을 끈 덕분에 흥행에 성공했다.
- 해병 동경에 가다(Marines, Let's Go, 1961)#: 왜색 문제로 상영 허가가 보류되었다가 재허용되어 개봉. 동아일보는 "8월 15야의 다집"이 왜색 논란이 일었던 상황을 소개하며, 이 영화(해병 동경에 가다)에 비하면 건전한 편이라고 말했다.기사 1963년 8월 3일 단성사 개봉.
- 요술소년(少年猿飛佐助, 1959)#, #: 일본 최초의 시네마스코프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이자, 토에이 애니메이션이 제작한 두 번째 영화. 완전한 일본 영화임에도 개봉된 이유는 일본에서 수입한 것이 아니라 미국 MGM을 통해 영어 자막이 탑재된 수출판을 구입해왔기 때문. 수입사는 MGM 제공(MGM이 미국 내 배급했다는 의미)이라고 써있으니 미국 영화라고 주장(...)했고, 그것이 받아들여져 개봉 성공. 1963년 12월 7일 대한극장 개봉.
- 흑선(1958)#
- 굿바이(원제: 사요나라)
- 밤의 세계(1962)#: 밤문화를 다룬 이탈리아 다큐멘터리. 1963년 1월 1일 대한극장 개봉.
아래는 국내 제작 영화이나, 영화에 포함된 일본 색채로 인해 상영 허용 논란이 일었던 국산 영화이다.#
- 행복한 고독 #
- 동경비가 #
- 검은 장갑 #
- 귀국선 #
4.1.2 개방 이후
1998년 10월 20일 제1차 일본 대중문화 개방으로 영화의 경우 공동제작 영화(20퍼센트 이상 출자 등 영화진흥법상 요건을 충족하는 경우와 한국 영화인이 감독이나 주연으로 참여한 경우), 일본 배우가 출연한 한국영화,세계 4대 영화제(칸, 베를린, 베니스, 아카데미) 수상작들에 한해 개방했다. 이에따라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카게무샤>, 이마무라 쇼헤이의 <우나기>, 기타노 다케시의 <하나비,>, 한·일 공동으로 제작된 박철수 감독의 <가족시네마> 등이 개방되었다. 비디오물(VHS, DVD 등)은 극장에서 상영된 영화만 비디오 출시를 허용하였다.
1999년 9월 10일 제2차 일본 대중문화 개방으로 공인된 국제영화제 수상작과 전체관람가 영화로 확대(애니메이션 제외)해 이와이 슌지의 러브레터를 비롯해 다수의 영화가 국내에 상영되게 되었다.
이후 2000년 6월 27일 제3차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 실시되었고, 2001년 7월 12일 일본 역사 왜곡 교과서 논란으로 정부가 개방 일정 중단을 선언하기도 하였다.
2004년 1월 1일 제4차 일본 대중문화 개방에서 영화, 음악, 게임 부분이 전면 개방되어 현재는 수입 제한 조치가 없다.
4.2 만화
해적판이 아닌 정식 발매는 1989년 12월 아이큐 점프의 드래곤볼이 시초였다. 1991년 12월 창간한 소년 챔프는 슬램덩크로 이에 맞섰다.
4.3 게임
소니 컴퓨터 엔터테인먼트 코리아와 한국닌텐도가 출범하게 된 계기
아케이드 게임업계와 함께 일본 게임업계의 주류산업을 담당했던 비디오 게임업계는 '수입선 다변화 품목'의 규제때문에 일본게임의 제대로된 게임의 수입이 힘든 상태였다. 수입선다변화품목은 외국과의 경쟁시 한국이 극도적으로 불리할수밖에 없는 산업분야를 보호하기 위해서, 이에 해당되는 분야의 외국산 수입을 규제하는것과 비슷한데, 한국에서의 수입선다면화품목 관련 법규가 실질적으로는 대일수입규제책의 일종이었다는 소리도 있다. 그래서 일제 자동차는 물론이고, 상당수의 일본제 공산품 역시 수입규제 대상이었다. 물론 수입규제대상에 일제만 있는것도 아니었으며 그때 한국경제가 수출액 10억 달러,1000억 달러 달성한게 나랏경사 취급받던 수출에 목을 멘 개도국이었다는것도 감안해야한다.
하여튼 이 때문에 80년대와 90년대에도 일본제 게임기(3~4세대 콘솔)가 몇몇은 정식 계약으로 우리나라에 정발되었지만 상당수는 북미판 기계를 우회수입하는것에 가까웠다.[18] 이러한 배경 탓에 전부터 일제 게임을 직접적으로 구하는것은 여의치 않았던 상황에 1995년, 음비법(음반 및 비디오물에 관한 법률)이 개정됨에 따라 우리나라 비디오게임 업계사상 최악의 흑역사의 시대를 맞이하게된다.
영상물의 법의 개정으로 정품도 불법으로 간주되어 버리는 웃지못할 사태가 벌어졌고, 이에 따라 경찰이 오면 정품인데도 마약을 거래하듯이 눈치보며 거래를 해야 했고, 용산의 보따리상들이 주도하는 정품 블랙마켓시장이 생기게 된다. 이러한 흐름속에서 정품조차 경찰이 단속하니 어차피 불법복제도 같은 불법이니 복제본을 쓰자는 논리가 통용되어 정품시장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며, 남아있는 정품도 슈퍼 패미컴의 파이널 판타지 6가 20만원, 플레이 스테이션의 파이널 판타지 7[19]이 27만에 유통되는 시대가 온 상황이었다.[20]
그러던 와중 2000년 6월 27일, 3차 개방에서 게임의 개방도 통과되면서 정식으로 게임이 유통되면서 변화가 오게 된다. 이때는 일본어로 된 게임은 수입이 허가되지 않았으나 2003년 9월 16일 4차 개방에서 완전 개방되면서 정식으로 일본어로 된 게임이 발매되기 시작된다.[21] 개방 직후에 소니 컴퓨터 엔터테인먼트 코리아의 강희원 대리는 “3차 개방 때 일본어로 제작된 게임 소프트웨어 수입이 허용되지 않아 유럽과 미국 지사를 통해 영문판을 우회공급해 왔다”며 “게임 시장이 개방되면 일본에서 새 게임을 출시한 후 한국 상륙까지 3개월 가까이 벌어지던 시차가 줄어들고, 한글판 게임의 동시 제작도 가능해지는 등의 긍정적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기대를 내비췄다. 이렇듯 업계도 개방에 호응하면서 일본어 음성/자막 게임이 활발히 수입되면서 비디오 게임 시장이 본격적으로 형성되는 계기가 된다. 그리하여 오타쿠들은 일본어를 공부하게 되고...
아케이드 게임의 경우에는 BEMANI 시리즈를 언급할 수 있는데, 국내 수입 초기에는 아래에 서술될 음악 부분의 개방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아서 심의상으로 일본어 보컬곡은 삭제되고 미디음으로 대체되었다. 게임에 따라서 곡이 아예 삭제되거나(ex: Ultimate power, DM Powerful MIX, ありがとね。) 또는 보컬만 삭제되거나(ex: 正論, 시리토리, 밤비나, 愛のしるし, MISS YOU 등) 영어보컬판이 있는 경우 그것으로 대체되기도 했다.(ex: Luv to me) 현재는 개방 단계가 바뀌어서 일어 보컬곡도 무사히 수록.
그 외 KOF 97,98의 경우 일본어로 된 음성을 대부분 기합소리 내지는 무음으로 교체된 기판도 있었다. 하지만 94~96은 전부 일본어 그대로였는데? 코코데스카 야이 야바레
4.4 음악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락카페, 롤러장, 디스코장 같은 곳에서 암암리에 뮤직비디오나 음악감상이 이뤄졌고, 역시 어둠의 경로(빽판과 불법복제된 카세트 테이프)를 통해서 일본 뮤지션의 음반을 구할 수 있었다. 일본 대중문화 개방 전에 1988 서울 올림픽 때 소녀대(...)를 비롯한 몇몇 뮤지션이 게스트로 공연하긴 했으나 일본 뮤지션의 음반발매나 공연은 전무했다. 그런데 일본 대중문화 개방 전에 일본 뮤지션이 '합법적으로' 공연한 적은 있었는데, 바로 티스퀘어나 카시오페아와 같은 연주밴드들이 정식 공연을 했었다(티스퀘어는 1994년, 카시오페아는 1996년). 한편으로는 (씁쓸한 일이지만) 티스퀘어나 카시오페아처럼 국내 공연 초연 이전에 이미 국내방송사에서 BGM으로 쏠쏠하게 써먹으면서 알게 모르게 이런 노래들도 많이 활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일들은 개방 이후로도 영향을 줘서 초기에 연주밴드 음악이 많이 알려지게되는 계기가 됐다.
2차 개방에서 처음으로 2천석 이하의 소규모 공연이 허가되었으며, 3차개방에서 좌석 제한이 철폐, 4차 개방에서 음악 매체의 판매가 허락되었다. 다만 여전히 공중파에서 일본어로 가창된 음악을 송출하는 경우는 적은 편이다.(이전 버전에선 금지 상태라고 서술했지만, 어디까지나 J-pop 의 인기와 관심도가 낮아 잘 나오지 않고 있을 뿐이지 타블로가 꿈꾸라에서 m-flo의 노래를 선곡하는 등, 엄연히 라디오 방송에서 일본어로 가창된 유명 J-pop 곡들이 송출되고 있다.) 신해철이 과거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 고스트스테이션에서 일본 노래를 틀었다가 경고를 먹기도 했다.[22] 다만 일본 음악이라 하더라도 일본어 가사가 없는 연주곡이나 영어로만 부른 곡들은 문제없이 나오고 있다,[23] 국내 방송에서 수많은 일본 덕후 음악이 BGM으로 삽입되는 것은 이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일본 대중문화가 개방되기도 전에 SBS에서 카드캡터 체리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방영해준 적이 있다. 카드캡터 체리 3기가 인기리에 무사히 종영되고, 마지막에 엔딩곡이 흘러나오는데, 원작과 동일하게 platina 3기 오프닝 일본어 원곡 앞부분이 약 10초정도 그대로 흘러나온 적이 있었다. 당시 하이텔이나 나우누리 등 PC통신 애니메이션관련 동호회에서는 난리가 아니었다...
다만 비디오로는 검열이 놓친건지 종종 일어판 노래가 나오곤 했다. 1993년 무빅스 비디오로 2편까지만 출시한 아르슬란 전기 애니메이션은 일어판 엔딩영상에 일어판 노래가 하나도 안 자르고 심지어 엔딩에 일어 자막,제작진 자막까지도 하나도 안 잘리고 나왔으며 버블검 크라이시스 트러스트판 비디오에서도 배경 노래에 작긴 해도 일본 노래가 분명히 나왔고 1994년에 나온 아랑전설 애니메이션 금문영상 출시판에서도 배경음악으로 나오는 일어판 노래는 그대로 나온 것을 비롯하여 여러 사례가 있었다.[24]
4.5 방송
방송에서도 일본 드라마, 영화, 애니메이션 등 일본 영상물이 방영될 수 있다. 또한 이 영상에서 나오는 일본어 음성도 별도의 더빙 없이 방영될 수 있다. 다만, 지상파 방송에서는 일본산 컨텐츠가 자주 방영되는 편이 아니라 지상파 방송에서는 일본어 음성을 내보낼 수 없다고 오해하는 사람이 있는데, 일본산 컨텐츠가 지상파 방송에서 방영되지 않는 이유는 외국 영상물에 대한 한국어 더빙의 필요성, 지상파에서 굳이 다룰 필요 없는 서브컬쳐 문화라는 점, 일본어 가창에 대한 일반 대중의 거부감 등 여러 요소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의 방송계에서는 공중파를 비롯해서 일본어가 못나오게 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케이블방송 분야에서는 얼마든지 일본어 음성을 아무런 제약없이 틀 수 있다. 예를 들어, 2010년대 들어 일본 애니메이션의 동시방영을 모토로, 일본 컨텐츠를 원판 그대로인 유지한채 자막을 입히거나 약간의 편집만 하는 케이블 방송국인 애니플러스가 들어섰고, 애니맥스도 이에 따라 한일동시방영시장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5 개방 여파와 현황
1998년 개방을 전후로 보급되기 시작한 인터넷의 영향과 중복되면서 일본 문화 콘텐츠가 대중적인 컨텐츠가 되었고, 오덕이 본격적으로 양산되기 시작하면서 대중적인 컨텐츠중 하나로 자리잡는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처음 개방정책이 나왔을 때는 일본 문화에 의해 국내 문화가 잠식될거라는 우려섞인 반대도 상당히 많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출판 만화 시장과 애니메이션 시장 부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매니아 시장 이상으로는 성장하지는 못하였다. 2000년대 이후로 일본 대중문화(드라마, 대중가요, 영화 등)의 영향력이 떨어지는 바람에 그렇게 된 것이다. 오히려 2000년대 중반 들어 한류가 불기시작하더니 급기야 2000년대 후반 들어서는 오히려 한국 가수들이 일본가서 히트치고 있는 실정. 이는 한국이 아시아는 물론 전세계적으로 봐도 자국 대중매체의 점유율이 높은 편에 속하는 국가인 점과도 무관하지 않다.
다만 애니메이션같은 산업분야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 한국에 자생적인 시장이 거의 없다시피 한 꼴이니 영향이 없지 않았다. 대한민국/문화 규제와 탄압 참조하면 알 수 있듯이 과거부터 이어온 탄압과 투자지원제도의 미비[25]로 기반이 매우 부실한 있었던 한국 애니메이션 시장은 일본문화에 완전히 잠식되어서 뽀롱뽀롱 뽀로로같은 아동 대상 컨텐츠를 제외하고는 발전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 됐다. 결국, 애니메이션 시장에서는 예측이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출판 만화 시장의 경우는 약간 다른데, 초창기 아이큐 점프나 챔프같은 잡지가 창간될 시기만 하더라도, 드래곤볼이나 슬램덩크같은 대형 일본 만화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한국 작가들의 만화로 채워지던 시기가 있었다. 지금처럼 잡지 대부분을 일본 만화가 잠식하던 때가 아니었다. 국산 만화가 무너지게된 계기는 대여점이 생겨나면서부터였는데, 그 전까지 일반적으로 만화책은 사서 본다는 인식에서, 대여점에서 100원~300원 사이의 저렴한 값으로 빌려본다는 인식으로 바뀌면서 급격히 기반이 주저앉게 된 것이다.[26] 또한, 1997년 청소년보호법 도입에 따른 청소년유해매체물 지정 및 만화가 기소, 이후 광랜이 보급되고 퍼져나간 불법 스캔본 또한 국내만화시장을 무너뜨리는데 단단히 한몫을 하게 된다. 결국, 이에 버티지 못한 기존 한국 만화가들은 웹툰으로 갈아타거나 잡지 연재를 중단하고 단행본만 내면서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다.
만화와 애니메이션 업계를 제외한 나머지 업계에서는 일본문화 개방으로 노골적인 표절 대신에 포맷이나 아이디어를 돈 주고 사오는 일이 정착되었으며, 이와 동시에 해적판 만화책이나 복제 비디오 등이 사라지는 긍정적인 효과도 보였다.
2004년 4차 일본 대중문화 개방 이후로 개방에 전진은 없는 상황. 5차 개방에 대한 논의가 2011년 정병국 문화체육관광부에 의하여 벌어졌으나 유야무야되었다. 2012년 들어선 한국이 문화적 컨텐츠에서 상당한 발전과 영향력을 가지게 된 관계로 별로 신경 안 쓴다.
2015년까지 한일양국의 정세는 냉랭하지만, 문화를 통해 이미 상당부분 교류가 있었다. 한국의 뮤지션이나 아이돌이 일본에서 음반을 발매하거나 TV출연으로 인기를 얻어 화제가 되었으며, 이에 미치진 못하지만 한국 현지에서도 일본가수의 내한공연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에선 케이블을 통해 일본 애니메이션, 방송프로그램을 정식으로 시청할 수 있게 되었고 콘솔게임 시장에서도 상당부분 한글화를 통한 정식발매가 이뤄진데다 모바일을 통한 온라인 게임의 서비스까지 가능해졌다.
그 외에 양국의 문학작품들이 출간되어 작가들의 낭독회나 강연을 통한 교류도 넓어지는 실정이다.
5.1 어린이 및 청소년
사실상 일본문화 특히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의 주 소비층이라 할 수 있는 어린이 및 청소년들은 1980년 이후에 태어나게 되었던 이들을 시작으로 태어나자마자 선대 세대들보다 먼저 어린시절부터 일본의 문화를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던 편이었다. 특히, 1990년대와 2000년대 이후에 태어난 이들은 청소년으로 성장하면서 점차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 등을 손쉽게 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2000년대 온라인 문화의 급속적인 발달로 그 동안 TV에서 한국적 분위기로 수정되어 나왔던 일본 애니메이션을 어렸을 때부터 봤던 선대 세대들과는 달리 이후 세대들은 TV뿐 아니라 컴퓨터를 통해서도 일본 애니메이션을 쉽게 접하는 입장이 되었고 그 결과 고질적인 불법 업로드 및 다운로드 유행과 토렌트 등의 등장으로 이 때를 계기로 이들 청소년들을 중심으로 이른바 한국 성우 까대기(더빙까) 현상이 나오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27].
이전 문화개방 이전만 했어도, 지금같이 컴퓨터가 아닌 TV로만 볼 수 있었고 TV로 봐도 대부분 한국 성우진의 육성녹음으로 나오고 한국적 분위기로 대폭 수정한 개정판으로 애니메이션을 봤던 경우가 많았다는 점을 보면 이번 문화개방이 사실상 "그 동안 봐왔던 한국 애니메이션이라 알고 있던 작품들이 사실은 일본 애니메이션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오해를 풀어내게 된 계기도 되었지만, 대신 철부지 일부 청소년들의 더빙까가 극성을 부리고 국내 성우진들이 사실상 명예훼손을 당하게 되는 계기를 방도하게 되었다는 단점도 가졌는데 이것은 사실 인터넷의 발달로 인한 폐해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그 동안 미국 문화의 지나친 병폐 등으로 찌들었던 선대시절 청소년 세대들과는 달리 저 때까지는 미국과 서구문화에 밀려서 그 동안 한국에서는 빛을 보지 못했던 일본의 문화가 1990년대에 태어난 청소년들을 계기로 점차 일본에 대한 환상과 기대를 부풀어오르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주기도 하였다.
선대 청소년들이 미국 및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서구에 대한 환상과 기대를 하였다면 요즘 청소년들은 일본문화 개방 및 온라인 문화의 발달로 그 동안 한국에서는 베일에 가려져 있던 일본문화에 대한 환상과 기대가 증가하게 되었고 온라인에서 일본여행 등을 다녀왔던 후기 등만 봐도 대부분 청소년들이 댓글을 달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2011년 도호쿠 대지진 +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와 2012년 이후 아베 신조 집권 등의 우경화, 그리고 본질적으로는 일본 애니메이션과 게임들이 질적 저하를 겪는 모습을 보였고, 2006년 기점으로 생겨난 미드 열풍과 늘 유명한 할리우드 영화, 2000년대 후반 이후 게임이나 유튜브 등을 중심으로 미국이나 영미권에 대한 환상도 늘어나고[28] 경제 성장으로 급부상한 중국에 대한 환상도 미미하지만 새롭게 생겨나는 등, 일본에 대한 환상이 약간은 감소한 추세다. 그래도 여전히 일본문화는 한국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 단적으로 포켓몬 고만 봐도...
6 만일 지금까지 일본 대중문화를 개방하지 않았다면?
사실, 냉정하게 봐도 김대중 대통령 집권기가 아니었더라도 일본 대중문화 개방은 이뤄졌을 확률이 높았다. 당시 PC통신만 봐도 음성적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을 접한 사람들이 많은 덕분에 일본 대중문화 개방에 대한 반대 여론이 없었으며, 또한 일본 애니메이션이 현지화를 하고 방영해야한다는 것 때문에 일본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세계관과 현지화된 세계관의 괴리감이 심해서 이에 대해 비판 여론이 생성된 상황이었다.
이전 버전에는 나무위키의 전신인 리그베다 위키(엔하위키)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건 지나친 비약이다. 기동전사 건담 시리즈는 투니버스에서 신기동전기 건담 W가, 대원방송에 기동전사 건담 SEED가 더빙 방영된 적이 있고, 설령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도 인터넷에 나와 있는 일본 웹의 정보를 통해 건담 팬이 된 사람들과 건담 더빙판을 접한 사람들이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서로 잡담을 나누어 활동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 이루어지건 말건, 엔하위키의 탄생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보기 힘들다. 세운상가를 유령처럼 배회하던 80년대 중후반의 1세대 덕후들을 무시하지 말라 만약 정부가 일본 IP마저 차단했다면? 그리고 복돌이들의 지상락원이였을것이다!
- ↑ 음란물, 이지메 같은 음성적인 일본문화를 지양하고, 긍정적인 요소를 들여오자는 취지.
- ↑ 같은 맥락에서, 일본 수입차 역시 한국 시장에서는 거의 판매고를 올리지 못했다.
- ↑ 김재규와 함께 일본 사무라이 영화를 즐겨 보곤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 ↑ 이래서 이 당시에 "입으로는 반일을 외치면서 외국 나가기만 하면 코끼리 전자밥솥(조지루시) 사서 들어오는 높으신 분들"에 대한 비판이 많았다.
- ↑ 비슷한 이유로 지금은 작고한 앙드레 김 선생도 젊은시절 수입 서점을 드나들며 보그지를 구했다고 한다. 당시 한국 락덕후들 사이에서 일본 락은 의외로 인지도가 높았다. 김태원의 밴드 부활은 앨범 속지에 라우드니스를 지옥으로 보내자라고 써놓기까지 했다(...).
- ↑ 해외에서 우편으로 보내는 경우 당시에는 한두달이 걸리는 건 예사였다. 배로 실어 왔기 때문에...
- ↑ 심지어 이 노래는 1969년 노래다! 해당항목 참조.
- ↑ 당시 공중파나 출판 매체가 아닌, 도시 중심가의 디제이 다방을 중심으로 형성된 신(scene)을 의미. 요즘으로 말하면 일종의 언더그라운드라 할 수 있다. #
- ↑ 일본어로 승부를 뜻하며 흥정하는것을 말한다.
- ↑ 당시 미군 정책상 미군 병사들은 위스키를 제한적으로 구입 할 수 있었고, 한국군 병사들은 미군 PX에서 가전제품을 제한적으로 구입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미군 PX 주변을 서성이는 미군 병사들에게 한국군 장병들이 "너희들 내가 군표 줄테니까 TV 한대만 사다 달라. 내가 너네들한테 위스키 한병 사줄게."라고 딜을 쳐서 윈윈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진정한 한미동맹 - ↑ 그런데 이런 것이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었다. 소련이나 동독 항목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윗 동네처럼 아예 폐쇄된 국가가 아닌 이상에야 어쨌든 해외의 물건들이 어느정도는 들어오기 마련이다. 한국의 빽판 전통처럼, 소련은 쓰고 버린 엑스레이 사진에 레코드를 대고 꾹꾹 눌러서 조악하게 복제한 엑스레이 레코드# #가 유통되었고, 정말 많은 사람들이 서구의 영화, 음악, 패션을 즐기고 있었다. 일례로 1991년 메탈리카의 모스크바 공연에는 러시아에서 정식으로 음반이 발매된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80만명(!)이 운집하는 기록을 남겼다.
뒤집어 말하면 군사정권 시절 한국의 문화통제 수준이 공산국가 수준이었다는 것 - ↑ 실제로 한국 오타쿠의 역사는 대략 80년대 초중반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 애니메이션 산업이 인력집약적인 특성이 강하다보니 다른 프로그램에 비해 제작비용이 많이 들어갔고 애니메이션 방영시간대의 광고료도 비싸지 않아서(= 수지타산이 안 맞는다.) 방송사 입장에선 애니메이션 제작에 대해 별다른 매력을 느끼기엔 힘들었다.
- ↑ 이것도 올림픽+시청료 거부운동의 영향덕택이었다. 제작 계획자체는 이미 70년대부터 있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미뤄졌다.
시청료를 이때도 2500원씩이나 받아먹고 KBS 1TV에서도 광고도 했던시절인데 잘하는 짓이다 - ↑ 심지어 70년대 당시의 초거대 만화출판사인 합동출판사에서 표절을 강요해서 상당수 작가들이 울며겨자먹기식으로 표절작으로 그려내야 했다는 후문도 있다.
- ↑ 일본 관료들의 망언이나 독도 문제가 불거졌을때, 옛날 운동권들은 일본 상품들이나 수상 허수아비를 불태우곤 했다.
- ↑ 해외방송 시청이나 표절(...)의 목적도 있을것이다.
- ↑ 대표적인 케이스로 당시 삼성 새턴이라는 이름으로 발매한 세가 새턴이 있다. 이런 점 때문에 삼성 새턴은 북미판 타이틀밖에 돌릴 수 없었다고.
- ↑ 그나마 1998년 인터내셔널 PC 버전 영문판이 4만원 정도의 가격으로 출시되어 6보다는 사정이 나았다.
- ↑ 이것 때문에 카마에서 수입한 플스는 모드칩을 달았다고 한다.
- ↑ 사실 개방 이전에도 일본어로된 게임이 정식으로 유통된 적이 있었다. 삼성전자에서 유통했던 파이널 판타지 7 PC판이 그것인데, 일본어로 된 간판이 나오는 문제로 제작사에 수정을 요청하였지만 그래픽수정으로 인해 게임이 망가진다는 이유하나로 거부하자 고심 끝에 영상물 등급 위원회에서는 발매허가를 하였다. 자막이 아니라 게임 내 간판이 그런거라 자세히 보지 않는 이상 잘 안보인다.
- ↑ 이에 대해 신해철 본인이 밝히길, 일본어 노래 자체가 금지인것은 아니지만 방송국 자체에 영어가 아닌 외국국적의 노래를 송출하는 횟수 제한규정이 있는데, 그 횟수를 자기 방송같은 대중가요 방송이 아니라 클래식음악 방송에서 다 써버리고 있다고 코멘트.
- ↑ 대표적인 케이스가 블리치의 4기 오프닝이지만 투니버스판 2기 오프닝으로 쓰인 'Tonight, Tonight, Tonight'.
- ↑ 당시 애니메이션은 어린이용이라는 선입견이 지금보다 훨씬 강해서, 걸리지만 않으면 대충 유야무야 넘어가는 경우가 꽤 있었다. 심지어 이를 악용해서 극장에 개봉한 것이 바로... 아키라
- ↑ 문민정부 들어서 극장판 애니메이션을 제작지원하긴 했으나 심사지원 기준 미비로 아기공룡둘리 얼음별 대모험을 제외하면 거의 망하다시피했고 이후에도 지원제도는 이어져가고 있으나 아직까지 갈길이 멀다. TV 애니메이션의 경우에는 2000년 이전에는 언론이나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어린이 시간대 미국과 일본 애니메이션 방영에 문제를 제기하는 경우는 많았지만 일단 애니메이션 제작이 그리 수지타산에 맞지는 않았던 것도 있고 더군다나 방송사에서 애니메이션 제작지원을 강제법안하는 법안이 마련되지 않아서 반영이 되지 못했다가 2000년에 들어서야 애니메이션 쿼터제가 적용되기 시작했고 그나마 지상파 애니메이션의 시청률 하락으로 인한 시간대 앞당기기와 케이블 애니메이션 채널에서의 국산 애니메이션 작품 홀대(주로 아동용), 그리고 한국 애니메이션 제작 여건의 부실로 인해 제대로 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 ↑ 이에 대해서는 대본소가 이미 존재했다는 점과, 대여점이 있어도 인기 일본만화는 무너지지 않았다는 점을 근거로 한 반론도 존재한다.
- ↑ 일본 애니메이션이 독일 같은 유럽이나 영미권에서 그들의 성우에 의해 번역될 때는 아무말도 안 하던 사람들이 한국 성우만 까대는 건 객관적으로 동조하기가 힘든 행태이다. 이는 일본문화를 원류라 생각하고 그 외의 한국문화를 아류라 생각하여, 아류는 반드시 본류로의 역행을 해야만 한다는 사고에 기초한 것인데, 이 사고의 비논리성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 ↑ 그중에서도 특히 북유럽이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인지도가 대폭으로 오른 케이스.